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나는 미리 깔아놓은 은행 어플에 접속했다.
'지금쯤이면 입금됐겠지.'
정산금이 들어올 것이란 이야기는 어제 들었다.
사실 분기별로 정산되는 것으로 계약은 됐는데, 작년에 회사가 난장판이라 법정금리가 붙는 조건으로 잠시 유예됐었다.
그래서 4월인 지금, 작년 정산금과 이번 1분기 정산금이 한꺼번에 입금됐다.
일반 직장인이었다면 회사를 고소할 공백이었지만, 당장 급한 사람이없고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서 큰 잡음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덕분에 4월 22일 월요일,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즉시 정산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으헉!"
옆 침대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배세진이다.
'액수가 큰가 보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워낙 성적이 좋았고, 콘서트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크게 실감이 나진 않는데.'
나는 관성적으로 어플의 대표 계좌를 밀고 새 계좌를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대한 종합예금]
[1,146,193,520원]
'…11억?'
11억이라고?
장기밀매를 해도 못 만져볼 액수가 화면에 떠 있었다.
"…."
말문이 막혔다.
이게 9개월 일하고 받는 게 가능한 액수였나?
잠 못 자고 부담감이 큰 상태에서 구른 건 맞았다. 그리고 길게 보자면, 아주사 때부터의 개고생이 누적된 금액이기도 했다.
하지만 11억을 받을 수 있다면 너무 남아서 무서운 장사다.
'아무리 그래도 11억은… 상상 이상인데.'
정산서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회사 수신용으로 개통한 메일을 확인해 봤다.
어떻게 주소가 유출된 건지 별 이상한 메일들이 폭탄처럼 쌓여 있긴 했다만, 대충 거르고 나니 정산서 메일을 찾을 수 있었다.
빠르게 훑었다.
"…후."
11억이, 맞았다.
그리고 원인도 알았다.
'연습생 비용이 없군.'
회사의 사전 투자 비용이 안 잡혔다는 뜻이다. 덕분에 수익이 발생하는 즉시 알짜 그대로 정산됐다.
앨범, 행사, 광고, 음원, 콘서트…
게다가 제작에 참여한 비중이 커서 저작권료도 꽤 됐다.
'김래빈은 더 받았겠는데.'
마침 옆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김래빈이 통화 중인 것 같았다.
아마 가족 중 누군가가 놀라서 전화한 듯싶다.
'난리군.'
난리가 나야 정상인 금액이긴 했다. 아직도 썩 내 돈 같지가 않다.
"너, 너 봤어?"
배세진이 뻘게진 채로 말을 걸었다. 정산금 봤냐는 뜻일 것이다.
"…네. 지금."
"이 정도면, 서울에 집 살 수 있지? 대출, 대출 끼면…."
어떤 집이냐에 따라 다르지.
하지만 배세진은 보안 좋은 내 집마련 계획의 초기 달성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오자 흥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계산이 잘못됐다.
"그거 세금 떼기 전 금액이에요."
"어, …어?"
"고액이라 세율이 높을 테니까, 다 쓸 생각 마시고 5월에 종합 소득세 신고하기 전에 세무사랑 꼭 상담하세요."
"…그, 그래."
배세진은 멍하게 긍정하더니, 도로 자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현실로 돌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나도 배세진에게 조언하면서 정신 좀 차렸다.
"형은 정산금 익숙할 줄 알았는데요."
"이런 금액은 처음이야…."
배세진은 햄스터 바디필로우에 얼굴을 처박았다.
저거, 전부터 유용하게 써먹는군.
"무, 무슨 일이야…?"
씻는 중이던 선아현까지 소리를 듣고 욕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정산 확인 중."
"아, 아하."
선아현은 안심했는지 웃었다. 얼만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넌 부모님이 관리해 주시던가?"
"으, 으응! 요, 용돈 받기도 하고…."
지난번에 백화점 상품권을 턱 하고 생일 선물로 내민 걸 봐서는 아마 저 용돈이라는 것도 상당한 고액일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상품권도 아직 안썼군.'
시상식 시즌 끝나자마자 콘서트랑 새 앨범 준비하고, 곧바로 또 활동기라 잊고 지냈다.
'마침 내일 오전에… 음, 스케줄은없는데.'
앞으로 주말을 포함한 2주 동안낮에 시간이 비는 건 그때가 유일했다.
일단 재확인부터 해보자.
"내일 낮에 우리 스케줄 없는 거맞지?"
"어, 어! 맞아, 왜…?"
"좀 나갔다 오려고."
"…쇼핑? 은행이야?"
배세진이 끼어들었다. 정산받자마자 나간다고 하니 짐작한 듯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쇼핑."
"…그럼 같이 나갈래? 나도 은행 들러야 되니까."
"음… 그건 좀."
"뭐?"
나는 목 뒤를 쓰다듬었다.
"디저트 가게 갈 생각이라서요."
"…?"
"한… 일곱 군데 정도."
"…?"
그래서 다음 날인 화요일. 나는 혼자 유유자적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아니, 돌아다닐 예정이었는데, 말이다.
"무, 문대야. 저기 파란 간판 맞지?"
"우측 첫 번째 골목에서 내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사님."
까보니 꼬리가 두 놈이나 붙었다.
선아현과 김래빈이 반색하며 따라온 것이다.
-나, 나도 나가고 싶었는데…!
-디저트요? 다음 주가 누나 생일인데 선물 중 하나를 고르기 정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고 한다.
참고로 배세진은 오다가 은행에 내려줬다. 택시 대절비가 절약돼서 이득이었다.
'이제 택시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만.'
인생에서 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너무 오랜만이라 좀 이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기사분이 첫 목적지에 차를 세웠다.
"자,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뒷자리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던 둘도 얼른 따라 내렸다.
"마, 맛있겠지?"
"기대가 큽니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눌러쓴 남자 셋이 전문 디저트 가게에 들어가는 게썩 흔한 그림일 것 같지는 않았다만… 뭐, 됐다.
'길에 사람 자체가 별로 없어.'
평일 9시 반이라 그런 것 같았다.
나와 멤버 둘은 막 문을 연 가게에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 헉."
"안녕하세요."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간파당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이젠 마스크는 무용지물인 것 같다.
"어어, 어… 헉, 와…. 노래 너무 잘 듣고 있고, 허어."
"감사합니다. 다쿠아즈 종류별로 하나씩 다 포장해 주세요."
"네, 네?"
"맛별로 하나씩 전부 포장 부탁드립니다."
"아, 아, 넵!"
미안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악수와 사인을 포장된 다쿠아즈와 교환했다.
"으허 헉."
…그래도 즐거우신 것 같아 다행이군.
그리고 당황한 채로 서 있는 둘을돌아보았다.
"너희 안 골라?"
"아!"
나머지 둘도 얼결에 악수와 함께 다쿠아즈를 골랐다.
나는 곧바로 계산대로 갔다.
"같이 결제 부탁드립니다."
"아, 네!"
둘 다 기겁했다.
"괘, 괜찮은데!"
"정산 액수로 정렬하면 제가 사는게 맞… 아니,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그, 괜찮다는 의미로…."
나는 픽 웃었다.
"됐어. 내가 나오자고 한 거고."
"형…."
"무, 문대야…."
차유진이나 큰세진을 데리고 왔으면 뻔뻔하게 뜯어먹었을 텐데, 이 두 놈은 감동이나 받고 앉아 있다.
둘은 포장된 다쿠아즈를 건네받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자, 잘 먹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게 밖으로 나오는 순간, 김래빈이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아, 저 누나 생일 선물을 사야 합니다."
"그건 천천히 골라봐도 괜찮을 것 같다. 가게가 많이 남았으니까."
"네?"
둘은 눈을 끔벅였다.
"그, 여, 여기서 샀으니까, 고, 고른 거 아냐?"
"마음에 안 들 경우를 대비해서 후보군을 많이 찾아놓으신 줄 알았습니다만…
"아닌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곱 곳에서 다 살 거야."
"…!"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그래서 정오가 됐을 때, 두 놈은 모두 흐느적거리며 택시에 앉아 있게 되었다.
나는 박스를 정리해서 발밑에 내려놓았다.
모두 일곱 개. 다 성공적으로 구매했다. 이미 하나씩 맛도 봤고.
중간에 앨범을 흔들며 달려온 분과 포옹하는 예상 못 한 이벤트가 있긴했지만, 순조로웠다.
'마지막은 좀 아슬아슬했지.'
계산대에서 눈이 마주친 사람이 우렁차게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마카롱 받자마자 인사만 하고 도둑놈처럼 가게에서 도망쳤다.
"끄, 끝이지…?"
"어. 끝."
"흐아아아…."
선아현이 줄줄 녹아내렸다. 사람많이 만나서 지친 모양이다.
중간에 그냥 숙소 들어가라니까, 어차피 몸 관리하느라 단 건 별로 먹지도 않는 놈이 왜 꾸역꾸역 따라붙었는지 모르겠다.
'소외감 때문인가.'
선아현 성격상, 여럿이서 다니다가 혼자 빠지는 게 싫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쉬는 시간에 굳이 따라 나와 준 건… 효용을 떠나서 고마운 일이긴 했다.
"이제 귀가하는 겁니까?"
"어. 가자."
나는 택시를 숙소로 돌렸다.
그리고 도착한 숙소에서 같이 올라가는 대신, 디저트만 맡겼다.
"숙소 있는 사람들 나눠 먹으라고 전해줘."
"어, 어?"
"내가 잠깐 할 일이 생각나서."
나는 두 놈을 귀가 조치 하고 도로 택시에 탔다.
그리고 내비를 다시 찍었다.
"백화점?"
"예."
나는 볼 일을 마저 본 뒤, 한 시간쯤 뒤에 숙소에 귀가했다.
띠리링-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에서 다쿠아즈를 볼이 터지게 집어먹고 있는 차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
"맛있어요! 고마워요!"
"뭐… 그래."
살찌는 놈도 아니고 단 것도 좋아하니, 적임자라고 볼 수 있었다.
"뭐가 제일 맛있냐."
"이거요."
딸기 마카롱이군. 나는 포장지의 가게 이름을 기억해 뒀다.
"과자 잘 먹었어 문대야."
" 뭘요."
"문대 여자친구 생겨서 연막으로 우리까지 사준 건 아니지? 형 믿는다∼"
"미쳤냐."
나는 류청우와 인사한 후, 킬킬거리는 큰세진의 등을 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서 책을 읽던 배세진 너머로, 책상에서 수세미를 뜨던 선아현이 보였다.
"무, 문대야. 할 일은 잘 끝났어?"
"어. 그리고 이거."
"으, 으응?"
나는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좀 이르지만… 생일 선물이야."
"어, 어어!?"
선아현이 기겁했다. 배세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선아현 생일이야…?!"
"아, 아니요…?!"
둘이 나란히 당황한 게 무슨 콩트같다.
"이주 뒤인데, 그때까지 외출할 시간이 없어서 지금 주는 겁니다."
"아…."
배세진이 안심하며 도로 누웠다.
선아현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 그렇구나, 고마워…!"
"별 말씀을."
…저 선물에 자기가 준 백화점 상품권을 썼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말도록 하자.
"여, 열어봐도 돼?!"
"당연하지."
선아현은 당장 포장을 개봉했다.
그리고 등장한 코트에 굳었다.
"…! 너, 너무 비싼 거, 아니…."
"아니야."
상품권 준 놈이 별소리를 다 한다.
나는 백화점에서 사 온 다른 쇼핑백을 침대 밑에 넣었다. 쇼핑백 크기가 커서 약간 시간이 걸렸다.
'…잘 고른 것 같긴 한데.'
차라리 선아현을 데리고 갈 걸 그랬나, 짧게 후회가 됐지만 이미 사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배세진이 힐끔 쳐다봤다.
"그건 뭔데?"
"선물이요."
그리고 그 주 일요일, 테스타의 이번 활동 마지막 음악방송 사전 녹화가 진행되는 새벽의 방송국.
현장에 도착한 테스타의 팬들은 웬 큼직한 박스를 하나씩 받게 되었다.
[테스타가 부릅니다.]
[자정 그리고 러뷰어 ]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1화]
박스가 배부된 시점은 음악방송 사전 녹화가 끝나고 팬들이 빠져나갈때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귀갓길에 박스를 열어보게 되었다.
테스타의 로고 스티커까지 붙은 연보라색 박스는 대놓고 외치는 것 같았다.
'저 역조공이에요!'
당연히 팬들 모두는 상황을 빠르게 눈치 챘다.
'어쩐지 공방 포카를 입장할 때 안주더니…!'
아마 이 상자 안에 사녹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포토 카드도 함께 들어 있을 것이다.
이미 크림빵이나 커피, 간단한 간식은 몇 번 받아본 팬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박스를 열었다.
'닭강정 들었으면 좋겠다.'
'묵직한 게… 이번엔 음료인가?'
하지만 박스 안에 보이는 것은 화려하게 포장된 큼직한 마카롱 28구였다.
"…!"
"으헉."
7구씩 네 줄이 좌르르 놓여 있는 것이 엄청난 박력이었다.
사람들은 지하철과 버스에서, 혹은 차 안에서 각자 기겁했다.
당연히, 살면서 마카롱을 굳이 28구나 한꺼번에 살 일이 없던 사람도 많았다.
'우리 인원이 300명이었는데 인당 28구를…?'
'이게 무슨 일이여.'
물량에 무슨 착오가 있던 건 아닌가, 몇몇 팬들은 의심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냥 기성품도 아니었다.
마카롱을 들어보니, 꼬끄에 동물 발바닥 모양 아이싱까지 올라가 있었다.
'미친, 새 발바닥도 있어!'
'이 유독 작은 건 햄스터야? 햄스터냐고!'
심지어 사슴 발굽 모양까지 있었다.
팬들은 발을 구르고 시트를 두들기고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면서도,고이 박스를 접어두려고 했다.
'인증샷이나 찍고 얌전히 두자.'
'영원히 냉동시켜 놔야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스커버 안쪽에 뭔가가 붙어 있었다.
작은 상자가 하나 더 있던 것이다.
'설마.'
' 또?'
팬들은 상자를 뜯어내어 뒤집었다.
그러자 정체가 드러났다.
잘 포장된 고급 브랜드 향수였다.
그것도 샘플 사이즈가 아니라, 50ml짜리 본품.
'헐.'
'잠깐.'
'이거 무슨 당첨 박스인가? 설마 다 준 거야 이걸?'
기쁨을 넘어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또 뭔가가 나왔다.
툭.
박스 사이에 끼어 있던 편지 봉투가 떨어진 것이다.
봉투가… 상당히 두툼했다.
이쯤 되니 슬슬 무서워진 팬들도나왔다.
'설마 뭐가 또 있어?'
'대체 어디까지 했냐…?'
침을 삼키며 봉투를 열어보니, 자필 쪽지를 복사한 것 같은 편지지가 나왔다.
[사랑하는 러뷰어에게 ]
: 오늘 마지막 음악방송 녹화에도 응원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에 저희가 정산을 받았어요!
무엇을 드리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이번 활동의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을드리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해 봤습니다.
활동 끝나기 전에 드리려고 급하게 하느라… 혹시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예쁘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ps. 향수는 각자 좋아하는 향을 골랐습니다. 7가지 중 랜덤으로 하나가 들어갔어요!
편지는 '러뷰어 사랑해'라고 쓴 낙서로 끝났다.
이 부분은… 진짜로 친필인 것 같았다.
그리고, 편지지를 꺼낸 봉투 안에는 인화된 사진이 잔뜩 들어 있었다.
숙소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테스타의 사진이었다.
이것 때문에 봉투가 그렇게 두툼했던 것이다…!
'미친!'
'미친놈들…! 이 미친놈들이!'
이쯤 되니 공방에 왔던 팬 대다수가 내적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SNS에서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미미미친 테스타가 마카롱 28개랑 향수랑 사진이 으아아악 으악 세상에 얘들아 무슨 1주년도 안 온 돌이 역조공을 이렇게 하냐고 으아아하 (사진)
" 뭐?"
박문대의 홈마는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야밤에 식중독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가는 바람에 못 간 마지막 공방에서 빅 이벤트가 벌어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확인해 본 타임라인은… 박스 인증샷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X발!'
홈마는 소파에 머리를 퍽퍽 박았다.
공짜 마카롱과 향수가 아까워서는 당연히 아니다.
내 아이돌의 팬사랑 증거품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못 받았다는 게…!
너무 억울해서였다…!
'갈 수 있었는데!'
하필 빠진 날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너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그녀 혼자만의 감상은 아니었다.
-X발 배 찢어지겠다 나도 우리 애들이 준 딸기 마카롱 먹고 싶어ㅠㅠ
-마지막 음방이라고 준 건가… 아나 진짜 코앞에서 신청 잘렸는데 너무 허망하다
-4세트나 줄 거면 마지막 주 음방에 나눠서 줘도 좋았을 텐데 물론 애들 맘이지만… 흑흑 나도 햄찌 발바닥 마카롱 하나만…ㅠㅠ
워낙 신경 쓴 티가 났기 때문에, 분위기는 도리어 부러움을 넘어서 살짝 박탈감으로까지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역조공은 일반 연예 커뮤니티에서도 제법 화제가 되었다.
척 보기에도 고액이라 관심 가지는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액 상당해 보이는 테스타 인기뮤직 역조공.jpg]
: (사진) (사진)
마카롱 4세트에 브랜드 향수
마카롱 멤버들 시그니처 따서 제작한 수제로 추정. 향수도 일괄 아니고 같은 브랜드 여러 향 섞여 있다고 함.
처음에는 팬들 부럽고 테스타가 대단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곧 상황을 분석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건 회사 픽이네 갑자기 역조공 스타일 확 달라짐… 브랜드 나온 거 보니 광고 찍은 듯
└헐 이건가 딱 봐도 뭔가 과한 구성이라 이상했어ㅋㅋㅋ
-애초에 역조공 회사에서 해주거나 정산에서 반반 까는 게 많잖아 근데 너무 이러니까 좀 위화감 들긴함ㅋㅋㅋ 좀 덜 나게 하지
-가격대가 2년 차 돌이 준비할 급이 아닌데?ㅎㅎ 그래도 팬들 좋았겠다 부러워ㅠ 나도 마카롱이랑 향수 공짜로 가지고 싶어ㅠ
-오 혹시 향수 광고 찍나? 아이돌향수 광고 드문데 신기
진심이든 악의든, 오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여론이 안 좋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역조공 편지지 인증 글이 이어서 줄줄 올라왔다.
-우리 애들… 첫 정산 받았다고 신나서 일단 지른 것 같습니다… (편지지 사진)
정산 언급에 향수를 골라서 샀다는 내용까지.
편지글은 테스타가 직접 역조공을 준비했다는 확언이나 다름없었다.
일반 커뮤니티 여론은 그 선에서 정리되었다.
-미친 자기들이 정산받아서 직접 샀대
-뭐야 궁예질 다 틀렸네ㅋㅋ으휴
-광고가 아니라 현찰 박치기 본새난다 진짜ㅋㅋㅋㅋ부럽다 재력이
-테스타 공방 신청 어렵지? 다음 활동 때 뭐 줄지 궁금해 더 비싼거 주면 나도 가보고 싶엌ㅋㅋㅋ
-나도ㅋㅋㅋㅋㅋ
└진심임?;; 선 넘네
-돈 개많이 받았나보다 이렇게 막쓰고
└앨범을 그렇게 팔았는데 못 받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닐까ㅋㅋㅋ└누가 뭐래?
└엥 왜 화내ㅠ 테스타 초동 보고화 풀어 83만이야 (캡처)
몇몇 어그로가 성공적으로 퇴치당하며, 테스타는 훈훈한 역조공으로적 당히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팬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전 멤버 목격담과 연결 짓는사람들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미친 설마 화욜에 디저트 맛집 투어 다닌 게 이거 고르려던 거야 얘들아?ㅠㅠㅠ
└헐
└헐 맞는 듯?
└추측인데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거 자제하자 좀…
└마카롱 사진 확인해봄. 일단 포장지 위에 'X그네트 스윗'은 화요일에 아문래 목격담이 뜬 집 중 하나는 맞습니다…. (로고에 동그라미 친 사진)
└-으허어어억
-그 맛집 투어가… 활동기의 일탈이 아니라… 역조공 준비였다고…?
팬들은 이 스토리가 과하게 감동적이라 오히려 충격에 휩싸였다.
-너무 과대해석 하지 말자 혹시 아니면 또 이걸로 욕하려는 정병들나옴
-그냥 정산받았다고 팬들한테 맛난 거 준 것만으로도 너무 귀엽고 훈훈하잖아ㅠㅠ
하지만 역조공 마카롱을 만든 가게의 SNS 계정에 후기 글까지 떴다.
-X그네트 스윗 후기 떴다…(링크)
-애들이 마지막 주 음방에 맞춰서… 다 넣고 싶어 했는데, 이미 예약이 다 차서 못했던 거래ㅠㅠ (인하트 캡처)
-그리고 여기가 진짜 맛있다고 계속 그래서, 주인장분이 엄청 으쓱하셨다고…
확인 사살이었다.
모든 게 진실이라는 엄청난 상황에, 팬들은 완전히 감동과 아련함에 젖어서 우는 이모티콘으로 글을 도배해버리기 시작했다….
-진짜 정산받자마자 허겁지겁 준비했나봐 아 수니심장 너무 뛰어서 터질 것 같ㄷㅏ…
-다른 팬클럽에서 섭외가 와도 절대 안 넘어가고 어쩌고저쩌고 진짜 살아 있는 천재 아이돌 테스타 외않해?ㅠ
-첫 정산 받았다고… 비싼 먹을거 왕창 사고 좋아하는 물건까지 팬들 바리바리 싸주는 아이돌… 평생 너희와 가겠다
-됐어 마카롱 가게 알았으니 주문넣어서 먹으면 돼 얘들아 역조공 맛 짜릿하다…
팬들은 박탈감이고 나발이고 머리끝까지 뽕이 차올랐다.
그리고 어떤 향수가 누구의 취향인지 맹렬한 추리글이나 올리며 행복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스타는 이 타이밍에 역조공했던 사진 대부분을 SNS에 풀어버리기까지 했다.
-진짜 테스타는 전설이다…
-마카롱 주문하고 향수도 샀다 이제 사진만 인화하면 나도 역조공을 받은 것
즐거운 역조공의 시간이었다.
나는 엄지로 화면을 밀었다.
"흠."
사진들은 잘 업로드되었다.
첫 팬 사인회 때와 비슷한 행동 원리로 움직인 결과였다.
'서운한 사람이 더 많으면 안 한것보다 못하지.'
정보와 컨텐츠는 모두에게 돌아가는 게 맞았다.
나는 올린 글을 한번 확인한 뒤, 음악방송 대기실에서 반응 모니터링을 계속했다.
'…분위기 좋네.'
낮 시간을 다 써서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기껏 돈 쓰고, 선물 받는 사람 마음에도 안 들면 그런 돈 낭비가 어디 있겠는가.
다행히 돈값은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향수를 굳이 일곱 종류 중 랜덤 하나로 넣은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고.'
덕분에 목격담은 셋뿐이지만 테스타 이름으로 선물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역시 개인이 아니라 그룹부터 시작해야 분란 소지가 없어.'
내가 돈 내는 건 딱히 상관 없었고.
'애초에 돈 들어갈 곳도 없다.'
가족도 지인도 없는데 뭐 어떤가.
당장 생활비나 집이 필요한 상황도 아닌 데다가 워낙 정산금이 고액이라 이 정도로 뭐라 하기도 웃겼다.
그래서 처음부터 계산은 내가 하고 명의는 그룹으로 뺄 생각이었다. 회사도 그러길 원했고.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듣자마자 류청우가 반대한 것이다.
-문대야 그건 안 되는데.
-예?
-네가 쉬는 시간까지 반납하면서 골라서 사 온 거잖아. 그럼 문대가 주는 선물로 들어가야지.
-아뇨. 안 그래도 괜찮습니다. 품목은 멤버들이 같이 고른 셈이니까요.
-문대 네가 괜찮아도 팬들은 안 괜찮을 거야.
-…!
-아무 것도 안 부담한 사람이 선물에 이름 올리는 건 거짓말이잖아.
사실을 알면 팬들이 알면 얼마나 슬프겠어.
-…
-그리고 팬들이 몰라도 우리 마음이 안 괜찮아. 그렇지?
-네!
-마, 맞아요!
-이야 형님 말씀 진짜 잘하시네요…
류청우는 단호하게 정리했다.
-최소한 돈이라도 분담해야 해.
…그래서 멤버들의 열화같은 성원과 함께, 그냥 전부 N빵해 버렸다는 말이다.
고맙긴 하다만…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긴 하다.
'혹시 말 새어나가면 여파가 걱정돼서도 아니고, '안 되는 일이라 안된다'라…
흠, 그러고 보니 내 인성에 관해서 말 나올 때, 사랑 못 받은 티가 어떻다는 어그로를 봤던 것 같다.
'불꽃 패드립이었지.'
하지만 별개로, '잘 자란 티'라는건 이 류청우 같은 놈을 가리키는 걸 수도 있겠다 싶다.
'구김살이 없다고 해야 하나.'
회복 탄력성 좋고 다른 샛길로 안빠지는 타입 말이다.
마침 당사자가 말을 걸었다.
"선물 반응 봐?"
"예."
"나도 봤는데, 팬들 좋아하시더라. 사실 네가 다 한 거라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다."
"뭐… 돈만 내려고 했던 건데요."
"준비도 너 혼자 했으면서 무슨 소리야!"
류청우가 장난치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도 다음엔 준비부터 다같이하자. 뭐든 너 혼자 다 감당하려고 안 해도 괜찮아. 팀으로 움직이는데 팀원을 잘 써먹어야지."
"…그렇죠."
팀원이 전부 나보다 6살 이상 나이가 어리지만 않았어도 고민해 봤음직한 논제다.
류청우는 빙그레 웃으며 내 등 한번 치고 지나갔다.
나는 목 뒤를 문질렀다.
'뭐… 애들이 협조적이긴 하다만.'
이번 팬 선물도 결국 막판엔 금액분담을 넘어 다 같이 진행했다.
그래서 그림이 더 좋았긴 했다. 향수도 각자 고르고, 마카롱 시안도 같이 상의했고.
저기 앉아서 메이크업 수정 받고 있는 놈들과 협업한 결과가, 제법 괜찮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
"역시 누가 어떤 향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부족합니다. SNS등으로 암시를 남기는 편이 좋을 것같…."
"마카롱 더 먹고 싶어요."
"네 마카롱 욕구가 이 안건보다 더중요해?"
"응."
"도, 돌아가는 길에 주문하면…."
"유진이 그만 주자∼ 애 굴러다니겠어."
"아니에요! 저 멋져요!"
얼굴에 붓 대고 참 말들도 많군.
잠시 혹한 내가 멍청이 같아진다.
…사실, 안 그래도 다른 선물들은 그냥 나 혼자 처리한 상태다.
…그렇다. '다른 선물'이 있다.
백화점에서 선아현의 생일 선물을 사면서, 가볍게 회사 실무진들 선물도 챙겼었거든.
'이런 거 하나씩 먹여두면 일 터졌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신경 써준단 말이지.'
어려운 것도 아닌데 겸사겸사 미리 해두면 좋지 않나.
물론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사무실에서 쓸 만한… 좀 비싼 실내용 고급 슬리퍼다.
하지만 먹을 것보단 나을 것이다.
'이 사람들한테는 먹을 건 줘 봤자그때뿐이야.'
계속 보급할 게 아니면 악수다.
차라리 일하는 환경에서 계속 쓸수 있는 물건인 편이 좋았다. 그럼 효과가 좀 오래 갈 것이다.
'적재적소에 괜찮은 소비였지.'
나는 계좌에 남은 금액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마지막 출금액도 떠올렸다.
'…기부도 좀, 했고.'
익명으로 아동복지재단에 넣었다.
…'박문대'가 받은 부모님 보험금을 썼으니,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게 이번 정산금 소비의 끝이었다.
'참, 인생 알 수 없군.'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며 스마트폰을내려놨다.
마침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스텐바이 들어간다!"
이번 활동기 마지막 음악방송 생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테스타 올라갑니다!"
"예∼"
무대는 언제나처럼 꽤 재밌었다.
…그리고 다른 상황은 모르겠지만, 여기 위에선 이 나이 어린 놈들이있어서 제법 든든하긴 했다.
'…괜찮은 팀이지.'
류청우의 말이 은근히 머리에 남는군.
나는 괜한 감상을 털어내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 스케줄을 떠올리려던 순간, 저쪽에서부터 우다다 달려온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매니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얘들아! 너희 빌보드 차트 들었대!"
"…?"
"…?"
"예?"
성적이 안 되는데 무슨 헛소리신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2화]
테스타가 국내에서 성적을 잘 내고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국 내의 이야기다.
당장 위튜브 조회수만 봐도 음원차트 50위권인 그룹에게 밀리기도 한다.
해외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대형 기획사 그룹들보다 인지도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근데 무슨 뜬금없이 빌보드야.'
월드 앨범 차트에 들었다는 건가.
그게 그나마 현실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얼터너티브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 요?"
"그래!"
생전 처음 들어본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네이티브인 차유진을 쳐다봤다.
흠,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이군.
"아차차! 잠깐."
설명해 줘야 할 매니저는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다시 뛰어나갔다.
'정신없군.'
우리는 알아서 대기실로 돌아가면서, 차유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까 차트, 혹시 알아?"
"Alternative Songs Chart 알아요…. 저거 몰라요."
김래빈을 제외한 모두가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얼터네이… 차트 뭔데…?"
"Alternative Rock 만 있어요. 저 좋아해요!"
"아."
록 장르의 일종인가 보다. 일종의장르별 차트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럼 뒤에 디지털 세일즈가 붙었다는 건… 순수하게 음원 판매량만 측정하는 차트라는 뜻인가.'
나는 대기실에서 스마트폰을 찾자마자 대체 무슨 차트인지 확인해 봤다.
…25위까지밖에 표기 안 되는, 장르 하위 마이너 세부 차트였다.
'심지어 유료 회원용이야.'
옆에서 김래빈이 어정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타이틀곡 중에 얼터너티브 록은없는데…."
나는 우선 지난 검색 엔진의 저장된 페이지를 이용해서 직전 차트를확인했다.
"오, 그게 그거야?"
큰세진이 끼어들어서 화면을 휙 내렸다.
"야."
"하하! 여기 앨범만 봐도 알 수 있…?"
훑으며 내려간 결과, 테스타의 앨범 아트는… 없었다.
"…?"
뭐야.
"이거요!"
그때, 차유진의 손까지 내 스마트폰 화면 위로 난입했다. 그리고 쓱쓱 움직여 한 곡을 짚었다.
[127 Section Bonus book / TeSTAR]
"…!"
"헐."
"우리 게임곡!"
그렇다.
2집을 발매하면서 콜라보했던 그 꿈도 희망도 없는 게임, 127 Section의 곡이 차트에 들은 것이다.
챕터 1에서 몰살당하는 동료 캐릭터들로 분장했던 경험부터 저절로 떠올랐다.
"근데 우리 앨범이 아니네?"
큰세진의 말대로, 앨범 아트까지 달랐다.
나는 곧바로 스파티파이에 해당 곡을 찾아냈다.
'…게임 OST 앨범이군.'
돌아온 매니저에 의해 차로 이동하면서 소식을 다 들은 후에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게임 글로벌 런칭이요?"
"어! 근데 굉장히 잘됐나 봐. 난리라더라!"
127 Section이 이번에 영미권 중심으로 글로벌 런칭을 했는데, 대박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매니저가 흐흐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OST 앨범도 냈는데 거기서 너희 곡이 차트에 들었다네! 야, 그것도 곡이 좋으니까 든 거 아니겠어…."
"그렇죠?"
"기, 기쁜 일이네요…!"
대충 사태를 파악한 멤버들이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적당히 좋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뜬금없이 일요일에 소식이왔군.'
빌보드 차트는 수요일 업데이트 였을 텐데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테스타의 성적이 아니라 게임의 성적이었다.
소속사든 팬들이든 크고 급한 사안은 아니니, 매니저 선까지 소식이 내려오는 데에 며칠쯤 걸렸을 법도했다.
'T1은 좋겠어.'
인수한 작은 게임사에서 대박이 나왔다니 말이다. 물론 자본은 무지막지하게 부었겠지만.
어쨌든 OST가 잘 됐다니 우리 쪽에도 잘된 일이었다. 앨범이랑 연결이 많이 된 곡이기도 했고.
'벌스 빼면 다 영어라 좀 먹혔나.'
메인 차트에는 기색도 없고 저 마이너 차트 하위권에만 반짝 나타난거지만, 그래도 흥미롭고 좋은 소식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목 베개를 걸치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게임 OST가 차트에 진입을…?'
마이너 차트라 그러려니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영화 OST도 아니고 게임 OST가 들어갈 수 있나? 그것도 막 런칭한 모바일 게임이?
게다가 무슨 기준으로 얼터너티브록으로 분류가 된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록 요소만 차용한 케이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좀 이상한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해봐야겠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아주 오랜만에 게임 커뮤니티들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사태를 파악했다.
'테스타 컴백 트레일러를 또 게임광고로 썼군.'
127 Section은 글로벌 런칭에 맞춰서 위튜브나 전광판 광고를 해외에서 진행한 모양인데, 여기서 우리 트레일러 영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모양이다.
'퀄리티가 워낙 괜찮았지.'
시네마틱 트레일러 수준이었다.
나라도 재활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광고를 접한 영미권 외국인들은 트레일러에 등장하는 테스타가 그냥 게임 속 인물을 연기하는 광고 배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춤도 안 추고 노래도 안 하고 연기만 했으니까.'
케이팝에 관심 없는 게임 마니아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우리가 VTIC만큼 해외에서 인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트레일러 광고 반응이 괜찮으니… 게임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게임 글로벌 버전에서는 아예 앱내 추가 데이터 다운로드를 기다리는 화면에 트레일러 일부를 삽입해 두기까지 한 것이다.
덕분에 해외 유저들도 자연스럽게 '왠지 비중 있을 것 같은 놈들이 챕터 1이 끝나자마자 몰살당하는 경험'의 매운맛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챕터 1을 플레이한 후 충격받는 영상을 올리는 것이 게임 스트리머들 사이에 한창 유행이라고한다.
검색해 보니 진짜 조회수 몇십, 몇백만 단위 영상까지 나오더라.
[Never play 127 Section… NEVER!]
[MY FIRST TIME PLAYING 127 SECTION. (I hate it)]
썸네일은 헤드셋을 쓴 채 울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눈이 튀어나오게 커진 외국인들이었다.
'정말 난리가 따로 없군.'
어쨌든 그 화제성을 토대로, 127 Section은 스토리성과 UI로 대호평을 받으며 영미권에서 제법 흥행하는 중이다… 라는 게 요약이었다.
'게임 UI나 비주얼이 그쪽 감성일것 같긴 했지.'
작품성과 세계관으로 인정받은 몇몇 유명 인디게임들과 비교되는 모양이었다. 벌써 GOTY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다만 한창 호황인 글로벌 시장과는 다르게, 이걸로 국내 게임 커뮤니티는 난장판이었다.
일단 익명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흠."
이건… 안 되겠군. 선아현이나 배세진이 보면 기절할 거 같은 수위다.
'좀 징그러운데.'
그래서 활기는 떨어지지만 아주 온건한 커뮤니티를 찾아봤다.
제작진에게 건의하는 게시판의 몇몇 글에서 논쟁이 벌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이돌로 하는 홍보 이쯤에서 끝냅시다]
: 광고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요새 흐름이 그러니까요.
그런데 게임에서 실존 연예인을 계속 생각나게 하는 건 다른 경우입니다. 더는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첫 챕터에 그 콜라보 캐릭터들 다 죽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계속 떡밥 나오고, 은근 다시 나올 것처럼 뉘앙스가 상당하던데요.
그래도 최근엔 아이돌 이미지가 좀 지워져서 게임 속 캐릭터로만 보려고 했는데, 또 글로벌 광고로 아이돌이 나오더군요.
양덕들이야 그 아이돌을 잘 모르니 괜찮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글로벌판에서 성공한 걸 보고 또 허튼짓 할까 봐 걱정되네요.
제발 런칭 광고로 끝냅시다.
(해당 아이돌에겐 유감없습니다.)
-맞아요 초기에 즐기고 끝난 거다시 가져오는 일 없었으면 함
-런칭 때야 홍보해야 하니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좀 걱정임 국내 업뎃 주기도 길어지는데… 폐허공장 정신 못 차리나?
-애초에 이게 무슨 씹덕 겜도 아니니까요. 티원이 인수하면서 판 키우려고 무리수 뒀던 거죠.
└씹덕물에 남자 아이돌…?
└여성향 씹덕 겜 의미하는 거였습니다.
└미쳤음? 거기도 싫어함 ㅋㅋ
- 나는 좋았는데ㅠㅠ 트레일러 멋지지 않았나요?
└저도 트레일러 좋았습니다. 테스타 괜찮았는데 너무 과민 반응들 하시는 듯… 새로 콜라보 한다는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지금부터 이렇게 해 놔야 눈치보고 안 들고 올 거 아니에요 분위기 파악합시다
-뭐야 여기 왤케 변함? 원래 갓스타 아니었나
└그거 한 달 만에 끝난 판인데 언제적 이야기를…ㅋㅋ
└음 그땐 그 아이돌 팬분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ㅎㅎ
└이건 좀 악의적인 이야기 같네요. 그땐 그냥 막 런칭해서 다들 신나서 달리느라 그랬던 거예요. 그아이돌분들도 콜라보로 이것저것 많이 홍보해줬고요.
-글로벌도 그 영상으로 광고한 건 강렬하고 좋은 것 같음 돈빨 났음 근데 양덕들 팬아트 보면 아이돌 보여서 좀 역겹긴 함 근데 참을 만함근데 또 하진 마라
"으음."
몇 가지 글과 인기글 흐름을 더보고 나니, 대충 이해했다.
'확 식었군.'
속된 말로 말하자면, 뽕이 다 빠진 것이다.
처음엔, 망할지도 모르는 게임사의 신작에 자본과 인지도가 투입되니 그 맛에 급격히 호의적으로 됐을 것이다. 당장 흥행이 급하니까.
'까보니 진짜 결과물이 좋아서 확 달아올랐을 거고.'
게다가 초기 동료는 다 죽어버리니 그 충격성 덕분에 더 흥분했겠지.
테스타의 홍보로 유입된 테스타의 팬들이 많으니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서 캐릭터는 퇴장했다. 당연히 테스타의 팬들은 계속해야 할 유인을 못 느끼니, 금방 많이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초기 동료 몰살 이야기가 공공연해지고, '흥한 모바일 게임'에 유입된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통상적인 흐름이 다시 잡힌 것이다.
'아이돌 관심 없다 이거지.'
흥미 없고 이질적인 놈들을 내가 좋아하는 게임 컨텐츠 안에 가져다 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게다가 게임사에서는 워낙 초기 동료에 대한 반응이 격렬했다 보니, 업데이트 되는 내용에서도 계속 초기동료 떡밥을 뿌린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 글로벌 판에서도 테스타 광고가 나오니, 또 콜라보가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가갔다.
'그럼 하나뿐이지.'
안 엮이면 된다.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정리했다.
뜬금없이 빌보드에서 그룹 이름 봐서 재밌었던 걸로 끝내자.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로부터 은근한 떠보기가 들어왔다.
"얘들아 혹시 게임 콜라보 한 번…."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 앨범 준비해야죠∼"
"…? 얘들아?"
깔끔한 거부에 매니저는 당황했다.
'이럴 줄 알고 애들 모아놓고 짧게 브리핑도 해놨다.'
-코, 콜라보 재밌었는데….
-하하, 박수칠 때 떠나자는 거구나∼
좀 아쉬워하는 놈도 있었지만, 어쨌든 다들 납득했다. 또 해봤자 피곤해지기만 한다는 점이 크게 심금을 울렸던 것 같다.
아주사 부터 신인상 논란까지, 일단 인터넷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것 자체가 피곤할 만도 했다.
그래서 그룹 결정 이후 최초로 프로젝트 거부 사태가 발발했다.
'그동안 너무 고분고분했나.'
회사는 아쉬워하며 몇 번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테스타가 최근 워낙 성적이 잘 나오는 탓에 그룹의 발언권이 강해져서 무사히 무마되었다.
그리고 새 앨범 준비와 5월의 축제 스케줄을 병행하던 어느 날.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에서 무대요?"
"네! 그리고 요새 뜨는 프로그램이에요 여기! 위튜브 위주로 좀 작긴하지만 시청자층도 확실하고…회사 직원이 흥분해서 이야기하다가, 살짝 헛기침을 했다.
'…눈치를 봐?'
예감이 안 좋았다.
"근데… 음, 그, 게임 콜라보 곡을 불러달라고 하거든요?"
아, 역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3화]
일단 우리끼리 잠시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회사 직원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토의를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
"미국 가고 싶어요!"
"그래. 유진이는 찬성으로 알고 형들 이야기 좀 더 해볼게."
"예아!"
차유진이 온화한 류청우의 말과 함께 토의에서 제외되려던 순간, 큰세진이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유진아, 너 이 쇼 들어봤어?"
"Nerdy Andy Show? 아니요!"
이번에 출연 요청이 들어온 쇼 이름이었다. 널디 앤디 쇼. 그리고 차유진은 정말 이 이름을 모르는 눈치였다.
"최, 최근에 생겨서 유진이도 잘모르는 게 아닐까…?"
"맞아. 요새 뜨는 중이라고 했죠?"
멤버들이 각자 떠들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문대문대, 검색해 보게?"
"응."
"오∼ 봐봐."
누가 보면 주머니에 스마트폰 없는놈인 줄 알겠군.
어쨌든 검색하기 귀찮은지 슬금슬금 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멤버 놈들을 끼고 진행했다.
간단히 번역 프로그램을 돌려가며검색을 해본 결과, 쇼의 정체가 드러났다.
"아, 페이지 뜬다."
당연하지만, 유명한 미국 지상파 간판 토크쇼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소외된 작은 프로그램이냐? 그것도 아니었다.
"오, 신기하네."
"되게 특화된 느낌이다."
유명 토크쇼를 패러디한 형식으로 진행되는 유쾌한 분위기의 방송이었다.
그리고 컨텐츠는… 말하자면, 서브컬처다.
게임이나 코믹스, 슈퍼히어로 영화쪽 위주로 다루는 것 같은데, 회사직원 말대로 위튜브 조회 수가 꽤나왔다.
"유진아, 이거 한번 볼래? 재밌어?"
"뭐예요?"
차유진이 토크쇼 클립이 재생되는내 스마트폰 화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잠깐 화면을 보더니, 작게코웃음을 쳤다.
"…?"
설마 이놈이 문제를 잡아냈나?
"재, 재미없을까…?"
"몰라요. 저 이런 거 안 봐요. So nerdy."
"어, 어어?"
…그냥 취향에 안 맞는 모양이다.
차유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큰세진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근데 너 미국 가려면 여기 나가야하는데∼? 나와서 게임 곡 불러야 돼!"
"나오는 거 괜찮아요. 보는 거 안해요."
거참 프로페셔널한 태도였다.
'문제는 그래서 나갈 거냐는 건데.'
보니까 적당히 화제성도 있고 괜찮은 프로그램 같긴 했다.
하지만 첫 미국 무대로 이걸 나가도 될지 모르겠다.
'게임하고 더 안 엮이고 싶은데 말이지.'
장기적으로는 리스크가 상당하다.
테스타는 케이팝 그룹이고, 케이팝 앨범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나가서 잘해봤자, 괜히 게임 캐릭터 아바타 이미지만 뒤집어쓰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진짜 테스타의 앨범을 들고 해외 진출했을 때, 첫인상과의 괴리감이 상당하겠지.
그건 조롱이나 배신감으로 돌아올 확률도 충분했다.
'영미권 진출에 별 뜻이 없다면야 언플 용으로는 괜찮은 선택이다만….'
어쨌든 미국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이니, 기사용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수용 이미지 떼는 데에 도움이되겠지.'
'우리도 글로벌 진출 짱짱해요'라고 연막을 치는 것이다.
이 경우 게임 커뮤니티 여론도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혹시 게임 이용해서 언플한다고 얘기 나와도 콜라보만 새로 안 하면 금방 가라앉을 테니까.
하지만 멤버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한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커리어적인 기회로 받아들인것이다.
"해볼까? 흔치 않은 기회잖아."
"…나는, 상관없는데."
"저도 도전할 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콜라보 곡이라도 저희 곡을 들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굉장히 발전적이고 신인다운 태도였다. 음.
놀라운 것은, 여기서 선아현이 우려하는 의견을 꺼냈다는 점이다.
"그, 근데 괜찮을까요? 무, 문대가 그때… 콜라보 또 하면 안 좋다고, 했는데… 이건 괜찮을까…?"
마지막은 날 보고 물어본 질문이다.
여기 큰세진도 끼어들었다. 다만, 이놈도 찬성하는 측이었다.
"에이∼ 새로 콜라보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무대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멋지게 해서 좋은 인상 남기는 거지 뭐∼"
저거 첫 인상의 중요성을 모르는 놈이 아닐 텐데, 미국 진출 야망이 리스크를 이겨버린 모양이다.
'모로 가든 인지도부터 챙기자는거군.'
설상가상은, 선아현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다.
"그, 그럴까? 머, 멋진 무대 했으면 좋겠다…!"
내심 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다른 놈들도 동조하며, 의욕 찬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머리를 휘저었다.
"…그래. 나도 좋아."
"오오!"
"단, 최대한 그룹을 보여주는 쪽으로 했으면 하는데."
"그, 그룹을?"
"어."
무슨 포괄적인 말인가 싶었겠지만, 설명 이후에는 모두가 납득했다.
"좋아요!"
"흠∼ 예습 잘해야겠네."
"최근 일정에 여유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들뜬 분위기로 그룹 토의가 끝났다.
그리고 다시 만난 회사 직원에게는 아까 내 발언과 비슷한 의견이 들어갔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일단… 저희 타이틀도 하나는 부를 수 있었으면 하는데요."
"아∼ 아! 물론이죠. 그건 무조건 저희가 상의할 거구요!"
"네. 감사합니다. 무대는 프로그램쪽에서는 선곡 요청만 있고, 나머지는 저희 쪽에서 준비해 가는 게 맞을까요."
"네. 맞아요. 하고 싶으신 컨셉이나 세팅 있으면 최대한 맞춰드릴게요. 시간상 가능한 선에서요!"
"잘됐네요."
시간, 아주 괜찮을 것이다. 나는피식 웃었다.
"저희 밴드 라이브 하려는데요."
"아! 좋죠."
"그리고 의상은 필요 없습니다."
"…? 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얼굴이군. 이제부터 한 번 더 설명이 필요한 타이밍인 것 같다.
테스타의 미국 프로그램 출연 소식은 한 번 정도 연예 뉴스 메인을 찍고 내려갔다.
혹시라도 출연 이후 반응이 안 좋으면 언론 놀이도 힘드니, 그냥 섭외 들어오자마자 소속사에서 냅다 기회를 잡아버린 것이다.
테스타의 5월 대학 축제 직캠들과 선아현 깜짝 생일 파티 영상을 신나게 즐기던 팬들에게도 이 소식은 금방 들어갔다.
-헐 미국 진출?
-해외 이야기 슬슬 나올 때가 되긴 했는데 일본부터 갈 줄… 역시 테스타야 노리는 인구수가 다르지
-아 드디어 차유진 영어 하는 거 원 없이 볼 수 있겠다 캘리보이의 쾌활 섹시 억양ㅠㅠ
-실시간으로 보려면 연차를 내야하는군 오케 그날 식중독 걸릴 예정임
아직 해외 투어로 인한 국내 활동소홀을 걱정하기보단 '이렇게 잘난 내 돌 전 세계가 알아야 함'의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테스타는 워낙 국내에 팬들이 훨씬많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다만, 정확한 프로그램 내용과 섭외 과정이 공개된 뒤에는 살짝 식었다.
-아 게임 콜라보곡 부르는 거였구나… 어쩐지 방송 느낌이 좀 그쪽이긴 했어ㅋㅋ
-저 프로그램에 케이팝 나오는 거 처음이라네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임
-겜 콜라보 의견도 우리 애들이 많이 냈다던데 결실 봐서 좋다
-타이틀곡보다 이쪽이 현지에서 잘 먹힐 것 같기도 함 일단 그 콜라보 곡이 빌보드도 들었음 (캡처)
-근데 이걸로 겜 하는 씹덕 새끼들이 또 발작하면 가만 안 둘 거임 X발 우리 갓기가 천재라서 콜라보 곡도 갓띵곡으로 만든 걸 어쩌라구요ㅎ
마지막은 김래빈의 개인 팬이 분노를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비공개 계정에 눌러쓴 말이었다.
'개X끼들 진짜 빡치네!'
그녀는 쾅 키보드를 내려쳤다.
별 거지 같은 소리를 지껄이던 악성 게임 유저와 개싸움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런칭할 때는 갓스타거리면서 올려치기 오지게 하더니 이제 게임 흥했다고 꼬리 자르기 질이야!'
상황이 변하며 유저층이 그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는 건 분노한 김래빈의 팬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흐지부지됐으면 좋겠다. 하!'
이 게임을 아주 그냥 손절 해버리고 싶었다!
사실 막말로 테스타가 해외에서 잘되는 것도 그녀의 이득과는 거리가멀었다.
'혹시라도 이걸 계기로 잘되면 투어 다니느라 음방도 잘 안 나올 텐데, 어느 쪽이든 나한테는 별로라고!'
…하지만 이래 놓고서, 널디 앤디쇼 의 테스타 출연 당일에는 또 실시간 시청을 위해 대기하는 중이다.
심지어 스마트폰은 화면이 너무 작고 에러가 잦다는 이유로 굳이 데스크탑 앞에 앉기까지 했다.
'후…'
가벼운 현타가 그녀의 어깨를 지배했다.
어쩔 수 없었다. 김래빈과 박문대가 이 같잖은 프로그램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헐, 너 또 걔들 보냐?"
"응, 꺼져."
"응, 너나."
"한 번만 더 너라고 부르면 뒤진다 진짜."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에게 손으로 욕을 날린 뒤 무시했다. 하지만 남동생은 알짱거리며 그녀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거 그거야? 미국에서 겜 곡 부르는 거? 코스프레하고 나옴?"
"야 꺼져라."
"뇌절 오졌다∼ 으악! 억!"
남동생은 등짝을 사정없이 맞고 나서야 도망치듯 소파로 돌아갔다.
127 Section이 워낙 잘된 덕에, 남동생도 그 게임을 제법 깊게 플레이해 봐서 그쪽 소식을 알음알음 알았다.
'벌써 뇌절 소리가 나와? 더 열 받네.'
김래빈의 개인 팬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Welcome to the Show!]
[This is… nerdy!]
[Oh, I mean, Andy∼]
"뭐라는 거야."
굉장히 미국스러운 B급 감성 CG와 자막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또 한참을 영어가 스피커에서 쏟아졌다. 거기에 몇 분마다 들어가는 중간 광고는 덤이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알아볼 수 있는 건 몇몇 슈퍼히어로 영화 캐릭터들뿐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과제나 마저 하고 나중에 편집본이나 볼 걸 그랬다며, 김래빈의 개인팬은 진한 후회를 느꼈다.
그래도 튼 게 아까워서 보고 있자니, 다행히 테스타의 예고가 떴다.
정확히는… 127 Section OST공연에 대한 예고였지만 말이다.
'X발…!'
게임만 실컷 홍보하는 거 아닌가?
싸한 느낌에 그녀는 발을 찼다. 남동생이 킹콩이 어쩌구 하며 개소리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자니, 곧 광고가 끝났다.
그리고 스테이지가 비쳤다.
"…!"
테스타가 나올 그곳에는… 웬 밴드가 가득했다.
'밴드 라이브 하려나 보네.'
그녀는 일단 화면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스타가 스테이지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들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어…?"
아니, 그냥 평상복이라기엔 깔끔했다. 하지만 평소 그들의 아이돌 무대 의상같이 컨셉추얼하지도 않았다.
"어? 코스프레 안 했어?"
남동생의 말대로, 그렇다고 게임 캐릭터의 의상이나 머리 모양도 아니었다.
테스타는 그냥 자연스러웠다. 리얼리티 영상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차유진이 씩 웃으며 스탠딩 마이크를 잡았다.
-What makes peopl live?
CHOICE!
그리고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 트레일러 곡 무대가 시작되었다.
DOOOM DOOOM DOOOMDOOOM ZZZZ-ING!
-I'm gonna survive,
Like you did before
박문대가 고음의 도입부를 대단히 시원스럽게 들어갔다.
테스타는 각자의 스탠딩 마이크를 잡은 채로, 추임새를 넣으며 노래를 불렀다.
"…!"
음원보다… 듣기 좋았다.
남동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노래 좀 하네?"
테스타는 원래 라이브를 잘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요소 없이 딱, 곡만 듣게 하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사실 지금 이 프로그램을 보던 팬중 대다수는 테스타가 어떻게든 이무대에 연출을 넣거나 안무를 넣을거라고 내심 짐작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냥 깔끔하고 시원하게, 곡을 즐길 수 있는 무대였다.
표정을 잘 쓰고 제스처가 어색하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무대를 쭉 끌고 갔다.
-Choose your way
Choose your side
자신감이 느껴졌다.
-Survive!
테스타는 캐릭터 퍼포머가 아닌, 정석적인 가수의 이미지로 게임 콜라보 곡을 훌륭하게 선보였다.
화면의 박수와 환호 소리에 맞춰서남매도 입을 벌렸다.
"와…."
"올∼ 이건 인정함."
김래빈의 팬은 '네가 뭔데 인정하고 말고 지랄이냐'고 대답하는 대신, 끓어오르는 흥분에 책상을 두드렸다.
'하여간 무대는 진짜 잘해!'
완전한 선 긋기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게임의 일부분이 아니라 이 게임 OST를 만든 가수 예요!'
라고 외치는.
그리고 가수로서의 역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선 긋기는 자연스럽고 훌륭하게 통했다.
[Wow∼ That's awesome!]
이 구도는 첫 번째 무대 이후의 작은 토크 분량에서도 드러났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4화]
테스타는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토크쇼의 게스트용 소파에 앉았다.
다만 마이크를 든 것은… 차유진이었다.
'저래도 괜찮아?'
차유진이 제일 영어가 능숙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저절로 걱정부터 들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능숙했다.
[어서 오세요! 제 쇼의 첫인상은 어떤가요?]
[음, 색깔이 넘치고, 쾌활하고, 또 형씨 인상이 참 좋네요∼ 그쪽 노란 넥타이 맘에 들어요. 127 섹션 마크죠!]
[오, 고마워요! 이건 지난 5월 11일, 127 섹션 공식 사이트에서 판매했던 가장 첫 번째 공식 상품이죠. 어렵게 구매했는데, 이 특별한 자리를 위해 처음으로 몸에 대봤답니다.]
남동생이 깐족거렸다.
"알아듣냐?"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냥 대충 듣는 중이다.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다.
'차유진, 영어 하니까 분위기가 다르네.'
훨씬 여유롭고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화면에서는 짧은 스몰 토크가 끝나가고 있었다.
[맞아, 당신 정말로 캘리포니아 사람처럼 보여요!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서핑 좋아할 것 같은데, 맞죠?]
[하하, 샌디에이고에서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어… 그렇다면, 음, 당신은 이런것들이 별로 관심 없을 수도 있겠군요. 옙.]
사회자가 일부러 몸을 움츠리고 사방을 훑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뇨아뇨, 이건 색다르고 재밌는 경험이에요. 그리고 127 섹션은 재밌는 게임이었고요!]
[너그럽게 말하는군요∼ 좋습니다. 그럼 게임 안에서 여러분의 역할에 대해 좀 말해볼까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박문대가 바로 마이크를 들었다.
[사실 저희는 가수고, 대부분이 연기 경험이 없었습니다. 짧지만, 뮤직비디오 안에서 게임 캐릭터를 연기한 건 재밌고 새로웠습니다.]
단정한 영어가 술술 흘러나왔다.
"헐?"
김래빈의 개인 팬… 아니, 이제 박문대의 팬이기도 한 대학생은 거의 모니터를 흔들 뻔했다.
"와 영어 X나 잘하네?"
"그러니까!"
예상 못 한 영어 능력에 흥분한 대학생과 다르게, 화면의 박문대는 침착하게 대화를 계속했다.
[아, 그러면 여러분이 그 동료들이 만들어지는 데에 영감을 준 건 아니군요?]
[그 친구들에게 영감을 받아서 곡을 만들긴 했습니다. 주로 이 친구가요. 이름은 김래빈입니다. 래빈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오∼ …안녕하세요, 래빈? 당신 정말 작곡할 것처럼 생겼네요! 뮤지션의 눈빛이에요!]
[안녕하세요.]
화면의 김래빈이 어색하게 사회자와 인사했다.
'래빈이부터 챙겨주네.'
자세한 문맥까지는 몰라도, 영상과 단어만 들어도 확실했다. 대학생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캐릭터들의 어떤 부분이 영감을 줬나요? 워후! 나쁜 말 아닙니다, 그냥 좋은 질문이에요! 누가 저분께 알려주세요!]
[오우, 저 친구 인상이 좀 강하죠? 그렇지만 눈을 잘 보면, 아주 부드러운 영혼을 가졌다는 걸 알죠!]
[여전히 무서워요!]
차유진이 찐따 컨셉에 심취한 사회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서 김래빈의 눈빛을 변명해 주는 사이, 김래빈의 말은 선아현을 통해 통역되어 나왔다.
[그들의 서사가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하네요. …그건 비극이었지만, 캐릭터의 선량한 의지가 주는 아름다움과 강렬함을… 살리고자 노력했지요.]
프랑스 어투가 묻어났다.
'쟤도 외국어 쓰니까 느낌이 다르네?'
선아현은 최근 공식 석상에서처럼, 외국어를 쓰는 동안도 거의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약간의 머뭇거림도 수줍음 정도로 해석할 정도였다.
[맞아요! 챕터 1을 끝내고 트레일러를 돌려보는 내내 느꼈던 감정이군요! 오, 이제 당신의 영혼이 보여요, 래빈!]
[하하하!]
김래빈은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멀뚱한 얼굴로 갸우뚱거렸다.
"아 귀여워!"
"니 저게 귀여움? X나 삥 뜯을 것처럼 생겼는데."
"닥쳐."
대학생은 남동생을 무시하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럼 혹시 127 섹션의 새 OST는 계획에 없을까요?]
원래 이 질문은 '동료 캐릭터 재출연 계획'에 대한 것이었으나, 앞선 테스타의 답변으로 수정된 것이었다.
박문대는 차분하게, 준비한 답변을 했다.
[저희도 첫 작업을 진행하면서 정말 즐거웠지만, 새 OST가 나와도 저희의 곡은 아닐 것 같습니다.]
[대체 왜죠?!]
차유진이 휙 끼어들었다.
[다른 아티스트 분들은 어떤 OST를 작곡할지 궁금하니까요! 여러분도 그러시죠?]
그 긍정적인 부추김에, 관객석에서 반사적으로 호응이 돌아왔다.
[네네, 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아쉽네요! 'Bonus book'이 정말 좋은 곡이라서요.]
[감사합니다.]
[그거 알아요? 형씨, 뭘 좀 아네요! 취향이 아주 훌륭해요!]
[제가요? 하하하, 그렇죠!]
차유진의 칭찬에 사회자가 웃으며 게임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제야 몇 마디 자기소개와 인사가 오가더니,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아까 본 무대가 정말 근사했는데, 다른 무대도 하나 준비하셨다고요?]
[예. 저희가 평소 하던 음악을 하나 보여드려도 좋을 것 같아서요.]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앤드류 밴드∼]
밴드가 준비 사운드를 내자, 테스타 멤버들은 소파에서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오∼]
"어?"
"야야 키 작아지지 않았냐?"
대학생은 개소리를 지껄이는 남동생을 때릴 여유도 없었다.
그사이, 화면의 테스타는 걸친 가디건이나 재킷도 벗어서 적당히 소파에 두었다. 스탭들이 나와서 빠르게 소파를 치웠다.
그러자 청바지에 흰 반팔 티셔츠를 입은 맨발의 모습으로 착장이 통일되었다.
휘익!
예상 못 한 본격적인 준비에, 관객석에서도 반응하는 소리가 들렸다.
테스타는 답변하던 마이크를 그대로 쥔 채로 쓱쓱 움직이더니, 안무대형을 맞췄다.
조명이 꺼졌다.
Uuuu— Uu— Uuuu—
송출을 만져서 지지직거리는 밴드 사운드 위로, 느릿하고 우울한 피아노가 올라갔다.
그리고 현대무용에 가까운 움직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잠기는
시간을 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간단한 옷차림과 재즈 사운드, 외국어, 그리고 라이브 밴드 사운드 위에서 펼쳐지는 현대무용 안무.
모든 것이 시너지를 주며, 테스타의 무대는 컨셉츄얼보단 예술적으로 보였다.
낯설 거나 이곳에서 거부감을 느낄수 있는 요소들까지 그 안에 묻혀서 '수준 높음'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든 것이다.
게다가, 보고 듣는 재미를 극한으로 연마한 케이팝 장르의 장점은 확실했다. 잘 소화할 수 있는 그룹에게는 더더욱.
그리고 테스타는 그런 그룹이었다.
-널 만났던
자정
그리고 다음
덕분에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 관객석은 '좋은 관람'에 해당하는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사회자도 박수를 보내며 튀어나왔다.
[예술이 따로 없군요! 테스타의 앨범 Time to go의 'Midnight, and next' 였습니다. 여러분∼ 다음코너에서 뵙죠!]
그렇게, '127 섹션'으로 시작한 그들의 출연은 '테스타'로 마무리되었다.
화면은 광고로 변했지만, 무대의 인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찢었다.'
대학생은 왼손으로 책상을 친 뒤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 반응이 여론이 되었다.
미국에 온 김에 여기서 할 수 있는 스케줄이 이것저것 잡혔다. 대충 몇가지를 끝내고 나니, 우리가 출연한 널디 앤디쇼 가 방영된 후였다.
나는 호텔 침대에 누워서, 일단 한국 여론을 살폈다.
일단 '성공적 출연, 뜨거운 반응'같은 상투적인 기사가 몇 개 떴고, 흠….
해외 반응 리뷰하는 인기 위튜브 채널 영상에 테스타가 등장했다.
[(해외반응) 양덕들에게 케이팝 맛을 보여준 테스타! 리액션모음 한글자막]
'반응이 나쁘진 않았나 보지.'
저런 영상이 우후죽순 있는 걸 보니, 일단 현지에서 무작 정 비 웃음을 당하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널디 앤디쇼 에 업로드된 무대 영상을 찾았다.
'조회수가 제법 높아.'
심지어 127 섹션 이가 아닌 쪽도 조회수가 비슷했다. 기대도 안한 일이었다.
두 영상 모두 영문 댓글들 위주로 줄줄 달려 있었지만, 대충 분위기보는 것에는 큰 무리는 없었다.
이번 활동하면서 틈틈이 영어 공부를 좀 해뒀기 때문이다.
'기왕 생긴 특성인데 낭비할 수는없지.'
이걸 의식해서였다.
[특성 : 유학생 (A)]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 외국어 습득 능력 +200%
숙련 속도니까 빨리 익힐수록 다음특성이 나왔을 때 갈아 끼우기 용이했으니까.
물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단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외운 말 어색하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만 익혔다.
'그래도 상상 이상으로 빨랐어.'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이런게 생겼으면 도서관에 반년쯤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댓글을 대충 읽어보았다.
-그들의 확고한 음악적 정체성이 흥미롭다
-케이팝이라고? *정신이 날아감*
-정말 대단한 가수들이야 라이브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어!
-아무래도 이들에게 빠진 것 같아 위튜브 알고리즘이 날 계속 새로운영상으로 이끌어
-대중적 의견 : 테스타는 케이팝계에서 저평가 당했으며 마침내 그들을 발견한 게 너드들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127섹션에 대한 댓글을 제외하면 대충 이 정도 분위기였다.
다만 내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이 프로그램 시청자들에게 '자정, 그리고 다음'이 먹혔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래도 게이 같다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 동네에서 케이팝 볼 때 자주나오는 말 아닌가. 나도 안다.
근데 곡 장르 덕을 좀 본 모양이다.
이 프로 시청자 중에 프로그래머가 많았는데, 이런 로파이 재즈가 그동네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내 코딩용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했어
-그들은 진정한 뮤지션같아 보였어! 폴인 OST도 해줬으면 좋겠는데말이야 (울면서 웃는 이모티콘)
-진정하기 좋은 음악이네. 밤새 코드를 짰는데 버그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을 때 들어야겠어. (공포스러운 이모티콘)
어쨌든, 전체적으로… 대성공이었다.
혹시 몰라 국내 게임 커뮤니티도 확인했는데, 완전히 누그러들었다.
도리어 게임 초기 분위기를 추억팔이 하는 사람들도 몇 명 튀어나왔다.
'선 그어둔 게 유용했군.'
OST 나 캐릭터 관련해서 뇌절할 것 같지도 않고, 콜라보 곡을 라이브로 잘 보여줬기 때문에 호감을 회복한 모양이다.
127섹션 게임 커뮤니티들에게 날을 세우기 직전이었던 테스타 팬들도 확 가라앉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나∼"
"인터넷."
"우리 무대? 좋지∼"
씻고 나온 큰세진이 옆 침대에 털썩 누웠다.
위튜브 업로드용으로 호텔 룸메이트를 무작위로 바꾸면서 이놈이 걸렸기 때문이다.
'의외로 안 거슬리는군.'
좀 귀찮고 시끄럽긴 한데, 생활 패턴이 비슷했다.
큰세진이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우리 다음 앨범은 더 잘 될것 같아?"
"글쎄. 해봐야 알지."
"야, 이럴 때는 다 잘 될 거라고 하는 거야∼"
큰세진은 시원하게 웃더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뭐, 잘될 확률이 높긴 하지.'
널디 앤디쇼 의 동영상이 제법 호평을 받으면서, 해외 케이팝 팬들이 급격히 테스타에 관심을 가지는게 눈에 보였다.
아마 케이팝과 친하지 않은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서일 것이다.
'원래 사람 마음이 그렇지.'
이 기세라면, 다음 앨범 뮤직비디오 뷰를 기대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큰세진에게 말했다.
"나 잔다."
"어, 불 꺼도 돼∼"
나는 조명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다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모니터링을 끝냈으니, 전체적으로 현재 국내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알았다.
테스타가 케이팝 해외 파이를 슬슬 잡아먹기 시작할 때, 국내에서도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한 신인 남자아이돌의 데뷔곡이 음원에서 대박을 맞은 것이다.
바로, 마침내 데뷔에 성공한 골드 1의 그룹이었다.
'오.'
대충 확인해 보니, 데뷔 때 테스타급은 아니었지만 음원차트에서 대단히 선전하고 있었다.
곡이 워낙 좋다는 게 중론이었다.
'기세만 유지하면 성공하겠군.'
골드 1이야 썩 괜찮은 놈이니,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다른쪽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내 상태이상이었다.
청려의 말이 맞으면, 이번에 받을 4번째 상태이상이 내 마지막 미션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흐름으로 보면, 분명 한층 더 높은 기준선을 요구할 것이다.
'…그럼 지금 상태이상을 받는 게 낫나?'
해외에서 오는 반응과 국내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발 주자를 보니 그런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1년 정도가 커리어 하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물론 VTIC처럼 끝없는 성장세로 계속 더 잘나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불확실한 업계 환경에서 그렇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올해는 거의 확실히 잘나갈것 같거든.
'흠.'
일단, 나는 상태창 팝업을 불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5화]
[성공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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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누를 때마다 찝찝한 남의 뒷이야기들이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일단 청려는 더 안 보고 싶군.'
당시에는 도움은 됐다만, 지금 와서는 뭘 캐내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차라리 원래 '박문대'의 사정을 더보는 편이 낫겠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아예 청려와 연락이 끊겼기도 했다.
이번에 그 널디 앤디쇼 출연 반응이 제법 좋으니 여기저기서 안 친한 놈들까지 축하 문자를 보냈었다.
심지어는 최원길한테까지 사과 겸축하 문자가 왔으니까.
-선배님 미국 진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폐를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그 용건만 적힌 문자를 보니, 저절로 전에 받았던 청려의 '미안해요'만 적힌 사과 문자가 떠오르더라고.
그러나 그놈에게 다른 연락은 없었다. 예능에서 만났던 다른 브이틱 멤버 두 놈에게 이모티콘 폭탄을 받았을 뿐이다.
'정서적으로 좋은 일이지.'
앞으로도 서로 손절하는 이 분위기로 갔으면 좋겠다.
나는 머리를 한번 휘젓고, 다시 팝업을 들여다보았다.
'가자.'
뭐가 나오든, 과민반응할 필요는없다.
나는 팝업을 터치했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시야가 암전되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달리는 좌석버스 안이었다.
우우우웅.
사람들이 자리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웃고 있었다.
유독 서로 화목한 분위기나, 노선도가 붙어 있지 않은 벽을 보아 대충 짐작이 갔다.
'대절된 버스군,'
대중교통이 아니라 단체 관광객이라도 태운 것 같았다. 제법 옛날인지 좀 촌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옷도 잘 차려입은 것 같았고.
그리고 그때 알아차렸다.
지난번 경험들과 달리, 누군가의 입장이 아니라 내 자아가 뚜렷했다.
'대체 뭐지.'
약간 혼란스러울 찰나, 왼쪽 창가자리에 앉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린 류청우였다.
"…!"
류청우는 창가에 기댄 채 팔짱을끼고 잠들어 있었다. 어린데도 벌써기골이 잡혀 있었다.
굉장히… 뜬금없었다.
'류청우가 자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
떨떠름하게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섬광처럼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류청우가 했던 발언이다.
-어릴 때 교통사고가 좀 크게 났었는데… 뭘 잘못 건드렸는지 다 크고 나서야 후유증이 생기더라고, 힘을 주면 손이 떨려.
'.…설마.'
X발 아니겠지, 설마.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휙 꺾였다.
순식간에 버스가 휘청거렸다.
"아악!"
비명과 버스 기사의 고함이 교차하는 순간, 왼쪽 유리창이 깨지면서 뭔가가 후두둑 튀었다.
찢겨나온 사이드미러였다.
그리고 그 쇳덩어리가 그대로 류청우의 어깨에 찍혔다.
"…!"
"청우야!"
고함과 비명에 버스가 난장판이 되었다.
'무슨 사이코패스 새끼가 이런 걸 라이브로 보여주려고 하냐?!'
반사적으로 류청우를 당기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내게 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상당히 참혹한 몰골로 쓰러진 류청우를 앰뷸런스가 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분이 착잡했다.
구급 대원들과 승객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고가 '어린이 부상자 한 명'으로 들어와서 지금 운송 차량 규모가 그 정도거든요."
"아, 저희야 괜찮아요! 아프면 병원 가보면 되지."
확실히, 크게 다친 건 류청우 정도였다.
바로 수긍한 구급 대원들은 기절한 류청우와 울부짖는 그의 부모들만 앰뷸런스에 태운 뒤 병원으로 향했다.
남은 승객들은 보험 처리를 위해 대표로 한두 명만 남은 뒤, 택시를 타고 도로를 빠져나가기로 합의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계속 이 시야에 머물러 있었다.
'뭐냐.'
차라리 류청우를 따라간다면 모를까, 왜 여기 남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승객들로 향하는 순간.
"그러면 이렇게 가?"
"그래."
나는… 나는, 생각이 멈췄다.
다신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엄마와 아빠였다.
"먼저 타세요. 저희 다음 거 탈게요."
"아이고 고마워∼"
맞아. 저런 목소리였다.
사진이라도 남은 모습과 달리, 목소리는 한 소절도 남지 않았다.
내 돌 때 찍어둔 비디오도 이사 도중에 분실됐었기 때문에, 기억에만 남은 목소리는 금방 밋밋해졌다.
가끔 잠결에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도 곧 무너졌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의식만 있을 뿐이었기에, 대신 나는 추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친척 모임이었구나.'
이 버스는 아마 풍산 류씨 모임이었나 보다. 박문대의 몸에 들어오기전 나, '류건우'와… 류청우의 성씨말이다.
무슨 가족 여행 따위를 가는 도중에 류청우가 사고가 났던 모양이다.
류청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쪽으로 시야가 가지 않고, 여기 남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부모님이 몇몇 친척과 함께 택시를탔다. 중고등학교 때 일이 년 신세를 졌던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친척 모임 맞네.'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대체 언제지?'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과 한없이 가까운 이때는.
'안 돼.'
조건반사처럼, 섬뜩한 예감이 머리를 두드렸다.
택시는 바로 출발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 괜찮으려나 몰라. 걱정이네."
"그러게요. 다들 놀랐을 텐데, 펜션 도착하면 좀 쉬고 돌아가죠. 모처럼 가족 행사인데, 세상에."
"강원도까지 와서 이렇게 돼서 애엄마 아빠 마음이 어떨지… 휴."
가족 행사. 강원도.
나와서 안 될 키워드가 계속….
"그래도 건우 안 와서 다행이네. 외고 준비한다며, 애가 참 열심히한다∼ 누굴 닮아서 그런다니?"
"엄마 닮은 거죠 뭐. 둘이 머리 좋은 게 아주 똑같아요."
"어휴. 금슬도 좋구만."
"하하!"
웃음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도착했네요."
"좀 누웠다가, 버스든 기차든 잡아서 서울 돌아가죠?"
창밖으로, 펜션이 보였다.
산과 잘 어울리는 운치의 목조 건물이었다.
다 탄 모습만 사진으로 봤던 것같….
'그만.'
하지만 택시의 사람들은 나란히 내려서 짐을 들고 펜션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 남았다.
'그만하라고.'
하지만 시야는 순식간에 돌아갔다.
시간이 감겼다.
그리고 곧, 펜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트드트트드드드득…
안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밖에서 보니, 한낮이라 대단할 것도 없는 밝기였다.
하지만 사람은 저런 걸로도 죽더라.
특히 허가받지 않은 가연성 건축자재로 지은 건물에서는… 말이다.
유독한 연기가 발생해서.
자다가 미처 나오지 못해서.
삐이이이이이익-
두늦은 사이렌 소리가 뇌를 뒤흔들었다.
끝났다.
"허어억."
입에 손을 밀어 넣었다. 그래도 소리가 샜다.
나는 이불을 얼굴에 처넣었다. 드디어 입이 틀어막혔다.
'이게 뭐야.'
모르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가 X발 이런 걸 왜 봐야 하지?
뇌가 이상했다. 생각이 제대로 안돌아갔다.
진정해야 했다. 왜 진정해야 하냐면, 왜냐하면….
'내일 W라이브.'
맞아. 내일 스케줄이 있다. 호텔에서 노는 모습을 적당히 한국 저녁 시간대에 맞추어 송출할 건데, 그러니까….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나?
내가 이 상태로 과연 일을 할 수있… 왜 이딴 걸 고민해야 하지?
"야, 너 왜 그래?"
카메라고 나발이고 내가 X발 왜 이런 걸 봐야 하냐고. 내가 그렇게 인생을 X 같이 살았냐?
"박문대 너 괜찮아? 뭐야."
"말 걸지 마."
"뭐'?"
"말 걸지 말라고 X발…!"
이불 때문에 뭐라고 지껄였는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 걸던 놈은 알아들었나 보다. 말을 더 안 건다.
됐다. 좀 생각을… 생각을….
[돌발!]
상태이상 :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발생!
"X발 진짜."
나는 머리를 침대 협탁에 박았다.
"야!"
"박문대!"
소리가 늘었다. 사람이 늘어난 모양이다.
침대가 푹푹 꺼지더니, 손 몇 개가 어깨를 잡았다.
"…지금 병원 갈래? 너 어디가 아픈데."
"안 아파."
"그럼 왜 그래. …무슨 문제 생겼어? 일단 얘기해 봐. 회사에 말 안할 테니까."
"…."
피곤했다.
이… 설명할 수 없으니, 좀 닥치고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최선인데 그걸 설명해도 비합리적으로들리는 상황이.
"무, 문대야. 이거."
누군가 손에 뭘 쥐여주었다. 잔이다. 그리고… 약인가.
나는 입에 털어 넣고 물을 삼켰다.
그대로 역류할 것 같았지만, 넘어갔다.
"…."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도, 좀… 머리가 식었다.
"…진정제야?"
"…! 지, 진통제랑, 수면제…."
아, 그래. 진정제는 처방 없으면 못 사는군.
그래도 뭘 입에 처넣으니 현실감이 돌아왔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니, 도리어 엉망진창인 머릿속에서 좀 벗어난 느낌이다.
'침착하자.'
나는 기침을 몇 번 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좀, 안 좋은 꿈을 꿔서. 미안하다. 소란 피워서."
"괘, 괜찮아!"
"…좀 진정됐어?"
하지만 긴장한 몇몇 멤버들의 얼굴사이로 류청우가 보이는 순간, 나는 저 새끼 얼굴을 그대로 협탁에 꽂아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안 되겠어.'
아직 내 머리는 맛이 간 상태인게 분명했다.
나는 침대에 도로 누웠다.
"다시 한번, 미안하고…. 약도 먹었으니, 도로 자볼게."
하지만 곧바로 반박당했다.
"…아니, 병원 가."
"뭐?"
배세진의 목소리였다.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매니저 형 부를 테니까, 가서 진단서 끊고 진정제 받아오라고. …할 수 있는데, 안 할 필요 없잖아."
"…."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놀라서 달려온 매니저의 동행하에, 나는 정말 이 미국 한복판에서 응급실을 거쳐서 진정제를 사 왔다.
적당히 불면증 핑계를 대고 받은 진정제는 제법 효과가 괜찮았다. 그날부터 큰 문제 없이 취침했다.
그리고 직후 건강 핑계로 빠진 W라이브 하나를 제외하고는, 스케줄도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그냥 다른 생각 안 하고 하면 되니까.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문제는 두가지가 남았다.
하나는… 상태창을 부르기 더럽게 꺼려진다는 것.
이거야 유예기간이 넉넉하니 당장은 괜찮았다. 다른 한쪽이 훨씬 골칫거리였다.
바로 류청우와 상호작용을 못 해먹겠다는 것이다.
간신히 인사 정도는 하겠는데, 더 들어가면 바로 그 X 같은 '진실 확인'이 생각나서 미치겠다고.
…그런데 하필, 다음 촬영 룸메이트가 류청우였다.
'돌겠네.'
불화설과 정신건강 중 택일하게 생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