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당황했다.

선아현 성격상 줄줄 울면서 구석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얼굴에서 평정심이 보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군기가 들어간 것 같다.

심지어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선아현은 내가 불러놓고 말이 없자, 오히려 그때야 겁먹은 얼굴이되어서 되물었다.

"왜, 왜…?"

"아니, 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나는 말을 흐리고, 대신 가방에서 초코바나 꺼냈다.

차유진 사태를 겪으며 학습된 행동이었다.

"먹을래?"

"으, 으응! 고마워…."

선아현은 신줏단지 모시듯이 두 손으로 초코바를 받아들더니, 본인의 가방에 꼭꼭 넣었다.

"…?"

안 먹나?

내 의문을 의식했는지, 선아현이 우물쭈물 말했다.

"체, 체중 관리해야 하니까… 모, 몸이 무거워지면, 춤이 이상해져. 야, 야식에 익숙해지면 안 돼."

"그래?"

무용 전공자 출신은 다르긴 하군.

대충 납득하고 넘어가려다가, 문득 모순점을 발견했다.

"너 등급 평가 때 나한테 자정 넘어서 초코바 주지 않았냐?"

"무, 문대는 괜찮아! 그, 그때 너무 말랐었어…."

이런 비화가 있었나.

황당해하려니, 옆 침대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 그때 박문대 진짜 말라서 난 극한으로 관리한 건 줄 알았잖아."

"근데 체질이더라? 너 먹는 거 보면 와…. 너 입에 들어가는 거 비해서 안 찌는 거야. 나라면 진작 돼지 됐음."

큰세진과 골드 1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거참.

'일부러 체력 때문에 많이 먹은 건데, 이런 오해를 받고 있었나.'

떨떠름했지만, 이 헛소리들 덕분에 방 분위기는 좀 풀린 것 같았다.

선아현도 밑에서 작게 웃다가, 짜게 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놀라며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참… 특이한 놈일세.

나는 말 없이 침대 머리맡의 생수병을 던져줬다.

선아현은 몇 번 헛손질 끝에 병을받아서 마셨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자, 잘하고 싶어. 이번에 더."

"…그러게."

저 발언을 볼 때 아무래도 선아현이 인터넷 여론을 확인하긴 한 것같았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진 않아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나 싶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은근히 운을 뗐다.

"…괜히 신경만 쓰일 수도 있으니까 인터넷에서 다른 건 찾지 말고자료조사만 하자."

"아…."

선아현은 오묘한 얼굴로 감탄사를 뱉더니, 갑자기 기합을 넣고선 대답했다.

"이, 이미 알던 거라, 괘, 괜찮아. 가, 각오했어."

"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선아현이 민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촤, 촬영 전에 이미 그런 글들 다봤거든. 자, 자꾸 찾다 보니까, 계속나와서…."

그래서 촬영 시작 날 만났을 때그렇게 죽상이었던 건가.

그때는 지금 수준으로 여론이 나쁘진 않았지만, 원래 물밑으로는 별글이 다 올라오는 게 인터넷 아닌가.

아마 선아현이 인터넷하고 별로 안친해서 오히려 정도를 모르고 다 들여다본 것 같다.

'대체 어디까지 서치한 거지.'

느낌상 온종일 아이돌 욕하는 글만 올라오는 개막장 커뮤니티까지 살펴본 것 같은데.

선아현은 주절주절 변명처럼 말을 붙였다.

"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마, 마음의 준비도 했고. 괘, 괜찮아. 이, 익숙하기도 하고."

"그러냐."

"으, 응!"

선아현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은근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익숙하다는 건 말 더듬는 증상으로 욕먹는 걸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또래 관계에서 지옥을 맛보고 온 놈이 분명했다. 요새 청소년들은 무섭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래 안 갈 테니까 걱정 마. 무대만 잘하면 또 사라질걸."

"그, 그럴까?"

"어. 서바이벌 프로잖아."

진짜 욕먹어도 싼 놈 아니면 방구석 여포질이 다 그렇다. 현실이 X같으니까 인터넷에서라도 윽박질러도 되는 사람 물면 재밌는 거지 뭐.

또 다른 유명인사가 화제가 되면 그쪽으로 우르르 옮겨갈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장 내일부터는 내가 욕먹을 수도 있고."

"어? 아, 아니야…! 너, 너는 잘못한 것도 없고…."

"너도 잘못한 건 없어."

선아현이 당황해서 입을 다물자, 옆에서 큰세진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현이한테 '욕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캬∼ 문대 너무 멋있는 거 아니냐. 내가 시청자면 벌써 주식 샀다."

"어, 그래."

"와. 이것도 이제 안 통하네?"

큰세진이 껄껄 웃으면서 침대를 굴러다녔다. 아래층을 쓰던 골드 1이 기겁하면서도 팀원들에게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해 미친놈아 침대 무너지겠다! …그래. 우리 그냥 열심히 하자. 이번 무대 무조건 잘하자고!"

"그럽시다!"

어떻게든 상황을 의욕으로 승화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 침실 분위기를 띄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기운차게 조장되었다.

그리고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김래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그런 의미에서 의상용 예시 자료랑 소품용 패턴을 찾아서 정리했는데 이제 단체방에 올려도 괜찮을까요…."

"…아."

그렇지. 스마트폰을 본 목적은 그거지.

아무래도 진작에 찾았는데 분위기 때문에 말을 못 꺼내고 있던 모양이하기야 김래빈 입장에서는 1차 팀전 때 온갖 욕을 다 먹었으니 지금인터넷 분위기가 오히려 선녀겠군.

탐색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큼, 당연하지."

"예. 올리겠습니다."

골드 1의 헛기침 소리가 침실을 울리는 동시에, 여기저기 스마트폰에 진동이 들어왔다.

나는 김래빈이 올린 자료를 확인해보았다.

[색감_재질_문양 목록정리_옷본 베이스.xlsx]

[소품 패턴_디테일 목록정리_노 베이스.xlsx]

클릭해 보니 딱 분류별로 정리해 놓은 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아마 제작진도 이런 수준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능력 좋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감탄사와 간단한 칭찬이 오고 갔다. 큰세진은 휘파람까지 불었다.

"…감사합니다."

김래빈의 머쓱한 감사 인사 후에, 팀원들은 새벽 3시까지 의상과 무대소품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

어떻게든 무대를 잘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잠은 죽어서 자겠다'는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야 상태창이 있으니 그렇다 쳐도, 진짜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새벽까지 노동과 연습에 매달리는 이틀을 또 보낸뒤, 망할 놈의 중간평가 시간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무대감독과 음악 감독, 의상팀까지 앉아서 트레이너들과 같이 평가를 했다.

우선 내가 자체평가를 해보자면,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 팀의 현 방향은 괜찮았다.

그래도 썩 기대되진 않았다. 지금까지 중간 피드백에서 좋은 평가를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결과는… 대놓고 좋았다.

"난 너무 좋았어."

"이대로만 가자!"

일단 피드백이 이 문장으로 시작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트레이너들과 감탄한 초대 심사위원들을 보며, 팀원들은 그라데이션으로 상황을 실감했다.

우선 안무가.

"안무 누가 짰어? 다 같이 했다고? 아니, 주도적으로 짠 사람 있을거 아냐. …와, 니들 말 맞췄지? 진짜 다 같이 했다고? …그래. 누가했는지는 방송에 나오겠지. 어쨌든 잘했으니까 할 말이 없네."

다음은 보컬 트레이너 뮤디.

"다들 그렇게 움직이면서 음정이 안 흔들린다는 게 우선 너무 대견하다! 그리고 새롭게 해석한 부분에 맞춰서, 원곡하고 부르는 방식이 달라진 점도 되게 매력적이야. 이 느낌 그대로 완곡 가자!"

심지어 영린도 드물게 대놓고 칭찬했다.

"많은 고민과 연습이 들어간 무대라는 걸 아는데, 그걸 아마추어처럼드러내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훌륭합니다. 중간평가인데도 이미 완성도가 있구요. 빨리 무대에서 보고 싶네요."

여기까지 팀원들은 '감사합니다' 봇이 되어서 감사만 연발했다.

누구 하나 감격으로 눈물을 쏟아도 이상할 게 없는 호평이 연속되는 가운데, 감독과 의상팀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 작성해 주신 시안을 보면, 디테일적인 부분에서 많은 신경을 써주신 게 저희도 바로 느껴졌구요. 지금 준비하신 걸 보니 무대에서 잘어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편곡을 아주 수월하게 진행한 팀이에요. 이미 많이 아는 친구가 있고, 자기들끼리 다른 이야기 하는것 없이 딱 원하는 걸 정리해 와서 사운드 뽑는 게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오늘 보니 무대도 아주 저희 기대만큼 멋지네요."

"이 팀은 의상도 굉장히 빨리 제작단계에 들어갔어요. 컨셉이 확실한데 애매한 부분은 별로 없었죠. 얼른 무대에서 저희가 만든 옷 입고 퍼포먼스 하시는 걸 보고 싶네요∼"

이 칭찬의 소용돌이가 끝난 뒤 팀원들의 얼굴이 정말 볼 만했다.

행복한데 실감이 안 나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큰세진도 마무리 멘트를 제대로 못 했다.

"팀, 아니, 어… 감사합니다. 저희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무 열심히 해서 몸 상하지는 말고!"

짝짝짝.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단체 인사 후 자리로 돌아왔다.

완전히 넋이 나간 팀원들은 나머지팀들의 무대를 보며 대세에 따르는 반사적인 리액션만 남발했다. 방청객이 따로 없었다.

나도 얼떨떨했다.

'이렇게 잘 풀린다고?'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자고 이걸 완성하는 데만 몰입해 있다 보니, 이게 얼마나 좋아 보일지 확신을 할수 없던 것이다.

기껏해야 '괜찮긴 할 텐데' 정도가 끝이었지.

'…어쨌든 기분은 좋군.'

성취감에 약간 고양될 정도였다.

나는 다른 팀 참가자들의 퍼포먼스를 응시만 하며, 그 성취감을 잠시간 누렸다.

중간평가가 완전히 종료된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무 좋았다."

"나도."

"저도."

팀원들이 침대에서 중얼거렸다. 다 끝나고서야 제대로 실감이 난 건지,목소리에 전에 없던 행복감이 줄줄흘렀다.

"우리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마, 맞아."

이런 식으로 맞장구치는 패턴이 몇번 더 흘러갔다.

'오늘은 이대로 취침인가.'

오랜만에 4시간 이상 자볼 수 있겠군.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순간 또 일 얘기가 나왔다.

"아, 의상 소매 색 안 정했는데."

"오 맞다."

진짜 독한 놈들이었다.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젠장.

"나도 몇 가지 봐둔 게 있는데, 잠시만."

큰세진이 톡톡 스마트폰 화면을 조작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여기서 봤…."

그러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큰세진은 그냥 스마트폰을 든채로 굳어 있었다.

"뭐야?"

"너 왜 그래?"

얼굴이 새하얗게 굳은 큰세진은 웬화면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침실에서 빛나는 스마트폰 화면은,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데도 색은 확실히 보였다.

'가쉽용 게시판이잖아.'

포털사이트와 연계된 곳으로, 온갖갈등 소재와 루머, 논란글의 온상지로 유명한 게시판이었다.

나는 굳이 큰세진에게 더 말하지않고 내 스마트폰으로 그 게시판에 접속했다.

그리고 30분 전에 떴는데도 이미 랭킹에 진입한 한 게시글을 보았다.

[3위! 아주사 큰세진 학폭 고발합니다. (425)]

크고 아름다운 지뢰였다.

'이런 X발.'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1화]

아이돌 업계에서 학교폭력은 진짜 답이 없는 스캔들이다. 그동안 터진사건들로 인해 쌓인 데이터가 증명해 줬다.

특히 따돌림이나 신체적 폭력이 목록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끝이다. 그냥 탈퇴하고 군대 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통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근데 하필 같은 팀 참가자한테 그게 터졌다?

'…일단 확인부터 하자.'

나는 우선 올라온 글을 클릭했다.

그사이에 댓글이 더 붙었다.

[3위! 아주사 큰세진 학폭 고발합니다. (491)]

: 참다 참다 제가 죽을 것 같아서 글 씁니다.

큰세진이라는 별명을 쓰는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참가자 이세진은 청솔고등학교 재학 내내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 선거 출마했다면서 모범생 미담처럼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억울하고 눈물이 나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이세진은 중학교 때부터 술 담배를했고, 아닌 척 친절한 척 노는 무리와 어울리며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어진 장문의 글은 구구절절 큰세진의 교묘한 학교폭력 행적을 주장했다.

자세한 사례까지 들어간, 일대일로 이루어진 괴롭힘에 대한 묘사가 세밀했다. 얼핏 읽고 있는 내게도 설득력이 느껴질 정도다.

'이건 그냥 한번 써본 어그로용 루머가 아니다.'

진짜든 아니든 작정하고 올린 글이었다. 심지어 하단에는 사진까지 첨부했다.

글 쓴 사람 본인의 고등학교 졸업앨범.

그리고 손가락에 담배를 낀 큰세진의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이 추가되어 있었다.

[나 다른 사진도 많아. 네가 조금이라도 상황파악을 한다면 지금 사퇴해. 다른 건 몰라도 너 같은 애가 아이돌 하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진짜가 아니어도 한번 꼬리표 붙으면 떼기 힘든데, 사진까지 올렸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사망 선고급이었다. 그리고 이 팀에 어마어마한 악재기도 했다.

큰세진이 존버해도 팀 편집은 끝장이고, 사퇴해도 지옥이었다. 파트 분배부터 동선까지 새로 다 맞춰서 연습해야 할 테니까.

나는 한숨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일단 확인부터.'

"나 지금 글 봤는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다못해 무슨 일이냐고 되묻는 사람도 없다.

'아무래도 다른 놈들도 다 보고 있는 모양이군.'

큰세진은 말없이 스마트폰 화면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여기 사진 너인 건 확실해?"

"…모르겠는데."

큰세진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이런 거 찍은 적 없어…."

하지만 아니라고 확답은 못 하는군.

다시 물어봤다.

"너 담배 피웠냐?"

"잠깐, 고 1 때…. 일이 좀 있어서. …근데, 바로 끊었어. 그리고 나 이런 짓 한 적 없어. 진짜, 학교에서 내가 왜 이런…."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던 큰세진은, 숨이 턱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댓글 보고 있군.'

안 봐도 끔찍할 건 분명했다. 골드 1이 상황을 눈치채고 얼른 말렸다.

"야, 너 그거 보지 마. 일단 꺼. 꺼봐."

"…봐야 대응을 하죠. 그런데….예, 이미 끝났네요."

큰세진은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내려놓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나라도 안 믿을 것 같거든? 담배는 피웠지만, 사진은 찍은 적 없고, 담배 빼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설득력 없잖아."

말하면서 큰세진은 점점 침착해지고 있었다. 아니, 침착해진다기 보다는… 체념하고 있었다.

"…사람들 안 믿겠지?"

사진까지 첨부한 마당에 뒤집기는 힘들어 보이긴 했다.

별개로 큰세진이 정말 억울해 보이기는 했다. 그리고 고발 글에 묘사된 행적이 큰세진의 그동안 방향성과 상당히 차이가 났다.

'저놈 성격상… 누굴 괴롭혀도 후환을 남겨둘 것 같지는 않은데.'

자신이 괴롭힌다는 것도 모르도록 교묘하게 상황을 몰아가서 자업자득으로 고통받도록 만들면 모를까.

이렇게 뒷말이 나올 수도 있는 방법을 쓸 놈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도 그냥 추측이다. 길게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속단할 수는 없다. 원래 사람은 여러 가지면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한테는 개쓰레기 꼰대 상사여도 자기 아들한테는 든든한 아버지인경우는 많이 보지 않는가.

"…."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켰다. 그리고 큰세진 고발 글을 처음부터 샅샅이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큰세진과 팀원들은 절망과 슬픔에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큰세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나…내일 사퇴할게."

"…!"

"야, 잠깐만."

"차, 차, 차분하게, 새, 생각을…."

"이미 충분히 해봤어. 담배 핀 건 사실이고…. 여기서 내가 계속 버텨봤자, 논란만 커질 것 같으니까."

큰세진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는것 같았다.

"조금 가라앉은 다음에, 해명 잘하면 일이 년 뒤에는 데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좀… 난 정말 찍은기억이 없는데 나오니까, 무섭기도하고."

항상 여유가 한 치는 남아 있던 큰세진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다른 팀원들은 차마 무슨 다른 소리를 꺼낼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그 말에 대꾸했다.

"그거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같은데."

"…왜?"

"이 글 쓴 놈이 '상황파악 했으면지금 사퇴하라'고 적어놨잖아. 지금 너 사퇴하면 이 말이 기정사실로 굳어진다."

내가 본인 일도 아닌데 자꾸 말을 받아치니 큰세진은 슬슬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만해라. 기분만 나빠지니까. 이상황에서 반박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잖아."

"반박 소재를 잘 잡는 게 중요하지."

"뭐'?"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큰세진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화면에는 고발 글에 포함된 마지막사진이 확대되어 있었다.

"이거 합성이야."

"…!"

눈 튀어나오겠다. 그만 좀 놀라라.

사실 침착하게 생각해봤다면 본인이 먼저 합성이라고 추측했을 텐데, 겁먹어서 못 한 모양이다.

나는 큰세진에게 스마트폰을 넘겨줬다. 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사진에서 티가 나는 부분을 검지로 집어줬다.

일단 담배 쥐고 있는 손.

"여기,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확대해서 맞춰보면…. 픽셀 약간 깨져있지. 일부러 화질 낮췄나 본데, 그래도 몇 점 티가 나."

그리고 담배.

"담배가 혼자 명도가 안 맞아. 이사진 노출값이면 이것보다 밝아야하는데, 너무 하얗게 보이니까 낮추는 과정에서 약간 더 낮춘 거야."

하얀색 물건을 사진에 넣을 때 초보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였다. 하얀건 눈에 띄는 게 맞는데 어색해 보이니까 뭉개 버리는 것이다.

내 스마트폰 성능이 워낙 떨어져서좀 끊기긴 했지만, 이런 확인에는 문제없었다.

'…데이터 보정 작업했던 덕을 볼줄이야.'

나는 추가금을 받고 '옷에 그 좆같은 패턴 좀 지워주세요ㅜㅜ' 같은요청을 들어줬던 과거를 잠시 회상했다.

"너, 너 이걸 어떻게 알아? 확실해?"

"그래."

큰세진은 말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서 희망의 빛이 번뜩이는 걸 봤다고 생각했을 때, 골드 1이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럼 당장 해명 올려! 합성이라고!"

"아, 아…. 그렇죠! 올려야…."

"아니, 기다려 봐."

얘는 현실에서 잘 나가던 놈이라 그런지 인터넷 생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덤덤히 설명했다.

"나도 알아봤는데, 네 팬분 중에서도 합성인 걸 알아본 분들 분명 있을걸."

"아!"

"그, 그럼 그냥 기다리면, 패, 팬분들이…."

"아니, 내 말은…. 합성이라고 볼만한 지점이 있어도 욕하는 게 재밌으니까 안 믿을 거란 뜻이야. 큰세진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주장하는거라고 비꼬겠지."

"…아."

방 분위기가 작살나기 전에 당장 부연 설명부터 붙여줘야겠다.

"그러니까 찾아라."

"어?"

"원본사진. 원본하고 같이 올리면 합성이란 말에 반박 못 할 테니까."

사진의 큰세진이 렌즈를 응시하고있는 걸 보니 카메라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인 중 누군가가 찍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지인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린다는 건 위험하다.'

지인이 올렸을지도 모르니까.

'고발 글 올린 놈이 자신 있게 사진을 넣은 걸 봐서는, 이 사진 원본 가진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긴 한데…'

아니, 잠깐. 이건 특정되기 쉬우니까 오히려 아닐 것 같기도 하다.

'흠, 그게 아니면…'

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큰세진에게물었다.

"다른 사람들하고 사진 찍으면 다 저장하는 편이야?"

"내가 나온 건, 그렇지."

"그럼 일단…. 앨범에서 무슨 행사나 모임 때문에 사진 대량으로 찍었던 날부터 살펴보는 게 어때."

여러 장 찍은 단체 사진에서 큰세진만 크롭한 후 배경을 바꿨다면, 원본사진을 못 찾을 거라고 의기양양할 만도 했다.

"문대야 너 원래 대체 뭐 하던 놈이야? 사실 국정원 직원이지?"

"그럴 리가요."

골드 1의 헛소리를 빠르게 넘겼다.

다른 팀원들은 진작에 큰세진의 옆에 붙어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진을 함께 찾아보고 있었다.

"단독 사진 말고 단체 사진도 봐. 확대한 걸 수도 있어."

"오케이."

겨우 평소 말투로 돌아온 큰세진이 재빠르게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갤러리를 열었다.

그리고 눈 아픈 탐색 시간이 이어졌다.

큰세진 이놈은 사진을 얼마나 많이 찍었는지. 고등학교 때 사진이 끝도없이 나왔다.

아직 1학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반 시간이 경과했다.

"세, 세진이는, 친구가 참 많네."

"…하하."

오죽하면 선아현이 질린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큰세진은 민망한 웃음소리를 내며, 사진을 휙휙 넘겼다.

그리고 2학년 1학기 사진이 나올 무렵.

"형, 이거!"

김래빈이 손가락으로 넘어가는 사진 하나를 찍었다. 큰세진이 얼른 사진을 확인했다.

대여섯 명이 모여 서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의 앞뒤로 같은 곳에서 찍은, 포즈만 다른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큰세진은 구석에 약간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상체를 확대하니 확실히 보였다.

고발 글에 들어간 사진이었다.

"…하."

큰세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어쩐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거 운동 때 사진이네."

"흠."

그러고 보니 고발 글 초반에 학생회장 출마가 어쩌고 하는 말이 있었다. 누군진 몰라도 이게 어지간히 고까웠나 보군.

'진작 이때 사진부터 찾아보라고할 걸 그랬나.'

그래도 어쨌든 찾았으니 됐다.

"허어…."

큰세진은 긴장이 풀렸는지 뒤로 뻗었다. 침대 뒤 벽에 머리를 박을 뻔했지만, 지금 그런 건 신경도 못 쓸게 분명했다.

"다행이다. 내 사진첩에 있어서."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골드 1이 힘차게 말했다.

"좋아! 너 소속사 있었지? 그거 보내 버려! 반박문 내자고 해!"

상식적인 조언이었다. 이미 일이 커졌으니 차라리 공식적으로 증거자료하고 함께 대응하는 게 깔끔하겠지.

그러나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왔다.

"소속사에?"

큰세진이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 뒤를 쓸었다.

"음…. 그건 좀."

이런 거 하라고 있는 게 소속사인데 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2화]

큰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 소속사… 해피프렌드잖아."

"아."

그 순간 아이돌 지망생들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리고 왕년의 데이터 팔이였던 나도 눈치챘다.

'거긴… 논란 초기대응 못 하기로 유명한 곳이군.'

그러고 보니 이 사달이 나는 중인데도 소속사에서 연락이 안 온다 글이 올라온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고, 이제 온갖 SNS에서 난리였다. 규모 좀 있고 발 빠른 소속사였다면 이미 눈치껏 큰세진과 접촉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앨범은 잘 내주는곳이라 들어온 거였는데. 하하."

큰세진은 형식적으로 몇 번 웃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그럼 친구한테 올려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 어떨까? 치, 친구들 많잖아."

"음…. 우리 규정상 촬영 중에는 공식적인 인터넷 활동은 금지니까, 아는 애들한테 부탁해 볼까. 사진보내주고 올려달라고 하면 신나서 할 애들은 좀 알아."

'그냥 놔둘까.'

지금도 너무 과하게 참견했다 싶어서 후회하기 직전이다. 그러나 기왕입 뗀 거 끝까지 손대자는 생각에 결국 조언했다.

"직접 섭외하면 그것도 기록이 남잖아. 차라리 제작진한테 말해서 직접 올리겠다고 해."

'지금 네 지인 중에 범인이 있는것 같은데 조심 좀 해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큰세진은 대번에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다. 어디 보자…큰세진은 스마트폰으로 메모장 어플을 켜다가, 아직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나머지 팀원들을 보고 씩 웃었다.

"다들 피곤할 텐데,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저 조용히 혼자 작성해볼게요. 여러분은 이제 취침하셔요."

"야, 이런 상황에 널 놔두고 우리만 홀랑 자기는 좀 그런데."

골드 1의 걱정에 큰세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다 같이 못 자면 내일 정말 지옥을 보지 않을까요…."

"…."

내일도 해야 할 일이 끔찍하게 많긴 하지.

굉장히 설득력 넘치는 말이었다.

결국, 나머지 팀원들은 모두 해쓱한 얼굴을 한 채 본인의 침대로 복귀했다.

나도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벽에 도로 잠에서 깼다. 목이 말라서였다.

'자기 전에 너무 많이 떠들긴 했군.'

조용히 일어나서 싱크대로 향하자, 탁자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큰세진이 반응했다.

"어. 문대 안 자?"

"목말라서."

"그렇구만."

아직 못 자는 걸 보면 큰세진은 아직도 해명문 작업을 끝마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직도 인터넷 여론을 뒤적거리고 있거나.

둘 다 그다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다 적었어?"

"음…. 적긴 했는데."

큰세진은 갈등하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약간 시간을 두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올리면 그걸로 또 다른 소리가 나올 것 같았거든."

"어떤 소리?"

"음, 우선 촬영 중에 직접 SNS로 소통하는 건 특혜라는 말은 나올 거고…. 내 해명문이 단호하면 '성격이 저럴 줄 몰랐다' 같은 반응, 반대로 온정적이면 '찔려서 저런다', 뭐 그런 소리를 할 것 같단 말이지."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그냥 익명의 지인인 척하고 적어보려고 했는데, 한번 볼래?"

큰세진이 스마트폰을 건넸다.

[큰세진의 친구입니다.]

: 오늘 올라온 고발 글의 사진은 합성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사진 중에 원본 사진이 있었습니다.

(원본 사진)(합성 사진)첫 번째 사진을 잘라서 만든 것이 두 번째 사진입니다.

"…."

"어때?"

이걸 어떡하냐.

이게 일반적인 학과 생활이었으면 괜찮은 해명이다. 해야 할 말 다 들어가고 두괄식이라 보기 편하고.

문제는 인터넷 익명 사이트에 적합한 글은 아니었단 점이다.

나는 무심코 뒤를 바라보았다.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올리라고 말하면 자정에 내가 한 짓이 다 헛수고가 될 확률이 너무 높다.

'하…'

잠은… 내일 자자.

"…이건 아니다."

"뭐?"

"아니라고."

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결국 내가 하는구나, X이이발.

새벽 3 시 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골수 인터넷 유저들만이 날밤을 세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큰세진의 학교폭력 논란도 한번 휩쓸고 지나가서 간헐적인 잡담으로만올라올 타이밍이었다.

그때, 한 아이돌 관련 익명 사이트에 글이 올라왔다.

[엥 나 큰세진 사진 찾은 듯.]

:(합성 사진)이거 원본이 이거아냐?(원본 사진)

글에 첨부된 것은 큰세진과 얼굴이 대충 검게 지워진 다른 학생들의 단체 사진이었다.

흔한 통신사 아이피로 작성된 가벼운 글이었으나, 그 내용을 확인한 새벽 이용자들의 댓글이 순식간에불어났다.

-헐

-뭐야

-어디서 났어?

-야 이거 찐 같은데;;;

-성지순례 각임?

-저 사진 잘라서 쓴 건가

-어케 알았누

└친구 비계에 큰세진 과사 있어서 뒤지다가 발견했음

└이거 스토커 새끼 아니냐;;

└왱 니들도 있으면 할 거면서

└ㅋㅋㅋ팩트로 때리네

└와 이 새끼 갓반인 얼굴은 다가렸어 고소는 무서운가ㅋㅋㅋ

글쓴이의 피드백에 댓글 분위기는 더 불타올랐고, 이윽고 글을 확인한누군가가 정확한 비교 샷까지 만들어왔다.

-크롭해왔다 똑같음 (사진)

└히 익

└ㄷㄷㄷ

└미친

-ㅋㅋㅋㅋ진짜 합성이었냐고 개웃겨 뭐 하는 찐따새끼길래 주작을 이렇게까지?

-와 큰세진 상장폐진 줄 알았는데 작전세력이었네

└미친ㅋㅋㅋㅋ

└지금이라도 풀매수ㄱㄱ

댓글은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났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원본사진이 찍힌 시점이 큰세진의 학생회장 선거 출마 때라는 것도 찾아냈다.

-청솔고등학교 홈페이지 뒤지니까 비슷한 홍보사진 찾음. 선거 활동때인 듯?(링크)

└와 진짜 열폭이었네

└주작글에서 선거 어쩌구 할 때부터 싸했다ㅋㅋ

└와 주작한 애 진짜 이 악물고 썼나벼

└지금 들켜서 부득부득 가느라 이빨 없을 듯ㅋㅋㅋ

여기까지 오니, 슬슬 SNS나 커뮤티니 등지에 이 글의 캡처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의문의 정의구현.jpg(feat. 큰세진학폭 아님)]

[큰세진 학폭 사진조작 떴다.]

[누가 큰세진 원본사진 찾아냄]

첫 글이 올라왔을 때처럼, 댓글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우연히 찾아낸 듯한 뉘앙스가 더해진 탓에 이 글은 더 진실해 보였다.

여론은 금방 학폭 고발글을 비웃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잠 못 이루고 있던 큰세진의 팬들은 캡처본을 올리는 일에 얼른 가세했다.

그들은 전투적으로 댓글을 올리며, '사진은 조작이지만 내용은 사실일수도 있다' 따위의 분탕질을 개소리하지 말라며 쫓아냈다.

그렇게 고발글이 조작됐다는 정보는 삽시간에 인터넷 여론을 점령했다.

당일 출근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이뤄진 일이었다.

"삭제했네."

큰세진이 중얼거렸다.

사진이 조작이었다는 점이 들통나고 여론이 완전히 기울자, 고발 글을 적었던 놈은 소리소문없이 글을 삭제하고 사라졌다.

더 지저분하게 물고 늘어지면 힘들뻔했는데, 아무래도 여론이 너무 뒤집혀서 포기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큰세진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에 짓눌린 모양이었다.

"고마워. 내가 진짜… 면목이 없다."

고마울 만도 했다. 초안을 그대로올렸으면 이렇게는 안 됐을 테니까.

'데이터팔이 1승…'

가격 흐름 좀 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짬을 이렇게 또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고생은… 그업보를 청산하는 셈 치자.

"애초에… 담배에 손도 안 댔으면이 난리도 안 났지."

큰세진이 자괴감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도 멍청한 짓이었다는 건 아는 모양이다.

"왜 피웠는데?"

"…아, 그때…. 데뷔조에서 밀렸어. 데모까지 녹음했는데… 나 빼고 다른 놈 넣어서 데뷔 잘하고, 앨범도 잘 팔고."

"…'해피 프렌드'에서?"

거기 근 5년간 성적 괜찮은 남자아이돌 뽑은 적 없지 않나?

"아니, 다른 곳. …근데 한동안 다른 팀 낼 생각 없다고, 지금 여기하고 연결해 준 거야."

"그래."

이 시점에서 삼사 년 전에 데뷔해서 첫 앨범부터 잘된 남자 아이돌은 한두 팀뿐이었다.

그리고 둘 다 대형 소속사다.

'…좀 늦더라도 존버하는 편이 낫지 않았나?'

17살 때부터 5년 지나도 22살. 팀에서 연장자로 데뷔하기 괜찮은 나이다. 해피프렌드 가느니 일단 대형에 붙어 있는 편이 합리적이 었을 것이다.

"…그때 올해 내로 신인 낼 거라고하도 호언장담을 해서 계약했는데…. 안 내주고 벌써 4년 째네. 하하."

"…."

그랬군.

원래 구두계약은 믿으면 안 되는데, 고1이 멘탈까지 뭉개졌으니 그런 걸 챙길 여력은 없었나 보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여기 나온 해피프렌드 소속사 연습생 중에 당장 데뷔할 만한 애는 없어. 그러니까 내가 이 프로에서 데뷔를 꼭 해야 하거든…."

"…."

"그래서 하는 얘긴데, 하차 막아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 박문대."

이놈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누굴 품평하면서 자기 속마음을 까발리는 건 처음이다.

'나름대로 성의라는 건가.'

"그래. 많이 고마워해라."

"…뭐? 하하!"

큰세진이 웃다가 탁자에 도로 머리를 박았다. 웃고 싶은데 피곤에 절어서 힘든가 보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민했다.

'…너무 스스럼없어졌나.'

약쟁이 위험군이라 거리 좀 두려고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흐지부지되다못해 과하게 친해진 것 같다.

'어차피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확률이 낮아 보이긴 하지.'

큰세진은 아마 학폭 터졌을 때 사퇴해서 데뷔를 못 했을 확률이 높았다. 혹시 사퇴를 안 했어도 지금처럼 여론을 뒤집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 데뷔는 힘들었을 테고.

'음, 근데 아역배우 이세진 쪽도 지금은 그다지 데뷔각이 잡히진 않는군.'

그래도 이세진의 방송 분량과 이미지는 '박문대'라는 변수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기에, 차라리 이쪽이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든 이게 당장 중요한 문제는아니다.'

슈뢰딩거의 약쟁이는 그냥 상자에 처박아두자. 지금 시급한 건 이틀뒤의 팀전 무대였다.

빠바밤바밤빰빰!

"흐어어어!"

"으으…."

마침 아침 기상 경보와 함께 침대에서 꿈틀꿈틀 팀원들이 일어났다.

'또 휴식 없는 하루가 시작됐군…'

퀭한 눈으로 서 있자, 큰세진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까 대화의 연속인 것 같다.

"아니, 진짜…, 내가 이거 끝나면 밥이라도 살게. 뭐 먹을래?"

"소고기."

"…국산 아니어도 되지?"

"맛있으면."

팀전 리허설까지 딱 50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3차 팀전 무대는 Tnet의 간판 음악 프로인 'MusicBomb'의 세트장 중 하나인 대형 스테이지에서 진행되었다.

실제 선배 아이돌들이 서는 스테이지에 서서 멋진 무대를 보여달라는 의미였는데, 사실 리액션 컷을 뽑기 좋아서인 것 같았다.

"이 스테이지에서 바로 사흘 전에! VTIC이 사전녹화를 진행했었습니다!"

"우아아아!"

MC의 말에 참가자들이 환호했다.

사실 무대 세트가 완전히 달라서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 공통점도 없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정상급 아이돌과 같은 공간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들뜬 것 같았다.

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VTIC… 괜찮은 놈들이긴 했지.'

단가가 비싸서 찍는 보람이 있었다.

"선배 아이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주시기바랍니다!"

MO? 대본의 문구를 마무리한 뒤 들어가자 리허설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러분! 본방이랑 순서 똑같이 가는 거예요!"

"네!"

순식간에 지시사항과 음악 소리로 무대 현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순서상 참가자들은 아직 약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달토끼 팀은 일단 구석에 모였다.

"우리 화이팅이나 한번 하고 갈까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는데, 고생한 만큼 멋진 무대 보여주고 옵시다."

"아, 좋지."

"그, 그럽시다."

팀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긴장감은 불안이 아니라, 기대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선명히 보였다.

" 달토끼 팀,"

팀원들이 한 손을 우르르 모았다.

"화이팅!"

함성은 거의 전투적이었다.

'맙소사.'

주변에 가깝게 따라붙은 카메라가 없었는데도, 내가 선뜻 이 짓에 참여했다는 게 생소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갑시다!"

정말로, 무대가 코앞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3화]

3차 팀전이 진행될 MusicBomb의 스테이지 밖은 인산인해였다.

그리고 인파의 대다수가 방청객이아니라 밖에서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인파 틈을 비집고 입장 줄에 들어가던 어느 대학생은 그 점이 불만이었다.

'들어오지도 못하면서 왜 바글바글 모여서는.'

진짜 볼 수도 없으면서 자기들끼리 신나서 저러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난번 2차 때도 그러더니, 규모가 더 늘었네.'

그녀는 진절머리를 내며 입장 줄에섰다. 길이를 보니 입장하려면 한세월은 걸릴 것 같았다.

'짜증 나.'

그녀의 앞뒤는 나눔받은 슬로건이나 간식을 든 사람들이었다. 마침 그슬로건들에 적힌 이름이 똑같았다.

[박문대 데뷔해]

'…쟤 진짜 인기 많아졌어.'

그녀는 지난 2차 팀전 때를 떠올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박문대 팬이어서 기분이 나빴는데, 하필 그녀가 좋아하는 김래빈이 박문대와 같은 팀이기까지 했었다.

'그 컨셉충 같은 걸 왜 좋아한대?'

그녀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막상 지난번 팀전에서 무대가 끝나자마자 미친 듯이 열광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부정 중이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박문대를 비웃는 짓은 하지 못하게 됐지만 말이다.

'…뭐, 무대에서는 괜찮았으니까,봐주는 거야.'

그녀는 애써 부정하면서 박문대의 슬로건에서 시선을 뗐다. 누가 뽑았는진 모르겠지만 예뻐서 더 짜증 났다.

"질서 지켜주세요!"

"밀지 마세요!"

사전에 받은 번호대로 줄을 서서 안에 입장했지만, 중간부터는 달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앉는 좌석없이 일괄 스탠딩이었기에 먼저 설수록 유리했던 것이다.

그녀는 무대 바로 앞 펜스를 잡았다.

'됐다!'

무려 18번째로 방청 신청에 성공한 자신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방청 신청자가 폭주하며, 제작진이 신청을 선착순으로 다시 바꾼 덕에 가능했던 쾌거였다.

'완전 코앞에서 보겠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기대가 불편함으로 변하기 직전까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MC가 입장했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3차팀전 무대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드디어 시작한다는 안도감과 기쁨, 짜증이 섞여서 폭발적인 환호성이 울렸다.

'빨리 시작이나 좀 해!'

그녀는 속으로 외치며, 펜스를 꾹잡았다.

"이번 팀전의 주제는 자체 제작! 선곡부터 무대장치까지, 공연의 모든 요소를 참가자들이 직접 선택하여 만들었습니다!"

'이건 김래빈 무조건 잘했겠다!'

못하는 건 정치질뿐인 자신의 주식을 떠올리며. 그녀는 흥분감에 다른 방청객들처럼 환호를 보냈다.

"또한 주주님들의 지난 매수 경향성을 빅데이터 알고리즘으로 분석하여, 주주님들께서 함께 좋아하시는 참가자들이 한 팀이 된 상태입니다!"

MC의 말에 방청객들은 여기저기서 무슨 개소리냐며 수군거렸다.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그냥 따로 투표를 받지 뭐하러 저런 헛짓을 했는지가 요지였다.

어쨌든 MC는 천연덕스럽게 오프닝 진행을 마쳤다.

"여러분의 기대가 크신 것 같은데요, 그럼 지금 바로! 오프닝 무대가 공개됩니다!"

"와아아악!"

"참가자들이 고른 곡은… 감성돌 맥시마이트의 기다림이 좋아 입니다!"

방청객들은 즉시 무대로 집중을 돌렸다.

혹시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참가자가 지금 등장할까, 기대에 찬 눈동자가 어두운 무대로 향했다.

'좀 나중에 나오는 게 좋지만…아, 모르겠다! 당장 나와줘!'

그 생각에 보답하듯이, 무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피이이잉.

'헉!'

그러나 완전히 밝아진 것은 아니었다.

가닥 굵은 노란색 빔라이트들이 무대 아래에서 솟구친 것이다. 빛줄기들은 여전히 어두운 무대 위를 어지럽게 비추었다.

언뜻 보이는 무대엔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울리는 관악기 소리.

우웅-. 우우우웅-. 우우- 우우우-.

국악 수연장지곡의 초반부 대금 소리였다. 우아하고 구슬픈 음이 홀로무대를 배회했다.

그리고 한 인영이 무대 왼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선뜩하리만치 깔끔한 공중제비였다.

목각으로 된 토끼탈을 쓴 장신의 남자는 달려 나와서 허공을 가르며 뒤로 돌았다.

대금 소리가 끝났다.

한 다리로 착지한 인영의 움직임에따라, 몸에 걸친 두루마기가 펄럭거리며 안에 입은 양장 차림이 드러났다.

그 순간, 무대를 가르던 빔라이트가 완전히 사라졌다.

완전히 깜깜해진 무대에서, 대금소리 대신 목소리가 울렸다.

-내 기다림은 길고

언제나 즐거우니까

반주가 없는데도 음정 하나 나가지 않은, 녹음 작업이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소리였다.

그리고 이제 방청객들은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았다.

'박문대….'

깊은 북소리와 함께 무대에 빛이돌아왔다.

둥- 둥둥둥! 둥- 둥둥둥!

무대 위에는 어느새 목각 토끼 탈을 다섯 명의 인영이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 검은 무대배경에 쏟아질 듯 찬란한 은하수가 드러났다.

그리고 군무.

스르륵.

느리고 감각적으로 시작한 동작은 박자를 쪼개며 점점 복잡하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속도가 연속적으로 변하며 타이밍이 맞지 않을 법도 하건만, 누구 하나 박자나 동작이 맞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 춤사위에 따라 무겁던 북소리의 윤곽이 날카로워지며, 그 뒤로 현대적인 베이스 라인이 묵직하게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대금과 보정된 피아노 음이 층계 위에서 놀기 시작했다.

Uhwi- Wiwiwi-

Uhwiuhwi— Wi∼∼

북소리가 완전히 음 구성의 일부분으로 숨을 죽인 순간, 다섯 명은 안무에 맞추어 일제히 토끼 탈을 머리 옆으로 올렸다.

동시에 가장 오른쪽의 사람이 노래를 시작했다. 박문대였다.

-널 기다리는 길목마다

언제나 설레는 내가 있어

안무와 함께 가장 왼쪽에서 무대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린 큰세진이 빙그레 웃었다.

-불안이 다가올 틈은 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넌 꼭

무술처럼 대형이 갈라지며 김래빈이 뒤에서 튀어나왔다.

-이곳에 나타날 거란 걸

우리가 만나게 될걸

확신하는 내 맘이

자리마다 넘쳐흘러 이렇게 아!

'래빈아!'

펜스를 잡고 있던 대학생이 속으로 울부짖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어떻게든 참아냈다.

그리고 이 랩 파트까지 와서 그녀뿐만 아니라 관객 대다수가 확실히 알아차린 점이 있었다.

'가사를 다 한국어로 바꿨네…'

그렇다. 몇 단어 섞여 있던 영어를 다 한국어로 바꾸어 무대 분위기와 맞춘 것이다.

'역시 우리 애는 천재야!'

찰떡같이도 바꿨다며 그녀가 속으로 광광 울었다. 다른 팀원이 바꿨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대에 빨려드느라 그 감상 역시 순식간에 머리 뒤로 사라졌다.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

난 널 알아

넌 날 알게 될 거야

골드 1, 하일준의 목소리를 받아서 큰세진이 프리코러스를 완성했다.

-벌써 답은 정해졌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다가올 테니∼

선아현이 센터로 나왔다. 토끼 탈이 살짝 어설프게 돌아가서 관자놀이를 덮고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이 반짝거렸다.

'…잘생기긴 했네.'

대학생은 근거리에서 선아현을 보고 차마 부정적인 감상을 할 수 없어서 분해졌다.

선아현은 곧고 우아하게 선 채로 노래를 시작했다.

-난 기다림이 좋아

내 기다림은 길고

언제나 즐거우니까

'어?'

바로 그 후렴에서, 익숙한 동작이 섞이기 시작했다.

원곡의 포인트 안무인 손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손동작에 새로운 발동작을 엇박으로 넣어 강렬한 느낌을 살렸다.

휘익!

원곡보다 훨씬 몸을 크게 쓰는 안무는, 휘날리는 두루마기와 어울려서 엄청나게 인상적이었다.

'아…'

감성적이고 담백한 원곡보다, 낭만적이고 벅찬 느낌의 사극풍으로 무대는 완성되고 있었다.

-이 기다림이 끝나면

마주칠 너를 알아

벌써 내 맘이 밝아

박문대가 후렴 뒷부분의 고음을 불렀다.

촬영 중에 물이 빠졌는지, 어느새 금발에 더 가까워진 머리가 탈을 쓸어넘기며 같이 넘어간 상태였다.

'…머리 깐 것도 뭐…. 괜찮네.'

그녀는 오늘 스타일리스트가 인생 역작급 무대화장을 해줬기 때문일것이라고 애써 감흥을 감췄다.

그리고 음이 끝나는 순간, 박문대는 완전히 뒤로 몸을 돌렸다.

'뭐야?'

참가자의 움직임과 표정에 집중하던 관객들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뒤로 돌렸다.

무대 뒤에서 흐르던 별빛 위로 거대한 검푸른 궤적이 그려지고 있었다.

"…!"

어느새 소리는 현악기와 관악기만 남았다.

그것을 배경음으로, 그 검푸른 궤적은 거대한 원을 그렸다.

마치 먹물로 그리는 듯 수묵화 같은 흔적으로 완성된 원은 이윽고 푸르게 빛났다.

별빛 사이의 동그란 푸른 광원. 달에서 보는 지구였다.

Uhuuu- Uhuuu— Uhu, Uuu—

참가자들은 음률에 맞춰 한번 바닥에 부드럽게 쓰러졌다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두루마기를 벗어 멀리 흘렸다.

-꿈꾸듯 가벼운 백일몽

널 만나러 떠나가는 길

참가자들은 어느새, 완전한 양장차림으로 섰다.

그 몸이 짧고 강렬한 군무를 만들었다.

거의 무용에 가까운 선의 전신 동작으로, 세차고 부드럽게 몸이 곡선을 그렸다. 느낌이 아주 묘했다.

타악기 없는 반주는 어느덧 다소 관능적으로 들렸다.

'김래빈 미친…'

"어억…."

"…!"

대학생은 설마 자신이 낸 소린가해서 화들짝 놀랐으나, 사방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너도 날 기다려왔다고

말하는, 선명한 기시감

가사 '데자뷔'를 '기시감'으로 바꾸며, 소리가 삼키는 듯이 더 묘해졌다.

-운명의 순간을 마주해

절대 망설이지 않도록!

탕!

그 순간, 반주에 타악기가 다시 들어왔다.

살짝 노골적이던 관능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난 기다림이 좋아

내 기다림은 길고

언제나 즐거우니까

다시 돌아온 후렴구, 큰세진이 센터로 나오며 복잡한 군무의 중심을 잡았다.

안무는 더 화려해졌다.

-이 기다림이 끝나면

마주칠 너를 알아

벌써 내 맘이 밝아

그리고 나직한 허밍이 이어졌다.

-Hum hu hu hum- huhu DDu-ru Du—ru Du Du

후렴의 멜로디였다.

발을 움직이는 안무와 함께하니,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며 설렘에 부르는 것 같았다.

반주의 북소리가 마치 심장 고동처럼 들렸다.

대학생은 이 허밍 위로 박문대가 혼자 한 옥타브 높게 음을 넣어주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름이 돋았다.

'…악긴 줄 알았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대 위에서는 도입부 안무가 다시 한번 변주되고 있었다.

대형이 쉴새 없이 바뀌며, 자연스럽게 다섯 명은 무대 위 단 하나의소 품 주변으로 섰다.

'어?'

거대한 나무그루터기.

바로 계수나무의 그루터기였다.

자연스럽게 그루터기에 둘러앉은 그들은 곧바로 위에 입은 양장 블레이저를 벗어 아래로 던졌다.

셔츠처럼 디자인된 남성 저고리를 드러낸 채, 큰세진이 정면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는 토끼탈을 다시 얼굴로 돌리며,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기다려줘.

계수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채 잠이 든 달토끼들의 위로 지구의 푸른빛이 내리며, 무대는 마무리되 었다.

그리고 촬영장 지붕을 박살 낼 만큼 커다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악!"

"꺄으아악악!"

"으아으!"

무대 아래에서는 온갖 괴성과 입을 틀어막는 반응까지 온갖 리액션이 넘쳤다.

오프닝부터 예상도 못 했던 등수높은 참가자들의 조합에, 끝내주게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본 탓에 다들 흥분한 탓이었다.

게다가 무지막지하게 컨셉추얼한이 무대는 덕후의 마음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해석할 수없었기에, 더 여러 번 보고 숨은 요소를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들었다.

분명 벌써 방송까지 남은 날짜를 세보고 애가 타는 방청객도 많을 것이다.

'다 끝났구만.'

펜스에서 손을 놓은 대학생은 괜히 뿌듯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다가 무대 불이 꺼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오프닝을 이렇게 끊어놨으니 다음 놈들은 자동으로 무대를 조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설레는 마음을 인정했다.

'…뭐, 악토비 애들도 잘하긴 하네.'

'저기에 류청우 차유진 껴서 데뷔해도 되겠다'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입장 때의 짜증은 온데간데 없어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