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이 야밤에 제정신인가.'

아무리 직종상 밤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다지만, 벌써 자정을 넘겼단말이다.

골드 1이 그래도 분별력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떨떠름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문대야.

답변하는 골드 1의 목소리는 좀 얼빠진 놈 같았다.

-음… 아, 지금 전화 돼?

"네. 말씀하세요."

-알았어. 음….

골드 1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이야기 들었는데.

"예?"

-우리 회사가 너희한테… 안 좋게 굴었다고 하더라.

"…!"

이걸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고?

그 회사야 긴급 폭탄 처리로 정신없을 테니 이놈이 사태를 얼추 파악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만, 다짜고짜 전화한 건 이상했다.

'뭘 어쩌려고?'

이 질문은 바로 다음 순간 답을 얻었다.

-저기… 미안하다.

"…."

이거 였나.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야 뻔하다.

"형이 한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혹시 회사에서 전하라고 시킨 거라면 아무 소용 없는 말이고, 그냥 골드 1 개인이 한 말이면 위안이 될말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지만 골드 1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 사실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나도 알았던 것 같아. 그냥 모른척 넘어갔던 거지.

"…!"

-회사에서 너희 이야기 가끔 들었거든.

전화기 너머로 골드 1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일 줄은 모르긴 했는데…그래도 아무튼, 합리화했었나 보다.

너희는 워낙 잘되니까 별문제 없을거라고 생각했나 봐.

"…음."

-근데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까, 너희 입장이면 진짜 짜증 났겠더라.

말하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전화했어. 음, 원래는 청우한테 하려다가, 네가 제일 많이 피해 본 것 같아서 너한테 먼저 했어.

흠, 이것 참.

'회사가 정말 뒤집어졌나 본데.'

사람 죄책감이 아무 계기 없이 생기진 않는다. 소속 가수가 지난 일을 돌아볼 만큼, 그야말로 그 동네가 난장판인가 보다.

'그래도 반발 심리보다 사과부터생각했다는 건 훌륭해.'

본인 마음 편하자고, 혹은 회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연락한 면이 없잖아 있겠다만… 어쩌겠는가. 이놈도 따지고 보면 겨우 대학생 연령대다.

사과할 용기 낸 것만으로도 싹수가 괜찮은 놈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선선히 사과를 받았다.

"괜찮습니다. 좀 놀라긴 했는데 다 끝난 일이잖아요."

X된 건 너희 회사인 상황에서 네 사과 정도야 안 받아줄 이유도 없다.

말이야 뭔들 못 하는가.

-그래, 고마워.

골드 1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목소리가 너머에서 들렸다.

-아, 그리고 슬휘도 너한테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라. 촬영때 잘 대해줬다며.

"…?"

걔가 누구… 아, 그렇군. 그 한국대생이다.

'대충 골드 3로 부를까.'

나는 적당히 긍정했다.

"별건 안 했는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래. …헉, 잠깐. 지금 새벽 1시야?

"네."

골드 1이 괴상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무게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군.

-와 씨, 진짜 미안하다. 모니터링하다가….

"저도 그랬어요. 괜찮아요."

아마 저쪽도 한국대생이 나오는 과거가 부른다 를 단체 시청한 모양이다.

"그래도 슬슬 잘 때긴 하네요."

나는 적당히 마무리용 멘트를 쳤고, 골드 1은 눈치껏 전화를 끊었다.

-아, 그래. 음, 잘 자. 활동 응원할게.

"예. 감사합니다. 형도 좋은 결과있길 바라요."

대화는 온화하게 잘 끝났다.

하지만 아마 앞으로는 이놈들 데뷔초 때처럼 격 없이 인사하거나 아는척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별수 없지.'

경쟁업자라는 게 원래 그럴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혹시라도 다른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스마트폰을 무음 모드로 돌렸다.

'자자.'

그리고 선아현과 배세진이 숙소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푹 잤다.

덕분에 새벽에 온 문자를 확인한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후배님, 공시생 경험을 유용하게썼네요. 축하합니다^^]

이 새낀 또 뭐야.

아점 먹다가 뱉을 뻔했다.

'대체 언제 이런 걸 보냈냐.'

문자 보낸 시간을 보니 새벽 4시였다.

'자기 샵 갈 시간에 보냈나 본데.'

민폐 였다.

나는 보험 광고 당시 봤던 새끼 리트리버가 프로필 사진으로 떠 있는 'VTIC 신청려 선배님'이란 글자를 짜게 식은 눈으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한테 공시 공부했던 걸 말했었군.'

본의 아니게 무슨 신뢰의 증명이라도 한 셈이 되었다.

나는 '네 감사합니다'를 빠르게 쳐서 보내고 메시지 탭을 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새 문자가왔다.

지이이잉-

[(이미지 파일)]

뜬금없는… 기프티콘이었다.

"…?"

클릭해 보니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파는 '수험생 응원용 초콜릿 세트'다.

이걸 설마 유머랍시고 보냈냐?

[활동 응원 겸 보내봤어요. 이제 곧 신곡 타이밍 아닌가?]

그건… 맞다. 슬슬 리패키지 앨범을 낼 타이밍이긴 했다.

그리고 활동 곡은 계획대로, 골든에이지 곡을 맡았던 작곡가에게 받은 후보곡 중에 나왔다.

'편곡이 잘됐어.'

거의 만장일치로 김래빈의 편곡이 통과되었는데, 김래빈은 아직도 썩 자신이 없는 눈치긴 했다.

웃긴 건 본인 실력보단 환경에 대한 염려였다는 점이다.

-확실히 음원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장르를 고르긴 했습니다만, 저희가 곡을 낼 때쯤 새로운 흐름이 도래해서 완전히 대중성의 척도가 변해 버리면…!

-그럴 일 없어 래빈아 진정해.

이런 느낌의 대화를 근래 몇 번이나 했다.

나는 한숨을 참았다.

'자기 발이나 걱정할 것이지.'

김래빈의 발은 최근 '더 이상 안정이 필요하지 않을 수준의 완벽한' 완치 판정을 받았다. 덕분에 안무연습은 아주 순조롭다.

'그놈의 실내 클라이밍하겠다고 고집만 안 부렸으면 일주일은 더 일찍받았을 텐데.'

스케줄을 소화하려는 열정은 알아주겠다만, 참 고지식한 놈이었다.

"너무 대중성을 노려서 평단에서엄청난 혹평을 하는 건…."

"아니야 래빈아∼ 걱정 말고 밥 먹자."

마침 밥 먹으면서도 저러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앨범 준비는 순항중이라는 이야기다.

'어차피 이렇게 그 회사를 재갈 물릴 거였다면 괜히 작곡가로 큰 그림까지 그렸나.'

영린과 청려까지 끌어들여서 작곡가를 공유해 버린 것 말이다.

나는 김에 싼 밥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음, 영린도 이번 성적이 좋았지.'

내가 일부러 골든에이지의 작곡가를 공유했던 영린이 이 주전에 낸신곡도 현재 음원 차트 상위권이다.

며칠 전에 작곡가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따로 한 번 더 받았었다.

'아, 그래서 더 빡쳤던 건가.'

영린에게 그 작곡가를 소개해준 게 나라는 걸 골든에이지의 회사가 어디서 들었다면, 이 근래 굳이 날 물고 늘어진 것도 더욱 이해가 갔다.

'일에 감정까지 들어가니 더 잘됐겠어.'

자기들은 역바이럴하면서 겨우 작곡가 좀 공유했다고 열받았다면 그 꼴이 좀 어처구니가 없긴 하다만 말이다.

'뭐, 다 끝난 일이지만.'

도의적으로 문제 생길 정도는 아니었으니, 당장 T1 상대하기도 숨넘어가는 그놈들이 악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자, 그럼 영린 다음이 우리고.'

마지막 타자는 청려의 그룹인VTIC 이었다.

'약삭빠른 새끼.'

투어나 컴백 스케줄 이야기하면서 슬그머니 뒤로 빠졌지만, 흥망성쇠 다 보고 증명된 후에 판돈 걸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타이틀도 아니고 서브곡으로 넣으면서 호들갑은 다 떠는군.'

과연 완벽주의 리셋증후군답다.

…뭐,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미친놈이 순순히 협력하는 것 자체가 나름대로 협조의 표시일 것이다.

'이대로만 가도 참아줄 수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 자판에 엄지를 옮겼다.

[예. 열심히 해봐야죠. 초콜릿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래요.]

그래. 깔끔하다.

이놈도 내심 그 작곡가의 곡이 마음에 드는지 좀 더 협조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골든에이지 쪽에서 헛짓 안 해도, 괜히 다른 말은 안 나오는게 좋지.'

여러모로 이 그림은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고 했는데, 또 스마트폰이 울린다.

지이이잉-

"…."

[아, 나 다음 달에 생일이에요. 27일.]

어쩌라고.

나는 넌덜머리를 내며 스마트폰을껐다.

밥이나 마저 먹자.

"각자 그릇 잘 가져다 놨지?"

"네!"

청소해 주시는 분이 오시긴 하다만, 인간적으로 기본은 하기 위해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뒀다.

그리고 자유시간이다.

"으하하하핫!"

보통은 각자 방에서 노는 경우가 잦은데, 오늘은 차유진이 무슨 이상한 춤추는 게임을 한다고 해서 관전하러 나온 놈들로 거실이 북적였다.

'들어갈까.'

매번 방에만 있기 그래서 나왔는데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움직이긴 귀찮았기 때문에,나는 다른 집중거리를 찾아냈다.

'…슬슬 까볼 때가 됐지.'

이건 소란스러울 때가 차라리 다른생각이 안 들어서 편할 것이다.

'상태창.'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정산을 시작했다.

[이름 : 박문대 (류건우)]

Level : 17

칭호 : 없음

가창 : S-

춤 : B

외모 : A-

끼 : B+

특성 : 잠재력 무한, 유학생(A), 바쿠스500(B), 잡아채는 귀 (A)

!상태이상 :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남은 포인트 : 2

우선 S에 진입한 가창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좀 뿌듯하군.'

잘 찍은 항목이었다. 예능부터 활동까지 쏠쏠하게 써먹었다.

그 후에는 레벨업으로 얻은 포인트도 눈에 들어왔지만, 더 신경 쓰이는 건 다른 요소였다.

'저건 왜?'

이유는 모르겠다만 끼가 B에서 B+로 자연 증가했다.

'특별히 끼가 오를 만한 일은… 안한 것 같은데.'

최근 안 열어봤다 보니 대체 언제 증가한 건지도 모르겠다.

"흐음."

아무튼, 오른 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팔짱을 꼈다.

이제 얼른 포인트를 분배하고 끄면된다.

새 앨범이 나오기 전이니까 지금이딱 적기였다.

'정석은… 끼인가.'

한 포인트만 소모해서 A 등급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이니 가장 효율적이긴 했다.

"좋아."

"뭐가요?"

"…!"

아차.

상태창을 켜놓는데 심력을 쏟은 나머지, 입 밖으로 말해버린 모양이다.

게임을 막 끝낸 차유진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 다른 말은 안 했으니까.'

문제 될 건 없었다. 나는 대충 대답하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놈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볼까.

"음, 그냥 물어보는 건데."

"네!"

"혹시 아이돌로 활동하는 데 가장 필요한 능력이 뭐라고 생각하냐."

"흠? It's like- personality?"

개성.

'대충 끼로 치환이 가능한가.'

끼가 같은 업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능력치가 좋은 놈이 할 법한 말이긴 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김래빈이 치고들어왔다.

"좀 더 프로다운 대답을 해야지! 형! 제 생각에는 역시 곡을 소화하는 능력 같습니다. 표현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결국 차유진이랑 똑같이 '끼' 능력치로 치환되는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 프로야! 너 밋밋해!"

"아냐! 네 대답은 성의 없었어!"

싸우는 두 놈을 보고 있자니, 옆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본기."

배세진이다. 아무래도 본인이 필요하다고 느낀 걸 말하는 것 같군.

그 와중에 차유진과 김래빈의 말싸움에 큰세진도 한마디 얹고 있다.

"다 잘해야지∼ 무슨 그런 걸 따지고 있어?"

"그래도 더 중요한 걸 고르고자…."

개판이다.

'괜히 물어봤나.'

결론 날 때까지 그냥 두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막간을 이용해 다른걸 확인하기로 했다.

바로 이벤트 팝업이었다.

[명성의 참맛!]

10,000,000명의 사람이 당신의 존재를 기억했습니다!

: 전설 특성 뽑기 👈 Click!

천만 명이라니.

이쯤 되면 그 규모가 현실에 모이는 걸 떠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더 무서운 건 이게 제법 과거에떴다는 점이다. 아마 지금… 오천만명을 향해 달리는 중일 것이다.

'휴우.'

보람과 소름이 동시에 오는군.

어쨌든, 특성 뽑기를 클릭해 보겠다.

둥둥둥둥둥-

익숙한 슬롯머신 그림과 함께, 슬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웅이 B 등급을 기본으로 시작했으니… 전설이면 A가 기본으로 나오는 건가.'

하기야 천만 명이 날 안다는데 이정도는 나올 만하다.

하지만 슬롯에는 금색이 섞여 있었다.

'뭐야.'

이젠 더 높은 등급이 나올 확률만 생성되고, A 등급 확정은 안 주겠다는 것 같다.

'양산형 망겜 같네.'

나는 금색, 백금색, 무지개색이 섞여 돌아가는 슬롯머신을 노려보았다.

'뭐든 좋으니 활동에 쓸 만한 게 나왔으면 좋겠군.'

슬슬 '유학생'을 버리고 갈아탈 시점인 것 같아서 말이다. 컨셉 소화력에 도움이 되거나, 하다못해 머릿결이 튼튼해지는 거면 좋겠다.

슬롯은 점점 천천히 돌아가더니,멈춰섰다.

다행히 백금색이었다.

파파팡!

[특성]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획득!

"…!"

하지만 거기엔… 어디서 많이 본특성 이름이 떠 있었다.

등급만 달라진 채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1화]

쓰레기장에 버린 인형을 현관 앞에서 도로 만났다는 괴담을 아는가?

지금 내 심정이 그거랑 썩 비슷하다.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지금 뽑은 이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특성.

아주사 참가 초반에 c등급으로 나와서 선아현 설득에 써먹었다가, 데뷔하면서 삭제한 특성이었다.

다시 튀어나온 것도 웃기지만 다른것도 웃겼다.

'왜 등급이 A냐고.'

이미 가지고 있던 특성이 또 뜨면 합성되며 상위 등급으로 변하는 건 경험해 봤는데, 그 경우에는 이름이 바뀌었던 것 같단 말이다.

'무슨 시스템이 체계가 없나.'

왜 이건 또 이름이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설마 효용성이 좋아서 A등급으로 상향 조절됐다는 X망겜에서나 할 법한 개소리는 아니겠지.

일단… 내용을 자세히 한번 확인해보자.

[특성]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획득!

-듣는 이에게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 발동 확률 60%, 기본 활성화 상태

"…음."

설명은 그대로에, 확률은 확실히 높아졌다. C등급일 땐 35%였던 것같은데, 여기선 60%다.

'그렇다면 상위 등급인데 이름이 변하지 않았다는 게 맞는데… 대체 왜?'

그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경고인가.'

그러고 보니, 새 특성이 나오면 꼭 그걸 써먹을 순간이 온다는 가설을 세웠었다.

그리고 그 가설은… 지금까지 얼추 맞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굳이 이름까지 바꾸지 않은 건, 내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어서 꼭 이 특성을 가져가라는 경고를 하려고….

'과하다.'

이 상태창의 의도에 너무 집중하지말자. 뒤통수 맞은 경험이 한두 번인가.

그렇다고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무조건 무시할 필요도 없다.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

나는 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리다가,결국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차피 바꿀 참이긴 했지.'

'감정적 동요'라는 게 여러모로 쓸모 있는 능력이긴 했다.

'이게 맞는 선택이다.'

나는 특성란을 조작했다.

[특성 : 유학생(A)이 삭제되었습니다!]

그렇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특성이 내 상태창에 재입성했다. 다시 감투 쓴 걸 축하한다.

이제 남은 건 스탯 투자인데….

"그래. 나도 세진이처럼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고 생각해. 그런데 테크닉적인 측면보다는 마음가짐에 가까워.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잖아."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 저도…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마음! Personality!"

아니, 그 마음이 아니다.

게다가 스탯 투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론이 나왔다.

'허이고.'

하지만 이놈들이 나름대로 일치된 결론을 내렸다는 표정으로 훈훈해하고 있으니 뭐… 놔두자.

"그래서 마음가짐으로 결론을… 잠깐, 근데 이 이야기 왜 하던 거야?"

"문대 형이 물어봐요!"

차유진의 발언에 류청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냥 심심해서 물어본 겁니다."

"아, 그런가."

류청우가 멋쩍게 웃었다.

"난 또, 우리 마음 한번 다잡자고 한 말인 줄 알았어. 이제 곧 새 활동이니까."

"아∼ 저희가 그 용도로 쓰면 되죠! 컴백 화이팅!"

"화, 화이팅!"

졸지에 컴백 대박을 외치는 분위기가 되었다. 거참.

'그래도 다들 예전처럼 바짝 긴장하진 않는군.'

궤도에 오른 팀의 확실한 위치. 좋은 곡과 안무.

그리고 리패키지는 원래 텀이 짧고 앨범 구성이 비슷해서 성적 기대가 덜하니, 오히려 부담감이 줄어든 것같았다.

아주사 새 시즌에 발목 잡힐 염려도 없다. 산업 스파이 사건 때문에 회사가 한동안 저자세로 나올 테니, 출연이나 기사 거부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듣기로는 최근 방영된 6화에서 주식 매도 할인, 그러니까 '마이너스표 싸게 팜'이라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 있다던데.

내 일이 아니니 강 건너 불구경이 따로 없었다.

'흠, 나도 이번에는 좀 쉽게 갈까.'

몸이라도 좀 편하게 춤에 찍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아직 켜진 상태창을 보다가,피식 웃었다.

'20만 못 모으면 죽는 놈이 무슨.'

효율적으로 가자.

이번에는 퍼포먼스가 강력하지 않은 곡이니, 다른 요소를 더 강조해서 무대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좋다.

'이래도 하나로 수렴하는군.'

나는 처음 생각했던 그대로 스탯을올렸다.

끼가 B+에서 A-이 되도록.

'뭐, 이래 봤자 차유진에 비할 바는 아니다만.'

과연 B일 때와 어떤 차이가 생길지, 좀 궁금하긴 했다.

박문대가 상태창 정산을 마친 날로부터 2주 뒤 10월 17일 목요일 오후

"컴백!"

박문대의 홈마는 패드와 스마트폰 공기계에서 각각 돌아가는 뮤직비디오와 음원 스트리밍을 보며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화면들엔 공통으로 뜬 문구가있었다.

[테스타(TeSTAR) - Picnic]

바로 그달 14일에 컴백한 테스타의 이번 리패키지 신곡이다.

'너무 좋아!'

휴식기 없이 소처럼 일하는 가수가 걱정되면서도 좋아서 입이 벌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행차에서 끌어올린 기세 못 탈까봐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활동 곡이 아주 좋았다.

산뜻하고 부드러운 R&B 곡은 쌀쌀한 가을 아침에 기분 좋게 듣기 딱이 었다.

'출근길 픽 되자…. 제발!'

아직 발매 사흘째라 대중 픽이고 뭐고 팬들이 일간 차트에서 순위를 끌어올리기 바쁜 참이었건만, 홈마는 그답지 않게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이건 음원에서 선전해야 돼!'

이렇게까지 리스닝에 치중한 곡을 만들었는데 모두가 들어줘야 한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솟구치고 있었기때문이다.

게다가 테스타는 대중성을 신경 쓰다 보면 놓칠 수 있는, 팬들이 좋아할 만한 자신들의 모습도 살짝 챙겨왔다.

뮤직비디오에서 디테일을 살린 것이다.

-일기예보와 상관없어

널 만나고 싶은 날이야

가볍게 툭툭 걸어가면

오늘은 파란 하늘, 이야

Go on a picnic, Go on a picnic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그냥 '대학생 테스타 멤버들이 한강으로 놀러 간다'는 간단한 스토리였지만, 내부의 소품과 구도 사용이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아주사부터 행차까지 테스타의 결정적인 모습과 소품들을 교묘히 재현해 끼워두었기 때문이다.

가령 박문대의 방 안에 걸린 아주사 유니폼과 똑 닮은 고등학교 교복, 한강에서 선아현이 부는 비눗방울,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류청우의 구도 따위였다.

아는 사람만 찾아낼 수 있는 요소들이 팬들을 재밌게 했다.

그래서 테스타에 관심이 있던 기자는 이런 논평을 내주기도 했다.

[1주년을 맞은 그룹이 가져오는 노스텔지아]

여기 거대한 이야기가 압축된 시간이 있다. 쉬지 않고 달려온 테스타의 시간은 대중과의 농도 진한 공유감으로 촘촘한 밀도를 가졌다.

그 모든 시간을 하나하나 풀어헤쳐, 아름답게 흩날리게 두는 느낌이 각별하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도 즐길 수 있다…

물론 이 기사가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진 못했지만, 홈마를 위시한 테스타 팬들의 댓글과 응원은 듬뿍 받았다.

그리고 팬들이 해석뽕에 취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첫 대중 반응도 썩괜찮았다.

일단 KPOP 관련 커뮤니티 등지에서 '곡 별로다', '행차가 더 나았다'로 도배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이 정도가 한계였다.

-행차에 비해 좀 밋밋함 그냥 내 취향임

-되게 쉬운 노선 골랐네ㅠㅠ컨셉충 이제 안 하려나 보다

└래빈이가 직접 편곡했는데 너무 좋아서 꼭 타이틀로 쓰고 싶다고 멤버들이 그랬대! 다음 컴백 때는 또 어떤 멋진 곡 들고 올지 기대하는중이야

-무난무난∼

-노래 좋은데 좀 아쉽다 좀 더 강렬한 게 나올 줄 알았어

물론 보는 팬들이 열 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행차 가지고 나왔을 때는 '너무나갔다', '오글거린다'면서!'

이미 지나가서 깎을 수 없는 지난 활동 곡을 마구 치켜세우면서, 그걸로 신곡을 후려치는 꼴은 언제봐도 사람을 빡치게 했다.

홈마는 뒷목 잡고 싶은 기분으로 잠깐 그 꼴을 회상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우리 명곡이야.'

곡이 좋으니 모든 게 괜찮았다.

게다가 타이틀곡의 평만 좋은 게 아니었다. 리패키지 앨범 구성품도 훌륭했다.

예약 특전으로 피크닉용 담요와 박스를 보내줬는데, 무늬를 멤버들이 그린 것이다.

'상술인 건 알지만… 훌륭한 상술이었다.'

홈마는 문대가 그린, 뭉개진 떡 같은 사과 무늬 담요가 걸려 있는 자신의 방 벽 한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참고로 그 옆에는 내가 만든 가수님 의 '5월의 신랑' 인형이 크기별로 우르르 모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좋아…. 순조롭다."

홈마는 순식간에 진정했고, 동시에 설렘을 동반한 행복에 침대를 굴렀다.

솔직히 서바이벌로 데뷔한 그룹 멤버의 홈마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어지간한 가시밭길이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스코어를 보면…지레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고 즐거운 날들이었다.

문제가 터지긴 했지만, 처신이 딱딱 알맞아서 금방금방 가라앉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적이 좋았다!

'아, 이번에 과거가 부른다 나온것도 너무 좋았지.'

무슨 사극 왕세자처럼 총명 그 자체였다며, 홈마는 흥분해서 타임라인에 렉이 걸리던 그 상황을 짧게회상했다.

문대는, 천재 강아지야….

그냥 원초적인 주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퍼뜩,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일하자, 일!'

지난번 행사에서 찍은 사진을 얼른 보정해야 오늘 컴백 무대 본방을 상쾌한 마음으로 볼 것 아닌가!

하지만 홈마가 무심코 클릭한 노트북의 인터넷 탭에서 본 것은… 테스타의 위튜브 채널 커뮤니티에 뜬 공지였다.

[테스타의 같이 살기 TEST : 외전 룸메이트 바꾸기 2탄!]

과연 누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을까요? 내일(금) 저녁 7시, 멤버십 러뷰어에게 선공개됩니다! -

(사진)

첨부된 사진에는 카드 게임을 하는 남자 손 여럿이 첨부되어 있었다.

글과 맞춰보면… 누가 봐도 룸메이트 정하는 게임이었다!

"와아악!"

홈마는 즐거움의 비명을 질렀다.

'재밌겠다!'

아현이가 싫은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이쯤 되면 박문대가 다른 멤버와 룸메이트를 했을 때의 반응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약간 진정했다.

'음… 류청우는 말고… 이세진이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두들겨 패고 타이밍 맞게 잘 넘어가서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문대의 지난 썸머패키지의 모습을 봤을 때 류청우와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다들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만 그러고 다시 잘 지내더라.'

잠시 싸웠나 의심한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굳이 룸메이트가 되는 모험을 바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주사 1차 팀전의 조합의 첫인상이 아직 강렬했기 때문에, 홈마는 내심 이세진을 꼽았다.

'아무튼, 재밌었으면 좋겠네!'

결과적으로, 홈마의 이 포괄적인바람만은 이루어졌다.

"WOOOW! 문대 형!"

"…와."

실화인가.

나는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내미는 차유진을 보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우리 룸메이트예요!"

확인 사살까지 해주는군. 알겠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2화]

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설명하자면이렇다.

테스타의 이번 룸메이트 배정은 카드 게임을 빙자한 땅따먹기 보드게임으로 정해졌다.

"자자, 이제 여의도는 제 '빨간무 코인 세력' 땅입니다! 다들 코인 하나씩 주시죠∼"

"…어, 어어?"

"벌써? 세진이가 굉장히 잘하네."

"하하∼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 낯선 게임은 룰이 복잡하고 플레이 타임이 길었으며 결정적으로, 룸메이트 배정과는 별 연관성이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콜라보 했었던 '127 Section'의 IP를 쓰는 보드게임 신작이더라고.

'T1에서 넣은 PPL이겠지.'

이젠 익숙하다.

아무튼, 그래서 제작진들은 어떻게든 이걸 룸메이트 재배정과 끼워 맞추기 위해, 게임 순위 높은 놈 순서대로 룸메이트를 고를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결과가 이렇다.

"바로 유진이의… '불꽃폭주족'이 36 칸으로 1등!"

"예아!"

"에이∼ 아쉽네!"

막판에 차유진이 역전승한 것이다.

'삼 연속 주사위 6면이 나오다니.'

차유진의 미친 운빨에 승리고 나발이고 나중에는 다 무슨 갬블링 관전하는 것처럼 소리나 지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차유진 이놈은… 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룸메이트로 지목했고.

"문대 형, 룸메이트 잘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대체 왜.'

우리가 언제 친해졌다고 이러냐.

심지어 다른 놈을 끼워 넣어 책임을 분산시킨다는 선택지도 차단되었다.

"흠흠, 그럼 1등 한 유진이의 방선택은…."

"1번!"

2명이 지내는 방이다.

"오∼ 문대 1번 방 복귀네? 축하해∼"

"…오."

하나도 안 반갑군.

물론 이걸 대놓고 표출하는 미친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차마 적극적인 말은 못 했다만, 그래도 차유진에게 하이파이브나 어깨를 두드리는 등의 긍정적인 신체 신호는 중분히 주고 있다.

'차유진 팬들은 자극하면 안 돼.'

그 사람들은 이걸 개그로 넘어가주지 않고 날 쥐어 짜내서 막내 갈구는 왕따 유발자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진정하고, 이놈이랑 같은 방을 써서 좋은 점을 생각해 보자….

…그런 게 있나?

"그럼 2등인 세진이의 선택은?"

"옙, 제 선택은… 두구두구두구. 우리 멋쟁이 래빈이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하! 아, 우리 3인 방 가도 좋을것 같은데?"

"음, 3등은 문대니까 생략하고…마침 4등인 래빈이가 룸메이트 차례네. 래빈이 어떻게 할래?"

"저는 선아현 형이 마지막 룸메이트로 합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 나, 나?"

"예! 지난 룸메이트 시절 이후 몇가지 여쭤보고 싶은 사항이…."

다른 놈들이 속속들이 룸메이트가 되는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장점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알았다.

"젤리 먹어요!"

"그래."

한동안 일찍 숙면하긴 글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며칠 후 음악방송 대기실. 의상 소품을 고정하던 스타일리스트가 물었다.

"문대야, 괜찮아? 정신없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다만 바쿠스가 없었다면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차유진 저 미친놈 어제 새벽 2시까지 안 잤어.'

그것까지는 괜찮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를 수 있지.

다만 그 2시까지 활발히 활동했다는 게 문제였다.

나한테 말을 걸면서 말이다.

"….후 "

사실, 나는 미리 선수 쳐서 차유진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해둔 상태였다.

-내가 최근에 체력을 관리하느라… 운동 시간 외에는 웬만하면 누워서 쉬고 싶거든.

-오우… 형 힘들어요?

-힘든 건 아니고. 체력을 좀 비축해 두려는 거니까 되도록 침대에서 안 나오게 해줘.

- 알았습니다!

그리고 차유진은 내가 질문 폭탄이 날아올 것을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깔끔하게 오케이를 외치더니, 그다음부터는 정말 주의해 줬다.

그러니까… '침대에서 안 일어날수 있는' 수식어만 말이다.

-와우! 이거 봐요, 형!

-…

침대에서 목만 빼서 확인한 차유진의 스마트폰에는 아기와 요상한 하울링으로 대화하는 시베리안 허스키의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너무 귀엽고 웃기지 않아요? 아기와 강아지. 언제나 제 하루를 행복하게 해준다니까요]

-그래. 좋지.

여기에 긍정적인 대꾸를 해줄 때까지만 해도 이 비슷한 패턴이 새벽 2시까지 반복해서 나올 줄은 몰랐다.

당장 내일 금요일 음악방송 사전녹화가 있는데… 말이다.

-형, 형! 이 hippo**.

- 그만.

결국 '조용히 하고 좀 자자'는 말을 세 번쯤 하고 나서야 차유진은 잠을 잤다.

조금만 더 나갔어도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강제로 취침시켰을 것이다.

'미치겠네.'

물론 매번 이러는 건 아니다.

차유진이 일찍 잘 때도 있지만 그게 순 자기 맘대로라는 게 문제다.

그래도 태도를 보면 내 말을 나름대로 지키려는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자기 기준에 별거 아니다 싶으면 머리에 저장을 못 하는 부류라 매번 까먹는다는 것이다.

'겁이라도 줘야 하나.'

물론 농담이다. 카메라 앞에서 차유진이 주눅 든 티라도 내는 순간 불화설 꼬투리다.

평소라면 무시할 정도였으나, 문제는 내가 바로 몇 달 전에 류청우에게 비협조적으로 보일 영상물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 썸머패키지 말이다.

'안 좋아.'

고로 일단은… 참는다.

다만 지금까지의 경향상 반년 이상은 이 룸메이트가 고정일 텐데, 과연 내가 그동안 이 새끼에게 불편한 티를 한 점도 안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류청우는 처음에 어떻게 룸메이트를 버틴 거지.'

음, 생각해 보니 큰세진이 있으니 그쪽으로 차유진의 어그로가 다 튀었겠군.

"형! 쿠키 쿠키?"

"괜찮아."

"맛있어요!"

"너 많이 먹어라."

이젠 숙소 밖에서도 차유진이 부쩍 말 거는 빈도수가 늘었다. 룸메이트라고 친근감을 느끼는 중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테스타 바로 대기하러 이동하실게요∼"

"넵!"

어쨌든 다음 무대가 바로 우리였다. 룸메이트는 룸메이트고, 지금은 일에 집중하자.

와아아아아-!

인이어 너머로 함성이 들렸다.

차음 작용을 하는 작은 파츠를 뚫고 웅웅 울리는 소리는 묘하게 사람을 고양 시키는 맛이 있었다.

'잡념이 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특히 퍼포먼스가 복잡하고 빈틈없는 곡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느낌이 썩 도움이 됐다.

하지만 지금처럼 군데군데 느슨하게 짜인 곡은 억지로라도 좀 생각을하는 게 좋다.

그냥 흘렸다가는 맹숭맹숭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니까.

쉬운 만큼 밋밋해 보이지 않게 더 신경 써야 하더라고.

'여기서 약간 기다렸다가… 제스처.'

-시원한 바람 달콤한 커피

시럽을 많이 넣어

나와 똑같아 그래

Take a seat

턱을 괴는 동작이 불 들어오는 카메라에 잘 잡혔다.

'묘하게 수월하군.'

전보다 생각에서 표현까지의 딜레이나 체감적 차이가 줄어든 느낌이다.

'이게 끼 스탯의 힘인가.'

제법 재밌었다.

나는 몇 번 생각에 없던 표현-표정을 바꾸거나 한 손으로 안경을 만드는 등의 동작을 더 추가했는데, 멈칫거림 없이 적절히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오.'

흥미롭다.

-이제 편하게 기다려

(Hold on a second)

지금 데리러 갈게

서로서로 등을 대고 서거나 앉는 것으로 무대는 끝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꾸벅꾸벅 인사하며 무대 아래로 내려온 놈들의 얼굴이 굉장히 멀쩡했다.

"모니터링, 모니터링∼"

"거기 줄 조심해!"

마지막에 좀 재기발랄한 댄스 브레이크가 있긴 한데, 특별히 폐가 튀어나올 만큼 숨이 차진 않았기 때문이다.

'서브곡도 발라드고.'

재밌는 점은, 활동 난이도가 낮아진 것과 다르게 음원은 더없이 잘나갔다는 점이다.

당장 매니저도 무대 모니터링이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이렇게 외치는판이다.

"얘들아! 피크닉 음원 또 올랐어! 24Hits에서 7위야!"

"와!"

발매 5일째라고 믿기지 않는 쾌거였다.

한 사람이 반복적으로 들어도 24시간 내로는 1회만 카운트해 주는 구조에서, 올해 남자아이돌 음원 중 이런 순위는 VTIC 외엔 우리가 처음이다.

'당장 우리 직전 앨범인 행차보다도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좋아.'

음원 대중성이 훨씬 좋은 영린과 비슷한 속도였으니, 곡이 정말 이지리스닝으로 잘 빠졌다는 뜻이다.

큰세진이 슬쩍 챙겼다.

"래빈이가 편곡을 잘해줘서 그래∼"

"마, 맞아. 곡 정말 좋아…!"

"아, 아닙니다! 실질적으론 좋은 데모와 팀원분들의 좋은 의견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수상소감 같다.

'얼굴이 폈군.'

김래빈은 며칠 전보다 훨씬 편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음, 그래도 여전히 살벌해 보인다.

"너 곡 많이 만들어! 나 줘."

"곡이라는 건 그렇게 마구 찍어내는 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영감이 와야 작업을 할 수 있…."

"영감님? 너 할아버지?"

"바보야! 그게 아니라, 음…."

나는 한숨을 쉬었다.

"…Inspiration."

"아, 감사합니다 문대 형!"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 두 놈의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사실 차유진이 통역사로 쓰기 위해 날 룸메이트로 찍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든다.

설득력 있군.

"얘들아, 엔딩 무대!"

"아, 넵!"

어쨌든, 컴백 주라 정신없이 바쁜 스케줄 속에서 생각을 정리할 타이밍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서 차유진의 속셈을 알게 된건 며칠 후 취침 직전의 자유시간이되어서 였다.

[일기예보와 상관없어∼ 널 만나고싶은 날이야.]

그나마 시간이 빈 월요일 심야.

나는 침대에 누워서 직캠을 보고있었다.

바로 금요일 날 찍었던 그 음방에서 올려준 공식 세로 직캠이었다.

[(K-cam) 테스타 (TeSTAR) 박문대 직캠 'Picnic' 2X1018]

썸네일은 턱을 괴는 내 클로즈업샷에, 벌써 조회수도 제법 붙었다.

보니까 커뮤니티 등지에서 내 첫번째 아주사 직캠과 비교하며 가볍게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그… 바로 나 등급 평가 직캠말이다.

나는 '박문대는 딥러닝 AI 댕댕이' 비슷한 말로 도배된 댓글을 약간 민망하게 훑으며, 내 직캠을 다 봤다.

'확실히 더 좋아졌다.'

강약 조절이 확실하고, 표현하고 싶은 느낌이 확실하면서도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게 좋았다.

'음.'

이 정도면 예전의 내가 봐도 이놈은 돈 되겠다고 찍을 수준이 아닌가, 살짝 자화자찬해 봐도 괜찮을것 같다.

하지만 이 생각은 다음 동영상이 자동재생되며 일시 기각되었다.

[(K-cam) 테스타 (TeSTAR) 차유진 직캠 'Picnic' 2X1018]

같은 날 차유진의 직캠이었다.

'이 새끼는 진짜 괴물이네.'

그냥 자연스럽고 좋은 수준이 아니라, 동작마다 하나하나 묘하게 느낌을 줬다.

'흠, 쫄깃쫄깃?'

그런 수식어가 어울릴 것 같다. 단순히 춤을 잘 추는 게 아니라, 잘살렸다.

'분석할 보람이 있겠군.'

나는 잠시 차유진의 직캠을 틀어뒀다. 그러자, 불쑥 머리가 옆에 들어왔다.

"형! 제 video 봐요?"

"어. 너 잘하네."

"히히."

차유진은 신난 표정으로, 영어로 우수수 말을 쏟았다.

[어때요? 그러니까, 재미있어서 보는 거예요?]

"그것도 있고, 내 거랑 비교도 해보고 연구 좀 할 겸."

"오우!"

차유진은 눈을 번쩍 빛내더니, 내침대를 펑펑 쳤다.

[형! 그럼 우리 몇 가지 팁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형이 저한테 노래에 대해서 알려주면, 저는 춤에 대해 알려주는 거죠!]

"그래?"

"네!"

저놈이 가르치는 데 소양이 있을것 같지 않아서 별 기대는 안 된다고 생각할 찰나, 차유진의 본론이 나왔다.

[그리고 우리가 유닛 공연을 하는게 어때요? 다음 콘서트에서!]

어쭈?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3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차유진과 같이 유닛 무대를?'

확실히 콘서트 일정이 잡혀 있긴 했지만, 거의 픽스된 다른 세트 리스트와 달리 유닛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솔로곡이 있으니 굳이 필요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거든.'

대신 그 자리에 단체로 발라드나 한두 곡 하자는 건데, 난 사실 유닛쪽에 더 마음이 기울긴 했다.

그쪽이 더 기대하는 재미가 있을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답을 기다리는 차유진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안 돼."

"예? 왜요?"

차유진은 배신당한 얼굴이었다.

이놈 웃기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 나랑 유닛 무대를 하고 싶은 이유가 뭔데."

"형이 잘해요! 같이하면 멋져요!"

"모르지. 넌 춤을 잘 추고 난 노래를 잘하니까 오히려 안 맞을 것 같은데?"

"연습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노력 이야기부터 나오는군. 너도 한국인 다 됐다.

차유진은 드물게도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너 애초에 유닛 무대 생각하고 날 룸메이트로 골랐지."

"네!"

특별히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번에 룸메이트끼리 유닛 무대를 했던 걸 떠올리고 골랐나.'

나는 대답 없이 차유진을 쳐다보았고, 차유진은 살짝 풀이 죽었다.

"형 무대 재밌어요… 나도 그거 할래요."

음. 그래도 여전히 말은 꿋꿋하군.

"내 무대가 재밌다고?"

"네…. 영어 말해도 돼요?"

지금까지 실컷 써놓고는 뭘 묻고있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차유진은 영어로 상황을 주르륵 설명했다.

[우리가 서바이벌 리얼리티쇼에 출연할 때부터 생각했는데, 형이 생각하는 무대 아이디어들이 정말 멋져요. 그래서 이번 콘서트에선 저도 거기에 100%를 쏟아서 한번 해보고 싶어요!]

차유진은 눈을 번쩍이며 손가락으로 자신과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최고의 댄스, 최고의 보컬! 장담하는데 연습만 조금 더하면 끝내주는 무대가 될 거예요!]

오, 예상 이상의 호평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사 때도 계속 다음에 같이하자고 했었나.'

그땐 다음이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장기적 안목으로 생각했었나 보다.

이거 참.

'좀 잘 설명해 줄까.'

팀에 댄스라인이 셋이나 되는 데도 본인이 제일 춤을 잘 춘다고 당당히 말하는 저 당당함을 봐라.

그냥 거절했다간 자기가 납득이 안되니 계속 유닛 하자고 조를 게 분명했다.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유닛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알지?"

"하지만 유닛 좋아요! 그냥 한다고말해요!"

"안 돼.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잘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들 의견도 다 고려해서 정해야지. 우린 팀이니까."

"…."

차유진은 부루퉁한 얼굴이었으나, 나름대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포지션이 너무 달라.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확실히 다른 상태에서 이도 저도 아닌 유닛을 했다가 혹시 기대치에 못 미치면 상황이 애매해질 수 있어."

"걱정 안 해요. 우리 실력 좋아요 도전해요!"

넌 걱정 안 해도 내가 걱정이 된다 새끼야.

가뜩이나 1, 2위가 자기들끼리 짜고 유닛하면 관심 쏠릴 텐데, 거기서 이미 다른 멤버 개인 팬 중엔 빈정 상하는 사람이 나온단 말이다.

그런데 그 판에 기대보다 못해 버리면 기껏 무대 해놓고선 얻는 거 하나 없이 손해만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굳이 차유진과 유닛 할 이유가 없다.

"도전 좋지. 하지만 우린 일하는 중이야. 여긴 학교가 아니니까 무조건 도전할 수는 없어. 신중해져야지."

"…."

차유진은 완전히 축 처졌다. 저렇게 낙담하는 모습은 또 아주사 이후 처음이다.

'원대한 포부가 있었나 본데.'

나는 결국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뭐, 콘서트 무대가 유닛으로 결정되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보는게 어때."

"…!"

기각이 아니라 보류라는 뜻이었다.

'너무 눌러두는 것도 안 좋지.'

차유진을 좀 현실로 끄집어내리는건 괜찮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찍어누를 필요는 없었다.

뭐, 정말 좋은 의견이 나올 수도있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차유진은 도로 신이 났다.

"좋아요! 저 영감님 많아요! 많이 말해요!"

영감을 주겠다는 뜻이겠지.

"하루에 세 번만 받는다."

"Umm… Got it!"

차유진이 손가락을 튕기는 제스처를 하며 대화가 끝나는 듯했으나….

[그렇지! 수중 공연 어때요?]

"…."

우리 콘서트 예산을 생각해라.

'그냥 낙담하게 놔둘 걸 그랬나.'나는 내 선택을 짧게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콘서트 유닛보다도 더 사소한 것에서 도화선에 불이 붙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며칠 뒤, 테스타의 룸메이트 재배정 컨텐츠가 위튜브에 업로드되었다.

해당 계정 멤버십에 가입한 사람만 일주일 일찍 볼 수 있게 풀어줬지만, 당연히 불법 해적판이 온갖 곳에 판쳤다.

테스타의 유명세 덕분이었으나, 그불법 업로드 영상마다 조회수가 붙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친 개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청나게 웃겼기 때문이다.

보통 팬을 겨냥한 아이돌의 자체 컨텐츠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테스타의 최근 위튜브 컨텐츠들도 적당히 훈훈하고 덜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룸메이트 컨텐츠부터는 제작 PD가 바뀌며, 테스타의 데뷔 리얼리티 당시의 자극적인 맛이 살아났다.

T1이 테스타의 자체 컨텐츠를 개편하면서, 데뷔 리얼리티를 찍었던 제작팀도 섭외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캐릭터성을 붙이고, 몰아가고, 편집의 반전도 잘살렸다.

[배세진(투자중독자) : (전부 투자하고 남은 건 2코인…! 이젠 정말코인뿐이야!)]

[선아현(건물주) : 아, 그… 세진형께 3코인 징수하라고 떴어…]

[배세진(방금 파산) : !]

게다가 워낙 이 게임에 돌발 상황이 많이 발생했다.

덕분에 온갖 영상의 댓글마다 외국어와 한글로 웃는 의성어가 도배되었다.

-여러분 이 영상은 찐입니다 방금 웃다 토할 뻔했어요

-계속 서로 파산시켜 미쳤냐ㅋㅋㅋㅋㅋ얘들아 땅을 지켜 왜 자꾸 팔아서 투기햌ㅋㅋ큐ㅠㅠㅠㅠ

-(19:41) 차유진 1/216 확률 뚫고 최고액 받는 순간 애들 반응ㅋㅋㅋㅋ

-아이 류청우 배세진 개모탴ㅋㅋㅋ

└어릴 때부터 진짜 돈 버느라 가짜 돈 버는 게임은 못 해본 듯…(측은한 이모티콘)

└ㅋㅋㅋㅋㅋㅋ아니 국가대표랑 아역배우를 불법 아동노동처럼 말하기있냐고요!

팬들은 불법 영상들을 신고하자고 글로는 독려하면서도, 내심 영상이 너무 재밌어서 그냥 좋아했다.

-머글 영업용으로 좋을 듯… 돌덕의 망상인가? (턱을 괸 이모티콘)

-어차피 자컨은 홍보용인데 괜히 멤버십으로 당장 푼돈에 눈멀지 말고 바로 풀지ㅠㅠ

-아 꿀잼… 얘들아 사랑한다

-이런 존잼 그룹을 당장 파지않으면 인생의 낭비 최고의 가성비 당신의 웃음을 되찾아줄 테스타를 지금 위튜브에서 만나보세요

-파산한 배세의 영혼을 잡아채는 이세진의 깜찍한 손동작… (GIF)

그리고 PD는 이 게임 이후의 룸메이트 결성까지도 제법 재밌게 살렸다.

[차유진 : 와우! 문대 형! 우리 룸메이트예요!]

[박문대 : …와? (영문은 모르겠으나 일단 고마움)]

룸메이트 배정으로 각각의 멤버들이 살짝 표현한 감정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극대화해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데뷔 후 거의 보지 못했던 차유진과 박문대의 조합은 제법 재밌어서 반응이 좋았다.

-차유진 그냥 박문대가 옆에 있어서 고르고 본 듯ㅋㅋㅋㅋㅋㅋㅋ

-문대 당연히 유진이가 래빈이 고를 줄 알았나 봐 표정 봨ㅋㅋㅋㅋ

-문댕댕 차고영 조합 얼마 만이냐아 더 보여줘라∼∼(쩌렁쩌렁

-ㅅㅂ박문대 X나 내향인간 주제에 차유진 말 다 받아주네 X발 스윗한 사과떡 개조아

-이건 핵인싸 캘리보이의 직사광선에 짜게 마르는 인천 티벳여우(캡처)

테스타를 두루두루 좋아하는 팬들이나 박문대의 팬들은 대부분 이 구도를 좋아했다. 캐릭터가 강렬하고훈 훈해서 재밌었기 때문이다.

다만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다.

차유진의 개인 팬 중, '아주사' 방영 극 초기부터 자리 잡고 있던 고인물 중 몇몇이었다.

-아 가만히 있는데 모두가 좋아하는 최애 밀고 싶어서 정병난 어떤 빠들 보면 우에에엑

-감성팔이로 선동질하던 버릇은 역시 못 버리는구나 어쩔 수 없지 그냥 죽어ㅠ

-곰머 X나 띠꺼운 티 다 내던데 곰머 빠들 어떻게든 훈훈으로 몰아가려고 기를 쓰네 썸머패키지 국데 다음은 윾진이야?ㅋㅋ

박문대가 차유진을 홀대하는 걸 억지로 훈훈하게 연출했다는 게 그들의 논지였다.

물론 이것이 차유진 팬덤의 전반적인 여론은 아니었다.

그들은 차유진의 성공적인 데뷔에 공격성이 많이 누그러들었고, 새롭게 팬이 된 사람과 섞이며 배타성이 많이 줄었다.

다만 여전히 박문대의 1위에 대해서는 그 정당성에 의문을 느끼는 팬들이 은연중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감성은 박문대의 개인적 활약을 썩 좋지 않게 보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렇기에, 수면 아래 익명 사이트나 비밀 계정뿐만 아니라 공개된 곳에서도 이런 혐오성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나왔던 것이다.

언제나와 비슷한 날이었다.

-이 새끼들 뭐야?

다만 전과의 차이점은, 박문대의 팬들도 더 참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캡처) 2위 악개들 아직도 이러고 계시네 느그가 못나서 투표에서 밀린 걸 어쩌라구ㅠㅠ

-응 열폭으로 넹글 돈 정병∼

-윾진이도 너 같은 정병이 자기 프로필 쓰는 거 보면 토나올 듯ㅎ

-머갈텅텅이라 주등이 간수 못 해서 단독 예능 못 나오는 걸 어떡해ㅜ 1위가 책임져줘야 하는 거야?ㅜ

아주사 때야 극 초반부터 부동의 상위권이었던 차유진 팬덤의 선점 효과에 밀려 꾹꾹 참고 뒷공작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박문대의 데뷔 후 활약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외양과 무대가 계속 계단식으로 좋아지며 팬 유입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데다가, 예능도 출연마다 홈런을 날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이번 앨범에서는 포토 카드시세도 차유진과 엇비슷해졌다.

그러니 박문대의 과격한 개인팬들이 슬그머니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쟤네 정도는 이제 대놓고 패도 상관없지 않나?'

그리고 한번 반박하기 시작하니, 둑 깨진 저수지처럼 욕과 비난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차유진의 악성 개인팬들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몇몇 사람은 글을 삭제하고 사라졌으나, 남은 사람들은 물 밑으로 들어가며 더 과격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 내 계정에서 내 맘대로 떠드는 것도 안 되냐고 꼬우면 지들이 안 보면 될 걸 어디서 완장질이야ㅋㅋㅋㅋ

-올팬인 척 아가리 털면서 뒤에서는 솔로곡 스트리밍 배척하는 게 와우임 정말 돌이랑 빠가 똑같이 음습그자체

-으으 X나 인기멤된 줄 알고 패악질 오졌다 그래 돈 안 쓰는 할배할매 픽 되신 거 축하드려요∼(박수이모티콘)

바야흐로 개판이 따로 없었다.

-쟤네 차유진 후렴 센터 아닐 때마다 별 추잡한 방법으로 까면서 팩스 총공까지 기획했던 새끼들임 이번 기회에 다 뿌리 뽑아야 돼요

-박문대 악개들 오픈메시지방 있잖아 왜 모른 척해ㅋㅋ 루머 제작즐거웠어?(캡처)

폭로와 폭로가 이어지며, 루머와 가짜 증언문까지 슬금슬금 나오고있었다.

-행복한 덕질 좀 하자 얘들아

-관련 내용 다 차단합니다 애들떡밥만 즐길게요∼

-다 탈덕해 제발

여기에 발 담그지 않은 팬 중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은 많이들 진절머리를 내거나 무시했으나, 의견을 내는 사람도 심상치 않게 있었다.

-솔직히 차 악개들이 너무 심하긴했지 미친 새끼들이 따로 없었음

-곰머 빠들도 똑같이 윾진이 까던데 그냥 다 병신들임 돌이 무슨 죄가 있냐

-걍 차유진이 1위 했어야 됐어 애초에 거기서부터 꼬인 거야 억울할 기회를 줬으니 뭐ㅋㅋㅋ

조금만 더 일이 번지면 SNS나 커뮤니티 인기글 진출까지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X발.'

그리고 박문대가 이 꼴을 본 것도딱 그 시점이었다.

"…유진아."

"네!"

"덥앱 좀 하자."

회사와의 짧은 통화 후, 박문대는 차유진과 함께 개인 라이브 방송을 켜버렸다.

상황 확인 후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4화]

현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차유진과 박문대의 개인 팬덤 중 일부가 싸우기 시작했는데, 그게 공론화를 타고 크게 번지기 일보 직전이다.

'미치겠네.'

…흠, 진정하고.

그냥 모른 척하고 넘긴다는 방법도있으나, 이 이상 물 위로 올라가면 괜히 '피곤한 그룹'으로 한 번 더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으니 일단 가볍게 수습 시도라도 해볼 생각이다.

'그래서 W앱을 키려는 거지.'

룸메이트가 되었고 아직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았으니, 모른 척하면 그렇게 티 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주의점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차유진과 뭐라도 방송을 해보려면 명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구도가 되면 안 된다.

이 경우, 상황 때문에 암묵적인 서열이 생기기에 어떻게든 꼬투리가 잡힌다.

'기껏 가르쳐 주는데 태도가 성의없다'나, '강압적으로 가르친다' 같은 예시를 들 수 있겠다.

'고로 차유진과 함께하는 즐거운 요리교실 이나 박문대와 함께하는 즐거운 영어교실 같은 건 기각.'

-두 번째, 일과 관련된 것은 고르지 않는다.

춤이나 노래와 관련된 주제를 고르는 순간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한다'로 비교 이야기가 나온다.

다시 갈등이 폭발하기 딱 좋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경쟁 컨텐츠를 고르지 않는다.

한쪽 편에 몰입한 사람들이 상대편에게 감정이 상할 수 있다.

'고로 내기나 카드 게임 등은 안된다. 삭제.'

그러면 권고되는 사항은 어떤 것인가?

간단하다.

'둘이 한 팀이 돼서 뭔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그 뉘앙스가 은근해서 강요하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냥 웃으면서 볼수 있는 편이 최고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웃기다면 더 좋다.

그래서 나는 이걸 골랐다.

"와아아아!"

바로… 공포 테마 방탈출이다.

'X발.'

내가 내 발로 이런 돈 낭비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곧 리모델링에 들어간다는 방탈출 카페의 룸을 찾아다가 제법 큰 돈을 주고 순식간에 유선상으로 계약을 끝냈다.

…흥정할 시간이 없어서 손해를 좀본 것 같다.

'회사에서 비용 처리해 주겠다고 말해서 다행이지.'

물론 그게 비용이 된다는 건 내정산 액수가 까인다는 말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그나마 스케줄 빈 심야에 차유진과 함께 방탈출을 하러 온 것이다.

물론 스마트폰 카메라를 든 스탭도 슬픈 눈으로 따라왔다.

'죄송합니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워어! 형, 머리! Watch out!"

다만 차유진은 굉장히 신난 모양이다. 말도 안 된다.

"너도 이런 거 무서워하지 않았나…?"

"너무 가짜예요! 안 무서워요! 귀신 없어요!"

지난번에 데뷔 리얼리티에서 갔던 그 집에 비하면 애들 장난 같다는뜻인 듯하다.

'확실히… 조악한 편이다.'

인건비 문제인지 귀신 역할을 수행하는 직원도 없다. 게다가 소품과 벽지 등에서도 묘하게 가성비의 냄새가 났다.

'괜히 리모델링을 앞둔 게 아니군.'머리 쓰는 구간이 적어서 괜히 '저것도 못 푸냐' 등 꼬투리 잡힐 일도없었다.

가끔 불 끄면서 겁이나 주니 적당한 담력과 순발력만 있다면 괜찮….

"형! 여기 피!"

"…크레, 크레파스야. 녹았네."

"아하!"

한 대만 갈기고 싶은 마음이 표출되면 안 된다. 잊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섬뜩해지는 구성 덕에 조잡함을 잊고 몰입이 가능했다.

심지어 막판에 붉은 조명 속에서 마네킹이 나올 때는 차유진도 겁을 먹어서 그림이 괜찮았다.

"What the…!"

욕도 참았군. 잘했다.

덕분에 탈출하고 나왔을 때는 무슨 큰 역경을 헤쳐나온 것처럼 분위기가 돈독했다.

"두 분, 6분 21 초 남기고 탈출 성공하셨습니다∼"

"WOOOW! 보세요, 탈출!"

"돌아가는 길에… 맛있는 걸 먹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쫄보즈

-의외로 영혼의 쌍둥이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탈출ㅊㅋㅊㅋ

-(박수 이모티콘)

스탭이 슬쩍 보여준 실시간 반응은 굉장히 좋았다. 시청 인원도 단체 W앱 수준으로 많았다.

'됐나.'

일단 컨텐츠 용으로는 성공한 듯싶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 guys∼"

그렇게 W라이브는 자정 직전에 종료되었다.

"그럼 카메라 수거해 가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방송은 방안에 설치된 다른 각도에서 찍은 캠과 함께 편집되어서 w앱에 따로 올라오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만 제목이 [댕댕이와 냥냥이의 공포 극복기]가 된다는 말에 기함할 뻔했으나, 받아들였다.

차라리 그쪽으로 어그로가 끌리는게 좋으니까.

'오히려 좋지….'

나는 한숨을 쉬며 스마트 폰을 다시 확인했다.

-이렇게 둘한테 공포 탈출을? 덥앱 담당자 사악하넼 ㅋㅋㅋㅋㅋ

-리얼리티 공포체험의 재림

-둘 다 큰세가 그리웠을 듯

-오돌오돌 떠는 댕냥이들ㅋㅋ (캡처)

-잠깐 명석했다가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문댕댕 (캡처 비교)

"뭐 봐요?"

"팬들 반응."

"아하."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W라이브를 준비하면서 이걸 왜 하는 건지 설명은 해줬다.

적당히 우리 팬 중 사이가 안 좋은 팬들이 있다는 정도로.

'대충 상황은 파악했겠지.'

지난번 이세진과 배세진의 싸움판에서 눈치껏 게임을 진행한 이놈의 태도는 우연은 아니었나 보다. 쓸데없는 승부욕이 싹 빠진 상태라 편했다.

"다들 좋아해요?"

"어. 괜찮네."

아무튼, 반응도 썩 만족스러웠다.

당장 컨텐츠를 즐기느라 바빠서 실시간 트랜드나 인기글에 관련 내용이 올라오느라 물밑 싸움에 대한 화제는 이미 한물가며 다 밀렸다.

싸운 당사자들을 제외하면 누가 신경 쓰기도 힘들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차유진과 박문대 팬들이 순간 화력이 좋은 편이라서.'

이러고 며칠 뒤에 또 누가 슬쩍목소리 키우려고 할 때쯤 편집본이 새로 업로드될 것이다. 그럼 일단 락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내일. 오늘은 늦었으니까 제로 콜라나 마셔라."

"이옙…."

…다만, 숙소에 돌아가기 위해서 차에 탄 뒤에는 좀 찝찝한 내용을 발견했다.

바로, 싸운 당사자 중 차유진의 악성 팬들 몇몇이 익명 사이트로 도망쳐서 올린 글들이었다.

-와∼ 신기해 또 타이밍 봐ㅎ

-여론 신경 쓰는 티 엄청 내네 징그러운 새끼

-곰머가 곰머했다 윾진이 놔줘라

-ㅋㅋㅋㅋ박문대 X나 서치하면서 염탐질 오지게 할 듯 킹리적 갓심

'올 게 왔군.'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예감은 했다.

'몇 건을 너무 절묘하게 처리했어.'

논란이 터질 때마다 괜찮게 무마했다 보니, 연결하다 보면 '혹시 이새끼 다 알아서 이러는 건가?'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 법했다.

다만 이번이든 예전이든, 정황 증거도 하나 없다.

난 먼저 대응하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한발 앞서서 혹은 동시에 나와서 뭉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보통 '논란이 터져서 대응했다'고 여기기는 힘들 것이다. 타이밍이 적절했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나는 이런 일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혹시 의심하는 사람도 판을 짠 주체를 회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내 평가는 언제나 그냥 대응이 적절하다, 운이 좋다 정도로 끝났다.

그래서 좀… 재밌긴 하다.

'얘네 자기들이 쓰면서도 안 믿을거야.'

그냥 열 받으니 정황 하나 잡고 우기는 것이다.

다만 짜 맞추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표본이 쌓여서 그럴싸한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염려는 있다.

'뭐,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저놈들한테 1승을 주기는 싫은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럼 이건 또 어떻게 없앨까.'

기왕 시작했으니, 아예 잡음이 나올 여지가 없게 다 뿌리 뽑아버리고 싶었다.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편이 가장 와해시키기 좋긴 한데. 아니면 다른 신선한 그룹으로 갈아타게 만들거나.'

차유진 입장에서도 이쪽의 영향력이 더 약해지는 편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형! 콜라 마시겠습니까?"

"…어, 뭐?"

고개를 돌리니, 기어코 제로 콜라를 산 차유진이 작은 페트병을 들고 차에 타고 있었다.

"으음, 마셔요? 드시겠습니다…? 먹어요?"

차유진이 열심히 말을 바꿨다. 아무래도 내 대꾸가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싶다.

"괜찮아. 너 마셔라."

[오, 알았어요. 그런데 형, 혹시 고민 있어요?]

"…!"

"형 피곤해요. 그렇게 보여요."

"심야니까."

[그런 것 말고! 음… 마치, 심리적 요인으로?]

"…."

이놈이… 이런 걸 눈치챈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차유진을 훑어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대답해 주자.

"반응 확인하느라 신경 써서 그래. 별거 아니다."

"오우, 싫다는 사람 많아요?"

"아니, 그냥 뭐… 없진 않지."

"아하."

차유진은 자신의 제로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요, 형. 어떻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다 내마음대로 바꿀 수 있겠어요?]

"…!"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엄마가 그랬는데, 어차피 날 싫어하는 누군가는 인생에서 계속 나타난대요! 그런데 무시하고, 짠! 계속가는 거죠. 스트레스받지 마요!]

"…."

음. 상상도 못 한 상식적인 조언이 나왔다.

좀… 머리가 식는다.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이 익명 게시판까지 도망친 놈들을 당장 신경 써서 처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럼 혹시 그 '문제'가 발생하면, 다루기 힘들 것 같은가?

"…."

'아니.'

그때 닥쳐서 해결해도 힘들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내가 모니터링을 빡세게 하는 것이 알려진다고 해서 뭐 그렇게 큰 문제가 되겠는가. 최악에도 좀 깬다는 사람만 나오겠지.

오히려 내가 이놈들을 다 뽑아내 버리려다가 실수가 발생했을 때 문제가 커질 확률이 높았다.

나는 결국, 인정했다.

'내가 좀… 과민했다.'

평소라면 벌써 털고 신경 껐을 수준이었는데, 누군가 날 파악하려고 든다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무슨 통제 강박이라도 생겼나.'

남의 몸에 들어와서 여러 의미로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군에 종사하게 되다 보니, 어느새 뇌가 좀 굳은 모양이다.

"후."

나는 화면에 떠 있던 익명 게시판을 끄고, 폰은 대충 옆자리에 던졌다.

그리고 말했다.

"네 말이 맞네. 좀 빠져나와야겠다."

"좋아요 제가 맞아요!"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군.

[아, 형. 하나 더 있어요! 언제나 고소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잊지마요!]

굉장히 미국인다운 조언도 나왔다.

"그래."

"Good!"

내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도 몰랐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을 좀 붙여둘까.'

겸사겸사, 차유진은 마음 놓고 내 몫의 제로 콜라까지 다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는 순간, 누군가 세차게 어깨를 때렸다.

"오 형! 오늘 영감님 말해요! 우리 유닛 무대 서커스 해요!"

"…."

룸메이트 반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간헐적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가 결국 차유진을 간식으로 협박 및 회유해 입 다물게 만든 후 며칠.

회사에서 콘서트 이야기가 나오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컨텐츠에 대한 말도 나왔다.

참고로 나는 긍정적이었다. 즐길거리가 많으면 혹시 쓸데없는 헛소리가 나와도 밀어버리기 좋으니까.

다만 회사의 이야기가 내 생각과는… 좀 달랐다.

"새 리얼리티를 기획 중인데요."

리얼리티 좋다. 기왕이면 앨범 발매 때 했으면 좋았겠지만, 투어 중에 공백기 메꾸는 용도로도 나쁘지않….

"미국 편으로 생각 중이에요!"

"…?"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결재봇이 가고 새로 오는 본부장이… 미국 병에 걸렸다는 것을.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5화]

내가 본부장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이틀 전이었다.

"또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래도 올해는 다 채우고 가실 줄 알았는데."

알음알음 도는 소문으로는, 산업스파이 건이 T1 본사까지 들어가면서 결재봇과 윗선 사이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슨 합의가 났는지, 결재봇은 퇴직하며 자회사로 떠났고 그자리에 새 본부장이 부임해 왔다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본부장님이 T1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무슨 유명한 전문 CEO가 온대요!"

"기대되네요."

하나도 기대되지 않았지만, 뭐 맞장구야 못 쳐줄 것도 없었기 때문에 회사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참고로 이 자리는 콘서트 관련 회의였다.

"그럼 문대 씨 솔로곡 연출은 이렇게 확정인 걸로 올려두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때만 해도 이틀 후 리얼리티 회의에서 예상도 못 한 미국행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미국이요?"

"저 좋아요! 미국 가요!"

"아, 유진아 잠깐만. 미국 좋죠∼근데 비용도 그렇고 저희 스케줄 괜찮을까요? 투어 미국 쪽 거의 안돌잖아요∼"

'이번 리얼리티는 미국행' 발언을 듣자마자 큰세진이 바로 현실적인 문제를 부드럽게 꺼내왔다.

'정확한 지적이다.'

우리가 미국에서 어느 정도 반응이 온다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KPOP 좋아하는 마니아층 사이에서 겨우 국내 1군 다운 인지도를 갖추었다는 말일 뿐이었다.

그 게임토크쇼 나가서 받은 관심으로 서브컬쳐 쪽 인지도도 좀 생기긴했다만 어디까지나 소소한 수준이다.

투어 규모가 기대될 정도는 아니란뜻이고, 당연히 미국 쪽 콘서트는 구색만 맞추는 수준이었다.

"아, 남미투어 일정하고 맞춰서 비행기 스케줄을 잘 짜보신다고 해요. 비용이야 뭐, Tnet에서 당연히 테스탄데 이 정도는 투자하겠다고∼"

"오오∼"

"감사한 일입니다만 혹시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건 아닌지…."

몇몇 순진한 놈들이 직원의 아부에 쑥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상한데.'

뜬금없이 미국이라니 가성비가 너무 안 맞지 않는가.

나는 직원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굳이 미국인 이유가 있을까요. Tnet 쪽에서 먼저 제시한 건가요?"

"아, 음… 본부장님이 제안하신 거긴 한데요…."

"…새로 오신 본부장님이요?"

"네."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이틀전인데 대체 언제 그런 제안을 한건지 벌써 싸하군.

"말씀하시면서 무슨 이유를 이야기 하셨을까요."

"그, 일단 제가 그 자리에서 직접 들은 건 아니라서… 음, 글로벌 동시 공개를 염두에 두고 고르시다 보니까, 좀, 전 세계적으로 친숙한 배경을 골랐다고 하시더라구요."

빠져나갈 구멍 만들어두고 추상적인 답변을 준다. 뭐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는 소리다.

'좀 더 캐볼까.'

내가 입 열기 전에 류청우가 먼저 다음 질문을 이었다.

"글로벌 동시 공개요?"

"네. 이번 리얼리티는 한국 외 국가에서는 위튜브로 바로 공개하는쪽으로 논의 중이에요!"

차유진이 끼어들었다.

"미국 사람들 많이 봐요?"

"…! 어, 네. 그런 이야기가 나오긴했지만…."

동요하는 직원을 보니 차유진이 졸지에 정답을 찌른 게 분명했다.

'설마 영어권을 노렸다니.'

뭐 리얼리티 한 편 정도야 이런 시도를 해도 나쁠 건 없었다만, 문제는 여기서 새 본부장의 경향성이 보였다는 점이다.

해외투어 중에 국내 팬들을 달랠 컨텐츠를 뽑아서 이탈을 막을 생각보다, 어떻게든 해외 파이를 늘릴 생각을 하는 것 말이다.

그것도 이미 KPOP이 친숙한 나라가 아니라, '있어 보이는' 미국을 대상으로.

'일단 끊자.'

그룹이 썩 안 내켜 한다는 티를 냈을 때 조심스러워하는지를 확인하는 편이 낫겠다.

나는 멤버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끼리 이야기 좀 해보고 다음 미팅 때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게∼ 그편이 좋을 것 같아요!"

큰세진이 지원사격을 했지만, 대답하는 직원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아, 그럼요! 그런데 물론 테스타분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프로그램 제작진분들이 여러 현실적 요건을 고려해서 결정하시는 거라… 그점은 정말 죄송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다음 미팅 때 미국 안 가고 싶다고 해도 어지간하면 보내 버리겠다는 뜻이다.

'X발.'

내부에서 어지간히 강하게 밀어서 이미 반쯤 결정이 난 건이었나 보다. 그래도 산업스파이 건 때문에 엄청나게 눈치 보는 티는 난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에는 적당히 리얼리티에서 하고 싶은 컨텐츠 이야기나 좀 하다가 회의실을 나왔다.

"어때? 미국."

"가요! 저 집 가요 맛있는 레스토랑 많아요! 엄마가 형들 보고 싶어요!"

"아, 그건 너무 좋지∼"

"이, 인사드릴 수 있다면 좋겠어."

차유진이야 극렬 찬성파였고, 다른 멤버들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어쩔 수 없지.'

확실히 다른 멤버에 비해서 가족을 만날 기회가 적을 테니,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면 쓰고 싶을 것이다.

'집이 그립기도 하겠고.'

어차피 가게 된다면 차유진의 집으로 가는 편이 컨텐츠상으로는 좋겠다 싶다.

'그 전에 분위기는 한번 잡는 편이좋겠지만.'

안 그래도 아까 눈치 보는 걸 봐서는 아마 다음 미팅 전에 회사에서 무슨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날 오전 회사 연습실에서 매니저에게 새 일정을 받았다.

"얘들아, 새로 오신 본부장님이 너희 좀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아, 본부장님께서요."

"…지금요?"

"한 1시간 후쯤? 오래 안 걸릴 거라고 하시네!"

되묻는 배세진의 얼굴이 음침했다.

그럴 만도 했다.

'쉬는 시간이 날아갔군.'

바쁜 스케줄 중간에 간신히 난 짬을 살려서 연습실에서 막간의 휴식을 즐기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알았습니다…."

"음, 넵!"

대답들이 썩 열의가 있진 않았다.

그래도 한 시간 뒤, 테스타는 오랜만에 본부장실로 향했다.

최근 종목을 바꿔서 프랑스 자수인지 뭔지를 하던 선아현까지 아쉬운 눈으로 천 더미를 힐끗거리는 걸 보니, 일단 본부장이 첫인상을 조진건 확실했다.

'차라리 미팅 시간 중에 남는 시간을 쓰지.'

급하게 자리 만드느라 은은한 반감만 샀지 않은가.

나는 이번에도 일 더럽게 못 하는놈이 온 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본부장실에 입성했다.

그리고 의외의 광경에 약간 놀랐다.

"아, 테스타 분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우선 앉으세요."

본부장은 다과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구색 맞추기용 가벼운 수준이 아니라, 아예 웬 치킨부터 와플까지 종류별로 가져다 놓은 게 무슨 행사용 차림 수준이었다.

애들 꼬시는 학원 설명회 수준이었으나, 최소한 의사표시는 충분했다.

'너희랑 잘해보려고 만든 자리야'하고 말이다.

"제가 여러분 쉬시는 중에 부른 게 맞죠? 가뜩이나 요새 바쁘실 텐데 죄송해서 좀 차려 봤습니다, 하하!"

"어휴, 당연히 괜찮습니다, 본부장님!"

"가, 감사합니다."

"좀 드시면서 이야기할까요?"

그리고 본부장은 먼저 치킨 하나를 들었다.

대충 입만 댔다가 내려놓는 걸 보니 먹고 싶었던 건 아닌 것 같고, 자기가 먼저 안 들면 다른 놈들이 편하게 먹기 불편하다는 점을 아는것 같았다.

'오.'

그래도 실무진과 가까이 지낸 느낌이 좀 나는군. 나이도 전 본부장들보다 훨씬 젊은 놈이다.

본부장은 적당히 잡담이나 좀 나누다가, 애들이 먹는 걸 좀 기다린 후에야 일 이야기로 들어갔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건, 우선 얼굴 좀 보고 서로 인사하는 자리를 가지려고 한 게 첫 번째 이유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악수가 오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미 이야기 들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번 리얼리티 미국 로케 관련입니다."

본부장은 진지한 얼굴로 두 손을깍지 꼈다.

"저는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장기적 관점에서 미국 시장을 공략할 로드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

아 망할.

"제가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여러분의 앨범과 활동 내역을 다 확인했어요."

본부장은 진지한 얼굴로 테스타의 활동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분석을 떠들었다.

"…그리고 미국이 좋아하는 건 분명하거든요. 언더독, 사회적 메시지, 뿌리에 대한 자부심과 개성. 어떨까요 유진 님. 제 말이 맞나요?"

"오, 맞아요!"

"그렇죠. 그리고 테스타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스타일의 팀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분명 더 큰 시장에서도 통할 것 같습니다."

"오…!"

헛소리다.

일단 그 세 가지 조건부터가 과한 비약이고, 차유진은 그냥 맛있는 걸 먹어서 신났는데 그걸 사준 놈이 뭘 물어보니 맞장구쳐준 것뿐이다.

무엇보다 그 세 가지 조건을 다 충족해도 미국에 안 먹힌 놈들은 하늘에 별처럼 많을 것이다.

'헛꿈이 들었네.'

문제는 이 새끼가 자기 나름대로 자료를 분석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자기 능력을 굉장히 신뢰하는 듯했다.

류청우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음, 좋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어떤 특정 국가나 계층을 노리는것보단… 계속 좋은 앨범을 내는 데 집중하는 쪽으로 팀을 꾸려와서요."

"물론이죠! 여러분은 계속 좋은 음악해 주시면 됩니다. 그 좋은 음악을 어떻게 잘 홍보하고 매니징 할지를 회사가 더 열심히 고민하고 활동하겠다는 말이었어요."

말은 청산유수다.

"솔직히 지금까지 이 T1 스타즈의서포트가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비전을 공유하긴 커녕 따라가는 데 급급했어요."

본부장의 눈은 진지했다.

"가령 이번 콘서트 일본 투어 규모도 그렇죠. 아이돌 주식회사 가 일본 방영 1화부터 대단히 반응이 좋았다고 하던데, 그럼 발 빠르게 투어 규모도 키우고 추가 스케줄도 잡고, 일본 니즈 분식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요."

오, 그래도 이건 제법 새로운 소식이었다.

근래 바빠서 남의 나라 반응까지 더 찾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저 말대로 소속사에서 진작 알아봤어야 할 일이긴 하다.

'그래도 괜히 했다가 어쭙잖게 이상한 방향으로 일 벌이는 것보단 아무것도 안 한 지금이 낫다.'

가령 지금 저놈이 결재봇 대신 있었으면 뜬금없이 일본 음악방송이나 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본부장은 자신의 분석에 깊이 심취했는지, 거의 침을 튀길 만큼 열변 중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떤가요. 아이돌 주식회사 가 일본에서도 대히트해서 테스타 여러분의 주가가 쭉 상승하는 동안 소속사에서는 일본 활동을 손 놓고 있었습니다."

"음, 그런가요."

"일본에서 그 정도로 상승세가 뚜렷합니까?"

떨떠름한 류청우와 호기심에 찬 김래빈의 발언에,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수 있게 되어 신난 본부장이 웬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스마트한 동작으로 휙 화면을 넘겼다.

"혹시 이거 보셨습니까?"

거기엔 적당히 최근 감성 템플릿으로 만들어진 PPT의 슬라이드 하나가 떠 있었다.

그리고 내용물은… 웬 일본 옥션 상품 캡처였다. 가격대가 어마어마한 것 외에 유별난 점은 없었다.

다만 그 상품에 선아현의 얼굴이 떡하니 보였다.

그건 연초에 무슨 방송사 공익 캠페인에서 극소량만 이벤트로 추첨 증정했던 포토카드였다.

아마 인이어 떨어져서 선아현이 공중제비로 커버한 그 무대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방송국 스텝의 요청으로 찍었던 것이다.

'묘하게 상황 특수성이 있지.'

게다가 선아현이 직접 찍은 것 치고는 역대급으로 잘 나와서, 하도 요청이 빗발치는 통에 결국 원본 사진 데이터를 방송국 SNS에서 띄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처음 이벤트로 풀었던 몇장에 제법 프리미엄이 붙었던 것 같은데, 그게 일본까지 넘어가서 저런 가격대를 형성할 줄은 몰랐다.

"지금 이거 거의 한화로 50만원 선이에요. 일본에서 대단히 테스타 수요가 증가 중이라는, 굉장히 임펙트 있는 증거죠. 특히 선아현 님 굉장히 반응이 좋더라구요."

"네, 네…."

선아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본부장이 열정적으로 외쳤다.

"그러니 좀 더 공격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해야 할 시점입니다. 일본을 이렇게 쉽게 뚫었으니 분명 미국도 괜찮은 루트만 뚫어서 매진하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있을 겁니다."

"…."

이제 알겠다.

'이놈 상대하라고 '듣고 보니 맞는말이군'이 A 등급으로 돌아왔던 거였나.'

이런 식으로 또 내 이론이 증명되는군.

나는 한숨을 참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