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29화]

심사위원들은 금방이라도 '그럼 너희, 래빈이가 다 잘못했다는 거야?' 같은 대사를 칠 분위기였다.

그러니 말을 잘 골라야 했다.

'상황 수습이 아니라 그냥 사실 나열처럼 들려야 된다.'

"네. 래빈… 이가 편곡이 가능하니까 편곡자님과 상의해 줬고, 편곡 방향은 저희가 다 같이 의견 내서 정했습니다."

김래빈이 움찔거렸다.

'넌 입 열면 안 되고.'

다행히 류청우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맞습니다. 말씀 주신 문제도 저희가 다시 한번 다 같이 이야기해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래서 팀전 당일에는 최고의 무대 보여드릴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살렸다.

나와 류청우는 눈치껏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여러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질책할 타이밍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다행이었다.

"그럼 지금 편곡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다른 팀보다 시간적으로 굉장히 뒤처질 거예요. 할 수 있겠어요?"

"해내겠습니다. 우리 할 수 있지?!"

"네!"

"할 수 있습니다!"

눈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놈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대답을 흐리진 않겠지.

다행히 이번에는 트롤러도 정신 차리고 힘차게 대답했다.

심사위원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이 시간 제약 속에서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점, 결과는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 꼭 알고 계셔야 해요."

"맞아. 바꾼다고 꼭 지금보다 좋아지리란 보장은 없어."

그렇다고 안 바꿔서 무대가 별로면 '왜 피드백 받고도 안 바꿨지?' 같은 반응이 나오겠지.

그리고 '도전정신이 없다'는 식의 분량이 들어갈 테니, 사실 의미 없는 말이었다.

결국, 뭘 하든 결과에 맞춰서 과정이 편집되고 평가되는 것이다.

참가자들 모두 암묵적으로 아는 사실이기에, 팀에 군기와 긴장감이 깃들었다.

"예. 명심하고 도전하겠습니다."

류청우의 대답이 상황을 끝마치는 것 같은 그때,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마이크를 든 원곡자였다.

"아 예…. 말씀하세요."

심사위원들은 갑자기 끼어든 원곡자에게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했고, 원곡자는 그윽한 눈으로 마이크를들었다.

"여러분의 무대에는… 태양처럼타오르는 곡이 가진 힘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

이야기 다 끝난 판에 뒤늦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은은하게 당황한 사람들을 두고 원곡자는 계속 입을 털었다.

"이 곡은,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와 열정을 불어 넣어줘야 하거든요? 근데 여러분, 잘생기고 춤 잘 춘다고그게 전해지는 게 아니에요."

"…."

아, 예….

"저희 활동할 때는, 진짜 그 느낌을 주려고 했거든요. 여러분 지금 좀 유명해졌다고 그런 곡에 대한 예우를 잊으면 안 돼요."

아직 데뷔도 못 한 오디션 프로참가자들한테 저런 말까지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애들 후려치는 꼰대 발언을 조언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자아도 좀 비대한 것 같고.

하지만 저놈 반응도 편집에 들어갈테니 신경 써야 한다는 게 골 아픈지점이었다.

안 그래도 편곡 대안을 쥐어 짜내야 하는데 저 헛소리까지 참고해야하나.

짜증 났지만 반박해 봐야 '불쌍한 무명 아이돌 원곡자'에게 곡 뺏는 그림만 나오니 다들 순순히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뭐…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다른 팀들까지 모두 중간평가 피드백 끝난 후, 마침내 편곡 재토의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트롤러가 우물쭈물 김래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미안해…."

저거 카메라 앞에서 사과하게 둬도되나?

하기야 이미 팀 단위 커버는 쳐놨으니, 본인 실수 수습은 알아서 할 일이긴 했다.

김래빈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편곡을 도맡은 건 사실이고."

사실 '아니 X발 니가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요'라고 대답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어쨌든 류청우는 둘 모두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끝냈다.

"고생했다. 얘들아, 우리 준비되면 바로 편곡 얘기 다시 해보자."

참고로 여기서 '준비'는 제작진의 카메라 세팅이었다.

"네!"

막간의 자투리 시간에 참가자들은 기합이 든 상태로 잠시 흩어졌다.

중간평가가 아슬아슬했던 탓에 썩 표정들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끝에서 수습이 된 탓인지 아직 희망이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대안이 나와야 그 희망도 쓸모가 있단 말이지.'

딱 보니 이거다 싶은 편곡 방향을 생각해 낸 놈도 없고, 그냥 말하다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것 같았다.

가진 거 없이 행복회로 돌리는 중이란 뜻이다.

'앞날이 썩 밝진 않군.'

"저기, 박문대 형."

"어, 네."

구석에 앉아서 혼자 머리 좀 굴려보는 중에, 김래빈이 말을 걸어왔다.

'의왼데.'

지난 사흘 동안도 별로 대화해 본적 없는 놈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애초에 사흘간 누구랑 떠든 적이 거의 없었다.

연습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놈의 잡담을 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어쨌든 김래빈은 엉거주춤 옆에 꿇어앉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뇨. 뭘."

아까 트롤러 말 잘라줬다고 고맙다는 거겠지.

"그런 상황에서 다른 분이 도와주신 건 처음이라…."

역시 그랬군.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김래빈 입장에서도 걱정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팀에 적응을 못 해서 싸우는 분량이 들어가면, 여론상 회복 불능 선고가 뜰까 봐.

'어쩐지 너무 저자세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구구절절 이야기가흐른다.

"제가 지난 1차에 이어서 팀워크가 결여됐다는 평을 또 받을까 봐 많이 고민했는데, 박문대 형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역시 팀원으로 제일 먼저 팀워크 좋은 분을 영입했던 건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

설마 박문대를 맨 처음 픽업한 게 '팀-워크'때문이었단 말인가.

질문해 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 팀원들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우해 주시는 걸 봤습니다. 물론 가창력도 훌륭하셨고요."

"…어, 그래요. 고맙습니다."

방송에서 편집으로 박살 나 놓고 또 방송 내용을 믿었다는 점이 아주 독특한 놈이었다.

그것도 초반에 오지게 사회성 없게 편집된 박문대의 팀워크 능력을 믿다니….

정말 놀랍다. 차라리 큰세진을 뽑았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아, 거긴 또 류청우랑 리더 역할이 겹쳐서 안 뽑았나.'

나름대로는 기준이 있나 보지.

황당해하고 있자니, 김래빈이 또 말을 걸었다.

"아, 형. 편하게 말씀하셔도 전 괜찮습니다."

"…음, 그래."

뭐, 등수 높은 놈이랑 말 터놓는건 나쁠 게 없었다.

나는 순순히 대답하다가, 지금 상황에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다는 걸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편곡 말인데, 혹시 뭐 생각하는 거 있어?"

"…사실, 좀 곤란한 상황이긴 합니다."

김래빈의 잘 나가는 양아치 같던 인상이 좀 누그러지며 우울한 표정이 됐다.

"다시 편곡에 들어간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얼마나 고쳐야 할지도 문제니까요."

이미 맞춰서 다 연습해 놓은 탓에 얼마나 건드려야 마감일을 맞출지모르겠다는 말이군.

"많이 고치면 안 될 것 같은데…지금 수정사항이 너무 중구난방이라 통일성이 없어서 뭘 손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특별히 아이디어도 없고 뭘 고칠지도 못 정하겠다는 뜻이군.

나랑 똑같았다.

김래빈은 한번 성토를 시작하니 멈출 수 없다는 듯이 줄줄 걱정을 중얼거렸다.

"원곡자분의 조언도 반영해야 할텐데, 사실 '용기와 열정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그건… 진짜 그렇지.

조언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아이돌이 무슨 쌍팔년도 미국 만화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용기와 열정을 어떻게 불어넣냐.'

"…?"

잠깐. 방금 뭔가… 깨달은 것 같은데.

나는 직전의 생각을 복기해 보다가, 이상한 아이디어 하나를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 아이디어가… 이 상황과 딱 들어맞았다.

원키를 그대로 써도 소화할 수 있도록 편곡이 가능한 컨셉 아이디어.

이미 연습한 응원단 컨셉의 안무를 많이 안 고쳐도 되고, 심지어 그놈의 '용기'와 '열정'도 잡을 수 있다.

어쩌면 기가 막힌 해결책인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너무 과해.'

그랬다. 그냥 과한 게 아니라, 유치찬란해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 안 고치는 것만 못했다. 누구하나만 잘못해서 무대에서 마가 떠도 그대로 숙연해질 게 분명했다.

어?

"…아니지."

"저, 형?"

"잠깐."

나는 김래빈의 되물음을 일단 무시했다.

대신 마침 자투리 시간이 끝나서 슬슬 돌아오는 팀원들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상태창!'

그리고 빠르게 팀원들의 스테이터스를 훑었다.

"…!"

다른 능력치는 몰라도, '끼' 능력치는 전부 B- 이상이었다.

참고로 B등급에 들어섰다는 것은, 메인 포지션으로 써 먹을만한 수준의 능력치라는 말이다.

과연 등수 높은 놈들만 모인 팀답다.

'이건… 되겠는데?'

어쩐지 심사위원들이 철 지난 응원단 컨셉을 별로 안 까더라.

"래빈아. 편곡 말인데."

"예, 예?"

나는 당황한 김래빈에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일단 뱉었다.

"예…?"

김래빈은 처음에는 더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부가설명이 붙을수록 점점 침착해지더니, 곧 삼백안을 번쩍번쩍 빛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도 반응이 좋았다.

"자, 잠깐만요."

김래빈은 연습실 한 편에 설치된 건반으로 달려가더니, 뭔가를 뚝딱뚝딱 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 본 김래빈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특성 : 마에스트로(A)]

: 필요한 건 작은 계기일 것이다.

영감을 받을 시, 창작 속도 +120%

선아현도 그렇고, 역시 상태창 금수저가 따로 있다.

'다른 놈 특성을 복사해 오는 기능은… 없나? 웹소설에서 보면 자주나오던데.'

한탄하고 싶었지만 일단 할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얼른 상태창을 불러왔다.

그리고 남은 포인트를 '끼 스탯'에 투자했다.

이걸로 나도 B-에 진입한 것이다.

'좋아. 수치는 맞췄고.'

"문대야, 래빈이 왜 갑자기 건반으로 갔어?"

다가온 류청우가 건반을 뚱땅거리는 김래빈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박문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컨셉 아이디어를 냈는데,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무슨 아이디어?"

"변신 히어로물이요."

혼란스러운 류청우의 뒤에서, 차유진이 옆 사람에게 속닥거렸다.

"변신 혀로물이 뭐예요?"

경연 날짜까지 닷새 남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닷새 후 경연 당일.

아이돌 주식회사 의 2차 팀전이 진행될 무대 세트 건물 앞은 인산인해였다.

방청객의 숫자가 많이 늘어난 건아니었다. 단지 치솟는 시청률과 화제성 지수 덕분에 앞에서 배회하며 소리라도 들어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막방도 아닌데 벌써부터 슬로건이나 포토 카드를 나눠주는 사람도 심상찮게 보였다.

'와, 장난 아니네.'

한 여성이 어수룩한 몸짓으로 인파를 피해서 입장 줄에 섰다.

친구의 부탁으로 함께 방청객 신청을 넣었다가 본인만 당첨된 것이라, '그냥 가지 말까?' 고민하다가 겨우 자체 휴강을 하고 온 사람이었다.

'요새 워낙 유명하니까.'

물론 이 선택에는 '제발 우리 문대 어떻게 하는지만 좀 알려줘' 라며 눈물과 밥으로 호소한 친구의 부탁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까지 좋나…?'

그녀도 SNS에서 금갈색 머리를 한박문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제법 매력적이었으나, 저 정도로좋아할 만큼 잘생기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밥도 얻어먹었으니 눈여겨봐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드디어 건물 안으로 입장했다.

방청이 끝난 후 친구에게 박문대의 사진을 구걸하는 미래는 상상도 못한 채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30화]

친구의 부탁으로 방청을 온 여성은그럭저럭 시야가 좋은 중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좀 어색하네.'

혼자서 이런 관람을 하는 것이 처음인 여성이 머쓱해할 때, 옆자리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누구 보러 오셨어요?"

"네? 어… 박문대?"

"아…. 네."

김래빈 데뷔해 슬로건을 한 손에 들고 있던 옆자리는 위아래로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곧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휙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괜히 와서 기분과 시간만 버리는 느낌에, 여성은 뚱한 상태로 첫 무대를 방청하기 시작했다.

"첫 무대는…. '롤링커플'의 Fingerprint입니다!"

MC의 우렁찬 소개와 함께, 활동 2번 끝에 망한 혼성 아이돌인 '롤링커플'의 무대가 스크린을 통해 잠시 상영되었다.

'숨은 명곡이라 잘 모르는 방청객을 배려', '원곡자에 대한 예우'라는 명분으로 하는 구성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뜨지 못한 옛 아이돌의 촌스러운 무대와 현 참가자들의 무대를 대비시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 무대를 재해석한 참가자들은… 하일준, 지태우, 이세진, 선아현, 최나훈, 석희강, 그리고 최원길입니다∼ '기간틱' 팀! 입장해주세요!"

원곡의 무대화면이 뚝 꺼지더니, 참가자들의 프로필 사진이 MC의 호명에 따라 한 칸씩 스크린을 채웠다.

그리고 스크린이 서서히 꺼지며,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손바닥을 맞대면 느껴지는 Feel∼

방긋 웃는 큰세진의 얼굴이 화면을 채웠다.

따단따-

그리고 빠른 비트의 일렉트로 하우스 반주와 함께 화려한 군무가 무대위에 펼쳐졌다.

'우와…'

화면으로 볼 때와 달리, 현장에서는 안무의 공간감이 살아있는 탓에 더 박력 있게 느껴졌다.

아이돌 무대를 처음으로 직접 관람하는 여성에게는 약간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발라드 가수 말고 댄스 가수 콘서트도 좀 다녀볼 걸 그랬나?'

그녀는 무심코 후회하면서, 눈앞의 무대를 즐겁게 몰입해서 관람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대가 끝난 뒤에 퇴장하는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보낼 때 즈음에는 완전히 들뜬 상태였다.

'이거 좀 재밌는데?'

무대 중간중간 준비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지루했지만, 방송 장비가 돌아가는 중에 연예인들의 무대를 보는 것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참가자들에 따라 팀의실력이 들쑥날쑥했다는 점이었다.

'이 팀은 좀… 그렇네.'

두 번째 팀은 아쉬웠고, 세 번째, 네 번째 팀은 꽤 재밌었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덕질'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각 무대에 대한 자세한 감상보다는 뭉뚱그린 느낌만 남아서 쓱쓱 잊어버렸다.

일단 지금까지는 첫 번째 팀이 가장 잘했다, 그 정도가 머리에 남은 감상이었다.

'나가면서 가장 좋았던 두 팀에 투표하라고 했지?'

일단 한 자리에 첫 번째 팀을 넣어둔 채로, 그녀는 계속 무대를 관람했다.

그다음 팀들도 나름대로 컨셉이 있고 재밌었지만, 첫 팀만큼 큰 감흥은 없었다.

'음, 약간 피곤하다.'

사실 후반 팀들의 실력이 전반보다 뒤떨어지진 않았다.

단지 계속 잘 모르는 곡을 연달아서 보고 있자니, 처음의 신선함이 사라지고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친구에게 부탁받은 참가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팀 아닌가?'

그녀는 스마트폰을 켜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겨우 다음 팀 소개를 집중해서 들었다.

"이번 무대는… 밴드 '태양섬'의 태양처럼 타오르는 입니다!"

그리고 스크린에 10년 전쯤 음악방송으로 보이는 영상이 떴다.

'아, 이 노래.'

야구 좋아하는 친구와 갔던 야구장에서 들었던 응원가다.

'원래는 이렇게 불렀었구나…

뭐랄까, 야구장에서처럼 신나지는 않았다. 그냥 굉장히 고음이 많고,힘든 곡이구나 싶었다.

그녀는 열창하는 화면 속 보컬을별 감흥 없이 흘려 보다가, MC의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무대를 재해석한 참가자들입니다! 류청우, 이세진, 김유준, 박문대, 유지호, 김래빈, 그리고 차유진!"

'방금 박문대라고 했지?'

그녀는 황급히 스크린을 다시 응시했다. 스크린에서는 이번 참가자들의 프로필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아, 다들 아는 애들이다.'

유명한 참가자들이 많아서 마지막팀이었구나.

그녀는 다시 올라오는 기대감에 자리를 고쳐 앉았다. 주변에서 아까보다 몇 배는 커진 환호성이 귀를 찔렀다.

'세상에, 진짜 인기 많네.'

"바로, '영웅가' 팀! 지금 입장합니다-"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무대가 캄캄해졌다.

스크린 불빛도 사라진 검은 무대였다.

그 위로 한 줄기 푸른 스포트라이트가 꽂히는 순간.

검지를 총구처럼 하늘로 치켜 들고있는 참가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레이싱복 같은 패턴의 훤칠한 검은 점프슈트가 강렬한 푸른 조명을 흡수했다.

그 손에서는 빨간 핑거 슈트가 조명에 반들거렸다.

그리고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Yah, yah-" Hero Time

[HERO TIME!]

순간, 같은 글자가 스크린을 가득채웠다.

끼이이익!

강렬한 베이스가 노골적인 글리치 소리와 함께 스피커를 찢기 시작했다.

무대의 모든 조명이 터지듯이 돌아왔다. 그리고 일곱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쭉쭉 뻗은 팔다리가 바닥을 치고 몸을 꺾으며 칼같이 정교한 군무가 펼쳐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패턴이 다른 검은 점프슈트 차림이었다.

가운데 위치한 차유진이 노래를 시작했다.

-타오르네 내 마음이

태양처럼 찬란하게

뒤에서 몸을 든 참가자가 이어받아 불렀다.

-저 멀리 하늘 높이 닿아

더 멀리 날아 잡을 수 있게

전형적인 밴드 사운드가 흘러야 할 반주 자리에는, 락킹한 느낌만 남은채 무겁고 강렬한 덥스텝 사운드가깔렸다.

WOB- WOB- WOB- WEEEB-I

BRMMMM-!

그리고 다시 군무.

한 손을 뻗는 참가자들이 마치 마샬아츠를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무대를 쳐다보았다. 자기 파트에서 더 격렬하게움직이는 것이 시선을 붙잡았다.

안무는 자잘한 움직임 없이 크고 확실한 동작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자칫 단조롭고 과해 보일 수 있는 구성은,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동선 덕분에 그저 강력해졌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하나

타오르는 황홀한 열정

남색 헤어밴드를 한 류청우가 프리코러스를 불렀다.

무언가를 쏘는 것 같은 묘하고 멋진 안무가 섞여 있다 싶은 순간, 코러스가 터져 나왔다.

-날아가! 난 끝까지∼

저 태양처럼 빛날 그 날까지!

앞으로 다리를 박차며 시원하게 고음을 뻗은 참가자의 머리색은 반짝거리는 금발이었다.

샛노란 광택의 초커가 마치 자신의 머리로 만든 것처럼 어울렸다.

그 높은음을 내면서, 참가자는 씩웃고 있었다.

'미친.'

쟤가 문대야? 여자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 사진 너무 못 찍잖아…!'

친구가 자기가 찍었다며 보여준 사진에서는 안 저랬다!

저렇게 잘하고 귀여운 애는 그렇게 찍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형성된 낮은 기대치를 두들겨 패는 것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원래 취향 이기는 장사는 없는 법이었다.

'내가 걔랑 취향이 비슷했구나…!'

그녀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을때, 무대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박문대가 앉으며 비켜난 자리로 김래빈이 들어왔다.

보랏빛 렌즈가 든 고글이 빗장뼈 부근에서 흔들렸다.

-Rising like a star

Shining like the sun

'어?'

원곡에서 계속 후렴의 고음이 나와야 할 부분에, 대신 랩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남은 후렴구 멜로디가 사라지진 않았다.

대신 마치 샘플러처럼 신디사이저로 처리되어, 힙한 덥스텝 반주 위에 쨍한 소리로 더해졌다.

그 위로 랩이 얹어지니, 앞선 고음의 기세가 죽지 않았다. 도리어 듣기 편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 부분의 가사가 올드했기에, 영어로 직역한 랩 가사가 차라리 곡을 더 현대적으로 만들었다.

-날아가네! 이 순간∼

여긴 태양처럼 타오르는, 시간!

-Take your wings

and fly up

Let's catch up

to the moon!

'와…'

원곡을 잘 모르던 여성은 그냥 '이쪽이 더 낫다.' 정도의 감상만을 느꼈지만, 그래도 다른 팀보다 훨씬 편곡이 좋다는 것은 확실히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무대가 멋있었다.

마지막 후렴이 나올 즈음에 그녀는 거의 홀린 채로 무대를 향해 등받이에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날아가! 저 끝까지∼

이번에는 박문대와 김래빈이 각각 대형의 끝에서 주고받는 것처럼 후렴을 불렀다.

마치 일체형처럼 움직이는 안무가 파동처럼 보였다.

청보라 레이저 빛 아래에서 검은 점프슈트는 마치 SF 코믹스 캐릭터같은 느낌을 배가시켰다.

그리고 초고음의 마지막 후렴 마디.

-네 세상을 구하리!

"허어어억."

그녀는 육성으로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하얀 핀포인트 조명 속에서 고개를 드는 박문대는 진짜 당장이라도 세상을 구할 것 같았다.

아니, 일단 자신은 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대에서는 마지막 댄스 브레이크와 함께 백 텀블링을 하며 차유진이 튀어나왔다.

허공을 가른 몸은 마치 액션 영화속 시퀀스처럼 무대 바닥으로 착지했다.

툭.

아주 상징적인, 슈퍼히어로 랜딩이었다.

탑 라인 남은 반주 위로, 글리치섞인 안내방송 같은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Thank you for flying Hero Air today…

무대 위의 소년들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한 손 엄지를 들어올린 채, 곡이 끝났다.

그 순간, 그녀는 주변이 엄청난 소음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아아아악!"

"으아아으악!"

무대에 집중하느라 무의식중에 무시했던 온갖 환호와 비명이 귀를 울렸다.

더 신기했던 것은, 그녀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쳤어! 미쳤다!"

아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옆자리 사람도 거의 자리에서 튀어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손에 든 슬로건은 이미 다 구겨진채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탓에 본연의 역할을 전혀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씩 웃는 박문대, 초고음을 쭉 미는 박문대, 뒤로도는 박문대가 끝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동시에 눈앞에서 퇴장하는 박문대의 모습을 한 컷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생각했다.

'투표! 투표를 해야 돼!'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를 확신했다.

'무조건 1위! 무조건 1위다!'

이 팀이 승자였다!

무대가 전부 끝난 뒤, 방청객들이 나간 텅 빈 관객석 앞에서는 곧바로 등수 발표가 시작되었다.

팀마다 일렬로 선 참가자들을 앞에두고, MC는 다음 순위를 발표했다.

"3위는… 태양처럼 타오르는 을 재해석한 '영웅가' 팀입니다!"

"헐?"

"야 말도 안 돼."

MC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