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사실, 2집 준비는 좀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진작에 예상했다.
데뷔 앨범을 준비하며 지옥을 맛본회사 실무진들이 다음 앨범 준비를 무조건 일찍 시작하려 했기 때문이다.
"수록곡 후보는 거의 채웠구요, 이 풀 내에서 앨범 컨셉에 따라 뽑아다가 구성할 계획이에요. 나머지는 다음 앨범으로 빼거나 드랍할 거구요."
"넵."
단지 문제는 본부장 놈이 그놈의자체 제작 뽕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시간도 넉넉하니까, 타이틀곡 관련해서는 충분히 상의해보시고 천천히 말씀주셔요."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타이틀곡 프로듀싱을 화끈하게 미뤄주셨기 때문이다.
'…데뷔 앨범이 성공한 게 화근이었나.'
자기 발상이 연예계에서도 잘 통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시간이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두 달 이상으로 기한을 잡아둔 데다가, 곡이 이미 거의 다 나온 상태였다.
덕분에 멤버들 안색이 썩 괜찮았다.
"이번에도 좋은 곡 잘 골라보자."
"래빈이 편곡 벌써 기대되는데?"
"감사합니다."
아직 컨셉도 미정인 상태에서 타이틀 후보 스무 곡 중에 세 곡을 골라와 달라는 말에도 희망찬 분위기가 조성될 정도였다.
…그러나 며칠 뒤, 차라리 자체 제작 쪽이 나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콜라보요?"
"그래, 그거!"
갑자기 본부장이 부를 때부터 싸하다고 생각은 했다만, 이런 폭탄이나올 줄은 몰랐다.
"어떤… 콜라보를 말씀하시는 건지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자, 봐봐요."
본부장이 자신감이 줄줄 흐르는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일단 큰 글씨부터 눈에 들어왔다.
[신규 사업 제안서]
[모바일 게임]
[(주) T1 플레이즈]
"…?"
"이번에 T1 에서 자회사로 인수한 벤처에서 개발하는 게임인데, 이게 진짜 딱 될 느낌이야. 시기도 딱이고. 우리 테스타랑 콜라보하면 시너지 날게 눈에 보여요. 어? 게임이니까 컨셉 잡기도 편하고 얼마나 좋아."
줄줄 쏟아놓은 본부장은 흐뭇한 얼굴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이거 내부 서류인데, 내가 우리 테스타 믿고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서 딱 보기만 해, 말은 말고."
X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모바일 게임…?'
제발 누가 꿈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옆에서 류청우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모바일 게임과는 접점이 없는 사람이라 좀 덜 경악한것 같기도 하다.
"…혹시, 어떤 식의 콜라보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자, 생각해 봐요. 게임 발매하면서 우리도 같이 컴백하는 거지. 그리고 서로서로 홍보해주는 그림으로 가면 관심이 두 배가 될 거 아니야."
이런 X 같은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뇌하수체에서호르몬 대신 침이라도 생성하나?
'모바일 게임에 대체 무슨 기대를하는 거냐…'
아니면 그쪽에서 무슨 청탁이라도 받았나?
아니, 광고모델이면 모를까, 이렇게까지 아이돌 앨범하고 깊게 엮여서발매하는 걸 반기는 쪽은 거의 없을것이다.
'그 아이돌 이미지에 잡아먹히니까.'
두 달 뒤 발매라면 이미 거의 완성된 상태일 텐데, 거기다가 낯선아이돌을 홍보하는 내용을 끼워 넣어? 망작되기 딱 좋다.
'이걸 저쪽에서도 밀었다면 정말 테스타 팬들 돈 뽑아먹고 한탕 하고접으려는 놈들이란 뜻인데…테스타 브랜드 이미지부터 박살 날미래가 눈에 선했다.
'양산형 X망겜 밈 붙겠네.'
아니, 애초에 어떻게 게임을 홍보하는 내용을 앨범에 넣으라는 건가.
그것도 모바일 게임을.
이 본부장이 낚인 건지 아니면 밀어붙인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X 같았다. 저 새끼 라니지나 좀 깔짝거려 보고 이러는 것 같거든.
"금요일 오후에 거기랑 미팅 잡아놨으니까, 마음의 준비 딱 해놓고."
"…본부장님, 혹시 이미 다 이야기가 끝난 상황입니까?"
"내가 이미 윗선에 다 말해둬서 싹 정리해 뒀어. 우리 테스타는 열심히 하기만 하면 돼요."
"…알겠습니다."
확인 사살이었다. 여기서 안 하겠다고 지랄해 봤자 회사와 감정싸움만 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하게 된다는 뜻이다.
'X발 진짜…'
다음 앨범은 미리 짜놓고 들고 가서 컨펌을 받아야 하나. 미치겠다.
"…."
그렇게 본부장과 미팅을 끝내고 나오는 길.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놈이 있는지 확인해 봤다.
'이세진 둘 빼곤 전멸이군.'
큰세진이야 그럴 줄 알았다만, 이세진은 의외였다.
'게임하는 취미라도 있나.'
어쨌든 나머지 넷은 '좀 당혹스럽지만 열심히 해봐야겠다' 분위기다.
아마 데뷔 앨범 정도의 고난을 예상하는 것 같았다. …일단 그냥 두자.
'어차피 금요일에 미팅 나가면 눈치 채겠지.'
그 순간, 큰세진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야, 어떻게 생각해."
"망했지."
"하하."
큰세진은 느리게 웃더니, 결국 얼굴에 짜증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 건 진짜 좀 그렇다. 그치?…노력으로 해결될 부분이 아니잖아."
"…맞아."
"너무하네 정말…."
큰세진은 뭔가 말을 이으려다가, 자기 목소리가 좀 커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냥 입을 닫았다.
'현명한 선택이군.'
나는 대신 이세진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세진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보고 걷고 있었다.
"…."
저거, 이 사태 때문에 저런 거 맞나? 그 아주사 때도 본 적 없던 죽상인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옆에 있던 차유진이 이세진의 등을 탕탕 쳤다.
"형! 아파요?"
"…! 아니, …괜찮아."
말하는 건 멀쩡하다.
'캐볼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그만뒀다.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지금 당장은… 이 망할 사태에 해결책을 떠올리는 게 급선무다.
'…보너스 트랙 하나만 넣어서,게임 주제가로 쓰면…'
본부장한테 택도 안 먹히겠지. 젠장.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머리를 굴렸지만, 별다른 해결점은 (당연히)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 게임 콜라보 사태는 또 예상치 못한 사고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중이었다.
이 일로 갈리는 건 테스타뿐이 아니던 것이다.
이 일의 최초 발단은, T1 스타즈 Ent가 '잡유니버스'에 드디어 등록되며 기업 리뷰를 쓸 수 있게 되면서였다.
데뷔 앨범 준비하다 번아웃이 와서 퇴사한 실무진 몇이 신랄한 리뷰를 쭉 적어두었다.
[장점 : 소속 가수는 열심히 함,밥이 맛있음.]
[단점 : 체계 없는 구조, 엔터사 경험 없는 윗선의 멍청한 패악질, 무리한 일정 때문에 사라진 워라밸.]
[총평 : 이직만이 살길. 가수도 이직하길 바람.]
가장 최근에 작성된 리뷰가 이 정도였다. 별점은 하나.
유명 기획사의 재직자 리뷰는 제법 관심을 받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여러 커뮤니티에 이 캡처 역시 돌아다녔다.
-여기도 사람 갈아 넣네… 대기업 계열사라 오히려 심한 것 같다 위에서 알못이 설치는 듯
-테스타 살려
-어휴 한숨만 나옴
-팬들이 총공 괜히 한 게 아니구나
└그것 때문에 더 워라밸 없어진거 아냐?
└저기에 팬 언급 한 마디도 없는데 왜 생각이 그쪽으로 흘러
└갑자기 팬 머리채 잡네;;
└너희가 이러니까 못 적어둔 거겠지ㅎㅎ…
테스타의 데뷔 활동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이래저래 다들 말이 많았다.
그리고 이 캡처는 직장인 익명 어플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엔터회사는 진짜 힘든가 보다]: 관심이 있어서 이직 알아봤는데 무섭네요. 어차피 제가 관련 직군아니라 힘들긴 하겠지만ㅠ 실제 다니시는 분들 평은 어떤가요? (캡처) 엔터테인먼트
-솔직히 이 연봉으로 할 일은 아닙니다 (MS 엔터)
-사람 하는 일이 다 똑같죠ㅎㅎ(LeTi 엔터)
-초봉을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주는데 일은 보람 있어요. 근데 이것도 부바부인 듯 (트레져 엔터)
그럭저럭 한탄 글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 글이 첫 페이지에서 사라지기 직전, 갑자기 당사자가 등장했다.
-ㅋㅋㅋㅋ우리 회사네. 절대 오지마세요 stay… (T1 스타즈 엔터)
└헐 등판하셨네
└많이 힘든가요?
└네 (T1 스타즈 엔터)
└ㅜㅠㅠㅠ아이고
└ㅋㅋㅋ모든 것을 알려주심
짧고 굵은 답변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수수 붙어서 궁금한 점을 물었고, 결국 직원은 그라데이션으로 분노하며 많은 것을 올려두고 갔다.
-일단 윗선에 진짜 이상한 사람 많아요 나 별사람을 다 만나봤는데이런 수준은 처음이에요. 데뷔 앨범도 말아먹을 뻔했어요. 무슨 이상한 컨셉 들고 와서…
-이번에도 별 이상한 거 가져와서 하자는데 이건 이미 컨펌 나서 하게 될 듯… 솔직히 소속 가수가 불쌍함
-ㅌㅅㅌ보는 건 좋은데, 데뷔 때 윗선 설득하겠답시고 너무 고생하는 걸 봐서 좀 안쓰럽기도 하고… 일단 내가 너무 안쓰럽네요. 여길 다닌다는 게ㅋㅋㅋㅋ
-다들 비슷한 생각하고 있어서 더 적어도 누군진 안 들킬 것 같지만… 열 받아서 여기까지만 하고 갈게요 우리 회사 이직 절대 하지마요∼(T1 스타즈 엔터)
얼마 지나지 않아 Hot글에 올라간 뒤 이 댓글은 삭제되었지만, 이번에도 캡처가 남아서 떠돌았다.
당연히 두근거리며 다음 앨범을 기다리던 팬들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진짜 맞아?
└찐임 저기 회사 메일로 인증해야 하는 곳이야.
└아… 미치겠네
급격한 싸함을 느끼던 팬들은, 황급히 리얼리티 2화를 돌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열정에 가득 찬 훈훈한 제작일지처럼 보이던 2화와 그 비하인드 영상들에게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애들 리얼리티에서 발표하는 거 설마 위에서 이상한 거 들고 와서설득하려고 한 거야?
-들고 왔다는 놈이 저 본부장 같음. 맨 가운데 앉은 아저씨. 저 사람 보면서 발표하네.
-보니까 마법소년 쪽 타이틀은 애들한테 떠넘겨놓고 하이파이브를 회사에서 작업했네. 근데 하이파이브 편곡에 래빈이 있었잖아.
└하이파이브 쪽을 설득한 게 맞는듯
└그럼 아예 두 곡 다 이때부터 재작업한 거네? 한 달도 안 남겨두고?
└ㅋㅋㅋㅋ한 달 내로 컨포에 뮤비에 안무까지 두곡 다 했다고? 제정신이야? 애들 재우긴 했냐?
└마법소년만인 줄 알았을 때도 개빡쳤는데 두 배였네ㅋㅋㅋ아ㅋㅋㅋㅋ
불타오르던 팬들은 곧 미래에 대한 걱정에 등골이 싸늘해졌다.
-글쓴 분이 이번에도 무슨 이상한 컨셉 들고 왔다고 했잖아, 근데 이미 컨펌났다고.
-아 설마
-하….
-야 제발 차라리 기간 넉넉히 주고 애들 시켜 제발.
공포에 질린 팬들은 회사에 전화와 메일로 문의를 넣었다. '최근 준비중인 테스타의 2집 앨범의 컨셉이 이미 정해졌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도는데 사실이냐'는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매크로를 돌린 것 같은 한결같은 답변이 돌아왔지만, 곧 쏟아지는 물량에 약간 더 내용과 형식이 정중해졌다.
[T1 스타즈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우선 문의해 주신 건은 사내 기밀사항이기 때문에 임의로 답변드릴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자사는 테스타의 새로운 앨범준비를 위하여 많은 것을 준비하고있으며, 아티스트의 의견 역시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절대 안심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만약 앨범 컨셉이 미정이거나 테스타가 직접 맡았다면, 벌써그 부분은 확답이 돌아왔을 것이기때문이다.
-댓글 캡처 내용이 맞았나 봐요
-아 어떡해
-차라리 테스타한테 회사를 줘라 그게 낫겠다
팬들은 결국 약간 더 극단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리얼리티에 나온 게 곽신균 본부장 맞지? 그 사람한테 다이렉트로꽂아야 피드백 나올 것 같아
그리고 이 선택으로 엄청난 결과가나왔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00화]
자고 일어나니 상사가 없어졌다.
'꿈인가.'
꿈이 아니었다.
지난 며칠간 팬들과 기 싸움하던 본부장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퇴사는 아니다. 그냥 원래 본인이 일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안 그래도 본부장은 슬슬 포트폴리오 들고 튈 각을 보던중이었던 것 같다.
실무진에게 카더라로 주워들은 내용으로는 원래도 1 년만 있다가 갈생각이었다고.
그러던 중 팬들과의 분쟁이 나니 그걸 핑계로 위에 잘 이야기해서 냉큼 날라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본부장의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 있던 '테스타와 게임의 콜라보'는….
속행되었다. 이미 계약서까지 다찍어뒀더라.
'X발.'
그렇다고 본부장 보내버려서 좋아하는 팬들한테 이것도 좀 어떻게 해달라고 찡찡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이 바로 미팅이 잡힌 금요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정말 팬이에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미팅 자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의외로 수더분한 인상의 남녀였다.
느낌상 사기꾼 같은 인상을 예감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이쪽도 콜라보 이야기가 급작스러웠는지, 좀 얼이 빠진 눈치였다.
"그… 일단 저희 게임부터 설명드릴까요?"
"예, 예!"
"경청하겠습니다."
"넵, 그러면…
이어지는 내용은… 제법 특색 있고 재밌게 들렸다.
그것도 의외였다.
'호오.'
"…그래서, 운석에서 나온 의문의 물질로 멸망한 서울을 탐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게임의 주요 스토리입니다. 서울에 있는 다양한 세력들을 만나면서 선택에 따라 동료와 능력이 바뀌는 로그라이크식 어드벤처예요."
"굉장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김래빈이 박수를 치고나왔다.
이건… 진짜 괜찮을 것 같다는 신호인데.
의외로 본부장이 투척하고 간 게 쓰레기가 아니라 질 좋은 소고기일수도 있다는 뜻인가.
게다가 이 사람들, 제법 호의적이었다. 그냥 말만 호의적이라는 게아니라, 일로 써먹을 만한 호의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콜라보가… 저희도 갑자기 받다 보니까 조사할 시간이 좀 부족하긴 했는데요, 그래도 기초적으로 확인했을 때… 여러분께서 만든 '마법소년'이 정말 멋졌어요."
"아, 감사합니다. 저희도 빨리 게임 확인해 보고 싶네요. 정말 재밌을것 같습니다."
"아, 그러면 잠깐… 플레이 한번해보실래요?"
"예?"
"버그 수정 중이긴 한데 이미 플레이는 가능한 수준이에요! 진행에는 무리 없을 거예요."
왼쪽에 앉은 사람의 품에서 스마트폰 기기가 쑥 나왔다. 크기가 큼직한 안드로이드 기종이었다.
스마트폰을 쓱쓱 만져서 게임 실행 화면을 켠 사람이 류청우에게 그것을 건넸다.
"아…."
"저요! 저 해요!"
약간 어색하게 받아든 류청우는 간절한 차유진의 요청에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잘하고 재밌어하는 사람이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곧 당부의 말과 함께 스마트폰을 넘겼다.
"조심히 써."
"예아!"
차유진은 얼른 받아다가 눈을 빛내며 게임을 시작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저쪽도 신난 것 같은데.'
설렘과 긴장이 어린 눈으로 테스타를 보는 두 사람을 의식하며, 나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자유도가 높고 모바일인 탓에 모든 것은 세밀히 구현하기는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게임은 텍스트와 그래픽, 일러스트가 번갈아 나오며 진행되었다.
다만 아주 세련되었고, 컨셉추얼했다.
게다가 재밌었다. 동료를 모아 스토리 챕터를 클리어하는 구성이 꽤괜찮았다.
'이거… 되겠는데.'
왜 T1 이 인수했는지 알 것 같은 퀄리티였다.
'…근데 여기 어디에 아이돌 홍보를 넣냐.'
그것만 생각하면 아주 말문이 막힌다.
어쨌든, 순식간에 챕터 1을 끝낸차유진이 신나서 외쳤다.
"정말 재밌어요!"
"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아쉬워하는 차유진에게서 힘들게 스마트폰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떠셨어요? 혹시 콜라보하면 이런 게 좋겠다∼ 하는 부분 있으세요?"
"….으음."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 할 것같습니다."
"…역시 그렇죠? 저희도 고민해 볼게요."
다들 예상했던 상황이기 때문에 숙연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게임이 망작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첫 미팅은 '각자 생각해보자'는 애매한 대화로 끝났다. 하지만 나름대로 전망이 나쁘지 않았는지 분위기는 괜찮았다.
"저 게임 BGM을 변주해서 타이틀곡으로 쓰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거 광고라 공중파 음방은 못나오는 거 아니야?"
"헛."
나름대로 영감을 얻었는지 그림을 그려보던 김래빈은 이세진의 지적에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나는 약간 안심했다.
'일단 브랜드 이미지 박살 날 일은 없겠군.'
무리수라고 욕먹고 성적이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앨범 내는데 지장이 생길 정도로 우스갯거리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문제는 대체 뭘 콜라보하냐는 건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토의가 열렸다.
우선, 류청우가 회사에서 실무진들에게 들은 제안을 전달했다.
"수록곡하고 게임 BGM 교환이 제일 깔끔하지 않냐…는 게 현재 의견이야."
"음, 무난하네요."
참견할 본부장 놈도 없으니 그냥무늬만 콜라보로 하고 적당히 끝내버리자는 소리였다.
'직장인의 비애가 느껴지는군.'
하지만 의외로 큰세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러면 우리만 너무 일하는데요?"
"어…?"
"둘 다 음악 관련이잖아요! 아마 AR팀 분들하고 저희만 고생하게 될것 같은데…. 음, 이쪽도 챙겨오는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그렇군.
'손해 안 보는 게 아니라 이득을 봐야 하는 지점까지 올라갔다는 거지.'
확실히 저대로 가면, 일만 가중되고 이득은 게임사만 먹고 끝난다.
게임은 홍보 효과를 받지만, 출시도 안 한 게임과 콜라보한다고 테스타가 얻을 인지도 이득은 없기 때문이다.
'…게임하는 사람들이 BGM 때문에 아이돌에 입덕할 일도 드물거고.'
"그럼 대체 의견은?"
"이제부터 생각해 보자는 거죠∼ 어차피 일해야 하면 보상이 있는 쪽이 하는 맛도 나도 좋잖아요."
"으음."
그리고 사람들이 고민에 잠기려는찰나, 이세진이 침음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냥, 회사 사람들한테 맡기자. 앨범 준비하기도 바쁜데 뭘 콜라보 할지까지 우리한테 정하라고 하는것부터가 이상한 거 아냐?"
"형, 그러면 작업량이…."
"그건 AR팀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는 녹음만 하겠다고 말하면 돼."
이세진은 딱 잘라 쳐냈다.
"애초에… 이 상황이 이상한 거야. 왜 신인이 이런 것까지 만들고 결정하냐고. 회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
너무 맞는 말이라 그냥 수긍하고 싶어지는군.
드물게 말을 많이 한 이세진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마 계속 생각하던 것을 쏟아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차유진이 해맑게 대답했다.
"근데 다른 거 하고 싶어요! BGM 재미없어요."
"…."
이세진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저런.'
그래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많이 나아졌다.
"자∼ 그럼 다수결로 하죠? 새로운 콜라보레이션 주제를 생각해 내고싶다, 손!"
놀랍게도 이세진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손을 들었다.
'징한 놈들.'
저거 분명 큰세진 빼고는 이득을 보려는 게 아니라 '도전해 보고 싶어서', '멋진 작업물 만들고 싶어서'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 와중에 큰세진이 깜짝 놀란 척한다.
"헐, 문대 안 하고 싶어?"
"아니, 난 보류. 괜찮은 의견이 나오면 그쪽으로 하고, 아니면 그냥 BGM 이나 만듭시다."
"그래. 일단 그렇게 진행하자."
류청우는 다시 이야기를 돌렸다.
"자, 그럼 우리 그룹이 게임과 콜라보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뭘까."
"…게, 게임에 출연할 수 있다?"
"돈? …은 물 건너갔네요. 계약도이미 끝났고."
"예. 둘 다 이번에는 해당 사항이없는 것 같습니다. 출시가 코앞인데저희를 넣어주실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음, 맞는 말이다.
혹시 시간이 충분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공들여 세계관 짠 것 같은 게임이 뜬금없이 연예인에서 따온 캐릭터를 출시하자마자 넣고 싶지는않겠지.
'…잠깐.'
…이거, 역으로 생각해 볼 수도있지 않나?
"이건 어때요."
"응?"
"우리 캐릭터를 넣어달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캐릭터를 뽑아서 쓰죠."
"…?"
나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우리랑 제일 닮은 게임 캐릭터들 추려서 그걸로 서브곡 하나 뽑는 게 어때요."
"…!"
"타이틀이 아니니까 공중파 못 타도 상관없고, 케이블이랑 위튜브만공략해도 요새는 판이 크니까요."
잘 만든 게임 IP, 그냥 우리 세계관으로 빨아먹자는 뜻이었다.
"그… 동료 캐릭터들 목록을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예."
"어…."
다시 만난 게임사 측 사람들은 뜬금없는 제안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더니, 약간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저희가 수익 창출용으로 동료 캐릭터 뽑기 시스템이 있기는 한데요."
"네."
"그, 요소가 전부 랜덤이거든요…?"
"…!"
무작위로 생성된 캐릭터를 뽑는다는 말이었다.
"근데 일러스트가 있던 걸 봤는데요."
"그거 카툰렌더링으로 뽑은… 음, 아무튼 그것도 랜덤으로 만든 거라고 보시면 돼요!"
"…."
여기서 막힐 줄은 몰랐는데.
그때, 김래빈이 손을 들었다.
"…그럼 차유진이 썼던 동료들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번 이름이 바뀌는 겁니까?"
"아, 그 친구들은… 그, 다음 챕터시작하면서 사실 다 죽어요."
"…!"
"주인공이 혼자 서울을 탐험하게 만들어야 해서… 하하."
유일하게 고정된 동료들이라며, 앞에 앉은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었다.
"죽는 거 싫어요…."
차유진은 급격히 우울해졌다. 그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 그럼 그냥 쟤네 쓰면 되는거 아닌가?'
고개를 돌리니 차유진을 뺀 모두가그 생각을 떠올린 얼굴이었다.
'…마침 7명이었지.'
이 게임, 파티가 4명 구성인 덕에 주인공 포함 8명으로 튜토리얼 인원을 딱 잡아뒀다.
류청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가 그 친구들 좀 써도 될까요?"
"어, 네?"
"아, 그러니까… 저희 멤버들이 그 친구들 역할을 하나씩 맡아서, 곡하고 무대를 만들어볼까 하는데요."
"…."
'혹시 싫어할 수도 있다.'
이쪽도 급하게 콜라보 연락을 받은거면, 이렇게까지 엮이기 싫다고 할수도 있지.
'그러면 얌전히 BGM 이야기나…."
"헐!"
"…?"
"너무 좋아요!"
"…!"
"저희야 시간과 예산만 있으면 그런 프로젝트 해보고 싶죠!"
흥분한 여성에 이어서 남성이 두주먹을 불끈 쥔 채 외쳤다.
"우리 애들이 3D로 나오다니…!"
"…."
마음이 일치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의외로, 콜라보는 순조롭게 진행될것 같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01화]
때는 9월 23일 일요일.
테스타의 팬, 러뷰어들은 말라붙은 떡밥에 슬퍼하고 있었다.
물론 테스타는 주기적으로 SNS에 소식을 남겼고, 며칠에 한 번씩은 꾸준히 광고나 행사 관련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팬들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데뷔 활동기의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애들 다른 소식 없어…?
-본부장 놈도 쫓아냈는데 축하 파티 W앱 같은 거 해줬으면 좋겠다한 일주일쯤
-우리도 양심이 있지 벌써 컴백 떡밥 바라는 건 아니다 얘들아 근데 어떻게 위튜브 자체 예능이라도 안될까…?ㅎ
-매일 진수성찬 주지육림이다가 보리밥에 간장만 먹는 느낌이야ㅠㅠ
그렇게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던 팬들은, 다가오는 월요일에 괴로워하며 잠이 들 예정이었다.
그 동영상이 뜨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방금 공식 계정에 뭐 올라왔는데 위튜브다? (링크)
[테스타 (TeSTAR) 'Bonus book' Comeback Trailer (with 127 Section)]
-?
-컴백 트레일러?
-갑자기요?
-심정지 을 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기겁하면서도 바로 영상을 클릭했다.
썸네일은 조준경 너머로 보이는 왼쪽 눈이었다. 렌즈를 꼈는지, 아니면 CG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소 섬뜩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등장한 것은 검고 긴 다리였다. 날렵한 가죽 바지를 걸친 쭉 뻗은 발은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했다.
카메라가 그 발걸음을 따라가며, 다 부수어지고 판자와 천 따위를 덧댄 자국이 역력한 복도를 속도감 있게 비췄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리에서 쭉 올라가, 어느새 검은 핑거슈트를 낀 왼손을 비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옆얼굴이 함께 클로즈업되었다.
붉은 머리를 내린 차유진이었다.
그리고 차유진의 손안에 있는 것은… 다 낡아빠진 빨간 솜인형이었다.
[ -]
차유진은 나직이 익숙한 멜로디의휘파람을 불면서, 솜인형을 뒤집었다.
인형의 등 뒤에는 톱니바퀴가 달려있었다. 오른손이 거침없이 톱니를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끼릭끼릭.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곧 이상한 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Pi Pi Pi Pipipipipi
PPi-.
쾅.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검게 변했다. 내레이션이 깔렸다.
[WHAT makes people live?]
[…A CHOICE]
화면이 다시 밝아지는 순간, 전경이 바뀌었다.
반파된 운동장이었다. 모래가 다 굳고, 골대는 이미 헐었다. 그 한가운데 이상한 문양이 항공샷으로 잠깐 잡히는 순간.
대단히 무거운 비트가 울리기 시작했다.
DOOOM DOOOM DOOOMDOOOM
그리고 현란한 현악기 오케스트라가 울리기 시작했다. 위급한 단조의 반주였다.
그 위로 일렉 사운드의 강렬한 신스가 천둥이 꽂히는 것처럼 리프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I'm gonna survive,
Like you did before
I'm gonna grab it,
Just like I dreamed
고음의 도입부였다.
그 순간, 화면의 운동장 골대 아래가 폭발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차유진이 튀어나왔다.
-Ashes to ashes, dust to dust
But NOT for me 난 아니야
난 살아 그렇지 like
Legends never die
머리에서 먼지와 모래를 털어낸 차유진은 신난 것처럼 골대를 한번 차더니,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가 검붉은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정문을 발로 열고 성큼성큼 통과하는 순간, 장면이 전환되었다.
-모든 갈림길이 선택의 기로
But wherever you go, 찾아
가장 확실한 방정식을
You will never die
샘플로 가득 찬 푸른 연구실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배우 출신 이세진이 었다.
안경 낀 섬세한 인상과 다르게, 걸친 가운에 녹색, 검붉은색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차유진이 정문 밖으로 질주하는 것을 모니터로 지켜본 이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구실 문을 봉쇄한 철책 앞으로 걸어가다가, 발을 멈추고 덕지덕지 붙은 경고 표식을 읽었다.
바이오해저드(생물재해) 표지 마크였다.
그 순간, 다른 장소의 같은 마크를찢어내는 손으로 컷이 바뀌었다.
-That's what keeps me alive
난 세차게 쫓아가
삶을 완성시킬 발걸음
If I reach out, I can hold it
찢어진 종이를 한 손에 쥔 것은 단정한 현대적 차림새의 큰세진이었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연설하는 듯 낡은 단상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쥐고 있던 종이를 낡은 철책으로 던진 순간.
툭.
구겨진 종이는 힘없이 철책에 튕겨나갔으나, 단상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철책으로 달려갔다.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쪽에 걸려있던 야구 모자를 들어 탁, 자신의 머리에 걸쳤다. 그리고 유유히 단상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카메라가 하늘로 치솟았다.
-I'm gonna survive,
Like you did before
I'm gonna grab it,
Just like I dreamed!
머리부터 발끝까지 현대적 무장요소를 갖춘 저격수가 옥상에서 가늠쇠 너머로 이상한 것을 겨누고 있었다.
저격수의 총에서 푸른 빛이 쏘아졌다.
두근거리는 붉은 덩어리에 빛이 맞는 순간, 덩어리가 터지며 폭발이 일어났다.
카메라가 한 바퀴 돌며, 저격수가 총을 던지며 일어나는 것을 비추었다. 류청우였다.
류청우가 던진 총은 옥상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붉게 녹아 아스팔트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카메라는 아스팔트보다 밑으로 떨어졌다.
-I will never die
Like I did before
I'm gonna keep you
Alive- Alive- Alive!
물이 고인 거대한 하수구에는 마네킹과 온갖 무기가 반파된 채로 쌓여있었다.
김래빈은 그 최상단에 고요히 누워있었다. 햇살 한 줄기가 그 위로 내렸지만, 동시에 물이 뚝뚝 떨어지며 검은 머리카락과 얼굴을 적셨다.
그 순간, 김래빈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다소 섬뜩한 그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였다.
철퍽.
하수구를 이동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컷이 이어졌다.
곡은 드랍되는 대신 더 멜로디컬 해졌다. 부드러운 미성이 이어졌다.
-Choose your way
Choose your side
Make your way
Decide your fate
사람들이 옮기는 거대한 물탱크 같은 물체로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졌다.
물탱크는 부들부들 흔들리더니, 상단이 열리며 흰 팔이 튀어나왔다.
그 안에서 자신의 몸을 끄집어낸 것은 선아현이었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로 이상하게 빛나는 물이 탱크에서 흘러넘쳤다.
선아현의 뒤로 빛나는 물방울의 향연이 후광처럼 멈췄다.
그 순간, 카메라는 비상하는 물방울과 함께 하수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 고층빌딩의 깨진 창문을 비추었다.
-Choose your way
Choose your side
Make your way
Decide your fate….
창문 뒤에 서 있는 것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소년이었다.
곡이 잦아들었다.
[….]
검은 후드를 눌러쓴 소년은 카메라를 등지고 창문 밖을 응시했다. 손에 든 것은 낡은 스마트폰이었다.
한밤중인데도 도시는 일렁이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광으로 소년의 인영이 더 어두워졌다.
그 상반신이 서서히 클로즈업된 그순간.
소년이 휙 뒤돌아 카메라를 응시했다.
박문대의 얼굴이었다.
카메라는 마치 놀란 것처럼 휙 멀어졌다. 그러자 어느새 소년의 주위에 떠 있는 드론들이 보였다.
일렁이는 야광 불빛의 드론들이 카메라를 쏘아보았다.
박문대는 이상한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카메라를 보더니, 스마트폰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박문대가 다가오는 순간, 화면이 꺼졌다.
픽.
자막이 떠올랐다.
[Choose Your Side]
[127 Section]
[Coming Soon]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
-!?
그리고 팬들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난발하게 됐다.
트레일러 영상은 2분 42초짜리 짧은 영상이었으며, 곡 역시 1절 분량만 잘려 나왔다.
하지만 넘치는 영상미와 의미심장함, 지난 앨범과 연결되는 요소들 때문에 온갖 SNS 팬 계정들과 커뮤니티는 월요일도 잊고 순식간에 영상에 대해 떠들었다.
-ㅠㅠ아니 예고도 없이 이렇게 트레일러 띄워서 나 같은 새가슴 덕후놀라게 하는 법 있냐구요 진짜ㅠㅠ감사합니다. 법으로 제정해주세요.
-본부장 쫒아내길 잘했다 역시 그놈 없어도 잘만 뽑네
-이거 선공개곡 같지? 안무 없어서 아쉽긴 했는데 군무 씬이 들어가면 이 긴장감이 풀렸을 것 같아서 딱 좋았어
└맞아 진짜 원테이크는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으로 편집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근데 왜 곡명이 보너스 북인지는ㅋㅋㅋ 아직도 모르겠음. 별책부록이라는 뜻인데 그냥 영상 제목인가.
물론 일반 연예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바로 소식이 올라왔다.
[TeSTAR 컴백 트레일러 뜸]
: 팬들도 뜰 줄 몰라서 혼비백산중인 듯
-와 돈냄새
-무슨 영화 트레일러 같네
-근데 안무도 없구 곡도 아이돌느낌은 아닌 듯ㅜ
-티원에서 돈 진짜 엄청 투자하나봐 이세진 좋겠다 추가로 들어가서저 꿀 다 빠네
└흠 이번 건 오히려 배우 출신 나와서 영상 퀄 올라간 듯?
└ㅋㅋ 20초 나왔는데 연기력 감정 가능해?
└아이고 아주사에서 밀던 주식이 아깝게 탈락했다니 안 됐다 그게 누구라고?
-세계관에 잡아먹힌 듯… 너무 오덕같아
-개쩐다 진짜
자신의 불호를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댓글과 조회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영상 말미에 나온자막 떡밥은 곧바로 분석되어 결론이 나왔다.
[테스타 이번 영상 게임 관련인듯]
: 마지막에 나온 자막 127 section검색해 보니까 10 월 출시 예정인게임 뜸
(기사 캡처)
원래 소규모 개발팀인데 T1에서인수했네
-호옹
-게임 콜라보였어?
-헐 더 좋아 어쩐지 게임 느낌이더라니
-그럼 그냥 광고영상이었나.
└컴백 트레일러라는 걸 봐서는…광고 수준이 아닌 듯…ㅎ
-흠 난 별로다 걔네 이제 겨우 자기 세계관 잡아가는 시기인데ㅠㅠ
-근데 걍 게임용이라고 하기엔 마법소년 뮤직비디오랑 연관점 너무 많던데? 팬들이 엄청 파더라
└T1에서 게임을 테스타 세계관용으로 만들었나?ㅋㅋ
└헐
└설마
└진정한 돈지랄이다;;;
적당히 테스타에게 관심 있던 사람들은 흥미로워하면서 상황을 관찰했다.
팬들은 걱정과 기대 사이에서 오갔으나, 그 다음 날 앨범 예약 공지가뜨면서 일단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마무리되 었다.
-영상에 돈 처바른 것 보니까 버림패는 아니야 곡도 좋고 지난 앨범하고 세계관도 연결되는 것 같으니까 일단 기어 박음
-이게 타이틀은 아닌 것 같고 걍 게임사하고 한두 곡 콜라보한 것 같아 일단 이런 퀄리티 트레일러 본걸로 난 만족!
-곡 영상 비주얼 삼박자가 딱 떨어져서 난 좋았음 타이틀 기대됨ㅠㅠ
다만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쪽도있었다.
[야 니들 이거 봄?]
게임 커뮤니티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02화]
테스타와 콜라보하게 된 이 게임 개발사는, T1에 인수되기 전에도 몇가지 마니아층 두터운 게임을 내면서 인지도를 쌓았었다.
덕분에 관련된 소규모 게임 커뮤니티들이 있었다.
아이돌 뮤비 자막에 127 섹션 나옴 어떻게 생각함?
(테스타 컴백 트레일러 영상)
-흐미 이것은… 맞는 것 같은디
-보고 왔다. 서울 배경, 붉은 저주, 생물재해, 물탱크까지 나옴. 확정 아니냐?
-아니 이런 변두리 망겜 제작사에 아이돌 광고가 붙는다고? (혼란 이모티콘)
└대기업 인수 맛 달달하구먼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음
-아 여돌 아니었냐 다행이다 씹덕새끼들 유입 막았쥬
└대신 빠순이 붙잖어
└돈만 많이 쓰면 누구든 상관없지 않누 이 새끼들 또 서버 닫고 빤스런할까 봐 걱정이다 이 말이야
└아ㅋㅋㅋㅋㅇㅈ
'왜 하필 아이돌로 이런 걸 만들어서 이미지 묻히냐' 같은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첫 번째로는 영상이 워낙 시네마틱하며 기존 공개된 게임 배경의 분위기를 잘 살렸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들이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27 섹션 의 제작사인 '폐허공장'은 질 좋은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요 몇 년 사이 암암리에 제법 인지도가 생겼지만, 과금 모델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는 탓에 늘 운영 뒷심이 부족했다.
덕분에 이들은 그저 이른 서버종료를 막고 싶을 뿐이었다.
-머기업의 투자 기대해봐도 되는 부분임?
-와! 127 섹션 국민 갓겜 된다!
-그래서 대체 겜이 언제 나오는거고… 왜 트레일러를 내놨으면서출시일도 안 뜨냔 말이야! (탁자 치는 이모티콘)
└구멍가게에 뭘 기대하시는ㅎ?
그리고 테스타의 컴백이 충분히 기사 등으로 홍보된 뒤, 한발 늦게 게임사는 출시일을 발표한다.
['폐허공장'의 신작 게임 127 섹션, 국민 주식 테스타와 손잡고 출시]
[테스타의 컴백 트레일러는 콜라보영상이었다…127 섹션 출시 임박]
-야호!
-와 인지도 떡상한다!
-테스타요? 폐허공장의 아들입니다.
-어허 테스타라니 갓스타라고 부르는 거야
게임 마니아들이 기대에 부풀어서 뒹굴고 있을 때, 테스타의 팬들 쪽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진짜 이번 앨범 게임 광고용이야?
-설마 본부장이 해놓은 거 그대로 진행 중인 건 아니지…?
-아니 뭘 어떻게 콜라보 했는지라도 구체적으로 알려주던가 그냥 뭉뚱그려서 적어놓으니까 빡치네 진짜ㅋㅋㅋ
-또 소속사 패야됨?ㅠㅠ
….
다행히 팬들의 불안이 더 자라지 않을 시점에서, 새로운 정보가 공개되었다.
[테스타(TeSTAR) Concept Photo 'Side A']
테스타의 앨범 컨셉 포토였다.
그리고 이 사진들의 분위기는… 대놓고 청량했다.
하얀 티셔츠를 입고 숲에 누워있거나, 헤드폰을 끼고 침대에 엎드려서 창밖의 자연풍경을 보는 등의 장면이던 것이다.
그리고 전부 맨발이었다.
전체적으로 청량하고 아련한, 청소년기의 여름날 같은 풍경이었다.
-아니 미친
-으아아아 청량왔다!
-아현이가 맨발…! 맨발!
-문대 사과 무는 컷 봤어? 봤냐고?!
-기절할 것 같다
-흐흫흑ㅠㅠㅠ얘들아 볼수록 잘생겨진다…
기존에 공개된127 섹션 의 정보나, 컴백 트레일러와 완전히 다른느낌에 팬들은 안심하면서 사진을 보정할 수 있었다.
"문대야! 반응 완전 좋다!"
"나도 지금 보는 중이다."
"하하!"
큰세진이 웃으면서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다른 방에도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으로 댓글을 살폈다. 다들 자연스럽게 게임 콜라보는 앨범에 일부분일 뿐이라는 점을 알고 넘어갔다.
'이 순서대로 푸는 게 맞았던 것같군.'
게임 콜라보 사실을 나중에 밝히면 배신감이나 거부감이 들 수도 있고, 먼저 때리면 게임으로 관심이 쭉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거부감이 들지 않게 빌드업하면서, 동시에 게임과는 적당히만 융합되는게 중요했다.
'너무 엮여도 안 돼.'
게임 콜라보는 그냥 세계관을 더 재밌게 즐기게 해주는 외전 정도로 취급당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적당한 만족감을 즐기고 있는데, 보던 스마트폰 화면에 팝업이떴다.
[VTIC 청려 선배님 : 앨범 내요?]
"…."
이거… 무조건 목적이 있는 질문이다.
그래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라답장했다.
[예. 이번 달 말에 컴백합니다.]
[VTIC 청려 선배님 : 그렇구나. 그럼 아직 시간 좀 있네요.]
그리고 달갑지 않은 제안이 왔다.
[VTIC 청려 선배님 : 내가 만든곡 있는데 수록곡으로 쓸래요?]
미쳤냐?
[정말 괜찮습니다. 선배님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수도 없고, 앨범이 이미 유기적으로 완성된 상태입니다. 제안해주신 점은 정말 감사합니다.]
[VTIC 청려 선배님 :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맨입으로 받기는 그래서 주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꼭 이번 앨범에 쓸필요도 없어요^^]
"…."
[혹시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혹시 톡 내역 훔쳐보는 놈들이 있을까 봐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미래정보를 듣고 싶은 거냐는 의미다.
[VTIC 청려 선배님 : 네.]
[말씀드렸지만 저도 경험이 많지 않아서 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VTIC 청려 선배님 : 그건 제가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
아, 이 새끼 또 보기 찝찝한데.
'연을 끊을 수도 없고.'
그럼 나도 정보나 캐내야겠군.
[그럼 저도 곡보다는 선배님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순식간에 답장이 오던 방금과는 다르게, 응답이 돌아오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VTIC 청려 선배님 : 그러세요.]
가뜩이나 앨범 준비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이놈과 접견하는 건 되도록 활동 이후로 미뤄 버리고 싶었지만 막혔다.
-그때는 콘서트 투어 때문에 해외로 출국하거든요.
덕분에 연습 다 끝난 이 한밤중에 녹음실을 빌렸다.
'젠장.'
일단 회사에는 같이 작업은 시도할건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해둔 상태다.
'어차피 작업도 안 할 거긴 하지만.'
어쨌든, 청려가 도착한 것은 몇 십분 후였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예. 저야 잘 지냈습니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트레일러 잘뽑았던데. …아."
청려가 문 옆 옷걸이에 얇은 코트를 걸다가, 표정 없이 이쪽을 돌아봤다.
"혹시 그 게임 이미 알고 있던 건가? 출시하면 공전의 히트라도 치나? 그래서 콜라보했어요?"
"…회사에서 다짜고짜 시켜서 하는건데요."
"아, 그렇군요."
청려가 빙긋 웃으며 녹음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USB 였다.
"그럼 곡부터 들어볼래요?"
이 새끼 진짜 사람 말 안 듣네.
"…곡은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녹음실에서 만난 김에 그냥 들어나 보세요."
청려는 부스 앞 기계를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곧 노래를 재생했다.
"…!"
"좋죠?"
귀에 착 달라붙는 트로피컬 하우스곡이었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자기가 쓰지 이걸 남 줄 성격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왜 선배님이 안 쓰고 절 주려고하십니까."
"음, 전 이런 곡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럼 같은 회사 후배는?"
"…."
"아니면 같은 팀 멤버분을 드려도 되는 상황이잖습니까. 유닛 활동으로."
"…음."
청려가 곡을 껐다. 그리고 턱을 괬다.
"역시 똑똑하네…. 쓸데없게."
"…!"
"이거 사실 내가 지은 건 아니에요."
청려가 USB 꺼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전도유망한 신인 작곡가가 티홀릭한테 줘서 제법 히트… 했어야 할 곡인데. 내가 가로챈 거예요."
뭐?
"아, 작곡가 동정할 건 없어요. 이분 이 곡 이후로 표절 손대서 줄소송 당하다 해외 도피로 끝났거든."
"…."
청려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뭐, 내가 돌아오기 전에는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잘 살고 있을 거예요. 곡 값을 잘 쳐줬으니까."
"…."
"근데 우리 회사 사람한테 곡 주면 안 되지. 이게 또 표절곡 주려고 할지 모르잖아요."
"…근데 그걸 절 주겠다고?"
청려가 미소 지었다.
"당연히 사정을 설명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문대씨는 절대 이 사람한테 곡 다시 안받을 거잖아요. 안 그래요?"
"…."
내가 눈치 못 챘으면 그냥 이대로엿 먹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방금 쓸데없이 똑똑해서 눈치챘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설명해 주는 재미가 없어지니까 한 말이죠."
살살 잘도 빠져나가는군.
청려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이런 위험을 잘 관리하고 싶은거라서. 거창한 정보를 원하는 게 아니라… 큰 흐름. 트렌드, 사건들만 기억나는 대로 말해봐요. 그럼 나도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 줄 테니까."
"…."
그냥 공부만 했는데요.
기억나는 건 9시 뉴스나 포탈 메인에 자주 등장했던 사건뿐이다.
하지만 이놈이 알고 싶은 건 내년 여름에 올 태풍 이름은 아니겠지.
"…제가 공시생이었다는 건 기억나시죠?"
"아주사에 참가해서 1위 할 정도로는 사회와 친숙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 오해가 발생했군.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냥 노력과 재능인데요."
상태창 이야기 꺼내면 눈 돌아갈 것 같은 놈이다. 입도 벙긋 말자.
"…그런 것치곤 컷을 너무 아는것처럼 잘 챙겼고."
고등학교 자퇴하자마자 데이터 팔았다고 해도 안 통할 것 같으니… 음.
제일 가깝고 많을 사례를 들자.
"공시 시작 전에 아이돌 팠어서 이동네 대충 압니다."
"…."
청려는 잠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후 "
그리고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돌 팬이었다고."
"예."
"…누구 팬이었는데."
"말랑달콤이요."
"…."
청려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약간 누그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그래도 기억나는 건 다 말해봐요. 나도 대답해 줄 테니까."
항복 선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겠습니다. 음… 아, 맥시마이트의 비트온이 내년 초쯤 음주운전이 터지…."
"원래 그런 놈이고. 다음."
"흠… 올해 말에 뮤디 씨가 캐롤을 내는데, 제가 음식점에서 계속 들었으니… 아마도 음원 성적이 좋았던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
이렇게 세 번쯤 반복하자, 청려가음울하게 물었다.
"…내년에 유행하는 비트 같은 건 몰라요?"
"그걸 알면 벌써 썼죠."
"…!"
청려는 결국 내게 별다른 정보가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참."
"내년 공시 경쟁률이라도 알려드릴까요."
"…됐습니다."
"흠."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혹시 이 사태가 왜 벌어진 건지 짐작 가는 이유 있으신가요? 아니면 사건이나."
"그걸 나도 알고 싶은데 말이지."
청려는 눈을 찌푸렸다.
"확실한 건, 일단 과업을 다 끝내면 더는 갑자기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죠. …게다가 미래 지식은 아직 남아 있으니, 이 몇 년 아주 유용했는데."
그 문맥에서 쓴 '유용'이란 단어 뉘앙스가 아주 은근했다.
"…곡 뺏으셨습니까?"
"하하, 뭐 당연한 걸 물어요? 본인들이 작곡하는 것도 아니고, 작곡가한테 먼저 받는 쪽이 임자 아닌가."
청려가 밝게 웃었다.
"그것도 작년으로 끝나서 아쉽네."
"…!"
그 말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 새끼 작년에 시간 돌렸구나.'
그리고 데뷔 전으로 갔다.
그렇다는 건… VTIC의 연차에 비춰봤을 때, 최소 7년 이상 돌렸다는 것이다.
그럼 상태이상이 최소 8개다. 뭣도모르는 상태에서 그걸 피하려고 했다면 과연 몇 번이나 실패를….
'…제정신 아닐 만하군.'
앞으로도 거리를 두고 지내자고 다짐 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03화]
청려와의 별 소득 없는 만남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벌써 새벽 3시. 당연히 다들 자고 있었다.
'…내일 8시에 침대에서 일어나야되는데.'
당장 자야 했다. 나는 발소리를 낮추고 얼른 내 방을 찾아갔다.
그리고 놀랐다.
"…!"
"흐…."
이세진이 자기 침대에 처박혀서 스마트폰을 보고 질질 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폰 화면에서 빛이 새어 나와서 이세진의 흥건한 얼굴을 비췄다.
'…넷플러스라도 보나.'
굉장히 민망했다.
"…."
나는 일부러 살짝 발소리를 내고방을 스쳐 지나갔다. 수습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지 뭐.'
그리고 욕실에서 샤워까지 하고 나오니, 이세진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보이지 않았다.
저쪽도 민망할 만했다.
'…자자.'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귀마개는 이새벽에 굳이 안 껴도 되겠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끅 "
옆에서 끅끅거리며 우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누가 들어도 이불 속에서 베개에 얼굴 처박고 우는 소리였다.
'미치겠다.'
나는 귀마개를 끼고 도로 누울까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서 옆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불 위를 툭툭 쳤다.
"형. 무슨 일 있어요?"
"…!"
이불이 들썩거리더니 기침 소리가울렸다.
'눈물, 콧물에 침까지 나왔군…안 봐도 남한테 보일 꼴은 아닌것 같아서 나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귀마개, 큽, 안 했어?"
"이 새벽에 껴야 할 필요가 있을 줄은 몰랐죠."
뒤척이는 소리가 다시 났다. 그리고 이세진이 목소리가 평상시에 가깝게 침착해졌다.
"…자. 별일 아니니까."
"…."
뭔 일이 있긴 하단 뜻이군.
그 순간, 머릿속에 이제는 희미해진 경고음이 울렸다.
"…형, 설마 마약 문제는 아니죠?"
"미쳤어?"
음, 아니군.
나는 기겁해서 이불을 차고 나온 이세진을 확인하고 도로 침대로 돌아갔다.
이세진의 얼굴이 열 받았는지 시뻘게진 것이 어두운데도 보였다.
"내가 마약할 놈으로 보여?"
"아뇨…. 그냥, 오늘 청려 선배님 만났는데, 마약으로 훅 간 분 이야기를 좀 들어서요.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봤어요."
"…."
이세진은 몇몇 구체적 예시를 떠올렸는지, 찝찝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그런 덴 안 엮이는 게 최선이지. 너도 이상한 놈들은 아예 선을 안 만드는 게 좋아."
"잘 알겠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이불을 덮었다.
'더 묻기도 애매해졌군.'
이세진도 나름대로 성장하려고 하는 것 같으니, 정말 큰 문제가 생기면 말하겠지.
그리도 혹시 모르니 말은 해두자
"형."
"왜."
"힘들면 말해요."
"…그래."
"청우 형한테."
"… 야!"
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정자세로 누웠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들었다.
컴백이 다가오자 연습과 스케줄을 병행하며 점점 피로가 가중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데뷔 앨범보다는 할 만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더블 타이틀을 한 달 만에 준비했던 때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다며, 그룹 내에서는 아직 호평이 자자했다.
확실히. 일단 잘 시간이 최소한은 확보되어 있으니 살 만했다.
'모니터링할 시간도 틈틈이 있군.'
나는 스마트폰으로 현재 흐름을 확인했다.
음, 며칠 전까지 팬들은 얼마 전 공개된 컨셉 포토와 앨범 사양을 비교하며 추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미친 앨범이 Side A, B 두 가지 구성으로 나와서 앨범명이 Choose Your Side인 거임? 이런 디테일에 덕후는 울어요
-난 A는 청량 B는 몽환 밀어본다.
└트레일러는?
└그쪽은 그냥 인트로곡 아닐까?
└난 거기가 Side B인 것 같음
-아니 트레일러에 분명 마법소년 소품들이 등장했거든요ㅠㅠ 게임 광고라고만 보기는 애매한데 아직 게임이 출시도 안 돼서 비교도 못 하고…!
└안녕하세요 선생님 폐허공장 지금까지 갓겜만 냈었습니다. 출시하면 꼭 찍먹 부탁드립니다…!
└앗 넵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컨셉 포토가 공개되었다.
[테스타(TeSTAR) Concept Photo 'Side B']
고전적인 동절기 교복을 입고 있는 테스타의 모습이었다.
지난 앨범과의 연관점도 있긴 했는데, 분위기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배경이 되는 교실이 단순히 낡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라, 형광 빛으로 빛나는 거친 그래피티로 낙서가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래피티 너머로 보이는 교실 벽의 재질은 통상적인 아이보리색이 아니라 녹슨 크롬 구조물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몇몇 멤버들은 방독면이나 독특한 기계 장비 따위를 들고 있었다. 장비에서도 네온사인 같은 빛이번쩍였다.
누가 봐도 디스토피아 느낌의 사이비 펑크였다.
- 으아아악
-미친 사이버 펑크
-너무 좋아
-지난 앨범에 동복 못 챙겼다고 챙긴 것 봐… 우리 애들 너무 배웠다 가방끈에 걸려 러뷰어 넘어질 지경
-ㅠㅠㅠ청우 드디어 염색했어요 여러분 우리 흑발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파란색이에요 전 너무행복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겨우 몽환2나 생각한 예상한 내 대가리를 깬다…
-컨포 둘 다 너무 맘에 들어 앨범 빨리 왔으면ㅠㅠ
팬들은 굳이 여론 관리할 것도 없이 즐거워했다.
'게임 걱정은 거의 사라진 것 같고.'
사실 이 컨셉 포토는 트레일러와 제법 유사점이 많았는데, 아마 느낌이 좋다 보니 불길한 예감이 많이 가신 모양이었다.
그리고 굳이 팬들만 모인 곳이 아닌 웬만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전반적으로 반응이 괜찮았다.
[테스타 Choose Your Side 컨셉포토]
: Side A (사진)
Side B (사진)
대체로 잘 뽑았다는 게 현재 여론
-오 잘생겼다
-선아현 볼 때마다 잘생겨지네
-얘네 매번 컨셉이 과한데 돈으로 미는 느낌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벽한 설명
└나 2D 덕후인데 그래서 그런지 챙겨보게 되더라ㅎ
-두 번째 컨셉은 김래빈이 진짜 잘 받는다 양아치보다 좀 퇴폐적인 느낌이라 확 눈에 띔
-뮤직비디오 기대된다 올라오면 여기도 올려줘!
어떻게든 여론을 바꿔보려는 사람도 있었으나, 큰 소용은 없었다.
-모를… 어디서 잘 뽑았다고 하는데?ㅋㅋ
└엥 그냥 어딜 가도 여론 괜찮은데… 여기서도 다들 잘 뽑았다고 하잖아
└팬들 몰려온 걸 수도 있지ㅠㅠ
└이 정도 숫자가 다 팬이면 그냥 걔네가 여론 아님?ㅋㅋㅋ
주로 이렇게 끝났다.
'안됐군.'
나는 피식 웃으며 글을 나왔다.
"무, 문대야. 인… 터넷 봐?"
"어, 새로 올라온 컨셉 포토 반응 확인했다."
"그, 그렇구나."
선아현은 굳이 여론이 어떤지 묻지 않았다.
듣기로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하여 너무 관심을 두지 않으려 훈련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새로 만난 의사가 잘 맞는지, 요새 선아현의 얼굴이 밝았다.
'이번 활동 끝나면 본격적으로 발음 교정 시작한다고 했었나.'
음, 잘됐으면 좋겠다.
"우, 우리 사진 찍을 때 되게 더웠는데."
선아현이 한마디 운을 떼자마자 여기저기서 동의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맞아요!"
"이상기온인지 초가을에 닥친 폭염때문에 세트장 냉방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
내가 할 말 대신해 줘서 고맙네.
"그래도 세진이는 사진 찍을 때 얼굴색도 안 변하더라. 대단해."
"배우 멋져요!"
"그러게."
뜬금없이 칭찬을 받은 이세진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지만, 곧 작게 대답했다.
"…고마워."
"잘한 걸 잘했다고 한 건데 뭐."
류청우가 웃으며 스트레칭을 다시 시작했다.
새 안무를 익힐 때면 진도를 잘 못 따라오는 이세진을 이런 식으로기 살려놓는 장면은 이제 꽤 익숙했다.
'뭐, 없는 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연기가 필요한 컨텐츠가 들어가면, 이세진은 대부분 기량이 압도적이었다.
옆에서 큰세진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거, 너무하네∼ 이쪽 세진이도 있는 걸 잊지 맙시다, 여러분. 저도 잘 찍었어요∼!"
"하하!"
"와 형 멋져요."
"유진아 영혼이 없구나."
"저 거짓말 못 해요. 앗!"
큰세진은 차유진에게 헤드 락을 가볍게 한번 걸고는 깔깔 웃으며 놔주었다. 이세진은 휙 고개를 돌렸다.
'저 둘은 계속 사이가 애매하군.'
싸울 것 같다는 게 아니라, 그냥…서로가 싫어서 굳이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다.
"자, 연습 다시 시작하자∼"
"넵!"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안무가들어갔다.
"발 잘 보고∼"
"이쪽으로∼"
안무가의 조언이 입에 붙어버린 멤버들이 성대모사를 하면서 후렴을 췄다. 웃음을 못 참고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다들 가관이었다.
다만 이세진은 아직도 따라가는 게 벅찬 모양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거울을 보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아직 춤은 D+였다.
알파벳 단계 하나를 뛰어넘는 것은 어떤 분류군이 바뀌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춤에 별로 재능이없는 사람이 단기간에 넘기긴 힘들것이다.
'이대로 가면 곧 넘길 수 있을 것같긴 한데.'
나는 이세진의 스탯창을 확인했다.
[이름: 이세진]
가창 : C- (B+)
춤: D+ (B)
외모 : A+ (S)
끼 : A (S-)
특성 : 집중(B)
!상태이상 :
벌써 가창은 C에 접어든 상태였다. 원래도 춤보단 높았으니 비교적 빨리 올린 듯싶었다.
그리고 이세진의 춤 잠재 스탯은 'B'이니, 일단 C까지는 꾸준히만 해도 올라가겠지.
'게다가 저 특성.'
꽤 괜찮았다.
[집중 (B)]
: 해내고 싶어
-집중력 +100%
심플한 이름과 설명이었지만 꽤 다용도로 보였다. 나한테 떴어도 아마 킵해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상태창도 한번 정리해야겠군.'
나는 내 상태창을 불러왔다.
[이름 : 박문대 (류건우)]
Level : 15
칭호 : 없음
가창 : A
춤 : B-
외모 : B+
끼 : B
특성 : 잠재력 무한, 듣고 보니 맞는말이군(C), 바쿠스500(B), 잡아채는귀 (A)
!상태이상 : 상이 아니면 죽음을
남은 포인트 : 3]
무대 업적 100번대까지의 달성과 연습 업적 5000번대 달성이 불러온 쾌거였다.
좋은 무대를 할 때 뜨는 팝업도 두어 번 더 갱신하며 스탯을 추가로 받았다.
이 과정에서 특성 뽑기도 하나 받았는데…
[특성: 눈 밑 수도꼭지 (B)]
-편하게 열고 잠그세요!
: 눈물 제어 능력 MAX
바로 버렸다. 젠장.
어쨌든, 이걸 빼도 뭘 많이 챙기긴 한 것 같다.
'…데뷔 활동이 빡세긴 했지.'
잠 못 잔 보람을 여기서도 챙겨간다 싶다. 그러나 이것도 제일 놀라운 점은 아니었다.
…제일 놀란 건, 끼 스탯이 자연증가했다는 것이다.
…W라이브나, 팬사인회 등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추측 중이다.
물론 나나 이세진 말고도 멤버들은 대부분 스탯이 자연 증가했는데, 일단….
"문대 딴생각 그만∼!"
"…."
나는 큰세진의 호명에 곧바로 생각을 멈췄다.
'일단 연습에 집중하자.'
그리고 잠시 뒤, 마지막 반주가 끝났다.
땀을 닦아낸 큰세진이 예의상 물었다.
"후, 처음부터 다시 틀까요?"
"그러자."
"넵!"
큰세진은 A-던 춤 스탯을 A로 끌어올리더니, 안무가가 준 안무를 느낌까지 그대로 살린 채 따는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부럽군.'
남은 포인트를 다 춤에 박아버릴까 생각하는 그 순간.
다시 시작된 도입부 안무 중에 이세진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헉!"
" 괜찮아?"
"…괜찮,"
이세진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거렸다.
그리고 누운 채로 발목을 잡더니, 입을 깨물었다.
. …예감이 좋지 않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04화]
"형, 괜찮아요?"
"세진아, 너 발목 상태 좀 보자."
"…."
이세진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발목을 보더니, 결국 이를 악물고 바지를 걷어서 상태를 확인했다.
발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거 안 좋은데.'
일단 부상은 확정이다.
"…!"
"괘, 괜찮아요! 조, 좀 붓긴 했는데… 벼, 병원 바로 가면…."
선아현이 발목을 살피더니 다급히 외쳤다. 무용전공자라서 어느 정도 발목 부상에 조예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세진아, 일단 앉아봐. 매니저형한테 연락해서 바로 응급실 가자."
"…그래."
이세진은 류청우의 안정적인 부축을 받으며 일단 안무실 구석 의자에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고 온 매니저와 함께 병원으로 떠났다.
"가, 같이…."
"아니! …나 때문에 연습 지연되면 안 되잖아. 갔다 올게."
이세진은 동행을 극구 거부하며 매니저 둘의 부축과 함께 안무 연습실을 떠났다.
"큰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게요."
"마, 많이 붓지는 않았으니까… 괘,괜찮을 거야."
넘어진 정도였기 때문에, 다들 큰부상은 아닐 거라고 짐작하며 다시연습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세진이 돌아온 것은 안무연습 시간이 다 지난 뒤였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아∼ 여기가 우리 세진이 숙소인가? 좋네!"
"…."
"어? 자주 올게, 내가."
"…스케줄 때문에, 거의 숙소에 없어요."
"그래∼? 그럼 이 아빠가 들어와서 관리해 주면 되겠어. 사양 안 해도 돼."
"…괜찮아요."
이세진은 웬 중년 남성의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얼굴 생김새만 봐도 부자 관계로 보였다.
그런데 대화에서는 편의점 알바와 술취한 진상의 냄새가 났다.
'…?'
"아, 우리 세진이 친구들이구만∼나, 세진이 아빠!"
"아,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어르신은 무슨∼ 나, 세진이랑도 나가면 큰형인 줄 알어."
"하하, 동안이시네요∼"
큰세진이 대화를 받으며 잘랐다.
그리고 류청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진이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제 숙소를 촬영해야 해서…."
"아, 나 저기 조용히 앉아 있을게! 찍을 거 찍어요∼"
"…."
류청우가 약간 난감한 기색이 됐다.
나는 이세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주책맞은 부모님을 선보인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쑥스러움이 아니라, 피로감과 수치스러움 같은 게 덕지덕지 보였다가 쑥 사라졌다.
'…진상 맞는 것 같은데?'
큰세진이 이세진의 아버지에게 손을 저었다.
"에이∼ 아버님,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 드려야죠. 이렇게 멤버 부모님을 홀대하면 되나요. 저희가 준비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좀 있다가 가겠다니까? 쟤 부축해 오느라 힘들어서 그래."
저렇게까지 말하면 퇴치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얼른 방에 들어가서, 물건을 들고 돌아왔다.
"아버님, 고생하셨을 텐데 들어가서 편하게 드세요."
회사에서 명절선물로 받은 홍삼 세트였다.
"…! 아이고∼ 내가 이런 거 받는사람이 아닌데. 응? 이런 거 달라고 한 소리가 아니야."
뻔한 소리를 하면서 중년 남성이 냉큼 홍삼을 받아 갔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들 묵는 숙소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시잖아요. 저희가 스케줄상 그럴 여건이 안 돼서 반갑고 죄송해서 드리는 겁니다."
"그래∼ 응? 1 등 친구가 이 친구지? 세진이 뽑아준 친구가. 어, 아주 듬직하네. 세진아, 얼른 고맙다고 해."
"…."
"아, 저희 촬영 때문에 이제 매니저 형 올 시간이 돼서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음, 그래요, 나 가볼게∼ 금방 또 올 거야."
이세진의 아버지는 힐끔힐끔 이세진을 돌아보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
이세진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아, 앉아야 하는데…."
이세진은 선아현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러서 휙 쳐냈다.
"…!"
다행히 선아현은 손을 피했다. 그리고 이세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 미안해!"
"괘, 괜찮아요!"
난리군.
어쨌든 이세진은 방을 힐끔 보는것이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난 경험들을 떠올리는지 도망치는 대신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냥 다리가 불편해서 방까지 가기 힘든 걸 수도 있다만.'
반깁스를 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 었다.
"…아버님이야?"
"…어."
무거운 분위기에서 김래빈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근데 매니저 형은 어디 가시고 부모님께서 오시게 된 겁니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급하게 가면서 연락한 것 같더라."
본래는 차라리 다른 회사 사람에게 연락할 텐데, 나중에 들어온 두 번째 매니저가 신입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부모님께 연락드려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살짝 무거운 분위기에서, 차유진이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발목 괜찮아요?"
"-! 마, 맞아요, 발목!"
"회복까지 얼마나 소요된다고 하십니까?"
"…별일 아니랬어. 일이 주만 조심하면 된다고."
"흠, 그런 것치고는 고정을 제대로 시켜두셨는데."
"일부러 좀 과하게 해주신 거야. …내가, 빨리 낫고 싶다고 해서."
몇몇 멤버들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주로 미성년자다.
"형…."
"멋져요!"
이세진은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그리고 약간 쑥스러운 것처럼,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룹에 폐가 되는 일은 없게 할게."
"에이∼"
이세진의 미소가 약간 어두워졌다.
"…그, 아버지도 못 오게 할 거고. 걱정 마."
"…."
참 애매했다.
'가정사라는 게 그렇지.'
이렇게 단체로 앉은 상황에서 까보라고 요구할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 오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다만 이 자리에 김래빈이 있다는 걸 깜박했군. 저놈은 아까 흐른 묘한 분위기도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김래빈의 질문에 이세진은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내장을 토하는 해삼처럼 더듬더듬 사연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이 숙소가 넓으니까, 자기도 살겠다고 버틸 수도 있어."
"그럼 회사에 말해서 허가를 받으면…."
"…안 돼! 손버릇도 나쁘고… 아무튼, 같이 있어서 좋을 게 없는 인간이야."
이세진은 대체 자기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른 말을 마쳤다.
"…아무튼, 내가 못 오게 할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그, 그게 끝이야."
그리고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서 뒤뚱뒤뚱 방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남은 멤버들은 멀뚱히 서로를 돌아보았다.
"…."
"흠, 뭐… 발목도 괜찮은 것 같고, 저희도 이만 자러 갈까요?"
"일단은 그러자."
큰세진의 정리에 다들 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아∼ 넷플러스 보지 말고 자라."
"싫어요…."
거실에서 넷플러스를 틀던 차유진은 류청우의 말에 우울하게 TV를 끄더니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음."
넷플러스라. 얼마 전에 이세진이 침대에 머리 박고 울던 게 떠올랐다.
'그거 넷플러스가 아니라… 설마 아버지 때문인가.'
…웬만하면 이 문제는 아니었으면 좋겠군.
해결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이세진의 종이 같은 멘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반깁스한 다리를 힘겹게 햄스터 바디필로우 위로 올려두던 이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
"…."
이세진이 민망했는지 쓱 시선을 피했다.
'못 본 척해주자.'
나는 스마트폰을 보는 척하며 침대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오히려 이세진이 말을 걸었다.
"…저, 미안하다. 홍삼은 내 거 가져가."
아, 그거 때문이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먹을게요."
"그래."
그대로 방이 평화로운 침묵에 잠기려던 찰나, 뭔가를 부스럭거리며 확인하던 이세진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근데 내가 열어서 한두개 먹었거든. 새 걸 사다 놓을 테니까, 그거 가져가."
"…? 괜찮습니다. 그냥 대충 먹죠. 뭐."
"…휴."
이세진이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안심보다는 민망함이나 허망함 쪽으로 들렸다.
이세진은 햄스터를 짓누르는 자신의 깁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왜 계속… 짐이 되는 거지."
"특별히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아무튼, 이번에는 정신 차리고 할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넵."
힐끗 고개를 돌리니, 이세진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두 눈이 아주 의지에 활활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안무 영상이라도 보나?
'…뭐, 열정 좋지.'
본인이 의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그걸 나한테 요구하지만 않으면 된다.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귀마개를 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이세진이었다.
어쩐지 스마트폰 부여잡고 질질 짜던 장면이 겹쳤다.
'…설마 아버지 문제 해결하겠다는 거였나.'
사이다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서야 자주 보인다만, 현실에서 가족 관련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될 것 같진 않았다.
'뭐… 본인이 됐다는데 굳이 내가 말 얹는 건 더 웃기긴 하군.'
가족 없는 사람이 조언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그냥 잠이나 자기로 했다.
하지만 이세진은 이번에도 꽤 오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며칠 뒤, 콜라보 게임 127 섹션 과 마지막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듣기로는, 게임 제작팀에서 트레일러를 보고 엄청나게 흥분한 나머지 자체적으로 일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결과를 받아봤다.
"와, 우리랑 좀 닮게 수정해 주셨네."
"이거 완전 저예요!"
"볼에 점이 생겼습니다…."
초기 캐릭터들의 외양에 테스타 멤버들의 외양적 특징 몇 가지를 가볍게 반영해 준 것이다.
-아니, 뭘 다 뜯어고친 건 아니고, 저희가 가진 재료 안에서 약간 고쳐봤어요∼
-어때요? 완전 트레일러 생각나죠! 특히 이세진 씨 무테안경! 그거 진짜 만장일치로 바로 수정작업 들어갔거든요!
…뭐 주로 이런 식이었다.
참고로 내 캐릭터는 쌍꺼풀이 속쌍으로 바뀌었다는데, 미안하지만…큰 차이 모르겠다.
"후∼ 재밌고 힘들구만."
"힘내자!"
"힘냅시다!"
당장 뮤직비디오 공개가 며칠 뒤였다. 일정은 더 바빠졌지만, 쏟아지는 일감에도 '잘되는 느낌'은 확실히 중독적 이었다.
덕분에 테스타는 이놈 저놈 할 것없이 다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세진 역시 포함됐다.
어쩐지 후련한 얼굴인 이세진은 제법 편한 얼굴로 류청우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놈 다리 다친 것도 잘 낫는 모양이고, 이대로 컴백까지 순항하면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사건은 회사에서 나가는 길에 터졌다.
"이세진! 너 이리 와, 어?!"
"…!"
회사 뒷문 쪽 로비 앞에 안면 있는 중년 남성이 앉아 있다가, 이세진을 보고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당연히 이세진의 아버지였다.
이세진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X발.'
다행히, 당장 매니저 둘이 가로막았다.
"아버님, 이러시면 안 되죠!"
"자자, 진정하시고!"
"놔봐! 요즘 것들은 X발 예의가없고! 어! 사람을 핍박하고!"
이세진의 아버지는 덩치 있는 매니저에게 막히자 주춤거리면서도, 끝까지 손가락질을 하면서 끌려갔다.
"너 가만 안 둬, 어? 이 천벌 받을 불효자 새끼야!"
"…."
소란스러웠던 로비는 곧 이세진의 아버지가 끌려나가면서 잠잠해졌다.
그러나 잠시 뒤 더 소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