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우선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특성이 터진다고 만능 설득이 가능한 스킬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성 설명을 다시 보자.

[특성 :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듣는 이에게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 발동 확률 60%,

기본 활성화 상태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아무 소리나 지껄인다고 납득해 준단 뜻은 아니다.

즉, 이건 무대부터 대화까지 각종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의 보조 바퀴였다.

고로 이 미국뽕이 찬 본부장을 좌초시키기 위해선 이놈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가져와야 했다.

그럼 뭘 찔러야 하는가?

굳이 미국에 가려는 이놈의 내심을 자극해야 했다.

'이미지' 말이다.

"미국에서 잘 되면 저희야 정말 좋지만… 기간을 어느 정도로 계획하고 계신가요."

벌써 계획을 다 세웠는지, 본부장의 대답이 거침없었다.

"저는 짧으면 2년, 길면 3년 정도보고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플랜이에요."

계약 끝나기 전까지 기간 꽉꽉 채워서 해먹겠다는 뜻이다.

'안 되지.'

나는 곧바로 질문했다.

"그런데 그렇게 길게 미국에서 활동하면, 한국 팬분들이 다 떠나지 않을까요."

"하하, 그거야 다 예전 일이죠. 요새야 다 위튜브나 SNS로 세계 소식을 속속들이 아는 시대 아닙니까.

어차피 여러분 다 한국어 쓰시잖아요? 한국 팬들이 오히려 접근성이좋죠."

"음… 그럼 더 싫어하실 것 같은데."

"예?"

"아뇨. 저희 미국으로 가면 인지도 없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그걸 다 보면 오히려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나는 일부러 한 텀 쉬고 덧붙였다.

"대단한 팀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선 바닥부터면 확 깨지 않을까요."

"…!"

"한국에서 잘되는 것도 2∼3년이나 못 보면 이미지가 잘 회복이 안 될것 같아서요."

"그러게요∼ 저희가 원래 하던 자리에서 훨씬 잘하니까 오히려 다른나라에서도 반응이 오는 것 같아요! 본부장님 말씀하신 대로 요새는 뭐든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다 알잖아요∼"

큰세진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해 주신 일본에서의 반응도, 아이돌 주식회사 이후에 저희가 한국에서 성공했다는 걸 아시니까 더 프로그램에 몰입하시지 않았을까요."

"…으음."

본부장의 얼굴에 대학도 안 나온 어린 무지렁이들에게 말대꾸 당한 불쾌감과 함께 묘한 기색이 지나갔다.

바로 마음에 걸리는 소리가 정확히 들어왔을 때의 동요였다.

그리고 그 순간, 팝업이 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발동!]

'됐다.'

미국에 전념하는 2∼3년간 국내에서 테스타의 브랜드 이미지를 조지며 이미 잡은 한국 시장이 흔들릴 것이라는 예측이 그럴싸하게 들리긴한 모양이다.

본래라면 아집으로 '내 마스터 플랜 대로라면 미국에서 성공할 테니상관없어!'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거기서 특성이 터지며 동요가 심해졌다.

'이젠 본부장이 너그럽게 져줄 수있는 판만 짜면 된다.'

슬그머니 물러나면서도 '소속 가수를 배려해서' 같은 합리화를 할 수있게 말이다.

"…저희가 불안해서 그래요."

"마, 맞아요."

"아직은 국내에서도 성장하는 중이니 좀 더 정상을 향해 노력해 보고싶습니다."

멤버들로부터 지원사격도 잘 들어온다.

이놈들과 이미 지난 미팅 이후로다 합의가 된 상황이었으니까.

-리얼리티를 미국에서 찍는 건 좋지만, 아예 미국 타겟은 좀….

-이상해. 쓸데없이 할리우드 노린다고 어설프게 그쪽 감성으로 영화찍는 것 같다고.

-적절한 비유였던 같습니다, 형님!

-뭐, 뭘…!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혹시라도 미국 이야기가 더 나오면 끊자고 이야기 이미 끝났지.

여기에 류청우가 마지막 말을 진중하게 얹었다.

"한국에서 대상은 받은 정도로 위치가 공고해졌을 때까진… 좀 더 생각해보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

본부장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대인배라도 된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엔터테이먼트 사업이니, 당사자들의 생각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존중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자리를 뜨면 된다.

"휴."

본부장실을 나오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진짜 보내 버리려고 하셨을 줄이야."

"노, 놀랐어."

'적어도 올해 연말까진 시간을 벌었다.'

혹시라도 이번에 대상을 수상하…면… 뭐, 그때는 이쪽 발언권이 더강해졌을 테니 오히려 협상이 수월해진다.

류청우가 살짝 나와 큰세진의 등을쳤다.

"고생했다."

"뭘요."

"어휴."

"그래도 미국 가요? 제집 가요?"

"그래, 거긴 간다."

리얼리티 촬영까지는 별수 없었다.

"와!"

차유진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너라도 행복하니 다행이라는 시선이 슬쩍 차유진에게 쏟아졌다가 가셨다.

'그래도 순조로운 편이다.'

본부장과 면담을 하고 확신했다.

자기 일을 과신하는 타입이긴 한데, 다루기는 까다롭지 않다.

'자기가 베푸는 입장으로 만들어주면 되는군.'

무엇보다 테스타를 T1을 위해 잘 써먹을 생각보단 테스타 자체를 키우고 싶어 하니 차라리 나았다.

'방향만 잘 틀어주면 되겠어.'

나는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어휴, 안마라도 해줘?"

"됐어."

'행차' 때부터 지금 '피크닉' 리패키지까지 쉴 틈 없이 몰아치다 보니 몸이 좀 축나는 것 같다.

'그래도 성적은 좋아.'

이번 앨범은 음악방송 활동이 다 끝났는데도 여전히 음원 성적이 잘나왔다.

'막판에 VTIC에게 밀리긴 했다만.'

어제 동일 작곡가의 곡을 선공개로 쓴 VTIC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음원차트를 비집고 올라왔다.

'어쩔 수 없지.'

다만 어제 받은 문자는 좀 열받긴했다.

-곡 고마워요 후배님^^

이 새끼 음원 차트 캡처까지 넣어서 보냈더라.

순간 빡침이 올라왔으나, 처리할것이 없는 평온한 현 상태를 깨닫고도로 내려갔다.

'이제… 콘서트 유닛 무대 관련만 정하면 되나.'

유닛 무대를 구성에 추가할 건지,할 거라면 누구랑 짤 것인지 말이다.

이건 뭐 특별히 엄청난 지뢰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콘서트 질과 차유진 사기만 고려하면 된다.

'웬만하면 다른 놈이랑 유닛 하고 싶긴 한데, 뭐, 김래빈이나.'

나는 원래 떠올렸던 유닛 후보군을 생각하며, 차유진을 잘 떼어놓을 방법을 고민했다.

다만 이걸 최종 결정할 미팅 전,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이 발생했다.

바로 차유진과 함께했던 공포의 방탈출 편집본이 업로드된 것이다.

[문댕댕과 차고영의 공포 탈출 넘버원 | 테스타 룸메이트 번외 EP.1]

박문대가 들었던 예비 제목에서 약간 더 특징이 가미된 이 동영상은 당시 실시간 w라이브와는 또 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실시간으로 볼 때는 영상이 흔들리는 스마트폰 카메라 하나로 송출된 탓에, 무슨 파운드 푸티지 스타일의 페이크 다큐스러웠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서는 그 느낌이 쭉 빠지고 예능 편집이 더해진 것이다.

그래서 공포 방탈출에 대한 몰입보단, 둘의 캐릭터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 방의 테마는… 이상한 인형을 주워 온 아이가 꾸는 악몽…. 음, 이래서 분리수거가 중요하죠.]

[인형 무서워요? 악몽 싫어요!]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박문대는 담담했고 차유진이 호들갑을 떠는 구도였다.

이 구도는 들어가서도 비슷했으나, 포지션은 반대가 되었다.

[형형! 저기 머리카락! TeddyBear가 사람 머리카락이에요! 안 이뻐요!]

[내려놔 그거 내려놔 유진아.]

차유진은 신나게 호들갑을 떨고 박문대는 담담하게 기겁한 것이다.

그리고 막판에 가서는 초반 구도를 집어치우고 아예 둘 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다.

스토리에 몰입한 탓이었으나, 편집으로 인해 거기서 한 발짝 떨어져서볼 수 있는 팬들에게는 그런 개그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맞추면. 영어 문장인가?]

[맞아요! Umm∼ THIS IS NOTA DREAM… 꿈이 아니래! 꿈이아니래요!]

[자, 잠깐, 잠깐만.]

구구구구궁!

갑자기 조명이 붉게 번뜩이더니, 구석에 있던 조잡한 마네킹의 목이돌아갔다.

[히이이익!]

거의 부둥켜안은 채로 뒤로 펄쩍뛰어오르는 둘의 모습은 적외선 카메라에서도 정말 볼 만했다.

그리고 영상 테마를 보자마자 기대했던 그림에 사람들은 흡족해했다.

-(00:57)(05:14)(13:09) 시간이 지날수록 둘 다 눈이 커져ㅋㅋㅋㅋㅋ

-이건 마네킹이 잘못했다 쫄보 둘을 위협했어

-ㅅㅂ박문대 차유진 저렇게 의지하는 거 처음봄ㅋㅋㅋㅋㅠㅠㅠ

- 기물 파손 안 하겠다고 서로 옷만 잡아당기는 모습이 훈훈하다 역시 준법 아이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

둘 다 멘탈이 강해 보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미지였던 데다가 자체적으로 컨텐츠를 골랐다는 부가 설명까지 붙은 덕에, 특별히 거북해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밌었어요. 신선했습니다.]

[우리 또 하러 와요!]

[그래.]

탈출한 뒤엔 마치 수월히 해낸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좋아하는 모습까지, 훌륭한 아이돌 자체 컨텐츠의 표본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건 박문대의 예상 이상으로 잘 정착해 버린다.

-쫄보즈 앞으로도 공포길만 걸어…

'쫄보즈'란 별명으로 말이다.

사실 1, 2위 둘을 묶어서 같이 좋아해 보고 싶었으나 특별한 커넥션이 없던 사람들을 쿡 찔러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밑에서 서로 이빨을 드러내던 격렬한 개인 팬들의 싸움이 눈치를 볼만큼, 둘 모두에게 호감이 있던 사람들의 반향이 거셌다.

"…."

결국, 적당히 모니터링만 해본 박문대도 차유진에게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야, 유닛 하자."

"와우!"

담백한 항복 선언이었다.

다만 지난번 콘서트의 유닛과 직접적인 비교를 피하기 위해, 유닛 무대의 시기에 대해서는 살짝 조절이들어갔다.

"그럼 유닛 무대는 나중에 앵콜 콘서트 때 공개로?"

"좋아 좋아∼"

마지막 콘서트 컨셉 회의에서 난결론이었다.

대신 그들은 이번 투어에 깜짝 이벤트를 좀 추가했다.

"사람들 놀라겠지?"

"웃다 넘어지실 것 같은데."

모든 게 깔끔했다.

테스타는 특별한 갈등 없이 차근차근 콘서트 준비를 마무리해갔다.

심지어 새로 온 본부장의 지시로, 소속사는 투어 최종 연습 전 테스타에게 열흘간의 긴 휴가까지 주었다.

'아티스트의 컨디션 관리도 회사의 의무'라는 멋진 말과 함께였다.

'기선 제압인가.'

박문대는 별 감흥을 받진 않았으나, 어쨌든 휴가는 환영했다.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할 타이밍이었다.

"오랜만에 집 간다∼"

"푹 쉬고 오자."

"자주 안부 인사드리겠습니다."

누가 보면 한 반년은 헤어지는 것처럼 요란한 인사 후에야 놈들은 숙소를 나갔다.

-괘, 괜찮으면… 놀러 올래?

-할머님께서 5월의 신랑을 감명깊게 보셨다고 합니다.

-…엄마랑 이사 갈 집 알아볼 건데, 아니, 그, 너도 계획 있으면 공유하는 게 좋지 않나 해서!

몇 명 본인 집에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권유한 놈도 있었으나, 적당히 사양했다.

'드디어 혼자다.'

나는 열흘간의 칩거 계획을 검토하며, 쾌재를 불렀다.

혹시라도 아플 때를 대비해서 회사와 비상 연락망도 잘 구축해 뒀고, 구급약도 잘 받아뒀다. 죽도 사뒀고.

'몸살감기 정도야 뭐.'

혹시 걸려도 이젠 상관없었다. 열흘이나 되니, 한 사흘쯤 앓아도 일주일은 멀쩡한 정신으로 쉴 수 있겠지.

'모니터링은 너무 자주하지 말자.'

웃기지만, 이번엔 차유진과의 충고를 한번 반영해 보기로 했다.

'며칠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이번 본부장은 테스타에 관심이 과하니, 분명 회사 내 인터넷 모니터링 작업도 강화했을 것이다.

혹시 문제가 터져도 연락이 올 기대가 생겼다는 뜻이다.

"좋아."

스마트폰도 비상 연락을 제외하면 전부 무음으로 바꿔놨다. 심지어 답지 않게 상태 메시지까지 띄워 놓은상태다.

-휴가. 확인 느립니다.

이렇게 말이다.

나는 재확인을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 들다가, 이미 화면이 켜져 있는것을 확인했다.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VTIC 신청려 선배님]

정말 안 반갑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7화]

청려를 동종업계 탑티어 경쟁자 선배로 보든 리셋 증후군에 걸린 미친놈으로 보든, 휴가 첫날부터 연락하고 싶은 부류는 절대 아니다.

'무시할까.'

유혹이 강렬했다.

…다만 평소와 달리 문자가 아니라는 점이 신경을 건드렸다.

'웬만하면 문자가 왔을 텐데 전화라.'

혹시라도 비상사태면 안 받는 게 더 귀찮은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가령… 작곡가 관련 문제라든가.

'X발 좀 쉬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쉰 뒤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후배님. 미안한데 지금 휴가중 맞죠?

이 새끼 상태 메시지도 봤는데 굳이 전화했네.

"…예.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숙소겠네요.

왠지 그렇다고 하면 굉장히 짜증나는 상황을 직면할 것 같은 직감이 든다.

나는 말을 바꿨다.

"이제 나가보려고 합니다. 지방으로 쉬러 내려갈까 해서요."

-그렇구나. 그럼 지금은 잠깐 시간될까요?

"예?"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순간, 바로 설명이 붙었다.

-아, 지금 촬영 중이에요.

"…!"

-음… KBC 즉석 로드맵 인데, '친한 후배'가 장소 추천인 키워드로 나와서요.

즉석 로드맵. 시청자 리퀘스트로 채운 제비뽑기를 통해 복불복으로 반나절 동안 국내 여기저기를 다니는 기획이다.

한마디로 복불복 여행기.

그리고 컴백을 앞에 둔 VTIC이 고를 만큼 꾸준히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컨텐츠 중에 즉석으로 지인을 참여시키는 게 있다고 하던데, 그건가.'

아마 시간 될 것 같은 놈 중에 내가 제일 인지도가 괜찮은가 본데, 난 휴가 첫날부터 일할 생각 없다.

그것도 이놈이랑은.

물론 촬영 테이프가 돌아가는 판에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완곡히 말을 돌렸다.

"어… 정말 감사한데요, 선배님. 제가 정말 금방 내려갈 거라… 시간이 거의 없어서요. 이거 어쩌죠."

적당히 아쉬운 투로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문대 씨가 딱 근처라서 연락해봤는데… 아주 잠깐만도 안 될까요?

제비뽑기 한 번만 하면 돼요.

"…."

-많이 불편하면 어쩔 수 없지만요.

'X나 불편하다 새끼야.'

하지만 여기서 거절했다가 편집이 제대로 안 되면 나만 손해다.

마침 휴가인 데다 숙소에 있는 놈이 그 잠깐도 시간을 못 내서 대선배를 물 먹였다는 뉘앙스로 해석하려는 놈들 분명 튀어나올 테니까.

그리고 이놈이 저자세로 나온 것도 분명 그걸 노렸을 것이다.

'선 넘네.'

이번 건 반드시 돌려주겠다.

"그럴 리가요. 선배님 말씀이신데 어떻게든 시간 만들어보겠습니다."

-정말요? 미안하고 고마워요. 나중에 내가 맛있는 거 살게요.

곤란해하는 후배한테 갑질하는 쪽으로 슬쩍 밀어보려고 했는데 이런건 안 걸리는군. 망할 새끼.

"지금 오시는 겁니까?"

-네. 그럴 거예요. 음… 5분 내로 도착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조금 있다 봐요.

전화 너머에서 청려의 웃음소리가 들리다가, 전화가 끊겼다.

'귀찮군.'

나는 한숨을 참고, 마스크와 후드티를 챙겨 쓴 뒤 밖으로 나왔다.

'다른 놈들이 부를 때 같이 갈 걸그랬나.'

차라리 배세진 말대로 서울 브랜드 아파트 매물이나 보러 다니는 편이더 나았을 것 같다.

'그쪽은 시세라도 남지.'

이건 뭐, 얼만 받았다.

출근 시간대가 막 지난 아침이라 단지는 한산했다. 나는 정문 앞에서 이미 대기 중인 검은 승용차 한 대를 확인했다.

나를 확인했는지 누군가 창문 밖으로 손을 살짝 흔들었다.

'저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보조석 문이 바로열렸다.

"…!"

그 건너편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청려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문대 씨."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빨리 내려왔네요. 정말 고마워요.

일단… 여기 카메라 보고 인사부터할까요?"

아직 스탭이 붙지 않는 구간인지, 차 안에는 청려 혼자였다. 그리고 운전석 중심으로 온갖 각도에 카메라가 보였다.

청려가 찍은 것은 보조석 앞에 달린 카메라였다.

나는 보조석에 적당히 몸을 넣어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테스타의 박문대입니다…. 선배님 저, 제비뽑기는?"

"이동하면서 PD님이 알려주신다고 하네요. 짧게 이 주변 한 바퀴 돌테니까, 연락 오면 받아 줄 수 있을까요?"

더 귀찮아졌다. 하지만 여기까지온 마당에 뭐 카메라 앞에서 토 달수도 없다.

"예. 그럼요."

나는 일단 보조석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청려가 오디오를 채웠다.

"안전벨트 잊지 말아요."

"네."

안 말해도 설마 안 차겠냐, 새끼야.

나는 벨트를 차려 몸을 돌리다가, 문득 주머니의 스마트폰을 의식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연락하는 편이 낫지 않나.'

휴가 첫날에 갑자기 불러내서 굳이 그 생각까진 안 들었다만, 일단 카메오로 잠깐 나오더라도 보고는 해두는 게 서로 이로웠다.

'내리자마자 해야겠군.'

일단 촬영 중이니 스마트폰은 최대한 안 만지는 게 좋으니까.

그때 였다.

'…?'

묘한 위화감 같은 것이 들었다.

…촬영 중.

나는 다시 카메라를 보았다.

'불이 안 들어왔어.'

온에어 사인을 보통 빨간 불로 처리하는데, 이 카메라는 표시가 없었다.

아니, 이 카메라뿐만 아니라 다른것들도 마찬가지다.

'…촬영 형태의 문제인가?'

그래도 혹시 오류나 이상으로 꺼졌나 해서, 나는 카메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후욱.

갑자기 뭔가가 얼굴로 날아와 우악스럽게 붙었다.

"…!"

"됐다."

흰 천 같은 것이 눈코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숨이 틀어막히며 이상한 휘발성 냄새가 뇌를 찔렀다.

"웁."

생각이고 나발이고 당장 양손부터들어 올려 천을 떼어내려 했으나,순식간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X 발….'

혀를 깨물려고 했으나 늦었다.

암전이 었다.

"…허억!"

"아, 깼어요?"

머리가 X같이 아팠다.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통증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누르려 했으나, 두손이 모두 달려 올라왔다.

철컹.

은색… 수갑이다.

'…수갑?'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은 와중에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력했다.

"좀 마셔요."

눈앞에 실리콘 재질의 컵이 불쑥 나타났다.

들고 있는 손의 주인은… X발, 청려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음, 일단 물 좀 마시고…."

"너 같으면 지금 물이 목구멍에 넘어가겠냐 X발 새끼야."

"…."

머리가 좀 더 깨끗한 상태였으면 좀 더 차분하게 대응하겠는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가서 더 빡쳤다.

나는 되는 대로 머리를 양손으로 누르며 사태를 분석하려 시도했다.

이 새끼가 방송이라고 차에 타게했는데, 무슨 천 같은 게….

'마취제였나.'

그러면 당연히, 방송은 날 낚으려는 낚시였던 것이다.

카메라도 당연히 안 켜져 있었을것이고.

'X발…!'

이딴 것에 걸려들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일단 무슨 범죄 영화도 아니고 이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긴 한다만.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는 아니야.'

천장이나 바닥을 보니 연식이 오래된 주택인 것 같다. 즉, 어디 외진곳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비명부터 질러봤자 이 새끼가 그런 것도 염두에 안 뒀을 리가 없고.'

즉, 사람 하나 죽여도 당장 방해 안 받을 법한 곳… 인 것 같단 말이다.

'미치겠네.'

왜 갑자기 이 지랄이란 말인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사고했다.

일단 질문부터.

"…대체 왜 사람을 기절시켜서 끌고 온 겁니까. 여긴 어디고요."

"제안할 게 있어서. 별로 안 내켜할 것 같으니 장기적으로 해볼까 하고 준비해 봤어요."

청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컵을 적당히 내 근처에 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 발도 적당히 제압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저하네 X발.

"무슨 제안인데요."

"음… 좀 식상한 이야기가 될 수도있는데. 다시 시작하는 거 말이에요."

이 미친 새끼가 들먹일 이유라면 이럴 쪽일 줄은 알았다.

다만 타이밍이 뜬금없었다.

"현 상태에 만족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리고 선배님도 적응해 본다고 하셨잖습니까."

"아, 그거요."

청려가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문제가 생겨서."

"…예?"

"멤버 중 하나가 형사 사건에 기소당할 예정이라."

"…!"

"좀 더럽게 엮였어요. 수습이 안될 것 같거든요. 그룹에서 제명하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여파상 컴백이 예정대로는 힘들 것 같네요."

X발. 눈앞이 캄캄해진다. 나는 침을 삼켰다.

"…그래도, 그 사람만 탈퇴하면 그룹에는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네? 하하. 후배님. 왜 모른 척하고 그래요."

청려가 미소를 지었다.

"VTIC이 한 10인조쯤 되는 다인원 그룹도 아니고, 하나 탈퇴하면 영향이 크죠. 이미지 문제도 생길테니 이번이 하락세의 신호탄이 될건 거의 확정이잖아요."

청려가 의자를 끌어와서 맞은편에앉았다.

"회사에서도 차기 그룹 이야기부터 꺼내던데, 음, 끝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이대론 안 된다. 틀어야 한다.

"…제가 있던 미래에서, VTIC 관련해서 큰 소식은 들은 적 없습니다. 아마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고 넘어갈…."

"공시생이라 잘 모른다며."

"VTIC은 워낙 큰 그룹이라 그 정도 사건이면 분명 뉴스나 어디서 봤을… "

"하하, 너무 애쓰지 마요."

"…."

뭘 들어먹을 상태가 아니다. 당장내 대가리를 내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흉기.'

나는 당장 놈의 손이 닿을 만한 주변을 살폈다. 흉기로 쓸 만한 도구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뭐 해."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서."

"아, 시간 충분하니까 그건 천천히 궁금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물론 후배님의 선택에 달린 문제긴 한데… 음, 내 제안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네."

청려가 웃으며 질문했다.

"자살하지 않을래요?"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미친새끼가.

"미쳤습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거부감이 있을 시점이긴 하지."

놈은 여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직접 죽는 건 그렇죠? 그런데 내가 죽이는 것도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요."

'꺼림칙해서' 같은 상식적인 이유는 나오지 않았다.

"살해당했을 때도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괜한 변수를 넣고 싶지 않단 말이지."

"…."

"후배님도 그렇죠? 혹시라도 처음으로 못 돌아가는 끔찍한 사태는 피해야죠."

"전 죽었을 때 안 돌아갈 것 같다고 충분히 말…."

"돌아간다니까."

청려가 눈을 마주쳤다.

"안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테니까 걱정 마요."

"…."

"아, 그리고 이야기해 두려고 했는데… 후배님, 아까 같은 섭외는 믿으면 안 돼요. 당연히 지인 부르는건 사전에 다 이야기하고 촬영하죠. 혹시 다음에 사기나 공수표에 당할수도 있으니까 기억해 둬요."

청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시작할 때 어떤 방향으로 설계해야 후배님에게 더 좋을지에 대한 계획도 우리 천천히 세워봐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고."

"…."

"좀 쉬고 있어요. 휴가라면서."

청려는 낮게 허밍하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탁.

예의 바른 작은 소리와 함께 다시문이 닫혔다.

"…후"

긴장이 돋아났던 등골에 찬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수갑 아래 팔목에서도 땀이 찼다.

'당장 변사체행은 피했다.'

그러나 저놈이 언제 머리가 더 돌아서 '그냥 죽이는 게 편하겠다'는 식으로 나올지 모른다. 뭐 이런 개같은 상황이….

여기 내가 걸렸다고?

'휴가라고 뇌가 녹았나, X발.'

나는 끓어오르는 격분에 수갑째 손을 바닥에 내리쳤다. 바닥만 파이고, 수갑은 멀쩡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X발 어떻게든 여기서 멀쩡히 기어나간다.'

내가 기절했을 때 머리를 오함마로 갈기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개새끼야.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8화]

얼마 뒤. 암막 커튼 때문에 시간을가늠할 수 없는 시점.

"여기서부터 정리해 볼까요. 후배님의 아이돌 주식회사 참가는 훌륭한 선택이었는가."

다시 맞은편에 앉은 청려가 웬 노트에 키워드를 적으며 차분히 설명했다.

"당장 초기 미션을 넘기는 데엔 효율이 높죠. 후배님은 다음 미션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골랐을 테니… 훌륭한 판단이네요."

하나도 안 고맙군.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아쉬운 선택인데. 5년 단기에 이미지 소모가 너무 심해서… 회사도 체계가 없고 재계약 여부도 불투명하고."

청려가 약한 미소를 지었다.

"초기를 넘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거르는편이 낫죠."

"…."

"재시작하면 LeTi로 찾아와요. 바로 데뷔 가능한 자리에 넣어줄 테니까."

'내 팀이 또 말아먹으면 바로 리셋할 수 있게 근처에 두겠다'는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코웃음을 참았다.

'입만 산 놈'

이 새끼의 상태창에서 리셋을 유발하는 상태이상, '교정'은 비활성화 상태다.

즉, 본인이 죽는 것으로 재시작하는 방법은 이미 막혔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션이 실패하면 죽어서돌아간다'는 개념은 파악하고 있던이 새끼는 이제 미션이 다 끝났으니본인이 죽어봤자 못 돌아간다는 건짐작했겠지.

그래서 날 써먹겠다는 건데… 여기서 좀 막히긴 한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내가 죽으면 다시 시작한다고 왜 확신하냐는 말이다.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이런 걸 광신하나?

이걸 파고들어서 좀 털어보고 싶긴한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까닥하면 오함마 각이다.'

당장 이 새끼를 자극하는 건 좋지않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 자진 하차 하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그럼 오함마 맛 좀 보세요'

하고 뭘 후려갈길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는 다른 구석을 믿어야한다.

이놈은 모르고 나만 아는 내 유리한 지점.

나의 상태창. 특성들 말이다.

'생각을 하자.'

그 전에, 열 받아서 이가 갈리니 이 정도는 대꾸해 주고.

"그래서 LeTi에서 데뷔하다 선배님 커리어에 또 문제 생기면 다시 리셋이나 해라, 이게 목적입니까?"

"아뇨. 그럴 리가."

…청려는 약간 민망한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미안해요. 후배님도 들었다시피 워낙 정답이 없는 상황이라서. 원한다면 다음에는 미션을 지금보다 빠르게 다 끝낼 수 있도록 꼭 도와줄게요."

"…."

"물론 지금보다 편하고 유익하게그룹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플랜도 같이 잘 짜보죠."

이게 당장은 진심인 것 같다는 점이 제일 골 아팠다.

'이 새끼 이러고 또 비슷한 일 터지면 도로 리셋 종용한다.'

물론 내가 죽는다고 도로 재시작할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만, 아무튼 뻔하지 않은가. 한번 해봤으니 계속시키겠지.

그런데 이 미친놈의 사고회로에서 현 상황이 예외적, 일회성일 것이며 내게 보상안을 충분히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문제였다.

'별로 큰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거야.'

기준점이 다르다 보니 리셋 한 번 강요하는 정도는 그냥 좀 민망하고 미안한 일로 생각한다. 당연히 말이더 안 들어 먹힌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청려는 의자에서 도로 일어났다.

"피곤한 것 같으니 일단 여기까지하고… 저녁으로 먹고 싶은 음식 있어요? 가능한 선이면 줄 테니까."

일단 현재 시간대는 저녁이군. 겨우 하나 건졌다.

"없습니다. 알아서 챙겨 먹도록 그냥 절 보내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힘들겠네요. 음, 잠시만."

그리고 청려는 도로 방을 나갔다.

기대도 안 했지만, 저 천연덕스러운 반응을 보니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은 안 되겠다.

…빌드업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뜻이다.

'이게 통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쓸데없는 대화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골라낸 내 특성 하나를 확인했다.

[특성 : 바쿠스500(B)]

-맑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

: 모든 피로 누적 속도 - 50%바쿠스500.

내 컨디션 유지용 특싱이다. 이것 덕분에 컴백 주 며칠 정도는 한두시간만 자도 견딜 수 있다.

물론 이걸 이용해서 저 새끼가 잠든 사이 탐색을 개시해보겠다는 꿈같은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더럽게 꼼꼼히도 치워놨네.'

애초에 이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 불편하고 웃긴 동작으로 확인한 화장실도 민둥한 시설물만 남아 있었다.

'이미 몇 번 해본 느낌인데.'

리셋 중에 대체 어떤 관계자 뚝배기를 위협해서 정보를 얻어낸 건지는 모르겠다만, 상당히 그럴싸한 추측 같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이 특성을 활용할 상황은 '모두가 잠든 사이' 따위가 아니라 다른 타이밍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좀 기다린다.'

저놈이 내가 체념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적응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신중히 상황을 본다.

나는 수갑을 내려다보고, 혀를 찼다.

힘든 휴가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 며칠.

자는 간격과 식사 타이밍으로 볼때 사나흘 정도로 추측한다.

자살 권유가 더 과격해지지 않도록, 나는 그동안 '뉴라이프 플랜'에 천천히 동조해 가는 것처럼 발언을 조절했다.

이런 식이다.

"LeTi도 연습생 비용 다 청구 한뒤에 정산 시작하나요."

"아뇨. 데뷔 시점에 수익이 발생하면 바로 시작해요. 괜찮죠?"

"좋은 곳이네요. …갈 생각은 없습니 다만."

"하하."

이 패턴을 몇 번 반복한 뒤, 정보수집을 위해 약간 민감한 소재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휴가 중이라도 제가 연락이 없으면 분명 의심할 텐데. 따로 연락 없습니까?"

"글쎄요."

"…연락이 왔나 보군요."

"하하, 티 나요? 적당히 답장했으니까 걱정 마요. 후배님 말투로."

"…."

이 새끼 내 화면 잠금 패턴도 알고 있나.

'그 보험 광고 때냐.'

당시 강아지 찍으며 스마트폰 잠금을 풀었던 것이 기억났다.

'망할.'

휴가 다 끝날 때까지 외부의 도움은 기대 못 하겠군.

그래도 이놈이 계속 내 스마트폰을 확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집 안에 있을 확률이 높다. 나는 그것을 기억해 두기로했다.

그 후로도 의미 없을 설득과 변명, 기분 나쁘게도 의외로 제법 질이 좋은 청려의 아이돌 관련 팁 브리핑이 쏟아지는 며칠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그때가 왔다.

"오늘은… 후배님?"

"…선배님."

세 번째 기상. 아마도 아침이나 새벽.

나는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한숨을 쉬었다. 숨이 통과하는 코와 목이 후끈했다.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느릿느릿말했다.

"혹시 몸살약 있으십니까?"

바로 쉬는 타이밍마다 찾아오는,지독한 몸살이었다.

이번에도 휴가 타이밍에 맞춰서 어마어마한 열과 부담이 몸에 쏟아졌다.

굳이 내가 정신적으로 긴장이 풀릴 타이밍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상대로다.'

내 추측이 맞았다는 뜻이다.

'이 몸살, 컨디션 특성에 대한 반동이 맞나 본데.'

바쿠스뿐만 아니라 일회성 특성이었던 '잠은 죽어서 자는 것이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그런 특성들을 풀로 사용한뒤 '활동 스케줄'이 없을 때만 아프니 아무리 그래도 좀 기묘하게 보였거든.

그래서 가설을 세워 본 거였는데, 이번 걸로 거의 확신이 온다.

'상태창이 개입된 것 같은 기계적인 분류야.'

꼭 연예인 활동을 쉴 때만 몸의 부담이 몰려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 아픈 타이밍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약?"

이 새끼를 당황하게 만드는데 말이지.

내가 사나흘 만에 외상도 아니고 몸살로 드러누울 거라고 상상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잠시만."

들어오던 청려가 다시 방문을 닫고나갔다.

'좋아.'

일단 곧바로 '마침 아프니 죽으면되겠다' 같은 발언은 안 나왔으니 진행 방향이 썩 괜찮았다.

'방심했군.'

상황을 다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에 저놈이 반사적으로 안심해 버린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서 며칠 내로 리셋을 기정 사실로 생각하는 중이겠지.

다시 들어온 청려의 손에는 약과 물이 들려 있었다.

처방전 없이 사놓을 수 있을 법한 약이다.

'…상비약을 준비했군.'

이건 좀 아쉽다. 치밀한 정신병자 새끼.

"진통제랑 해열제니까. 좀 먹어둬요."

포장 안에 들어 있다. 굳이 다른 물약을 섞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복용은 한다.

그리고 슬쩍 운을 뗐다.

"…혹시, 병원은."

"우리 둘이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 미안해요. 음… 재시작하면 몸은 바로 나을 텐데."

결국, 이 말로 돌아왔군. 권유긴하지만.

'지금 찌른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쉰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실 전 지금 팀이 좋습니다. 다시 시작해서 똑같은 팀을 꾸려도 절대 지금과 같을 수는 없겠죠. 공유한 사건과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까."

"…."

"그냥 제가… 여기서 계속 살 수있게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뭐, 성격에 안 맞는 발언이긴 했다만, 아프면 좀 감성적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때맞춰서 특성도 터져줬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발동!]

훌륭해.

물론 상대의 '감정적 동요'를 이끌어내는 것이니, 설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봐라.

"…미안해요."

청려는 약간 표정 없는 얼굴로 짧게 중얼거렸다.

딱 '미안한 감정' 정도만 생겼나보군. 알겠다 개새끼야.

정확히 계획대로다.

"…."

나는 일부러 한동안 침묵하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머리가 아파서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그런데, 화장실… 앞까지만 좀 부축해 주시죠."

"그래요."

거절 안 할 줄 알았다.

청려가 적당히 다리 불편한 사람 부축하는 것처럼 내 어깨 밑을 받쳐들었다.

생각이 흔들리며 주의가 분산된 순간.

그러니까… 내 동작보다 본인 생각을 더 의식할 순간.

'지금이다.'

나는 양팔을 돌려서, 청려의 머리에 걸쳤다.

"…!"

그리고 수갑째로 놈의 목에 걸어당기기 시작했다.

"…이!"

수갑 사이 금속이 놈의 목을 꾹누르는데, 당연하지만 저항이 거셌다. 체중째로 눌러서 자세를 불안하게 바꿔도 계속 가격이 들어온다.

'X발.'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군. 하지만 절대 놓을 순 없다.

나는 억지로 팔을 비틀어서, 놈의 목을 그대로 꺾었다.

"…!"

"크읍."

어차피 이 컨디션에 두 손이 부자유스러운 판에 어지간해서는 건장한 성인의 목을 부러트릴 수 없다.

그냥 이 새끼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누른다…!

"…."

산소가 차단되어 창백해지면서도 눈깔을 돌려서 이쪽을 노려보는 게 X발, 더럽게 소름 끼치는….

상관없다.

'시뮬레이션하던 대로만!'

나는 마지막으로 수갑을 뒤틀어 놈의 머리 뒤를 후려갈겼다.

퍽.

짧고 과격한 소리와 함께, 압력이 사라졌다.

"…."

제압했다.

"허억."

나는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X발, 진짜."

팔목 다 작살났다. 개 같네 진짜.

그래도 희열 때문에 통증은 모르겠다.

나는 되는 대로 꿈틀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가서, 다행히 쓸 만한 날붙이를 찾았다.

바로… 전구다.

파바박!

집어던진 책에 조명이 박살 나며 날카로운 조각이 바닥에 쏟아졌다.

옛날 제품이라 더 심했다.

"좋아."

몇 번 손이 베이긴 했지만, 다리를묶은 케이블 타이 뭉치는 풀었다.

이제 만일의 상황에 도주가 용이해졌으니, 예정대로 움직인다.

나는 뻐근한 목을 움직였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정신 차리셨네요."

맞은편 의자에 케이블 타이로 꽁꽁 묶여 있던 청려가 신음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케이블 타이 여분을 많이도 사두셨던데."

"…."

"공구도 넉넉히 준비해 두서서, 수갑도 잘 풀었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준비성 철저하시네요, 선배님. 덕분에 편했습니다."

그리고 씩 웃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79화]

이 새끼에게 할 말이 정말 많았으나 우선 이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일단 좀 묻죠. 대체 어떻게 납치같은 미친 계획이 안 들킬 거라고 확신한 겁니까? 제 휴가만 지나도 다들 찾으려고 혈안이 될 텐데."

"…."

청려는 어두운 눈으로 이쪽을 보다가, 고조 없이 대답했다.

"열흘 안에 끝낼 생각이었으니까."

내 스마트폰으로 휴가 기간도 확인했나 보군.

"열흘 안에 제가 자살할 기미를 안보이면 죽일 생각이었단 뜻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살짝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다시 물었다.

"그리고 제가 죽으면 재시작한다고 굳게 믿으시는 거야 알겠는데, 대체 본인도 같이 돌아갈 거라는 믿음은 어디서 나오신 겁니까?"

안 물어볼 수가 없는 질문이다.

"그냥 저만 죽고 여기서 타 그룹 아이돌 살해범으로 잡혀가실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

"선배님."

청려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표정없는 얼굴이었다.

"글쎄요… 안 잡혔을걸."

"…!"

"네 전화기도 있고… 적절한 제스처만 주면 테스타처럼 사건사고 많은 아이돌 그룹에서 멤버가 잠적한다고 경찰 수사 같은 건 안 들어가거든. 소속사가 막아."

청려는 희미하게 웃었다.

"압박감이 심해서 포기했다, 아니면 정산받고 초심 잃어서 도망갔구나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자기들끼리 찾아보다가… 결국 비용이 커지면 포기하죠. 후배님이 없어도 남은 그룹은 충분히 돈이 되고, 결국 그걸 굴리는 데 집중하게 되지."

"…."

"그렇게 박문대는 '건강상으로 활동 중지' 처리되어 사라지는 거야. 음… 한 이삼 년 지나면 간간이 추억팔이 하는 사람들만 나오게 될 것같은데."

비약이다.

계약 기간이 멀쩡히 남았는데 T1을 등에 업은 소속사가 쉽게 '박문대'를 포기할 리가 없다.

게다가 지금 내 화제성은 잘하면 아이돌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준이다. 뜬금없는 활동 중단 여파가 저렇게 간단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얼기로 보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그럴싸함이 있었다.

'X 발.'

정말 뒤질 뻔했군. 나는 혀를 차면서도 대화 자체에는 만족했다.

"그렇군요. 증언 감사합니다."

"…?"

나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녹음이 돌아가고 있던 내 스마트폰이다.

"…!"

"생각보다 식상한 장소에 두셔서 금방 찾았습니다."

이 새끼 위치 추적까지 고려했는지 전원 꺼두고 노트북에 연결해서 우회접속으로 메시지 어플을 썼더라.

어쨌든, 식기세척기 안에서 찾아낸 내 스마트폰은 다행히 멀쩡했다.

나는 녹음 중단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내가 신고해 봤자 상황만보면 쌍방폭행이니 언론에 퍼지면 논란만 커지고, 그 이슈에 물려서 내 마지막 미션이 실패하는 그림까지 노린 것 같은데."

나는 스마트폰을 툭툭 쳤다.

"녹음기록하고 정황 사진 다 남겨서 클라우드에 자동백업 설정까지 해뒀습니다."

"…."

"내가 여기서 나가서 신고하면 끝이라는 뜻이지."

"그래요?"

"예. 그러니까 좀 협조적으로 굴어라 이 X발 새끼야."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놈의 얼굴을 갈겼다.

퍽!

짧고 둔탁한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속이 다 풀리는군.

청려는 입안이 터졌는지 혀로 더듬는 것 같았으나, 큰 동요는 없었다.

"…어차피 컴백도 못 하는데. 음, 아프네요. 몸 안 좋다더니."

"몸 안 좋은 놈한테 얻어맞아서 기절한 새끼가 입만 살았네."

"하하, 음, 그런데 어차피 후배님 신고 안 할 것 같아서."

청려가 눈을 마주쳤다.

"증거 있어도 이런 사고에 말려들어서 미션에 방해될 여지를 안 남길것 같거든."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무 빡치면… 모르지. 마지막 미션이 끝나면 바로 풀지도."

"…."

"좀 시끄러워지긴 하겠지만, 그룹에서 반대할 만한 놈도 없으니까. 신고까지 순탄할 것 같은데, 어때요."

도리어 빨리 신고 안 하고 뭐 했냐고 경악하는 놈들만 나올 것이다.

벌써 그 꼴이 선하군.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놈의 반응은… 규격 외였다.

"네? 하하하."

청려가 밝게 웃었다.

"머리 좋은 줄 알았는데 순 맹탕이네."

"…!"

"지금 팀이 좋다? 아, 지금이야 끝내주겠죠. 성적 잘 나오고, 외부에 적이 많아서 뭉쳐야 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아."

청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거 몇 년이나 갈 것 같아요?"

"…!"

"아니, 몇 년까지도 아니지. 당장 뜨고 일이 년만 지나도 이상한 소리하는 일간이가 나오거든."

놈은 허공을 봤다. 뻔한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지루한 눈이었다.

"자아를 찾겠다는 개소리부터 클럽 들락거리면서 그룹 파는 놈까지 별사람이 다 나오지. 무슨 팀을 어떻게 꾸렸든 마찬가지야. 인간의 열정과 성실함은 소모적이더라고요."

"…."

"지금은 아닐 것 같아도, 잘 생각해 봐요. 마음에 걸리는 사소한 결점들이 없었는지. 나중에 그것들이… 큰 실망으로 돌아오니까."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 끝마쳤다.

"투어 끝나고 정산 한 번 더 받고나면 후배님에게 괜한 짓 말고 조용히 넘어가자고 말하는 놈이 한 사람도 안 나올지는, 모르는 일인 거에요."

"…."

나도 사람 별로 안 믿는다만… 이새끼는 반복 경험에서 우러나와서 그런지 역대급이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놈을 보다가,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뭐, 쓸데없이 정붙이지 말고 효율 위주로 새 시작하라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네.

"정 안 맞으면 나중에 해체하죠 뭐. 미션도 다 끝났을 텐데."

"…!"

"마음 맞는 놈들끼리만 해도 되고… 해보다 안 되면 그만두는 거지 뭘 그렇게까지 그룹에 목숨 겁니까. 아, 그래. 재시작 이야기 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나는 팔짱을 꼈다.

"VTIC은 하락세 좀 맞으면 안 됩니까?"

"뭐?"

"무슨 천년만년 탑티어 해 먹을 수있는 바닥은 아니잖습니까. 전성기는 끝나니까 전성기잖아요."

어차피 아이돌 그룹 인기라는 게 아무리 끌어도 군대 갔다 오고 나이먹으면 최고점 지나서 내려오는 구간이 올 수밖에 없다.

"분명 이게 아니더라도 VTIC이 하락세를 타는 날이 올 텐데, 그거 얼마간 늦추겠다고 재시작까지 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설마 평생 VTIC이 업계 최고일 수 있다는 망상을 하진 않았을 것아닌가.

청려는 잠시 표정이 없어졌으나, 곧 빙긋 웃었다.

"후배님은 아직 한 번도 안 해봐서 체감이 잘 안 되겠지만, 사실 재시작 한 번 정도는 큰일도 아니라서. 그룹 수명을 늘릴 수 있다면 해볼만하죠."

놈이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이런 예상 못 한 사건 때문에 그룹 커리어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림을 계획해서. 다음에는 그렇게 될 테니 걱정 마요."

나는 말을 던졌다.

"안 될 텐데."

" 뭐?"

"그 완벽한 커리어, 안 온다고."

턱을 괴려다가 손이 아릿해서 그만뒀다. 망할.

"VTIC의 하락세는 무조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고 그냥 타이밍만 달라질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하락 타이밍이 가장 완벽한지 네가어떻게 알아. 앨범 판매량 떨어질때마다 계속 재시작할 건가?"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영원히 재시작해야 할걸요. '다음은 더 좋을 거야' 합리화하면서."

"…."

청려는 뭐라 대답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리긴 했으나,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뭘 찌른 것 같은데.'

지뢰인지 스위치였는지 모르지만, 지금 굳혀야 했다.

'기세를 꺾어놔야 돼.'

더는 이놈이 내 일을 훼방 놓게둘 순 없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더 패를 아낄 것도 없다. 여기서 종지부를 찍는다.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난 죽어도 재시작 못 해서 그럴 기회도 없겠다만."

청려가 거의 관성적인 것처럼 입을열었다.

"…그러니까 미션에 실패하면,"

"죽어요. 그냥."

나는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진실을 말했다.

"나 원래 박문대 아니었거든."

"…!"

"원래 대졸 공시생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박문대 몸이었어. 재시작한게 아니라 그냥 남의 몸에 들어온거야."

내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아마 미션 실패해서 죽으면… 최선의 경우에도 내 몸으로 돌아가고 끝일 것 같은데. 안 그래?"

"…."

"애초에 이상하지 않았나? 내가 20대 초반 느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난 원래 29살이었거든."

청려의 얼굴에 처음으로 온갖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나 보군.

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는데."

"그렇다니까. 널 다 잡아놓은 상태에서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며 웃었다.

그간 괜히 약점이 될까 봐 이야기 못 했는데, 살인미수 증거가 내 손에 있으니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속이 다 시원하다.

"넌 이제 재시작 못 해."

"…."

자, 확실히 동요했고.

이제… 내키진 않지만, 완벽한 봉합을 위해 채찍 대신 당근을 내밀어볼까.

"그러니까… 흠이 생겼다고 지금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

"네가 가진 건 이제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니 그냥 좀 편하게 살아라. 개도 키우고 하고 싶은 일하면서."

여기서 깔끔하게 손절만 할 수 있다면 정말 고소 안 할 마음도 있다.

물론 손해 보상은 청구하겠지만.

'앞으로 안 엮일 수만 있다면 손절로 만족한다.'

나는 생채기에서 올라오는 가려움에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

청려는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타이에 묶인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팝업이 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발동!]

이게 어떤 의미로 뜬 건지 모르겠으니 좀 기다려 보자.

"…."

청려는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뭘 할지 모르겠는데."

"알아서 찾아야지."

"그런가."

청려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묘한 우울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겠군.'

저놈은 그동안 아이돌로 성공을 못하면 자꾸 재시작하니까 VTIC의 성공에 모든 가치 판단을 몰빵해 왔을것이다.

'안 그러면 더 돌아버리지.'

그리고 미션 클리어가 안 되면 자꾸 리셋되는 상황도 'VTIC의 완벽한 성공을 위한 기회'라고 뇌에서 처리해 놨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걸 틀어막고 '그거 기회 아니고 포기야!'라고 쑤셔 넣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만, 당장은 이놈이 확실히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됐다 X발.'

이제 1 차로 증거물, 2차로 내 상황 공개, 3차로 정신 공격까지 해뒀으니, 한 반년쯤은 웬만하면 알아서 합리화하겠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미션 다 끝났을 때고.'

훌륭했다.

나는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간다. 공구 옆에 두고 갈테니까 알아서 풀어라."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으니 혹시라도 공구를 집어 던지긴 힘들 것이툭

"…."

청려는 내가 발로 미는 공구함을 물끄러미 보다가, 작게 말했다.

"좀 기다리면, 숙소까지 태워줄 수있는데."

"사양하지. 마취약 흡입한 게 선명해서."

"…."

대충 보니 서울 근교라 한두 시간버스 타면 숙소까지 가긴 문제 없을것 같았다.

손목 상처도 긴 팔이라 안 보일테고.

나는 내 스마트폰만 챙겨서 당장 현관을 향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그 심정과 태도가 반년 이상 지속돼야 할 것이다. 아니면 손해 좀 보더라도 감옥에 처넣을 테니까.

나는 곧장 문을 열고 나왔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시원했다.

나는 곧장 근처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잡아서 숙소로 향했다.

한 번 갈아타야 했으나, 복잡한 동선은 아니라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슬슬 통증이 온다는 점이었다.

'검사를 해봐야겠는데.'

일단 숙소에 복귀한 뒤에 변명거리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나는 통증도 잊을 겸, 버스 안에서 내 스마트폰을 점검했다.

우선 단체 메시지방은 휴가 이후로 꽤 많은 말들이 오갔다.

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다는 근황 보고식 이야기나 잡담 위주로 돌아갔는데, 대답 없는 '박문대'를 부르는 놈도 있었다.

이런 식이다.

[큰세진 : 문대문대? 스마트폰을 해지했니?]

[큰세진 : 박문대를 찾습니다… 아무리 휴가라도 속세와 연을 끊어버리다니… 과연 티벳이야 가차 없지]

그리고 청려는 이렇게 대답해 놨다.

[나 : 그만해라.]

솔직히 소름 끼치는 싱크로율이다.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해놨군.'

나는 떨떠름하게 다른 개인 메시지방들을 확인했다.

[김래빈 : 문대 형 할머님이 영상통화를 부탁하시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날짜와 시간은 모두 원하시는대로 맞추겠습니다!]

그 뒤로 형광색으로 '고마운 당신 에게 늘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원색으로 번뜩이는 한라산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다.

"…."

뭐라고 해야 하나… 굉장히 예상했던 그대로의 상황이다.

그리고 '박문대'를 사칭한 청려는 깔끔하게 거절해 놨다.

[나 : 미안. 쉬고 싶은데 다음에도 괜찮을까.]

[김래빈 : 정말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휴가 끝난 후 뵙겠습니다!]

이건 좀 그랬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지.'

병원 갔다가 정신 차리면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나머지를 다시 확인했다.

다 비슷비슷했다. 뭘 권유하면 거절하는 식이다.

[배세진 형 : 매물을 세 가지 봐뒀는데, 네가 보기엔 어떤 게 평형 이더 좋아 보여? (사진)]

[배세진 형 : 바쁘면 답장 안 해도돼]

[나 : 잘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여기도 이렇고.

[선아현 : 문대야 나는 지금 설악산 근처로 가족들과 여행을 왔는데 단풍이 정말 예뻐서 좋아 너만큼은 잘 찍진 못했지만 몇 장 사진을 남겨봤어 숙소에 가지고 갈게 (사진)]

[나 : 그래, 고맙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청려의 마지막 흔적은 단체 메시지방에서 발견되었다.

[나 : 좀 더 본격적으로 쉬려고 호텔에 쉬러 왔어요. 다들 휴가 끝날때 봐요.」

[큰세진 : 와 호캉스!(이모티콘) 문대문대 말해줘 5성이야?]

"…."

거기서부터는 답장이 없었다.

어쩐지 좀, 그랬다.

슬슬 휴가가 날아간 실감이 난다.

'X발.'

역시 그 새끼 상태이상만 끝나면다 터뜨려서 죽여 버릴까.

다행히 날짜를 보니 휴가가 아직 절반은 남았다. 나는 최대한 진정하며, 버스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평일 낮이라 사람 없는 버스에서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평화롭게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내 몸 상태는 평화롭지 않았다.

'망할.'

숙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대로 나는 바닥에 엎어졌다.

퍽.

대리석이 볼에 들러붙는 건 전신의 작열감 때문에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X발.'

이거 큰일 났다. 움직일 수가 없다.

관절에 연골이 다 빠진 느낌이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

'구급차.'

안 된다. 지금 몸에 남은 부상을 모아보면 누가 봐도 범죄 피해자처럼 보인다.

이렇게까지 처리해 놨는데 상태이상 처리 전에 쓸데없는 논란은 사양이다.

'좀 기절했다 일어나면 괜찮아지지 않나.'

몰골은 좀 그렇지만 이대로 복도에서 좀 쓰러져 있는 방법이….

지이이이잉-

스마트폰.

누가 전화를 걸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스마트폰의 받기 버튼을 눌렀다.

며칠 만에 듣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 받았….

나는 말을 끊었다.

"지금… 숙소, 119… 부르지 말고… 병원, 좀…."

-뭐?

"회사… 연락, 하지 말고, 좀…

-문대야? 박문대!

나는 그대로 푹 퍼졌다.

이런 말 그렇지만, 며칠 만에 깊은 잠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80화]

그 후로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체감으로는 순식간이었으나, 아마 짧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들었다.

머리가 상쾌했기 때문이다.

"…."

다행히, 눈을 뜨자마자 보인 곳은 누가 봐도 1인 병실이었다.

'됐다.'

전화 받은 놈이 제대로 처리했나보….

"…! 문대야."

"…!"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난 류청우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이놈이 여기 왜 있어.

"잠깐, 호출!"

그러나 뭘 이야기할 겨를도 없이, 류청우는 곧장 버튼을 눌러 의료진을 불렀다.

그리고 잠시 뒤.

"네. 다른 이상 징후는 없으시고요. 수액 속도 괜찮으신가요?"

"예…."

"그럼 이대로 한 시간 후에 다시 교환해 드릴게요."

방문한 의료진의 체크하에 큰 이상 없다는 소견이 다시 발급된 듯하다.

나는 수액이 들어가는 손등을 떨떠름한 눈으로 보았다.

'어쩐지 상쾌하더라니.'

간 덕이었나 보다.

"이상 있으시면 호줄하시면 돼요."

"…예."

"감사합니다!"

달칵.

그리고 의료진이 나가자마자. 심각한 얼굴들이 침대 옆에 줄줄 튀어나왔다.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된다.

류청우가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는 것 같더니 큰세진과 배세진이 어딘가에서 튀어온 것이다.

'뭐야 이거.'

무슨 조폭 영화에서나 봤던 구도아닌가.

그 와중에 류청우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손목은 염좌라 전치 3주, 갈비뼈는 두 대 실금 4주. 팔다리 피멍은 그것보단 빨리 빠질 거라고 하시더라."

"…."

"너 하루 꼬박 정신 못 차렸어."

생각보다 부상 정도가 양호했다.

박문대 몸이 의외로 단단했나 보다.

'안 부러진 게 어디냐.'

다만… 이 상황 보니 머리는 좀 잘 굴려야겠군.

맛 가기 직전이었던 나한테 마침 전화를 걸었던 당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단, 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

큰세진이다.

안 봐도 이놈이 남은 둘에게 연락한 것 외에는 이 상황에 답이 없다.

"…야."

"뭐, 왜."

그 와중에 왜 이렇게 대꾸가 비협조적이냐.

"나 혼자 119 도 안 부르고 널 병원까지 어떻게 옮기냐? 자차 있는 형 부르는 거 외에 방법 있어?"

"…."

추궁하려던 건 아니다만, 확실히 할 말이 없긴 하군.

큰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애초에 너한테 전화 걸었을 때…청우 형이랑 만나는 중이었거든."

"…."

"너 톡이 너무 이상해서."

"…뭐?"

큰세진은 팔짱을 꼈다.

"박문대가 멀쩡한 숙소 놔두고 굳이 호텔 가는 것도 웃긴데, 그것만 남기고 연락이 끊기니까 더 이상하잖아."

"…!"

"그래서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봤는데… 답장마다 다 이상하더라."

큰세진이 배세진 쪽으로 살짝 턱짓했다.

"저 형님도 그래서 청우 형한테 연락 중이었대."

배세진이 살짝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종합소득세 신고까지 이야기했으면서 갑자기 아파트 평형 잘 모른다니까, 이상해서."

"…."

떠본 거였나.

큰세진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거 너 아니지?"

"…."

"그러니까 좀 묻자, 너 대체 꼴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래. 이 질문은 나올 줄 알았다.

"내가 당장 신고하자는 청우 형 말리긴 했는데… 솔직히 나도 왜 말린건지 모르겠거든? 진짜 별생각이 다들고…."

큰세진이 허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혼자 처리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면 지금이라도 신고할 거니까, 무슨 일인지 그냥 빨리 털어놔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고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데."

"그러니까 왜!?"

"문대야, 어떤 이유든 우선 공식적으로 기록 남기는 게 좋아. 신고하자."

"…활동 때문이야?"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쌍방 처리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

"뭐, 뭐?"

나는 수액이 들어가고 있지 않은 쪽 손을 주먹 쥐고 흔들었다.

"X나게 패줘서."

"…."

"…."

"외출하다가 웬 미친 새끼한테 걸려서 때려눕히고 증거 좀 잡아놨는데, 우리나라 법이 정당방위 범위가 너무 좁아서… 승소해도 법정 가면 시간만 잡아먹잖아요."

"그, 그래도 그 새끼한테 법의 철퇴를…."

"제가 진짜 철로 대가리를 갈겼으니까 괜찮습니다."

"…."

수갑이지만 뭐, 철은 맞겠지.

입을 벌리고 굳은 셋을 향해, 나는 덤덤히 설명을 이었다.

"사실 제 부상의 다수는 역으로 제압하려다가 생긴 거라… 실제로 무방비 상태에서 맞은 건 아니라서, 괜히 기사 나서 물고 늘어지면 저만 귀찮아질 것 같거든요."

"…으음."

이놈들 얼굴이 다 얼빠졌다 복잡미묘해졌다 난리도 아니군.

하지만 배세진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네가 맞은 게 맞단 거잖아…!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으니까, 잘 맞춰서 신고해 보자. 너한테 또 해코지할 수도 있고."

"뭐, 어차피 신고해도 질 테니까 그쪽이 입 털 순 없을걸요. 쓸데없는 짓 못 하게 겁도 잘 줬고."

"거, 겁을?"

"예. 제대로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음, 제가… 일 처리를 대충 했을 것 같나요."

"…."

아닌가 보다. 평소 신뢰를 잘 쌓은 것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군.

"설명 괜찮았을까요? 그래서 신고는 안 하려고 했습니다. 119도 부르면 바로 부상 원인 추적하실 것 같아서 안 하는 쪽으로 부탁했는데요."

"…문대야. 그거 그냥 병원 와도 해."

"…!"

류청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 상태 정말 심각했어. 열은 펄펄 끓는데 얻어맞고 포박당한 것 같은 흔적도 있지…."

"…."

"나야 네가 누굴 얼마나 때렸는지 모르지만, 정당방위 범위가 어떻게 되든 간에 네가 피해자야. 지금 네모습을 보고 쌍방 같은 소리가 나올리가 있나."

류청우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병원엔 아픈 상태에서 무리하다가 콘서트 연습 사고가 난 걸로 말은 해뒀지만… 그래도 난 신고하면 좋겠다. 네가 불편하다면 어쩔수 없지만."

"…."

"아니면 최소한 그 사람 신상 명세는 아는 대로 회사하고 공유하자. 혹시라도 접근 못 하게 해야지."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몽타주 정도 대충 지어내서 이야기하면 되지 뭐.

"예. 회사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 잘 생각했어."

"우리한테도 말해줘! 그런 미친놈은 다들 주의해야지."

"알았어. 음, 그리고."

좀 민망했지만, 이 말은 하는 게좋겠다.

"고맙다."

"…!"

"형들도 감사합니다. 솔직히 그때 전화 안 왔으면 힘들었을걸요."

나는 피식 웃었다.

"사칭한 메시지, 솔직히 그럴싸하던데. 누가 눈치챌 줄 몰랐습니다."

"…."

잠시 약간의 감동과 성취감으로 병실이 훈훈해졌다.

'잘하면 탈출 안 했어도 오함마 맞기 전에 행적 잡혔겠는데.'

각이 들 찰나, 큰세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나한테 더 잘해라. 우선 내 개인 사진을…."

"취소한다."

"야! 너무하네!"

큰세진이 침대보를 쳤다. 웃긴 새끼.

"…흠, 흠! 잘 쉬고. 아무튼! 몸조심하고!"

"그래. 그래도 제때 병원 와서 다행이다."

남은 둘도 뿌듯해하는군. 좋아, 상황 정리 잘됐다.

"아, 음료수나 좀 사올까. 너희 뭐 마실래?"

"에이 형,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야. 나 좀 걸을 겸 다녀오려고. 음, 문대는 사과주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집을 게 있다면, 이거다.

'음, 확실히 좀 편하군.'

류청우가 덜 거북했다.

아무래도 무의식이 아플 때 도와준 놈을 뇌에 도로 잘 찔러넣은 모양이다.

'역시 체감을 해야 알아먹어.'

몸에 이득이 되니 머리가 도로 좀 돌아왔다.

"그럼 쉬고 있어."

"네."

나는 적당히 손을 흔들어 류청우를배웅했다.

달칵.

그리고 놈이 나가자, 갑자기 큰세진이 슬쩍 물었다.

"야, 리더 형도 나갔는데."

"…."

"뭐 회사에 이야기하긴 싫지만 털어놓고 싶다 하는 거 없어? 세진형님도 문대가 털어놓으면 딱 들어주실 거죠?"

"뭐, 뭐? 아, 그… 당연하지!"

눈치 빠른 새끼.

'내가 대충 칭찬으로 말을 돌린 걸 눈치챘군.'

뭐, 어차피 만일을 위해서 몇 놈한테는 설명해 두려고 했다.

차후 활동 중 되도록 VTIC과 엮이지 않는 쪽으로 텀 내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 말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그러려면 서로 안 친해서 나 몰래 뭘 공모하지 못할 만하며, 다른 놈에게 실수라도 안 떠들 성격이 좋다.

'딱이군.'

나는 입을 열었다.

"나 습격한 놈 말인데, 사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야."

"뭐?"

"누구!"

"VTIC 청려요."

"…!"

배세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확 굳었다.

"그 새끼, 어쩐지 이상했어."

"…그래요?"

"어, 눈이 이상했…!"

"신고하자."

"…!"

큰세진이 굳은 얼굴로 치고 들어왔다.

"앞으로 시상식이나 음방에서 계속볼 건데, 안 돼. 신고하자."

"그럴 필요 없다니까."

"너 지금은 괜찮아도 막상 만나면…."

나는 피식 웃었다.

"그 X밥 새끼가 뭐."

"…!"

"말했잖아. 때린 건 나라고."

나는 수액 맞는 팔을 조심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새끼, 얼굴도 맞아서 한동안 활동도 못 할걸."

"…널 먼저 신고하면,"

"녹음에 사진에 막판엔 사과까지 받았어. 못 해."

"…후 "

큰세진은 한숨을 푹푹 쉬었으나, 더 반박하진 않았다.

'신고하면 무슨 진창이 될지 슬슬 감이 오나 보군.'

그래도 그룹 성적에 그렇게 목매는 놈이 신고하자고 말한 게 용하긴 했다.

"대체 왜 널…."

"모르죠. 그냥 꼴 보기 싫었나 본데요."

"미친놈이네."

업계에서 더 기상천외한 놈들을 많이 봤는지, 배세진은 의외로 쉽게 이 빈약한 이유를 납득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물었다.

"…쟤랑, 나한테만 말하는 이유가 있어?"

"음, 앞으로 혹시라도 굳이 VTIC 만날 스케줄 잡을 것 같으면 요령껏 좀 같이 피해달라고 부탁드리려고요."

살짝 아부도 해놓자.

"일할 때마다 발언을 잘해주시니까요."

"…! 그, 그래. 알았어."

사명감을 좀 불어 넣어주니까 확 낫군. 좋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증거는 꼭가지고 있어!"

"그럼요."

그렇게 '박문대는 왜 저 꼴이 됐는가'에 대한 설명과 납득이 끝났다.

'생각보다 힘들었는데.'

뭐, 그래도 좋은 의미로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얘들아, 음료수."

"오∼ 감사합니다!"

"…고마워."

얼마 뒤 류청우가 돌아왔고, 나는 제법 비싼 편의점 제 사과주스를 마시며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일단… 부상을 거동이 편한 선까지 회복하는 데에 넉넉 잡아 4주인가.'

아슬아슬하게 콘서트 시작에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여차하면 서울 콘서트는 좀 무리하면 그만이고.'

다만 문제는 그동안 최종 연습을 못 따라간다는 점이다.

단체 안무야 휴가 전에 익혔으니 변동사항이 없으면 어떻게 맞추겠는데, 솔로 무대가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팬서비스로 넣은 코너도 새로 안무를 따야 했다.

'조심하면서 동작은 외우는 게 최선인가.'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일단 다른 놈들한테도 부상 양해 좀 구하고, 회사에도 연락해서 미리 기사 좀 뽑아달라고 할 생각이다.

'지금 때려놔야 혹시 콘서트 때까지 회복이 안 돼도 다들 양해해 주겠지.'

…하지만 이 행동이 생각보다 강한 파장을 불러올 줄 알았다면, 조금더 미루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나 : 웬 미친 스토커한테 걸려서 제압하느라 약간 다침. 휴가 이후에 메시지는 전부 그 사람이 사칭한 거니 모두 없던 일로 부탁. (한숨 쉬는 이모티콘)]

일단 이걸 보자마자 선아현이 여행을 때려치우고 병실에 찾아오더라.

아무래도 내 원룸에 침입했던 또라이들을 본 적이 있어서 '스토커'라는 변명에 더 식겁한 모양이었다.

"무, 문대야!"

"…? 안녕."

'너 왜 여기 있냐'는 표정을 쳐다보기도 전에 선아현이 기겁해서 버럭 외쳤다.

"아, 약간 다친 거 아니잖아!"

"…."

뭐… 깁스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약간 아니냐.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선아현을 역으로 진정시키고 무슨 빵이 가득든 선물 상자를 받았다.

속초의 유명한 빵집이라는데, 아무튼 맛은 좋았다.

그리고 선아현을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부모님과도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너무 안타까워해 주셔서 오히려 좀머쓱했다.

"다음에는 꼭 아현이랑 같이 와. 요새 너무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아이고, 어떡해."

"괜찮습니다. 제가 이겼어요."

"그, 그러니? 그래도…."

울상인 얼굴이 선아현이랑 똑같던데,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피, 필요하면 연락해!"

"알았어."

이후로도 선아현은 휴가가 끝날 때까지 병실을 들락거렸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나라면 절대휴가 때 매일 병문안 안 온다.

'인성의 차이인가.'

아, 물론 선아현이 아닌 다른 멤버들에게도 연락은 왔다.

그중에는 안 그래도 연락하려던 놈도 있었다.

-형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김래빈 말이다.

"그래. 음, 잘됐네. 안 그래도 할말이 있었는데."

-예…?

그리고 나는 할 일을 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님. 박문대입니다."

[아이고!]

나는 일단 분위기를 띄우려고 트로트를 부르려고 했으나, 김래빈의 할머님은 취향이 확고하셨다.

[그∼ 우리 신랑이 할 때 불렀던 그거가 좋다! 겨울밤!]

"드, 들려드리겠습니다."

[어휴, 이뻐라∼]

음, 아무튼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유진은… 놀랍게도 휴가 마지막 전날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생존 신고를 한 것이, 단체 메시지방에 올린 짧은 동영상이었다.

[와하하하!]

[Watch out!]

…바로 바닷가에 입수하는 차유진을 역동적으로 막 찍은 비디오였다.

이 늦가을에 말이다.

[차유진 : 엄마가 찍어주었어요!:D]

정말 한결같은 놈이었다.

그래도 한발 늦게 내가 올린 글을봤는지, 야밤에 전화해서 안부를 묻기는 했다.

-형! 스토커 이겨요? 때려요!?

이것도 정말 한결같았다.

"후."

그리고 이때쯤, 드디어 회사에서 내 부상에 대한 기사를 내기 시작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81화]

회사가 처음 내 입원 사실을 알았을 때는 당연히 경악했다.

기껏 휴가 보내놨더니 전치 4주라니,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 주자 더 경악했다.

"스, 스토커요?"

"예. 웬 미친 인간한테 걸려서…."

멤버들에게 말했던 것과 비슷한 변명으로 대충 돌려막는 짓이었지만, 나도 어지간히 때렸다'는 말에 소속사도 안색이 변했다.

괜히 터뜨려서 여론 요동치느니 나한테 참아달라고 하고 싶은데 본인이 직접 묻자고 하니 반색까지 했다.

"그래요 문대 씨. 저희가 보안 인력 최대한 많이 확충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필 휴가 중이라 이런 일이…."

휴가 중이라 본인들 책임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뜰하게 암시하는 게 참대단한 수완이었다.

내가 휴가 중이긴 했으나 숙소에 남아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며칠간 연락 한 번 없던 놈들이라 좀 찔리긴 했나 보다.

'뻔하군.'

아무튼, 덕분에 기사 타이틀은 쉽게 뽑혔다.

[테스타 박문대, 콘서트 연습 중 낙상으로 입원]

깔끔하지 않은가.

회사 공식 계정으로 공지도 올리기로 했고, 내용도 적당히 염좌와 타박상으로 잘 버무려서 정리되었다.

'됐네.'

사실 나는 이쯤 해서 이 화제가 마무리될 줄 알았다.

검색해 보니 내가 입원했다는 정황이 물 밑에서 알음알음 퍼져 있긴 했지만, 출처 문제로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아이돌 사생활에 집착하는 쪽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왔거든.

-헐 곰머 입원했대 휴가 중이라 꾀병은 아닌 듯?

-ㅠㅠㅠ박문대 입원 맞나 봐 숙소에 안 오네 걱정하게 만들어

-행적이 없당 톡은 하는 것 같은데… 뭐징

이 정도 선에서 더 밖으로 나온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입원한 곳은 원래부터회사에서 찍어놓고 다니던 병원이라, 관계자들 입이 무거웠다.

내 자세한 상태에 관한 이야기는거의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간혹 맞는 소리가 있긴 했지만 다량의 루머와 거짓말이 섞이며 그것도 루머 취급당했다.

-정병 사생한테 걸려서 어딘가 부러졌다고 지인에게 들었다…흠

-몸살이지 솔직히 떠드는 것도 의미 없음 걔 쉴 때마다 아프다고 하는 거 다 알던데 뭐

-팔목 부상ㅋㅋ 걍 안무 연습 부상일 듯 연습충이라 납득 쌉가능

이렇게 떠들던 와중이니, '콘서트 연습 중 무대 부상'이라는 변명은 상당히 설득력 있고 특별히 충격적인 사유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공식 입장 전에 쓸데없는 기사가 나지 않도록 회사에서는 빠르게 엠바고 관리에 들어갔다.

확실히, 이번 본부장이 회사는 잘 굴리는 것 같았다.

'괜찮겠어.'

나는 내심 속으로 합격점을 내리며, 남은 휴가를 즐겼다.

'나흘이라도 건져서 다행이다.'

회사와 공식자료용 부상 설정을 위해 말을 맞추느라 입원 기간이 휴가말일까지 연장되긴 했으나, 특별히 불만은 없었다.

사실 날짜가 반 토막 난 것만 제위하면 1인 병실이라 원래 하려던 것과 큰 차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좀 떨떠름하긴 했다.

'…여기 비싸겠는데.'

듣기로는 6인실도 꽤 가격이 나가던데, 1인실이니 정말 많이 깨졌을것이다.

내가 사실 통원 치료해도 괜찮을 정도의 부상이라 더 웃겼다.

'별일을 다 겪어보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회사에서 낼 테니 푹 쉬면서 편하게보내긴 했다.

책 읽고, 동영상 좀 보고. 병원에서 주는 삼시 세끼 챙겨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는 뜻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멤버가 외부음식을 가져와서 특식도 쏠쏠했다.

"무, 문대야. 딸기 가져왔는데."

"아, 고마워."

"내, 내가 씻을게…!"

주로 선아현이었으나, 다른 놈이 가져오는 때도 있긴 했다.

"문대문대∼ 피자!"

'이놈은 문병 핑계로 자기 먹고 싶은 거 사 오는 것 같은데.'

아무튼, 누워서 식량만 축낸 나흘은 제법 짜릿했다.

그리고 휴가 마지막 날.

계획했던 대로 기사와 공지가 풀렸다.

[박문대, 콘서트 연습 중 낙상…'전치 4주']

[테스타 박문대, 휴가 중 부상 소식 전해]

그런데… 막상 까보니, 내 예상과는 상황이 좀 다르게 흘렀다.

반응이 훨씬 격했던 것이다.

-아 문대 어떡해

-미치겠다 티원 이 X새끼들아 무대 관리도 못 해?

-기껏 휴가받아놓고도 연습하러간 애가 입원까지 했다니까 진짜 속이 타서 눈물 난다

-뭘 시켰길래 무대에서 떨어져서 전치 4주가 나와… 아 제발 위험한 거 그만 시켜

-박문대 성격에 부주의로 낙상? 못 믿음 지들이 장치 이상한 거 발주해놓고 언플 뻔하네 개빡쳐ㅋㅋㅋ

박문대의 팬들이 걱정과 분노로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잠깐만.'

식은땀이 다 났다.

아니 무슨 의식불명도 아니고, 하다못해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이럴 것까지 있는가.

휴가가 다 끝나고도 열흘 정도는 그룹 공식 스케줄에 불참하기로 합의해서 그걸 욕하는 놈들이나 나올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나올 때마다 팬들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휴가 때 나대다가 스케줄 불참ㅋㅋㅋ개판이네

└ㅎㅎ느그 새끼는 매일 휴가나 다름없긴 하겠다 스케줄을 못 잡던데ㅠ

└연습을 나댄다고 표현하는 덕질 생활 알만함ㅇㅋ

└으이구! 동태눈깔 망돌 빠는 사람의 발언! (박수 이모티콘)

살벌했다.

'일단… 소속사가 이렇게까지 공격당할 줄은 몰랐는데.'

자체 컨텐츠에서 멤버들이 앨범이나 무대 제작에 참여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었기 때문에, 무대장치도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아마도… 걱정이 지나치게 심해진 나머지 어떻게든 원인을 색출해서 시정조치하고 싶었나 보다.

'…박문대가 다친 게 그렇게 신경쓰이나.'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음."

나는 환자복의 팔을 걷어보았다.

좀 부은 느낌이 남아 있긴 한데, 피멍은 거의 빠져서 노랗거나 파란 느낌만 적당히 남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마침 내일 숙소로 퇴원할 예정이기도 하니까, 병원에 있는 지금 뭐라도 해야겠다.

찰칵.

나는 셀카를 하나 찍어서, SNS에 업로드했다.

안녕하세요, 러뷰어.

박문대 입니다.

제 몸 관리가 소홀해서 활동을 빠지게 되어 아쉽고 죄송합니다.

큰 부상은 아니고, 내일 바로 퇴원할 예정입니다. 빠르게 회복하여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이럴 때는 정중하게 쓰는 게 괜한 소리 안 나오게 하는 데에 맞을 것이다.

"괜찮네."

쓸데없는 표현도 없고, 필요한 내용과 근황 알림용 사진까지 첨부했다.

이 정도면 다들 좀 마음 놓겠지.

나는 만족하며 올라간 게시글의 반응을 즉시 모니터링했다.

"…?"

그리고 당황했다.

-ㅠㅠㅠㅠ저는 문대로 시작 안 하는 문대의 글 너무 낯설어 어떡해 문대야 아픈 걸로 자책하지 말자 아ㅠㅠㅠ

-문댕댕이 없어… 티벳문댕도 없어… 이모티콘이 없는 문대라니…

-이렇게 각 잡고 사과할 일 아니잖아 티원 개쓰레기 회사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문대야 네가 빨리 스케줄 하겠다고 무리하는 것보다 푹 쉬면서 잘 회복하고 밝은 얼굴로 봤으면 좋겠어 맘고생 하지마 제발ㅠㅠ

그 밑으로도 영어와 일본어 등 온갖 언어로 내 글이 번역되며 각자 우는 이모티콘이 끝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오열의 파도였다.

심지어는 내 팔목 색의 대비값을 보정해서 멍 자국까지 식별해 내고있다.

"…."

이거 어쩌냐.

나는 결국 다음 날 오전에 퇴원하면서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저는 문대'라는 문구와 함께 올렸다.

그제야 분위기는 좀 진정되었으나, 여전히 오열과 과몰입의 기조는 남아 있었다.

'콘서트 준비를… 열심히 해야겠군.'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이 분위기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나는 식은땀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명심했다.

그리고 퇴원 수속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는 순간, 또 한 번의 강렬한리액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유진이 막 휴가를 끝내고 돌아와 있던 것이다.

"문대 형! 나 왔… Huuuuh?!"

"안 돼!"

"무, 문대 갈비뼈 다쳤어!"

새벽에 돌아와서 브리핑받을 시간이 없었는지, 현관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내 등을 두드리려던 놈은 곧바로 다른 멤버들에게 육탄 제지당했다.

차유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갈비? 고기?"

"여기."

내가 대충 허리쯤을 가리키자, 차유진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삿대질을했다.

"맞아요? 때린 거 아니에요?"

"…때리다가 맞기도 한 거지."

"쟤 손목도 다쳤어."

"맙소사!"

차유진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 거예요…."

"이겼다니까. 내가 더 때렸어."

[뭐, 턱이라도 날렸어요?]

"어, 턱도 날리고 머리도 갈기고."

"오."

그제야 차유진은 존경심을 회복한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멋져요!"

"그래."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놈과 룸메이트였지.'

사건이 많아서 잊고 있었다.

'도로 1 인실로 돌아가고 싶다.'

갑자기 든 소원이었으나 당연히 이루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해산물의 엄청난 팬은 아닌데요. 그래도 갈치는 좋아하셨어요! 음, 살이 달콤했죠.]

"…갈치 맛있지."

[우리 팀도 같이 먹으러 가면 좋겠어요!]

나는 오랜만에 내 침대에 눕자마자, 스케줄 직전까지 차유진과 어머니의 제주도 여행기를 들었다.

거실로 슬그머니 나가려는 시도는 질문 폭격으로 세 번쯤 저지당했다.

이쯤 되면 내가 스케줄에 동행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제발.'

그리고 예정대로, 차유진을 포함한 멤버들은 짧은 저녁 스케줄에 맞춰서 숙소를 나갔다.

내일부터는 콘서트 최종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터라 내가 빠지는 얼마 안 되는 공식 스케줄 중하나였다.

"다녀올게. 잘 쉬고."

"여차하면 매니저 형 불러!"

"잠시 후 10시쯤에 귀가해서 뵙겠습니다."

"그래. 잘하고 와라."

인파가 숙소에서 썰물처럼 사라졌다. 나는 놈들이 나가자마자 침대에도로 누웠다.

"후."

입에는 영상통화 열창의 답례로 김래빈에게 받은 반건시를 하나 문 채였다.

달달하군.

세상이 고요했다.

"…음."

하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중요한 전공을 늦잠 자서 자체휴강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생으로 스케줄을 빠지니 별 소득없이 손해만 보는 느낌이다.

'구상이나 해두자.'

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당면한 문제 몇가지를 떠올렸다.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콘서트다.

'솔로곡 무대 구성을 좀 바꿔야 하나.'

나 온자 하는 무대다 보니, 혹시라도 부상이 덜 회복되었다고 무대 보는 맛이 확 떨어지면 곤란했다.

그리고 박문대가 굳이 휴가 중에 홀로 연습하다 다쳤다는 변명이 신빙성 있게 보이려면 이 방법이 제일 나았다.

'실수하면 낙상과 손목 부상이 일어날 법한 무대여야겠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현재 다친 부위가 덜 회복되더라도 유동적으로 대응이 가능한 퍼포먼스라…

'흠.'

나는몇 가지 옵션을 떠올려보다가, 하나에서 멈췄다.

"이게 제일 낫나."

그리고 밤 10시를 좀 넘긴 시각.

나는 스케줄에서 돌아온 놈 중 하나를 불러냈다.

"아현아."

"으응?"

"너 전공 관련해서 뭐 좀 물어봐도 될까."

"어, 어?"

다 챙길 수 없다면, 순간 임팩트라도 살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