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일단 김래빈이 추천 많이 받은 댓글을 들고 왔으니, 이쪽도 수치가 나오는 지표로 말해줘 볼까.
"네 말대로 객관적으로 보자. 지금 '행차'가 저 곡보다 음원 순위가 더높지. 이거야말로 객관적이고 냉정한 대중평가 아닌가."
하지만 김래빈은 속지 않았다.
"그건 인지도 차이에서 발생하는 표본 차이의 문제 같습니다. 사적인 감정 없이 실제 두 곡을 모두 들어본 후 이루어지는 평가가 필요합니다…!"
"…."
그래서 기어코 내 평을 들어야겠다는 말이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내가 듣기에는 '행차'가 더 좋은 곡이야."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쪽 곡이 더 대중적인 건맞아."
"…!"
"듣기 쉽고 편한 곡이지."
김래빈은 무릎에 올려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나는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목적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래. 우린 애초에 퍼포먼스를 최우선으로 두고 곡을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괜히 비교 안 해도 된다는 뜻이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완벽한 곡은 없어. 객관적인 비교도 힘들고. 시기와 취향… 운의 문제도 있잖아."
"…예."
김래빈은 여전히 주눅이 든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찝찝하냐?"
"예? …예."
김래빈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저는… 말재간이 좋지 못하고 공동체 생활에 적합한 타입이 아니라는 평을 자주 받지 않습니까."
아이고.
"그러니 만약 프로듀싱 측면에서도 기여가 부족하다면 그룹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역량을 계발하는게 옳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흠."
김래빈은 아마, 자신이 지금 퍼포먼스를 못 해도 앨범에는 기여하고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럼 역시 이 방법이 제일 낫나.'
나는 준비하던 계획 하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걸 말하기 전에, 우선 앞내용부터 정정해두자.
"일단… 네가 특별히 공동체 생활을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어,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만…."
그래. 살면서 많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대인관계에서 고집이 세거나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니니 일하는데에 문제는 없었다.
"그래? 테스타 활동하면서 멤버 중에 누가 너한테 화낸 적 있던가."
"…아니요."
"거봐. 문제 될 수준 아니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 그렇군요!"
김래빈의 표정이 좀 밝아졌다.
"그리고 프로듀싱 문제는… 음. 잠깐만."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음원 사이트에 표기된 골든에이지의 신곡 정보를 불러냈다.
저작권자 항목이다.
"여기 작곡가랑 편곡자들 보이지."
"예."
미리 확인해둔 내용이 입에서 쭉 설명되었다.
"작곡가는 외부 프리랜서인데… 편곡자들은 이 작곡가 팀이 아니야. 골든에이지 회사 소속이지."
"음, 예."
"무슨 뜻인지 알겠어?"
"현대의 작곡은 다중 작업을 거친 종합적 성격의 제작이니 책임 소재를 자신에게 두는 건 자의식 과잉이다…?"
기상천외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아니, 네가 원하는 직접 비교가 가능하다는 거지."
나는 화면의 작곡가를 툭 쳤다.
"사실 내가 이 작곡가한테 곡을 좀 받았어."
"…! 어, 언제 어떻게 진행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잘."
청려 말이 거슬려서 활동기 시작할 때 이미 컨택해서 몇 곡 받아왔다.
바로 이번 앨범 활동 이후 짧은 텀을 이어질, 리패키지 앨범에서 쓸 활동곡 후보로 말이다.
"골든에이지는 이번 곡으로 성적이 괜찮았으니 분명 동일 작곡가한테 또 곡을 받을 거야. 그리고 편곡은 또 회사에서 하겠지."
"…설마."
"그래."
이제 눈치챘군.
"네가 같은 작곡가 곡을 편곡해서 내면, 네가 원하는 직접적인 비교가 가능하지."
"…!"
"누가 이 대중적인 작곡가의 곡을… 더 잘 편곡했는지 말이야."
이 작곡가의 후보곡을 다 들어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멜로디는 착 붙게 잘 뽑던데, 구조가 약해.'
속된 말로 완성도가 떨어졌다. 편곡 빨을 많이 탈 것 같았다.
잠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입을 벌리고 상상하는 것 같던 김래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하지만 잘못하면 너무 직접적인 대결 구도가 되어 서로에게 불이익이 될 수도…."
어쭈. 거기까지 생각을 했나?
나는 픽 웃었다. 좀 기특하긴 했기 때문이다.
김래빈의 말대로, 잘못하면 그 프레임 자체로 테스타가 손해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저 소속사 하는 걸 봐서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테스타가 골든에이지의 작곡가를 뺏었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보려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긴 힘들 것이다.
"괜찮아. 대결 구도 안 돼."
"예?"
"우리만 그 작곡가 곡 쓰는 것 아니야."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VTIC 유닛이랑 영린 선배님도 다음 앨범에 그 작곡가를 쓸 테니까."
"…!"
그렇다.
이런 걸 혼자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같이 할 놈들을 끌어들여야 했다.
'그 도플갱어 예능 때 영린 번호를 받아두길 잘했지.'
…청려 쪽은 좀 찜찜했다만, 헛짓 못 하게 만들려면 한배 태워놓는 게 나았다.
어쨌든 둘 다 생각보다 군말 없이 오케이 했고.
-아 재밌겠네. 잘 생각했어요^^
-좋은 작곡가 소개 고맙습니다. 새앨범 작업에 탄력이 붙겠네요.
소속도 연차도 이미지도 다른, 탑티어가 사이 좋게 곡을 받아 갔으니 그 작곡가를 일방적으로 골든에이지에 엮긴 힘들 거다.
그냥 작곡가 이름값이 높아지겠지.
청려의 조언대로 골드 1 회사 쪽이 곡 못 받게 작곡가를 매수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굉장히 양심적인 행동 아닌가.
'그러게 어디서 양해도 없이 남 멱살을 잡아.'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웃으며 팔짱을 꼈다.
"올해 안에 각자 편곡한 같은 작곡가의 곡이 너덧 곡 나오는 거야. 진짜 진검승부가 되겠지."
"…."
김래빈이 침을 삼켰다.
"그래도 해볼래?"
"예…!"
좋아. 판이 짜지니 의욕이 돌아온 모양이다. 김래빈은 열의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꼭 그 작곡가 걸 활동 곡으로 쓸 필요는 없어. 후보곡 중에 올리는 거니까 멤버들과 상의해서 대중적인 쪽으로 잘 골라보자."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얼른 자라."
"예…?"
김래빈이 급격한 마무리에 당황했다. 나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지금 자도 네 시간 반밖에 못 잔다."
"헉, 죄송합니다! 제가 형의 취침시간에 큰 피해를…."
"괜찮으니까 자자."
나는 김래빈을 말린 뒤, 바로 방불을 껐다.
내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당장 발불편한 김래빈을 끼고 어떤 무대를 일본에서 보여줄지 연습해야 했다.
'호랑이 인형에라도 태워야 하나.'
발 회사든 멤버든 쓸 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려놨기를 바라며, 나는 잠이 들었다.
일본 방송 무대 녹화 사흘 전 일이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방학을 맞이한 8월 평일 오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컴퓨터로 위튜브를 틀었던 고등학생은 인기 동영상 상위에 아직도 떠 있는 뮤직비디오 하나를 발견했다.
[테스타(TeSTAR) '행차(present)' Official MV]
"…."
사실, 이 남고생은 이미 이 뮤직비디오를 다 봤다.
전적으로 티저 때문이었다.
고등학생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긴 내가 만든 가수님 의 5월의 신랑, 박문대의 결승 곡이 여기 나온다고 누나가 살살 꼬셨던 것이다.
-야야 이거 봐봐
-아 뭔데 꺼져
-야 10만 원 언제 줄 거냐고∼ 만원깎아 줄 테니까 얼른 봐라 여기 박문대가 내 가수에서 부른 곡도 나온다
-….
-이거 입소문 X나 타서 지금 조회수 개많이 붙었다니까? 너도 빨리 봐
그래서 고등학생은 기어코 티저를 봤고, 그 엄청난 스케일에 흥미를 느껴 버렸다.
그렇게 누나의 영업은 성공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은 극구 부인 중이었다.
'…혹시 편곡했나 해서 봐준 거지.'
'5월의 신랑'이 부른 결승전 곡의 다른 버전이 궁금했을 뿐이라며, 고등학생은 애써 생각했다.
'근데 솔직히 객관적으로 퀄리티 있는 영상은 맞았다고. 넷플러스 초대형 드라마 트레일러 같았으니까 재밌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심지어 고등학생의 기준에서, 뮤직비디오는 티저보다도 재밌었다.
뮤직비디오가 훨씬 짧고 박진감 넘쳤기 때문이다.
'속도감 쩔었지.'
고등학생은 약간 갈등하다가, 뮤직비디오를 클릭해서 재생했다.
'어차피 한 번 본 거 또 봐도 어쩔건데 뭐.'
다행히 영상은 광고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착호갑사 청은 나와서 명을 받들라.]
뮤직비디오는 왕에게 '가장 해로운 괴물'을 잡으라는 명을 받은 류청우가 요괴답사록 을 챙겨 들고 조선 곳곳을 찾아다니며 요괴를 찾는 내용이었다.
요괴로 분한 각 멤버들은 류청우와 상호작용하며 '가장 해로운 괴물'에 대한 실마리를 주거나, 퇴치당한다.
-마침내 찾아온 날
행차
끝내 여기서 오늘
특히 후렴이 들어갈 때마다 강렬한 안무컷과 역동적인 스토리컷이 교차될 때 몰아치는 느낌이 대단했다.
그렇게 중간중간 들어가는 안무 장면들이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는 가운데, 마침내 류청우는 마지막으로 동굴에 있는 김래빈과 만난다.
김래빈은 자신의 동굴 사방에 띄운 조롱불을 이용해 '가장 해로운 괴물'의 정체를 알아내려 시도했다.
이때 곡의 본인 파트가 함께 교차하며, 스토리컷의 김래빈이 직접 카메라를 보며 파트를 소화하는 것이 매우 묘한 느낌을 줬다.
동굴 속에서 초롱불이 온갖 네온사인 빛으로 빛났다.
경고등처럼.
-지금, 나타나셨다
경고 또 경고
팔자로 접근하는
느릿한 짜릿한
깜박거리는 초롱불들이 희한한 빛을 만드는 가운데 카메라가 빙그르르 돌아서, 류청우를 비췄다.
-나
곡이 멈췄다.
그리고 비명과 질주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과거 컷신이 들어갔다.
[아아악!]
[으흐흐흑….]
네발짐승이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컷 탓에 형체가 잘 보이지 않던 짐승은, 해가 뜨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위로 동굴 속 현재 류청우의 모습이 교차되었다.
류청우는 '가장 해로운 괴물'이 본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곡이 폭발했다.
-고개를 숙여도 도망칠 수 없어
잘 봐 지금
전율이 따라와
마지막 댄스 브레이크를 포함한 몇십 초가량, 절정에 달한 안무컷이 스토리 없이 몰아쳤다.
그리고 노래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마무리되는 순간에서야 다시 스토리 컷이 등장했다.
[…]
어두운 밤. 카메라를 노려보던 류청우는 등을 돌려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태평소 소리와 함께, 곡이 끝났다.
[행차]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낯선 백그라운드 뮤직과 함께였다.
-늦은 밤 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 어쩌면
너는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
이별에 대한 노래였다. 언뜻 듣기에는 사랑 노래처럼 들렸지만, 이 스토리 이후에 흐르니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류청우의 솔로곡 '진실'이었다.
이에 관해 뮤직비디오와 티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보며 온갖 떡밥을 찾아 분석하는 팬과 위튜버가 한트럭이었지만, 고등학생은 그것까지는 몰랐고 별 관심도 없었다.
그냥 '영상이 오졌다'고 감탄하며,이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쿠키까지 있던데.'
실제로, 엔딩 크레딧이 끝나자 또 영상이 나왔다.
류청우에게 첫 뮤직비디오 장면에서 근엄하게 명령했던, 다리만 나온 왕의 정체였다.
[그걸 속냐∼]
머리에 여우 귀가 솟은 이세진이었다.
실실 웃던 이세진이 자신의 거대한 꼬리 장식을 뭉개며, 방만하게 왕좌에 드러눕는 것으로 쿠키 영상까지 끝났다.
이 엔딩의 충격과 귀여움에 몸서리쳤던 팬들을 모르는 고등학생은 그냥 입맛을 다셨다.
'이런 거 넷플러스에서 안 만들어주나.'
아이돌 말고 진짜 연기자가 하면 더 좋았을 거라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고등학생은 그 영상에서 별다른 흠은 커녕 어색함도 찾아내지 못했다.
'…잘하긴 해"
소년은 결국 다시 한번 인정하며, 뮤직비디오 화면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렉이 걸렸는지 버벅거리며 뒤로 가기가 먹히지 않았다.
'아, 진짜.'
고등학생은 진절머리를 내며 연달아 계속 뒤로 가기를 누르다가, 휙휙 뒤로 넘어간 주소 덕에 누나가 띄워뒀던 인터넷 페이지를 엉겁결에 확인했다.
시크릿 페이지로 탐색해서 평소에는 잘 남지 않는 누나의 인터넷 혼적이었다.
"뭐야?"
파란 SNS 페이지에는… 웬 교실에서 뒤를 돌아보는 박문대의 움짤이 떠 있었다.
마법소년 MV 비하인드 컷 (1) 박문대
(보정된 GIF)
#박문대 #금발문대 #금문댕 #마법소년
붉고 노란 보랏빛 쨍한 하늘 앞에서 하얀 하복을 입고 있는 흑발의 박문대는 뒤를 돌아보자 금발로 변했다.
아주 잘 빠진 움짤이었다.
"…."
참고로 프로필에 적힌 계정 소개문구는 '금문댕만을 사랑하겠다는 피의 연합'이었다.
'이거나 저거나 똑같이 생겼구만.'
남고생은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정신 사나운 금발보다는 흑발이 보기 편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도 뮤직비디오야? X나 느낌비리비리한데.'
고등학생은 빈정거리면서도 혹시하는 기대에 위튜브에 '테스타'를 검색했다.
하지만 '마법소년' 뮤직비디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바로 어제 올라온 영상이었다.
[테스타 행차 일본 방송 CUT]
'어?'
썸네일은 입을 쩍 벌린 일본 개그맨이 었다.
'아, 이건 못 참지.'
국뽕 노렸네. 남고생은 킬킬거리며 그것부터 클릭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59화]
테스타가 출연한 일본방송은 상단에 7:41쯤으로 시간이 떠 있는 아침 방송이었다.
'아 케이팝 급이 있지 아침한 마당같은 데를 나오냐.'
고등학생은 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일단 틀었으니 뭘 하는지나 보자는 생각으로 계속 동영상을 보았다.
팬이 붙인 듯 한글 자막이 붙어있었다.
[초특급 KPOP 그룹이 방문했다!]
[한국의 국민 아이돌, 테스타]
그리고 테스타의 활동 연혁과 성적이 뮤직비디오나 수상 장면과 함께 교차되며 빠르게 방송을 탔다.
[그런 그들의 이번 앨범 판매량은 무려 110만!]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결성된 7인 7색의 매력이 비결일까요?]
[신오오쿠보에서 한류 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한인타운 주변 길거리의 KP0P 팬들의 인터뷰가 짧게 지나갔다.
[역시 최근 가장 기세가 좋은 느낌?]
[저의 최애는 문대. 노래를 잘하는 귀여운 강아지!]
[모두 최애가 달라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고, 정말 귀엽기 때문에.]
'오… 일본에서도 인기 좀 있네?'
고등학생은 시큰둥하던 얼굴을 좀폈다.
영상은 별 번쩍거리는 효과와 함께, 드디어 테스타의 등장을 예고했다.
[한국의 초특급 아이돌이]
[지금 스튜디오에 등장!]
두두둥!
어딘가 적나라한 효과와 함께, 파스텔톤 세트장에서 박수 치는 너덧명의 패널들을 배경으로 테스타가 입장했다.
전통 장신구를 적당히 매치한 남색정장 차림이 말끔했다.
'다리 길이 보소.'
고등학생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동안, 테스타는 별 긴장한 기색 없이 웃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Take your STAR, 테스타입니다!]
[와아아!]
[어서 오세요. 각자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MC의 요구에 아주 간단한 일본어를 섞거나 영어를 써버리는 식으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시간이 별로 주어지지 않은 걸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특징적인 요소도 살짝 곁들어시.
[안녕하세요. 테스타의 리더 류청우입니다. 전에 양궁 국가대표였어요.]
[허어억!]
[진짜?]
[예. 금메달리스트였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다음 사람에게 미련없이 마이크를 넘기는 것이다.
일부러 더 거센 리액션이 튀어나왔다.
[너무 쿨해! 위험해!]
[저게 매력 포인트일 겁니다!]
자막을 제작한 사람은 심지어 뒤에서 패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작은 색깔 자막으로 구현해 놨다.
대충 씩 웃는 멤버가 잡힐 때마다 터져 나오는 '멋지다', '귀엽다' 정도였다.
[저는 배세진입니다. 아역배우 출신이고…]
[확신의 츤데레입니다!]
[…!]
살짝 머뭇거리며 적당히 마무리하려던 배세진의 말끝에 이세진이 끼어들었다.
[츤데레?]
[으하하!]
배세진의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폭소를 뽑아낸 이세진은 웃으며 자신의 소개를 이었다.
[제 이름은 이세진이고, 여기 츤데레 형님하고 이름이 똑같아서 큰세진이라고 별명을 만들었어요.]
[큰?]
['큰'은 한국어로 크다는 뜻이에요∼ 넵. 팀에서는 댄스를 맡고 있습니다!]
연습생 때 교육받은 덕에 능란한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선아현입니다. 무용을, 전공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박문대입니다. 노래 부르는 강아지와 티벳여우 중에 원하는 이미지로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HELLLLO GUYS, I'm Eugene. Please remember me! Thanks!]
그런 식으로, 제일 끝에 서 있던 김래빈까지 차례가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패널에게서 질문이 들어왔다. 김래빈이 마치 장식처럼 교묘하게 차고 있던 발의 장식이 보호대라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거야?]
[예. 하지만 무대 보여드리는 것에 지장은 없습니다.]
김래빈의 똘똘한 대답을 통역사가 번역해 주자, 패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자신감이 좋다'는 식으로 감탄했다.
'춤 X나 빡세던데 어쩌려는 거지.'
고등학생은 약간 회의적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테스타의 무대, 곧 이어집니다∼]
원래는 광고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자리였지만, 컷본인 탓에 영상에서는 바로 무대가 이어졌다.
적당히 치운 세트장 위 단상에서, 조명이 돌아가며 일본어 자막과 함께 무대가 시작되었다.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도록
오늘 납신다 행차, 하신다
기록에 작대기 하나 더 긋도록
지금 납신다 행차, 하신다
'X나 잘 맞네.'
이미 김래빈이 없는 동선을 연습해온 덕에 안무는 매끄러웠다.
게다가 오프닝이 오랜만의 완전체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차유진이었던 덕에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했다.
극도로 정적인 카메라는 역동적인 퍼포먼스의 디테일들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고등학생은 아무 생각 없이 입 다물고 무대에 집중했다.
-행차
'근데 걔 안 나오는데?'
다만 다리 다쳤다는 놈이 1절이 지나도록 아예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머리에서 지웠다.
'신랑 본체가 후렴 내내 더블링 넣는 거 맞는 것 같은데? 크, 내 귀진짜 왜 이렇게 잘 듣냐.'
무대 보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사실 '행차'의 무대를 제대로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냥 넋 놓고 1절과 2절 도입을봤다.
그리고 마지막 프리코러스에 들어가기 직전.
고등학생은 저 뒤에서 김래빈이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것을 간신히 눈치챘다.
'뭐 어쩌려는 거지.'
짜게 식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무 대형이 교묘하게 움직이더니, 갑자기 썰물처럼 빠지며 김래빈을 들어 올렸다.
"…!"
김래빈은 형형한 눈빛으로 마치 가마에 타듯이 다른 멤버들의 등과 팔에 올라탄 채로, 파트를 시작했다.
-아닌 밤중 찾아온 누군가
부숴 찢어발긴 문고리가
탕탕탕
구르는 튀는 소리가
그리고 동시에 대형이 바뀌었다.
-지금 나타나셨다
경고 또 경고
팔자로 접근하는
느릿한 짜릿한
바닥으로 연결된 팔과 상반신을 타고, 김래빈은 마치 착륙하듯이 가볍게 전면으로 미끄러지며 팔로 몸을 지탱해 일으켰다.
그리고 맨 앞 센터에 서서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나
"와씨!"
고등학생이 감탄하든 말든, 김래빈은 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 파트가 오도록 계속.
'어?'
고등학생은 그제야 깨달았다.
테스타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유사파트를 적당히 빼서 재배치한 다음, 후반의 한 뭉텅이를 몽땅 김래빈에게 몰아줘 버린 것이다.
'와 패기 지렸다.'
랩 비중이 큰 곡인 덕에 김래빈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앞으로 걸어 나오는 김래빈에게는 따로 안무는 없었으나, 주변 멤버들이 수족처럼 움직여 준 덕에 도리어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받는 것처럼, 극후반부 절정에서 박문대의 보컬이 쭈우욱 올라갔다.
'이거지!'
거기서 몰아치는 마지막 댄스 브레이크.
뒤로 빠진 김래빈이 보이지 않을만큼 화려한 몸놀림이 이어진 뒤,테스타는 대형을 일부러 뒤로 쭉 뺐다.
그래서 김래빈과 합류한 뒤. 엔딩컷을 맞았다.
[행차]
"개잘하네."
고등학생은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쳤다. 마침 화면에서도 무대가 끝난 뒤 패널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있었다.
하나같이 눈이 확장되어 있었다.
'야 썸네일이 여기서 나오냐.'
남고생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영상의 테스타는 몸을 일으킨 뒤,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테스타의 행차입니다∼]
동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은 확신했다.
'이건 솔직히 찢었다.'
왜 이게 조회수가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국뽕이 한 사발 얼큰하게 차올랐다.
재밌어서 댓글까지 보니, 마찬가지로 재밌어하는 팬들과 한국인으로들썩였다.
-테스타 맛을 쬐금만 보아라 많이는 말고 우리도 자리 없어서 안 됨ㅠㅠ
-개안하는 느낌이었겠지 우리도 알아ㅋㅋㅋㅋ
-일본으로 가기 엔 테스타가 아깝다 소속사는 잘 생각해서 미국 쪽을 더 중점으로 두길
-우리 케이팝 아이돌들∼ 자랑스럽습니다!^^
-뭐임 테스타가 아침 방송 같은데 나올 급은 아니지 않나 외화벌이도 좋지만 자존심은 챙기자
└일본은 저런 아침 프로 위상이 한국보다 훨씬 높습니다 시청률도 잘 나오고요∼ 테스타 대박 맞습니다ㅋ
└오 그렇군요ㄱㅅㄱㅅ
"오…."
알고 보니 좀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었나보다. 고등학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또 재밌는 거 없나?'
흥이 붙어서 연관 동영상을 보니, 테스타에 대한 일본 반응을 리뷰한게 줄줄 떠 있었다.
[테스타의 한국 전통 무대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일본 방송인들!]
[테스타 무대에 난리 난 일본방송]
'국뽕 채널들 신났구만.'
고등학생은 원래 이런 건 쪽팔려서 안 보지만, 심심해서 한번 봐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하나를 클릭해 보았다.
참고로 비슷한 시각, 박문대도 모니터링을 진행 중이었다.
-테스타 무대가 너무 대단해서 우유를 쏟았다 믿을 수 없어
-이 아이 누구? 대체 누구? 아무리 봐도 천사 (TV 화면을 직접 찍은 선아현 사진)
-발레 전공인가. 어쩐지 우아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예쁜 얼굴과 천사의 몸짓이구나 (* ´ ω` )
-아침 방송에 또 한국 아이돌이 나왔다. 다만 댄스 레벨이 굉장하네요.
-누가 다리를 다친 멤버의 이름을 알려줘! 무서운 미형 얼굴에 멋진 목소리에 상냥한 성격? 어느 만화캐릭터야ww
-세진이들이 신경 쓰인다 캐릭터가 반대인 게 참을 수 없어…
-동양풍 곡이군요 박력이 대단해!(︶‿︶✿)
-누가 봐도 귀여운 네코짱인데 왜 티벳여우가 별명인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한국WWW (박문대 사진)
'좋은 반응만 골라서 했나.'
약간 왜곡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룸서비스를 대강 입에 밀어 넣으며 동영상을 빠른 배속으로 넘겼다.
그냥 글로 올려도 될 내용이 동영상으로 나오니 시간이 배로 들어서 귀찮았다.
'그래도 영어 배우기도 바빠 죽겠는데 일본어까진 무리다.'
적당히 인사나 회화 정도를 2주만에 익힌 것도 전적으로 특성 덕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충 팬들의 SNS와 위튜브 채널에서 수집한 내용을 정리했다.
'선아현 반응이 좋군.'
후반 센터가 인상적이었는지 김래빈 반응도 좀 많이 나왔고, 나머지 멤버들은 골고루 괜찮았다.
'…생각보다 내 언급도 많은데.'
대체 어떻게 꽂힌 건지는 모르겠는데, 4차원 캐릭터 같은 느낌으로 좀 먹힌 모양이다.
'모르겠다.'
아무튼 반응이 전반적으로 아주 좋았다는 게 결론이었다.
물론 성과가 될 만큼 큰 반향이 일어났다는 건, 무조건 좋은 말만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테스타의 인기에 발광하는 일본넷우익]
이 동영상 내용을 대충 그 예시로볼 수 있겠다.
-테스타가 누구?W 들어본 적도없어 어차피 재일이나 좋아하겠지
-또 반일 그룹인가 일본의 돈이 그렇게 탐나면 제대로 태도를 정해라
-이놈들도 다 정형했군
-한국풍 컨셉이라니 한국 정부의 국책은 어디까지 가는거냐
-눈속임만 거창하지 곡은 시끄럽기만한 졸작WWWWWWW
그 밑으로는 이 말에 반증을 들며 비웃는 동영상 업로더의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전형적이군.'
대충 일본에서 약간이라도 이름 알린 케이팝 그룹이 들었던 개소리는 다 챙긴 것 같다. 반응이 좋긴 한가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모니터링을 종료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회사에서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서도 정식방영한다구요?"
"어! 너희 반응이 좋다고 거기 방송국에서 사 갔다더라!"
바로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의 일본 정식방영 소식이었다.
'…괜찮으려나.'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라 일본에서도 먹힐 것 같다만, 이미 결론 다나온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뭐 그리인기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야∼ 그때 생각난다!"
"마, 맞아."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몇몇 멤버들이 오랜만에 나온 아주사의 방영 이야기에 제각기 감상을 이야기했다.
일단 우승해서 데뷔했다 보니 그새 미화되었는지 어려운 수험 생활 떠올리듯 말하는 놈들이 제법 생겼다.
물론 안 그런 놈도 있었지만.
"…폐지됐어야 했는데."
배세진이다.
아무튼, 아주사 에 대한 소식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희 이번에 '아주사' 새 시즌 하는 거 알지?"
"헐. 그래요?"
"기어코 하는군요."
"그래∼"
매니저가 슬쩍 운을 뗐다.
"그래서∼ 너희가 한 번 나오면 한다는데?"
이럴 줄 알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0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전 시즌 우승자가 출연하는 건 일종의 국룰이었다.
특히 테스타는 누가 봐도 아주사 의 성공의 산증인이었으니, 내가 제작진이라도 무조건 출연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소속사도 T1 계열인 마당에 당연히 거절은 불가능하다.
"얘들아, 생각해 봐. 멋지지 않을까? 챔피언 등장이잖아!"
"오∼"
큰세진이 매니저 말에 실실 웃었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참는 것 같군.
"저희 나가는 걸로 다 이야기된 건가요?"
"음, 좀 그렇게 된 것 같긴 해. 너희 그래도 같은 회산데 의리 지켜줄거라고 생각하시지."
의리 같은 소리 한다.
'여기 악편으로 한 번 이상 박살난 놈들이 절반인데.'
다들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좀 어처구니 없어하거나 쓴웃음 짓는 놈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손을 들었다.
"형님! 이번에 여자분이에요?"
"어? 아, 참가자가?"
"네!"
"맞아. 여자애들!"
"오우."
차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를 남자친구로 생각하는 팬이있어요. 싫어해요!"
"푸흑!"
선아현이 사레가 들렸다.
"야, 그거야 조심하면 되는 거지∼너 걔네랑 연애할 것도 아니잖아!"
"좋은 사람 만나면 연애가 natural해요! 마음 몰라요!"
"촬영장에서 멋진 말 좀 해주고 오면 돼! 그렇게까지 기회도 없다 유진아!"
맞는 말이다.
'특별히 화면에서 엮이게 만들진 않겠지.'
T1도 황금알 낳는 테스타의 배를 가르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쓸데없이 테스타의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주진 않을 것이다.
다만, 참가자들이 편집으로 오해를 받을 여지는 있었다.
'인기 아이돌 등장에 정신 팔려서 연습을 소홀히 하는 참가자….'
아주 익숙한 구도였다. 향수까지 불러일으키는군.
그냥 그런 거에 엮이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그리고 위험 요소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새끼들 헛짓할 것 같은데.'
우리가 했던 시즌3가 너무 성공했다 보니, 분명 시즌4에서는 각종 세력이 달라붙어서 좌지우지하려고 기를 썼을 것이다.
텀만 보면 작년에 벌써 시작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게 1년이나 미뤄진 것도 심상치 않았다.
'10할의 확률로 논란 터진다.'
그 개판에 조금이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사린다.'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보신에 초점을 두는 게 맞지 않겠냐고 조금 있다가 브리핑이라도 해야겠다.
내심 한숨을 쉬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김래빈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그럼 이번에 제가 쓴 여성 키에 알맞은 곡을 미션곡으로 드리는건…."
"안 돼."
"아니야 래빈아."
"…?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대답하기도 전에 쏟아지는 만류에 김래빈이 다시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고집이 안 센 놈이라 다행이었다.
'프로듀싱 열정은 다른 곳에 써라.'
우리는 최대한 안 엮이는 기조로간다.
"촬영이 언제래요?"
"어, 다음 주일걸? 오래 안 걸려서 사이에 짧게 잡았다더라."
"오∼"
나는 매니저와 큰세진의 대화를 들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 목요일이네. 문대 예능 스케줄있는 날!"
아, 언제인지 알겠다.
" 내가 만든 가수님, 가장 최고의가수 캐릭터는…."
"박문대의 '5월의 신랑'님입니다!"
퍼퍼펑!
꽃가루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환호가 울렸다.
패널들이 박수 치는 모습 위로 '3연승이라니!' 같은 자막이 들어갈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축하드립니다!"
무슨 특집 프로그램 편성 때문에 4주 결방이 뜬 이후, 오랜만에 해본 '5월의 신랑' 무대였다.
그리고 마지막 우승이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신선함 유지를 위해서 한 캐릭터가 해먹을 수 있는 회차를 3회로 제한해 놨기 때문이다.
'끝이군.'
딱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두 번째로 리드미컬한 탱고도 하나불렀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추억을 회상하는 아련한 야상곡도 불렀다.
'물론 클라이맥스를 길게 편곡했지.'
덕분에 깔끔하게 3번 우승하고 하차할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나는 준비한 마지막 소감을 적당히 패널과 주고받았다.
자, 시청자와 멤버들한테 고맙다는이야기 좀 하고….
"문대 씨, 새 캐릭터로 나올 생각없어요?"
"맞아! 보내기 너무 아쉬워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러면 또 뇌절이라고 할 거 다 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또 찾아뵐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5월의 신랑으로 지내는 동안 정말 재밌고 행복했습니다."
이건 진실이다.
'덕분에 회복이 빨랐지.'
혼자 준비해야 하는 스케줄이 있는게 가끔 류청우 만나기 찜찜할 때 도움이 됐다.
더 바빠지니까 다른 생각할 겨를이없는 것도 편했고.
'…중간중간, 상담도 도움이 됐어.'
인정하자니 머쓱하지만, 확실히 겉핥기라도 전문가에게 털어놓는 건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 상담 횟수도 줄였다.
'슬슬 상태창도 큰 무리 없이 정산할 수 있겠다 싶고.'
내가 내심 현 상태를 정리할 때, MC는 열심히 진행을 계속했다.
나도 촬영에 집중하도록 하자.
"3회 연속 우승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5월의 신랑'은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아래 캐릭터 상품이 제작됩니다."
참고로 이건 일종의 공익사업이라나 방송국에는 수익이 안 돌아오고 전부 기부된다.
"결식아동을 돕는 이번 상품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시청자님!"
그런데 기부 명의가 내가 아니라 이 프로그램명이다.
'날강도 놈들.'
세제 혜택도 뺏어가는군.
물론 덕분에 깔끔하게 인지도 이득만 얻어가긴 한다. 혹시 상품화에서 문제가 생겨도 전부 방송국 탓이니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너무 좋았어요∼"
"또 봐요!"
어디선가 나온 스탭이 내 품에 인형을 하나 안겨줬다. 얼굴에 꽃이 달린 '5월의 신랑' 인형이다.
'맙소사.'
홍보까지 알차게도 써먹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인형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심사위원과 관객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한 후 스테이지 아래로 내려왔다.
위에서 MO} 엔딩 멘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문대 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취감이 제법 괜찮았다. 나는 손에 들린 봉제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침실에 둘까.'
슬슬 룸메이트도 바꿀 참이니, 나중에 방 바꾸고 정리할 때 기념으로 어디 배치나 해둬야겠다.
'자, 이건 됐고.'
나 혼자 시작했던 예능은 이제 끝났다.
이제 테스타의 고향 예능 방문 촬영을 끝내러 가볼 시간이다.
"문대 웰컴∼"
"어땠어?"
차에 타자마자 질문부터 나왔다.
나는 인형을 흔들었다.
"이겼어요."
"오오∼"
박수가 벤을 울렸다. 자기 일도 아닌데 반응 한번 좋다. 이 기세로 아주사 촬영장에서도 리액션 봇으로 활약하고 오면 될 것 같다.
"이, 이게 상품이야?"
"어."
"와.…."
"생각보다 괜찮은데? 우리도 이런거 만들어서 앨범에 끼우자고 말씀드려도 괜찮을 것 같다∼"
꽃대가리 인형은 비즈니스 분석을 당한 후 좌석 뒤의 창문 앞에 안착했다.
그리고 차는 쭉쭉 이동해, 외곽의 익숙한 거대 건물 앞에 섰다.
"우와… 하나도 안 변했어."
"진짜 오랜만이다."
저 말에 '다신 보고 싶진 않았는데'가 생략되어 있다는 데 꽃대가리를 걸겠다.
류청우마저 약간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음… 그래. 잘하고 오자."
"넵."
이미 숙지한 대본을 다시 되새김질하며, 테스타는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2가 촬영 중인 세트장 안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고지받은 상황을 확인하게 되었다.
"헐! 얘들아!"
"오∼ 안녕하세요!"
촬영장 안에는 골드 1의 그룹…골든에이지가 있었다.
물론 저 그룹뿐만이 아니다. 당장 저기서 골드 2가 힐끔힐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오∼ 희승이 진짜 오랜만인데? 모델 한다며, 잘 지내?"
"헤헤, 그럼요! 세진 형님은 잘 지내셨어요?"
제작진은 시즌3에 출연한 뒤 어느정도 활동을 하는 참가자를 싹 모아둔 것이다.
'무리수 아닌가.'
아주사 뽕을 한껏 끌어올린 뒤에 출범할 생각인 것 같은데, 성별이 달라서 시청자층이 제법 갈릴 상황이라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었다.
'뭐, 나랑 상관은 없다만.'
우리야 시즌4가 망하는 게 차라리 좋았다.
시즌3만큼 잘된다면, 아무리 다른 성별이라도 서바이벌 그룹 좋아하는 층이 갈아타서 유출이 없진 않을 테니까.
공정성 논란이 아니라 노잼으로 망한다면 최상의 결과인 것이다.
'음, 어떠려나 모르겠군.'
촬영이나 무사히 마치자.
"아, 테스타 왔어∼ 잘 왔어요! 고맙네."
테스타는 한껏 친절해진 PD와 악수를 하고, 작가진들과 인사했다. 그중에는 예의 그 류서린 작가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한테 노래방에서 명함을 준, 류청우와 친인척 논란이 났던 그 작가말이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원래 나와도 친척….
'이런 건 됐고.'
어쨌든, 류서린 작가는 특별히 누구에게도 알은 척하지 않고 상황을 넘겼다. 제법 현명한 판단이었다.
PD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브리핑했다.
"여러분, 지금 연출은 다 숙지 되셨죠?"
"네!"
"멋지게 부탁드려요∼ 멋지게!"
브리핑받은 등장 연출은 이렇다.
' 아주사 시즌3의 업적 동영상'을 이번 참가자들한테 틀어준 뒤, 갑자기 당사자들이 직접 그들 앞에 등장해서 응원 한 마디씩하고 질문받고 퇴장한다…는 식 말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군.'
하는 건 괜찮다. 다만 이걸 기획한 쪽에서 무슨 효과를 노린 건지 또렷하게 보여서 민망했다.
"초, 초콜릿 먹을래?"
"…어. 하나 줘."
"저도 주세요!"
당이라도 충전해야겠다.
그렇게 선아현이 내미는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 시간이 왔다.
"5초 뒤에 들어갑니다∼"
순위 발표식 세트장 앞 장치에서 대기 중이던 시즌3 참가자들은 다함께 리프트를 타고 시즌4 참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비명이 들렸다.
"우아아아악!"
"진짜야? 이거 진짜야?"
나도 이 연출이 믿기지 않지만, 진짜다.
'설마 1 위라고 더 과하게 편집하는건 아니겠지.'
벌써 모니터링이 걱정됐다.
"후우."
"아, 생각보다 이거 떨렸다."
비하인드로 풀 생각인지,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카메라가 따라왔다.
대충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응원 멘트를 또 던져뒀다.
"화이팅!"
"시즌4 대박 나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내가 대박 나길 바란다고 진짜 대박 나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다만 좀… 촬영이 쪽팔렸기 때문에, 손에 땀이 찼다. 좀 씻고 올까.
"아, 나 잠깐 화장실 좀."
어디론가 자리를 비운 매니저 대신 큰세진이 스마트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참가자들 번호 물어보러 가는 건 아니지, 문대야? 믿는다∼"
"어 그래."
마침 옆에서 번호 땄다고 시시덕거리는 다른 시즌 3 참가자 놈을 봐서 그런지 미쳤냐고 대꾸할 마음도 안든다.
'안 들킬 자신 있나 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복도를 걸었다.
소란한 세트장에서 점점 떨어져서 걷고 있자니, 갑자기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고개를 돌리자, 예상과 다른 인물이 있었다.
최원길이다.
이놈이 날 쫓아올 이유가 있던가?
"저, 형."
"…?"
최원길은 갈등하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왜."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모르겠는데요. 조심하세요."
"뭘 조심하는데."
"저희, 소속사요."
"…!"
이 이야기를 본인이 꺼낸다고?
일단 지난번 같은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했다.
"아무도 없어요. 저도 확인했어요."
어쭈.
'나름대로 좀 배웠다는 건가.'
나는 픽 웃으며, 완전히 최원길 쪽으로 뒤돌아섰다.
"그래. 너희 소속사가 왜."
"…저희 메인보컬 아세요? 저 말고, 그 형."
"아, 그분."
내가 내가수 에서 '5월의 신랑'할 때 리본 단 통닭 했던 골든에이지의 그놈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 알지. 왜?"
최원길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형이랑… 비교한다는 것 같은데."
"나랑? 뭐로?"
내가수 에서 K.0 당했으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한단 말인가. 그것도 서바이벌 1위 출신하고 말이다.
최원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학력으로요…."
"…!"
"그 형, 한국대생이거든요."
맙소사.
'이게 있었군.'
맞다. 이 '박문대'는 고졸도 못 했지.
대졸자로 산 다음에는 바로 아이돌로 사느라 '박문대'의 가방끈은 거의 잊고 있었다.
가끔 긁는 소리로만 나오는데, 그마저도 요새는 잘 안 나오니까.
'그만큼 약한 소재라는 뜻인데.'
애초에 학업을 중간에 그만둔 아이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아주사 때 가정사 털리면서 너무 부각됐을 뿐이다.
'박문대' 캐릭터성의 백그라운드를 두텁게 해주는 역할도 하니 특별히 단점만도 아니었다.
이 말뜻은, 잘못 건드렸다가는 골든에이지만 애먼 사람 핍박한다는 식으로 역풍 맞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내가 인기가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거기 솜씨가 이런 건 이미 짐작했을 것 같은데.'
나는 일부러 최원길을 한번 떠봤다.
"그런 건 시도하기엔 지나치지 않나? 확실한지 알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저한테 알려주시는건 아니고, 그냥 회사에서 어쩌다 들은 거라… 그 형을 막, 도련님 같은 이미지로 밀고 가자고 하면서, 그랬거든요. 거기 박문대 형도 소재로 쓴다고 말해서…."
"…."
그러니까 나랑 일대일로 붙이는 게아니라, 그놈을 '유난히 학력과 집안 좋은 엘리트' 느낌의 금수저 이미지로 밀려는 건가.
그리고 그렇지 못한 수많은 반례 중 하나로 나도 슬쩍 쓸 생각이었나보다.
'별짓을 다 한다.'
물론 진짜 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언플 잘 쓰는 소속사라면 해볼만한 시도긴 했다.
"자, 잘 몰라서 죄송해요. 그냥…제가 폐를 많이 끼쳤으니까… 사과드리고 싶어서, 말씀드렸어요. 죄송합니다."
"…그래."
나는 한숨을 참았다.
"일단… 고맙다."
"…!"
최원길은 화들짝 놀란 것 같았지만, 좀 편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저, 그, 가보겠습니다…."
"어. 잘 들어가고."
나는 뛰어서 사라지는 최원길을 잠깐 보다가, 내심 혀를 찼다.
'애매한데.'
이건 내가 안다고 뭘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당장 수능 다시 봐서 대학을 가는 쓸모없는 짓을 할 생각도 없으니까.
'일단 미리 알았다는 것에 의의를 둘까.'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좀 짜증은 나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복도를 계속 걸었다.
'화장실 들를 시간은 없겠어.'
꽤 많이 걸어온 탓에 반대편 출입구가 더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쪽으로 돌아서 세트장을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출입구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을 봤다.
"…꼭 생각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선배 진짜 괜찮은 분이에요."
"…."
웬 스탭과 배세진이 대화를 끝내고 있었다.
'PD?'
정확히는, 굳은 표정의 배세진이 아주사 의 PD 중 한 명에게 뭔가 받은 상태였다.
PD는 곧 자리를 떴고, 나는 배세진에게 다가갔다.
"형."
"…어, 어."
배세진은 좀 얼이 빠진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그…."
배세진은 좀 갈등하는 얼굴이었으나, 곧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나한테, 드라마 해볼 생각 없냐고."
"…!"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1화]
솔직히 까놓고 생각해 보자.
'배세진은 드라마 하고 싶어 할 만하지.'
애초에 아역배우 출신에, 배우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아주사 에 나왔던 녀석이다.
게다가 누가 봐도 아이돌 관련 능력치보다 배우 관련 능력치가 좋았다.
'나라도 흔들렸겠어.'
나는 약간 어두운 안색인 배세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안 온 드라마가 괜찮았나 보네요."
"…나 예전에 아역배우 할 때, 같이 일해봤던 작가분 드라마야. 거기서… 작은 역할이 하나 있다는데."
배세진이 약간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금 말 건 PD가 그 드라마 PD랑 지인이라면서… 드라마 괜찮다고, T1에서 지원 제작하기도 하고…."
"음."
그 정도면 분명 회사에도 오퍼가 들어갔을 텐데, 활동 생각해서 자른 모양이었다.
'슬슬 테스타 투어 각이 보이니까 괜한 여지 안 주려는 생각이었나.'
하락세가 오기 전까지는 무조건 투어가 더 돈이 될 테니까 말이다.
"…뭐, 됐어. 어차피 지인은 누구나 괜찮다고 하지."
배세진은 억지로 떨쳐내듯이 말하고, 명함을 버리려는지 근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잠시만요."
"왜?"
"회사하고 이야기라도 해보는 게어떨까요. 저희 활동도 1년 지났으니까, 가볍게 한 작품 정도는 이야기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
배세진의 눈이 커졌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야 배세진이 한 3년은 다른 생각 없이 그룹 활동만 해주는 게 최고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변수였다.
'자꾸 누르면 계약기간 못 채우고 탈주할 수도 있단 말이지.'
보니까 하고 싶은데 팀 활동에 문제가 생길까 봐 꾹꾹 눌러 참는 게 눈에 보였다.
사람이 이성과 사회성으로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아무리 재미를 붙였다곤 하지만 본인이 잘하는 걸 눈앞에 두고 부진한 것만 계속하다 보면 돌아버리기 딱 좋다.
'차라리 지금 드라마 하나 풀어주는 게 낫지 않나.'
들어보니 비중 작은 조연 같았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욕 좀 먹더라도 'T1 제작이라서 홍보용으로 테스터 멤버까지 동원됐구나∼' 하고 큰 문제 없이 넘어갈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니 말이다.
그나마 이렇게 아귀 맞게 가능할때 살짝 풀어주는 게 몇 년 뒤에 본격적으로 연기하기도 편하겠지.
거부감도 덜하고.
나는 배세진이 적당히 합리화할 수 있도록 근거도 슬쩍 붙여줬다.
"어차피 슬슬 개인으로 예능도 몇번 나오고, 화보나 광고도 찍는 분위기니까요."
"…."
하지만 배세진은 굳은 얼굴로 명함을 구기더니, 쓰레기통에 넣었다.
"…!"
"됐어. 정신만 팔리겠지."
그리고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간신히 따라가고 있는데… 지금 다른 걸 신경 쓸 여유는없어."
압박감이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활동이 우선이야."
"형…."
"…?"
저거 나 아니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김래빈이 우수에 찬 얼굴로 배세진을 보고 있었다.
손에 음료수가 들려있는 걸 보니, 배세진과 내가 자리에 없어서 못 받은 걸 자기 손에 들고 우릴 찾아다닌 모양이다.
'발에 아직도 보호대 찬 놈이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데 당사자는 해맑았다.
"형이 테스타의 활동에 이렇게 열중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빨리 부상에서 회복해서 팀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뭐, 뭐야! 너 어디서 나왔어!"
"아, 이거 드십시오!"
배세진은 얼굴을 붉히고 기겁했다.
'망했네.'
뭐라 더 설득할 여지도 분위기도 없었다.
'영 아쉬워 보이면 나중에 한번 운이라도 띄워줘야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음료수를 받아들고 김래빈을 따라 일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배세진은 불퉁한 표정으로 본인의 차를 빨아먹고 있었지만, 썩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배세진 형과 문대 형을 만나서 음료를 전달했습니다."
"고생했네∼"
"그래도 앞으로는 걷는 건 조심하자 래빈아. 회복할 때까지는 신경써야지."
"숙지하겠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김래빈은 '대체 어디를 갔다가 온거냐'는 멤버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 둘을 찾아 데리고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뒷자리에서 차유진이 툭툭 김래빈의 옆구리를 치며 물었다.
"형들은 어떤 일 했어?"
"아, 배세진 형께서 테스타의 향후활동에 대해 다짐하시는 것 같…."
"아, 아냐!"
맨 앞자리의 배세진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황급히 부정했다.
김래빈은 그 격렬한 반응을 이해할수 없었는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분명 모종의 활동을 거절하시면서 테스타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신 것 같…."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말 좀해줘…."
"…."
본인이 하시지 왜 날 부르고 그러냐.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형이 드라마 출연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어. 활동에 집중하고 싶다고."
"지, 진짜?"
앞에서 배세진이 신음을 내며 얼굴을 두 손을 가리는 게 얼핏 보였다.
"고생했네, 세진이."
"다음에 해봐요! 도전 좋아요!"
"저, 저도 활동 열심히 할게요 형…!"
약간의 감동과 격려로 차 안이 훈훈해졌다. 배세진은 복잡미묘한 생각이 드는지,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이고.'
나는 혀를 차며 생수병을 땄다. 옆에서 큰세진도 적당히 스마트폰을 보며 말을 던졌다.
"정말 아쉬우셨을 텐데 대단하시네요"
"…."
앞자리의 배세진은 움찔하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나온 듯이툭 대답을 던졌다.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
"…!"
다소 날 선 대답이었다.
대답을 들은 큰세진의 얼굴에서 어처구니 없다는 식의 실소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예? 에이,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냥 좋은 말씀드린 거잖아요."
"…너 비꼬는 건 아는데, 이런 걸로 그러지 마. 거절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제가 언제 형 말을 비꽜… 아뇨. 넵.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말 안 할게요. 그럼 괜찮으시죠?"
"그러니까 매번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대놓고 말해."
갑자기 차 안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건 X발 또 뭐야.'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옆에서 큰세진이 스마트폰에서 고개를 뗐다.
큰세진은 이젠 숨기지도 않고 실소중이었다.
"뭘 또 대놓고 말해요? 저 이미 말 잘하고 있는데."
"은근히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 거 그만하라고.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니까 제가 왜 형을 이상하게만들겠냐구요. 아니, 왜 이런 말을하시는지 모르겠네."
"얘들아, 잠깐."
배세진이 휙 고개를 돌렸다.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너 나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도움도 안되는 게 자존심만 세다고 생각하는거 나도 안다고."
"…!"
"거봐."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 건데요."
"그러면서 또 카메라 앞에서 자기유리할 때만 나한테 친한 척하잖아."
슬슬 큰세진도 머리끝까지 빡친 얼굴이었다.
"그럼 카메라 앞에서 싸울까요? 형, 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매번 사람이…."
배세진이 자신을 팔걸이를 내려쳤다.
"나는! 이 일에 진지해. 애들 장난처럼 구는 건 너야."
"뭐?"
분위기는 이게 주먹다짐으로 안 번진 건 전적으로 차 안이라 그런 것 같은 수준까지 험악해졌다.
그 순간, 큰세진이 거의 일어나다시피 상체를 앞으로 뺐다.
"누구한테 지금…."
"야, 그만."
'미쳤나.'
나는 얼른 놈의 가슴을 한 손으로 눌렀다. 갑작스럽게 번진 말싸움에 당황했다가 그제야 정신 차린 다른 사람들도 둘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그래 얘들아 그만하자! 형 운전하다가 심장마비 걸리겠어!"
"지, 진정하, 하시고…."
"일단 숙소 돌아가서 좀 차분히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우리 지금 달리는 차 안이야. 사고 날 수도 있어!"
"…."
둘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말없이 조용히 자리에 도로 정상 착석했다.
물론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차 안에서, 나는 침음성을 참았다.
'돌아버리겠네.'
데뷔 때부터 눈에 들어오던 삐걱거림이 갑자기 대단한 것도 아닌 도화선에서 확 터졌다.
'적당히 서로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왔나.'
이게 해결될 방안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일단, 숙소 도착하면 대화부터 중재하는 걸로 하고.'
귀찮지만 별수 없었다. 나는 눈을감고 숙소에 도착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둘은 대화는 커녕,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 신속하게 각자의 방에 처박혔다.
정확히는 배세진이 방으로 직행하는 순간 이세진도 코웃음을 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회피라기보단… 그냥 둘 다 더럽게 열받은 모양이다.
'X발.'
답이 없다.
"…."
거실에 앉은 나머지 테스타 놈들은 말없이 TV 화면만 보고 있었다.
마침 보기 싫은 광고까지 나온다.
[따스한 마음처럼 따스한 손길]
[오성의 안내견 전문학교의 예비 안내견들을 만나보세요!]
청려와 찍었던 광고다. 화사한 필터 속 야외 풀밭에서 노란 개들이 뛰어나와 내 머리에 매달리는 게 반복 컷으로 나오고 있다. 내 얼굴이 상당히 멍청해 보였다.
"어, 문대 형."
"강아지 좋아요…."
개 좋다고 말하는 차유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기운이 없이 들렸다.
아니, 차유진뿐만 아니라, 다들 좀 당황해서 멍한 것 같다.
'이 팀이 그럭저럭 화목하게 잘 지내긴 했지.'
데뷔한 후로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싸움이 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당황할 만도 했다.
씁쓸한 현실의 분위기와 다르게, 화면에서는 활기찬 개떼와 청려가 보였다.
[여러분의 사랑으로 자랐습니다.]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
[국민의 보험 - 오성 생명보험]
저기도 개판. 여기도 개판이었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 나는 뒷머리를 휘저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생각하자.
'일단… 타이밍이 안 좋았지.'
배세진은 드라마를 거절하겠다고 어렵게 결심한 탓에 아직 심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안 그래도 예민한 놈이었다. 평소에 큰세진의 은근한 말투를 눈치채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쌓아뒀나 본데, 이번에는 참을 수 없이 딱 거슬렸나 보다.
'큰세진이야 안 그래도 커리어 성취에 집착하는 놈이고.'
나처럼 상태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성적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타입이다.
그래서 팀원 중 능력치도 떨어지고 사회성 부족한데 빳빳한 배세진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러니까 아마 본인이 '참아주던'놈이 도리어 지랄한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둘이 안맞아.'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여러모로 공통점이랄게 없는 놈들이다. 호감도 없고 서로의 행동이 납득도 안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솔직히, 그냥 카메라 돌아갈 때만 알아서 잘하라고 내버려 두고 싶긴한데….
'그래도 뭘 해보긴 해야겠지.'
…류청우 때 배려도 받았고 말이다.
나는 넌덜머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문대야."
"형."
류청우가 슬그머니 따라오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세진이, 그러니까 이세진한테 가볼 테니까… 네가 배세진이한테 가볼래? 둘이 대화는 해봐야지."
"흠. "
내가 배세진과 현재 룸메이트란 사실을 고려한 분배인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세진한테 가보는 게 나을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 되돌아보니 마음에 걸리는게 있는데, 이걸 멤버 중에 나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류청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갑이 나을 수도 있겠다."
"네."
"그럼… 고생하자."
류청우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주방을 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냉장고를 열었다.
'술은 역효과일 것 같고.'
냉수나 좀 챙겨가자.
나는 한 손에 생수 두 병을 들고 이세진의 방문 앞으로 갔다.
똑똑.
"나야."
"…."
잠시 후,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방문이 열렸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2화]
방문을 연 큰세진은 미소 비슷한걸 짓고 있긴 했으나, 당연한 말이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음… 들어오게?"
"어."
나는 방 안에 들어가서 대충 문을 닫으며, 들고 있던 냉수 한 병을 가볍게 던졌다.
"이거 뭐야, 냉수 마시고 정신 차려라?"
"겸사겸사."
"하하."
하나도 안 웃긴 놈이 웃는 시늉만 하고 있다.
큰세진은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물을 따서 반병 가까이 비운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어차피 이렇게 되면 사과도 내가 하고 푸는 것도 내가 하게 될 건 알아."
고조 없이 낮은 목소리였다.
"좀 가라앉으면 알아서 사과하고선 지킬 테니까 걱정 마. 난 이런걸로 그룹에 악영향 안 줄 거야."
"…."
그나마 다음 말은 좀 감정이 실렸다.
"너랑 다른 멤버들한텐 미안해. 차안에서 싸워서 다들 놀랐겠다."
나는 팔짱을 꼈다.
"…배세진 형한테는 사과는 하겠지만, 미안하진 않다?"
"당연한 거 아니야?"
큰세진이 실소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나는 진짜…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그 형한테 팀원으로서 지킬 도리는 다 지켰다고 생각하거든?"
큰세진은 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그 형 안무도 내가 절반은 일대일로 봐주는 식이야. 카메라 돌때마다 뜨는 소리 하거나 그냥 입다물어 버리면 그거 수습해 주는 것도 한두 번인가."
사실이긴 했다.
저놈이 배세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활동할 때마다 팀원으로서 도와주긴 했다.
그게 배세진을 위한 건 아니겠지만.
"근데 그걸 친한 척이라고… 하."
큰세진이 물병을 구겼다가, 마음을가라 앉히려는 듯 다시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카메라 앞에서 그런 게 어딨어? 이건 일이잖아. 본인이 내가 불편하니까 카메라 돌 때도 말 걸지 말라는 건가? 그러면서 자기는 일에 진지하고 내가 애들 장난같이 군단 소리를…."
대충 이런 데서 어긋난 줄은 알았다.
더 격해지기 전에 한번 끊자.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
큰세진은 말없이 물을 들이켰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넌 팀에 기여하는 게 크지. 네 말대로 형도 알게 모르게 너한테 일방적으로 도움받은 적이 많고."
"…."
"그래서 네가 자길 싫어한다는 거에 더 압박감을 크게 느꼈을 거야."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형은 계속 도움을 받을 수밖에없으니까."
배세진이 이 악물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멤버들에 비해 아이돌로서 능력치가 떨어지는 건 별수 없었다.
애초에 이쪽 지망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팀에 피해를 주고있다'는 생각 때문에 본인 업보라고 생각해서 더 꾸역꾸역 참았을 것이다.
"그래서 참다가 터진 거겠지. 오해도 있었고. 일부러 널 다른 애들 앞에서 못된 놈 만들려고 한 건 아닐거야."
이놈 성격상 배세진이 일부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본인을 물 먹였다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으니, 이것도 슬쩍 말해주고.
"…."
아니나 다를까, 좀 진정한 모양이었다.
큰세진은 침착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네가 보기에도 아까 내가 비꼬는 것처럼 들렸어?"
"차 안에서?"
"어."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
큰세진이 대답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근데 진심 같진 않았어. 마음에 없는 소리지만 분위기상 해준단 느낌 이었지."
사실 그 상황만 본다면, 큰세진의 말은 앞에서 다른 멤버들이 말했던 것과 비슷했다.
문제는 그동안 쌓인 게 있었다는점이다.
'실제로 데뷔 극 초반에는 너 X같은데 팀이니까 웃으며 대해준다는 느낌이었고.'
배세진 입장에서는 그때 인상이 강하니, 그 성의 없는 말투가 계속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너야 무시하는 것보다는 그게 팀분위기에 낫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인 건 알아. 근데 어떤 사람한테는 그게 더 견디기 힘들 수도 있지."
"…."
"물론 먼저 너랑 좀 괜찮은 분위기에서 따로 상의해 보는 게 더 좋았겠다만… 성격상 그게 안 됐을 거야."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내 물을 마시며 피식 웃었다.
"그냥 네가 그 형이랑 성격이 안맞아서 그래."
"….하."
큰세진이 한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이번 기회에 대화 좀 해봐라."
차라리 서로 행동 원리를 머리로라도 이해하면 '저 새끼도 날 엿 먹이려는 의도는 없다' 선에서 용납해줄 순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대답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돌아왔다.
"…좀, 지긋지긋한데."
썩 긍정적이진 않았다.
"뭐가."
"그 형이 나랑 한 번이라도 잘 지내보려고 한 적 있나?"
"…!"
큰세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기억나? 아주사 때부터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말만 하면 정색했잖아."
…첫 번째 팀전부터 수많은 사례가 스쳐 가긴 한다. 나는 침음성을 참았다.
"…그렇긴 했지. 사정이 있긴 했지만."
"문대야, 여기 사정없는 사람이 어딨어? 노력 안 하는 사람도 없잖아."
큰세진이 픽 웃었다.
"그런데 그 형은 노력하고 사정이 있고, 원래 예민하니까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
배세진에 아예 기대를 버린 것 같은 뉘앙스였다.
"너도 봤잖아, 그 형 지금도 그래. 나랑 예능 잡히자마자 질색하던데. 그건 또 무례한 게 아닌가? 내가 싫어도 좋게좋게 대하다 보니 티가나는 건 비꼬는 거고?"
큰세진은 어쩐지 좀 지친 것 같았다.
"그래 뭐, 어쨌든 네 말은 알겠어. 말했잖아. 사과할게. 일단 좀 자고…내일 이야기해 보면 되겠지."
"…."
미치겠네.
나는 한숨을 참다가, 그냥 내쉬었다.
"야, 그렇게 불편하면 하지 마."
"…!"
"둘 싸운다고 당장 앨범이 망하는 것도 아니고…. 안 내키는데 굳이 마음에도 없는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차라리 시간 날 때 욕하고 싸우는 게 낫겠어."
큰세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뭐?"
"내일 오후부터 스케줄이야. 그전에는 풀어야 티가 안 날 테니까."
"…."
와, 진짜 대단한 놈이었다.
'본인 마음이고 나발이고 일단 일이 우선이군.'
이러니 1인분도 간신히 소화하는 배세진한테 감정이 더 좋아지긴 힘들지.
'게다가 이놈 백그라운드도 있고.'
나는 굳이 이놈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를 떠올렸다.
일단 이놈 말부터 무너뜨려 놓자.
"우리 멤버가 7명이야. 굳이 둘이 대화 안 해도 한두 번은 우연으로 넘어갈걸. 내 태도가 한 달쯤 통으로 쓰레기 같았는데도 큰 문제로 안 번졌잖아."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말하기 약간… 껄끄럽긴 하지만 다른 수는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대화해 보라고 이야기한 건 일종의 경험담이기도 한데. 나도 청우 형이랑 대화해 보니까좀… 괜찮아졌거든."
"…! 그거랑은 다르지."
"아니, 비슷한 부분도 있어."
나는 내 물을 마셨다.
"난 그 형이 불편했던 게 아니라, 그 형을 보고 연상되는 사건이 불편했던 거니까."
"…."
"너도 비슷한 거 같은데."
"뭐가."
"네가 배세진 형한테 계속 박한 평가를 주는 여러 이유 중에, 나처럼 연상되는 사건이 있어서 불편한 것도 있지 않냐는 거지. '배우 출신 마지막 멤버'잖아."
"…!"
그렇다. 큰세진이 예전에 콘서트 유닛 무대 준비하면서 털어놓은 과거사가 마음에 걸렸다.
본인이 데뷔조에서 잘린 이유.
-하필 딱 출범 직전에, 부모님 두 분이 전부 배우인 애가 새로 들어왔거든? 인지도가 있어서 팀에 넣어야겠는데… 윗분이 꼭 7명으로 내겠다는 거야. 어쩌겠어? 한 명 잘리는 거지.
똑같이 배우 키워드에 본인보다 실력이 부족한 마지막 멤버인 배세진을 보며 이 트라우마가 무의식 중에도 지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
큰세진은 뒤통수 맞은 얼굴로 입을꾹 다물었다.
사실 이거 잘못하면 나랑도 싸울수 있겠다 싶은데, 멍청한 놈은 아니니까 내 말뜻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대화를 좀 하면서 배세진 형이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라는 거였어. 당장 이해하거나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상대를 좀 차분하게 판단해 보라는 거지."
"…."
큰세진은 느리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쉰 뒤에, 어깨를으쓱거렸다.
"…그래, 알았어. 해볼게."
아까 전의 '이야기해 보겠다'와는 다른 뉘앙스의 대답이었다.
상황을 넘기기 위해 적당히 사과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대화해 보겠다는 뉘앙스.
'됐네.'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나는 물병 뚜껑을 닫으며 방바닥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했다."
"어이고, 수고 많으셨어요, 문대 선생님."
"그만해라."
"하하!"
큰세진은 실실 웃으면서도 약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마 본인의 거부감에 정말 그렇게 비합리적인 측면도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고 있을 것이다.
'알아서 정리하겠지.'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도더는 피곤해서 못 해 먹겠다.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 자러 간다."
"그러셔요. 아 맞다."
"왜."
배세진과 관련된 질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의외의 말이 나왔다.
"너 그때 그렇게 태도 쓰레기 같지 않았어, 문대야. 그냥 아픈데 열심히했지. 청우 형도 걱정만 했어."
"…!"
"신경 써줘서 고맙다. 잘 자."
큰세진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방문을 닫았다.
달칵.
"…."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느낌이 좀 이상했다.
"음."
나는 닫힌 문 앞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배세진이 류청우와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거기 들어가긴 좀 그럴 테니까.
거실에는 아까 봤던 셋이 나란히 모여서 TV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방 언제 들어가요? 졸려요."
"조, 조금만 더 기다리자…."
"참아, 바보야. 거실에서 자면 되잖아."
"나 바닥 싫어, 침대 좋아."
"형들 마음보다 그게 중요해?"
"두 개 다 중요해!"
차유진과 김래빈은 멱살을 잡고 싸우기 직전이었다. 선아현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얘, 얘들아. 싸우지 말고…!"
나는 침음성을 참으며 말을 걸었다.
"…너희들 다 들어가."
"형!"
"문대 형!"
"화, 화해했어…?"
"아니."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는 다짐을 받아낸 후에 차유진을 큰세진이 있는 방으로 귀가시키고, 김래빈도 류청우를 기다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선아현에게 말했다.
"우린 그냥 거실에서 자자."
"으, 응!"
데뷔 이후에 처음으로 침대가 아닌곳에서 자보게 생겼군. 새삼 그동안 잘 지냈다 싶다.
하지만 다른 방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내오는 순간, 류청우가 우리방 밖으로 나왔다.
"형."
"아, 얘들아. …너희 이불 꺼내왔어?"
"이, 이야기가 길어지실까 봐요…."
"아, 괜찮아. 들어가서 자. 세진이랑 이야기 끝났어."
"잘됐나요?"
"음…."
류청우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세진이가 마음고생을 좀 한 모양이더라. 무조건 누구 탓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둘이 푸는 자리를 한번 마련하긴 해야겠어. 이세진이 쪽은 어땠어?"
"정신 차리면 대화해 보겠대요."
"좋아. 그럼 우리 내일쯤 상황 보고 다시 이야기해 보자."
"예.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너야말로 수고했어."
아마 류청우가 배세진의 말을 계속 잘 들어준 모양이었다. 대충 굿나잇 인사를 하고 선아현과 방으로 돌아가니, 배세진은 확실히 안정된 상태였다.
"…미안해. 나 때문에 분위기 불편했지."
"아, 아니에요…! 형, 형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냥 좀… 어쨌든 미안해. 조심할게."
배세진은 창백하고 부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니, 침대에 누워서 미동도 없이 조용해졌다.
안 봐도 내부에서 스트레스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엄청나게 번뇌했나 보군.'
안 들어도 뻔했다.
'내가 너무 지나쳤나'로 시작해서 '아니, 그런데저 새끼가'까지 온갖 생각이 오르락내리락했겠지.
"…."
선아현이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침대로 가자, 나는 한숨을 쉬며 방 불을 끈 뒤 내 침대에 누웠다.
'모니터링을 못 했네.'
원래는 차 안에서 할 생각이었는데, 알다시피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지금이라도 좀 해둘까.'
나는 스마트폰을 켠 뒤, 뉴스 기사부터 천천히 여론을 살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서 작은목소리가 들렸다.
"…안 자?"
배세진이었다. 잠든 선아현을 의식했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아직은요."
"…."
배세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주 주저하는 쉰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내가 잘못한 걸까."
불안이 느껴졌다.
"아니요. 괜찮을 거예요."
그냥… 더럽게 안 맞는 놈 둘이 나름대로 그룹을 위한답시고 서로 참아서 지금까지 곯은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배세진 쪽이 더 약자니까 이쪽이 더 힘들었을 것이고.
"….음."
흐 .
이불을 뒤집어썼는지, 아주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들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호들갑을 떨지 않고 조용히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대화하고 나면 결론이 나겠지.'
그때까지는 둘이 좀 떨어뜨려 줘야겠다.
다음 날, W라이브에서 하필 그 두사람이 같은 조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때의 생각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3화]
내가 싸운 둘이 당장 빨리 풀지않아도 스케줄 한두 번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소리를 했던가?
정정하겠다. 개소리였다.
'어떻게 첫 타에 둘이 붙냐 X발.'
대충 덮고 넘어갔다가 한 반년쯤 뒤에 더 크게 터지면 진짜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작살 날까 봐 리스크를 감수했던 거였는데.
설마 그 리스크가 첫 판에 다 터질 줄은 몰랐지.
'꿈이면 좋겠다.'
이 사단을 막으려고 방어책을 쌓았는데 도리어 거기서 터졌다는 게 제일 어이가 없었다.
일단… 이번 w앱 컨텐츠는 이렇게 시작했다.
"러뷰어들 안녕하세요! 저희가 이렇게 7명 다 같이 W앱 하는 건 오랜만이죠? 예고했는데 혹시 보고 오셨나요∼?"
"저희 지금… 짜잔. 실내 클라이밍 센터입니다. 오늘은 저희 좀 새롭게 노는 모습 보여드리려구요."
"2인 1 조로 나눠서 해볼까요? 넵. 환호 감사합니다."
"아, 청우 형은 형평성 문제로 사회를 보시겠답니다!"
여기서 원래 MC가 큰세진이었다.
사실 무슨 올림픽도 아니고 우리끼리 노는 건데 형평성이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류청우가 양민 학살하면 그게 더 재밌었겠지.'
하지만 큰세진이 MC를 보면 배세진과도 계속 대화를 나눠야 했기 때문에 임의로 빼서 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슬쩍 회사에 이야기해뒀다. 저 둘이 같은 팀이 되지 않게 수 좀 써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전달과정에서 무슨 오류가 발생한 건지, 젓가락 뽑기 결과 큰세진과 배세진은 같은 색을 나란히 뽑았다.
"…와! 두 세진이가 같이 블루 팀입니다."
시청자가 이상한 낌새 눈치채기 전에 당장 박수부터 치자.
짝짝짝짝!
다행히 다들 필사적으로 박수를 쳤다. 얼추 괜찮을 듯싶었다.
"오, 저희 잘해봅시다 형."
"… 그래."
그래도 카메라 앞이라고 대화를 하는 게 용했다.
회사에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이 새끼들 진짜 이런 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
이런 실수야 어디든 흔하다지만,이 타이밍이 맞물리니 정말 갈아 치우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점을 집어주겠다. 편집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녹화본이 아니라 생방송 라이브였다.
"…."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
방송이 끝나면 우르르 익명 계정이 새롭게 등장할 게 눈에 벌써 선했다.
'안 돼.'
저 둘 멘탈 빠개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식은땀이 다 나던 그때, 옆에서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형! 우리 이겨요! Go Red Team∼Go Red Team!"
"그래."
그거다. 남은 놈들이라도 리액션을 호들갑스럽게 해서 위화감을 묻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같은 팀이 된 차유진을 일부러 부추겼다.
"어떤 팀이 이기기 좋을 것 같냐."
차유진은 예상대로 움직여줬다.
"Umm… 김래빈 팀이요!"
"그 발언은 단순한 호기일 뿐이야! 나랑 아현 형은 전 룸메이트로서 분명 효과적인 운영력을…."
됐다. 이제 다들 폭소하면서 리액션만 하면 된다.
나는 비슷한 방법으로 차유진을 잘 써먹으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힐끗 본 w앱의 실시간 채팅창 반응도 의도대로였다.
-문대 왜 이렇게 신났엌ㅋㅋㅋㅋㅋ
-아니 문대얔ㅋㅋㅋ
-막내즈 순 말티즈같은 놈들
-벌써 노잼
-귀여웡ㅠㅠ
음, 안정적이고 내용 없는 악플을 보니 아직 싸한 느낌은 없나 보군.
'저 두 놈 경기할 때만 잘 넘기면되겠어.'
다행히 3팀이라 부전승으로 결승에 올릴 팀으로 저놈들 팀이 선정되었다.
물론 일부러 져줬다.
"그럼 가위바위보 하나 빼기 결과… 바로 올라가는 팀은 블루!"
"오∼"
"게임을 적게 하니까 오히려 손해를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야∼ 고맙다 래빈아. 덕분에 안 신나졌어."
큰세진은 흔한 하이파이브 한 번 하지 않은 둘의 상황을 김래빈의 말때문인 것처럼 부드럽게 넘겼다.
-ㅋㅋㅋㅋㅋㅋㅋㅋ아웃겨
-래빈이 명석해
-으윽 갑분싸
-배세 표정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한고비만 남았군.'
저 둘이 결승에서 같이 등반하다가 서로 노려보거나 닿기만 해도 어깨를 확 빼버리는 등의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됐다.
나는 차유진과 함께 김래빈-선아현의 팀을 상대로 등반을 시작하며, 약간 긴장했다.
'탈락하면 안 된다.'
저쪽이 이겨서 올라가면 대인관계에서의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거란 기대가 안 들었다.
문제는 생각보다 저쪽이 클라이밍을 잘했다는 점이다.
특히 선아현이.
"화, 화이팅…! 발,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슥슥 올라가더니 김래빈도 끌어올려 주더라고.
힘과 균형 감각은 칭찬해 주고 싶으나, 도움이 안 됐다.
'하기야 져줄 눈치가 있었으면 애초에 저 팀이 질 필요가 없었겠다만…'
나는 침음성을 참으며 묵묵히 등반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기긴 했다.
"레드팀 승리!"
"와우!"
엄청난 속도로 올라간 차유진이 상대 팀원 둘을 모두 견제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착지한 뒤, 기꺼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잘했어."
"히히."
차유진이 히죽히죽 웃더니, 김래빈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기기 좋아!"
"차유진은 다른 사람의 등반을 방해했고 저와 아현 형은 서로 도왔기때문에 본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Hmm, Whatever∼"
차유진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성토하는 김래빈이 귀엽다며 우는 물결이 한 번 지나갔다.
-최고의 토끼ㅠㅠㅠㅠㅠ
-예능을 알아버린 차고영
-김래빗 귀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운명의 순간이 왔다.
"자, 테스타의 클라이밍 시합, 결승전 이제 시작합니다. 다들 준비하시고… 어허, 유진이 뒤로 물러서."
"넵."
칼같은 류청우의 제지에, 게임으로 흥분했는지 앞으로 약간 빨리 나오던 차유진이 도로 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늦어도 이겨요!"
"…!"
"오∼ 유진이 자신감 넘치는데, 이러고 형들한테 지면 너무 창피하지 않겠어?"
큰세진이 뼈 있는 말을 던졌으나, 차유진이 실쭉하게 웃었다.
"못 이겨요!"
"…!"
미친 어그로였다.
'이 새끼 왜 이래.'
그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발언이 웃기려는 건 줄 알았는지 관계자들이나 실시간 채팅 반응은 괜찮은 것같았으나, 내가 보기에 이놈은 진지했다.
'한 번 이겨서 눈에 뵈는 게 없나?'
이놈들 지금 긁으면 안 되는….
"어어∼? 이기면 어쩌려고 그러지 유진이? 우는 거 아니야?"
"안 그래요!"
큰세진이 씩 웃었다.
"그래? 그럼 확인해 봐야겠네∼"
진심이 느껴졌다.
긴장한 채 빳빳이 굳어 있던 배세진마저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장갑을 점검하고 있었다.
눈이 돌아간 게 틀림없었다.
'이 새끼들 둘 다 무시당하는 거 더럽게 싫어하는구나.'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번뜩였다.
잠깐만, 이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건가?
나는 당장 입을 열었다. 일부러 되는 대로 진지한 척하면서.
"그러게. 질 것 같지가 않다."
"맞아요!"
"와, 박문대 너까지 그러냐!"
큰세진이 야유하는 가운데, 이번엔 배세진까지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배신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왜 저래.'
어쨌든 성공이었다. 경기에 과몰입하게 만들면 위화감이 덜 느껴지겠지.
"자∼ 기선제압은 그쯤 하자. 네 사람 다시 나란히 서고."
멤버 넷은 아까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시합장 앞에서 대기했다.
"준비… 출발!"
그리고 우르르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진짜 열심히 하네.'
나는 상황을 보기 위해 일부러 적당한 속도로 올라가다가, 아주 위만보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세 사람을 보며 좀 질렸다.
'좀 조심하는 게 낫지 않나.'
특히 근육량 부족한 쪽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배세진이 순간 다리를 헛디뎠다.
"…!"
하지만 곧바로 다시 자세를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차유진의 질문에 대답하는 배세진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차유진과 투닥거리며 올라가던 큰세진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저 먼저 올라가 있겠습니다∼"
본인도 걱정하는 말이라도 해야 했는지 고민했나 보군.
의외인 것은 배세진이 대답했다는것이다.
"…알았어. 잠시만."
"오우∼"
참고로 뒤의 감탄사는 차유진이다.
차유진은 그 직후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차유진 성공!"
"YEEES-!"
차유진은 곧장 휙휙 자리를 옮기며 배세진을 방해하는 것처럼 몇 번 별영향력 없는 시늉을 하더니, 얼마안 가서 내가 있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마치 지탱에 도움을 줄 것처럼 팔을 뻗다가, 입 모양으로만 속닥거렸다.
영어였다.
[우리가 져줘야 해요!]
"…!"
We have to lose.
차유진에게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통찰력 있는 발언이었다.
'꿈인가.'
물론 현실이었다.
나는 순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차유진을 볼 뻔했으나, 곧 더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솔직히 연속 두 경기로 손에 힘이 풀릴 참이라 봐준다고 말하기도 웃겼다.
"헉."
"문대 형 괜찮아요?"
"어, 멀쩡해."
차유진이 슬쩍 안부를 묻는 척하며 내 등반이 지체된 사이, 배세진은 아득바득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목표한 홀드를 터치했다.
"됐어…!"
돌아보는 배세진의 얼굴이 시뻘겠다.
"좋습니다, 블루팀 승리!"
"오오!"
홀드를 의기양양하게 잡고 있는 배세진에게 다른 멤버들이 긴장감도 잊고 박수를 보냈다.
'나도 됐다.'
나는 바닥에 착지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자연스럽게 지는 건 성공했다.
이어서 차유진이 무슨 묘기라도 부리는 것처럼 멋을 부리며 내려온 뒤, 이긴 두 사람도 바닥으로 착지했다.
"아니, 유진이 이긴다며∼"
"저 이겨요! 문대 형이 세진 형한테 져요."
"야."
일부러 차유진의 등짝을 쳤다. 뒤에서 촬영을 관람하던 관계자들이 황급히 웃음을 참았다.
"아야! 등에 구멍 나요!"
나는 누가 봐도 호들갑을 떠는 차유진을 내버려 두고, 배세진에게 말을 걸었다.
"형 잘하시던데요."
"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지."
말은 그러면서도 뿌듯한 얼굴이군.
큰세진이 엄살을 부리는 차유진과 설전 같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
나는 큰세진에게 슬쩍 턱짓했다.
큰세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잘하시네요. 형."
"…!"
배세진은 어깨를 보니 화들짝 놀랄 뻔한 것 같았으나, 다행히 얼굴은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고마워. 너도… 잘하더라."
"하하."
둘은 굉장히 정중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무리 카메라 앞이라 저러는 거라지만, 그래도 화가 좀 누그러든 것은 분명해 보였다.
'둘 다 간밤에 생각이 많았나 보군.'
옆에서 흐뭇하게 그것을 지켜보던 차유진이 영어로 속닥거렸다.
[스포츠에서의 활약과 승리. 언제나 통한다니까요.]
"…경험담이냐?"
[제가 꽤 좋은 미식축구 선수였거든요! 물론 뭐, 중학교 때였지만요]
아무리 내가 영어회화를 속성으로 떼는 중이라지만 이놈 말 절반은 표준어가 아니라 제대로 못 알아먹겠다. 대체 한 문장에 'like'가 몇 번 등장하는 거냐?
…물론, 훌륭한 판단력이라는 건 나무랄 수 없겠다.
'역시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를 안 보는 거였군.'
나는 차유진의 등을 툭 쳤다.
"잘했어."
"그럼요!"
마치 2등 세레모니처럼 적당히 주먹이나 맞대고 있자니, 이번 촬영을 무사히 넘겼다는 실감이 났다.
그리고 싸운 둘이 적당히 온화한 분위기에서 대화할 준비도 생각보다 빨리 끝난 듯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