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짜잔!]
천 아래 감춰져 있던 것은… 묵직한 명패였다.
-?
-? 뭐얔ㅋㅋㅋ
기업 회장의 책상 위에나 있을 법한 고급스럽고 거대한 자개 명패에는 궁서체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러뷰어]
[Loviewer]
류청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랑을 담아 저희를 지켜봐 주시는 팬분들을 생각하며 정했습니다.]
[LOVE plus Reviewer! 입니다∼]
차유진이 부가 설명을 붙였다. 그리고 뿌듯한 눈으로 거대 명패를 바라보았다.
[저거 주문? 주문 제작했어요!]
[지금까지 저희한테 투자해 주신 우리 팬분들이 저희한테 최고라는뜻으로… 아, 그리고 W라이브 끝나면 추첨으로 팬분께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명패는 뜬금없어서 웃기기만 했다.
참고로 박문대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다수결로 밀려서 그냥 포기했다.
어쨌든 테스타가 너무 뿌듯해 하는것 같았기에, 팬들은 그냥 웃는 이모티콘과 하트로 댓글을 밀어버렸다. 귀여웠으니까.
물론 SNS에서는 치열한 상황중계가 오갔다.
-W앱에 명패 올드하니 가져다 치우라고 말해주고 싶죠? 하지만 첫W앱이잖아요 봐줍시다ㅠㅠ 우리 한번만 봐주자!
-아 ㄹㅇㅋㅋ만 치라고∼
-어지간히 X구린게 나오지 않는이상 분위기 파악하란 말이야∼
-일단 이름은 괜찮으니 명패는 의외의 귀여움이라고 납득 가능한 부분임 ㅇㅋ?
덕분에 팬덤명에 대한 반응이 궁금한 나머지 스마트폰 화면에 가까이갔던 멤버들은 'ㅋㅋㅋ'과 'ㅠㅠㅠ'그리고 '사랑해' 같은 글 위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보고! 반응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 다행이에요….]
[좋았어!]
테스타는 들뜬 얼굴로 다음 발표를이어갔다.
[그럼 이어서 공식 색을 발표하겠습니다!]
테스타의 첫 W라이브는 꽤 오랜시간 이어졌다.
원래는 2시간 예정이었으나, 멤버들이 첫 번째 W라이브를 대본대로만 진행해서 끝내기 아쉬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반에는 꽤 많은 TMI가 풀려나왔다.
[오늘 W앱에서 테스타가 풀어준본인들 MBTI 정리ㅋㅋㅋ]
: 류청우 ESFJ / 이세진A ISFP /선아현 ISFJ / 큰세진 ENTJ / 박문대 INTJ / 김래빈 INFP/ 차유진 ENTP
이런 거 안 해본 애들이 라이브로 하면서 신나 하는 게 별미였다 정말… 테스타는 W라이브까지 맛집이야…
※정식 테스트 아니었으니까 재미로 보기!
-와 겹치는 애들 하나도 없어 ㅋㅋㅋㅋㅋ
-ㅠㅠㅠㅠ애들 오늘 너무 귀여웠어 W앱 자주 켜줬으면 좋겠다
-외향 내향 진짜 귀신같이 나왔다 특히 확신의 E 큰세진ㅋㅋㅋㅋㅋ
-청우 ESFJ 설명 나올 때마다 애들이 똑같다고 감탄하는데 완전 선생님 좋아하는 유치원 애기들 같았잖아ㅠㅠ 아이고 귀여운 것들
-공감능력 낮은 것 같은 애들이 T네. 어울린다.
└? MBTI로 인성 궁예질하는 멍청이가 있다?
└ㅋㅋㅋㅋㅋㅋ인류 절반 묶어서 후려치기 오졌다∼
물론 드디어 정해진 팬덤명을 자축하는 분위기가 가장 강했다.
-테스타 솔직히 테스터 생각나서 찝찝했는데 팬들한테 사랑 넘치는리뷰 작성자 컨셉 잡아준 내 가수덕에 다 잊어버렸다
└이거 맞음 테스타-러뷰어 완전운명의 페어 반박 안 받습니다 ️
-내일 법원 문 여는 대로 이름을 김러뷰로 개명할 예정임ㅇㅇ 사랑스럽고 일코될 듯
└ㅋㅋㅋㅋㅋㅋ미쳤나ㅋㅋㅋ 하루에 둘이나 신청하면 이상하잖아 나만 할 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
-시간대별로 하늘색 따서 쓰리톤으로 팬덤 컬러 만든 것도 괜찮았어. 이번 앨범 세계관하고 연관되는느낌?
└맞아 어차피 요새 컬러야 유명무실한 느낌이기도 하고ㅋㅋㅋ
-사실 우리 응원봉이 엄청 눈에 띄게 나올 것 같아서… 컬러는 아무래도 좋을지도…
└ㅋㅋㅋ맞아ㅋㅋㅋㅋ
└나 벌써 공방 기대 돼 진짴ㅋㅋㅋㅋ
테스타의 팬들은 첫 W라이브에서 터진 여러 떡밥을 즐기며 일요일을보냈다.
게다가, 마침 이번 활동 마지막 팬사인회가 진행 중이었다.
-W라이브 직후에 팬싸 괜찮으려나ㅠㅠ
-얘네 스케줄 진짜 못 잡는다;
테스타를 걱정하고 소속사를 욕하면서도, W라이브 관련 이야기를 질문해 보겠다는 이야기에 또 후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다행히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어떤 분이 래빈이한테 야구방망이 모양 마라카스 줬어ㅋㅋㅋㅋ 래빈이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해ㅋㅋㅋ (사진)
-문대한테 강아지 그려달라고 해봤습니다. 음… 암튼 문댕댕이 강아지라고 하니까 이게 앞으로 강아지입니다. (터진 호떡 같은 그림 사진)
-오늘은 아현이가 선물 준비했다ㅠㅠ 사슴 캐릭터 펜이야ㅠㅠ 나 이걸로 사인받아왔어! (사진)
그리고 테스타도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간다는 느낌 덕에 더욱 활기차게 팬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문대야 나 응원봉 여기 그려주면안 될까?"
"…그럼요. 여기요?"
"응!"
오늘만 한 열 번은 비슷한 요청을 받는 것 같다.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며 사인 옆에 응원봉 최종버전을 그렸다.
…내가 그렸지만 뭔지 도저히 못알아보겠다.
"어떡해! 너무 좋아…."
허술한 모습이 인간적으로 보여서정이 가는 건가….
'아니면 너무 못 그리다 보니 희소성이 있어서인가.'
어느 쪽이든 받는 쪽이 좋다면야 상관은 없다만, 봉이 김선달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은 피할 수가 없다.
'시간만 때운 느낌인데.'
나는 최대한 빨리 그림을 마치고 다시 물어봤다.
"다른 거 또 보고 싶은 거 없으세요?"
"헉, 그럼 설레는 말 적어줘!"
"흠, 설레는 말…."
이런 구체적이지 않은 부탁이 고민에 시간을 쓸 수 없는 환경상 제일 까다로운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팬 사인회 한 타임하면 두 번 이상은 듣는 말이기 때문에 슬슬 속도가 붙었다.
나는 곧바로 응원봉 아래에 글을 적어 내렸다.
[오늘 박문대의 저녁 일정 : 팬사인회에서 만난 러뷰어 생각하기]
"허어엉…."
"또 봐요."
팬분은 흐느적거리며 스탭에게 다음 자리로 이동 당했다. 이미 한 번 버텼기 때문에 이번에는 스탭도 단호해서 별수 없었다.
'역시 상대와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을 언급하는 게 제일 효과가 좋군.'
약간 개인적 느낌을 넣는 게 더 좋긴 한데, 도저히 20초 안에 생각날 것 같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에 진짜 떠오를 것 같다.'
나는 목 뒤를 쓰다듬으며 다음 사람을 기다렸지만, 아직 올 기미가없었다.
"세진이는 무대 잘하는 비결 있어요?"
"음∼ 누나가 좋은 점 말씀해 주시면 그걸 비결로 하면 되겠다!"
"와아악!"
큰세진이 거의 무슨 묘기처럼 대화를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탭이 손도 못 쓰는 게 대단했다.
'시간이 떴군…'
이름을 부르는 카메라에 시선을 주고 있자니, 방금 건너간 팬이 선아현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선아현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지, 목소리에 별 감흥이 없었다.
"서, 성함이 어떻게 되, 되시나요?"
"네?"
팬이 약간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되묻는 게 들렸다.
"그, 이, 이름이요…!"
선아현은 다시 한번 물었지만, 약간 더 작아진 목소리는 도리어 좀뭉개졌다. 상대의 말투에 약간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잘 안 들리는데요…."
"죄, 죄, 죄송해요."
"아뇨."
"…."
느낌 안 좋은데.
이후로 선아현의 말이 없어졌다.
힐끗 보니, 그래도 사인은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드디어 큰세진의 말이 끝났는지, 내 앞으로 다른 팬이 왔다. 아직도큰세진과 손을 흔드는 중인 팬이 앨범을 내밀길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이, 이거…."
"아."
선아현이 준비한 선물을 내민 모양이었다.
그리고, 약간 기분이 상한 것 같은 목소리가 거절했다.
"아, 됐어요. 괜찮아요."
"…!"
선아현 앞에 앉아 있던 팬은 그대로 자리를 떴다.
사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언제나 친절한 사람만 만나는 직업은 없다. 저 정도면 면전에서 욕 들은 건 아니니, 어쩌면 그냥 기분 좀 나쁘고 넘길 수도 있다.
문제는 X나게 감이 싸하다는 것이다.
'말더듬증, 낯선 또래, 거절.'
키워드가 아주 트리플 크라운이다.
선아현 트라우마 스위치 위에서 누가 탭댄스를 춘 수준이다.
"…."
옆을 보니, 선아현이 바짝 굳은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X발…'
저건 조금만 지체하면 들킨다.
나는 일단 선아현 손에 들린 펜을 뺏었다. 그리고 바로 포장을 뜯어버렸다.
"…!"
"이거 아현이가 준비한 선물인데, 저도 이걸로 사인해드려도 될까요."
"와! 너무 좋지!"
나는 곧장 사인을 시작하며, 선아현을 대화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아현이가 누나한테 지금 제가 쓰는 것도 주고, 포장된 것도하나 더 준대요."
"헐…?! 진짜?"
"그럼요. 맞지?"
"…네, 네!"
선아현이 정신을 차렸는지, 대답을 시작했다.
'일단 굳은 건 풀렸고.'
"어어어, 너무 좋은데, 나 왜 두개 받아?"
"큰세진의 말을 오래 받아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에 드리는 보답입니다. 저희 멤버가 말이 좀 많죠."
"야, 너무 하네!"
"으하하하!"
용케 듣고 큰세진이 한번 추임새를넣고 사라졌다.
이쯤 되니 모든 게 농담이다 싶은지, 팬분은 신나게 웃으며 펜을 챙겨갔다.
"너무 고마워∼ 근데 내가 누난 건 어떻게 알았어?"
"옆에서 큰세진이 한 열 번은 말하던데요?"
"하하핫…!"
민망한 듯 웃은 그 팬분은, 다행히 다음 순서인 선아현한테도 성의껏 말을 걸고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선아현은 다음 사람이 오기 전에 안정을 되찾았다.
'일단 넘겼다.'
다행히 그날 팬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다른 이변은 없었다.
"너 괜찮아?"
"…괘, 괜찮아."
숙소에 돌아가는 차 안, 선아현의 상태는 확실히 아까보다 나아졌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리고 연거푸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미, 미안… 내, 내가 크, 큰일 낼뻔, 한 거지…."
"그런 건 아니고."
좀 귀찮은 스캔들이 될 순 있겠지만, 그룹에 타격이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저놈 멘탈이 먼저 박살 날 것 같다는 점이 문제였다.
'팬싸 잡히면 또 아까 같은 상황이 올까 봐 계속 걱정하겠지.'
그러다 '근성' 특성이 비활성화라도 되는 날에는… 정말 그룹에 타격이 갈 수 있었다. 댄스 라인에 구멍이 날 테니까.
"혹시 상담받아 볼 생각은 없어?"
"…시, 시, 시간도 없고…."
"소속사에 말하면 좀 빼줄 것 같은데. 요새는 이런 문제로 아예 활동쉬는 사람도 많아."
활동 시작하고 4주는 채웠으니, 선아현이 못 해 먹겠다고 나오면 어느정도 편의는 봐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선아현을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고, 곧 휴가 주신다니까, 그, 그때… 할게."
"…."
그거 언플용이고 한 사흘 주고 생색낼 것 같던데.
그냥 지금 받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해보려는데, 선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 지금은… 하기 싫어. 아, 아직활동 중이고, 스, 스케줄, 빠지기 싫고."
단호하군.
본인이 그렇다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처음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흠… 그래. 알았어."
"으응…."
'분위기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선아현 부모님께 연락해 버리면 되겠지.'
음악을 틀어놓은 차 안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눈 탓에 대화는 새어나가지 않았다. 나는 팝송을 따라 부르는 차유진 목소리에서 귀마개를 사용해 도망치기로 했다.
"…."
그리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거실이 웬 풍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87화]
"이게 무슨…."
류청우가 풍선 폭탄을 맞은 꼴인 거실을 확인하며 중얼거리다가 멈췄다. 아마 풍선 사이사이에 돌아가는 렌즈가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리얼리티용 카메라가 돌아왔다.
'재촬영이 오늘부터였군.'
최근에 숙소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리얼리티 카메라는 컨텐츠 뽑을 때만 짧고 굵게 있다가 빠지곤 했다.
'활동이나 일상 컨텐츠는 이미 너무 우려먹어서 더 못 써먹을 수준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꼴은 또 처음이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주춤주춤 거실에 진입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풍선 속에서 대형쪽지를 발견했다. 얼마나 컸냐면, 모양만 쪽지지 거실벽의 사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집! 테스타의 1위 기념 여행]
"어?"
"…여행?"
"여행!"
차유진이 단번에 풍선을 차며 벽에 접근했다. 공식 색으로 선정된 세가지 팬톤 넘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색색의 풍선들이 허공을 비상했다.
"이거 뜯어져요! 안에 무엇이 있어요!"
"유진아 조심해야지!"
"오우."
차유진은 지난번에 혼났던 것을 떠올렸는지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얌전히 쪽지를 놓았다.
"그래, 같이 확인하자."
"네…."
굳이 이래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만, 방송용 그림을 위해서 다 같이쪽지를 뜯어냈다.
"하나, 둘, 셋!"
그러자 웬 거대한 룰렛이 등장했다.
'…룰렛이라니.'
단어만 들어도 플래시백이 터질 것같군.
하지만 멤버들은 본격적인 여행 컨텐츠 냄새에 흥분했다.
"와! 이게 뭐야?"
"복불복?"
"여행 복불복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래빈의 말대로 상단에는 크게 여행 복불복 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밑으로 적당한 글씨로 설명이 이어 졌다.
"음∼ '여러분은 이 룰렛을 함께 돌려서, 이번 여행의 컨셉을 결정합니다… 1박 2일간 떠나는 테스타의 우정 여행'! 와, 진짜 본격적인데요?"
"너무 좋아요!"
"빠, 빨리 돌릴까…!?"
약간 기운이 없던 선아현까지 신나서 룰렛에 달라붙었다. 룰렛은 총 7칸으로, 칸마다 다른 테마가 적혀있었다.
[힐링, 먹방, 어드벤처, 익스트림, 테마파크, 역사.]
"오∼"
키워드는 제법 특색 있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힐링이 제일 낫겠군.'
척 보니 어디 산속에라도 가서 전원 생활하는 스케줄이다. 제일 만만하고 가사 노동 외에는 체력 소모가 없을 느낌이지.
"Adventure하고 싶어요."
"힐링 좋지."
"먹방은 완전 문대를 위해 넣으신것 같은데?"
분량을 생각했는지 잠시 각자 취향을 피력하던 놈들은 곧 참지 못하고 신나서 룰렛에 붙었다.
"다 같이 잡고 동시에 돌리죠!"
"그러자. 문대야, 너도 얼른 이리와!"
"…옙."
덕분에 여섯이서 다 같이 룰렛을 돌린다는 기이한 장면이 카메라에잡혔다.
'제발 훈훈하게라도 나가라.'
나는 희망 사항을 중얼거리며 멤버들과 동시에 룰렛을 건드렸다.
"오오오∼"
"돌아간다!"
'당연히 돌아가지 그럼 안 돌아가겠냐.'
어지간히 힘을 줘서 돌렸는지, 룰렛은 핑글핑글 꽤 오래 돌다가 간신히 멈춰 섰다.
"테마파크…!"
간절한 김래빈의 말이 무색하게도 원반은 테마파크의 보라색 칸을 넘어… 빨간색까지 갔다.
"어어어!"
그리고 시뻘건 빨간 칸에 전위적인 글씨체로 테마가 적혀 있었다.
[익스트림 여행]
"…익스트림?"
"아, Extreme!"
차유진이 드디어 발음의 뜻을 깨달았는지,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차유진 마음에 들어?'
그렇게 불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류청우의 스마트폰으로 제작진으로부터의 문자가 들어왔다.
[테스타의 이번 여행 테마는 익스트림∼]
[극한의 즐거움을 맛보는 익사이팅테마로 모시겠습니다! *^^*]
[※무르기 없음!]
"무, 무르기 없음…?"
"어…, 어허허…."
서바이벌로 단련된 촉이 발동했는지 멤버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
나는 룰렛 앞으로 다가갔다.
"문대야'?"
그리고 룰렛을 다시 돌려보았다.
빙글빙글, 열심히 돌아가던 룰렛은…
또 익스트림 여행에서 멈췄다.
…다시 돌려보았다.
빙그르르…, 툭.
…익스트림 이다.
그리고 멤버들은 상황을 깨달았다.
"…!"
"…사기잖아요!"
…참고로 다음 날 만난 제작진은, 스케줄을 먼저 짜야 하는데 당연히 7개 전부 걸리게 둘 순 없지 않겠냐며 실실 웃었다.
'이 새끼들….'
어떻게든 여행 컨텐츠에서 시청률을 뽑아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정말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스케줄 때문에 늦게 확인했네요. 뮤직가요 1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침에 깨자마자 와 있는 문자에 답장하고 있자니 슬슬 어처구니가없다.
상태 메시지에 확인 늦다고 적어놔도 계속 오는군.
참고로 상대는 VTIC의 청려다.
'이 새끼 진짜 피곤하네.'
본인도 1위 후보였던 마당에 늦게 확인했을 리가 있나.
당연히 멤버 중 누군가라도 당일에 말했을 것이다. 3주 연속 공중파 트리플 크라운이 저지됐는데 말이 안나왔을 리가.
'일부러 꼽주려고 연락한 건 맞는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곧 답장이 왔다.
[다음에는 더 빨리 1위 하길 바라요.]
동발해서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알아서 피해 가면 각자 1위 챙기고 얼마나 좋냐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선배님.]
'이거 시X 무시할 수도 없고.'
일단 톡 알림은 꺼버렸다. 안 그래도 본부장 만날 때마다 X 같은 데별 새끼가 다 귀찮게 구는군.
"여! 행! 준! 비!"
"무, 문대야, 짐… 다, 다 챙겼어?"
"어. 잠시만."
스마트폰을 끄자마자 우당탕탕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출발 준비 촬영이군….'
리얼리티 여행 컨텐츠의 시작이었다.
"그게 끝이야?"
"어."
"괜찮겠어?"
"그럼요."
배낭 하나 메고 오자 여기저기서 너무 짐이 너무 적지 않냐며 참견이들어왔다.
'1박 2일인데 뭐.'
어차피 제작진 시키는 데로 가는 패키지여행이다. 옷하고 양치 도구면 된 거 아닌가.
"간식은요?"
"뭐?"
"간식은요?"
"…간식."
"네!"
"가서 사 먹자."
"네…."
차유진 안에서 내 이미지는 간식 보급책이 된 모양이다.
'빵셔틀이라도 된 기분인데.'
고등학교 때도 달아본 적 없는 멋진 직함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자, 그럼… 저희 드디어 첫 여행갑니다∼"
"와!"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제작진 카메라 앞에서 오프닝은 잘했다. 속아놓고도 다들 일단 여행이라니까 들뜬 분위기가 역력했다.
'강행군이긴 했지.'
데뷔 앨범 준비 때부터 지금까지 두 달쯤 쉬지 못하고 달렸으니까.
다만, 그런 멤버들을 보는 제작진이 히죽히죽 웃을 때부터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했어야 했다.
약 3시간 뒤.
우리는 경기도 끝자락에 있는 웬산 아래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오늘의 첫 여행지에 도착한 테스타 여러분, 축합니다!"
"와!"
"경치가 정말 좋네요!"
좀 더웠지만, 확실히 날씨가 좋았다. 오랜만의 야외 활동에 화색이 도는 멤버들에게 PD가 확성기로 외쳤다.
"여러분의 첫 번째 익스트림 활동은… 스카이다이빙입니다!"
"…!?"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저기 위에 경비행기 보이시죠?"
두두두두…
푸른 하늘 위로 검은 비행물체가 쓱 지나갔다.
"저기 타서 뛰어내리실 거예요."
"…!"
그리고 난장판이 되었다.
"아아아아악!"
"이건 완전히 안전하다… 나는안전하다…."
"하하하하하하!"
"…중도 포기는 불가능한가요?"
"에이, 비행기까지 타서 아깝죠∼이거 이미 돈 다 냈는데?"
"…."
강사의 느긋한 대답에 이세진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었다.
'개판이군.'
그래도 제작진이 마지막 보루를 내려주기는 했다.
-정 못 뛰시겠으면 그냥 내려오셔도 됩니다. 대신, 다음 코스가 두배!
'이거 팬들한테 욕 처먹을 것 같은데.'
누가 진짜 못 하겠다고 울기라도 하면 '왜 아이돌 리얼리티를 쓸데없이 가학적으로 만드냐'고 쌍욕 먹고 사과문 발표할 수위였다.
다만 그럴 일은 드물 것 같았다.
"자, 그럼 한 사람씩 뛰어내립니다!"
"으아아아!"
이놈들이 의외로 다 악바리기 때문이다.
그 아주사에서 아득바득 버틴 놈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구석에 처박혀서 혼자 중얼거리던 김래빈부터 신나서 발을동동 구르던 차유진까지 모두 잘만 뛰어내렸다.
뒤에 강사가 있으니 좀 용기가 생긴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 갑니다!"
"네, 네…!"
선아현도 별문제 없이 쑥 뛰어내렸다.
'다음은 난 가.'
얼결에 또 마지막 타자가 됐다. 아주사 깜짝 VCR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런 건 무섭지도 않지.'
죽거나 다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단 말인가. 단지 이 돈 주고 하는 의미는 잘 모르겠다.
"자∼ 이거 같이 뛰어야 합니다. 심호흡하시고."
"예."
"아, 이 친구가 제일 강심장이네∼갑시다!"
훅
바람이 얼굴을 찔렀다.
"…하!"
"좋죠∼?"
좋았다.
…생각도 못 했다.
사방으로 새파란 창공이 펼쳐졌다.
푸른 지평선 너머로 산과 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햇살이 눈을 찌르는데도 덥지 않았다.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자, 낙하산∼"
퉁, 압박감과 함께 몸이 허공에 느릿하게 멈추어 바람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해방감이었다.
"잘 타네! 이거 잡고… 이렇게 밀어봅시다!"
"…."
내가 류건우로 계속 살았다면, 과연 이런 걸 해볼 생각이나 했을까.
'절대 아니지.'
그 돈 주고 뭐하러 하늘에서 뛰어내리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았다.
성취, 공연, 팬, 환호…. 삶을 사는 감각이.
'…이상하네.'
상태이상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았다.
이상하게, 내가 박문대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자, 착지합니다!"
지상으로 착륙하는 순간, 먼저 내려간 놈들이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대까지 도착∼"
…뭐 익스트림 여행, 나쁘지 않을것 같군. 나는 웃으며 바닥에 발을디뎠다.
내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던가?
"자, 오늘의 두 번째 익스트림 체험! 바로∼ '흉가의 초대'입니다!"
"아아아아!"
지금 취소하겠다. 제작진 놈들은 정도를 모른다.
"전방에 보이는 건물 보이시나요?"
"예…!"
"보이긴 하는데…!"
겁 많은 걸로 인증된 몇몇 멤버들이 이미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PD가 신나게 확성기로 떠들었다.
"이번에 내한한 호러메이킹 전문팀이 운영하는 공포체험 세트장입니다!"
"으아아아…."
"딱 올여름만 운영해서 지금만 할수 있는 거예요!"
이 자세한 설명은… PPL이란 뜻이다.
옆에서 음울한 얼굴로 이세진이 중얼거렸다.
"올여름만 버텼으면 되는 거였구나…."
"…."
그러게 말이다.
"그럼 여러분, 지금부터 '흉가의초대'에 입장할 조를 나눠주세요!"
"저희가…! 조를 만드는 데 안 좋은 기억이 있어요…!"
"다 같이 입장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테스타는 입장 조를 나누기시작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88화]
…익스트림 공포체험 조는, 의외로… 상식적인 구성으로 인원수를묶었다.
"둘, 둘, 셋으로 나누면 되는군요."
"휴…."
일단 혼자는 아니라는 말에 겁쟁이들의 안색이 나아졌다. 특히 김래빈이.
"그, 그럼… 어떻게 나누면 될까?"
"전 청우 형과 가고 싶습니다!"
"나도!"
그리고 류청우의 주가가 갑자기 떡상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런 분야에서 특히 믿음직하긴 하지.'
류청우는 쓱 주변을 둘러보더니,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그럼 나 포함해서… 음, 래빈이랑 문대랑 이렇게 셋이 갈까?"
"감사합니다!"
"에이∼ 그러면 재미없죠! 청우 형님은 무조건 2명 조여야 재밌지!"
큰세진이 다 된 밥에 초를 치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진짜.'
공포영화 보고 무서워하던 건 역시다 컨셉질이 맞았던 것 같다.
"흠, 그런가?"
"그럼요!"
…그리고 큰세진에게 류청우가 설득되는 바람에, 가위바위보에서 마지막까지 이긴 사람이 조를 전부 지정해주는 구성이 되었다.
"이야∼ 이렇게 됐네."
'X발.'
거기서 큰세진이 최종까지 살아남은 게 제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보통 이런 건 말한 놈이 망하는거 아니냐.'
큰세진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순식간에 조를 편성했다.
그래서 나는….
"으아아아!"
"나가요! 나가요!"
큰세진과 차유진이라는 미친 조합으로 흉가를 탐험하게 되었다.
나가기 전에 내 고막이 먼저 터져나갈 것 같은 조합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차유진에게 물었다.
"…너 공포영화는 안 무서워했잖아."
귀신은 안 무서워하고 징그러운 거에 약한 줄 알았다. 하지만 차유진은 완전히 발걸음마다 개구리를 산채로 밟은 것처럼 튀어 오르고 있었다.
"보는 거 괜찮아요! 진짜는 싫어요! 가짜만 괜찮아요!"
"…."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히 가짜가 아닌가…'
하지만 이런 건…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자.
대신 큰세진에게 물었다.
"너 대체 나 왜 골랐냐."
"뭐랄까… 양심의 부름이죠? 3명조에 들어가고 싶은데 강심장까지챙겨가면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내 내면의 외침?"
"…."
"그래서 쫄보 셋의 화려한 극복기를 보여주기로 했어!"
개소리한다.
…흠, 이마에 카메라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일단, 움직이자."
"그래. 그러자∼"
"빨리 가야 합니다…."
…최단 거리를 생각해봐야 한다.
"근데 문대야, '수상한 징조'는 대체 어디 있을 것 같아?"
"…."
그것도 문제였다.
이 '흉가의 초대'에서 각 조가 수행해야 할 미션이 있었는데, 바로 '수상한 징조'를 발견해서 사진을 찍어오라는 것이었다. 무조건 하나 이상!
"그거 많이 발견해서 찍어오면 선물 준다고 하셨잖아! 우리도 한번탐험해서 도전해 보자!"
"…그건 좋아요!"
차유진까지 선물과 탐험 키워드에 꽂혔는지 만용을 부리기 시작했다.
답이 없다.
"…그럼, 일단 복도를 지나서, 제일 작은 문으로 들어가자."
제일 크고 눈에 띄는 방에 직원이 대기 중일 것 같으니까…!
"보통 이런 건 숨겨두잖아. 눈에 안 띄는 것부터, 봐야 할 것 같다."
"와, 좋은 아이디어다∼ 자 그럼 아이디어 제공자가 앞장서는 거지?"
"…."
정말 때려치우고 싶다.
하지만 맨 뒤보다야 맨 앞이 나은것은 맞았기 때문에, 차악을 선택하는 기분으로 앞에 섰다.
"그래."
"와∼ 멋있어! 난 무서우니까 맨뒤에서 가야지∼"
그래도 차유진을 맨 뒤에 놓는 악수를 두고 싶지는 않았는지, 큰세진은 알아서 맨 뒤로 갔다. 리액션 분량 뽑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자, 그럼 출발!"
"출발!"
"…."
나는 천천히 복도에서 걸음을 옮겼다. 어두침침한 목재 건축물 내부,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대야! 저기 피!"
"…!"
욕할 뻔했다. 나는 고개만 돌려서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소리 좀 지르지 말아라…!"
큰세진은 순순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미안해애액?!"
"으아아아!"
"…?!"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여자가 있다. 한 50년 전 배경영화에나 입을 법한 고용인 복장이었다.
근데 발이 없었다.
그리고 눈도 없었다.
피만 흥건했다.
"갸아아아악!"
"허어어어으아! 도망쳐!"
…비명 지르는 놈들과 같이 옆방으로 뛰어들어 가면서, 나는 이 조는 이미 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밖으로 나오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 미친 흉가에서 나오는 데 한시간이나 소요됐다는 뜻이다.
'25분짜리 코스였는데.'
대체 방송에 얼마나 쪽팔리게 나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목이 아파요."
"너도? 나도."
실컷 비명을 지른 두 놈은 제작진에게 이온음료를 받아서 미친 듯이마시고 있었다.
물론 큰세진이야 반쯤 재미로 소리를 지르던 놈이니 자업자득이며 자신의 업보다.
선아현은 예상 시간의 두 배나 쓴 오합지졸들이 신경 쓰였는지 말을걸었다.
참고로, 선아현과 이세진 2인조는 20분 만에 사진을 세 장 찍고 출구를 찾아 나왔다.
…여러 의미로 현타가 왔다.
"괘, 괜찮았어?"
"…뭐. 그냥."
이거야말로 정말 왜 돈을 내고 하는지 알 수 없는 경험이었다.
'아니, 돈을 받아도 그래.'
최저시급 정도 받는 거라면 다신 안 들어가고 싶다.
"문대가 고생했지∼ 야, 고맙다."
"감사합니다!"
카메라에 다 찍혀서 그런지 자기가 하드캐리했다고 주장하는 얼토당토않은 일은 없군.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사진 찍어서 나왔으니, 도망친 것보다야 훨씬 나은 상황이긴했다.
"후우우우…."
"다녀왔습니다."
마지막 팀인 류청우와 김래빈이 35분 만에 귀환하자, PD가 또 입을털기 시작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저녁드셔야죠!"
"설마… 저녁도 익스트림인가요?"
"그럼요!"
"어어어억."
카메라 없으면 폭동이 났을 텐데 카메라가 있어서 탄식 리액션만 난무했다.
"익스트림한∼ 돼지 통구이입니다!"
"허어어어억!"
"통구이!"
다행히 제작진도 눈치가 없진 않았는지, 이쯤 해서 풀어줘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흉가 옆 공터에서 새끼 돼지 통 바베큐가 불 위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다 구운 거군.'
화력을 보아하니, 저 모닥불 같은건 고기를 뜨끈뜨끈하게 유지하는용도인 것 같았다.
어쨌든 어마어마한 비주얼에 멤버 대부분이 행복해했다. 아직도 혼이 나간 것 같은 김래빈만 빼고.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이는 것만큼 압도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고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맛있었다.
흉가에서 찍은 사진으로 받은 선물은… 동물 잠옷이었다.
'이렇게 또 한 벌 늘어났군.'
선물 받은 것만 합쳐도 다섯 벌이넘어갔다.
어쨌든 7벌을 준 걸 보니, 사실상 리얼리티 여행 중에는 멤버 모두 이걸 입고 자달라는 소리다.
'어렵진 않지.'
그래서 저녁 8시, 펜션 거실에 앉아 있는 테스타는 전부 동물 잠옷차림이었다.
"겁 많은 세 사람이 잘해줘서 같이입어보네."
"마음에 듭니다."
"귀, 귀엽고 좋아요."
혹시 PPL일까 봐 열심히 말하는 놈들을 보니, 벌써 방송인 다 됐구나 싶다.
어쨌든, 지금부터 잘 때까지 통으로 자유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짜 자유롭게 하고 싶은걸 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자율적으로 컨텐츠 하나 뽑아달라는 뜻이지.'
뭐… 노래방 게임을 하든, 보드게임을 하든, 그것도 아니면 각자에게진심 어린 편지를 쓰든. 뭐라도 편하게 하는 것처럼 해달라는 뜻이다.
"흐∼ 저희 심심한데 진실게임이라도 해볼까요?"
저렇게 말이다.
"지, 진실게임?"
"응. 아까 보니까 거짓말 탐지기도있더라고."
"그래? 그거 괜찮다."
하지만 거기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김래빈이 끼어들었다.
"흠, 모처럼 놀면서 낮 시간을 보냈으니, 저녁에는 약간 생산성 있는 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불길한 키워드에 멤버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산성…?"
"래빈아 설마 우리 뭐 만들자는…그런 이야기야?"
"예!"
"…."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의외로 이세진이 툭 말을 던졌다.
"…뭘 만들자는 건데."
"아, 신곡입니다."
"-!? 뭐?"
"시, 신곡?"
"예. 사실 얼마 전에 작업한 곡이있습니다! 혹시 몰라서 휴대용 녹음 장비도 챙겨왔고요."
김래빈이 신나서 자신의 가방을 가져왔다.
그 순간, 모두가 극구 나서서 김래빈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어허, 래빈아! 이거 잘못하면 스포일러지∼"
"그래. 그리고 이런 건 이번 활동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그렇습니까?"
김래빈은 당황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렸다. 이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다.
'…저놈이 사회성은 없지만, 바보는 아닌데.'
한번 아귀를 맞춰볼까.
"신곡이라는 게 다음 앨범 타이틀 목표는 아니지."
"아, 네!"
김래빈은 그제야 감을 잡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제가 만든 건 팬송용입니다!"
"…아!"
가불기가 등장했다.
여기서 '그건 좀' 같은 반응이 나오면 마치 팬들을 위한 곡을 만들기싫다는 식의 교묘한 편집에 당할 수있다.
물론 이제는 제작진의 편집이 아니다. 어그로의 편집을 의미한다.
[오늘 테스타 리얼리티에서 말 나오는 장면]
[괜찮다 VS 좀 그렇다 갈리는 테스타 발언]
…이런 식으로 커뮤니티에서 인기글을 점령할 게 벌써 눈에 선했다.
다행히 당장 큰세진이 입을 열었다.
"팬송 너무 좋은데? 꼭 만들어보고 싶었어!"
지원 사격하자.
"재밌겠어. 지금 타이밍도 맞고."
"…괜찮겠지."
"조, 좋을 것 같아."
순식간에 일어난 태세 전환에 김래빈은 그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절대 노린 건 아니겠다만, 내가 본중 유일하게 김래빈이 정치로 승리하는 장면이었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 테스타의 팬들은 활동기에 쏟아진 컨텐츠를 복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위튜브에 뮤직비디오 해석 뜬 것중에 이게 제일 나은 듯 (링크)
-클래식 뮤지션들의 마법소년 리액션 영상 떴다!
-혹시 빨간 야잠 입고 한 하이파이브 언제 음방인지 알려주실 분?ㅠㅠ
└지난 주 뮤직밤이요!
└헉 감사합니다ㅠㅠ
뮤직가요에서 VTIC을 이기고 1위를 한 뒤, VTIC 팬들과 어떻게든 싸움을 붙여보려는 어그로가 날뛰었으나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VTIC이 국내 활동을 끝낸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쪽 팬덤에서도 적당히 넘어갈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교적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던 테스타의 팬들은, SNS 알림을 하나 받았다.
테스타의 계정이었다.
'누구지?'
멤버들이 제법 자주 찾아오는 탓에, 팬들은 큰 긴장감 없이 그저 즐겁게 알림을 클릭했다.
[제 마음을 받아주시죠 (위튜브 링크)]
'마음을 받아?'
'…?'
'연애… 연애 관련 아니지?'
팬들은 걱정 반 혼란 반으로 링크를 클릭했다.
그리고 동물 잠옷을 입은 7명의 썸네일을 확인했다.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89화]
갑작스럽게 뜬 테스타의 동영상 아래로 제목이 보였다.
[테스타(TeSTAR) - 마법은 너]
특별히 설명문은 붙지 않은, 공식적인 냄새가 덜 나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 잠옷을 입고서 있는 테스타의 모습을 보니, 왠지 비하인드 캠 같은 귀엽고 소소한 떡밥 같았다.
'좋다∼'
팬들은 적당히 기쁜 마음으로 재생을 클릭했다.
그러자 낯선 반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전자 피아노의 상쾌하고 부드러운 미디엄 템포였다.
그리고 실내공간에 적당히 널브러져 있던 테스타가 주섬주섬 일어나서 대형을 갖췄다.
'…?'
신곡? 커버?
당황한 팬들의 앞에 보컬이 울렸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마치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
-너라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낯설지만 어쩐지 좋을 거야
과하지 않은 좋은 멜로디.
그리고 동물 잠옷을 입은 테스타가 허공으로 한번 뛰어오른 뒤, 춤을 시작했다.
머리 위로 동물 귀 모양 천이 퍼덕 거렸다.
"…!"
실시간으로 팬들의 외침이 SNS를 채우기 시작했다.
-리얼리티 비하인드인줄 알았으나 신곡입니다 당장 클릭해
-빠빨리 애들 계정에 있는 동영상 보세요 미쳤어
-ㅠㅠㅠㅠㅠ귀여워
춤은 기본기를 바탕으로 귀여움을 가미한 정도의 난이도였다.
하지만 동물 잠옷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카메라에 자유롭게 여러 제스처나 동작을 하는 덕에 어수룩해 보이지 않았다.
-현실은 꿈처럼 빛나고
꿈에선 멋진 내일을 꿈꿔
내일 너를 만나면
반짝이는 꿈들만 말할게
눈표범 잠옷을 입은 차유진이 꼬리를 한 손으로 붕붕 흔들며 나와서 벌스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가사에 맞춰 꽃가루를 뿌렸다.
사슴 잠옷을 입은 선아현은 그 꽃가루 사이로 등장했다.
-잠기지 않는 내 꿈들은
현실을 박차 달리게 만들어
Reality is breathing∼ Yeh
YES breathing (breathing!)
Hoo-ha! Hoo-ha!
주변의 호응 때문에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갑자기 튀어나온 힙합편곡 탓인지, 선아현에게서 평소답지 않게 덩실덩실 율동 같은 동작이나왔다.
그리고 이때쯤 팬들은 깨달았다.
'마법소년 가사잖아!'
'마법소년' 가사에서 따온 단어들이 쾌활하게 재조립되어 벅찬 하루의 느낌을 구성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 생각했다.
'김래빈이네.'
'이거 김래빈이다.'
달토끼 경연의 임펙트였다.
그사이, 노래는 프리코러스로 들어갔다.
-숨 가쁘게 뛰어갈 게 (Umm∼)
날 보면 웃어줄래?
하얀 아기백구 잠옷을 입은 박문대가 중앙으로 나오더니,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
그리고 마법소년 엔딩 안무의 센터인 큰세진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개그였으나, 열심히는 했다.
팬들은 포복절도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간헐적 문대가또 상태입니다
-큰세진 뒤에서 쓰러질려고 하는데욬ㅋㅋㅋ
-문대 파트 누가 빨리 짤로 만들어줘 이건 주기적으로 봐야 됨
파트는 멤버들이 박문대를 도로 일으켜 세워서 소요사태를 진압하는것으로 끝났다.
그 와중에 가사는 감미로웠다.
-변하지 않는 건 없어도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마법은
-Maybe it's YOU∼
마지막 프리코러스 한 마디를 떼창한 테스타는 후렴에선 멋지게 안무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까만 아기곰 탈을 쓴 큰세진이 센터였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마치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
(Ooh- yeah!)
-너라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낯설지만 어쩐지 좋을 거야
기분 좋은 가사와 큼직한 큰세진의 움직임 덕에 후렴은 속 시원하게 쭉쭉 뻗어 멋진 안무 영상 같았다.
그러나 다음으로 핑크색 토끼 잠옷을 입은 김래빈이 나왔다.
언밸런스의 극치였다.
-ㅋㅋㅋㅋㅋ래빈이 핑크
-중세토끼에게 머선일이고
-하지만 너무 귀엽잖아요ㅠㅠ 래빈이 하고 싶은 거 다 해ㅜㅜ 근데 허락은 맡고 하자
당근 펜을 마이크처럼 들고 김래빈이 싱잉랩을 흥얼거 렸다.
-Life is strange
가볍게 발 박차고 올라
하늘 위를 걸어보나
비가 와도 난 몰라
내 삶은
-bright, 쏟아지는 light
All right 네가 맞아
오늘 난 빛나잖아
무슨 락페스티벌처럼 동물 귀를 퍼덕이며 헤드뱅잉을 하는 테스타의 모습이 압권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너희가 행복하다니 나도 좋다
영상은 계속 유머 한 통에 멋짐한 스푼을 넣은 구성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마지막은 약간 쑥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진지하게 끝났다.
-어제 너와의 만남이
오늘의 빛나는 꿈이 되고
내일의 마법이 된 거야
그래, 마법은 바로 너야.
영상은 테스타가 다 같이 손을 잡고 꾸벅 인사하는 것으로 끝났다.
-ㅠㅠㅠ
-아니 갑자기 이런 영상을 예고도 없이 올려줘? 이 효자 놈들
-갑자기 삶의 질이 수직상승함
-동물 잠옷 기안자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제발 한우 먹여줘
팬들은 갑자기 떨어진 신곡과 영상에 소화불량에라도 걸릴 듯이 즐거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근데 이거 신곡인가?
-신곡 같음 검색해도 안 나옴
-헐 신곡을 이런 식으로 공개해도 괜찮나요?
-음싸에도 안 올라왔는데;;; 설마소속사 실수로 올린 건 아니겠죠?
└미친
일 못하는 소속사의 전적을 몇 번 겪어본 팬들은 갑자기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테스타의 계정에 새 글이 올라왔다.
[데뷔부터 1 위까지 많은 것들을 선물해 주신 러뷰어에게 테스타가 올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사랑합니다
'마법은 너'
Soundcloudy : (링크)]
통으로 무료 공개된 팬송에 팬들이 기함했다.
-팬송이었다고?!
-설마 선물이라고 사클에 무료로푼 거야?
-아니 얘들아 너무 고마운데 음원은 그냥 음싸에 풀어주지…ㅠㅠㅠ 연말시상 성적 생각하면 이 타이밍에 이렇게 보내기 아까운데ㅠㅠ
└심지어 곡도 너무 좋아서 더 아까워요
-언제 이런 걸 또 만들었냐 너희 잘 시간도 없어보이던데… 그래도 고맙다 얘들아 진짜 귀엽네
팬들은 테스타의 뜬금없는 선물에 기뻐하면서도 '저거 완전 이지리스닝 곡인데', '음원 사이트에 풀렸으면 쭉 올라갔을 건데' 하면서 괴로워 했다.
물론 감동에 젖은 사람들이 더 많긴 했다.
-테스타가 마법이다 밈을 가수가 역으로 돌려주는 이 상황… 너무 좋다?
-인간적으로 이것만 올리고 끝내진 않겠지…? 우리 연말에 콘서트할때… 팬송도 안무 더 넣어서 신나게 떼창하는 거지…? 상상만 해도 기분최고
-어떻게 1위 곡 가사를 따와서 팬송 만들 생각을 했어ㅠㅠ 역시 김래빗 천재야 1위 곡 편곡자 답지
└김래빈 아닐 수도 있잖아요 작사에 테스타 전부 다 뜨던데요
└ㅋㅋㅋㅋ누구 빠인지 투명하니까 제 계정에서 꺼지세요ㅅㄱ
-다음 앨범에 수록곡으로 나오면꼭 사야지… 공식 앨범아트 가사 들어 있는 버전 소취
어쨌든 팬들 대부분은 행복해했고, 그걸 모니터링하는 테스타도 행복했다.
"여행까지 와서 일한 보람이 있네."
"그러게요. 급하게 찍었는데 잘 나왔네요∼"
"잠옷이 좋아요."
아직도 눈표범 잠옷을 입고 있는 차유진이 싱글벙글 웃었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반. 익스트림여행도 슬슬 마지막 컨텐츠를 뽑을 시간이었다.
'…솔직히 제작진에서 그럴 줄은 몰랐는데.'
사실 지난 저녁부터 오늘 오전 시간은 전부 팬송 녹음과 영상 제작에썼다.
팬송 제작 컨텐츠에 꽂힌 제작진들이 시간을 쭉 빼줬기 때문이다.
'덕분에 초안만 잡고 빠지려던 걸 대충 완성까지 시켜버렸지.'
그래도 발표는 더 늦게 할 생각이었는데, 제작진들이 회사에 설득까지 해가며 지금 풀자고 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리얼리티 홍보용으로 쓸모양이었다.
아마 다음 주 예고로 '그 팬송의 제작기' 같은 문구가 뜰 것이다. 그리고 실제 제작기는 다다음 주에나 본격적으로 나오는… 뭐 그런 구성이겠지.
어쨌든 반응이 좋아서 다들 표정이밝았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넵."
안무 연습하느라 아침을 건너뛰었다. 배가 고프긴 했다.
다행히 제작진들이 양심은 있는지 근처 맛집에 데려가 줬다. 오리주물럭집이었는데, 거의 인당 3인분씩은 먹은 것 같다.
"잘 먹었습니다∼"
"마, 맛있었어요."
"문대 씨, 혹시 자세한 감상평 없나요?"
"단맛과 매운맛의 균형이 좋고 육질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밥맛이 좋아서 계속 들어갔습니다. 됐냐?"
" 오∼"
그리고 다음 활동은… 계곡 래프팅이 었다.
"거기 넘어진다! 조심!"
"으아아!"
철퍽! 얼굴로 계곡물이 물폭탄처럼 튀었다. 그 와중에도 노를 저어야했다.
"자자, 여러분! 한 명이 실수하면 다 같이 물에 빠지는 겁니다! 서로 챙겨주면서 갑니다!"
"예… 옙!"
흔들리는 보트 위에서 물 맞으며 힘을 쓰는 것은… 노동에 가까웠다.
"야호!"
하지만 멤버 몇 명은 상당히 신나보였다. 특히 차유진과 류청우.
대체 무슨 재미를 느끼는 건진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알겠다.
'…먹은 만큼 칼로리를 쓰라는 건가.'
어쩐지 회사가 귀띔했을 것 같은구성이다.
나는 오리주물럭이 원흉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로, 묵묵히 노를 저었다.
"예∼ 팔 그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공장에서 알바할 때가 떠오르는 경험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재밌어요!"
래프팅까지 끝내고, 근처 시설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으니 오후가 훌쩍지나갔다. 슬슬 촬영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계속 근처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카메라가 세팅되었다.
"와, 진짜… 알차게 시간 쓰고갑니다."
"정말 저희끼리 여행 온 것 같아서 재밌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 반, 방송용 반으로 멤버들이 웃으며 엔딩멘트를 주고받았다.
"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여, 여행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쪽은 완전 진심인 것 같다.
"그러게, 우리끼리 또 여행 가보자."
"찬성∼"
"국외로도 가보면 좋겠습니다."
…잠깐, 다른 놈들도 그냥 진심이었나?
"그럼 저희는 또 멋진 모습으로, 팬분들을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테스타의 같이 살기 TEST!"
정해진 엔딩 멘트를 마친 멤버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물론 나도 그랬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만나요!"
촬영은 그렇게 끝났다.
"컷! 수고했습니다∼"
"예에!"
"감사합니다!"
일단 스케줄 하나를 또 무사히 마친 덕분에 다들 얼굴이 밝았다.
아마 이번 촬영이 제법 재밌었던 것도 맞는 모양이다.
"여기 서울하고도 가깝고 좋다. 다음에 가족들하고 와도 좋겠어."
"괜찮긴 했지."
류청우와 이세진이 대화를 나누는것을 들으며 몸에 설치된 마이크를 반납하는데, 옆에서 갑자기 매니저가 뛰어왔다.
"…?"
"래빈아, 잠깐…."
매니저는 김래빈을 데리고 근처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물놀이하느라 빼둔 김래빈의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뭐라 뭐라작게 말을 전달했다.
그 순간, 김래빈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0화]
김래빈 안색이 저렇게까지 변하는건 처음 봤다.
각자 흩어져서 자기 볼일을 보던 멤버들 중 몇몇도 바로 알아차릴 정도 였으니까.
"래빈아, 무슨 일 있어? 형, 무슨일이에요?"
류청우가 다가가서 조용히 묻자, 매니저가 류청우까지 데리고 어디론가 빠졌다.
"…."
복잡한 개인 사정이 생기면, 누가 참견하는 게 도리어 꺼려질 확률이 높았다.
류청우야 리더 감투가 있어서 괜찮다만 다른 멤버들의 참견까지 김래빈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일단 상황을 더 살펴본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매니저는 류청우와 돌아왔다.
김래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김래빈은요?"
"잠시만. 촬영 정리되면 이야기하자."
매니저는 주변 스탭들을 신경 쓰는 듯했다. 멤버들은 상황을 파악했는지, 입을 다물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제작진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차에 타고서야 전말을 들었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고요?"
"그래. 그래서 바로 병원으로 갔어."
"…."
김래빈이 조부모와 사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들의 안색이 변했다.
나는 혀를 찼다. …마음이 안 좋았다.
'…그래도 보내는 줬군.'
그나마 활동이 마무리될 때, 하루 스케줄이 끝날쯤에 연락이 와서 군말 없이 바로 보내준 것 같다. 쓸데없는 소리 안 하고.
…잠깐.
나쁜 소식이 이렇게 타이밍 좋게…일어날 수 있나.
"형, 그거 연락 언제 왔어요."
"뭐, 뭐?"
"김래빈 할머님 쓰러지신 거, 연락 언제였어요."
"…."
매니저는 약간 침통한 얼굴이었다.
"…너희 계곡 래프팅 끝날 때쯤 왔더라, 폰을 꺼서 정리해 두는 바람에… 촬영 끝날 때야 확인했다."
"…!"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럼… 이미 래빈이가 가도."
"느, 늦었을 수도 있…."
"그렇진 않을 거야! 계속 연락이 왔었어."
매니저는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나마 차 안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나는 매니저를 살폈다.
'설마 미리 확인했는데 말 안 했나.'
그럴 수도 있었다.
'곧 촬영이 끝나니 컷은 마저 뽑고 보내보겠다고 수작 부릴 수 있지.'
어차피 김래빈이 가든 안 가든 할머님이 갑자기 쾌차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합리화하면….
…아니다. 너무 나갔다. 매니저든 회사든, 그 정도로 윤리적으로 막나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랬으면 굳이 저렇게 솔직히 말을 해주지 않았겠지.
나는 한숨을 참으며 몸을 뒤로 기댔다.
"…할머니 어떡해요."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유진이 울적한 얼굴로 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직접 뵌 적이 있나 보군.'
류청우가 힘겹게 입을 뗐다.
"괜찮을 거야. 좀 있다가… 래빈이한테 연락해 보자."
"네…."
차 안의 분위기가 축 처졌다. 큰세진까지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흠…."
이세진은 이 분위기가 답답한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우중충한 분위기에서, 차가달려서 숙소로 향했다.
지난 1 박 2일간의 미치도록 활기찬 일정이 거짓말 같은 엔딩이었다.
김래빈이 숙소로 돌아온 것은 자정을 넘은 새벽이었다.
"…!"
"왔냐."
몇몇 멤버들이 아직 안 자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내일 아침에 화보 스케줄 있는 선아현, 이세진 둘은 매니저의 강권에 의해 일단 들어갔다.
'김래빈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게 현명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았다. 지금이새벽 3시 반이었다.
"택시 탔어?"
"…예."
김래빈은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특별히 혼 나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큰일은 아니었나 보군.'
나는 입을 열었다.
"할머님은 괜찮으시대?"
"네…. 금방 병원에 가서, 후유증 거의 없으실 거라고."
알고 보니, 할머님은 뇌출혈로 쓰러지신 모양이다. 다행히 김래빈의 누나가 빠르게 발견해서 골든 타임내로 처치가 끝났다고.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래빈아."
"마음고생 했겠어. 힘들었지?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김래빈은 다시 울컥했는지, 눈을 세차게 비비며 거실로 들어왔다. 조촐하게 환영 겸 위로가 이어졌다.
"저녁은 먹었어?"
"…아뇨."
"어휴."
"안 그래도 고생했을 텐데, 뭐라도 먹고 자는 게 낫겠다."
맞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한숨을 쉬고 자원했다. 이 라인업이면 내가 하는 게 제일 빨리 끝난다.
"…앉아 봐. 뭐라도 데워줄 테니까."
"괘, 괜찮습니다!"
"새벽이다. 목소리 낮추고."
"예…."
상황이 괜찮은 걸 확인한 멤버들은 한결 편한 얼굴로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그럼 래빈아, 푹 쉬고. 문대는 수고∼"
"예…."
"밥 다 먹고 들어가."
"고생했어."
마지막으로 차유진이 김래빈의 어깨를 두드리고 들어갔다.
내일 오후부터 또 단체 스케줄이 있었다.
일단 큰일로 번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굳이 밥 먹는 애 앞에 단체로 앉아서 보고 있는 게 더 부담스러울 일이었다.
'나도 얼른 끝내고 들어가야겠군.'
나는 적당히 즉석밥과 찌개를 데워서 내놨다. 혹시 몰라서 저녁에 하나 더 시켜둔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자."
"감사합니다…."
나는 김래빈이 먹는 것을 확인한 후,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깨달았다.
'…이 상황에서 새벽에 혼자 밥 먹는 것도 그림 상 이상하지 않나.'
서럽기 딱 좋았다. 그러니 한둘은 남는 게 맞았다.
그리고 내가 그걸 지원한 꼴이다.
'…그래도 이게 맞지.'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김래빈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반도 못 먹고 수저를 내려뒀다.
"…맛없냐?"
"아뇨…."
김래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할머니, 괜찮으신 건 확인했는데…, 그래도… 기분이 이상합니다."
"…왜."
"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겼는데, 제가 또 늦게 보면, 그리고…그때는 진짜… 진짜면."
"…음"
"혹시 늦게 보지 않았다고 해도, 제가 공연 중에, 촬영 중에… 중단하고 가는 게 옳은 건지. 그런데 그러면… 직업적 소양이 부족한 것 같고."
"…."
"계속…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 걱정이 들 만했다.
그리고 일에 삶이 갈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법한 걱정이기도 했다.
바쁘게 일하다가, 어느 날 아주 치명적인… 연락이 왔을 때,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면 대체 어떡하면 좋겠냐는.
문제는 김래빈이 아직 성인도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법적으로 술도 못 마시는 나이에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직업환경이 정상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돈 버니까 프로지 않냐고 하면 할말은 없다만.'
저런 연락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또 모르는 상황이라서 말이다.
"…."
참 어렵군. 이 새벽에 이런 말을하게 될 줄이야.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연락을 받았을 때는… 학원이었어."
"…!"
"수업 중이라 폰을 무음으로 바꿔둬서…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봤지. 시험이 얼마 안 남았었거든."
"…."
부재중이 24건 떠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긴 한다. 학원 안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 가고 그놈의 가족행사, 따라갔으면 뭐가 바뀌었을까 하는… 별 의미 없는 생각 말이다.
"그때 내가 너보단 훨씬 덜 바쁘고, 그냥 학생이었어. 그래서 이런…타이밍의 문제는, 사실 운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아."
"게다가 네가 평생 이런 스케줄에서 살 건 아니잖아. 경력이 더 붙으면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한 게 스케줄이다."
나는 목 뒤를 쓸어내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걱정되면, 일단 가족 연락오면 무조건 확인해달라고 매니저한테 말해둬. 그리고 일하다 중간에 가도 아무 문제 없어."
"…!"
"다들 그러고 살아. 욕하는 놈이 사이코패스니까 고소하고."
"…."
한참을 대답이 없던 김래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좀 괜찮아졌냐?"
"…네!"
김래빈은 약간 더 힘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수저를 도로 들어 올렸다. …기운을 좀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속도 보니 5분 내로 들어갈 수 있겠군.'
나는 좀 안심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음, 들어가면 해가 뜰 것 같은데.
'낮밤이 또 뒤바뀌는군…'
생체리듬 개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휴가받으면 우선 저녁 9시에 취침해서 다음 날 9시에 깨는 패턴부터 잡아야겠다.
"저, 형."
"왜."
"뭐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해봐."
김래빈은 다 먹은 상차림을 정리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억상실증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계신 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
"…갑자기 자다가 기억났다."
"아, 알겠습니다."
정말 한결같은 놈이었다.
테스타의 리얼리티 여행 편은 소식 기사가 나오자마자 팬들의 환성을불러일으켰다.
-야호! 여행!
-아 테스타 리얼리티 초반에는 꿀잼이었는데 요새 꿀노잼 돼서 클립만 봤더니 드디어 제작진이 정신을 차렸다
-계곡 목격담 있던데, 막 시골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느낌으로 힐링 컨텐츠려나ㅠㅠ 기대된다
그리고 예고편이 뜨자, 이 반응은 두 배로 불어났다.
-ㅋㅋㅋㅋㅋㅋㅋ미친 익스트림!
-스카이다이빙에 귀신의 집에 물놀이야? 와 진짜 알짜만 모아뒀넼ㅋㅋㅋㅋㅋ
-문대와 귀신의 집? 이건 되는 주식이다 모두 부어!
-헐… 팬송도 이때 만들었나봐ㅠㅠ 애들 만드는 거 한 컷만 나왔는데도너무 꽁냥꽁냥 귀엽다
-역시 래빈이 주도였네 다 같이 했다고 래빈이 후려치려던 새끼들죽어
-밥도 잘 먹은 것 같아서 안심함
└ㅋㅋㅋㅋ이거 완전 내 반응ㅋㅋㅋ
└ㄹㅇ혹시 밥 잘 안 줬을까 봐 걱정했는데 통돼지가 나오더랔ㅋㅋㅋ
팬들은 며칠 안 남은 리얼리티 여행 첫 에피소드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예능 떡밥은 없나, 아쉬운 마음으로 카더라를 긁어모았다.
그리고 웬 인증 없는 익명 글 하나를 보기도 했다.
:일단 친해지세요 이번 게스트 ㅂㅇㅌ ㅊㄹ랑 ㅌㅅㅌ ㅂㅁㄷ임. ㅊㄹ 섭외했는데 그쪽에서 직접 지목했어. 다들 시청률 잘 나올 것 같다고 수군거리는 중.
VTIC 청려가 박문대와 예능을 찍는다는 말이었다.
이 허무맹랑한 주장 밑에는 당연히 비웃는 반응이 주르륵 달렸다.
-? 무슨 개소리임
-잡덕 망상 잘 봤습니다
-이런 새끼가 청려랑 박문대 인사한 거 보고 절친 카더라 뚝딱 만들어내는 거지?
-캬 요새는 이런 하급 어그로에도 반응이 달리냐 세상 많이 좋아짐
팬들도 당연히 믿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며칠 뒤.
정식으로 기사가 떴다.
[일단 친해지세요, 다음 게스트는 VTIC과 테스타? (단독)]
: 지난 21일 MBS 관계자에 따르면 일단 친해지세요 는 최근 VTIC의 청려와 테스타의 박문대를 게스트로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고 밝혔다.…
-?
-뭐야 이거
-진짜야?
진짜였다.
얼마 뒤, 일단 친해지세요 에서 제작한 예고 영상이 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1화]
일단 친해지세요 의 예고 영상은 지난 게스트들을 주르륵 보여주는것으로 시작했다.
기라성 같은 유명인들의 출연을 보여준 뒤, 그 분위기의 정점을 찍는 새 게스트를 보여준 것이다.
[이번 게스트는….]
[VTIC!]
자막 뒤로 VTIC의 수많은 기록과 활동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중 한 멤버가 클로즈업되었다. 국제 시상식에서 수상하며 인사하는 유명한 장면이었다.
[VTIC의 리더]
[청려]
[그가 친해지고 싶은 상대는?]
직후, 새로운 화면이 나왔다.
[202X년 7월 어느 날]
[청려 : 안녕하세요. VTIC의 청려입니다.]
사복 차림의 청려가 나오는, 사전미팅 영상이었다.
[Q : 친해지고 싶은 사람의 선정기준은?]
[청려 : 아무래도… 동료 가수분? (웃음)]
[청려 : 사실 그동안 활동에 집중하느라, 동료 가수분들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어서요.]
'워커홀릭의 비애'라는 작은 덧붙임 자막이 떴다가 사라졌다.
[Q : 딱 한 분만 들자면?]
[청려 : 어렵네요. (웃음)]
[청려 : 사실 최근에 눈여겨본 분이 있긴 한데.]
[청려 : 저랑 좀 비슷하신 것 같아요.]
다음에 나온 청려의 목소리는 '삐-'소리로 처리되었다.
입 모양도 가려진 탓에 거기서는 아무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이 청려가 누굴 지목한 것인지 짐작했다.
아주사 의 '바로 나' 무대가 부분만 클로즈업되어서 흐릿한 화질로 송출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기사로 다 유출된 거, 대놓고 힌트나 주겠다는 뜻이다.
[청려가 지목한 '비슷한 동료 가수'는 과연 누구?]
[다음 주 일단 친해지세요 에서 밝혀집니다!]
그리고 댓글은 이미 스포로 점령당했다.
-박문대네
-누가 봐도 박문댄데요ㅋㅋㅋ
-우와 청려님 예능 거의 안 나오던데 드디어ㅠㅠ 후배님과의 케미 기대합니다!
-헐 존잼이겠다
베스트 댓글은 거의 이런 기조였다.
최신순으로 정렬하거나 SNS에 들어가면 또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있었지만, 어쨌든 일반 시청자들의 기대는 상당했다.
대중성까지 확보한 남자 아이돌은 드물었는데, 그중에서도 단독 예능출연이 없던 둘이 공중파 예능에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쪽은 첫 공중파 예능이라, 팬들은 완전히 들떴다.
-헉 문댕댕 단독 예능ㅠㅠ
-이 프로 진짜 재밌음 그리고 문대가 잘할 것 같은 타입의 프로임 기대된다
-드디어 소취 성공… 존버 1승 추가… 감개무량…
-(이미 본방 사수 중인 영혼입니다 지나가세요)
VTIC과 활동 기간이 겹치며 생겼던 갈등의 여운이나, 테스타 내부 개인 팬들의 불만 어린 목소리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대세를 잡지는 못했다. 테스타 멤버의 개인 팬들도 일단 누구든 공중파 예능을 뚫어줬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건 악성 개인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속사가 임의로 꽂은 것도 아니고 지목당한 거니까 욕은 안 박는데… 애초에 곰머가 사연팔이로 1위해서 득보니 찝찝하긴 함ㅎ
-문대야 말아먹지만 말아라 우리 애도 나와야하니까
-곰머 예능 X도 관심 없으니 뮤트하겠습니다 가뜩이나 그룹 계정만있어서 계속 봐야 됨 빡침
-잉? 박문대만 공중파 예능 나옴? 우리 애도 개인 스케줄 더 잡아줘라티원 놈들아
부정적인 여론은 수면 아래에서 이정도로만 말이 오간 뒤,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 빨리 다음 주 금요일 됐으면좋겠다ㅠㅠ
전반적으로 이 의견이 연예 관련 커뮤니티의 여론이었다.
그리고 이 설렘의 당사자는 지금, 불신에 가득 찬 상태로 촬영장에 들어 섰다.
'이 새끼 수상한데.'
갑자기 상의도 없이 예능 게스트로 박문대를 지목했다고?
심지어 꼽 주는 톡은 날리면서 이 예능 관련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개인적으로 귀띔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엿 먹이려는 것 같다.'
하지만 딱 찍어서 들어온 공중파 예능, 그것도 시청률이 잘 나오는 금요일 밤 예능 섭외를 날리는 걸 회사가 오케이 할 리 없었다.
덕분에 현재, 스탭에게 인사 후 촬영지로 접근 중이었다.
"…."
눈앞에 거대한 목재 건축물이 보였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군.'
하필 목재냐. 나는 한숨을 참으며 문을 두드렸다.
"안에 누구 계시나요?"
쿵쿵쿵.
제법 강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자니, 곧 살짝 문이 열렸다.
"추우실 텐데 얼른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한겨울 감성을 넣은 이 X 같은 설정 때문에 여름에 패딩까지 껴입고있으려니 쪄 죽을 뻔했다.
'분명 초대하는 쪽에서 정한다고 했으니, 이 새끼가 정했겠지.'
자기는 처음부터 실내에 있으니까상관없다 이건가.
나는 목까지 치밀어 오른 욕을 삼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전형적인 산장의 모습이었다. 펜션 수준은 아니고, 등산객들이 오가며 잠깐 묵을 만한 간이 시설의 느낌이 확 났다.
'…대사 칠 타이밍인가.'
나는 짐을 벗어서 구석에 두며 중얼 거렸다.
"갑자기 눈보라가 쳐서 놀랐는데, 산장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날씨 상황 보고 얼른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렇다. 현재 기본 설정값이 '눈 내린 산장에서 조난 직전인 상태'다.
이 얼토당토 않은 설정이 들어간 이유는 뻔하다.
이 프로그램 특색이다.
일단 친해지세요 는 한 유명인을 섭외해서 그 사람이 지목한 유명인과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이런 힐링 컨텐츠야 워낙흔하니, 적당히 신박한 요소를 하나 집어 넣어뒀다.
바로 극한 상황이다.
두 사람은 모종의 극한 상황에서 몸의 안위를 챙기기 위해 고립됐다는 설정이 무조건 기본값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본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일종의 콩트다. 개그와 몰입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정도.
참고로 파일럿 때 대히트한 상황은 좀비 아포칼립스 사태가 터진 아파트였다.
영린이 말랑달콤 출신 배우를 지목해서 둘이 출연했다는데, 클립 몇개로 살펴봤을 때는 꽤 흥미로웠다.
'내가 출연하는 게 문제지.'
그것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초동 180만 장 아이돌과 함께 말이다.
'꼬투리만 주지 말자.'
무조건 성질 더러운 선임 다루듯이 대해서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나가는 게 목표다.
"이런 날씨에 산행은 드문 일인데, 이렇게 만나다니 신기하네요. 아, 커피 드실래요?"
청려는 웃으며 보온병을 들어 올렸다. 다른 손에는 산장에서 찾았다는설정인지, 낡고 촌스러운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두 손으로 청려가 내미는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안에서 아메리카노가 끓고 있었다.
더워죽겠는데 긴 팔에 펄펄 끓는 아메리카노라….
"…."
입만 대는 시늉을 하고 내려놨다.
다행히 안쪽은 냉방이 팽팽 돌아가서 슬슬 겨울 옷으로도 견딜 만했다.
'여기서 내가 권유할 차례였지.'
나는 입을 열었다.
"커피도 얻어 마셨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녁은 제가 대접할까요? 보존식을 좀 넉넉히 챙겨왔습니다."
"좋죠. 음… 눈보라가 아직 거세네요.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든든히 먹어둬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초록 칸막이로 막아둔 창문 유리창을 슬쩍 내다보는 척하자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무슨 일이긴.'
돈 받고 하는 일이다. 쓸데없는 생각 말자.
나는 구석에 던져둔 가방에 다가가 보존식을 꺼냈다.
내가 챙긴 건 아니고 제작진이 미리 챙겨준 건데….
상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간편 무뼈닭발 덮밥]
"…."
다른 걸 꺼내자. 이제 닭발은… 뇌절이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식사 시간은 그냥 왜 등산을 하게 된 건지 가벼운 콩트나 하면서 지나갔다.
"정리는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이런 건 같이 해야죠."
누굴 보내 버리려고 후배를 놀게 만드냐.
그렇게 남은 비닐과 용기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콰과과광!'
이 소리는 진짜로 넣어주는군. 솔직히 놀랐다.
"…!"
"천둥인가?"
청려가 눈을 찌푸리더니, 산장 문앞으로 가서 살짝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그 소리가 산사태였나 봅니다. 밖에 눈이 쌓인 것 같네요."
"일단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나는 구형 피처폰을 들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눈이 너무 쌓여서 오늘은 못 온다고 들은 사람' 시늉을 했다.
"이런. 그럼 일단 오늘은 이 산장에서 버텨봅시다."
"넵.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이걸로 고지받은 기본 설정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한두 가지 콩트용 인물 설정을 염두에 두고 자유롭게 상황을 꾸려가면 된다…는 게 제작진의 사전 설명이었다.
그래서 난로를 찾고 창문 단속하는 웃긴 시늉을 좀 하고, 다시 거실에 앉았다.
"난로가 잘 작동이 안 되네요.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오늘은 자지 않고 버텨야겠습니다."
방송 그림을 위해 밤새 노가리나까라는 제작진의 뜻이다.
'…뭘 해야 하나.'
이 프로그램 구성상 슬슬 '낯선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를 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이건 하급자가 조언을 구하는 식으로 먼저 시작해야 그림에 적합하려나.'
나는 고민하다가, 적당히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가 오늘 등산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는데,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됐네요. 하하. 음, 사실 제가 가수거든요."
"예?"
청려는 쑥스러운 것처럼,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VTIC이라는 아이돌 그룹인데, 혹시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네요."
이 가증스러운 설정 좀 봐라.
나는 '당연히 들어봤다, 팬이다.' 같은 반응 좀 해주고 내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최근에 데뷔했습니다."
"정말요? 후배님이셨군요. 이런 우연이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현실성이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없는 상황 설정이지.
슬슬 진지한 대화로 들어가려나 싶었는데, 턱을 문지르던 청려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음… 마침 저희가 직종도 같고, 자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네요."
"예?"
"들어보실래요?"
여기서 싫다고 할 놈이 있겠냐?
"예. 경청하겠습니다."
"하하, 경청까지 할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잡담인데요."
청려가 가볍게 목재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혹시 아이돌 괴담 아세요? 저도 최근에 들은 건데."
"…괴담이요? 아이돌 괴담?"
" 예."
…무슨 콩트 욕심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주자.
"무슨 내용입니까?"
"음, 어떤 내용이냐면…."
청려가 빙그레 웃었다.
"한 아이돌이 있었는데, 어느 날눈을 뜨니 과거로 돌아간 거예요."
"…."
"그 아이돌은 놀라면서도, 이번에야말로 논란 없이 성공한 아이돌이 돼보자고 열심히 도전하는데…. 이게 웬걸. 자꾸 사고로 죽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거죠!"
"…."
"그래서 과거에 갇힌 아이돌은 어느새 귀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녹음실을 배회하며, 성공할 것 같은 아이돌이 녹음을 하면 끼어들어서 같이 녹음을 한대요. '나도 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
청려가 팔짱을 꼈다.
"어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