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아현과 큰세진이 촬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뭐라도 먹고 가자고 조르기에 음식점에서 만났다.

"어, 문대 하이∼"

"아, 아안녕…."

그러나 음식을 앞에 두고도 둘 다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한 놈은 사회생활용 리액션 자판기가 됐고, 한 놈은 금방이라도 질질짤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이너스 투표 때문에 이러나.'

가장 상식적인 추측이었다.

그냥 내버려 둘까 하다가, 밥 먹는데 무슨 짓인가 싶어서 한 번 물어봐 줬다.

"투표 걱정돼서 그래?"

"으, 으응?"

"둘 다 표정이 별론데."

그러자 둘이서 반사적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아마 자기 상태가 메롱해서 상대도 기분이 별로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 문대 귀신이네∼ 아니,뭐… 걱정 안 하기가 힘들지. 인터넷을 너무 봤네, 하하."

큰세진이 영혼 없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선아현도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많이 싫어할까 봐…."

어이고.

아무래도 볼 필요 없는 글까지 있는 대로 찾아본 모양이다. 분위기보니 밤새 SNS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자기 이름을 검색한 게 분명했다.

이제 촬영장에 들어가면 누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숫자로 확인하게될 테니, 밥이 목구멍에 잘 안 넘어가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밥은 먹고 들어가야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말했다.

"오디션 프로니까 싫어서 찍는 사람보다 견제해서 찍는 사람이 많지 않겠어? 표가 많이 깎였다는 건 유망해 보인다는 뜻일 수도 있지."

당장 전 팀전만 해도 등수 높은 놈들이 모인 팀이 현장 투표 3위로 끝났지 않은가.

"어지간히 많이 나오는 거 아니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뜻이야."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정신승리할 구석이 있으면 좀 낫겠지.

예상대로 큰세진이 먼저 회복했다.

"그렇긴 하지."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번에는 정말 뭐라도 성과를 내야 하거든. 연습생 기간도 너무 길었고…. 뭐, 아무튼, 잘 먹고 힘내서 가보자!"

놈은 무심코 튀어나오던 말을 얼른 갈무리해 버리고, 전투적으로 식사를 재개했다.

선아현은 여전히 걱정으로 초조한 표정이었지만, '밥은 먹고 가는 게낫지 않냐'는 말에 전투적으로 식사는 했다.

'밥 한 번 먹기 힘드네.'

나도 한숨을 참으며 식사를 재개했다.

후발주자라 좀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인지도도 괜찮고, 편집으로 작살나 본 적 없는 애들까지 이러고 있으니 다른 참가자들은 뻔했다.

'오늘 촬영 분위기 장난 아니겠군.'

그리고 이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탈락 위기 참가자부터 등수 높은 참가자들까지, 모조리 초상집 분위기가 따로 없었다.

'맘에 안 들면 퇴출하세요'

투표가 도입된 후에 인터넷에서 참가자에 대한 비방과 루머가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신난 놈은 차유진뿐이었다. 1위의 자신감은 아니고 그냥 성격문제인것 같다.

"왜 같이 안 갔어요?"

심지어 나한테 와서 광고 보러간 날 썰을 혼자 신나서 풀고 가기까지했다. 정말 대단한 성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이 시작되었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그두 번째 순위 발표식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방송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순위 발표식은 어느 때보다 침체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새롭게 도입된 제도,주식 매도 가 합산된 첫 등수가 오늘 발표됩니다. 얼마나 많은 분이 사고파셨는지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었습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 기도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다 큰 어른들이 애들 데리고 참 못 할 짓 한다 싶다.

"그 전에 지난 팀전 최종 1위를발표해야겠지요? 최종 1위 팀에게는 엄청난 상품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MC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유쾌하게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바로, 주식 매도 무효입니다!"

"… 네?!"

"허 "

순간, 주변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1위를 하신 팀은 주식 매도 를 통한 마이너스 수치가 포함되지 않은 수치로 등수를 평가받게 됩니다!"

리액션은 더 커지지 않고, 오히려 힘없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작게 웅얼거렸다.

"너무해."

확실히, 참가자를 존중한다면 할수 없는 발상이기는 했다. 제작진들 마음대로 혜택을 땠다 붙였다 하는꼴이니까.

'애초에 마이너스 투표도 사전 공지 없이 6화와 함께 때려 버린 놈들인데 뭘 바라겠냐.'

"1위는… 축하합니다! Fingerprint를 재해석한 '기간틱' 팀!"

최원길이 뽑았던 팀이 결국 최종 1위를 가져갔다.

아마도 이번 주식 매도 제도 때문에 탈락이 확실시됐던 최원길에게 구조신호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원길은 울면서 안도했지만, 사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저놈 큰일 났네.'

만일 마이너스 투표 때문에 떨어지게 됐다면 동정여론이 치고 올라올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저렇게 운 좋게 붙어버리면, 다음 팀전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내지 않는 이상은 부정적인 여론이 폭주할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적당한 소감과 함께 1위발표는 마무리되었다.

"그럼 이제부터, 순위 발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합격자 총수는 30명. 지난 순위 발표식처럼 2명을 남겨두고 28위부터 발표되기 시작했다.

"28위, 박준경 참가자입니다!"

사실 20위까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특출나게 표수가 깎인 놈도, 덜깎인 놈도 없었다. 그냥 그 등수에서 붙을 만한 참가자들이 별 반전없이 불렸다.

이변이 나타난 것은 20위 안에서부터였다.

"20위는… 최원길 참가자입니다!"

"와."

"대박."

골드 2보다도 높은 등수였다.

아마도 마이너스 투표를 의식한 팬들이 결집해서 투표를 몰아준 탓에 오히려 올라간 것 같았다.

최원길은 주절주절 긴 소감의 끝에사과를 붙였다.

"…또, 제 성숙하지 못한 태도를 깊이 반성합니다…. 아, 앞으로는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흑."

그리고 울먹거리며 자신의 등수 자리에 앉았다.

'차라리 골드 2 집어서 사과하는게 낫지 않았나?'

뭐, 내가 걱정해 줄 문제는 아니었다. 내 등수나 걱정하도록 하자.

그 후 순위를 요약하자면… 이세진은 폭락했고, 김래빈은 회생에 성공해 6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큰세진 등 최원길의 팀이었던 참가자들은 상승했다. 애초에 상승세였던 분위기에 마이너스 투표를 제하니 등수가 확 오른 것이다.

흐름을 보니 아마 나도 좀 떨어질것 같았다. 그래서 빠르게 불려도 즉각 반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등수가 올랐다.

"4위는… 박문대 참가자입니다!"

이 아수라장에서 기대도 안 한 선방이었다.

5위까지 안 부르기에 설마 28위 아래로 폭락했나 싶었는데, 설마 4위에서 부를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니, 더 당황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한다!"

류청우가 일어나서 다가오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등을 두드린 것이다.

차유진도 다가와서 류청우를 따라하며 축하 인사를 했다.

"축하합니다!"

'가는 길에 대충 아는 척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무대 반응이 워낙 좋다보니 마음의 거리를 마음대로 좁힌 모양이었다.

특히 류청우는 지난 팀전 사람들이다 떨어지는 바람에 별로 친한 참가자가 없는 것도 한 몫한 것 같고.

나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선아현과 하이파이브까지 하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무슨 희대의 인싸라도 된 기분이었다. 굉장히 낯설다.

"…우선, 주식을 사주신 주주님들께 감사합니다. 실력에 비해 과분한 등수인 것을 명심하고, 투자해 주신만큼 성과를 내도록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정석적인 감상이 끝나기 무섭게MC가 치고 들어왔다.

"박문대 참가자, 매번 무대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주주님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있는데요. 혹시 다음으로 써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나요?"

더럽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차라리 애교 좀 부려보라는 게 쉬울 것 같다.

그냥 적당히 포괄적으로 말해버리자.

"…다음은, 좀 유쾌한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하하, POP CON이 슬슬 그리워지는 건가요? 박문대 참가자, 다음 무대 기대 하겠습니다."

유쾌를 팝콘으로 엮어버리는 MC가 있다?

물론 MC를 노려볼 수는 없으니,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올라갔다.

4위에게 주는 화려한 쇼파는 솔직히 민망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허리는 솔직했기에, 나는 한결 편안하게 남은 순위발표를 기다렸다.

"3위는∼ 차유진 참가자입니다!"

"헐 "

"1 위였잖아."

지난 순위 발표식 1위였던 차유진은 2계단 떨어졌다.

그러나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높은 등수 받아서 좋아요'라는 해맑은 소감과 함께 올라와서 소파에 안착했다.

그리고 대망의 1, 2위 결전.

결승전에 올라온 건 류청우와, 선아현이었다.

'쟤 쓰러지는 거 아니냐?'

선아현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단상에 섰다. 1위를 하면 당장에라도 혼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영광의 1위는… 축하합니다! 류청우 참가자입니다!"

"감사합니다!"

1위는 류청우였다. 사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럴 줄 알았다.

국대 출신에 방송 이미지도 호감이니, 마이너스 투표 영향도 별로 안받았겠지.

류청우와 선아현의 소감이 끝난후, 진 빠지는 29위, 30위 참가자발표가 이어졌다. 하도 시간을 끌어서 소파에서도 등이 배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에 나왔다.

"만일 여러분이 주식 매도 제도가 없었더라면, 받게 되었을 등수입니다!"

제작진 놈들이 득표수와 깎인 표수를 다 공개하고 재정렬해서 스크린에 띄워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탄식 소리가 이어졌다.

"못 보겠어."

나도 얼른 '박문대'를 스크린에서찾아냈다.

[매수 : 893,452 / 매도 : 12,257]

[합산등수 : 4위 / 매수등수 : 3위]

3위라고?

원래 내 등수였던 4위를 확인해보니, 선아현이었다.

아무래도 최상위권의 투표수가 유사한 탓에 마이너스 투표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까움보다는 다른 감정이들었다.

'이거 의외로… 꺼림칙하다.'

[매도 : 12,257]

그렇다. 분명 결과가 좋았는데도, '박문대'가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의지의 만 단위 숫자를 보는 것은…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타격감이…'

잠깐!

'개소리 그만하자.'

내 목표는 데뷔해서 돌연사를 피하는 것이다.

X발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해도 모자랄 마당에 90표 중 하나꼴로 싫다는 놈이 나오는 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돌연사를 막아줄 89만 표에 감사나 하자,'

나는 상황을 정의하고 생각을 종료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은 등수가 어떻게 나왔든 간에 '나 미치게 신경 쓰여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팀전 꼴 아주 잘 돌아가겠다.'

벌써 눈물콧물 짜는 애들 몰골이 눈에 선했다.

"잠시 대기하고 계세요!"

제작진들도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 당황한 모양인지, 원래라면 순위 발표식이 끝나자마자 이뤄졌어야 할다음 팀전 촬영이 잠시 중지되었다.

대신 제작진들은 무슨 이상한 미니기획을 들고 나왔다.

아이돌 장기자랑

…급조한 기획답게 촌스럽기 짝이없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36화]

제작진의 설명은 간단했다.

릴렉스도 할 겸 놀면서 상품도 타가라.

즉, 속뜻은 이런 의미였다.

'니들끼리 재롱 좀 떨면서 수학여행 바이브 좀 즐기다가 T1에서 PPL 받은 상품 홍보 겸 좀 받아가라.'

아마 다들 뉘앙스를 짐작했겠지만, 그래도 순위 발표식 직후보다 분위기가 괜찮아졌다.

상품이 괜찮았고 룰이 헐렁했던 것이다.

"등수 없고, 자원으로 진행되는 거에요∼"

"아…."

"일단 나오시면 뽑기로 상품 중에하나 무조건 타가실 수 있어요!"

"…네!"

대답하는 목소리들이 한결 편했다.

손해 볼 것 없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MC가 없으니 좀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점도 한 몫했을 테고 말이지.'

…솔직히 나도 건조기는 솔깃했다.

어차피 원룸이라 둘 곳도 없긴 했지만, 급조한 기획의 상품으로 대형 전자제품이 나올 줄이야.

'프로그램이 엄청 잘되고 있긴 한가 보군.'

상품에 포함된 김치냉장고 사진을보며 그렇게 생각할 때, 스크린에서 상품 사진들이 사라지고 커다란 글자가 떴다.

[장기자랑 : 랜덤 댄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승자!]

'얘네 폰트도 안 만졌네.'

함초롱바탕체가 영롱했다.

내 감상이 어쨌든 간에, 곧 스크린에는 5초 카운트다운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나마 상태가 괜찮던 놈들이 몇 명 달려 나와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시작!]

그리고 유명 KPOP 후렴구들이 쉴새 없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어어억."

"야 너 틀렸어! 들어가야 돼!"

"악, 뭐야."

처음에는 분량 때문인지 기계적으로 참가했던 참가자들이 끝에 가서는 거의 콩트를 찍으며 승자를 가렸다.

그렇게 대충 12곡쯤 지났을 때, 승자가 나왔다.

"아, 감사합니다∼"

큰세진이었다.

"아무도 안 물어보셨지만, 소감 말할게요. 이날을 위해 PR 라이브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하!"

"우우우∼'

PR 때 유사한 컨텐츠를 했던 큰세진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하고, 얼른 뽑기 통에 손을 넣어 쪽지를 뽑았다.

"자, 제 상품은…."

[(진)직화무뼈닭발 1 Box]

"문대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큰세진의 빠른 태세전환에 참가자들이 폭소했다. 스탭들까지 입을 가리고 웃는 통에, 이쪽을 보며 눈을 찡긋거리는 큰세진에게 정색할 각은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 닭발 이미지는 언제까지갈까.'

계속 이렇게 회자되다간 은퇴할 때까지 따라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큰세진이 큰 웃음을 주고 들어간 탓에 분위기가 한층 더 풀렸다.

"다음 거 주세요!"

"이건 내가 타간다, 진짜."

그런 식으로 네댓 번 승부가 더 이루어진 후에는 참가자들 대다수가 장기자랑에 진심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비싼 가전제품 몇 점이 상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장기자랑이 스크린에 떴다.

[장기자랑 : 랜덤 노래방]

[1 절 완창하는 사람이 승자!]

"이건 날 위한 종목이지."

"와, 나 진짜 나가고 싶은데 이미 이겨 버렸네? 어쩌지?"

나는 깐족대는 큰세진을 무시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갔다.

"오∼∼ 문대 자신 있나?"

사실 별 자신은 없었다. 크게 하고싶은 마음도 없었고.

등수가 오른 다음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거만해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방어한 것뿐이다.

…기왕이면 이겨서 건조기 가져가면 더 좋고.

남은 상품이 7가지라 14%는 될테니, 희망을 품어 볼 법한 확률이다.

나는 안면만 있는 네 명의 참가자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끝나길 기다렸다. 제작진이 슬그머니 바닥에 마이크를 두고 갔다.

[시작!]

화면이 바뀌자마자 곧바로 전주가흘렀다.

쿵짝쿵짝 쿵짜라 꿍짝∼

중독성 넘치는 뽕짝 멜로디가 강당을 울렸다.

"…?"

"응?"

KPOP이 나올 줄 알았던 참가자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렇다. 흘러나온 것은 K-트로트 노래방 반주였다.

"어.…."

"잠깐, 잠깐."

참가자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열심히 전주를 들었으나, 도저히 전주만 듣고는 무슨 곡인지 알 수가없었다.

트로트에 신나는 뽕짝 리듬으로 시작하는 전주가 한 두 곡이 아니었기때문이다.

나는 갈등하다가, 슬그머니 앞으로가서 마이크를 주웠다.

"…!"

"문대가 트로트…?"

골드 1의 중얼거림이 여기까지 들렸다.

"그냥 잡은 거 아닐까?"

"형, 그 곡 진짜 알아요?"

나는 수많은 아우성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전주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서울 남대문 거리에 비는 오는데∼ 내가 찾는 사람이 없네∼"

"…!"

참가자들이 수군거렸다.

"헐 "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많이 봐서 안다.

행사 촬영을 몇 번 가다 보면 트로트 가수의 무대를 보는 일도 많았다.

특히 아이돌 무대 직전에 배치되는 경우가 잦아서, 행사 후반에 나올 만큼 어르신들에게 인기 있는 곡들은 나도 제법 많이 들었었다.

이 곡도 원곡 가수의 무대를… 흠, 많이 봤을 때는 하루에 두 번도 봤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가수가 날 알아보고 카메라에 윙크도 날려주더라.

양심상 위튜브에 직캠을 업로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아∼ 내가 찾던 그대는∼ 내가 바란 그대는∼"

제법 유명한 곡이라 후렴구에 들어가자 참가자들이 따라 불렀다. 행사에서 그 가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싶다.

"서울을 떠나 버렸네∼"

"오오."

괜히 분위기를 타서 1절을 열창하고 나니, 참가자들이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건 환호보다는… 마술쇼에서 신기한 장면을 봤을 때의 반응 같았다.

좀 민망했지만, 어쨌든 성공했으니 상품 뽑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몇 번 참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뽑기 통을 잡았다.

뽑은 쪽지를 펼치자 사진에서 언듯 은색 몸체가 보였다.

'설마 건조기…!'

[김치냉장고]

미쳤다.

"야! 김치냉장고!"

"문대 운 무슨 일이야∼!"

"문대가 찾던 그대가 냉장고였던거임."

참가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나를 둘러싸고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쪽지를보다가, 문득 현실을 깨달았다.

'…상품은 세금 떼고 주지 않나?'

세금으로 납부할 돈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품 수령하자마자 중고거래로 팔아서 세금부터 내고, 통장이나 채워놔야겠다.

어쨌든, 비싼 걸 잡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옆에서 축하하던 큰세진이 은근하게 속닥였다.

"문대야 우리 상품 바꿀…."

"안 해."

"넹

닭발이나 먹어라.

마지막 닭싸움을 끝으로 장기자랑이 화려한 막을 내린 뒤, 한결 풀린 분위기로 팀전 촬영이 시작되었다.

MC는 조정된 촬영 스케줄상 진행이 힘들었는지, 놀랍게도 영린이 진행을 맡아 새로운 팀전을 발표했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벌써 3차 팀전입니다. 참가자 여러분, 77명으로 시작해서 30명이 된 지금까지 버틴 스스로를 칭찬해 주시길 바랍니다."

MC의 활기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영린은 차분하고 진중하게 상황을 진행했다.

무엇보다 이미 성공한 아이돌의 말이라 참가자들이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당장 옆에서 골드 2가 히죽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셀프로 쓰다듬고 있었다. 가관이었다.

"이번 3차 팀전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팀원을 짰습니다."

어디 보자, 지금까지는 참가자의 선택에 의해 팀이 구성되었으니, 슬슬 다른 요소가 개입할 타이밍이긴했다.

하지만 그 요소가 좀 특이했다.

"바로 빅데이터 알고리즘입니다."

"… 네?"

"빅 데이터요?"

갑자기 IT 뉴스에서 볼 개념이 등장하자, 참가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린을 쳐다보았다.

영린은 미소 지으며 멘트를 이었다.

" 아이돌 주식회사 는 주주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주식을 사는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주주분께서 동시에 함께 매수하신 주식들을 중심으로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돈 쓰는 시청자가 묶어서 좋아하는 참가자들끼리 팀을 정해줬다는 뜻이었다.

"자세한 분석 데이터는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럼 주주분들의 빅데이터가 선택한 여러분의 팀원들을 만날 준비가 되셨나요?"

"허억."

"너무 신기해."

참가자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과연 누구랑 될 것인지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도 적당히 참가자들을 둘러보았다.

'일단… 선아현, 큰세진은 있을 것같고.'

이 둘은 그냥 SNS만 봐도 알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아현까지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나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큰세진은 한술 더 떠서 내 등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야, 잘 부탁한다."

"어. 그래."

큰세진은 덤덤한 내 대답에 혼자낄낄거리며 폭소했다. 아무래도 놀리려고 말을 걸었던 것 같았다.

"준비가 되신 것 같군요. 그럼 순서대로 나와서 상자를 받아가시면됩니다."

영린의 뒤로 검은 상자가 주르륵 놓인 탁자가 세팅되었다.

"상자 안에는 배지가 들어 있습니다. 상자를 받으신 뒤 복도로 이동하셔서, 그 배지의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 방 안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영린은 가나다순으로 참가자를 불러서 상자를 건네기 시작했다.

당연히 '박문대'는 꽤 초반에 불렸다.

"박문대 참가자. 상자를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박문대'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은상자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도 당연히 카메라를 든 스탭이 대기하고 있었다. 눈치껏 그 앞에서 상자를 개봉하니, 토끼 대가리 모양 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끼?"

나는 약간 황망하게 중얼거리다가, 카메라를 의식하고 얼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복도에 늘어선 방들을 확인했다. 방마다 명패가 달려 있었다.

병아리

고양이

사슴

강아지

그리고 맨 마지막 방에 찾던 이름이 보였다.

토끼

전체적으로… 유치원 교실 같은 네이밍 센스가 돋보였다.

'뭐, 팀만 나누는 거니까.'

유머를 잡을 의도일 것이라 짐작하며, 나는 곧바로 방문을 열었다.

같은 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참가자들이 모두 나보다 늦게 불릴 것이기 때문에 큰 긴장은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이겠지.'

하지만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서는 순간, 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번뜩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

김래빈이 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박문대 형."

김래빈은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서 옆으로 물러났다.

가운데 앉으라는 배려인 것 같았다.

둘밖에 없는데 굳이…?

"또 같은 팀이 될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게. 잘 부탁한다."

" 예."

평온한 대화가 오갔지만,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추리가 오갔다.

'왜 김래빈이 같은 팀이지?'

내가 김래빈과 교류가 있는 장면이 송출된 것은 직전의 7화뿐이었다.

그럼 7화 이후의 득표율이 그놈의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영향을 줄만큼 컸다는 말인가?

'물론 직전 순위 발표식의 주식만 고려했다면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가능성을 가늠해 보다가, 간단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김래빈이 엮인 참가자가 드물어서였군.

어떤 식으로 가중치를 준 건지는모르겠지만, 아마도 김래빈과 연관성이 있는 참가자가 그나마 나와 차유진뿐이라서 내가 있는 팀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뭐, 등수 높은 참가자가 있으면 좋지.'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방바닥에 착석했다. 김래빈이 곧바로 또말을 걸었다.

"형, 방금 장기자랑에서 부르신 곡, 저도 좋아하는 곡입니다."

"…그래?"

김래빈이 트로트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다음 팀원이 들어올 때까지 대충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음 팀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37화]

나 다음으로 토끼 방에 들어온참가자는 선아현이었다.

"…아!"

선아현은 긴장한 얼굴로 방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밝아지더니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이, 이번에는 같이해서 조, 좋네."

"어, 잘 부탁해."

"으응, 여, 열심히 할…."

신나서 바로바로 입을 열던 선아현이 멀뚱히 이쪽을 보던 김래빈과 눈이 마주친 것은 그 시점이었다.

"…!"

선아현은 그제야 김래빈의 존재를 깨달은 건지 화들짝 놀라며 굳었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접점이 없군.'

등급도 다르고 팀전에서 만난 적도 없으니까 말이다.

선아현은 황급히 나와 김래빈을 번갈아 보더니 침을 삼키며 김래빈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 자, 자잘 부탁드립니다…."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아니 저야말로…."

김래빈도 진지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선아현도 얼른 고개를 바닥을 항해 박았다.

어딘지 인터넷 유머에서나 봤던 것같은 기묘한 풍경이었다.

'이 둘만 두면 대화가 진행이 안되겠군.'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김래빈과 선아현의 인사 배틀을 관람하고 있자니 네 번째 팀원이 방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왔다.

"토끼 누구야?!"

큰세진이었다. 한 손으로 토끼 모양 배지를 흔드는 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방 컨셉에 완전히 심취한 모양이었다.

큰세진은 선아현과 김래빈을 재빠르게 확인했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폭소했다.

또 왜.

"뭐야, 문대 왜 여기 있어?"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큰세진이 느물느물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강아지 방이 있어서 당연히 거기 있을 줄 알았지. 이번에 같이 못 하나 했다?"

티벳 여우 인터뷰로도 모자랐나. 강아지 이미지야 구성상 챙겨가려고 했던 거지만, 현타는 별개의 문제라 이놈을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다.

큰세진은 눈치 빠르게도 슬그머니 사람들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같이하면 좋은 거 아니냐∼ 우리 이번에도 팀원이 좋다! 잘해보자! 이제 한 명 남았나?"

명패 달린 방문은 총 6개였다. 현재 30명의 참가자가 생존 중인 것을 고려하면 방당 5명이 배정될 확률이 극히 높았다.

'그럼 지금까지 온 게 4명이니, 한명 남은 것이 맞지.'

근데 누가 올지 모르겠다.

'일단 순위나, 포지션은 이대로도다 잡은 상태다.'

겹치는 이미지 없이 골고루 팀원이 잡힌 데다가 순위도 상위권, 실력들도 다 괜찮았다.

편곡은 김래빈이 할 테고, 리더 롤은 어차피 큰세진이 냉큼 주워갈 것같으니 그것도 됐다. 올라운더인 선아현이 있어서 무대구성도 편했다.

사실 이대로 4명이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트롤러만 안 오면 된다.'

최원길을 포함해서 몇몇 정도 거를 타선이 생각났다. 그놈들만 아니면 사실 누가 와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팀원이 순탄하게 구성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상황을 가늠해봤다.

'여기서… 이세진까지는 커버 가능하다.'

비협조적이라 그렇지, 이득 보려고 남에게 폭탄 돌리는 스타일은 아니니 살살 구슬리면 됐다.

그래도 이번 순위 발표식에서 멘탈이 터졌을 가능성도 있으니 기왕이면 같이 안 하는 게 좋았다.

그럼 마지막 조원 희망편이라면… 음, 가나다 순서상 이미 매진된 놈 빼면 남는 게 하나군.

'골드 1이 제일 편하지.'

가능성 측면에서도 가장 높은 참가자를 떠올리고 있을 때 큰세진이 히죽 웃으며 제안했다.

"우리 문 뒤에 숨어 있는 건 어떨까요? 마지막인데 아주 열과 성을 다해서 한번 환영해 주면 좋잖아요."

뻔한 발상이었지만, 마지막 팀원의 리액션이 괜찮다면 방송에 잘 나올 장난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다가 최원길 들어오면 분위기 이상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인데, 이미 다른셋이 조르르 문 뒤로 가서 그냥 포기했다.

여기서 말려봤자 카메라 앞에서 나만 그림 이상해지겠지.

그렇게 문 뒤에서 팀원들이 작게 숙덕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있자니, 벽에 붙어있던 큰세진이 작게 소리쳤다.

"왔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서 입술에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야 어차피 입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다물고 있어 줬다.

곧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 엥?"

"짜잔!"

시간 차를 두고 문 뒤에서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갸아아악!"

방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던 참가자가 하늘로 펄쩍 뛰어오르며 몸개그를 했다. 예상보다 새가슴이다.

'방송 분량 축하한다.'

희한한 비명과 함께 나뒹구는 마지막 팀원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형!"

예상 안이던 골드 1이 합류했다.

'…괜찮네.'

나는 처음으로, 팀원 구성을 보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우리 토끼반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

짝짝짝. 누구 하나 뚱한 표정 없이 상식적인 리액션으로 토의가 시작됐다.

대학생활을 포함해도 내가 겪어봤던 팀플 중 분위기가 역대급으로 화기 애애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으니 욕설도 없고 딴짓하는 놈도 없다.

'진짜 유치원 같군.'

물론 모든 팀이 토끼 반 처럼 조별과제 희망편인 건 아니었다.

가령 등수 구간이 몰려서 하위권만 묶인 두세 팀은 이미 반쯤 포기한 분위기였다.

"아…."

"음, 잘해봅시다…."

"…이렇게 됐네."

하지만, 의외로 절망편은 최상위 연습생들이 모인 다른 팀에서 나왔다. 최원길, 이세진이 류청우와 차유진의 팀에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김래빈의 멱살을 잡았던 트롤러까지 그 팀이었다.

몇몇 참가자들이 숙덕거렸다.

"저렇게 묶일 수도 있어?"

"조합 신기하다."

류청우의 위장이 살살 녹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걸.

'안됐지만, 내 입장엔 오히려 좋다.'

저쪽이 편집 어그로를 다 끌어가주면 편할 테니까.

내가 짧게 결론을 내리고 있을 무렵, 큰세진이 토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자자, 그럼 얼른 곡부터 이야기 해봅시다! 하고 싶은 곡 있는 분?"

다수의 팀원이 눈을 빛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심지어 선아현도 슬그머니 드는 것이, 다들 어지간히 신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자유 선곡 팀전'이 나왔으니까.

방금 들은 MC의 발표를 떠올려봤다.

'여러분은 각자의 팀에 어울리는 곡, 안무, 컨셉까지 모든 디테일을 원하시는 대로 골라 무대를 만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름하여 자체제작 무대!'

제작진이 또 날로 먹어보겠다는 말이었다.

'지난 시즌에는 그나마 미니게임으로 뭘 따가게 해줬던 것 같은데.'

제작진 측에서 의상과 무대장치를 포함한 컨셉을 미리 열 패턴쯤 준비해뒀다는 뜻이다. 참가자들이 그중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그런 것도없이 생짜 알아서 짜오라는 식이다.

아마 이번 시즌 기획 시점에는 예산 부족 때문에 미리 짜놓는 게 감당이 안 됐던 모양이다.

그나마 프로가 흥하면서 추가 예산을 많이 따왔는지, 지금은 이 컨텐츠에 예산 제약이 거의 없다는 점 하나는 장점이었다.

'그래서 이놈들이 다 들뜬 거겠지.'

나는 다른 팀원들의 의견을 하나씩 경청해 줬다.

시계 방향으로 발언 순서가 정해지며, 먼저 발언권을 얻은 선아현이 작게 외쳤다.

"기, 기다림이 좋아 는 어떨까…!"

기다림이 좋아. 특징은 고음과뮤지컬 같은 구성의 안무.

청량하고 세련된 하이틴 감성이 타겟층에 제대로 적중했었다.

현시점에서 5년 전에 발표된 9인조 남자 아이돌의 곡으로, 해당 그룹에게 첫 1 등의 영광을 안겨줬었다.

그동안의 행적을 돌아볼 때, 대놓고 선아현이 좋아할 법한 곡이었다.

"오, 첫 후보부터 명곡 좋네."

"맞아. 우리 다들 막 그런 청춘! 청량! 컨셉은 보여준 적 없기도 하고."

나도 한마디 보탰다.

"괜찮네."

"으, 으응!"

선아현은 화색이 된 채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대로 선정되지 못해도 긍정 리액션만으로도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대체 어떻게 살면 저 얼굴로 저러냐.'

좀 안쓰럽게 황당했다.

"다음은 래빈이!"

"멤버 구성을 고려했을 때, VTIC 선배님들의 혼(Hone)이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준비한 것처럼 멘트가 쏟아져 나왔다.

"동양적인 사운드 샘플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컨셉이 특징적이고, 음역대도 적절합니다. 안무 난이도가 있는 곡이라 퍼포먼스 요소를 보여주기 쉽고, 댄스 브레이크 간주를 넣기 용이하고요. 편곡도 하루 내로 초안 잡아 올 수 있습니다!"

"으응…."

'정말 하고 싶은가 보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른 팀원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박자 느리게 호응했다.

김래빈은 아차 싶었는지 그제야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을 붙였다.

"저, 물론… 다른 좋은 의견이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오키오키, 래빈이가 고른 곡도 좋았는데, 일단 다른 의견도 천천히 들어보자∼"

큰세진이 쓱 넘겼다.

'하지만 편곡할 놈의 의견은 좀 자세히 들어두는 편이 나을 텐데.'

아무래도 큰세진 본인도 밀고 싶은 곡이 있는지, 굳이 김래빈의 더 말을 받아주진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좀 챙겨갈까.'

나는 입을 뗐다.

"말한 것 중에 어떤 요소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예? …아, 그, 특정한 요소가 마음에 든다기보단, 과제에 두루두루 가장 적합한 점을 고려했습니다."

전체적인 무대 완성도에 초점을 뒀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참고해야 할 관점이네."

"맞아. 나 깜짝 놀랐잖아."

"래빈이는 다 계획이 있구나!"

"…감사합니다."

팀원들이 칭찬을 붙이자 김래빈이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어색해하는 김래빈을 훈훈하게 지켜보는 분위기가 짧게 조성된 뒤, 큰세진이 마지막으로 의견을 냈다.

"이제 때가 됐다."

"여기까지 왔는데, 섹시 컨셉을 할때가 됐다…!"

"세, 세, 섹시…."

"으아악!"

"어어우…."

오글거린다며 몸서리치는 반응이 따라왔다. 큰세진은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하! 솔직히 부정 못 한다? 못하지?"

대놓고 뻔뻔하게 말해서 얄밉지만….

'…일리 있는 말인데.'

괜찮은 발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없었다.

'제대로 소화하기만 하면 이것보다 강한 컨셉도 없지.'

세련된 수준으로 수위를 지키면서 멋지게 보일 수 있다면야, 섹시 컨셉은 전통적으로 증명된 성공 루트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큰세진에게 물었다.

"어떤 곡으로 하고 싶은데?"

"어? 역시 문대가 안목이 있어. 난사실 곡은 특별히 하나 딱 밀고 싶지는 않고, 여러 곡 비교하면서 이… 섹시 컨셉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줄 곡을 상의해서 정하고 싶은데, 어때?"

괜찮았다.

하지만 다른 둘의 의견도 괜찮았지.

나는 고개를 돌려서, 아직 발언하지 않은 골드 1을 쳐다보았다.

골드 1은 하얗게 불탄 모습이었다.

"나는… 모르겠다. 난 그냥 토끼나 좀 살려보자고 하려고 했어…. 근데 다들… 아주 확실한 비전이… 있구나?"

다른 의견들이 너무 확고해서 전투력을 상실한 것 같았다. 그럴 만도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 문대는… 어, 어떤 걸 하고싶어?"

"나? 특별히 정해둔 건 없는데."

선아현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자, 큰세진이 눈을 빛냈다.

"오, 그럼 문대의 선택을 듣고 싶다! 우리 의견 중에 뭐가 제일 좋아?"

큰세진의 말에 나머지 팀원들의 시선이 꽂혔다.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무시할 순 없는 상황이긴 하다.

'뭐가 제일 좋냐'라.

나는 생각에 잠겼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38화]

"일단… 기다림이 좋아 하고 싶은데."

"…II"

선아현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설마 내가 본인의 선곡에 동조해줄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예상 못했다는 태도다.

"저, 저, 정말?"

"그래."

기다림이 좋아 가 좋은 곡인 것도 맞고, 5년 전 곡이라는 점에 가산점이 들어갔다.

김래빈이 말한 혼 은 재작년 곡이었다.

'첫 번째 팀전 때도 생각했지만, VTIC 최신곡은 부담스럽다.

'김래빈 본인은 자신 있어 보였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편곡을 주도할 김래빈의 의견을 아예 반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놈의 특성, 마에스트로 를 활용하려면 뭐라도 취향에 맞는 키워드를 던져줘야 했다.

마침 선아현의 기뻐 죽겠단 표정 과반대로, 김래빈은 약간 침울한 표정이었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나 보다.

"하지만 '자체 제작'이 이번 팀전주제니까, 원곡을 그대로 쓰기는 힘들지."

"아…."

"그러니까 좀 파격적인 편곡이 들어가면 좋겠어. 개인적으로 아까 래빈이가 의견 낸 것 중에 '동양풍'이 좋아 보이는데."

"그건,"

김래빈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해졌다가, 곧바로 반색했다.

"확실히, 가사도 어색하지 않고…. 악기만 잘 고르면 굉장히 재밌는 편곡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무도 편곡에 맞춰서 수정하면 아주 인상적인 무대 장면도 가능할 겁니다."

"다행이네."

일단 이걸로 김래빈은 넘어갔다.

그럼 남은 건 큰세진과 골드 1인가.

고개를 돌려 둘을 훑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큰세진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럼 섹시한 동양풍으로 편곡하는건?"

"어차피 동양풍으로 가도 그 안에서 어떤 분위기를 쓸 건지 정해야 하잖아요. 기왕이면 임팩트 있게 섹시 쓰자, 이 말입니다!"

틀린 말은 없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겠군…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에 '섹시 컨셉'을 못 쓸 의견은 없었으니, 아마 내가 무슨 대답을 해도 이렇게 엮을 작정이었을 것이다.

'적당히 웃기게, 거절하기도 난감하게 잘 말하는군.'

아니나 다를까, 골드 1이 장난스럽게 탄식했다.

"너어는 정말 대단한 놈이다, 진짜…."

사실상 그러자는 뜻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표정으로 보니 이미 넘어갔다.

"하하, 제가 좀?"

큰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걸로 선곡에 팀원 넷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남은 한 놈도 챙겨가자.'

훈훈하고 민주적인 팀 분위기 싫어할 시청자는 드물었다. 나는 덤덤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토끼도 쓸까요."

"엥?"

골드 1이 손사래를 쳤다.

"아, 내가 말한 거? 괜찮아. 그냥 해본 말이야."

"아뇨.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토끼가?"

"예.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토끼 있잖아요."

다른 팀원들은 각자 나름대로 이야기를 떠올린 것 같았다.

"벼, 별주부전?"

"그… 토끼와 거북이 달리기 하는게 우리나라 이야기던가?"

"그건 이솝우화입니다."

수군대는 팀원들 사이에서 큰세진만 씩 웃었다. 눈치 빠른 놈.

"달토끼?"

"달토끼. 맞아."

달에서 방아로 떡을 만든다는 옛날 이야기 속 토끼였다. 일명 옥토끼.

계수나무 밑에 있다는 가사의 동요로도 유명하다.

"…걔를 무슨 수로 섹시하게 만들어?"

동심 파괴 아니냐며 골드 1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무슨플레이보이 잡지식 토끼라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이 키워드가 마음에 들었는지, 벌써부터 눈을 번쩍번쩍하며 정정했다. 입 열 필요가 없으니 솔직히 편했다.

"그대로 쓰지 않고 모티브만 따서 재구성하면 될 것 같습니다. 환상의 동물이라는 이미지를 잘 살릴 수 있다면 매력적인 컨셉입니다."

"어, 그러려나? 물론, 나야 내 의견 써주면 좋지만."

골드 1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세진이 곧바로 상황을 정리했다.

"음∼ 저도 마음에 듭니다! 그럼 우리 일단 거수로 결정할까요?"

주변의 몇 팀은 벌써 곡을 정해서 제작진에게 알리는 중이다.

시간상 슬슬 우리 팀도 선곡 결론을 내리고 세부사항으로 넘어갈 타이밍이긴 했다.

"이번 무대, 기다림이 좋아 를 달토끼를 곁들인 섹시한 동양풍 컨셉으로 재해석하자는 의견에 찬성하시는 분, 손들어주시죠!"

곧바로 전원의 손이 올라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본인도 손을 든 큰세진이 웃었다.

"크, 진짜 민주적이었다∼ 우리 의견이 다 반영되었네요. 열심히 해봅시다!"

"넵!"

"예이-"

그렇게 토의는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기애애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때였다.

"싫다니까!"

저 옆의 다른 팀에서 누군가 소리지르며 일어났다.

마침 시야에 얼굴이 걸렸다. 이세진이다.

"뭐야?"

"어…."

"싸우나?"

주변에서 참가자들이 작게 속닥거렸다.

하지만 다들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 편집의 희생양이 되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이세진은 맞은편의 참가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최원길과 풀 죽은 표정의 차유진이 보였다.

하지만 대치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어난 이세진은 이를 악문 채로, 촬영장에서 뒤돌아 뛰어나갔다.

"헐. 쟤네…."

다행히 류청우가 곧바로 침착함을 되찾고 이세진을 따라 나갔다.

"너희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세진아? 이세진!"

한 카메라가 황급히 류청우에게 따라붙었다.

와 저기는 정말… 텄네.

뇌 맑은 차유진까지 말려든 정도면 분위기가 알만했다.

"허이고…."

골드 1이 짧게 탄식 소리를 냈다.

김래빈은 지난 팀전의 트라우마가 도지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누구도 굳이 저 팀에 다가가서 위로나 질문을 할 만큼 눈치없진 않았다.

촬영이 몇 주째인데,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 하는 참가자는 없던 것이다.

'오지랖은 방송용 제물이지.'

그래서 이 토끼 반 은 얼른 제작진에게 선곡 보고를 끝마치고 연습실로 이동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토끼 반 이 숙소로 복귀한 것은 자정을 한참 넘은 시간이었다.

모두가 시든 콩나물 같은 꼴이었다.

"침실 좋다…."

큰세진이 죽는 소리를 내며 침대로 엎어졌다.

열흘 동안 편곡에 안무 수정에 무대 컨셉까지 알아서 하라는 돌아버린 스케줄을 견디지 못하고 K.O 당한 모습이다.

"씨, 씻고 올…."

선아현은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편곡 진행에 맞춰서 안무를 계속 재창작하는 내내 극도의 긴장 상태더니, 결국 정신력이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골드 1은 뭐라도 먹어야겠다며 흐느적흐느적 다른 방으로 갔다. 골드 2의 컵라면을 얻어먹을 생각인 것 같은데, 뭐 알아서 하겠지.

"…먼저 샤워기 좀 이용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김래빈은 선아현을 몇 번 부르다가, 대답이 없자 내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 방에서 제정신인 건 나만 남게 되었다.

아, 나는 왜 비교적 멀쩡하냐고?

당연히 상태창빨이다. 나는 상태창 하단에 떠 있을 새로운 특성을 떠올렸다.

[특성 : 바쿠스500(B)]

-맑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

:모든 피로 누적 속도 - 50%

지난번 팀전 무대가 방영된 뒤, '명성 업적' 다음 단계 보상으로 뽑은 특성이었다.

[명성의 무르익음!]

500,000명의 사람들이 당신의 존재를 기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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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실감 나지 않는 수치다.

50만 명?

대체 프로그램이 얼마나 떴으면 일개 참가자를 50만 명 이상이 기억한단 말인가. 아무리 상위권 참가자라도 놀라운 숫자였다.

속도로 봐서는 100만 명도 금방 돌파할 것 같다는 점이 약간 섬뜩하기까지 했다.

'100만 명이 나를… 아니, '박문대'를 기억하게 되는 건가.'

이럴 때는 차라리 남의 몸인 게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어쨌든, 50만 명 단위의 명성 업적뽑기는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얻었던 것 중에 서바이벌 환경에서 제일 유용했다.

폐활량이 당장 늘어나거나 근력이 붙은 건 아니었으나, 바쁘고 체력소모가 큰 날이 확실히 수월해졌다.

'이렇게 빡세게 달렸는데도 생각을 정리할 여유가 남아 있으니 말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피곤하고 나른하긴 했다.

'김래빈 나오면 바로 씻고 자야겠군.'

그때, 방문에서 소리가 났다.

똑똑.

골드 1인가? 하지만 그놈이면 굳이 노크 같은 걸 하고 들어올 리가없었다.

'스탭이면 벌써 본인이 누군지 이야기했을 테고.'

짐작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똑똑똑똑!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됐다. 그러나 방문 안 팀원들은 전멸상태다.

'…귀찮게 됐군.'

나는 한숨을 쉬고 일어나서 방문을열었다.

밖에는 차유진이 서 있었다.

여기까지야 좀 의외긴 하지만 납득할 만했다. 같은 소속사 출신인 김래빈이라도 만나러 왔나 보다 할 테니까.

문제는 질질 짜고 있었다는 점이 차유진은 눈물 콧물 다 빼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건 왜 여기 와서 우냐?'

굉장히 당혹스럽다.

숙소 복도와 방 안에도 고정캠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놈이 울면서 여기 온 것도 다 잡혔을 텐데, 대체 방송에 어떻게 나올지 감도 안 왔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왜 굳이 여기로 기어 들어왔단 말인가.

'류청우하고 상담하는 게 상식적이지 않나?'

류청우 성격이면 벌써 잘 다독였을것이다. 왜 다른 팀에 와서 분란의 소지를 만든단 말인가.

'하기야, 그 방면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 같지는 않다…'

나는 짧은 침묵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래빈이 보러왔어?"

"크흥, 형하고 김래빈이 만나려고요,"

차유진은 불명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왜?'

별 친분을 쌓았던 것 같지는 않다만… 뭐, 어지간히 지난 팀전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어쨌든 결과가 좋았고 과정도(차유진의 입장에서야)별 고민 없이 재밌었을 법도 하지.

'이번 팀전의 지옥을 맛보고 나니 새삼 그리워졌나 보군.'

아무튼 여기서 돌려보내면 방송에 어떤 그림으로 나오든 긍정적으로 편집해주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들어와. 래빈이는 씻고 있어."

"네…."

차유진은 계속 훌쩍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서는 다른 팀원들이 죽은 듯이 숙면 중이다. 이 정도 소음으로는 절대 깨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에 굳이 소리를 낮추지는 않았다.

일단 근처 탁자 앞에 앉혔다.

'뭐라도 쥐어줘야 하나.'

나는 심란하게 차유진의 몰골을 보다가, 가방에서 초코바를 몇 개 꺼내서 쥐여줬다.

단 거라도 들어가면 좀 낫겠지.

"고맙븝니다…."

차유진은 다 뭉개진 발음으로 초코바를 받아다가 입에 물었다.

우물우물 초콜릿 씹는 소리만 방에 울렸다. 나는 심란해졌다.

'이걸… X발 뭐라도 물어봐야 하나?'

괜히 물어봤다가 남의 팀 사정에 끼어들어야 하면 그것만큼 끔찍한 사태도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입 다물고 김래빈하고 떠들게 놔둬도 문제다.

'김래빈도 그렇게 사회성이 출중한 부류는 아니다.'

혹시라도 이 상황이 무슨 사태로 번질지 몰랐다. 중간에 거처 간 나한테까지 화살이 돌아오면 곤란했다.

결국, 나는 지뢰 제거하는 기분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39화]

"힘든 일 있어?"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물었다. 제발 듣는 놈도 적당히 답변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차유진은 초코바를 입에 물고, 더 서럽게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돌겠네….

예체능 분야라 다들 감수성이 예민한지, 아니면 서바이벌이 살벌하게 고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우는 놈들을 너무 많이 보는 것 같다.

"다들 싸워요…. 말하면 무, 무섭습니다, 크흥."

"…음 "

차유진은 완전히 기가 죽은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의 해맑은 아무 말 폭격기는 자취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 팀 진짜 하루 만에 개판 났나 본데?

' 강아지 방 이라더니 이름 따라가나.'

저놈들, 이대로 방영되면 방 이름이랑 엮어서 조롱당할 미래가 선했다.

그렇다고 '박문대'가 차유진에게 무슨 조언을 하기도 웃긴 일이었다.

뭘 말해도 한 치만 혀 잘못 놀리면 '박문대 나만 싸해?' 같은 게시물 폭격을 맞고 인터넷 여론이 떡락하기 딱 좋다. 다른 팀이니까.

'대충 진정되면 보내야겠군.'

나는 그냥 진지하게 다른 소리를 했다.

"초코바 더 줄까?"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가방에서 초코바를 한 움큼 더 꺼내서 쥐여줬다.

'…많이 챙겨오길 잘했네.'

아직 큰 거 한 봉지가 더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아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가는 산통 다 깨지.

그렇게 화장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배경으로 초코바 우물거리는 차유진과 잠시간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유진은 양손에 초코바를 쥔 채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함니다."

좀 진정됐는지 돌아갈 생각인 것같았다. 자세한 사정을 줄줄 읊지 않아서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마음에 없지만 상황에 맞는 소리한 번만 해주자.

"래빈이 안 보고 가도 괜찮겠어?"

"네…. 괜찮겠습니다."

"그래."

차유진은 눈물을 그치고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아까보다 약간은 더 씩씩해 보였다.

'저거 슈가 하이 아닌가.'

당 떨어지면 또 울면서 배회하는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이 폭탄을 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는 차유진을 잠시 지켜보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빠 죽겠는데 곳곳에 지뢰까지있냐.'

이제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방송에서 꼬투리 잡힐 일 없게 더 조심해야 했다. 한번 폭락하면 반등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문제는 내가 조심한다고 모든 상황을 제어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냥, 튀지만 말자…. 이대로 가기만 해도 최종까진 간다.'

나는 다시 한번 되새기며 침대에 뻗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들었다.

씻지도 못한 채로 잤다는 것을 깨달은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참가자들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의 기획과 창작에 고통받으며 무대 준비에 매달릴 무렵.

촬영장 밖에서는 재상장! 아이돌주식회사 8화가 방영되었다.

-헐

-쟤가 왜?

-대박ㅋㅋ

-?

상위권으로 갈수록 의외의 순위가 난무하며 실시간 시청자 반응은 경악을 오갔지만, 가장 반응이 격했던것은 지난 팀전 우승 보상이었다.

[마이너스 투표 무효]

'얼마나 미움받고 있는지'를 반영하겠다는 잔인한 투표방식을 일부만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을 격분하게 했다.

-ㅋㅋ 크통수 오졌다

-이딴 프로그램에 돈 쓴 내가 병신이었네

-우승팀에 제작진에서 미는 참가자 있다 백프로ㅋㅋㅋ 이걸 얘네만 쏙 피하게 해준다고?

아이러니한 점은, 이 분노가 제도를 만들고 우승 보상을 기획한 제작진보다도 참가자를 향했다는 점이다.

이 보상의 최대 수혜자로, 원래 탈락 등수였다가 붙은 최원길은 물론 가루가 되도록 여론의 뭇매를 맞고있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분노는 거기서끝나지 않았다.

우승팀의 참가자 중 순위가 크게 상승한 참가자들의 여론까지 일시적으로 크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헐 선아현이 차유진 밀었다 2위…

-쟤는 또 울어? 지겹게 즙 짜네

-표 안 깎여서 좋겠어 우리 애는 밀리고도 고맙다고 웃는데 말더듬이쉑 떡상해놓고 얼굴 죽상인 게 더꼴 보기 싫어ㅠㅠ

-우욱. 선아현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게 2위ㅋㅋㅋㅋ 데뷔해서 소감도 어버버 거릴 장애인한테 동정표 주는 얼빠들 정신차리세요ㅋㅋ

└댓글 미쳤나;; 최소한 선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ㅋㅋㅋㅋ말더듬이 빠순이 어서 오고

└너희 진짜 상상 이상이다, 역겨워.

└반박 못하니 욕부터 박네ㅋㅋ 서, 서, 설마 정당한 2위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ㅋㅋ

그동안 최소한의 도덕을 의식하여 표면에 나오지 않았던 원색적인 비난까지 댓글에 등장했다.

경악하거나 말리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본래 머릿수가 비슷하면 공격적인 여론에 순간적으로 힘이 실리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 반동으로, 마이너스 투표와 우승팀 보상 때문에 등수가 밀리고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 참가자들에게는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얘들아 고생했다ㅠㅠ

-원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법입니다. 표 깎는 이상한 루저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응원합니다^^

-아쉬웠을 텐데 씩씩한 모습 보여줘서 고마워

덕분에 보정 전 등수가 더 높았던 박문대는 등수가 상승하고도 운 좋게 어마어마한 비난 여론은 피해갔다.

대신 팬층에 약간 변화가 생겼다.

1차 팀전에서 문대의 팀을 묶어서 좋아하던 사람들이 비난 여론에 위축되면서, 2차 팀전에서의 박문대의 모습을 더 선호하는 팬들이 대세를 잡은 것이다.

-문대야 4위 축하해 고생 많았다ㅠㅠ (2차 팀원들에게 죽하받는 영상)

-'형 뭐해요?' 삼 연발에 문대 표정ㅋㅋㅋㅋ '왜 고양이가 강아지한테 이러지…?' (차유진과의 자투리영상 캡처본) (고양이와 강아지 유머 사진)

-문대가 이번에 애들 치댐에 못이겨서 반강제로 인싸가 된 게 너무웃김ㅋㅋㅋ

-여기 구석 보면 문댕댕 간식 나눠주고 있음ㅠㅠㅠ 아악 천사… 천사댕댕…(짧은 동영상)

그동안 관계성 강한 참가자 그룹이 없던 다른 두 참가자의 팬들도 신이나서 은근슬쩍 그 흐름에 끼어들었다.

차유진과 김래빈의 팬들이었다.

-문댕댕 김래빗 차고영, 강아지 토끼 고양이라니 완전 가슴 두근거리는 조합 아닙니까. 한 번만 잡숴 보셔 츄라이 츄라이(사진)

-우리 애들 나 같은 찐따가 길에서 말 걸면 무시할 것처럼 생겨서는 맬렁맬렁 귀요미라는 점이 너무 귀엽다ㅠㅠ(방송분량 보정 동영상)

-애니멀 히어로즈 출동!(팬아트)

여기서 가끔 류청우를 끼워 넣은 조합까지 SNS에 넘쳐났다.

2차 팀전 방영으로 새롭게 프로그램에 빠져든 사람과, 참가자에게 분노와 견제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섞이며 분위기 과열은 더 심해졌다.

불지옥과 온돌방을 넘나드는 이 과몰입 때문에 인터넷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었다.

프로그램이 극한의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기에 더 심했다.

연예계 관련 커뮤니티를 넘어서, 이제는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여다보아도 아주사 에 대한 글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글마다 앓는 사람과 싸우는 사람이 바글바글 붙었다.

[요즘 잘나간다는 서바이벌 프로 참가자]

: (사진) 차유진이라는 참가자인데, 요새 여자들은 이런 기생오래비 같은 애를 좋아합니까? 쩝… 말세네요

-안광이… 쏘다니는 살쾡이 같은게… 복없는… 인상입니다…

-아재 추합니다ㅋㅋ

-왜요 잘생긴 청년이구만^^ 우리 딸이 좋아라 합니다.

-이 프로가 요새 어린 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더군요∼ 노래 참 잘하는 친구도 있던데, 나중에 결승 가면 한 표 줄라고 합니다∼

└박문대 말이군요ㅋ 좀 싹바가지 없어 보이지만… 원래 가수가 노래를 잘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ㅋ

-정신 차리세요 늙어서 안목까지없으면 어쩝니까? 차유진군 아주 똘똘합니다 양궁하던 청년도 아주 괜찮아요 저는 이 둘 응원합니다

└아줌마야말로 정신차리쇼 딴따라에 빠져서 말뽄새가 그게 뭡니까

이렇게 댓글에 불이 붙으면, 누군가 SNS 등지로 캡처해 가서 또 그글에서 싸움이 붙는 일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났다.

[아주사 라떼 커뮤니티 반응.jpg]

:(캡쳐)ㅋㅋㅋ 극딜 당하는 아재와 호통치는 꼰대의 대환장 콜라보ㅋㅋㅋ

-ㅋㅋㅋㅋ차유진 슈스네 내 동년배들 다 차유진 키 180 거대 아기고영 사진 저장했다∼

-여기서도 언급 없는 선아현이 2위라니 어이가 없네 진짜…

└이 글이 네티즌 대표글도 아닌데 왜 생각이 그렇게 흘러;;

└ㅋㅋ선아현은 비판만 해도 빠들이 천하의 개새끼로 몰아가니 그냥 언급을 말아야함ㅇㅇ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잖아 선아현이 뭘 잘못했는데?

└이거 봐 또 급발진ㅋㅋㅋㅋ

그리고 하필 이 타이밍에, 참가자들은 실시간으로 이 파란만장한 인터넷 여론을 접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살았다.'

운 좋게 큰 비난 여론을 피해 갔고, 반동이 올 만큼 적극적으로 치켜세워지고 있지도 않으니 딱 좋은상태였다.

심지어 갈아탈까 고민하던 상위권 참가자들과 은근슬쩍 그룹으로 묶였다.

그러나 안도감 이상으로 보람이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엄지로 화면을 문질렀다. 사이드에 스크롤이 생기며 온갖 욕 댓글이 위로 쓸려갔다.

'어쩐지 좀… 씁쓸하군.'

까놓고 말해서 지금 욕 들어 먹는 참가자 중에 최원길을 빼면 그렇게 인성 터진 놈도 없다.

대부분은 그냥 열심히 하는 어린애들인데 이렇게까지 두들겨 맞아야하나.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솔직히 다른 놈들이 떡락하면 반사이익을 볼 테니 생존에 이득이 부분인데도영 뒷맛이 나쁘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

-자료탐색용 기기 배부하겠습니다∼

이번 팀전이 자체제작이라, 구체적인 컨셉용 자료탐색을 위해 스마트폰 기기를 잠시 돌려준 것이다.

본래 촬영 중에는 스마트폰 소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 덕에 참가자들이 바깥 여론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었는데, 이번 팀전에서는 그 룰이 깨진 것이다.

게다가 프로그램이 너무 잘나가는 탓에 인터넷 접속만 하면 관련 글을 피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자기 글을 다 살펴본 상태.

숙소 침실은 각자 말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팀원들로 적막했다.

아마 다른 방도 비슷하겠지.

게다가 하필이면 이 팀에는 지금 인터넷에서 집중포화를 받는 참가자가 있다.

선아현.

'얘 우는 거 아닌가?'

이층침대 밑 칸에 있을 선아현의 몰골을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식은땀이 다 난다.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이거 설마 멘탈 나가서 특성이 도로 비활성화되는 거 아니냐…?'

선아현의 '근성' 특성이 도로 비활성화되면 '자아존중감 결핍' 상태이상이 도로 살아날 것이다.

그럼 전체 능력치가 두 단계씩 떨어지는 미친 패널티를 먹은 선아현이 과연 무대를 제대로 소화할 수있을까?

무대 완성도와 팀전 편집이 둘 다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지 팀원 운이 좋더라니.'

팀전 하나라도 편하게 가는 날이없다.

'일단 상태는 확인해 봐야겠군.'

"선아현."

나는 침대 밖으로 얼굴을 빼서 아래로 숙였다.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선아현이 고개를 돌렸다.

"으, 응!"

"…?"

얘 왜 멀쩡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