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마친 달토끼 팀은 리액션 컷을 위해 단체 대기실에 돌아왔다. 다른 팀의 무대를 관람하도록 대형 모니터가 설치된 방이었다.

참고로,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대오열하는 통에 다들 눈깔이 붕어처럼 부어 있다.

솔직히 울 만도 했다. 열흘 넘게 제대로 못 쉬면서 이 악물고 준비한걸 무사히 끝냈으니까. 나도 20살이었으면 질질 짰을 것이다.

"야 문대는 어떻게 눈물 한 방울안 흘리냐. 너 혹시 정말 국정원 출신…."

"아닙니다."

다 쉰 떡밥을 개그로 써먹으려는 골드 1의 시도를 제지해 줬다. 주변에서 팀원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분위기는 편안했다.

'잘했다는 걸 안다 이거지.'

다른 팀 참가자들과 같이 있으니 암묵적으로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중간 평가와 리허설로 이미 견적이 나온 상태였다.

다른 팀에서 누가 갑자기 미친 잠재력을 발휘해서 무대에서 축지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이건 이긴 판이라는 것이 말이다.

덕분에 다른 팀의 무대가 나올 때마다 유독 리액션이 잘 나왔다.

맘이 편하니 사심 없이 다른 팀의 무대를 즐길 수 있다는 거겠지.

'재밌네.'

나도 모처럼 관람객의 자세로 돌아가서 무대들을 감상했다. 물론 적당히 주변 봐가면서 반응도 좀 해주고.

'일단 두세 번째는 텄다.'

두 번째 팀은 일단 편곡이 뜬금 없었고, 제시간 내로 안무를 완성 못해서 후반부 댄스 브레이크 때 인원의 절반 이상이 동작을 날렸다.

세 번째 팀은 큰세진처럼 섹시 컨셉을 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센스없이 너무 과하기만 해서 좀… 사람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저 정도면 여자들이 더 싫어하겠는데.'

과연 방송에서 얼마나 편집으로 보정 해줄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팀은 그나마 본전은 건진 것 같았다.

골드 2가 있는 이 팀은 귀엽고 신나는 곡을 골랐는데, 원곡에서 크게 다른 편곡을 하지는 않았지만 잘 어울렸다.

"희승이 잘한다!"

골드 1이 골드 2가 센터로 나오자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나도 박수를보냈다.

이제 남은 건 한 팀.

바로 불지옥 맛 류청우 조였다.

'불쌍한 놈.'

이 판에 류청우에게 측은지심이 안생긴다면 그건 조별과제를 해본 적없는 놈일 것이다.

이세진과 최원길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진 게 내 눈에도 보였다. 그런데 그걸 끌고 트롤러 하나와 차유진까지 챙겨서 무대를 완성했다?

그것만으로도 돈을 받아야 할 업적이었다.

참고로 차유진은 여전히 기가 죽은상태고, 그동안 이삼일에 한 번씩 찾아와서 간식을 뜯어갔었다.

과연 입에 들어간 초콜릿값만큼 무대에서 힘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못써도 상관없었다. 내 팀도 아니고 뭐.

"화이팅!"

대기실을 떠나 무대로 나가는 팀마다 격려를 보내던 큰세진이 류청우팀에게도 응원을 보냈다.

약간 시간이 흐른 후, 모니터 화면에 류청우 조가 등장했다.

"시작한다!"

썩어도 준치라고, 등수 높고 등급높은 놈들이 모인 팀이다 보니 대기실 분위기에 기대감이 감돌았다.

물론 잘하는 게 아니라 망하길 바라는 기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류청우 팀은 망하지 않았다.

'…저 새끼 왜 날아다니냐.'

차유진이 멱살을 잡고 끌고 갔기때문이다.

후렴구에 센터로 치고 나올 때마다 무대 완성도가 좋아 보이는 착시가 일어났다.

'저래서 1등 했구나.'

멘탈 나간 줄 알았는데 무대에 올라가니 사람이 달라졌다.

'특성 덕인가.'

나는 지난 팀전에서 확인했던 차유진의 특성을 떠올렸다.

[특성 : 블랙홀(A)]

: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인력무대 몰입도 +150%

이런 걸 달고 있으니 웬만하면 데뷔할 수밖에 없지.

"오오오!"

류청우 팀의 무대가 끝나자 대기실의 참가자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차, 차유진 씨 정말 잘한다."

"그러게."

달토끼 팀이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초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차유진이 날고 기었어도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서 확실히 차이가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오프닝이었다는 점인데.'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면 인상은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무대 순서를 정하는 미니게임을 말아 먹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골드 1이 그렇게까지 털릴 줄은몰랐지.

당시 팀 대표로 미니게임에 나간 골드 1의 위풍당당한 발언이 떠올랐다.

-나만 믿으라고!

…그러나 이 발언이 실현되는 일은없었다.

팀 내 가위바위보에 모든 힘을 쏟아낸 골드 1은, 이어지는 팀 대표전에서 거짓말처럼 연달아 참패를 당했다.

만일 이 순서 때문에 근소한 차이로 1위를 못 한다?

사실 아쉬운 건 골드 1뿐이다. 나머지 팀원들은 어지간히 순위가 떨어져도 최종까지는 갈 놈들이었기때문이다.

골드 1 은 순위가 간당간당했기 때문에 이번 팀전 우승이 중요했다.

지금까지 경향성을 봤을 때 제작진이 분명 이번 생존에 도움이 될 걸 우승상품으로 줄 테니까.

'곧 발표하겠군.'

마지막 팀 무대가 끝났으니, 앞으로 팀전 순위발표까지 대략 1시간 전후로 남은 셈이다.

이번에도 1, 2위만 남겨두고 다음순위 발표식으로 미루는 개짓거리를 할 확률이 높았으나, 어쨌든 대강 윤곽은 잡히겠지.

그리고 한 시간 반 뒤, 결과는 정확히 예측대로였다.

"남은 1위 후보는 두 팀! 달토끼 팀과 허스키야 팀입니다! 과연 어떤 팀이 최종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까요?"

저 허스키야 가 류청우의 팀명이다. 여기까지는 뻔한 전개였다.

"결과는… 순위 발표식에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어, 그것도 예상했고.

"하지만 매번 이러면 여러분, 너무 지치겠지요? 그래서 이번 팀전 우승혜택을 지금 발표하겠습니다!"

"어어?"

그건… 몰랐네.

"우승 혜택은… 다음 순위 발표식에서 무조건 생존입니다!"

너무 과하게 좋았다. 인원이 30명밖에 안 남았는데 굳이 이런 보상을내건다고?

아니나 다를까 MC가 맥을 끊었다.

"단,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다음 순위발표식 전까지, 1위 후보 팀들은 팀 내부 상의를 통하여 혜택을 받아갈 한 명의 참가자를 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작진 놈들의 발상은 어째 프로그램이 후반에 접어들수록 기상천외해지고 있었다.

이거… 못 받아가는 나머지 놈들한테는 우승 벌칙 아닌가?

받아가는 놈도 같은 팀원 팬들에게 집중포화 당해서 욕이란 욕은 다 처먹게 생겼는데.

하기야 대충 공시생이던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제작진들은 최종화까지 어그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기가 막힌 놈들이었다.

어쨌든, 사실 달토끼 팀에서야 별문제 없었다. 받아갈 놈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골드 1 줘야 공리주의적으로 맞지.'

어차피 나머지 놈들은 탈락할 것같지도 않다. 괜히 받아서 논란이 되느니 깔끔하게 주고 이미지 챙기는 걸 선호하겠지.

문제가 있다면 직전까지 인터넷에서 조리 돌림 당하던 선아현이 지레겁먹고 본인이 받고 싶다고 말하는그림인데, 성격상 그럴 일은 없을것 같았다.

큰세진은 학폭 루머 때문에 여론이 반전된 상태니 본인 순위를 잘 짐작할 테고.

대충 눈으로 팀원들 표정을 훑었다. 골드 1을 힐끗거리는 게, 다들 비슷한 발상을 한 것이 눈에 보였다. 골드 1은 민망해 보였지만 거절할 눈치는 아니었다. 예의상 사양만 몇번 하겠지.

'이쪽은 문제없고.'

역시 문제는 저쪽 팀인 것 같은데.

허스키야 팀에서 과연 누가 어떤 깽판을 칠지 두근두근 기다리는 제작진들의 마음이 눈에 선했다.

"그럼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3차 팀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주주여러분, 순위 발표식에서 뵙겠습니다-"

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참가자들을 끝으로 촬영이 종료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촬영 때 뵙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인사성 바른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 때,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달토끼 팀은일단 다시 모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우승 혜택을 골드1에게 몰아줬다.

"저희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 최연장자가 받아가는 걸로 할까요?"

"넵."

"찬성합니다."

"조, 좋아요!"

"야, 진짜 고마운데 그래도 좀 더상의해 보고…."

큰세진이 허허 웃으며 말을 정리했다.

"형님, 모르시겠습니까? 더 상의할수록 잘 시간만 늦어진다는 것을…."

"아."

촬영이 끝나고 긴장이 완전히 사라지자 슬슬 지난 열흘간 못 잔 잠이 끝도 없이 밀려온 것이다.

덕분에 다들 눈을 반만 뜬 채로 대화하는 중이다.

"그, 그래. 고맙다 얘들아. 내가 밥살게."

"하하. 고마워요 형! 소고기 같이 양심 없는 메뉴는 안 부를게요."

나 들으라고 저격한 것 같지만 무시하자. 피곤하니까.

어쨌든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달토끼 팀은 해산했다.

나는 하품을 참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스마트폰 내비를 찍었다.

"무, 문대야."

"어."

고개를 돌리자 선아현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 설마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왜."

"지, 집 갈 때 같이 갈래? 부, 부모님이 데리러 오셔서…."

"어… 그래. 고맙다."

프로그램 인지도상 이젠 버스에 타서 이동하긴 힘들 것 같아서 안 그래도 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덕분에 택시비 좀 절약하겠군.'

다른 참가자 부모님을 뵙는 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뭐 차 얻어 타는것 정도야 별일 있겠나 싶다.

"아, 아니야! 고, 고맙긴!"

선아현은 앞장서서 신나게 걸어가더니, 도롯가의 검은 세단 앞에서멈춰섰다. 외제차였다.

'역시 집이 좀 사는 것 같군.'

선아현이 자취하는 곳 보고 짐작은했었다.

나는 차에 올라타는 선아현을 따라 들어가며,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가 문대구나! 반갑다."

"어서 타라∼ 우리 아현이 이번에도 잘했니?"

"아, 아빠!"

예상했던 것보다도 가족 분위기가 화목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선아현이 허둥지둥거리자 부모님이 흐뭇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예. 잘했습니다. 방송 보면 놀라실걸요."

"역시 우리 아들이야∼"

선아현은 수치사할 것 같은 얼굴로 앞 좌석의 뒤판에 얼굴을 박았다.

가족을 만나니 표현이 한결 자유로워졌다.

'역시 만악의 근원은 또래 관계였군.'

나는 정중하게 원룸 주소를 알려드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편안하게 이동을 즐겼다. 가끔 질문에 대답만 하면 되니 꿀이었다.

화목한 친구 가족을 보고 기분이 이상해지는 단계는 옛적에 지났다.

덕분에 이 편안한 착석감을 중분히 즐길 수 있었다.

"잘 들어가요∼"

"넵. 감사합니다."

"여, 연락할게!"

"그래."

나는 선아현의 가족들과 여러번 작별인사를 한 뒤에야 내 주소에서 내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TMI를 너무 들었군…'

선아현이 유럽으로 유학을 갔고 발레도 배웠다는 것까지 내가 알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만, 차를 얻어탄 값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낡은 계단과 복도를 지나서내가 계약한 원룸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들어가면 무조건 잠부터….

'아.'

이런 X발….

문이 열려 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5화]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원룸 현관문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분명히 이중으로 잠금을 해두고 촬영을 나갔는데, 돌아와 보니 잠금이다 풀려 있다?

'올 것이 왔군.'

유명세가 생기면 따라오는 문제.

사생활 침해 편이다.

이미 걱정했던 문제긴 했다. 금전상 다른 대책이 없어서 그냥 놔두고있던 거지.

'…일단, 안에 중요한 물건은 없다.'

별로 산 것도 없고, 옷도 촬영 때문에 이미 다 챙겨왔기 때문에 원룸에 가치 있는 건 전무 했다.

'그럼 이대로 조용히 나가서…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다.

지이이잉!

[선아현]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순간, 문제를 깨달았다.

여기 원룸 벽이 종잇장 수준이라 방음이 안 된다.

'X 됐다.'

나는 황급히 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당장 비상구 쪽으로 달렸다.

비상구 앞 모퉁이에서 꺾어서 사각지대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틈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가, 주변을 살피고 들어가는 웬 여자의 뒤통수를 보았다.

세상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데 남의 집에 무단침입해 있다는 게 문제지.

식은땀이 흘렀다.

'돌겠네.'

나는 우선, 비상구 밖 계단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것은 화면에 뜬 그대로 선아현이었다.

-무, 문대야 저기… 아직 식사 안했어?

"안 했는데, 지금 내가 밥 먹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어, 어?

"집에 누가 무단침입해 있어."

-허, 헉.

전화기 뒤로 숨을 삼키는 선아현의 목소리와 무슨 일이냐며 묻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라면 대충 둘러대고 끊었겠지만, 지금은 귀찮다고 얼버무릴 상황이 아니었다.

'경찰서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해야겠군.'

112에 신고했다가 경찰차라도 출동하면 동네가 소란스러워질 테고, 자칫하면 괜히 이상한 루머가 생길수도 있었다.

이제 막판인데 괜한 빌미를 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직접 가서 상황 설명하고 조용히 인계할 생각이었다.

'택시 부르다가 한세월은 걸릴 줄 알았는데 차라리 잘됐어.'

-자, 잠깐. 우, 우리 바로 갈게. 바로 내려와! 시, 신고해야….

"내가 직접 가서 하려고. 미안한데 경찰서까지만 좀 태워주실 수 있을까?"

-다, 당연하지!

나는 선아현과 통화하며 바로 계단으로 내려갔다.

정말 별일을 다 겪는구나 싶었다.

이후 일은 다행히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보다 더 식겁한 선아현과 부모님이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 준 덕에 곧바로 신고를 진행할 수 있었다.

-네? 아, 여자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경찰은 좀 시큰둥한 기색이었지만 어쨌든 출동은 해줬다.

그리고 밝혀진 전말은 이렇다.

'설마 한 명이 아닐 줄이야.'

원룸 안에 있던 것은 총 4명이었다. 그들은 함께 집을 뒤진 뒤 식기와 옷가지를 마구잡이로 챙겨 쓰고 있었다.

이미 다른 아이돌을 스토킹한 전적이 있는 몇 명이 의기투합해서 내 뒤를 밟은 뒤, 방범이 허술한 원룸에 침입한 모양이었다.

'상상도 못 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어깨를 주물렀다.

더 큰 문제는 경찰이 그다지 체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동네 뽑기 운이 나빴나.'

발각된 4명도 긴장한 기색 없이 나한테 자꾸 말을 붙이려고 들며 실실 웃었다.

- 야!

-문대야, 안 들려?

-너 귀 들리잖아. 대답 좀 해봐∼

-박문대!

'대충 훈방 아니면 벌금이겠군.'

진짜 원룸 안 옮기면 큰일 날 것같다.

"무, 문대야. 괜찮아?"

"어? 아. 괜찮아."

선아현은 안절부절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내가 밥을 얻어먹는 입장이라 민망할 정도였다.

일이 끝나고 들은 사정은 이렇다.

-그, 근처에서 외식하기로 했는데, 너, 너도 같이 먹으면 좋지 않을까해서….

-아. 그래서 전화한 거구나.

- 으응!

덕분에 지금 선아현네 외식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이 집 갈비 잘하네.'

나는 묵묵히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잠을 못 잤으니 먹기라도 잘 먹어야겠다.

"세상에, 요새 진짜 이상한 사람들많아. 어떻게 그런 짓을…."

"우선 부모님께 연락드리는 게 좋지 않겠니?"

선아현 부모님은 많이 놀랐는지 이 대화 패턴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계신다.

흠.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그냥 사실대로 말했다.

오늘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은데다가 밥까지 얻어먹고 있는데 최소한 답변이라도 성실하게 하는 성의는 보여야겠지.

"예전에 사고가 좀 있어서… 부모님 안 계십니다."

헙. 숨을 들이 삼킨 선아현의 아버지를 흘겨보며 어머니 쪽이 조용하게 물었다.

"따로 연락할 어른 계시니?"

"특별히… 떠오르는 분은 없습니다."

내가 박문대 몸에 들어와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것도 있지만, '박문대'도 딱히 보호자가 있는 흔적은 없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비슷하군.'

지금 보니 좀 흥미로웠다. 내가 박문대의 몸에 들어온 이유 중에 배경의 유사성도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식탁 위 분위기가 늪처럼 가라앉고 있었으니 수습부터 하자.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건 아니고요. 여러 사정이 겹쳐서 이렇게 된거라…. 지금도 지내는 데 특별히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니?"

"네."

선아현의 어머니는 괜한 호들갑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래. 혼자 지내면 이것저것 할게 많아서 바쁠 텐데, 그동안 우리 아현이 잘 챙겨줘서 참 고맙다."

"아뇨. 제가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이쯤에서 선아현이 펄쩍 뛰면서 부정할 줄 알았는데 말이 없었다. 돌아보니 선아현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기를 열심히 뒤집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도 내가 부모님 없는 걸 몰랐나?'

생각해 보니 제작진한테만 이야기하고, 그 후로 방송에서 다룬 적이없었다.

그럼 꽤 놀랐을 것 같은데, 선아현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본인이 저런 반응을 원하나 보군.'

이제 보니까 어쩌면 촬영 초기에선 아현이 '박문대'를 졸졸 따라 다닌것도 저기서 이유가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첫 등수 평가에서 선아현의 증상을 적당히 넘기고 리액션했기 때문인가.'

추측이 대충 짜임새는 맞았다.

'뭐 중요한 추리는 아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고기나 더주워 먹었다. 일단 다른 방도가 없으니 오늘은 그 원룸에서 보내고, 내일 바로 어디라도 구해봐야겠다.

그러나 식사 직후 뜻밖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거, 거기에 다시?"

"잡혀갔으니까 최소한 오늘은 안오겠지."

"그, 그래도…."

일단 원룸에 돌아갈 예정이라는 말에 기겁한 선아현과 가족들이 수군거리더니, 다음 촬영 때까지 선아현의 자취 집에 얹혀살 수 있게 됐다.

"…?"

뭔진 모르겠지만 개이득이니 입 다물고 따라가도록 하자.

박문대가 뜻밖의 거주지 등급 업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즈음, 인터넷에서는 방청을 마친 사람들이 미친 듯이 스포일러를 풀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너무 잘 나가는 탓에, 이쯤 되니 더 이상 발설 금지 조항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언급량이 많았던 것은 개인으로는 단언 차유진이었으나, 팀으로는 달토끼 팀이 압도적이었다.

-그걸 오프닝에 꽂냐 다음 팀이 불쌍했음

-등수 높은 건 이유가 있더라! 다 존잘이었당

-무대 나오면 인터넷 뒤집어진다에 건다ㅋㅋ

-선아현 왜 욕먹음? 개 잘하던데

달토끼 팀 소속 참가자 팬들의 여론몰이라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누르려는 사람도 많았으나, 방청 인증이 속속들이 올라오자 슬그머니 악담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 본인도 지인도 방청에 당첨되지 못해 종일 넋을 놓고있던 박문대의 네임드 팬 계정 운영자가 있었다.

첫 팀전에 카메라를 몰래 숨겨갔다가 박문대에 정착한 바로 그 사람이다.

'내 인맥이 이렇게 부족했던가.'

아직 팬덤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않은 서바이벌 참가자라, 네임드 계정으로서 최대한 친목질을 자제했더니 돌아온 것은 정보전 패배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현재 인기글을 클릭했다.

[방청 갔다 왔다. (사진 有) (361)]

: 이런 거 된 적이 처음이라 두근거리면서 다녀왔는데 진짜 문대 얼굴 본 것만으로도 가치가 차고 넘쳤다ㅠㅠ

문대 첫 번째 팀으로 나왔는데 토끼 탈 쓰고 한복 입었어. 퓨전 판타지 사극 등장인물 같더라. 존멋이라 견디지 못하고… 살짝 찍었음ㅠㅠ

그리고 무대 방송빨이라는 거 진짜 개소리임 너무 잘해서 아직도 심장두근거려ㅠㅠ

노래 진짜 탈 인간급으로 잘하고 춤도 잘만 추던데 못 한다고 염불외는 애들은 대체 뭘 보고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밑으로 자세한 감상 적을게!

그녀는 그 글을 한 자씩 정독하다가, 사진을 찍었다는 말에 참지 못하고 스크롤을 확 내렸다.

밑에 토끼 탈을 비스듬히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박문대의 상반신 사진이 있었다.

"악!"

별빛이 빛나는 검은 배경에 군청색 두루마기를 걸친 금발의 박문대는 진짜 더럽게 잘생겨서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데이터를… 사야 하나.'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데이터 파는 놈들도 법적 문제가 생길까 봐 보통 이런건 방영 이후에나 팔았다.

빨라도 9화 예고편, 늦으면 10화 본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저 모습을 상상할수록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광고, 광고나 보자…."

그녀는 막방 전에 올릴 새로운 광고 시안을 화면에 띄우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아니, 근데 이 광고에도 저 때 사진을 쓰면! 좋을 텐데!'

그리고 다시 울부짖으며 SNS에 접속했다.

방청 후기를 검색하는 그녀의 일과는 9화 예고편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선아현 자취 집에 얹혀사는 것은 원룸에서 살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제공했다.

물론 중간에 원룸 주인과 훼손된현관문 잠금장치 보상 문제로 골 아픈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야 박문대 몸에 들어오기 전에도 연례행사로 일어났던 일이니 딱히 기분 상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곰팡이 없는 방에서 잔다는 점이다. 그리고 방음이 좋아서 귀마개 없이 잘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소음 없는 환경에 대한 즐거움은 오늘 누릴 수 있는 이점은 아니었다.

"아니, 니들끼리만 재밌게 지내고 있었다니!"

큰세진이 놀러 왔기 때문이다.

오늘 9화를 같이 시청하자며 동갑 단체방에 떠들던 큰세진은, 내가 선아현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말에 급발진하더니 기어코 아침부터 쳐들어왔다.

"어, 어서 와!"

선아현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집주인이 좋다니 내가 뭐라고 할 수있는 부분도 아니라는 뜻이다.

큰세진은 히죽히죽 웃으며 거실로 들어오더니, 챙겨온 보드게임을 꺼냈다.

…정말 본격적으로 놀 생각이 만만한 것 같았다.

지이이잉.

"박문대 연락 오는 거 아냐?"

"어. 맞네."

나는 식탁에 둔 스마트폰이 울리는것을 확인했다.

[김래빈 : 안녕하세요 형. 오늘 9화가 방영되는 날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함께 시청할 수 있을까요?]

음, 어차피 같은 팀이니 여기 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큰세진이 있는 시점에서 조용한 시청은 글렀으니 괜찮겠지.

"래빈이가 9화 같이 보자는데 부를까?"

"어? 찬성∼"

"조, 좋지!"

곧바로 만장일치가 나오는군.

나는 별생각 없이 김래빈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약간의 텀을 두고 답장이왔다.

[김래빈 : 저… 차유진도 있는데, 같이 시청해도 괜찮을까요?]

야, 그건 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6화]

사실 차유진 하나 낀다고 시청 분위기가 박살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9화에서 차유진의 팀 분위기가 지옥 불에 떨어지는 장면에 나오면 굉장히 숙연해지겠지.

괜히 불편해질 필요가 있나?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짧게 고민했다. 적절한 거절 문구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큰세진이 끼어든 건 그쯤이었다.

"뭐야?"

"아, 김래빈이 차유진 껴도 되냐는데."

"음… 괜찮을 것 같은데?"

큰세진이 씩 웃었다.

"설마 제작진이 9화에서 그 팀을풀겠어? 10화 예고편에나 나오겠지뭐!"

와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게다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줄이야. 학폭 논란 이후로 이상한 신뢰도가 생겼는지 대놓고 말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같다.

"이번 기회에 친목도 쌓으면 더 좋고∼ 아 맞다, 집주인 의사가 중요하지! 아현이 어때?"

"나, 나는 괜찮아!"

"그렇대!"

선아현은 쿨하게 예스를 외치고 보드게임 룰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이놈도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

말도 안 놓은 참가자를 자기 집에선뜻 부를 줄이야.

"뭐… 그렇다면야."

오라고 하지 뭐.

나는 떨떠름하게 김래빈에게 답문을 넣었다.

김래빈과 차유진이 도착한 건 점심 이후였다.

"오∼ 어서 와!"

큰세진이 쾌활하게 인사했다.

참고로 '이렇게 됐으니 형도 불러야겠다'라는 큰세진의 발언에 의해 황급히 합류한 골드 1도 거실에 앉아 있었다.

팀원 중에 골드 1만 안 부르면 그림이 이상해지는 건 맞는데, 여기에 차유진이 끼는 것도 그림이 이상한 건 매한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합니다."

차유진은 의외로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들고 있던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내밀었다. 참고로 봉투 안에 든것은 모두 과자였다.

"일단 치킨 시켰는데,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또 시키자."

"예."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구석에 앉았다. 안 시키겠다는 뜻이군.

그러나 차유진은 눈을 반짝거리며물었다.

"그럼 피자 시킬 수 있나요?"

"그럼!"

"와우!"

차유진은 감탄사만 남기고 배달 어플을 켰다. 여전히 기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자기 혼자 해맑은 건 여전했다.

김래빈은 침착하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형들은 아침에 합류하신 건가요?"

"아, 나는 그렇고∼ 문대는 더 전에왔어."

"예?"

굳이 숨길 건 없지만, 좀 귀찮긴했다.

어쨌든 무시할 수는 없으니 원룸에서 일어난 대환장을 설명해 줬다.

중간중간 선아현이 끼어들어서 이야기를 보충했다.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니까, 다른 사람도 있더라고."

"히이익!"

"하, 한 명이 아니라, 3명이나 더 있었어!"

"…음, 그렇지. 그래서 경찰이 연행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겨, 경찰분들이 너무 건성으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너, 너무했어."

"너무… 했지. 그래."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사건은 점점 더 과장되어 마치 인터넷 주작 설처럼 변해 있었다.

덕분에 설명을 다 들은 참가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 너 아현이네 오길 잘했다. 무섭네."

"그러게. 야… 나도 집 앞에 누가 찾아온 적은 있는데, 저럴까 봐 걱정이다. 집에 동생도 있고…."

"헐, 누가 왔다고요?"

"어. 나중에 들으니까 초인종 누르고 앞에 계속 앉아 있어서 동생이 밖에 못 나갔다잖아."

"어우…."

자취하거나 소속사의 숙소에서 사는 사람들 위주로 비슷한 경험담이 쭉 나왔다.

충격과 공포의 아주사 본방 시청 전에 어울리는 섬뜩한 화제였다.

치킨을 먹을 때 즈음에는 아는 참가자의 친구 아이돌 이야기까지 지나갔다.

"…그래서 들어가 보니 샤워실에서 렌즈 감지기 소리가 '삐삐-' 울리면서…."

"미쳤네."

다음으로 도착한 피자를 씹고 있을때, TV에서는 마침내 아주사 9화본방 전 8화 재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코멘트를 붙이며 8화를 감상했다. 끝날 즈음에는 차유진까지 분위기에 잘 끼어 있었다.

"3위 진짜 하나도 안 아쉬웠어?"

"아쉬웠는데 좋았어요."

"야, 멋지다."

"히히."

골드 1의 감탄에 차유진이 히죽거렸다. 대체 허스키야 팀에서는 무슨 지랄이 나서 저런 놈을 풀 죽게 만들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그렇게 피자 박스가 깨끗이 비워지고 나서야 9화가 시작했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이제 지긋지긋해지려는 로고가 뜨고,먼저 나온 분량은 장기자랑이었다.

여기선 참가한 참가자들이 그럭저럭 골고루 분량을 챙겨갔다.

힐링을 표방하고 진행한 컨텐츠라 그런지, 아니면 급조된 부실한 진행을 훈훈함으로 때우려는 시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대부분은 적당히 캐릭터를 살리는 유머러스한 장면을 챙겨갔다. 큰세진이 대표적이었다.

문제는 내 분량이… 개그로 등장해서 개그로 끝났다는 점이다.

[이 순간… 무대를 지배한다!]

[박문대, 그는 트로트에 진심인가?]

노래 부르는데 이딴 자막을 넣더라고.

대놓고 오글거리게 만들었으니, 웃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들 참 잘 웃었다.

"으키키킥!"

"프읍…."

"인성 되게 좋아 보이는 분량이다. 축하해 문대야!"

마지막은 큰세진이다. 나는 탄산을 마시던 큰세진의 등을 말없이 한 대쳤다.

"커헑."

차라리 웃지 그랬냐.

박문대의 분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치 냉장고를 타고 참가자들이 뛰어나와서 열광의 도가니탕이 된 장면 끝에, 아예 도장을 찍듯이 인터뷰까지 삽입했다.

[Q : 트로트 좋아하나요?]

[박문대 : 네.]

즉답 후 엄지를 들어 보이는 컷이 삽입되었다.

'저거 팀 마음에 드냐고 물어봤던인터뷰잖아.'

이 미친놈들은 무슨 날조를 이렇게 매화마다 한단 말인가.

자막은 거기다 못을 박고 있었다.

[트로트 러버 박문대 참가자, 김치냉장고와 행복하세요!]

아직 김치냉장고는 받지도 못했다, 개자식들아.

더 열 받는 점은 이후 9화에서 내분량이 저걸로 끝이라는 것이다.

'더럽게 실속 없는 것만 줬네.'

초반이었다면 일단 긍정적인 분량에 감사했을 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슬슬 마지막 팀전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그다지 득이 되는 편집이아니기 때문이다.

'절실해 보이지 않는다'는 평만큼 서바이벌 결승전 표에 치명적인 말도 드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방송에서의 박문대는… 솔직히 그다지 절박해 보이진 않았다.

간절해 보이는 장면보다 웃긴 장면이 차라리 더 많았을 정도라면 이해가 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팀전에서 좀 더 열심히 한 측면도 있건만, 이 경향성이 계속 간다면 그다지 '절실함'이 조명받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쩔 수 없나.'

애초에 여기서 최종 데뷔하겠다 결심하고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컷을 노릴 만큼 보여준 적도 없고, 뽑을 타이밍이 꽤 지나긴 했다.

내가 무슨 백스토리가 있어서 팬분들이 자체적으로라도 절실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공유할 수 있는 것도아니었다.

'좀 웃기는 일이긴 하군.'

사실 여기 나온 사람 중 제일 절박한 것은 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놈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해둬야 하나.'

마지막 화에서 갑자기 순위가 폭락해서 떨어지더라도 그러려니 하자.

누가 주워가든 데뷔는 빨리할 수 있겠지.

나는 입맛을 다셨다. 왠지… 좀 아쉬웠다.

'기왕 활동할 거면 좀 편한 놈들이랑 하는 게 나을 텐데.'

아마 여기서 과반수는 데뷔할 것이다. 거기에 못 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패배감도 들었다.

처음 촬영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나도 꽤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놀랍게도 제작진이 9화 끝에 허스키야 팀이 망하는 것을 통으로 넣어준 것이다.

[최원길 : 그러니까, 형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이세진 : 할 수 있는 거랑 하고싶은 건 엄연히 다른 의미 아니야?]

[최원길 : 형 지금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잖아요. 잘 생각해보시면….]

[기정균 :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좀 도전해 보는 게 어때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세진 : …그만 좀.]

방송은 이 대화 뒤에 이세진의 얼굴이 썩어가는 장면을 몇 초나 길게 잡아서 송출해 줬다.

그리고 완전히 감정이 상한 상태로, 서로를 거의 주먹이 나갈 듯이 쳐다보며 짧게 문답하는 모습이 다시 나왔다.

카메라를 의식해서 참는 게 역력했다.

하필 류청우가 제작진에게 선곡을 제출하러 갔을 때 일어난 참사라 중재할 사람도 없었다.

[차유진 : ….]

참고로 차유진은 한번 끼어들었다가 아예 없던 발언처럼 무시당했다.

분위기에 맞는 발언이 아니라 그럴줄 알았다.

차유진이 우울한 얼굴로 화면을 보더니, 곧 얼굴을 컵에 처박고 탄산음료나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덕분에 욕먹을 소지 없이 잘 넘어간 것 같은데, 본인 입장은 달랐나 보다.

[류청우 : …무슨 일이야?]

9화는 돌아온 류청우가 완전히 박살 난 팀 분위기를 보며 당황하는것으로 끝났다.

[절체절명의 분위기, 과연 그들은무사히 무대를 완성했을까?]

"아, 완성했지∼ 그치?"

"맞아. 잘하더라."

큰세진이 적절히 치고 들어와서 분위기를 풀었다. 굳이 나한테 호응을 유도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맞장구 쳐줬다.

차유진은 겨우 탄산음료에서 얼굴을 떼고 웃었다.

저거 아무래도 슈가 하이에 중독된것 같은데?

'…설마 내 탓인가.'

나는 불길한 생각을 얼른 지웠다.

화면에서는 이제 중간 광고의 탈을쓴 끝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아마 광고 후에 짧은 예고편이나 비하인트 컷이 나오면서 바로 방송이 끝날 것이다.

"오늘은 준비 과정만 보여주네."

"그러게. 우리 별로 안 나왔다."

달토끼 팀은 초반 결성 때만 짧게 보여준 후 거의 분량이 없었다.

제작진이 임의로 순서를 조정할 수있다지만, 그래도 첫 무대니 9화 마지막에 걸리지 않을지 약간 기대했는데 아예 아무 무대도 편성을 안할 줄이야.

'이러면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나?'

잠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자니, 중간 광고가 끝나고 화면에 다시 아이돌 주식회사' 가 나오기 시작했다.

MC가 화면에 등장했다.

"…느낌이 안 좋은걸?"

"너도? 야 나도."

방송에 MC가 단독으로 나와서 좋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반사적으로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오늘도 즐겁게 시청하셨나요?]

"아뇨."

"아니오."

여기저기서 힘없는 부정이 나왔다.

촬영 때는 하지 못하는 소소한 일탈이었다.

[이번에 제가 발표해드릴 부분은…바로, 지금까지의 주식 현황입니다!]

"뭐?"

"음, 이렇게 쉽게 알려주시진 않을것 같습니다. 아마 특정 등수 몇 명, 만 공개하지 않…."

[단, '깎인 주식'만을 발표합니다! 주주 여러분은 어떤 주식을 가장 많이 매도하셨을까요?]

"맙소사."

김래빈이 탄식했다. 그럴 만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마이너스 투표 수치만 공개하겠다는 발상을 한거냐.'

대충 큰 어그로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건 별로 놀랍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이런 서프라이즈가 있을 줄은 몰랐지.'

이번 화에 무대를 안 넣은 패기는 여기서 나온 게 분명했다.

[그럼 지금 바로, 매도 순위를 공개합니다!]

MC의 말과 함께, 화면에 마이너스 표시가 붙은 순위가 주르륵 정렬되었다.

그리고 거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7화]

우선 마이너스 투표 1 위는… 뻔했다.

[1 위 최원길]

'끝났군.'

9화 편집을 보니 저놈은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다음 순위 발표식에서 보는 게 마지막일 것이다.

문제는 2위부터였다.

[2위 선아현]

이쪽도 사실 예상 가능한 순위긴했다. 지난 투표 시작 기간과 선아현을 향한 비난 여론이 절정이었던 시기가 딱 맞아 떨어졌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최원길과는 달리, 선아현은 갑자기 과하게 공격받은 탓에 안 그래도 슬슬 동정여론이 부상 중이다.

'선아현이 마이너스 2위 할 정도는아닌데?'

같은 소리가 전반적으로 조성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힐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이번 팀전도 잘했으니 안정적이다.

'막판에 흐름을 잘 타겠군.'

그러나 당장 면상에 2위를 맞은 당사자한테 이 분석을 들이대 봤자 통할 리 없었다. 덕분에 거실에 TV소리만 몇십 초째 울리고 있다.

'본방 단체 시청하자는 놈 또 나오면 연을 끊는다, X발.'

분위기가 죽여줬다.

게다가 2위에서 시선을 조금만 내리면 4위가 이세진B. 그러니까 큰세진이다.

이놈은 논란 터진 밤에 배신감으로 남은 표수를 다 털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은데.

'금방 수습됐으니 오히려 걱정돼서 표 주는 사람이 속출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큰세진이 제일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우리 팀전 방영만 되면 딱 뒤집히는 건데, 그쵸?"

"그러게 말이다."

"뒤집히긴 힘들 것 같습니다."

갑자기 입을 연 김래빈이 진지하게 개소리를 중얼거렸다.

'미쳤냐?'

큰세진이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김래빈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이번 팀전도 잘 완수했으니, 아마 득표율에 크게 하락세가 나타나진않을 것 같습니다."

"…야, 너…. 음, 래빈아. 마이너스 투표인 건 알지?"

"예. …아!"

김래빈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골드 1에게 대답하다가, 곧 뭔가 깨달은것처럼 감탄사를 뱉고 설명을 덧붙였다.

"마이너스 투표도 일반 득표율과 비례해서 증가하는 경향성을 보이니까요."

최원길 같은 특수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통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해당 참가자의 투표 규모의 문제가 되니까.

"…어어?"

"그렇긴 하지."

순간 분위기가 풀렸다. 지난 순위발표식을 떠올린 참가자들이, 김래빈의 발언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발상 괜찮네.'

소통 능력이 좀 떨어지긴 해도 확실히 쓸 만한 놈이었다.

선아현도 어느새 긴장을 낮추고, 골드 1의 너스레에 적당히 리액션을 보내고 있었다.

"허, 그럼 나 탈락인 거 아냐? 나 21위인데!"

"형님! 형님은 안티가 없어서 그런거죠!"

"마, 맞아요."

나는 이미 광고로 돌아간 TV 화면을 보는 대신, 인터넷으로 순위를 다시 확인했다.

[8위 박문대 ▼3]

앞으로 차유진, 뒤로 류청우가 있는 등수였다.

그리고 지난번 순위 발표식의 마이너스 표 수치와 비교했을 때는 3계단 등수가 내려간 모양이다.

'좋아해야 하나.'

분석이 힘들었다.

사실 논란이 된 적 없는 차유진이나 류청우에 비해, 방송의 '박문대'는 구설수가 좀 있었다.

그래서 애매했다. 이것이 '박문대'의 부정적 여론이 이제야 잦아든 증거인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박문대'의 투표 규모가 줄어든 것인지.

'하락세는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지.'

무대는 매번 괜찮게 뽑았다고 생각한다. 직캠 조회수나 언급량은 지속적으로 늘었다. 내 주변에 앉은 놈들도 대부분 지표가 좋았다는 게 문제지.

'…한 열세 명쯤 뽑았으면 무조건 안정권인데.'

이미 몇 명 뽑는지 알고 있으니 그런 행복 회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쓴 입맛을 다시고 이번 화반응이나 살펴봤다. 박문대의 분량이 별로 없어서 큰 반항은 없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문대… 트로트도 잘해? 대체 못하는 게 뭐임?

-(대충 존나 귀엽다는 비명)

-김치냉장고 타고 눈 크기 두 배된 댕댕이 [짧은 동영상]

-여러분 문댕댕이 트롯 서바이벌에 나가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합시다 흐미 잘못하면 뺏길 뻔했자나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 좀… 귀여웠다.

'아이돌 안 되면 돌연사인데 트로트는 무슨'

그러나 피식거리며 다음 인기글을 읽는 순간,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박문대 사실 인생 2회차가 아닐까? 합리적 의심임 암튼 그럼

이걸 맞추네.

어쨌든 그 외에는 소소하게 토끼반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물 밑을 좀 더 찾아보니, 차유진의 팀인 강아지 반에 안 들어가서 다행이다는 반응도 제법 보였다.

-기왕 댕댕인 거 별명 따라갔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워한 20분 전 내글을 삭제하는 중임

-솔직히 그놈의 빅데이터 알고리즘 들먹일 때 개수작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애 머리채는 무사해서 다행일 뿐…

— ㅋㅋㅋ홈페이지에 그 빅데이터 어쩌구 올린 거 보고 왔는데 존나 치밀하게 잘랐더라 제작진 그 반에 죽이고 싶은 참가자 있나?

전체적으로 '박문대'를 좋아하는사람들의 글 분위기가 다 이런 식이었다.

이번 무대도 괜찮겠다는 안도감과 기대감.

어지간하면 데뷔하겠구나, 하는 약간의 여유.

사람들이 즐거워 보이는 건 좋다만, 나는 오히려 1차 팀전 때보다도 확신이 없었다. 아마 결승이 목전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이번 팀전에서 분량이 없을 것 같은데.'

무대는 잘 뽑은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달토끼 팀에 나보다 스토리라인 빼기 좋은 참가자가 과반수였다.

'유지보수는 했다는데 만족해야 하나.'

어차피 방송 중반부터는 분량을 너무 많이 받아도 욕을 먹었다.

팀에서 한 놈만 주인공처럼 나온다? 팬도 늘지만, 반감도 사기 쉬웠다.

방송 분량은 한정되어있는데 저놈이 나오면 내가 좋아하는 놈이 못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문대'는 분량을 아예 못챙긴 적은 없지만, 혼자 다 처먹어본 적도 없었다.

꼬투리 잡을 여지를 주지 않은 것에 만족해야겠지. 나는 다소 아쉬운마음으로 인터넷 창을 껐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이 아쉬움은 쓸데없는 김칫국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

왜 분량이 있냐.

박문대의 가장 규모가 큰 익명 팬커뮤니티는 10화가 방영되기 전부터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예고편에서 짧게 지나간 달토끼 팀 무대 장면에 박문대의 상반신 컷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만에 나온 고화질 떡밥에 다들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예고편 문댕 얼굴 돌았다

=아ㅋㅋ 얼굴만 봐도 각 나오네 오늘 방송 끝나자마자 직캠 스트리밍 간다 1000만 가자

-한복? 토끼 탈? 미쳤나 봐 어떻게 매번 팀전마다 컨셉을 이렇게 잘 뽑음? 이번에도 문댕 아이디어 같지.

└맞을 듯 무대 뽑는 거 보면 소나무가 따로 없음 덕후 마음 조지는 컨셉만 잡네ㅋㅋㅋ

└역시 아이돌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다

└이거 맞다

신나서 떠들던 그들은 10화가 시작하고 나서도 비슷하게 박문대의 이야기만을 떠들었다.

관련 없는 다른 참가자의 팀들이 나오는 것은 간간이 큼직한 소식만 띄엄띄엄 올라오기를 40분째.

겨우 달토끼 팀의 분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작진 놈들 진짜 끝에 욱여넣었네

-방청 스포 보니까 오프닝이었다며! 오프닝이! 왜! 여기에!

-인질 노릇도 한두 번이지 아 열받아ㅋㅋ

-문댕 나온다 드디어ㅜㅜ

사람들의 화제가 드디어 실시간 방송으로 집중되었다.

달토끼팀의 선곡 과정은 별다른 손질 없이 조별과제 희망편 같은 분위기 그대로 방송을 탔다.

-문댕 : 허허 네 의견도 좋고 쟤 의견도 좋구나 다 쓰자

-문댕 여전히 현명한데?ㅋㅋㅋㅋ

-큰세진 섹시 돌림노래 할 때 문댕 얼굴 봤냐고ㅋㅋㅋ 왜 티벳여우 이야기 했는지 알겠다 귀여웤ㅋㅋㅋㅋ

-다들 쌉소리 안하고 조근조근 이야기하니까 항암제가 따로 없다

사실 달토끼 팀의 방송 분량은 훈훈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뽑아낼 갈등 소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별 유감이 없고 여러 이유로 몸을 사릴 줄 아는 참가자들만 모인 덕이었다.

하다못해 큰세진의 학폭 논란 당일밤의 숙소 촬영분이라도 있었다면 좀 달라졌겠지만, 하필 그날 기기 문제로 숙소 카메라들을 다 뺀 탓에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제작진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승승장구하는 달토끼 팀의 모습을 송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조별과제 절망편의 허스키야 팀과 대조되어 보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달토끼 팀 참가자의 팬들은 쾌적한 시청 시간을 누릴 수있었다.

제작과정에서 차근차근 모든 요소를 다 정상적으로 만들어 챙긴 것은 달토끼 팀뿐이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면이 따스해지는 만큼 독기가 빠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모호한 화기애애함이 다시 채웠다.

-문댕 저렇게 널부러진 거 처음봄

-다 안면 있는 애들이라 편한가벼

- 훈훈하네

가령 강행군으로 뻗은 달토끼 팀의 모습은 마치 친해서 허물없는 것처럼 나왔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채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좀비처럼 지내던 모습은 아예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무대는 완성도 높은 그대로 방송을 탔다.

-찢 었 다

-섹시전통토끼 잘 봤습니다 이 조합이 어울리다니 문댕 네 안목은 도대체…

-이어폰으로 들었는데 문댕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후렴에 더블링 넣음

└와 돌았다

└이게 가능한 일임?

└심지어 마지막에 허밍은 옥타브가 하나 높은데?ㅋㅋㅋ 이제 실력으로 까면 병신 인증이다

팀 스토리가 아닌 제작 과정이 분량을 받은 덕분에, 무대의 다양한 요소들을 시청자들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의외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했다.

-야 문댕 뒤돌면서 지구 나올 때진짜 소름 끼쳤음

-한복- 양장- 한복 흐름좋았다 달토끼가 현대인하고 사랑에 빠져서 중간에 상상하는 느낌…

-계수나무가 그루터기로 나오고 거기서 무대 끝나는 것도 좋더라 약간 쓸쓸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느낌이라 스토리 혼자 상상하게 됨ㅎ

└전 2D 덕후가 이 무대를 좋아합니다

└이런 오글거리는 글에 내가 욕을 박지 않는다? 무대뽕이 차오른다는 뜻임

-문댕아 무대마다 레전드 뽑아줘서 고맙다 덕분에 편하게 덕질함

현장에서도 반응이 어마어마했던 무대답게, 시청하는 팬들은 굳이 억지로 여론을 잡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댓글을 쏟아내고 있었다.

다만 누구 하나 서사를 받지 못하고 모범생들의 무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은은한 아쉬움을 남겼을 뿐이다.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박문대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오열했던 것 역시 삭제되었다.

분량을 받지 못할 것이란 박문대의 생각은 맞았다.

단지 다른 팀원이 서사를 가져갈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사이좋게 아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덕분에 직후 마지막 허스키야 팀이 방송을 타자, 박문대 팬들의 댓글 폭주도 소강상태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아 좋았다

-이대로 데뷔 가자

-문대 얼굴 더 보고 싶어ㅠㅠ 이제 분량 끝인가

-애들 노는 것 좀 더 보여주지 다큐 편집이라 꿀노잼이었음 제작진감 없네ㅉㅉ

박문대가 뜬금없이 화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 타이밍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8화]

류청우가 리더인 허스키야 팀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연습을 진행했다. 팀원 간 끝나지 않는 갈등 때문이었다.

[최원길 :(이세진 형이)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실 줄은 몰랐어요.]

[기정균 : 피해의식 같은 게 있나?]

[류청우 : …후우.]

중간중간 삽입되는 인터뷰와 BGM까지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야망 없는 참가자가 없었기에 연습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진행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 갈등의 당사자들 대신, 제작진은 갈등에서 소외된 차유진에게 모든 성장 스토리를 몰아줬다.

박문대는 여기서 등장했다. 굳이 따지자면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조언자 역할이었다.

[박문대 : 힘든 일 있어?]

그리고 박문대가 여러 장소에서 차유진과 대화를 나누며 간식을 쥐여주는 장면이 빠르게 몇 컷 지나갔다.

호랑이에게 떡 주는 어머니처럼 빠른 상황 종결을 위해 간식을 보급해줬을 뿐이지만, '문대 형이 도와줬다'라는 차유진의 인터뷰 덕분에 그장면들은 썩 괜찮아 보였다.

-?

-뭐냐ㅋㅋ

-둘이 친함?

별로 못 본 그림이라 박문대의 팬들도 당황했다.

지난 2차 팀전에서 차유진과 같은 팀이 되며 무대가 흥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나온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검증된 리더인 류청우를 놔두고 우리 애 쪽으로 피신했단 말인가.

하지만 의문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귀여운 추가 떡밥은 언제나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먹을 건 기가 막히게 챙겨주네

-역시 문댕이군 먹는데 진심인 남자야

-문댕 : 뜻밖의 힐러

-왜 스물한살(곧)아이돌한테서 우리 할머니가 보이죠?

화면에서는 차유진이 기존의 천진난만한 이미지 대신 무섭게 무대에 집중하는 열정을 어필하며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쳤다.

혼자 분량 다 처먹었다고 비난이야 좀 받겠지만, 그보다 확실한 인상을심었다. 내면의 성장 및 절실함이 꽂히는 서사였다.

박문대야 본인이 받고 싶은 종류의 분량을 싹 잡아가는 차유진을 보며 짜게 식었지만, 그의 팬들은 그냥 귀여운 박문대의 성격 좋고 든든한 모습이 방송에 나온 것을 마음껏 즐겼다.

심지어 일반 시청자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박문대가 생각보다 어른스럽네

-팀원들하고 잘 지내는 이유가 있나 봅니다.

└그러게요 첫인상은 영∼ 버릇없어 보였는데 의외예요.

노골적으로 분량을 챙겨준 차유진의 곁다리로 등장한 컷이라 어그로는 차유진이 다 가져갔다.

박문대에게는 좋은 이미지만 은은히 남았을 뿐이다.

덕분에 10화 방영 다음 날, 인터넷을 살펴보던 박문대는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됐다. 배부른 소리나 하게됐기 때문이다.

'초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만회하는 건 좋다. 하지만… 역시 절실함은 못 잡았군.'

차유진이 잡아간 저 이미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무대는 결승전뿐이었다.

그리고 결승에서 굳이 박문대에게 제작진이 서사를 줄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방송이 재밌어질 만한 캐릭터만 줬으니까.

'포기해야 하나.'

혀를 차던 박문대는, 얼마 남지 않은 촬영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직후 촬영 때 있을 이벤트를 잡아냈다.

'잠깐, 그걸로도… 가능한가?'

물론 방송은 전적으로 제작진의 편집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컨텐츠로 쓸만한 컷을 뽑아보는 노력은 해볼만했다.

박문대는 마음을 굳혔다.

'시도해도 나쁠 건 없지.'

참고로 선아현이 찜닭을 먹자고 말하려다, 생각에 잠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내린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와, 이젠 좀 덥다."

촬영장에 들어서며 큰세진이 중얼거렸다.

벌써 4월 말이었다. 첫 촬영을 겨울에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완전히 적응해 버렸군.'

이제 더는 낯설지 않은 '박문대'의 몸을 움직여 유니폼으로 환복하면서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그때, 힐끗 이쪽을 본 큰세진이 말을 걸었다.

"어, 너 키 큰 것 같은데?"

"뭐?"

"운동 열심히 하나 보다. 좀 벌크업도 됐고."

그 말에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요 몇 달간 키도 꽤 자라고 근육도 적당히 붙어서 이젠 원래 내 몸과 체구 차이도 거의 없었다.

"21살 넘어도 키 큰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는 처음 본다."

"나도 내가 처음이다."

"아이고∼ 그러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넘겼다.

'177 정도인가.'

며칠 전에 재본 키를 떠올리며, 촬영장의 대기석에 착석했다. 이젠 주변에 낯선 얼굴이 없다는 게 도리어 어색했다.

"문대 안녕∼"

"형 안녕하세요!"

'혹시 원래 몸으로 돌아가도 적응기간이 필요하겠는데.'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대충 인사를 돌려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곧 반납해야 하니 미리 전원을 꺼둘 셈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새로운 알람 떠있었다. 익명으로 개설한 여론 탐색용 SNS 계정에서 온 것이다.

관성적으로 클릭하니, 막 공유가만 단위로 접어든 글이 하나 떴다.

[문대가 부른 트로트 원곡자분이 SNS에 글 올림ㅋㅋ(링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과열되다 보니 슬슬 관련 없는 유명인들도 참가자들을 언급하고 있었으니까

링크로 이동하니 활짝 웃으며 손가락 하트를 치켜든 트로트 가수의 얼굴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린 SNS가 떴다.

뒷배경에 희미하게 '박문대'가 트로트를 부르는 장면이 방송되는 TV화면이 보였다.

[제 노래 멋지게 불러준 아주사 의 박문대 참가자님! 응원합니다^^ 꼭 데뷔하시길!

#아주사 #듀엣가자 #트롯멋쟁이

"…."

뭐… 원곡자가 만족했다니 좋은 일이다. 팬들도 재밌어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길 때였다. 트로트 가수의 다른 게시글이 화면에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큼지막한 사진을 올려놨다.

'잠깐.'

저거 내가 찍은 사진인데.

다시 확인해 보니 역시 내가 몇년 전에 찍었던 행사 사진이 맞았다.

안 팔려서 양심상 팬사이트에 풀어줬던 컷이다. 이날 자연광이 괜찮아서 사진 질이 좋았기 때문에 본인이SNS에 올리고 싶었을 만도 했고.

그러나 어딘지 찜찜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도로 끄면서, 그 원인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엔 내가 없지 않았나?'

분명 박문대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원래 내 몸의 행적을 추적했었다.

하지만 아예 내 신상 자체가 없었단말이다.

근데 내가 찍은 사진은 남아 있다?

'이상한데.'

나는 곧바로 위튜브에 들어가서 검색창을 눌렀다. 그리고 내가 찍은것 중에 가장 유명한 직캠을 검색했다.

[영린 레전드 직캠]

심사위원 영린이 무명 시절 폭우속에서 열정적으로 무대를 완성하는 직캠이다. 이걸로 영린이 떡상의 발판을 마련했었지.

그러자 위튜브 제일 상단에 낯익은 썸네일이 보였다.

'있다.'

동영상이 있었다.

물론 원래 내 계정은 아니었다.

내가 안 팔리는 데이터를 올리던 계정은 공시 수험 생활을 시작하면서 삭제했다. 그러니까… 현시점에서 따지자면 작년쯤이다.

안 그래도 지금 동영상 댓글창에 업로더의 댓글이 상단 고정되어 있었다.

-원본이 삭제돼서 올립니다. 본인 등판하시면 지워드림.

이걸로 거의 확실해졌다.

'나는 없는데, 내가 찍은 데이터는 남아 있다는 건가.'

좀 섬뜩한 일이었다. 단기간 내로 아이돌 못 되면 죽는 상태 이상까지 생긴 건 더 그랬다.

'진짜 데이터 팔던 업보가 돌아왔나.'

반쯤 농담 삼아 했던 생각인데, 슬슬 농담 같지가 않다.

'너 대체 뭐냐?'

상태창을 켜서 물어봐도 대답은 없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이 새끼 대체 목적이 뭐지?

"야, 뭐 해?"

"잠깐. 생각 좀."

일단, 얼른 상념에서 벗어났다. 엉겁결에 모순점을 찾긴 했지만 당장은 촬영이 코앞이다.

'그러니 일이 끝나면 더 알아본다.'

나는 곧장 생각을 마무리하고 스마트폰을 반납했다.

괜히 다른데 신경 팔려 있으면 태도 논란 먹잇감만 될 뿐이다. 머리를 비워야 했다.

다행히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촬영 시작하자마자 MC가 급 전개로상황을 빼주더라고.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대망의 3차 순위 발표식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참가자들이 몇 달간의 촬영으로 숙련된 박수를 보내자 바로 본론으로들어갔다.

"그러나 여러분의 순위를 알아보기전에, 한 가지! 먼저 알아봐야 할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진심입니다."

곧바로 '그' 컨텐츠가 왔군. 나는 MC의 다음 말을 짐작했다.

'이 오디션에 얼마나 진심인지 보자고 하겠지. 캐스팅 콜 로.'

그렇다. 이 아이돌 주식회사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이쯤 해서 또 하나의 자극적인 컨텐츠를 넣는다.

이름하여 '캐스팅 콜'.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Tnet과 친하고 적당히 이름 있는 소속사에서 참가자들을 캐스팅하러 오는 자리였다.

단, 소속사를 선택하면 프로그램은 하차해야 했다.

그러니 여기까지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게 선전한 참가자가 이탈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참가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여기서 바로 인지도가 보장된 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는데 어정쩡한 소속사로 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 데뷔할 만한 놈이 탈주할 경우는 없으니 단지 프로그램에 긴장감을 더하는 이벤트일 뿐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 긴장감을 이용할 수는있다.'

그러니 최대한 대화를 유도해서 이프로그램에 '박문대'가 얼마나 진심인지 되는 대로 어필해볼 생각이다.

…물론 편집에서 잘릴 확률이 더높겠지만.

"…흡 "

옆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대부분 타이밍과 MC의 말로 '캐스팅 콜'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난 순위 발표식에서 중하위권이었다면 충분히 갈등할 만한 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데뷔할 확률이 낮으니 다른 동아줄을 잡고 싶어질 테니까.

탈주각 재는 이미지야 '권유해 주신 소속사가 오래전부터 제 워너비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싶다. 앞으로 더 성장한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 같은 말로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하위권에서는 꾸준히 이탈자가 나왔다.'

지난 시즌은 대놓고 5명쯤 날랐던것 같은데. 직후에 방송이 조기 종영된 걸 생각하면 아주 현명한 손절이었다. 데뷔권 등수만 물 먹었지.

MC는 참가자들이 숨넘어갈 때까지 지겹게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바로바로∼"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소속사 목록이라도 뜨나.'

주변에서 '캐스팅 콜'을 언급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불어날 때쯤 MC가 팔을 활짝 벌리고 말을 이었다.

"심리 테스트!"

"준비된 성격 유형 검사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딱 맞는 KPOP 컨셉을 매칭할 겁니다∼"

주변에서 긴장 풀린 참가자들이 '와….'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짜게 식었다.

'그냥 예능 분량이었나.'

아니면 저 데이터를 토대로 또 다음 팀전을 결정할 수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내가 낚였다는 점이다.

'젠장.'

참가자들은 스탭의 인도를 따라 열명씩 각각 작은 방으로 이동했다.

이름순으로 끊은 덕분에 기다리지 않은 점은 좋았으나, 현타 때문에 뒷맛이 나빴다.

'괜히 김칫국만 마셨군.'

입장한 방 안은 1인 연습용 부스를 개조해 놓은 곳으로, 2인용 작은책상 가운데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단독 앵글 컷용 공간이었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맞은편으로 돌아가서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자리에 미리 세팅된 태블릿에 문답 표가 떠 있었다.

요새 유행하는 SNS 감성 디자인이 신뢰도를 낮췄다.

'어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양식같은데.'

아마 급하게 외주를 준 것이 아닌가 짐작하며 툭툭 오지선다형 질문을 선택해 갔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49화]

태블릿에 뜬 성격 유형 문답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행동을 고르라는 것.

물론, 다 아이돌 특수 상황이다.

[1. 당신은 21개국 글로벌 팬들에게 선보이는 세계적인 KPOP 콘서트, TaKon(테이콘)의 퍼포머로 선정 되었습니다!

피땀 흘리는 연습에 매진하던 중,당신에게 갑작스럽게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공연까지 남은 기간은 일주일뿐입니다. 당신의 선택은?]

일단 노골적으로 끼워 넣은 자기들 콘서트 간접광고는 무시하자.

차 떼고 포 떼면 대충… 데드라인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하던 거 엎어버리고 다시 할 거냐는 질문이다.

'당연히 안 하지.'

이게 무슨 학교 과제인 줄 아나.

일주일 남았으면 무대 세트부터 의상까지 거의 픽스됐을 텐데, 아이디어 생겼으니 다 갈아엎자고?

'애초에 엎을 짬이 생기려면 한…5년 이상은 걸릴 것 같은데.'

웬만하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내가 절실함을 어필하고 싶어도 그렇지, 이건 열정이 아니라 만용이었다.

[⑤ 아쉽지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던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자.]

나는 최대한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 선택지를 골랐다. 그리고 편집할 수없도록 동시에 카메라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 혼자 하는 거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데… 무대는 종합 예술이니까, 그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같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는 잘 정리해 두고 바로 다음에 써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양념을 쳐놨는데 또 이상한 캐릭터를 잡기는 힘들겠지. 나는 다음 문답으로 넘어갔다.

[2. 당신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뮤직 어워드, ToneA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교통사고로 인해 한 멤버가 중상을입게 됩니다.

다행히 당신은 경미한 타박상만 입었습니다. 곧바로 출발하면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당연히 X발 몸을 정양해야지.

데 뭘 믿고 타박상이니 시상식을 가냐.

근데 아무리 봐도 이거 의지와 노오력으로 시상식에 간다는 선택지가 긍정적으로 뜰 것 같다.

'뭣 같네.'

나는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참으며, 중립 답안을 골랐다.

[④ 병원에서 원격으로 수상 소감을전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직접 가면 더 좋겠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은 즉각 드러나지 않을 수도있으니까요. 검진을 통해서 몸 상태를 확실히 확인해야 활동에 차질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연설명을 붙이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설마 계속 이런 식인가?'

어. 그런 식이 맞았다.

놀랍게도 10가지 문답이 전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그놈의 KPOP 컨셉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제작진만 알것이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나머지 문제를 풀었다.

(은근히 자사 제품을 들먹이는)광고와 관련된 9번 질문까지 넘기고 나니 드디어 마지막 문제가 떴다.

드디어 끝이군. 얼른 10번 문제를 훑어보았다.

[10. 당신은 세계적으로 활약할 글로벌 KPOP 아이돌을 뽑는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에 줄연했습니다. 끝없는 노력과 극복을 통해 마침내 마지막 관문 앞에 선 지금. 어마어마한 캐스팅 콜이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의 선택은?]

이걸 여기다 넣어?

이중으로 낚였음을 깨닫는 순간, 태블릿 화면이 바뀌었다.

3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이다.

'뭔 놈의 카운트다운을 3초만 주냐.'

기겁하는 참가자 리액션을 뽑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순식간에 숫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생각할 새도 없이 곧장 문구가 떴다.

[지금 선택하세요!]

그 순간, 예고도 없이 정면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하세요?"

문밖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잠깐. 정정하겠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낯이 익었다.

왜냐하면… 많이 찍어봤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VTIC의 멤버가 웃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상도 못 한 거물의 등장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거 조금만 인사 늦었다가는 인터넷에서 주리가 틀릴 각이다.

"아,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VTIC 멤버가 손을 뻗어서 악수를 청했다. 나는 거래처 사장이라도 만난 것처럼 두 손 뻗어 악수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무슨 수로 섭외했냐.'

아주사 가 아무라 잘 됐어도 그렇지, VTIC 소속사에서 투자지분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출연하게 만들었냐는 말이다.

VTIC이 Tnet에서 독점 리얼리티라도 진행하나. T1 계열사 광고라도 잡았나.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말조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SNS에 무슨 캡처본이 돌아다닐지 몰랐다.

나는 VTIC 멤버가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착석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상대를 확인했다.

'리더였던가.'

이름과 인기 척도는 기억나는데 다른 포지션은 그다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단 저 팀 내에서도 개인 지표가 괜찮았고, 춤을 잘 춰서 직캠 수요가 좋았던 것만 기억났다.

활동명은 청려.

"일단 제 소개부터 드릴게요. VTIC에서 리더 역할을 수행 중인 청려라고 합니다."

본명은 따로 있던 것 같은데 당연히 모른다.

어쨌든 본인도 '박문대'가 자신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방송 그림상 한번 소개한 거지.

"박문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하고도 뭘 잘 부탁하는 건,학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적당히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더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어야 했나?'

당황해서 오히려 리액션을 깜박했다.

"방송에서도 그러시던데, 굉장히 침착하시네요."

"…너무 놀라서 굳었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저거 지금 안 믿는다는 뜻이지?

청려는 적당히 분위기 가벼워질 만큼만 웃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제가 박문대 참가자님을 만나러 온 이유는… 저희 VTIC의 소속자인 LeTi로부터의 캐스팅 콜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발언이 나올 것을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제작진 돌았나?'

지금 LeTi 이름값이면 순위가 한 자릿수여도 탈주할 놈이 나올 수 있겠는데?

물론 저기 들어간다고 차기 남자아이돌로 데뷔할 수 있는 보장은 없다. 이미 소속사가 보유한 연습생이 한둘도 아닐 것이고.

그러나 워낙 현재 VTIC의 위상이 높아서 20살 전후의 어린애들은 홀라당 넘어가기 딱 좋았다. 심지어 VTIC 멤버 본인이 왔으니까.

'이미 소속사 있는 놈도 눈 딱 감고 사인할 정도다.'

청려는 계속 준비된 것 같은 대사를 쳤다.

"물론 모든 참가자분께 드리는 제안은 아닙니다. 아까 푸신 문답 기억나시나요?"

"예…."

"9가지 상황 문답에서, 박문대 참가자님이 저희 VTIC 멤버들과 가장 응답 일치율이 높은 참가자세요."

청려가 작게 손바닥을 쳤다.

"저희 LeTi 소속사의 아티스트들과 비슷한 인재상을 공유하신다고 볼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방에는 각각 다른 소속사 사람들이 들어가서 캐스팅 콜을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예고편 뽑기 쉽겠는데.'

VTIC까지 나온 걸 봐서는 Tnet하고 친하면서 이름 있는 소속사는 다 긁어모았을 테니, 시청자들은 이런 재미가 없을 것이다.

"우선 LeTi 소속사를 선택하시면 누릴 수 있는 장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말은 뻔했다. 대충복지랑 업적이랑 비전을 읊은 것이다.

'소속사 이미지 챙기기용인가.'

외운 게 신기했다. 리더라 대외용으로 이미 알아둔 거겠지만.

어쨌든 참 감명 깊은 이야기 듣는 것처럼 성의껏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사를 냈다.

청려는 이번에도 적당 선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준비한 듯 유머를 덧붙였다.

"그리고 박문대 참가자님은 이미 아시겠지만, LeTi는 말랑달콤 선배님들의 소속사이기도 합니다. 음…같이POP CON을 추실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하하…, 네."

이놈의 팝콘 망령은 떨어질 생각을안 하는군.

어쨌든 내가 솔깃했다고 생각한 건지, 청려는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책상 위로 서류와 펜이 올라왔다.

계약서였다. 도장 찍힌 모양새나 양식을 보니 정말 쓰는 것 같다.

'진짜냐.'

이렇게까지 연출에 진심일 필요가있나. 나는 떨떠름하게 계약서를 훑었다.

"박문대 참가자님은 VTIC의 소속사, LeTi의 캐스팅 콜에 응답하시겠습니까?"

생각해 보자.

내가 10명이 들어가는 첫 조였다.

남은 인원은 30명. 3조.

'그럼 적어도 두 명은 더 LeTi의 캐스팅 콜을 받는다는 소리다.'

만약에 여기 온 VTIC 멤버가 둘이상이라면?

그럼 나를 포함 총 6명까지 이 캐스팅 콜을 받는다는 게 된다.

여기서 나 말고 한 사람만이라도 더 오케이했다고 치자.

LeTi가 바보도 아니고, 만약에 2명이상 탈주해서 그 소속사로 간다면 한두 번은 묶어서 활동을 시켜줄 확률이 높았다.

아주사 가 그냥 잘 된 것도 아니고, 지금은 거의 신드롬 수준이니까.

'소속사가 이 유명세를 그냥 버리진 못하지.'

그러니 만약 내가 '박문대'의 몸으로 계속 아이돌을 하고 싶지 않다면, 이쪽이 오히려 나은 선택지일수도 있다.

일이 년만 활동하고 흐지부지될 확률이 높으니까.

'이후에는 원래 몸으로 돌아갈 단서를 찾거나… 새로운 진로를 찾아보면 된다.'

활동을 중단하면 금방 잊힐 것이다. 매년 새로 데뷔하는 아이돌만 수십 팀이다.

나는 계약서 위로 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얌전히 펜을 내려놓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계속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아…."

청려가 아쉬운 것처럼 대응해 준다. 무대에서 팬서비스가 좋더니 카메라 앞에서도 인성이 좋군.

"아쉽네요. 박문대 참가자님, 정말 LeTi에서 잘하실 것 같았는데."

"과찬이십니다."

나는 깍듯하게 다시 한번 인사했다.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왜 거절했냐고?

일단…. 혹시라도 나 혼자 오케이한 거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얘네 솔로 활동을 안 시켜주거든.

심지어 VTIC도 유닛 활동만 시켜줬다. 아마 솔로 활동이 그룹 수명을 깎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3년 후 미래에도 LeTi의 신인남자 아이돌은 데뷔하지 않았었다.

즉, 돌연사 확정이다.

'절대 안 되지.'

차라리 프로그램을 하차하면 하차했지, LeTi에서 데뷔 기다리는 건 미친 짓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네.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할 수는 없으니, 다른 쪽 이유를 대답해야겠지.

"음…. 투자비용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예?"

"지금까지 제 데뷔를 위해 주식을 매입해 주신 분들이 계시니까, 그 투자만큼은 돌려드리고 싶어서요."

그렇다.

'…기왕 아이돌을 한다면, 제대로해보는 게 낫지.'

아주사 에서 데뷔하면 T1 산하레이블과 5년 계약이었다.

그럼 적어도 '박문대'가 데뷔하라고 돈과 시간을 쓴 사람들이 만족할만큼은 활동하게 될 것이다.

…뭐 내 입장에서도 그렇다. 어차피 다른 꿈이나 비전이 있는 것도아니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좀 즐거웠고.

'의외로 적성에 맞나.'

무대도 재밌었으니까.

"여기서 데뷔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대답이겠지.

하필 VTIC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절실함을 어필할 타이밍은 잡지 못했지만, 까이진 않을 것이다.

청려는 내 대답을 경청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0화]

"그래요. 박문대 참가자님,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려는 가타부타 더 말 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거절을 수긍했다.

좀 더 대화를 뽑아서 절실한 컷을 뽑아내겠다는 계획대로 진행해 보고싶었지만, 그런 시나리오가 통할 만한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름값이 너무 크다.'

작년 대상 수상자라 급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도리어 '박문대'만 구질구질해 보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 이 계약서는 파기하겠습니다."

청려는 계약서를 집어 들고, 카메라에 잘 보이게 들어서 두 쪽으로찢었다.

' 퍼포먼스군.'

아마 사전에 언질 받은 행위인 것같았다.

"어려운 결정 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청려 선배님께서도 활동 건강하게 마치시길 바랍니다."

대충 파장 분위기에 맞춰 악수하고 허리를 숙였다.

"아, 저희 이번 활동 보셨나요?"

"예? 예."

이만 촬영 끝내는 거 아니었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대화를 잇는다.

성의껏 대꾸해주자.

"이번 앨범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와∼ 혹시 제일 좋아하는 곡이?"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건가? 설마 거절했다고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음, '별 보라'를 특히 좋아합니다."

나는 적당히 수록곡을 뽑았다. 사실 시간 없어서 들어본 적은 없고,

'박문대' 서치하다가 SNS에서 공유된 팬 글에서 본 곡이었다.

"아, 그거 제가 작사한 건데."

청려가 반갑게 자신을 가리켰다.

'홍보도 알뜰하게 챙겨가는군.'

이미 이 이상 잘나갈 수 없을 만큼 잘나가는 와중인데 말이지. 과연 짬 있는 아이돌다웠다.

"아하, 저 왔다고 일부러 말해주셨구나."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니까 별수 없었다.

청려는 마주 웃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갑자기 문밖으로 나갔다.

'뭐지.'

다시 들어온 청려의 손에는 웬 봉투가 들려 있었다.

"별건 아니고 홍삼인데, 먹고 힘내시라고 가져와 봤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빨간 봉투에 금색으로 적힌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걸 봐서는 확신의 PPL 이었다.

'어찌 됐든 홍삼은 환영이지.'

얼른 받아들자, 청려가 다시 한번마무리 인사를 했다.

"그럼 화이팅!"

"네, 화이팅."

싱글벙글 마주 보며 웃는 것으로촬영이 끝났다.

곧바로 스탭들이 들어와서 청려를 챙기기 시작했다.

몇몇은 카메라를 조정하고 태블릿 PC를 만졌지만, 다수가 청려에게 붙은 것은 확실했다. 아마 VTIC 쪽 인원인 것 같았다.

'지극 정성이군.'

하기야 몸값이 얼만데 나라도 저런다.

청려는 스탭이 옷에 붙은 마이크를 수거해 가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말을 걸었다.

"문대 씨."

"예."

아까와 달리 별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굳은 표정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말 거는 사람 표정이었다는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LeTi 괜찮은 소속사 맞아요. 정산도 괜찮고. 혹시 프로그램 끝나고 상황 되면 연락해요."

탈락하면 컨택해 보자는 뜻이었다.

'진심인가.'

아니, 소속사 임원도 아니고 뭐하러 여기서 연습생을 섭외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 회사 주식 가지고 있나.'

그러면 말 된다.

그래도 굳이 박문대한테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뭐… 데뷔조에 쓸만한 메인 보컬이 없을 수도 있겠지.

나는 긴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스탭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방에서 퇴장해서 대기실로 이동했다.

아마 스포일러를 유출을 막기 위해, 아직 이 깜짝 심리 테스트를 받지 못한 참가자와 격리한 것 같았다.

"형!"

들어가자마자 먼저 앉아 있던 김래빈이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서 제안받으셨어요?"

"LeT 였어."

"저도 LeTi였습니다!"

역시 VTIC 멤버가 더 왔었군.

김래빈이 답지 않게 흥분해서 VTIC을 만난 이야기를 풀었다.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고 있자니,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던 류청우가 아는척을 했다.

"아, 너희 먼저 끝냈구나."

류청우는 표정만 봐도 심적 갈등했다는 티가 났다.

'설마 여기도 VTIC인가.'

3/10은 너무 후한 확률인데.

옆에서 안면만 있는 참가자가 치고 들어왔다.

"형님! 어디서 캐스팅 콜 받으셨습니까!"

"나는… 원더홀."

티홀릭의 소속사였다. 오랜 기간 아이돌 잘 뽑기로 유명한 대형소속사.

'이쪽도 괜찮은데.'

물어본 놈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류청우는 기 빨린 표정으로 입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의왼데.'

거의 데뷔가 확실한데도 탈주각을 본 것 같다는 점이 좀 신기하긴 한데, 뭐 사정이 있겠지.

대기실은 속속들이 참가자들이 돌아왔다. 곧 첫 타자였던 10명이 다 모였다.

'일단 첫판에는 다 거절했군.'

솔직히 하위권 한둘쯤은 탈주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생각보다도 소속사 라인업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판에도 전원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이쯤 되니 이상한 공명심이라도 생기는지 뿌듯해하는 놈들이 속출했다.

"조, 좋은 분 같았어."

느지막이 돌아온 선아현이 밝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솔로 활동 중인 모 가수가 몹시 친절하게 격려의 말을 해준 듯했다.

"그래도 거절했네."

장난삼아 한 소리에 선아현이 펄쩍뛰었다. 선아현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당연히 끝까지 해야지…! 거,거기 가면… 같이 데뷔 못 하잖아…."

아무래도 선아현은 처음 찍어 먹어본 긍정적인 또래 관계에 극도로 과몰입한 것 같다.

'딜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다른 놈들은 다 튀었을 텐데.'

나는 약간 안쓰럽게 놈을 보다가,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으, 응!"

선아현은 기운차게 긍정했다. 김래빈은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선아현을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오묘한 판에 3번째 그룹이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레티 아깝네∼ 아까워!"

첫 번째로 돌아온 큰세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저렇게 말했다.

이놈도 LeTi에서 제안을 받았다는거군.

'김래빈, 큰세진, 그리고 나인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대충 소속사 경향성이 보이는 게 제법 흥미로웠다.

그리고 큰세진의 말은 더 웃겼다.

아깝다니.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목표가 최대한 빨리 데뷔하는 것같았는데 이렇게 사리에 밝은 놈이 LeTi로 갈 리 없었다.

그러나 큰세진은 마이크가 없고,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 갈아탈 걸 그랬나. 좀 아쉽네."

생각보다 고민을 좀 한 것 같은데?

기존에 본인 소속사가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 보니 저절로 흘러 나온 말인 것 같았다.

사실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더 좋은 소속사로 갈아타는 건 사실 업계 환경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주사 에서 최종 데뷔하는 연습생들의 소속을 양도받는 것은 사실 거대 방송사의 횡포나 다름없었다.

속된 말로 깡패짓.

소속사야 울며 겨자 먹기 식이긴했지만, 어차피 데뷔조 탈락한 연습생이니 방송에 내보내서 재활용 하는것 같았다.

'방송국과의 관계의 윤활유 역할이지.'

하지만 이번 시즌이 너무 잘 되다보니 은근한 압박이 있는 모양이다.

자진 탈락해서 소속사에 남아줬으면 하는 압박 말이다.

나는 촬영 쉬는 기간에 큰세진에게 지나가듯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어, 요새 그런 말 좀 듣지. '지금까지 같이 연습한 동생들하고 같이 데뷔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 사람들 진짜 재밌다니까?

무슨 혜택이라도 걸고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러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내킬 리가 없다.

"농담이야. 여기서 데뷔 가야지∼"

큰세진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농담이 아니라 진짜 고민했던게 분명했다.

'의외로 상위권에서 흔들리는 놈들이 많았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라도 하나 나가서 경쟁률 좀 줄여줄 생각은 없나.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탈주한 것은 하위권 한 명뿐이었다.

"최원길 참가자는 소속사 트레블러의 캐스팅 콜에 응답하여, 오늘부터 아이돌 주식회사 를 떠나게 됩니다"

나는 감탄했다.

'각 잘 봤네.'

이번 화 여론 보고 빨리 손절한것이 틀림없었다.

어려서 그런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머리는 좀 쓰는것 같았으니 싱글벙글 웃으며 가진 않았겠지.

"우, 우리 소속사?"

뒤에서 골드 1이 당황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놈 트레블러 소속이었지.'

티홀릭 소속사의 제안을 어렵게 거절했다던데. 아무래도 원소속사에 어느 정도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계속해 보겠다는 배짱도 있던 것같고.'

어쨌든 그걸로 캐스팅 콜 이벤트는 마무리되었다.

목적을 못 이뤘다는 것에 약간 입맛이 씁쓸했지만, 분량은 확보했다.

'VTIC 분량을 자르진 않겠지.'

기껏 섭외해 놓고 날릴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제작진들은 최원길 하차에 대한 연습생들의 리액션을 몇 컷 따고는 곧바로 순위 발표식 준비에 들어갔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캐스팅 콜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착석 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견디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 소재가 화려해서 그런지 다들 떠드느라 정신이없어 보였다.

"헐, 그 기획사가?"

"대박."

"와… 청려님 실물 어때요?"

순위 발표식 직전의 긴장감마저 수위가 낮아졌을 정도였다.

"후∼ 라인업 장난 아니었네. 갈등한 애들이 많을 만했다."

큰세진이 휘파람을 불며 소속사 이름을 하나씩 꼽았다. 그리고 살짝주변을 살피더니, 희한한 미소와 함께 속닥거렸다.

"야 그거 아냐?"

"뭐."

"저기 앉은 내 동명이인 형님도 엄청 갈등했대."

아역배우 출신 이세진을 가리키는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제일 늦게 합류했군.'

이세진은 거의 최원길 하차 소식과 동시에 도착했었다.

별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안 썼는데, 음… 사실 지금도 별 관심 없다.

큰세진은 예전부터 이세진에게 별좋은 감정이 없어 뵀지만, 어지간히 '박문대'가 편해졌는지 웃으면서 본심을 슬슬 풀어놨다.

"원래 배우 소속사였잖아. 진짜 아이돌로 갈아타고 싶었나?"

"그럴 수도 있지."

탈락할 것 같은데 아이돌이 계속하고 싶으면 갈아타는 것도 고려해 볼법했다.

나이 때문에 당장 데뷔하지 않는이상 차기 팀 노리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자기 알아서 할 일이지 뭐.'

내가 별 관심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자투리 시간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순위 발표식 촬영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이 순위 발표식을 준비할무렵.

캐스팅 콜 이벤트로 깜짝 출연했던 소속사 연예인들은 이미 다른 스케줄로 자리를 뜬 후였다.

활동 시작하면 스케줄이 분 단위로있다는 VTIC도 마찬가지였다.

벤에 탄 두 사람은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점심을 주문할 때야 겨우 말문을 텄다.

"형, 어땠어요?"

"그냥 일한 거지."

청려는 덤덤히 대답했다.

"형도 세 명 봤나, 눈에 띄는 애없었어요? 난 만난 애들 괜찮던데."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