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와 친밀한 미소 아래 느껴지는 경계심과 차가운 의심의 눈초리도, 내가 함께 일하던 현장 요원들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그리드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나긴 디브리핑 과정도 아니었다. 나에게 주어진 런던 한복판의 MI5 안전 가옥은 몇 가지 가구와 설비를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텅 비어있었고, 8년 전 동결되었던 내 은행 계좌를 복구하는데에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으므로 나는 임시로 지급 받은 약간의 현금을 가지고 가장 가까운 테스코로 향했던 것이다. 거리의 냄새도, 사람들의 말소리나 자동차가 내는 소음까지도 모든 것이 낯설고 이질적이었지만 테스코 앞에 줄지어 놓인 쇼핑 카트만큼 당황스럽진 않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손잡이를 잡아 당긴 카트는 금방 쿵 하는 반동과 함께 내 손에서 벗어나버렸다. 영문을 몰라 한참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제야 카트에 달린 쇠사슬이 눈에 띄었다.

'뭐?'

차곡차곡 겹쳐진 채 늘어놓은 카트 전부가 짤막한 쇠사슬 체인으로 고정되어있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전기 의자에 못박힌 듯이 묶여있는 것처럼 보여 일차로 속이 차갑게 얼어 붙었고, 여기저기 없어지고 늘어나고 변경된 지하철과 버스 노선 때문에 집이 아닌 처음 방문하는 타국에 온 느낌이 들어 울컥했던 것과 같은 울분이 이차로 몰려와 사고를 마비시켜버렸다. 한참 동안 그러고 서 있자니 등 뒤에서 누군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동전 없으면 비켜요'라며 나를 옆으로 밀쳤고 그제야 카트의 손잡이에 동전을 넣으라는 그림 설명서와 문구가 인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미친 거 아냐? 카트 쓰는데 동전을 넣으라고? 뭐하러?'

나에게 짜증을 내던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얼굴도 보지 못했으니 마주친다 해도 그를 알아볼 일이 없었겠지만 괜시리 양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11월 초의 싸늘한 밤 공기에 차가워진 손등을 가져다 대었지만 뺨은 손등 만큼이나 차가울 뿐이었다. 나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불거지도록 카트 손잡이를 꽉 쥔채 테스코 안으로 들어갔다. 빨갛게 언 손바닥이 낡은 플라스틱 손잡이와 뻑뻑하게 부딪히며 슬쩍 아려왔다.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물건 목록에 장갑을 덧붙이며 물건들이 잔뜩 진열된 통로들을 태연한 척 걷기 시작했다.

음식은 별로 생각이 없고, 세면 도구와 갈아입을 옷 몇 벌을 간단하게 챙길 생각으로 우선 세면제가 있는 통로로 향했다. 높다란 천장에 크게 달려 있는 표지를 따라 바둑판 형식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통로들을 지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세면제 코너에 도착했을 때에는 패닉하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야 했다.

알고는 있었다. 8년 전에도 테스코는 이렇게 커다란 곳이었고, 8년 전에도 영국은 물건이 종류별로 이렇게나 넘쳐나는 자본주의 국가였으니까. 달라진 것은 나였다. 8년간 나에게 세수라든지, 샤워라든지 하는 것은 벽에 묶인 채 살갗이 발갛게 붓고 쓰릴 정도로 거센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호스로 물세례를 받는 것이나, 녹슨 샤워기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쇠 냄새가 나는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 쓰는 것이나, 혹은 표면에 얼음이 낀 양동이의 물과 거품이 나지 않는 딱딱한 연노랑빛 비누로 얼굴과 몸의 일부분을 닦는 것이 전부였다. 물고문도 씻는 것으로 친다면 모를까, 그게 전부였다. 목욕은 8년 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안전 가옥의 화장실에는 욕조가 없었다. 있었더라면 그것 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 비누 뿐만 아니라 각종 클렌징 제품이 꽉 들어찬 기다란 진열대 앞에서 내가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있기만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그러고 있자 저만치에 서 있던 40대 여성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힐끔거렸고 나는 왠지 그 시선을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비누 중 아무 것이나 집어 카트에 던져넣었다. 세면제 코너를 벗어나고 나서야 나는 그 비누가 연노랑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연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중에 가장 친근한 걸 집은 것이라 보는 게 훨씬 맞는 말 같아 나는 곧장 돌아가 비누를 바꿔 집었다. 하얗고, 무난한 것으로.

'이런 것에도 겁 먹는데 복귀는 할 수 있을까…'

해리는 한 번도 나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심지어 디브리핑조차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렸다. 로이 워커라는 남자로,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섹션 치프였다. 그래, 내가 함께 일하던 현장 요원들은 이제 아무도 남아있질 않았다. 톰 퀸이 퇴직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해리가 진실을 말해줄 만큼 나를 믿지 않는 것처럼. 혹시 톰도 어딘가에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곤 했다.) 돌아온지 5일 밖에 되지 않았고, MI5의 대테러부서 국장이 얼마나 바쁜지는 나도 잘 알지만….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고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무작정 끌려와 보니 그가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솔직히 나는 나에게 자신 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해리보다는 내 등을 떠미는 카챠모프가 더 신뢰가 갔다. 누가 나를 러시아에 팔아넘겼는지를 생각해볼 시간은 8년이나 있었지만, 아직도 답은 찾지 못한 상태였고 솔직히 말해 해리 피어슨은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카챠모프의 말대로 그는 나를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으니까. 설사 그가 나를 팔지 않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미웠다. FSB는 초반에는 나를 거래 조건으로 내밀기도 했지만 4년이 지나도록 MI5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내가 별 쓸모 없다 생각했던지 올렉 같은 고문관 손에 일임해서 넘겨버렸으니까. 그를 떠올리자 몸에 한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후드 티의 소매를 끌어내려 카트 손잡이와 함께 움켜쥐었다. 길이가 짧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손목의 문신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야 왜 사람들의 시선을 내가 그토록 의식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러시아 감옥에서는 갑옷처럼 두르고 다니던 문신들을 이제는 옷으로 감추고 행여나 보일까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영국에 돌아온 뒤로는 한 번도 거울로 내 몸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럴 용기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치약도, 칫솔도, 수건도, 옷도 전부 그런 식으로 나를 쩔쩔매게 하는 진열대가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어서 겨우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 뒤였다. 그렇게 집이 아닌 집에 돌아온 5일째 밤도 어색하기만 한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지은지 오래 되어 나뭇결 사이 사이에 먼지와 퀘퀘한 곰팡이내가 달라붙어 있는 딱딱하고 편평하지 못한 바닥만이 8년만에 돌아온 런던에서 내게 친숙한 위안을 주었다. 그렇게 또다시 악몽의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잠을 설친 밤이 지나고 나서야 영국에 도착한 지 엿새째가 되어 나는 내게 임시 발급된 신분증과 출입증을 챙겨들고 그리드로 향했다. 나의 변절 여부를 판단하고 복귀 여부를 결정할 섹션 치프 로이 워커와의 디브리핑이 10시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9시 49분. 루카 노스의 자료 파일은 양이 방대해서 지난 사흘간 철야를 했는데도 미처 다 읽지 못한 파일이 서너권 남아 있었다. 말이 서너권이지 어른 손가락 두 마디는 될 법한 두툼한 서류철로 서너권이라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을 만큼 빠르게 읽고 있는데 전화기가 알람 시계마냥 날카롭게 울려댔다. 다행히 눈치 빠른 조가 내가 인상을 쓰는 걸 보고는 제가 전화를 받았지만 결국 전화는 다시 내게 넘어왔다.

"로이, 1층 보안실이요."

우리는 모두가 이름을 불렀다. 해리의 국장님이라는 호칭 또한 외부인이나 그렇게 지칭하는 것이지 가장 신참인 타릭조차 그를 해리라고 불렀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결국 귀결되는 이유는 하나였다.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죄다 개소리였다. 일 년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직장에서 서로를 직책으로 불렀다간 얼마 못 가 다들 못 견디고 퇴사하고 말 걸. 고작 7년차인 내가 섹션 치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테러부서는 MI5 중에서도 승진이 빠르기로 유명한 부서였다. 하지만 정작 오고 싶어 하는 이는 그닥 많지 않았다. 근속 년수가 바닥을 치는 주된 사유가 '사망'인 부서니까. 어제는 하급 분석관이었던 녀석이 이제 상급 분석관이 된다는 것은 상급직에 공석이 났다는 뜻이고, 결국엔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지휘 체계도 명확한데 굳이 서로를 직책으로 불러가며 직책에 붙어 함께 불리던 이름이 다른 이의 이름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씁쓸해할 일을 만들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저 이름만 부르다 부르지 않게 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보안실의 전화를 받고 내려가보니 루카 노스가 1층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는 정확하게 정각 10시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모를테지만 현장 요원 출신의 감인지 내가 엘레베리터에서 내려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내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8년 전의 사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 선이 도드라지게 야위어 있었고 눈 밑이 움푹 꺼져 그늘져 있었다. 며칠 잠을 좀 설친 정도의 얼굴이 아니어서 나는 그녀가 디브리핑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귀환하자마자 곧장 병원으로 보내져 검진을 받긴 했지만 아직 자세한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의사들의 초진 소견은 8년쯤 적국의 감옥에 갇혀 있다 풀려난 정보국 요원이라면 당연히 들을 만한 소리였다. 영양실조, 면역력 약화, 불면증, 그리고 또 뭐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해리는 다른 절차들이 끝나기까지 디브리핑을 미룰 생각이 전혀 없었고, 나는 지난 사흘간 한데 모아 차곡 차곡 쌓으면 내 키를 훌쩍 넘는 양의 루카 노스 자료 파일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노스 씨? 로이 워커입니다. 따라오시죠."

남자 중에서도 꽤 큰 편이라 열 일곱 즈음부터는 한두번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만 보며 지내왔던 나에게 여자들이란 언제나 작은 존재였다. 그래서 두세걸음 정도만 떨어져 있는데도 루카 노스가 별로 고개를 들지 않아도 나와 눈을 대등하게 맞출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지난 사흘간 그녀에 대한 정보들이 낱낱이 기입된 파일을 빠삭하게 읽어댔는데도 눈앞의 존재가 너무나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연한 하늘색 시선을 받는 것은 엑스레이 스캔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적사항에 키가 180cm라고 적혀 있는 걸 읽었을 때에는 정작 이런 것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악수를 할 때 잠깐 쥐어본 것 만으로도 그녀가 보기보다도 훨씬 더 키에 비해 터무니 없이 말랐다는 알 수 있을 정도로 손가락이 너무나 얇아서 나는 한순간이지만 앞으로 4시간 동안 그녀를 디브리핑이라는 허울 아래 취조해야 한다는 것이 퍽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정말 잠시 뿐, 동정심 같은 것은 내게 달라붙기도 전에 금방 미끄러져 저만치 멀리 사라져버렸다. 루카 노스는 8년간 FSB의 손안에 있었던 사람이고, 모스크바에 파견되기 전까진 해리가 가장 아끼는 우수한 현장 요원이었으므로 변절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우리 눈을 속일 재주가 있었으니까.

말은 따라오시죠라고 했지만 모스크바에 가기 전에도 벌써 경력이 8년이나 되었던 노스에게는 제 집 정원처럼 훤한 공간일 거였다. 그러니 내가 자신을 안내하는 곳이 취조실 아닌 취조실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러시아에서의 시절도 MI5 요원으로서 보낸 것이 맞다면 16년차인 현장 요원 다운 면모였다. 그래서 내가 '여성분 먼저'라는 듯한 동작으로 문을 열고 안을 향해 손짓했을 때 (나도 영국인인 셈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영국적인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을 나는 꽤 즐기는 편이었다. 취조실인걸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아는데 뻔히 아닌 척 신사적인 체 하며 먼저 들어가시지요 하는 상황이라니.) 나는 노스가 능숙하게 맞받아칠 거라 생각했었다. 필요 이상으로 정중한 느낌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고마움을 표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노스는 잠시 문앞에서 멈칫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하게 굳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어차피 엘레베이터에서 내리면서부터 내가 자신을 문에 '취조실'이라 적혀 있지 않고 방안에 감시 카메라만 붙어있지 않을 뿐 취조실이나 다름 없는 공간으로 데리고 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테니 이제 와서 자신이 디브리핑이라는 허울 아래 취조 당한다는 사실에 그렇게 당황했을 리는 없었다.

MI5 현장 요원으로서의 경력에다 FSB에게 수감 당했던 기간 (과연 몇 년이나 수감자 신분이었을런지는 모르지만)을 고려하자면 꽤나 녹록지 않은 취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상대였지만 나는 얼마든지 내 취조 기술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딱히 긴장이 된다거나 하진 않았다. 노스는 침착한 목소리로 처음에는 간결하게 핵심만 짚어 내 질문에 대답했고, 내가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자세하게 캐어 물을 적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세부사항을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이런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반인이 들으면 '몇 년 전 일인데 너무 자세하게 기억하는 게 아니냐'며 의심스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쪽 일이라는 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능력을 필요로 했고, 또 우리는 그렇게 훈련 받았으며, 8년이나 감옥에 있었다면 지난 일들을 한없이 곱씹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을 것이므로 (그러니까, 노스가 변절하여 FSB에게 VIP 대우라도 받지 않았다면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료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해리가 내게 일러준 바에 따르면 노스는 머리 속에 사진을 찍듯이 상세하게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이 있었다. 해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최고 수준이라고 했었다. 아마 내가 묻는다면 노스는 모스크바의 정보원을 접선하러 갔다가 정보원 대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FSB 요원들을 만난 날 몇 대의 빨간 자동차를 보았는지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첫 30여분이 흘렀을 때, 나는 노스가 뭔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 얘기를 읊고 있는 듯이 딱딱한 도자기 인형처럼 무표정으로만 일관하던 노스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목소리나 호흡에는 떨림이 없었지만 그렇잖아도 원래 꽤나 흰 편인 피부에 한참 말라 눈에 더욱 띄는 관자놀이 부근의 혈관이 더욱 도드라지며 슬며시 맺힌 식은땀에 더욱 푸른 빛을 띄었다. 잘 훈련 받은 요원답게 아마추어처럼 손을 안절부절 못한다거나 하는 기색은 전연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진 양 손은 그것만 본다면 편안하게 쉬고 있는 사람의 손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스는 분명 뭔가 패닉 발작을 겪고 있었다. 어딘가 멍하게 풀린 듯한 눈빛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5분쯤 지나자 노스는 다시 통제력을 되찾고 (그걸 통제력을 잃었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패닉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는 것을 서너번 더 눈치챌 수 있었는데, 두 번째에 나는 노스가 무엇 때문에 패닉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유일한 출구인 문은 내 등 뒤에 있었다. 내가 가진 파일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으니 폐소 공포증은 러시아에서 생긴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노스의 통제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2시간 동안 그녀는 가끔씩 창백해지는 안색이나 약간의 식은땀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목소리도, 호흡도 전부 정상적이었고, 패닉 발작에 얼굴 근육이 움찔거릴듯 하면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감췄다. 시선은 간혹 잠시 아래로 내리 깔았다가 다시 눈을 위로 뜰 때를 제외하고는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내 눈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그렇게 내 눈만 보면서 자신이 사방이 막힌 공간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내리까는 것은 미소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의식적으로 한다기 보다는 반사적인 행동처럼 보였는데,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줄은 인식은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행동 같았다. 나라고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보면 참 웃겼을 것이다. 표정 없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별 세세한 것까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으니) 내가 노스의 패닉 발작을 알아본 것처럼 그녀도 내 반응이 회의적이거나 싸늘해지면 감지하는 듯 했다. 그러니 그럴 적마다 묘하게 호소력 있는, 상대방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힘을 가진 미소와 그 빌어먹을 눈을 내리까는 동작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새카만 흑발이었지만 속눈썹은 엷은 갈색빛이어서 얇은 눈꺼풀을 한순간에 내리깔아 몇 번 테이블을 바라보며 깜빡이곤 다시 나를 올려다보는데, 어딘가 퇴폐적이고도 우아한 느낌이, 그러면서도 결코 천박하거나 가볍지는 않고 오히려 어딘가 품격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사람 마음을 녹였다. 형편없는 안색에 깡마르게 여윈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정보국 현장 요원직에는 선천적으로 호감을 사고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능력을 타고난 녀석들이 흘러 들어오게 마련이지만 노스는 그중에서도 작정을 하고 타고난 녀석처럼 뛰어났다. 거기에 동유럽 출신처럼 보이기도 하는 외모에 모스크바 억양을 구사하는 러시아어 실력까지 더했으니 아마 저 눈 깜빡임 만으로도 웬만한 놈들에게선 정보를 탈탈 털어냈을것 같았다. 해리가 아껴 마지 않는 현장 요원이었을법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노스가 두렵고 경계심이 들었다. 해리가 왜 그토록 아끼던 부하를 (노스가 FSB에게 붙잡혔을 때, 해리는 그녀를 돌려받기 위해 온갖 연줄을 동원하여 별별 수단을 썼었다) 고생 끝에 돌려받아 놓고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디브리핑을 시키는지도 이해가 갔다. 노스는 아군에게는 둘도 없이 귀한 재원이리란게 분명했지만 그 동전의 이면은 적들에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옭아드는 파괴력이 있음을 시사했으니까. 처음부터 해리는 노스가 요원으로써 제 기능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 따윈 가늠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둘도 없는 현장 요원이라는 건 너무나 명확했으니까. 단지 해리는 노스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만 가리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디브리핑을 시킨 것이었다.

노스가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FSB에게 붙잡혔는지에서부터 수감 뒤 첫 4개월 가량을 디브리핑 하는데에 벌써 2시간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걸 노스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첫 4개월 간은 그래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으니까. 뭐, 하루 10시간 가량의 취조를 인간적이라고 해도 된다면 말이겠지만. 하지만 4개월이 지나도록 노스는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거기에서부터 카챠모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노스에게 카페테리아 위치를 알고 있느냐고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어봐주고 싶지는 않았다) 묻고 1시간 뒤에 다시 이 방에서 보자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점심 시간 동안 해리와 내무장관을 만나러 가야 했다. MI5 건물을 의심스러운 인물이 멋대로 돌아다니게 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어차피 이 방을 나가는 순간 복도에서부터 CCTV 영상을 통해 타릭이 노스를 감시할 터였다. 나는 파일과 노트 패드를 챙겨들며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가족은 만나 봤습니까?"

노스가 민간인이었다면 참으로 잔인한 질문이었겠지만, 그녀는 8년간 FSB의 관리 하에 붙들려 있던 MI5 요원이었고 따라서 이 질문은 그저 취조의 한 기술일 뿐이었다. '첫 질문은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질 것. 그래야 상대방이 거짓말 하는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다'는 건 교본에 나오는 말이었고, 따라서 노스 같은 상대에겐 먹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변화구를 던져야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야비하다 할만큼 감정적인 부분을 뻔히 찌르는 방식으로. 하지만 폐소 공포증의 패닉 발작을 저렇게 침착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는 이것도 그닥 당혹스러운 질문은 아닌 듯했다.

"아뇨. 오래 전에 이사 갔던 걸요."

날씨 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노스는 반사적으로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돌아온 첫 날, 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노스가 해리에게 물었다는 걸 그날 운전을 맡았던 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대화는 짧고, 간결했으며, 잔인했다. 아마 해리는 한눈에 노스가 완전히 부서지진 않은 것을 알아보고 그녀가 변절했는지를 판단하기 전까지는 아예 감정적인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리라. 하기사. 저렇게 호감을 사는 재능을 가진 요원이 '옛 정'같은 걸 무기로 '죄책감'을 자극하며 감정적으로 공격해온다면 제아무리 해리 피어슨이라도 돌처럼 버티긴 어려웠을 것이다. 해리 또한 그저 사람일 뿐이었으니까. 그의 완전무결함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자신의 약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치밀함으로 쌓아낸 철갑옷 같은 것이었다. 둘 사이에 오고간 개인적인 대화란 그게 다였다. 자신의 가족을 만나 봤느냐는 질문에도, 그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고 말해줬느냐는 질문에도 해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 한 마디였다. 벤이 말하길 조수석에 앉아 두 번 모두 '아니'라는 대답만을 남긴채 도로만을 응시하는 해리의 반응에 노스는 한동안 백미러에 비친 해리의 옆얼굴을 쳐다보더니 이후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고 했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변절하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화라도 냈어야 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노스를 직접 만나보니 그렇게 생각하긴 힘들었다. 이 여자를 화나게 하려면 런던 버전의 911 테러를 일으켜도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으니까.

"아버지 소식은?"

그건 예상치 못한 부분인듯 했다. 처음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 중 노스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온 것이었다.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해리가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음을 뻔히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 마냥 '가족은 만나 봤나요?'같은 질문이나 던지는 놈에게 '오래 전에 이사 갔더라'며 해리가 정보를 주기를 거절한 사안에 대해 스스로 알아보러 갔었으며, 그들을 만나지도 찾지도 못했음을 순순히 시인하는 척하며 자신이 MI5에게 감시 받고 있음을 안다는 걸 드러낼 정도로 능숙했던 노스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워커!"

"저는 점심에 일정이 있어서 이만."

언제 와 있었는지 엘레베이터 쪽에서 해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굳어선 노스를 복도에 내버려둔 채 엘레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노스의 아버지는 그녀가 SAS에 입대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부녀는 의절한 사이였다. 하지만 노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의 충성심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여전히 아버지는 신경 쓰이는 존재인듯 했다. 해리가 불러서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나는 노스에게 전남편(그는 아내가 MI5라는 걸 몰랐고 그저 르포 기자인줄로만 알았으며 노스가 FSB에 잡히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유기 이혼을 신청했다. 법원에 제출된 서류는 대상이 실종된 MI5 요원이었으므로 곧장 해리의 책상으로 날아왔고 그는 거기에 인가 서명을 내주었다. 나는 노스의 임시 신분증과 출입 허가증에 결혼 전 성인 루카 노스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본인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싶었다.)과 아들의 행방을 알려줄 생각이 없듯이 목사 노스 씨가 암투병 끝에 3년 전에 자신의 교구에서 숨을 거뒀다는 사실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타인의 약점은 많이 쥐고 있을 수록 좋은 법이었으니까.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에는 더더욱.


해리는 나와 눈을 마주치기는 커녕 내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마치 복도에는 로이 워커만 서 있다는 듯이, 나는 벽지 무늬나 구석에 놓인 화분 같은 것이라는 듯이. 디브리핑을 해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게 될거란 얘길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그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어차피 디브리핑 결과를 보고 받기야 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직접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지난 8년간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낱낱이 말해주고 그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었다. 17일 연속으로 고문 받고 3주 넘게 독방에서 사람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지내고 나면 고문관의 등장이 곧 내가 전기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뜻인 걸 알면서도 얼마나 그가 그리워지는지. 3일 내내 물고문을 받으면서 익사 당하는 기분을 겪고 나면 이젠 더 이상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데도 물소리만 들리면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끝이 뾰족하게 갈린 기타 줄이 살갗을 파고들어 플라스틱을 태워 만든 잉크를 피부에 새기는게 어떤 느낌인지. 하나 하나 자세히 늘어놓고 해리가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를 괴롭게 하고 싶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미안함은 느끼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왜 내가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느냐고 그를 쥐고 대답을 흔들어내고 싶었다. 왜 그날 그 장소에 정보원이 아닌 FSB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느냐고. 왜 나를 되찾으려 애쓰지 않았느냐고 설명해보라고 하고 싶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일은 원래대로라면 내가 갈 필요도 없는 간단한일이었다. 러시아에 심어둔 우리쪽의 정보원과 접선하는 것일 뿐인 일로, 상급 분석관이었던 내가 직접 갈 일은 아니었다. 단지 당시 그리드에 여러 사정이 있어 내가 갔었을 뿐. 상황이 허락했다면 보통은 신입을 보냈을만한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나는 단 한 순간도 내가 영국 땅을 다시 밟는데 8년이나 걸릴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사흘이면 남편과 아이가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올거라 생각했었다.

복도의 CCTV로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을 알기에 계속 멍하니 서 있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겠다 싶어 일단은 무작정 걸었다. 하지만 별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서 제일 먼저 보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후의 디브리핑에서 워커에게 읊어주어야 할 내용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라 메스꺼움이 치밀었다. 다행히도 화장실은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넘어오지 않는데도 계속 헛구역질 하는 소리를 누가 들을까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워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내 디브리핑을 맡게 될 사람이라는 걸 알기 전부터 그가 싫었다. 해리가 나에게 그를 섹션치프라 소개하던 순간부터 나는 그가 싫었다. 비록 내가 기억하는 현장 요원들은 아무도 그리드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에게 그 자리는 톰 퀸의 자리였다. 해리의 말대로 톰이 그 자리를 제발로 떠났다 한들 때때로 미국식 발음이 튀어나오는 워커 같은 녀석이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그리드에 내가 기억하는 이들이 더 이상 없는 것도, 톰이 없는 것도 전부 저 녀석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기 때문인 것만 같아 그가 더욱 미웠다. 복귀하게 된다 해도 이 팀에서 이제 내 위치는 어디인지도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있을 자리가 있기는 한지도. 내가 FSB에 잡힌 뒤 곧바로 그 빈자리를 충원하기 위해 어디에선가 워커를 데리고 왔다 해도 그는 분명 나보다 MI5로서 보낸 시간이 한참 적었다. 하지만 이제 해리가 신임하고 인정하는 요원, 섹션 치프는 로이 워커였다. 모스크바에서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톰이 퇴직했을 때 그 자리를 이었을 나는 해리가 눈도 마주쳐 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8년 전에는, 나는 스스로가 해리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내 자신이 MI5 대테러부서 국장 해리 피어슨이 아끼는 현장 요원이라고, 내가 이 부서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젠 해리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 허울만 좋을 뿐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신세라는 것 뿐이었다. 8년 전에 해리가 나를 믿기는 했었는지도 이제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카챠모프의 말대로 해리는 나를 치워버리려 모스크바로 보냈던걸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나를 FSB의 손에 넘겨줄 요량으로 날 보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한 번도 나를 되찾으려 애쓴 적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얄궂은 점은 러시아의 감옥에서 카챠모프의 말을 들을 적에는 그가 세치 혀로 심리전술을 부려 나를 교란시키려 한다 생각하며 해리를 믿을 수 있었는데, 정작 영국에 돌아오고 나니 카챠모프는 진실을 말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돌아온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저토록 냉대하는 해리를 보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그는 내가 변절했을거라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차라리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를 FSB에게 던져줬다는 편이 더 말이 되었다. 가족들에게 내가 죽었다고 했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짧게 대답하던 그의 냉담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는 앨리슨 사건 때의 대화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스크바로 떠난 뒤로는 나에 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아 그 대화를 떠올릴 일조차 없었던 걸까?

[해리.]

[음?]

[만일 제가 앨리슨처럼 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자넨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전… 죽은 걸로 하고 싶어요. 만일 제가 저렇게 되거든 개리한텐 제가 죽은걸로 해주세요. 자동차 사고나… 뭐 그런거요.]

[그럴 일 없어야지 무슨 소리야.]

[일하다 보면 어떻게 될 지 모르잖아요.]

개리 퓰러. 나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MI5였지만 남편은 내가 MI5라는 것을 몰랐다. 그에게 나는 그저 문자 한 통이나 메모 한 장 달랑 남겨놓고 며칠씩 연락두절되는 일이 허다한, 밤낮 구분 없이 일하러 나가는 르포 기자였다. 사흘이면 돌아올거라 해놓고 그대로 사라져버린 아내를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감옥에서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견디게 해준 것은 MI5가 나를 빼내 줄 거란 희망이 아니었다. 그 희망은 때때로 해리가 나를 버렸다는 절망이 되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했지만 개리와 트레이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내가 모스크바로 떠났을 때, 트레이는 세 살이었고 나는 매일같이 조금씩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었다. 개리는 나를 얼마나 찾았을까?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을 만났을 것 같았다. 만났기를 바래야 했다. 나조차도 내가 러시아 감옥에서 평생을 보낼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기약 없이 어디로 간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도 한 마디도 설명해주지 않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아내만 기다리고 있었길 바랄 수는 없었다. 트레이가 엄마 없이 자랐기를 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이나 개리가 다른 여자와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있지 않기를, 트레이가 다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에 살던 집에 가보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살던 사람이 몇 번씩이나 바뀐 상태였고, MI5도 아닌 나는 개리를 찾을 길이 없었다. 로이 워커는 디브리핑을 위해 MI5에 보관되고 있던 나에 관련된 파일이란 파일은 모조리 인가를 받아 읽었을 테니 알고 있을텐데. 해리는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임시 신분증에 적힌 내 이름을 다시 읽었다. 루카 노스. 결혼 전 성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정자체로 반듯하게 인쇄된 활자가 마치 루카 퓰러 따위는 환상이었다고 나에게 비아냥거리는 것만 같아 나는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이름 따위 때문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검진복으로 갈아입는 걸 도와주던 간호사의 손길이 멈칫했던 것처럼 간단한 이유였다. 그가 새로운 여자를 만났건 어땠건간에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8년만에 나타나 산책이라도 갔다 온 사람마냥 불쑥 돌아갈 수는 없는 거였다. 남들이 보기엔 여러 절차나 보안상의 이유가 더 크겠지만 나에겐 다른 모든 이유보다도 내 모습이 가장 큰 이유였다.

화장실 칸막이를 짚고 일어서자 머리가 가볍게 울리며 눈앞이 잠시 까맣게 이지러졌다. 세면대에서 따뜻한 물을 틀어 입안을 헹궈내고 손과 얼굴을 씻고 나자 한층 더 머리가 쿵쿵 울리며 쑤셔왔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자 너무나 낯선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 8년간 나는 거울을 이렇게 차분히 들여다 볼 일이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다른 수감자들 사이에서, 혹은 고문관 (주로 올렉이었다)이 곁에 있는 러시아 감옥에서는 이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나는 새삼 내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게 어색해졌다. 간수들은 주기적으로 수감자들의 머리카락을 짧게 밀었고 덕분에 나는 지금 다듬어지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자란 단발을 하고 있었다. 늘 긴 머리를 하나로 말끔하게 정돈하여 묶은 모습으로 들여다보던 MI5의 화장실 거울에 이런 지금의 모습을 비쳐보자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훨씬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창백하고, 마르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누가 봐도 현장에 투입해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종이 타올을 찬물에 적셔 눈가를 식혔다. 피곤하고 지쳐 보이긴 해도 적어도 불안정해 보이는 듯하던 느낌은 약간 가라앉은 듯 하여 나는 손을 씻기 위해 걷어올렸던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전부 채웠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경계선이 날카롭지 못한 감옥 문신이 옷으로 가리기 너무 힘든 곳까지 새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팔꿈치 아래까지 내려와있는 쇠사슬 문신을 새겼듯이 나는 어느 시점부터 내가 러시아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거라 생각했었다. 맨 첫 문신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목 뒤에 새겼지만 어깨와 등을 덮기 시작한 문신은 어느새 가슴팍과 손목 안쪽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감옥에서 새긴 것이 아니라더라도 어차피 지울 수는 없을 테니 적응해야 할 테지만 나는 영국에 돌아온 뒤로 벗은 몸으로 거울 앞에 선 적이 없었다. 보지 않으면 거기에 없는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유치한 발상이었지만, 나는 그걸 볼 용기가 없었다.

카페테리아는 내가 기억하던 위치에 그대로 있었고,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현기증이 일어 뭐라도 먹어두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또다시 창문 하나 없는 꽉 막힌 좁다란 취조실에 갇힐 생각을 하자 샌드위치나 머핀 같은 음식에는 도저히 손대고 싶지 않아서 그냥 따뜻한 홍차 한 잔과 밀크 초콜렛 바를 하나 집어 들었다. 러시아 이전에는 단 것이라면 질색을 하곤 했지만 이제는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홍차에 레몬을 넣었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레몬을 빼내고 우유를 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올렉에게 길들여진 흔적이 여지껏 남아있는 것이 불쾌해 홍차 우유를 담는 작은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담았다. 러시아식 홍차 대신 그냥 물을 마실 생각이었다.

"루카."

그게 내 이름이었지만 그렇게 불리는 것이 이젠 낯설어서 나는 그 이름을 듣고도 그냥 멈춰서기만 했을 뿐 상대방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누가 나를 루카라고 부른 것이 당혹스러워 홍차와 초콜렛이 놓인 쟁반을 들고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등 뒤에서 급하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내 팔에 손을 얹어 나를 부드럽게 돌려세웠다. 말콤이었다. 현장 요원들은 내가 아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리드 분석관들은 옛 얼굴 그대로들이었고 말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해리를 따라 그리드를 지나치면서 투명한 유리 벽 너머를 두어번 훑어보았기 때문이지, 그들이 나를 본 일은 없었다. 물론 내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었겠지만. 말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눈은 이미 눈물이 고여 반짝이고 있고 얼굴에는 감정들이 서너가지 뒤섞여 떠올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국에 온 지 엿새만에 처음으로, 누군가는 그래도 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해준다는 게 나에겐 너무나 낯설면서도 갈망했던 일이었다. 적어도 나는 눈물이 고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팔에 힘이 빠져 고작 머그잔과 종이컵, 초콜렛 바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 쟁반이 갑작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손이 약간 떨리는 듯 싶어 쟁반을 좀더 꽉 잡아쥐려는데 누군가가 내 손에서 쟁반을 받아들어주었다. 연한 금발머리의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목에 걸고 있는 보안 카드에 '조안나 조 포트먼'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보안 카드에 찍혀 있는 작은 마크들에서 그녀가 MI5의 하급 분석관이자 현장 요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가워요, 조 포트먼이에요. 당신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말콤이 정말 기뻐했어요."

조에게 나를 소개하거나 (어차피 나를 알테지만 형식상으로라도) 혹은 악수라도 했어야 했겠지만 나는 혀가 묶인 듯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조가 자기 몫의 쟁반과 내 것까지 들고 있어 악수를 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나를 FSB에 팔아넘겼는지에 대한 의문을 허공에 던지던 쓰라린 시간 내내 말콤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물망에 오른 적이 없었다. 현장 요원들을 지원하는 그리드 분석관으로서, 그리고 당시에도 가장 최고참이었던 분석관으로서 내가 FSB에게 잡혔을 때 말콤이 얼마나 자책감에 휩싸였을지는 떠올리기 어렵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진심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자책하며 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나에게 비틀린 쾌감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내가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해리가 아니라는 것이 분했다. 그리고 나를 반겨주는 말콤을 눈앞에 두고 고작 이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나자신의 인간성에 환멸을 느꼈다.

나는 말콤과 조와 한 테이블에 앉았지만 대화는 거의 조가 이끌었다. 나는 이제 MI5가 아니었고, 말콤과 나 사이에는 '보안 인가' 같은 것이나 '보안 규정' 같은 사항들이 적신호를 밝히며 제동을 걸지 않는 대화 주제를 찾기가 힘들었으니까. 조는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지만 대부분은 의미없는 내용으로 (음식 불평이라든지) 나나 말콤이나 그저 사교용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조는 밝고 쾌활했으며 어디에 던져 놓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그녀가 정보국 요원이라기 보다는 신문 기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MI5도 무엇도 아니고 MI5 신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였지만… 그녀는 곧 전화 호출을 받고 자리를 먼저 떠났다. 말콤은 내 시선을 피하며 생활은 어떤지 등을 물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나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초콜렛을 한 조각 더 입에 넣으며 물었다.

"톰은 퇴직했다면서요?"

"아… 그렇게 됐지…"

말콤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분석관으로서는 뛰어났지만 현장 요원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것이 그가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인 나였기에 그는 감정이 얼굴에 여감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톰의 퇴직에 관한 사항은 아무리 말콤의 감정에 호소해도 그가 결코 털어놓지 않을 사안이었고, 나 역시 애초에 자세한 내막을 알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톰의 퇴직에 관한 것은 그것이 해리가 말한 것 같이 별다른 실정 없는 퇴직은 아니란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한 가지 거절했으니 말콤은 자신의 재량권 안에 있는 편의는 분명 봐주리라. 나는 미안해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알려달라고 물어본 거 아니에요. 그냥… 알던 얼굴들이 없길래요."

"그… 저… 가족은 봤고?"

말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다가 샐러드를 입에 쑤셔넣으며 웅얼거리듯이 물었다. 나는 계산된 표정으로 그의 질문을 대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마치 '다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라는 듯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말콤이 나를 올려다보자 금방 미소지으며 표정을 바꿨다. 하지만 현장 요원들에게 익숙한 말콤이 내가 가짜로 침착한 척 웃는 얼굴로 바꿨다는 것을 눈치채기에는 충분했다.

"옛날 집엔 가봤지만…"

나는 어쩔 수 없지 않겠냐는 듯이 미소지으며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보았더라면 내가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리거나 한 일 같은 걸 두고 '어쩔 수 없지 뭐'하는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말콤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30년 넘게 잘 훈련받은 현장 요원들을 하루종일 맞대며 살아왔고, 그들이 어느 정도 선까지 자신의 감정과 표정을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을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것이 그를 더 자책감에 괴롭게 했으리라. 하지만 말콤은 입술만 몇 번 달싹이더니 다시 시선을 떨구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말콤 같은 사람을 이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원하는 것이 있기에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같은 것은 역시 지옥에 떨어져 마땅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지금 이렇게 지옥에 있는건지도 몰랐다.

"아니, 아니에요…"

내가 갑자기 피식 웃자 말콤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닌 척 했다. 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나를 팽개친 셈이 된 (러시아까지 친다면 세 번이나) 말콤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내 눈을 끈질기게 쳐다보았고 나는 쟁반 옆에 내려놓았던 내 핸드폰과 임시 신분증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신분증에 '루카 노스'라고 써 있더라구요."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잠시 풀어놓자 눈에 눈물이 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울기까지 할 수 없기에 나는 재빨리 감정을 다잡으며 눈을 빠르게 깜빡여 눈물이 흐르지 않게 했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 4년간 '루카 퓰러'로 불리던 나에게 '노스'라는 결혼 전 성은 정말로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그 이름은 불릴 적마다, 읽힐 적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필요 이상으로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열 한살이면…학교에 다니겠죠?"

말콤은 트레이의 대부였다는게 이제야 기억이 나 나는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분했다. 어차피 그들의 삶에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까지 원하는 게 아닌데도 내게 가족의 행방조차 알려주지 않는 해리가 미웠다. 그가 MI5에조차 내가 돌아올 자리는 없다며 나를 거절해버릴까 두려웠고, 그가 내가 변절했을지 모른다 의심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남은 식사 시간 동안은 화제를 바꿔 어색하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만을 나눴지만 내가 디브리핑이 남아있다며 돌아설 적에 말콤은 나를 잠시 불러세워 가족 일은 자신이 알아봐주겠다는 말을 넌지시 건넸다. 나는 고민하는 척은 했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말콤은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만 알아보겠다며 별다른 정보를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기긴 했지만 섹션 D의 분석관 말콤 존스가 찾아낼 수 없는 정보란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개리와 트레이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을 갑옷삼아 마음 속에 단단히 두르고 취조실로 향했다.


오후의 디브리핑은 오전과 달리 한편에 큼지막한 창문이 달려 있고, 복도쪽 벽면은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그래도 일정 부분 반투명한 처리가 되어 있어 내부를 멋대로 들여다보긴 힘들었다) 다른 방에서 진행했다. 어차피 노스가 폐소 공포증을 어떻게, 얼마나 잘 통제하는지는 이미 보았기 때문에 굳이 그녀를 또다시 성냥갑 같은 방에 가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앞으로 진행될 디브리핑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노스를 극한으로 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취조관으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아주 조금이라도 딱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인간이지 싶었다. 나는 MI6와 MI5에서의 생활 뒤에도 여전히 인간적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자리에 앉으며 나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 대신 햇빛을 받은 노스의 얼굴이 누구라도 한 번쯤 쓰다듬어 보고 싶은 도자기 인형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아무런 의도 없이도 상대방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정보국 요원으로서는 대단한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노스가 변절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만한 사람이 내 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녀를 경계해야 했다. 노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에 내가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집요하게 파헤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노스가 내 팀에 들어오더라도 내 수족처럼 그녀를 믿을 수 있을 테니까. 해리가 왜 노스를 그토록 외면했는지가 한층 더 피부에 와닿았다. 화이트 홀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노스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현장 요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처럼 여겼다고 했다. 그러니 디브리핑을 자신이 진행한다든지, 혹은 개인적 접촉을 한다든지 했다간 노스에 대한 반역 혐의가 풀리고 그녀가 MI5로 돌아온다 한들 해리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늘 의혹의 그림자가 후텁지근하게 달라붙어 있었을 것이다. 노스는 러시아에 넘어갔는데, 그걸 자신이 감정적인 이유로 모른척 덮고 넘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그러니 노스를 다시 팀으로 되돌려놓고 싶은 만큼 해리는 철저하게 노스의 충성 여부를 검증해야만 했다. 이미 팀에 들인 후에는 늦을 테니까.

첫 네 달간 FSB는 하루 10시간에서 14시간씩 노스를 심문했고, 때때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하거나 물을 주지 않거나, 식사를 제한하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냥 그게 다였다. 그들은 상당히 유한 방법으로 자기들 손아귀에 들어온 MI5 요원을 대했고 그 결과 얻은 것은 루카 노스라는 이름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알고 있었던 정보였기에 그걸 수확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기간 동안 MI5는 수차례 FSB의 거래 요구를 받았었는데, 하나같이 터무니 없는 것들 뿐이라 해리는 모조리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노스가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그녀에게 그것을 구구절절 알려줄 입장도 아니었다. 4개월이 지나자 FSB는 노스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이런 나긋나긋한 (꼭 FSB어서가 아니라 MI5라도 FSB 요원을 손에 넣었다면 관타나모는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을 일들을 벌였을 것이다) 방식으로는 노스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수도, 해리의 죄책감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고문관은 누구였죠?"

"여럿 있었어요. 초반에는."

노스는 차분하게, 마치 제 앞에 놓인 픽션 소설이라도 읽어내려가듯 무덤덤하게 진술을 시작했다. 트락티르니코프. 스크바르초프. 콜로소프. 예브데키모프. 그리고 티호미로프바. 노스는 17개월간 자신을 거쳐간 앞선 네 명의 고문관과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선 남 얘기 하듯 했다. 나는 노스가 강한 것인지, 어딘가가 고장나 결여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지 잠시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곧 티호미로프바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7개월이 지나도록 네 명의 고문관을 거쳐갔지만 노스에게서 이름 외엔 아무것도 캐내지 못하자 FSB는 그녀를 모스크바에서 사라토프로 옮겼고, 사라토프에서의 2년 5개월 간 노스는 예브게니아 티호미로프바의 담당 하에 있었다. 다른 고문관들이 제냐라고 부른 티호미로프바는 남자 고문관들 보다 훨씬 더 악명 높은 방식으로 노스를 다루었고 이는 앞선 네 명의 고문관에 대한 기억이 성서의 시편이라도 읽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다른 방식이라면?"

기억에 잠식당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노스의 눈은 아스라히 먼 곳을 보는 사람처럼 잠시 초점을 잃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현실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좀 더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앉았다.

"워터보딩이요."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고 호흡도 균일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끼쳐 진저리 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만 했다. 듣는 나조차도 등골이 오싹해졌으니까. 아무리 지독한 고문을 해도, 워터보딩까지 하는 기관은 모사드나 알 카에다, 아니면 고문의 대상자가 무슬림 테러리스트일 경우와 장소가 관타나모일 경우에 한정되어 CIA가 간혹 그런 극한적인 방식까지 동원하곤 했었다. 아무리 길어도 14초 이상 워터보딩을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폐에 물이 들어차 익사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신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공포심까지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제냐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노스에게서 얻어내고 싶어했던 정보가 무엇인지 노스는 정작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을 머릿속으로 두어번 되돌려본 뒤 노스의 완벽한 기억력을 떠올렸다. 물론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기억력이 좋든 나쁘든 아무런 기억이 남지 않을 수 있었고 그게 더 정상이었지만 과연 노스가 고문 때문에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혹은 워터보딩이라는 극한의 카드까지 꺼내 들면서 감춰야 할 다른 일들이 있었는가를 캐내는 것이 내 임무였고, 나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전혀?"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며 그것만으로 대답을 끝내버리려는 노스에게 나는 일부러 선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되물었다. 내가 건넨 말은 한 마디 뿐이 었지만 그 속뜻은 '7개월동안 고문관이 뭘 알고 싶어했는지 기억 나는 게 없다고?'라는 것쯤은 노스도 알아 들었으리라. 이 부분을 '잘 모르겠다'고 넘겼다간 복직은 둘째치고 감옥에 던져질지도 모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것이기에 노스의 눈이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되짚어보기에 그닥 유쾌한 기억은 아닐테지만 나는 알아야 했고, 노스가 기억하도록 강요해야 했다.

"이름… 체계… 연락망 같은 걸 물었어요."

"MI5의?"

노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리 쥐어짜도 더 이상 기억할 수 있는게 없어 보였지만 나는 확인 캐물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름 한 두개쯤 대답했다 해도 이해할 만한—"

"아무 것도 대답한 적 없습니다. 어차피 얼마 못 가 의식을 잃었고, 아닐 때에는 멈춰달라고 비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나는 모스크바 접선책의 이름도 몰랐고, 그들에게 줄만한 정보는 아무 것도 알고 있지 않았어요. 하고 싶었어도 대답해줄 정보가 없었습니다."

"FSB가 섹션 D의 상급 요원에게서 얻어낼 것이 없었다는 겁니까?"

"내가 알고 있었던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쯤은 아실텐데요, 워커 요원. 우리가 FSB의 내부를 알고 있듯이 그들도 알고 있으니까요. MI5의 연락 체계나 해리 피어슨의 이름을 얻어내려고 날 고문할 필요는 없죠."

충성심에 대한 문제는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그걸 자극하면 뭔가 한꺼풀 벗겨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노스는 원래부터가 이런 사람이었던 건지 아니면 8년간 이골이 나게 단련이 된 것인지 이 정도 도발에는 조금도 넘어오지 않고 차분하게 응수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 수록 나 또한 끈덕지게 굴 수밖에 없었다. 간혹가다 한 두번씩, 계절병 마냥 나는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드는 이 직업이 환멸스러울 때가 있곤 했는데, 이번 겨울에는 오늘이 그런 날일 듯 했다. 어쩌면 직업은 핑계일 뿐이고 나라는 놈이 원래 이런 놈일지도 모르지만.

"후유증 같은 것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폐소 공포증처럼?"

"폐소 공포증처럼요."

"다른 것은 어떤 게 있죠? 구체적으로?"

노스는 거의 디브리핑 내내 유지하는 한 가지 표정 그대로였지만 나는 그녀의 눈에서 나에 대한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캐묻는 내가 아마 미울 것이다. 변절자라면 나처럼 한 가지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짜증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의 가혹함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과 억울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직업군에서는 '유죄 판결 이전까지는 결백하다'는 헌법 취지는 적용되지 않았다. '모든 혐의가 걷힐 때까지는 유죄'라는 것이 이 바닥의 기본 질서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았다. 게다가 나는 섹션 치프로서 이 디브리핑의 결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복귀 여부까지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니 노스는 속으로는 이를 갈더라도 내게 발톱을 직접 드러내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쩐지 내가 어느 정도는 이 권력의 차이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이 불쾌해졌다. 노스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지난 8년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들을 답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름의 순화 과정을 거친 것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반발로 있는대로 전부 늘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첫 대답대로 통제하지 못할 것은 없어보였다. 폐소 공포증을 그렇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물소리는 싫어하게 됐고, 비를 맞는 것이나 차가운 물로 샤워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한다. 손톱깎이 소리처럼 딸깍거리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고, 구두굽 소리에 예민해졌으며, 불을 끄고 자는 것은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 슬리퍼 대신 맨발이 더 편하고, 가만히 있을때 초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무엇 때문에 그런 습관이나 호불호가 생겼는지를 따져보다면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일들로 거슬러올라가게 되었지만 그 자체로는 누구나 가졌을 법한 사소한 부분들이어서 복귀에 문제가 될만한 건 없었다. 다섯 명의 고문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네 시간이 흘렀고, 짤막한 15분의 휴식시간 동안 나는 재빨리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웠다. 평상시에는 향을 음미하듯 천천히 한 대 정도 태웠겠지만 오늘은 빠르게 숨을 들이쉬며 두 대 반을 피우고서야 담뱃갑을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머리가 얼얼해서 그 정도는 피워야 할 것 같았다. 코트를 벗고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화장실에 들러 셔츠를 털고 손을 씻은 뒤 민트를 몇 번 씹고 뱉었다. 노스는 방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인지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이처럼 앉아있었다.

대화 주제는 카챠모프로 넘어갔다. 나는 종종 노스가 카챠모프를 가장 좋아하는 삼촌이라도 되는 양 묘사한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챠모프는 단 한 번도 그녀의 고문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오직 때때로 노스를 찾아와 그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을 뿐이었다. 고문관들을 묘사할 적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비정한 마네킹들을 묘사하는 듯하던 노스는 카챠모프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묘사했다. 노스의 기억 속에서 고문관들이나 감옥의 다른 죄수들은 그녀와는 다른 선상에, 다른 차원에 서 있는 저급하고 비정한 이들이었지만 카챠모프는 아니었다. 그는 교양과 학식을 갖춘, 심지어 때로는 인품이 있는 사람으로까지 회고되고 있었다. 그들은 윌리엄 블레이크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정치와 경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더 이상 잡혀있지 않은데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카챠모프는 그녀를 붙들고 있었던 적이 없는데도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져있는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내가 그 점을 주목하고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노스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카챠모프가 좋은 말 동무였다는 건 사실이니까요."

"말 동무?"

"유일한 말 동무였죠."

그밖에도 나는 노스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깊게 분노하고 있으며 해리 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발언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감이었으므로 디브리핑 보고서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중에 해리에게 구두로나 덧붙일 수 있을테지만 마땅한 증거도 없이 해리에게 그런 소릴 해봤자 해리야 '그럴만 하다'생각할 것 같아 이 부분은 일단은 보고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싶었다.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4년동안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에서 보냈다는 소리에 나는 워터보딩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서리가 등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구소련 시절부터 악명 높았던 그 교도소에서 노스는 올렉 다샤빈이라는 우크라이나 출신 고문관 밑에서 4년을 보냈다. 그는 주로 전기고문을 즐겨 사용했으며, 노스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보다는 그녀가 러시아를 위해 일하도록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카챠모프 이야기로 벌써 세 시간을 족히 보낸 덕에 올렉에 대한 내용은 다음 번 디브리핑 세션으로 미뤄야 했지만 나는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은 고문관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물었어야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마지막 남은 인간성인 것인지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던 질문이었다.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 일은 없습니까?"

"협박을 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없었습니다. 그것보단 더 좋은 방법이 있었으니까요."

"이를테면?"

"해리가 나를 돌려받는데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얘기로 심리전을 벌였죠."

"개리 퓰러에 대한 얘기는?"

"있었죠. 그것도. 지금쯤 다른 근사한 여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어요."

"돌아오기 위해 그들과 타협할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오히려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났기를 바라는 쪽이었어요. 평생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할거라 생각했으니까요."

평생 러시아의 감옥에서 그렇게 살다 죽을 삶인 줄 알았다고 무던하게 대답하는 노스의 목소리는 그날 밤 늦도록 디브리핑 보고서를 작성하는 내내 귓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이 직업의 존재 자체가 경멸스러워졌다. 이런 직업이 필요한 현실이 혐오스러웠다. 갖은 고생 끝에 돌아온 우리 편에게조차 의심의 칼날을 세워야 하는 것이 싫었고, 그걸 싫어하면서도 충실하게 그 역할을 이행해내는 내가 싫었다.

'시발 생각이 너무 많아졌어…'

나는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태웠다. 둘, 셋, 넷, 다섯. 텅 빈 담뱃갑을 구겨 저 멀리 템스강을 향해 집어던지고 나자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는 니코틴에 살짝 몽롱하게 마취된 듯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내려가 디브리핑 보고서 계속해서 채워나갔다.


별달리 갈 곳도, 할 일도 없었기에 다음 이틀간을 나는 거의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보냈다. 말콤이 나에게 문자나 전화를 할 리는 없었지만 때때로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하게 되곤 했다. 다음 디브리핑 일정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점점 더 다시 시간을 확인하러 눈을 뜨는 것조차 하기 싫어졌다. 그냥 이대로 조용히 땅 속으로 꺼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영국에 돌아오게 되면 다시는 할 필요 없으리라 했던 생각을 나는 또다시 하루종일 하고 있었다. 제냐 얘기를 하는 것도, 카챠모프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올렉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워커의 눈빛도 싫었다. 그가 나의 거짓말을 눈치챘을까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변절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 다만 몇 가지 사항은 묻지 않아줬으면 해'라고 말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타인에게 절대로 꺼내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은 거짓말로 덮어씌웠다. PTSD가 있다는 인상을 줬다간 복귀를 거절당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또다시 올렉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담요로 감싼 몸을 한껏 둥글게 웅크리며 양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화장실의 타일 바닥이 볼에 와닿는 감촉은 서늘했지만 담요를 둘러쓴 몸은 춥진 않았다.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었다. 매끈한 시트를 덮어씌운 푹신한 매트리스와 포근한 거위털 이불이 덮여있던 올렉의 침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안전가옥의 침대는 그닥 좋은 매트리스나 침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올렉의 침대가 떠오르는 구석이 있어서 나는 언제나 이런 딱딱한 바닥이 더 좋았다. 거칠고, 차갑고, 담요 밖으로 비어져나온 발가락 끝이 얼얼할 만큼 차가운게 좋았다.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니까. 내 핑곗거리가 워커의 귀에도 그럴싸하게 들렸기를 바랄 뿐이었다.

돌아오면 이렇게 될 거란 걸 몰랐던 걸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나는 뭘 기대했던 걸까.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아내를 개리가 8년이나 기다렸을거라 기대했던 걸까? FSB의 손 안에 8년이나 있었던 요원을 해리가 두 팔 벌려 환영해줄거라 생각했던 걸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을. 나는 왜 영국에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쓸데 없이 혹시나 하는 생각 따위는 결코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전부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단 한 순간도 희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아무런 근거도, 가능성도 없는 희망을. 그 멍청한 희망이 이제야 돌아와 내게 아둔함과 미련함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젠 로이 워커의 손에 달려 있었다. 나를 알지도 못하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의 손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달려 있었다. 또다시. 러시아 감옥에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나를 변절자라고 판단하면 나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 것이고,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나를 복직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나는 우편함에 퓰러라고 적혀있는 집 뿐만 아니라 유리 벽들이 늘어선 그리드로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감옥은 이제 넌덜머리가 났다. 해리가 나에게 감옥으로 가라고 한다면, 나는 이번엔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거절할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을 차라리 러시아에서 죽었으면 순교자라도 됐겠다 하며 그냥 다 끝내버릴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감옥에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드에 들여주는 것도 아닌 것보다야 그게 차라리 더 인간적일 것 같았다. MI5가 아니면, 나는 이제 무엇이 되면 좋을까. 개리는 항상 내 일이 너무 위험하다고 불평했었다. 그는 좀 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 충실한 배우자를 원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런던이, 영국이 어떤 위협 아래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던 나는 세상이 평화롭다고 믿는 눈 가리개를 다시는 쓸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가장 큰 위협을 받는 도시에 내 남편과 아이가 살고 있다면, 나는 그 위협에 맞서는 일선에 꼭 서 있고 싶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다녀왔어! 나 일 그만뒀어! 이제 집에 늘 있을게!'하고 그에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해봐야 소용 없는 생각 따윈 그만하고 싶어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리고 싶다는 유치한 같은 충동을 겨우 떨치고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기 까지는 또다시 시간이 걸렸다. 어린 애가 생떼를 쓰는 것처럼 디브리핑을 하기 싫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게 짜증이 나 샤워기를 세게 틀었다. 좁달막한 욕실 안에 소름끼치는 물줄기 소리가 가득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샤워 부스를 등진채 세면대에 물을 받아 놓고 스펀지로 몸을 닦았다. 거울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계속해서 아래로 향했지만 주변시야에 끔찍하리만치 선명하게 문신의 푸른 빛이 가득 들어왔다. 내 문신이 저렇게 컸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한 시간에 걸쳐 물에 적신 스펀지로 몸을 씻었다. 물이 자꾸만 식어 차가워져서 새로 뜨거운 물을 받고 식어버린 물을 버리고 하는 시간이 실제로 몸을 닦는 시간보다도 더 오래 걸렸다. 나는 샤워 하나 똑바로 못 하는 얼간이가 된 내 꼴이 우스웠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될까.

코트까지 전부 합쳐 딱 여섯 벌의 옷 밖에 들어있지 않은 옷장 앞에선 사실 그렇게 고민하며 서 있을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나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옷을 고르느라가 아니라, 옷장에 온통 검정색과 진회색 옷 뿐인 것을 이제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검정색 청바지와 진한 회색 터틀넥 스웨터를 집어들며 나는 러시아 이전에는 내가 뭘 입었더라 하는 생각에 잠겼다. 개리는 내가 푸른 색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내가 홀터넥을 입는 것을 좋아했고, 때때로 내가 앞이 대담하게 파인 옷을 입으면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나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문신이 비치지 않을 만한 것, 문신을 모두 가릴 수 있을 만한 것으로만 옷을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개리에게 돌아갈 일은 없을텐데 왜 내가 여태 그의 취향을 신경쓰고 그가 실망할거라는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은 이제 전부 그만하고 싶어서 대신 오늘 있을 디브리핑에서 진술해야 할 내용들을, 이미 수천번도 더 편집하고 재단하여 머릿속에 말끔하게 정돈해둔 내용들을 하나씩 되짚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자 오래된 회벽칠에 틈이 갈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금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내 허리를 움켜쥐던 올렉의 손바닥이나 목덜미를 깨물던 더운 숨결이 어땠는지를 떨쳐버리려 애썼다. 진술 내용에 그런 이야기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올렉의 침대에서 있었던 일들은 평생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의 C 동 28실에 묻어둘 작정이었다. 문신이 절로 사라질 리 없는 걸 아는데도 몇 천번이고 문질렀던 허벅지 안쪽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청바지의 두터운 이음 솔기만 만져졌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MI5의 루카 노스 디브리핑 파일에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4년은 오로지 전기 고문과 협박, 회유, 그리고 독방에서의 시간만으로 기록될 것이다. 목을 감싸고 있는 터틀넥의 아크릴사가 갑갑하게 느껴져 양 손으로 목 부분을 잡아당겼다. 뒷목에 까슬한 합성 섬유실이 부스럭거렸다. 개리가 좋아했던 부드러운 울 목도리가 떠올랐다.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내가 준 것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진한 녹색의 목도리는 아마 오래 전에 휴지통에 처박혔겠지.


사흘만에 다시 본 노스의 안색이 예전보다 나아진 게 없어보이자 나는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혹 FSB와 접촉하지는 않는지 지켜보는 현장 팀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로는 노스는 집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푹 쉬는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좋을 일이다 싶었지만 어쩐지 노스가 휴가 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잠이나 잤을 것 같지는 않더라니.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곱씹고 있었을까? 아니면 FSB와 모종의 방법으로 연락을 했던 걸까? MI5를 스파이할 전략을 세우고 있진 않았을까? 진한 회색의 터틀넥과 대비되는 흰 얼굴이 유독 더 창백해보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밀치기라도 하면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팔랑거리듯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유를 넣은 홍차를 건넸지만 그녀는 형식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할 뿐 두터운 머그잔이 차갑게 식도록 손가락 한 번 대지 않았다. 핫 초콜렛이 더 좋았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취조관으로서 그녀를 동정하거나, 연민을 품거나 해서는 안 되는데.

"올렉 다샤빈은 어떤 사람이죠?"

우크라이나 출신의 고문관은 이른 바 '프리랜서'였는데, 주로 FSB에게서 일을 받았다. 바로 전까지 슬로바키아에 있었던 그는 노스를 담당하기 위해 블라디미르 교도소로 옮겨 왔으며, 노스를 FSB측의 스파이가 되도록 회유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노스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려 했는데, 주로 사용한 방법은 그녀를 독방에 가둬두는 것이었다. 창문도, 문의 창살도 없는 손바닥만한 지하의 독실에 한 번 갇히면 소리를 지르든 자해를 하든 노스는 3주에서 4주 가량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불빛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 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른 수감자들이 알려줬어요. 독방에서 한 번 나오면… 곧장 다시 독방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니까."

독방에서 나온다는 것은 전기고문을 뜻했다. 올렉은 그 분야의 전문가였고 영구적인 장해를 남기거나, 피고문자가 의식을 잃게 하거나 하지 않는 한도가 어디까지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2-3일 가량 전기 의자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노스는 다른 수감자들이 위치한 B동 4구역의 감방으로 돌려보내졌다. 2-4명이서 한 방을 사용하는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노스는 혼자였다. 원칙적으로는 하루 30분의 활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감자들은 서로 교류할 수 없었지만, 간수들이 허술해져 있거나 새벽에 자리를 비운 틈이면 죄수들끼리 문의 창살을 두들겨 대화를 하곤 했는데, 노스는 그걸 통해 자신이 얼마나 독방에 갇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수감자들과의 관계는 어땠죠? 당신이 영국인이라는 걸 그들이 알았습니까?"

"아뇨. 하지만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꽤 됐고, 담당 고문관이 따로 있었고, 종신형이라는 점 덕분에 소속은 없었지만 지낼 만 했어요."

"소속이라면?"

"마피아라든지, 카르텔이나."

"그럼 문신도 블라디미르에서?"

질문에 바로 바로 대답하던 노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어제 점심때쯤 병원에서 진료 기록을 받은 터라 그녀가 무채색의 터틀넥 스웨터와 코트로 꽁꽁 감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이젠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네 장의 사진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의료진은 양 팔과 손목의 결박흔이나 등과 배의 타박상 때문에 촬영한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하얀 회벽 같은 피부에 한가득히 그려진 검푸른 문신만이 띄었다.

"감옥의 문화 같은 거죠. 그게 없으면 거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속하지 않은 사람은 죽게 돼 있고요."

직접 사진을 보지 않고서는 온몸 가득히 그런 문신이 뒤덮여 있다고 믿기 어려운 노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잠시 그녀가 안타까워졌다. 지금껏 노스가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을 할 적마다 나는 그 말을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정말로 그녀가 포기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등 한 가득 여덟개의 러시아 교회 돔을 새기면서, 가슴 가득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새기면서 언젠가 개리 퓰러에게 돌아갔을 때 '르포 기자 일이 잠깐 꼬여서, 어쩌다보니 문신을 했어'라고 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테니까.

"올렉의 제안에 응할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아뇨."

"단 한 번도? 이 정도면, 특히 이성간에는 스톡홀름 신드롬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은데요."

"그가 내 담당이 되었을 즘엔 이미 포기한 뒤였거든요. 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FSB의 스파이가 되면 영국에 돌아오는 게 확실한데도?"

"…그렇게 돌아오면요? 뭐가 달라지죠?"

나는 한동안 노스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와봤자, 지금 이 상태일 것이다. 어차피 개리에게는 돌아갈 수 없고, MI5에서는 변절자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FSB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그녀가 FSB에 넘겨준 정보 때문에 전남편이나 아들이 테러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 올렉이 그녀를 얼마나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는가는 이젠 중요치 않았다. MI5만이라면 어쩌면 그녀는 충성심을 팔았을지도 몰랐다. 해리에 대한 원망으로라도 그랬을지 몰랐다. 하지만 개리 퓰러와 트레이 퓰러가 영국 어디엔가 있는 한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개리가 '배우자의 고의적 유기'를 사유로 법원에 이혼을 신청했다는 걸 알면, 그땐 노스는 어떻게 나올까?

노스에게서 특정한 정보를 얻어내려 한 것은 아니기에 올렉에 대한 디브리핑은 두어시간 만에 끝이 났다. 나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그리드로 돌아가면서, 유리 벽 서너 개 너머로 노스를 돌아보았다. 엘레베이터 앞에 서 있던 노스는 곧 말콤과 마주쳤는데, 말콤은 5개월 전 FSB측에서 자기네 정보원과 노스를 맞바꾸는 제안(MI5는 결코 손해 보는 제안이 아니었다)을 건넸을 적부터 그녀를 돌려받는데 가장 열성적이었던 만큼 노스에게 커피라도 제안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 했다. 말콤은 8년 전에도 현장 요원들 지원 업무의 총 책임자였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저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자책에 시달렸으리라. 노스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해리의 신뢰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런대로 말콤의 환대로 조금은 기운을 차렸으면 싶어 나는 굳이 말콤을 불러세우지 않고 그냥 그리드로 향했다. 어차피 보안 규정 같은 것이야 말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테니까.

보고서 작성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꾸만 내가 너무나 노스에게 동정적인 쪽으로 치우쳐 작성하는 것 같아 두어번 새로 썼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너번 더 내용을 찬찬히 훑은 뒤 서류철하여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갔다. 해리는 총리를 만나러 갔으니 노스의 디브리핑 결과는 내일에나 보고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메일함 살펴보고, 서버에 다른 사항은 없는지를 체크한 뒤 간만에 잠잠하게 지나가는 목요일이라 생각하며 주말까지 이대로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으며 자리를 정돈했다. 지하 주차장은 두 개 층이 누수 때문에 긴급 공사중이었고, 아래층과 위층 부서에서 신입 교육인지 뭔지 때문에 오늘도 지하 주차장에는 자리가 없었다. 나는 습관처럼 지하 3층까지 내려갔다가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시커먼 공사용 비닐만 한가득 눈에 들어오자 속으로 욕을 집어삼키며 다시 1층을 눌러 위로 향했다. 그나마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한 시간쯤 전부터 비가 내리는 것 같았으니 무료로 세차를 한 셈이 되는 거랄까. 1층 로비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비가 훨씬 세차게 내리고 있는 게 보였는데, 운 나쁘게도 나는 우산이 없었다. 하지만 별 다른 사건 없는 평온한 목요일 저녁의 가격이 비에 잠시 홀딱 젖는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수지 맞는 장사지 싶었다. 나는 코트를 단단히 여미고는 차를 주차해놓은 곳으로 뛰어갔다. 어차피 쫄딱 젖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나는 그렇다고 느긋하게 그 따가운 빗속을 걸을 만큼 낭만적인 놈도 아니었다. 지상 주차장이 한 가지 더 짜증나는 점은, 여기는 방문객 용이었기 때문에 내 MI5 출입증은 먹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차 요금을 계산하고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리드용 주차 카드가 있어서 그걸 그냥 긁기만 하면 나중에 알아서 정산되는 방식이 있긴 했다. 문제는 빌어먹을 주차 카드 따윈 도무지 쓰는 적이 없어서 한참 뒤져야 한다는 거였다. 10여분 만에 주차 카드를 찾아들고 나자 빨리 집에 돌아가 따끈한 욕조에 몸이나 담그고 스카치 한 잔 하고 푹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주차 카드를 입에 물고 여지껏 물에 미끌거리는 손을 하나씩 훌훌 털어대며 운전대를 돌리는데, 로비의 바깥 계단 쪽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노스였다. 그녀 역시 손에 우산이 없었고, 나는 노스가 러시아에서 물고문을 당했다는 게 떠올랐다. 노스는 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왼쪽 손목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십여초 망설인 끝에 로비 앞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