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일단, 녹음본을 계속 들어봤다.

들을수록 MBS 방송국 외진 계단에서 최원길과 했던 대화가 확실했다.

'망할.'

[다들 원래 그렇게 살잖아요! 나만 그런 것처럼 막… 다들 파트 싸움하고, 욕하고 그랬으면서.]

최원길이 구구절절 다른 사람들을 거론하며 토로했던 자기변명들이 저음질로 줄줄 이어졌다.

사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욕할 놈은 넘칠 빌드업이었다. 다짜고짜 시비를 걸더니 남 탓하며 우는 소리만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이 뒤에 편집의 마술까지 부려놨다.

단어 하나를 새로 배치해 놨더라고.

[형은 뭐든 다 잘됐으니까요.]

[…아닌데. 너 나랑 바꾸라면 할거야?]

[…못 바꾸잖아요!]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다는 거네. 음…. 근데 솔직히, 가족을 바꾸고싶진 않을 거 아니야.]

[네.]

[….]

원래 이후 가족 안부 질문에 나왔을 최원길의 대답이, 다짜고짜 저 대화의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덕분에 뉘앙스가 훨씬 이상해졌다.

'최원길이 원래보다도 훨씬 싹수없게 나왔어.'

내가 가정사를 꺼내자마자 냉큼 '그래, 너 같이 고아로 사는 건 좀 그렇고 네 커리어만 부러운 거야'라고 대답한 꼴이 됐지 않은가.

당연하지만, 이후 최원길이 했던 사과는 흔적도 없었다. 지직거리는 소리만 몇 초 더 재생된 뒤에 영상은 끝났다.

마치 최원길의 즉답에 당황한 박문대가 말문이 막힌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공백이다.

이것도 의도적인 것 같군.

"…흠."

댓글을 다시 살펴봤다.

우선 최원길의 말을 본래보다 더 과격한 어투로 해석해 적어놓은 베스트 댓글이 하나.

아까 내가 읽었던 댓글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들은… 음, 정말 예상대로였다.

내 이야기가 절반이라는 뜻이다.

-와 시비 거는 거 미쳤나

-박문대 부모님 다 돌아가셨잖아 세상에 저 반응 무슨 일이야…

-ㅋㅋㅋ말투 봐 성격 대단한 듯

-최원길은 처음 얼굴 볼 때부터 쎄했음 욕심 덕지덕지 붙어서는 열폭에 돌아버렸네 인성 좋은 문대는 얼굴도 계속 리즈 갱신하는데ㅉㅉㅉ

-박문대 계속 잘 타일러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런 말이나 듣고…아… 마음 안 좋아…ㅠㅠ

- 부모님 돌아가신 애한테 인생 잘풀려서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실화냐고

-증거도 없는데 이걸 진짜 믿어요? 댓글 다 테스타 팬들인가…

└주작 냄새에도 달려드는 빠순이들ㅋ 이럴 시간에 효도나 해 라∼

└녹음본 1번도 있는데 거기 영상도 있어서 빼박임

└이런 일에 빠순이 같은소리 들먹이는 거 창피하지 않나요?

- 녹음 1번 있음 다들 듣고 오세요 (링크)

'…1 번.'

영상 제목에 '2'가 붙어 있더라니, 1번까지 있는 모양이다.

나는 댓글의 링크를 클릭했다.

방송국 외진 계단에 앉아서 혼자 중얼거리는 최원길을 흔들리는 저화질 카메라가 잡고 있었다.

'있는 대로 당겼군.'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며 확대한 것이 분명했다.

최원길은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서 자기가 입 밖으로 말하고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내용이 네티즌 저격이었다는 점이다.

[원래 댓글 쓰는 새끼들은 다 생각없이 쓰는 거야… 자기들이 뭘 쓴건지도 모르고, 금방 잊어버리고….]

사실 최원길 입장에서 못 할 말은아니었다.

인터넷에서 그렇게 조리돌림을 당했으니, 상담하거나 혼자 다짐할 때 저런 말을 할 수도 있지.

사실 동정심이 들 수도 있는 모습이다.

다만 아주사 때 최원길 욕했던 사람들이 보면 배알이 꼴리긴 딱 좋았다.

-ㅋㅋㅋㅋ정신승리 눈물겹다

-본인 인성이 터져서 욕먹었던 건데 남 탓하는 거 봐 어휴…

-응 그런 경우도 있긴 한데 넌 아니야

여기서도 댓글의 비난과 비꼼은 거침 없었다.

나랑 했던 대화를 잘 편집해 놓은 그 녹음본이 준 명분 덕일 것이다.

"…."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일단, 날 저격하려고 했던 건 아니라는 점은 알겠다.

'최원길을 잡으려는 거지.'

정성스럽게 녹음을 편집까지 해서 올린 걸 보면 확실했다.

아마 그때 방송국 계단 밑에서 본 놈이 이 새끼겠지.

그때 안 올리고 최원길 그룹 데뷔기사 뜰 때까지 존버한 걸 보면 작정한 놈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를 써먹었군.'

이 새끼가 판 키우려고 박문대를 땔감으로 삼은 점이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날 동정하고 옹호하는 댓글이 줄줄 이어지는 것을 보았는가?

여론이 호의적이니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절대 아니다.

겨우 백그라운드 서사 속으로 묻어둔 불행한 가정사 이미지가 또 대놓고 물 밖으로 떠올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장 SNS에 올라오는 글들이 이랬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학교 폭력으로 자퇴까지 했던 사람에게 '넌 계속 잘 돼서 좋겠다'는 워딩을 쓴다는 건 공감지능의 문제다.

-박문대 저 때 어땠을 지 생각하면 내가 눈물날 것 같아 최원길 진짜 제정신 아닌 듯

심지어 테스타 팬 계정도 아니었다.

'…이런 걸로 이득 볼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났는데.'

당장 한 표가 아쉬운 오디션 중이 아니라 그룹이 자리 잡는 데 성공한 지금, 이런 화제는 오히려 방해였다.

이미지가 변질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박문대를 보면 무대나 그룹 이미지보다 먼저 충격적으로 불행한 과거사부터 떠올린다고 생각해봐라.

그것도 테스타 새 앨범 활동기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고 재밌어야 할 컨텐츠들까지 피곤해지기 딱 좋았다.

'…차라리 울보는 웃기기라도 하지.'

한마디로, 지금 이건 나한테도 악재였다.

'첫 컴백 방송 날부터 이게 무슨일이냐…

벌써 피곤했다.

"…후 "

일단, 손 닿는 상황부터 컨트롤하자.

나는 당장 매니저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매니저가 스마트폰을 들고 뛰쳐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곧바로 연락처에서 골드 1을 찾았다.

내 행동을 확인한 류청우가 즉시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야."

"…위튜브 인기 동영상 5위… 아니, 3위 확인해 보세요."

벌써 실시간 랭킹이 쭉쭉 오른다.

환장하겠군.

이미 확인했는지, 큰세진이 달려왔다.

"이거 최원길 진짜야?"

"편집돼서 뉘앙스가 달라졌어. 잠깐."

골드 1이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형."

-문대야, 너 혹시 그거….

"봤어요."

-그래. 그럼 물어봐서 미안한데, 혹시 원길이가 한 말….

"편집된 겁니다. 그런 수준의 막말 아니었고, 뒤에 최원길이 사과도 했어요."

안도한 듯,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일단 진짜, 진짜 아니라니까 다행인데, 아… 미치겠다.

"거기 회사는 다 알아요?"

-어. 회의 벌써 들어갔지. 근데….

골드 1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지금 원길이가 상태가 좀, 많이 안 좋거든. 회사에서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잘 해결되면좋 겠지만….

"…."

-일단 나도 회사에 상황 다시 말해볼게. 너희 회사도 혹시 알아?

"예. 말해뒀어요."

아마 소속사끼리 벌써 컨택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수습은 될 것 같다. 근데, 후…. 원길이 어떡하냐.

골드 1은 나에게도 몇 가지 위로의 말을 한 뒤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최원길이… 이대로 데뷔조에서 잘릴 수도 있겠는데.'

저쪽 회사에서도 여론이 파멸적이니 슬슬 손절 각을 보는 모양이었다. 해명한 뒤에도 반응 안 좋으면 빼버릴 듯한 뉘앙스였다.

그리고 최원길 상태가 안 좋다고하는 걸 보니… 잠깐, 이거 느낌 안 좋은데.

이 새끼 혹시 이상한 생각 하는건 아니겠지.

"…."

식은땀이 났다.

이건… 수습 속도가 생명일 수도 있겠다.

'늦으면 반동이 어마어마해지는 거아니냐.'

이 논란이 계속 재생산되면서 X나 커지고, 소속사가 손절 각을 보며 상태 나쁜 최원길이 바닥까지 친 후에 해명이 됐다고 치자.

그때 상황이 수습되어 봤자 역풍은 나한테 쏟아진다.

왜냐고?

지금 나랑 최원길로 일대일 선악구도가 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자. 이 녹음본에서 내가 했던 말들이 대단히 선량한 발언도 아니다.

그냥 아이돌이 시비 앞에서 적당히 몸 사리며 할 법한 말이지.

그런데 지금 이걸 무슨 성인군자 발언처럼 사정없이 올려치고 있다.

날 불쌍하고 착한 피해자로 만들어야 최원길 욕할 때 각이 더 잘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원길이 얻어맞을 대로 얻어맞고 나중에서야 해명되어 동정여론이 부상하게 되면, 상황이 딱반대로 뒤집힐 것이다.

-솔직히 갑자기 가족 얘기로 끌어들인 건 박문대잖아 근데 팬이 많아서 피코 가능했던 듯

-최원길 무팬유죄에 걸린 거임ㅠ

아마 이런 식으로, 박문대의 팬들이 박문대를 피해자로 이미지 메이킹해서 여론몰이했다며 얻어맞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박문대의 과거논란도 줄줄 다시 올라오겠지.

그렇게 신나는 정의 구현을 한 판더 때리는 것이다.

'절대 안 되지.'

거기까지 전개되기 전에 해프닝 급에서 수습한다.

최원길도 이런 오해로 더 고생하기엔 어린놈이 쓴맛을 너무 많이 봤기도 했고.

'얼른 털어야겠는데.'

메인에 기사 뜨기 전에 매듭지어서 최원길이 X 되지 않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나는 매니저를 통해 빠르게 회사와 전화로 면담한 뒤, 바로 컨펌을 받았다.

"뭐 하게."

배세진이 슬그머니 와서 물었다.

분위기 보니 이미 멤버들한테 상황이 다 퍼진 모양이다.

"해명해 줘야죠."

"테스타 계정에?"

"아뇨."

배세진은 본인 입장문을 올렸을 때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다.

'내가 직접 올리면 화제성이 더 커진다.'

그럼 테스타 컴백이 받는 관심까지 논란이 처먹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공식입장만 뜨게 두면 '회사끼리 이미 다 입 맞춘거다, 박문대만 안됐다' 같은 소리가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럼 방법은 하나다.

제 3자를 이용한다.

나는 다시 골드 1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왜?

"형, 시간 되세요?"

-되는데, 혹시 급한 소식 생겼어?

"비슷해요. 메시지 기록 좀 만들어볼까 하는데요."

-…?

생방 무대까지 코앞이었다. 30분내로 증거물부터 만들자.

최원길은 신난 어그로들, 상황에 몰입한 대중들, 그리고 극대노한 박문대의 팬들에게 전방위로 두들겨맞기 시작했다.

각 잡고 옹호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녹음본 소식은 재해석없이 쭉쭉 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시적으로 박문대의 인성 주가는 최고조가 되었다.

[콘서트에서 팬들 떼창에 우는 박문대]

[박문대가 아주사 내내 다른 참가자 챙겨줬다는 증언 모음]

[자퇴 당시 박문대 사정.jpg]

최근부터 아주사 방영 초기까지 온갖 미담이 끄집어내어져 올라왔다.

다만 박문대의 팬들은 복잡미묘한심정이었다.

마냥 최원길에게 분노한 사람부터 후폭풍부터 걱정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여론이 소용돌이쳤지만,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우리 애 과거사가 무슨 공공재처럼 막 올라오는 게 기분 나쁘면 정상임?

-녹음 듣는데 너무 열 받아서 미칠 것 같다

-ㅊㅇㄱ진짜 개빡치네 당장 30분 뒤면 컴백 무대 해야 되는데 ㅅㅂ애들 그냥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겠어…ㅠㅠ

-그래도 문대가 착한 댕댕인 거 다들 알아주는 건 다행이다

골드 1의 SNS에 글이 올라온 것은바로 그 시점이었다.

(사진)

원길이 말 듣고 많이 고민하다가 직접 물어봤습니다. 정말 노력하는 친구니, 너무 밉지 않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원길이가 SNS 계정이 없어서 제계정으로 대신 올립니다.

사진으로 올라간 것은… 골드 1 자신의 톡방 캡처였다.

그리고 상단에 표기된 방 이름은 바로 '박문대 동생'이었다.

캡처 내용은 골드 1의 선톡으로시작했다.

[나 : 문대야 미안한데 이거 좀 봐줄 수 있을까? 혹시 진짜니? (동영상 링크)]

[박문대 동생 : ?]

[박문대 동생 : 잠시만요]

링크는 당연히 '최원길 녹음2'였다.

그리고 딱 동영상 재생 시간 만큼 시간이 지난 뒤, 답장이 왔다.

[박문대 동생 : 아니 이게 뭐야]

[박문대 동생 : 이런 느낌 아니었는데요…]

[나 :ㅠㅠㅠㅠㅠㅠ]

[나 : 그치 이거 아니지…?]

[박문대 동생 : ㅇㅇ 짜집기 같아요]

[박문대 동생 : 이때 원길이랑 덕담 주고받고 끝났던 것 같은데]

[박문대 동생 : 원길이한테 이거 올린 사람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고 전해주세요 자기 맘대로 말 순서 바꿔놨네요]

[나 : ㅋㅋㅋㅋㅠㅠ 알았어! 고맙다 (하트 쏘는 이모티콘)]

[박문대 동생 : 뭘요 (인사하는 노란 강아지 이모티콘)]

캡처는 14분쯤 뒤에 골드 1이 '이거 혹시 캡처해서 올려도 괜찮냐'고 물어본 후, 박문대의 흔쾌한 허락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헐…

-이런 것도 요새는 조작이구나

-이거 하일준 공계 맞죠?

-미친 개소름

그리고 어느 소속사와 달리 일 잘하는 골드 1위 소속사는, 여론이 요동치는 것에 맞춰서 기사를 뿌리고 위튜브 베스트 댓글을 장악했다.

-이거 주작이래요 (링크)

-박문대 증언 나옴 짜집기라고 최원길한테 고소하래ㅋㅋㅋㅋ

-기사 떴다 소속사에서 진짜 고소 들어간다고 함 미친놈ㅉㅉ

그렇게 최원길에 대한 비난은 수위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기전에, 포탈 메인에 걸리기 전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욕하던 사람들이 약간 민망해 하고 흥이 식는 수준에서, 비난의 화살이 녹음을 조작한 당사자에게 돌아갈수 있던 것이다.

음악방송이 끝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잡은 박문대도 순식간에 그 상황을 확인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지금 이 대처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이다.

일단 이 녹음 올린 새끼가 다른걸 쥐고 있으면, 최원길은 또 롤러코스터급 직강을 처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한번 튀어나온 가정사 이야기는 아직 봉합이 안 됐다.

게다가 방금 본 해명 기사 댓글 반응도 찝찝했고.

-분명 자라면서 이런 일로 상처받을 일이 많았을 텐데, 너무 고운 마음씨를 가진 청년이네요. 최원길군도 큰 경험을 했다 생각하고 수양의 계기로 삼길∼

-박문대처럼 좋은 사람이 잘 되야하는데ㅠㅠ 앞으로 더 잘 되길!

-와 최원길이 문대 덕에 살았네…

요약하자면, '착한 문대가 좋게 좋게 넘어가 주는구나'다.

아무리 짜집기라도 해도 앞에서 최원길이 건 시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니, 골드 1에게 보낸 내 정정 메시지가 배려심 넘치는 착한 마음씨로 와전되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흐지부지됐을 텐데, 문제는 작업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최원길 소속사는 혹시 해명 기사자체가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걱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예 화제를 틀어버리고 싶었는지, 최원길보다 박문대의 '착한대처'에 집중해서 기사를 풀고 여론을 밀었다.

결과는 아까 본 댓글이고.

'이거 싸한데.'

느낌이 안 좋다.

갓성, 천사표. 이런 수식어는 급하게 붙일수록 순식간에 뗄 수도 있다.

꼬투리 하나에도 박살 나서 이미지 말아먹을지 모르는데, 문제는 그 꼬투리 잡으려고 대기 중인 놈이 한둘이 아닐 것이란 점이다.

'신인상 못 받게 만들려고 카드뉴스까지 만든 놈들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았겠지.'

이런 상황이니, 부각되지 않고 그냥 은은하게 착한 놈으로 보이는 정도면 충분했다. 저렇게 대놓고 착한 이미지는 부담이었다.

'괜히 인성 영업 피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종합적으로, 결론이 나왔다.

'이미지를 틀어야 해.'

이 난리를 이번 활동 초기에 바로 덮을 만큼 강한, 강한 임펙트가 필요했다.

'답은… 예능뿐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36화]

예능.

어느 정도 활동이 궤도에 오르고 성적이 나오는 아이돌이라면 잡기 마련인 스케줄이다.

근래 아이돌 자체의 대중성이 많이 줄어서 웬만큼 성적이 나와도 예능잡기 까다롭다는 말도 있지만, 일단 테스타는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작년 예능 버즈량 1위 아주사 출신이니까.

대충 연예계 관심 좀 있는 사람이다 싶으면, 차라리 테스타를 몰라도 아주사 최상위권 참가자인 멤버들 얼굴이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작년 활동으로 성적도 확실히 증명했겠다, 이번 컴백에도 예능 오퍼가 꽤 많이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덕분에 내가 원하던 적당한 예능 스케줄을 잘 잡았다.

"긴장되나∼?"

"어느 정도는."

큰세진이 씩 웃었다.

"야, 나도 그래!"

자기도 긴장된다고 하는 것치고는 눈이 아주 야망에 타오르는데.

'그럴 만도 하지.'

지금 촬영장으로 향하는 테스타 멤비는 나랑 큰세진, 둘뿐이다.

이 예능이 그룹 전체가 참가할 만한 포맷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상의를 거쳐서 오퍼가 내려왔고 이둘이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멤버 개인으로 예능을 잡는 경우는 거의 처음이었다. 그리고 큰세진 저놈은 절대 개인을 어필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유닛 무대가 성공해서 오히려 더불이 붙었나.'

뭐,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말 안 해도 알지? 도착하면 인사잘하고∼"

"넵!"

"예."

매니저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대로,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일단 출연진에게 인사부터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겨우 2년 차니 예상 가능한 일이겠지만, 우리보다 후배는 없었다.

하지만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 테스타!"

인지도와 성적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역시 뜨는 게 답이군.'

그래도 큰세진이 순식간에 배우 셋과 번호를 교환한 건 그야말로 진기명기 였다.

그리고, 한 대기실에서 제법 반가운 얼굴도 발견했다.

"헉! 선배님∼"

"아, 반갑네요. 두 사람."

아주사 에서 대표를 맡았던 여자아이돌, 영린이었다.

"소식 잘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니 좋네요. 다른 분들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영린은 몇 가지 덕담을 하고는 농담처럼 덧붙였다.

"올해 솔로 앨범 낼 건데, 활동은 겹치지 말죠."

…갑자기 데뷔 초 VTIC과 동발한 악몽이 떠오르는군.

"하하! 에이, 저희가 무서워서 미뤄야죠, 선배님∼"

"앨범이 많이 기대됩니다."

"고마워요."

영린은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에 음… 예상 못한 사람이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인사를 마치자마자 나를 보며 반색했다.

"문대 씨 맞죠? 와, 이렇게 보네! 오늘 촬영 잘해봐요∼"

바로… 말랑달콤 멤버였다.

내가 첫 등수 평가에서 춘 POP CON, 그리고 첫 팀전에 할로윈 컨셉으로 바꿨던 새로운 세상으로 의 원곡자인, 여자 아이돌 말랑달콤 말이다.

그리고 지금 만난 건… 흠, 말랑달콤 중에서 유일하게 잘나가는 배우로 활동 중인 그 멤버다.

어쨌든 연차로 따지면 대선배라는 뜻이니, 나는 고개를 꾸벅거렸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다들 내가 말랑달콤 팬이라고 알고 있지 않나.

'설마 이 사람도 내가 본인 팬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나 다를까, 말랑달콤 멤버는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저기, 혹시 저희 멤버들 중에 누구 팬이었어요? 저희끼리 살짝 내기를 해가지고."

이건 정답이 하나뿐이다.

"…당연히, 올팬이었죠."

"에이, 내 팬은 아니었구나? 잘 빠져나가네, 문대 씨!"

말랑달콤 멤버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기 허벅지를 쳤다.

'무슨 사촌 동생 대하듯 하는군.'

아무래도 내가… 하도 팝콘을 춰댄 탓에 일방적인 친분이 생겨 버린 모양이다.

"물론 농담이고요! 문대 씨 덕분에 우리끼리 오랜만에 진짜 재밌었어요∼ 고마워요. 오늘 촬영 때 잘해봐요!"

"…감사합니다."

이러다 말랑달콤 사인 CD도 하나 받아 갈 것 같다.

아무튼, 출연진 중에 인연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건 호재긴 했다.

'이리저리 편집 스토리 빼기 좋지.'

아예 서로 모르는 출연진보다는 묶어서 설명할 부분이 있는 점이 분량받기도 좋지 않나.

저 둘과는 워낙 연차가 많이 차이나서 쓸데없이 올드한 공중파식 사랑의 작대기 편집이 들어갈 확률도 낮았다.

'그래도 같은 성별인 편이 편하긴한데.'

아쉽지만 나머지 줄연진 중에서 특별히 활동이 겹치거나 아는 인선이보이진 않았다.

…라고 이때까진 생각했지.

그러나 어지간히 스케줄이 바쁜지, 촬영 직전에야 간신히 도착한 놈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VTIC 멤버 둘이다.

'X발.'

저 새끼들이 여기서 왜 나오냐.

단체 출연하면 이 예능이 포맷을 바꿔서라도 단독 특집을 편성할 급의 놈들이, 활동기도 아닌데 왜 튀어나왔냔 말이다.

그 순간, 마이크를 다 착용하고 온 큰세진이 내 등을 찌르면서 숙덕거렸다.

"이야, 레티 일 잘하네."

"레티?"

LeTi 엔터테인먼트. VTIC과 말랑달콤의 소속사였다.

큰세진이 힐끗 눈짓했다. 본인이 번호를 땄던 배우들 쪽이었다.

"저기 배우 그룹, 말랑달콤… 수현 선배님 첫 주연 영화 팀이었어."

"…!"

"같은 소속사잖아. VTIC 끼워주는 걸로 단체 출연 합의 봤겠지."

…영화 홍보 차 출연진이 단체로나왔던 거였나.

덕분에 휴식기인 VTIC 둘이 친히 나와준 모양이다.

보유한 회사 주식도 있으니 같은 회사 소속 연예인 홍보에도 마음이 너그러워질 만도 했고.

큰세진이 슬쩍 웃었다.

"그래도 문대는 좋지?"

"뭐가."

"문대의 사회생활을 담당하는 선배님은 안 보이네∼"

"…."

아무래도 내가 청려를 불편해 한다는 건 애 진작에 눈치챈 모양이다.

뭐, 그냥 '생각보다 꼰대 새끼였나보다' 정도로 추측하는 것 같긴 했다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별로 안 중요하고."

"오, 그래?"

그렇다.

청려가 당장 이 사람 많은 촬영장에서 다짜고짜 내 머리통에 오함마를 후려갈기진 않을 것 아닌가.

그냥… 미친놈 만나서 좀 짜증 나고 피곤한 정도일 것이다.

'그놈이 있든 없든 상관없지.'

문제는… VTIC이 나왔다는 것 자체다. 같은 남자 아이돌 포지션인데 급 차이가 나니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분량이 걱정돼서."

"어?"

큰세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문대가 예능 분량도 다 걱정하네! 근데 너무 걱정 마∼"

"…?"

큰세진이 더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저 두 선배님, 예능에서 말을 잘 안 해."

"…!"

"아마 된다는 사람 급하게 보내줬나 봐. 음, 적당히 때우고 가시지 않을까?"

예능에 별 뜻 없는 멤버라 큰 의욕이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

솔직히, 약간 감탄했다.

'이 새끼 머리 진짜 잘 돌아가네.'

정보 모아놓고 생각하는 게 난 놈은 진짜 난놈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봐야겠네."

"열심히 해봐야지."

우리는 드물게 쓸데없는 주먹인사를 했다.

마이크가 켜지고, 촬영은 곧 시작되었다.

"감각적인 토요일! 주말 밤의 즐거움, 토요 파티 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와아아아!"

토요 파티, 국민 MC가 진행하는 본격 버라이어티 예능이었다.

이름에서 짐작 가능한 대로 연차가 아주 지긋하신 프로그램이었는데, 2000년대 후반에 종영했다가 복고열풍으로 몇 년 전 부활했다.

공중파에서 토요일 오후 8시 50분에 시작하는, 시청률 잘 나오는 프로그램.

한마디로 극한의 대중성을 갖춘 예능이다.

쓸데없이 게스트 가정사가 튀어나올 일이 없고, 딱 몇 장면 캐릭터 재밌고 임팩트 있게 보여줄 수 있는.

내가 찾던 요소는 다 갖췄다.

다만… 나 자신을 놓는 과정은 필요했다.

컨셉이 항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둠칫 두두둠칫!

당장 지금 MC가 80년대 스타일 DJ 부스에서 단발머리를 흔들면서 디제잉 중이다.

굉장히 심취한 것 같다. 프로의식이 대단했다.

"오늘의 파티 컨셉?이심 동체!"

사전에 공지 받은 말이 나왔다.

"오로지∼ 한 쌍의 똑같은 파뤼피플, 완전 붕어빵만 입장 가능한 오늘의 스테이지! 우리 파뤼피플들 지금∼ 등장해 주세요!"

덕분에 큰세진과 옷이랑 머리 모양을 맞췄다.

…참고로 이 컨셉을 의식했는지, 회사에서 생각한 이 예능 출연 멤버 조합 중 하나가 '큰세진-배세진' 페어였다.

물론 배세진의 적극적인 기겁 덕에 논의하기도 전에 무산되었지만.

"우리 차례."

"어."

슬슬 나와 큰세진이 세트장에 등장할 차례였다.

[이번에 입장할 파뤼피플은∼ 오우∼ 어리다! 잘생겼다!]

우리는 그대로 스테이지에 올라가서, MC의 어마어마한 소개 멘트와 함께 준비한 춤을 출 예정이었다.

MC가… 출연자가 춤을 추는 내내 옛날에 밈으로 유행했던 오글거리는 예능 자막을 입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춤추는 마법! 솟구치는 주식! 테스타의 빛나는 두 별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이크를 통해 회장에 울리는 저소리를 참지 못한 출연진이 무너지는 게 웃긴 포인트인 것 같다.

근데 큰세진이나 나나 썩 재밌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류청우, 선아현 둘이 나왔으면 모를까.

그래서 역으로 해주기로 했다.

나와 큰세진은 춤을 추면서 슬금슬금 DJ 부스를 둘러쌌다.

"…?!"

MC가 약간 당황했다.

"와, 최고의 국민 MC!"

"진행이 뭔지 보여주겠다! 내가 바로 진행이다!"

"부스도 가둘 수 없는 존재감! 전국을 울리는 빛!"

"토요일 저녁을 쥐고 흔든다. 이것이 거인의 멘트!"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잡는 건 오로지 DJ석의 그분뿐!"

[아니…!]

MC가 대신 무너졌다.

처음에는 정말 당황한 것 같은데, 이건 좀 장단 맞춰준 것 같았다.

'다행이다.'

더 심한 멘트를 입으로 내지 않아도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큰세진이 실실 웃으며 남은 멘트를 모조리 털어냈다.

"대한민국의 예능사는 최호수 전과 후로 나뉜다. 그가 바로 예능의 기준!"

"…."

댄스 스테이지는 그렇게 끝났다.

정신 차린 MC는 몇 번 웃음을 참고서, 주옥같은 엔딩 멘트를 남겼다.

"등장하자마자 스테이지를 접수! 이것이 바로 예능이다! 열정, 패기, 러브 앤 피스!"

"감사합니다!"

나와 큰세진은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후'

일단… 이 파트에서 내가 노렸던건 다 했다. 제작진까지 웃고 있는 걸 보니 임팩트도 괜찮았고.

그러나 출연진용 의자에 앉자마자 번뇌가 몰려왔다.

출연 전 방송 예습할 때도 각오는 했다만, 어떻게 예능이 이렇게까지 사람의 항마력을 시험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이런 포맷을 그리워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청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리액션이나 하자.'

나는 마지막으로 스테이지에 올라간 VTIC 놈들에게 열심히 박수를 보냈다.

큰세진 말대로 예능에 별 뜻은 없는지, 크게 준비해 온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이 내린 잘생김!"

그렇게 출연진 12명이 다 등장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이 파티를 연 것은…가짜를 찾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니 너무 붕어빵이라 이상하지않았어요? 한 명은 도플갱어야! 가짜라고!"

…이런 컨셉으로, 함께 출연한 사람이 갈라져서 6:6 팀전을 하는 것까지가 들은 내용이었다.

"팀을 패배하게 만든 결정적인 인물! 그 사람은… 벌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첫 게임에서 벌칙자가 선정되는 순간, 진짜 속셈이 드러났다.

"어? 같이 입장하신 우리 주호 씨는 왜 안 나오세요?"

"네, 네?!"

"같은 몸이니 벌칙도 같이 받아야죠∼ 도플갱어잖아요! 그래서, 이심동체!"

"…!"

그렇다.

벌칙자가 나오면, 상대팀에 있는 그 사람의 도플갱어도 함께 벌칙을 받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그럼 저쪽에 나는 노리면 안 되겠네?"

"아니, 팀 승리가 중요하죠! 벌칙 까짓거 그냥 받읍시다∼"

놀랍게도 아무한테도 고지해 주지않았기 때문에, 출연진들은 진짜 놀랐다.

수군거리는 그 틈에서, 나는 큰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벌칙 한번 받자.'

'오케이.'

벌칙 같은 위기 상황에서의 리액션이 캐릭터 뽑기 좋았다. 이건 무조건 챙겨 먹어야 했다.

"이번 팀전의 벌칙은… 물풍선 폭탄입니다!"

"허억!"

흠, 저 정도면 수위도 괜찮을 것같고.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 방해가 들어왔다.

이번 팀전인 미러볼 피구전에서 일대일로 남은 상황이었다.

라인업은 나와 VTIC 멤버였다.

그리고 마침 상대편의 혼자 남은 VTIC 멤버가 공을 잡았다.

'이런 건 맨 마지막에 탈락하는 사람이 벌칙이다.'

이 프로그램 특성상 억울해하는 모습을 웃기게 뽑으려고 백프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 마지막까지 남았으면서 못 이겼으니까 패배의 원인 맞잖아요∼'

같은 소리 하겠지. 전적도 많았고.

'여기서 맞으면 되겠군.'

나는 공을 맞을 준비를 했다.

"됐다!"

"저기 때려요!"

그런데 상대편의 VTIC 멤버가 미친 짓을 시작했다.

애매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공을 던지는 척하다가 금을 밟아 탈락해버린 것이다.

"…?"

"아차차! 실수를 해버렸네!"

'뭐야.'

저 새끼 뭐 하는 짓이냐.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찡긋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무슨 발표에서 신입생을 커버쳐 준 고학번 선배 같은 면상이다.

'대체 뭐냐고.'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37화]

VTIC에게 벌칙 분량을 도난당했다.

"자∼ 두 분, 스테이지 위로 올라와주시면 됩니다!"

"어우, 아깝네요!"

"좀 억울합니다∼"

날 아웃시키는 대신 자진해서 금밟고 벌칙에 들어간 VTIC 한 놈과 다른 놈은 별 특출날 것 없는 리액션과 함께 물풍선을 맞았다.

앨범 초동 180만 장 파는 놈들 아니었으면 3초 컷으로 지나갔을 만한 특색 없는 꼴을 보니, 큰세진 말대로 예능에 별 열정은 없어 보인다.

'…분량 따려고 일부러 탈락한 건 아니라는 뜻인데.'

그럼 아까 그 뿌듯한 얼굴이 진심으로 '신인 아이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진짜 실수였는데 민망해서 그랬다는 쪽이 설득력이 있지 않나.'

큰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림 같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슬쩍 가리켰다.

빡치지만 별수 없고 다음에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벌칙 받기를 시도해보겠다는 뜻인 것 같다.

"자 이번 팀전은∼ 쌍화차 찾기!"

하지만 다음 팀전에서도 이 기묘하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달걀 노른자가 없는! 쌍화차를 제일 처음 고르는 분의 팀이 패배합니다∼ 자, 음악에 맞춰서 댄스와 함께 골라봅시다!"

한마디로 의자 뺏기와 복불복을 합친 애매한 90년대 바이브 게임이었다.

'이건 완전 운인데.'

이번 건 패스하기로 생각하고 차라리 고민도 하지 않고 골랐다. 이러다 걸리면 더 웃길 테니까.

물론 확률상 그놈의 노른자는 들어있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아, 문대 씨∼ 통과!"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내가 고른 쌍화차에는 노른자가 들어 있었다.

그러자 VTIC 놈들이 박수를 치며 선동을 시작했다.

"오오∼ 대단해!"

"와, 이걸 어떻게 이렇게 바로 맞히지?"

"…."

왜 이러냐고 새끼들아.

대충 대답해서 넘기긴 했는데, 이건 대놓고 웃긴 것도 아니고 순 애매하고 부자연스러운 훈훈함일 게 뻔했다.

결국 보다 못한 MC가 이걸 꼬집어서 웃기려는 중이다.

"아니, 두 분 아까부터 문대 씨한테만 너무 리액션이 좋은데요?"

"아 형님 뭘 모르시네∼ 잘나가는 사람들끼리 친한 거잖아요∼!"

"그런 거야∼?"

VTIC 놈들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아니 그냥, 잘하는 친구잖아요!"

"고민도 안 하고 맞히는 게 신기해서 그랬죠."

차라리 살리지 그냥저냥 부정해버리니 또 그림이 애매했다. 예능 못하는 놈들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걸로 왜 나한테 트롤짓을 한단 말이냐.

'엿 먹이는 건가?'

혹시 몰라 살펴봤지만, 딱히 도발하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치겠네.'

그리고 이번 벌칙은 말랑달콤 멤버가 가져갔다.

"잘 보세요! …노른자 아니죠? 통조림 황도죠?!"

"으아악!"

벌칙은 고삼차였다. 도플갱어로 벌칙을 함께 수행한 영린은 표정도 안 변하고 원샷해 스탭들의 반응까지 이끌어냈다.

'부러운데.'

나도 차라리 고삼차 마시고 뿜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이러다 계속 벌칙 한번 못 받고 리액션 병풍 겸 VTIC 분량 곁다리로 끝나겠다.

'차라리 활약을 해야 하나.'

노선을 돌릴까 고민하던 찰나에, 잠시 촬영이 멈췄다.

"컷! 갈고 가겠습니다∼"

"저희 마이크 잠시 체크할게요."

"넵!"

짧은 정비 겸 휴식 시간이었다.

"나 화장실."

"어."

큰세진이 MC를 따라 슬쩍 자리를 떴고, 나는 일부러 음료를 마시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러자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후배님∼"

"아까 우리 너무 급하게 와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죠?"

VTIC 놈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통성명도 해본 적 없는 놈들이지만 정색할 수는 없는 게 또 사회생활이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아∼ 선배님 어색하네요. 그냥 형으로 해요, 형으로!"

"맞아. 우리 너무 늙은 것처럼 부르지 마요."

8년 차가 양심 없는 소리를 한다는 감상보다도 먼저 든 느낌이 있었다.

'음?'

이놈들… 왜 이렇게 어색하지.

'등에서 식은땀 흘리고 있을 것 같은데.'

나름대로 호탕하고 살갑게 말을 걸려 한 것 같지만 한계가 보인다.

원래 이런 걸 해오던 놈들… 그러니까 큰세진이나 류청우 같은, 사람 휘어잡는 게 익숙한 부류의 느낌이아니었다.

사교적인 연장자 역할이 안 익숙한것 같은데.

'뭐지.'

일단 대답은 제대로 해줘 보자.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대선배님이신데 제가 함부로 부르긴…."

"무슨 대선배에요∼ 으악!"

"그냥 편하게 하라니까요!"

"…."

와 이놈들 애쓰네.

아까 벌칙 막타 도난당했을 때보다도 당혹스럽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그걸 대충 암묵적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두 놈이 시시덕거리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 예능 많이 어렵죠?"

"예? 예…."

너희만 없으면 난이도가 두 단계는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뿌듯한 얼굴이었다.

"어, 촬영하면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SOS 보내요. 도와줄게."

"…?"

"아 부담은 가지지 말고! 나중에 후배 생기면 또 잘해줘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요."

그리고 이 두 놈은 서로 '오∼ 말좀 하는데?' 하는 표정을 주고받고있다.

기가 막히는군.

"…."

나는 두통을 참으며 대놓고 물어봤다.

"…그럼 아까, 금 밟으신 건."

"아하하! 아니∼ 그렇게 티가 났나?"

"아냐, 이 후배님이 감이 좋은 것같아."

"그렇지? 아무튼 막… 너무 신경쓰지 마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놈들, 완전히 호의로 한 짓이야.'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게다가 도와주겠답시고 떠올린 발상이 1차원적이다.

예능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걸 감안해도 썩 머리 굴릴 줄 아는 부류는 아닌 것 같았다.

'한 5년 안에 보증이나 사업 사기로 한탕 털릴 것 같은데.'

아무리 VTIC이 순조롭게 큰 놈들이라지만, 이 불지옥 K팝 사회에서 8년 버틴 것 치고는 영 맹탕이었다.

'…설마 청려가 갈아 끼운 놈들인가.'

사고 안 칠 놈들, 다루기 쉬운 놈들 찾다 보면 저 꼴 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어쨌든 별다른 복잡한 생각은 없어보이는 놈들이니 적당히 쳐내면 되겠군.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도 제가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려고요. 아까처럼 배려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어?"

약간 당황한 놈들이 잠시 고민하다가 머쓱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사실 거, 청려 형한테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

"…?"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정수리가 서늘해지려던 찰나에, 앞의 놈이 빙긋 웃었다.

"아니, 문대 씨 진짜 열심히 하고 좋은 후배니까 잘해줘라, 뭐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

"맞아! 그런데 그 형이 진짜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어. 친한 사람도 진짜 거의 없고… 후배님이랑 친해져서 신기했지."

안 친하다.

"좀 사람이 삭막해 보일 순 있긴 한데… 그래도 재현, 아니, 청려 형이 생각보다 되게 사람 괜찮잖아요."

"맞아. 그 형 막 유기견 센터에 자기 정산받은 거 절반씩 기부하고 그런다?"

"헐, 절반이나 했어?"

"어 나 그 형 은행 어플 쓰는 거보다 기겁했잖아."

"무슨 산신령처럼 살더니 진짜 동물은 좋아하네."

둘은 말하다가 자기들끼리 대화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머쓱하게 다시 빠져나왔다.

"아니, 왜 이야기가 이리로 갔냐? 아무튼, 이것도 인연인데 오늘 촬영때 힘든 일 있으면 말해라∼ 뭐 그런 거죠."

"혹시 지금 힘든 건 없고?"

"…."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정신이 혼미했다.

나는 내 내면에 주먹을 갈겼다.

'알 게 뭐야 X발. 정신이나 차리자.'

청려가 뭐 유기견들의 수호자든 말든 자기 알아서 할 일이고.

중요한 건 지금 내 목표. 현재 촬영이다.

나는 어휘를 골라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적당히 처한 상황을 설명한뒤, 사실 벌칙을 노렸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려주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그랬어요?"

"야 미안하다!"

"이제 벌칙 막 몰아볼까?"

"올 벌칙으로 해줘?"

"…괜찮습니다."

나는 대신 가벼운 부탁을 했고, VTIC 멤버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헤이 문대∼"

그 직후, 화장실에 갔던 큰세진이 돌아왔다.

"뭐 좋은 얘기 했어?"

"그럭저럭. 넌?"

"야, 화장실 갔다 왔는데 무슨 좋은 이야기까지야 있겠어∼?"

대답하면서 실실 웃는 걸 보니 뭘 한 건 올린 모양인데 입은 일단 딴소리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곧 전리품이 튀어나왔다.

"그냥… 어쩌다 보니 동선이 겹쳐가지고, 최호수 MC님이랑 대화 좀 했지. 번호도 교환하고."

역시.

"대화가 알찼나 보네."

"뭐, 우리의 예능 방향성 이야기를 좀 했달까?"

큰세진이 씩 웃었다.

"우리 둘은 절대 벌칙 안 받을 거라고 말했거든."

"…!"

"그러니까 어떻게든 벌칙 줘서 리액션 뽑으려고 할걸."

훌륭했다.

후반부 촬영은 몇몇 출연진들의 협조 하에 잘 끝났다.

'계획 이상으로 잘 나온 것 같군.'

이제 편집의 문제인데, 솔직히 큰걱정은 안 든다.

내가 PD라도 이건 안 자를 것 같아서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오늘 굉장히 좋았어요!"

어쨌든, 도착했을 때처럼 꾸벅꾸벅 인사를 박은 뒤에야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음 스케줄로 가는 차 안.

촬영이 잘 끝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반갑지 않은 연락이 불쑥찾아왔다.

[VTIC 청려 선배님 : 오늘 촬영에서 애들 만났다면서요.]

[VTIC 청려 선배님 : 어때요.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후 "

VTIC 놈들 만났을 때 왠지 이럴 것 같긴 했다.

어처구니없지만, 또 이렇게 보면 문자 내용 자체는 그럭저럭 정상이었다.

'만나면 미친놈이라 문제지.'

나는 눈두덩이를 몇 번 누른 후에, 답장을 보냈다.

[예. 선배님들께서 도움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답장이 왔다.

[VTIC 청려 선배님 :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후배님도 더 좋은 팀원들과 다시 활동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X발.'

뭐만 하면 무조건 뒈지고 다시 시작하라는 쪽으로 가냐고.

VTIC 놈들의 헛소리가 뇌리에서 울렸다.

-재현, 아니, 청려 형 생각보다 되게 사람 괜찮잖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냐.

괜찮은 사람 다 얼어죽는 소리하고있다.

하지만 VTIC 놈들이 거짓말을 한것 같지도 않았다. 즉, 예시로 든 사례 자체는… 진실 같단 거지.

'…딱 한 번만 해본다.'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한번 상대가 정상이라고 가정한 뒤 답장을 시도했다.

[안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계속 듣는 것 자체가 굉장히 스트레스입니다. 전 미션 생각만으로도 거의 한계입니다.]

[굉장히 힘드니 하지 말아주셨으면합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뢰 밟았나.'

하지만 혹시 야산 생매장이 초읽기 상태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절대 나혼자는 안 죽는다.

'이 새끼도 사회적 사망 상태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나는 목 베개에 기댄 채로, 예전에 떠올렸던 안을 다듬기 시작했다.

약간… 마음을 안정시키는 반복 노동같은 짓이다.

"흠."

그러다 또 불쑥, 답장이 돌아왔다.

[VTIC 청려 선배님 : 알았어요.]

"…!"

몇십 초가 흘렀다.

그 후에야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VTIC 청려 선배님 : 미안해요.]

"…."

문자는 그걸로 끝났다.

"…후. "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도로 눈을 감았다.

사람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는 놈들이었다.

박문대가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을때, 인터넷에서는 슬슬 기사가 뜨고 있었다.

[최호수의 토요 파티, 특급 라인업이 온다… VTIC부터 테스타까지]

[테스타의 예능 나들이? 토요 파티 촬영, "많이 기대해 주세요!"]

-헐 브이틱 테스타

-이번엔 동발 아니고 예능 출연이라 너무 다행

└ㅋㅋㅋㅋ그러게

-청려랑 박문대 일친에서 진짜 웃겼는데… 또 보고 싶다 그 둘 나왔으려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스타 중 누가 출연하는 것인지도 공개 되었다.

-문대랑 큰세넹

-아 문대다 개조아ㅠㅠ

-토요 파티라니 드디어 엄마한테 테스타 영업할 날이 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축하해

-왠 이세진; 차유진이 나와야 맞는 거 아닌가

└예능 멤이라 그런 듯?

└예능 멤 같은 소리하네 그건 본인이 알아서 뚫어야지 6위가 예능먼저 나오는 거 웃긴 일 맞잖아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건데 인지도나 화제성 생각하면 당연히 1, 2위부터 나와야하는 거 아니야?

└예능 하나에 목숨 걸 기세

└누가 보면 우리가 꽂은 줄 알겠음

-문대 화이팅! ㅎㅎㅎ

그리고 이 반응을 다 살펴본 뒤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도 있었다.

'문대한테는 거의 욕이 없네!'

대학원생은 안도하며 보던 페이지를 빠져나갔다. 위튜브 영어 댓글의 파도에 침몰당한 뒤, 인터넷을 찾아보게 된 박문대의 팬이었다.

최근 문대를 좋게 봐주는 분위기가 확실해서 마음이 들떴다.

홈마인 친구는 영 불안해하는 눈치였으나, 그녀로서는 썩 이해가 되진 않았다.

'다들 문대 착하고 귀여운 거 알아주면 좋지 않나?'

문대가 악플을 볼까 봐 걱정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선녀나 다름없었다.

'예능 기대된다!'

대학원생은 웃으며 침대에서 발을 구르다가, 치밀어오르는 덕심을 참지 못하고 위튜브에 접속했다.

그리고 아직도 인기 동영상 순위에떠 있는 한 썸네일을 클릭했다.

'한 번만 더 보고 자야지.'

바로 테스타의 이번 신곡 뮤직비디오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38화]

뮤직비디오를 클릭하자, 5초짜리 광고보다 먼저 동영상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테스타 (TeSTAR) '자정, 그리고 다음 (00 :01)' Official MV]

[조회수 22,147,586회]

'헉, 이천이백만 됐네.'

얼마 전에 봤을 때는 이천만이었는데, 발매 일주일이 지난 참인데도 조회수 붙는 속도가 꽤 빨랐다.

1,000만까지 걸린 시간도 그룹 자체 신기록이었다.

'나도 또 보고 있는데 뭐.'

그럴 만도 하다며, 대학원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테스타의 이번 뮤직비디오는 기존의 것들과는 좀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 시작한다."

그 순간, 광고가 끝나고 뮤직비디오가 시작되었다.

[…]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 쳐진 고풍스러운 축음기가 화면에 잡혔다.

흰 손이 불쑥 구석에서 나와, 축음기의 바늘을 눌렀다.

투두둑.

거미줄이 끊기며, 느리고 지직거리는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음질을 낮춘 것 같은 로파이(Lo-fi) 재즈였다.

로맨틱하고 서글픈 피아노가 울렸다.

어느새 화면은 대저택의 현관으로 컷이 바뀌었다.

오래됐지만, 사치스러운 흔적이 여전한 그 구조물은 잡히는 프레임에서 엄청난 영상미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먼지가 쌓인 채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 대형을 갖추어 앉은 일곱 명의 모습에 초점이 잡혔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서서히 잠기는

시간을 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고요해 이제는

노래도 꿈도

다 잊어버려 여긴 자정,

너의 Midnight

안무가 펼쳐졌다.

현대 무용과 왈츠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온몸을 쓰며 서로를 지탱하는 동작이 많은, 우아하고 복잡한 안무였다.

긴 소맷단이 흔들렸다.

따라 추기 쉬운, 외우기 쉬운 반복적 동작은 없었다. 오로지 입을 벌린 채 보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움직임이었다.

그 구조적인 선들이 샹들리에 불빛아래 길게 잡혔다.

-시계 초침이 달려 날 불러도

끌어올릴 수는 없어 오늘도

나는 여기, 너의 자정

너의 Midnight

영상은 낡고 사치스러운 현관에서 비가 내리는 고상한 서재로, 녹슨 새장들만 즐비한 거대한 식탁으로, 붉은 향초로 가득한 욕실로 배경을 바꾸었다.

그때마다 머리와 의상도 그 형태와 색을 바꾸며 순식간에 배경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미친 것 같은 영상미였다.

그리고 배경은 어느새 황금빛 푸른나비가 날아다니는 침실까지 왔다.

화려한 정장을 기초로 구성된, 끝이 없을 것 같던 의상의 변천사도 마지막까지 왔다.

고전적 형태의 가벼운 셔츠였다.

그 어깨 사이 등골에서, 돌아가는 고동빛 태엽이 보였다.

-번지는 Midnight

일그러진 초점이

흔들려 시간을 애태워

마지막 후렴의 만개하는 안무.

나비들은 대형이 바뀔 때마다 모여들어, 횟대에 앉는 새처럼 태엽에 앉았다.

바닥의 그림자가 늘어지며 나비 날개를 길게 드리웠다.

-넘치는 Midnight

허물어진 Shape

찢어져 새로운 날이 와

의미심장한 컷신, 연기, 돌출된 서사는 없었다.

오로지 안무, 그리고 적절한 클로즈업 샷으로만 이루어진 영상은 순식간에 시간을 삼키고 지나갔다.

아름답고 황홀한 영상미와 달라붙 벌는 듯이 어울리는 곡이 흐르는 뮤직비디오였다.

-널 만났던

자정

그리고 다음

노랫말은 그렇게 끝났다. 모든 소리가 잠시 멈췄다.

마지막 반주는 가냘프게 다시 시작되었다.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가 툭툭 흐르는 가운데, 첫 장면처럼 흰 손이 등장했다. 다만 이번에는 팔을 타고 카메라가 올라갔다.

흰 손의 주인은 선아현이었다.

안무 대형에서 벗어난 선아현은 침실 한 편의 괘종시계로 향했다.

그리고 시계 위에 매달린 푸른 나비박제의 오른쪽 아랫날개를 뜯어냈다.

날개 밑의 유리에서, 대각선으로난 금이 드러났다.

[00:01]

정면에서 다시 잡힌 괘종시계 위로 유려한 필기체 자막이 뜨며, 영상이끝났다.

'후!'

다시 봐도 너무 좋았다!

대학원생은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문대의 클로즈업이 잡히는 마지막 소절을 돌렸다.

푸른 나비가 관자놀이 부근에 날아다니고, 살짝 위를 응시하는 박문대의 색조가 오른 얼굴은 정말 최고였다.

그리고 화룡점정도 있었다.

'목에 초커!'

비록 재질과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그녀가 처음 박문대를 봤던 아주사 2차 팀전이 떠올라서 더 좋았다.

대학원생은 이미 했으면서도 괜히 그 장면을 한 번 더 캡처해 봤다.

'아, 진짜 이번 뮤직비디오 너무 좋아! 곡도 그냥 듣기 좋고!'

괜히 머리에 물음표 뜨는 일 없이 4분간 황홀한 영상미와 귀에 편한 곡을 즐기게 해주는 게 딱 그녀의 취향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당장 썸네일에서부터 드러났다.

원래 테스타는 '마법소년' 때부터 손이나 풍경, 소품처럼 서사적이고 의미심장한 썸네일을 써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놓고 멤버 상반신 클로즈업을 썸네일에 걸어놨다.

김래빈이었다.

"으음."

문대가 아니라 아쉬웠고, 하필 처음 만났던 팬의 인상이 영 별로였던 김래빈이라 대학원생은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컷 자체는 예술이었다.

'…래빈이 잘생겼지.'

목에 코르셋 초커를 하고, 턱 아래 푸른 나비가 보이는 김래빈의 물기 젖은 컷은 대단했다.

그리고 이 곡에 완전히 어울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주 나른하고 사치스러운 컨셉이었기에, 약간 퇴폐적인 인상인 김래빈이 잘 어울렸다.

뮤직비디오도 세계관이고 나발이고 시각과 청각을 폭격하겠다는 식이었지 않은가.

'앗, 넘어갔다.'

그녀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흐른 영상이 끝나며 자동재생으로 연관 동영상이 이어 재생되었다.

바로 콘서트에서 했던 '자정, 그리고 다음'의 첫 무대였다.

[아아아아악!]

[으아악!]

비명 때문에 노랫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였다.

'아 맞아! 다들 이랬어!'

그녀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킬킬웃었다.

홈마인 친구가 보내준 본인의 직캠영상 링크에는 깔끔하게 음향 편집까지 해놔서 잊고 있었다.

친구에게 듣기로는, 직전까지 공개된 컨셉 포토에서는 낌새도 안 줬기때문에 더 난리였던 거라고 한다.

'음, 그러고 보니 그냥 사진 예쁘다! 기대된다! 이런 느낌이었던 것같아.'

맞다.

더 극적인 첫 무대 임팩트를 위해, 테스타와 회사는 박문대의 의견을 수용해 컨셉 포토와 티저를 심심하게 찍었다.

그냥 적당한 정장과 저택을 이용해서 적당히 보기 좋은 컷을 낸 것이다.

-셤별이 드디어 컨셉충을 벗어났다는 소식 듣고 옴

└어 개노잼 됐다

└그래도 애들은 이뻐 그럼 됐지

-아 뭔가 아쉬운데

-이번엔 한 턴 쉬고 가나? 정규라 작업할 것도 많고 콘도 겹쳐서 무난히 가는 거 아닌가

└행복 회로 튼튼하네 분리수거 힘들겠어

-초심 다 뒤졌다 곧 살도 찔 듯

대학원생은 잘 몰랐으나, 물 밑의 적나라한 반응은 이 정도였다.

하지만 콘서트가 나오는 순간 모든게 뒤집혔다.

심지어 테스타는 콘서트 의상이니 좀 과해도 된다는 생각에, 진짜 태엽에 나비 모형을 꼬리처럼 달고 나오기까지 했다.

자본이 투하되니 그 정도로 과해도 의상이 어색하지 않았다.

-셤별놈들은 컨셉에 진심이다

-코르셋 초커에 저 셔츠 대체 누가 낸 의견이냐 인간적으로 성과금 줘라

- 나비 소년 너무 조아

단물 다 빨아먹은 학교 세계관은 이제 퇴물이지 이거 밀자

-빠수니 초심 풀충전

-역시 남돌은 섹시야

그 뒤에 앨범 전용으로 뮤직비디오의 컨셉을 고스란히 딴 스페셜 포토를 추가하고, 일부는 테스타 SNS에 올린 것까지 완벽했다.

그러나 그런 치밀한 계산을 굳이 알 일 없이, 대학원생은 그냥 행복했다.

'그래, 문대 직캠도 보자!'

대학원생은 신나게 위튜브 검색어를 집어넣고, 박문대의 이번 신곡 음악방송 직캠을 찾아냈다.

이마를 반만 드러낸 헤어스타일과 느슨한 무대용 정장이 정말 잘 어울렸다.

'금발 최고…!'

그녀는 행복하게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댓글 창을 열었다.

물론 베스트 댓글이 영문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았지만, 한두 개 정도의 한글 댓글을 찾으면 반갑기 때문이다.

그 주접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쓱 대댓글로 뭔가 달아보고 싶기도 했다.

"흠흠∼"

대학원생은 행복하게 댓글 창을 내리다가, 드디어 한글 댓글을 발견했다.

그러나… 생각하던 느낌의 댓글이아니었다.

-박문대 화이팅∼ 씩씩하고 멋진 모습 좋아용

-문대 잘 돼라! 힘들지 않았으면ㅠㅠ

"…?"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번 컨셉은 근사함과 우아함을 바탕으로 약간 섹시하기까지 했고…요소마다 예술성을 신경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박문대는 그 컨셉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아주 적절히 소화한 천재 아이돌이었다!

'근데 왜 무대 이야기 대신 이런게 이렇게 위에…?'

물론 좋은 말이었기 때문에 기분이나쁘진 않았다.

다만… 좀, 흥이 식었다.

"으음."

대학원생은 그냥 댓글을 넘기고 쓱쓱 내렸다. 다행히 곧 그녀와 마음이 꼭 맞는 주접 댓글을 발견하고 하트를 누를 수 있었다.

-문대가 눈 깜박거릴 때마다 세상이 깜박거리잖아 이게 바로 개기일식이다

'이거지!'

대학원생은 히히 웃으며 즐거워했다.

위화감은 금방 잊어버렸지만, 이제는 그녀도 친구가 불안해하던 지점이 뭔지, 슬쩍 알 것도 같았다.

'문대보다 문대가 착한 데에 더 관심이 많구나…'

물론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다는 건아니지만, 그런 기류가 생겼다는 게 이젠 즐겁지 않았다.

'얼른 문대 예능이나 보고 싶다.'

대학원생은 예능을 기다리며, 간간이 쉬는 시간마다 지난 콘서트 유닛무대 준비 영상과 유닛 무대 직캠을 돌려 보았다.

그리고 돌아온 토요 파티 방영날.

그녀는 박문대와 큰세진의 첫 등장씬부터 사레가 들린다.

"크헙!"

박문대와 큰세진이… 유아용 핑크빛 요정 날개를 야무지게 챙겨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추어, 80년대 음악다방풍 스테이지에서 척척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추는 마법! 솟구치는 주식! 테스타의 빛나는 두 별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멜빵 바지를 입은 그 모습이 물론귀엽고 잘생겼다.

하지만 핑크빛 요정 날개가 시청자의 시야를 강탈했다.

자막도 떴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꿈결의 춤사위!]

[요정인가 인간인가]

DJ의 새 멘트였다.

'왜… 왜 저런 걸 꼈지?'

대학원생은 혼란스럽게 화면을 보다가, 곧 깨달았다.

"아, 나비!"

이번 신곡이 팬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나비소년'이라고 불리는 걸 의식한 것 같았다!

'너무 귀여워!'

개그 겸 홍보를 위한 큰 그림이었지만, 어쨌든 보는 팬은 즐거웠다.

"아하학!"

대학원생은 폭소하며 볼륨을 키웠다.

그리고 같은 시간, 테스타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크, 크흐흠!"

굳이 토요 파티 를 모니터링 해주겠다며 거실에 모인 놈들이 폭소했다.

'이럴 줄 알았다.'

좀 민망은 했으나… 이런 일로 평정심이 무너지기엔 지금까지 별 괴상망측한 일을 다 겪었지 않은가.

"그렇게 웃기냐."

"네!"

차유진이 대답하자 옆에서 배세진이 고꾸라졌다. 저 대답까지 웃긴 모양이다.

' …참자.'

나는 리모컨으로 향하려는 눈을 둘렸다.

…하지만 나와 큰세진이 DJ 부스를 둘러싸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화면의 내가 외쳤다.

[와, 최고의 국민 MC!]

틱.

나는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어?"

"야, 왜∼"

"문대야, 재밌어! 괜찮아!"

안 괜찮다.

나는 씁쓸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촬영 후반부가 참… 기대된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39화]

둘이 뜬금없이 MC를 역으로 공격해버린 댄스 신고식은 예상대로 잘리지 않고 통째로 잘 나왔다.

[쏟아지는 찬사에 그만 DJ 공백]

[23년 예능 외길, 첫 출연 핑크 요정에게 압도적 패배]

주로 MC를 희화화하는 구도로 편집이 되었으나, 그래도 임팩트는 잘 챙겼다.

[요새 신인은 다 이런 거야?]

[무섭다… 너무 무섭다!]

…날개가 형광색으로 불타는 CG랑 이런 정도의 자막도 받았고.

'등장할 때마다 폭소하진 않겠다'는 다짐 후에 사운드를 되찾은 멤버들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하하, 흠, 예능 잘하고 왔네."

"훌륭하, 큼, 하십니다!"

"형은 무서운 사람이에요. 멋져요!"

"…어, 고맙다."

차유진은 자막의 '무섭다'를 '위협적으로 잘난'으로 창조 해석한 것같다.

어쨌든, 민망은 둘째치고 잘 뽑히긴 했다.

실시간 체크 중인 시청자 반응도 썩 좋았다.

-ㅋㅋㅋㅋㅋ왜 니들이 그걸 햌긔ㅋㅋㅋ

-디제이최 죽었는데욬ㅋㅋㅋㅋㅋ

-뭐야 이 도른자들은

-스탭 웃는 소리 들림ㅋㅋㅋ

-날개 뭐얔ㅋㅋㅋ 미쳤나봐 너무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패기 오졌다

-브이틱 산 채로 구워 먹었을 듯

마침 화면에서 VTIC 두 사람이 나와서 멋진 댄스를 선보였다.

바로 10초 후에, 멘트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 다니게 됐지만 말이다.

"….흠."

저것도 나름 웃기네.

'브이틱 팬들도 그럭저럭 만족하겠군.'

후한 평가를 내려주고 있자니, 슬슬 반전과 함께 도플갱어 팀전이 시작되었다.

[같은 몸이니 벌칙도 같이 받아야죠∼ 도플갱어잖아요! 그래서, 이심동체!]

재미야 있었다만, 이 게임 초반 30분에서는 특별히 베스트 컷으로 더 건질 만한 사항은 없었다.

그냥 열심히 게임 하면서 자연스럽게 몇 컷, 그리고 브이틱의 자폭에 당황하는 리액션만 잡혔을 뿐이다.

"날개 왜 없어요?"

"위험하니까 빼놓고 했지∼"

"아하!"

이 정도 선선한 대화를 나누면서, 이번 주 토요 파티 모니터링은 끝났다.

"둘이 예능 참 잘했다."

"재, 재밌었어…!"

후한 평가였지만, 아직 다음 주 분량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듣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도 본방 시청해 주세요∼"

"하하, 알았어."

류청우는 너스레를 떠는 큰세진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 주에 무슨 꼴을 보게 될지 상상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인터넷 반응도 적당히 팬들 위주로 다음 주를 기대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일반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등장 덕에 '테스타 둘 재밌네∼' 정도의 호의적인 감상이 주를 이뤘다.

흠, 딱 좋았다. 너무 기대받지 않을 때 효과가 더 좋을 테니까.

나는 기지개를 켜며 소파 앞에서 일어났다.

'한 주 더 기다려 봐야겠군.'

큰 문제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후, 우려했던 상황이 드디어 발생했다.

내 여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박문대가 토요 파티 의 다음 방영분을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은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박문대의 예상대로, 최원길의 녹음본 폭로자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로자는 이번엔 아예 글을 올렸다. 스탭 인증과 함께 아주사 에서 최원길의 악명에 대해 증언하는 내용이었다.

-헐 스탭이었구나

-녹음본 짜깁기가 아니라 중간중간 녹음버튼 누르느라 대화가 잘린거라고 함

-최원길 무섭다 문대 협박당한 거아니야?ㅠ

-그 소속사 걸러야 할 듯

하지만 며칠 가지 못했다.

미처 지우지 못한 메타데이터로 인해 폭로자의 신상이 드러난 것이다.

[미친 최원길 폭로자 쓰레기잖아]

: (캡처) 여기 구석에 이미지 원주소 보이지? 끝부분이 아이디 같아서 구글링해보니까 행적 다 뜨네 ㅅㅂㅋㅋㅋㅋ

고인 능욕하는 무직 허언증 환자임

스탭증도 도용

(캡처)

그리고 곧바로 회사의 고소 진행 공지가 떴다.

'유포자는 최원길과 안면도 없는 사람이며, 일일 알바 도중 우연히 대화를 들어 녹음하게 되었다'가 중론이 었다.

동시에 최원길의 소속사는 각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정정 글을 올리며, 폭로자의 정체를 최대한 자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최원길 루머 유포자 = 유명한 고인 능욕 네임드]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최원길 폭로자 정체]

그 작업이 끝나자, 여론은 드디어 최원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개역겨워 최원길 불쌍;

-진짜 무섭다 아주사 끝난 지가 언젠데 그때 악편이 지금까지 애를 잡네ㅠㅠ

-지금 녹음 들어보니까 1번 너무 슬퍼… 얼마나 고생했으면 애가 저러냐

자연스럽게, 여론의 주목이 옮겨가며 박문대를 향하던 동정과 인성 고평가는 시들시들해졌다.

그리고 그때만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박문대와 최원길 관련 의견갈리는 상황]

: 종영되고 올라온 아주사 비하인드 영상임 (캡처)

1 차 팀전 때 원래 최원길 파트였던 브릿지를 박문대가 하게 됨박문대가 이 파트를 단독 편곡할거라고 말하면서 최원길 힐끗 쳐다보는 장면

참고로 이 파트 자기 혼자 초고음성녀 편곡해서 박문대 떡상했음

(캡처) 최원길 당황한 얼굴

'박문대가 최원길 맥인 거다' VS

'기분 탓이고 억측이다'

어떻게 생각해?

-헛소리 또 시작하네

-왜 이런 걸 지금 올려? 싸우라고?

└팬 눈치 보면서 글 올릴 타이밍 골라야 돼?

-대체 어디서 의견이 갈리고 있는데요ㅋㅋㅋㅋ갈리길 바라는 거겠지.

주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말라는 이야기가 대세였으나, 흐름을 타보려는 악의도 많았다.

-오 생각보다 박문대 쎄하다…

-곰인 척하는 여우 재질인 거 다들 아는 줄ㅋㅋㅋㅋ

-얘 이미지메이킹 진짜 잘하잖아 솔직히 이번에 최원길 해명 올린 것도 다 손익 계산해본 거라고 생각

└맞아 사람이 좀 음습한 느낌임

└사랑 못 받고 자란? 특유의 그 느낌 있음…

-박문대 팬들 녹본에서 최원길이 다짜고짜 시비 건 건 맞지 않냐고 그러던데… 솔직히 다 개연성이 있었을 듯

└나도 이 생각 했어ㅋㅋㅋ

-이거 최원길이 후렴 하겠다고 해서 바꿔준 건데 무슨 개소리야 앞뒤가 다 바뀌었네

└또 최원길 탓하고 싶어?

물론 이 글은 신고와 반박으로 얼마 안 가서 삭제되었다. 하지만 팬들에게 찝찝한 뒷맛을 준 건 어쩔수 없었다.

이후로도 불쑥불쑥, 박문대의 지난 행적을 악의적으로 꼬집는 글이 인기글에 등장했다가 싸움이 나서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들의 노린 반응은 이것이었다.

[박문대 인성 좋다고 난리 치더니 아니잖아. 괘씸하네?]

박문대의 발 빠른 대처와 테스타 자체의 스타성으로 인해 그 정도의 역풍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위태로운 며칠이었다.

팬들은 긴장에 찌든 채 하루하루를 넘겼다.

박문대가 촬영한 2번째 토요 파티 가 방영되기 시작한 건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제발 뭐 하나만 걸려라.'

'제발 노잼이어도 되니 아무 일도 없어라.'

두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토요파티 의 '이심동체' 2번째 회차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적당히 웃겼다.

[이야∼ 끝이 안 나!]

[다들 왜 이렇게 잘해요?]

맹렬하게 게임에 달려들어 열심히하는 아이돌과 배우들의 모습은 훈훈하고 마음 편히 보기 좋았다.

벌칙을 받고 돌아오는 배우를 챙기는 큰세진의 모습도 '벌써 절친 다됐다'며 부드럽게 조명해 주었다.

이상한 낌새는 그다음 게임부터였다.

[이번 게임은∼ '가만히 멈춰라'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오래 버티는 분이 성공!]

입에 생수를 한가득 담은 채로, 가장 오랫동안 물을 뿜지 않고 참는 사람이 속한 팀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박문대는 물대포로 난장판이 된 테이블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

[아니, 문대 씨, 깨어 계신 건 맞죠?!]

[이게 가능해?]

스탭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섹시댄스를 춰도, DJ 부스에서 원숭이가 튀어나와도, 눈앞에서 코끼리를 탄단원이 불꽃 저글링을 하면서 지나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 동요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박문대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박문대가 겪었던 미친 상황에 비하면 코끼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실제 자연계에 존재라도하지.'

상태창에게 협박당하는 판타지 소설 주인공의 비애였다.

그리고 그 자막이 오랜만에 박문대의 머리에 붙었다.

[평-온]

티벳여우 CG까지 뒤에 등장했다.

두 볼이 물 때문에 다소 면적이 넓어진 덕에 기가 막힌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초유의 상황]

[지금 제작진이… 제작진이 준비한게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와!]

[대박이다 진짜!]

완승이 었다.

박문대는 물을 삼키고 꾸벅꾸벅 주변에 인사를 돌렸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겐 즐거움을 돌려줬다.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웃겨 진짜

-박문대는 정말 한결같아… 놀라워

-변한 게 없엌ㅋㅋㅋㅋㅋㅋㅋㅋ

-티벳 여우 대승리

-너무 귀엽네요ㅠㅠㅋㅋㅋ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MC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큰세진 저격이었다.

[자, 그럼 이번 벌칙자는… 이세진씨입니다!]

[네?]

[에이 그건 아니죠!]

[세진이보다 먼저 탈락한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요?]

[결정적인 그 순간! 거기서 탈락하시면서 팀의 힘이 무너지는 거거든요∼ 아∼ 보세요! 세진 씨가 빵 터지면서 지금 연달아 둘이 같이 웃어버렸어요∼]

MC는 그럴싸한 말로 상황을 몰아가며, 당황한 큰세진의 반응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큰세진은 활짝 웃었다.

[아, 좋죠!]

[…!?]

[세진아?]

[너 아이돌이 얼굴에 낙서 괜찮아?]

[그것보다 팀의 승리가 더 중요하니까요!]

[?!]

당황한 자막 너머로 큰세진이 박문대에게 검지를 뻗었다.

[문대야!]

[…?]

[너 자꾸 잘하면 내가 무조건 벌칙 받아버릴 거야!]

[…!]

[팀은 이겨도 넌 올 벌칙이라구! 잘 생각해!]

승리를 향한 광기였다.

[희생정신…?]

자막도 당황했다.

하지만 박문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좋아. 올 벌칙 받죠, 뭐.]

[!]

[팀이 이기는 게 중요하잖아요. 도플갱어 잡아야죠.]

[얘들아 너희 너무 몰입했어!]

[이거 예능인 거 알지?]

[저희 꼭 이겨서 가짜 잡고 나가요.]

[가짜 중요하지! 근데 너희 이거 자료 앞으로 평생 간다니까?!]

[가짜를 여기서 못 잡으면 우리 팀에 앞으로가 없잖아요J

[맙소사.]

말이 안 통했다.

둘은 나란히 나가서 고양이 수염과 너구리 낙서를 당했다.

귀여웠지만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진짜 광기]

자막도 불타오르는 가운데, 다음 판이 진행되었다.

[이번 판은∼ '가요 대백과'! 지금은 몇 년도? 88년도∼ 올해 발매된 *곡을 듣고 이름을 맞히면 됩니다!]

그리고 패턴상 이 게임을 예측하고 예습해 온 큰세진이 정답을 쓸어가기 시작했다.

[정답입니다!]

[예이!]

큰세진이 속한 팀의 승리가 확실시된 그 순간.

이번에는 박문대가 자폭하기 시작했다.

[아… 문대 씨, 땡!]

[…후배님 뭐 하시는…?]

[제가 최다 오답률을 기록해서 벌칙을 받으려고요.]

[!]

놀라 나자빠지는 자막 너머로 박문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세진도 잘할수록 벌칙 맛을 볼겁니다.]

[잠깐.]

[이게 원래 이렇게 쓰라고 있는 규칙이 아니야 얘들아!]

파국이었다.

결국 게임이 진행될수록 말려든 출연진들은, 활약하는 사람을 자폭으로 저격해 벌칙을 받게 만드는 방식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말았다.

시청자들은 뒤집어졌다.

-ㅋㅋㅋㅋㅋㅋㅋ이게 뭐얔ㅋㅋㅋㅋㅋㅋ

-너무 웃어서 토할 것 같음

-돌았냐고 왜 이렇게 됐냐고

-미치겠어

-과몰입 신인이 불러온 대참사ㅋㅋㅋㅋㅋ

분명 팀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구도인데도,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예능에 과몰입한 덕에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이 그냥 웃길 뿐이었다.

[야 가자.]

[에휴.]

심지어 기성 출연진까지 분위기에 휘말려서 자체적으로 희생했다. 다 포기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벌칙을 받으러 가는 모습은 희극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최종 승부를 가르는 마지막 게임에서 또 일이 터졌다.

말랑달콤 소현이 막판에 자폭 위협을 포기한 것이다.

[미안해 문대 씨! 영린 언니 고소공포증이 있어! 이건 아닌 것 같아!]

[!]

과몰입은 그렇게 배신당한 채로 끝났다.

영린은 성공적으로 깃발을 들어 올리며 팀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그래서 진짜는… 파티 팀입니다!]

[와아아아아!]

쓸쓸한 표정으로 넋이 나간 박문대의 얼굴은 정말 웃겼다.

-하얗게 불태웠다….

-ㅋㅋㅋㅋㅋㅋㅅㅂ귀여워

-아니 이런 거에 과몰입하지 말라구 바보얔ㅋㅋㅋㅋㅋ

-아 진짴ㅋㅋㅋ넘 웃곀ㅋㅋㅋ

-진짜 귀엽다ㅋㅋㅋ신인이라 가능한 대환장 파팈ㅋㅋㅋ

-얘 아주사 때도 방송에 너무 진심이더니 여기서돜ㅋㅋㅋㅋㅋ

그리고 이 회차의 테스타 중심 클립은 위튜브에 올라오는 순간 순식간에 인기 동영상에 올랐다.

[(토요 파티) '저놈의 도플갱어를 매우 쳐라!' 테스타의 과몰입 모음.zip I 레전드 이심동체 I SBC]

안티들이 열심히 빌드업 하던 '아닌 척 음습하게 사람 꼽 주고 머리 굴리는 박문대'는 '과몰입 티벳 여우 사차원 문대가또'의 파도에 밀려서 산산조각이 났다.

'됐다.'

나는 복잡한 의미의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을 껐다.

좀… 많이 민망했지만, 만족스럽긴했다.

'분위기 제대로 잡혔군.'

브이틱에게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어달라고 부탁했던 보람이 확실했다.

덕분에 테스타의 행동이 더 유별나게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리액션효과였다.

그리고 이렇게 웃긴 이미지가 확고하게 붙은 덕에, 한동안은 사소한 일로 요동칠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맘 편히 진행할 수 있겠어.'

이번 활동 시작할 때부터 계획했던 일을 슬슬 진행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먼저 사전작업이 필요했다.

'정산 액수 정리부터 하자.'

드디어 작년 성과를 까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