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는 참가자라.'
청려는 웃으며 아주사 참가자들과의 촬영을 끝마친 것과 관계없이,그들의 장기적 성공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그 프로그램의 현재 상위권이 오디션 예능의 힘으로 잘나가는 중이긴했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 나왔을때의 경쟁력은 또 별개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스토리 내에서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일 수도.'
어차피 소속사 내부 경쟁에서 탈락하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팽당한 케이스가 다수였으니까.
청려는 그냥 점심 메뉴 이야기나 계속하려다가, 무심코 떠오른 한 참가자를 입에 담았다.
"박문대?"
"아, 닭발?"
그보다 어린 멤버가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청려는 웃지 않았다.
"설문지 답이 나랑 전부 일치했어."
"헐! 진짜? 신기하네. …형이랑 성격이 비슷한가?"
"…어느 정도는."
"헉, 진짜?"
청려는 경악하는 동생을 무시하며, 약간 아쉬워했다.
'그런 타입이 팀에 하나 있으면 좋은데.'
박문대는 설문의 보기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방송을 신경 써서 어떻게든 중립적인 답을 찍은 기색이 역력했다.
"음, 형이랑 비슷한 성격이면 굉장히… 냉정하겠는데?"
"현실적이라는 뜻이지?"
"그, 그렇지."
타인의 사정에 몰입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인 사고는 잘 못 하는 타입.
연예인보다 일반 기업에 더 어울리는 인재상 말이다.
대체로 아이돌 지망생들, 특히 재능 있는 어린 애들은 예체능 계열 특유의 장단점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덜 차갑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그들이 직면할 현실은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성인 사회였다.
"뭐, 형 같은 사람이 리더인 게 좋긴 해."
"그래? 고맙다."
자기 얼굴에 금칠이라고 볼 사람도있겠지만, 청려도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머리 식은 사람이 분위기 잡는 편이 좋다.'
꼭 자신이 리더를 맡은 VTIC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문대는 꽤 괜찮은 차기 데뷔조 후보군이었다.
'한 일이 년 구르면 춤도 되겠지.'
그리고 그 성격에, 연상이라면 연차가 짧아도 저절로 팀에서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청려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본 일이라 장담할수 있었다.
'그럼 같이 일하기 편해질 텐데.'
팀과 회사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VTIC이 회사와 재개약하며 지분을 좀 받았다고 해서 차기 남자아이돌에게 더 신경 써줄 필요도,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데뷔하면 경쟁자인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양심상 권유 한번 해줬으니 충분했다.
'본인이 생각 있으면 연락하겠지.'
짧은 결론을 끝으로 청려는 머리에서 '이미 끝낸 스케줄'에 줄을 긋고 치웠다. 바쁜 계절이었다.
순위 발표식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이돌 주식회사 촬영장 안.
포맷은 똑같았다. 그러나 인원은 확 줄어들었다.
붙을 수 있는 것은 20명뿐.
그것만으로도 장내에 긴장감이 조성되 었다.
그리고 그 비좁은 인원에 변동을 일으킬 요소가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3차 팀전의 두 1위 후보팀 리더분들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팀전 우승 혜택이다. 1위 팀에서 합의한 한 명이 무조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 생존권.
우리 쪽은 당연히 골드 1으로 합의가 끝난 상태다. 촬영 전에 사전 인터뷰 때 이미 제출했기도 하고.
"저희 달토끼 팀은… 하일준 참가자를 선정했습니다."
그러나 큰세진의 말이 끝나고도 꽤 오랫동안 허스키야 팀의 리더, 류청우는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 허스키야 팀, 선정한 팀원을 발표해주시기 바랍니다."
MC의 재촉이 신난 것처럼 들리는건 내 피해의식 때문이겠지.
류청우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희 팀은 최원길 참가자를 선정했었습니다."
이야, 끝까지 한 건 하고 가네.
'걔가 의외로 난 놈이었나?'
솔직히 저걸 챙겼을 줄은 몰랐다.
그럼 최원길은 50%의 프리패스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갈아탔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쨌든, 놈 덕분에 상황이 애매해졌다.
이미 누구를 선정했는지 촬영 전에 제작진에게 전달했었기 때문이다.
눈치 보니 최원길이 탈주한 후 급하게 바꾸는 것도 제작진 측에서 컨펌이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제작진은 당황한것처럼 다급히 회의하는 모션을 취하더니, MC에게 사인을 보냈다.
MC는 제작진의 스케치북을 보고 천천히 대사를 완성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는데요, 원칙상 자진 하차가 발생할 경우 당연히 그 참가자의 혜택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캐스팅 콜 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하여, 허스키야 팀에게 3분 간의 상의 시간을 추가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류청우는 목례하고 앉아서 팀원을 모았다.
그리고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끝났군.'
이건 안 봐도 저 팀이 1등이다.
'저렇게까지 화면을 뽑아놓고 혜택을 안 주면 그림이 안 산다.'
제작진이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판을 짰을 리가 없었다.
결국, 골드 1은 알아서 생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전승은 물 건너 갔군.'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하려는 골드1의 얼굴을 보니, 저쪽도 은근한 싸함을 느끼는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1등은 달토끼 팀이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1등은… 허스키야 팀!"
"감사합니다."
그러나 웃기는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 허스키야 팀의 추가 합의에 따라, 무조건 생존의 혜택을 받는 참가자는… 차유진 참가자입니다…!"
저 미친놈들이 혜택을 차유진에게줬던 것이다.
'둘 중 하나겠어.'
합의가 결렬됐거나, 차유진이 말도 안 되게 밉보였거나.
어쨌든 그건 자기들 알아서 할 사정이고, 달토끼 팀 쪽은 2등스러운 분위기였다.
"좀 아쉽네요."
"그, 그러니까요."
"야야, 아니야! 정정당당하게 등수받는 거지!"
골드 1이야 호쾌한 척 외치고 있긴 한데, 솔직히 속으로 허스키야 놈들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라도 벌써 했다.'
팀전 1위 발표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진짜 순위 발표가 시작되었다.
"17위는… 권희승 참가자입니다!"
캐스팅 콜 로 풀어졌던 분위기가 거짓말인 것처럼,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공기가 조였다.
"가, 감사합니다…."
18위에 이어 두 번째로 불린 골드 2가 대놓고 안심한 표정으로 단상에올라갔다.
'저놈도 은근히 계속 가네.'
최종까지 갈 줄은 몰랐다. 턱걸이긴 했지만.
그렇게 10위까지 별다른 이변 없이 순위가 발표되었다. 붙을 만한 사람들이 쭉 붙었다는 소리다.
그나마 놀라운 점은 이세진이 소폭 상승했다는 정도일까.
"11위는… 이세진∼ A! 참가자입니다!"
직전 팀전에서 대놓고 싸운 것치고는 괜찮은 성적이었다. 아마 빌런으로 찍힌 최원길과 싸운 덕에 의문의 보정을 받은 모양이다.
옆에서 큰세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세진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 부럽다."
큰세진은 마치 떨어질까 걱정된다는 것처럼, 살짝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기만 아닌가?
기세상 누가 봐도 붙을 놈이었다.
속으로 '제발 늦게 불러라' 염불을 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말 프로다운 카메라 의식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단상에서는 MC가 적당히 뜸을 들이며 쭉쭉 순위를 발표해 나갔다.
친분 있는 참가자들 대부분은 이름이 불려 단상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박문대의 이름은 전보다 늦지 않게 불렸다.
"감사합니다."
나는 6위 자리에 착석했다.
지난번보다 소폭 하락세였다.
'역시 순위가 떨어졌군.'
표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상위권 인플레만큼 내 표가 불어나지 않은 것뿐이다.
인플레가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돈 쓴 만큼 투표할 수 있으니, 팬들은 마이너스 투표를 의식할수록 불안감에 더 표를 사게 됐다.
그리고 이 경향성은 참가자가 간절해 보일수록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쫄리면 더 지르라는 거지.'
하여간 제작진 놈들이 지갑 쥐어짜는 방법은 기가 막히게 채택했다는말이다.
그러나 분량이든 등수든 과거든 논란이 있는 다른 최상위권들과 비교할 때, 최근 '박문대'는 특별히 꼬투리 잡힐 상황이 없었다.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논란거리를 만드는 건 미친 짓이었다. 편집에서 수위를 조절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제작진이니까.
' 캐스팅 콜 을 그냥 넘긴 게 역시 좀 아깝다.'
약간 아쉬웠지만, 이미 지나간 배였다. 어차피 VTIC이 튀어나온 이상 박문대 중심의 분량을 뽑기는 글렀던 것이다.
"축하한다∼"
"어. 고맙다."
소폭 상승해서 7위로 마감한 큰세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하이파이브를요청했다. 아주 정석적인 동료 참가자의 리액션이었다.
'이놈도 기세를 봐서는 데뷔할 것같은데.'
학폭 논란 때 붙은 마이너스 표를제외하면 큰세진이 박문대보다 표수가 많았다.
예상대로 투표자들이 결집한 모양이다.
선행이 내 뒤통수를 위협할 줄이야.
'역시 호구 짓이었나….'
그 당시 같은 팀이라 별수 없긴했다. 그래도 약간 배알이 꼴리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내심 짧게 혀를 차고, 도로 MC에게 시선을 돌렸다.
1위는 차유진이었다.
"와우!"
차유진은 신나게 웃으며 1위 배지를 받다가, 문득 진지하게 태도를 가다듬고 소감과 감사를 전했다.
"여기 나와서…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더 강하게 멋진 모습 만들겠습니다. 1위 정말 감사합니다."
문법은 여전히 해괴했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을 만큼 진중한 목소리였다. 최근 분량과 시너지가 날만한 면모였다.
'저래서 1등 했군.'
노리고 저러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점이 과연 여기서 끼 스탯이 가장 높은 놈다웠다.
"주주 여러분께서 선택하신 1등 주식, 차유진 참가자!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적당한 박수 소리와 함께 차유진은 1등 좌석으로 올라가 앉았다.
남은 생존자는 최하위 두 자리.
그리고 아직까지도 골드 1은 단상에 올라오지 못했다.
'일단 후보에는 들었다.'
20위, 19위 후보 넷이 전광판에 뜨고, 골드 1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희망적이었다. 확률은 50%였으니까.
그리고 골드 1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20위!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결승 무대에 진출할 마지막 참가자는… 서태문입니다!"
…없었다
팀전 1위 때처럼, 절반의 확률이 또다시 골드 1을 배신한 것이다.
확률 50%랑 원수라도 졌나 싶은 결과였다.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투표해주신 주주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골드 1, 하일준은 21위로 오디션 참가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형!"
"야, 연락해!"
MC의 마무리 멘트가 끝나자마자 탈락자들은 전보다 덜 형식적인 배웅의 시간을 가졌다. 몇 달 간 부대끼고 지냈으니 어지간하면 친한 놈이 서넛은 생겼을 테니까.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골드 2와 선아현 다음으로 골드 1과 인 사하게 되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데, 하필 감성에 푹 젖은 둘 다음에 대화하게 되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단 적당히 악수를 하자.
"문대∼"
그러나 이쪽도 만만찮게 감성 빌드업이 됐는지 허그로 시작했다.
'이걸 떼어낼 수도 없고.'
찜찜해하려니 골드 1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쉬운 기색을 꾹 누른 것 같은 말을.
"넌 데뷔할 것 같다. 힘내."
'박문대'의 몸에 막 들어온 나에게, 몇 달 뒤 아이돌 지망생의 덕담에 복잡한 심정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면 과연 믿었을까 모르겠다.
'거참.'
나는 한숨 대신 덕담을 돌려줬다.
"형도요."
"뭐'?"
"형도 금방 데뷔하실 것 같습니다."
골드 1, 하일준은 허그를 풀고 히죽 웃었다.
"그렇지? 난 잘될 준비가 됐다니까."
모른다. 21위라는 애매한 최종 등수로 과연 성적을 낼 수 있을지.
그러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카메라가 돌고 있으니 적당히 해치우자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야말로 고마웠다!"
57명이 탈락하고 남은 20명의 참가자. 이제 기다리는 건 결승 전 뿐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2화]
탈락자들이 다 방 빼고 나간 뒤,남은 참가자들은 숙소에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재집합 했다.
눈물 콧물 짜며 배웅할 때는 언제고, 이젠 다들 이상한 선민의 식에 차 있는 분위기다.
'어쩔 수 없지.'
불특정 다수의 응원을 받으며 파이널까지 왔으니 자아가 비대해질 만도 했다.
웬만큼 멘탈 강한 놈이 아니면 분위기에 취할 만도 했다. 나이도 어리고.
MC는 퇴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영린이 촬영을 진행했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그 마지막 무대를 완성할 20명의 참가자분들. 축하드립니다. 우리 손뼉 칠까요?"
"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인사치레가 아니다.
'왜 아무것도 없냐.'
분명 마지막 팀 가르기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촬영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기 중인 소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있는 건 전광판 뿐이었다. 어쩌려는 거지.
"우선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여러분이 공연할 곡을 공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글러입니다.]
"헉."
전광판에서 작곡가 팀이 나와 인사했다. 유명 아이돌 타이틀 몇 곡 작업했던 이름 있는 팀이었다. 익숙한 뮤비들이 몇 컷 지나가자 참가자들이 흥분했다.
[저희 이슬러가 참가자분들께 드리는 곡을…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새 곡이군.'
파이널까지 와서야 데뷔 팀 앨범에 넣을 수 있는 곡을 줬다. 시즌 시작 전 예산 규모가 짐작이 간다.
[Lalu∼ La Li∼]
어쨌든 곡은 좋았다. 귀에 잘 붙고, 음원 차트에서 프로그램 빨로 반짝 진입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질 곡은 아니었다.
문제는 가이드 보컬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이거 그냥 되는 대로 부르는 것 같은데.'
잠깐, 설마?
"이 곡의 제목은 Final입니다. 그리고 가사는… 없습니다!"
"예?"
"가사가 없어요?"
영린의 말에 참가자들의 리액션이 쏟아졌다. 곧 전광판의 작곡 팀 중 하나가 어색하게 파이팅 포즈를 잡으며 대본을 읽었다.
[여러분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Final 데모 버전을 완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파이팅!]
영린이 영상의 소리를 이어받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Final은 미완성 곡입니다."
"참가자분들께서 직접 가사를 짓고, 안무를 완성해 이 곡에 어울리는 부제를 붙여주셔야 합니다. 또한, 편곡도 가능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
'자체 제작 망령이라도 붙었나.'
아무리 셀프 프로듀싱하는 아이돌이 잘 나간다고 해도 파이널에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3차 팀전에서 달토끼 팀 빼고는 사실상 제작 파트 다 죽 쑨 거 못 봤나?
허스키야 팀 1등은 차유진빨이었지. 거기도 음원만 들으면 별로였다.
'심지어 결승은 생방송인데 어쩌려는 거냐.'
나는 떨떠름한 채로,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무대 곡을 마저 들었다.
확실한 건 일단 김래빈이랑 같은 팀이 되어야 한다. 작사에다 편곡?
더 볼 것도 없고 이놈부터 무조건 잡고 가자.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팀을 짜는데.'
마치 그 생각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영린이 발표했다.
"그리고 함께 무대를 만들어갈 팀 구성은… 완전히 자유입니다."
"…!"
"누구와 어떤 팀을 구성하든 제작진은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최대 인원 7명 안으로 팀을 구성해, 연습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아이고.
'개판 났군.'
이거 누구든 처신 잘못하면 막판에 논란글 생성기 되겠는데.
내가 알기론 결승 당일 생방송에도 만만치 않게 지뢰를 깔아놨었다. 설마 아직 결승 무대 준비 파트에서도 지뢰밭일 줄은 몰랐다만.
"그리고 파이널 무대 우승 혜택은… 천만 원입니다."
"허억!"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리가 터졌다.
갑작스러운 상금에 다들 당황한 모양새였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제작진은 참가자들의 최종 데뷔 여부는 온전히 주주님들의 손에 맡기기 로 결정했습니다."
이 마음에도 없을 소리는 됐고, 천만 원이면… 세금 떼면 대충 780만 원쯤 받을 것 같다.
'어떻게 되든 저건 타가고 싶은데.'
참고로 장기자랑에서 탄 냉장고는 아직도 못 받았다. 설마 이놈들 상금도 미루다 입 싹 닦는 건 아니겠지.
계산하면서 영린의 남은 말을 들었다.
"그럼 함께 파이널 스테이지를 만들어나갈 팀원 구성, 지금… 시작하세요!"
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참가자들이 우르르 행동을 계시했다.
"문대야."
"형."
양옆에서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7위 큰세진, 5위 김래빈이다.
큰세진이 김래빈을 확인하고 빙긋 웃었다.
겹치는 포지션 없다 이건가.
"일단 우리 셋은 같이 갈래?"
"좋습니다."
"그래."
순식간에 합의가 끝났다. 그 와중에 저쪽에서 2위 자리에 서 있던 선 아현이 우물쭈물 다가왔다.
뭐, 선아현이야… 끼워도 손해는 안 보는 놈이니까 괜찮겠지.
"같이할까?"
"으, 으응!"
선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른 팀원들도 별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4명.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2위, 5위, 6위, 7위.
'좀 과한가.'
자칫하면 상위권이 친목으로 자기들끼리만 했다고 적폐로 욕먹을 것 같은데.
슬슬 실력은 괜찮고 순위가 비교적 낮으며, 친분 없는 참가자를 넣어야 할 것 같았다.
"형. 차유진은…."
"음 "
김래빈이 운을 띄웠다.
나는 저쪽에서 이미 이야기를 나누는 차유진과 류청우를 확인했다.
1위, 4위.
아, 이건 안 되겠는데.
"그냥 여기서 마감하는 건 어때."
"예?"
'어차피 이걸 거절하고 안 친한 낮은 순위 넣자고 하면 안 통한다.'
나는 깔끔히 추가모집을 포기했다.
큰세진이 곧바로 지원사격으로 들어왔다. 이놈도 벌써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우리 무대에서 비중도 생각해야 하잖아∼ 마지막이니까 많이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지금 각 자 포지션도 딱 좋고!"
부정 못 할 것이다. 차유진 들어오면 편집이나 분량에 무슨 왜곡이 나타날지 모른다.
김래빈은 고민하는 얼굴로 잠시 말이 없더니, 곧 평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표가 걸린 것도 아니고 상금일 뿐이니까.'
아직 투표 방식은 모르겠지만, 혹시 개인 투표라 승리에 불리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최종적 으로 무대 분량이 더 중요했다.
4명이면 충분하다.
정리된 상황에 큰세진이 활기차 게발을 돌렸다.
"그럼 이대로 보고…."
"저기. 형님들!"
그때, 큰세진의 말을 끊고 누군가 들어왔다.
골드 2였다.
"아, 저희… 같이할 수 있을까요?"
골드 2는 놀랍게도 11위 이세진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수로 꼬셨냐.'
골드 2는 초조하고 긴장한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솔직히 뻔히 보였다.
저걸 어떻게 거절해야 욕을 안 먹을 수 있을까.
힐끔 큰세진을 쳐다봤다. 안쓰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절 문구를 쥐어짜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껏 괜찮은 소수정예로 맞춰놨는데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겠군.
하지만 골드 2는 씩씩했다. 좀 서글픈 의미로 그랬다는 뜻이다.
"저 진짜!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어느 파트 맡아도 딴소리 없이 잘할 수 있고요!"
이거 그림이 이상해지는데.
차라리 차유진이 와서 끼워 달라고 하면 거절해도 괜찮았다. 적당히 유머 좀 섞어서 라이벌 기믹으로 가르면 되니까.
근데 18위인 고1이 이러는데 거른다? 심지어 이 팀 과반수가 첫 번째 팀전에서 쟤랑 같은 조였다.
'편집 거리 주게 생겼군.'
나는 한숨을 참았다.
차라리 말 걸자마자 '미안, 넷이하기로 했어.' 같은 말로 빠르게 끝내고 갔어야 했다. 다만 아무도 그걸 총대 메고 싶진 않았겠지.
이러면 그냥 받아주는 게 낫긴 하는데, 이미 직전에 분량 핑계로 차유진을 쳐냈다. 발언한 나나 큰세진 입으로 받자고 하기도 이상했다.
"가, 같이하면 안 되나…?"
다행히 여기서 제일 마음 약한 놈이 먼저 항복 선언을 해줬다. 선아현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입을 연 것이다.
'잘했다.'
이제 김래빈 설득이 관건인데….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
'이걸 쉽게 받아줬다?'
김래빈이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한번 편집 매운맛을 봐서 기민하게 반응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으음, 문대는 어때?"
"괜찮아."
"그래. 그럼 우리 같이할까?"
"허업! 감사합니다!"
골드 2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만세 포즈를 취했다. 뒤에서 이세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폈다.
저건 아직도 뻣뻣하게 굴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감사는 무슨, 잘해보자."
큰세진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영린에게 향했다. 그리고 몇 마디 주고받는가 싶더니, 금방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1조 확정!]
[선아현 (2), 김래빈 (5), 박문대 (6), 이세진 B(7), 이세진 A(11), 권희승(18)]
확정됐다.
생각보다 얼렁뚱땅 만든 꼴이 돼서 좀 떨떠름하긴 했다. 이세진 같은 요주의 폭탄을 끼우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우리끼리 하겠다고 설치는 밉상으로 찍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때, 뒤에서 아쉬움 가득한 차유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놓쳤어요!"
아무래도 저 팀에서 메인보컬로 '박문대'를 거론하고 있었나 보다. 1조가 너무 빠르게 만들어져서 타이밍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형! 다음에 같이해요!"
"그러면 좋지."
나는 참가자들 틈에서 손을 붕붕 흔드는 차유진에게 대답하며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인데 다음이 어디 있냐.'
차유진은 끝까지 해맑은 뇌의 소유자였다.
"이야, 우리 팀 빨리 만들어서 연습시간이 확 늘었네요!"
큰세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화를 진행했다. 4차까지 왔다 보니 슬슬 쓸데없는 '서로 알아가는 과정'의 시간 소비가 없어서 좋았다.
"일단 리더를 뽑고, 바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
사람들은 감탄사와 함께 큰세진을 계속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팀전에서 리더를 맡았으니 이번에도 하겠거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큰세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리더 입후보 안 하겠습니다!"
"왜, 왜?"
충격에 휩싸인 팀원들에게, 큰세진이 일부러 부끄러운 것처럼 과장되게 눈을 깜박였다.
눈알 찌르고 싶네 저거.
"저… 메인 댄서 하고 싶어요!"
두 가지가 무슨 겸직 불가 포지션도 아니고 이제 와서 웬 개소린지 모르겠다.
'너 2차 때 둘 다 해 먹었잖냐.'
설마 저 발언을 메인 댄서 노릴 때 써먹을 생각인가.
'리더도 포기했어요!'
같은 구린 멘트랑 함께 말이다.
의외로 배우 출신 이세진이 툭 말을 던졌다.
"둘 다 할 수 있잖아."
"아∼ 그렇죠. 근데 이번에는 좀 더 혼신을 다해서 도전해 보려구요."
큰세진이 웃으며 손을 모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짤 게 많으니까, 음, 3차 때도 생각했던 건데요. 창작에 재능 있는 사람이 리더를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 말에 김래빈에게 눈을 돌렸다.
김래빈은 멀뚱멀뚱 큰세진을 보다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저는 박문대 형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거 아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3화]
"문대 형이 리더요?"
"예."
골드 2의 되물음에 김래빈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어하는 얼굴이 딱 2차 팀전 당 시 팀원들의 반응이 떠오른다.
'그만해라.'
이 이상 개그 분량을 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김래빈은 말릴 새도 없이 꿋꿋이 말을 이었다.
"우선 침착하고, 안목이 좋고, 주변을 잘 챙기십니다."
"오."
큰세진은 턱을 긁적이고 있었다.
옆에서 선아현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반응에 흥이 올랐는지 김래빈이 속사포처럼 와다다 말을 풀어놓았다.
자기 논리에 자기가 감화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순간 판단력이 좋으시다는 점이 리더로서 가장 뛰어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모들로 볼 때 종합적인 창작이 필요한 상황에서 좋은 역량을 발휘하실 것 같습니다."
"… 그건 그렇네요."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골드 2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진도 의외로 별 말없이 얌전하다.
'이게 먹혔냐.'
나는 떨떠름하게 상황을 살피다가, 문득 괜찮은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더면 간절해 보이는 분량 뽑기 좋지 않나?'
어차피 막판인데 모 아니면 도다.
좀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리더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난 해도 상관은 없는데. 너희 괜찮겠어?"
"그, 그럼요!"
골드 2가 지레 찔려서 왁 대답하자, 팀원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나도 피식 웃고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제가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오∼!"
"축하해∼"
박수받고 리더 배지를 찼다. 싸구려 금속 배지에서 'L'이 반짝였다.
'나쁘지 않다.'
작사는 김래빈이 하고 안무는 선아현이 짤 테니 큰 부담도 없었다.
'이세진만 좀 주의하면 되겠어.'
지난 팀전에서 몇 번 써먹고 잊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특성이 이번에는 등급 값을 해주길 바랄 뿐이다.
아, 특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드디어 레벨 업했다.
지난 팀전 연습하며 1,000번째 연습 포인트들을 모은 덕분이다.
'노래하고 춤 둘 다 해서 겨우 레벨 올렸지.'
나는 혀를 차며 오랜만에 상태창을 불렀다.
[이름 : 박문대 (류건우)]
Level : 13
칭호 : 없음
가창 : A
춤 : C+
외모 : B+
끼 : B-
특성 : 잠재력 무한, 듣고 보니 맞는 말이 군(C), 센터가 되고 싶어(C), 바쿠스 500(B)
! 상태 이상 : 데뷔가 아니면 죽음을
남은 포인트 : 1
'춤에 찍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C+ 능력치로 선아현, 큰세진 듀오가 수정한 안무를 따라가는 건 지옥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여분 포인트 하나는 남겨두려는 계획이 박살 나기 직전까지 갔 었다는 것만 확실히 해두고 싶다.
그리고 하나 더 남겨둔 것이 있다.
[명성의 농익음!]
1,000,000명의 사람들이 당신의 존재를 기억했습니다!
: 영웅 특성 뽑기 👈 Click!
'100만 명이라니.'
살 떨리는 수치다.
'박문대'의 이름과 얼굴, 특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사실 이 뽑기를 남겨두고 싶어서 남겨둔 건 아니다. 순위 발표 도중에 달성해서 지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이건 지금 돌려보겠다.
상태창에 능숙하게 눈짓하자, 슬롯머신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빛 칸에 멈췄다.
[특성 : '부동심 (B)' 획득!]
마음이 외부의 충동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 정신적 충격 -50%
'나쁘지 않군.'
리더가 된 상황에 필요한 특성이었다. 화나지 않게 도와주겠군. 나는 적당히 만족했다.
그러나 또 팝업이 떴다.
[특성은 총 3가지만 보유할 수 있습니다!]
[센터가 되고 싶어 (C)][바쿠스 500(B)]
[부동심(B) new!]
뭐?
'이런 식으로 밸런스를 맞추냐.'
하기야 게임 시스템이라면 무한정 특성을 계속 가질 수 있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특성 목록을 훑었다.
일단 '잠재력 무한'은 없다.
'삭제 불가, 그리고 아예 카운트되지 않는 것 같군.'
지금 팝업에 따르면 보유 가능 특성은 3가지였다. 그런데 '잠재력 무한'을 포함해 지금까지 4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아마 이게 맞을 것이다.
'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삭제할 것을 골랐다.
[특성 : 부동심(B)이 식제되었습니다!]
방금 얻어서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건 이미 쓸 데가 있다.'
'센터가 되고 싶어(C)'는 끼 스탯을 보정해 주기 때문에 버리기 아까웠다. '부동심 (B)'보다 등급은 낮지만, 눈에 보이는 수치로 효과가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리더인 시점에서, 선아현과 또 팀이 된 이상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C)'도 버리고 가기 위험하다.
게다가 '바쿠스 500(B)'는 웬만한 게 나와도 버릴 생각이 없다. 이건 RPG에서 체력 포션이나 다름없었다.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럼 남는 게 부동심뿐이지.'
좀 아깝지만 별수 있나.
애초에 내가 그렇게 감성이 충만한 편도 아니니 큰 타격도 아니다.
'이대로 간다.'
그렇게 상태창을 끄자마자 주변에서 신난 목소리가 들렸다.
"문대장님! 그래서 우리 뭐부터 하나요!"
"박리더! 문대장!"
와, 벌써 별명이 생겼네.
부동심을 버린 게 옳은 판단이긴 하는데, 왠지 이번 연습 내내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올라오는 회의감을 무시하고 회의를 진행했다.
"일단, 콘셉트부터 잡을까 합니다."
파이널 연습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문대가 팔자에 없던 리더 노릇을 하며 파이널 무대 연습에 매진하던 며칠 뒤, 바깥에서는 순위 발표식이 포함된 11화가 방영되었다.
박문대의 팬들은 물론 문대가 VTIC과 만난 캐스팅 콜 분량에 재밌어했다.
특히 청려가 인터뷰에서 대놓고 '자신과 박문대의 모든 문답이 일치했다'라고 대답한 것을 보고 몇몇 VTIC의 팬들까지 섞여서 신나게 방송을 즐겼다.
-청려님 만나고 수줍어진 멍댕 [동영상]
-VTIC 분 들어오실 때 문댕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거 봤냐고ㅠㅠ 오구구 우리 댕댕 놀랐어요?
-아니 문대 하나 찍을 때마다 코멘트하는 거 너무 귀여운데 청려도 똑같이 하고 있엌ㅋㅋ
└심지어 코멘트 내용도 비슷해… 하… 둘이 케미 좋다 나중에 예능이라도 같이 해주지 않을까ㅠㅠ
└응 아냐 어디서 VTIC에 느그빻대를 비벼ㅎ
└청려 팬인데 무시하세요 하급 어그로입니다. 문대군 너무 귀여웠어요∼
└넵 고맙습니다ㅠㅠ
프로그램이 후반에 접어들며 어느새 관록이 붙은 팬들은 이제 웬만한어그로에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방금 우리 리더님이랑 아이돌 심리테스트 완전히 일치하는 참가자분 누구임?
└박문대(21, 메인보컬) 별명 문댕댕, 닭발을 좋아합니다. 귀엽고 항상 열심히 하는 참가자예요ㅠㅠ [사진 여러 장]
└앗 감사합니다. 주식 살게요∼ㅎㅎ
└헉 고맙습니다 저희 한 주는 무료거든요. 구매 후 인증해주시면 치킨 기프티콘 이벤트 중입니다ㅠㅠ [링크]
훈훈한 나눔이 오가던 그 분위기가 깨진 것은 박문대의 순위가 발표된 순간이었다.
-?
-방금 문대 부름?
-6위
-미친
-떨어졌네
-실화임?
현재 박문대의 기세면 당연히 3위 이상은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잠시 혼란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던 팬들은 곧 분노에 찼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ㅋㅋㅋㅋ어처구니가 없네 문대가 이럴 상황이냐?
-매번 무대마다 레전드 찍고 유입이 넘치는데 하락ㅋㅋㅋ 하….
-아니 주식 본인은 매번 온갖 호재만 올리는데 시발 순위가 떨어져?ㅋㅋ 이건 팬이 게으른 탓이다 문대는 잘못이 없다
-애가 초반 악편 말고 무슨 논란이 있냐 실력이 부족하냐 얼굴이 별로냐… 다 아니잖아. 진짜 뭐든 잘하고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이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
-가뜩이나 간절 감별사들이 개소리하는 것도 열 받는데ㅋㅋㅋㅋ 미치겠다
방송이 끝난 뒤 새 벽에도 이 분위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대신 좀 더 침착해졌다.
-잠이 안 온다.
-사실상 큰세1진이 역전한 거임 루머 때문에 주식 매도 잠깐 확 늘었는데 그거 빼면 순위 바 뀐다?
-그러니까 문대 원래 7위라는 거지?
-아 정말 할 말을 잃어버림
-솔직히 이번 무대가 순위 떨어질 무대는 아니었잖아. 떡상하면 모를까.
-문대 메인보컬 포지션인데도 직캠 조회 수하고 좋아요 합산 4위였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맞아.
-다른 참가자 주주들 하는 거 봄? 우리만 주식 믿고 어지간히 몸 사리면서 해온 거임
그리고 이 모든 의견은 하나로 수렴되었다.
-이렇게 가면 문대 떨어질 수도 있어. 정신 차리자.
그리하여 해뜨기 직전의 새벽.
박문대의 팬사이트들은 온통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뇌리에 꽂힌 것은 하나였다.
'뭔가 보여주겠다!'
"바깥공기가 맑구나."
오랜만에 촬영장 밖으로 나왔다.
옆에서 큰세진이 드물게 우중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주일 만인가.'
갑작스러운 숙소와 촬영 세트장 정비 문제로, 참가자들은 예기치 못하게 짧은 이틀의 휴식 기간을 얻었다.
파이널까지 열흘, 다음 방송까지는 사흘 남은 시점이었다.
아이돌 주식회사 는 파이널 전주에 본방송 대신 토크쇼 같은 형태로 생존 참가자들과 함께 하는 방송을 한 화 진행했다.
물론 그것도 생방이었다.
그전에 짧게라도 쉴 시간이 생긴 건 다행이긴 했다. 연습량이 좀 걱정되긴 했지만, 그건 사흘 뒤 내가 알아서 죽도록 하겠지.
"문대는 이번에도 아현이 집?"
"으, 응!"
휴식 동안 선아현에게 짧게 더 신세를 지게 됐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리더 노릇은… 생각보다 칼로리 소모가 심했다.
나는 곧바로 선아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또 부모님이 데리러 오셨다고 한다.
"형!"
뒤에서 이 며칠간 매일 들은 목소리가 또 들렸다.
"응, 왜."
"혹시 이틀간 특별히 스케줄 없으시면 이번에야말로 팬분들께서 걸어주신 광고 보러 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음"
없다고 즉답하고 싶다. 하지만 도리상 말문이 막혔다.
'한번 보러 갈 타이밍이긴 한데.'
기껏 돈 써서 걸어줬는데 본인이 인증도 안 하면 기운 빠질 테니까.
근데 혼자 가고 싶다.
하지만 거절하고 혼자 가면 김래빈과 사이가 나빠지겠지.
'이게 무슨 미연시도 아니고…'
좀 황당했지만, 별수 없었다.
"그래. 가자."
"…! 네!"
김래빈은 신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서 뭔가를 열심히 작업하기 시작했다.
"가장 효과적으로 많은 광고를 볼 수 있는 루트가… 이런 식이면 어떨까요?"
나는 김래빈이 내미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지하철 노선 위로 줄을 그어 놓은 그림 하나가 떴다.
아무래도 내 광고가 걸린 역을 표시해 놓은 맵 위로 이동 위치를 덧그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단에 관련 문구가….
[박문대 지하철 광고 최신 ver(27개 역)]
"…."
27개?
하나같이 유동인구 많은 곳만 알차게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게… 가능한가?'
무슨 VTIC 글로벌 모금 생일 광고도 아니고, 혼자 27개 역에 걸리는 게 가능한 일이었나.
옆에서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큰세진이 내 등을 쳤다.
"야, 너 차유진보다 하나 더 걸렸어! 지하철 광고! 네가 1등이야!"
"오… 형, 축하드립니다."
대체 연습하는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4화]
'27개 역'이라는 숫자에 말문이 막힌 사이, 광고 인증 원정대는 착실하게 숫자가 불어났다.
"지금 갈 거야? 그럼 나도 갈래. 여기 몇 군데 겹치네!"
"팀 스포일러 금지 조항이 있으니 다른 팀 사람도 같이 가는 건 어떨까요."
"차유진?"
"예."
"난 괜찮아. 문대는?"
"그러든가."
"네!"
조용히 얼른 보고 오는 건 그 시점에서 끝났다.
의외였던 점은 선아현이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로 빠졌다는 점이다.
"부, 부모님이랑… 여행 가기로 해서."
"그래?"
이게 사유면 선아현 자취 집에 나 혼자 가 있는 것도 웃긴 일인데?
"아, 그럼 나도 다른 데 묵을까."
"아, 아니! 써!"
선아현이 기겁했다.
"키, 키 줄게."
"음, 고맙다."
내 뭘 믿고 키까지 빌려주는 건지 모르겠다. 떨떠름하게 키를 받아 들자, 선아현이 뜬금없이 이실직고했다.
"워, 원래는, 같이 가자고 하려고…."
"…."
가족여행에 박문대를 대체 왜 끼워주려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부모님이 허락은 한 건가?
"… 마음만 고맙게 받는다."
"으응."
이렇게 된 거면 차라리 김래빈과 광고 투어가 났겠군. 하마터면 얼굴 한번 본 남의 부모님과 여행까지 갈뻔했다.
"촬영 날 봐∼"
손을 붕붕 흔드는 큰세진 주도로 선아현을 배웅했다. 그리고 선아현이 차를 타고 사라지자마자, 차유진이 나타났다.
"완전 신나요!"
차유진이 눈을 빛내며 백팩을 흔들었다. 벌써부터 피곤한 예감이 들었다.
'하루는 날렸군.'
날아간 내 휴일에 묵념이나 하자.
일단 이 인원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자는 미친 안건은 기각했다.
이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역도 못 가서 도망쳐야 할걸."
"맞아."
차유진은 아쉬워했지만 금방 회복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재밌어하더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첫 타자는 촬영장과 제일 가까운 여의도역이었다.
"찍는다?"
이건 어찌어찌 잘 끝났다.
여의도역에 걸린 건 나와 김래빈뿐이었기 때문에 각자 군말 없이 얼른 사진을 찍고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마스크 벗을 때 눈치챈 사람이 한두 명 있던 것 같긴 했지만, 직장인이 많은 역에 평일 오전인지라 소란이 일어나지 않고 넘어갔다.
"좋았어!"
비밀 지령이라도 수행한 것처럼 신난 동행인들과 택시에 도로 타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러면 아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목격담이 없으면 그냥 혼자 광고판 실물 구경한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인증이라고 해도 인터넷에 사진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목격담인 것처럼 내가 유출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나 이 걱정은 쓸모없는 상념이었다.
바로 다음 방문지인 고속터미널역부터 난장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어어!"
"차유진! 야 차유진이야!"
"쟤네 걔들이야? 아주사?"
"광고판 보러 왔나 봐. 헐…."
이 모든 말을 고속터미널역 광고판 전방 3M 안에 접근하자마자 동시에 들었다.
당연히 모두 마스크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다들 모자나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농담이 아니라 지하상가에서부터 이쪽을 보고 뛰어오는 사람까지 보인다.
'이건… 민폐다.'
사고 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튀자.'
대충 시선만 교환한 뒤 얼른 역을 벗어났다. 사진은 당연히 찍지 못했다.
'이제 뭐로 가려도 쓸모가 없군.'
택시에 타서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택시 뒤로 다른 택시가 따라붙은 것까지 확인했다.
"저거 우리 따라오는 거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습니다."
김래빈의 확인에 택시 분위기가 우중충 해졌다.
택시 기사분은 '뭔 재밌는 일들을 그렇게 하셔∼' 하고 농담을 하셨다가, 심각한 분위기에 조용히 입을 다무셨다.
'망했네.'
그렇게 광고 투어는 초반부터 장렬하게 망했다.
간신히 따라오는 차를 따돌리고 난 뒤, 모두 현 상황을 납득했다.
"…따로 가자."
"그래."
"예…."
"인형탈 쓰고 가요!"
"…?"
조용한 합의 분위기를 깨고 차유진이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인형탈?"
"네! 귀엽고 사람들 모르고!"
그 말에 큰세진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잠깐… 아, 강남 쪽에 대여업체 있네."
"오우!"
"가격도 괜찮다! 인당 5, 6만원만 쓰면 되겠는데?"
5만 원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하지만 괜찮은 발상이긴 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첨언했다.
"하는 건 좋은데, 그래도 각자 알아서 광고 보러 가는 걸로 하자."
"응?"
"왜요?!"
차유진의 되물음에 김래빈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인형탈 넷이 돌아다니면 시선이 더 집중될 테니까…."
"아."
모두 즉각 납득했다.
"그럼 일단 대여까지는 같이하자. 괜찮지?"
"네!"
"오키. 기사님! 저희 여기로 가고 싶은데요…."
큰세진이 곧바로 택시 목적지를 변경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웬 상가건물 구석에 위치한 파티용품 대여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 이거!"
도착하자마자 차유진이 곧장 인형탈 하나를 집어 들고 신나게 계산대로 향했다. 아마 백호 비슷한 뭔가였던 것 같다.
"빠르네."
"우리도 얼른 고를까."
그러자 인형탈 앞에 남은 인원 옆으로 다가온 직원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사인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혹시라도 오늘 중에는 인터넷에 올리지 말아 달라며 부탁한 뒤에, 우리는 줄을 서서 사인을 했다.
굉장히 어색했다.
"난 이거."
사인이 끝난 뒤, 직원분을 대동한 채로 인형탈을 골라갔다. 큰세진이 거대한 곰 인형탈을 고르자 옆에서 김래빈이 토끼탈을 골랐다.
누가 봐도 다분히 팬 여론을 의식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결국 이건가.'
나는 떨떠름하게 인형탈 하나를 잡아들었다.
5년 전 인형탈 알바 이후 처음 써보는 인형탈은 묵직했다.
'이것도 고생이겠군.'
이걸 쓰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했다.
일단… 루트부터 새로 짤까.
박문대의 팬사이트들은 투표 독려에 이어서, 결승전 때 문자 투표를 끌어 모으기 위해 대중교 통마다 광고를 걸었다.
래핑버스에 영화관까지 별 광고를 다 잡았지만, 준비 시일이 짧은 탓에 현재 실행된 것은 지하철역 광고들 정도였다.
여기, 강남역 지하상가 부근 대형 전광판을 선점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잘 나왔다!'
제작발표회 때 박문대의 볼 콕 포즈를 뽑아낸 이 여성은 기어코 그 사진으로 광고판을 뽑았다.
'아껴두길 잘했어.'
참고로 잠실역에는 2차 팀전의 히어로 슈트를 입은 박문대 전신을 디지털 포스터 광고로 걸었다. 이다음에는 그걸 보러 갈 예정이었다.
'하나 더 하고 싶었는데.'
맞은편 전광판의 선아현을 보며, 그녀는 아쉬움을 삼켰다.
저 자리가 탐났던 것이다.
사실 며칠 전에 선아현의 팬들 이아현 역을 통째로 빌리다시피 해서 지하철 안전문부터 출구까지 광고를 깔아 놨다는 포스팅도 봤다.
'거기를 그럴 정도면 강남은 좀 놔주지.'
모금액도 충분해서 그녀가 보태려던 사비가 남았기 때문에 더 아까웠다.
'어찌 됐든 색도 잘 나왔고, 됐다.'
그녀는 전광판을 다시 한번 카메라로 찍었다.
그때, 잠시 커피를 사러 갔던 그녀의 친구가 다가와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야, 저거 봐!"
"어?"
커피 빨대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웬 귀 쫑긋한 노란 강아지 탈이 뒤뚱뒤뚱 전광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웰시코기?'
멍하니 보고 있자니, 웰시코기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이 보였다.
[박문대 데뷔해]
"뭐야 저게!"
그녀는 빵 터져 웃으면서 웰시코기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주변에서 전광판을 보던 몇몇 사람들도 웰시코기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대 머리색과 별명에 맞춰서 노란 강아지 탈을 쓰고 온 모양이었다.
키 큰 사람이 뒤뚱뒤뚱 인형탈을 움직이는 것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그녀의 친구가 전광판 앞에서 멀뚱히 선 웰시코기에게 물어봤다. 웰시코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아, 재밌는 사람 진짜 많아.'
그녀는 웃음을 가리지 못한 채 웰시코기에게 말을 걸었다.
"저 사진 하나 찍어서 올려도 될까요? 아이디어 좋으시네요!"
웰시코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얼른 사진을 찍고 자신의 팬 계정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광고 확인하러 왔는데 문댕댕 인형탈 쓴 팬 분 만났어요!
:D(사진)(사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였기에 순식간에 공유와 좋아요 수가 늘어났다.
그사이, 웰시코기는 인증숏을 다 찍고 그녀의 친구에게 폰을 돌려받았다.
"잘 들어가세요∼"
웰시코기가 그녀와 친구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다시 뒤뚱뒤뚱 길을 떠났다.
그녀도 키득키득 웃으며 친구와 2호선을 타러 이동했다. 잠실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그곳 광고도 확인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근처 맛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2차로 카페에 가서 시킨 음료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녀의 친구가 웃으며 뭔가를 보여주었다.
"이거 봐! 아까 웰시코기 팬 분 잠실도 갔었나 봐. 사진 또 떴었네."
"와, 대단하네. 그거 입고 이동하기 힘들 텐데."
문대가 봐도 재밌어하겠다며, 그녀는 웃으며 SNS에 뜬 사진들을 확인했다.
웰시코기는 부지런하게도 오전과 점심 내내 여기저기 역마다 방문해서 인증샷을 찍었다.
'이거 하려고 서울 올라오셨나?'
간혹 그런 팬분들을 보기도 해서 낯선 일은 아니었다. 인형탈은 재밌는 발상이긴 했지만.
휙휙 넘기다 보니 아까 그녀가 찍은 사진들도 보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을 멈추었다.
그녀의 친구가 웰시코기를 찍어주는 장면.
"…어?"
"왜 그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물었다.
"그… 아까 웰시코기 찍어줄 때."
"응"
"호, 혹시… 폰 확인했어?"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뭐… 그냥 스마트폰이지. 좀 낡았고… 케이스도 안 꼈… 자, 잠깐."
친구는 말하다가 스스로 깨달았다.
그녀는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급히 문대의 PR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기종.'
그리고 다시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친구 손에 들린 웰시코기의 폰은…PR 영상의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등에 쭈욱 소름이 돋았다.
"야, 야야야, 야…."
"… 진짜야? 진짜? 진짜?"
"아니, 이게, 어…."
그녀와 친구가 믿기지 않는 추측에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을 때, 스마트폰에 새로운 알림이 들어왔다.
[미친 미친 미친 노란댕댕탈 문대임 시발 지금 탈 벗었어 아아아악ㅠㅠㅠ(흔들린 사진)( 탈 벗는 문대 사진)]
그 글에는 신촌역 전광판 앞에서 땀에 젖은 채로 탈을 벗고 미소 짓고 있는 박문대의 상반신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오전에 그녀들이 본 그 사진이 맞았다.
두 사람은 음료가 나올 때까지 입을 벌리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그제야 얼음물을 목구멍에 꽂아 넣으며 내면으로 울부짖었다.
'악수라도 할걸!'
분명 계를 타서 기쁘고 문대가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동시에 아쉬워서 토할 것 같은 괴상한 기분이었다.
"팬싸 가자."
"꼭 간다."
팬사인회를 기약하며, 둘은 조용히 불타올랐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5화]
나는 해가 지기 전에 인형탈을 반납하고 선아현의 자취 집으로 귀가했다.
온몸이 인형탈 안의 습기로 쪄진 것 같았다.
'더워.'
지출이 상당했다. 게다가 피곤했다.
그런데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좋은 소리만 듣고 와서 그런가.'
마지막에 탈 벗을 때 반응도 신기했지만, 사실 탈 쓰고 돌아다닐 때가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하거나, 박문대의 인화 사진이나 간식 등을 건네주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이런 사진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만.'
노란 동물 귀를 합성한 사진도 있더라고.
나는 그 사진을 포함해 받은 물건들을 적당히 짐 속에 넣어뒀다. 나중에 더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즉시 샤워를 했다.
'살 것 같다.'
몸을 말린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한결 상쾌해졌다.
침구에 앉아서 찬물을 마시고 있자니, 새로 생긴 단체 메시 지방이 끝도 없이 울렸다.
[큰세진 : 이야 소식 다 봤다 다들 잘 다녀왔더라ㅋㅋ 유진이 빼고!]
[차유진 : ;(]
[김래빈 : 인형탈까지 쓰고 왜 말을 했어.]
[차유진 : 나는 몰랐어…]
위로 올려서 대충 확인해 보니, 차유진이 고맙다고 외쳐서 단번에 들통난 뒤 도주하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어쩐지 놀랍진 않군.'
[큰세진 : 야 문대는 15군데나 돌았더라? 진짜 대단하다 의지의 한국인임 다들 박수 가자]
[김래빈 : (손뼉 치는 올드한 이모티콘)]
[차유진 : 축하합니다…]
[큰세진 : 문대야 1 사라진 거 다 보임 대답해라ㅋㅋㅋ]
나는 피식 웃고 답을 달았다.
[나 : 그래 고맙다.]
[김래빈 : (인사하는 기본 이 모터콘)]
[차유진 : 멋져요!]
[큰세진 : ㅋㅋ별말씀을 (하트 이모티콘)]
나는 이모티콘이 남발된 단체방을 끄고 SNS에 접속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
혹시라도 '쉬는 시간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연습이나 하지 뇌가 없나.' 따위의 이상한 소리가 나오진 않았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흠."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다들 즐거워 보였다.
타임라인을 좀 더 위로 당겨봤다.
웬 4명이 인형탈을 쓰고 각자 다른 참가자의 광고를 찾아다녔다는 걸 사람들이 눈치챘을 때.
사람들은 처음엔 팬들끼리 장난삼아 한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덕친이랑 해보고 싶어 짐
-화목하고 귀엽다 이렇게 팬들끼리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냈으면ㅠㅠ
-차래문큰 다 데뷔합시다
하지만 차유진이 들통나고, 하나둘씩 참가자들이 탈을 벗을 때마다 분위기는 경악의 도가니탕 이 됐다.
-미미 미친
-헉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야
-나 어제 잠실 역 갔는데ㅜㅜ 아아악 문대야 ㅠㅠ 누나가… 알았으면 오늘 거기서 캠핑을 했지…
-쌩얼 뭐임 광나는 거 실화냐
-님들 저 웰시코기 문대한테 사진 주고 왔는데ㅠㅠ 어어어엉 문대야 사랑한다 으아아! [강아지 귀 합성한 문대 사진]
이후 사람들은 혹시 이것도 아주사 촬영인가 술렁거리다가, 인형탈 대여업체에서 사인과 함께 후기를 올리자 더 행복해하기 시작했다.
[애들끼리 자기 이미지대로 맞춰서 빌렸나 봐 인형탈 렌털 업체에서 후기 뜸 (링크)]
-세상에 이 미친놈들 어떻게 지들끼리 이런 생각을ㅠㅠ
-우리 애 인형탈 뒤져서 굳이 웰시코기 탈 골랐을 거 생각하면 진짜 귀여워서 죽고 싶어 진다 [죽도록 사랑해 및 캡쳐]
-팬들이 자기 댕댕이라고 부른다고 강아지 찾아서 노란 거 고르고 뿌듯해했을 거 아니야ㅠㅠㅠ 심장 아프다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좀 민망했지만, 사람들이 워낙 좋아하니 참을 만했다. 그러나 이렇게 귀엽다고 연발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감성의 문제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침구를 정리해 누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 먹은 게 없어.'
종일 인형탈 쓰고 질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속이 허하진 않았다.
뭐라도 먹고 자야 하나. 짧은 생각이 들었지만, 곧 까무룩 잠들었다.
꿈도 없는 단잠이었다.
그렇게 이른 저녁 시간에 빠진 잠은 그다음 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뭐… 알찬 휴일이었다.
반나절 동안 가벼운 운동만 하며 푹 쉬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생방송 토크 준비를 위해 촬영장으로 향했다.
야밤에 웬 호두과자를 싸 들고 여행에서 돌아온 선아현도 물론 같이 왔다.
참고로 호두과자는 맛있었다. 앙금에 흰 강낭콩을 써서 부드럽더라.
"문대는구나. 잘 쉬었어?"
"예."
촬영장의 대기공간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도착한 류청우가 인사를 해왔다.
선아현은 제작진에게 호출받아서 자리에 없었다.
"형은 잘 쉬셨어요?"
"음…. 그래."
류청우가 씩 웃었다. 그냥 보기에도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리더도 안 했군.'
전해 듣기로는 양보했다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관심도 없고.
"너희 인형탈 한 거 봤어. 재밌어 보이더라."
"아, 감사합니다. 형도 인증 몇 번 하셨던데."
혹시 데뷔할 경우를 생각해서 이 정도로 반응 접대는 해주자.
류청우는 약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 최근에는 못 했지."
뭐 어쩌라는 건가.
사연을 물어봐 달라는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류청우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마무리 멘트를 했다.
"방송 끝나면 한번 하시면 되죠."
"음… 데뷔 못 하면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
류청우가 하하 웃었다.
'왜 계속 말꼬리를 잡는 것 같지.'
나는 말을 잘랐다.
"형 데뷔하실 것 같은데요."
"고맙다. 근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야. 나도 순위 하락했잖아."
설마 1위에서 4위로 떨어진 걸 말하는 건가.
'너 데뷔해서 리더까지 해 먹는 걸었는데.'
나는 떨떠름하게 류청우를 훑었지만, 이 시점의 참가자는 누구든 불안할 수도 있겠다는 걸 인정했다.
게다가 이놈은 좀… 번아웃 같은 게 온 느낌이다.
'잠깐, 류청우가 이대로 탈락하면 공석이 하나 생긴다.'
나는 잠시 희망찬 생각을 했지만, 곧 버렸다. 이제 와서 멘털 깨져도 남은 건 결승뿐이니 별 소용없겠지.
그냥 되는 대로 편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탈락해도 팬분들은 광고 인증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걸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글쎄… 탈락하고, 프로그램 끝나도 팬분들이 계속 계실까 모르겠다."
"광고에 돈까지 썼는데 갑자기 사라지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어?"
"그거 환승역이면 단가 최소 이백에, 목 좋은 곳은 천 만원인 거 아시죠."
"그, 그래?"
"예."
류청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몰랐나.'
"열심히… 해야겠네."
"그럼요."
나는 멀뚱하게 류청우를 마주 보았다.
"문대!"
마침 큰세진이 한 손을 들고 힘차게 입장했다.
'저걸 핑계 삼으면 되겠군.'
나는 자연스럽게 류청우에게 목례하고 큰세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최소 단가로 잡아도 5,400만 원을 빚진 셈인가.'
소처럼 활동해야 양심이 박 살 나지 않을 것 같은 액수였다.
돌연사 다음으로 확실한 동기부여가 이렇게 생길 줄은 몰랐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이번 주 본방송 부제는 이랬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 실적발표회
토크쇼에 이런 콘셉트충 같은 부제가 붙을 줄은 몰랐다만, 어쨌든 꽤 인상적인 네이밍 센스였다.
내용은 통상적인 오디션 프로 특집과 다를 게 없었다.
아직 생존한 참가자들을 불러서 앉혀놓고 질문하고 에피소드 관련 썰도 좀 푸는 식이다.
다만 생방송이기 때문에 편집의 마법은 없었고, 당연히 평상시보다 질문 수위는 많이 낮아졌다.
"오∼ 찍먹파 14명! 역시 찍먹이 더 대세군요!"
고로 이런 식의 TMI 대방출이 분량의 다수였다.
'날로 먹는군.'
나는 들고 있던 찍먹 패널을 내리며 내심 생각했다.
기존에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MC 대신, 토크쇼에서 자주 보던 탤런트가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워낙 입담이 괜찮아서 아마추어 20명을 데리고도 마가 안 뜨는 것은 대단했다.
'그래도 이대로면 시청률 반토막 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마다 MC 새로운 콘텐츠를 입에 넣어줬다.
"이번 코너는∼ 랜덤 플레이 댄스입니다!"
음악이 나오면 달려와서 춤추는 심플한 룰의 유명한 콘텐츠였지만, 20명이 마구 달려 나와서 하니 나름대로 엉망진창 흥겨운 재미가 있었다.
-Come to me
Come to me
눈부셔 네 곁의 Paradise
"와악!"
"나 해보고 싶었어!"
말랑 달콤의 새로운 세상으로 에 맞춰 차유진과 몇몇 참가자들이 달려 나와 춤을 췄다.
"오∼"
완전히 몰입한 것처럼 1차 팀전 당시의 안무를 따라 하는 모습에 악토버 31 출신 참가자들이 폭소하며 박수를 쳤다.
이렇게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곡만 써서 돌렸기 때문에, 다른 팀의 안무를 추는 참가자들의 모 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꽤 수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나쁘지 않군.'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멜로디가 귓가를 때렸다.
-POP! POP!
넌 나의 팝콘∼
"어어?"
"와 이거!"
"으하핫!"
들어가던 참가자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와서 팝콘을 추기 시작했다.
워낙 쉽고 유명한 춤이라 거의 스무 명 전원이 나온 것 같다.
나 빼고 다 나왔다는 뜻이다.
"문대 씨! 문대 씨!"
"…."
MC 신나게 박문대를 불렀다.
'은퇴할 때까지 줄 것 같군….'
나는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참가자들에게 합류했다.
기왕 하는 거니 열심히 추자.
-POP POP POP!
POP CON!
기어코 엔딩까지 음원을 틀어준 제작진 덕분에 마지막 포즈까지 하고 들어가게 됐다.
마지막까지 안무를 하며 앞자리에 붙어 있던 놈들이 같이 들어가며 쫑알거렸다.
"야∼ 문대 진짜 늘었다!"
"천재입니다, 천재."
"…그만하자."
"어어∼? 칭찬인데? 부끄러우세요?"
"형님 너무 겸손하신데요∼?"
큰세진과 골드 2를 같은 팀으로 받은 것은 실수였던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방송은 그런 식으로 제법 흐름을 탔다.
빼는 사람 없이 필사적으로 콘텐츠에 달려드는 20명의 참가자들은 계속 적극적으로 MC의 발언에 따랐다.
"자자, 이쯤 해서 우리 시청자 여러분께 받은 질문을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오∼"
"잠시만요, 제가 이름을 하나 뽑으면…."
MC는 세트 구석에 준비된 박스에서 볼을 뽑아내더니, 안에 있는 이름을 읽었다.
"박문대 참가자님!"
"…예."
20분의 1 확률에 걸릴 줄은 몰랐다.
나는 얼른 손을 들고 대답했다.
MC는 아주사 에서 PPL 중인 태블릿 PC를 가져와서 손에 들고는 슥슥 화면을 넘겼다.
아무래도 방송용으로 적절한 질문을 거르는 중인 것 같았다.
"지금 올라오는 질문 중에… 아, 이거!"
MC는 화면을 터치해서 질문 크기를 키우더니, 카메라 쪽으로 돌려서 보여주며 읽었다.
"음, '문대 개명한 게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입니다!"
뭐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