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W라이브를 포함한 그 날의 스케줄을 모두 끝내고 숙소에 돌아온 밤 11시.
싸운 둘을 위해 방 하나를 비워준 나머지 놈들은 다시 거실에 모였다.
참고로 비워준 방은 3인 방이다.
그쪽이 더 넓으니까.
급하게 나오느라 뜨려고 잡았던 수세미도 놓고 온 선아현이 중얼거렸다.
"자, 잘 푸셨으면 좋겠어…."
"그러게."
사실 류청우라도 저 자리에 끼워놔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긴 했는데, 그러면 도리어 제삼자를 의식해서 겉핥기식으로 끝날까 봐 폐기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대판 싸우는 게낫지.'
좀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대화할 자세도 갖추었으니, 이젠 싸워도 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들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럼 시간이 좀 지나면 선을 지킬수 있다.'
격한 감정은 사라지고 기억은 남기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생각이 많은 타입이니, 그 시간이 길지도 않을 것이다.
"넷플러스 틀어요!"
"그래. 너 보고 싶은 거 봐."
차유진은 류청우의 허락에 태평하게 미국 시트콤을 틀었다.
영어로 떠들썩해진 거실에서,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회사와의 통화 내역이 찍혀있었다.
[운영팀 오서형 대리님]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항의한 흔적이다.
그렇게 요청하고 당부했는데도 오늘 w앱에서 싸운 둘이 한 팀이 된일에 대해서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러는데 화 안내면 호구지.'
워낙 워라밸이 없는 동네다 보니 어지간한 실수는 그러려니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치명적일 수 있는 건 알아서 신경 잘 써야 할 것 아닌가.
'불화설 폭탄을 이렇게 다뤄?'
변명을 들어보니 '마크 있는 걸 뽑지 말아라'가 '뽑아라'로 와전되면서 전달되어 이렇게 됐다는데, 뭐, 그건알겠다.
문제는 그 뉘앙스였다.
-근데 사실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이 큰 문제 없었잖아요…. 조심하는 건 좋고 저희 쪽에서 실수한 일이긴 한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한마디로, '애초에 별일 아니었는데 너희가 오버한 거 아니냐'는 뜻이다.
'이 새끼들 너무 풀렸네.'
아무래도 그간 외부에서 일이 많이 터지고 거기만 집중하다 보니, 내부에선 테스타의 무던함을 안일하게 믿게 된 것 같다.
이러다 진짜 누가 돌발 행동이라도 하면 대처가 느릴 것 같아서 영 별로다.
'이건 손질 좀 들어가야겠는데.'
나는 적당히 그림을 뽑아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스마트폰을 내렸다.
'일단은… 저놈들부터 해결되면.'
소파 앞에서는 차유진이 자기가 좋아하는 시트콤 등장인물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김래빈이 진지하게 말렸다.
"아직 이 드라마를 안 본 사람에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니 자중…."
"스포일러 아냐!"
"스포일러 맞아!"
저놈들 목소리 때문에 드라마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방에 들어간 두 놈이 악을 쓰고 싸워도 못 듣겠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해당 방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뛰쳐나왔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상기된 배세진이었다.
"박문대!"
'쟤가 내 이름 부르는 걸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설마 둘이 의기투합해서 날 공격하는 걸로 결론을 냈냐.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너,너… 좀, 들어가자."
"예?"
"와보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일어났다.
그리고 얼결에 배세진에게 몰려 방으로 들어갔다.
"오우! 형들 싸우…."
"자자, TV 봐, 유진아."
배세진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시끄러운 드라마 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던 큰세진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멱살 잡는 소동은 일어나지 않을 듯싶었다.
'괜찮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날 불렀냐.'
떨떠름하게 바닥에 앉으니, 기다렸다는 듯이 큰세진이 입을 열었다.
"일단… 형이랑 대화 좀 하면서 정리를 좀 해봤어."
"그래."
"들어봐."
큰세진은 차분히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중간중간 배세진이 끼어들 틈까지 주는 완벽히 정제된 태도였다.
'사무적이군.'
우선, 둘 다 앞으로 태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한 모양이다.
"앞으로 최대한 서로 감정 상하지않는 쪽으로 가려고."
큰세진은 본인이 배세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아 무시하듯이 굴었다는 점을 사과했고, 배세진도 심경이 복잡한 나머지 갑자기 강하게 공격한 점은 사과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서로 좀 조심하기로 했어."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서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말이야."
이야기하다 보니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게 있었다고 한다.
배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고, 객관적으로 좀 봐줘. 어떤지."
리더인 류청우가 있는데 굳이 나를 배심원으로 초빙할 필요가 있었냐는 말이 목까지 올랐으나, 참았다.
'상태이상만 아니었어도 진짜.'
이놈들은 내 시한부 상태에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무슨 말인데요."
배세진이 침을 꼴깍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도 그렇게 비협조적이야?"
"…!"
배세진은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각각 꾹 움켜쥐었다.
"나는… 내가, 못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별로라면 알겠어. 그런데…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거야. 진짜야."
"…형 노력하시는 건 다들 알죠."
큰세진이 진절머리가 나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형이 노력을 안 하신다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형이 노력하는 것 외에 나머지는 신경을 안 쓰시니까…."
배세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경을, 안 쓴다고?"
큰세진이 한숨을 쉬었다.
"들어보시려는 생각보다 화부터 나죠? 이래서 제가 그냥…."
"잠깐."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나는 큰세진이 뭔가를 더 쏟아붓기 전에 끊었다.
"설명을 더 해줘야지. 형이 신경 안 쓴다는 나머지가 뭔데."
"너도 알잖아."
큰세진은 약간 진정된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자기가 아니라 그룹을 보여주는 거엔 하나도 신경 안 쓰시는 거."
"무슨…."
"모든 멤버가 의좋고 사이좋은 그룹처럼 보이는 데 별 관심 없으신거 알아요. 근데 이 그룹 존속에 큰 관심이 없으셔도 그 정도는 카메라 돌면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큰세진이 지친 투로 말했다.
"아이돌 그룹이잖아요. 그런 것도 중요해요."
"…!"
배세진은 굳었다. 그리고 잠시,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답은 천천히 나왔다.
"알았어."
"…!"
"…내가 그런 건 잘 몰라서… 미안. 앞으로는 신경 쓸게."
이번에는 큰세진이 말문이 막혔다.
'생각하고는 좀 다르게 흘러가나 보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배세진에겐 애초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돌 그룹이었을 텐데, 심지어 서바이벌 개인전으로 올라왔다.
그러니 그룹 케미스트리고 나발이고 그런 걸 눈치채거나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무대 연습하기도 버거웠겠지.'
사실 큰세진이 편견 없이 생각했다면, 진작에 오해하지 않았을 수도있었다.
다만 '배우' 때문에 데뷔조에서 탈락했던 트라우마와 겹쳐서 무의식중에 생각이 고정된 것이다.
'어차피 배우 할 텐데 딱 지금만 존버 해보려는 거겠지'로 말이다.
그리고 큰세진에게는 충격스럽게도, 심지어 배세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나도 이 팀이 좋은 팀이라고 생각해. 잘하고 싶고, 폐 끼치고 싶지않아. 또, 이 팀으로… 활동할 수있어서 좋고."
"…."
배세진은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 머뭇거렸으나, 쥐어 짜내는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카메라 돌 때만 친한 척한다고 해서 미안해. 넌 그냥 잘해보려고 한 거였구나."
"…!"
큰세진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대답은 한 박자 느리게, 충분히 생각한 후에 나왔다.
"아니요. 제가 함부로 억측했네요. 죄송합니다."
"…!"
이번엔 배세진이 의외란 얼굴을 했다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크, 크흠. 괘, 괜찮아!"
보니까 슬쩍 열 받았어서 화낼까말까 약간 갈등했는데 참았군. 저놈도 많이 성장했다.
큰세진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저도 뭐, 이득 보려고 한거 맞죠! 동명이인 캐릭터 좋잖아요∼"
평소와 비슷한, 유들한 어조였다.
다만 평소 배세진과의 영혼 없는 대화보다야 훨씬 솔직하게 느껴졌다.
배세진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 뭐, 그래."
여기선 또 부정해 주는 게 서로 더 풀고 화해하는 대화로 이어졌겠다만, 배세진의 한계는 여기까진가보다.
아니나 다를까, 큰세진은 벌써 쓴웃음을 짓고 있다. 화해 제스처를 뭉갰으니 이해가 안 되겠지.
'괜찮아. 여기까지만 해도 별 다섯개급 전개다.'
어쨌든 서로의 행동에 대단한 악의는 없었다는 걸 사례 하나로 확실히 증명했지 않은가.
앞으로는 상대 때문에 빡칠 때마다, 괜히 과한 추측으로 스트레스안 받고 '원래 그런 놈이지' 하며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겨우 시작점으로 돌려놓은 거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정말 할 만큼 했다.'
간절히 맥주가 당겼다. 찾으러 가야겠다.
"그럼 배세진 형은 협조적이신 걸로 하고… 전 나가보겠습니다."
배세진이 화들짝 놀랐다.
"어? 자, 잠깐."
"야, 같이 나가자∼ 아, 형, 더 말씀하실 거 있으세요?"
"…없어."
"그러시다네."
큰세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서로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음, 그래."
괜히 더 깊은 대화 나누게 했다가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르니 이 상태로 고정해 두는 게 좋겠지.
나는 둘과 함께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거실에서 안도와 환영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을 피해, 냉장고로 향했다.
'아마 두 캔 정도 남았던 것 같은데.'
지금 체중에도 문제 없으니 야밤이라도 한 번은 괜찮겠지.
달칵.
"…."
없어.
"여기 맥주…."
"여기요!"
"헉, 죄송합니다, 마지막 캔인 줄모르고 함부로 차유진이…."
거실에 누운 차유진의 손에는 다비어 찌그러진 캔이 흔들리고 있었다.
"…."
이 새끼가….
"무, 문대야. 나, 양주 받은 거 있는데, 마실…."
"고마워."
"뭐, 뭘!"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건강에 도움되는 놈은 선아현뿐이었다.
나는 돌아간 방에서 선아현의 양주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거, 건배!"
룸메이트인 배세진도 극한의 스트레스에서 해소된 느낌에 취했는지, 양주 시음에 기꺼이 동참했다가 죽은 듯이 잠든 게 그날의 마지막 사건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 작은 세진이한테 제안이 하나 왔는데 말이야."
매니저가 샵으로 가는 차 안에서 슬그머니 갈등의 원인을 도로 집어왔다.
"드라만데, 작가님이 작은 세진이를 아신다는… 얘들아?"
"…."
배세진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지 새끼야.
매니저는 삽시간에 굳은 차 안 분위기에 당황했으나, 뒷자리의 배세진은 숙취로 퀭한 눈으로 큰 동요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안 해요."
"그, 그래? 근데 큰 거 아닌데…매니저가 더 당황하기 전에, 류청우가 배세진에게 물었다.
"…세진아, 그래도 비활동기랑 겹칠 수도 있으니까 한번 봐두는 것도 낫지 않겠어?"
"…!"
배세진은 살짝 동요한 자신이 창피한지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난."
"청우가 좋은 말 했네! 다들 괜찮지?"
둘이 대판 싸웠던 날 차에 없었던 첫 번째 매니저는 앞자리에 앉은 '넉살 좋은 놈'을 지정해서 리액션을 시켰다.
큰세진 말이다.
"….음."
별 기색 없이 매니저를 보던 큰세진이 입을 열었다.
"활동에 지장만 없으면 되지 않을까요? 형이 알아서 정하시겠죠∼"
"…!"
담백하고 완곡한 중립 선언이었다.
이번에는 배세진도 '알아서 처신 잘해라' 같은 느낌을 받지는 않았는지, 약간 놀란 얼굴로 큰세진의 좌석 쪽을 보았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뒤, 매니저에게 말했다.
"…그럼. 시놉은 볼게요."
"오∼ 좋지!"
하지만 매니저는 약간 난감한 얼굴로 슬쩍 설명을 붙였다.
"근데 시놉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예?"
"어, 이거 카메오 같은 거거든?"
"…!"
"작은 세진이 예전에 영화에서 했던 그 애기무당 있잖아? 그게 깜짝 출연하는 느낌으로다가…. 세진아? 듣고 있지?"
"…."
그렇다. 이 모든 개싸움은 원인부터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큰세진과 배세진은 멍한 얼굴로 그날 관리받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어쨌든 며칠 뒤, 배세진은 1, 2화에 깜짝 등장하는 '미친놈으로 잘 자란 애기무당' 촬영을 하루만에 끝마쳤다.
"와…."
"어어어…."
당일에 시청한 결과, 무당과의 싱크로율이 거의 귀기 어린 수준으로 훌륭했으며 대단히 박력이 있었다.
그 귀기가 실제 빡침에서 우러난 것 같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형 진짜 연기력이 대단하십니다."
"멋져요!"
"…이, 이 정도 가지고 뭘."
뭐, 결국 배세진도 좋아하긴 했고.
다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온 예고편이 더 충격적이긴 했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2]
[금요일 오후 10시 방영]
아주사 시즌4 방영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5화]
"오∼ 아주사."
"이번 주부터였구나."
아주사 새 시즌 광고가 떴을 때, 드라마를 보던 녀석 중 몇 명이 성의 없이 감탄했다.
아마 썩 기대되진 않을 것이다. 그냥 촬영은 했으니 아는 척하는 거겠지.
하지만 30초짜리 광고가 다 지나갔을 때, 그 평정심은 황당과 부끄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돌 주식회사 가 만든 KPOP 국민돌]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하는 글로벌 현상]
[테스타 (TeSTAR)]
[그 뒤를 이을 아이돌 주식들을 만나보세요!]
"세상에."
홍보의 절반 이상이 '테스타가 얼마나 대단했고 시즌4에도 등장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쉬운 방법을 썼군.'
시즌3가 방영 당시에도 어마어마하게 잘 나갔고, 데뷔한 그룹까지 기세 이상으로 잘 되었으니 초반 어그로에 이만한 게 없었다.
'이 드라마 끝에 광고를 넣은 것도 의도가 있었겠고.'
아주사 시즌3 출신 배세진이 깜짝 출연한 드라마 방영분 바로 뒤 황금타임에 시즌4 광고를 붙였지 않은가.
애초에 이 그림을 노렸다는 뜻이다. 회사가 제안을 거르지 않고 배세진에게 넘긴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초반 시청자 견인층으로 꼽은 게… 테스타의 팬들이라는거지.'
"…음."
아무리 팬층이 깊게 겹치지 않는다지만, 팬덤 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썩 좋진 않았다.
T1 이야 어차피 시즌 4로 데뷔할 애들도 자기 소속이니 환승을 유도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초반 화제성 몰이하고 나면 진짜 수요층을 끌어모을 테고.'
다만, 시즌 4가 생각보다 잘 되지못하면… 또 테스타 찬스를 써먹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안 좋은데.'
내가 보기엔 시즌 4는 준비된 시한폭탄이다.
가뜩이나 류청우와 작가의 친척 논란으로 신인상 때 그 지랄을 봤는데, 혹시 시즌4에서 공정성 논란이나는 순간 엮이는 건 십상이다.
안 그래도 테스타는 데뷔 이후에 크고 작은 잡음 때문에 피로도가 높아지기 쉬운 걸 앨범 퀄리티와 이미지로 누르고 있다. 더는 곤란하다.
'이번 출연 분량으로 끝내야 한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번의 분량도 적었으면 좋겠다만.
나도 안다. 별 가망 없는 바람인것을.
'그 새끼들, 개인 컷도 따갔지….'
아마 자체 화제성이 궤도에 오를때까지 최대한 우려먹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던 큰세진이 피식 웃었다.
"오∼ 다른 예고편에도 우리 나온다."
소리만 들어도 인사하는 테스타와 비명을 지르는 이번 시즌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긴박하게 잘 붙여 편집된 게 아주 잘 들렸다.
[선아현입니다….]
[끄아아아아악!]
"조, 조금 부끄럽다…."
"아현 형 굉장히 잘생기게 나오셨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그, 으, 으으응…."
김래빈의 말이 제일 부끄러운가 보군. 잘 알겠다.
나는 이날 배세진의 드라마 출연반응을 체크하고, 아주사 새 시즌에 대한 반응도 잠깐 확인한 뒤 일과를 끝냈다.
아직까진 별 갈등이 없이 화제성만 있었지만, 어쩐지 폭풍 전야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주사 새 시즌이 방영을 시작했다.
"러뷰어 안녕∼"
"안녕!"
활기찬 인사와 함께, 큰세진이 스마트폰의 버튼을 눌렀다.
[W라이브가 종료되었습니다.]
마침 약간 시간도 있고, 주기가 돌아와서 W라이브를 진행했다.
주제는… 솔직히 말하겠다. 레파토리가 다 떨어져서 간단히 요리나 좀해봤다.
그래도 고기니까 괜찮았을 거라고 믿는다. 일단 먹는 놈들은 좋아했다.
"이거 먹어요?"
"그래. 먹어."
오늘의 메뉴였던 비어 치킨의 마지막 반 마리가 차유진의 입으로 들어갔다.
'잘 먹네.'
이놈이 오늘의 (스케줄이 마침 빈) W라이브 멤버 중에 제일 먹성이좋긴 했다.
나, 큰세진, 차유진, 그리고… 배세진 중에서 말이다.
"고생하셨어요, 형."
"한 것도 없는데 뭘…."
배세진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뇨. 형이 제일 조리에 도움이 됐는데요."
"…그래?"
"네."
"뭐, 크흠, 뭐 그렇다면야."
큰세진은 웃기는 데 집중했고 차유진은 먹는 데 집중했으니 사실 보조는 배세진뿐이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오늘 배세진은, 큰세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법 '협조적'이었다.
리액션을 많이 하고 진행과 관계없는 친목용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배세진의 이런 노력은 본인 생각보다도 큰 성과로 돌아올 것이다.
아주 적당한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배세진이 드라마에서 연기를 너무 잘했어.'
배세진이 아역배우 출신이라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지만, 아주사 에서의 분량 때문에 다른 멤버들보다 기량이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전반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 출연에서 '연기력'이라는 기량이 재인식되며 주가를 꽤 회복했다.
이런 식이다.
-배세진 진짜 개놀랐다 신들린 줄
-11살에 천만배우 짬 어디 안 갔네ㅋㅋㅋ
-같이 보면 엄마가 그 꼬마 이렇게 컸냐고 너무 즐거워했음
-더 길게 보고 싶었어요 작품해주세요∼ㅠㅠ
아주 센스 있는 카메오 역할이라 출연이 짧아도 인상 깊고, 연기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이득이지.'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배세진의 개인 팬과 안티가 모두 '연기하는게 낫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을 법하다는 게 문제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벤트성 단발 출연이라 그소리가 도마 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니, 지금 정도면 된다.
'자체 컨텐츠에서 의좋은 모습을 이런 식으로 계속 보여주면 괜찮겠지.'
그룹 활동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분위기로 충분했다.
'본격적인 연기는 도의상 이삼 년후에 시작하면 딱 적절할 것 같고.'
뭐, 사실 당장 내년 말부터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상태이상도 이번으로 끝이 맞다면, 그때쯤이면 이렇게 아득바득 성과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집중해야지.'
그래서 지금 팔자에도 없는 아주사새 시즌 모니터링을 진행하려고 하지 않는가.
분명 테스타의 1화 분량은 낚시일것 같아서 2화까지 쌓아뒀다.
"문대문대 뭐 해∼?"
"이번 아주사 좀 보려고."
"오∼ 좋은 생각인데?"
나는 마침 비어 있는 거실 TV를 선점해서 위튜브로 이동했다. W라이브를 같이 찍은 놈들이 슬금슬금 주변에 자리 잡았다.
'내심 궁금했나 보군.'
마침 메인에서 바로 해당 방송 클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2 국민대주식 테스타 등장 | 1, 2화 테스타 Clip]
이런 건 보통 시간이 좀 지나야 풀어주는데, 어지간히 당장 화제성이 급했나 보다.
"오∼ 썸네일 문대!"
공식 1등이잖냐.
어쨌든, 바로 클릭해 보았다.
[내게 아이돌 주식회사 란?]
화면에서는 어두운 배경으로 진지한 얼굴을 한 테스타 멤버들의 단독샷이 나왔다.
[제가 다 떨리네요!]
[저한테, 아이돌 주식회사는…]
[…새로운 기회?]
[내 인생의 전환점]
'우리 아주사가 이렇게 대단한 프로그램이에요'라고 분위기 잡는 용의 컷인가 보다.
"으으윽∼ 장난 아닌데?"
"cheesy 해요!"
"…하."
오랜만에 맛보는 아주사의 쇼비즈니스 맛에 정신을 못 차리는 놈들을 두고, 영상은 쭉 직진했다.
자신의 시즌 3 출연 컷들을 보고 회상하며 민망해하는 테스타의 모습이 훈훈한 BGM과 함께 나왔다.
"야∼ 문대 고개를 못 드네. 닭발이 창피해? 저렇게 맛있게 먹던 닭발이 창피한 거야?"
"시끄러."
그리고 테스타의 이 아주사 출연컷들과 활동 모습을 보고 있던 이번 시즌 참가자들로 장면이 연결되었다.
[진짜, 저도 저런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다.]
[도전욕이 불탔던 것 같아요.]
"…좋을 때다."
"Cheer up, guys∼"
"잘됐으면 좋겠네."
나름대로 동정과 공감의 눈으로 이장면을 보던 멤버들은, 다음 장면에서 탄식하게 된다.
[시즌3 참가자들의 촬영장 등장!]
[까아아아아아악↗!]
[※까마귀 소리 아닙니다※]
세 번쯤 리플레이를 하면서 등장씬을 조명해 주는데, 테스타를 거의 멤버 별로 잡아줬기 때문이다.
화룡점정은 참가자들의 인터뷰였다.
[제 원픽이셨거든요. 미치겠어요…!]
[막… 비명이 목구멍에서 그냥!]
[주체가 안 되던데요. 으허허허허!]
[문댕댕 실물! 진짜! 저 심장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저 불쌍한 마지막 참가자는 직속 선배를 존칭도 안 붙이고 별명으로 불렀다며 인터넷에서 뜯기고 있을 것이라는데 비어치킨을 걸겠다.
"음, 생각보다 민망한데?"
"왜? 전 좋아요!"
멤버들의 평이 갈리는 가운데, 화면의 격한 환영은 테스타의 멤버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덕담과 응원을 전할 때야 조금 진정되었다.
우선 차유진.
[WOW! 다들 힘내요! 긴장하지말고, 지금 순간을 즐기고, 열심히해요!]
넌 한 번도 악편을 안 받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며 언짢은 척하는 놈들이 몇 명 있었을 것 같다만, 그 정도는 차유진이 무슨 말을 해도 나왔을 테니 괜찮다.
그다음은 배세진.
[…여기서 원하는 걸 얻어가실 수있길 바랍니다.]
음, 실력 없는 놈이라 이런 뻔한 말밖에 못 하는 거라며 선동하려다 역공당해서 망했겠고.
다음은… 큰세진이다.
[아이돌 주식회사 가 큰 오디션이잖아요. 그렇다 보니 참 예상대로, 생각대로 안 된단 생각도 들 수밖에없는 곳인 것 같아요.]
'실패할 수도 있다' 밑밥 깔아주고.
[하지만 기회라는 것은 부정할 수없으니까,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응원하겠습니다!]
성취보다 도전 자체에 초점을 뒀다.
음, 여긴 흠 잡힐 곳이 없다. 프로그램도 심기 안 거슬릴 선에서 위상을 살짝 치켜세워주기까지 했다.
'눈치 빠른 놈이 뭐가 다르긴 하군.'
어쨌든, 여기까진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이상한 편집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 것 같다.
다만, 내 순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제일 마지막이었으니까.
"문대 형!"
"오∼ 라스트!"
재생 바가 거의 끝까지 가서야 화면의 박문대는 마이크를 들었다.
[이곳에 출연하면서….]
그리고 갑작스럽게 소리 없는 회상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저는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자주 생겼었어요. 제 능력이든, 상황이든.]
박문대가 팝콘을 추는 모습, 등급평가 때 잠도 자지 않고 연습하는 모습, 안무 연습하고 뻗어 있는 모습이 연달아 지나갔다.
그리고… 혼자 침대에 앉아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컷도.
"…."
미방영분. 아마 '박문대'의 과거를 깨달았을 때의 컷인 것 같았다.
[하지만 또, 가끔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때도 있더라구요.]
박문대의 무대 위 모습과 같은 팀 참가자들 속에서 구호를 외치며 살짝 웃는 모습이 짧게 잡혔다.
[여러분도 이 촬영이 끝났을 때, 더 넓은 시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화면, 테스타가 된 박문대가 고개를 숙였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컷 이후, 눈시울을 붉히는 이번 시즌 참가자들이 잡혔다. 물론 감동적으로 편곡된 이번 시즌 주제곡 BGM과 함께다.
"…."
"…그."
배세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런 느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다. 순 날조였다.
난 '1등이니까 조금만 더 길게 부탁드려요!'라는 부탁을 받고, 참가자들의 호의 속에서 매우 무난한 투로 응원을 마쳤다.
저런… 박문대의 지난 시즌 행적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며 연관 짓는 뉘앙스는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참가자들의 눈물도 없었다.
그 애들은 그냥 즐거워했다.
다만 놀랍진 않았다.
"아주사잖아요."
"그건… 그래."
이 대화로 이 자리의 모두가 상황을 납득 했다.
다만 인터넷에 있는 '모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대야, 기사도 좀 떠 있는데?"
"…그래?"
[아주사 새 시즌 출격. 다크호스에서 우승까지… 박문대의 역전극이 재현되나]
[일반인 출신 1위, 박문대의 현명한 조언.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2>]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2'부실주'였던 박문대의 급등 비결 전수?]
'이 새끼들이 진짜.'
오랜만에 먹는 아주사의 어그로맛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6화]
"폰 좀."
나는 큰세진의 스마트폰을 넘겨받아서 기사 하나의 내용을 훑어봤다.
박문대가 부실주였다고 타이틀을 뽑은 최고의 어그로 기사였다.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2 지난시즌 무스펙.무경력의 일반인으로 참가하여 우승한 박문대가 '한계를 뛰어넘을 때가 있다'며 참가자들에게 같은 경험을 독려했다.
…
프로그램 관계자는 '모든 것을 시청자의 선택에 맡기는 프로그램에서 누가 승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주사 시청의 묘미'라고 말하며, '흔쾌히 출연해 준 테스타에게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
"흠."
대충 알겠다.
'아주사 쪽에서 푼 기사가 맞네.'
박문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처럼 적어놨지만, 사실 중점은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주사의 드라마틱한 재미를 강조하고 싶은 거군.'
변변한 배경도 없이 참가한 놈이 갑자기 우승할 수도 있는, 마치 바이오주 같은 프로그램의 예측 불가성 재미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같다.
'좀 오버했는데?'
난 첫 등수도 골드 권이었고, 등급평가에서는 아예 플래티넘을 받았다.
그리고 꾸준히 화제성 있는 조에서 왕도를 달려서 막판에 가정사가 풀리며 우승한, 딱 정석적인 오디션 스타일의 참가자였다.
아주사 의 차별화된 스타일을 보여주는 참가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쓸데없이 뽕이 찼네.'
그냥 오디션의 재미를 상기시키는 쪽으로만 가면 될 텐데, 제작진들은 이 개막장 오디션 프로그램에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이놈들도 폼이 좀 떨어진 것 같군.'
짝수 시즌 말아먹는 게 징크스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역시 테스타는 발을 빼야겠어.'
소속 연예인인 이상 T1과 척지면 손해가 크니, 재출연이든 콜라보든 제의 들어오면 편하게 거절할 수 있도록 당위성부터 만들어놔야겠다.
우선 이번 기사의 여파도 좀 확인해 놓자.
"잘 봤다."
"오케이∼ 나쁜 느낌은 아니었지?"
"어. 괜찮네."
우선 팬들 반응부터.
나는 큰세진의 스마트폰을 돌려주고, 내 스마트폰으로 탐색을 개시했다.
"…."
그리고 당황했다.
-망주사 개새끼들 우리 애 잠죽자 고민 피땀눈물 다 구전설화로만 전해 듣게 만들더니 새 시즌에서 3초 보여줬네ㅋㅋㅋ
-조곤조곤 말하는데 내용이 진짜 문대가 이 일에 애정과 열정이 있다는 게… 많이 느껴져서 울컥했음 나 졸지에 지하철 4호선 사연녀됨
-문대 성격에 분명 팬들 걱정 안시키려고 티 안 냈을 거라는 게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우리 문대 주식사서 다행이야 데뷔해서 너무 다행이야
-박문대 X발 너무 좋아ㅠㅠㅠㅠㅠ탈덕은 죽음뿐
와 이거 좀… 민망한데.
심지어 아주사 이후 서바이벌이 끝나 시들해졌던 사람들까지 새 글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딘지 심금을 울린 부분이 있었나보다.
아주사가 싫어서 짜증 내는 사람 절반, 어쨌든 얼굴 봐서 좋다는 사람 절반일 줄 알았는데, 예상 이상으로 사람들이 집결되고 있었다.
'좋은 일이긴 하지…?'
약간 떨떠름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 다음은… 대중 반응인가.'
이쪽은 아예 별것도 없었다. 연예기사 댓글도 막힌 데다가, 기사 중점도 아주사 홍보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확 쏠렸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나에 대한 반응 대부분은 '좋은 말 했네' 정도였다.
부정적인 반응도 모아볼 수는 있긴해지만, 의미가 있나 싶다.
이 정도였거든.
-엥 그냥 뻔한 말 같은데 티넷 왜저랭
-넘 띄워준다ㅋ
-하기야 중졸 일반인이라 아주사 아니었으면 데뷔하긴 힘들었다고 봅니다.
-힘들게 큰 느낌이 딱 오디션에서 좋아하는 타입인 듯
이런 정도야 적은 본인들은 욕은 없으니 악플이라고 인지도 안 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막말이니 신경쓸 것도 없다.
'됐네.'
이용당해서 괜히 이미지 소모하는게 좀 짜증은 난다만, 팬들이 좋아했으니 적당히 퉁 칠 수 있다. 빠르게 손절 각이나 잡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스마트폰 화면을 끄려다가, 보던 SNS 글의 최신 댓글을 무심코 확인했다.
'박문대, 아주사 시즌 4에서 전한 현명한 조언'이라는 기사를 공유한 게시글이었다.
-박문대 막상 제대로 대화해 보면 무식 텅텅일 듯 으윽… X나 아무말이나 대충 씨불이고 멋진 척하면 회사에서 언플 해주기∼
'오?'
이거 뉘앙스가 아주 오묘했다.
그냥 내가 싫은 악플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흐름을 틀어보려는 키워드가 보였다.
'무식 텅텅?'
평소 박문대 뒤에 자연스럽게 붙는 표현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건 나한테 가장 타격이 클 만한 흐름도 아니 었다.
'아주사의 공정성과 T1의 언플을 엮는 식이 더 효과적일 텐데.'
그래서 뭐랄까, 이상하게 다른 목적의식이 느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잠깐.'
해당 계정을 확인해 봤다.
이벤트 참가와 유머글 공유. 그리고 '점심 언제 먹어∼', '퇴근하고 싶다' 같은 뻔한 말들로 띄엄띄엄 타임라인이 채워져 있었다.
'음.'
나는 '박문대', '무식', '중졸' 같은 키워드를 엮어서 몇 번 검색을 시도해서, 비슷한 계정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프로필과 아이디가 무난하며, 인격이나 특정 주제가 보이지 않는 말을 공유하는 계정들.
'솜씨 좋네.'
그리고 다음으로 SNS에 아예 다른키워드를 검색했다.
[골든에이지 한국대]
그러자 우수수 결과가 쏟아졌다.
제일 공유가 많이 된 글은 '부잣집 아가씨 도련님 느낌 뿜뿜 아이돌들'이었다.
'이거 말고.'
좀 공유가 덜 된 마이너한 글을 찾아서 공유자 계정들을 확인해 보았다.
[한국대 연예인 모음]
…아까 본 그 개성 없는 계정 프로필들이 사이사이 끼어 있었다.
'찾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확신할 수있었다.
'슬슬 골든에이지 쪽에서 작업 들어가나 본데.'
최원길이 말해줬던 것 말이다.
-그 형을 막, 도련님 같은 이미지로 밀고 가자고 하면서, 그랬거든요.
거기 박문대 형도 소재로 쓴다고 말해서….
역시 예상대로, 그 회사는 나랑 골든에이지의 한국대생 멤버를 직접 비교하진 않는다.
'대신 집단으로 묶어버렸군.'
나처럼 학력과 배경이 약하면서 인지도 좋은 아이돌들은 슬쩍 역바이럴 했다.
그리고 해당 골든에이지 멤버는 학력 좋은 금수저 연예인 명단에 묶어서 이미지를 각인하는 작업을 동시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확실히 수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판을 키워서 반발을 최대한 누르며, 효과적으로 급과 이미지를 높이는 행위였다.
'잘하네.'
뭐, 썩 불안하거나 짜증 나는 건아니다. 이 정도는 웬만한 연예 기획사는 다 하는 짓 아닌가.
근데 좀… 피곤하다.
'다른 걸 신경 쓰기도 바쁜데 말이지.'
지금 상태이상부터 아주사 새 시즌까지 처리할 놈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이놈들이 저지르는 일이 더 수위가 높아지면 수습하기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기획사하고는 그냥 지금 끝내버려야겠다.
'어디 보자.'
머릿속에 명단을 떠올리려는 순간, 불쑥 누군가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보는데."
배세진이었다.
"아, 모니터링이요."
"그래? 그럼… 무슨 일 있는 건아니야?"
"예, 뭐…."
배세진은 갈등하는 눈치더니, 곧작게 말했다.
"…고민 있으면 말해. 그래도 내가 오래 일했으니까…."
카메라 앞에서 협조적으로 해보니 자신감이 붙은 건지, 이놈 팔자에도 없는 연장자 노릇까지 해보려고 한다.
'노력은 고맙다만….'
지금은 특별히 배세진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설명은 해두는 게낫겠지. 스케줄 문제니까.
나는 생각한 것 중 가장 무난한 방법을 말했다.
"방송 좀 나가보려는데, 최대한 방영 빠른 쪽으로 스케줄을 잡고 싶거든요."
"방송? 갑자기 무슨 방송?"
나는 피식 웃었다.
"인터넷에서 저 무식하다고 하는 놈들이 있어서요. 머리 쓰는 데나 좀 나가볼까 싶습니다."
"뭐, 뭐? 별놈들이 다 설치네!"
배세진은 감정이입을 했는지 씩씩거리더니, 자리에서 바쁘게 몇 번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뭔가 떠올랐는지 불쑥 멈춰 섰다.
"…그래! 나 그 작가 알아!"
"예?"
"교양국 작가!"
배세진의 눈이 이글거렸다.
"나 이번에 찍은 드라마 작가님이 예능 때 같이했었다고, 잠깐!"
그리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가져와서 맹렬히 문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참고로 지금 저녁 8시 반이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예, 예… 작가님. 아, 아니요. 저 배역은… 아닌데요. 그, 흠, 죄송한데 혹시…."
배세진은 거북한 기색을 숨기며 어찌어찌 열심히 통화를 마치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나를 돌아보았다.
"됐어…! 최대한 빠르게 방영 가능한 촬영으로 말해주시겠대!"
"…."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런데 무슨 프로그램인가요."
"…?!"
배세진은 본인이 내 의사도 묻지않고 특정 프로그램에 청탁을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시뻘게졌다.
"어, 교양인데, 예능에 가까운…그."
"네."
"… 과거가 부른다 야."
아하.
"좋네요."
"…그렇지?!"
그렇다 아주 딱 좋았다.
과거가 부른다, 나도 가끔 본 적있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진들이 과거 어느 시점의 장소를 재현한 곳으로 이동해 사건을 해결하게 만드는 컨텐츠였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 논리나 역사퀴즈를 풀면서 아슬아슬하게 교양적 성격을 살리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특집이 아닌 이상 출연진이 가는 과거의 장소는… 한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건 못 먹으면 내가 바보다.'
인생을 예체능에 바친 사람들 속에서 PSAT과 한국사를 준비해 본 공시생? 날로 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사랑 이야기해서 스케줄 잘 조정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형."
"그, 그래!"
나는 배세진에게 칭찬 겸 답례로 야식용 토스트를 만들어주었다.
"형! 저도 먹어요!"
"세진 형한테 허락받아."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리고 도래한 과거가 부른다 촬영 당일.
나는 예상치 못한 인선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저놈은… 골든에이지의 한국대 메인보컬이었다.
그러니까, 그 리본 단 통닭 했던놈 말이다.
'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또 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뇨, 저야말로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올리며 인사한 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가 갑자기 스케줄이 잡혀서 굉장히 긴장하면서 왔는데, 선배님이 계셔서 정말 반갑고 영광입니다!"
이것 봐라?
"갑자기 잡히셨군요. 저도 얼마 전에 출연 결정이 났습니다."
"그러시군요! 저는 정말 거의 당일에…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아니요. 대화 좋죠. 저희 이번 촬영도 잘해봅시다."
"예, 감사합니다!"
골든에이지 메인보컬은 곧 다른 출연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엇갈리듯이, 잠시 편의점에 갔던 선아현이 돌아왔다.
"저, 저 왔어요…!"
"오케이∼ 아현이는 조금 있다가 머리 수정하자!"
교양국에서 기왕이면 한 명 더 출연해 달라고 하기에 지원을 받아서 함께 온 멤버다.
선아현이 가져온 주전부리를 정리하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무, 문대야. 촬영 많이 기대돼? 기, 기분 좋아 보이네…."
"아, 재밌어서."
정말 재밌었다.
내가 급하게 머리 쓰는 예능을 잡자마자 저놈이 뒤이어서 예능을 잡았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회사에 쥐새끼가 있네.'
이걸 어디에 써먹을지 벌써 즐거워진다.
물론, 일단은 이 촬영부터 잘 끝내야겠지. 나는 선아현이 준 초콜릿을하나 뜯었다.
'한국대 상대로 통하나 볼까.'
잠시 뒤, 촬영은 지연 없이 바로진행되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7화]
박문대와 선아현이 출연하는 방송, 과거가 부른다 는 대여섯 명 정도의 출연진이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그리고 안정된 진행을 위해, 일종의 MC 역할을 맡는 고정 출연진이 당연히 있었다.
'아, 딱 각 나오네.'
이번 게스트들의 면면을 확인한 예능계의 대선배 MC가 한 생각이었다.
'잘나가는 아이돌에 명문대 출신 아이돌? 이 소재 못 놓치고 은근히 비교는 하겠어.'
스무 화가 넘게 진행해 본 그의 생각에는 벌써 편집이 어떻게 나올지 구성이 보였다.
물론 무작정 비교하면 저 잘나가는 아이돌, '테스타'의 팬들에게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교양 프로그램이니 너무 노골적이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어떻게든 테스타 멤버의 활약 장면도 조금씩 살려주거나, 영 안 되면 귀엽게라도 편집해 줄 터다.
'야∼ 근데 한국대생에 중졸이면 힘들겠는데.'
제작진이 편집 훈훈하고 예쁘게 해주려고 고생 좀 하겠다며, MC는 속으로 킬킬거렸다.
그때, 사인이 왔다.
"아, 온다온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외치곤 빠르게 촬영장 구석에서 대기했다.
"이거 언제 내려요?"
"여기 어디예요?"
두건으로 얼굴 전체를 덮어쓴 6명의 출연진들이 안내를 따라 뒤뚱뒤뚱 이동했다.
MC는 카메라를 향해 엄지를 치켜든 뒤, 감정을 잡고 외쳤다.
"의복들이 그게 무어냐?"
"와악!"
"깜짝이야!"
"어서 그 해괴망측한 것을 벗거라!"
"어어…
출연진들은 혼란 속에서 꾸물거리며 자신의 두건들을 내렸다.
그리고 놀랐다.
"어어 여기 어디야?"
"한옥 같은데…?"
"일단 조선 시대 같지."
출연진들은 친분 있거나 친분 있어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붙어서 속닥거렸다.
그리고 MC는 오늘의 요주의 인물, 별 동요 없이 선아현의 속삭임을 듣는 박문대를 주목했다.
'거 침착하네∼'
검은 머리에 준수하게 생긴, 침착한 얼굴이었다. 어째 가방끈 짧은 인상은 아니라며, MC는 편견 어린생각을 무심코 했다.
'요새 아이돌들도 참 인물이 좋아.'
그는 금발의 선아현을 보고 내심 고개를 끄덕이면서, 혼란스러워하던 출연진들이 자신에게 개그 분량용 말을 붙이기 전에 얼른 대사를 쳤다.
"오늘 큰 행사가 있을 터이니, 늦지 않게 의복을 갖추고 자리에 참석하도록 하여라! 그럼 난 이만."
대충 현대어와 섞어서 말한 MC가 뒷짐을 지고 창호지를 바른 문밖으로 슬그머니 도망쳤다.
"아니, 어디 가세요?"
"형님! 형님!"
"와 이 프로 대책 없구만."
당황한 출연진들을 뒤로하며 문은 굳게 닫혔다.
"아∼ 오늘도 월척이여!"
MG는 능숙하게 멘트를 던진 뒤 히죽거리며 모니터링 룸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게스트들의 뻘쭘한 짓이나 활약을 보면서, 리액션을 하며 해설을 붙이는 게 바로 MC의 본분이었다.
'보자∼ 한 20분은 분량 뽑을 겸 감 못 잡고 헛소리들 하겠지.'
MC는 그동안의 경향성을 예측하며 모니터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예외를 보았다.
[MC님을 닮은 관리분이 남기신 말을 생각해 봤는데요. 이번 목표는어떤 행사인지 알아내서, 의복을 갖추고, 늦지 않게 참석하는 세 단계같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역시 스바이벌 출신이라 그런지 문대가 참∼ 차분해,]
[그럼 우선 이 방을 나가야 하는데… 방탈출 같네요. 이 문 옆에 잠금장치가 있어요.]
[어? 그러게!]
박문대가 순식간에 진도를 빼버린것이다.
"이야∼ 빠르네, 빨라!"
MC는 본분에 맞게 손바닥을 치며 감탄사를 뱉으면서도 당황했다.
'쟤 뭐야?'
사람들이 헛소리하고 방 안을 탐색할 시간을 안 줬다. 속전속결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다음 장면이었다.
[자자, 내가 읽어줄게. 들어봐라 얘들아.]
경력 긴 개그맨이 문 옆에 달린작은 상자에서 한지를 꺼내어, 그들의 첫 번째 퀴즈를 읊었다.
[흠흠, '이번 급제자 6인의 집현전 배속을 정하는데 이들은 을, 갑, 병,무, 기, 정이라. 그 조건은 아래와같다.' …뭐꼬 이게!]
그 밑으로는 '을과 갑이 함께 집현전에 배속될 시 병도 집현전에 배속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서로 맞지 않는 조건문이 몇 줄이나 이어졌다.
실제 논리학에서 쓰이는 제법 복잡한 예제였다.
역사 교양 예능의 폭격이었다.
"으하하학! 아∼ 다들 얼굴들이!"
그리고 MC가 기겁하는 출연진들의 반응을 막 즐기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과 '기'가 집현전에서 근무하네요.]
[…?]
[그, 그래?]
[예. 그리고 순서대로 다시 나열해보면… 갑을병정무기니까.]
박문대는 나무로 된 6단계의 잠금장치에서 첫 번째와 여섯 번째를 동시에 눌렀다.
잠금이 해제되었다.
[오오오?]
[뭐야, 뭐야!]
"아니?"
답까지 3초도 안 걸렸다. MC는 입을 떡 벌리고 모니터를 보았다.
하마터면 앞에 앉은 제작진에게 '저 친구가 명문대였나?' 하고 물어볼 뻔했다.
"저거 원래 저렇게 듣자마자 풀 수있는 거야?"
여기저기서 제작진이 고개를 흔들며 엑스자를 쳤다. MC는 헛웃음을터트렸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중졸이라며!'
심지어 모니터에 저기 한국대 출신이라는 놈도 박수만 치고 있다. 저 속도는 안 나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었다.
[이 방에 뭐 다른 게 없을지 좀 살펴보고 나가는 건 어떨까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야∼]
[이, 이거요…!]
방을 한 차례 수색해서 숨겨진 상자와 문제를 발견한 선아현이 명문대생에게 보기를 읽는 역할을 넘겨줬다.
[그럼 읽겠습니다! '날짐승을 잡는 법은 화살을 쏘는 것이고, 들짐승을 잡는 법은 창을 던지는 것이다. 바다짐승은 흙짐승과…]
약간의 넌센스가 가미되어 센스가 필요한 논리 문제였는데, 이것도 문제를 다 듣자마자 박문대가 입을 열었다.
[음, 날짐승 세 번, 들짐승 한 번, 바다짐승 두 번, 날짐승 한 번… 같은데요. 그리고 짐승을 사방 신으로 생각하면… 각각 동서남북의 방위로 치환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방신? 청룡 이런 거 말하나?]
[아아! 나 알겠다! 날짐승은 주작! 이렇게?]
[예. 그런 느낌으로요.]
위아래와 양옆으로 당길 수 있는 잠금장치는 감을 잡아 신난 출연진들에 의해 순식간에 풀렸다.
[와아아!]
[야 문대 니는 머리가 막 뺑글뺑글도네! 미칬다 아이가!]
[감사합니다.]
"어어? 저거 저러면 안 되지 않나?"
모니터의 박문대가 출연진의 칭찬과 손바닥 세례에 꾸벅 고개를 숙였고, 제작진들이 MC의 말에 웅성거렸다.
"저거 원래 한 바퀴 돌고 와야 풀수 있는 건데…."
풍수지리 힌트와 장소 힌트 없이그냥 본인의 센스와 논리로 풀어버렸다는 소리였다.
PD의 말에 MC는 일부러 역정을 냈다.
"어∼ 저렇게 똑똑한 애를 섭외했으면 난이도를 대폭 올려서 아주 교양의 쓴맛을 보여줬어야지!"
PD가 침몰하는 장면을 카메라가 담았다. 웃기려는 의도는 충분히 통했으나, MC는 내심 감탄했다.
'야∼ 역시 이런 건 타고난 머리가 더 중요하구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사실 모니터 속 박문대는 약간 떨떠름했기 때문이다.
'음, LEET랑 PSAT 기출 베꼈네.'
예습용으로 전 회차를 볼 때도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단어랑 단계만 좀 추가했을 뿐이지 똑같았다.
'한 번 푼 건 어떻게든 머리에 남는단 말이지.'
그래서 속도가 훨씬 빨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아니어도, 솔직히 박문대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논리학 기호만 알면 한 줄로 정리가 끝나니까.'
막 학기에 PSAT 대비로 졸업반용 논리학을 수강해 나름 좋은 성적을 받았던 박문대에게는 민망할 정도의 일이었다.
'새내기도 안 마치고 휴학한 놈과 비교하기도 그렇지.'
박문대는 한국대생을 약간 짠한 눈으로 보았으나, 곧 자신의 코가 석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든, 순조롭긴 하다.'
그럭저럭 만족하는 박문대의 주변에서는 상자 안 내용물 확인에 한창이었다.
[안에 뭐 들었어요?]
비단에 싸인 내용물은… 막 만들어진 듯한 서적이었다.
그리고 그 표지와 안 모두가 한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오, 음…?]
[모르겠다. 이거 무슨 한자뿐인데?]
[그러게요.]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갈까요?]
[그래그래, 그럼 아현이가 챙기고… 이제 우리 밖으로 나가볼까?]
[네!]
그때, 박문대는 아현에게 말을 걸었다.
[나 잠깐만 그것 좀 봐도 될까.]
[으응!]
박문대는 건네어 받은 서적의 속을 빠르게 훑어본 후, 피식 웃었다.
[…?]
[아, 고마워.]
[자자, 얘들아. 우리 문 같이 열자!]
[네!]
선아현은 서적을 다시 품에 챙겼고, 출연진들은 방문에 붙어 카운트다운을 한 끝에 문을 휙 열었다.
[3, 2, 1, 개봉!]
[…!?]
[…!]
그리고 굳었다.
문밖은… 오가는 궁인들로 바쁜 복도였다.
[세상에 여기 궁인가 봐.]
[다 사극에서 봤던 차림이야…!]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접어들 때였다.
"아∼ 슬슬 재밌겠어∼"
모니터를 보던 MC의 말대로, 본격적인 콩트가 이어졌다.
[괴상망측한 차림새를 한 무리가…!]
[으아악!]
방 밖으로 나온 멤버들은 궁인들의 질책을 받으며, 밀폐된 거대한 궁에서 우왕좌왕 숨어다니기 시작했다.
[와 미치겠다.]
[쉬잇! 조용히 가자.]
[아, 여, 여기 문 열렸어요…!]
[잘했어 아현아!]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찾아낸 그들은 방 안의 옷장에서 의복을 찾아냈다.
[오∼ 관복인가?]
[멋있는데요?]
아니었다.
[그것은 성균관에서 입으시던 청금단령이 아니옵니까. 성균관에서 갓급제하여 오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이 프로그램 진짜 백스토리에 목숨 거네요.]
[예?]
[아, 아니옵니다∼]
출연진은 자신들이 입은 것이 성균관 유생들이 입는 일종의 교복이라는 것을 궁인들과의 콩트를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의 성균관 스승을 자칭하는 웬 관리에 의해 자신들이 참석할 행사가 왕의 행사라는 것을 알게된다.
[어서 어전에 들어야 한다!]
[어전?]
[왕, 저희 왕 뵈러 가야 했던 거였어요!]
[와씨, 그렇구나!]
[하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으냐. 험험.]
[네…?]
성균관에서 등록금 대신 스승에게 올리는 속수례의 일종으로 작은 음식을 구해온 그들은, 겨우 진짜 관복을 구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박문대 쟤는 요리도 잘한다 야."
모니터를 보며 PPL 음료를 마시던 MC가 순 포기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저기서 제작진의 탄식이 울렸다.
이번 출연진의 행보는 그야말로 쾌속이 따로 없었다. 단순히 문제 풀이만 보자면, 분량이 약간 걱정될 정도였다.
물론 전적으로 박문대 탓이었으나 더 기가 막힌 점은 이게 아니었다.
문제가 빨리 풀리는 만큼, 그 타임을 채워줄 수 있게 상황극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균관에서 가장 즐겨 하시던 놀이가 무엇이옵니까.]
[무엇이옵니까.]
[무, 문대야…'?]
박문대의 회피에 선아현이 당황하면서도 열심히 대답하는 것은 꽤 귀여웠다.
'저놈 저거 개그 분량은 동생들 챙겨주네.'
선아현이 동생이라고 오해한 MC는, 선아현과 골든에이지의 메인보컬에게 콩트를 양보하거나 은근히 종용해 주는 박문대의 모습에 약간 훈훈함과 질림을 느꼈다.
'오디션 1등 괜히 한 게 아니야∼'
딱 봐도 눈치가 귀신 같은 놈이었다.
[음… 어떻게 생각해?]
[어, 음. 잠시만요. 계산해 보겠습니다!]
심지어 일부 퀴즈에서는 뒤로 물러나서 명문대생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는데, 쾌속 정확 박문대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
'야, 저거 편집이 어떠려나∼'
은근히 혀를 차던 MC는 직후, 깨달았다.
'이거 완전 상황이 반전됐는데…?'
제작진은 원래는 명문대생의 퀴즈선전을 예상하고 테스타에게 훈훈하고 귀여운 분량을 챙겨줄 생각이었는데, 순 반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명문대생 쪽은 자기도 이름만 얼추 들어본 그룹이었으니, 이젠 제작진이 굳이 챙겨줄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테스타의 다른 멤버인 선아현이 워낙 마스크가 좋고 반응이 우아해서 훨씬 진짜 유생 같았다.
'야, 무섭네. 무서워.'
MC는 혀를 내둘렀다.
박문대는 후배인 명문대생을 분명 챙겨줬지만, 명문대생이 받아먹지 못하는 그림이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모니터 속 출연진들의 스토리는 쾌속 전진하여,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다.
그런데 관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그대들이 속히 전달할 것이 있…어, 어, 가지고 왔구나…?!]
[예…?]
자신을 집현전의 관료로 소개한 사람이 찾아오라고 요구하려던 물건이, 바로 그들이 첫 번째 방에서 즉시 찾아낸 서적이던 것이다.
[대박!]
[문대야! 고맙드아!]
[다 같이 풀었는…, 윽, 감사합니다.]
박문대는 출연진들의 손바닥 세례를 다시 한번 감내했다.
[우리 이거 최단 속도 아닌가?]
[해 떴을 때 촬영이 끝난다! 야호!]
출연진들은 신이 나서 발걸음을 옮겼고, 드디어 어전에 당도했다.
그리고 감춰진 퀴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용무로 어전에 들러 하십니까?]
[그것도 알아야 됐어요…?]
[으으음…! 얘들아, 후퇴다!]
줄연진들이 동공을 떨며 작전상 후퇴를 기획할 때였다.
[저,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박문대가 출연진들에게 속삭였다.
"또 너야!"
MC가 즐겁게 외치는 동안, 모니터링실의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박문대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왕은… 세종대왕님이 아닐까하는데요.]
[….!]
[왜, 왜?]
[이 서적이요.]
박문대는 전달하라는 미션을 받았던 서적을 들어서 속 내용을 넘겼다. 수많은 한자가 펼쳐졌다.
[이거, 꼭 한글 같지 않으세요?]
그리고 박문대의 손은 한 곳에 멈춰서 상단을 가리켰다.
무심코 지나쳤던 그 장의 첫 문자는…ㄱ과 똑 닮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어?]
[잠깐만!]
출연진들은 해당 서적을 자세히 장마다 확인해 봤다.
확실히 모양새가 현대와 달라 조금 낯설어서 그렇지, 잘 보니 한글의 모음과 자음처럼 보이는 것들이 상단 곳곳에서 보였다.
[헐, 잠깐. 그럼 이게 훈민정음인가? 그래서 세종대왕님?]
박문대는 애매하게 고갯짓 표현을흐렸다.
[음. 근데 훈민정음은 대왕님이 직접 만드셨다고 하시니까요. 집현전 학자들이 대왕님께 전달하는 건 이상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남은 건….]
[남은 건?]
[훈민정음 해례본 이 아닐까 하는데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풀어 적은 서적이었다.
왠지 느낌상 한글로 적혔을 것 같다고 무심코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한문으로 적혀있던 것이다.
한자를 쓰던 이들에게 '한글'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니 까.
박문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배웠어요. 그러니까 저희는 들어가서, 세종대왕님께 이 서적이 훈민정음 해례본 이라고 말씀드린 뒤에 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정답이었다.
"우오아!"
MC가 감탄했다. 앞에서 제작진도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니터 안 출연진도 흥분했다.
[이야 문대 씨 그런 것까지 알고있어?]
[와! 맞는 것 같은데?]
[정황이 아주 딱 맞네요! 어쩐지 집현전 등장할 때 느낌이 왔지!]
하지만 박문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 둘 있는 것 같습니다.]
[어?]
[아까… 갑을병정무기 중에 '갑'과 '기'가 집현전에 배속된 문제 기억나세요?]
[어, 기억나지!]
박문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는 그게 저희가 아닐까합니다.]
[…!]
[명수도 일치하고, 막 급제한 것도 똑같잖아요.]
생각지도 못하게, 백스토리가 맞물렸다.
[그래서 집현전에서 근무하는 두사람이 이 해례본을 올리면 될 것같은데, 나이순으로 따지면….]
박문대는 정중히 손을 들었다.
[그게 형님과… 이 동생인 거죠.]
[…!]
박문대는 희미하게 웃으며, 제일 나이 많은 출연진과 제일 어린 출연진, 그러니까 명문대생을 가리켰다.
모니터링실에서는 이제 그냥 감탄만 나왔다.
"대단하다 진짜."
[니는 천재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제가 과하게 추측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 맞다. 이건 맞는 기다. 내 직감이 딱 말해주고 있다니까.]
출연진의 말대로, 맞았다.
'저건 한 번 깨진 뒤에 힌트 많이 받고 간신히 알아내는 그림이었지? 몰라도 그냥 넘어가고.'
"한국사도 다 알아? 어휴."
피해간 박문대에게 질렸으나, 어쨌든 얼른 옷을 주워입었다.
시간이 됐다.
"자, 내려갑시다∼"
그는 의관 행렬 비슷하게 차려입은 스탭들을 데리고, 어전으로 갔다.
마침, 출연진들도 마음을 굳히고 어전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집현전의 '갑'과 '기'가 전하께 훈민정음 해례본 을 올리기 위하여 왔습니다."
"…어서 오시오."
"예스!"
출연진들은 환호를 지르며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용상에 앉은 MC를.
"왔는가."
"어어억!"
MC는 의기양양하게 훈민정음 해례본 을 가지고 등장한 출연진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형님! 아니, 세종대왕님!"
그리고 당황한 출연진 맏형이 그를 세종대왕이라고 불렀다가 '※세종은 묘호(廟號)라 사후에 정해집니다.' '극도의 미리니름'이라는 자막이 붙었다는 개그를 끝으로, 촬영은 마무리되 었다.
"훌륭하도다!"
박문대의 풀이가 정답으로 밝혀진 채로 말이다.
"이야∼ 대단했어!"
MC는 촬영을 끝마치며 인사를 하면서, 박문대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박문대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MC는 명문대생과 박문대를 슬쩍 돌아보았다.
'비교가 안 되겠네.'
박문대의 문답 분량 폭주와, 엄청난 활약이 그대로 방송을 타는 것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박문대는 여기에 따른 부작용도 이미 고려하고 있었다.
"촤, 촬영 재밌었어!"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알찬 시간이었다.
선아현은 헤헤 웃었다.
"무, 문대는… 한국사도 잘 아는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습했어."
"어, 어?"
말 그대로의 뜻이다. 예습했다.
"그 방송 이전 회차들을 좀 봐뒀거드 "
정식으로 본 건 5편 정도다. 나머지는 좀 다르게 했다.
우선 과거가 부른다 의 전 화차 25화 정도를 제목과 줄거리로 표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외한 뒤 비슷한 출제 경향성에서 한국사에 남은 인상적인 사건 중, 최신 3회차와 겹치지 않은 시대에 일어난 것을 선정하는 것이다.
'한글 창제와 6월 항쟁이 제일 유력했어.'
그 후엔 그쯤 일어난 업적과 사건을 지엽적인 것까지 다 외우면 된다.
'범위가 그 정도로 줄면, 이런 것도 할 만하지.'
공무원 준비하면서 워낙 지식을 지엽적으로 외운 경험이 많아서 말이다.
게다가 한국사는 기존에 공부한 가닥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고, 고생했어…. 지, 진짜 멋있었어!"
"고맙다. 너도 잘하더라. 물건도 잘찾고. 콩트도 잘하고."
"아, 아니…, 그건 네가!"
"내가 뭘."
나는 차 안에서 이동하며 선아현과 적당히 계속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음 촬영장에 도착해서 그룹과 합류하기 직전, 슬쩍 화장실로 빠졌다.
"잠깐만 들렀다 갈게요."
"그래 오케이∼"
"아, 알았어!"
하지만 화장실에 가는 대신, 주차장 뒤편의 밀폐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때가 됐다.'
오늘 촬영은 바로 이번 주말 심야방영 예정이다. 그 전에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쥐새끼를 말이다.
"예, 예 안녕하세요."
혹시 운영팀에 전화 중이냐고? 아니다.
"매니지먼트실 맞죠?"
매니지먼트실. 운영팀을 하위조직으로 두고 있는 실이다.
"저 실장님과 면담 가능할까요."
원래 이런 건 관련인 중에 가장 높은 사람에게 다이렉트로 꽂는 게 제일 효과적이지 않은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8화]
매니지먼트실 실장과의 면담은 약간의 소란 이후 곧바로 체결되었다.
굳이 실장과 만나려는 이유가 뭔지 캐물으려는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으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라는 모호한 말로도 방어가 가능했다는 게 놀라웠다.
'테스타로 돈을 잘 벌긴 하나 보지.'
감정이 있는 자원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잘 달래보려는 투가 역력했다.
괜히 구체적인 변명까지 생각해 뒀군.
그리고 매니지먼트실에서 은근히 긴장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 앨범이나 활동 계획 외에는 큰 자기주장 없던 그룹의, 리더도 아닌 놈이 다짜고짜 면담 요청을 넣었으니까.
아마 이 돌발활동과 관련해서 자기들끼리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것이다.
다만 그걸 오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내일 뵈러 가겠습니다."
-아… 네
바로 다음 날로 면담 약속을 잡아버렸거든.
마침 일주일 중에 낮 스케줄이 없는 게 그때뿐이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음… 무슨 추측을 하고 있으려나.'
특별히 상관은 없으나, 상황상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회사가 내 행동에 대해 무슨 판단을 내렸는지는, 다음 날 10시에 실장과의 면담 자리에 입장하고 난 뒤 5분 만에 알게 되었다.
"음… 문대 씨, 그룹 활동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을까요?"
"…."
"문대 씨가 능력이 좋아서 답답할수도 있죠. 그래도 앞으로 1년 정도는 더 이 기조로 가는 게 안정적이거든요."
인사한 뒤 신변잡기식 이야기를 약간 하다가 들어간 본론이 저거였다.
'아하.'
그리고 그 뉘앙스에서 알아차렸다.
'내가 솔로 활동을 원한다고 생각했나.'
쉽고 빠르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긴 했다.
서바이벌 1 등, 최근 개인 예능 반응 좋음, 그룹 활동 중 정신적 불안으로 상담받음.
'솔로 활동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배경이긴 하지.'
그리고 하나 더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놈 이런 대화 별로 안 해봤어.'
내가 진짜 솔로에 관심이 있어서 그룹 위주의 활동에 불만을 제기하러 온 거였다면, 저러면 안 됐다.
뭔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다짜고짜 '1년 더 이렇게 갈 거다'라는 말을 들은 꼴이지 않은가.
자의식 비대한 시기의 연예인이 퍽이나 저걸 납득했겠다.
'무조건 연예인이 먼저 자기 이야기 꺼내고 넌 고심해 주는 척하는 구도로 갔어야지.'
보통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실장까지 달려면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일텐데, 이놈은 아니라는 뜻이다.
'역시 낙하산이군.'
다른 파트, 가령 AR 파트나 프로듀싱, 제작 마케팅은 아무래도 전문인력이 필요한 부서였기 때문에 스카웃 해온 경력직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매니지먼트 쪽은 그나마 비빌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관계자들이 한자리 주려고 꽂은 낙하산이 몇 명 있었다.
사실 이쪽도 전문성이 필요한 파트인데 말이다.
'덕분에 이야기하기가 한결 편해졌다만.'
나는 젊은 실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일부러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이면 좋죠."
"그렇죠∼?"
"그런데 이러다가 큰일 나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요."
"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폭탄을 던졌다.
"다른 기획사 다니는 분이 이중 취업 중이시던데, 괜찮을까요?"
"…!"
실장은 말문이 막히는지 잠깐 대답을 못 했다.
그리고 겨우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열었다.
"아 문대 씨, 우리 회사 그거 안돼요∼ 아마 뭐, 이직한 지 얼마 안돼서 아직 그쪽에서 프로필이 안 내려간 것 같은데."
잘 모르는 어린놈이 오해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줄수록 좋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자꾸 골든에이지하고 같이 스케줄을 잡으시는 것 같아서요."
"예?"
"저 이번에 과거가 부른다 촬영한다고, 골든에이지 이야기하시면서 통화하시던데요."
"…! 누, 누가요?"
"그… 누구시더라? 잠시만요."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주소록을 뒤지는 척하다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맞다. 운영팀 오서형 대리님이요."
"…!"
혹시 기억나나?
이세진과 배세진이 싸웠을 때, 둘을 같은 팀에 배정시켜서 항의 전화하니 '실수는 맞는데 예민 떨지 말라'고 말한 그놈 맞다.
아, 저 통화를 진짜 들었냐고?
'당연히 못 들었지.'
대가리에 총 맞지 않고서야 담당 연예인이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저런 통화를 하겠는가.
그러나 용의자는 확실했다.
'저놈뿐이야.'
일단 다른 파트들은 그럴 필요가없다.
앞에서 말했지만, 스카우트해 온 전문인력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굳이 이런 산업 스파이짓을 하지 않아도 이직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헛꿈을 꿀 필요가 없으니 유인책이 없었다.
하지만 운영팀은 달랐다.
연예계 매니지먼트실의 전문성을 평가절하한 T1이 경력직 스카우트 대신 낙하산과 이미 시장에 나온 애매한 경력의 싼 매물로 채워 넣은 곳이다.
거기에 머릿수 채우려고 넣은 뭣 모르는 신입까지.
한 마디로 이 회사에서 제일 일 못 하는 집단. 불만이 많고, 이 일에 특별히 애착도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콩고물에 홀릴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지.'
그럼 다음은 간단하다.
'겹치는 놈이 있는지 보면 된다.'
골든에이지의 소속사에서 다짜고짜 잘 모르는 놈을 섭외하진 못했을 테니, 분명 어느 정도 안면이 있고 같이 일해본 놈을 꼬셨을 것이다.
그래서 골든에이지의 소속사, '트레블러'의 자체 이력을 확인해 봤다.
보통 이렇게 일 잘하는 놈들이면 어디 다른 대형에서 한 가닥하고 왔을 확률이 높지 않은가.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원하는 증언이 이미 SNS 에 넘쳤다.
-대표님이 원더홀에서 일하다가 일준이랑 몇 명 데리고 독립하신 거래 어쩐지 연생들이 원더홀 느낌이더니 ㅠㅠ
원더홀. 대형 남자아이돌을 잘 내는 유명한 기획사였다.
'음, 뻔하군.'
그럼 이제 끝이다.
남은 건 저 대표와 직원들의 '원더홀'에 재직 기간과 이력이 겹치는 우리 회사 놈을 찾아내면 된다.
'회사 내부망 구조를 T1에서 따왔던데.'
소속 연예인에게 무심코 문서 접근 권한을 높게 준 안일함에 감사할 뿐이었다.
어쨌든 확인 결과, 이력이 겹치는건 매니지먼트실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
[2019. 06. 01. - 2021. 01. 04. I원더홀 ENT I 현장 업무 보조 및 서류 작업]
운영팀 오서형 대리 말이다.
그러면 모든 정황이 다 맞다.
'저쪽에서 일 대충 하는 것도 납득이 가지.'
이미 마음이 떴으니 구색만 맞추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놈이 담당하는 것마다 잡음이 났던 거고.
"대리님은 좋은 예능 공유하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신 걸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한 곳에 집중하시는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 연예인 쪽에서 패악질 부리는 구도로 가면 안된다.
이 문제를 '연예인이 과하게 생각했나 보네∼' 하고 합리화 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놈이 직접 의심을 가지고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난 뭣도 모르고 말하는 것이고.
"생각해 보니까 자꾸 골든에이지쪽하고 뭐가 많이 겹치던데, 좀 가성비로 일하시는 게 아닌가 싶기도하고요."
"스케줄이 겹쳐요?"
"예. 그렇던데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기사나 글에 같이 붙어 나오는 경우도 많고… 귀찮아서 같이 작업하시나 싶어서, 좀 그랬어요."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이 말 뒤의 심각성을 못 알아차리면 넌 X발 낙하산이 아니라 돌대가리다.
다행히 실장은 얼굴이 시뻘게졌다가 다시 허옇게 떴다가 도로 돌아왔다.
내면에서 뭔가 깨달음과 빡침이 오갔다는 뜻이다.
"그래요… 흠, 그래. 내가, 그 대리 문제는 잘 이야기해 볼게요. 문대씨 이야기 잘 알았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물론 정말 정신 차리고 깔끔히 처리할 거란 기대는 안 한다.
잘 봐라.
"문대 씨. 그래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이 일은 잘 해결될때까지는 따로 어디 말씀 안 하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럴 줄 알았다. 이 새끼, 자기 평판 나빠질까 봐 쫄았네.
그럴 만도 했다. 이건 외부로 유출되는 순간 테스타 팬들에게 시위 트럭을 받을 급이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참고로, 이것도 당연히 뻥이다.
"잘 생각했어요."
실장은 내가 면담을 요청한 이유를 더 묻거나 생각해 본 겨를도 없는지, 그대로 나를 배웅했다.
'정신이 빠졌네.'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마침 회사들린 김에 녹음도 처리하겠다'는 핑계로 잡은 녹음실로 향했다.
음향 조정 등을 요청받은 AR팀직원이, 미리 온 두 번째 매니저와 잠깐 잡담을 하다 끝낸 참이었다.
매니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문대 왔구나∼ 이야기 잘했어?"
"네, 괜찮았어요."
"무슨 이야기 했어?"
"음… 비밀로 해달라고 하시던데요."
"어어?"
옆에서 기기를 만지던 AR팀 직원의 귀가 두 배로 커져도 안 놀랐을 것이다.
'궁금하겠지.'
그건 두 번째 매니저도 마찬가진지, 내게 괜히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왜, 왜. 문대 너 솔로 시켜주시겠대?"
"아, 그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럼 뭔데?"
"음… 형은 매니지먼트실이니까, 들으셔도 될 것 같기도 한데요."
"뭐야, 뭐야?"
자, 매니지먼트실 이야기라는 힌트는 잘 흘렀다. AR팀 직원도 잘 주워들었겠지.
나는 일부러 좀 뜸을 들이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뭐, 어떻게든 해결 날때까지 조용히 해달라고 하셔서."
"아∼ 궁금하네 진짜!"
"죄송해요. 말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에이, 알았어!"
자, 꽤 큰 문제가 터진 거라는 뉘앙스도 흘렸다.
아마 이 스케줄이 끝난 AR팀 직원이 돌아가서 할 말이 뻔했다.
'매니지먼트실에서 뭐 큰 문제 터졌나 봐!'
지루한 회사 생활에 재밌는 안줏거리 아닌가.
이제 매니지먼트실에서 수습하는 기색만 나면, 무슨 일인지 관심을 가지고 캐내려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그럼 내부에 소문 다 나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겠지.
'이번 주 내로 본부장 귀에 들어가는데 천원 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사흘 뒤, 본부장이 기염을 토하며 관련자와 증거를 추가 색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대문대, 그거 알아?"
"뭐."
"운영팀에 누가 우리 정보를 다른 기획사에 팔고 있었대! 세상에∼ 무섭다 진짜."
거실 소파에 걸터앉은 큰세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 말은 저래도 개새끼 잡아내서 속 시원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 잡았대?"
"어. 근데… 우리 멤버 중에 누가 알아서 제보했다더라고."
"…그래?"
"응. 그냥 그렇다고."
큰세진이 씩 웃었다.
"그리고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인데, 고생한다 문대야∼"
큰세진은 내 등을 툭 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눈치챘나.'
괜히 캐묻지 않아서 편한 놈이었다.
그리고 역으로, 일단 와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와∼ 회사 분위기 장난 아니다!"
두 번째 매니저 말이다.
개인 스케줄 도중에 '네가 말하려다 말았던 것이 이게 아니냐'며, 흥분해서 회사 사정을 미주알고주알다 떠들어주더라.
"어떤데요?"
"본부장님이 직접 그쪽 회사에 연락하고 계시던데! 아, 오 대리는 벌써 불려갔어!"
그럴 만도 했다.
결재봇은 조용히 기간만 채우려다가려고 했는데, 이런 대형 문제가 물밑에서 터졌으니 빡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번 이런 게 소문난 이상, 분위기 다시 잡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T1에서 일하다 온 결재봇도 잘 알 것이다.
공개처형 말이다.
'물론 회사 내부에서 만으로 한정이겠지만.'
그래서 일단 산업스파이는 찍어둔 채로, 그 스파이를 고소해서 공론화 해버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골든에이지의 소속사를 압박 중일 것이다.
물론 결과는 무조건 항복일 확률이 높았다.
'들키는 순간 끝이었지.'
골든에이지가 1군이 되도록 키운 후라면 모를까, 이건 체급싸움도 여론싸움도 안 됐다.
방송국을 뒤에 업은 대기업 계열사랑 중소기획사의 정면 알력 싸움인데, 심지어 귀책사유가 중소기획사에 있어서 대기업에 명분까지 있다?
'증거까지 확보된 이상, 더는 빼도박도 못한다.'
골든에이지의 소속사가 아무리 영리하고 일을 잘해도, 계속 영업하고 싶다면 엎드려서 운신을 조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동안은 재갈 물고 있겠군.'
테스타와 엮는 언론 플레이와 바이럴 장사는 눈치껏 접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제 방영될 과거가 부른다 의 대중반응에도 골든에이지 측은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결 편하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사전 준비는 다 끝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될 주말이 코앞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69화]
박문대의 과거가 부른다 출연은 예고편이 뜨면서야 알려졌다. 가장 빠른 방영 일자로 급하게 스케줄을 잡은 탓이었다.
[(예고) 성균관 유생이 된 테스타와 골든에이지? 과거가 부른다 EP36 I SBC 교양]
그리고 당연하지만, 사서 걱정하는 물밑 여론이 한번 휘몰아쳤다.
긁어 부스럼에 대한 걱정과 지난 경험에서 나온 직감이었다.
-아 X발 또 그 그룹
-나만 싸하냐
-맛집 가는 힐링 예능이나 잡으라고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교양까지 시키고 있어 개새끼들이
여론을 신경 쓰는 팬 증에는 골든에이지가 일부러 테스타를 물고 늘어진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도 많았다.
박문대의 과거, 가정사와 불우한 자퇴 스토리까지 연결해서 생각하면, 굳이 한국대생과 함께 '머리 쓰는 교양'에 나온 이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학벌로 은근히 비교하며 긁는 편집이 들어가는 날에는 억울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속 터져서 본방 못 볼 것 같아
-이번에도 또 비비면 못 참을 듯 어떻게든 공론화한다 내가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깊게 파고들어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고, 가볍고 즐겁게 팬심을 즐기는 사람들이 주로 볼 수 있는 여론은 이랬다.
-미친 박문대 한복 차림 돌았다ㅠㅠㅠ 심지어 성균관 유생복이래 예고만 봐도 갓작
-감사합니다… 압도적 감사…
-아니 이렇게 갑자기? 굉장히 갑작스러운데요 대환영입니다
-예고편 보니까 문대 활약 많이한 것 같아서 두근거린다
고단한 석사 과정을 보내는 중이던 대학원생이 보던 것도 이쪽이었다.
'내 삶의 낙…'
대학원생은 퀭한 눈으로 히죽 웃었다.
심야에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주말 낮에도 랩실에 있기 때문이다….
'나도 본방 본다구!'
그녀는 신이 나서 소파 위라도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던 탓에 얌전히 착석해서 TV를 켰다.
"이제 한다!"
방송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했다.
[그들을 부르는 과거는?]
대학원생은 흥미진진하게 초반 안대를 푸는 오프닝과 MC의 모니터링룸 착석까지를 관람했다.
그리고 신나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박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말하고 웃는 박문대가 힐링이 따로 없었다.
'이번 활동 흑발이라 아쉬웠는데, 그래도 얼른 유생복 입은 거 보고싶다!'
그러나, 이 평정심은 다음 장면에서 박살 난다.
[갑'과 '기'가 집현전에서 근무하네요.]
[!]
"어어어억!"
박문대가 쾌속으로 첫 번째 문제를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뭐야? 왜 저래? 박문대 왜 저래?"
그리고 이 육성은 대학원생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그녀가 덕질용으로 어설프게 만든 SNS 계정의 타임라인도 비슷한 문구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
-뭐임
-박문대 미친ㅋㅋㅋㅋㅋㅋ
-내 남자 머리까지 좋냐 X발ㅠㅠㅠㅠㅠ
그러 나 너무 빠른 경악이었다.
[음, 날짐승 세 번, 들짐승 한 번, 바다짐승 두 번, 날짐승 한 번… 같은데요.]
[세 번째 선반에 있는 걸 가져다 드리면 어떨까요.]
박문대의 활약이 방송 내내 끝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헐."
대학원생은 입을 벌리고 화면을 보았다.
방송은 특별히 편집의 마법을 부리지 않았다. 교양국답게, 세련되었지만 너무 자극적이진 않은 산뜻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리어 박문대의 문제 풀이도 실시간 느낌이 살아 그 맛이 더 잘 느껴졌다.
[어어? 저거 저러면 안 되지 않나?]
[저거 원래 한 바퀴 돌고 와야 풀수 있는 건데….]
[술렁이는 모니터링반]
그 비상식적인 수준의 능력치에, 제작진과 MC의 적나라한 리액션과 탄식이 나오는 것까지 분위기를 잡았다.
"와…."
대학원생은 말문이 막힌 채 화면을 보다가,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걸… 똑똑하다는 밋밋한 말로 표현하기가 싫다!'
무슨 머리 좋은 연예인들 모아놓고 문제 풀게 만드는 퀴즈쇼에 나가도 손색없이 에이스일 것 같지 않은가!
줄연진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여기저기서 감탄과 헛웃음이 쏟아졌다.
[문대야, 이리 와 봐. 그래. 솔직하게 대답하자. …너 멘사 회원이지? 나한테만 딱 말해줘!]
[예? 그럴 리가요.]
'그럴 것 같은데!'
완전 그럴 것 같은데 뭘 '그럴 리가요' 같은 대답을 하고 있냐며 대학원생은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잔뜩 흥분한 그녀처럼, 출연을 걱정했던 팬들도 예상을 훨씬 웃도는 박문대의 미친 활약에 글을 쏟아내고 있었다.
-미친 박문대 또 맞췄음
-혹시 이거 내 꿈 속인가?
-뭐 듣자마자 계속 풀엌ㅋㅋ큐ㅠ미쳤냐고 박문댕!
-문대는 그림 빼면 못하는 게 뭐냐 진짜 ㅅㅂ괜히 걱정했네;;
-나는… 우리 강아지가 노래 춤 얼굴 아이디어만 천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진짜 천재였던 거임
심지어는 워낙 박문대가 쾌속 진행을 해버린 탓에, 문제 푸는 부분은 특별히 쳐낸 것도 없었다.
오히려 덧대어졌다.
[첫 번째 문제는 사실 논리학 기호로 정리하면 간단해서요. 저, 혹시 펜 좀… 감사합니다.]
박문대가 아예 인터뷰에서 자신의 풀이법을 설명하면서, 원래도 나왔을 문제 해설 분량을 더 흥미롭게 보강한 것이다.
욕할 각을 보던 사람들이 '대본 티 너무 난다', '이미 답 다 알려준 거아니냐'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할만큼 상세했다.
[저는 동일 기호는 무조건 겹쳐서 정리하는 게 편하던데요. 그러면 이렇게… 하나씩 안 맞고 튀어나오는게 있어요.]
누가 봐도 박문대가 자신이 직접 풀어서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났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왜 이렇게 잘하는지'에 대한 백그라운드 스토리까지 준비되었다.
[제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해서…많이 봤거든요. 어떻게 풀면 좋을지 고민하면서 나름대로 많이 공부해봤어요.]
박문대가 솔직하게 자신이 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예습한 것을 토로한것이다.
물론 진실은 이번 화 한국사 출제 범위를 좁혀 암기하기 좋게 추린 것뿐이었으나, 적당히 사실을 섞은 덕에 더 진실해 보였다.
논리 퀴즈에 뺏긴 한국사 실력에 대한 변명도 적당히 진실이 섞여 덧붙여졌다.
[사실… 공무원이 되면 어떨까 해서, 아이돌 되기 전에 한국사 공부도 좀 했었구요.]
박문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다소 가슴 찡해질 만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정을 박문대에게 관심이 조금만 있다면 다들 알고 있다는 점에서, 좀 치사할 정도로 잘 조형된 발언이었다.
덕분에 '기특하다'와 '어떡해'와 우는 이모티콘으로 시청자 리액션이 가득 찼다.
-ㅠㅠㅠ 문대 하고싶은 거 다 해 은퇴 빼고
-우리 엄마가 계속 기특하다고 혼잣말 하셔 장학금도 보낼 기세
-아이돌 해줘서 고맙다ㅠㅠ 공무원… 와 저 머리면 금방 붙었을 듯…; 말랑콩떡 문댕댕이 없는 돌판이라니 제법 섬뜩했단 거죠
-참 똑똑하고… 뜻 있는 청년도… 배움의 기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럽구나!
교육열로 불타는 국민성의 옆구리가 쿡 찔린 덕이었다.
그야말로, 조작 어그로가 뭐라 말꺼내기도 머쓱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간간히 '작위적인 느낌이다', '음ㅋㅋ', '노렸네' 같은 애매한 댓글이 달리며 발화점이 되고 싶어서 발버둥 쳤지만, 턱도 없었다.
이 프로그램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신뢰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티원 계열사도 아니고 공중파가 굳이 박문대 띄워주려고 주작을?ㅋㅋ 그럴 필요가 없지
-제작진도 개당황했넼ㅋㅋㅋㄱㅂ개웃겨ㅋㅋㅋ
-이 프로 PD는 조작하느니 망하자는 쪽임 고증에도 목숨 걸고 그래서 가끔 망하면 회생 불가 개노잼화도 나오는데도 꿋꿋한 교친놈들이라고ㅋㅋㅋㅋ
게다가 '분량 혼자 다 해 먹네' 같은 방향으로 트집 방향을 돌리려고 해도 근거가 희박했다.
박문대는 문제를 푸는 상황 외에는 특별히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극이나 액션, 혹은 훈훈한 장면에서는 도리어 선아현을 전면으로 내밀었다.
[우와! 우와아악!]
[내도 저런 걸 해보고 싶다….]
가령, 선아현이 천장에 매달린 한지와 감을 건드리지 않고 힌트를 빼가야 하는 미션을 우아하고 날렵하게 소화해 내는 것은 꽤 볼 만한 장면이었다.
몸가짐이 깔끔해서 더 어울렸다.
'무슨 신선 같네.'
대학생은 저 장면의 슬로우 걸린 온갖 보정이 며칠 안으로 자신의 타임라인 안에 들어올 것을 확신했다.
게다가 선아현은 깨알 같은 토크도 제법 살렸다.
[이거… 하나 드릴까요?]
[어, 어. 저 괜찮은… 아니, 저는 괜찮사옵니다.]
박문대가 구워 온 떡을 멍하니 보던 궁인에게, 떡 한 조각을 조청에 찍어서 다른 손으로 받쳐 내미는 선아현은 그림이 따로 없었다.
촬영 중에 이래도 되는 건지 내적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 귀여움까지 챙겨갔다.
심지어 분위기 조성용 NPC로 등장하는 궁인도 순간 본분을 잊고 현실 인물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않는가.
'별명이 왜 천사인지 알겠다….'
대학원생은 자신의 내면 '문대의 친구들' 폴더의 선아현을 '문대의 귀여운 친구들' 폴더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 와중에도 화면에선 출연진들이 훈훈하게 사건을 풀어가고 있었다.
[우리 분위기 좋은데?]
[좋아좋아! 자, 우리 막내도 함 해볼까?]
[넵! 풀어보겠습니다!]
물론, 박문대가 준비했던 대로, 골든에이지의 한국대생도 문제나 상황극에서 분량은 받긴 했다.
다만 익숙지 않은 단독 출연과 토크에 뻣뻣이 굳은 탓에 별 재미는 없었다.
문제를 푸는 부분에서는 나름대로 선방했으나, 기대치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쾌속으로 풀어버린 박문대만큼의 임팩트는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한국대생이라는 사전정보를 강조한 탓에, 그 정도는 기대했기 때문이다.
[오∼ 굿굿!]
[감사합니다!]
이런 수준의 개성 없는 통상적인 장면으로 방송 흐름만 이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대생은 '심하게 조롱거리가 된 나머지 괜한 시빗거리나 화제가 될 정도'는 아니나, '스포트라이트는 다 뺏길 수준의 맹탕'으로 시청자들에게 정리되었다.
박문대의 팬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였다.
덕분에 그들의 비공개 커뮤니티나 SNS는 축제 분위기였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속 개시원함
-내가수 때랑 똑같은 꼴 났네ㅎ
-ㅋㅋㅋㅋㅋㅋ아 꿀잼
-다음에는 제발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으세용
평소라면 '대기업의 횡포'란 식의 은근한 부추김이라도 했을 골든에이지의 소속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기 때문에, 이 분위기는 반발 없이 정설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절정은 에피소드 마지막에서 터졌다.
[이 서적이요.]
[이거, 꼭 한글 같지 않으세요?]
바로 박문대의 한국사 지식 자랑과 추리 대행진이었다.
[집현전의 '갑'과 '기'가 전하께 훈민정음 해례본 을 올리기 위하여 왔습니다.]
담담한 발성과 희미한 미소가 곁들여진 이 장면은 드라마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컷처럼 그럴싸하게 잘 나왔다.
덕분에 방송을 타자마자 클립이 되어 온갖 SNS와 커뮤니티에 올라오기까지 했다.
[오늘자 과거가 부른다 시청자라면 공감할 명장면]
[? : 이거 꼭 한글 같지 않으세요?]
[과거가 부른다 소름 돋는 박문대 마지막 추리씬]
평소라면 어그로가 끌리다 못해 폭발해 나갈 제목이었으나, 어그로 대신 수많은 공감을 받으며 순식간에 인기글로 등극했다.
담백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난이도 에바였는데 이걸 한 방에 맞춰서 진짜 개소름 돋음
-역시 머리는 타고 나는 건가봐
-이거 딱딱 맞아드는데 카타르시스 오지더라ㅋㅋㅋㅋ
-그래 박문대 데뷔곡 PPT 주도적으로 만들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ㅋㅋㅋ
-뭔가 너무 아까워 이렇게 똑똑한데… 내 안의 K-고3이 지금이라도 수능을 보라고 말하고 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돼 문대는영원히 K돌 해야된다구!ㅠㅠ
약점을 동반했던 박문대의 '불우한 과거사' 이미지가 추가된 '좋은 머리'를 받아들이며 더 입체적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박문대의 계획이 차질 없이, 변수없이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깔끔하네.'
나는 스마트폰을 내렸다. 돌발 사태 없이 개운하게 성과만 본 적도 오랜만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
옆 방에서 차유진이 무슨 응원 문구처럼 단어를 신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케줄 빈 놈들이 심심하다며 과거가 부른다 를 함께 모니터링한 결과였다.
'미국식 버릇인가.'
발음도 정확한 게, 그 장면이 한국사 무식자 차유진에게도 나름대로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었다.
"으하하핫!"
마침 차유진의 룸메이트인 큰세진이 포복절도하는 소리도 들린다. 룸메이트 재배정 컨텐츠가 코앞인데, 제발 저 두 놈만 안 걸렸으면 좋겠다.
그래도 어쨌든… 간만에 계산할 게 없는 밤이었다.
나는 옆 방의 소음을 둔하게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이완되는 감각이 지배적이라 귀마개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좀 일찍 자볼 생각이었다.
그때 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수마트폰이 일정 진동으로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였다.
'뭐야.'
전화할 만한 놈이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주소록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전화는 차단하도록 설정해 뒀으니, 스팸도 아니었다.
아….
나는 한숨을 참으며 스마트폰을 도로 들어 눈앞에 가져왔다. 당연하지만, 전화 건 놈이 액정에 떠 있었다.
[골든에이지 하일준 형]
"…?"
웬… 아닌 밤중에 골드 1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