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챕터2→챕터3


거대한 기가 갑자기 출현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지구 상에 딱 셋이 있었다.

트랭크스, 인조인간 17호와 18호.

심심풀이로 스케빈저 사냥을 하던 두 인조인간이 기가 출현한 장소에서 가까웠던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그 위치가 하필 두 인조인간에게 있어서는 특히 예민하게 반응할 만한 이유가 있는 특이점인 점은 또 어떻고?

그곳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인조인간 17호와 18호가 제작된 산 속의 비밀 연구소였다. 비록 닥터 게로가 그들의 인격을 완전히 말살한 이래 그들의 기억은 첫 타겟이었던 서쪽 도시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들이 제작된 곳에 관한 정보는 전자 두뇌에 기록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겠다, 좋은 기억도 없겠다, 없는 셈 치고 잊고 있던 곳에서 아무런 징조 없이 그들의 장난감과 비슷한 힘을 지닌 것이 불쑥 나타났다. 혹시 그들이 모르는 미물이 그들의 눈을 피해 숨 죽이면서 그들의 약점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인조인간 듀오는 연구소와 그곳에 혹시라도 존재할 그들에 대한 정보를 없애기 위하여 트랭크스보다 한 발 앞서서 예의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너무 방심했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서 연구소를 부수던 무언가를 포착하기가 무섭게,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그들은 삼켜졌다.

먼저 그들이 느낀 전투력으로는 불가능함이 분명한 속력으로 둘 사이에 웬 괴물이 나타났다. 18호는 괴물에게 낚아채여 그것과 함께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괴물은 덩치에 비례하여 그 힘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태였다. 트랭크스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 적당히 봐주느라 감추었던 힘을 드러내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그 괴물은 그들의 혐오하올 창조자가 예정한 그들의 포식자이자 그들이 부품으로서 그 기능을 다 바치도록 설계된 궁극의 인조인간인 셀. 인조인간 17호와 18호는 결국 끝까지 닥터 게로의 설계에 따라 파멸을 맞이했다.

태양계를 덮듯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사악한 기운이 인조인간 남매의 종말과 새로운 재앙의 탄생을 알리는 가운데.

마침내 계왕의 경고도 뿌리치고 트랭크스가 마주한 것은 '외계인'이라고 형용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였다. 철저하게 무너진 동굴 앞에서 결가부좌인 채 공중에 떠서 검은 등딱지 날개를 활짝 펴고 눈을 감고 명상하는 녹색 딱정벌레 외계인. 느껴지는 기운이 사악하지만 않았다면 그의 어머니가 가끔 보는 앨범 사진에서 보는 피콜로를 연상시키도록 평화로워 보였다.

30m 즈음 접근했을까.

그것이 눈을 뜨고 그를 직시했을 때, 트랭크스는 반사적으로 초화하면서 검을 뽑았다. 온몸의 솜털이 일어나서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솟아나왔다. 눌리고 눌려 무정함으로 변질한 광기(狂氣)로 번들거리는 분홍색 눈동자가 그의 육감에는 사악한 기운보다 더욱 위험하게 다가왔다.

"너는 약하구나."

무정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어느 새 코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눈높이를 맞추어 트랭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랭크스는 본능적으로 전신을 꼿꼿하게 굳혀 조금도 움직이지 않도록 긴장했다. 무정하도록 눌린 광기가 풀려나는 순간이 그가 죽는 순간임을 직감하고서. 그럼에도 감각은 곤두세운 채, 트랭크스는 눈앞의 괴물의 기운에 서린 힘겨운 '억제'를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너는 약해."

참으로 마음 아프고 자존심이 상하는 모욕임과 동시에 사실. 그러나 트랭크스가 주목한 것은 그 발언에 담긴 기묘한 분위기였다.

괴물은 트랭크스를 모욕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하기 위하여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

억제된 기운과 혼잣말, 무정한 광기.

트랭크스의 머리에 깨달음으로 벼락이 쳤다. 그 벼락이 사악한 기운이 만들어낸 편견을 내리쳐 때리고, 사악함 아래에 더 깊은 곳 기운의 근원이 도사리는 곳에 자리한 잉걸불과 같은 정순함을 향해 그의 눈이 트이도록 했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어! 그가 누구든지 간에, 그는 자의로 사악함에 매몰된 것이 아니야!'

근원에 자리한 정순함에 걸고, 트랭크스는 도박수를 던졌다.

검을 놓고.
초화를 풀고.

그의 변화에 놀란 듯이 한 발짝 물러나는 외계인을, 트랭크스는 맑게 갠 하늘과 같은 빛깔의 눈으로 두려움 없이 마주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트랭크스라고 해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검은 날개를 천천히 폈다가 접기를 다섯 차례.

"셀(Cell). 이제는 셀이다."

외계인은 트랭크스의 가설을 확신하게 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만남이 한 시간선의 운명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