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2화]

지난 자정에 '마법소년'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걸 각 잡고 모니터링할 시간은 없었다. 저기 비몽사몽 중인 차유진의 헛소리가 증명해 줄 것이다.

"음…? 머리 됐어요?"

"머리는 아까 끝났고, 지금은 차 안에서 이동 중이야."

"오…."

차유진이 희끄무레한 감탄사와 함께 도로 잠들었다.

그렇다. 어젯밤부터 여기저기 이동하며 때 빼고 광내고, 무슨 촬영을 하고, 무슨 인터뷰를 하고….

근 한 달간 잠을 제대로 못 자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슬슬 여긴 누구고 나는 어디인지 헷갈리는 놈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 이제 쇼케이스 맞죠…?"

"맞아∼"

긴가민가 싶다는 투로 매니저에게 물어봤던 선아현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코앞이라니 새삼스럽게 긴장이 된 모양이다.

"음, 이 한 달간 준비한 건… 다 보여주고 오자. 어디서든, 연습량은 배신 안 하니까."

"그럼요∼"

"네, 네!"

목소리가 잠긴 류청우의 격려에 깨어있던 멤버 몇이 호응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던 김래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실 기간 대비 연습 비중이 높은 것이지, 연습의 절대량으로 따지면 부족하…."

"…."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슬그머니 말이 바뀌었다.

"…지 않고, 충분히 무대를 열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사회성은 없지만, 눈치는 보는 놈이라 다행이었다.

쇼케이스에 참석한 기자들은 대부분 기대치가 컸다.

테스타의 실력이 아니라, 화제성에 대해서.

'일단 기사 뷰 수는 어느 정도 뽑겠지.'

'혹시 망하면 망하는 대로 좋다.'

사진을 찍는 기자도, 칼럼을 적는 기자도 열정적으로 자리에서 쇼케이스가 시작되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자들의 앞과 뒤로 아주사 에서 주식 패키지를 구매했던 주주들이 앉았다.

대부분은 이것저것 슬로건이나 응원 도구를 챙겨 온 상태였다. 아직 공식 응원봉 등이 나오지 않았기에 모양이나 색은 달랐지만, 그래도 팬들의 설렘이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들뜬 그 분위기에서, 어두운 무대에 불이 들어오며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하이파이브!

뮤직비디오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은 야구복을 입은 테스타는 뮤직비디오보다도 정확하게 군무를 맞춰 무대를 소화했다.

-내 발이 움직여

줌을 주는 것처럼∼

너에게로

Ddan Ddan Daradara DAAN Yeah!

유쾌한 노래에 어울리도록 안무도 신나게 몸을 움직이는 점핑 동작이 자주 등장했다.

휘익∼!

휘파람에 맞춰서 몸을 돌리거나 발을 튕길 때마다, 무대 집중도가 확 높아졌다.

'잘하네.'

'노래도 좋다!'

간주마다 멤버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인사를 하는 등 끼 넘치는 애드리브도 능청스럽게 귀여웠다.

'신인 안 같다.'

'오디션 출신들이 이런 걸 잘하더라.'

기자들은 그 호의적인 감상을 호들갑으로 승화시켜서 타이틀을 열심히 뽑았다.

['Hi-five' 테스타의 대세 증명 시작]

[테스타 '오프닝으로 끝내기 홈런!']

그사이, 오프닝을 끝낸 테스타 멤버들이 잠시 들어갔다. 그리고 대신 MC가 나와서 시간을 끌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어!"

익숙한 아주사 의 MC에 팬들이 반가움과 징그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무대 아래에서 테스타는 미친 듯이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악, 머리!"

"야구복 진짜 안 벗겨지네…."

간신히 화려한 견장이 달린 교복 재킷까지 챙겨 입은 테스타가 뛰어나가는 사이, MC는 능숙하게 관객의 반응을 이끌었다.

"이야∼ 오랜만입니다 주주님! …어? 안 반가우시다고요? 아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맙시다∼ 석 달이나 얼굴 본 사이 아닙니까! 물론 주주님만 제 얼굴을 보신 거지만."

웃음과 장난스러운 야유, 환호가 뒤섞인 순간. MC는 웃으며 다음 무대를 소개했다.

"그럼 오랜만에 여러분의 주식을 만나 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주식,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불이 들어온 무대 위.

테스타가 웃으며 전주에 맞춰 춤을 시작했다.

바로 나 였다.

"…!"

종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관객들은 이상한 아련함에 휩싸였다.

게다가 서로 파트까지 나눠서, 웃으며 바로 나 를 부르는 테스타의 모습을 보는 감상이 새로웠다.

마치 해피엔딩 이후의 에필로그를 보는 느낌이었기에, 관객들은 훈훈한 마음으로 무대를 즐겼다.

-오늘 무대 위에 빛나는 건.

바로 나!

그래 네가 만들 Shining Star.

바로 나!

"마침내 깨어나 빛을 발해∼"

급기야는 아예 떼창이 이어졌다.

테스타는 좋은 의미로 당황한 채, 더 크게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아주사 를 시청했던 기자들까지도 몇 명 고개를 끄덕거리는 즐거운 유행가 타임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몇 명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아주 자기들 곡 다됐구나.'

'파트도 나누고 신났어?'

삐딱한 마음으로 쇼케이스에 참석한, 아주사 탈락 참가자의 팬들이었다.

물론 탈락 참가자 팬 중 대부분은 그냥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1순위로 좋아하던 참가자가 아니더라도 테스타에 어느 정도 호감 있는 멤버는 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나 소수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챌린저 버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건이 터진 것은 다음 곡이 끝나고, 잠시 멤버들이 토크를 하는 도중이었다.

"저 이 버전! 꼭 하고 싶었어요!"

"네∼ 축하합니다. 차유진 어린이."

"히."

차유진이 결승전에서 했던 곡,Final의 다른 팀 버전을 해보았다는 것에 신나서 떠들고, 다른 멤버들은 그걸 카메라 없을 때보다 귀엽게 봐주고 있었다.

기자들도 특별히 악의가 짙은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날카롭거나, 약간의 함정이 어린 질문은 몇 가지 던졌다.

"다들 친해 보이시는데, 각자 제일 안 친한 멤버는 누굴까요?"

"으음, 앨범 준비가 굉장히 단기 간에 이루어졌잖아요.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VTIC이 바로 며칠 전인 12일에 컴백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 예상 질문 안에 있던 내용이라, 류청우와 큰세진이 서로 던져 가면서 부드럽게 주제를 흐렸다.

"저희 다 친해지는 중이죠∼ 근데 다들 아주사 하면서 이상한 동지애가 생겨서… 저희, 예상보다도 되게 빨리 친해져서 놀라는 중입니다!"

"앨범 준비는 회사에서 이미 진행을 위한 대비를 다 해주신 상태였기 때문에 빨리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곽신균 본부장님과 직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VTIC 선배님 만나면 꼭 앨범에 사인받고 싶습니다! 제 버킷리스트였어요!"

멤버들이 악마의 편집을 피하기 위해 익힌 생존형 인터뷰 스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질문도 나왔다.

"두 타이틀곡을 선정하셨는데, 아까 보여주신 'Hi-five' 무대와 차별화된 '마법소년'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

류청우가 반사적으로 마이크를 잡으려다가, 짧은 판단 끝에 아이디어 발안자인 박문대에게 대답을 넘겼다.

'이상한 질문은 아니니까 문대가 해도 괜찮겠지.'

완전한 배려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박문대는 인터뷰를 썩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거참.'

그래도 도로 마이크를 돌릴 수는 없으니, 박문대는 선선히 마이크를 들었다.

"마법소년은

그때였다.

"…1"

"아!"

무대 좀 아래쪽에서 반투명한 무언가가 세차게 튕겨 나와 박문대의 팔을 쳤다.

"조심…!"

류청우가 빠른 반사신경으로 박문대를 잡아당겼으나, 제법 세차게 날아온 탓에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

"…."

박문대는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온통 젖어있었다.

'생수병 던졌네.'

화려한 견장에서부터 소매까지 물이 떨어져 뚝뚝 흘렀다.

이마가 차가운 것을 보니, 옆얼굴에도 좀 튄 모양이다.

팔꿈치가 약간 욱신거렸다.

'세게도 던졌군.'

순식간에 공연장이 당혹스러움으로 굳었다.

관객들 사이에서 술렁거림과 걱정 어린 중얼거림, 작은 비명까지 온갖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들은 행복해졌다.

'이거 참.'

'누군지 몰라도 한 건 해가네∼'

박문대는 일단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이상한 성분은 없다.'

이마가 멀쩡한 걸로 봐선 염산이나 알코올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에도 던진 놈 침이나 좀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 그냥 넘긴다.'

이 모든 사고는 팔을 터는 3초간 끝났다.

언제나 상황을 가늠하며 살아야 했던 청소년기를 보낸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박문대는 픽 웃었다.

"눈치가 빠르시네."

"…!?"

"제 대답을 예측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킷을 벗었다. 재킷 안으로, 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교복 와이셔츠가 드러났다.

마법소년 뮤직비디오의 하얀 하복이었다.

"무대를 직접 보시면 이 곡의 차별화된 매력, 음. 충분히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아!"

멤버들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파악하고, 본인들도 재킷을 벗어서 옆으로 던졌다.

"그럼 재촉에 힘입어서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소년."

박문대가 아직 젖은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마이크를 되잡았다.

곧, 오르골 소리가 공연장을 채웠다.

몽환적인 보랏빛 무대장치 속에서, 젖은 머리의 박문대가 입을 열었다.

-내일 만난 너를

오늘 내내 생각해

낮처럼 파란 꿈을 꿔

그리고 현장의 팬들은 물병 사건을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테스타의 쇼케이스는 한 시간 내외로, 절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끝나기도 전에 속속들이 기사와 후기가 올라왔다.

물론 해프닝을 언급 기사도 빠지지 않았다.

[테스타, 물에 젖은 몽환의 '마법소년']

[준비된 스타의 저력. 퍼포먼스로 승화한 위기]

이런 타이틀의 기사를 클릭하면, 어김없이 하복 차림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는 박문대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또는 물에 젖은 재킷을 던지는 사진도 있었다. 견장에 묻은 물이 튀겨지며 조명에 반사되는 것이 도리어 미감을 살렸다.

물병에 맞는 사진도 간혹 올라왔지만, 대부분 자신이 찍던 영상을 캡처한 것이라 물건이 꽂히는 역동적인 장면의 화질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반응은 확실했다.

-대체 뭐 하는 미친 새끼길래 이제 데뷔하는 아이돌한테 물병을 던져?

-저거 얼굴 노리고 던진 거잖아ㅋㅋㅋㅋ 청우가 안 당겼으면 빼박 얼굴 맞았을 듯

-찐 정병이 분명함

-잡혔지? 제발 잡혀서 연행됐다고 말해 줘

-지금 쇼케이스 못 가서 무대 늦게 보는 것도 서러운데 내 자리를 저런 새끼가 가져간 거?ㅋㅋ 죽어 제발

팬들은 격분하면서도, 박문대의 대응에 깊게 안도했다.

-ㅠㅠ잘못하면 뒤숭숭하게 끝날뻔했는데 문대가 잘 수습해줘서 다행이야 진짜

-당황했을 텐데 티 안 내고 자연스럽게 넘긴 게 진짜 대단하다…

-에잉 박문대 그냥 눈치 없어서 진심으로 재촉 이야기한 것 같은데?ㅋㅋㅋ아주사 캐릭터 해석이 정확했던 듯∼

└여기에서까지 캐릭터 이야기가 나오니? 꺼져

-멤버들도 딱 보자마자 같이 재킷 벗는 거 보고 감동했음 애들끼리 잘 맞는 것 같아

그래도 위튜브의 사이버 렉카들은 이 좋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당일 실시간 인기 동영상에 잠깐 이런 제목이 뜨기도 했다.

[아주사 1위에게 날아온 물병의 정체?]

[쇼케이스에서 물벼락 맞은 1위 아이돌!]

우습게도, 대응이 좋았던 덕에 이 모든 것들이 다 바이럴 마케팅처럼 화제성의 화제성을 불러 왔다.

"형, 이거 봤어?"

그리고 이 소식은 막 1주 차 활동을 마친 VTIC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3화]

지루한 음악방송 사전녹화 대기 시간, 취향 따라 스마트폰을 만지던 VTIC 멤버 중 하나가 청려를 불렀다.

보여준 것은 위 튜브 실시간 인기 동영상 9위였다.

[쇼케이스에서 물벼락 맞은 1위 아이돌!]

[지난 18일 저녁, 한 아이돌 그룹의 데뷔 쇼케이스가 레드스퀘어에서 진행됐습니다. 바로 몇 달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오디션, 아이돌 주식회사 의….]

이슈 위튜버는 쇼케이스 물병 사건을 신나게 개인 사견을 붙여서 떠들고 있었다.

"이거 걔 맞지? 그 아주사."

"…아."

청려는 화면을 보고, 그 얼토당토않은 심리테스트를 기억해 냈다.

"박문대."

[눈치가 빠르시네.]

마침 영상에서는 (저작권 문제로)작게 첨부된 애매한 화질의 직캠이 나왔다. 박문대가 부드럽게 상황을 수습해 버리는 장면이었다.

"얘 진짜 좀 똑똑한데?"

"그러게."

"근데 좀 안 됐어. 하필 우리랑 동발이라…."

옆에서 슬쩍 구경하던 다른 멤버들도 끼어들어 혀를 찼다.

"Tnet이 만용 부리는 게 하루 이틀이냐."

"지표 괜찮은데 1위 못해서 아쉽겠다."

약간의 동정심이 깃든 말투는, 2주 차에도 본인들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1 Night Sign / VTIC]

지금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일간 순위였다.

음원 차트가 실시간이 보이지 않게 개편된 이후로부터는, 어지간하지 않으면 기존 음원 순위를 뚫고 바로 1위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린다.'

오는 자정에 공개될 테스타의 음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테스타의 1주 차 앨범 판매량이 VTIC 2주 차를 트리플 스코어 이상으로 따돌려야 음악방송 1위를 기대할만 했는데, 안타깝게도 VTIC과 초동 기간이 하루 정도 겹쳤다.

어느 한쪽에서 테스타가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미친 기록을 세우지 않는 이상, 지는 건 예정된 일이란 뜻이다.

물론, 아무리 오디션 출신이라도 신인 남자 아이돌에게 음원 차트 1위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했다.

"아∼ 됐다! 후배 걱정할 시간 있으면 우리나 잘하자!"

"옳소!"

VTIC은 순식간에 다시 자신들 각자의 관심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청려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질 수도 있겠는데.'

데뷔 쇼케이스는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뒤풀이는 없었다.

"이제 막 데뷔했는데 TV에 호빵처럼 나올 수는 없잖아. 거하게 먹이긴 그렇겠지∼"

"호빵 맛있는데요!"

"얼굴이 잘생겨야지 뜯어먹고 싶게 토실토실하면 안 되잖아."

"아하!"

차유진은 단번에 납득했다. 나는 큰세진의 놀라운 소통 솜씨를 잠시 감상하다가, 또다시 대화 소재가 되었다.

"그래도 문대 업적은 진짜 뒤풀이 감이었지."

"마, 맞아."

"훌륭했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하하, 이 친구 부끄러워하긴!"

"…."

나는… 쇼케이스가 끝나자마자부터 지금까지 '박문대의 순발 력은 세계 제일'이란 말을 기출 변형해서 듣는 중이었다.

이젠 민망하다기보단 떨떠름할 지경이다.

특히 큰세진 저놈을 일부러 더 민망해하라고 저러는 것 같아서 은근히 열 받는군.

"다들 고생 많았고, 잠깐… 쉬자."

"예이∼!"

"드디어."

어쨌든 뒤풀이 대신 짧은 휴식 시간을 받긴 했다. 류청우의 말에 멤버들은 안도부터 기쁨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을 선보이며 숙소로 흩어졌다.

참고로 나는 잤다. 같은 방 쓰는 이세진도 자서 수면 질이 향상되었다.

'잠 안 자도 되는 특성이 그립군.'

그러나 리얼리티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길지 않은 개인 시간을 보낸 뒤엔 다시 거실에 모여야 했다.

"다들 잘 쉰 것 같네."

"헤헤."

누가 봐도 간식을 까먹고 온 얼굴의 차유진이 웃었다.

그리고 다 같이 옹기종기 류청우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벌써 공개일이라니까 신기하긴 하다."

"기, 긴장돼…."

자정에 데뷔 앨범 음원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자기 걸 안 보고 굳이 하나를 같이 보는 건… 뭐, 그림이 훈훈하게 나오기 때문이겠지.

"어! 넘어갔다!"

금방 스마트폰 시계 단위가 변했다.

[00:00]

"으, 음원 나온 건가?"

"지금 봐요?"

김래빈이 단호하게 정리했다.

"24Hits 차트에 보일 때까지는 한 시간 이상 집계 시간이 걸립니다."

"한 시간…."

침음성을 뱉으며 이세진이 부엌으로 사라졌다. 물이라도 가져오려는 것 같았다.

'…한 시간 후에도 안 뜰 확률이 높을 텐데.'

24시간 집계된 다른 곡들 사이에서 한 시간짜리 성적으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VTIC도 한 시간 후 24시간 차트 진입이 87위였다.

아마도 김래빈은 그 사실을 이어서 설명하려는 듯했으나,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곧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

이번에는 설명해도 괜찮았는데?

큰세진은 긴장된 분위기를 상쇄하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마법소년' 뮤직비디오부터 보는 건 어때요?"

"아."

맞다. 그것도 아직 못 봤지.

겨우 숙소에 돌아와서 휴식 시간을 받은 탓에 그것까지 생각해낼 겨를이 없었다.

'리얼리티 제작진이 이것도 리액션 분량 찍어달라고 했었지.'

"좋은 생각이네."

"큰 걸로 봐요!"

차유진이 얼른 리모컨을 들고 TV 화면을 위튜브로 바꾸었다.

검색할 것도 없이, 실시간 1위에 뮤직비디오가 떠 있다.

[테스타(TeSTAR) '마법소년' Official MV]

"예에!"

"우, 우와."

멤버들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화면을 쳐다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오. 썸네일 문대다."

"자, 잘 나왔어."

썸네일은 교실의 창 앞에서 뒤를 돌아보는 박문대의 모습이었다.

하얀 커튼 뒤로 주홍빛, 자줏빛에 물든 하늘이 역광으로 빛났다.

'1위 대우인가.'

나는 떨떠름하게 썸네일을 보다가, 차유진이 들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해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

당황한 차유진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마법소년' 뮤직비디오가 재생되었다.

영상은 썸네일 화면으로 시작되었다.

[….]

텅 빈 교실 한편, 박문대는 노을이지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노래가 시작되었다.

-내일 만난 너를

오늘 내내 생각해

낮처럼 파란 꿈을 꿔

화면이 바뀌었다.

낡고 부서진 교정이 한낮의 햇살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가, 갑자기 보랏빛으로 물들며 반짝이는 비눗방울이 쏟아졌다.

그리고 학교의 일상적인 장소에, 비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각자의 파트마다 지나갔다.

-세상이 차가워도

꿈은 달콤해

현실이 무너져도

꿈은 선명해

차유진이 다 부수어진 교실에서 홀로 멀쩡한 교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동물 모양 태엽 인형을 모퉁이에 줄 세워, 태엽을 돌렸다. 그림자와 조명 탓에, 인형은 작은 생물처럼 보였다.

-잠기고 싶지 않아

잠들고 싶어 난,

꿈을 그리는데

But reality is breathing

All the time…

양호실 침대에 앉은 선아현이 베갯잇을 뜯었다. 그 안에서 솜 대신 빛나는 민들레 솜털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침대 주변 허공을 반짝였다.

-All that time,

아마 필요했던 거야

미래로 가는 마법이

그래서 난

류청우가 장난감 총으로 화단의 꽃을 쐈다. 비비탄이나 물 대신 빛줄기가 터지며 푸른 꽃잎이 비상한다.

그리고 보랏빛 노을이 지는 옥상에서 펼쳐지는 줌.

-Cast a spell

Make a wish come

true true true

-미래로 빠져들어 조용히

-Cast a spell

Make a dream come

true true true

-꿈으로 잠들어 파랗게

후렴이 끝나고 나오는 간주에는 박자가 좀 더 쪼개지며 화려한 댄스 브레이크가 이어졌다.

한낮의 옥상이 교차 편집되며, 보랏빛 배경 장면의 오묘함이 더 깊어졌다.

"저거 메이크업도 새로 해서 다들 고생 많으셨지."

"맞아요! 여러분, 잘 보시면… 인자에 찍은 거랑, 노을 질 때 찍은 거랑 의상이랑 메이크업에 차이가 있습니다!"

큰세진이 카메라에 대고 설명했다.

사실이었다.

낮 배경은 좀 더 맨 얼굴에 가까웠고 노을 배경은 뭔 반짝이에 눈밑에 홍조 비슷한 것까지 넣어놨다.

의상도 노을 배경을 찍을 때 액세서리를 더 붙였었다.

'그걸 하루 만에 찍으려니 모두 죽을 맛이었겠지.'

다행히 고생한 보람이 있게도, 컷은 잘 나왔다.

그리고 들어가는 2절.

최면을 거는 것 같은 묘한 손가락 동작이 끝나고 뒤에서 김래빈이 나왔다.

그리고 느리고 복잡한, 아주 묘한 리듬으로 멜로디 랩을 했다.

교차되는 것은 복도의 부서진 캐비닛이 겹겹이 쌓인 더미 위에 앉아서 송곳을 던졌다 받는 김래빈이다.

"오!"

"목소리 좋다."

"…감사합니다."

김래빈이 약간 머쓱하지만,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근데 어쩌다 송곳같이 살벌한 물건을 골랐습니까, 래빈 씨?"

"…귀여워서…?"

"…?"

상상 이상의 대답에 큰세진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기분 좋게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고 치자."

"그래. 귀여워 래빈아."

뮤직비디오 때깔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 안심했는지, 리액션들이 좀 편 해졌다.

이어진 화면에서는 마지막 타자로 이세진이 나오고 있었다.

이세진은 학교 건물 안에서 정문 현관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유리문 너머로 교정이 보였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마지막 후렴 전 브리지.

리프 멜로디인 오르골 소리가 톤이 낮아지며, 그 위에 보컬 멜로디가 똑같이 따라갔다.

-숨어도 감출 수 없는 건

아마도 마법일 거야

숨이 벅차고 떨리는

꿈.

이세진은 유리문을 부쉈다.

그 순간,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주르륵 컷이 돌아갔다.

테이프를 뒤로 돌리는 것 같은 기묘한 속삭임이 지나가더니, 곡 없이 컷이 삽입되었다.

박문대가 학교 밖에서 교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

이윽고 현관 앞에 멈춰 선 박문대는, 두 손을 모두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달칵.

자물쇠를 채웠다.

… 달칵.

필름이 돌아가며, 안무와 함께 마지막 후렴이 터져 나왔다.

-Cast a spell

Make a wish come

true true true

-미래로 잠들어 조용히

-Cast a spell

Make a dream come

true true true

-꿈으로 빠져들어 파랗게

어느새 안무가 펼쳐지는 옥상 주변은 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옥상을 감싼 난간이 깨지며 투명한 결정 맺혔다. 그리고 프리즘처럼 빛을 왜곡했다.

배경을 어지럽히는 빛처럼, 안무가 더 복잡하고 곡선이 강해졌다.

안무의 마지막.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대형을 서클로 바꿨다. 그들 이 옥상에 머리를 맞대고 동그랗게 눕는 순간 곡이 끝났다.

툭.

보랏빛 비눗방울이 터져 나왔다.

[….]

그리고 나타나는 검은 화면.

느릿하게 편곡된 '마법소년'의 Inst가 흐르는 가운데, 마치 단편영화처럼 고전적인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그제야 멤버들의 말문이 다시 터졌다.

"와!"

"너무 잘 나왔는데요?"

"감독님 감사합니다."

"머, 멋지게 잘 나온 것 같아…."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통에 아무 도서로의 말을 받아주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떠들었다.

"굉장히 음, 의미심장하게 나와서 재밌네."

"팬분들께서 다양한 세부 요소들을 찾아보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우린 좋았는데, 팬분들도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분위기는 이 이상 따스할 수 없을 만큼 따스해졌다.

'스타트를 잘 끊었으니 들뜰 만도하지.'

덕분에 음원 차트를 확인할 때도 불편할 정도로 긴장감이 곤두서 있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

"와! 진입했네∼"

85위, 88위 진입이었다.

'…한 곡은 VTIC보다도 약간 높은데.'

전국적으로 흥했던 오디션의 대중성을 등에 업은 오픈 빨은 생각 이상이었다.

'미쳤군.'

하지만 '실시간 진입 1위' 같은 말에 더 익숙하던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인지, 멤버들은 그냥저냥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머리로는 알아도 당장 눈에 보이는 건 80위권이니까.

그래서 더 격한 반응은 다음에 터졌다.

"다, 다 우리 곡…."

"헉."

아직 실시간 차트가 살아 있는 다른 음원 사이트들에서는 테스타의 타이틀곡이 1위, 2위를 나란히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1위 Hi-five / 테스타] new!

[2위 마법소년 / 테스타] new!

[3위 Night Sign / VTIC] ▼2

[….]

심지어 7위 안에 이번 앨범에서 발표한 4곡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물론 잠시 후면 VTIC에게 순식간에 밀릴 것이다. 그래도 미친 기세였다.

그제야 실감이 난 멤버들은 경악에 휩싸인 채로 스마트폰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캐, 캡처하자."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직 음악방송에 출연하지도 않은, 활동 극 초반부터 터진 호신호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4화]

테스타의 음원 차트 선전은 엄청 난파란을 불러일으켰다.

[테스타 24 Hits 진입 순위 (1시간)]

: Hi-five 85위, 마법소년 88위 차트 개편 이후 남돌 최고 진입 순위 갱신

한 곡은 VTIC보다도 높음ㄷㄷㄷ

-도랐다

-와 아주사 무섭네

-남돌 3대장 라인에 테스타 넣어야겠는데?ㅋㅋㅋㅋ 퇴물 다 된 티홀릭을 빼자

└이 새끼 테스타 팬 아닙니다. 분탕 종자 신고 부탁드립니다.

└신고 완료∼

-이럴 줄 알았음 티저부터 화력 미쳤던데 ㅋㅋ

-음판 오늘 하루 만에 25만 장 팔았다며 예약 기간도 짧았으면서ㄹㅇ 데뷔하자마자 어나더 클래스 오졌다

-와 성적충 붙겠는데? 일단 내가 붙음ㅇㅇ

└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대리뽕 찬다

가뜩이나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을 대로 높아진 상태 였다.

아주사 를 한 번이라도 시청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얹어대는 통에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자, VTIC 팬들의 반응도 확 싸늘해졌다.

-데뷔 앨범 진입이 순위 갱신ㅋㅋㅋ 방송사들 생태계 교란 정말 심하다

-수치를 봐야지 딱 봐도 빈집털이잖아

└안타깝게도 지금 음원 박터지는중임ㅋㅋ 차라리 한 달 전에 나왔으면 70위권도 노려볼 만했다

└뇌피셜 지리네ㅋㅋ 아 테스타빠들은 여러 의미로 수치를 모른다∼

-지금을 즐겨두세요∼ 다음 앨범이면 아주사 뽕 다 빠질 테니까ㅠㅠ 커리어하이 데뷔 앨범에서 끝날 텐데∼

└브이틱팬들 넹글 돌아버렸죠?ㅋㅋㅋ

└추하다 티카야

-오디션 프로그램 동안 다들 한 번씩 논란 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듣는 사람이 많다니 신기하네…

신나서 장작을 넣어대 며 이간질을 해대는 악성 누리꾼들 덕에, 팬덤간 분위기는 살얼음처럼 얼어붙고 있었다.

하지만 별개로 아이돌에 적당히 흥미만 있던 사람들은 굉장히 재밌어했다.

-와 그럼 이번 주에 브이틱, 테스타 음방에서 같이 보겠네

-꿀잼 예약ㅋㅋㅋ

-이대로면 담주에 테스타 1위하는 거 아냐?

└모름 VTIC 초동 기간 오늘까지였는데 오늘 한 18만 장 터졌어

└히익 거기도 단위 미쳤다

└테스타 무대가 방송 타고 음원이 얼마나 올라오느냐가 관건일 듯?

└오호 테스타 예능 스케줄 많이 잡아야겠네ㅋㅋㅋ

테스타는 다음 날 일간 차트에 'Hi-five'를 17위, '마법소년'을 19위로 올렸다.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였지만, 당연히 VTIC만큼은 아니었다.

-테스타 미쳤는데?

-VTIC은 천상계니까 논외고ㅋㅋ 솔직히 신인 남돌이 음원 차트에서 저러는 게 안 믿기는 정도임

-저 순위 안 떨어지고 유지만 해도 대박이야

다들 적당히 놀라고, 적당히 기대를 충족했다.

그렇게 목요일이 왔다.

테스타의 첫 음악방송 사전녹화 날이었다.

"너무 졸려요."

"그러게."

차유진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새벽부터 하는 건 알고 있었지. 근데 준비 시간을 생각 못 했군.'

새벽 4시 30분에 음악방송 사전녹화가 시작된다 치자. 그러면 늦어도 4시에는 방송국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럼 샵에는 그보다 몇 시간 전에 가야 하고….

한마디로 야간 노동이었다.

'우리야 계속 실내에서 이동한다만, 이걸 보러 오는 사람들은 어쩌냐.'

지원해서 추첨으로 뽑는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이 시간대에 사람 부를 거면 시급이라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날이 안 추운 게 다행이었다. 기다리면서 감기 걸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잘래요…."

차유진은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뻗었다.

"깨, 깨워야 할까? 모, 목소리 자다 일어나면, 잘 안 나올 텐데…."

"쟤 매번 저러고 살았는데 잘만 했습니다. 신경 써주지 마세요."

"그, 그렇구나."

김래빈의 단호한 말에 선아현이 손을 도로 모았다. 얼굴이 창백했다.

잠을 못 자서라기보단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만."

"으응?"

나는 가지고 다니던 작은 가방을 뒤져서 사탕 한 묶음을 선아현에게 던져줬다.

포도당 캔디였다.

"좀 먹어둬. 피곤할 때 좋더라."

"어, 어어…."

"헐, 문대 나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큰세진이 냉큼 선아현의 사탕을 하나 빼가려다가, 의외로 선아현에게 제지당했다.

"자, 자, 잘 먹을게!"

"아니, 아현이가…!"

"…."

나는 말없이 가방에서 캔디를 더꺼 내서 던져줬다. 큰세진이 희희낙락 받아갔다.

"오, 고마워!"

'…뭐든 간에 한 서너 배는 사야지, 먹고 싶은 만큼 먹겠군.'

가뜩이나 재정 상황이 아직 좋지 않은데,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때, 문밖에서 매니저와 류청우가 카메라와 함께 들어왔다.

'또 리얼리티 용인가.'

이번 음악방송이 Tnet이라 쉽게 출입하는 모양이었다.

매니저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류청우가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얘들아, 팬분들이 도시락 보내주셨어!"

"헉!"

"…도시락!"

자던 차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정말 놀랍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도시락 박스들은 휘황찬란했다.

'5단 도시락이라는 걸 실물로 볼 줄이야.'

나는 칸칸이 요리가 든 도시락을 분해하며 약간 당황스러워졌다.

원래 도시락이라는 게, 평범한 식사보다는 못한… 좀 한 끼 때우는 느낌이었는데.

도시락 상자 제일 위에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테스타의 데뷔가]

[마법이다 ]

밑에는 간단하게 '테스타 팬 일동' 정도만 적혀있었다.

"…."

아마 여러 개인 팬 커뮤니티가 합동으로 준비한 것 같았다. 그룹 첫 데뷔 무대니, 괜히 이름 나눠서 하느니 같이 보낸 거겠지.

멤버를 생각한 섬세한 배려심이었다.

"사진을 찍자 "

"일단 이대로 한 컷 찍고 개봉해서한 번 더 찍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야. 빨리 사진 잘 찍는 문대가 찍어주면 되겠다."

"그래."

"오?"

나는 군말 없이 폰으로 각도와 초점을 맞춰서 몇 컷을 찍었다. 그리고 명도와 채도를 조절해 바로 색감을 보정했다.

"진짜 잘 찍었다."

"소, 손재주가 좋은 것 같아…!"

"고맙다. 이거 업로드하려는데 괜찮을까."

"어?"

사실 멤버들에게 물었지만, 매니저가 들으라고 한 소리다.

이세진이 글을 올린 후로 아직 사적으로 특별히 뭘 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포일러의 문제도 있고 분위기의 문제도 있어서였다.

슬슬 운영해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매니저도 선선히 오케이 제스처를 보냈다.

멤버들도 힐끔 그 제스처를 확인하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당연히 괜찮지∼"

"문대가 좋은 생각 했네."

"이제 먹어요?"

차유진의 간절한 질문은 암묵적으로 무시당했다.

대신 김래빈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시작으로 여러 소식을 자주 업로드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근데 너는… 웬만하면 검사받고 올려라.

"사랑하는 꼭 넣자."

"자, 잘못하면 도시락 주셔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헉."

멤버들은 내가 사진을 편집할 동안, 열심히 문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80자 제한이 있네. 신중하게 잘 고르자."

"넵!"

그래서 완성된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테스타(TeSTAR)의 계정입니다!]

: 테스타 첫 음악방송 녹화 대기 중! 도시락 정말 감사합니다! 먹고 힘내서 멋지게 무대 해내겠습니다.

저희 열심히 준비한 만큼 보여드리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기다려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ㅠㅠ 우리 오래오래 봐요 (사진) (사진)(사진)

"좋아! 업로드했다!"

멤버들이 뿌듯해하는 가운데, 희미한 미소와 함께 그것을 보던 류청우가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잠깐, 지금 몇 시지?"

… 3시 50분.

꼭두새벽이다.

선아현이 새파랗게 질렸다.

"우, 우리 지금, 새, 새벽에 알림을. "

"삭제… 삭제하면 알림 안 가나?"

"당연히 갔을 겁니다…."

"…."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물론 새벽에 글을 올리는 아이돌도 많다지만, 이 경우 한 달 만에 올리는 그룹 소식을 새벽 톡처럼 보내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시락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던 차유진이 물었다.

"왜요?"

"새벽에 알림이 가면 민폐잖아."

"아하."

차유진이 해맑게 말했다.

"사과해요!"

"…!"

잠시 뒤. 테스타의 계정에 새 글 알림이 한 번 더 떴다.

[테스타(TeSTAR)의 계정입니다!]

: 새벽에 갑자기 글 올려서 죄송합니다ㅠㅠ 저희가 시간 감각 이 없어져서 이런 일이… 다음에는 꼭 낮에 찾아오겠습니다! (사진)

첨부된 추가 사진은 다 같이 고개를 숙인 테스타의 대기실 모습이었다.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요."

"음?"

"저희 의상 스포 한 거 같은데."

"…!"

…다행히 제작진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녹 직전에 뜻밖의 간 탈출을 경험한 멤버들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앞으로 SNS는, 최소한 30분은 고민해 본 후에 올리는 걸로 하자."

"예…."

그 대환장 잔치가 끝나고 나니 녹화 시간이 코앞이었다.

"이제 빨리 도시락 먹어요!"

"시간 없어, 끝나고 먹자."

"오우…."

차유진은 상심했다.

우리는 도시락에 동봉된 비타민 음료만 하나씩 챙겨 마시고, 바로 무대로 향했다.

"와아아아!"

밤부터 줄을 서며 기다려준 200여 명의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줬다.

참고로 우리가 아직 무대로 올라간 상황도 아니다. 단지 스테이지 옆에서 왔다 갔다 했을 뿐이었다.

큰세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괜히 밥 먹었냐 같은 질문은 하지 맙시다. 이 새벽에 왠지 우리만 도시락 먹고 약 올리는 것 같잖아요."

지금이 새벽이라는 것을 방금 전 사건으로 완전히 깨달은 멤버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만 빼고.

"하지만 못 먹었는데…."

"끝나면 바로 먹자."

"…예압."

류청우가 가볍게 상황을 제압했다.

"올라가실 게요∼!"

"넵-"

멤버들이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서 무대로 올라갔다.

세트가 대단했다. MV의 부서진 학교 세트를 핵심만 옮겨놓은 모양새에, 보랏빛 LED에 비눗방울 효과까지 제대로였다.

'돈 좀 썼군.'

하지만 세트를 심도 있게 둘러볼 시간은 없었다. 앞에서 몇백 명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 첫 녹화 무대입니다.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류청우의 선창에 따라서 멤버들이 인사하자, 밑에서 들리던 환호에 비명과 인사가 섞였다.

"혹시 테스타에게 바라시는 점 있으면…."

"글 자주 올려줘!"

"아, 글이요."

아까 SNS에 올린 글은 다 체크했는지, 무대 아래에서 폭발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류청우도 그만 웃어버렸다.

"자주 올리겠습니다. 새벽에는 말고요."

"오늘 바로 올릴게요!"

"자주 올린다는 건 단위가 어떻게…."

"매일!"

팬들이 목청껏 외쳤다. 김래빈한테도 안 밀리는군. 대단하다.

이렇게 무대 가까이서 대화까지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소통이 자연스러웠다고는 말 못 하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풋풋한 맛이 있었다. 신인 시절 잠깐이니, 팬들도 이분위기를 즐기겠지.

"아, 시작합니다."

몇 마디 짧게 대화를 나누던 멤버들은 곧 스태프의 사인에 무대에서 포지션을 잡았다.

내가 첫 파트로 가운데서 시작하는 구성이라 앞으로 나오게 됐다.

"문대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게 하트를 만들었다. 그… 소위 말하는 K-하트 말고. 그냥 손하트였다.

"아아악!"

손발이 터질 것 같았지만, 사람들이 즐거워 보이니 됐다….

새벽에 다리도 아플 텐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반응이 좀 가라앉자,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무대 밑에서 힘찬 목소리들이 들렸다.

'…응원법이네.'

저걸 내가 듣게 될 줄이야.

-내일 만난 너를

오늘 내내 생각해

"생각해!"

나는 첫 소절에 들어가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좀 즐거웠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5화]

MusicBomb이 시작하는 목요일 저녁 7시.

드물게도, 본방송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북적였다.

-라인업이 화려하니까 좋네

-일단 테스타가 먼저 나올 테니 걔네 나오면 불러주세요ㅋㅋ

대형 남자 아이돌 두 그룹이 함께 음악방송에 출연하는데 한쪽은 심지어 데뷔 무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테스타의 팬들이 더 활발했다.

-애들 새벽에 글 올린 거 봤어? 진짜 너무 귀엽다ㅠㅠ

└당황해서 사과하는 사진 넣은 거 진짜 씹덕 그 자체… 하지만 다음에는 꼭 셀카를 넣어다오 그게 사과다

-새벽에 글 오천만 개 올려도 되니까 많이 올려줬으면 좋겠다

-도시락 서폿 진짜 잘했더라 애들 새벽에 고생했을 텐데 밥이라도 잘 챙겨 먹었으면ㅠㅠ

-사녹 후기 보다가 부러워서 배 찢어질 뻔… 세 번쯤 찍었는데 사이사이에 토크 엄청 해줬다네

-문대 하트 애교했대…

└미친

└나 왜 사녹 광탈이냐

└직캠 누구 안 찍었냐?ㅠㅠ 제발 이렇게 빈다 올려줘…

이미 사전녹화 후기가 풀리며 의상 및 메이크업, 팬서비스와 토크까지 온갖 정보가 팬들 사이 에서 숙지된 상태였다.

그래서 팬들은 더 흥분한 채로 본방송을 기다렸다.

-하이파이브는 사녹 아니고 생방이지?

└ㅇㅇ어떤 야구복 일지 벌써 기대됨…

-아 언제쯤 나올까?ㅠㅠ 순서 스포 없어?

안타깝게도, 테스타의 무대는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Tnet의 음악방송이었기에 대우를 잘 받은 덕분이었다.

-순서가 이렇게… 뒤라고…?

-좋은데 슬프다

-어디쯤 있니 얘들아ㅠㅠ

그나마 팬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그룹 소개 인터뷰 분량은 중후반에 등장해줬다는 점이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테스타분들을 모셨습니다!]

[Take your STAR! 안녕하세요, 테스타입니다!]

화면에 등장한 테스타가 방긋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야구복을 입은 그들은 가드부터 글로브까지 각자 이미지에 맞는 소품을 챙긴 상태였다.

-미친 야구복

-ㅜㅜ문대 흑발도 잘 어울려 흑뭉댕이 됐구나

-차유진에게 핑크머리 해주신 분! 감사합니다! 아 너무 좋아!

- 존잘ㅠㅠ

-팀구호 좋당

[테스타 여러분, 오늘 무대를 앞둔 소감이 어떠신가요?]

[굉장히 긴장되는데, 준비 열심히 한 만큼 전부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대본과 후렴 한 구절 부르기가 끝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즐겁게 멤버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가 방송을 탔을 때.

-헐

순식간에 반응 글이 쏟아졌다.

-X나 잘하는데?

-원래 오디션 끝나면 콩깍지 벗겨져야 하는 거 아님? 왜 잘해?ㅋㅋㅋㅋㅋ

-숙연해지기 딱 좋은 콘셉트인데 진짜 잘 소화한다… 자기들이 정해서 그런가

-농담이 아니라 나 진짜 입덕 한 것 같아 빨리 갈발 꽃사슴처럼 생긴 분 이름 좀

└선아현

└잘 잡으셨습니다 선생님 우리 애 천사임

-이제부터 나 테스타 야구부 매니저다 반박 안 받음

생방으로 나온 'Hi-five' 무대부터 제대로 재밌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카메라를 찾아내고 콘셉트에 맞게 짓궂은 표정을 짓거나 청량하게 웃는 테스타는 확실히 곡의 주인처럼 보였다.

파트를 본인들이 나눈 덕에 라이브도 흔들리지 않았다. 긴장한 기색 없이 딱 맞는 안무와 함께 쭉쭉 무대를 빼는 것이 즐거워 보였다.

-아 재밌다

-캬 역시 아이돌은 무대를 잘해야 됨

사람들은 'Hi-five'만 보고도 벌써 무대가 다 끝난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마법소년' 무대가 나오는 순간 다시 댓글창과 SNS는 새 글로 도배되었다.

-ㅋㅋㅋㅋㅋㅋ와 말이 안 나옴

-문대 안목 좋네 왜 이 곡 밀었는지 알겠다

└그러게 역시 아주사에서 콘셉트 뽑던 티벳 점쟁이 여우 짬 어디 안 갔어ㅋㅋㅋ

└ㄹㅇㅋㅋ

-남돌이 이런 몽환 콘셉트 안 오글거리게 하는 팀 얼마 없는데 계보에 테스타 넣어줘야 할 듯

화면의 테스타 멤버들은 몽환적인 오르골 선율이 분위기를 잡는, 감각적인 딥하우스 곡에 맞추어 무대를 휘저었다.

무대가 사전녹화라는 점을 잘 이용해서 약간의 그래픽 이펙트를 추가했는데, 그 반짝거림과 글리치가 과하지 않게 '초현실', '마법'이라는 오묘한 키워드를 잘 살렸다.

그리고 '학교'라는 설정을 놓지 않았기에, 과하지 않은 선에서 청량하고 불안한 청소년기의 느낌 역시 살아 있었다.

결정적인 안무에서 무용처럼 극적인 움직임을 몇 가지 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무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멤버들이 그것들을 입이 벌어지도록 잘 소화했다.

사람들은 감탄하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피력했다.

-솔직히 대중성은 아까 야구 곡이 나은데 결국 덕 붙는 건 이쪽인 듯

└? 반대 아님? 이쪽 곡이 훨씬 트렌디하고 야구 쪽이 퍼포먼스용인 듯

└둘 다 좋은 걸로 하자ㅋㅋㅋ

-야 진짜 인간 승리다 어떻게 두 곡을 다 잘 뽑고 두 무대를 다 잘하냐ㅋㅋ

-솔직히 마법소년 압승임. 서사부터 안무, 멜로디까지. 하이파이브는 여기에 비하면 좀 B급이다.

└응 그래도 음원차트는 하이파이브가 더 높아∼

└이제 곧 뒤집히겠지.

└아아 얘들아 싸우지 마…ㅠㅠ 테스타가 둘 다 해준다잖아…

└맞아 제발 즐기거나 해ㅠㅠ

팬들은 흥분해서 무대의 여운을 즐겼다.

-데뷔 무대를 찢은 신인이 있다?

네 바로 우리 테스타입니다.

-나같이 누추한 사람이 저런 귀한 아이돌을 좋아해도 되나 의아할 지경

-주주님들 참안목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

-파트 분배도 진짜 잘해놨다 누구 하나 안 서운하게 챙긴 우리 애들의 마음씨가 느껴져ㅠㅠ

연차가 오래된 발라드 그룹의 무대가 다음으로 방송을 탔지만, 테스타의 팬들은 첫 공식 데뷔 무대 감상의 여운에 젖어 폭주 중이었다.

하지만 VTIC이 나오며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

-클래스가 뭔지 보여주네ㅋㅋㅋ

-와 너무 잘해서 무섭다 진짜

-저 정도면 무슨 문화재 같은 거 등록해줘야 하지 않을까?

-티홀릭 다음으로 퇴물 드립 치려던 놈들 다 어디 감?ㅋㅋ

누아르 감성의 스윙 하우스 곡은 무섭게 세련되고 강렬했다.

하지만 본래 사람들은 신선한 이미지, 다크호스에 더 흥미를 가지는 법이었다. 때문에 테스타 언급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아 케이팝의 미래가 밝다∼

-이번 주 내내 두 무대 같이 볼 수 있겠네ㅋㅋ

VTIC의 무대가 엔딩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이어서 1위 발표식이 진행되었다.

[이번 주 1위는… VTIC의 Night Sign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와∼]

VTIC은 지난주 공중파부터 나오기 위해 MusicBomb을 건너뛰었다. 덕분에 컴백 무대와 함께 1위 트로피를 받을 수 있었다.

-ㅊㅋㅊㅋ

-너무 당연해서 축하도 까먹을 뻔

-축하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이번 앨범을 위해 함께 노력해주신…]

VTIC도 네티즌도 놀라지 않았다.

큰 감격은 없지만 기쁘고 즐거운 수상 소감이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MC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빵 터지는 음악의 즐거움!]

[뮤직∼밤! 다음 주에 만나요!]

-재밌었다∼

-오늘 오래간만에 뮤직 밤 본 보람이 있었다ㅎㅎ

완연한 파장 분위기 속, VTIC 멤버들이 1위 앙코르를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때, 예상치 못한 컷이 방송을 탔다.

앞으로 나오던 청려가 들어가는 테스타를 돌아보더니, 웃으며 손을 흔든 것이다.

-어어 방금 봄?

-? 청려 맞지?

-아니 청려 웬일이야 타 그룹 친한 사람 없다더니ㅋㅋ

-친분 생긴 듯?

-귀엽다ㅋㅋ

-역시 후배는 귀여운가 벼

사람들은 즐겁게 떠들었지만, 막상 인사를 받은 쪽은 몹시 떨떠름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갑자기 무슨 인사지?'

VTIC은 스케줄 문제로 급하게 도착해서 생방에 들어갔기 때문에, 특별히 이쪽에서 인사를 갈 시간도 없었다.

즉, 지금 청려를 아주사 끝나고 처음으로 봤다는 뜻이다.

근데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대놓고 손을 흔들어준다?

'저럴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나는 짧게 찜찜한 기분을 느꼈지만, 곧 버렸다. 바빠 죽겠는데 누가 갑자기 인사를 하든 말든 알게 뭔가.

'1위 해서 갑자기 신났나 보지.'

"문대 너한테 인사하신 것 같은데? 너하고 캐스팅 콜 때 만나서 그러신가 보다."

"흠, 그럴지도요."

나는 여상스러운 류청우의 말에 동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차유진의 기대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집 갈 수 있어요?"

"에이, 인사는 하고 가야지∼"

매니저의 대답에 큰세진이 중얼거렸다.

"아, 여기도 아직 그거 하나 보네."

"뭐?"

"PD한테 줄 서서 인사하고 가는 거."

"음."

나도 대충 이야기는 들어봤다. 아이돌들 음악방송 퇴근길이 늦어지는 게 1위 발표 때 단체 샷 하고 저 인사 탓이라던데.

'여기 아니라 공중파도 몇 곳 저짓 한다고 듣긴 했지.'

덕분에 퇴근이 늦으니 썩 내키지는 않았다. 새벽부터 깨어 있느라 힘들기도 했고.

'…그래도 사회생활하려면 별수 있니.'

이런 건 괜히 안 튀는 게 좋았다.

우리는 군소리 없이 매니저를 따라갔다.

"이, 이거 좀 어색하네…!"

복도에 도착해서 줄을 서자, 선아현이 당황한 얼굴로 속삭였다.

생각보다 출연진들이 바글거렸고, 시선이 쏠렸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말을 걸 것 같은 분위기다.

관행상 앨범 돌리러 인사는 다녀봤어도 이렇게 집단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교성 넘치는 놈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나는 시선을 무시하고 선아현과 잡담을 나눴다.

"무대 어땠어?"

"어? 무, 물론… 괴, 굉장히 좋았어!"

"어떤 면에서?"

"음… 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고, 곡도 좋고, 가, 같이하는 멤버들도 친하고…."

"…."

'솔직히 우리가 다 친하지는 않지 않나?'

하지만 굳이 이걸 짚어서 산통 깰 필요는 없었다. 그냥 입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선아현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때, 복도 저쪽에서 무슨 썰물처럼 사람들이 우수수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보였다.

이 타이밍에서 이건 하나뿐이다.

'VTIC이겠지.'

우리 다음으로 무대를 한 발라드 그룹은 스케줄 때문에 1위 발표 전에 이미 자리에 없었다. 연차가 꽉 차야지만 그런 곳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VTIC도 같은 원리로, 연차와 인기 덕에 빠르게 PD와 인사를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T1계열사 특전 같은 건 없나.'

적폐 같은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자니, 마침 VTIC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열심히 고개 인사나 해주자.

하지만 누군가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아, 문대 씨, 또 뵙네요. 1위 축하드립니다."

"…!"

청려였다.

"아, 이분이 그…?"

"맞아."

"와, 반가워요. 활동 파이팅!"

다른 VTIC 멤버도 알은체하며 한 마디씩 거든다. 청려는 웃고 있었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것 같은데?'

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냥 인사만 했다.

"예.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저도 반갑습니다. 음… 우리 번호 교환할까요? 이렇게 활동 겹치기도 드문 일인데."

"…저야 감사하죠."

일단 번호는 교환해 두자. 써먹을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선선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다만, 굳이 다른 출연진들이 미어터지는 복도에서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조용히 매니저 통해서 번호만 알아가도 될 텐데.'

아까 굳이 카메라 돌아가는데 인사하는 것도 그렇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데. 뭔지 모르겠다.

'…그냥 인맥 과시용인가?'

어쨌든 박문대가 오디션 프로그램 1위 출신인 건 맞으니 말이다. 그냥 청려가 관종일 수도 있지.

'한 번 본 놈 성격을 내가 제대로 알 리가 있나.'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잘 들어가셔요."

VTIC은 금방 복도에서 사라져 줬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스마트폰을 도로 넣었다.

옆에서 큰세진이 박수를 치며 히죽거렸다.

"이야∼ 문대, 여돌보다 먼저 남돌에게 번호를… 커허업."

포도당 캔디나 더 처먹어라.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76화]

큰세진은 꽤 오래 투덜거렸다.

"아니, 너무 안 받아주네. 내가 여돌 번호 물어보자고 한 것도 아니고."

"…."

그랬으면 포도당이 아니라 다른 게 날아갔지.

어쨌든 큰세진은 캔디를 다 먹고나니 기분이 나아졌는지, 차에 타고난 뒤에는 또 장난을 걸었다.

"아, 알겠다. 문대는 보고 싶던 여자 아이돌이 있다고?"

없다 새끼야.

'행사에서 실컷 봤었는데 무슨.'

나는 피식 웃고 대꾸했다.

"너는?"

"아 나야 팬들하고 결혼했지∼ 여돌? 그게 뭐였더라?"

천연덕스러운 큰세진의 말에 류청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김래빈은 진지하게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저희는 남녀에 상관없이 타 그룹에 지나치게 경계를 풀지,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응?"

"여자 아이돌도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

김래빈이 뜬금없이 통렬하게 외쳤기 때문에 다들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무슨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김래빈이 더 진지하게 설명을 이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돌은 장기경쟁입니다. 그런데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남녀와 관계없이 아이돌 그룹이 장기간 존속하며 여러 컨셉을 시도할수록 점점 타겟층은 겹치게 되는 겁니다…!"

선아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렇구나…!"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수요가 겹치는 아이돌 그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

"…으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맞장구쳐 주자.'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음, 맞는 말이야."

"…! 그렇죠!"

김래빈은 잠시 승리의 순간을 만끽하는 듯, 눈을 번쩍거렸다. 류청우가부드럽게 상황을 받아넘겼다.

"래빈이가 똑똑하네."

"감사합니다!"

씩씩한 김래빈의 목소리 뒤로 차유진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 아니야?"

도긴개긴인 놈들끼리 서로를 무시하는 사이군. 잘 알겠다.

음악방송 촬영은 그 후로도 일요일까지 매일 진행되었다.

한밤중에 준비하는 새벽 사전녹화를 하루걸러 하루꼴로 하고나니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그나마 금요일 음방은 사전녹화가 9시부터 진행해서 숨 좀 돌렸지만,그것도 7시에 출근하니 큰 차이는없었다.

'바쿠스500' 특성을 가진 내가 이정도니 다른 놈들 사정은 안 봐도 뻔했다.

'어제 이세진이 쓰러질 뻔했지.'

다행히 차 안에서 엎어져서 다치지않고 끝났다. 소속사도 놀랐는지, 그후로 기름기 하나 없던 식단이 좀 여유로워졌다.

이 와중에 저녁에는 리얼리티 컨텐츠까지 챙기려니 체력이 쭉쭉 갈려나가는 게 당연했다.

'…이걸 매주 해야 한다니.'

좋은 건 응원 소리 들으면서 무대를 하는 딱 그 순간뿐이었다. 그 시간을 위해 팬과 아이돌 모두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게 아주 대단한 구조였다.

이 기회를 못 잡아서 우는 애들이 더 많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랬다.

'사람을 쥐어 짜내는군.'

나는 한숨을 쉬었다.

"6월 셋째 주 인기뮤직 1위는… 축하드립니다, VTIC의 Night Sign!"

어쨌든 드디어 주말 마지막 음악방송까지 끝났다. 나는 1위 수상자에게 기계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여긴 사전녹화를 안 시켜줘서 잠은 좀 잤다.'

주워듣기로는 케이블 오디션 출신이라고 텃세 좀 부린 모양이었다.

어쩐지 순서도 초중반이더라고.

물론 장단이 있었다. 사전녹화가없으니 무대구성에 제한이 생겼다.

생방송 한 번으로 무대를 끝내야하기 때문이다.

'활동 첫 주에는… 사전녹화를 하는 게 유용하긴 하겠어.'

내가 생각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차피 워라밸이 없다면 결과라도 좋은 편이 낫지 않겠나 싶다.

"우리 사진 좀 찍을까?"

"좋아요!"

"문대야 셀카 어때?!"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일단 사진요청부터 들어왔다.

'SNS 업로드용이군.'

이런 건 찍어야 하긴 했다. 나는 군말할 것 없이 그냥 스마트폰을 받아서 전면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7명이 상반신 의상까지 다 나오도록 각도를 잘 조절해, 사진을연사로 찍었다.

이러면 신나서 자기들끼리 잘 골라올린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사진을 업로드 할 것인가를 두고 또 입씨름하는 놈들이 나왔다.

"자, 3번 사진이 제일 낫지 않아? 7명 다 웃는 게 잘 보이는 편이 보기 좋잖아∼"

"입이 이상해요. 다음 거 써요!"

"들어주지 마세요. 한 사람만 잘 나온 사진을 쓰는 건 비합리적인 행동입니다."

"사, 사진 다 잘 나왔어…."

선아현이 말리는 건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론은 큰세진이 고른 것과 차유진이 고른 것 두 장이 업로드되었다.

이세진은 질린 표정으로 그 과정을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인 못 나온 거 올렸다고 어제 구시렁댄 건 깨끗하게 잊은 모양이었다.

'하하, 팀 참 잘 돌아간다.'

카메라가 있어서 싸움으로 빌드업 안 되는 게 다행일 뿐이다.

어쨌든, 첫 주 활동은 이렇게 마무리 되는 듯싶었다.

'…일단 무대 반응은 좋아서 다행이고.'

틈날 때마다 간간이 확인하고 있다. 조회수와 전체적인 평 모두 아주 괜찮았다.

'역시 춤을 찍은 게 정답이었나.'

사실… 뮤직비디오 찍기 직전에 하나 남은 포인트를 춤 스탯에 투자했다.

보컬뿐만 아니라, 내 무대 분량 자체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위 부작용인 것 같았다.

'센터로 나오는 동선이 잦으니 안찍을 수가 없었지.'

막판까지 다른 스탯과 고민했는데, 일단 가장 약한 걸 보완하는 게 우선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기울었다.

'괜히 조롱 밈 붙으면 골치 아파진다.'

덕분에 현재 내 춤 스탯은 'B-'다.

그냥 곧잘 추는구나 싶은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물론 세 놈이나 춤이 A등급이라 크게 이득은 못 봤다만.'

이제 개인전도 아니니, 퀄리티에 기여하는 수준으로 도약한 것에 만족하기로 하자.

…뭐, 박문대 개인 직캠에서 팬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는 게 재밌기도하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첫 주 활동 무사히 잘 마무리됐네요!"

대기실을 떠나기 전, 멤버들과 스탭들이 웃으며 자축했다. 매니저가 한마디 덧붙였다.

"음원 10위 안에 들어간 것도 축하하고∼"

"하하핫!"

그렇다. 매니저의 말대로 음원은 고무적으로 잘 올라가는 중이다.

나는 단톡방에 올라온 오늘 24Hits 순위 캡처를 떠올렸다.

[10위 마법소년 ▲4]

[13위 Hi-five ▲3]

'음방 버프라는 게 정말 있긴 한가보군.'

약간 놀랐던 건 마법 소년이 역전했다는 점이다.

아마 무대 덕도 있지만, 그 곡이 잘 안 질린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이파이브는 계속 듣기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층도 '마법소년'은 괜찮았을 것 같으니까.'

곡을 고르는 내 새로운 특성이 꽤 효과적인 것 같아서 만족했다.

…물론 아직도 VTIC은 음원 차트 1위에 잘 붙어 있었다. 진짜 대단한놈들이었다.

'흠, 이번 활동으로 공중파 1위는무리인가.'

상황 보니 다음 앨범도 올해 내로 내줄 것 같고, 이번 앨범 성적도 괜찮았으니 벌벌 떨면서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긴 했다.

…애초부터 돌연사가 갱신되는 이 개 같은 상황이 없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말이지.

바쁜 스케줄에 잊고 있던 깊은 빡침이 속에서 올라오려다, 간신히 내려 갔다.

열 받는다고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니 진정하도록 하자.

'…순탄한 궤도에 올려놓은 걸로 만족할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내 가방을 챙겼다. 옆에서 류청우가 매니저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 그럼 오늘은 바로 숙소로 가나요?"

"아… 사실 오늘 급하게 미팅이 하나 잡혔는데."

"네?"

"너희 예능 나가고 싶어 했잖아. 예능이야!"

매니저가 밝게 이야기하자, 피곤한 와중에도 몇 놈이 낚였다.

"오∼ 무슨 예능인가요?"

"예능 재밌어요?"

매니저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일해라 인간 이라는 프로그램이야!"

"…?"

"이번에 TVC에서 새로 런칭하는 프로그램인데, 너희 알지? 거기서 만든 예능들 다 잘됐잖아∼"

"오오!"

멤버 몇 명이 솔깃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매니저가 말을 더 얹었다.

"이색 직업 체험하는 예능인데 PD님도 좋은 분이고, 다들 기대가 크대. 꼭 테스타랑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니까 열심히 해보자!"

"…."

…아, 벌써 감이 온다.

'갑자기 혓바닥 길어질 때부터 이상했다.'

TVC면 T1계열사 방송국이다. 한마디로 자기 식구 안에서 예능 새로 런칭하니까 화제성용으로 테스타를 쓰고 싶다는 말이다.

게다가 3년 후에서 온 나도 이름도 못 들어본 프로그램이다.

'프로 망할 것 같으니까 꽂은 거네.'

지금 타 방송사에서는 아직 테스타가 1위를 못 내다보니 케이블 오디션 출신한테 러브콜 넣기 애매해서 예능섭외로 눈치싸움 중인 것 같은데.

'그 딜을 못 기다리고 여기다 첫 예능 특수를 써 버려?'

회사놈들이 큰 그림 그리느라 그룹에는 생산성 하나 없는 선택을 해버리는 꼴을 보니 어이가 사라진다.

하지만 뭣 모르는 멤버들은 해맑고 씩씩하게 매니저에게 대답하는 중이다.

"넵!"

"알겠습니다!"

"…예."

나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카메라 도는데 따져서 뭐 하나. 신인에게 무슨 스케줄 거부권이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군말 말고하고 오자.

그리고 마침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큰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

저건 X 같지만, 별수 있냐는 눈인데.

이후 차에 타서 슬쩍 물어보니, 직전에 방영된 일해라 인간 의 1화 반응이 괴멸적이었다고 한다.

'역시.'

회사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앨범 준비하면서 쓸데없이 회복한 모양이다.

더 버리도록 하자.

"안녕하십니까∼"

이미 소속사와 출연 이야기가 끝났는지 일해라 인간 과의 미팅 자리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이미 자기들끼리 다 말 맞춰뒀군.'

"몇 가지 사전 질문만 먼저 드릴게요."

"네!"

당장 다음 촬영이 코앞이라 급한지, 인사치레도 없이 열 개 내외 정도의 문답을 주고받는 것으로 미팅은 서둘러 끝났다.

일해라 는 타이틀답게, 주로 하고싶은 일을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일을 안 하는 게 최고지.'

그러나 현재 직업상 이런 답변을 적을 수는 없으니, 적당히 특이한 직업 몇 가지를 답변했다.

'급하네.'

제작진은 허둥지둥 원하는 질의응답을 다 수집하고 미팅을 끝냈다.

바빠 죽겠다는 게 눈에 보였다.

'1화 반응이 별로라 사람들이 갈리나 보군.'

어쨌든, 덕분에 완전히 밤이 되기전에 숙소행 차를 다시 탈 수 있었다.

"자, 다들 손들어주세요∼"

SNS에 올린다며 동영상을 찍는 큰세진에게 의무적으로 손을 흔들어주고 있자니, 주머니에 진동이 왔다.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큰세진이 동영상을 다 찍고 카메라 끄는 것을 확인한 뒤, 스마트폰을 확인해 봤다.

[VTIC 청려 선배님 : 연락이 없어서 먼저 문자 해봅니다. 박문대 씨 번호 맞나요?^^]

"…."

와, 진짜 찝찝한데.

'신인이 연락 먼저 안 했다고 은근히 먹이는 건가.'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 번호 가져간게 아닌 건 잘 알겠다.

그래도 연차 서열상 무시할 수는없으니 일단 답장은 보냈다.

[제가 스마트폰을 잘 안 봐서 연락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러자 순식간에 답장이 왔다.

[VTIC 청려 선배님: 죄송할 건 없고, 그냥 인사라도 하면서 지내자고 문자 해봤어요.]

피곤해 죽겠군.

나는 대충 '알았다, 감사하다'는 식의 짧은 답장을 보내고 아예 스마트폰을 껐다.

'내일쯤 톡 확인 늦는다고 바꿔두면 되겠지.'

어차피 슬슬 어떻게 알아낸 건지 이상한 새끼들이 자꾸 툭툭 톡을 넣어서 귀찮던 참이었다.

주소록에 없는 번호 연락 차단하면서 상태 메시지도 바꾸자.

'어쨌든 오늘은… 이대로 퇴근인가.'

그대로 차에서 살짝 잠이 들려던찰나, 류청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우리 슬슬 안무 박자가 각자 조금씩 달라지는데, 지금 시간난 김에 잡아놔야 하지 않을까?"

"…."

잠이 확 깬다.

주변을 보니, 다들 '나 쉬고 싶어요'라고 써놓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에 차마 반박을 못 해서 암묵적인 동의의 침묵만 흘렀다.

나는 한숨을 참았다.

'…퇴근은 무슨.'

연습이나 하러 가야겠다.

테스타가 살인적인 활동 첫 주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 팬들은 넘치는 컨텐츠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점이 테스타가 얌전히 스케줄을 따르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했다.

-첫 주 음방 교차편집 위튜브에 떴는데 진짜 개쩐다 (링크)

-이번 주 리얼리티 쇼케이스 편 너무 좋았어! 애들 머리하는 거 너무 귀엽고 무대 진지하게 준비할 때 눈물 나더라 테스타 오래 가자ㅠㅠ

-CQ 화보하고 인터뷰 비하인드떴다. 잡지는 일단 전량 매진. (링크)

└아아…ㅠㅠ 늦었어…

└추가 물량 많이 찍어 주세요 제발…ㅠㅠ

테스타와의 계약이 단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속사는 일부러 멤버간 개인별 경쟁을 부추기는 마케팅 방식보다는 일단 그룹 자체를 좋아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 노력은 팬덤에 잘 정착하려는 중이었다.

그룹이 하나의 SNS만을 이용하며,자주 같이 있는 사진을 올리는 것도이젠 큰 반발 없는 분위기였다.

다만 한 분야에서만큼은 그럴 수없었다.

바로 앨범에 들어가는 랜덤 포토카드였다.

앨범 판매랑과 직결되는 요소다 보니, 앨범에 랜덤으로 들어가는 멤버들의 포토카드는 전통적인 상술에 따라 그대로 넣었던 것이다.

덕분에 테스타를 욕하고 싶은 사람들은 관련 비교 글에 바글바글 붙어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테스타 포토카드 거래단가 순위]

: 차유진=박문대 선아현 김래빈=큰세진=류청우 이세진

+)중고월드에서 통계 낸 거임 현실 부정 안 받아요∼ (링크)

-역시 차유진이 1위네ㅋㅋㅋㅋ

-아 박문대 엔딩 센터 내놓으라고ㅋㅋ 죽은 부모 팔아서 1위 하니 좋았냐∼

-이세진은 진짜 모든 곳에서 쓸모가 없네? 뮤직비디오 분량 처먹는거 외에 하는 일이 있어?

-류청우 거품 드디어 빠졌구나 최종 순위 보고 코어 없을 줄 알았지ㅋ

-제발 인싸인 척 상황을 컨트롤하는 척 쾌활 훈남인 척 좀 그만하자 큰세진아 비인기멤은 그렇게 나대는거 아니다ㅠㅠ

-아현이는 그 얼굴로도 3위가 한계인 거 보면 역시 말 안 하는 직업을 고르는 게 나았을 것 같아. 아이돌 말고 화보 모델? 같은 거 하지!

아무리 팬들이 신고하거나 무시해도 한계가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나가기 직전'인 라이징에게 쏟아지는 질시와 분노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 조롱이 모든 멤버에게 전방위로 쏟아졌기 때문에, 도리어 팬들에게이상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미친놈들한테 먹이 주지 말자

-아주사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줄 세우기에 목을 맨다? 절대 애들 팬 아님 개인팬도 아닐 거야

└이게 맞음 찐팬이면 저런 글에서 자아표출하는 게 말이 되냐ㅋㅋ

-아주사 좀 봤다고 괜히 아는 척말 얹는 정병들한테 휘둘릴 필요 없어. 우린 애들만 보고 가면 됨.

-맞아 테스타가 이렇게 잘하는데 저런 거에 감정 소모할 필요 없자나그냥 알못 소속사나 패자

그들 사이에서는 형식적으로만 그렇게 표명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룹 팬'이라는 정체성이 슬슬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딱 그 시점 즈음에, 특별한 행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테스타의 첫 팬 사인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