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

잠시 거짓말 같은 침묵이 흘렀다.

본부장은 뜬금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마법소녀? 애들이 보는 거 말이야? 루나문 같은?"

"예."

박문대는 본부장이 불쾌해하기 전에,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탁.

"물론 정말 유아용 마법 소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PPT가 한 장 더 넘어가며, 몽환적 색채의 소품 컷들이 보였다.

노을빛에 반짝이는 교실 창.

금 간 피처폰의 하늘 바탕화면.

보랏빛 효과가 넘실거리는 교실 시계.

"다만 그 장르가 가진 상징적 모티브만 따서 재구성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종목입니다. 최근 레트로 감성이 유행하니 대중성과 선구안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으음."

박문대는 레트로 마케팅의 사례를 몇 가지 PPT에 띄웠다. 그중에는 소속사의 모기업인 T1에서 진행한 SNS 바이럴도 있었다.

"또한 몽환적인 곡 분위기와 '청춘', '마법'이라는 키워드가 어우러진다면, 아트 필름 등의 구성으로 예술성도 충분히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

본부장 같은 높으신 분의 약한 부분을 콕 찌르고 들어간 것이었다.

박문대는 본부장이 자체제작 아이돌 이야기를 할 때, 그가 이 소속사 사업에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는지 알아차렸다.

'있어 보이고 싶어 하던데, 잘 먹힐 수밖에 없지.'

앞에서 실컷 대중성 이야기도 떠들어놨으니 상업성에 대한 변명도 충분히 해뒀다.

"관련 이미지 레퍼런스 및 편곡 시안입니다."

박문대는 PPT를 넘기며, 멤버들과 함께 선별한 추가 이미지 자료를 보여 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번 곡을 짧게 재생했다.

코러스 부분이었다.

하지만, 데모와는 느낌이 달랐다.

"…!"

"이런 방향으로 전체적 편곡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함께 서서 발표 자료를 보던 김래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편곡을 주도한 본인이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건 묘한 편안함을 줬기에, 나머지 멤버들도 슬쩍 안도했다.

'저것 때문에 한숨도 못 잤지.'

류청우에게 차가 있고 운전면허가 있어서 그들에겐 다행이었다. 매니저에게 문자만 넣고 작업실로 갈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아침에 깨서 문자를 본 매니저는 기겁했지만 말이다.

"오…."

본부장은 묘한 감탄사를 내더니, 곧 고개를 까닥까닥거렸다.

그리고 박수를 쳤다.

"아, 확실히 젊고 재능 있는 친구들이 있어야 돼. 이렇게 하루 만에 딱! 발표까지 준비해 오고 말이야∼"

'마음에 들었나 보군.'

박문대는 코웃음을 참았다.

본부장은 '요새 입사하는 애들보다 나은 것 같다'라는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실무진들에게 떠들더니, 겨우 본론을 이야기했다.

"좋아∼ 이렇게 진행해 봐요."

"감사합니다!"

"아, 이거 나라서 오케이 하는 거예요. 다른 본부장, 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몰라∼"

박문대는 생색을 내는 본부장을 보며, 최대한 건실하게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상대하던 바이브였다.

참고로 그 꼴을 본 멤버들은 '대체 얼마나 7번을 하고 싶었던 거냐'며 뒤에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죠. 본부장님 믿고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응?"

박문대는 끝난 줄 알았던 PPT를 한 장 더 넘겼다.

"바로 회사에서 진행해 주셨던 곡에 대한 의견입니다."

"…?"

"아, 야구부라는 콘셉트는 저희도 정말 좋았습니다. 그렇죠?"

"그럼요!"

"한번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정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문대와 멤버들은 이미 예정된 호응을 열심히 주고받았다.

'회사 사람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끝내 버린다.'

"그러니까 전통 야구부 느낌을 더 살릴 수 있도록, 디스코 대신 다른 장르를 가미하면 어떨까 합니다."

"뭐, 뭐?"

박문대는 희미하게 웃었다.

"록(Rock)을 쓰면 어떨까요?"

소속사에서 공인했던 테스타의 데뷔 날짜 2 주 전.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걸렸다.

[아주사 테스타 6월 18일 전격 데뷔]

[오디션 출신 대형 신인 테스타, 데뷔 초읽기]

[테스타(TeSTAR)까지 등장… 6월 가요계 대란]

기존에 데뷔 기간으로 잡은 마지노선보다 닷새쯤 늦은 날짜였지만, 그래도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 보름간 아무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뭔가 진행 중이긴 했나 보다. 휴…

-20일 남았구나. 드디어 맘 편히 기다릴 수 있겠네.

-애들 SNS에도 첫 글 빼고 아무것도 안 올라왔잖아ㅠㅠ 얘들아 잘 부탁한다며! 다들 앨범 준비하느라 바쁜 거지?ㅠㅠ

-리얼리티 일정도 잡혔던데 빨리 예고 떴으면 좋겠다

몇몇 팬들은 VTIC과 일정이 겹치는 것을 살짝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날짜까지 뜬 데뷔를 미루자고 할 수는 없었기에 현실에만 족했다.

-애들은 좋아하겠네ㅋㅋ VTIC 존경한다는 멤버들 꽤 있었지?

-뭐 이대로면 완전 동시 발매도 아니고 한 주쯤 차이 날 테니까 괜찮을 듯.

-문댕댕 청려님 하고 만나는 거 또 볼 수 있겠다

└생각만 해도 흐뭇함

팬들은 소식 한 줄을 떡밥 삼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불만을 표출하는 팬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기다려 보자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컴백까지 2주도 안 남은 시점.

-왜 아무것도 안 나와?

사람들은 폭발했다.

-소속사 일 안 하냐

-티저 이미지라도 나올 때가 됐는데 왜 안 뜨냐고 애들 SNS도 감감무소식

-아니 어떻게 이 정도로 떡밥이 없냐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얘네 기사만 내놓고 애들 어디 섬에 처박아둔 건 아니지?;;; 목격담도 없고

-애들 방치하고 소속사 투자금 먹튀 하는 건 아니겠지 가만 안 둔다.

금방이라도 성명문을 발표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전운이 감돌았다. 급조된 소속사 홈페이지는 이미 트래픽 오버로 접속 불가 상태였다.

폭발한 분노로 랜선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던 그날.

-미미 미친 뭐 떴어 (링크)

티저가 뜬 건, 그날 밤 자정이었다.

[TeSTAR(테스타)'마법소년' Ofticial Teaser]

"…."

썸네일에는 하늘로 뻗은 두 손이 떠 있었다. 노란빛과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인 하늘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재생을 클릭하면, 갑작스럽게 검은 화면이 떴다.

달칵.

영문 내레이션이 자막과 함께 흘렀다.

[아이였을 때, 나는 언제나 해가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일상에 달이 뜬 밤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교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차르르륵- 달칵.

필름이 상영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노을 지는 하늘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황금빛과 자줏빛, 붉은 햇살이 어지러이 부딪혔다.

오르골 소리가 울렸다.

두 음계가 물방울처럼 화면을 적시며 몽환적으로 물들였다.

어느새 카메라는 점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색채의 하늘을 하얀 테두리가 감쌌다.

커튼이 휘날리는 창틀이었다.

그리고, 창틀에 기대 잠든 인영이 보였다.

[…]

하얀 여름 교복을 입은 검은 머리 소년의 뒷모습.

주변에는 낡은 글로브와 야구공 따위가 흐트러져 있었다.

소년은 살짝, 뒤척였다. 그 사이로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년의 하얀 교복이 노을에 분홍빛으로 물드는 순간.

휘날리던 커튼이 크게 펼쳐지는 듯하더니, 하얗게 빛나며 결정처럼 부서져 내렸다.

파스스스…

그 투명한 결정 조각들은 소년의 뒷모습에 쏟아지며, 보랏빛 노을을 사방으로 난사했다.

황홀한 색채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화면이 검게 바뀌었다.

[마법소년]

[06.18. 00:00]

"…."

30초짜리 짧은 영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조회수가 반응을 증명했다.

[조회수 : 5,191,045]

미친 기세였다.

심지어 삼백만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테스타가 해외에 별 기반이 없다는 걸 고려하면 기함할 수준이었다.

"어때?"

"사', 사람들이… 좋아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다행이다…!"

데뷔를 앞두고 멘털을 위해 인터넷 디톡스를 하던 몇몇 멤버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눈을 캄캄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솔직히 반응이 안 좋았다면 나도 멘털이 살살 녹았을 것이다.

지금 25일째 불면증 걸린 소처럼 일만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날짜가 아슬아슬해.'

사실 티저는 좀 더 후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아직 '마법소년' 뮤직비디오 편집도 안 끝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두면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피라도 토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앞당기려고 다들 애좀 썼다.

'소속사는 드디어 겁 좀 먹은 것 같았고.'

어쨌든, 반응은 압도적으로… 좋았다.

-미친 퀄리티 왜 이래

-세상에 콘셉트를 어떻게 이런 걸;; 정말 당혹스럽네 계좌번호 좀 불러줘

-얘들아 벌써 재밌다 벌써 갓곡이다

-뭐라고? 마법소년? 너희가 내 마법이야… 아흐흑

-이래서 소식이 없었구나 이런 걸 만들고 있었다니… 그럼 어쩔 수 없지 오케이 이해했음

-제 지갑은 테스타의 것입니다. 티저로 예약됨.

팬들 살살 긁는 댓글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불호가 다 떠밀려내려 갈 만큼 평이 좋다는 뜻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티저는 잘 나왔다.

곡에서 공개할 부분을 잘 골랐고, 연출도 적당했다.

'뒷모습만 나와서 누가 출연한 건지 잘 모르게 만든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서바이벌로 데뷔하는 그룹 티저에 대놓고 한 명만 딱 집어서 나오게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을 쏟아 넣은 영상미가 일품이었다. 부족한 시간을 돈으로 때운 꼴이긴 했지만.

'사람들 기대치가 너무 커진 것 같긴 한데… 곡이 좋으니, 웬만하면 커버할 수 있겠지.'

며칠 내로 추가 콘텐츠가 계속 뜰 테니, 팬들이 불안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얘들아, 정신 차리고 다시 준비하자."

"넵…."

류청우의 피곤한 목소리에 멤버들이 좀비처럼 흐늘흐늘 몸을 일으켰다.

나도 스마트폰을 대중 던져두고 합류했다.

"고생했어. 이제 뮤직비디오는…이 곡만 찍으면 끝이니까."

"와…."

"안무 연습 중심으로 스케줄이 돌아올 거야."

"…."

지옥의 강행군이 따로 없었다.

"네!"

지독한 침묵 속에서, 차유진의 대답만 신나게 울렸다.

그때, 스탭이 다가왔다.

"세팅 끝났습니다∼"

"옙!"

두 번째 뮤직비디오 촬영이 슬슬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사실, 보통 늦어도 한 달 전에는 찍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신 나간 스케줄이 따로 없다.

'…관계자는 다 철야 확정이라는 뜻이지.'

참고로, '마법소년'을 찍은 감독이 이것도 찍는다.

'이 회사, 실무진들은 확실히 일을 잘하는데.'

뮤직비디오 감독을 어디서 끌어온 건지, 이름 있는 신진 감독을 순식간에 섭외했다. 아마 인맥으로 중간에 가로채 온 것 같았다.

T1에서 야심 차게 모은 경력직다운 행보였다.

…문제는 의욕만 있는 본부장과 중구난방 회사 체계라는 불발탄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점이지만.

특히, '테스타의 소속사는 여기' 언플에 눈이 멀어서 한 달 내 데뷔 같은 기사부터 때려댄 윗 분은 당장 퇴사해 줬으면 한다.

…이건 일단 머리에서 지우자.

일해야 하는데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군.

"다들 자기 촬영 분량은 다 숙지했어?"

"저는 특별히 숙지할 것도 없었습니다."

"저도요!"

"아, 맞아∼ 우리는 뭐 특별히 없더라. 세진 형님이 고생하겠던데?"

"…별로."

이세진은 불퉁하게 대답했지만, 비협조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어쩌다 보니 찍는 두 뮤직비디오에 전부 스토리라인이 들어가서, 기왕 있는 아역배우 출신을 잘 써먹기로 했었다.

'흠, 기왕이면 좀 더 열심히 하게 바람을 넣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세진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보면서 좀 감명받았습니다. …정말 잘하시던데요."

"…."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짬은 어디 가질 않더라고. 이 중에서 유일하게 무편집 상태에서 한 컷도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대의 심정이라면 이해합니다. 티저에 뒤통수만 나오는 컷도 단독이라고 민망해하는 놈이니까∼"

엉뚱한 놈한테서 헛소리가 돌아왔다.

큰세진은 내가 돌아보자 순식간에 시선을 돌리고는 딴청을 피웠다. 저 새끼가 진짜….

"…그걸로 벌어먹고 살려고 했는데, 잘해야지."

"예?"

이세진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약간 가라앉은 얼굴로 스탭을 따라갔을 뿐이다.

'칭찬을 해도 저러냐.'

나는 한숨을 참았다. 짜증 날 체력도 아까웠다.

"자, 단체 안무 씬부터 들어갈게요∼"

"넵!"

나는 안무 대형에 맞춰 자세를 잡으며, 머릿속으로 일정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원래는 콘셉트 포토가 먼저 떠야 하겠지만, 티저 영상 푸느라 일정이 미뤄져서 앨범 발매될 즈음에야 풀릴 예정이었다.

'그럼 아마… 리얼리티가 제일 먼저 풀리겠군.'

사실 늦어도 전주면 영상 예고편이 뜰 줄 알았는데, 지금도 많이 늦은 감이 있었다. 본방까지 며칠 안 남았으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이날 밤에 리얼리티 예고편이 올라왔다.

[테스타의 같이 살기 TEST]

[6월 8일 금요일 저녁 7시 대공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69화]

'드디어 오늘이 왔다.'

박문대의 첫 번째 홈마는 손가락을 두둑두둑 꺾으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오늘이 바로 리얼리티 첫 화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며칠 전에 공개된 예고편에 나온 장면 때문에 친구와 흥분했던 기록이 아직도 톡에 남아 있었다.

-문대 요리한다!

-문대 게임한다!

-갸아아아악!

…만성적인 콘텐츠 부족에 시달리던 중에 던져진 영상 떡밥은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귀엽게 편집된 짧은 예고편을 하도 돌려본 탓에 내용을 다 외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본편을 보기 직전이었다!

'시작한다…!'

'12세 관람가' 표시가 나오자 그녀는 두 손을 비볐다. 조회수 기록을 위해 돌리던 티저 스트리밍은 잠시 멈추고, 군기 든 자세로 화면을 응시했다.

[영광의 데뷔!]

프로그램은 아주사 최종화의 발표 순간들과 각종 미디어 반응을 짧게 보여주는 것으로 테스타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시작했다.

[마침내 결성된 테스타(TeSTAR)]

[그들의 행방은?]

의미심장한 자막.

그리고 직후에 뜬 것은….

[으아아악!]

[한 번만 더 하자!]

[어, 어어어….]

보드게임에 과몰입한 테스타 멤버들의 모습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잘 지내고 있었구나 누나는 안심이야!

-극도로 즐거워 보임

SNS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대로, 테스타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오디션에서 벗어나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팬들이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테스타는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나…?]

유머러스한 자막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202■년 5월 ■■일. 아침 9시]

[와아아!]

[집 좋아요!]

와글와글 숙소로 입장하는 테스타의 모습이 잡혔다.

해맑고 신나 보이려는 멤버들의 노력과 편집이 빛을 발하며 강아지 떼처럼 보였다.

'문대는?'

박문대는 뛰어다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눈을 둥그렇게 뜨고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것은 테스타의 SNS 첫 사진에서도 봤던 노란 후드티였다.

'움직이는 영상으로 보니 더 귀여워…!'

그녀가 감격에 차 있을 때, 다른 시청자들도 한창 사복 이야기로 달리고 있었다.

-애들이 이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입은 걸 드디어 움직이는 고화질로 보는구나ㅜㅜ 이게 바로 데뷔의 맛인가!

-선호 스타일 확 드러나네

-ㅋㅋ아 다들 예상 쌉가능이었는데 문대만 튀어ㅋㅋㅋ

└그러게 목격담에서 맨날 티 쪼가리만 입고 있던데 웬일로 저런 귀여운 옷을ㅋㅋㅋ

└웰시코기 인형 탈도 썼잖아 본인 캐릭터에 진심인 거야 문대는…

└이게 맞다

└역시 의문의 노력 캐

그리고 화면에서는 테스타 멤버들이 로봇 청소기에게 미션 카드를 받는 장면이 송출되기 시작 했다.

[여러분이 진정한 그룹이 될 수 있도록, 미션을 클리어-하세요!]

[앗.]

[아… 미션.]

그 후로도 합격자들이 아주사 가 연상된 요소들마다 과민 반응하며 살짝 침울해하는 모습은 좋은 개그 요소로 활용되었다.

-ㅠㅠㅠ아앗

-어 쩌면 좋아ㅋ큐ㅠ

-얘들아 사실 우리도 다 아주사 PTSD에 고통받고 있단다…

-정말 죄 많은 프로야 테스타가 나왔으니 이제 폐지해버리렴!

-다음 시즌 할 시간에 테스타 리얼리티나 매년 잡아주길ㅋㅋ

시청자들은 폭소하면서도 공감 했다.

그리고 룸메이트 미션에서 게임에 과몰입하느라 태세를 전환해버린 멤버들을 보고는 다시 한번 폭소하게 되었다.

[제발 한 번만!]

[이기고 싶어요!]

— ㅋㅋㅋㅋㅋ

-애들 승부욕 어쩔 거얔ㅋㅋㅋㅋ

-저것도 일종의… 직업병 아닐까… 아주사에서 잠죽자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거임

└이거 맞는 듯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제일 과몰입한 사람과 제일 침착한 사람 둘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한 것도 깨알 같은 재미 요소가 되었다.

[예에에아! 이겼어요!]

[…음, 축하한다.]

요란스러운 차유진의 세리머니에 당황한 듯 담담한 박문대의 모습은, 두 사람의 팀전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더 웃긴 대조를 이루었다.

-문댕 또 티벳여우 표정 나옴ㅋㅋㅋㅋㅋ

-둘이 겁나 다른데 같은 팀이라 너무 재밌어 계속 친하게 지내줘 얘들아ㅠㅠ

-ㅋㅋㅋ1, 2위가 자기들끼리만 순위 바꿔서 또 1, 2위 했네

-차유는 운이 엄청 좋고 문댕은 게임을 잘하는 듯?ㅋㅋ

하지만 막상 룸메이트 결과에는 반응이 살짝 사그라들었다.

그다지 생각해 본 적 없는, 바란 적도 딱히 없던 조합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오

-이렇게 됐구나ㅋㅋ

-잘 지냈으면 좋겠다

-룸메이트 이대로 끝까지 가진 않고 또 바꾸면서 하겠지?

그래도 저녁 식사를 만드는 장면에서는 반응을 대부분 회복했다.

신나서 마트를 질주하며 물건을 쓸어 담는 장보기 팀과, 조곤조곤 화목하게 찜닭을 만드는 요리 팀이 대비되며 둘 다 귀여웠기 때문이다.

특히 박문대와 선아현은 예상외의 요리 솜씨로 분량을 뽑았다.

[일단 재료부터 다듬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닭을 손질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박문대는 재료가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일을 배분하고 본인이 제일 까다로운 작업을 잡았다.

순전히 다른 멤버들을 믿을 수 없어서였으나, 화면에서는 제법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선아현은 어쩐지 요리를 잘할 것처럼 생겨서 사정없이 말아먹고, 그런 자신에게 엄청나게 당황하는 모습으로 분량을 챙겼다.

[미, 미미안….]

[미안할 건 없고.]

박문대는 처참한 양파와 선아현의 손을 다질 뻔한 식칼을 번갈아 보다가, 우울해하는 선아현에게 새로운 일감을 주었다.

[이거 가지고… 저기 식탁 좀 정리해 줄 수 있을까.]

[으, 응!]

화면의 선아현은 순식간에 화사한 효과와 함께 밝아졌다. 그리고 당연히 팬들은 즐거워했다.

-문대 요리도 잘 함?;; 당황스럽네

-아이고 아현앜ㅋㅋㅋㅋㅋㅋ

-얘들아 앞으로 아현이에게 식칼은 주지 말자 (본인이) 다칠 것 같다고ㅠㅠㅋㅋ

-문대 엄청 사람 잘 챙기는데?ㅠㅠ 대체 왜 아주사에서 초반에 그렇게 나온 거야…

└고것은 모든 박문대 팬들의 의문일 듯

숙소 첫 끼로 찜닭을 먹으며 화목하게 대화하는 모습도 팬들이 리얼리티에서 기대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다.

-애들 손 크구나 찜닭 엄청 많이했엌ㅋㅋㅋ

-다들 잘 먹네

-생각보다 애들 되게 친한 것 같음 아주 사로 만들어진 전우애인가ㅋㅋ

-오래가자 얘들아

그리고 그 화의 화룡점정이 떴다.

바로 단체 공포영화 관람이었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

화면에 뜨는 귀신 얼굴에 마트 PB팝콘이 허공을 갈랐다.

[으어어어….]

[어우!]

멤버 하나하나의 반응을 돌려 가며 잡아주는 제작진들 덕에, 팬들은 즐겁게 멤버들의 캐릭터를 더 쌓아갈 수 있었다.

-차유진 웃는데요?ㅋㅋㅋ

-아닛 천하의 큰세진이 귀신을 무서워하다니! 귀신도 먹금할 기 쎈 방글방글 인싸인 줄 알았다고!

-래빈아 옷 찢어지겠다ㅋㅋㅋㅋ

-류청우씨 그렇게 안 봤는데 치사하게 자기는 안 무서워하면서 공포영화를 골랐구먼!ㅋㅋ

그리고 박문대의 컷이 오기 전, 박문대의 팬들은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당연히 박문대가 무서워할 리 없다는 것을!

-티벳여우 표정 또 나올 듯ㅋㅋㅋ

-(다들 무서워하는 것 같다. 공포영화는 무서운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벌써 귀엽다 문대ㅠㅠ

-야무지게 팝콘 잘 챙겨 먹으며 볼 듯

하지만 화면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문대는…

시선을 내리깔고 팝콘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귀신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간헐적으로 팝콘 통이 움찔 튀어 올랐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

[(팝콘 곡예)]

그래도 박문대는 꿋꿋이 공포영화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댓글이 폭주했다.

-…?

-?!

-무서워… 무서워한다!

-세상에

-미쳤나 봐 너무 귀여워

일주일간 밤을 새우든 최종 1위를 하든 언제나 덤덤한 모습만 주로 방송에 탔던 박문대의 동요에 팬들은 완전히 흥분했다.

-와 끝까지 화면 못 본다ㅠㅠ 으흐흐흑 그러면서 아닌 척하는 것 봐

-팝콘 다 먹었는데 쟤 계속 빈 통 잡고 있대요! 무서워서 못 놓는대요!

-영화 꺼지니까 일어났엌ㅋㅋㅋㅋ

-다른 애들 눈치 못 챘지? 문대 지금 카메라 앞에서도 자기 되게 자연스러워 보였다고 착각하고 있지?ㅋㅋㅋㅋ

화면을 보고 있던 박문대의 홈마도,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톡을 넣었다.

[아아아]

[문대는 요리도 잘해]

[보드게임도 잘해]

[근데 공포영화는 못 봨ㅋㅋ 미친 너무 귀여워서 아파트 부수고 싶어]

톡을 넣으면서도 계속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탓에 오타가 속출했지만, 어쨌든 본인이 하고 싶었던 말은 저것이었다.

[7인 7색]

[새롭게 서로를 알아가는 테스타]

[과연 내일은 무슨 일이?]

각 멤버의 팬들 모두에게 즐거움을 챙겨준 공포영화 파트를 끝으로, 리얼리티 첫 화는 마무리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한 시간이나 흘렀다.

아쉬워하는 그녀의 앞에, 중간 광고가 끝나고 예고편이 송출되었다.

[저희 지금 작업실이에요∼]

방음 부스가 설치된 음악 작업실에서 토의를 주고받는 테스타의 모습.

그리고….

[지금… 발표하러 가는 중입니다.]

단정한 옷을 챙겨 입고 회의실로 들어가는 멤버들의 모습이 었다.

"헉."

앨범 작업 관련 분량도 있나 보구나!

벌써 다음 화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서둘러 SNS를 켰다. 이 넘치는 감상을 공유하고 싶었다.

-솔직히 꿀노잼 예상했는데 대존잼이었다

-애들 사이 어색할 거라던 놈들 다 어디로 숨었냐?ㅋㅋ 친하고 편하던데요?

-아 예고편도 그렇고 데뷔 관련 이야기 풀리니까 너무 좋다 마음이 놓이고ㅠㅠ

-와 설마 그 갓 콘셉트 멤버들이 골랐나? 그것도 아주사 짬밥인가?

타임라인에 들어오는 말마다 공감이 안 가는 게 없었다.

그녀는 흐뭇하게 웃으며 글쓰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새롭게 갱신된 타임라인에 뜬 글을 보았다.

[아… 미치겠다 (링크)(캡처)]

"어?"

링크는 포털 사이트 뉴스 주소였다.

그리고 캡처는… 그 기사를 떠 온 것이었다.

"…!"

그녀는 내용을 읽자마자,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싸해졌다.

[아이돌 주식회사 테스타 '불공정 계약' 소송으로 드러나]

:재상장! 아이들 주식회사 로 데뷔한 테스타(TeSTAR)의 멤버 이세진(22)의 전 소속사(드림 K)가 Tnet과의 불공정 계약에 대 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드림 K 측의 주장에 따르면 Tnet은 지난 1월부터 방영된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참가자를 모집하기 위해 다수의 소속사에게 강압적으로 소속 아티스트의 참가를 요구하였으며, 참가 자가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할 시 해당 아티스트의 소속을 Tnet에게 양도하는 불공정 계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기사를 클릭했다.

자정이 넘은 한밤중.

일 터진 숙소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정리해 보자."

"…."

"그러니까, 세진이 전 소속사에서… 본인들 아티스트를 돌려 달라고 하는 중이네."

류청우가 담담히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한숨을 참았다.

'터질 만한 일이긴 했어.'

애초에, Tnet이 어떤 참가자든 아주사 로 데뷔하면 우리 소속이라는 계약을 밀어붙인 것부터가 무리수이긴 했다.

오디션으로 띄운 그룹을 오래 해먹고 싶은 욕심을 참지 못하고 만든 방식일 것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이중 소속으로 정산 두 번 떼는 식으로 하지 않나.'

아예 뺏어가는 건 이 업계에서도 거의 없던 것 같던데 말이다.

방송국하고 싸울 수는 없으니 어지간하면 소속사가 지고 들어갔겠지만, 아주사 이번 시즌이 너무 잘되는 바람에 결국 한 건 터진 것 같았다.

'아마도… 방송사 마음대로 소속사 변경 제안을 하는 '캐스팅 콜' 콘텐츠 때부터 이미 불만이 쌓였을 테고.'

게다가 이세진은 그냥 혼자 배우로 써먹을 수 있으니 더 아까워할 만했다.

못해도 최소한 테스타 활동 중에 본인들 몫도 받아가고 싶다는 거겠지.

"…."

이세진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 대치상황에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큰세진이 웃으며 재촉했다.

"형님, 말 좀 해보시죠∼"

처음에는 살살 어르고 달래더니, 더는 못 참겠는지 슬슬 말투가 바뀐다.

"큰세진,"

"이거 빨리 정리해야 됩니다. 지금 저희 데뷔 날짜 일주일 남은 거 아시죠? 시간 없어요∼"

"…."

"지금 형님이 입장 정리 안 하면, 다른 소속사들도 똑같이 물타기 해서 소송 이야기 나올 수 있죠?"

큰세진은 여전히 서글서글 웃고 있었지만, 말이 점점 빨라졌다.

"가만있으면 형 혼자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피해 보는 거라니까요? 가든 남든 빨리 지금 소속사랑 이야기를 하라고."

'저거도 멘털 터졌군.'

나는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큰세진의 소속사도 간 좀 보다가 이세진의 소속사가 하는 소송에 합류해 버릴 수도 있긴 했다.

겨우 오디션 합격해서 데뷔 직전인데, 그 꼴을 당하는 걸 생각만 해도 큰세진은 피가 거꾸로 솟는 모양이었다.

"…."

그러나 이세진은 입을 여는 대신 벌떡 일어나서 도망쳤다.

"…!"

"야."

쾅.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장난하나.'

본인 일인데 이렇게까지 1차원 적으로 회피를 하다니.

이쯤 되니 별생각 없던 나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한두번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오늘 자려면 어차피 문은 따야겠지.'

나는 방 앞으로 다가가서, 잠긴 문고리를 위에서 내리쳤다.

퍽.

가정집 문고리라 역시 그냥 열리는군. 운동한 보람이 있다.

"…!"

"들어갑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0화]

잠긴 문을 따고 방으로 걸어 들어가자, 본인 침대에 침울하게 앉아있던 이세진이 기겁했다.

"으…!"

"정신 차리시고."

나는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곧바로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류청우와 큰세진은 보이지 않았다.

'…눈치껏 빠졌나 보군.'

그 둘이면 그럴 만도 하지.

뭐, 됐다. 어차피 이세진이 저러는 이상 당장 취침도 글렀으니, 무슨 생각인지 드러나 보자.

'술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막 출범하려는 아이돌 그룹 숙소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그냥 말을 꺼냈다.

"형, 어차피 내일 아침이든 새벽이든 회사에서 면담 들어갈 건 아시죠."

"…!"

"그럴 거면 그냥 여기서 편하게 생각 좀 정리하고 가는 게 낫지 않나요. 피한다고 피해지는 상황도 아니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특성은 이번엔 안 터지는 건지,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세진은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뭘 모르겠는데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

지금 와서 진로 고민을 하기엔 늦어도 한참 늦지 않았나.

"전 소속사로 돌아가서 연기 계속하고 싶으세요?"

"…돌아가고 싶진 않아."

"그럼 연기는 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당연한 거 아니야?"

이세진이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었다.

"애초에 아이돌은 생각도 안 해봤어…."

"…."

이거 어쩐지 상태 이상 떴을 때네가 생각나는데…?

나는 혀를 찼다.

'오디션에 자의로 참가한 게 아니었나 보군.'

" 아주사 는 전 소속사 때문에 참가했나 봅니다."

"…맞아. 오래 쉬어서… 그런 거라도 해야 일감이 들어온다고 해서."

"음."

나는 무심코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열심히 하시던데요."

"…열심히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못 하니까."

이세진이 약간 발끈했다.

'흠, 그거하곤 결이 달랐는데.'

결승에서 저놈이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데뷔할 테니 안 끝난다, 그런 뜻이야?… 좋겠네.

그건 본인도 계속하고 싶다는 말 아닌가. 게다가 이세진의 상태창 변화도 눈에 보였다.

'이제 F가 없어.'

이세진은 촬영 시작할 때 F였던 춤 스탯을 지금 D+까지 올려놨다.

아무 감흥 없이 그냥 해야 하니까 달성할 수 있는 성장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대충 감이 왔다.

"사실 재밌었죠."

"…!"

"해보니까 재밌어서 자기도 모르게 더 열심히 하게 된 거잖아요."

이세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정 못 하는군.

"맞아…. 무대에 서는 건, 좋았어.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연기도… 계속하고 싶어."

"…? 하세요."

"뭐…?"

대체 이걸 왜 고민 중인지를 모르겠다.

"한 이삼 년 지나면 여기 소속사에서도 알아서 개인 활동 꽂아줄걸요. 연기하세요. 5년 채우면 재계약 시즌이니까 아이돌 그만하고 싶으면 연기만 계속하면 되고."

잠시 입을 벌리고 듣던 이세진은,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못 해."

"예?"

"너 내 전 소속사 어떤 곳인지 모르는구나."

"…."

뭐, 잘 모르긴 했다. 배우는 내 종목은 아니었거든.

이세진이 반쯤 포기했는지, 줄줄 상황을 불었다.

"드림K 거기… 질 괜찮은 소속사 아니야. 내가 이대로 여기 소속으로 있으면 괘씸죄로 뭘 터뜨릴지 모른다고."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요?"

여기서 혹시라도 마약이 나오면 내가 앞서서 탈퇴를 권유할 생각이다.

다행히 이세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막살진 않았어. …일단 그럴싸한 아무거나 찌라시 형태로 터트릴 거란 뜻이야."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재계약 안 했다고 그렇게 보내 버린 배우가 이미 몇 사람 되는 모양이었다.

재계약 시즌이 오면 일부러 루머 풀어서 몸값을 낮추기도 한다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악덕 기획 산데?'

"음, 예상 가는 루머 라인업이 있다면?"

"나야 뻔하지…. 일단, 오디션은 배우 재기 목적이었으며 아이돌은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고 깔아서 한번 분위기 잡고."

"음."

"그다음에는 불륜이나… 뭐, 어쨌든 범죄 아니라 증명 못 하는 선에서 이상한 선전지 풀어서 보내겠지."

"음, 저희 투자처가 T1이라 거기서 그렇게 막 나가진 못할 것 같은데."

"일단 전자를 먼저 터뜨려 분위기 잡는 게 그런 목적이지. T1쪽에서 날 자르게 만드는 거야."

이세진이 쓰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막판에 추가로 붙은 거니까."

"…."

"지금 인터넷에서 내 여론이 좋지도 않잖아. 나 빼고 하라는 사람도 많아…. 내가 잘, 못 하니까…."

"…음"

그걸 다 찾아봤나 보군.

확실히 그런 이야기가 좀 돌긴 했다.

추가 합격자에, 배우 출신에, 제일 능력치가 떨어지니 쟤만 빼고 가면 훨씬 좋은 그룹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여론, 우리 데뷔하면 약해질걸요."

"…쓸데없이 위로는 됐어."

"아니, 그냥 그럴 거라는 뜻인데요."

"…뭐?"

"VTIC이랑 동발이잖아요. 당장 그쪽이랑 견제하느라 내부로는 뭉칠 거란 뜻입니다."

"…!"

원래 외부에 강력한 적이 생기면 내부는 뭉치게 되어 있다.

"게다가 형 나가면 다른 사람이 타깃 될 걸요.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그걸 근거로는 생각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최약체처럼 보이는 사람을 빼버리고 싶어 하는 건 어느 집단에서나 보이는 행태였다. 특별히 이세진이라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세진은 약간 울컥하는 것 같았지만, 곧 추스르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당장 전 소속사를 막을 방법은 없어. 지금 소속사에 내가 말을 한다고 해서 찌라시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직접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뭐?"

나는 팔짱을 꼈다.

"형이 직접, 먼저 발표하면 되죠."

"… 먼저?"

"전 소속사 강요로 참가했던 건데 적성 찾아서 안 돌아가고 싶다고 글 올려요. 꼭 전 소속사 '강요, 강압' 강조하시고. 오디션 덕분에 거기서 잘 탈출했다는 식으로."

"…!"

"그럼 찌라시 나와도 잘 안 먹히지 않을까요."

전 소속사에서 루머 뿌리는구나∼하고 팬들이 방어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뜻이다.

일단 여론이 돌아가면 전 소속사도 소송을 끌고 가기 부담스러워질 것이고, 그럼 지분 주기 싫은 T1이 알아서 잘 끝내겠지.

이세진은 잠시 입을 벌린 채 말이 없었다.

"…너, 자퇴하고 뭐 하던 놈이야?"

"오디션 나왔죠."

이 레퍼토리는 변하질 않는군. 이번에는 국정원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소속사랑 그렇게 이야기해보는 겁니다."

"…그래."

어쨌든 대충 상황은 정리했다. 나머지는 류청우가 알아서 토닥이든 하겠지. 나는 한숨을 참았다.

"…SNS 계정에 올려야 하나."

"꼭 자필로 쓰겠다고 하세요."

이세진의 전 소속사, 드림K의 소송 소식이 나온 후 인터넷 연예 기사란은 꼭 관련 내용이 하나 이상 채워졌다.

사실 불공적 계약이 맞긴 했기에, 방송국의 갑질 문제와 맞물리며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계약기간 남은 사람 뺏어오는 건 너무했다. 계약은 유지하고 자기들이 운영관리만 해야지

-그럼 이중으로 정산 떼이잖아 애들이 무슨 외주 용역도 아니고 왜 그래야 돼;; 아이돌한테는 오히려 저게 나음

-솔직히 전 소속사가 제대로 한 게 없으니 오디션까지 내보낸 거 아니야?ㅋㅋ 이제 와서 잘 되니 돌려달라고 하는 거 속셈 투명하다!

-연습생 트레이닝시키고 이것저것 비용 따지면 전 소속사가 억울한 거 맞잖아.

-아 이세진 때문에 피곤하게 이게 무슨 일이냐 걍 주고 6명이서 하자 어차피 없는 편이 무대 퀄리티 팀 분위기 모두 도움됨

특히 이세진을 빼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거셌다.

-아 정말 그분은 도움되는 게 없다

-우리 애들 잘 되는데 액땜했다고 치고 얼른 빼고 가자고ㅠㅠ

-데뷔 일주일 전에 이게 무슨 일이야

-오디션도 억지로 나오셔서 존버 하다 보니 어쩌다 데뷔하신 분 얼굴 보고 싶은 사람? 응 없지?

-잠 못 자고 울고 무대만 보고 달려서 합격한 테스타에 배우님 안 어울리니 제발 빼자

그 말에 이세진의 팬들이 상처 받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첫 글 이후로 알람이 없던 테스타의 SNS에 새 글 알람이 들어왔다.

빛의 속도로 클릭한 팬들은 자필편지 사진이 첨부된 글을 봤다.

-…!

이세진의 글이었다.

[안녕하세요. 테스타의 멤버 이세진입니다.]

: 최근의 뉴스와 이야기에 대하여, 제 생각을 전하기 위해 글을 적어봅니다.

단정한 글씨체로 조심스럽게 적힌 글 내용은, 자신의 어릴 적 연예계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정리하자면 전 소속사가 어린 자신을 어마어마하게 혹사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과도한 스케줄로 인해 건강에 이상이 오며 아역배우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3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일정을 12살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회복해서 새롭게 도전하려는 순간, 전 소속사로부터 오디션 참가를 강요받았다는 말이 이어졌다.

[…한번도 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으면 네게 작품이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등의 설명에 큰 압박을 받고 아이돌 주식회사 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가한 오디션.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큰 즐거움을 느꼈다고 이세진은 적어나갔다.

[또래 관계에 소극적인 제게 다가와 주는 좋은 친구들, 또 그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가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 무대에 서는 것은 굉장히 짜릿하고 행복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 일을 꼭 계속하고 싶어졌습니다. 간절해졌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그 꿈이 이루어져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데뷔할 수 있는 지금이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입니다.

이세진은, 자신은 꼭 이 친구들과 함께 테스타로 데뷔하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첫 번째 글을 즐거운 소식으로 전해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음 글은 테스타 멤버로서 여러분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세진에게 조금이라도 호의적이었던 테스타 팬들의 여론이 살아났다.

-ㅠㅠㅠㅠ

-세진이 아이돌 하겠다잖아! 그냥 하게 좀 둬ㅠㅠ

-아니 전 소속사 양심 어디 갔냐고 12살 애기한테 저래 놓고 무슨 불공정 이 지랄ㅋㅋㅋ 니들이 한 게 불공정 아니냐?

-이번만은 T1이 맞았다. 그리고 드림K는 처맞을 소리를 했다.

-사실 나도 세진이 얼결에 테스타 된 건 아닌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맞나, 그런 의심 가끔 들었는데ㅠㅠ 미안하다

아역배우 때부터 팬이었던 사람들은 더 마음 아파했다.

-12살 어린애가 그렇게 힘든 데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방송 나왔던 거생 각하면 속이 탄다…

-난 세진이가 많이 커서 성격이 차분해진 줄 알고… 하…

-연기하는 세진이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 세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 보고 싶다. 일단 저 소속사로 돌아가는 건 안 돼.

그리고 한번 여론이 꺾이니, 이세진을 배척하는 것을 재밌어하던 사람들이 제법 떨어져 나갔다.

물론 여전히 비꼬는 사람도 많았지만, 일단 머릿수에서 밀리는 형태가 된 것이다.

-이세진도 감성팔이 좀 하네ㅋㅋ그래도 제일 못하는 걸 어쩌겠니 어휴.

└23살한테 열폭해서 악플 다는 인생보단 잘하고 있잖아!ㅎㅎ

└ㅋㅋㅋㅋ뼈 때리네

-이세진 아이돌 간 보니 괜찮아서 계속 해 먹고 싶다는 말이잖아ㅋㅋ 한 3년 해 먹고 탈주할 듯 탈락한 애들만 불쌍하게 됐네

└대체 사고가 얼마나 꼬였으면 이렇게 음습하게 해석하냐…

└이런 놈들 특징: 다른 글에선 이세진한테도 밀렸다고 탈락한 애들 빈정댐

오디션 합격자 팬으로서 이세진의 글에 느끼는 공감대 때문에, 도리어 테스타 개인 팬덤들도 이 사건에 대한 악플에는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회를 틈타서 Tnet은 드림K를 약간의 당근과 넘치는 채찍으로 잡았다.

기사들이 조용히 내려가며 수습되고, 팬들의 분위기가 반전된 그날.

쐐기를 박듯, 자정에 또 다른 티저가 떴다.

그러나 이번에는 테스타 위튜브 공식 채널에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Tnet의 테스타 리얼리티 항목으로 추가되었다.

[TeSTAR(테스타) 'Hi-five' Official Teaser]

'채널 실순가?'

'마법소년이 아닌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일단 영상을 얼른 클릭했다.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1화]

새로운 티저 영상은 쾌활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하이파이브∼

학교 운동장으로 보이는 그라운드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차유진이 손을 흔들며 외친 말이었다.

차유진 뒤로는 안무 대형을 갖추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딱 맞는 스트라이프 야구복을 입고 있었다. 몸을 풀던 멤버들은, 갑자기 시작된 후렴구에 맞추어 타다닥 안무를 잡았다.

-이 샷은

Tang Tang Tang

딱 맞아 들 거야

-네 맘에

Pang Pang Pang

팡파레처럼!

-막 터져 나와!

동작이 크고 박자가 잘게 쪼개진, 신나는 안무였다.

후렴 한 구절이 끝나자, 마지막 안무 포즈 그대로 화면이 멈췄다. 화면을 향해 발을 뻗고 돌아본 자세였다.

그리고 잠시 뒤.

[…컷!]

[어후!]

감독의 말에 그라운드에 주저앉는 멤버들의 모습 위로 흰색 자막이 떴다.

['Hi-five' 뮤직비디오]

[테스타의 같이 살기 TEST 2화에서 최초 공개!]

처음 공개된 '마법 소년'의 티저와 대비되는, 유머러스하고 동적인 티저였다.

당연히 순식간에 댓글이 불어났다.

-미친 타이틀 두 게임?

-선공개인가? 어떡하냐 이것도 좋네

-아니 정말 학교로 뽕을 뽑았잖아ㅋㅋ

-둘 중 하나는 네 맘에 들겠지야?ㅋㅋㅋ 참고로 전 둘 다 마음에 듭니다. 훌륭하다 테스타.

└ㅋㅋㅋ너도? 나도!

-와 싸비만 들었는데 벌써 각 나온다 음원은 이게 이길 듯

└아니 아직 마법 소년 안무도 안 나왔잖아 공평한 기회를 달라구!ㅋㅋㅋ

-드럼 롤 나오는데 제 심장도 치시는 듯; 아 테스타야말로 인간 제세동기다!

직전의 우중충한 사건을 확 뒤엎어버릴 만큼 흥분하고 신난 사람들로 인터넷이 뜨거웠다.

다만 약간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너무 일을 잘해서였다.

-아니 진짜 소식 끊긴 동안 소속사에서 폐관 수련이라도 했나? 두곡이나 뽑았는데 둘 다 좋다고?

-심지어 콘셉트도 딱 대비되는데 좀 연결도 시켜놨나 봄;; 마법소년 티저에 글로브랑 야구공 나온 거 기억남?

└헐

└오졌다 진짜…

-리얼리티 2화 예고편 보니까 애들 되게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 같은데 벌써 기대된다.

-우리 데뷔 앨범으로 초동 50만 가즈아!

그리고 이 반응은 리얼리티 2화가 나온 순간, 한 번 더 폭발했다.

[관련 이미지 레퍼런스 및 편곡 시안입니다.]

멤버들이 하루 만에 발표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 방송을 탔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적당히 앞뒤를 잘 연결해준 탓에, 본부장의 무리수나 VTIC 동시 발매 언급은 다 잘려 나갔다.

대신 열정적으로 타이틀곡을 잡아가는 테스타의 모습이 잘 비치어졌다.

-아니 애들 왜 이렇게 일 잘해;;

-상상도 못 했다 자기들끼리 곡 다 골라서 콘셉트도 잡았냐

-게다가 아무도 안 싸우고 화목해! 의견이 다른데 서로 설득하고 있어!

-테스타의 조별과제 행복 회로는 현실로 이루어진다…

물론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도 튀어나왔다.

-신인이 이랬다고?ㅋㅋ 다 연출입니다. 낚이지 마세요∼

-이미 다 정해진 거 아이돌이 발표하는 것처럼 분량 뽑은 겁니다. 방송 대본 믿지 마시길!

└그쪽이 좋아하는 아이돌은 혼자 아무것도 못 하나 봐요 불쌍해서 어떡해ㅠㅠ

└그러게… 힘내세요!

다만 딜 미터기가 폭발한 팬들은 한두 마디만 남기고 그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심지어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벌써부터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건 무조건 흥한다.

-화제성 지수 벌써 끝도 모르고 치솟고 있네ㅋㅋㅋ 티저 사기라도 웬만하면 잘 될 듯

-뮤직비디오 방송 끝에 나오겠지?

리얼리티 2화는 제작 일기에 가까웠다. 다만 끝에서는 약간의 예능 분량으로 인형 뽑기 장면을 넣어줬다.

공포영화 분량을 1화로 당겨오며 생략됐던 컷이었다.

주로 인형 뽑기에 실패하고 정신 승리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귀엽게 담아냈다.

[그러네. 기계가 이상하네.]

-ㅋㅋㅋㅋㅋ

-아 큰세진 너무 웃겨!

2화는 인형 뽑기에서 이세진이 강아지 인형을 뽑는 것으로 마무리돼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 예고 자막이 뜨자,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다시 달아올랐다.

-시작한다.

-뮤직비디오 나온다!

중간광고가 끝나는 순간.

화면이 해가 쨍쨍한 교실 창문으로 바뀌었다.

"뮤비 나온다."

"자, 자잠깐."

선아현이 슬라이딩과 함께 거실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중간 광고가 끝났다.

'타이밍 좋군.'

나는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첫 장면은 박문대가… 그러니까, 내가 창문 밖을 보고 있는 컷으로 시작했다. 해가 쨍쨍한 파란 하늘이었다.

그리고 박문대의 눈앞에 웬 종이 안내문이 들이밀어진다.

[체육대회]

[학교대항 야구전]

안내문을 내민 사람은 이세진이다.

평소 불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긴장한 모범생처럼 보였다.

안내문을 들여다본 박문대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기웃거리는 순간, 전주가 시작되었다.

휘익!

곡은 경쾌한 휘파람 멜로디와 함께 시작됐다.

업비트 드럼의 잔박을 없애고 일렉트릭 기타를 얹어 록 사운드를 살린 변형된 디스코… 라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고, 신나긴 했다.

일단 김래빈이 추천한 대로 가니 기존의 쌈마이 느낌이 확 사라져서 다행이었지.

다만… 시간문제로 가사는 바꿀 수 없었다.

-OH 고민 고민하다가

결심을 했어 Um∼

오늘 나는 던질 거야

나를 던져 보낼 거야

네 맘에∼ Shot Shot!

… 저 정도면 됐지 뭐.

"안무 잘 맞는다."

"유진이 날아다니는데?"

"히히."

단체 안무 컷이 나오자마자 멤버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아마 뮤직비디오 리액션 콘텐츠를 뽑으려 설치된 리얼리티 카메라를 의식한 것 같았다.

'애초에 콘티 다 보고 시작했는데, 특별히 놀랄 건 없지.'

화면에서는 중간중간 안무컷이 들어가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대강 요약하자면, 모범생 이세진이 생기부 채우려고 반에서 야구 시합에 참가할 애들을 모으는 내용이었다.

체육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놈들을 모으다 보니까 별별 괴짜나 독특한 캐릭터를 모으게 됐다… 뭐, 그런 스토리다.

"문대는 도서부네!"

"자, 잘 어울려."

나는 주로 책이나 이북만 들여다보고 있는 역할을 받았다.

-좀 신비한 느낌을 내줘야 돼요. 알지?

감독은 그렇게 강조하던데, 솔직히 신비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게는 나왔다.

다음 타자는 선아현. 다들 짐작했겠지만… 무용부다.

"진짜 잘한다."

"전공자다운 솜씨이십니다."

"고, 고마워…."

화면에서 열심히 현대무용을 하는 선아현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직후 거절 못 하고 얼결에 야구하러 끌려가는 것까지 고증이 확실했다.

다음은 류청우.

"역시 국가대표!"

"여러분! 저 형 실제로 저거 쏴서 맞췄어요!"

"하하, 연습 놔서 자세 다 풀렸는데 뭐."

이쪽은 양궁을 하다가 캐스팅되는 장면이 들어갔는데, 당연히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그리고 다음은… 차유진과 김래빈이 함께 나오는데.

작은 콩트가 들어갔다.

우선 이세진이 힘차게 체육용품 창고 문을 열었다.

스르륵!

그러자 창고 안에 늘어져 있던 김래빈과 차유진이 보였다.

누가 봐도 양아치같이 생긴 두 놈은 문을 연 이세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

[….]

[…죄송합니다!]

스르륵!

열렸던 문이 순식간에 도로 닫혔다.

"하하하!"

"크흡, 잘 나왔다."

뮤직비디오를 보던 놈들이 폭소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웃겼다.

'제일 어린 둘한테 저런 역할을 줬으니까 더 재밌겠지.'

참고로 저 노는 캐릭터는 본인들이 직접 주장해서 잡았다.

'창작물에서라도 또래 관계 서열 최상위의 삶을 경험해 보고 싶다… 고 했던가.'

김래빈의 구구절절한 발언을 떠올리자, 차유진의 해맑은 발언도 떠오른다.

-그게 재밌어요!

어쨌든, 둘 다 인상이 순한 편은 아니라 무섭게 잘 소화해 냈다.

마지막으로는… 학생회장 선거 중인 큰세진을 선거 유세를 조건으로 섭외했다.

"경험자는 역시 다르네."

"아, 저 세계에서는 당선됐을 거예요∼"

큰세진이 능청스럽게 말하더니 씩 웃었다.

'일부러 골랐군.'

학폭 루머 때 학생회장 선거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예 뮤직비디오에서 저 캐릭터를 골라서 그 쪽 이야기를 덮어버릴 모양이었다.

어쨌든, 뮤직비디오는 오합지졸이 모여서 어떻게든 체육대회에서 다른 학교를 이기는 유머러스한 엔딩으로 끝났다.

참고로 이세진의 목적인 생기부는 마지막에 쿠키 영상처럼 들어가서 살짝 반전을 살렸다.

"와아!"

"마지막까지 재밌었다!"

이해가 힘들 만큼 끊기지도, 지루할 만큼 스토리가 나오지도 않아 딱 완벽한 재미를 줬다. 단체 안무 컷과의 배치가 적절한 덕인 것 같았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했어요!"

일단 뮤직비디오 하나가 무사히 발표됐다는 기쁨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말이 쏟아졌다.

그리고 류청우가 일부러인 듯, 넌지시 말했다.

"특히… 세진아, 고맙다."

"…!"

"맞습니다. 세진 형님 덕분에 아마추어인 저희도 자연스럽게 컷이 잘 나온 것 같습니다."

"헉, 래빈 씨. 형들이 많이 아마추어 같았군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큰세진의 말에 또 김래빈이 낚인 건 넘어가고.

"…."

이세진은 입을 꾹 깨물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 아니, 다들 잘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태도가 형편없었다면 미안하다."

"아, 아니요…."

"앞으로는… 이렇게 회피하는 일없을 거야. 정신 차릴게."

이세진은 양손을 각각 꾹 쥐고 있었다.

'급한 불 끄고 나니 정신 좀 차렸나 보군.'

아마 며칠간 지난 상황들을 돌이켜본 모양이다.

"괘, 괜찮아요! 혀, 혀, 형이야 말로 고생하셨고…."

"이제 데뷔하는 거잖아.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하는 게 당연하지."

"힘내요!"

"…고마워."

허들 낮은 놈들이 잘 받아준 덕에 분위기는 다시 훈훈해졌다.

이세진의 일이 터진 뒤, 며칠간 흐르던 약간 어색한 기류가 뮤직비디오 덕분에 가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직장동료 이상으로 마음 터놓고 친해진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파이팅합시다∼"

가령 저기 실실 웃고 있는 큰세진은 이세진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지만, 뭐… 생판 남이던 7명이 같이 있는데 다 마음에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싸우지만 않으면 됐다.

'리얼리티에도 분위기는 괜찮게 잘 나오겠군.'

사과야 알아서 편집해 버리겠지.

나는 어깨를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류청우가 온화하게 말을 붙였다.

"자, 그럼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자."

"…."

"…넵!"

천하의 차유진까지 대답이 반박자 늦게 나왔다.

그동안의 강행군 때문에 이미 다들 연습에 질린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잘 수 없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데뷔 쇼케이스까지 사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내자, 얼마 안 남았어."

"그럼요…."

"화, 화이팅!"

의미 없는 구호 몇 번을 끝으로, 그날도 거의 밤새도록 연습을 할 것이 확정되었다.

"…."

쇼케이스에 기자들 말고 팬들이나 많이 왔으면 좋겠군….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

"저기."

"예?"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는데 이세진이 말을 걸었다. 예의상 고개를 돌리자,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같이 써줘서."

"…?"

방을?

피곤해서 잠시 머리가 안 돌아갔다.

나는 즉시 그것보다 부합할 최근 예시를 떠올렸다.

"아, 자필 편지요?"

"…그래!"

이세진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곧 숨을 들이쉬며 혼자 진정했다.

"…덕분에 잘 끝났어. 꼭 갚을게."

"네…. 뭐,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사실 누구든 정신 차리고 쓰면 뽑을 내용, 빨리 정리한 것뿐이다. 시간이 없으니까.

그러니 은혜는 됐고 마약 스캔들만 안 내면 된다.

뭐… 사실 심증으로는 그 마약 스캔들도 전 소속사 관련 문제였을 것 같긴 했다.

'…이랬는데 설마 다른 사정이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뒤통수 한두 번 맞는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르니 주의는 계속하자.

"갚는다니까! …아무튼, 고맙다고."

이세진은 기어코 다시 소리를 지르더니, 곧 자기가 알아서 수습하고 후다닥 숙소를 나갔다.

30초도 안 돼서 다시 볼 텐데 말이다.

'…어차피 너나 나나 연습실 가야 되는데.'

저놈도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을 옮겼다.

테스타의 Hi-five 뮤직비디오는 팬들을 만족시켰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문장이었으나, 사실 어마어마한 의미였다.

아주사 데뷔 그룹에 대한 천장을 뚫을 정도로 치솟은 기대를 충족시켰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솔직히 더블 타이틀이란 말 듣고 티저만 봤을 때는 좀 걱정했었다 괜히 화력만 분산될까 봐… 근데 쓸데없는 걱정이었음ㅋㅋㅋ

-아 뮤직비디오 때깔 봤냐∼ 대기업 자본의 맛이 이런 거구나!

-아 나 어떡해 너무 설레ㅠㅠ 마법 소년 뮤비도 오지겠지?

-띵곡 도랏다 빨리 음원 풀어줘 얘들아 텍마머니ㅠㅠ

더불어, 쇼케이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눈물도 넘쳐흘렀다.

-아주사 이 미친놈들이 주식 패키지로 다 팔아재껴서 티켓팅이 없다며ㅠㅠ 이미 최종화 전에 쇼케 매진이라며!

-이게 말이 되냐 티넷아! 산 사람 중에 탈락자 팬들도 있는데 걔네가 암표 개 비싸게 판다고ㅠㅠ

└암표로 끝나면 다행이죠. 혹시 나쁜 맘먹고 쇼케이스에서 야유하는 사람 나오면 어쩌려고… 하…

표를 못 구한 팬들이 걱정과 억울함에 가슴을 치고 있을 때.

실제로 탈락자의 팬 중 몇몇은 자신의 쇼케이스 표를 암표로도 팔지 않았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실제로 야유나 소요가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Tnet이 무심코 넘긴 위험요인인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마법소년'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6월 18일.

쇼케이스는 그날 저녁 8시에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