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
나는 상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녹음할 때마다 생각날 것 같은데요."
"하하!"
청려가 손을 흔들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사실, 그냥 제가 지어냈거든요. 녹음실 괴담을 좀 변형해 본 건데."
"…음, 그렇군요."
"근데 녹음실 괴담은 진짠 거 아시죠?"
"…!"
청려는 몇 번 웃으며 개소리를 늘어놓더니, 씻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후"
넘겼다.
나는 질린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노력했다.
'저거 분명 아는 놈이다.'
이 빌어먹을 상태창이나 회귀에 관해서 아는 새끼가 괴담 연막으로 날 떠본 것이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확신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내 상태를 확인한 건 아니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배경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정황만 보고 추리했다는건가.
…아니, 이것도 애매하다.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군.'
나는 머리를 정리하는 척 이마에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정했다.
곧 청려가 돌아왔다.
"충전식 전기포트 가져오길 잘했네요. 찬물에 적당히 섞어서 쓰세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청려가 내미는 원통형 기기를 받았다.
보온병이 아니라 전기포트였다.
'어쩐지 아메리카노가 끓고 있더라니.'
쓸데없는 디테일까지 챙기느라 찬물만 나오게 만든 제작진에게 감탄하며, 나는 할 일을 했다.
'상태창.'
일단, 저놈 상태창부터 확인한다.
지금까지의 경향성으로 볼 때, 특성과 상태이상에는 보통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추측할 만한 힌트가 있었다.
'확인해서 손해 볼 건 없지.'
하지만 팝업이 뜨는 순간.
기대도 안 한 힌트가 들이닥쳤다.
[이름: 청려 (신재현)]
현재 확인이 불가능한 인물입니다.
※필요조건 : 두 번째 '진실' 확인
"…!"
나는 곧바로 화장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동요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화장실로 이동해,문을 닫았다.
"…."
화장실 안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후…."
하지만 마이크는 여전히 달려 있다. 나는 혹시라도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도록 입을 다문 채로, 다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필요조건 : 두 번째 '진실' 확인]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었군.
청려의 상태창을 확인하려면, 내가 보류시켜둔 '진실' 보상을 수령하라는 뜻이다.
'재촉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청려 저놈이 이 사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요구하는 걸지도 몰랐다.
'게임에서 레벨 제한이 걸린 컨텐츠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그럴싸해서 확신하기 힘들었다.
'…이런 불확실한 힌트로 상태 이상을 다시 시작하라고?'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더 찝찝했다.
'재촉할 목적이면 더 극단적인 수단을 쓸 수 있을 텐데.'
저놈에게 정말 단서가 있다고 상태창이 당근을 흔들고 있는 거라면?
"…."
결정하자.
'어차피, 계속 상태이상이 뜨는 채로 살 수는 없다.'
이대로 클리어하다 보면 상태이상이 사라질 것이라는 내 추측도 엄밀히 말하자면 행복회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걸 아무리 미뤄도 300일이다. 그 후에는 보상을 수령해야한다.
'차라리 지금 얻어갈 수 있는 걸 얻어간다.'
이 타이밍이 지나가면 청려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차라리 서로 탐색 중일 때 끝낸다.
'…팝업.'
[성공적 1위!]
당신은 공중파 음악방송 인기뮤직 을 통해 1위에 성공했습니다!
!제한시간 : 충족 (대성공)
!상태이상 : '1위가 아니면 죽음을'제거!
: 진실 확인 👈 Click!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Click!'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시야가 암전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건물 옥상.
"…."
한 남성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쌀쌀한 겨울바람에 밀려 연기가 흩어진다.
찬 공기에 기침이라도 할법하건만,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형형한 안광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빛나는 야경이 흘렀다. 맞은편의 전광판에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한때 그가 찍었던 브랜드였다.
정확히는 그의 그룹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남자는 화려한 영상의 색감을 보다가, 문득 고민에 잠겼다.
잘못된 시기의 해외 진출? 시류에 맞지 않는 컨셉? 초심을 잃은 멤버들? 쓸데없는 바람만 넣는 소속사의 투자자들?
"…."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처음부터 잘못됐다.'
애초에 멤버 구성부터 잘못된 것이다. 쓸모없는 구성원이 너무 많았다.
아니, 쓸모없는 게 아니라 방해가 됐다.
'내가 짰으면 이렇게 안 했어.'
그는 그제야 인정했다. 자신이 잘못 살았다.
'감성, 눈물. 그런 건 다 팔아먹을 때만 쓰는 거지.'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들이다. 개인 사정, 어쩔수 없는 사연… 다 입으로만 지껄이고 싸게 팔아먹는 변명일 뿐이다.
"…."
인정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타고 남은 꽁초를 하늘에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덜컹.
난간을 박차는 소음과 함께, 남자는 고층 건물 아래, 도로로 떨어졌다.
하지만 남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
"…!"
그는 가정집 작은 방에서 눈을 떴다.
"…무슨."
그가 집어 든 구형 휴대폰 액정이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청려가 되기 전 자신이었다.
"허억!"
나는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당장 물을 틀었다.
끼긱.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찬물이 쏟아졌다. 나는 즉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
'박문대' 때와 똑같았다. 제삼자 시점에서 남의 과거 사정 들여다보는 이 구성.
그리고… 이번 놈은 분명 청려다.
'이런 X발.'
이 새끼도 과거로 돌아왔네.
대충 짜 맞춰봐도 커리어 말아먹었다가 돌아와서 성공한 것 같다.
그쪽이야말로 웹소설 줄거리에 딱맞는다는 생각에 실소가 나왔으나, 그보다 먼저 빡침이 올라왔다.
'그래서 상태창 확인 못 하게 막아뒀냐…!'
상태창으로 확인해 버리면 '진실' 보상이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아니, 그것보다 이게 대체 왜 보상이란 말인가.
'박문대'의 과거야 내 사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니 떠도 그러려니했다.
하지만 청려가 무슨 지랄을 했든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거창하게 '보상'으로 주냐.
'상태이상 관련 힌트나 줄 것이지…!'
…치밀어오른 화는 찬물에 꽤 오래 머리를 박고 나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겨우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겠군.'
이 이상한 초자연적 현상 경험자에게 정보를 들을 수 있다면, 확실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상태창이, 마치 게임을 진행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힌트를 주는 것 같긴 한데
띠링.
['상이 아니면 죽음을']
: 정해진 기간 내로 가장 권위 있는 국내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지 못할시, 사망
남은 기간: D-365
…또 이 지랄을 하는 걸 보면 그냥 내가 고통받길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래도 이번에는 좀 낫군.'
신인상 정도야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챙길 것 같다.
저 애매한 '권위 있는' 기준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후보가… 흠, 3갠데. 객관적인 성적으로 따지면 절대 밀릴 일 없다.
요즘같이 대중성 챙기기 힘든 추세에, 하반기에 어떤 신인이 데뷔해도 아주사 출신 테스타를 뛰어넘는건 무리다.
'차라리 공중파 1위가 더 힘들지.'
나는 좀 진정한 채로, 얼굴에서 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청려에게 받았던 포트를 손에 들고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잘 썼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괜찮고, 어쨌든 잘 썼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포트를 반납하고, 청려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배낭에서 주전부리를 꺼내건넸다.
"밤새야 하는데, 괜찮으면 단 거라도 좀 드시는 게 어떨까요."
"아, 감사합니다."
청려는 바로 받아 갔지만, 여는 시늉만 하고 먹지 않았다.
'관리하는 건지 경계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배낭을 뒤지는 척하며, 다시 청려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떴다.
[이름: 청려(신재현)]
가창 : B+ (B+)
춤 : S+ (S+)
외모 : A+ (S-)
끼 : A (A+)
특성: 감정 (A)
!상태이상 : 교정(비활성화)
'미쳤나.'
무슨 스탯이 X발 고인물급이네.
특성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저절로 눈이 갔다. 혀 씹을 뻔했다.
'하지만 잠재력 무한은 아니군.'
스탯 전부 한계가 EX이지 않을까 싶던 막연한 예상은 빗나갔다.
어쨌든, 정신 차리고 원래 확인하려던 내용을 보자.
일단 특성부터.
[감정 (A)]
: 가치 있는 건 드물고, 쓰레기는 널렸다.
-인적 자원 판단력 +150%
'기업인 같은 재능이군.'
아까 봤던 '진실' 회상이 진실이면, 죽기 전에 삶을 회상하면서 얻은 재능일 수도 있겠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특성이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특성 뽑기 같은 게 없었나.'
…나와의 차이점이 꽤 선명했다.
어쨌든, 다음으로 넘어가자.
이번에는 상태이상이다.
[교정 (비활성화)]
: 다시 해보자
-실패 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방금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에야말로 논란 없이 성공한 아이돌이 돼보자고 열심히 도전하는데… 이게 웬걸. 자꾸 사고로 죽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거죠!
'아까 지껄인 아이돌 괴담… 본인 이야기였나.'
설마 '∼하면 죽음을' 류의 상태 이상 제거에 실패하면 상태창이 처음 생겼을 때로 돌아가는 건가.
섬뜩한 추리였다.
다만, 이 상태이상은 '비활성화'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비활성화 방법이 있다는 뜻이니까.
'일단 정리는 끝났고.'
다음은 추가 조사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다시 청려를 응시했다.
"간식 확인은 끝나셨나요?"
"예. 별거 없네요."
"하하."
너 아직도 긴가민가 싶지?
역시 저 새끼, 나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냥 떠본 거지.
그럼 이쪽이 정보력에서 우위라는 뜻이니, 이번에는 내가 떠볼 차례다.
털려라.
"음… 선배님, 혹시 제가 조언을 구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제가 조언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민이 있나요?"
"예. 다름이 아니라… 혹시, 선배님께서는 같은 팀 선배님들과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음, 시작이라면?"
나는 다 식은 커피를 가져와, 일부러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저희 팀은 결성 과정이 독특했다보니까… 확실히 그쪽에 강한 공감대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그룹분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그러세요?"
"예. VTIC 선배님께서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함께 데뷔하게 되셨나요?"
"…."
분명 '진실' 회상에서, 이놈은 VTIC 의 근본적인 실패 원인으로 '멤버'를 뽑았다.
'분명 이 새끼가 중간에 멤버를 갈았다.'
일개 연습생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거의 확실한 추측이다.
현재 VTIC은 튼튼하고 큰 논란 없이 탑티어로 잘만 살고 있으니까.
"음, 재밌는 질문입니다."
청려가 웃으며 내가 준 간식을 들어 올렸다.
드득. 소리와 함께 견과류가 씹혀사라졌다. 나는 진중한 얼굴로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자, 동요해라.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3화]
청려는 일단 말부터 흐리기 시작했다.
"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무릎을 꿇었다. 방송에는 하늘 같은 선배님께 조언을 구하는 신인 아이돌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청려는 영혼 없이 웃으며 몇번 편하게 앉으라고 빈말을 하더니, 화제를 트는 것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때야 대답을 시작했다.
"저희야 소속사에서 팀으로 만나서 시작했고, 다들 성격이 좋아서 금방 친해졌죠."
그리고 뭐 데뷔 때도 다들 열심히했다는 정석적인 대답이 이어졌다.
뻔하지만 사람들이 아이돌에게 기대하는 덕목이기도 했다.
음, 이렇게 회피하게 둘 순 없지.
"저는 지금 테스타 멤버들에게 굉장히 마음이 가는데, 청려 선배님께서도 같은 팀의 선배님들과 처음부터 잘 맞으셨군요."
나는 얼마 안 남은 커피를 원샷했다. 가라앉았던 부분이라 맛이 센게 정신이 확 드는군.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들이 팀으로 만나서, 다들 싸우지 않고 잘 맞은 거네요. 정말 신기하고 멋진 일입니다."
"…."
"분명히 다들 좋은 분들이시겠지만, 청려 선배님께서 리더로서 큰역량을 발휘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적당한 아부가 신인 같은 발언이다.
다른 멤버 후려친다고 보일 정도로선 넘진 않았고.
그런데 대충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청려에게는 전달 되었을 것이다.
'너 무슨 수 써서 입맛에 딱 맞는 놈들만 골라다가 팀 구성했지. 나도안다.'
…과연, 청려는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런가요."
" 예."
"쑥스럽네요. 그럴 정도의 일은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자, 이제 상황 파악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런 자리에서 해보는 게 또 처음이라,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 정도면 아쉬운 쪽이 누군지 알았겠지. 나는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했다.
"자, 그럼 저희 좀 편하게 있을까요?"
"넵. 감사합니다."
그 후로는 평범한 산장 조난 꽁트가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산사태와 망가진 뒷방.
그리고 창고에서 찾은 라디오에서 나온 섬뜩한 뉴스까지.
흠, 나름대로 몰입해서 잘 찍은 것같다. 나중에 본방 사수 해야겠군.
그렇게 별일 없이, 촬영은 다음 날 아침에 마무리되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맛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꾸벅꾸벅 주변에 인사를 하며, 제작진의 권유에 따라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영상통화를 걸었다.
뚜뚜뚜- 달칵!
얼마 안 가서,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큰세진이다.
'왜 류청우한테 전화했는데 너부터 나오냐.'
[헐, 박문대.]
[문대 형 전화입니까?]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니, 곧 화면에 테스타 놈들이 가득 찼다.
'혹시 누구한테든 전화하면 다 같이 나오라고 언질 준 보람이 있군.'
제작진에서 테스타도 곁다리로 몇컷 나왔으면 좋겠다고 미리 이야기가 끝났기도 하고 말이다.
원래는 본 촬영에 넣을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상 불가능해서 아마 이렇게 쿠키 영상처럼 자투리 컷으로 엔딩에 들어갈 것 같았다.
[촤, 촬영 끝났어?]
"어, 이제 들어가려고."
[조심해서 와.]
[마, 맞아. 조, 조심하고….]
[오는 길에 간식 사와라∼]
"…."
비까지 오는데 별 양심 터진 부탁을 다 듣는군. 나는 무시하려다가, 카메라를 생각하며 큰세진에게 최대한 온화하게 대꾸했다.
"너나 좀 사놔라. 들어가서 좀 먹게."
[오∼ 문대 잘 받아치는데? 그래!]
저쪽도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대충 웃으며 넘겼다. 나는 시시껄렁한 잡담을 몇 가지 더 떠들다가, 곧 영상통화를 종료했다.
매니저에게서 갑작스러운 폭우 때문에 도착까지 약간 지연된다고 문자를 받은 상태다.
아, 참고로 며칠 전에 드디어 새로온 매니저다. 원래 내 나이보다도 어리더라.
"문대 씨, 안 들어가세요?"
"아, 선배님."
나는 말을 거는 청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서 스탭 몇 명이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매니저 형님이 늦는다고 하셔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비가 와서 그런가 보네요. 그럼 점심시간도 늦을 텐데, 밥이라도 한끼하고 들어가는 게 어때요?"
"그래, 문대 씨. 밥 먹고 들어가요. 원래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데, 비가와서 정리하느라 우리가 안 되네."
옆을 지나가던 작가가 끼어들어 거들었다.
그림 잘 뽑았다며 제법 칭찬하던데, 박문대에 대한 인상이 꽤 좋게 잡힌 것 같다.
일 쉽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군.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요."
청려는 차를 가져왔고, 나는 매니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어차피 오후 스케줄이 없었던 것이다.
'끝나면 바로 들어가서 자야지.'
즐거운 상상 중에, 청려가 차를 몰고 돌아왔다.
'7년 차면 자기 차 뽑을 만하지.'
"타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곧바로 앞자리에 탔다. 툭, 문을 닫고 안전벨트를 매자,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청려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시간 낭비 안 좋아하는데. 우리 쓸데없이 재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
"몇 년도에서 왔지?"
"선배님부터."
"하하."
청려가 웃다가 뚝 그쳤다.
…좀 정신병자 같은데?
'갑자기 반말을 찍찍 갈기다 처웃어?'
혹시라도 전방 주시를 잊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해야겠다. 나는 대화와 시야 모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본인 입으로 시인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나는 이미 시점이 지나서요. 별로 쓸모가 없지. 음, 앞으로 올 미래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했는데."
"저도 별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뭐?"
"공시생이었거든요."
"…."
청려는 말문이 막힌 듯이 대답이 없더니, 곧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약간 긴장 수위를 낮춘 듯, 약간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네. 공시생이 무슨아이돌을…."
"안 하면 죽잖습니까."
"아, 벌써 거기까지 알았나."
'…?'
약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선배님은 언제 아셨습니까?"
"한 놈 보내 버리려다 실패하니까 죽어서 돌아가던데요."
"…어딜 보낸다고요?"
"자기 조국으로. 어차피 3년 채우자마자 공작소 차려서 튈 놈이니까."
청려가 웃으며 핸들을 가볍게 쳤다.
'차라리 내가 운전하고 싶다.'
문제는 박문대에게 면허가 없다는 점이다. 한숨 나오는 상황이 따로없다.
…어쨌든, 방금 대화에서 확실히 느꼈다.
'이놈, 상태창을 못 본다.'
죽어서 돌아가서야 '죽는 상태이상'을 깨달았다는 걸 보니, 이놈한테는 상태창이라는 가이드가 안 붙은 것이다.
'그래서 특성 3개를 못 채웠군.'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한 셈이다.
애초에 아이돌 출신에, 본인 몸 그대로 돌아갔다는 점에서야 나보다 유리하다만.
"어느 타이밍에 죽었지? 오디션에서 데뷔 못 하고 죽었을 것 같은데."
여기서 괜히 거짓말을 하면 도리어 말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놈이 눈치채고 거짓말을 섞기 시작하면 나도 곤란해지지.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아직 안 죽었는데요."
"…그래요? 그럼 어떻게 알았지?"
"그냥 알겠던데요. 기한 내로 업적못 내면 죽는 거."
"…."
청려는 말없이 전방을 주시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부럽네?"
"…."
룸미러에 눈동자만 굴려서 힐끗 나를 쳐다보는 청려의 눈이 보였다.
…솔직히 더럽게 섬뜩했다.
"지금이 딱 좋을 때잖아요. 주인공으로 사는 기분일 텐데."
"…기한 돌아올 때마다 죽을지도 모르는 게요?"
"…아, 그렇지. 이런 관점의 차이가 있겠어…. 음."
청려는 갑자기 한결 가벼운 말투로 불쑥 말을 이었다.
"그거, 일종의 패널티라고 난 생각해요."
"예?"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일에 실패하면 죽는 거. 솔직히 감수할만하지 않나요. 과거로 돌아왔는데."
"…."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거 순 미친놈 아닌가. 방어기제때문에 상황 합리화하느라 돌아버린것 같은데?
하지만 청려는 의외로 상식적인 이유를 댔다. 아주 놀라운, 이유였다.
"내가 계산하기로… 기본 한 번에,돌아온 연(年)수만큼 더해서 주어지는 것 같았거든요. 그거."
"…!"
상태이상에 끝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놈 건 비활성화 상태였나.'
이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계산해보자. 그럼 나는 3년을 거슬러 왔으니….
'4번. 그중에 이미 2번은 끝낸 상태다.'
희망이 반짝였다.
…물론 이놈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긴 했다. 그래도 일단 캐낼 놈이 생겼다는 것에 만족하고, 다음으로 마음에 걸렸던 점을 물어보자.
"그런데, 제가 과거로 돌아온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그냥 알겠던데요?"
"…."
일부러 내 말을 따라 하는군. 일단 나부터 불라는 뜻이다.
나는 내심 혀를 찼다.
'그래도 당장 상태창에 대해 벌써 이야기할 순 없다.'
이놈 평소에는 멀쩡하던데, 역시 이 초자연적 사태 관련해서는 좀 맛이 간 것 같다. 일단 오늘은 더 건드리지 말자.
"어쨌든, 여러 의미로 후배님 만나서 재밌었습니다. 유익한 경험이었네요."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하세요."
"감사합니다."
이후 적당한 한정식집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드디어.'
눈치 싸움하면서 밤을 새웠더니 더럽게 피곤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후 스케줄 없던 놈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문대 도착∼"
"어때, 예능은 괜찮았고?"
"고, 고생 많았어!"
"…어 괜찮았죠, 고맙습니다."
와, 이놈들 반갑네.
얼굴 자주 보면 정이 든다더니, 매일 같이 있다 보니 편해진 모양이다.
나는 양치질 중인 큰세진을 붙잡고물었다.
"간식은?"
"어허, 그걸 믿었니 문대야?"
당연히 아니었지.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 타서 한번 말해봤다. 물론 결과는 예상대로였지만.
하지만 놀랍게도 큰세진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확인하고 먹고 싶은 거 두 가지 골라가라∼ 편의점에서 사 왔다."
"…."
예상이… 빗나갔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고마워."
"별말씀을. 참, 원래 인당 세 갠데, 넌 단독 예능 잡혔으니까 하나 차감했다?"
"…."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원래 두개야."
이놈 요새 좀 선 넘네?
그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다.
지이잉.
[VTIC 청려 선배님 : 죽을 것 같으면 연락해요 ^^]
"…."
갑자기 큰세진의 행동쯤이야 아무러면 어떤가 싶다.
'일단 이놈보다야 훨씬 낫지.'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대충 답장한 뒤, 간식을 뒤로하고 씻자마자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왔네."
"네. 별일 없었나요."
"없었어. …자게?"
"예. 밤을 새워서요. 커튼 좀 쳐도될까요."
"그래."
나는 이세진과 짧게 대화를 나눈후, 합의하에 암막 커튼을 치고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저녁에 해야 할 모니터링이 있기 때문이다.
[테스타의 함께 살기 TEST! 6화]
리얼리티 여행 편 반영이 오늘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4화]
"깼어?"
"잘 주무셨습니까?"
"어. 상쾌하네."
나는 드물게 대놓고 말했다. 낮잠 푹 자고 목욕하고 나니 몸 상태가정말로 괜찮았다.
"자, 다들 여기 보고 웃으세요∼"
큰세진이 거실에 슬금슬금 모이는 놈들을 잡아다가 사진을 찍었다.
"업로드용?"
"응"
알아서 보정 잘 넣는 것 같아 참견은 안 했다. 대신 실시간 반응 모니터링을 위해 스마트폰을 꺼냈다.
'…느리네.'
보급형 중에서도 최저가를 집어왔더니, 일일 사용 시간이 너무 길었는지 슬슬 말을 안 듣는다.
뭐, 지금은 바꿀 돈도 없으니 더 생각하지 말자.
어쨌든, SNS 타임라인은 본방송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시작했다."
"차유진! 리얼리티 나온다!"
"네!"
방송은 부엌에서 과자를 든 차유진이 뛰어올 때쯤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출발 준비를 하며 들뜬 테스타였다.
[류청우 : 이 정도 챙겨가면 되려나?]
[차유진 : 여행 좋아∼]
[큰세진 : 잘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그리고 유유히 날아가는 스카이다이빙용 경비행기 컷이 등장했다.
카메라가 쓱 내려가며, 웬 시골 바닥에서 짐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테스타를 비췄다.
[정PD : 저기 위에 경비행기 보이시죠?]
[테스타 : …?]
[정PD : 저기 타서 뛰어내리실 거예요.]
[테스타 : (경악)]
넋이 나간 테스타의 위로 거대한 흰 자막이 떴다.
[이 사태의 원인?]
직후, 화면은 숙소를 비췄다.
[며칠 전 테스타의 숙소]
풍선이 널린 거실 바닥 위에 '특집! 테스타의 1위 기념 여행'이라고적힌 거대한 쪽지가 스포트라이트 CG를 받았다.
그리고 자막도 하나 붙었다.
[※이 사태의 원인 (스포일러)]
이후로는… 테스타가 겪은 일이 별 가감 없이 나왔다.
[차유진 : 여행!]
여행이라고 잔뜩 들떠서 룰렛을 돌렸다가 익스트림이 걸리고 당황하는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잘 편집되어 나왔다는 뜻이다.
물론 화룡점정은 룰렛의 조작을 눈치채는 것에서 나왔다.
[짜잔! (또) 익스트림 여행]
[짜잔! (또) (또) 익스트림 여행]
[테스타 : ?!]
인터뷰가 붙었다.
[박문대(천재 댕댕이) : 룰렛이 멈출 때 보니까 한번 튕기더라구요.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서.]
[박문대(사기당한 댕댕이) : 근데 정말 맞을 줄은… (할 말 잃음)]
[이세진(아주사에서 A 붙여줌) : 아주사에서도 조작은 안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세진 말 개웃기네 아주사에서도 조작은 안 했대 ㅋㅋㅋㅋ
└절절한 진심 인 게 분명ㅋㅋㅋ
-지금까지 훈훈했던 건 여행편에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던 거임
-아니 문대 진짜 능력치 극단적이네 잘하는 건 개 잘하고 못하는 건개 못햌ㅋㅋㅋ
└못 하는 것 예시 : 공포, 그림
└이야 오늘 하나 보겠다^^
└아 귀신의 집 너무 기대돼서 미칠 것 같아
"…."
왜… 못하는 걸 기대하시는 거지.
어쨌든, 화면의 테스타는 꼼꼼하게 스카이다이빙 교육을 받고, 경비행기에 탑승했다.
[테스타 : (집중)]
이 과정에서 멤버들이 태도가 꽤 주목을 받았다.
-래빈이 염불 외우는 데욬ㅋㅋㅋㅋ
└김래빗 : 이거슨…완전히 안전… 암튼 난 안전함….
-선아현 의외로 강심장이네 눈 하나 까딱 안 함ㅋㅋ 무서워하는 애들 이해는 못 하겠지만 위로해준다 -이 포인트가 진짜 웃겨ㅋㅋㅋ
-하 근데 다들 이런 것도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한다…. 얘들아 힘들것 같으면 꼬장부려도 돼 이거 서바이벌 아니야ㅠㅠ
└아앗… 갑자기 마음이 아파…
-류청우 뛰는 거 진짜 멋있네 홀강사도 감탄
나야 그냥 타서 뛰었다 보니 준비 분량은 별거 없었다.
다만 착륙할 때 자막과 합성을 하나… 받았다.
[강아지 랜딩]
그리고 뛰어내리는… 까만 웰시코기가 반투명 CG로 삽입되었다.
"으하하하!"
"강아지! 강아지!"
"…그만해라."
소파도 그만 때려라.
'…리얼리티 제작진 놈들, 편집거리 없으면 적당히 강아지로 때우는것 같은데.'
대체 저런 영상 자료는 또 어디서 찾아왔단 말인가.
어쨌든, 팬들도 폭소하며 재밌어는했다. 그래도 간혹 티벳여우 어쩌고하는 반응이 튀어나오는 걸로 봐서는… 큰세진 이놈의 그 인터뷰 하나가 정말 오래 간다 싶다.
[큰세진 : 하늘을 나는 느낌? 하하,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잖아요. 전 좋았어요.]
[차유진 : 또 하고 싶어요!]
[김래빈 : 막상 뛰어내리니까 상쾌한 해방감이 있었습니다.]
화면에서는 '다짜고짜 스카이다이빙'의 충격을 수습하기 위해서인지훈훈한 말 위주로 인터뷰가 삽입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정PD : 그럼 여러분, 지금부터 '흉가의 초대'에 입장할 조를 나눠주세요!]
그놈의 익스트림 공포체험이다.
[큰세진 : 저희가…! 조를 만드는데 안 좋은 기억이 있어요…!]
[김래빈 : 다 같이 입장하겠습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테스타의 말에 팬들이 안타까워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안 좋은 기억 드립ㅋㅋㅋㅋㅋ
-아주사 PTSD를 여기서?ㅋㅋㅋ
-대체 얼마나 무서운 거얔ㅋㅋ
-아 나 이것만 기다렸잖아 얘들아 얼른 들어가렴 (팝콘)
그리고 이분들의 바람대로… 흉가를 탐험하는 테스타의 모습이 방송을 탔다.
근데 어쩐지… 우리 조 분량이 제일 많았다.
'…3명이라 그런 거겠지.'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민망해서 볼 수가 없다.
[큰세진 : 으허어억!]
[차유진 : 으아아아악!]
[박문대 : (기절)]
기절?
'멀쩡히 잘 움직이는데 저런 자막을 붙이냐.'
떨떠름하게 화면을 보는데, 큰세진과 차유진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맞아! 너 진짜 기절한 줄 알았잖아!"
"영혼 없었어요!"
…차유진이 영혼 같은 고급 단어도 알고 있군.
"…그 정도는 아니었지."
"어? 그래?"
큰세진이 실실 웃었다.
"너 그럼 저분 쫓아올 때 했던 말 하나만 대 봐."
"…."
말을… 하셨냐?
"기억 안 나지? 모르지? 기절해서 그래!"
오디오 안 비는 조를 짠 자신에게 감사하라며 큰세진이 낄낄 웃었다.
"야, 저기 봐. 이제 나온다!"
"…."
고개를 돌리자, 화면에서 복도를 질주하는 직원분이 보였다.
…정말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Bbbirrrrrrrddd …!]
"봤지?"
큰세진이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하지만 직후, 화면의 내 양옆에서 차유진과 큰세진이 더 크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조절된 볼륨입니다.]
"…."
이놈들 때문이었잖아.
이 와중에, 방송은 큰세진의 조용한 활약을 모아서 강조 편집한 뒤내보내고 있었다.
[무서워하면서 할 건 다 함]
[어? 찾았다?]
[팀원 챙기는 큰세]
[홀로 발견]
-야 큰세진 좀 멋있는데?
-방금 보자마자 방향 트는 거 봄?
-뭐야 그냥 무서움도 즐기는 거였잖앜ㅋㅋㅋ 탐색 엄청 잘하네
-유능 그 자체
-문대 완전 얼어붙었어 너무 귀여워ㅠㅠ
-울 댕댕이 짖지도 못해 완전 순둥이야
"…."
고개를 돌리자 큰세진이 활짝 웃었다.
"와, 큰세진이 탈출 시간을 줄였네? 역시 문대가 봐주는 걸로 하자!"
직업상 힘들겠지만, 딱 한 대만 저놈 주둥이를 때릴 수 있다면 좋겠다.
'흉가의 초대'는 백스토리를 방송에서 살짝 들려주며 끝냈다.
[테스타가 찍은 사진의 정체는…?]
20세기 서양의 고전적인 귀신 들린 집에 인신 공양을 합친 스토리라인은 제법 섬뜩했다.
"아, 저래서 거기 제단이 있었구나."
"…좀 슬프네."
"…."
사람 감성은 제각각이니 넘어가자.
어쨌든, 여행 1편은 돼지 통구이로 포식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런 컷에서 스탭 몫까지 챙기는건 이제 거의 국룰이나 다름없었기때문에, 그 장면도 훈훈하게 잘 뽑혀 나왔다.
-잘 먹어서 보기 좋다 얘들아ㅠㅠ
-와 돼지 한 마리 뚝딱 사라짐ㅋㅋㅋㅋ
-관리 안 해? 매번 고기 처먹네
└뭐래 테스타 다 개말라인간인데
└본인 돌이나 관리하세용
-W앱으로 먹방해줘ㅠㅠ
흠, 마지막은 고려해 볼 만한 의견이다.
'이제 리얼리티도 다음 주로 종영이군.'
7화가 사실상 끝이고, 8화는 그냥 하이라이트 모음 특별 편성으로 감독컷 같은 부제를 달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사실 아이돌 리얼리티 대부분이 4화 내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도 뇌절 수준으로 길게 뺀 거긴 했다.
아주사 가 최종회 막 끝냈을 때 기세에 더해서, 동 시간대에 타 케이블에서 엄청난 드라마 하나가 나오는 통에 Tnet 편성이 빈 덕에 벌어진 일이었다.
'거의 활동 기간보다도 길군.'
이제 음방도 이번 주로 마지막이다. 데뷔 앨범 활동은 사실상 마무리라고 볼 수 있었다.
'활동 마무리 기념으로 W앱이라도해야 하나.'
나는 침실로 돌아가서, W앱의 테스타 계정에 확인차 접속했다.
그리고 약간 놀랐다. 마지막 라이브가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시험]
그런데 영상 길이가 1분 2초였다.
'…1분'?'
대체 뭘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별말 못 들은 거 보니 사고 난 건아닌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누구지.'
일단 가장 유력한 후보는 큰세진이긴 했다. 하지만 그놈이 1분 동안만 했을 리는 없을 텐데.
나는 검은 썸네일을 클릭했다.
약간의 백색소음과 함께, 어두운 화면이 출력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불쑥 팔뚝이 화면에 가득 찼다.
[아…, 이, 이렇게….]
[어?]
[…헉!]
영상은 그걸로 끝났다.
'선아현이네.'
딱 보니 뭘 잘못 건드려서 연습하다가 실제 라이브를 틀어버린 모양이다.
댓글을 보니 다들 귀엽다고 울고 있었다. 재정비해서 밤에 틀어줄 거라는 즐거운 추측을 하는 분도 꽤있었다.
다만 좀 이상했다.
'음, 그놈 성격에 SNS에 장문 사과라도 올렸을 것 같은데.'
오늘 몇 번 테스타 SNS 계정에 접속했을 때는 그런 흔적도 못 본 것이다.
'어차피 w라이브는 해보려고 했으니, 말이나 꺼내 봐야겠군.'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한 셋 정도가 같이하는 편이 진행하기도 편했다.
의욕 있는 놈이 끼면 내 부담이 덜하겠지.
나는 일단 옆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냐?"
"…어, 어!"
문은 금방 열렸다. 김래빈은 아직 거실에 있는지, 방에서는 선아현 혼자 있었다.
"왜, 왜…?"
근데 얘 왜 눈치를 보지?
원래도 좀 그런 타입이긴 했다만, 말 좀 걸었다고 이럴 시기는 벌써지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선아현이 말하는 걸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근래에는 꽤 말이 많아졌었는데 말이다.
태도고 말투고 순 아주사 초반수준으로 돌아온 수준이다.
"너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선아현이 꿋꿋이 부정했다. 허이고.
"너 지금 식은땀 흘리는데."
"…!"
"나한테 말하기 싫으면 청우 형이나 매니저 형한테라도 이야기해 봐라."
"자, 잠깐."
선아현이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는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나… 시, 실수를 해서."
"W 라이브?"
"봐, 봤구나…."
"어. 실수로 튼 거. 근데 뭐… 아무 문제 없던데."
다들 댓글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해줬으나, 선아현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거… 시, 실수로 튼 거, 아냐."
"…?"
선아현이 침을 삼켰다.
"하, 하려고 튼 건데, 끈 거야."
"…."
"너, 너무 무, 무서워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5화]
나는 선아현의 힘겨운 설명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인사라도 해보려고 틀었는데, 갑자기 무서워져서 껐다는 거지."
"…으, 응"
"음."
선아현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방문 앞 바닥에 앉아서 이러고 있으니 좀 웃기긴 하군.
"어떤 점이 무서웠는데?"
"사, 사람들이… 시, 싫어할 것 같고."
"싫으면 안 볼 텐데."
"…요, 욕했어."
"흠, 실시간 댓글에서 봤어?"
선아현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또 어떤 미친 새끼가 알람 오자마자 들어가서 개소리 지껄여놨나 보군.'
왜 이렇게 자기 인생 갈아서 남상처 주려는 놈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답답하군.'
어쨌든, 선아현은 분명 아주사 에 출연할 때도 말도 안 되는 수위의 욕을 봤었다.
그때 잘 견디다가 이번에 터진 것은 아마도 팬사인회 때 일이 기폭제가 된 것 같았다.
'댓글이 아예 실시간으로 뜨는 것도 영향을 끼친 것 같고.'
면전에서 직접 들은 것 같았나 보다.
나는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굳이 이 직업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널 좋아하는 사람만 만날 수는없어. 누군가는 널 싫어하겠지. 그리고 그냥 남 욕하는 걸 재밌어하는 놈도 나오고."
"…."
"당연히 기분 나쁘지. 무서울 수있는 일이긴 한데… 그만둘 정도로 무서우면 역시 도움을 좀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
"상담 지금 받는 게 낫지 않겠어? 이제 활동도 마무리 단계고."
"괘, 괜찮아."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그냥 상담을 안 받고 싶은 것같은데."
"…소, 소용없었어."
선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예, 예전에… 이거, 마, 말 더듬는거, 고쳤었는데… 다, 다시 또 이래서."
"…."
"소, 소용없어."
선아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나, 나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야…."
"….?"
이건 또 무슨 극단적인 소린가.
"그냥 좀… 돌팔이 만난 거 아니냐?"
"…! 도, 돌팔…."
"그리고 말 더듬는 걸 꼭 고쳐야 한다는 게 아니라, 걱정이라도 덜하면 낫지 않냐는 뜻이었고."
"…."
"못 믿겠으면 다른 애들 불러서 투표 부쳐 볼까."
"…?!"
다행히 이런 거 관련해서는 별 트라우마가 없는지, 선아현의 멍한 동의 아래 설문을 조사했다.
일단 류청우.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어떤 일이든 재활은 꾸준히 해보는게 좋지. 일단 결론 날 때까지는 포기하지 마. 잘 생각했네."
"…예, 예."
다음은 큰세진과 김래빈. 거실에서 팬송 댓글을 보고 있었다.
"헐, 다른 의사 당연히 만나 봐야지. 회사에 말하면 아마 유명한 의사 소개해 줄걸? 다른 소속사에서 일하다 온 분들이 많아서."
"사전에 경험하신 하나의 사례로 일반화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다섯 정도까지는 비교 분석해 봐야 신뢰성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 그, 그런가…."
부엌에 있던 차유진은 돌팔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뜻을설명해 준 후에 다시 물어봤다.
"돌팔이 버려요! 새 의사 선생님만나요!"
"…."
어쩐지 일일 드라마 줄거리 요약같았지만, 간단명료했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이세진에게 물어봤다.
의외로 진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의사마다 천차만별이지. 이런 이야기하고 돈 받나 싶은 놈도 있고…좋은 사람도 있고."
"네, 네."
"안 맞으면 빨리 바꾸는 식으로 하는 게 좋아. …나도 길게 받아본건 아니지만."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이세진은 작게 덧붙였다.
"…잘해봐."
"-! 예, 예!"
의외의 지원사격이었다.
자, 이걸로 조사는 끝났다. 나는 팔짱을 끼고 다시 물었다.
"어때."
선아현은 이번에는 제법 마음이 동했는지,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그리고 곧, 두 주먹을 불끈 쥐고말했다.
"…그, 그럼… 화, 활동 끝나면, 바로 말할게."
"그럴래? 그래."
"…으, 으응!"
"그렇게 너희 부모님께 보내 둬라."
"어어어'?!"
저러다 또 일정 다가오면 쓱 미룰게 선했다.
나는 선아현이 자신의 부모님께 연락해서 상담 계획에 대해 알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선아현은 본인이 직접 말했다 보니 결국 땀을 흘리면서 문자를 보냈고, 부모님은 순식간에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선아현의 상담 일정은 성공적으로 잡혔다.
"잘했어."
"어, 어어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나는 등을 한번 두드려주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선아현의 부모님께 뜬금없는 감사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선아현이 내가 설득했다고 말을 한 모양이었다.
'…굳이?'
좀 민망한 일이었다.
-고마워요. 우리가… 음,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니까….
약간 목이 메시는지, 몇 번 소리를 다듬는 소리가 들린 후에 다시 감사인사가 이어졌다.
"아닙니다. 그냥 말만 꺼내 본 건데요."
-그렇더라도요.
…이후 스치듯 주워듣기로는, 선아현이 재발 직후에 넌 계속 그렇게살 거라는 식의 폭언을 몇 번 들었던 모양이다.
분명 학교였을 거라는데 내 잔고를 걸 수 있었다. 얼마 없긴 했지만.
'역시 또래 관계가 문제였군…'
어쨌든, 나는 적당히 예의를 차려서 선아현의 부모님과 통화를 끝냈다.
참, 별일을 다 겪어본다.
나는 조용히 통화하기 위해 나온 베란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여름바람을 맞았다.
'…피곤하고, 시원하고.'
오랜만의 단체생활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마지막 음방은 큰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다들 반바지 좋아하시네."
"우, 움직이기 편해서, 좋았어."
나도 시원해서 좋았다.
마지막에 무릎 꿇는 동작이 있는 큰세진은 좀 다른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만.
[안녕하세요 러뷰어.
저는 문대 (강아지 이모티콘)
이것은 오늘의 의상입니다. (사진)(사진)]
SNS에 마지막 단체 사진을 업로드하고 나니, 정말 첫 활동이 끝났다싶다.
"내일부터 휴가구나."
"신난다∼"
"오랜만에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류청우의 말에 다들 들뜬 표정이되었다.
그렇다. 소속사는 언플대로 휴가를 줬다.
딱 나흘.
'지방 사는 놈은 내려가서 밥 먹고쉬면 땡이겠군.'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다. 음방 준비하면서 주워듣기로는 아예 안 주고 다음 앨범 준비시키는 놈들도 수두룩한 것 같던데.
그리고 그날 저녁에 광고 촬영을 끝마치자마자 밥도 거르고 숙소에 도착한 테스타는, 이미 준비한 짐을 들고 한 명씩 집으로 떠났다.
"그럼 다들 며칠 뒤에 뵙겠습니다∼"
"뵙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
"아, 안녕…."
그 와중에도 선아현은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지, 삐걱거리며 사라졌다.
툭. 띠리릭.
현관문이 닫혔다.
그렇게 나는 숙소에 혼자 남았다.
'…개꿀이다.'
이 넓은 곳을 혼자 조용히 쓰면서 나흘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 체력이 차는 느낌이다.
나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누웠다.
'일단 좀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밥을 먹고… 밀린 자세한 모니터링을 해야겠…."
…까지 생각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거실에서 깨어난 나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안 움직였다.
바로 아주사 첫 촬영 이후에 겪었던 그 증상이었다.
끔찍한 몸살에 걸렸단 뜻이다.
'…죽겠군.'
심지어 더 심해졌다. 뇌가 익는 것같다.
처음에는 뭐라도 해보려 했으나, 곧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TV 보는 것도 힘드냐.'
나는 무거운 손으로 위튜브 화면이 흐르던 TV를 껐다.
청려와 함께 찍은 일단 친해지세요 1화 예고편 모니터링하려고 했는데, 뭘 본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다.
'…열을 제보자.'
띡
[38.8°C]
미치겠네.
나는 체온계를 찾은 통을 뒤져서 진통해열제를 찾아냈다. 그리고 일단 씹어먹었다.
더럽게 썼다. 하지만 얼마 뒤, 통증이 약간 가셨다.
그러자 좀 더 생산적인 생각이 가능해졌다.
'…매니저도 쉬지.'
일단 회사에 연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신체에 긴장이 풀리며 과로로 축적된 문제가 터진 것뿐이다.
'일단은… 휴가 동안 몸을 정양해야 하나.'
어차피 쉬는 것 똑같다만, 아파서 쉬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아쉽지만 별수 없었다.
'기운이 있을 때 미리 죽을 해놓자.'
나는 대중 즉석밥으로 흰죽을 끓여놓고, 몇 술 뜬 뒤에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아직 약 기운이 있을 때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우선… 무대 반응부터.'
뮤직밤에서 올린 컴백 무대 개인 직캠들은 벌써 꽤 조회수가 쌓였다.
아마 개인 팬들끼리 은근한 경쟁이 붙었던 것 같다.
[(MBomb직캠) 테스타 (TeSTAR) 문대 MoonDae 마법소년/ 112만]
'…나도 백만 뷰 넘겼네.'
춤을 올린 보람이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영상을 클릭했다.
-이제 춤도 잘 추는 우리 천재 갱얼쥐 보고 가세요… 모두 문댕댕 합시다…ㅠㅠ
-문대야 너 잠은 자면서 연습하는거지?ㅠㅠ 아주사 때처럼 잠 안 자고 할까 봐 걱정된다 잘 쉬고 잘먹으면서 해야 돼ㅠㅠ
-와 진짜 뽕 찬다 이게 바로 1위 뽕인가
-동작마다 춤멤들 디테일이 조금씩 들어 있어… 대체 무슨 연습을 한 거야 문댕쓰…
그냥 다 같이 하다 보니 저절로 옮은 것이다. 내가 기본기가 없으니까.
'그래도 기분은 좋다.'
이런 맛에 워라밸이고 나발이고 일에 삶을 꼴아박게 되는 건가 보다.
흠, 영어 댓글도 꽤 있었는데,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눈에 읽히질 않았다. 나는 일단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이건 주기적으로 하고 있지만… 요며칠은 다른 일들이 많아서 별로 못했던 작업이다.
SNS에 '박문대'로 검색해 보자.
"…."
지난번처럼, 동영상과 사진, 팬아트가 쏟아졌다.
솔직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게 그다지 실감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타임라인을 내리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살폈다.
그러다 좀 특이한 것들도 발견했다.
박문대 테스타 문대 아주사
박문대 제발 금발 다시 해 너 흑발 X나 안 어울려 제발 금발하라고! 왜 기껏 염색해놓고 흑발로 돌아왔어ㅠㅠ 그냥 둬도 검게 자랄 머리잖아 제발 금발 해
"…."
제발 내가 검색해서 봤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화면을 뚫고 나왔다.
그 밑으로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말리는 사람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나 참."
헛웃음이 다 나왔다. 다음 앨범에는 투표라도 받아서 머리 색을 바꿔야겠다.
"다음은…."
내가 지금 입으로 말했나?
눈을 깜박거리며 스마트폰 화면을 봤다. 좀 흐릿한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팠다. 약 기운이 훅 빠져나간 것 같다.
'X발.'
더럽게 힘드네 진짜.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침대에 처박혔다. 모르겠다. 한숨 자고 나면 좀낫겠지….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몸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가위에 눌린 것 같다.
…목소리가 들렸다.
"…대야? 야! 박문대!"
"…!"
순간, 정신이 확 돌아왔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6화]
흐릿한 시야로 아는 놈 얼굴이 보였다.
"…큰세진?"
"너 열 엄청 나는 것 같은데."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마도 큰세진은 기겁한 표정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참고 대답했다.
"…큼, 어. 약 먹었어."
"약만 먹을 게 아니라… 야, 너 병원 가라. 회사에 전화 내가 해줘?"
"…무슨 중병도 아니고… 됐어. 몸살이야."
큰세진이 혀를 찼다.
"빨리 나을 수 있는데 뭐하러 앓아? 그냥 수액이라도 한 방 맞고 와. 처방 약도 센 거 받고."
"…."
귀찮은데, 솔직히 좀 솔깃했다.
'회사에서 그 정도는 내주겠지.'
그래도 대기업 자회산데 이 정도는 산재 처리해 줄 거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다가 현재 상황을 깨달았다.
"아… 오늘 매니저 형 쉬는데."
"택시 부르면 되지. 대충 챙겨입어."
"…."
택시가 선택지에 있었군.
나는 전화 통화를 마치는 큰세진을 바라보다가, 겨우 이성적인 의문점을 도줄했다.
"너 근데 왜 여기 있냐."
"받을 게 있어서 잠깐 회사 오면서 들렀어. 나 집 근처잖아."
회사에서 받을 게 있다고?
"뭘 받는데."
"그게 지금 중요하냐? 됐고 옷이나갈아입자. 택시 곧 온 댄다."
"…어."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서 땀에 절은 티를 벗어 던지고 대중 후드를 꺼내입었다. 으슬으슬해서 덥진 않았다.
"도와줘?"
" 됐다."
대충 이러고 가면 되겠지. 얼굴 가리게 마스크만 쓰면….
"자, 쓰시고."
"…."
귀신같이 알아채네. 나는 마스크를 귀에 걸며 순순히 인정했다.
"고맙다."
"알면 됐다. 나한테 잘해."
큰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아, 택시 근처라신다. 내려가자."
"어. 정문으로 가면 되냐."
"그쪽으로 불렀어. 따라와."
"…?'
대충 보니 배웅해 주겠다는 게 아니라 같이 가주겠다는 느낌인데 이거.
"그냥 나 혼자 살짝 갔다 올게."
"혼자 살짝 가다가 혹시 쓰러지면 어떤 기사가 날지 상상해 보렴."
"…."
패배를 인정한다.
"가자."
"그래."
나는 입 다물고 큰세진을 따라 내려가서 택시를 탔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멀미를 참고 있자니, 얼마 안 가서 병원에 도착했다.
"훨씬 낫지?"
"그러네."
나는 선선히 수긍했다. 수액에 대체 뭐가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색이 다른 두 팩을 맞고 나니 컨디션이 확 나아졌다.
'그냥저냥 참을 만한 몸살 정도.'
큰 병원인 데다가 위치상 연예인이 제법 오는지 조용히 끝난 것도 아주괜찮았다.
"가서 밥 먹고 약 먹으면 되겠네. 캬, 이런 친구 또 없다."
"그래. 고맙다."
"…별말씀을."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숙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가득 쌓인 상자 더미가 나타났다.
"…!"
그냥 택배 상자가 아니다. 아이보리색 포장지에 진녹색 리본이 감겨있는, 규격 다른 이 상자들은….
"아, 벌써 옮겨주셨네."
"…."
나는 태연한 큰세진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 생일이냐?"
"어? 아, 문대라면 검색하면서 봤겠구만∼"
큰세진이 찡긋 웃었다.
"맞아. 내 생일 모레야. 8월 1일."
회사에 받을 게 있다는 게 저 선물 더미였나 보다.
'…생일 일주일 전부터 호들갑 떠는 놈인 줄 알았는데.'
입도 벙긋 안 할 줄은 몰랐다.
사실 며칠 전에 스치듯이 SNS에서 본 걸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저 선물 더미도 데뷔 기념 서포트려니 하고 지나갈 뻔했다.
어쨌든, 생일 당사자는 태연했다.
"생일이 휴가 중간에 지나가니까∼ 인증샷부터 먼저 찍어두려고 했지. 이런 건 또 당일에 바로 봐야 기분이 좋잖냐."
"그건 그렇지, 그리고… 일단 축하한다."
"그래∼ 생일에 감동적인 축하 톡이랑 기프티콘 보내줘. 치킨 정도로만족해드림."
나는 피식 웃었다.
"…오늘 네가 치킨값은 했지."
"-! 문대 이것까지 들으면 두 마리도 딜해볼 수 있겠는데?"
"뭐?"
큰세진이 씩 웃더니,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서 웬 냄비 하나를 들어올렸다.
"이거 갈비찜이다?"
"…갈비?"
갑자기 어디서 그게 튀어나왔냐.
"내가∼ 숙소에 혼자 있을 친구가 걱정되어서∼ 내 생일상에서 빼 왔다는 거 아니냐!"
"…!"
"막… 감동이 흘러넘치지 않니? 휴가 중에 팀메이트를 위해 갈비를 가져온 큰세진… 크, 어디 나가면 미담으로 말해라."
"…."
"고마워서 말문이 막혔구나?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큰세진은 손을 흔들며, 도로 현관으로 향했다.
"나 돌아가 볼 테니까, 휴가 동안 건강 관리 잘해라. 갈비찜 꼭 데워먹고."
"…선물 인증샷 찍어줘?"
"하하, 됐네요. 아픈 놈이 무슨. 나 회사에서 이미 찍었어."
큰세진은 '또 아프면 병원 다시 가'라는 충고를 남기고 그 길로 사라졌다.
"…."
'이런 일도 다 겪어보는군.'
아플 때 누구랑 같이 있어 본 적도 별로 없고, 대체로 귀찮은 일만 늘었기 때문에 이번 건 제법 새로웠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편하네.'
…돌아오는 큰세진의 생일에는 정말 치킨이라도 보내야겠다. 내 휴일에 그 정도 값어치는 있지.
'자, 그럼 약 먹고 다시 모니터링을…'
드르륵.
스마트폰에 톡이 도착했다.
[선아현 : 문대야 휴가 잘 보내고있니? 난 첫 상담을 이제 끝냈어. 좋은 분이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도전 보려고 해. 너한테꼭 고맙다는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문자를… (더 보기)]
"…."
이건… 변한 게 없군. 그래도 단체방에 안 올린 게 어디냐 싶다.
더 보기를 눌러줬다.
요약하자면 고맙고 휴가 동안 혹시 놀러 올 생각 없냐는 말이다.
'없다.'
나는 '상담 잘 받은 건 축하하고 난 몸이 안 좋아서 쉬려고 한다'는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소파에 폰을 던져두고 약을 먹고 오니, 장문 문자가 5통으로 증식해 있었다.
게다가 단체방에 알림이 더럽게 많이 떴다.
확인해 보니 벌써 큰세진이 그룹단체방에 오늘 일어난 일을 다 떠들어둔 모양이다.
[차유진 : 건강해요 형! (우는 기본 이모티콘)]
[류청우 : 일하다 쉬니까 그랬나보다. 혹시 너무 힘들면 연락해.]
[김래빈 : 할아버지가 홍삼 주셨는데 숙소 복귀할 때 가져갈까요? (흐릿한 물통 사진)]
[큰세진 : 나도 줘 (폭소하는 이모티콘)]
…이런 식의 대화가 몇십 개 쌓인것이다.
"…허."
이쯤 되니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이놈들이 어디 옆방쯤 있는 것같다.
'그래도 고맙긴 하네.'
쉬는데 귀찮게 무슨 연락이냐고 할법도 한데 말이다.
심지어 이세진에게도 톡이 왔다.
물론 단체방은 아니었지만.
[이세진A : 몸 괜찮아?]
나는 먼저 온 순서대로 차근차근 답변을 달았다.
일단 선아현에게는 '몸은 잘 낫는 중이고 네가 눈치 없이 놀자고 권유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으니 걱정 마라'는 내용을 보냈고, 이세진에게도 적당히 괜찮다고 보냈다.
마지막으로 단톡에도 같은 내용을 올렸다.
[병원 갔다 와서 괜찮아졌습니다. 다들 휴가 잘 보내세요.]
그러자 확인한 사람들의 오케이 이모티콘들로 화면이 가득 찼다. 뭐…피드백이 빠르고 긍정적이니 좀 유쾌했다.
'이제 밥이나 먹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갈비찜과 즉석밥을 데웠다.
갈비찜은 꽤 맛있었다.
박문대가 컨디션을 회복하며 조용히 휴가를 마무리했을 때, 테스타의 팬들은 SNS에 올라온 테스타의 휴가 소식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아현이ㅋㅋㅋㅋ 수세미 뜨기 시작했대 귀여워…너무 귀여워…! (반쯤 뜬 수세미 사진)
-오늘의 래빈이: 할아버님과 초당옥수수를 먹었었습니다… 에어컨 밑에 앉혀서 신비복숭아 초당옥수수 배 빵빵해질 때까지 먹여주고 싶다 진짜
-청우가 찍어서 올려준 곳 어딘지아시는 분?ㅠ 산인 것 같은데 이 여름에 산을 올랐니 청우야…? 그것도 휴가 때…?
특히, 큰세진은 자신의 생일날을 전후로 온갖 사진과 동영상을 푸는통에 떡밥이 넘쳤다.
특히 가장 인기 있던 것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Hi-five 음악방송 무대 소리에 맞춰 립싱크를 하는 테스타의 짧은 영상이었다.
물을 마시거나 책을 읽는 등 일상적인 행동을 하며 거실을 지나가던테스타가 괜히 흥을 타서 남의 파트를 따라 하고 지나가는 것은 만 단위의 공유를 타며 화제가 되었다.
-아니 왜 리얼리티보다 여기서 더친해 보이냐고ㅋㅋㅋ
-나 진짜 배우세진이도 장단 맞춰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차유진 랩파트에…ㅋㅋ
-서로 많이 편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뜨듯해짐… 흑흑… 테스타 꼭연장해… 100 년해…
그리고 리얼리티 여행의 마지막 편까지 방영되며, 팬들은 테스타의 데뷔 활동이 잘 마무리된 시원섭섭한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딱 한 멤버의 팬들에겐 여운은 아직 즐기긴 일렀다.
바로 일단 친해지세요 본방송을 코앞에 둔 박문대의 팬들이었다.
-드디어 오늘이 왔다.
-문대ㅠㅠ예능ㅠㅠ 넘치는 분량ㅠㅠ
-이게 뭐라고 나 어제 긴장해서잠을 못 잤어…
-예고편 보니까 탈출한 살인범이랑 괴담 이야기 나오던데 우리 문대아닌 척 겁먹어서 선배님 졸졸 따라다녔을 거 생각하니 안 봐도 벌써 귀엽고 꿀잼이고 그 장면을 맑은 정신으로 보기 위해 오늘 연차를 쓴내가 승리자
└ㅋㅋㅋㅋ아니 얼마나 기대에 찬거얔ㅋㅋㅋ
긴장한 팬들의 기대 속에서, 이번주의 일단 친해지세요 는 방영을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눈 오는산 중턱의 산장에서 만나는 두 사람의 콩트였다.
[갑자기 눈보라가 쳐서 놀랐는데,산장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날씨 상황 보고얼른 들어와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둘 다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는 점이다.
졸지에 좋은 개그 코너가 됐다.
실시간으로 프로그램 온에어를 달리던 커뮤니티 댓글마다 웃음이 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조난 당하신 게 아니라 비즈니스 미팅하시는 것 같은데요 두부
-의문의 회의실 바이브
-참리더 청려님 어디 가고 재현이 튀어나왔냐 아이고 재현아 누가 보면 세미나에서 만난 줄 알겠어
-문대야 겨울이라는 설정이잖아너 지금 더워서 패딩 벗으려다 멈칫했짘ㅋㅋㅋㅋㅋ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나눠 마시고, 배낭에서 어설프게 꺼낸 발열 인스턴트를 나눠 먹는 장면도 사람들을 실소하게 만들었다.
-문대 방금 닭발 도시락 못 본 척함ㅋㅋ
-아니 댕댕쓰 본인이 챙겨온 설정인데 처음 보는 것처럼 배낭 뒤지고 있어!
-청려 당신 한여름에도 온수만 마신다고 후배한테까지 이 여름에 끓는 아메리카노를… (말잇못
-도시락 맛없나 봐 둘 다 먹으면서 말이 없어졌어ㅋㅋㅋ
창문의 애매한 눈보라 CG는 그 위화감을 더 웃기게 살렸다.
[그 순간,]
[갑작스러운 굉음이 울렸다…?]
게다가 자잘한 자막까지 들어가자 더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산장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굉음]
[조난자 1 : 천둥인가? (담담)]
[조난자2 : 일단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담담)]
-산사태로 산장에 고립되었지만 긴장 따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무한 생산해내는 PPL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 미치겠네
-둘이 완전 도찐개찐임ㅋㅋㅋㅋㅋㅋ
└자기들은 되게 몰입해서 하는 중이라고 생각중일 거에요… 아마…
이 끝없는 콩트의 굴레가 끊어진것은 청려가 괴담 이야기를 꺼냈을때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7화]
화면의 청려가 웃으며 괴담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혹시 아이돌 괴담 아세요? 저도 최근에 들은 건데.]
[…괴담이요?]
- 왔다.
-드디어ㅋㅋㅋㅋ
-박문대 이번엔 아메리카노 날리냐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괴담'의 도입부를 듣자마자 박문대는 바짝 굳었다.
-문대 귀신 썰까지 무서워하니?ㅋㅋㅋㅋㅋ
-얼굴 다 굳었는데 아닌 척 하는거 너무 귀여워
-난 팬도 아닌데 쟤가 무서워하는 걸 보는 게 왜 이렇게 재밌는지 모르겠어…ㅎ
└박문대 게시판에서 당신을 대환영합니다
실제로는 그 의미심장한 내용 때문에 긴장한 것이었으나, 방송에서는 그야말로 괴담 때문에 굳은 것처럼 보였다.
[녹음실을 배회하며, 성공할 것 같은 아이돌이 녹음을 하면 끼어들어서 같이 녹음을 한대요.]
[나도 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
가운데 귀신의 대사가 시뻘건 자막으로 처리되어 더 분위기를 살렸다.
[정적이 내려앉은 산장 안]
그리고 드디어 약간 싸늘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어?
-야 박문대 몰입했다
-이제야 겨우 꽁트를 벗어났어ㅋㅋ
-청려님 나이스샷
[하하, 걱정 안 해도 돼요. 사실,그냥 제가 지어냈거든요. 녹음실 괴담을 좀 변형해 본 건데.]
[…음, 그렇군요.]
[근데 녹음실 괴담은 진짠 거 아시죠?]
[!]
-거거 사실 폰괴담이었던 거임
-근데 폰괴담이라는 것도 폰폰괴담이었던 거임
-청려 장난 거는 거 드문데… 확실히 후배랑 있으니까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네요 재밌네
-아 개그와 몰입 사이 이정도 딱좋다ㅋㅋㅋ
이후 방송은 슬슬 흐름을 타며 제대로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난로가 고장 났네요.]
[…뒷방 문이 잠긴 것 같습니다.]
서서히 고립된 느낌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다소 진지해진 분위기에서,청려와 박문대는 거실에 마주 앉아속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음… 선배님, 혹시 제가 조언을 구해도 괜찮을까요?]
근래 가장 핫한 신인이 말하는 데뷔까지의 결성 과정과 팀워크에 대한 고민.
[이런 이야기를 이런 자리에서 해보는 게 또 처음이라,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해본 적 없다며 쑥스러워하면서도, 후배의 말에 성의껏 대답하는 선배의 그림은 제법 괜찮았다.
진실이 어쨌든, 서로 낯선 이들이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속내를 털어놓는 것 같은 그 묘한 구도에는 황금시간대 예능에서 노리는 약간의 감동 코드가 있었다.
-ㅠㅠ좀 오글거리는데 또 그게 좋다
-아이돌들 새삼 어린 나이부터 열심히 사는구나 싶다.
-우리 케이팝 아이돌들 다 힘냈으면 좋겠어ㅠㅠ 아 물론 사회면 뉴스에 뜬 새끼들은 제외임
-리더님 말하다 보니 배고파졌나봐 간식 먹네ㅋㅋ
-나 뭔가 문대 아주사 첫 평가 때 인상만 남아 있었거든. 근데 말 되게 예쁘게 해서 의외였고 좋았어.
방송은 그런 느낌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작은 떡밥을 던지고 다음 주로 연결되었다.
[-다음 이야기-]
[라디오 작동되는 것 같은데요…?]
[치지지직- 속보입니다. 조원산 근처 구치소에서 한 흉악범 용의자가 탈출….]
[-!]
-오오오
-본격적이다
-둘이서 산장 탈출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방어?
어차피 이 프로그램 특성상 너무 진지해지지는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 개그로 마무리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껏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다음 주.
시청자 대다수가 경악했다.
-이게 뭐임 대체 뭐임
-ㅋㅋㅋㅋㅋㅋ왘ㅋㅋㅋㅋ
-이게 이렇게 연결되냐
처음에는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방송 초반, 청려와 박문대는 경찰을 기다리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곧 이상하게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닳아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창밖으로 SOS 신호를 보낼 만한 물건을 찾아 산장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손전등이나 신호탄 대신 라디오 하나를 발견했다.
[일단 이거라도 들어볼까요? 작동하는 것 같은데.]
[지지지직….]
그리고 웬 살인 용의자가 교도소를탈출했다는 방송을 듣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두 사람 모두가굳은 그 순간.
[쾅쾅쾅!]
[!]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둔탁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경찰입니다! 문 열어주세요!]
[….]
타이밍상, 당연히 탈출한 살인 용의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전개였다.
[눈길을 주고받는 두 사람]
-헐 생각보다 긴장됨
-ㅠㅠ얘들아 너희 다 똑띠잖아 문 함부로 열지 말자
-지난주 회의실 바이브 다시 살려줘!
다행히, 두 사람은 그저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박문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직위랑 성함, 소속부터 말씀해 주세요.]
[….]
갑자기 문밖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쾅쾅쾅쾅!]
[야, 문 열어!]
[!]
-헐 무서워
-완전 장르 예능 같네
-이렇게 본격적으로 한 적 없지 않았나요?
시청자들은 약간 당황했다. 그리고 더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콰지지직!]
현관이 쪼개진 것이다.
[?]
거대한 물음표 자막 폭탄이 뜬 것도 잠시.
[일단 도주]
문이 완전히 부서지기 전에, 두 사람이 황급히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헐
-생각보다 본격적인데;;
-원래 이 프로에서 설정은 꽁트맛만 보여주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살벌해…?
댓글들은 슬슬 당황을 넘어서 불안감이나 짜게 식은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짜고짜 창문을 뜯고 탈출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쪽이요!]
[예!]
창문에 붙인 초록 배경이 찢겨나가면서 CG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자막도 혼란스러워했다.
[그, 그걸…?]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황]
그 와중에 둘은 한 명이 잠금장치를 움직일 때 다른 쪽이 창틀을 잡아주고 있었다. 아주 손발이 척척맞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빵 터졌다.
-둘 다 너무 과몰입한 거 아니냐고ㅋㅋㅋㅋㅋ
-지난주 비즈니스맨들 어디 감?
-얘들아 방송에서 막 제4의 벽을 그렇게 부숴도 되는 걸까…?
└제4의 벽 파괴(물리)
└ㅋㅋㅋㅋㅋㅋㅋ
두 사람이 뛰쳐나가고 난 뒤, 카메라가 황급히 달려와서 밖으로 나온두 사람을 잡았다.
촬영 장비를 가리기 위해 헐레벌떡 저가 CG가 등장했다.
[눈이 다 녹았었네요.]
[날이 확 따듯해진 덕인 것 같습니다. …외투를 벗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아직 제법 추운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이 사람들… 제법 뻔뻔해…
-날이 따듯해서 눈이 녹았댘ㅋㅋㅋ미 친ㅋㅋㅋㅋ
-주변에 눈 그림 뭔가 했는데 스탭이랑 촬영장비들 대충 CG로 뭉갠 거네ㅋㅋ
-그 와중에 문대 은근히 패딩 벗으려고 했는데 청려가 칼 차단했엌ㅋㅋㅋㅋㅋ
└거기까지는 몰입 깨져서 안 되나봐ㅋㅋㅋ
└아니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요…!
술렁거리는 시청자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둘은 계속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저 이상한 사람이 눈치채고 쫓아오기 전에 얼른 내려가죠.]
[넵.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같이 안 내려가게요?]
[만일의 경우 한 명이라도 사는 쪽이 나으니까요. 흩어져서 가는 게어떨까요.]
[음, 그건 그렇네요. 그럼 다음에또 뵙겠습니다.]
[넵. 잘 들어가십시오 선배님.]
-ㅋㅋㅋㅋㅋㅋㅋ
-저세상 스타일의 현명함
-너무 쿨하다 이게 바로 겨울인것 같다
-이 대화가 이렇게 물 흐르듯이흘러가도 되냐구요ㅋㅋㅋㅋ
-내가 돌덕이 아니라 둘이 아이돌심리테스트 다 똑같은 답 나왔다는것만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이 폭소하는 가운데, 청려와 박문대는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헤어졌다.
카메라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청려를 잠깐 비추다가, 곧 휙 돌아서 박문대를 쫓았다. 박문대는 내려가는 청려를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도망쳐 나온 산장의 현관으로 향했다.
-?
-뭐야
-문대 거길 왜
현관 앞에 선 박문대가 외투를 벗었다. 긴 롱패딩 안쪽으로, 입고 있던 옷이 드러났다.
황토색 구치소 복장이었다.
[!]
박문대는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아, 선배님 운 좋으시네.]
상황을 깨달은 사람들이 절규하기 시작했다.
-?
-미친미친 이게 뭐야
-으아어아악
-헐 죄수복
-정신 나갈 것 같음
-문대가 라디오에 나온 탈주 닌자 걔임? 으아아악
박문대는 휘파람을 불며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마치 리액션처럼, 놀라는 사람들의 감탄사가 짧게 장면에 삽입되었다.
그리고 컷이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산을 내려가는 청려였다.
-도 망 가
-청려님 빨리 뛰세요
-갑분 스릴러 드라마잖아 왜 이래MBSㅠㅠ
하지만 청려는 안 그래도 느릿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못 데려갔네….]
-?
-얜 또 뭐임
청려가 한숨을 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가 스치며, 잠시 카메라 시야에 공백이 생겼을 때.
청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나무 옆으로 전단지 하나가 클로즈업되었다.
[실종자를 찾습니다]
[폭설로 인한 산사태 중 실종]
그 명단에는… 청려의 증명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으아아아악
-얘는 유령임?
-세상에 이게 무슨 구성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맙소사
긴장감 넘치는 BGM이 깔렸다.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 자막과 함께, 방송이 끝났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전개가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무섭다기보다는 충격받은 사람들만 넘쳤다.
-상상도 못 한 반전이라는 드립이치고 싶은데 이걸로도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이 듬
-저 연기 존못 둘을 데리고 잘도 저런 걸 할 생각을 했구나 MBS
-히익 설마 연기를 못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척하는 구성을 노린건가!
└? 무슨 소리임
└귀신하고 탈옥범이면 둘 다 조난당한 게 아니니까 지난 주에 만났을때 침착 그 자체였던 거 아님?ㅋㅋㅋㅋ
└헐
사람들은 갑자기 완성된 큰 그림에 당황했다가, 이윽고 재밌어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까지 웃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꽁트로 모든 게 완성됨
-ㅋㅋㅋㅋ이걸 이렇게 맞추네
-졸지에 제작진의 큰 그림됨
-아ㅋㅋ 이런 거 너무 재밌어 지난주 꺼 재탕하고 와야지ㅋㅋㅋ
막장이었지만 확실히 몰입과 재미를 챙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그러웠다.
게다가 둘 다 팬덤이 어지간히 크다 보니 여론을 밀기도 쉬웠기도 했다.
-오늘 일단 친해지세요 정말 재있었어요∼ VTIC 청려 앞으로 자주예능에서 보고 싶습니다^^ 테스타 문대도 파이팅!
-박문대가 단독 예능이 처음인데도 천연덕스럽게 잘해준 것 같아요. 청려 선배님 케미도 좋았네요. 추천!
-청려와 박문대 모두 정말 탁월한 캐스팅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웃는 기본 이모티콘)
연예 기사 댓글이 없어진 덕에 시청자 게시판이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청려나 박문대 개인을 잘 모르는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파격적이고 웃긴 구성으로 평이 좋았기 때문에, 팬들은 별 걱정 없이 웃으며 예능떡밥을 즐겼다.
그리고 며칠 뒤.
새로운 떡밥이 또 떴다.
[저는 테스타의 문대 (강아지 이모티콘) 이것은 W라이브]
박문대의 첫 개인 W라이브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098화]
'송출은 지금 시작된 게 맞고.'
나는 화면이 잘 나오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간 딜레이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약간 기다린 후에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음, 이렇게 개인적으로 인터넷에 영상을 내보내는 건…그 PR 라이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일부러 천천히 말하면서 딜레이된 반응을 살폈다. 하트와 인사와 어그로로 댓글이 꽉 찼다.
'아직 읽기는 힘들겠군.'
나는 소개를 계속했다.
"뭘 해볼까 고민했는데… 제가 긴장돼서요. 일단 서로에게 익숙한 걸로 준비해 봤습니다."
나는 살짝 스마트폰을 각도를 조작해서 내렸다.
"오늘은… 짠."
카메라가 내 앞의 상을 비췄다. 오늘의 메뉴인 쌈밥이 보였다.
"밥을 같이 먹는… 컨텐츠로 준비해 봤습니다."
나는 수저를 들어 올렸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싸놓은 쌈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음, 제육볶음 맛이다.
'괜찮네.'
첫 방송이라 생짜 배달로 구성하긴 양심에 찔려서 만들어봤는데, 익숙한 맛이라 먹기 편해서 도리어 나았다.
'오디오를 신경 쓰자.'
나는 입안의 음식을 다 씹어서 삼킨 후에 잡담을 이었다.
"일부러 저녁 식사쯤에 맞춰오긴 했는데요, 다른 스케줄 있으시면 나중에… 식사하실 때 틀어놓고 보시면,"
-카메라 각도!
-눈 안 보여요
-오빠 카메라 좀ㅠㅠ
-벌써 먹기 시작했네
"아."
스마트폰을 다시 확인하니, 고정문제인지 내 눈이 살짝 보였다 말았다 하는 정도로 각도가 내려갔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밥 먹는 컨텐츠 보여주기엔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싫다고 하니 받침대를 조정해서 스마트폰을 약간 뒤로 뺐다.
"잠시만요."
나는 받침대를 돌려서 더 튼튼하게 고정한 뒤, 스마트폰을 톡톡 쳤다.
"된 것 같은데, 어떠세요."
차분히 기다리니 댓글에 답변이 섞이기 시작했다. 읽을 수 있는 것들만 빠르게 눈에 담았다.
-우아아
-내 아이돌 나를 잡고 흔드네
-문대 쇄골 일자다
-잘 보여
-굿
-조아용
"잘됐나 보네요."
내가 스마트폰을 흔드는 것에 반응하는 댓글들을 보고 있자니, 꼭 이 안이 조그만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것 같았다.
'꽤 재밌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당한 댓글을 골라서 중간중간 대답했다.
"좋아하는 메뉴냐고요? 음… 전 웬만하면 객관적으로 맛있는 건 다 좋아해서. 일단 맛은 괜찮습니다."
"…'배달시킨 건가요?', 아니요. 그냥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썩 요리할일이 별로 없다 싶다.
스케줄이 바쁘다 보니 그냥 사 먹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그쪽이 훨씬 편하기도 하고.
-요리 잘해요?
-나도 먹고 싶어ㅠ
-닭발좌 먹방한대서 들어옴
-어떻게 했어?
-헉 홈메이드
-맛 설명해줘ㅠㅠ
오, 의외로 반응이 격했다.
"드시고 싶다는 분들이 보이는데, 방송 끝나면 저희 계정에 간단한 레시피라도 올려보겠습니다. 음, 근데 특별히 비법은 없어서… 평소에 드시던 것과 별 차이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새 쌈밥을 입에 넣었다. 불고기 맛이었다.
"그리고 자세한 맛 설명은… 달짝지근한 양념이 밴 고기와 밥이 잘어울리고, 쌈장이 살짝 자극적인 맛을 주다가 상추가 상쾌하게 마무리해줍니다."
눈으로는 계속 댓글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외국어가 많다.'
-MOONDAE I love you
-No eng sub?
-hello (웃는 이모티콘)
-is it mukbang?
-did you got KIMCHI refrigerator?
이제 데뷔한 그룹의 개인 방송까지 용케 찾아오셨다 싶다.
아주사 가 글로벌 런칭 같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뭐 해외에서 파란을 일으켰다는, 언플 기사 한번 보지 못한 걸로 봐서는 그 효과는 아닌 것 같고.
'VTIC과 활동이 겹쳐서 덤으로 아셨나.'
아니면 위튜브 알고리즘의 늪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제법 신기했다.
"아, 김치냉장고. 아직 못 받았어요. 그냥 주실 때 되면 주시겠거니 맘 편히 기다리는 중입니다."
나는 이후로도 계속 적당한 질문에 답변하며 식사를 계속했지만, 의외로 이 '적당한 질문'이라는 걸 선정하기 어려웠다.
한 일 분쯤 들여다보고 있어도 외국어와 어그로만 난무하는 경우가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노잼
-많이 먹어!
-아 하필 곰머
-문대 폰으로 하는 중?
-뒤에 뭐 움직여요
-필터 바꿔 줘
흠, 막 던지는 어그로들 사이로 겨우 하나 답변할 만한 걸 잡았다.
"아, 이거 회사 폰입니다. 제 건 여기."
나는 적당히 던져뒀던 구형 스마트폰을 가져와서 카메라 앞에 적당히흔들었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 톡이 왔다.
지이이잉-
[VTIC 청려 선배님]
"…."
타이밍 X 같네.
그나마 팝업에 내용은 안 뜨게 해둔 게 다행이겠다.
-청려
-헐 브이틱
-친해요?
-으 싫어
댓글 보니 이미 다 잡혔다. 나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아, 선배님과는 일단 친해지세요 이후로 가끔 안부 인사 정도 나누고 있습니다."
이거 바로 답장 안 하면 VTIC 쪽에 꼬투리 잡혀서 까이나?
그러나 답장하면 첫 W라이브 중태도 논란이 될 것 같기도 하니 먼저 양해를 구하자.
"일단 봤으니까 짧게 답장 드려도될까요."
-허락 안 구해도 돼ㅠ
-응응
-내용 보여줘
-뭐라고 보내?
-친해요?
'환장하겠네.'
나는 얼른 톡 내용을 확인했다. 그냥 일 관련 잡담이었다. '넵 알겠습니다' 정도 답변하고 얼른 껐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
마침 준비한 것도 있었다.
나는 당장 적절한 댓글을 찾아냈다. 방송 켜고부터 꾸준히 들어오던질문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어디 있어요?
"음, 다른 멤버들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네요. 몇 명은 스케줄 중이고,몇 명은 집에 있습니다. 잠시만요."
나는 당장 일어나서 카메라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리고 방문 밖으로 나가서 이미 거실에 대기 중이던 놈을 데리고 들어 왔다.
"집에 있던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나 큰마음 먹었어요'라고 전신으로 외치는 중인 선아현이었다.
근 이삼 주간 상담을 받더니, 조금 용기가 생겼는지 출연을 결정하셨다만 아직 오래 나올 엄두는 나지 않는다고 하니, 일단 이렇게 중간에 잠깐 있다가 나가는 식으로 구성해뒀다.
다행히 댓글 반응은 좋았다.
-헐 아현이
-사스미 어서와ㅠㅠ
-사랑해
-청우 오빠 없어요?
-유진이 불러줘
몇몇 거부반응 정도는 선녀였는지 선아현의 안색이 꽤 안정적이었다.
선아현은 약간 달아오른 얼굴로 스마트폰에 손을 흔들었다.
"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하지만 딜레이되는 댓글 시간 때문에 선아현이 볼 수 있던 내용은 주로 '얼굴 미쳤다;' 정도였다.
"다들 잘 지내신다는 것 같습니다. 선아현 씨는 요새 뭘 하고 지내시나요."
"아! 저, 저는 뜨개질을 배웠습니다…! 보, 보여드릴까요?"
"좋죠."
우당탕탕. 선아현이 당장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카메라에 부탁했다.
"…쟤가 뭘 내밀면 박수 좀 많이 쳐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막 배워서 한창 좋아할 때라."
이러면 웃겨서라도 많이 올리겠지.
"이, 이거입니다…!"
선아현은 번개 같은 속도로 돌아오더니, 몇 가지 알록달록한 물건을냉큼 스마트폰에 내밀었다.
바로 수세미다. 식빵부터 딸기까지 종류별로 떠 놨다.
그리고 부탁대로, 사람들은 선아현이 시야에 돌아오자마자 박수 이모티콘으로 댓글을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선아현은 딜레이 때문에 아직 수세미를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박수를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화색이 되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정도면 됐나.'
더 두면 또 갑자기 예상 못 한 타이밍에 등장한 트라우마 제조기 수준 악플이 선아현의 멘탈을 박살 낼수도 있으니 이만 보내도 괜찮을 것같았다.
하지만 선아현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슬쩍 상 앞에 앉아서 수세미에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시… 식빵을 먼저 떠서, 조금 모양이 이상한데, 따, 딸기는 잘 만든것 같아요."
말리기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리고 문이 불쑥 열리더니,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문대 씨∼ PR 먹방 10분 끝났는데 계속하고 계시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큰세 진이었다.
"쌈밥 하나 주시면 없던 일로 해드릴게요∼"
"저도 쌈밥!"
그 뒤로 차유진이 손을 번쩍 들고 들어왔다. 누가 봐도 방송 보다가난입한 놈들이다.
'…분명 고기가 프라이팬에 그대로 남아 있을 텐데.'
그냥 주방에만 가도 먹을 수 있는 걸 굳이 여기 온 것은 W라이브 난입 목적뿐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방이 시끄러워졌다.
"헐! 이거 진짜 맛있네."
"주방에 고기 많이 해뒀으니까 먹어."
"아냐, 이 방송용으로 미리 정성껏 싸놓은 형태라 더 맛있는 것 같아."
"최고!"
차유진은 전형적인 먹는 예능 게스트처럼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선아현에게도 쌈밥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선아현이 먹고 싶은데 미안한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두통이 밀려온다.
"…편하게 먹어라."
"으, 으응!"
"형, 저도 많이 먹어요?"
"맘대로 해라."
"예 압!"
나는 순식간에 작살나는 쌈밥을 보며, 카메라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양을 더 넉넉히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댓글은 웃느라 난리였다. 웃음이라도 줬다니 다행이다.
"쌈밥이 다 떨어진 관계로… 오늘의 먹방은 이만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대신 질문 타임이든 뭐든 적당한 컨텐츠를 생각해 내려는데, 쌈밥 하나 먹고 손 턴 큰세진이 손을 내저었다.
"어? 야,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우리가 쌈밥 싸줄게!"
"…!"
…그래서 그 후 20분간, 부엌으로 스마트폰을 옮겨서 쌈을 싸는 방송을 했다.
"차유진 상추를 대체 몇 개나 쓴거야?"
"싸, 쌈이 얼굴만 해…."
그리고 얼마 뒤 건강검진 때문에 병원에 다녀온 나머지 세 명까지 합류했다.
"다들 뭐해?"
"형! 이거 드셔보세요!"
결국 합류한 놈들에게 쌈밥을 먹여서 시식 평을 들은 후에야 W라이브를 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시청자수가 잘 나왔던 것을 보면 흥미로운 컨텐츠였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겠다…
'…그런데 원래 하려던 말은 못 했군.'
방송이 난입한 놈들에게 해적질당하면서 되는 대로 흘러가 버리다 보니 일어난 부작용이었다.
나는 대신 SNS를 켰다. 그 과정에서 짧게 인터넷을 살펴본 결과, 반응이 꽤 괜찮았다.
-난 분명 먹방을 클릭했는데 정신차려보니 천하제일 쌈밥대회를 보고 있었음
-닭발 영상 지박령들 오늘 W라이브 뜬 거 보고 흥분해서 달려가더라
-아 위튜브에서 했으면 닭발좌 이제부터 쌈밥좌로 개명 쌉가능인데킈=1
-쌈밥 뜯긴 문댕 (캡처 사진)
'이 정도면 성공적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약속했던 짧은 쌈밥용 고기 레시피를 새 글로 적어 내렸다.
그리고 추가 문구와 함께 업로드했다.
[十 새 앨범 준비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이날 언급한 김치 냉장고는 이틀 뒤 바로 숙소로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