"너 걸을 수 있었어? 그럼 너, 나한테, 우리 모두 한테 거짓말 한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퀸은 눈을 똑바로 떴다. 감을 수 없었다. 눈꺼풀을 감는 순간 눈가에 고인 습기가 방울이 되어 흐를 것이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Fabray니까. Fabray들은 절대로 울지 않았다.

그러나 퀸은 울고 싶었다. 특히나 이런 때. 약한 모습 좀 보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럼 더이상 냉혈한 bitch 소리도 듣지 않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도 힘들다는 걸 알고 누군가가 날 달래줄 텐데. 어깨를 끌어안고, 눈물이 멈출 때까지 위로의 말을 속삭여 줄 텐데.

왜 사람들은 항상 그녀에게 자라라고 하는가? 냉혈한이라고 하는가? 철없다고 하는가? 가해자라고 하는가?

퀸은 이미 자라있었다. 지나치게 성숙해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린이였던 적이 없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어린이다운 것이란 없었다. 무조건 예절. 파브레이는 실수를 하지 않으니까. 파브레이는 완벽 외엔 모르니까. 모든 것에 완벽해야만 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들은 왜 알아주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퀸은 피해자였다. 예일에 합격했다고 해서 어떻게 퀸에게 일어난 그 모든 나쁜 일들이 없어지고, 퀸이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게 된단 말인가?

예일은 퀸이 쟁취해낸 것이었다. 퀸의 노력으로, 오직 그녀만의 노력으로 순수하게 얻어낸 것이었다. 그냥 굴러떨어진 행운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퀸이 항상 그런 굴러떨어진 행운을 얻는 냥, 그녀를 그렇게 다룬단 말인가?

집에서 쫓겨난 것, 고등학교 먹이사슬 제일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 그밖에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던진 모든 가시들이 그녀 스스로 일궈낸 예일로 가는 티켓 하나로 모두 덮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슈스터 선생님은 해준 것도 없으면서, 메르세데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집을 내주지 않았으면서, 커트는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도 해본적 없으면서, 어떻게 그들은 퀸을 행운아로, 가해자로, 상처하나 안입어본 온실속 화초로, 그렇게 본단 말인가? 퀸의 속이 이렇게 상처로 문드러져 썩어가고 있는데?

퀸은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겼던 적이 언제던가? 물론 성적인 접촉은 제외하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의 부모님조차도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엔 안아줬을지 몰랐다. 가령, 막 태어났을 때, 어머니가 안아주셨다던지. 그러나 그런 건 다 소용이 없었다. 기억할 수 없다면, 없던 일이나 다름 없는 것이니.

"일어나봐 퀸! 너 걸을 수 있잖아! 어서! 일어나 보라고!"

어느새 핀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 앞에 서서 어깨를 잡고 맹렬히 흔들었다. 퀸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지만 막상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돌같은 모습이 핀의 화에 기름을 더 끼얹은 것인지 이제 핀은 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했다. 퀸의 양 팔이 핀의 거대한 손에 짓이겨지는 듯한 아픔을 받았다. 갑작스런 고통에 퀸은 혼자만의 공상에서 바로 빠져나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한 핀에게 시선이 튀었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쿼터백과 헤드 치어리더.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호감은 있던,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은 완벽한 커플. 그런데 지금, 프롬에서, 하나는 괴물처럼 씩씩대며, 다른 하나는 휠체어에 앉아서 실랑이를-사실은 핀 혼자 일방적인 분풀이를-하고 있다니.

퀸은 갑자기 피곤해졌다. 눈물을 참고 있는 것도, 핀의 입에서 쏟아져내리는 날카로운 가시같은 모욕적인 말들도.

조가 곁으로 다가온 것도, 실베스터 코치가 핀의 가슴을 밀치는 것도 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양팔에 빨갛고 커다란 손자국이 남은 것도. 그녀는 그저 몹시 피곤했다. 그냥 눕고만 싶었다. 이 빌어먹을 의자에서 나와서, 그녀의 방 침대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세상을 차단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 세상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던가.

항상 원하는 걸 얻는 건 글리의 캡틴, 디바, 대부분 시끄럽지만 때론 참아줄만한 레이첼 베리뿐이었다.

레이첼 베리.

왜 이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조이는 것일까? 아니, 멍청한 질문이었다. 퀸은 이 답을 알았다. 이래뵈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이니까. 그 망할 트럭이 그녀의 차를 옆에서 받은 순간, 유리창이 파사삭 부서지고 모든 것이 암전되며 귓가에서 삐- 소리가 윙윙대던 그때, 그녀의 보잘 것 없는 짧은 삶이-빌어먹게도 짧은 삶이-스쳐지나갔다. 루시 카부시로 괴롭힘 받던 시절, 퀸으로의 변신, 맥킨리 고등학교, 치어리오, 산타나와 브리트니, 그리고 레이첼 베리. 그녀의 삶은 레이첼 베리를 만난 이후로 그 키작은 디바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레이첼은, 아니 베리는…아니, 이 마당에 호칭이 무슨 상관이랴. 레이첼은 달랐다. 그녀의 중심에는 핀 허드슨이 있었다. 항상. 이상하게 그게 퀸의 신경을 거슬렸다. 그래서 퀸은 둘을 떨어뜨려놓으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순결을 줄 거라는 멍청한 소리를 할 때도 뜯어말렸고, 결혼할 거라는 말도 뜯어말렸다. 그러나 레이첼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중심은 핀 허드슨, 그 멍청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러다 어떻게 됐던가? 가슴을 조이는 안전벨트와 점점 커지는 자신의 피 웅덩이를 보는 상황까지 오지 않았던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은 레이첼 베리와 핀 허드슨이 평생 이어지는 걸 막고 싶었던가?

레이첼 베리는 핀 허드슨과 이어져서는 안 되니까.
레이첼 베리는 퀸 파브레이와, 자신과 이어져야 하니까.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솔직할 수 있었다. 게이, 바이, 스트레잇, 상관 없었다. 그 작은 디바를 만난 뒤부터 퀸의 모든 행동, 말, 생각의 이유는, 목적은 레이첼 베리였다. 그것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결국 결혼은 멈춰졌다. 자신의 사고로 인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퀸은 조소했다.

그러나 핀과 레이첼은 헤어지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또다시 결혼한다고 난리를 칠 것이었다. 레이첼은 뉴욕에 가서 NYDA를 뒤짚어놓을 것이고, 스물다섯이 되기 전 퍼니 걸 오디션에 합격해서, 패니 브라이스 역할을 따낼 것이고, 그게 안 되더라도 브로드웨이 스타가 될 것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꿔오던 꿈도 이루는 레이첼 베리. 남자친구도 지켜낸 레이첼 베리. 그리고, 퀸 파브레이와도 친구가 된 레이첼 베리. 레이첼 베리는 언제나 그녀가 원하는 걸 얻어내니까. 자신과는 다르게.

그런 레이첼이 원하는 걸 갖도록 해주자.

퀸은 그렇게 결심했다. 어차피 자신이 원하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항상 갖는 레이첼에게 주자. 어차 헛수고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프롬 퀸, 레이첼 베리.

히긴스 교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질 때의 그녀의 표정은, 퀸의 어린 시절부터 꿈인 프롬 퀸 왕관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적어도 저 애는 행복하니까. 나 때문에 잃은 것 많은 저 애한테, 빚 갚은 거니까.

퀸의 마음이 아주 조금이나마 후련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일어섰을 때, 입이 떡 벌어진 레이첼의 얼굴이란. 휠체어에 앉은 자신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어두워진 레이첼의 얼굴을 보는 건 높은 사물함에서 물건을 꺼내야하는 것보다도 불편했다. 그런데 그 순간, 죄책감이 말끔히 씻겨나가고 레이첼의 얼굴은 환해졌다. 퀸의 마음도 환해졌다.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상처입은 다른 사람이 없어야 하니까.

비록 멍청한 허드슨이 그녀 옆에 딱 달라붙어있다고 하더라도, 레이첼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오직 퀸, 자신에게만 고정되어있으니까. 일단은, 지금 당장은 그녀의 방 침대도, 프롬 퀸 왕관도, 모두 퀸에겐 필요 없었다. 이순간, 퀸은 존재의 이유를 찾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