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광고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고민이 많은것 같던데."
VTIC 청려였다.
'돌겠네.'
저건 또 여기서 왜 나와.
참고로 회사에서 언질도 못 받았다. 급하게 좋은 광고 잡혔다고 사람을 실어나르는 통에 콘티만 보고 왔거든.
일단 안면 있는 놈이 상대면 대충이라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 안 드나?
'퇴사하고 싶다.'
일할 맛 정말 안 났다.
하지만 티 내봤자 루머 생성기일뿐이다. 그냥 고개나 끄덕이자.
"예. 조언해 주신 덕분에 잘 해결했습니다."
"아, 그래요? 잘됐네."
청려가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오늘 촬영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힘을 더 주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악수는 순식간에 끝났다.
"그럼 잠시 후에 봐요."
"예. 선배님."
안 보고 싶다.
나는 콘티를 떠올리고는, 오묘한 기분이 되어 의상을 갈아입고 촬영을 준비했다.
의상은 최근 유행하는 형태의 트레이닝복이었다. 단, 기업 로고가 달려있었다.
'하필 이런 옷을 입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고.'
일단, 촬영 장소가 풀밭이고, 촬영중 운동량이 많았다.
이런 식이다.
"자, 풉니다!"
감독의 말에 풀밭에 서 있던 나와 청려에게 한 무리의 네발 동물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생후 3개월 된 각종 리트리버와 시골 강아지 무리였다.
"킹!"
콘티에 나온 그대로 이놈 저놈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자니, 내 코까지 뛰어올라서 박치기를 하는 놈까지 나왔다.
'신났군.'
한 놈이 그러니까 연달아 서너 마리가 뛰어오른다. 야, 핥지 마.
양손으로 북실북실한 덩어리들을 집어 들었다.
…귀엽게는 생겼네.
"푸흥!"
이젠 내 얼굴에다 기침을 해댄다.
고쳐 안다가 넘어질 뻔했다.
나는 너덧 마리를 양손에 끼고 침범벅이 된 상황에 정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컷! 아, 그거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망한 내 얼굴을 스탭이 뛰어와서 고쳐줬다. 피차 고생이었다.
"강아지를 더 든든히 확! 잡아 들어주는 느낌으로∼ 방긋 웃어주시고!"
그래. '든든한 느낌' 중요하지.
지금 찍고 있는 게 보험사 광고니까 말이다.
정확히는, 모 대기업 보험사에서 유기견 지원 및 안내견 육성을 진행하는 것을 홍보하는 기업 브랜드 이미지 광고였다.
'보통 이런 건 대중적으로 인지도있는 사람을 쓰는데 말이지.'
그런데 원래 내 자리에 기용하려던 모 배우가 성추행 파문으로 잡혀가면서 대신 나를 쓴 모양이었다.
내가 만든 가수님 에서 막 생긴 장년층 인지도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착하지."
…저놈과의 대외적인 친분이 아예 영향을 안 주진 않았을 것 같다는게 좀… 뒷맛이 찝찝하군.
청려는 촬영이 중지됐는데도 귀신같은 손놀림으로 개 떼를 제압하고 있었다.
발라당 발라당 배 까는 놈들이 눈에 들어오긴 했다. 포토제닉이 따로 없다 이거군.
'하나 찍어두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굳이 들고 오긴 그랬다. 보기 안 좋지.
그 순간, 청려가 입을 열었다.
"강아지 좋아해요?"
"…나쁘지 않죠."
마침 스탭이 자리를 비웠다. 장면만 따고 목소리는 내레이션 삽입이라 부착형 마이크도 없고.
그 말은, 이 새끼가 헛소리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그렇죠? 참 괜찮은 애들이에요. 착하고."
"…."
"다루는 법도 쉽죠. 칭찬할 건 칭찬하고, 야단칠 건 야단치고."
청려는 강아지 이야기만 하면서, 그냥 개를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머리에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그 형 막 유기견 센터에 자기 정산받은 거 절반씩 기부하고 그런다?
설마 진짜였나.
아니, 상관없다.
"선배님께선 개 좋아하시나 봅니다."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촬영 재시작까지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의아하다는 뜻이다.
"좋은 건가? 잘 모르겠네요. 어차피 안 키우는 게 편해서."
이때까지만 해도 강아지가 손이 가서 귀찮다는 건 줄 알았다.
"예전엔 다시 시작할 때마다 개를 길렀는데, 좀 지나니까… 유기 상습범 루머가 퍼지더라고."
"…!"
"나라도 의심했을걸요? 확인해 보니 말할 때마다 전에 길렀던 견종이 달라지던데. 음, 아닌 게 증명되니 조현병 이야기가 나왔던가…. 하하하, 완전히 망했었어요, 그때!"
청려가 소리 내서 웃었다. 등골이 섬뜩했다.
"…같은 강아지가 아니었습니까?"
"네? 하하, 개까지 매번 똑같은 걸 기르기는 좀."
"…."
청려가 웃음을 멈췄다.
"해봤는데, 별로예요. 꼬여서 못 데려오면 괜히 신경 쓰여서 불편하니까."
말문이 막혔다.
이 새끼가… 왜 돌아버렸는지 이해가 가서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제 다시 시작하실 일 없으니, 새로 길러보셔도 될 것 같은데요."
포기하란 뜻이다.
"자신감 넘치네. 혹시… 이번이 마지막 미션인가? 내가 알려준 대로 계산해 보니 그래요?"
"…."
무반응이 상책이다.
그러나 이 새끼가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축하해요. 근데 그걸 믿어요?"
"…!"
"하하, 농담이에요. 내 경험상으로는 맞을 거예요. 이런 일로 거짓말은 안 하거든."
대상 트로피를 저 면상에 뭉개는 상상이 위로가 됐다.
"…흠, 그럼 정말… 끝인가."
놈은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빠지고, 강아지 배에서 손을 뗐다.
'…잠깐.'
설마 '다 끝나기 전에 한 번만 다시 해봐', '끝나면 기회 없다 타이밍은 지금뿐' 같은 소리 하면서 개짓거리 하진 않겠지.
당장 밑밥부터 치자.
"VTIC 선배님들은 현상 유지만 하셔도 지금 겨룰 그룹이 없을 텐데요. 현 상태가 최고 아닙니까."
"뭐… 괜찮죠."
청려는 심드렁했다.
그리고 강아지 뒷덜미를 집어 들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니지만… 음, 뭐… 그렇긴 합니다. 적응해 봐야죠."
"…!"
완곡한 항복 선언이었다.
'됐다 X발.'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혹시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진 않는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청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후배님, 너무 방심은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발 개소리 그만 듣고 싶다.
나는 슬슬 나도 모르게 개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는 맹한 털복숭이가 위로가 되긴 했다.
그리고 다행히, 청려의 다음 말은 개소리가 아니었다.
차가운 이성의 소리였다.
"이 직업군에서 '인기'는 한정된 자원이거든. 즉, 다른 팀이 자원을 잘 벌면, 내 자원이 유출된다는 뜻이죠. 언제나 그랬어요. 특히 국내로 한정 지으면 더더욱 그렇고."
"…."
설마 VTIC과 테스타 비유냐?
하지만 생각도 못 한 이름이 대신 튀어나왔다.
"올해 데뷔한 트레블러 소속 그룹이 좀 잘 되던데. 좀 신경 써둬요."
트레블러, 골드 1의 소속사다.
즉, 저놈이 말하는 건 괜찮은 신인인 골드 1의 그룹을 견제하라는 충고였다.
'…굳이?'
그놈들이 아직 견제할 만한 체급도 아니고, 잘못하면 괜히 서사만 주는꼴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어차피 청려가 아는 기간 이후에 데뷔한 놈들 아닌가. 이놈들의 미래를 청려가 확인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굳이' 저 새끼를 긁을 필요도 없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유념해 두겠습니다."
"말만 그러지 말고, 음… 보니까 곡이 좋더라고요. 그런데 작곡가가 회사 소속이 아니던데요."
청려가 웃었다.
"작곡가를 매수하면 좋은데."
"…!"
"쉽고 편해요. 곡이 별로면 끝이지."
"못 들은 걸로 해두겠습니다."
"칼 같네. 알았어요. 하지만 잊지는 말고."
'이 새끼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
강아지 한 뭉텅이로 애니멀 테라피라도 받는 중인지 술술 말을 꺼낸다.
"다음 신 준비 거의 끝납니다∼ 3분 스탠바이!"
다행히 곧 촬영이 재개된다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이걸로 끝이군.'
이 새끼와 같이 찍는 것도 다음 컷이 마지막이다. 나는 한숨을 참았다.
그리고 촬영이 재시작하기 직전,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주저하는 말투였다.
"…말했던 문제는, 잘 해결됐어요?"
"…."
나는 느리게 입을 뗐다.
"그럭저럭."
"그래요. 뭐… 마음 바뀌거나, 고민생기면 연락해요."
"…알겠습니다."
뭐, 이전보단 덜 섬뜩했다.
"컹! 키잉!"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청려는 스케줄 문제로 먼저 촬영 마치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개털이 묻은 트레이닝복과 똑같이 생긴 트레이닝복을 몇벌 선물로 받아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추가 안무 연습으로 다들 자리를 비웠는지, 일찍 끝낸 한 사람만 숙소에 있었다.
차유진이다.
"왔다."
"선물이요?"
"그래. 가져."
"와우!"
나는 트레이닝복을 하나 받아들고 희희낙락한 차유진을 보고 묘한 기시감에 시달렸다.
'…나보다 저게 개에 더 가깝지 않나?'
내가 적극적으로 채택하긴 했다만, 오묘한 별명의 세계였다.
며칠 뒤, 타이틀 안무가 완전히 숙달되 었다.
"후우, 안무 영상 완료!"
"아 좋아요∼"
좀 이르게 안무 영상 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약간 시간이 남았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마룻바닥에 누워서 휴식을 즐겼다.
"차유진 너 그거 또 입었어?"
"편해요!"
"아, 안무 영상에 그… 로, 로고나와도 괜찮을까…?"
"아, 내가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하셨어. 걱정 마."
"크, 형님 속도 봐∼"
차유진은 내가 광고 촬영 선물로 받아온 트레이닝복을 주야장천 입고 있었다.
'다음엔 저놈이 광고 찍을 판이군.'
나는 피식 웃고 스마트폰을 켰다.
앨범 예약 판매도 시작됐고, 커버 디자인도 공개돼서 반응을 모니터링할 생각이었다.
"무, 문대야. 팩 할래?"
"그래. 고마워."
에어컨이 돌아가긴 했지만, 단체로 과하게 움직여서 더웠다. 나는 선아현이 넘겨준 아이스팩을 목베개 삼은 채로 화면을 넘겼다.
'괜찮네.'
수묵화 컨셉의 흑백과 전통화 컨셉의 컬러로 컨셉을 나눠서 제작한 앨범 커버는 둘 다 호평이었다.
-전통 컨셉 맞나봐 너무 좋아ㅍㅍ
-한복 존버 승리
-포카 기대돼서 미치겠음
처음에 회사에서 '솔로로 7곡이니 7인 7색에 더해서 단체까지 앨범 8종 어떨까요?'라는 미친 소리를 해서 뜯어말리느라 힘들었다.
'안에 앨범 꾸미는 용도의 스티커들이나 랜덤 8종 중 몇 가지로 넣자는 말이 통해서 다행이었지.'
8종이 그대로 통과됐으면 본부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재를 갈겨줬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본부장이 곧 날아간다던가.'
새 앨범부터 예능 무대 제작까지 근래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할 일이 많다 보니 이런 카더라도 많이 듣는 본부장이 곧 나간다는 소문이었다.
'결재봇 있을 때 빨리 진행 시켜놓아야겠군.'
미래가 불투명하니 당길 수 있을때 빨리 당겨 먹어야 한다.
나는 상태이상 해결을 위한 계획을 점검하며, 무심히 모니터링용 검색어들을 바꿨다.
"무, 물 마실래?"
"어… 고맙다."
선아현이 또 뭘 줬다. 나는 약간 떨떠름하게 물을 받아들었다.
고마운데 좀… 빵셔틀 같은 게 생각나서 미안하다.
'모니터링이나 좀 해줄까.'
나는 별생각 없이 SNS에 선아현의 이름을 검색하려 했다.
그러자 인기 검색어가 자동완성되었다.
[선아현 연애]
"…?"
"문대문대 뭐 하…?!"
끼어들던 큰세진이 화면을 보고 굳었다.
그리고 나도 좀 당황했다.
'선아현이?'
예상도 못 한… 연애설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53화]
이 그룹에서 가장 연애설이 안 터질 것 같은 놈을 꼽자면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갈 놈의 검색어 자동완성에 '연애'가 붙었다.
"한번 봐봐."
정신 차린 큰세진이 바로 재촉했다. 나는 '선아현 연애' 검색어를 눌렀다.
제일 먼저 뜬 글은 이거였다.
-선아현 말 더듬는 찐따 인간구실하게 만들어줬더니 여돌한테 눈 돌아갔네 1주년 지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ㅋㅋ 대단하다 정신 차려
아주사 가 한창 과열됐을 때나 물 위에서 봤었던 원초적인 비난에 공유가 붙어 있었다.
'선아현 나랑 연애함' 같은 팬들의 농담이 유행 중인 게 아니라, 진짜 연애설이 어디선가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정리된 글 같은 건 없어?"
"잠깐."
나는 곧바로 연예인 가쉽이 올라오는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2위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선아현 트윈티 다미랑 연애해?]
"트윈티?"
활동도 안 겹쳤던 유명 여자아이돌 그룹이 튀어나왔다.
'연말 프로그램이랑 시상식 외에선 본 적도 없는데.'
선아현이 따로 번호를 물어봤을 거란 상상만 해도 어색했다.
'퍽이나 그럴 배짱이 있겠군.'
나는 떨떠름해 하며 제목을 클릭했다.
선아현이 테스타 계정에 올린 사진들하고 다미 인하트에 올린 사진하고 장소 다 겹치는데?
(비교 이미지)
올린 날짜도 비슷하고 멘트도 유사 최근 둘이 착용한 선글라스, 팔찌,시계 다 겹침
(비교 이미지)
올해 인터뷰에서 갑자기 연상이 이상형이라고 하는 선아현, 연하가 이상형이라고 하는 다미.
그리고 최근 자체 컨텐츠에서 폰잡고 있는 선아현
(짧은 GIF)
계속 실실 웃으면서 오래 뭘 치고있음 누가 봐도 연애 의심 가능한 모습 아닌가?
이미지를 상세하게 분류해서 잘 붙여놓은 글은 그냥 읽어도 그럴싸했지만, 당연히 빈틈이 많았다.
다 짜깁기니까.
'선글라스랑 시계 다 팬 선물일 텐데.'
선아현이 생일날 밤 4시간 동안 개봉하는 통에 배세진이 그만 좀 자자고 성질을 냈었다.
'폰이야 선아현이 워낙 장문으로 보내니 오래 잡고 있는 거고.'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그냥 정황 짜맞추기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그 정황 짜깁기가 워낙 찝찝한 게 몇 가지, 댓글에서 나왔다.
-선아현 저 풍경 사진 올라온 거 전부 테스타 스케줄에 없는 장소임ㅋㅋㅋㅋㅋ혼자 저길 왜 갔을까?
-헐 선아현 단독 광고 찍은 그 화장품 회사 임원이 다미 외삼촌이야… 아 쎄하다
-다른 건 몰라도 SNS는 지들끼리 신호 주고 받는 거 너무 투명한데ㅋㅋㅋㅋㅋ
댓글이든 글이든 추천수 대비 반대수가 절반쯤으로 굉장히 높았지만, 추천수가 어마어마하게 붙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 루머가 그럴싸했다는 뜻이다.
"…."
"…."
큰세진과 나는 잠시 말없이 댓글을 살폈다.
큰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본인한테는 말고. 회사에는 말해두는 게 낫겠는데."
"음, 역시 그렇지? 아현이는 보여주지 말자."
괜히 컴백 앞두고 쓸데없는 생각하게 만들지 말고, 혹시 모르니 이 여자애하고 친분 있는지 정도만 떠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이 암묵적 합의는 바로 다음 순간에 깨졌다.
"뭐, 뭘…?"
"…!"
돌아보니, 선아현이 초코바를 한움큼 들고 있었다.
설마 저놈이 또 뭘 주겠답시고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나, 나 뭐 잘못했어…?"
"아아니∼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우리끼리 장난친 거지∼"
"그, 근데, 회사에 말한다고."
"…."
"…."
결국 선아현은 완곡하게 순화된 현재 연애설 사태를 듣게 되었다.
"아현아, 너 혹시 연애하냐는데?"
"어, 어, 어어?!"
그렇게 안무 연습실에서 대놓고 브리핑을 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놈들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었다.
"…정말 할 일 없는 놈들 많네. 너 진짜 연애해?"
배세진이 불퉁하게 물었다. 선아현이 기겁했다.
"아, 아니요…!"
"그럼 이 여자분 알아?"
"모, 모르는데요…?"
"그럼 혹시 이 사진들은 다 어디서찍으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선아현이 약간 얼굴을 붉혔다.
"사, 상담가는 길에, 가끔 기분이 나면… 기, 길가도 찍고, 그랬어."
"어… 좋네."
"잘했어."
약간 어색한 칭찬이 쏟아졌다.
그래. 자투리 시간을 즐긴 거야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만, 문제는 상황이 사정없이 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충 왜 이렇게 된 건지 그림이 나왔다.
'…저쪽도 같은 곳에서 상담을 받나 보군.'
선아현과 연애설이 돈 여자 아이돌도 그곳에서 상담을 받는 게 정황상 가장 유력했다.
'그쪽도 상담받으러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 찍은 사진이니 붙인 멘트가 비슷했겠지.'
좀 민감한 개인적인 문제라 떠들긴 그렇지만 말이다.
'거기다 하필 단독 광고가 엮여서 이 지경이 됐나.'
사실 '광고주 회사의 이사 조카딸'이라는 건 건너건너 먼 인맥인데, 연결해서 하나로 적어버리니 그럴싸해 보여서 문제였다.
실제로 그런 인맥으로 연애가 시작된 경우가 꽤 있어서 더 그럴 것이다.
"크, 큰일로 번질까…? 오,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죄송하다고… 사과문이나, 해명문이라도…."
"안 번져. 올리지 마."
"아니 진짜도 아닌데 무슨 사과야 아현아∼!"
어차피 이런 증거 없이 정황만 있는 연애설은 대충 SNS나 커뮤니티나 들쑤시다가 흐지부지될 것이다.
변명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확률이 높았다.
'켕기는 것처럼 보이니까.'
게다가 혹시 연애설 상대방과 같은곳에 상담 받으러 다니는 게 밝혀지는 날에는 변명이 먹혔던 것만큼 논란이 뻥튀기되겠지.
모른 척하는 게 정답이다.
'다만 문제는 진짜 믿는 사람도 나올 거라는 점인데.'
정황이 그럴싸해서 '아현이 연애하는 건 맞는 것 같지만 넘어가 주자'는 식의 분위기가 팬덤 물밑을 도는건 별로였다.
그러면 몇몇 사람들한테는 보상심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이런 점도 넘어가 줬는데, 이것도 못 해?'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선아현은 죄책감에 약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타입이다. 그런 의견이 표면으로 튀어나오면 끌려다니기 딱 좋았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 그래도… 거, 걱정하는 분도 계실 것 같아서."
"아현아, 네가 이런 루머에 반응하면 오히려 더 걱정하실 거야."
"그, 그럴까요?"
류청우의 말이 맞다.
선아현이 따로 코멘트 하는 일 없이, 그냥 '헛소리였잖아∼' 하고 털고 넘어갈 수 있으면 제일이다.
'…문제는, 방법이 애매한데.'
당장 다른 멤버들이 선아현과 해당 장소에서 찍은 사진을 대뜸 업로드하면 그야말로 '나 연애설 의식하고있어요'라고 외치는 꼴이지 않은가.
회사에서 시켰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올 것이다.
'차라리 출처를 공격할까.'
하지만 출처가 아무리 더러워도 이런 연애 관련 가십에서는 잘 안 먹힌다. 윤리적 문제는 아니니까.
'흠. 지금 찍어서… 사진 시간을 좀 조작한 뒤에 이것저것 섞어 올리는 게 제일 낫나.'
가끔 일상 사진이 괜찮게 나오면 SNS에 묶어서 올리는데, 거기 섞어서 올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쓱 지나가도 발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안 걸릴 수 있느냐가 문제긴하지만.
나는 좀 신중하게 방법을 고민했다. 기왕이면 깔끔하게 털고 컴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 미안해. 나 때문에…."
"왜 이게 너 때문이야. 그냥 건수잡힌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문대 말이 맞아 아현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류청우에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차하면 사진 조작하지 뭐."
"… 그, 그건…."
"오∼ 맞아. 문대는 안 들키겠다!"
부추기지 마라. 그냥 선아현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니까.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일어나기 전에, 해결의 손길은 다른 곳에서 왔다.
스마트폰을 쓱쓱 넘기던 큰세진이 호들갑을 떤 것이다.
"야야, 댓글에 뭐 떴다."
"뭔데."
나는 큰세진이 내미는 폰 화면의 최신 댓글을 확인했다.
-ㅋㅋㅋ멍청이들아 다미 인하트나 좀 봐라 어휴 낚인 척 지랄들 한다(캡처) 다미 성희롱 글 다 PDF 땄어 응 악플러들 금융 치료 받자∼
첨부된 캡처는, 연애설 루머에 활용된 사진의 장소에서 한 남성과 장난을 치며 찍은 다미의 사진이었다.
-가족 외식 자알생긴 내 동생
이런 코멘트와 함께 말이다.
'날로 먹었다.'
사실상 종결이었다.
연애설을 의식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가족과의 사생활이니 회사 대응이라는 소리 하기 힘들어지니까.
게다가 원본을 확인하니… 메타데이터상 날짜도 일치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가라앉겠어."
그러자 멤버들의 얼굴에서 긴장이 훅 풀렸다.
"하, 됐다."
"다미 선배님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선아현 너는 그 감사를 직접 전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고맙습니다. 가, 같이 고민해 주셔서…."
"별말씀을요!"
"다행이다 아현아."
나는 선아현의 감사에 손을 흔들며, 큰세진의 스마트폰 화면에 뜬 두 사람의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음, 어디서 본 얼굴인데.'
마침 큰세진이 알은 척했다.
"아, 얘 걔네. 리본 통닭?"
"어."
아, 그놈이 맞네.
사진에 찍힌 다미의 남동생은 나와 내가 만든 가수님 결승전에서 붙었던 놈이었다.
골드 1 그룹의 멤버 말이다.
이름은… 기억 안 난다. 솔직히 노래 실력이 그리 인상적이었던 것 같지도 않고.
'결승까지 온 것도 운빨이었지.'
다만 청려의 충고가 생각나긴 했다.
-그 그룹이 잘되던데. 좀 신경 써둬요.
"…흠."
곡부터 이런 사소한 화제성까지 은근히… 이놈들 운이 좋은 것 같긴 한데.
나는 적정선의 결론을 내렸다.
'얘네 작곡가와 컨택은 해두자.'
다짜고짜 매수는 너무 갔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뜬금없는 차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왜 연애 안 돼요?"
"어?"
일동이 굳었다.
"너… 연애하고 싶어!?"
"네! 형 연애 싫어요?"
"아, 아니… 어."
배세진이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하긴, 굳이 연애하기 싫은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아마 차유진의 말도 비슷한 맥락인것 같았다.
'특정 누가 좋다는 게 아니라, 기회 오면 연애하고 싶다는 거겠지.'
물론 기획사에서 트레이닝 경험 있는 만큼, 저놈도 현실은 알고 있었다.
"안 된다 알아요! 근데 이유 몰라요…."
"음…."
굉장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주제였다.
사실 연애 자체의 문제보다는, '연애를 안 한다'는 게 보통 상태로 정착된 직업군에서 연애를 티 내면서하면 '난 아이돌 활동보다 연애가 하고 싶어'라는 시그널로 해석된다는 게 문제…
"패, 팬들이 안 좋아해!"
"…!"
저놈이 웬일이냐.
선아현은 시뻘게진 얼굴로 다시 외쳤다.
"너, 너를 남자 친구라고 생각하는 팬들이 있어…!"
"왜요?"
"어, 어…."
큰세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잘생겨서∼!"
"아하!"
차유진은 모든 게 명확해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 해요!"
"…."
저걸… 저렇게 비약해도 되나 싶긴한데.
'나도 모르겠다.'
먹혔으니 됐지.
그날 차유진은 SNS에 '저는 여러분의 남자 친구인가요?'라고 글을 올렸다.
본인이 알아서 본인의 연애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이번 테스타 앨범의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되었다.
다만, 길이가 무려 8분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54화]
테스타의 이번 앨범은 당연히 팬들의 넘치는 기대를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몇몇 팬들의 우려도 받고 있었다.
멤버별 솔로곡 예고 때문이었다.
-아 무슨 벌써 솔로곡이야 줄 세우기 어쩔건데ㅠㅠ
-어그로들이 ㅌㅅㅌ 순위 재정렬 이지랄할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스트레스 오져
-어떻게든 을팬 만들려고 난리더니 왜 갑자기 노선 탈주해
물론 솔로곡의 음원 성적이 멤버들의 지명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 앨범으로 발매되어 그룹명으로 같이 노출되기 때문에, 결국 곡의 대중성에서 순위가 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바이벌 그룹 특성상 '테스타 멤버 별 음원 성적'이라는 실시간 중계가 예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약간의 우려가 부푼 기대 속에서 자라고 있을 때, 테스타의 티저가 공지되었다.
위튜브의 최초공개 기능을 이용한 동영상 사전 예고였다.
하루 뒤에 해당 동영상이 공개된다는 뜻이다.
[테스타(TeSTAR) '행차(present)' Official Teaser]
'어두운 숲속, 나무에 꽂힌 화살'이라는 별 힌트 없는 썸네일이 함께떴다.
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사극풍은 맞는 것 같은데
-일부러 이러나
-화살?ㅋㅋ
하지만 사람들이 영상 정보를 확인하자 상황은 일변했다.
영상의 길이가 무려 8분 12초였으니까.
-티저라며! 티저라며!
-예고편을 8분 때리는 그룹이 있다?
-얘들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미친 너무 궁금해
-잘못 뜬 거 아닌가 무슨 티저가 8분;
KPOP 뮤직비디오 티저는 1분 이내로 짧은 것이 보통이었다. 8분은 이례적으로 길었다.
물론 길다고 크게 치명적일 일은 없었다. 어차피 이제 티저는 홍보 목적보다는 팬들의 기대감을 채워주는 역할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적을 신경 쓰는 팬 중에는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티저니까 가뜩이나 팬이 아니면 보는 사람도 적을 텐데 길이가 8분이나 되니 조회수가 줄어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마침 미국 프로그램 출연이 호조가 되며 해외 케이팝 팬덤 유입이 기대되는 상황이었기에, 확실한 지표를 빨리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아무리 티저 조회수가 자료로 잘 안 쓰여도 그렇지… 짧은 게 나을텐데ㅠ
-차라리 나눠서 여러 개로 공개하는 게 나았을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제발 T1 갬성 신파 노잼 스토리 뮤비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
-이쯤 헛발질할 때가 됐다고 생각은 하는데 아니었으면 좋겠다 돈 센스 있게 썼길
물론 컴백 직전에 초 칠 일은 일어나면 안 됐기 때문에, 팬들은 공개된 커뮤니티나 SNS 등지에서는 무조건 긍정적인 말로 분위기를 밀었다.
-8분이라니 너무 좋다 티저부터 애들 얼굴 길게 볼 수 있겠네ㅠㅠ
-혹시 우리 배햄찌 연기 볼 수 있나? 으아아악 너무 기대됨
-24시간 어케 기다리냐
-최초 공개 기다렸다가 30초로 끝나면 진짜 미칠 것 같을 듯 8분이나 주다니 역시 테스타 대혜자그룹
제발 이 기대감이 티저가 나오자마자 식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팬들은 티저 공개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 당일.
티저 동영상의 실시간 채팅에서 최초공개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사이좋게 경악했다.
-?
-뭐야
팬들의 추측대로, 티저는 매우 본격적인 사극풍이 맞았다.
다만 멤버들이 맡은 역할은 사람이아니었다.
영상은 거대한 대궐로 시작해 빨려들 듯이 그 안으로 들어가더니, 모서리를 돌고 돌아 장지문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서적이 가득한 서고였다.
그중 예스럽고 낡은 서적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펼쳐져 있는 것을 화면이 쫓았다.
그 안에는, 바닷가에 솟은 팔 하나가 수묵화로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그 순간, 영상은 실제 바닷가로 화면을 바꾸었다.
파르륵.
화면은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들어가더니, 물 아래 거대한 바위에 누운 인영을 비추었다.
인영은 흰 도포 느슨히 걸친 금발의 선아현이었다.
햇살이 푸른 바닷물을 뚫고 바위위 하얀 얼굴에 일렁였다. 아름답지만 괴이한 풍경이었다.
하단에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하얀자막이 떴다.
[숨소리]
공개된 트랙 리스트에 있던 곡명이었다.
그리고 아릿한 가야금 소리와 함께, 선아현의 솔로곡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선아현이 몸을 일으켜서 물속에서 천천히 무용을 시작했다.
곡에서 정해진 안무가 아닌, 그냥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머리카락과 도포가 물속에서 유려한 선을 그렸다.
-와ㅠㅠㅠ
-진짜 잘생겼다
-수중 촬영 미쳤나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선아현 솔로곡이 인트로구나!'
하지만 아름다운 수중 공연이 끝나자마자, 카메라는 물거품 속 선아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바닷속에서 치솟았다.
그리고 모래사장 위에 자개로 그려진 기묘한 원형 무늬로 접근했다.
저녁놀이 지는 어둑어둑한 때, 무늬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인영이 몸을 펴고 일어났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차유진이었다.
그 볼과 쇄골, 손등에 기묘한 글씨체의 옛 한글이 오색 자개 빛으로 무늬처럼 빛났다.
티디딩, 팅팅, 티딩!
꽹과리 소리와 함께 강렬한 비트의 새 곡이 시작되었다.
[장단]
차유진의 솔로곡이었다.
-어?
-오졌다
-헐 설마
-미친 차유진ㅠㅠㅠ
차유진의 퍼포먼스에 대한 반응과 현 상황에 대한 강력한 추측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실시간 댓글창이 폭주했다.
그리고 이들의 추측은 맞았다.
이런 식으로, 모든 멤버들의 솔로곡이 이어서 소개된 것이다.
차유진의 다음으로는 눈을 가린 배세진이 고목 위에 걸터앉은 채, 발라드 멜로디의 곡을 불렀다. 은은한 편종 소리가 가미되어 있었다.
그리고 숲속 동굴 안으로 들어간 영상의 시야는 초롱 불빛을 네온처럼 쓰는 김래빈을 비추었다.
김래빈의 솔로곡은 생황 소리를 메인으로 삼은 퓨처 베이스였다.
그 후, 동굴에서 빠져나온 카메라는 숲 한 편의 낡은 초가로 향했다.
이상야릇한 색색의 천이 어울리지 않게 초가의 다 썩은 장지문을 휘감고 있는 가운데.
박문대가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미 익숙한 '꽃 그믐'의 소금 소리가 울렸다.
-혼례복! 미친 감사합ㄴ다ㅠㅠ
-역시 문대는 얼굴을 봐야
마지막으로 영상은 초가와 대조되는 화려한 대궐로 돌아왔다.
그 한복판에서 이세진이 거대한 꼬리 같은 허리 장신구를 단 채 북소리에 맞춰서 묘기 같은 춤을 췄다.
경쾌한 이지리스닝 곡이었다.
당연히 팬들은 행복해했다.
-야 곡 다 좋잖아
-ㅠㅠㅠㅠㅠㅠ
-헤메코 굿
-영상미 맙소사
-아 앨범 얼른 받고 싶다ㅠㅠ
-제발 풀영상
-내 인생 가장 알찬 8분
하지만 이세진의 춤이 끝나고, 그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려 궁궐로 사라지자 화면이 꺼졌다.
-?
-청우 어딨어
-타이틀 안 보여줘?ㅋㅋ
-이거 티저는 맞음?
멤버 하나는 나오지도 않았고, 정작 타이틀곡은 보여주지도 않나 싶어서 당황한 팬들은 다시 켜진 화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트래픽 오류인가
-아 다행
-최초공개 이래서 문제라고ㅠㅠ
하지만 화면은 다시 바닷속 선아현을 비추었다. 솔로곡에 쓰였던 가야금 소리와 함께.
-엥
-또?
-반복 오류 맞네
오류가 아니었다.
화면의 선아현은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 사라졌고, 다음으로 모래사장의 차유진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컷으로 바뀌었다.
그다음은 배세진이었다.
하지만 인물이 바뀔 때도, 배경에 깔리던 국악기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계속 쌓였다.
-어?
멤버들은 솔로곡 비트 멜로디에 국악기를 하나씩 잡아넣었다.
그 국악기들이 하나하나 사이드로 조화롭게 들어가며 새로운 비트 멜로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화면이 이세진을 비추자, 이제 북소리까지 들리며 곡이 뼈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안을 현대적인 악기들이 채우는순간.
갑자기 곡이 멈췄다.
그리고 돌아간 화면에서는… 손이등장했다.
[….]
크고 단단한 손이 바닥에 떨어진 서적을 주워 들었다. 맨 처음 등장했던, 이상한 수묵화가 그려진 서적이었다.
카메라에 서적의 등이 잡혔다.
[요괴 답사록]
"출두하시렵니까?"
손을 타고 올라간 카메라가 팔의 주인을 잡았다.
철릭을 걸친 류청우였다.
-개잘생겼어
-아악 청우야
댓글창에서 뭐라고 부르짖던 간에, 영상 속 류청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적을 털어서 챙겼다.
그리고 또렷한 눈으로 화면 밖의 누군가에게 대답했다.
"그래야지."
돌아서 서고를 나가는 류청우의 뒷모습을 잡으며, 멜로디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담장 밖까지 걸어 나온 류청우는 자신의 등 뒤에 걸린 활을 꺼내어 숲속을 겨누었다.
검게 옻칠 된 국궁이었다.
[지금, 나타나셨다
경고 또 경고
팔자로 접근하는
느릿한 짜릿한]
화살이 파공음과 함께 날아가, 거대한 대나무에 깊게 꽂혔다.
[나.]
영상은 나무에 꽂힌 화살을 비추며 끝났다.
썸네일이 었다.
-미친미친
-와
-방금 타이틀임?
-으아아아
-다른 멤버들은 요괴고 청우가 잡는 거예요?
-사랑해 테스타ㅠㅠ
-아 솔로곡 다 연결되는 거 미쳤냐고!1
멤버들의 솔로곡들이 연결되며 타이틀곡을 구성했다. 그리고 영상을 통해 뮤직비디오의 스토리를 암시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티저의 의미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앨범 내 유기적 완성도를 생각했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성이었다.
이점은 티저 동영상의 '더 보기'란에 굳이 추가한 정보에서 더 확실히 드러났다.
앨범 전곡의 작사.작곡.편곡 저작권자 목록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무슨 곡마다 애들 이름이 있냐
-다 같이 만들었구나ㅠㅠ
비록 순서는 뒤쪽이었지만, 곡마다 다양한 멤버들의 이름이 보였다. 자신의 솔로곡이 아닌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굳이 티저 영상에서부터 이 모든 것을 연결하여 보여줬다는 것에서 확실한 의사 표명이 느껴졌다.
'앨범 곡들은 그룹으로 만든 작업물이에요'라는.
후일 직캠 조회수로 줄 세우기가 나올 수는 있어도, 앨범 내 음원으로는 멤버별 성적 비교를 방어할 논리를 선 제시해 줬다는 뜻이다.
-애들 진짜 그룹에 너무 진심이다
-우리 디너쇼할 때까지 같이 가는거야 테스타 디너쇼 볼 거라구ㅠㅠ
-그래 뮤비 조회수가 중요하지 티저야 우리만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고맙다 얘들아 8분 알찼다
멤버를 두루두루 좋아하는 테스타그룹 팬들이나, 과격하지 않은 개인팬들은 대부분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류청우의 팬들은 오묘한 반응이었다.
티저 마지막을 보면 류청우가 타이틀곡의 센터는 맞는 것 같은데, 정작 솔로곡을 소개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청우 솔로곡만 영상 없어?
-코어 없다는 염불도 빡치는데 홀대도 기상천외ㅋㅋㅋ
-항의하면 센터 먹고 겨우 티저로 왜 지랄이냐고 ㅊㅇㅈ빠들이 지랄하겠지? ㅋㅋㅋ환멸
-분량 항의도 못 하게 분위기 잡아놓은 게 더 싫어
'아직 컴백 뚜껑 열어보기도 전에 오버한다'와 '티저에 아예 곡이 안나왔는데 당연히 기분 나쁘지'가 은근한 싸움을 주고 받았다.
다행히 그게 캡처되어 여기저기에 '테스타 팬덤에서 논란 중인 화제'로 전시되기 전, 테스타 SNS에 글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러뷰어. 티저는 재밌으셨나요?
이번 활동에서 제 역할이 크다는 격려를 작업하는 내내 들어서 좀 긴장됩니다만, 앨범 기대해 주셨으면합니다.
아, 저는 류청우입니다. (웃는 이모티콘)
'류청우 분량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뉘앙스가 담긴 글이었다.
"이 정도면 될까?"
"예."
"음, 좀 건방진 것 같기도 한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하하, 알았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류청우는 웃으며 스마트폰을 껐다.
반응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며 컨텐츠가 풀리면 수그러들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타이밍에 한 번 안심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권유해 봤다.
'이건 이걸로 됐고.'
나는 류청우의 팬 여론이 '일단 기다려 보자'로 합의된 것을 확인한 뒤, 아까 보던 기사들을 다시 불러왔다.
'이게 더 걸리지.'
바로 골드 1이 포함된 그 그룹에 관한 기사였다.
[대형 신인 골든에이지, 컴백 초읽기]
[아주사 출신 골든에이지, 테스타 만나나?]
[파란의 8월 가요계… 테스타부터 골든에이지까지]
한마디로, 이 그룹 컴백이 하필 테스타 활동기와 겹친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사들이다.
당연히 보자마자 떠오른 구도가 있었다.
'우리 데뷔 때.'
부동의 탑티어 브이틱과 동발했던 테스타의 데뷔 말이다.
정확히 이 구도가 생각나게 하는동시 활동이었다.
'어쭈.'
나는 혀를 찼다. 이제 확실히 감이왔다.
이 새끼들 소속사가 일을 잘하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55화]
골드 1의 소속사에서 무슨 생각을하는지는 뻔했다.
'어차피 1위 못 할 거 임팩트 있게 못 하겠다는 거군.'
어차피 저 그룹은 지금 아무리 좋은 곡을 들고 와도 1위는 힘들었다.
데뷔곡으로 눈도장을 괜찮게 찍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돌 관심 있는 층 사이에서 흥했다는 말이다.
대형 3사 출신도 아닌 남자 아이돌. 대중 인지도가 낮은 상태.
이놈들 곡은 들을 시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그러니 프레임 한번 짜볼 만하지.'
이놈들은 테스타랑 어떻게든 엮기만 해도 이득이었다.
같은 아주사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브이틱-테스타의 동시 활동당시 구도와 유사하다는 식의 언론 플레이로 테스타의 라이벌 도전자 구도를 잡으려고 기를 쓸 것이다.
테스타의 팬들에게 눈총 좀 받고 견제 좀 받더라도 던져볼 만한 수다.
테스타를 어떻게든 긁어보려는 놈들도 많은 만큼 역으로 옹호도 받을테니 말이다.
물론 까보니 영 별로면 비웃음으로 끝나겠지만.
'…곡에 자신이 좀 있나 본데.'
최원길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소속사 솜씨가 일품이었다.
내 소속사도 좀 윗대가리가 빠릿빠릿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택도 없는 기대니 결재봇이라도 앉혀둔 현재에 감사하자.
지이이잉.
그때, 스마트폰 화면 위로 팝업이 뜨며 진동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골드 1의 메시지였다.
[얘들아 우리 활동 겹친다!]
[흠흠, 음악방송에서 뵙겠습니다 선배님들.]
"…."
애는… 괜찮은 놈인데 말이지.
아마 돌아가는 상황을 어렴풋이 눈치챘어도 이 일로 테스타에게 어떤피해가 올 것이라고 까지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좀 고맙고 민망한 정도겠지.
'어차피 무시할 수도 없고.'
지금 테스타가 골드 1보다 사회적 위치가 너무 우위였다.
테스타 멤버 중 누군가 골드 1에게 불편한 티를 내는 순간 저 소속사에서 신나서는 허겁지겁 '급 나눠서 사람 팽하는' 이미지를 붙여줄 것 같다.
'뭐, 이번 활동만 넘어가는 걸로 할까.'
어차피 이 시즌 지나면 또 다른 적당한 그룹 붙잡아서 이기는 그림으로 갈 것이다. 급을 끌어올린 후엔 승리의 맛을 보여줘야 서사가 예쁘니까.
게다가 솔직히… 테스타의 이번 앨범에 자신이 있었다.
'잘 만들었어.'
단순히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 활동으로서의 매력이 충분하게 작업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당장 공개된 티저 반응도 예상대로 극히 좋았으니까.
'커리어 하이일 것 같다.'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적당히 단체 메시지방에 올라온 골드 1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며 이번 활동의 성적을 점쳤다.
그리고 며칠 뒤.
첫 음악방송 사전 녹화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기실에서 희소식을 전해들었다.
"85만 장이요?"
"그래! 너희 대박 났다!"
전 앨범 초동을 나흘째에 이미 넘긴 것이다.
대충 경향성에 기대서 앞으로의 판매량을 환산하자면… 초동이 100만을 넘길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었다.
'1티어다.'
이젠 정말 국내 남자아이돌 그룹중 네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급이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멤버는 큰세진 정도인 것 같았지만, 나머지 놈들도 충분히 기뻐했다.
"세상에…."
"과감히 추측하자면 해외 판매량이 증가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컨셉이 대단히 전통적인 만큼 기존 케이팝 선호 층에 어필을…."
앨범 멋있어요! 그래서 그래요!"
좀 흥분해서 집단적 독백상태가 되었지만, 곧 화이팅하자는 쪽으로 흘러 갔다.
"우리, 컴백 무대 멋지게 소화해서 왜 우리 앨범이 많이 나가는지 보여드리자."
"오오오!"
"탁월한 말씀이십니다∼"
"머, 멋진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의욕이 넘치는군. 무대 녹화를 앞둔 지금 나오기 괜찮은 분위기였다.
"아! 테스타 오늘 뭔가 보여준다!"
"가자!"
'거의 공식 구호가 됐는데.'
빈도가 늘어나다 보니 슬슬 민망하지도 않은 구호도 한번 외쳐주고 녹화 현장으로 올라갔다.
와아아아아아!
친숙한 함성이 들렸다.
아주 오랜만처럼 느껴지는, 음악방송 사전 녹화였다.
'이번 앨범 심상치 않아.'
박문대의 홈마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그러기 힘들었다. 지표가 너무 좋았다…!
'해외 물량 왜 이래!'
즐거운 비명이었다.
그리고 지표는 단지 앨범 판매량뿐만이 아니었다.
테스타가 미국 토크쇼를 통해 해외 케이팝 커뮤니티에서 제법 화제가 된 이후, 박문대 홈마의 SNS 팔로워 수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러다가 이번 컴백 후에는 아예 박문대의 사진에 붙는 공유 숫자 자체가 거의 두 배 수준으로 늘었다.
위튜브의 각종 테스타 영업 컨텐츠에도 유저에 의해 영어 자막이 붙거나, 영어로 만들어진 팬들의 유머 동영상 조회수가 껑충 뛰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확 늘었다고…
천만 뷰를 26시간 만에 넘겼다.
아직 국내 동일 체급의 1군 남자아이돌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무적이었다.
심지어 입소문이 붙었는지 조회수 증가 속도가 아직도 상당했다. 덩달아 티저 조회수도 증가 중이다.
'그럴 것 같았어.'
이번 앨범 타이틀곡, '행차'의 뮤직비디오를 떠올린 홈마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 최고야.'
박문대가 아니라 류청우가 뮤직비디오 극의 중심인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뮤직비디오 자체가 너무잘 나왔다.
'류청우 이번에 꽤 치고 올라오겠는데?'
이젠 개인 간 순위를 비교할 필요가 없지만, 홈마는 버릇처럼 그런생각을 하면서 응원을 준비했다.
'곧 올라온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응원봉에는 앨범 커버 무늬가 프린트된 길쭉한 끈이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앨범 예약 특전으로 끼워줬던 응원봉 꾸미기 파츠용 미니 댕기였다.
응원봉이 순 마법봉 같이 생겼다보니, 응원하면서 곡과 통일감을 좀주려고 생각해 낸 장신구인 것 같았다. 아주 예뻤다.
'이런 건 귀엽고 좋지!'
하지만 적당히 만족스러워하던 홈마의 생각은 테스타가 무대로 올라오는 순간 사라졌다.
테스타는 옷고름이나 패턴에서 적당한 한복 요소를 가져온 정장 스타일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목이나 목, 귀걸이에 천 장신구가 묶여 있었다.
바로 팬들이 응원봉에 매단 것과 똑같은 댕기였다.
"으아아아아!"
'코디 누구냐!'
정말 감사했다.
다행히 시간 여유가 있는지 아니면 아직 촬영 준비가 덜 되었는지, 바로 무대로 돌입하는 대신 가벼운 인사멘트가 나왔다.
[여러분, 뮤직비디오 괜찮았….]
"어어어어!"
"네!"
"완전 좋아!"
[하하, 그래요!]
[저희 가장 좋았던 부분 아주 짧게 하나씩 이야기해 볼까요? 자, 말 꺼낸 우리 청우 형님부터∼!]
무대로 올라온 테스타는 적당히 토크를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새 1년 지났다고 데뷔 초와 비교해서 훨씬 능숙해진 모습이었다.
'귀엽다 진짜…'
홈마는 훈훈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시선은 박문대에게서 때지 못했다.
박문대는 뮤직비디오에서 이미 나왔던 대로, 머리 스타일이 변해 있었다.
예습한 덕분에 과한 비명을 참았다.
'흑발 너무 오랜만이야…'
홈마는 아주사 제작발표회 당시의 아련한 첫 기억에 취했다.
박문대는 평소에 하던 것보다 제법 긴 흑발이었다. 장발까지는 아니었으나, 앞머리를 슬쩍 양옆으로 넘길수 있을 정도로 길어진 게 은근한 고전미를 살렸다.
'훌륭하다…!'
홈마는 온갖 주접을 입 안으로 삼키며, 손을 흔들어주는 박문대에게 응원봉을 마주 흔들었다.
[여러분, 문대 이 흑발이 엄청난 고심 끝에∼ 나온 거라니까요?]
[솔직한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좋아!"
"너무 좋다고!"
홈마는 더 참지 못하고 열심히 소리를 질렀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티벳 여우 같은 무심한 얼굴로 물어보던 문대가 그 반응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최고!'
이 맛에 공방을 온다며 홈마가 광광 울었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무대 말이다.
[저희 들어가나요?]
[넵.]
스탭과 신호를 주고받은 테스타는 손 인사를 끝으로 얼른 자리를 잡았다.
멤버들은 반원 형태로 모인 채, 양팔을 늘어뜨린 자세로 웅크렸다.
[….]
소나무와 검고 붉은 천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 위에서, 무대가 시작되었다.
탕타당, 탕탕탕, 타다당-
꽹과리와 북으로 시작한 반주는 변형된 전통 악기 소리와 함께, 지극히 현대적인 구조로 노래를 시작했다.
트랩 힙합이었다.
그 순간, 바닥에서 다리를 펼치며 안무가 펼쳐졌다.
네발짐승이 움직이는 것 같은 안무였다.
그 묘한 움직임과 함께 삼각형 대형을 잡는 순간, 전주가 끝나고 차유진이 튀어나왔다.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도록
오늘 납신다 행차, 하신다
기록에 작대기 하나 더 긋도록
지금 납신다 행차, 하신다
리드미컬하고 그루브한, 상징적인 케이팝 아이돌의 댄스곡 맛을 극한으로 살린 곡이었다.
다만 국악기를 써서 소리가 독특한 탓에 아주 희한한 맛이 더해졌다.
-소리 없이 다가서는
포식자, 날카로운 Claw
이 밤을 할퀴는
추격자, 확신한 대로
중간중간 들어가는 확실한 보컬 멜로디들이 듣기 좋았다. 일부러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랩과 대비되어 곡곡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무슨 파트를 하든 안무가 쉴 틈이 없었다.
'저거 수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선아현의 파트에서 다 같이 바닥에 누웠다 반동으로 일어나는 파트를 보며, 홈마가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곧 잊어버렸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조차 아까웠기 때문이다.
-세상을 삼키고
뜨겁게 녹이지
혀끝을 울리는 소리
화살표 모양으로 돌아온 대형의 중심에 류청우가 섰다.
코러스와 함께, 박자가 확 느릿해졌다. 그리고 위압감 있는 정적인 안무가 분위기를 눌렀다.
-지금, 나타나셨다
경고 또 경고
팔자로 접근하는
느릿한 짜릿한
- 나
드랍과 함께, 반주가 터졌다.
-마침내 찾아온 날
행차
끝내 여기서 오늘
(never get away from me ye)
박문대의 고음과 김래빈의 낮은 랩이 겹쳐서 지나갔다.
-고개를 숙여도 도망칠 수 없어
잘 봐 지금
전율이 따라와
사이드의 이세진이 전면으로 나오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댄스 브레이크가 펼쳐졌다.
-행차
캐치한 비트 멜로디를 아낌없이 밀어 넣은 덕분에, 간간이 단어 하나만 뱉는 댄스 브레이크 구간에서도 곡이 귀에 잘 붙었다.
하지만 그보다 화려한 댄스 브레이크가 시선을 잡았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자세를 바꾸는 것처럼 대형을 움직이는 안무가 달려가는 듯한 소금과 가야금 소리에 맞춰 묘한 느낌을 주었다.
'미쳤다.'
뮤직비디오에서 안무가 중간중간 나오는 것만 봤었기 때문에,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쭉 보는 경험은 모든 팬이 처음이었다.
박력이 엄청났다.
심지어 후반에 들어가자 성대 묘기까지 들어갔다.
-강하게
더 크게
도래하는 나의 발걸음
브릿지의 박문대가 초고음을 지르자마자 이어서 곧장 마지막 댄스 브레이크가 들어갔던 것이다.
-행차
'문대 숨은 쉬는 거야?!'
설마 여기까지 라이브로 할 줄은 몰랐던 홈마는 감격과 걱정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걸 앞으로 계속 라이브로 할 수있는 건지 걱정이 될 수준이었다.
'왜 이쪽이 사녹인지 알겠다!'
서브곡이 아니라 타이틀을 녹화한 이유를 깨달았다고 생각한 홈마는 입을 벌리고 무대를 보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폭발적인 댄스 브레이크가 끝나는순간, 마치 되감아 빨려드는 것처럼 안무가 정리되며 대형이 잡혔다.
네발짐승 같았던 도입과 달리, 각잡힌 분대 같은 엔딩이었다.
가운데 선 류청우가 태평소 소리에 맞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무대는 끝났다.
'개좋아!'
"우아아아아아!"
이렇게 대놓고 퍼포먼스 곡을 단독으로 타이틀로 한 건 테스타 데뷔 이후 처음이었다. 팬들은 흥분해서 아낌없이 환호를 보냈다.
[후우… 감사합니다!]
'아쉽다'며 한 번 더 진행한 녹화에서도 흐트러짐은 없었다.
특히 워낙 체력이 좋은 류청우가 후렴 도입과 엔딩을 맡아서인지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왜 센터 줬는지 알겠다.'
문대 분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홈마는 악감정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있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아침 식사를 충분히 드시길 바랍니다!]
세 번의 촬영 끝에, 테스타는 녹화를 마치고 나갔다.
초반에 지체되어서 그런지 다음 팀을 위해 빠르게 나가주느라 엔딩 멘트 시간은 따로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무대가 너무 좋았으니까!
'아 느낌 좋다!'
이대로 쭉쭉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홈마는 나오면서 간식으로 받은 약과를 입에 넣었다.
꿀맛이었다!
우리 문대의 앞길도 꿀만 빨았으면!
느낌이 왔다.
'꿀 빨긴 글렀다.'
'어떤지 느낌 좀 알려달라'며 골드 1이 보낸 본인 그룹의 타이틀곡 후렴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이거, 생각보다 곡이 너무 좋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56화]
좋은 곡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증폭되는 '잡아채는 귀' 특성을 가진 이후 선곡에서 실패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데, 골드 1이 자기들 이번 타이틀이라고 보낸 이곡 후렴은… 정말 좋았다.
완성도나 예술적 측면에서 말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한 번 척 듣기에도 머리에 남는 곡이라는 뜻이다.
극단적인 대중성이었다.
'망할.'
물론 여전히 테스타가 성적에서 밀릴 가능성은 없다.
다만 헛소리하는 놈들이 나올 것 같다는 게 문제다.
'지금은 그걸 용납해 줄 수 있는상황이 아니지.'
일단… 테스타의 이번 앨범인 '착호갑사(提W甲士)'의 현재 분위기는이렇다.
우선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평론 사이트의 평론가 평점이 별 네 개.
올해 나온 아이돌 신보 중에 첫별 네 개였다.
균형의 미학.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달라야 한다. 뭄바톤의 장단 부터 신스팝의 숨소리 까지 다양한 요리를 국악기라는 재료로 엮어, 타이틀 행차 에 방점을 찍어 정찬으로 승화했다.
싱글과 미니로 점철된 근래의 경향성 속에서 반년 이하의 텀으로 연속정규 앨범을 시도한 과감함은 짜임새 있는 근거를 갖추었다.
…
후반에 덧붙인 '만듦새가 강박적이고 타이틀의 구조가 전형적이다'라는 게 비평의 전부였다.
상상 이상으로 평론가가 호평한 것이다. 당연히 그룹 위상에 도움이된다.
게다가 해외 반응도 뚜렷했다.
뮤직비디오 조회수와 앨범 판매량, 그리고 글로벌 음원 사이트 등지에서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니 해외 러브콜부터 들어왔다.
당장 준메이저급 영어권 토크쇼와 일본 아침 방송에서 퍼포먼스 일정까지 잡아둔 상태다.
심지어 극도의 퍼포먼스 곡이라 이지리스닝과 거리가 먼데도 국내 음원 성적까지 좋았다.
'지금 4위였지.'
회사에서 얻어듣기로는 공식 팬덤 가입자 유입이 지난 앨범보다도 가속화 중이라는데,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지표를 정리하자면, 이번 활동은 상업성과 작품성을 다 잡아서 탑티어 안정권으로 날아오를 절호의 기회였다.
한마디로 미친 전성기 시작의 문을막 열어젖히려는 참이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골드 1 그룹, 그러니까 골든에이지가 동발해서 테스타를 물고 늘어지는데, 심지어 더럽게 좋은 곡을 들고 나왔다고 생각해 봐라.
'분명'곡은 골든에이지가 더 좋은데 테스타가 팬빨로 이겼네' 같은소리 나온다.'
한마디로, 팬과 대중의 인식에서 뽕이 빠진다는 말이다.
테스타가 막 얻으려던 '전 방면에서 잘나가는 대세 그룹'이라는 이미지 평판이 '팬덤 큰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 축소될 위험성이 벌써 보였다.
탑티어 진입이 목전인데 여기서 발목 잡히는 건 사양하고 싶다.
'투어를 대규모로 돌아야 한다고.'
상태이상 돌연사를 피하려면 이 다음 컴백까지 테스타의 기세가 빠지면 안 됐다.
'여론이 계속 테스타 이번 앨범을 고평가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고민하다가, 금방 결론을 내놨다.
'답은 국뽕이다.'
테스타가 국내 대중과 가진 공통 분모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줘야겠다.
너무 인위적이고 과해서 거부감이 들지 않은 정도로만.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뒤늦게 골드 1의 메시지에 답장했다. 이미 여럿이 답을 올린 후였다.
[듣기 편하고 좋은 곡입니다. 축하드려요 형.]
혹시라도 저 회사에서 이상하게 써먹지 못하도록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보냈다.
골드 1은 그냥 고마워했다.
[하일준(형) : ㅠㅠ고맙다 얘들아!]
[하일준(형) : 하 반응 좋아야 할텐데… 열심히 해봐야지]
골드 1은 좀 불안한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농담과 함께 대화를 끝냈다.
[하일준(형) : 다음 주에 음방에서만나면 CD에 싸인 좀 해줄래…? 동생이 날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한두 시간 뒤, 다시 단체 메시지 방이 울렸다.
[하일준(형) : 얘들아 진짜 면목 없는데 혹시 너희가 곡 칭찬했다고 이번 주에 인터뷰나 이런 데서 말해도 될까?]
[하일준(형) : 아니 자꾸 싸움 붙이려고 질문해서 무서움]
[하일준(형) : 아 갓스타랑 우리 체급 차이가 얼만데 자꾸 그러니까 살 떨려… 살려줘.]
어쭈.
'그건 안 되지.'
본인은 진심일지 몰라도 저 회사에서 어떻게 써먹을지는 알 수 없다.
'경쟁자인 테스타도 인정한 골든에이지의 이번 신곡' 같은 소리로 언플하기 딱 좋지 않은가.
나는 다른 놈들이 답장하기 전에 빠르게 메시지를 쳤다.
[괜찮을까요? 형 그거 혹시라도 아주사 인맥으로 타 그룹에 타이틀 유출했다는 식으로 갈까 봐 걱정되는데요.]
그러자 직후 개인 톡이 도착했다.
[큰세진 : ㅎㅎ굿]
역시 일부러 답장 안 하고 있었나.
그리고 큰세진이 맞장구치며 분위기 잡을 필요도 없이, 기겁한 골드 1의 답문이 바로 돌아왔다.
[하일준(형) : 헐 그럴 수도 있겠다; 고맙다 문대야 이놈의 회사가 정신이 나가서 날 팔아넘길 뻔]
'회사가 조언한 게 맞았군.'
역시 보통 새끼들이 아니었다.
골드 1은 애초에 체급 차이가 워낙 나니 테스타에 대한 견제 심리는 아예 가지지도 못하는 것 같다만, 회사를 신뢰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부럽네.'
정말 이 동네랑 비교된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요청해야겠어.'
그냥… 뭐든 일일이 확인하는 게 회사에 뒤통수 안 맞는 길이었다.
박문대가 골든에이지의 타이틀곡을 확인한 그다음 주.
한 대형 위튜브 채널에 리액션 영상이 올라왔다.
독특한 상황을 연출해서 재밌는 리액션을 뽑아내기로 유명한 채널이라 최근 연예인 출연이 잦았긴 했다.
하지만 이 분야의 사람들이 출연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최신 KPOP을 본 국악인들 (feat.테스타) I NAYA]
바로 한국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출연이었다.
영상은 각 출연진당 하나씩 촬영되어, 컷을 연결해 편집되었다.
[안녕하세요. 국악성악가 백주빈입니다.]
[작년에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했었어요.]
[가장 최근에 공연한 건… 처용무?]
영상은 짧게 자료를 곁들여서 예술가들의 행적을 소개한 다음, 간단한 문답으로 시작했다.
[NAYA : 혹시 KPOP 들으세요?]
[유명한 건 대충 알아요.]
[아뇨.]
[네. 좋아해요.]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지만, 영상에서 강조하는 평은 이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평소에 하는 음악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
그러자 채널 제작진들은 노트북을 열어서, 국악인들에게 한 뮤직비디오를 시청하게 했다.
정확하게는, 티저였다.
[NAYA : 지금 실시간 인기 동영상 순위에 있는 KPOP 뮤직비디오를 하나 소개해 드릴 거예요.]
[음… 그냥 보면 되나요?]
[일, 십, 백, 천… 이거 단위가 천만이네, 와.]
[3, 2, 1, 저 누릅니다.]
달칵.
곧 작은 화면으로 해당 영상이 함께 송출되었다.
바로 테스타의 이번 신곡 티저였다.
[어, 이거?]
그리고 국악인들은… 선아현의 솔로곡이 나올 때부터 웃기 시작했다.
[이래서 보여주셨구나!]
[가야금이네요.]
물론 메인 악기를 제외한 요소는 지극히 KPOP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국악인들은 꽤 재밌어했다.
[되게 영리하게 잘 썼다.]
[약간… 동작에도 그런 걸 섞었네요. 태평무에서 쓰는 팔 동작이 있어요.]
[와, 진짜 잘생기셨어! 저런 분이우리 쪽(?)에 왔어야 하는데.]
하지만 바로 다음으로 차유진의 솔로곡이 이어지자, 반응이 약간 더강해졌다.
[끝이 아니었네요?]
[오, 이분도 되게 멋있다! 꽹과리가 굉장히 잘 어울려요!]
[…잠깐, 이거 영상 길이가… 잠시만요.]
[NAYA : 계속 봐주세요. (웃음)]
국악인들은 이어지는 테스타 각 멤버들의 솔로곡 1절을 전부 감상하게 되었다.
자본이 흘러넘치는 영상미와 함께.
[오….]
처음에 그냥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자 시작한 반응은 영상에 점점 몰입하며 강해졌다.
특히, 각 솔로곡의 국악기들이 쌓이며 타이틀을 만드는 순간에는 가장 격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와!]
[아 이게 다 일부구나!]
[대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악기들이 원래 쓰이는 곳이 달라서 다 같이 쓰이는 경우는 아마 없을 텐데… 오 굉장히 신선해요.]
[NAYA : 이 친구들이 직접 곡을 만들면서 낸 의견이라고 해요.]
[대단하다 진짜!]
그리고 류청우가 등장하는 순간, 결국 스토리에까지 몰입하게 되었다.
[요괴예요? 아까 책에 요괴….]
[음∼ 알겠다. 보세요. 일단 이 친구는 구미호야.]
[그래요? …아, 그럼 혹시 맨 앞에 그 친구가 처용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
그러자 채널 제작진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NAYA : 직접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
그리고 화면 밖에서 테스타 멤버들이 등장했다.
[박문대 : 안녕하세요. 테스타의 박문대 입니다.]
[차유진 : 안녕하십니까! 저는 차유진입니다. 테스타예요!]
[엄마야!]
테스타 멤버들은 영상마다 각자 하나 혹은 둘씩 나타나서 국악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경악한 국악인들과 재밌고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
[아, 영상 너무 재밌게 잘 봤어요!]
[완전… 천재 같았어요. 짱.]
[실물이 더 잘생기셨다.]
[저, 혹시… 정말 눈이 좀 불편하신….]
[배세진 : ? 아, 아닙니다….저는, 그, 아역배우 출신….]
[아아아! 어떡해, 죄송해요! 눈 가리신 게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서로 당황해서 나오는 날것의 반응들이 주는 친근감과 웃김이 길게 흘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약간 감동적이고 진지한 이야기로 살짝 기울었다.
[사실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저희가 대중과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거든요. 이렇게 멋진 퓨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문대 : 저희야말로 덕분에 국악기가 이렇게 멋진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서로 힘내죠!]
[차유진 : 좋아요! Let's hug!]
그리고 여운이 너무 무겁지 않게, 살짝 개그를 곁들여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차유진 : 근데 저 사실 미국 사람이에요! 깽까리 좋아요!]
[?]
국악인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조, 좋네…. 외국인도 좋아하고(?)]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영상은 업로드 되자마자 빠르게 수십.수백만뷰를 얻으며 국내 인기 동영상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건 비단 이 동영상만이아니었다.
테스타는 안무 영상 전문 위튜브 채널에서 아예 본격적으로 한복을 입고 무대를 하는가 하면, 공중파 예능 예고에서는 각자 맡은 국악기를 치며 등장하기도 했다.
적당히 컨텐츠에 어울리고 과하지 않을 수준에서 이번 앨범의 어필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테스타가 우리나라 국악을알려요'라는 뉘앙스의 밑밥을 열심히 깔아둔 뒤.
소속사는 테스타의 해외 스케줄 기사를 포털 메인에 펑펑 터트리기 시작했다.
골드 1 그룹의 첫 주 활동이 간신히 시작할 무렵에 투하된 폭탄이었다.
작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정도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그룹' 같은 무시무시한 자리엔 앉지도 못했다.
VTIC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테스타의 이번 활동 첫 해외 스케줄 촬영.
원래라면 각종 점검으로 바쁠 백스테이지가 다급함과 걱정으로 난장판이었다.
"김래빈!"
"괜찮아?"
"모, 모르겠…."
얼굴이 허옇게 질린 김래빈이 자신의 오른발에 손을 뻗었다가, 황급히 떼어 냈다. 통증이 심한 게 분명했다.
"래빈아 발 만지지 마."
"키트 있어요?"
"좀 볼게요!"
스탭들이 황급히 신발을 벗겨 조심스럽게 상태를 확인했다.
피가 흐르는 발등이 눈에 띄게 부어 있었다.
'망할.'
혀를 씹을 뻔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57화]
김래빈이 부상을 당한 건 무대 리허설 후 두 번째 녹화였다.
선아현 파트의 고난이도 단체 동작을 수행하던 중, 가장 가장자리에 누워서 일어나려 발을 뻗다가 구조물에 찍힌 것이다.
생각보다 무대가 좁았던 것이 사태의 원인이었다.
'…고지해 줬던 것보다도 작았어.'
아무리 이런 영미권 토크쇼 사이드에 준비된 무대 세트가 여럿이 군무를 추기엔 크기가 작다고 해도, 우리도 거기에 맞춰서 안무 동선을 줄여왔단 말이다.
'김래빈 동선이 튀어 나간 것도 아니야.'
즉, 이 새끼들이 뭘 잘못 알려준덕에 애 발이 작살났다는 뜻이다.
'X발.'
아니, 작살이라고 단정 짓지 말자.
타박상 때문에 피가 나서 그렇지, 생각보다 큰 상처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래빈 씨, 발 움직일 수 있어요? 움직이지는 말고, 느낌만!"
"…할 수는 있는데, 아픕, 아픕니다…."
"지혈부터 할게요!"
김래빈은 응급조치 후에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도 간단하게 상황만 정리한 후 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다시 무대 녹화를 진행할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첫 번째 녹화로 방영분이 반강제 픽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결론이 브리핑되었다.
"2주요?"
"그것도 최소한이에요. 춤은 당연히 안 되고, 보호대 차고 가만히 있을 때 한정으로요."
"…."
김래빈의 병실에서 나온 회사 직원은 통역사를 끼고 바쁘게 설명했다.
진단명은 인대 손상. 그리고 금 간뼈와 찢어진 피부.
'…최악은 피했다.'
골절이나 파열까지 갔으면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게 몇 달 단위로 뛰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금 행차 안무같이 격한 건, 한달은 경과 보고 다시 이야기해 봐야할 것 같다는데…."
막 활동이 한창일 참에, 김래빈이 이번 활동 내내 안무를 못 한다는것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에 가장 중점을 둔 곡에 딱 맞는 악재였다.
'이놈의 미국에 무슨 마라도 꼈나.'
지난번부터 돌아가면서 병원 신세를 지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류청우는 조심스럽게 회사 사람에게 물었다.
"후유증 이야기는 혹시 없었나요?"
"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후우."
류청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다른 놈들도 간신히 안도한 표정이다. 심지어 차유진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래, 래빈이, 지금 들어가서 봐도 괜찮을까요…?"
"네네. 지금 의사분 나가셨어요."
병원까지 따라왔는데 얼굴도 안 보고 바로 이동하기도 웃긴 일이었다.
우리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래빈아?"
김래빈은 좀 얼빠진 얼굴로 병상에 앉아있었다. 다친 발은 위로 고정된 채였다.
김래빈이 이쪽을 돌아보자마자, 큰세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래빈아, 발 통증은 괜찮아?"
"예. 근데, 저 무대는…."
"걱정 안 해도 괜찮겠는데? 지금 이야기하고 왔는데, 너 2주만 참으면 무대 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 큰일 아니야∼"
그러나 큰세진의 말에도 김래빈은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이놈이 대인관계 눈치가 없는 거지, 일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김래빈은 울먹거리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이, 이 주나 빠지면…."
"야, 무슨 소리야∼ 2주 금방 가! 우리 이미 컴백 무대도 했는데 뭐가 걱정이야?"
"세진이 말이 맞아 래빈아. 애초에 네 잘못도 아니잖아. 몸 회복하는 것만 신경 써. 알겠지?"
"…예."
크흥. 김래빈이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탁자의 티슈를 뽑아서 건넸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다른 생각 말고 쉬고 있어!"
"쉬어, 바보!"
김래빈은 어차피 미국 스케줄 중에 혼자 호텔에 있느니, 케어 받을 수 있도록 병원에 이틀쯤 묵기로 했다.
멤버들은 떵떵 큰소리를 치며 김래빈의 병실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이야기가 현실로 돌아왔다.
"래빈이 파트 나눠야겠죠?"
"그래야지."
류청우은 팔짱을 끼고 쓴웃음을 지었다.
"동선부터 새로 익혀야겠네."
"어차피 시차 때문에 잠도 안 오는데, 해보는 거죠 뭐∼"
"…."
배세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것 같았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발 다친 놈 두고 안무 연습 늘었다고 불평하긴 미안했나보다. 아주사 때와 비교하자면 장족의 발전이다.
'서로 피곤하게 됐어.'
김래빈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나머지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게 생겼다.
솔직히 심정적으로는 이 토크쇼의 무성의한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현지든 한국이든 어디 언론에라도 흘리고 싶다.
괘씸하니까.
'하지만 함부로 그럴 수도 없지.'
영미권 토크쇼에 게임 콜라보 같은소리 싹 빼고 출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잡음은 최대한 피하는게 맞았다.
그래도 빡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민폐란 말인가.
'더 떠야 하나.'
해외 토크쇼 출연 보이콧이 타격이 되려면 얼마나 더 떠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는 게 문제긴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잡생각을 지웠다.
'연습이나 하자.'
남의 나라까지 와서 또 연습 지옥에 빠지게 생겼다.
테스타가 부상 이슈로 퍼포먼스를 재정비하던 이때.
한국에서는 기어코 골든에이지, 박문대가 골드 1이라고 부르는 하일준의 그룹의 신곡이 슬금슬금 아이돌판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후렴 듣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이런 게 나중에 숨은 명곡 취급받으면 안 되지 가자ㅋㅋㅋ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음 수능금지곡까지 초읽기 들어감 (장소: 내머릿속)
재밌는 것은, 이 소위 말하는 KPOP 리스너 네티즌들이 골든에이지의 신곡을 밀어주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골든에이지가 아직 확실히 자리 잡지 못한 약자에, 최원길과 골드 1 덕분에 고생을 많이 한 이미지가 붙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곡이 워낙 좋으니, 적당히 성적을 올려주는 것이 일종의 정의구현 같아서 재미를 느꼈다.
물론 대부분 흥미본위의 말뿐인 이야기였으나, 골든에이지의 소속사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위튜브 프로모션과 각종 SNS 바이럴을 짜 맞추었다.
그리고 대중 노출도를 높이는 이 작업은 어색하지 않은 선에서 센스있게 진행되어, 결국 성공했다.
[골든에이지 Hi Goody 챌린지]
짧은 동영상을 올리는 모 플랫폼에서 해당 곡을 이용한 간단한 율동이 흐름을 탄 것이다.
덕분에 골든에이지의 음원은 빠른속도로 음원 순위를 역주행했다.
-미친 지금 26위
-대박
-더 흥해라 ㅊㅋㅊㅋ∼
-여기저기 바이럴 꾸역꾸역하더니 역주행 언플 성공했네 축하해∼
└열폭 오졌다리
└그 팬인 듯
게다가 보통 때라면 이 여론을 견제했을 테스타의 팬덤 쪽은 다소 아수라장이 었다.
-김래빈 발 어떡해 X발 안무 수정 안 하고 밀어붙인 회사 죽어 제발
-해외 무대 앞두고 하필ㅠㅠ 너무 아쉽고 걱정도 되고 오전 내내 넋부랑자로 지냄
-래빈이 우리 아기토끼 지금도 자책하고 있을까 봐 걱정이야 우리 걱정은 말고 발 낫는 것만 신경 썼으면 ㅠㅠ
#래빈아_건강해
-그분도 안 다쳤는데 눈깔 혼자 다친 거 좀 웃기지 않냐 혹시 연애하느라 정신 팔렸나 합리적 의심되는 부분
-김 래빈 파트 그냥 차유진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아? 왜 굳이 래퍼도 아닌 이세진까지 나눠줬는지 모를…
김래빈의 부상 소식 때문이었다.
테스타의 팬들은 부상에 대한 걱정과 완전체를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아쉬움, 그리고 몇몇 어그로가 소용돌이 치는 것을 신경 쓰기 바빴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선 골든에이지견 제가 꼭 필요한 사항도 아니었다.
어차피 골든에이지의 한발 늦은 음원 역주행은 신인 남자 아이돌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음원차트의 최상위권 진입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적 색채를 내세운 테스타의 이번 앨범은 엄청난 호평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테스타의 팬들은 단지 '곡은 골든에이지가 더 좋지 않냐'는 식으로 살살 긁으려고 드는 놈들이 가끔 출몰하는 게 짜증 났을 뿐이다.
어느 방면으로 보나 급의 차이는 누가 봐도 분명했다.
다만, 2주간 활동이 중단된 채로 병실과 호텔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누군가에게는 이 상황이 상당한 의미로 다가왔다.
"깁스 탈출 축하∼"
"래빈이 고생했다."
"아닙니다. 폐를 끼쳐 죄송할 뿐입니다."
전보다 가벼워진 발 보호대를 한 김래빈이 씩씩하게 말하며 고개를숙였다. 안무 없이 무대 복귀를 의사에게 겨우 허락 받은 참이었다.
"에이, 폐는 아닌데∼ 너 돌아온다니까 든든하긴 하지!"
"마, 맞아!"
"감사합니다."
멤버들은 적당히 김래빈을 다독여주고, 자신들의 호텔 룸으로 흩어졌다. 얼른 자고 일어나서 다시 김래빈이 포함된 동선으로 무대를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너 이 방이야."
"예!"
김래빈이 진료를 받으러 다녀오는 동안 임의로 나눴다.
'어차피 오래 묵을 방도 아니고.'
일본 스케줄은 길지 않았다. 나는 김래빈이 들어올 때까지 방문을 잡아준 뒤 씻으러 들어갔다.
"먼저 샤워 좀."
"예!"
요 며칠 쉬었다고 군기가 바짝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그러자 잔뜩 긴장한 김래빈과 눈이마주쳤다.
"…?"
무슨 폭탄 발언이라도 할 기세다.
'설마 부상이 덧나기라도 했나.'
여기서 안무 공백이 더 길어진다는 달갑잖은 소리가 나올까 봐 나도 침묵하고 있자니, 드디어 김래빈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형."
"왜."
"혹시 형이 들으시기에도… 골든에이지 분들의 이번 신곡이 제가 작업한 곡들보다 더 다수의 취향에 맞는 명곡입니까?"
"….?"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화제냐.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 김래빈이 눈을 꾹 감고 줄줄 말을 읊었다.
"현재 퍼포먼스에 대한 제 기여도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인데 혹시 음원 측면에서도 제 개입이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작곡 및 편곡 활동을 자제…."
"잠깐, 잠깐. 무슨 소리야."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흐르길래 끊었다.
'앨범 잘 내놓고 무슨 헛소리냐고.'
물론 자체 프로듀싱 멤버가 양날의 검이긴 했다. 잘하면 시너지지만, 못하면 내부갈등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음원성적이 나쁜 건 프로듀싱 멤버의 아집과 능력없음 때문이다' 같은 프레임은 만들기 쉽지 않은가.
'하지만 김래빈은 지금까지 실패한적이 없어.'
골든에이지가 1위 후보쯤으로 대단히 치고 나온 것도 아니고, 김래빈의 폼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웬 뜬금없는 소리냔 말이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음원에 대한 반응을 모니터링하던 도중에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우연히 골든에이지분들의 신곡 동영상을 보았습니다만, 그곳에서 다량의 추천을 받은 댓글이…."
"줘봐. 보게."
"예?"
나는 김래빈에게 해당 동영상 주소를 받아서 확인했다.
[골든에이지 -Hi Goody-댓글모음]
'…댓글 반응 동영상이었군.'
무대영상과 함께 관련 베스트 댓글을 모아서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이런 건 애초에 곡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라면, 긍정적이고 재밌는 댓글만 찾아서 보여준다.
당연히 골든에이지의 곡에 대한 칭찬만 가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금 제일 강한 놈하고 비교하는 것도 부지기수아니겠는가.
-테스타 보려고 음방 틀었다가 정신 차리니 하이구디구디 거리고 있었음
-시끄럽고 가오잡는 남돌 곡안듣는데 하이갓디는 듣는다 올해 최고의 곡
영상에 나온 댓글이 아니라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더 원색적인 수준의 비교도 나왔다.
'솔직히 곡은 골든에이지가 더 듣기 좋았는데'라는 게, 이 동영상만 보면 마치 대세 여론인 것처럼 보일지경이었다.
"흠."
나는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뗐다. 김래빈이 중얼거렸다.
"…그런 연유로, 객관적이며 냉정한 평가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나 원 참.
'자책감 때문인가.'
김래빈은 원래 어지간해선 본인 능력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부류는 아니었다.
아마 발을 다쳐서 본인이 무대에 설 수 없으니, 다른 쪽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심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자꾸 동발한 놈들 곡이랑 자기가 만든 타이틀곡을 비교하는 소리를 찾아보게 되고, 결국 저런 생각까지 든 거겠지.
"…."
나는 김래빈의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말을 골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