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간만의 테스타 W라이브는 눈을 빛내는 차유진과 큰세진의 얼굴로 시작했다.
[됐나?]
[나와요!]
둘은 흥분한 사람들이 댓글을 올리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뒤, 시시덕거리며 카메라를 휙 뒤로 뺐다.
그러자 두 사람의 전문적인 차림이 훅 눈에 들어왔다.
요리에 전문적인… 앞치마와 라텍스 장갑이었다.
[안녕하세요 러뷰어!]
[안녕하십니까!]
두 사람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화면을 확인했다. 차유진이 얼결에 한글 댓글 하나를 확인하고 손을 흔들었다.
[저도 반가워요!]
[하하, 저도요! 그리고 저희가 오늘 W라이브를 키게 된 이유는…바로 이 닭을 요리하기 위해서입니다!]
큰세진이 카메라를 휙 조정하자, 셀카 필터를 먹어 뽀얀 생닭 두 마리가 잠시 카메라에 잡혔다.
[자, 저 닭 보이시나요? 사실 저건 문대 생일선물로 주문한 닭입니다!]
물음표로 가득한 반응에도 큰세진은 천연덕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늘 멋지게 요리해서 연말 파티겸 문대에게 맛있는 밥을 해줄까 합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치킨스프!]
-뭐여
-저거 요리해?
-할 수 있겠어요?ㅜ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가 드립이 아니었다니ㅋㅋㅋㅋㅋㅋㅋ
걱정 어린 댓글에도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었다.
[맛없게 나오면 저희가 먹고 문대랑 멤버들은 맛있는 거 시켜주죠 뭐!]
[근데 이번에 잘해요!]
차유진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댓글들이 더 불안해했다.
-문대 불러
-얘들아 이거 아닌 것 같아
-귀여운데 두렵다
팀 내에서 대인관계 멘탈 강한 걸로는 확실히 상위권인 둘은 '노잼','나대지마ㅜ' 등 악플을 싹 거르고 팬 반응만 쓱쓱 받아들였다.
[아하, 문대 형! 형들 금방 와요!]
[맞습니다∼ 스케줄 때문에 약간 늦어요! 저희가 먼저 딱 메인 요리를 준비해 두고, 좀 간단한 것들은 같이 만들어볼 예정입니다!]
참고로 거짓말이었다.
그냥 안무가 약간 수정되는 바람에 추가 연습에 들어가느라 한두 시간퇴근이 늦게 된 것이다.
다만 제일 빨리 익힌 두 사람은 양해를 구하고 일찍 귀가해서 계획한 시간에 맞게 W라이브를 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멤버들은 이 둘이 설마 W라이브에서 요리 컨텐츠를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최고!]
그리고 둘의 요리는 안정적으로 망했다.
지난번 선아현과 제조한 망령의 탄스프 경험을 잊지 않은 차유진은 꽤 훌륭하게 불 조절을 했지만, 문제는 다른 데서도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와우! 다음은… 쿠민!]
[음? 쿠민? 안타깝게도 저희 숙소에는 그런 이국적인 향신료는 없습니다. 고춧가루를 넣죠!]
[좋아요! 꿀도 넣어요!]
[꿀 좋다!]
둘은 멀쩡한 레시피를 두고 개성강한 추가 재료들을 느낌대로 때려넣었다.
댓글들은 혼란과 당황, 그리고 웃음 범벅이 되었다.
-아냐
-꿀 버려
-치킨스톡 없니 ? 얘들아!ㅠㅠㅠ
-그래 요샌 배달도 잘 나오더라
-댓글 너무 빨라서 어지러웤ㅌㅌㅌㅌㅌ
그리고 팬들의 예상대로, 결과는 오묘한 맛의 닭 국물이었다.
[오 완성!]
[자, 일단 맛을…]
[…]
[…]
신나서 맛을 본 둘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이 되었다.
댓글은 누구 가릴 것 없이 폭소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둘은 망한 요리 맛본 사람 특유의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큰세진은 음식 낭비라는 반응이 나오기 전에 상심한 척 칼같이 차단했다.
[하하, 이 패배의 맛은 저희가 다 먹을 테니, 혹시라도 걱정 마시길 바랍니다….]
[먹는 거 괜찮아요.]
말리거나 웃는 댓글들을 확인하고,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소통을 시작했다.
[그럼 일단 치킨 배달부터…]
그리고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멤버들이 복귀했다.
[왔다!]
[잘 왔어요!]
차유진이 뛰쳐나가는 순간, 큰세진은 카메라를 향해 입술에 손을 대는 동작을 했다.
그리고 얼른 냄비를 감춰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물론 택도 없었다.
[너 뭐 해?]
[어? 하하! 덥앱하지∼ 문대도 러뷰어 여러분께 인사!]
[아.]
박문대는 일단 추궁을 멈추고 화면을 향해 얼굴을 숙였다.
[다들 잘 지내셨나요?]
순식간에 댓글에 수많은 인사가 지나갔다. 박문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문대!]
[….]
절묘한 타이밍 선정이었다.
자신의 SNS 말버릇을 따라 한 뒤 폭소하는 큰세진을, 박문대는 짜게식은 눈으로 잠시 쳐다보았다.
부엌으로 들어오던 멤버 몇 명도 황급히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이 새끼를 진짜.'
박문대의 속마음과 달리 댓글은 호평 일색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과 강아지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채팅창을 보며, 박문대는 한번 참기로 했다.
'가성비는 좋네.'
그리고 대신 냄비를 제대로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여러분, 얘네 뭐 했나요.]
분위기 맞춘 커버와 소수의 고자질로 댓글이 요동쳤다.
-같이 놀았어!
-토크∼
-이야기만 했어요
-유진이 애교 봤다ㅠㅠ 문대도 애교 해줘
-요리ㅋㅋㅋ
-세진이가 읍읍읍
-아무 것도 안 했엌ㅋㅋ
큰세진은 능청스럽게 박문대의 등을 치며 각도를 돌렸다.
[우리? 가벼운 소통을 하고 있었지∼ 그렇지 유진아?]
[맞아요!]
차유진은 해맑게 덧붙였다.
[그리고 요리했어요!]
[으악.]
큰세진이 침몰했다.
그리고 김래빈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앞치마를 하고 계시는데 들키지 않는 상황을 예상하셨다고…?]
팬들이 폭소했다.
그리고 박문대는 큰세진이 슬쩍 내려둔 냄비를 바로 확인했다.
[…설마 치킨 스프야?]
[맞아요.]
[연말이고, 너 생일도 기념할 겸 닭 요리해 주려고 했지… 근데 그냥 치킨 시켜줄게. 그건 우리가 다 먹는다!]
[먹는다!]
[….]
박문대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냄비 속 내용물을 한 입 맛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너희 차유진 어머니가 주신 대로 안 했지.]
[창의력을 발휘해 봤지.]
[꿀 넣었어요.]
[그래. 그런 것 같다.]
박문대는 혀를 차더니, 결국 냄비를 잡아서 조리대에 도로 올렸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재료들을 더 꺼내고서는 뚝딱뚝딱 냄비 속에 첨가하기 시작했다.
[오 문대!]
[맛있게 주세요!]
큰세진과 차유진은 상황을 파악하고 즉시 가벼운 숭배 모드를 장착했다.
[나, 나도 도울게…!]
[…그래? 그럼 이거 맛 좀 봐줘.]
[으, 으응!]
박문대의 완곡한 거절을 알아차리지 못한 선아현은 성의 성심껏 숟가락을 가져와서 국물을 맛봤다.
그리고 물음표와 느낌표가 번갈아 뜬 표정이 되었다.
[마, 맛있어! 그, 근데… 그, 맛이….]
[닭볽음탕이라고?]
[어, 어어! 맞아!]
그렇다.
치킨 스프는 온데간데없이, 냄비속 음식은 닭볶음탕이 되어있었다…!
충격적인 진술에 또 팬들의 민심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요리한 당사자는 태연했다.
[잘됐네.]
박문대는 W라이브가 송출되는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돌린 뒤, 제법 친절하게 설명했다.
[꿀에 고춧가루까지 들어가서… 그냥 간장, 고추장 넣고 한식으로 살렸습니다. 국물도 많이 졸아서 이게 맞는 것 같네요』
[헐 맛있어! 여러분 이거 진짜 맛있어요. 어떻게 한 거지? 박문대 대체 뭐지?]
[와우 요리 성공!]
[….]
박문대는 일시적으로 두 사람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물론 바란적도 없다.
그래도 그 냄비 하나로 저녁을 때우기는 턱없이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멤버들은 사이좋게 불판을 가져와서 삼겹살을 구웠다.
[이번 건 진짜 잘할 수 있다!]
[저 고기 굽는 거 잘해요!]
놀랍게도 차유진과 큰세진은 고기굽는 데는 정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망한 전 요리를 잘만회했다.
[…맛있어.]
[정말 연말 파티 느낌 나는 것 같은데? 좋다!]
자진해서 주방을 정리하고 온 두 큰형도 호평했다.
그리고 둘 다 냄비의 요리가 치킨스프였다는 것에 먹는 내내 위화감을 느꼈다.
들어갔던 파스타면이 좀 어색했지만, 수제비라고 생각하니 또 괜찮았기 때문이다.
[치킨 스프라니….]
[그거 또 만들었구나.]
그 의미심장한 말에, 댓글들은 이번에야말로 '또'의 의미를 알려달라며 울부짖었다.
-분명 사연 있다
-치킨 스프와 절친 바이브 해명해라
-ㅠㅠㅠ공유해 줘
[아 당연히 말씀드려야죠!]
[그것은 지난 15일 문대 형의 생신 당일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덕분에 테스타는 적당히 쳐낼 부분은 쳐내며, 박문대의 생일 에피소드를 즐겁게 떠들 수 있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테스타에게는 드물게도 아주 본격적인 실시간 소통의 분위기였다. 소문을 듣고 라이트 팬들까지 접속하며 시청자가 쭉붙었다.
그리고 시작한 지 2시간 반이 넘게 지났을 시점, 드디어 멤버들이 '그 질문'을 확인했다.
[이번 질문은… 오, 이거. 'KBC 아현이 덤블링 원래 안무였나요 애드립이 였나요?']
사실 이 질문은 초반부터 이미 몇번이나 올라왔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요리에 극도로 집중한 데다가, 빠르게 넘어가는 긴 한글 댓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리고 큰세진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못 본 척해버렸다.
다 같이 있을 때 대답하는 편이 임펙트가 크고 캡처가 돌아다닐 때도 그림이 좋기 때문이었다.
분위기에 취해서 살짝 유쾌해진 류청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거 애드립 맞습니다! 진짜 대단했죠!]
[대단해요!]
[아, 자세한 상황이요? 그때 저희 인이어에 문제가 좀 생겨서…]
테스타는 즐겁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고, 중간중간 박문대와 큰세진이 혹시 모를 방지선을 그었다.
[저 두 분이 아현이 등을 딱 붙잡은 거죠! 그래서 어땠다구요, 아현씨?]
[왜,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하, 한번 뛰어봤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지만 절대 저희가 의도한 바는 아니구요, 아현이도 앞으로는 안전이 확보된 후에만 시도한다고 합니다. 맞지?]
[으, 응! 모, 몸이 중요하니까…!]
테스타는 얼마 안 가서 그 화제를 마무리한 뒤 다른 소소한 이야기를 반 시간쯤 더 떠들고 방송을 종료했지만, 가장 먼저 캡처가 돈 것은 당연히 이 부분이었다.
[테스타 사고 애드립 궁예 다 맞다고 함]
: 본인들이 직접 덥앱에서 인증
(자막 있는 캡처연결본)
-이게 다 사실이라니
-선아현 무슨 수련이라도 했대?
-팬들 망상이라고 비웃던 애들 어쩌냐ㅋㅋㅋ
-선아현 그는 신인가
-수습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이런 현실성 없는 상황이…
-와 예비 플랜도 아니고 그냥 즉흥;
-화제되니까 거짓말했을 가능성은?
└리허설 본 스탭이 몇 명인데 뭐하러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해
└테스타가 그럴 필요가 있는 급이냐?ㅋㅋㅋ
└냅둬 오닉스 같은 망돌 빨아서잘 모르나 봄
가장 경이로운 쪽으로 나버린 결론에 사람들이 기겁했다. 그리고 이소식은 위튜브와 페이스리더 등지까지 물살을 타고 퍼졌다.
[테스타의 사고 수습,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맞아버렸다?]
[살아남은 아이돌 주식의 저력은 무서워]
[아주사 3위의 경악할 춤 실력]
안 그래도 테스타와 엮인 불공정 이미지와 논란은 힘을 잃은 상태였다. 테스타는 이번 화제로 그 찌꺼기까지 털어내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신인상 논란은 더 말 꺼내기도 어색할만큼 완전히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 애들은 천재야…
-역시 아이돌은 무대 보는 맛이지 근데 테스타는 귀엽기까지하니 어쩔수 없다 사랑하는 수 밖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겠어 귀여움도 영업할래ㅠㅠ
뽕이 차오른 테스타의 팬들은 막 W라이브에서 나온 훈훈한 떡밥을 퍼나르며 공유를 시도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테스타가 만든 자극적인 화제들에 길들어졌기 때문이다….
팬들은 약간 머쓱해하며 치킨 스프이야기를 멈추었다.
어쨌든 1월의 굵직한 시상식들에서의 신인상 수상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완전한 실력파 이미지를 수혈한 테스타는 성적 좋은 아이돌답게, 당연히 방송국에서 새해를 맞이할 예정이었다.
다만 거기서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도 만나게 되었다.
12월 31일 MBS 가요대제전.
"감사합니다!"
주어진 첫 무대를 끝내자 시간이 훅 떴다.
MBS에서 무려 4시간이나 생방을 때리고 테스타 무대를 1, 3부에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곡을 두 곡 시켜줬다는건 아니다. 방금 한 무대는 2000년대 남자아이돌 곡 1절 커버였다.
게다가 3부 무대는 딱 3분만 주는 통에 2절 벌스를 잘라내야 했다.
홈, 올해 테스타 성적을 고려하자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홀대다.
'이걸 출신 차별로 봐야 할지 소속사 차별로 봐야 할지 궁금한데.'
아마 둘 다겠지 싶다.
"그래도 의상 갈아입을 시간은 넉넉하고 좋네요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최악을 피하기도 했지.'
임진각 말이다.
"맞아. 야외도 안 갔고."
"…그, 그러게."
여름교복 입고 이 겨울에 야외 공연은 정말 대단한 볼 거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잡담을 하며 방송국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인사를 해왔다.
"와 테스타다! 저 사인 좀 해줘요!"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람을 확인한멤버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헐!"
"형!"
인사를 한 사람은 놀랍게도… 골드1, 하일준이었다.
"이야, 잘 지냈어?"
골드 1은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멤버 몇 명이 반색하며 다가갔다.
그리고 골드 1 옆에 익숙한 얼굴을 하나 더 발견했다.
"…오."
최원길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22화]
최원길. 아주사 에서 팀전마다 갈등을 쏠쏠하게 유발해서 결국 편집빔을 맞고 떡락한 놈이다.
약게 굴고 싶은데 티가 다 나서 망한 케이스라고 해야 할까.
선아현까지 '쟤는 너무 못된 애'라고 씩씩거리도록 만들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한결같이 대단한 놈이었다.
'흠, 골드 1 소속사로 탈주하면서 하차했던가.'
그래서 둘이 같이 이동 중인 거야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지만, 장소가 연말 가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방송국이라는 건 의외였다.
'아직 데뷔 안 했을 텐데.'
올해 신인 동향은 그놈의 신인상때문에 다 체크했는데, 저 둘의 소속사는 라인업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골드 1은 시시덕거리며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와, 진짜 반갑다! 아니 잠깐만, 선배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선배님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이고 됐습니다∼"
"펴, 편하게 말씀하세요 형…!"
"야 아현이 넌 여전히 애가 너무 착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충 골드 1과 최원길의 외관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댄서로 온 거군.'
저 소속사에서 아이돌 출신 여성 솔로 하나가 최근 성적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경험 쌓기 겸 언론 보도용으로 데뷔조 연습생을 댄서로 써먹는 거야 제법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골드 1은 자신과 똑같이 검은 의상을 입은 주변 놈들을 앞으로 밀며 소개했다.
"맞다, 얘네 같이 연습 중인 동생들이야!"
"어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는 놈들의 눈이 호기심과 부러움, 동경으로 빛났다. 이런 반응이 어색한지, 멤버 중 몇몇은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지목이 들어왔다.
"저, 저기 박문대 선배님!"
"예?"
"저 악수 한 번만…! 부탁드려도될까요…!"
옆에서 기겁하며 진압했다.
"야야, 나대지 마!"
"하이고 이 문디자슥 여기서도 허!"
얘네 뭐하냐.
나는 떨떠름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슨 기업 회장이라도 만난것처럼 극도의 정중함 속에서 악수교환이 이루어졌다.
"아 너무 좋아요!"
행복해하는 악수 종자를 두고 골드 1의 팀원들이 숙덕거렸다.
"야 사람이 역시 용기가 있어야 하나 봐."
"그러게."
…누가 보면 가요계의 전설적인 대선배라도 만난 줄 알겠군.
보니까 저기 이미 팀이 확정된 상태 같은데, 내년 초에 정식 데뷔한다면 테스타와 연차가 1년도 차이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뭐, 성적이 전부긴 하지.'
저 우러러보는 시선은 순수하게 '뜬 그룹'을 향한 심리적 격차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건 저 애들만은 아닌 듯싶었다.
좀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와, 사전녹화하는데 막 나 찍는것도 아닌데 진짜 떨리더라."
"아니, 몇십만 뷰 직캠도 있는 분이 너무 엄살떠시는 거 아니에요∼?"
"야 그거랑 다르지! 선배님 무대망치는 게 더 무섭잖아!"
"흠, 우열을 가리기 힘든 문제 같습니다."
근황을 주고받는 골드1과 테스타 멤버들 뒤, 최원길은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눌렸네.'
서열이 완전히 정리되면 끝나는 타입일 것 같긴 했다.
테스타의 올해 활동이 워낙 잘됐다보니 뭘 말해볼 엄두도 안 나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골드 1은 기어코 배세진과도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약간 아쉽다는 표정으로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아∼ 할 이야기 많은데, 바쁘지? 다음에 내가 밥이라도 한 번 살게!"
이만 볼일 보러 가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침 자리에 빈말을 잘 못 알아듣는 놈이 하나 있었다.
김래빈 말이다.
"아, 저희는 다음 무대까지 시간적 여유가 충분합니다. 대기실로 이동하면 대화를 계속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골드 1은 당황했다.
"하하, 래빈아 권유는 고마운데, 나 잘 모르는 분들은 불편하실 거 아니냐∼."
하지만 그게 차유진과 류청우였다.
"불편 안 해요!"
"아, 괜찮아. 편하게 해."
"그, 그래?"
깔끔한 오케이에 골드 1은 당황했다.
그리고 상황을 눈치챈 골드 1의 팀원들은 냉큼 도주했다.
"형 편하게 다녀오세요. 저희 숙소가 있을게요!"
"올 때 메롱나!"
"아주사 근황 토크, 아 화이팅∼"
"이 미친놈들이!"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은 우르르 복도를 뛰어서 사라졌다.
그러나 타이밍을 잡지 못한 최원길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이 팀에 막 합류한 탓에 썩 못 어울리고 있던가, 아니면 저쪽에서 같은 아주사 출신이라고 두고 간 것같았다.
'상황 애매한데.'
다행히 골드 1은 최원길을 챙겼다.
"아 원길아, 우리 이 친구들 대기실 방문은 처음이니까 마실 거라도 사갈까?"
"제가 사 올게요."
"어?"
그리고 최원길은 골드 1이 뭐라더 말하기도 전에 달려갔다.
'이대로 안 돌아올 것 같군.'
골드 1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 좀 불편했지?"
"괘, 괜찮아요!"
"괜찮기는…. 근데 원길이 쟤 많이 나아졌어. 인터넷 반응 너무 찾아보는 건 좀 걱정되긴 하는데….뭐 요새야 별 얘기도 안 나오고."
골드 1은 한숨을 푹 쉬었다. 꽤 마음고생을 한 듯싶었다.
큰세진이 웃으며 힐끗 최원길이 사라진 자리를 확인했다.
"쟤도 데뷔조인 거죠?"
"어. 사실 뭐, 노래도 잘하고… 어리고. 인지도도 있잖아."
하기야 아주사로 데뷔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방송 이미지의 문제기 때문에 대충 악편이라고 뭉개고 넘어갈 수 있다.
그룹에 하나 정도 끼우는 것에는 큰 문제 없다는 것이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혹시 저쪽이 내년에 초동 30만 장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나 분석해 보자.
"어, 문대 어디가?"
"화장실."
나는 대기실로 이동하는 행렬에서 슬쩍 빠져서 복도를 걸었다.
'여기 아래층이 사람이 없었지.'
시간도 넉넉하니 사람 안 만날 수 있는 방향으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최원길을 마주쳤다.
놀랍게도 편의점 대신 비상계단 한구석에 앉아서 고독을 씹고 있더라고.
"…."
"…."
화장실이나 가자.
나는 슬쩍 고개만 까닥거리고 최원길을 지나쳐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불쑥 최원길이 외쳤다.
"좋겠네요, 형은."
"…?"
"다 잘되고….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왜 갑자기 일일드라마 대사 같은게 튀어나오냐?
모르겠다. 뭐 황당함, 이런 것보다… 굉장히 숙연하고 민망하다.
'비상계단이라 소리 다 울리는데.'
그래서 더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 외진 계단 위아래로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 대사를 듣는 당사자가 나라는 걸 누구도 몰랐으면 하거든.
"그렇게 사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세상이 다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 주는 거."
그리고 이런 말을 현실에서 꺼내는 새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최원길은 이제 훌쩍거리고 있다.
'감수성이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지.'
아이돌 지망생들에게서 간혹 느끼는 괴리감을 또 한 번 느끼고 있다.
'그냥 갈까.'
나는 슬쩍 발걸음을 뗐으나, 난간저 밑에서 움직이는 인영을 발견했다.
"…!"
들리나?
거리가 꽤 됐다. 하지만 소리가 울려서 불분명할 수는 있어도, 드문드문 들린 것 같긴 했다.
이놈이 계속 떠들게 뒀다가는 이상한 소문이라도 생기는 거 아닌가?
'…수습하고 떠야 하나.'
나는 최원길을 확인했다.
"다들 원래 그렇게 살잖아요! 나만그런 것처럼 막… 다들 파트 싸움하고, 욕하고 그랬으면서."
"…."
이젠 순 자기 마음대로 떠들고 있다. 한번 터지니 자제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근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
"혀, 형도 제 파트 했잖아요. 또, 또… 세진 형도 짜증 냈었는데, 나만 더 못되게 군 것처럼 나오고. 희승이한테도 사과했는데 안 나오고."
최원길은 계속 아주사 중후반부에 본인이 받았던 분량을 되새김질하며 중얼거렸다.
'아직 머리가 아주사에서 못 벗어났군.'
뭐, 그럴 수도 있다.
어리고 자의식 강한 놈이 갑자기 불특정 다수에게 몇 달이나 원색적인 욕을 먹었으니까.
지난 반년간 다양한 미친 일을 겪은 테스타야 아주사 당시의 느낌을 빨리 털었다. 하지만 연습만 했던 이놈은 좀 다르겠지.
아마 나한테 이러는 것도, 아주사등급 평가 때부터의 견제심리와 열폭이 아직도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테스타 중 하나가 아니라 개인으로 마주치니 훅 터진 모양이다.
'…저 정도면 상담이라도 한번 받아보는 게 낫지 않나?'
물론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도의욕도 없다. 그냥 소문 안 나게 상황이나 잘 정리하고 얼른 뜨자.
나는 한숨을 참고 입을 열었다.
"내가 부럽다고? 왜?"
"…형은 뭐든 다 잘됐으니까요."
"아닌데."
나는 최원길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나랑 바꾸라면 할 거야?"
"…못 바꾸잖아요…!"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다는 거네. 음…."
나는 목 뒤를 주물렀다.
"근데 솔직히, 가족을 바꾸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
최원길은 웅크린 그대로 움찔거렸다. 당연하지만, 이놈도 박문대의 가정사는 아는 모양이다.
나는 일부러 느릿느릿 말했다.
"네가 부러운 건 그냥… 지금 내 직업적 상태뿐인 거지. 그리고 이런건 몇 년 뒤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부모님이랑 잘 지내?"
"…네."
"그래.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
최원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됐네.'
가불기가 잘 들어갔다.
'이제 쓸데없는 열등감은 좀 버렸겠지'
가정사가 유명한 걸 이렇게도 써먹는군.
'대충 힘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끝내자.'
하지만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죄송해요."
"…!"
최원길 입에서 사과가 나온 것이다.
"처음에 막… 운만 좋다고 그래서, 죄송해요."
음… 그랬었나?
아마 등급 평가 연습 때 최원길이 비꼬려고 던졌던 말 중에 하난 것 같다.
'원래 뱉은 놈은 기억 못 하고 들은 놈만 기억하는 게 국룰 아닌가.'
저놈만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상황 마무리하기 좋은 대화였다. 누가 듣고 있다면 더 좋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과 잘 받으마. 너도 데뷔 준비 잘하고."
"…."
최원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최원길은 좀 얄미운 놈이긴했지만, 무슨 대단한 범죄를 저지른건 아니었다. 머리도 덜 여물어서 영악하지도 못하고.
'정치질로 누굴 망하게 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본인이 대놓고 무시했던 골드 2가 본인보다 더 잘되지 않았는가.
종합적으로, 짜증 나는 트롤러였을 뿐이다.
'앞으로 볼 일 없었으면 좋겠군.'
나는 계단을 도로 걸어 내려갔다.
혹시 몰라 난간 아래를 슬쩍 재확인했지만, 아까 봤던 인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Happy New Year!"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테스타는 그대로 MBS에서 카운트다운까지 챙기며 신년을 맞았다.
하지만 당연히 느긋하게 새해 감성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당장 5일 뒤에 새 시상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드디스크어워즈
제법 유명하고 오래된 시상식 중 하나였기 때문에, 박문대가 임의로 세워둔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 후보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음원과 음반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틀에 걸쳐 진행됐지만 그래도 신인상 부문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테스타가 참석한 음반 부분 시상식 날짜 큐시트에 신인상 시상파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가 내심 생각했다.
'솔직히 테스타가 안 받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지.'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테스타는 자신들의 무대 순서가 다가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신인상을 탔다.
"축하합니다! 테스타!"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도 장애물이 많았던 탓인지 팬과 테스타 모두에게 희열감이 넘쳐흘렀다!
"와아아아악!"
근 두 달간 인터넷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팬들은 가열 차게 응원봉을 흔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테스타는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자, 갑자기 꿍꿍이 있는 미소를 지은 채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마이크를 곧장 선아현에게 넘겼다.
"…?"
순간 살짝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관객석을 지나갔다.
아주사 를 한 화라도 본 사람이라면 선아현의 말더듬 증세를 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선아현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본인이 당황하며 뒤로 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선아현은 약간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곧바로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과분한 상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23화]
선아현이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앞으로도 지금 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활동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느리고, 호흡을 들이키며 쉬는 구간이 많았다. 군데군데 발음을 끌다가 문장을 잇는 경우도 들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더듬진 않았다.
"…그리고, 응원해 주시는 러뷰어님들,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러뷰어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장까지 무사히 마친 선아현의 뒤로 멤버들이 우르르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그럴 것도 없었다.
팬석은 이미 충격과 감격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아아아악!
잘했어! 잘했어!
어떡해! 으아아아아!
심지어 영상으로 보던 사람들에게도 테스타의 마이크까지 울리는 관객석의 소리가 들렸다.
-엌ㅋㅋㅋㅋ팬들 소리 너무 잘 들렼ㅋㅋㅋㅋ
-선아현 팬들 숨 넘어가겠다
-ㅋㅋㅋ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도좀 감동받음
└나돜ㅋㅋㅋㅠㅠㅠ
└ㅋㅋㅋㅋ이게 바로 주주 후유증인가
-선아현 잘됐네ㅠㅠ
-쉬운 일 아니었을 텐데 대단
-암튼 테스타 ㅊㅋㅊㅋ 받을만했지
그렇게 테스타는 자기 증명 속에서 수상을 마쳤다.
작년 말에 사람들이 예상했던 조롱과 비난은 그림자도 없었다.
수상을 마치고 가수석으로 복귀하며, 팀원들이 선아현에게 한마디씩 칭찬을 던졌다.
"아현아 목표 달성 축하한다!"
"축하합니다!"
선아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고, 고맙습니다…."
흠, 축하받을 만했다. 저놈이 꽤 길게 고생했기 때문이다.
'대충… 한 달 반쯤 연습했나.'
선아현이 말더듬 증상 치료를 시작한 건 연말 무대 연습 때문에 더럽게 바빴던 그 타이밍이었다.
시작 단계다 보니 목적 의식을 위해 어렵지 않은 단기 목표를 하나 잡게 했다는데, 선아현이 잡은 게 바로 이거였다.
수상소감 자리에서 더듬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
덕분에 숙소와 연습실, 차 안에서 종일 저 짧은 소감문을 잡고 중얼거리는 선아현을 매번 봤다.
'…일주일 만에 매니저까지 소감문을 다 외웠지.'
그리고 모두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아현의 중얼거림을 반쯤 수면용 ASMR처럼 취급하게 됐다.
아무튼, 과하게 조급해하지 않고긴 기간 잘 연습해서 성공했다는 건 확실히 인상적인 일이다.
'일단 한번 성공하면 계속하게 된다는 점도 있고.'
그렇게 선아현의 상태이상 재발생 가능성이 멀어진다면 그룹에도 좋은일이다.
나도 칭찬을 얹었다.
"혹시 연습한 대로 안 나와도 괜찮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더라. 잘하던데."
"…! 그, 그 정도는 아니고… 너무 숨을 많이 쉰 부분도 있고, 다,다음에는 진짜로 잘할게…!"
"…."
아니… 그냥 잘했다니까. 뭘 저렇게 변명처럼 대답하냐.
하지만 뭘 정정하기도 전에 선아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사, 상담해 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흠, 이건 좀 감사받아도 될 건이긴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
"오, 훈훈해∼"
"우리 팀 분위기 정말 좋다."
논란도 사라졌고 신인상도 잘 탔겠다, 근심 걱정이 싹 사라진 놈들은 허허 웃으며 기분 좋게 가수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 기분은 가수석으로 복귀할수록 더러워지고 있었다.
테스타의 좌석 위치가 VTIC 바로 옆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신인을 이 옆에 붙이냐.'
덕분에 이동할 때마다 VTIC한테 대가리 박아서 인사를 해야 했는데, 뭐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제는 인사할 때마다 청려가 실실 쪼개면서 봤다는 점이다.
'X발.'
누가 보면 그냥 흐뭇해서 웃는 줄 알 것이다.
저 새끼가 신인상 논란에 불 질러놨던 SNS 글 수습을 꽤 잘해놨기 때문이다.
연말 프로그램에 나올 때마다 똑같이 SNS에 사진을 대량 업로드하면서, 그 사이사이 무작위 출연진을 오닉스와 비슷한 문구를 붙여서 추가한 것이다.
말하자면, 물타기였다.
덕분에 팬들의 적극적인 해명 글로 다들 오닉스 건은 우연의 일치였거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됐다.
…'박문대하고 친분 있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긴 했어∼'라는 반응이 제일 빡쳤다는 점만… 말해두겠다.
"…."
인사가 끝난 뒤, 나는 일부러 천천히 들어가서 VTIC과 최대한 떨어진 쪽 의자에 앉았다.
별 의미는 없고, 그냥 기분이나 덜 나빠 보려고 하는 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부가 끝나고 몇 분간의 광고 타임에 들어갔다.
그리고 광고가 전광판에도 떴다.
[마법소년 테스타의 마법 같은 인공지능 비서!]
"으아아악!"
"와 제발…."
흑역사 (현재진행형) 공개 인증에 멤버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공포의 러시안 룰렛이 돌아갔다.
[뀨! 큐리어스!]
이번 희생자는 배세진이었다.
햄스터 귀 그림 CG가 올라간 배세진의 연기는 자연스러웠으나, 본체는 완전히 맛이 갔다.
"…화장, 화장실 좀."
배세진은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황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멤버들은 동정과 폭소를 동시에 해냈다.
"으하하하하!"
"세진아 괜찮, 푸흐흡!"
박수 치는 놈부터 무릎에 머리 끼우는 놈까지 별 반응이 다 나왔다.
'나만 아니면 된다 이거군.'
맞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병을 땄다.
입에 물병 주둥이를 꽂아 넣는 순간, 배세진의 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거 멤버별로 하나씩 있죠? 재밌네."
"푸흑."
코로 나올 뻔했다.
'X발.'
청려 였다.
웃던 멤버들이 놀라서 고개를 꾸벅거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 잠시만 문대랑 이야기만 좀 하고 갈게요."
"넵!"
거북한 티라도 좀 내줘라 새끼들아.
하지만 배세진이 없어서 딱히 그럴 놈이 없었다. 젠장.
그나마 큰세진은 청려가 SNS 업로드 사건을 고의라고 거의 확신 하는것 같았다만, 지금은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게 맞았다.
'깔린 게 가수석 직캠이다.'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분명히 이 광경을 찍고 있을 것이다.
VTIC이든 테스타 멤버든, 분명 적어도 스무 개 이상의 카메라에 현상황이 잡히겠지.
'침착하자.'
어차피 여기서 대화해 봤자 워낙 시끄러워서 소리는 안 퍼진다. 아마 일부러 목청 크게 말하지 않는 이상 멤버들에게도 안 들릴 것이다.
"하실 이야기라는 게?"
"지난번 통화할 때 말했을 텐데…기억 안 나요?"
아, 그 자기 SNS 업로드가 나쁜 의도가 아니고 어쩌고 하던 그거군.
한마디로 '내가 널 X 되게 만들려던 게 아니야.'를 길게 설명해 주고 싶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이상 대충 들어주고 '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하고 끝내고 싶다만, 문제가 있다.
"…그걸 광고 타임 안에 다 설명하시겠다고요."
"아 충분하죠. 들어봐요."
청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타이밍에서 한번 죽는 게 가장편하거든."
"…!"
"잘 생각해 봤는데, 내가 처음에 제일 힘들었던 게 그거였어. 다시 시작하는 데에 거부감이 있던 거야."
청려가 탁자를 툭툭 쳤다.
"근데 한번 해보면 별거 아니었던걸 바로 깨닫거든요? 그럼 그 다음부턴 훨씬 일이 쉽지."
"…."
상상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닌 이유가 튀어나왔다.
'와 이거 장난 아닌데.'
나는 의식적으로 물병을 들어서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후배님도 이번에 아쉬운 점이 분명 있었죠? 돌아가서 한번 고쳐봐요. 그럼 부담감이 사라지고… 대신 성취감이 있어."
"잠깐."
물병을 내려놨다.
"그럼 일단 제가 신인상에 실패해서 죽게 만들려던 건 맞군요."
"내가 그랬다고 신인상을 못 받나? 그건 아니고… 그냥 좀 귀찮게 만든거죠."
청려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여론도 안 좋고, 상황이 짜증 나니까 다시 해보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제 죽음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서 수월한 진행을 도우려고하셨다?"
"네."
"음, 거짓말 마시고."
"…뭐?"
"제 진행이 수월해지든 말든 선배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
내가 이놈이랑 뭐 대단히 호의적인 사이라고, 이런 놈이 아무 콩고물도 없이 이타적인 의도로 움직였을 리가 없다.
대충 듣고 넘길 생각이었는데, 이쯤 되니 대체 무슨 개소리가 나올지 예측이 안 돼서 한번 끊어봤다.
청려는 약간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음, 물론 제 입장도 좀 고려한 선택이긴 했는데요."
"…."
"이게 후배님에게 영향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좀 궁금해서."
청려가 목을 살짝 꺾었다.
"혹시 너 죽으면 나도 재시작하는지 알고 싶잖아."
"…!"
"그렇지. 꼭 내가 돌아갔던 첫 시점 아니어도 괜찮고…. 너 돌아간 지점 정도도 괜찮지. 올해 상반기에 고치고 싶은 점이 몇 가지 있거든."
이 새끼는 완전히 돌았다.
진정한 의미의 리셋 증후군이었다.
"아, 물론 계속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하지만 미리 확인해 두면 확실하고 좋잖아요. 아닌가?"
"잠깐."
이거 잘못하면 VTIC 스캔들 나는 날 이 새끼가 날 암매장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이건 굳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차라리 말하는 편이 리스크가 덜 할것 같다.
일단… 아직 논리는 통하는 놈 같으니, 논리부터 쓰자.
"…우선, 저는 실패하면 그냥 끝일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음?"
"느낌이 그렇습니다. 그냥 죽고 끝일 것 같습니다."
상태창을 말할 수 없으니 느낌이라고 뭉개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내 상태이상에는 '죽음'이라고만 명시되어 있다.'
청려 저놈의 상태이상처럼 '돌아간다'는 표현 자체가 없던 것이다.
'아마 이번 한 번으로 끝일 거야.'
혹시 돌아갈 수 있더라도,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진짜 죽고 끝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가짐에 좋았다.
하지만 청려는 실소했다.
"아, 그거 처음에는 그래요. 근데 아닐 텐데?"
"…."
"겁먹지 말고 해보라니까."
이 개새끼가 진짜.
나는 열이 뻗친 채로 대답했다.
"아뇨. 애초에 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끝을 보고 싶은데요. 지금 멤버들이 좋고, 팬들이 좋아요. 바꾸고 싶은 건 없습니다."
"…."
청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표정 없이 허공을 보았다.
'…너무 나갔나?'
갑자기 어디서 오함마 꺼내와서 내 뚝배기를 깨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청려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
"음, 알겠어요. 뭐, 그렇다면야."
이게 통했다고?
갑자기 긴장이 쭉 풀릴 뻔했으나 참았다. 이러고 또 뒤통수칠지도 모를 놈이다.
하지만 청려는 그냥 약간 미안한 표정이 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이번에 나 때문에 마음고생 했다면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근데 다음에는 제 의사부터 확인해 주시죠."
"네. 아, 그럼 뭔가 마음 편할 소식이라도 알려줘야 하나… 음, 그렇지."
"…?"
"신인상 과제 기준을 알려줄게요."
청려가 웃었다.
"한대음 '올해의 신인'상입니다."
"…!"
한대음?
'그' 한대음?
… 한국대중음악식, 상업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음악성으로만 평가한다는… 곳이다.
내가 알기론, 지금까지 아이돌이 신인상을 받은 적은, 전무….
잠깐, 그럼 이 새끼도 못 받았다는거잖아.
"하하! 당연히 농담이고."
"…."
언젠가… 상태이상이 끝나면, 이 새끼 면상에 테스타의 대상 트로피를 뭉개버릴 것이다.
다행히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청려는 제대로 된 정보를 뱉었다.
"중요한 건 신인상을 받은 이후의 여론이야."
"…!"
"너희가 받을 만한 상을 받았다, 이 반응이 확고한 대중 여론이어야 넘어가더라고요. 물론 진짜 시상식과 반수에서 상 받는 게 전제고."
…그렇군.
'상태창이 말하는 '가장 권위 있는시상식'은 여론이었나.'
그럴싸했다.
어쩐지 이번 골디 신인상에도 상태이상 목표 달성 팝업이 안 뜨더니, 아마 2월이나 돼야 뜰 성싶다.
그리고 내가 결론을 내리는 순간, 도망갔던 배세진이 돌아왔다.
"…! 저기."
"아, 미안합니다. 일어나볼게요. 문대야, 또 연락할게."
"…."
차마 긍정적 답변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직캠을 의식해서 고개는 끄덕였다.
청려는 테스타 전체에게 손을 흔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배세진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청려를 보다가, 자신의 자리를 약간 찝찝해하면서 착석했다.
"…너 저 사람이랑 친해?"
왜 선배로 안 부르나 짧게 생각했는데, 곧 배세진이 데뷔한 지 14년이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편하게 정색했다.
"아뇨. 일 얘기하시던데요."
"…일?"
"오 문대의 사회생활∼"
목소리가 좀 컸는지, 큰세진이 듣고서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마 대충 SNS 변명하고 갔겠거니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배세진은 약간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혹시 괴롭히는 거면 말해."
"…."
아마 배세진은 지난 아역배우 경험을 떠올리며, 업계 선배의 갑질 따위를 생각하는 것 같으나… 잠깐,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맞는 것 같긴하군.
어쨌든, 설명은 불가능한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혹시 그러면 말할게요. 감사합니다."
"…뭘."
이날 테스타는 본상까지 받고, 무대를 실수 없이 잘 소화한 뒤 귀가했다.
참고로 대상은 VTIC이었다.
…내 상태이상이 끝나는 날까지는, 웬만하면 계속 저놈들이 대상을 탔으면 좋겠다.
어떤 미친놈이 재시작하겠답시고 야밤에 습격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골디 시상식이 끝난 다음 날.
슬슬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오늘 출근하셨다는데?"
회사에 새 본부장이 발령 난 것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24화]
"오∼ 새 본부장님 어떤 분이래요?"
"괜찮은 분이라던데?"
매니저와 큰세진의 대화가 들렸다.
'기대하지 말자.'
새로 온 높으신 분도 예전 본부장처럼 대단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일 확률이 높았다.
어찌 됐든 전 본부장 때 테스타 성적이 괜찮았으니, 회사 입장에서야 또 비슷한 놈을 보냈을 거 아닌가.
그러나 이 예상은 좋은 의미로 깨졌다.
"…결재봇이요?"
"그렇다니까! 퇴직 얼마 안 남았다고 몸 사리는 것 같대."
회사 사람들에게 건너 건너 들은 말은, 이 본부장이 별참견이나 밀어붙이는 프로젝트가 없고 실무진이 하던 대로 둔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릴 부른다는 말도 없군.'
보통 유일한 소속 가수 얼굴 한번 보자고 할 법도 한데 일언반구도 없었다.
오래 있을 양반은 아닌 것 같다만, 일단은 나쁘지 않았다. 잘 모르는 윗사람이 의욕만 있는 것보다 오케이만 외쳐주는 게 편하니까.
다만 이 영향으로 큰 프로젝트 하나가 떨어졌다.
"콘서트라니…."
"드디어 저희도 단독공연을 준비하게 되는군요."
밀린 대형 결재가 하나둘씩 승인처리 되면서, 드디어 콘서트 날짜가 잡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3월은 좀 날짜가 애매하지 않나?"
그렇다.
개강, 개학 시즌에 딱 맞아떨어지는… 누구든 공연 보러 갈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시즌에 잡힌 것이다.
…원래는 연초 특수를 노리고 하려고 했는데, 회사가 워낙 난리통이라 대관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이렇게 기간이 밀린 덕분에 공연 장비 등의 대여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라고.
다행히 멤버들은 금방 날짜에 대한 불안감을 덜었다.
"그래도 주말이니까 오시려는 분들은 꽤 있지 않을까?"
"시, 시간 괜찮은 팬분들이 계실테니까요…!"
"많이 오면 좋아요!"
"준비를 잘해서 좋은 공연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분위기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리고 남은 기간 3개월이라.'
뭐, 콘서트를 반년 이상 준비했다는 가수들도 보긴 했지만, 3개월도 나쁘진 않았다.
'현실적으로 반년 전이면 데뷔곡만 나왔을 때라 준비 자체가 불가능했기도 하고.'
좀 빡센 작업이 되긴 하겠지만, 활동기도 아니니 그럭저럭 잘 소화할수 있을 것 같았다.
…라고 생각할 때, 실무진에게 새로운 제안이 떨어졌다.
"신곡 첫 무대를 첫 콘서트에서 발표하는 건 어떨까요?"
"…저희 3월에 컴백도 하나요?"
"좀 무리일까요?"
무리다.
이 사람들 데뷔 앨범 한 달 만에 뽑았을 때 개고생했던 건 잊어버린건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이밀고 있어.
. …하지만 의외로 상식적인 답이 이어 졌다.
"근데 어차피 콘서트 세트 리스트 채우려면 새 곡 무대를 몇 곡 뽑아야 하는데, 기왕이면 다른 가수 커버곡이 아니라 이렇게 테스타의 곡이면 좋지 않을까요?"
"…음, 네."
"그리고 이번 앨범 이미 수록곡도 거의 다 나왔고, 타이틀만 작업하면 되는 상태잖아요."
맞는 말이긴 하다.
사실 이번 컴백은… 정규 1집이다.
그래서 공을 들이고자, 여유 있던 지난 앨범을 작업할 때 미리 다음 앨범 수록곡도 반쯤 뽑아놨었다.
이후로도 활동 틈틈이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 촬영이랑 이런 것도 어차피 콘서트 VCR 촬영해야 하니까, 일정 맞춰서 하면 될 것 같은데… 컨셉 포토도 콘서트용까지 맞추면 되구요."
"…."
비용과 시간의 절감 효과.
그리고 콘서트 컨셉 잡기도 좋겠지. 정규 1집 컨셉하고 연관성 있게 구성하면 상호 홍보 효과도 있고 팬들도 재밌어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무진과 가수만 갈리면 모두가 행복할 상황이었다.
'미치겠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조용히 경청만 하던 김래빈이 슬금슬금 동의 버의 의미로 손을 올리려고 하고 있다.
자진해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토끼고기가 따로 없었다.
류청우가 일단 상황을 정리했다.
"저희끼리 좀 이야기해 보고 말씀다시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네. 근데 내일까지는 꼭 말씀주세요."
그리고 내일까지 갈 것도 없었다.
회사의 연습실에서 결론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만장일치였다.
"저희 한번 작업해 보려고 합니다."
"아, 잘 생각하셨어요!"
회사는 기뻐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하면 또 할 수있더라'라고 생각하는 얼굴인 게 뻔했다.
지난 미친 일정에서 결과물이 좋았던 것의 폐해였다.
'배세진까지 물들었군.'
연말 무대를 한번 일주일 만에 바꿔보니 이쪽도 관록이 붙기 시작한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콘서트의 세트 리스트 초안을 보내줬다.
류청우가 빠르게 브리핑했다.
"우리 타이틀하고 서브곡 다 들어가고…. 팬송에 수록곡들 넣어도 열 곡이 전부네."
"음∼ 콘서트 하려면 적어도 스무곡은 필요한 상황인 거죠?"
"사실 스무 곡도 적은 편인 것 같습니다. 더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 맞아."
군데군데 빈 곡이 있는 세트 리스트는 아직 빈약했다.
"일단 두 곡은 새 앨범에서 가져온다고 쳐도, 나머지 여덟 곡을 새로 넣어야겠네."
새 앨범 수록곡을 안무 없이 넣는 방안도 고려되었지만, 퍼포먼스용 곡을 더 하고 싶다는 의견으로 기각되었다.
그나마 숨 돌릴 구간을 자기 의지로 썩둑 썩둑 잘라내는 놈들을 보니 말문이 막힌다.
'이러다 쓰러지겠는데.'
다행히 회사의 권고 사항이 기억났다.
"우리 유닛 곡 좀 넣어달라고 했는데, 그건 일단 채우죠."
이러면 다른 멤버가 하는 동안 반강제로 쉴 구간이 생기지.
게다가 회사는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아, 그걸로 자체 컨텐츠 찍을 거라고 하셨지?"
그렇다. 위튜브에 유닛 무대를 나누고 준비하는 과정을 예능처럼 편집해서 올릴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콘서트가 끝나면 그 유닛무대도 안무 영상처럼 업로드할 생각이라고.
"그럼 일단 그거 3곡은 빼고 나머지 5곡을 생각해 보자. 하고 싶은 곡 있는 사람?"
"저요!"
"저, 저도…!"
그리고 치열한 접전을 거쳐서 다섯곡이 선정되었다.
묵비권을 행사한 배세진과 양보를 선택한 류청우 덕분에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그럼 일단 이렇게 올릴게."
"넵!"
그리고 회사는 '이대로 정말 괜찮겠냐'는 질문을 열 번쯤 한 후에야, 몇 가지 순서를 수정해서 세트 리스트를 컨펌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VCR 시간이 길게 책정되었다는 소식을 알음알음 들었다.
'…유산소를 더 열심히 해야겠군.'
실무진의 반응을 보니, 콘서트가 죽도록 힘들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
그리고 새 앨범 타이틀과 컨셉을 정하며 며칠을 보낸 뒤.
오랜만에 숙소에 카메라가 들어왔다.
콘서트 무대용 유닛을 나누는 장면을 촬영하려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방식이 독특했다.
"오늘은 무슨 날?"
"룸메이트 바꾸는 날∼"
룸메이트 바꿔서 매칭되는 놈들끼리 무대를 해버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거 완전 아주사 팀전 느낌인데.'
심연을 너무 들여다보면 심연도 본인을 들여다 본다더니, 다들 그 방식에 물들어버린 모양이다.
뭐, 사실 의외성 강하고 재밌는 건 맞았다. 누구랑 해도 잘할 수 있다는 이놈들의 자신감도 느껴지고.
"그동안 정들었던 룸메이트들과 작별 인사를 합시다! 아이고 형님 동생∼"
큐카드를 든 큰세진은 진행을 하다가, 뻔뻔하게 흐느끼는 척하면서 차유진, 류청우와 포옹했다.
다분한 콩트 분위기였다.
휩쓸린 김래빈이 선아현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동안 제 소음과 작업에 언제나 너그럽고 온화한 태도로 응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함께 방을 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 나야말로 고마웠어! 그, 그리고, 작업하는 소리 듣기 좋았어. 곡좋더라…!"
화목한데 극한으로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둘이 잘 지내고 감정도 좋은 것 소같은데, 터놓고 친해지는 것에는 실패한 모양이다.
나도 배세진에게 인사를 했다.
"저희 생활 스타일이 비슷해서 좋은 룸메이트였던 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러게. 그대로 가면 좋았을텐데."
말을 하는 배세진의 시선이 은근히 차유진을 향해 있었다. 혹시라도 저놈과 같은 방이 될까 봐 위가 쓰리는 모양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나는 배세진의 생각에 동화된 채로 악수하며 대화를 끝냈다.
"자, 그럼 새로운 룸메이트를 만나봅시다!"
"와아아!"
상투적인 박수 소리가 지나간 뒤, 큰세진이 웃으며 등 뒤에서 준비된 소품을 꺼냈다.
"이번 룸메이트 방식은… 카드 뒤집기 입니다!"
"오!"
"이 뒤에 번호가 보이시죠? 바로 방 번호입니다! 같은 번호 걸린 사람들끼리 같이 쓰는 거예요∼"
큰세진은 쓱쓱 카드를 섞었다. 이런 게임도 제법 해봤는지 아주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일곱 장을 뒤집어서 깔았다.
"자, 여기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카드를 고르는 겁니다∼"
"OK!"
"알겠습니다!"
누가 먼저 카드를 고르는지는 가볍게 노래방 점수 게임으로 정했다.
"예옙!"
사실 카드 고르는 순서야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게임보다는 다들 그냥 컨텐츠용 분량 뽑는 데 치중했다.
그리고 점수도 완전히 의미 없었다.
"1등은… 100점을 맞은 차유진!"
"오우!"
실수로 모르는 곡을 선곡해서 그냥 지어내 부른 놈이 1등을 했기 때문이다.
"자, 카드 뽑으세요!"
"예!"
"자… 오! 1번입니다∼"
어쨌든, 차유진부터 시작해서 한명씩 나가 카드를 뽑았다.
그리고 나는… 놀랍게도, 배세진과 또 같은 방이 되었다.
"오, 배세진 형님의 방 번호는… 3번! 문대와 또 같은 방이네요∼"
"…!"
배세진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럼요."
사실 나도 차유진 피하고 저런 심정이었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3번이라는 점이다.
예전에 리얼리티에서 처음 룸메이트를 정할 때와 똑같이, 3번은 3명이쓰는 방이었다.
그리고 현재 남은 라인업은… 큰세진과 선아현이었다.
"아∼ 저희만 남았네요!"
"그, 그러게요."
"자, 그러면 제가 먼저 고르겠습니다-"
순서상 먼저였던 큰세진이 고민하는 것처럼 남은 카드 한 장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슬쩍 미끄러뜨리고는, 다른 카드에 손을 얹었다.
"…!"
잠깐, 저 새끼 지금….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아현씨, 그럼 같이 뒤집을까요?"
"조, 좋습니다!"
"그럼… 하나, 둘, 셋!"
휙. 큰세진과 선아현이 카드를 뒤집었다.
결과는….
"오오오!"
"이야! 유진아! 또 잘 부탁한다!"
큰세진은 1번, 차유진의 방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은 3번은…선아현이었다.
선아현이 활짝 웃으며 카드를 보여줬다.
"…!자, 잘 부탁해! 잘 부탁합니다!"
"그래. 잘 지내자."
배세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이번 방 배정이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오랜만에 같은 방 쓰네."
"으, 응!"
선아현은 카드를 꽉 쥔 채 후다닥 3번 방 인원에 합류했다.
"자, 그럼 러뷰어분들께 깜짝 발표가 있겠습니다! 과연?"
멤버들이 웃으며 드럼 롤을 넣었다.
"두구두구두구!"
큰세진이 큐카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저희 이번 룸메이트끼리 유닛 무대합니다!"
"기대 많이 해주세요!"
준비된 대로, 멤버들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그렇게 거실 촬영이 일단락되었다.
"후!"
"그럼 우리 짐부터 옮깁시다∼"
멤버들은 바뀐 방으로 자신의 짐을 옮기기 위해 당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달려갈 것 같은 놈이 다른 행동을 했다.
거실 바닥에 있던 카드를 챙긴 것이다.
"아! 여기요."
"네. 고마워요∼"
큰세진은 카드를 잘 정리해서 원래 박스 속에 정리한 뒤에 스탭에게 넘겼다.
그리고 아직 거실에 남은 나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문대, 짐 안 옮겨?"
"…가야지."
나는 큰세진을 따라 복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거 뭐 해놨던 거네.'
저놈, 일부러 3번을 피한 것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25화]
'저놈이 이런 수작을 부렸다고?'
좀 이상한 일이었다.
큰세진이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자기유리한 쪽으로 여론을 모는 놈인 건 안다.
하지만 굳이 카드에 수작까지 부려서 유닛을 고를 놈이었나?
혹시 들킬 수도 있다는 위험까지 감수하느니,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자기 유리하게 끌어갔을 것같은데.
'겨우 배세진 피하고 싶다고 저럴것 같지도 않고.'
흠, 영 개운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걸 추궁하기도 상황이 영좋지 않았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숙소에 카메라 깔린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제 살 깎아 먹는 짓이었다.
그리고 사실이라도 뭐라 하기 그렇지 않은가. 콘서트 일회성 유닛 좀자기 원하는 대로 슬쩍 했다고 뭐 큰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니까.
괜히 분위기만 조질 확률이 높았다.
'…일단은 넘어갈까.'
나는 이제 예전 방이 된 1번 방의침대로 갔다. 큰세진이 이제 자기방이 될 곳을 구경하는 것처럼 슬슬 따라 들어왔다.
"오, 나 문대 침대 써야지. 문대야, 내 침대를 너에게 인계하도록 하마."
"…어딘데."
"뭐야, 까먹었어? 제일 왼쪽이잖아∼"
"그래. 거긴 피해야겠다."
"헉, 너무 황송해서 못 쓰겠어? 괜찮아, 문대야. 사양하지 말고 편하게써∼"
"…."
아주 평소 그대로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짐을 챙겨서 1번 방을 나왔다.
'혹시 다른 문제가 생기면 그때 말꺼내도 되겠지.'
그리고 그 타이밍은 예상보다 좀더 빠르게 찾아왔다.
바로 며칠 뒤 시상식이었다.
한대음을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마지막 대형 시상식이었다.
하지만 몇몇 대형가수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투어 스케줄과 겹쳤기 때문인 것 같다.
즉, VTIC도 안 왔다는 뜻이다.
'…오함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문자가 왔다.
[VTIC 청려 선배님 : 이번이 거의 마지막 같네요. 신인상 축하해요^^]
"…."
정신적 오함마에 얻어맞는 기분이군.
단문으로 답장하고 스마트폰을 껐다. 그러자 큰세진이 아는 척을 했다.
"청려 선배님이랑 계속 연락해?"
"…어."
"흠∼ 그래그래."
큰세진은 뭔가 더 말을 덧붙이려는 것 같았으나, 그보다 먼저 시상식 대기실에 도착했다.
대기실 문 앞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자이롭 / 테스타]
이번에는 단독 대기실이 아니던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성적 덕분에 신인치고 대기실을 너무 잘 받았던 거긴하지.'
웬만큼 떠도 대기실 부족한 환경에서는 그냥 칸막이 두고 대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두 그룹에 하나도 사실 사정이 좋은 편이고.'
흠, 그래서 이번에 함께 대기하는건… 유명한 소속사 출신의 남자 아이돌이다.
'삼사 년쯤 선배인가.'
예상 가능한 라인업이었다.
류청우가 멤버들에게 가볍게 당부했다.
"음, 들어가면서 인사 잘하자."
"넵!"
하지만 평범한 다른 멤버들의 반응과 달리, 바로 옆의 큰세진이 동요했다.
"…!…음."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놈들 소속사랑 데뷔 날짜를 계산해 보면…'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매니저에 의해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아∼ 안녕하세요∼"
별 특색 없는 인사가 오가는가 싶더니, 곧 자이롭 놈들이 과장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 세진이!"
"잘 지냈어?"
역시 그랬군.
아무래도 이쪽이 아주사 전 큰세진의 짧은 탈선의 원인인 '그' 그룹인 게 맞는 것 같다.
큰세진이 데뷔 직전에 솎아내졌다던, 첫 소속사의 첫 데뷔조 말이다.
"와∼ 안녕하세요. 선배님∼ 진짜 반갑습니다!"
"야, 선배님은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불러∼"
"에이, 어떻게 그래요∼"
큰세진은 웃으며 몇몇 놈들과 악수를 하고 주먹을 부딪쳤다. 썩 친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큰세진이 큰세진처럼 구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워낙 사교성이 좋은 놈이니까.
다만 그다음부터는 분위기가 살짝달라졌다.
"세진이 어, 톡도 잘 안 보고 말이야. 형 서운하게."
"아이, 아시잖아요∼ 데뷔하니까 너무 바빠서!"
"그래. 세진이 너 지금이라도 바빠져서 좋겠어∼ 생각보다 많이 늦었잖아! 운이 좋았네."
'어쭈?'
이놈들 은근히 큰세진이 그동안 데뷔에 실패했다고 비꼬고 있다.
큰세진은 벙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좋죠∼ 선배님들 자주 톡 주시는데 답장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일이 바빠서 잘 안 맞네요."
너희 스케줄 없어서 X나 한가하냐는 뜻이다.
"…아니, 뭐, 자주 한 건 아니었잖아? 그냥 너 뭐 하나 궁금해서 했지."
"어? 요새 여기저기 많이 나와서 제 근황 알기 편하지 않으세요? 저한테도 가끔은 선배님들 근황도 알려주세요∼ 제가 다 궁금하네."
"…."
와, 저놈들 직전 활동이 부진해서 성적 관련 소식 없는 걸 이렇게 돌려 깔 수도 있군.
어떻게 봐도 큰세진의 판정승이었다.
그리고 이쯤 되니 김래빈을 제외한 대부분의 멤버가 상황을 파악했는지 눈을 굴리고 있었다.
자이롭의 멤버들은 표정이 썩기 직전이었다.
"…그래. 올해는 알기 싫어도 우리 소식 잘 알게 될 거야∼"
"그래요? 이야, 기대되네요! 저희 테스타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
이건 순수하게 체급 차로 뭉개버렸고.
결국, 자이롭 멤버들은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마쳤다.
"그래. 우리 서로 열심히 하자."
"넵!"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 듯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뒤에서 멀뚱히 서 있던 자이롭 멤버 하나가 끼어들었다.
"근데 테스타 소식밖에 못 들었는데? 너 소식은 잘 모르는데?"
"…!"
의외였던 점은, 큰세진이 이 별거 아닌 말에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는점이다.
큰세진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별다른 반박을 내놓는 대신 입을 닫고 있었다.
'어?'
그리고 여기서 김래빈이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올려서 발언했다.
참고로 참지 못한 건 열 받음이 아니라 순수한 논리적 오류였다.
얘는 상황을 몰라서 열 받지도 못했다.
"…? 세진 형이 테스타시니까, 테스타 소식이 형 소식 아닙니까?"
"맞아요!"
차유진이 냉큼 동의했다.
하지만 자이롭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룹 이야기만 들리고 이세진 이야기는 잘 안 들리니까∼"
"…? 아, 저희는 그룹 활동 외에 개인 활동은 한 적이 없습니다. 테스타의 소식을 세진 형님의 소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김래빈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자이롭의 말이 억지가 됐다.
끝났군.
'정리할까.'
나는 웃으며 끼어들었다.
"예. 앞으로는 테스타 소식 들을 때마다 이세진을 떠올려주시면 되겠습니다. 맞지?"
"정확하십니다!"
뿌듯한 김래빈의 얼굴과 반대로 자이롭의 얼굴은 완전히 썩었다.
"…아, 그래요."
아무리 선배라지만 이 새끼들도 시상식까지 와서 체급도 큰 그룹한테 지랄할 배짱은 없는지, 대화는 그대로 끝났다.
하지만 큰세진의 상태는 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 진짜 좀 이상한데.'
한 시간째 말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큰세진은 더럽게 위화감을 조성했다.
…그리고 방금 상황과 며칠 전 유닛 카드 사태와 연결하니 의심 가는 지점이 생겼고.
'…이대로 두긴 애매한데.'
큰세진은 마이크를 잡는 일이 많았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수상소감을 말해야 할 타이밍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지금 털고 가는 게 나았다.
"…차에 잠깐 다녀올게."
"어?"
"뭐 두고 와서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매니저에게 키를 받아왔다.
"내가 찾아다 줘?"
"괜찮아요. 얼른 갔다올게요."
그리고 문 근처에 앉아 있던 큰세진을 툭툭 쳤다.
"야, 가자."
"…응? 뭐라고?"
"옮길 게 있어서 한 명 더 필요할것 같다. 사진도 찍어야 하고."
"…."
큰세진은 말없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만 웃으며 일어섰다.
"…그래∼"
어딘가 빈정 상한 게 분명해 보였지만, 일단은 이동부터 하자.
그리고 이놈과 말없이 복도를 걸어서 차에 도착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차에 타고 나서 입을 열었다.
"…."
"너 뭐 최근에 문제 있냐?"
"….후"
큰세진은 차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본인을 불러낸 목적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한듯싶었다.
"아니."
"…그래? 그럼 머리 좀 식히고 올라가라. 너 대기실 불편한 것 같던데."
"…!"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차를 뒤져서 목 베개를 찾아냈다.
대충 이거 찾으러 왔다고 하면 되겠지.
"대충 변명해 둘 테니까, 시간 전에만 돌아와. 그럼."
"…."
나는 차 문을 잡았다. 그러자 뒤에서 큰세진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 이게 좀, 힘드네."
"문제가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문제…라고 해야 하나 이걸."
큰세진은 뭐라 말하기 힘든지, 계속 침묵이 이어졌다.
'그냥 말하는 편이 낫나.'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너 유닛 카드 고르는 거 봤다. …너 3번 카드 알고 피했지."
"…!"
"…3명이 하면 2명보다 분량이 줄어서 그랬냐?"
아까 '너 말고 그룹이 잘 나가는거지∼'같은 말에 타격을 받는 걸보니, 자기를 보여줄 부분이 줄어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나 싶었다.
하지만 큰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너랑 배세진 형이라 빠진 거야. 그 인원으로는 춤을 보여주기 어려울 테니까."
"…!"
"뻔하지. 널 중심으로 보컬 위주 퍼포먼스 곡을 짰을 거고… 난 댄스 브레이크 센터 정도 받고 끝이겠지. 그것마저 그 형에게 맞추어 줘야 하니까 난이도가 평이했을 것 같은데."
"…널 중심으로 댄스에 도전해봤을 수도 있지."
"하하. 아이고 문대야. 니가 팬들 돈 쓰는 콘서트 두고 퍽이나 그런 모험을 했겠다."
"…."
"그리고 혹시 나한테 맞춰서 댄 스위주로 구성했어도, 팬들 별로 안 좋아했을걸."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미치겠네."
큰세진은 한숨을 몇 번 쉬더니, 여러 번 주저하면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자신의 검색 방지용 이름으로 검색된… SNS 결과였다.
-까놓고 말해서 댄스라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 아혅이가 원탑이잖아 윾진이야 센터롤이고ㅋㅋㅋ 빅버드 빠들이 아득바득 댄스라인 미는 거 보면 역겨움
-아혅이 더듬는 거만 다 고치면 드디어 빅버드씨 소감 안 봐도 되는거지? 휴 다행
-솔직히 국데도 춤 잘 추잖아 댄스라인 의미 없죠 빅버드 양심 있으면 빠져 어딜 아혅이한테 비벼ㅋㅋ
-빅버드…. 대체 포지션이…? 인싸인 척 하는 게 포지션인가?ㅎㅎ
"…."
"원래 이렇게 검색하면 욕만 나온다고 하진 말자. 이렇게 일괄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정말 어느 정도는 팬들 여론이라는 뜻이니까."
큰세진은 침착했다.
나는 SNS를 밑으로 더 내려서, 전체적인 흐름을 다시 확인했다.
'…선아현이 너무 인상적이었군.'
백덤블링으로 사고를 수습하고, 말더듬까지 극복 중인 인상적인 모습때문에 선아현의 능력에 대한 위상이 확 치솟은 것이다.
그리고 같은 댄스 라인 중 차유진은 워낙 인기가 많고, 끼가 대단해서 센터 포지션이 확실했다.
그러다 보니 큰세진만 붕 떴다.
원래 큰세진을 시큰둥하게 보던 팬들은 그 지점을 대단히 크게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날 싫어하는 사람들 위주의 생각이겠지만… 어쨌든 내가 포지션 인상에서 밀리는 건 사실이야."
"…."
"아현이가 잘하는 거? 좋지. 그룹에도 잘된 일이야. 근데 내가 이 상태인 건 못 참겠거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차유진을?"
"그래."
큰세진이 스마트폰을 돌려받았다.
"이번에 유닛 무대에서 차유진보다 잘해야겠어."
"…."
"일대일 비교가 가능할 테니까. …그것밖에는 탈출로가 안 보이는데, 안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