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박문대가 개명을 했냐고?'
뒷골이 싸해지는 게 느낌이 안 좋았다.
어쨌든 어색해 보이면 안 되겠지.
나는 곧바로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출생신고할 때부터 박문대였는데요."
"으허허!"
MC 리액션이 좋군.
이건 사실이었다.
'이 몸에 들어오자마자 주민등록등본, 초본, 가족관계 증명서까지 떼어봤다.'
바보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다 찾아봤었다.
박문대는 이 이름으로 계속 살았었고,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본인이 직접 적어둔 고등학교 자퇴를 제외하면 깨끗했다.
'자퇴도 유서 보니 따돌림 때문이었고.'
데뷔에 문제 될 이유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 구체적인 '개명 여부 확인'은… 확실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끝나면 바로 인터넷을 찾아봐야겠어.'
"아∼ 문대 씨 이름이 워낙 유니크해서 물어보셨나 보네요!"
MC는 더 뽑을 것이 없다고 느꼈는지 곧바로 질문을 마무리했다.
나는 다른 참가자가 질문을 받는 것을 확인하며,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막 인터넷에서 심화된 SNS 글 하나를 찾았다.
[문댕이 뭘 하고 살았을지 궁금한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 개명한 외계인인 건 아닐까]
'이게 문제였군.'
좀 허탈했다.
원래 계정 주인이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였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빠르게 팀이 된 것 같았다. 팬 커뮤니티 내에서 이긴 하지만.
-(일 리가… 있다!)
-먹는데 진심인 걸 보니까 외계인 맞는 듯 지구의 식문화를 조사하러 파견된 거임 암튼 그럼
-문대 본체 강아지 귀 달렸다 내가 봤다
이런 농담을 하며 사람들이 웃는 거야 상관없었지만, 상황 자체는 좀 의구심이 생기긴 했다.
'하나도 안 나올 줄은 몰랐는데.'
박문대의 생년월일에 이름까지 프로필에 적혀 있었다.
솔직히 방영 중간에 출신 고등학교 정도는 밝혀질 줄 알았다.
하다못해 '나 같은 학교였는데 얘 좀 이상했음. 혼자 다니다 자퇴한 애임' 같은 말까지도 예상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발언이야 타격도 없을 터다. 오히려 학교에서 약자였으니 누굴 괴롭힐 깜냥은 아니라고 팬들이 안심했겠지.
'인상이 많이 달라져서인가.'
이 추측이 그나마 제일 일리가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 박문대는 비쩍 마른데다 머리카락도 덥수룩했었다. 거기다 아예 다른 사람(나)이 들어왔으니 말투나 동작, 분위기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겠지. 가명을 쓴 것도 아니니까.
'기왕이면 프로그램 끝나고 나왔으면 좋겠군.'
이제 생방송까지 스마트폰을 보기는 힘들 테니 말이다.
토크쇼 촬영이 끝난 뒤, 숙소에 다시 들어가며 언제나처럼 스마트폰을 반납했다.
'연습이나 열심히 하자.'
이제 결승 무대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뿐이었다. 다른 생각할 여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유가 없어도, 당장 문제가 생기면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걸 얼마 지나지 않아 체감하게 되었다.
일이 터진 것은 이틀 후 저녁이었다.
반쯤 졸면서 저녁을 입에 밀어 넣고 있을 때, 제작진에게서 급한 호출이 왔다.
지금까지 경험상 무슨 인터뷰 컷이라도 딸 줄 알았다. 그러나 스태프 룸 분위기는 심각했다.
"문대 씨."
날 노래방에서 캐스팅했던 작가는 간신히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지금 인터넷에… 글이 올라왔는데."
"…예."
이거 기분이 더럽게 싸한데.
심지어 저 작가가 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나를 앞에 두고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내밀었다.
"그냥 제가 직접 봐도 괜찮을까요."
"음, 그래요."
작가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냉큼 자신의 폰을 건넸다.
나는 화면을 봤다. 낯익은 인터페이스가 보였다.
큰세진 학폭 논란이 올라온 그 커뮤니티다.
그리고 상단에 큰 폰트로 써진 제목이 보였다.
[박문대 자퇴 이유 : 생리대 훔치다 걸려서ㅋㅋ]
"…."
이게 X발 무슨 개소리야.
상상도 못 한 타이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머릿속이 턱 막히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충격 때문에 안 돌아가는 뇌로 내용을 확인했다.
박문대 인천 시정고 출신인 건 이미 다 떴으니까 설명 생략할게 나 시정고 나왔는데 박문대랑 동갑임. 박문대 3반이었는데 개 음침하고 이상한 애였음. 나 사실 이름도 몰랐어 지금 뜬 거 보고 아주사 박문대인 거 알았다
응 근데 여기까지 읽고 안심하지마빠들아ㅎㅎ 박문대 자퇴한 거 같은 반 여자애 생리대 훔치다 걸려서 맞음
심지어 이것 때문에 생리대 도둑맞은 여자애도 소문 이상하게 나서 얼마 안 가서 자퇴했음
그리고 이거 아는 애들 꽤 있다?
학폭위 열리는 거 아니냐고 한동안 난리였다니까ㅎ 박문대가 자퇴하고 튀어버렸지만!
혹시 안 믿을까 봐 내 졸업앨범이랑 교복 인증할게. 근데 굳이 안 이래도 아는 애들 계속 나올 거임∼
[사진] [사진] [사진]
그 밑으로 자신도 이 사건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칭 시정고 출신 네티즌들의 증언글이 줄줄 베스트 댓글로 달려 있었다.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건… 답이 없었다.
차라리 누굴 때리거나 돈을 훔친 게 나았다. 훔칠 게 없어서 여자애 생리대를 훔쳐?
내가 현실에서 봤어도 답 없는 새끼라고 생각했을 일이었는데, 아이돌 오디션 참가자한테 이런 일이 터졌다고.
"다 읽었어요?"
읽었는데 할 말이 없다.
박문대 이 새끼 미친 거 아닌가?
'이딴 병신 짓을 저지르고 유서에 따돌림당한 게 억울하다고 적어?'
그래, 혹시 훔친 게 아니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근데 당장 이 새끼가 안 훔쳤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있냐는 말이다.
"…예."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작가는 쓸데없이 '진짜냐 아니냐'같은 소리는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빨리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수습하든가, 하차하든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나는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 잠시,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 습니다."
"예. 빨리 해주세요."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대로 정신 나간 채로 숙소로 돌아갔다. 아직 연습할 시간이라 숙소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탁자에 앉으면 위에 있는 물건을 다 박살 낼 것 같아서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하려 노력… X발, 노력 같은 소리 하네.
나는 침대를 후려쳤다.
'퍽, 퍽' 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지만, 뭐 하나 이 빡침이 해소되지를 않았다.
'이대로 뒈지라고?'
이걸 씨 X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런 하자 있는 몸에 처넣어놓고 아닌 척 레벨업으로 퍼주는 척 1년내로 데뷔하라고 등 떠민 이 상황에 악의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그 엿 같은 부동심 특성을 받아왔어야 했다.
'이제… 뭘 어쩌지.'
화남 다음으로 밀려온 것은 우습게도 진한 무력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정말로.
아는 게 없으니까.
하다못해 스마트폰이라도 있었으면 서치라도… 아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지금 그나마 여론을 안 보고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별 신경 안 쓰면서 살았다고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원색적인 비난을 쏟는 걸 보고도 멀쩡할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박문대를 응원했던 사람들이 대체 무슨 심정이겠냐는 말이다.
있는 대로 돈과 시간을 썼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 맞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내가 한 게 아니라서 더 어이가 없다. 아주 미칠 지경이다.
… 이렇게 상황에 압도되는 느낌은 고아 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
포기할까.
짧게 그 생각이 스칠 때 즈음, 누군가 숙소 방문을 삐걱 열었다.
"저, 저기…."
"…."
지금 꺼지라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침대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뇌가 끓는 것 같았다.
"야 박문대."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큰세진이 들어왔다.
벌써 소문이 돌았나 보군. 눈치 빠른 놈이 먼저 알아차린 것도 이상한 건 없었다.
"너 그 얘기 진짜냐?"
몰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극도의 스트레스로 입이 제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저 새끼가 대꾸를 하더라.
"왜 몰라. 너 진짜 그것 때문에 자퇴했어?"
"모른다니까."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결승만 남았으니 내가 하차하면 오히려 이득 아닌가.
"…너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거 알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억이 안 나."
"뭐?"
"X발. 자살하려다가 깨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됐냐?"
투두툭.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선아현이 들고 있던 초코바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탄식했다. 쓸데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나마 몸이 바뀌어서 과거로 돌아왔다고 지껄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상태창까지 보인 다고 했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허언증 아니면 정신병자다.
아니, 지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 일 해결 못하면 1년 내로 데뷔는 턱도 없을 것을.
"지, 지, 진짜…."
"어, 진짜."
가뜩이나 침착하기 어려운데 쓸데없는 대화에 기운쓰게 하는군.
"알았으면 좀… 가만히 둬.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 기억도 안 난다면서 무슨 수로 정리하게."
"좀 나가라."
"어차피 너도 아는 게 없으면 상의할 사람 있는 게 낫잖아. 소속사도 없으면서."
"…."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든데, 네가 이런 일로 거짓말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생리대 훔쳤다는 루머는 더 이상하고."
"마, 맞아."
"너처럼 계산 빠른 놈이 그런 바보짓을 할 것 같지가 않거든."
"-! 아, 아니…. 그, 그런 뜻은 아니고, 어, 그, 그러니까…."
선아현이 고장 났다. 큰세진은 선아현을 무시했다.
"그래. 피해자나 피해자 지인이 올린 거면 달랐겠지. 근데 보니까 그것도 아니라네."
머리가 좀 식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큰세진을 봤다.
큰세진은 침착하게 맞은편 바닥에 앉고 있었다.
안 그럴 것 같은 놈이 웬 오지랖인지 모르겠다.
'자기 일 도와줬다고 저러나.'
그래도 결승을 코앞에 두고 이러는 건 의외긴 했다. 지금 내가 이딴 걸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만.
"일단… 이 사건은 그럼 기억이 안 난다고 치자. 고등학교 때 일 기억나?"
"고등학교고 뭐고 아예 기억 자체가 없어. 정신 차리니까 앞에 유서만 있던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유서에는, 뭐 언급 없었고?"
"구체적인 사건 언급 자체가 없었지. 억울하다는 표현은 있었지만 그건 누구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본인인데 냉정하네."
큰세진이 힘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심적 여유가 없었다.
"저, 저기."
선아현이 힘들게 말에 끼어들었다.
"그, 그럼… 다, 당사자분이 계신지, 찾아서 확인하는 건… 히, 힘들까."
자퇴했다는 여자애를 말하는 거겠지.
"지금같이 촬영 중이면 찾을 시간도, 기회도 없지…. 하차하면 모를까."
…말할수록 상황이 명확해졌다.
일단 하차해서 급한 불을 끄고, 상황을 정확히 알아보는 게 그나마 생존율이 높을 것 같다는 것이.
"…하, 하지 마."
"뭐?"
"그, 그만두지 말고, 조, 조금 기, 기다려 보자."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7화]
"뭘 기다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선아현은 하차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패기 있게 말을 꺼낸 것 치고는 금방이라도 눈물 콧물 다 짤 것 같은 표정이다.
누가 보면 자기가 하차하는 줄 알겠군.
반대로 내 뇌는 점점 차가워졌다.
'이건 속된 말로… 존버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내가 이미 데뷔한 아이돌이었다면 일단 자숙하면서 기다려본다는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승전이 코앞인 오디션 참가자에게는 불가능한 접근법이었다.
사람들이 오디션에서 성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놈이 기어코 버티고 있는 모습은 반감을 더 키울 뿐이니까.
그냥 오디션도 아니고, 케이블이면서 현재 시청률이 10%를 넘고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이 프로그램에서는 더 자살행위다.
'어차피 결승에서 떨어질 거라면, 빨리 사퇴해서 정황을 파악하는 게 차선이다.'
일단 '건강 문제' 같은 모호한 말로 모른 척 뭉개 두자.
그 편이 대미지가 가장 적었다. 혹시 박문대가 진짜 억울한 거면 해명하기도 편할 것이다.
그리고 알아봐서 진짜 이 새끼가 잘못한 거면…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과를….
젠장, 그 여자애도 자퇴까지 했는데 나라도 박문대가 활동하게 그냥 두진 않겠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박문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으면 기다려도 상황만 악화될 뿐이야."
"하, 하지만… 세, 세진이도, "
"그때는 바로 합성 사진 찾았잖아. 마침 스마트폰도 있었고."
저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별로 없지.
선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짧은 침묵이 다시 숙소에 흘렀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또다시 누군가 숙소 방문을 두드렸다.
"…."
"어."
큰세진의 짧은 답을 듣고 방문이 열렸다. 김래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차유진이 졸졸 따라왔다.
남의 숙소에 왜 따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온 거면 정말 더럽게 눈치 없는 놈이었다.
김래빈은 방 분위기가 어지간히 쓰레기 같았는지, 바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개인 연습, 지금 끝났습니다…."
"…."
얘네 둘 자율 연습 빼먹고 온 거였군.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솔직히… 고맙긴 했다.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짜냈다.
"가서 연습해."
"-! 아, 아니…."
"며칠 안 남았는데 후회하지 말고."
"…넌 어쩌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차 상담해야지."
"…!"
"아, 아니야…."
마지막으로 여론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예상대로 가고 있으면 하차 사유나 잘 짜내 봐야겠다.
"예? 형, 왜 갑자기…."
김래빈이 기겁했다. 아무래도 이 사회성 없는 놈은 아직도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곤하다.'
더 뭘 떠들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내일쯤 되면 주워듣겠지.
나는 그냥 김래빈을 지나쳐서 문으로 향했다. 바로 작가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자 양옆에서 어깨가 붙들렸다.
"자자, 문대야. 일단 너 쉬었다가 일어나서 생각해 봐."
"마, 마, 맞아. 이, 일단… 쉬, 쉬고. 머리를 쉬고."
두 명이 달라붙자 순간적으로 육탄전에서 밀렸다.
덕분에 진압당하는 개처럼 질질 끌려서 침대로 도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미쳤나?
"미쳤냐?"
"너나 정신 차려. 지금 너 일 터진 거 확인하고 삼십 분도 안 지났거든. 몇 달간 이 고생한 걸 삼십 분만에 버리게?"
"그러니까 미룰수록 상황만 나빠진…."
"어차피 지금 하차해도 기사는 내일 아침에나 뜰 거 아냐. 아침에 해도 똑같다고."
큰세진과 선아현은 나를 침대로 도로 몰아넣었다.
"뭐든 맨 정신으로 결정해야 후회 안 할 거 아니야! 너 지금 쫄아서 제정신 아닌 거 알아?"
"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췄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지.
"난 제정신이야."
"응. 아니야. 너 지금 당황하고 겁먹었어."
큰세진이 작게 덧붙였다.
"… 내가 전에 그랬거든."
"…."
"아니면 너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았을걸. 지금 하차하든 내일 아침에 하차하 든 차이 없다는 거."
"…!"
그건….
젠장. 맞았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가 패닉 상태라니.'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빌어먹을 부동심 특성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군.
일단 이놈들이 미는 대로 침대에 누웠다.
선아현이 안도하는 소리가 대놓고 들렸다.
"대체 무슨 상황인…."
"자자, 나가자."
큰세진이 김래빈과 차유진을 몰아서 방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선아현이 그 뒤를 따라서 나가더니, 침을 삼키며 내게 말했다.
"쉬, 쉬어."
끼익.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방문이 닫혔다.
'…나가 봤자 저놈들 침대가 여기 있는데.'
뭐, 세 시간쯤 뒤에 머쓱하게 들어오든 연습실에서 자든 알아서 할 것이다. 내가 거기까지 신 경 쓸 여유 넘치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박문대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해 봤…자 갑자기 가능할 리가 있나. 사회적 죽음에 진짜 돌연사까지 당하게 생겼는데.
'상태창.'
여전히 아무 변동도 없는 상태창을 불러 봤자 눈에 들어오는 건 하나뿐이었다.
[!상태 이상 : 데뷔가 아니면 죽음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왜 하필 나였는가.
왜 하필 박문대인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알아낼 방법도 없다는 건 더럽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당연히 아침까지 갑자기 뾰족한 수가 생각날 것 같지도 않았다.
갑자기 상황이 좋아질리도 없고 말이다.
'행운을 바라는 건 바보짓이지.'
보통 경악스럽게 나쁜 일이 삶에 예고없이 찾아올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극히 드문게 당연했다.
로또가 될 확률과 길가다 교통사고 당할 확률을 비교해 봐라. 후자가 압도적이다.
날 봐라.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그 인생도 이미 망했을 줄이야.
"…허."
젠장. 더 초조해지기만 한다. 어차피 할 거 당장 사퇴하고 싶어 지는군.
'… 그래도 오늘 밤은 넘겨볼까.'
아무것도 기대되는 건 없었다.
순전히 말린 놈들 성의를 생각해서, 나는 한숨을 쉬고 팔짱을 뺐다.
상념이 어지러웠다. 내가 뭘 해야 합리적일지 계산을 할수록.
'어디로 가도 답이 없다…'
그렇게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펑!
나는 웬 소음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나무 박살 나는 소리?'
덜 깬 채로 눈만 돌리자,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선아현이 보였다.
"무, 무문대야."
선아현의 얼굴이 시뻘겋다.
'또 뭐가 터졌나.'
나 말고 다른 놈이 혹시 터진 거면 그 덕에 좀 묻어갔으면 좋겠군.
선아현이 내 코앞에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화면이 켜진 스마트폰이었다.
"이, 이거 봐…!"
화면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스마트폰을 잡아 들었다.
'어디서 났지.'
촬영장 반입금지 품목을 손에 들고 떨떠름하게 화면을 읽어 내렸다.
"…!"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2위!) 아이돌 주식회사 출연자인 박문대 최근 논란 당사자입니다. (632)]
: 공개적으로 이런 글을 적는다는 것이 아직 많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더는 죄 없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글을 적습니다.
저는 생리대 도난사건 이후로 자퇴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생리대를 훔친 것은 박문대가 아닙니다.
…
글은 아주 구체적으로 당시 정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글쓴이는 별것도 아닌 꼬투리로 몇몇 질 나쁜 동급생들에게 학기 초부터 지속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뒷담으로 시작한 괴롭힘이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결국 버틸 수 없을 지경까지 갔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처가 힘들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리대 도난 건이 터졌다.
아무래도 놈들은 반에서 별 친한 친구도 없이 혼자 다니던 박문대한테 도난을 뒤집어씌워서 두 배의 재미를 노렸던 모양이다.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행간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지만, 아마 이 조롱이 성추행급이었던 것 같다. 글쓴이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완전히 멘털이 박살나며 열흘간 무단결석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박문대가 그대로 자퇴했던 것이다.
글쓴이는 본인이 피해자면서도, 박문대가 누명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퇴 후 박문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사과와 안부를 묻는 문자에 대한 박문대의 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당연히 사과할 건 없으며, 자신은 어차피 자퇴하려 했기에 괜찮다. 그러나 네가 힘들어서, 널 괴롭힌 가해자들을 고발하고 싶은 거라면 돕겠다.'라는 장문의 답변이 왔습니다.]
글쓴이는 당시 항우울제를 복용 중이었으며 학교 근처에만 가도 과호흡을 일으킬 상태였기 때문에 고발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박문대와 흐지부지 말을 끝냈지만, 사건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후에도 계속 그것이 신경 쓰여 연락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없는 번호라고 떴다.
'… 박문대는 휴대폰을 해지했으니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온 문대를 봤을 때, 워낙 스타일과 인상이 바뀌어서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이번 논란이 나고서야 박문대가 그 친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조용했지만, 누구한테 폐 끼치거나 이상한 친구 아니었습니다. 자퇴한 후에는 사려 깊고 착한 친구였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부디 문대가 이번 일로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은 주인공이 녹음본을 토대로 고등학교 때 가해자들에 대한 고소를 진행할 것이라는 통쾌한 문장으로 끝났다. 아래로 몇 가지 인증 사진이 붙어 있었다.
최신 댓글에서는 현실 부정하는 사람들이 몰매를 맞고 댓글을 삭제하거나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태세 전환한 의견들이 베스트 댓글을 점령했다.
-미친 어쩐지 이상했어 문대 엄청 담백해 보이던데 저런 음습한 짓 할리가 없지ㅠ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박문대랑 글쓴이 루머 퍼뜨리던 자칭 동창분들 합의금 준비하세요∼ㅎㅎ
-아…ㅠㅠT 글 쓴 분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진짜… 문대야 진짜 고생했어 어쩌면 좋아…
"…."
속이 울렁거렸다.
'박문대가 아니었다고'
심지어 그걸 당사자가 나타나서 인증까지하며 증명했다고.
그것도 사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돼, 됐어!"
선아현이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머리가 띵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뭘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좋아진다고?
이렇게 그냥 해결이 돼?
안도와 기쁨보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삶이 변한다면, 웬만하면 나쁜 쪽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몸에 들어와서 반례를 체험할 줄이야.
"야!"
문을 박차고 우르르 사람이 들어왔다. 큰세진을 필두로 같은 팀 놈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리더였지.'
저 정도로 친해지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했다. 리더가 슈뢰딩거의 사퇴 상태니 연습을 바꾸기도 애매했겠어.
간밤에 이놈들도 여러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야! 내가 뭐랬어! 기다리랬지?"
큰세진이 선아현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고는 큰소리를 쳤다. 벌써 다 알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게."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고맙다."
이놈들 아니었으면 벌써 간밤에 때려치우고 짐 뺐다가 아침에 후회할 뻔했다.
"덕분에 방송 계속하네."
나는 웃었다.
선아현은 '아니다', '다행이다'를 반복하며 행복해했다. 큰세진은 씩 웃었다.
"고마우면 소 사줘."
"…서로 없던 일로 하자."
"야!"
돈 없어.
나는 투덜거리는 큰세진과 축하하는 팀원들의 말을 들으며, 그제야 안도했다.
'이제 결승까지 조용히 연습할 수 있겠군.'
"이거 가져와 줘서 고맙다. 어떻게 가져 왔냐?"
"다, 달라고 부탁했어!"
선아현이 밝게 웃으며 폰을 가져갔다. 이제 결승까지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뗀사이, 상황이 더욱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줄은 몰랐다.
첫 타는 골드 1이 올린 글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8화]
인터넷에서는 박문대의 루머가 빠르게 정정되고 있었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해명해 준덕분에,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욕해도 정당한 박문대'에게 화풀이를 할 수 없게 된 악플러들의 끈질긴 비아냥만 남았을 뿐이다.
- 인상이 바뀌었다니 다른 건 몰라도 성형한 건 빼박인 듯 우욱 피해망상 찐따가 성형하고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컨셉트충 짓ㅋㅋ 환상 개박살남ㅎㅎ
-방송에서 개쎈 척 마이웨이인 척하더니 그냥 찐따였잖아 그거나 생리대 도둑이나 다 기만질 아님?
-응 박문대 자퇴 충인 거 안 변했어 고졸도 못한 성인 안 빨아요 ️
어차피 결승도 코앞이겠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이미지에 흠집을 내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팬들은 분을 삭였다.
-인류애 박살이다…
-문대는 잘못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정신병자들이 계속 붙지?
-무조건 데뷔해야 된다 이건… 문대 데뷔 못 하면 억울해서 내가 못 살 듯.
-PDF 다 따고 있음 문대 소속사만 생기길 기다리는 중
골드 1, 하일준의 글이 올라온 것은 그 타이밍이었다.
하일준은 탈락하자마자 바로 SNS를 개설해서 프로그램 참가 소감문과 연습 일지 등을 올리고 있었다.
[곧 결승이네요! 저도 본방사수!]
+) 악토버 31 형님 동생들 응원합니다. 특히 #문대! 등급 평가 때 일주일 하루도 안 자고 연습해서 저희 사이에서 전설이었음👍 파이팅!
#아주사 #본방사수 #하일준 #트레블러
하일준이야 마침 문대가 두들겨 맞다 회복하는 것을 보고 안쓰러움 반, 화제성 목적 반으로 언급한 것이었으나, 내용이 문제였다.
아무도 박문대가 등급 평가 때 밤을 새운 걸 몰랐던 것이다.
마침 한창 인터넷에서 박문대 언급량이 폭주했었기 때문에, 이 SNS 게시글은 훌륭한 어그로감이 되었다.
-진정한 잠죽자;;;
-미쳤나 봐 무슨 일주일을…
-과장이겠지
-ㅇㅇ 제대로 안 자고 열심히 했다∼ 그런 내용 아님?
-연습생 사이에서 전설이었다잖아ㅋㅋ 굳이 저 정도로 과장할 필요가 있나?
결국 SNS에 달린 여러 질문 글에 하일준이 답변을 달았다.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하일준님! 혹시 언급하신 박문대 참가자 내용 말인데요, 정말 일주일 간 안 잤나요?
└하일준 : 네! 저희 같은 방이었어요. 문대 맨날 밤에 잠깐 들어와서 간식만 먹고 나갔어요∼ 잠자기 시작한 건 등급 평가 직전쯤? 컨디션 관리한다고ㅋㅋ
그리고 박문대의 팬들은 충격의 도가니탕에 빠졌다.
-우리 애 너무 진심인데?
-야 어떻게 해… 나 문대 천재 라그냥 실력 막 느는 줄 알았다고ㅠㅠ 근데 잠도 안 자고 했 던 거야? 왜 방송에서 한 번도 안 나왔냐고…
-문대 분량 있으면 매번 '재미 삼아 나왔는데 왜 잘하냐' 같은 캐릭터만 줬잖아ㅋㅋㅋ 하…
-생각해보면 열정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매번 아이디어 내고 매번 성장해서 나올 수가 없다
-이 악물고 했을 텐데 아ㅠㅠ 이제라도 알아서 진짜 다행이다 일준아 고맙다ㅠㅠ
충격이 가신 뒤에는 어떻게든 박문대를 데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커뮤니티마다 불탔다. 많은 팬들이 영업 글을 올리고 주식 홍보에 더 열을 올렸다.
그리고 몇몇 팬들은 자체적으로 변호사를 통해 악플러에 대한 제삼자 고발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더는 못 참겠다.
-일단 고발한다고 올려서 분위기라도 잡죠!
원래 아무리 빨리 진행해도 결승전에 성과가 나올 리가 없으니 소속사가 생기면 시작하려 했으나, 불타오른 몇몇 팬들은 더는 박문대에 대한 개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악플러에게 경고라도 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이 일은 의외의 것을 발견했다.
-이거 뭐야?
악플러를 특정하던 도중, 그들의 단체 메신저 방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중 몇몇이 박문대의 집에 무단 침입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별다른 성과 없이 경찰에 연행되어 갔으나 곧 훈방 조치되었고, 그 과정에서 딱 하나 챙길 수 있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박문대의 주민등록 초본이었다.
물론 박문대는 진작에 그 초본을 잘라서 분리수거용 박스에 넣어두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조각난 그 초본을 챙길 미친놈들이 집에 침입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그 초본을 바탕으로 문대의 자퇴 사실과 출신 학교를 파내서 인터넷에 올렸다.
문대가 고아라는 사실은 '동정을 살 여지가 있기에' 밝히지 않았으나, 이들의 메신저 방에는 이것을 비꼰 수많은 모욕이 난무했다.
-이 미친 것들이 진짜…
-사람이 어떻게 이러고 살지?
고발을 진행하던 팬들은 분노하면서도 당연히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조용히 일만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다수가 함께 이런 일을 처리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유출되었다.
[(1위!) 박문대 고아임 (1373)]
: 박문대 원룸에 사생이 침입해서 주민등록 초본 발견했다고 함. 부모님 두 분 다 사망 상태. 형제 없음.
[단체 메신저 방 캡처 사진] [테이프 붙인 초본 사진]
당연히 글 내리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조회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기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돌 주식회사 박문대 참가자, 가족 잃은 슬픔 딛고 도전한 오디션.]
이것 역시 어마어마한 비판에 직면하며 몇 시간 뒤 기사를 내리긴 했지만, 이미 알려진 내용은 어쩔 수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의외의 순작용을 불러오게 됐다.
당장 박문대를 욕하면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감성에 약한 사람들에게 오디션 참가자의 비극적인 과거는 당연한 셀링포인트가 되었다.
-어린것이 부모님 여의고 이렇게 도전하는 게 어디 쉬웠겠습니까 박문대군 힘내고 우승하길 바랍니다
-방송에서 어찌 그리 의연해 보일 수 있는지 참으로 감동적이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박문대 참가자 힘내세요∼ㅠㅠ 노래 너무 잘하세요 파이팅!
물론 모든 정보가 그렇듯이, 이 분위기가 잠잠해지면 박문대가 고아라는 것이 조롱의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덕분에 박문대는 어마어마한 옹호와 동정 여론 속에서 결승전을 맞게 되었다. 본인이 원하던 '절실한 이미지와 서사'를 얼결에 챙긴 덕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오랜만에 들여다본 인터넷에서는 별 미친 상황이 연달아 일어나 있었다.
'다 까발려졌네.'
그 무단 침입한 4명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쓰레기통을 뒤져서 찢어진 종이를 맞추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게 유출돼서 고아인 게 전 국민에게 알려질 줄이야.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궁금했는데 차라리 속 시원한 감은 있었다.
'뭐… 가족 없는 거야 남들이 알아도 상관없고.'
오디션 프로그램 캐스팅당한 시점에서 이미 말한 건데, 오히려 제작진이 언급도 안 한 탓에 너무 늦게 알려졌다.
문제는 이게 밝혀진 타이밍이 맞물리며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데뷔하겠는데…?'
아니, 데뷔의 문제가 아니라… 1등 할 수도 있겠는데?
"…."
이거…좋지 않다. 데뷔는 좋은데, 1등은 아니다.
'거기 지뢰가 있다고.'
나는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우선 컴퓨터에서 떨어졌다.
무대 가사 수정 핑계로 빌려서 슬쩍 서치 했던 건데, 이렇게 많은 걸 알게 될 줄은 몰랐다.
"형, 괜찮으세요?"
옆에서 같이 서치를 하던 김래빈이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고아인 게 밝혀진 건 괜찮냐는 뜻 이겠지.
"어. 이미 인터뷰 때 말했는데 안 나갔던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은 한결 안심한 표정이 되더니, 갑자기 아이디어가 생각난 건지 눈을 번뜩였다.
"형, 그럼 이 기세를 몰아서 기억상실도 밝히시는 건 어떨까요?"
"뭐'?"
이놈도 일 정리된 날 아침에 상황을 들어서 기억상실은 얼추 알고 있었다. 근데 별개로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현재 여론에서 그걸 밝히면 형에 대한 악성 댓글이 원천 봉쇄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표도 늘어날…."
"안 돼."
"예?"
여기서 표를 더 받아서 1등 하면 부상으로 지뢰밭을 받는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그냥 적당히 핑계를 댔다.
"증거 없어. 분위기만 이상해질걸."
"아, 진단서를 올리시면…."
"그런 거 없다."
"…기억이 사라졌는데 병원을 안가셨…?"
"몸도 멀쩡한데 그럴 돈 없어."
쿠궁. 돌 맞은 표정이 된 김래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
알았으면 됐다.
나와 김래빈은 그대로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나왔다. 곧바로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단어는 잘 찾았고?"
"어. 그 뜻이 맞더라."
수정 사항이 없다는 말에 연습실에서 작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차피 몰래 인터넷 들여다볼 용도로 간걸 뻔히 알면서도, 방송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자, 내일이 결승인데… 리더님, 한 말씀해주시죠?"
"오오!"
"돌아가면서 하자."
나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 그러자 낄낄 웃은 팀원들이 헛기침을 하다가 제각기 감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즐거워 보이는군.
거의 탈락이 확정인 골드 2도 의외로 포기한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 데뷔 인원수가 아직도 공표되지 않은 점이 희망을 준 것 같다.
팀에서 죽상인 건 한 명뿐이었다.
'이세진.'
아역배우 출신 그 이세진 말이다.
연습은 아득바득 어떻게 따라오던데, 리액션도 이런 방송용 분량도 영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이번 팀전 연습에서 별다르게 반발하진 않았다. 그냥 사교성이 더럽게 없고, 이걸 하고 싶어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
'기왕이면 이놈 말고 다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는데.'
내가 데뷔할 것 같으니 이제 같이 데뷔할 놈들을 재고 앉아 있군. 나는 한숨을 쉬고 생각을 버렸다.
'나나 신경 쓰자.'
"자! 마지막으로 박문대 리더 형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아쉬움 남지 않게, 준비한 건 다 보여줍시다."
"오∼"
적당히 상투적인 발언에도 마지막이랍시고 반응을 잘해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연습실 바닥에 앉았다.
의외로 긴장감이 쭉 올라왔다.
'내일이면 끝난다.'
상태 이상을 삭제할 수 있는 거의 확정된 기회.
"자, 연습 다시 하자!"
결승전이 코앞이었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마지막 촬영이 진행되는 곳은 한 유명대학교의 공연장이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만큼, 흥을 돋우기 위해 방청객을 3,000명 가까이 수용한 그 홀은 벌써부터 끈적거리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각자 응원하는 참가자의 푯말이나 슬로건 등을 들고 서서 방송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MC와 심사위원들이 속속들이 입장해서 자리를 잡았다. 관객석에서 방청객들이 보내는 환호에 몇몇 심사위원들이 답례로 가벼운 인사를 되돌렸다.
그리고 방송 시간 정각.
딜레이 되지 않고 방송이 시작되었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지난 12화의 긴 여정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불 꺼진 거대한 공연장 안, 영린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룹 결성을 위한 단 한 번의 의사결정! 주주 여러분, 마음을 정하셨나요?"
여기저기서 비명 같은 '예!' 소리가 울렸다. 혹은 괴로운 것 같은 '아니오'가 섞여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참가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당신의 주식이 있나요?"
꺄아아악!
아악!
넘치는 환호, 비명과 함께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사방으로 솟구치는 조명 속에서, 참가자들이 무대 장치를 타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지금 투자해 주세요!"
13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59화]
참가자들이 가장 첫 번째로 한 무대는 새로운 테마송이었다.
시즌이 한도 끝도 없이 흥행하면서 구색 맞추기 용도로 급하게 두 번째 테마곡을 집어넣은 것이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박문대는 부디 자신이 미래에 이곡을 들어본 탓이길 바랐다. 아니면 표절이라는 뜻이니까.
어쨌든 모르는 곡인데도 방청객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실물로 살아움직이는 참가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것이다.
물론, 화면으로 시청 중인 시청자들의 반응은 또 달랐다.
-? 뭔 곡임
-걍 바로 나 나 부르지 왜 띵곡 두고 이상한 걸 받아왔어
-얘들아 데뷔하자ㅠㅠ
-무슨 곡이든 선아현은 잘한다 이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진아 평생 센터 해
-아 긴장돼서 심장 튀어나올 것 같아ㅠㅠ
-문대야 데뷔해서 더 행복해지자
응원하는 참가자를 부르짖는 댓글들이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고, 넘기고, 거의 읽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갱신했다.
"허어어."
"땀 나."
처음으로 몇천 명 앞에서 무대를 하고 내려온 참가자들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즐거워했다.
'뭘 한 건지도 모르겠다.'
막판에 급하게 익힌 탓에 틀리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 박문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긴 하는데, 무대하고 거리가 멀어서 거의 무슨 홀로그램 같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정신을 차려서 긴장감이 몸에 깃들기도 전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의상을 갈아입으며 바쁘게 뛰어다니게 되었다.
그동안 무대 위에서는 MC가 등장해서 진행을 끌어가고 있었다.
"아, 정말 멋진 첫 무대였습니다!"
장장 3시간이 넘게 진행될 생방송이기에, 각 파트마다 다른 사람이 진행을 맡으며 최대한 피로를 줄이려 애썼다.
"준비된 무대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채널을 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저런 오디션 프로를 여러 번 진행해본 MC가 능숙하게 애드리브를 쳐가며 VCR이 뜨기까지 시간을 끌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결승전을 위해 준비한 팀전 무대, 과연 어떤 순서로 결정되었을까요?"
곧 참가자들이 미니게임을 통해 순서를 정하는 가벼운 분위기의 영상이 상영되었다.
'저걸 자정에 찍어서 잠을 못 잤었지.'
무대 아래에서 소리를 주워들은 박문대는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하필 전원 닭싸움 같은 원초적인 수단을 선택해서 류청우가 완승했었다.
'예정된 결과라고 해야 하나.'
놀라운 건 선아현이 선방했다는 점이다. 류청우 직전까지 남아있어 준 덕분에, 박문대의 팀은 두 번째로 우선순위를 확보했다.
물론 마음 편히 빈칸이 남은 순서를 고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작진은 꼴등부터 순서를 넣고 그 순서를 밀어내도록 만들었다.
좀 잔인하다 싶은 서바이벌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 방식이었다.
물론 이미 고여 버린 참가자들은 능숙하게 그 덫을 피해 갔다. 그들은 과장되게 반응하고 웃으면서 분위기를 유하게 조절해갔다.
[박찬주 : 어, 어어?!]
[이세진(큰) : 아이고∼]
박문대는 큰세진이 실실 웃으면서 순서를 미는 소리가 마침 위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다.
직전에 밀린 덕에 원하지 않던 순서에 있던 상대 팀 사람들이 의아한 소리를 내는 것도 들렸다.
"와, 무섭네."
마침 박문대의 옆에서 의상에 마이크를 옮겨 달던 큰세진이 소리를 듣고 혀를 내둘렀다.
상승세이긴 해도 데뷔 확정 수준이 아니었으니, 팀전 무대를 앞두고 더긴장했던 것이다.
큰세진은 드물게도 손을 떨고 있었다. 박문대는 혀를 찼다.
"김래빈이 청심환 가지고 있다던데."
"됐습니다∼ 먹어 본 적도 없고."
박문대를 향해 손을 내저은 큰세진의 뒤로 의상을 다 갈아입은 다른 팀원들이 달려왔다.
"박팀 올라갑니다∼"
스탭이 외치며 옆으로 뛰어갔다.
무대 위에 아래에 모두 스탭이 필요한 탓에 숫자가 부족하며 여기저기 빈틈이 생겼다.
"우리도 가는 거 맞지?"
참가자들이 알아서 따라가려던 순간, 선아현이 번쩍 손을 들었다.
"자, 잠깐만, 화, 파이팅하고… 가면 안 될까!"
"그럴까."
박문대가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팀원들도 얼른 손을 그 위에 올렸다. 이세진도 마지못해 손을 얹었다.
"파이팅!"
방송 탈 일 없는 기합은 짧게 끝났다.
"명언 말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뛰자고∼"
큰세진의 익살맞은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팀원들은 열심히 복도를 뛰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의 공연장.
최종 순서를 보여주지 않고 끝난 VCR 이후, MC가 마침내 다음으로 진행을 끌고 갔다.
"치열한 순서 공방전 끝에 결정된 첫 번째 공연 팀을 소개합니다…."
VCR이 나오던 화면에 대신 참가자들의 프로필이 떴다.
[선아현 (2), 김래빈 (5), 박문대 (6), 이세진 B(7), 이세진 A(11), 권희승(18)]
"팀 Challenger가 첫 번째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프로필이 사라지고, 1번에 붙은 자신들의 팀명을 보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참가자들의 연출된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
-뭐야 너희 왜 벌써 나와
-얘들아? 얘들아?
-이놈들아 왜 오프닝을ㅠㅠ
일반 경연 프로그램을 떠올리고 당황하던 팬들은 곧 상황을 깨달았다.
- 바보들아 무조건 먼저 송출되는 게 이득이야
무대가 끝나고 투표하는 게 아니라 이미 투표를 받고 있으니, 먼저 하는 게 무조건 유리했던 것이다.
물론, 잘할 자신만 있다면!
순식간에 시청자 반응이 변했다.
-맞네. 일찍 하는 게 답이네
-아ㅋㅋ 진작 알았지 니들은 몰랐냐?
-캬 머리 좋네
-애들이 똑똑해 난 애들만 믿고 가면 될 듯^^
-난 이미 믿고 있었다고!
게다가, 어쨌든 스타트를 끊겠다는 건 어지간히 배짱있는 선택은 맞았다.
사람들은 기대에 차서 무대 준비과정을 시청했다.
[팀원 일동 : 잘 먹겠습니다∼]
PPL인 프랜차이즈 카페 안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우선 방송을 탔다.
-문대 딸기 셰이크 먹어… 볼 쭈압쭈압 빨고 싶다 개 귀엽네
└신고했습니다.(사유 : 변태 )
└너무 해 잘못한 건 문대라고ㅠㅠ
└PPT 땄습니다 발표하세요
└미친 놈들ㅋㅋㅋㅋ
긴장감 없는 화면에 짧게 댓글의 긴장감도 풀어졌다.
참가자들은 영상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문대 : 우선 하고 싶은 콘셉트 있습니까?]
[권희승 : 저저! 지금까지 안 해본 거 하고 싶어요!]
[이세진(큰) : 나도!]
[선아현 : 나도!]
[박문대 : 음… 그래.]
자막으로 토끼반 박 선생님 이 지나갔다.
-ㅋㅋㅋㅋ
-애들 다 순해서 시청 편안
└이세진은?ㅋ 이세진은?ㅋ 이세진은?ㅋ 이세진은?ㅋ
└열사님 까지 말아라 최원길 보내버려 주셨다
└너나 원길이 까지 마세요 위선자 새끼ㅋㅋ
-애들은 순한데 시청자가 안 순해서 문제다
물론 화면에서 더욱 순해 보이는 건 이미 콘셉트를 정한 뒤에 PPL용으로 다시 찍고 있기 때문 이다.
[김래빈 : 저는Final이라는 가제에 잘 어울리는 콘셉트이면 좋겠습니다.]
[이세진(큰) : 와, 그것도 좋다!]
[이세진(배우님) : 그래서 어떤 콘셉트가 어울릴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막으로 생각에 잠긴 팀원들 이 나왔다.
침묵을 깬 것은 박문대였다.
[박문대 : '마지막'이라는 이미지 중에서도 '막판'… 쪽 느낌을 살리면 어떨까요.]
[이세진(큰) : 아, 딱 하나 남았다. 이런 느낌?]
[박문대 : 응, 근데 너무 무게 잡지 않는 선에서. 보는 사람이 너무 심각하지 않고 즐길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그러자 선아현이 손을 들었다. 참고로 선아현의 말을 더듬는 증상은 몇 화동안 제작진이 욕을 처먹은 끝에 마침내 자막에 구현되지 않았다.
[선아현 : 그러면… '■■' 같은 건어 때?]
화면 여기저기 참가자들의 머리 위로 느낌표 표시가 떴다.
[김래빈 : 저는 하고 싶습니다…!]
[이세진(큰) : 오, 나도! 재밌을 것 같아.]
[권희승 : 너무 좋은데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진까지 방송에 나왔다.
[박문대 : 그럼 저희의 테마는… '■■' 로 결정하겠습니다.]
와아! 감탄사와 함께 손뼉 치는 참가자들의 웃는 얼굴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그리고 테마 키워드가 다시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연습하는 참가자들과 녹음하며 칭찬받는 모습이 영상에 몇 컷 나왔을 뿐이다.
[이글러(작곡가) : 목소리가 굉장히 좋네요!]
[선아현 : 감사합니다….]
선아현은 귀가 빨개져서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자리로 들어갔고, 이어서 나온 박문대가 부른 자신의 파트는 한 번에 오케이가 났다.
작곡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더니, 박문대에게 요청했다.
[이글러(작곡가) : 혹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불러볼 수 있겠어요?]
[박문대: 예. 해보겠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다시 부르는 것을 보여 주진 않았고, 작곡가들과의 인터뷰 컷이 삽입되었다.
[이글러(작곡가) : 다 마음에 들어요. 이 팀은 진짜 잘해요. 곡 편곡도 '오∼ 너무 좋은데?' 이런 느낌?]
[이글러(작곡가) : 수정해 줄 것도 거의 없어요. 그냥 이대로 하면(잘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팀원들의 훈훈한 녹음 장면도 몇 컷 교차되었다.
결승이라 억지로 이상한 컷을 넣지 않은 덕분에 편집에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녹음하는 부분의 가사를 별 특징 없는 부분만 귀신같이 뽑아낸 탓에 주제를 짐작할 수 없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삐-' 처리된 단어가 궁금해서 뒹굴고 있었다.
-뭐임
-뭐야 나도 알려줘
-녀석들에게 보여준 걸 나에게도 보여 줘라…!
-에구 궁금해라 무대 봐야겠네요ㅠㅠ
-대체 무슨 신박한 의견을 내셨길래 다 편집했냐
-무대 준비 분량 저거 감추려고 자른 것 같아 열 받네
-이래 놓고 별거 아니면 웃길 듯ㅋㅋ
시청자들이 떠드는 사이, 어느새 별 갈등 없이 메인 댄서까지 정한 챌린저 팀이 끝없이 안무를 연습하던 것이 빨리 감기로 보이더니, 쓱 VCR이 끝났다.
지금 무대로 확인해주세요! 라는 문구와 함께.
-?
-끝인가
-이대로 그냥 무대?
-무대 나온다
맹숭하게 끝난 화면에 시청자들이 약간 당황했을 때, 공연장으로 돌아간 시청 화면에 무대 뒤 스크린이 잡혔다.
까만 스크린은 지지직거리더니, 푸르고 빨간 글리치가 튀며 하얀 글씨가 나타났다.
[Challenger]
: 도전자.
: 경기, 싸움 또는 스포츠 경기에서 전 우승자를 이기려고 하는 사람.
잠시 뒤, 화면이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픽 꺼졌다.
그리고 곡의 테마 멜로디가 공연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8비트로 변형되어서.
삐一 삐삐一 삐一 띠링!
노골적인 전자음은 한 멜로디로 시작해서 점점 화음을 쌓으며 발전해갔다.
마치 고전 게임이 현대 콘솔 게임으로 시리즈가 발전해가는 것처럼, 멜로디는 삽시간에 입체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테마 멜로디가 한 바퀴도는 순간, 무대 뒤 스크린이 열렸다.
슈우우욱-
검은 무대 안에서 파랗고 붉은 레이저와 함께 참가자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서자, 8비트 멜로디는 변주되며 작은 반주로 사라졌다.
"…."
방청객들도 반사적으로 환호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무대 위 인영들은 천천히 대형을 잡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60화]
방청객들은 무대 위 참가자들의 어두운 실루엣 위로, 근현대적인 전투복의 몇 가지 특징을 얼핏 보았다.
방탄조끼나 하네스 따위의 윤곽이었다.
'허억.'
흥분한 방청객들이 내적 비명을 지르는 순간, 갑작스러운 전자음이 공연장을 다시 울렸다.
변조된 중성적인 사람의 목소리였다.
[매칭 상대를 찾는 중입니다…]
[성공적 탐색.]
[위치 확인.]
[열세 번째 라운드. 돌입합니다….]
그 목소리에 맞춰서 온갖 고전 게임 버튼 소리가 새롭게 멜로디를 구성했다.
BBi BBi- Ding dong! BBibibibibiBBi, BBi, BBi-!
무대 위 참가자들은 그 소리에 맞춰서 몸을 움직였다.
팝이 부자연스럽게 들어간 동작은, 일종의 인형이나 로봇 따위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프리즈.
툭
짧은 동작을 끝으로 멈춘 그들의 위로, 조명이 켜졌다.
-네 손에 쥐고 있지 VICTORY
실현시키는 건 나야
깨끗한 사람의 목소리가 변조된 반주를 가르고 꽂혔다.
조명 아래 전형적인 샷 포즈를 한 선아현이, 소절 끝에서 씩 웃었다.
"아아악!"
순간 터질 듯한 함성이 공연장을 채웠다.
참가자들은 마치 그 함성에 응답하듯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테이지는 언제나 짜릿해
심장이 터질 듯해
바닥을 쓸며 등장한 큰세진의 소절을 받아서 권희승이 불렀다.
-손에 쥐고 있는 나의 WEAPON
절대 놓치지 않지 넌 알지
센터로 보컬이 치고 나올 때마다, 사이사이 복잡한 동작이 추가되며 고전 게임 캐릭터 같은 딱딱한 움직임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것은 의상과의 시너지로 인해 흡사 최근 게임의 캐릭터 창에서 플레이할 캐릭터를 선택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넘치는 아드레날린
솟구치는 POWER가 날린
마지막 SHOT!
-들이켜 네 흥분을
몸서리쳐 감각이 남긴
마지막 ROUND!
드물게도 보컬을 맡은 김래빈의 목소리가 마이크 위로 튀어 올랐다.
대형을 갖추고 팔을 당겨서 약간 독특하게 쏘는 안무는 대놓고 따라 추라고 만든 것처럼 구성 되어 있었다.
그리고 후렴구.
상승하는 음계를 타고 박문대가 고음을 찍어 올렸다.
-쏘고 날려 마지막 Match-!
하이라이트에 웃는 건 나니까
네가 쥔 그 VICTORY-!
내가 준 거야 너도 좋을 거야
그리고 후렴 뒤로 미친 듯이 상승했던 비트가 일시 드롭됐다.
쿵!
묵직하게 울리는 베이스 속에서 다시 테마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무대 위 그들은 삼각 대형을 갖추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네 손에 쥐고 있지 VICTORY
실현시키는 건 나야
-네가 골라 선택할 CHALLENGER
지금 여깄어 바로 나야
힘을 주어 신체를 움직이며, 무거운 비트에 어울리는 안무가 무대 위에 깔렸다.
몸을 튕기는 동작마다 이상한 위압감이 느껴질만큼 강약이 구분되었다.
머리를 털고 각을 잡는 동작 때마다, 방청객들은 입을 벌리고 무대를 지켜보았다.
그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댓글 창은 무대가 시작하자 잠시 멈췄다가, 이윽고 '미친', 'ㅓㅓ', '와', 따위의 짧은 단어들 로 도배되었다.
끔찍한 카메라 워킹에도 무대의 질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2절로 들어가며, 새로운 대형이 등장했다.
-네 기대는 언제나 황홀해
심장이 멈출 듯해
무대 위 인영들은 자신의 파트에 먼저 움직여서, 홀로 대형을 맞춰가며 다른 팀원을 거느리는 듯이 움직였다.
라이브와 동시에 하기엔 잔인할 만큼 어려웠지만, 보기에는 더없이 근사했다.
브릿지에서는 김래빈이 이세진의 보컬에 짧지만 정교한 랩을 주고받고 나자, 다시 후렴이 등장했다.
탕!
여기서는 다시 아이코닉한 쏘는 안무가 등장해서 혹시 모를 피로감을 방지했다.
그리고 다시, 시청자들이 방송으로 매번 들어봤을 데모 버전의 멜로디와 어감을 살린 드롭.
-네 손에 쥐고 있지 VICTORY
실현시키는 건 나야
-네가 골라 선택할 CHALLENGER
지금 여깄어 바로 나야
이번에는 선아현이 앞으로 나와서 안무를 잡았다. 무거운 비트 위에서 현란한 발놀림이 오갔다.
전체적으로 아주 치밀하게 구성된이 무대는 보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을 둘 다 챙겨서 집중도를 높였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무대가 끝났을 때 순식간에 끝났다며 물음표를 도배했다.
[Take this crown.]
[You're welcome!]
무대의 마지막. 초반의 전자음과 유사한 내레이션이 깔리는 가운데, 기지개를 피고 목을 꺾은 참가자들이 손을 흔들며 쓱 무대 뒤로 걸어서 사라졌다.
8비트 멜로디가 끊어질 듯이 울렸다.
BBi- BBi- BBibibibibiBBi, BBi-!
무대 뒤에서 조명이 터져 나오며, 그들의 실루엣은 서서히 사라졌다.
보통 안무는 포즈와 함께 끝나는 것이 정석이었다. 이건 모험수에 가까운 구성이었다.
하지만 이런 특이한 엔딩 고른 덕분에, 무대 위 그들은 마치 재밌게 게임 한 편하고 사라지는 캐릭터들 같았다.
"와아아악!"
시청자들은 잔뜩 흥분했다.
단어만 난무하는 시간이 조금 지나간 뒤, 삽입된 중간 광고가 끝날 때 즈음에야 소통이 가능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
-이 잔인한 놈들 이러려고 첫 빠따 들었군
-이걸 오프닝에 때리냐?
-토끼 탈 때 생각나네 근데 그때는 방송에서 뒤로 미루기라도 했지ㅋㅋ
-농담이 아니라 이거 이기기 힘들겠는데
-와 근데 X발 진짜 멋있다 턱 떨어질 뻔
-나 쪼개느라 잇몸이 다 마름
-컨셉 게임이었구나ㅋㅋ 박문대 선아현 머리 좋네
-솔직히 지금까지 아주사 무대 중에 제일 좋았다 인정?
-눈물이 줄줄 흐른다 선아현은 이미 아이돌이며 이에 대한 반박은 받지 않는다 다들 늦지 말고 주식을 사라
└팬사이트로 가세요∼
└마지막인데 봐주자 어차피 선아현 데뷔할 것 같다ㅋㅋㅋ
-일단 이 팀에서 넷은 데뷔할 것 같은데; 다음 팀 어쩌냐 어이구…
그리고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다음팀의 무대는 밋밋했다.
비교적 낮은 순위로 구성된 이 팀은 메인 포지션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고 팀워크를 다지는 분량을 받았다.
그리고 앞 팀처럼, 이 팀도 Final이라는 키워드를 살려보려 했다.
그러나 노력, 열정, 절박함에 초점을 맞춘 가사와 안무는 세련미가 없어서 도리어 부담스러워 졌다.
앞 팀에서 유머와 판타지를 섞어서 무대를 구성한 탓에 이 비교는 더 두드러졌다.
-열심히 하네
-쟤 눈에 들어온다 한 주 사줘야지
- 지루함
-다들 귀엽고 착한 것 같아요∼
다소 무미건조한 반응이 이어지는가운데 두 번째 팀의 무대는 끝났다.
그리고 이 루즈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팀의 무대가 공개되었다.
준비 과정은 똑같이 별것 없었지만, 류청우의 슬럼프 극복에 약간의 분량을 더 얹어줬다.
실제로 그가 슬럼프를 극복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방송에서는 계속 사양하던 리더 역할을 중간에 받아서 훌륭히 수행한 것처럼 나오긴 했다.
-응 알았어 류청우 찍어달라고?
-그래 군면제 놓치기 싫지ㅋㅋ
-류청우 괜찮은데 좀 빈정상하긴 함
-머글들 표 쓸어가겠지 뭐∼
골수 시청자들의 반응은 다소 시큰둥했다. 류청우의 좋은 분량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류청우가 전 국대가 아니었다면 무슨 욕을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대.
-차유진 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무대의 지배자! 화신!
-ㅋㅋㅋㅋ드립 밖에 안 나오네
-개 잘하긴 함
-흠 1등 하려나
차유진은 또 무대를 찢었다.
사실 다른 사람과의 합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탓에, 그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의 파트가 괜찮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냥 차유진이 빛나서 무대가 멋져 보일 뿐이었다.
솔로나 경연 프로그램에 최적화된 인재라고 볼 수 있었다.
시청자들은 즐겁게 떠들었다.
-아 재밌었다.
-첫타 막타가 괜찮으니까 재밌긴 하네
-이제 뭐 남음?
다시 진행을 맡은 영린의 중대 발표가 남아 있었다.
"참가자들이 준비한 Final 팀전 무대는 어떠셨나요? 예. 즐겁게 관람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중대 발표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영린이 손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바로, 데뷔 인원수 발표입니다!"
무대를 모두 마친 참가자들은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스테이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오랜만에 성공적 무대가 어쩌고 하는 팝업이 떴지만, 내가 그걸 들여다볼 상황은 당연히 아니었다.
언제 생방송으로 얼굴이 송출될지 모르니까.
혹시 무대 위에서 무슨 발표라도 하면 리액션을 잡으려는 카메라가 참가자 팀마다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위에서는 인원수를 발표하는 중이다.
"몇 명 보냐?"
"넌?"
"난… 열 명?"
큰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간 희망사항이 섞인 답변 같았다. 옆에서 메이크업 수정을 받다가 막 끝난 김래빈이 진지하게 끼어들었다.
"제 생각에는 홀수일 것 같습니다. 보통 아이돌 그룹의 대형을 생각해서 홀수를 많이 선호하시니까요."
"말 되네."
그게… 그런 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속으로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기도를 막 마친 선아현과 눈이 마주쳤다.
"넌 몇 명일 것 같아?"
"그, 글쎄… 아, 아마… 7명?"
"7 명?"
"너무 적지 않냐?"
주변에서 주워 들었는지 이놈 저놈 끼어들어서 핀잔을 줬다. 다들 아닌척하지만, 바짝 긴장한 탓인 것 같았다.
선아현은 몸을 움츠렸지만,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진 않았다.
'역시 성격이 변했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7명 찍은 사람이 제일 많을 것 같은데. 그 이상 찍은 사람이 더 많으면 좋겠지만."
"으, 응!"
선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차유진이 '난 짝수 좋아요.'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있자니, 위에서 방청객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밑까지 울렸다.
"뭐야?"
거의 진동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참가자들이 당황하는 사이, 영린의 마이크 목소리가 아래까지 쩌렁쩌렁 들렸다.
"이번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주주님들께서 선택하신 데뷔 희망 인원 평균은… 6.47명 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이 다 굳었다.
"반올림을 통해 숫자를 자연수로 보정한 결과… 최종 데뷔 인원은, 6명입니다!"
그리고 다시 비명과 욕으로 위가 시끄러워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6.4…, 뭐?"
참가자들의 당혹스러운 목소리 뒤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마지막 화 어그로지.'
사람들이 고른 데뷔 희망 인원을 아예 평균 내버린 것이다.
데뷔 희망 인원은 한 번만 투표할 수 있었고 수정이 불가능했다.
덕분에 사람들이 흥행 초반에 아무 생각 없이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이돌 그룹 숫자'에 투표했던 게 그대로 들어갔다.
근소한 차이로, 5명을 선택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시리즈는 대흥행했고, 제작진이 그나마 인원을 늘려보겠다고 눈물의 편법 쇼를 벌인 결과가 이거였다.
규모는 큰데 공격적인 성향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장난 삼아 1명에 테러한 것까지 표본에 들어가다 보니, 겨우 한 명 늘어난 것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이딴 병신 같은 방법으로 할 거면 진작 말을 하지 개자식들아ㅋㅋㅋㅋ
-6.47이라 6명? 6명? 돌았나 미친놈들ㅋㅋㅋ
벌써 예상 가능한 인터넷 반응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의 준비나 하자.'
이제 마지막 무대만 끝나면, 최종 순위 발표식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61화]
박문대의 예상대로 시청자부터 방청객까지 모두가 '평균 내서 6.47명'이라는 신개념 결과에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졌다.
몇몇 방청객들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자신의 SNS에 글까지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야유해서 현장 갑분싸 됨 마지막까지 정말 대단하다 아주사
-대체 평균 내겠다는 미친 생각은 어디서 나왔냐
-차라리 깔끔하게 그대로 5명 하든가 6.47명ㅋㅋㅋㅋ
-제작진 0.47명 왜 버림? 7위는 객원 멤버로 받아주자
└ㅋㅋㅋㅋㅋ이거다
그러나 혼란이 지나간 후에 반응은 의외로 무작정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제작진이 애를 썼다는 것이 느껴져서 다소 숙연해졌기 때문이다.
-뭐 주작 안 한 게 어디냐.
-제작진도 한 9명 하고 싶었을 거야.
-이상한 데서 양심적인 놈들… 어그로는 끌어도 조작은 안 하는 놈들…
-그래 5명, 6명 중에 고르는 거면 6명이지
사람들은 그럭저럭 상황을 받아들였다. 물론 인원수가 너무 적다며 울부짖는 사람은 여전히 넘쳤다.
-애초에 1명 투표를 막아뒀으면 되는 거였잖아 아주사 미친놈들아ㅠ
그리고 그때 즈음, 타이밍을 맞춘 듯이 새로운 VCR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예이!]
본 적 없는 파스텔 린넨 의상을 입은 참가자들이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고 웃는 영상이었다.
그들은 캄캄한 구조물 사이를 걷고 있었다. 구조물 사이사이로 빛이 반짝거렸다.
순식간에 현장과 인터넷의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뭐지?
-언제 찍었대
-무슨 영상임?
참가자들은 카메라를 붙잡고는 한 명씩 돌아가면서 마지막 방송에 대한 소감을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뛰어갔다.
[언제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마치 전형적인 감동 VCR처럼 보였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의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VCR을 시청 중이던 방청객들도 응원하는 참가자가 나올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참가자는 어쩌다보니 박문대였다.
박문대는 어색하게 카메라를 보고, 그냥 쓱 웃었다.
[감사합니다. 꼭 데뷔할게요.]
답지 않게 확실한 말이었다.
짧은 말을 남기고 박문대도 카메라 화면 밖으로 달려 사라졌다.
당연히 박문대의 팬들이 많은 커뮤니티에서는 댓글이 폭주했다.
-ㅠㅠㅠ아이고 문대야…
-문대 데뷔해야 한다
-멘털과 실력을 모두 갖춘 준비된 문대에게 투자하세요… 오늘 전화하시면 100원으로 5년 갈 투자가 가능하십니다…
-얘가 패드립하면 다 진짜라는 걔임?
└ㅇㅇ걔임
└히익 판사님 저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정사 빼도 팔방미인입니다 딱 한 입만 드셔 보세요
└ㅋㅋ사실 이미 투표했어 존나 잘하더라
└오 감사
한 표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 팬들은 가정사를 들먹이는 반응마다 빡침을 참고 영업을 계속했다.
그 사이 모든 참가자가 사라져 휑한 검은 화면에서는, 배경에 깔리던 바로 나 어쿠스틱 버전이 아련하게 커졌다.
시청자들은 이상한 여운에 휩싸였다.
-진짜 끝이라는 느낌이다
-종방 바이브 제대로네
-BGM 때문에 더 그런 듯
-얘들아 그냥 20명 다 데뷔하면 안 될까ㅠㅠ
-20명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냐? 제작진은 지금이라도 데뷔 인원 재투표해
그리고 영상의 각도가 돌아갔다.
참가자들이 달려간 방향이었다.
돌아가는 카메라를 따라, 레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
-헐
-설마
어느새 방송 송출 화면은 공연장으로 전환됐다. 무대 위로 올라오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영상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 실시간 송출이었던 것이다.
-아…
-ㅠㅠㅠ
그리고 참가자들은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로 나 어쿠스틱 편곡 버전을.
-ㅠㅠㅠㅠ
-안돼 얘들아 가지 마
-평생 아주사 해줘
└저주하냐?ㅋㅋ 근데 그렇게 해줘 진심임
└매주 꽁냥꽁냥 거리고 무대만 하자ㅠㅠ 탈락은 말고ㅠㅠ
-아 다 정들어서 어떻게 보내냐
참가자들은 벙긋벙긋 웃으면서 자기 파트마다 정성껏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1절 벌스가 다 지나가 기도 전부터 훌쩍거리는 참가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물론 박문대는 침착하게 자기 파트를 잘만 소화했다. 2절 후반 애드리브도 듣기 좋게 깔끔하고 귀에 잘 감겼다.
-노래 진짜 잘하네
-빠들이 미치려고 하던데 이유가 있었구나
-지금 입덕 해도 안 늦었지?
└안 늦은 정도가 아니라 승리자 아니냐? 감정 소모 안 하고 막방에 잡아서 데뷔 꿀만 빨면 되겠네ㅋㅋ
-지금 박문대 파기로 결심했다 얼굴까지 마음에 든다
몇몇 예외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무대는 애수가 넘치는 편곡에 빠진 참가자들의 모습 때문에 방청객들까지 훌쩍거리게 했다.
엔딩은 눈물을 주룩 흘리는 이세진의 하얀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끝났다.
-얘 잘생기긴 했다
└13화 중에 오늘이 리즈인 듯
-확신의 배우상
-얘들아 고생 많았다ㅠㅠ
-다들 잘 됐으면 좋겠다…
무대에서 내려온 참가자들은 본인들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훌쩍거리는 참가자들의 메이크업을 잡아주던 스타일리스트들이 슬슬 짜증이 날 무렵, 위에서 MC 새로운 VCR을 소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건가.'
박문대는 큰 감흥 없이 영상의 내용을 짐작했다. 오디션 마지막 화에 절대로 빠질 일 없는, 가족 콘텐츠다.
물론 박문대는 가족이 없어서 그냥 뭉개고 넘어갔다.
'오열하는 모습만 잔뜩 넣었겠군.'
그는 김래빈이 할머니의 영상편지를 보며 눈이 퉁퉁 부어 삼백 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던 것을 잠시 떠올렸다.
사실 참가자들 대부분이 울었기 때문에 컷을 뽑기는 굉장히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참고로 박문대는 담담하게 참가자들의 등이나 도닥거려주는 컷만 몇 장면 잡혔다.
그게 오히려 사람들이 마음 쓰게 만들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다 끝이네."
"…?"
박문대에게 뜬금없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뭐야.'
아역배우 출신 이세진이었다.
"뭐… 프로그램은 곧 끝나긴 하죠."
"넌 데뷔할 테니 안 끝난다, 그런 뜻이야?"
'이 새끼는 왜 갑자기 시비야.'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박문대는 그냥 대꾸하지 않고 말을 무시했다.
"…좋겠네."
이세진은 그냥 그렇게 웅얼거리더니, 구석에 가서 우울하게 처박혔다.
"…."
박문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기로 정했다. 최종 순위 발표 직전인데 남이나 신경 써줄 놈이 있다면 그건 호구였다.
생방송 초반 때만 해도 서로 격려하던 참가자들은 마지막 무대의 감성이 가시고 나니, 극도의 긴장감으로 굳어버렸다.
스탭이 다시 그들은 부른 것은 딱 그 타이밍이었다.
"B구역 이동! 이동합니다!"
참가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우르르 이동했다.
길고 긴 마지막 순위 발표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로 어깨가 아팠다.
'이거 피로 감소 특성 없었으면 죽을 맛이었겠는데.'
고개를 돌리기도, 자세를 바꾸기도 힘들었다.
몇천 명의 사람들이 밑에서 뚫어져라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은 꽤 강한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무대 할 때보다도 가까운데.'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팀전 무대보다도 관객이 가까웠다.
눈을 조금만 굴려도 무대 아래 있는 방청객과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바로 밑에서 슬로건도 흔들리고 있었다.
문댕댕은 오늘 데뷔한다
궁서체로 적힌 것이 굉장히 비장했다.
'손이라도 흔들어줘야 할 것 같군.'
그러나 이 긴장된 분위기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과연, 영광의 6번째 자리를 차지할 참가자는 누가 될까요…."
MC 저 대사를 포함해 몇 가지 라인으로 15분째 진행을 돌려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라온 지 20분이 지났는데 한 명도 발표가 안 됐다는 게 대단했다.
'표수 보니 그럴 만도 했다만.'
듣기로는 문자투표가 백만이 넘었다고 했으니, 아직도 집계 중인 건 이상하지 않았다.
MC는 3분쯤 더 흐른 후에야 제작진의 사인을 받았다.
"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인터넷과 생방송 문자 투자를 합산한 최종 주식 순위, 6등! 지금 발표합니다!"
주변에서 참가자들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넘치는 리더십과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을 받은 참가자입니다."
전광판에서 해당하는 참가자의 얼굴을 어지럽게 비췄다.
'…근데 왜 내가 있냐.'
류청우랑 큰세진은 알겠는데.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미 다른 두 명과 다르게 눈에 기대가 없어 보였는지, 내 얼굴이 잡히자 이 분위기에도 밑에서 사람 몇 명이 웃었다.
"축하합니다, 이세진… B!"
큰세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B가 붙자 빵 터지며 몸을 수그렸다.
"하하…!"
주변에서 참가자들의 무수한 악수요청과 축하가 큰세진에게 쏟아졌다.
나는 받을 축하는 다 받고 나오는 큰세진과 가볍게 하이파이브나 했다.
"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기대 버리려고 애썼는데."
큰세진은 달아오른 얼굴로 술술 데뷔조에 든 감상을 말하고, 자신의 팬들을 향해 애교 비슷한 것을 선보인 뒤 단상으로 올라갔다.
'진짜 데뷔했네.'
상승세라 그럴 것 같긴 했다.
'잘 모르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지.'
나는 선선히 다음 순위 발표를 기다렸다.
…그리고 장장 15분 넘는 인고의 기다림 끝에 다음 순위가 발표되었다.
"5위는…! …류청우!"
완전히 예상했던 인선이다.
오히려 순위가 좀 떨어진 감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본인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지 프로그램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멀쩡한 사람 좋지.'
나는 이번에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4위.
"김래빈 참가자! 축하합니다!"
김래빈은 긴장해서 축하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단상으로 비틀거리며 뛰어갔다.
그리고 발음만 또렷하게 줄줄 소감을 뱉었다.
…하지만 솔직히 소감보다는 발표문처럼 들렸다. 본인이 잘하는 것과 보완 중인 것을 줄줄 읊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제가 계발 중인 역량은 보컬입니다.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그룹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앞으로는 소통 능력도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그나마 소감 같았던 건 마지막 두 문장뿐이었다.
"…다시 한번 제게 투자해 주신 주주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씩씩하게 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팬들한테도 사랑한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래빈은 마이크를 반납하고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아차 싶은 표정으로 MC를 봤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 그래도 쓸모는 많은 놈이지.'
나는 적당히 납득했다.
다음 발표는 3위.
이제 불릴 때가 되지 않았나, 희망을 가져 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위는… 선아현! 축하드립니다!"
차유진과 선아현 사이에서 길게 끌던 전광판에 선아현의 얼굴이 떴다.
하얗게 질려있던 선아현의 얼굴에 순식간에 열기가 돌았다.
"고, 고마워…."
선아현은 의외로 울지 않고 축하를 받았다. 덕분에 포옹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얼결에 다른 놈들 따라서 해줬다.
"저,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 그런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신 주주님들과… 친구들에게 정말, 가… 감사합니다. 더, 더… 자랑스러워하실 만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아현은 마이크를 반납하고 올라가면서 펑펑 울었다.
원래 미래에서 확실히 데뷔하지 못했던 놈이 결국 붙는 것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음…. 좋은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선아현은 괜찮은 놈이니까.'
그럼 이제 남은 건….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마지막 순위 발표식! 이제 대망의 1위 발표를 목전에 앞두고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됐군.'
나는 한숨을 참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62화]
1위와 2위 발표만 남았다.
이러다 '박문대'가 탈락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은 안 들었다.
'후보가 없어.'
남은 사람 중에 1, 2위를 할 만한 얼굴 자체가 없었다.
아, 지난 순위 발표식에서 3위를 했던 아무개는 여자친구와 목격담이 떠서 민심이 폭락했다.
좀 안 됐다만… 아이돌 오디션에 참가하면서 촬영 쉴 때마다 여자 친구를 만난 건 스스로 불러온 재앙 아닌가.
"1위 후보 참가자 두 분을 지금 공개합니다!"
MC가 쩌렁쩌렁 마이크에 대고 힌트를 몇 가지 외쳤다. 긴 진행으로 목이 좀 쉬어 있었다.
그리고 앞서 순위들처럼 약간 시간을 끈 뒤, 후보가 발표되었다.
"차유진!"
차유진이 씩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밑에서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다른 후보는…."
나갈 준비 하자.
"박문대 참가자입니다!"
역시.
나는 안 친한 몇몇 참가자들에게 형식적인 축하를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형, 축하드려요."
그나마 골드 2가 진심이었던 것 같으나, 이쪽은 슬슬 탈락을 실감하는지 억지로 씩씩한 척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냥 등을 몇 번 두드려주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올라가 있던 차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합시다!"
굉장히 신나 보였다. 이 기세를 몰아 1위까지 가져가 줬으면 좋겠군.
나는 별말하지 않고 순순히 악수를 받아줬다. 일시적으로 공연장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다.
'일단 이걸로 데뷔 확정인가.'
나는 혹시 상태창의 변화가 있나 살 폈지만, 아까 뜬 '성공적 무대' 팝업뿐이었다.
"두 분, 1등을 놓고 경쟁할 상대 후보를 보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차유진이 곧바로 냉큼 마이크를 들었다.
"정말 멋집니다!"
"하하! 아주 명쾌한 답변입니다∼"
MC는 하하 웃더니, 긴장감 조성용 낚시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오늘 1위 하실 것 같나요?"
"모릅니다. 근데 1위 좋아요!"
차유진이 엄지를 척 들었다.
결승에서 장난친다고 반감 가진 사람들이 나올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보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여유였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박문대 참가자의 소감을 들어볼까요. 어떠십니까, 상대방을 보시면?"
나는 마이크를 들었다.
"워낙 잘하는 친구라… 저 친구랑 같이 거론된 게 실감은 안 납니다."
"방금 참 겸손한 발언이 었습니다∼하지만, 1위는… 어떻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어떻게든 나한테도 이 질문 물어볼 줄 알았다.
생각해 보는 것처럼 답변을 한 템포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슬쩍 저으며 답했다.
"… 힘들 것 같은데… 음. 사실 2위도 제 목표보다 굉장히 높은 순위라, 감사할 뿐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힘들 것 같다'라고 대답할 때 무대 아래 방청객들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너무 진심처럼 들렸나.'
"아, 2위를 해도 아쉽지 않다? 정말 아쉽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물론 된다면 정말 감사한 바일입니다."
"오∼ 알겠습니다. 여러분, 박문대 참가자의 마음가짐 이었습니다."
'질긴 놈.'
MC 겨우 질문을 멈추고 다시 뜸 들이기에 들어갔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화제성과 시청률, 각계의 반응, 데뷔하면 받게 될(자칭)최고의 대우까지 줄줄 다시 방송을 탔다.
그리고 한참 시간을 끈 뒤 발표 직전.
"대망의 1위는… 광고 후에 공개됩니다!"
'이럴 줄 알았다.'
원래 이러면 후보들이 긴장했다가 주저앉고, 뭐 그런 극적인 반응을 보여줘야 하는데 하필 후 보가 나랑 차유진이라 그냥 박수와 웃음만 나왔다.
대신 무대 아래에서 원망의 신음과 몇 가지 욕이 튀어나왔다.
'방금 쌍욕 하신 것 같은데.'
'문댕댕' 슬로건 뒤에서 튀어나온 욕설을 들었다고 거의 확신했다.
"형! 데뷔! 저랑 재밌는 거 많이 해요!"
"…좋지."
차유진은 중간 광고 표시가 뜨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완전히 들뜬 게, 누가 보면 이미 데뷔해서 숙소라도 입성한 줄 알았을 것이다.
'정말 1위 관심 없나.'
하기야 아직도 1위 혜택은 '어마어마한 혜택!'이라는 말로 대충 연명하는 중이다.
명예욕 없으면 '몰라∼ 난 데뷔함∼' 같은 상태여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근데 1위 혜택이 뭔지 아는 입장에서는 쫄린단 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 혜택은 사실상 벌칙이었다.
사실 원래도 차유진이 1위였고 직전 순위 발표식에서도 1위였으니 저쪽이 이길 확률이 더 높은 건 안다.
근데 사람이 예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어제 본 인터넷 반응을 보니 '박문대'가 1위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 모르겠다. 그럼 욕 좀 먹지 뭐.'
나는 생각을 포기했다. 돌연사 피했으면 됐다.
차유진이 떠드는 걸 몇 마디 받아주고 나니 다시 생방송이 재개되었다.
"대망의 1위 발표를 앞둔 재상장!아이돌 주식회사!"
MC는 아까 한 말을 또 한 바퀴 반복했다. 내가 외울 지경이다.
'슬슬 좀 말해라.'
솔직히 이미 둘 다 붙은 판에 뭘 이렇게 시간을 끈단 말인가.
'다들 채널 돌렸을 것 같은데.'
다행히 드디어 MC가 이름을 말했다.
대망의 1위는….
"…박문대!"
내가 기대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됐군.'
내가 1위를 했다는 거지.
나는 혹시 티가 날까 봐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이… 좋았다.
1위 벌칙이고 나발이고, 일단 내가 이 겼다니까 이상하게 확 아드레날린이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달성의 맛이 짜릿했다.
나는 거의 소리 내며 웃을 뻔했다.
'이거 대학 붙었을 때보다 센데.'
덕분에 나는 얼굴을 감출 것 없이 곧바로 소감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차유진이 굉장히 의리 넘치게 포옹했다.
'미국식이군.'
짧게 포옹을 돌려주고 마이크를 들었다.
MC와 똑같은 각도로 공연장을 보니, 정면 밑에 몇몇 제작진들이 '울 생각 없니?'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응. 없어.'
나는 그냥 웃었다.
뭐, 솔직히 반은 운빨에 상태창 덕이긴 했다만… 어쨌든 내 몫도 있지 않은가.
"박문대 참가자, 소감! 소감 부탁드립니다."
"예."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갑자기 아드레날린에 취해서 그랬나. 머리에서 별 계산이 안 들어가고 척수쯤에서 말이 나온 것 같다.
"솔직히 데뷔를 목표로 나왔습니다. 데뷔를 꼭 하고 싶었고, 해야 했고…. 그래서 1위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기대도 안 했고. 데뷔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숨을 골랐다.
"근데… 하니까 너무 좋네요."
여기저기서 환성과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솔직히 이럴 줄 몰랐어요'라고 이은 내 말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MC가 '아직 시간을 끌라'는 제작진의 신호를 받고, 내게 다시 물었다.
"이 자리를 통해 감사하고 싶은 분이 계신가요?"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다.
"음… 특별히 언급할 사람은 떠오르지 않네요. 그냥, '박문대'에게 투자해 주신 분께 감사합니다."
무대 밑에서 비명이 터져서 잠시 멈췄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뭔가 보답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음, 제게 뭘 소비하셨든 간에, 그 소비가 동 가격대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끝마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환호와 박수 사이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문댕댕' 슬로건은 들고 있는 분은 흐느끼느라 손에 너무 줬는지, 슬로건이 거의 우그러져서 '누댄 내' 비슷하게 보였다.
'이 말에…?'
약간 당혹스러웠지만, 뭐 좋게 봐줬다면 다행인 일이다.
자기 일도 아닌데 같이 기뻐해 주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약간 아릿했다.
'나쁘지 않네.'
이러면 1등 벌칙 정도야 받아도 상관없지 않나.
내가 마음을 정리했을 때, MC는 다음으로 2위 한 차유진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차유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영어로 어머니께 소감을 정하고, 방청객들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대놓고 즐겜러라 사람들이 왜 찍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한테 괜한 스트레스, 감정 소모 안 주는 타입이다.
"감사합니다∼"
차유진이 쾌활하게 소감을 마무리했다. 제작진들이 단상 옆 데뷔조 자리로 합류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차유진이 신나게 뛰며 떠나고 나자, MC가 나를 돌아보았다.
긴장을 조성하는 배경음이 시작됐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 왔습니다."
왔다.
나는 정자세로 서서 두 손을 모았다.
"1등에게 주어지는 어마어마한 혜택, 그 정체를 지금! 공개합니다. 박문대 참가자!"
"예."
"어떤 혜택이었으면 좋겠나요?"
"…글쎄요."
1억쯤 받고 싶다.
"잘 모르겠습니다…. 빠른 데뷔?"
"아∼ 중요하죠!"
MC가 손을 펼쳤다.
"자, 혜택을 보여주세요!"
그러자 정면의 커다란 전광판과 그 옆 전광판들에 오프닝 효과가 나타나더니, 곧 글이 떴다.
[상금 5,000만 원!]
"…!?"
왜 상금이 거기서 나와.
"네! 박문대 참가자는 1등 혜택으로 5,000만 원을 즉시! 이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와중에도 머리는 열심히 실수령액을 뽑았다. 3,900만 원.
물론… 받으면 좋다.
하지만 역시 이대로 삼천만 원을 먹는 일은 없었다.
"혹은! 다른 선택지도 있습니다!"
MC의 말에 따라 전광판에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새로운 멤버 영입!]
"박문대 참가자는 1등의 권한으로, 마지막 순위 발표식까지 함께 올라온 14명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을 함께 데뷔할 팀원으로 지명할 수 있습니다!"
'떴다.'
이 빌어먹을 선택지가 기어코 떴다.
바로 1등 더러 알아서 최종 탈락자 중 한 명을 선택해 데뷔조에 합류시키라는 막장 혜택!
혜택의 탈을 쓴 벌칙!
심지어 더 악랄해졌다.
'상금하고 둘 중에 고르라는 거였냐…!'
이 상황에 어떻게 상금을 고르냐고!
여기서 상금 고르면 나머지 14명을 찍은 사람들을 그대로 적으로 돌리는 꼴인데 당연히 새로운 영입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벌써 뭐라고 욕할지 각이 잡힌다.
-오천만원 큰돈이긴 한데 다른 사람 인생만큼 큰돈은 아니지 않나.
-어차피 데뷔하면 많이 벌 거면서ㅋㅋ 돈 진짜 좋아한다∼ 몇 년 뒤 둘기할 미래가 보이네ㅎ
-애들 고생하는 거 같이 봐 놓고 상금 고를 줄 몰랐어… 좀 이미지 와장창 나긴 한 듯
아마 누가 서 있어도 상금을 고를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제작진 놈들도 그걸 알고 이딴 짓을 저지른 것일 터다.
괜히 프로그램 마지막 화에 드라마 좀 넣어보겠다고 우승자 정신 고문하는 게 과연 마이너스 투표를 정식 룰로 넣은 놈들답다.
'이거 열 받는데'
확 상금 먹고 욕이나 좀 먹을까.
"박문대 참가자?"
"…예."
나는 간신히 늦지 않고 대답했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온갖 괴성이 방청객 석에서 난무했다.
무대 아래 서 있는 사람들도 제 각기 이름과 비명을 내지르는데, 머리가 안 돌아갔다.
"마음의 결정을 하셨나요?"
"…예."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