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VTIC의 청려.
'휴가 이후로 처음인가.'
사실 예상대로 별 감흥은 없다. 그동안 조용했던 걸 보니 이제 쓸데없는 개짓거리 할 확률도 낮겠고.
'대충 묻어가면 되겠군.'
아니나 다를까, 다른 놈들이 떠드는 소리만 들린다. 떠들썩한 시상식장을 의식했는지 목소리를 키운 것같다.
"리얼리티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컴백이 연기됐으니 아마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동안 온갖 영상물을 섭렵한 모양이다.
그러나 VTIC 놈은 내 동요 없음을 자기 말이 빈말처럼 들린 탓이라 오해했는지, 굳이 또 말을 잇는다.
"아니, 우리 다 같이 봤는데 진짜 재밌더라고요!"
"맞아, 형도 재밌었죠?"
"…!"
한 놈이 맞장구를 유도하며 청려를대화로 끌어들였다.
'그냥 가라 좀.'
방금까진 적당한 친목이라고 쳐도 이제 분위기 X 되게 생겼는데 직캠에라도 잡히면 루머 생성기다.
'이 새끼들 진짜 귀찮네.'
탄식하는 순간, 청려와 눈이 마주쳤다.
"…."
놈은 살짝 고갯짓했다.
그게 전부였다.
'오.'
정말 상황에 맞는 적절한 태도라약간 놀랍군.
머리를 얻어맞고서야 저놈 대가리에도 드디어 상식이 돌아왔나 싶은순간이었다.
"아∼ 선배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도 선배님들 무대 요새 너무 많이 챙겨보잖아요∼"
"오∼ 좀 쑥스럽네!"
"그러게!"
"그래서 오늘 진짜 경건한 자세로 집중하려고 방석까지 챙겨왔죠!"
"와하하! 그래서 가져온 거였어요?"
"그럼요∼ 선배님 파이팅!"
"예, 후배님도 파이팅!"
큰세진이 알아서 대화를 진행시켜 끝냈다.
진짜 소라도 사야 하나.
'밥값 하는군.'
저기 배세진도 VTIC 쪽을 노려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밥값은 한다고 쳐주겠다.
그리고 VTIC이 자기 자리로 가는 순간, 큰세진이 곧바로 관객석에선 보이지 않도록 입을 가리고 작게 말했다.
"…어딜 많이 때렸다는 거야? 흔적도 안 보이는데."
"뒷머리. 목."
청려는 검은 목티를 입고 있었다.
아직 흉을 못 지운 게 분명했다.
큰세진은 순간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기색을 지웠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한 해의 시작, 지난해의 활약을 돌아보는….]
그리고 그 순간, 무대에서 MC의 인사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본방송 송출이 시작된 것이다.
'한동안 지루하겠군.'
나는 표 나지 않게 등받이에 체중을 실었다.
리액션 기계를 운영할 시간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쁜 스케줄 중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타임이 있다는 건 편한 일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대만보며 집중하는 기색을 보여야 한다는 건 상당한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사 첫 녹화 때보단 낫지.'
최소한 지금 무대 퍼포먼스를 하는 놈들은 다 수상 실적이 있을 예정인 놈들이니 말이다.
와아아아아!
나는 방금 끝난 모 그룹의 무대에 함성에 맞춰 박수를 보냈다.
현대 무용을 적당히 접목한 댄스 퍼포먼스를 추가했던데, 솔직히 중앙에 선 한 명을 제외하곤 썩 재미볼 정도는 아니었다.
인지도 있는 아이돌 전체를 아주사 등급으로 치환하자면… 골드와 실버사이 정도인가.
음, 전공자의 고견을 한번 들어보자.
"무대 어때."
"나, 나?"
"응."
"음… 여, 열심히 하셔서 멋진 것같아. 음, 익스텐션이, 예쁘고."
잘한다는 소리는 못 하는군. 잘 알겠다.
그렇게 적당히 직캠에 무례하게 비치지 않을 정도의 리액션을 유지하며 버틴 결과.
[러뷰어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올 한해 정말 행복한 활동이었습니다.]
한 시간 반 만에 본상 수상 소감을 말한 직후, 슬슬 우리 무대를 준비할 타임이 왔다.
"이동, 이동."
"오케이."
그리고 이번 무대는 그냥 시상식 시즌의 여러 특별 무대 중 하나로 흘려보낼 것은 아니었다.
성공적인 리얼리티 방영 이후 첫무대였으니까.
예능으로 받은 대중적 관심을 다시 한번 무대로 끌어와야 아이돌 그룹으로서 호감을 소화할 수 있었다.
'결국 본업을 잘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이번엔 힘을 좀 줘봤다.
-마침내 찾아온 날
행차
그르르르- 워!
무대에서 수많은 댄서를 대동하고 두 갈래로 나뉜 안무가 부딪히는 순간, 산수화와 짐승 그림이 그려진 색색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리고 흡사 공처럼 보이는 레이저 효과를 이용한 날렵한 댄스 브레이크.
화려한 색채와 움직임이 공격적인 편곡과 맞물린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무관들이 했다는 전통 놀이인 '기마 격구'를 응용한 퍼포먼스였다.
환호가 인이어를 뚫었다.
우와아아아악!
아악!
콘서트에서 선보인 댄스 브레이크파트를 더 짧고 간단히 변형한 형태에 추가했는데 반응이 썩 괜찮았다.
지난번에도 생각했던가? 웃기지만, 이젠 무대 위에서 분위기만으로도대충 구분이 가능했다.
적당히 받아들여 줄 만한 무대였는지, 아니면 정말 볼 만한 무대였는지.
이번엔 확실한 후자였다.
"후우."
"바닥 미끄러웠는데 다들 잘했어."
"훌륭했죠∼"
큰세진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쉬운지 슬쩍 위를 쳐다보았다. 계획보다 더 과격한 움직임을 못 보여준 모양이었다.
"그래, 고생했다. 오랜만의 국내 무대였지?"
"그렇죠."
"재밌어요!"
실수 없이 깔끔한 무대에, 카메라 불 들어오는 걸 보니 퍼포먼스도 그럭저럭 리허설대로 잘 잡힌 것 같았다.
다들 제법 뿌듯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마침 VTIC은 근처에 없었다.
'무대가 다다음쯤이던가.'
이제 생방송도 거의 끝나가는 마당이니 마지막 무대 순서가 준비하러갔을 법도 했다.
남은 시상도 인기상과 대상뿐이다.
'이 타이밍에 수상하면 백스테이지에서 튀어나오겠군.'
몇 번 본 적 있는 그림이긴 한데, 솔직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오는것보다 임팩트는 떨어진단 말이지.
올해 이 동네 시상식 구성이 다소 어설프다고 생각하며, 나는 화면의 VCR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골드디스크 인기상 수상자는… 축하드립니다. 테스타!]
인기상 시상자가 테스타를 호명했다.
"…!"
"어? 어어?!"
무대가 끝나고 약간 늘어지게 앉아있던 놈들이 벌떡 몸을 추켜세웠다.
그럴 만했다.
이건… 솔직히 예상 못 한 상황이다.
얼마 전 '불건전한 경쟁을 부추긴다'며 제재를 받은 후, 인기상 투표 현황은 총 투표수만 표기되는 비공개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보통 감이라는 게 있지.'
인기상은 음반 대상 수상자가 함께 수상하는 경우가 잦단 말이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된 시대다. 굳이 음반 사주는 사람이 많은가수? 곡 하나가 아니라 그 가수 자체가 인기 많은 놈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전문가 심사'라는 명목의 주최 측 개입 없이, 100% 투표로 받는 상을 VTIC이 아니라 테스타가 받았다.
'아무리 VTIC 팬들이 덜 참여했어도 그렇지.'
이번 시상식도 불참이라고 짐작한 VTIC 팬들이 투표에 거의 막판까지그리 열성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는 건 안다.
그걸 고려해도 놀라운 결과다.
'참석 기사 난 뒤에는 분명 후반 러쉬가 있었을 텐데.'
이건 소위 말해… '비벼볼 만한'상태가 됐다는 뜻 아닌가.
이상한 희열 같은 게 슬쩍 등을치고 지나갔다.
'침착하자.'
어쨌든, 순식간에 지나간 이 생각과 별개로 몸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꾸벅 조아리고 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와…."
"우와!"
어리벙벙한 얼굴로 일어서는 놈부터 신나서 뛰쳐나가는 놈까지 다양하다만, 어쨌든 다들 딱히 기대는안 한 모양새다. 당연했다.
'주최 측에서도 말 없었는데.'
아마 놀라는 컷을 제대로 뽑고 싶었나 보다. 음흉한 놈들.
우리는 클로즈업을 열심히 따는 카메라를 대동한 채 삐걱거리며 무대위로 올라갔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다만 손 흔드는 팬들에게 인사하느라 자연스럽게 대열이 흐트러지는바람에, 스태프가 내미는 핸드 마이크가 리더가 아닌 엉뚱한 놈에게 가버렸다.
김래빈이다.
"어… 그."
당황했군. 역시 즉석 소감은 이놈에게 너무 부담스러운 과제였나.
'하지만 일단 운을 뗐으니 뭐라도 말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만이라도 해라.
"감사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김래빈은 한 번 운을 떼니 탄력을 받은 모양이다. 계속 마이크를 잡고 와다다다 긴말을 뱉었다.
"착호갑사 앨범을 준비하며 과연 대중적으로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잦은 우려가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많은 분께서 투표해주셔서 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에 마치 그룹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발 문장을 끊자.
그래도 이 정도라면 장황하긴 해도 합격점이 었다.
이대로 잘 마무리되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개인 곡이라는 모험적 선택… 으어어억, 죄송합니다!"
그러나 김래빈은 결국 앞에서 스태프의 사인을 발견하고서야, 기겁하며 정중히 자신의 마이크를 나에게 상납했다.
"…?"
왜 날 주냐. 옆에 리더가 있는데.
관객석에서 폭소가 나왔다. 김래빈은 얼굴이 가리고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다행인가.'
지금 그라운드를 꽉 채운 관객 중절반 이상이 VTIC 팬인데, 그나마 그쪽 분위기가 좀 풀어졌거든.
2년도 못 채운 햇병아리들이 수상하고 당황하는 꼴을 보니 '이번만 봐준다'는 정신승리가 가능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마이크를 류청우에게 넘기려 했으나, 류청우가웃으며 내가 하라는 시늉을 했다.
아마 본상 소감도 본인이 했으니 양보하는 것 같다.
'괜찮은데.'
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마이크를들었다.
"래빈이가 참 똑똑해요. 저도 래빈이 말에 다 공감합니다."
다시 터진 작은 웃음소리 뒤, 나는침착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저희에게 투표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더 투표할 가치가 있는 앨범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러뷰어 사랑해요! 저 완전 좋아요!"
엄지 손을 치켜드는 차유진을 마지막으로 수상 시간이 끝났다.
백스테이지를 거치는 짧은 시간에도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화는 아직 나눌 수 없었으나, 다들 체감한 것 같았다.
이제 테스타 체급이 1군 수문장이아니라 너끈히 그 안에 들어갔다는것을 말이다.
'동기 부여 확실하군.'
혹시 내년쯤 되면 순조롭게 VTIC과 라이벌 구도까지 만들 수 있는건 아닌지, 회사 사람들이 헛꿈을 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잠시 뒤.
VTIC의 컴백 무대를 보니, 회사도짧은 꿈을 접었겠구나 싶다.
와아아아아악!
관객석의 환성이 귀를 찢을 것 같이 컸다. 그럴 만했다.
'더럽게 잘하긴 한다.'
4명으로 인원이 줄었는데도 댄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빈 곳이 없다.
그리고 곡빨이 끝내준다.
'회사가 일을 잘하면 저게 되는군.'
도저히 수습 안 되는 놈은 빠르게 잘라내고, 나머지는 휴식 기간 내내기사 하나 안 나게 철저히 케어했다.
심지어 청려 부상도 대외적으로 한번도 뜬 적 없다. 이번 대처 하나로도 회사의 연륜과 능력, 비전까지 한 번에 느껴졌다.
그 결과. 잘 다듬어진 여론 속에서 저 완벽한 무대 하나로 VTIC은 순조롭게 하락세 위기를 벗어날 게 눈에 보였다.
한마디로, 어떤 소속사와 매우 비교된다.
'음, 퇴사하고 싶다.'
모든 직장인의 꿈을 읊조리고 있자니 곧 VTIC의 긴 무대가 마무리되고 대상이 발표된다.
뭐, 뻔하다.
[대상은… VTIC의 Insight!]
태도 논란 만들기 싫으면 열심히 일어나서 박수나 치자.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흐읍, 저희 정말 더 잘할게요.]
저쪽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울음바다다. 훌쩍이는 소리가 소감뿐만아니라 관객석에서까지 들려온다.
'음.'
다만 청려의 얼굴은 깨끗했다.
놈은 다른 놈들을 버릇처럼 몇 번 달래는 시늉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여상스러운 어조로 소감을시작했다.
[잘 모르겠네요.]
미친놈인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95화]
"…?"
"…?"
오늘의 피날레인 대상 수상소감에서 '잘 모르겠다' 같은 발언이 나오자, 당연하지만 공연장이 싸하게 얼어붙었다.
심지어 감격과 당혹으로 얼결에 나온 투도 아니고, 그냥 부드럽고 의아하다는 어조다.
'저 새끼 진짜 돌아서 개소리하는건 아니겠지.'
등골이 싸하다. 물론 혹시라도 박문대를 언급하면 VTIC 청려 살인미수 녹음본이 기사로 뜨는 걸 저 새끼도 모르진 않겠다만.
아마도 무대를 보던 사람 대다수가 동공을 사정없이 굴리고 있을 그 어색한 타이밍.
청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이자리가 너무 간절해서 잠 못 이루며울고, 견디지 못했던 밤도 있었습니다.]
옆의 멤버들이 그대로 굳어 있는 와중에도, 청려의 느릿한 말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흘러서,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청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때의 절박함이 제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보다 남은 감정이 있습니다.]
관객석이 숨을 죽였다. 청려는 웃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포기하지 않게 해주셔서.]
소감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뒤늦게, 그것이 적당히 훈훈하고 감동적인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로부터 정상적인 박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팬들이야 진작부터 열심히 호응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일어났던 사회면 전멤버 소동 때문에 저런 소감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 실제로는 다른 경험들에서나온 소감이겠다만.
"…."
나는 다른 놈들을 따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무대에서는 VTIC 놈들이 눈물을 훔치며 청려의 등을 어설프게 두들기고 있었다. 평소 안 하던 짓인가보다.
그래도 대상 앨범 타이틀곡이 울리는 가운데, VTIC은 곡이 끝날 때까지 무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 불이 꺼지고 한참 뒤에서야 서서히 무대에서 내려왔다.
"흠."
방금 저쪽에서 인사를 한 것 같은데, 거리가 멀어서 확신은 못 하겠군.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어쨌든, 시상식은 그렇게 환호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대상 받을래요!"
퇴장해서 차에 타자마자 차유진이 다소 뾰로통하게 중얼거린 말이다.
아무래도 신나게 인기상 들고 내려오자마자 VTIC이 대상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꽂힌 것 같았다.
"왜∼ 우리 받았잖아. ToneA에서 올해의 가수상!"
"그거 진짜 아니에요! 우리 방송 주셨어요!"
의외로 날카로운 발언에도 큰세진은 동요가 없었다.
"에이, 그래도 받은 거야∼"
"아니에요. 정당정당하게 받아요."
음, 이제 김래빈이 끼어들 때가 됐는데.
"정정당당이 겠지."
그럴 줄 알았다.
"같은 말이야."
"아니거든!"
"맞거든!"
사람 없어서 다행일 뿐이다. 나는 어느새 대상은 뒷전이 된 채 말싸움을 시작하는 두 놈을 무시하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안 말려도 알아서 조용해지겠지.
"우, 우리 댓글 보는 거야?"
"겸사겸사."
습관처럼 모니터링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먼저 정리해야 할 게 있긴 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34]
문자와 메시지 알림이 무더기로 떠있더라.
아마 축하 메시지일 것이다. 예상을 깨고 테스타가 인기상을 받았으니 기사가 제법 크게 났을 게 뻔하다.
'급한 건 없지.'
어차피 별 안면도 없는 놈들이 번호 교환한 예의상 보낸 것뿐이다.
나는 심드렁하게 문자와 메시지 알림만 훑었다.
…그리고, 축하 글 사이에서 이질적인 문자 하나를 봤다.
[데려왔어요]
가타부타 다른 설명 없이 그 다섯글자만 온 문자 내역에는, 웬 꼬질꼬질한 개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소파 한구석에 처박혀 자는 그놈은 아마도 리트리버 믹스처럼 보였다.
"…."
뭐, 이걸로 됐다 싶다.
나는 메시지를 지우지 않고 넘겼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링을 시작하려던 찰나, 뒤에서 귀청 떨어질 것 같은 부름이 들렸다.
"문대 형! 차유진의 대상 발언이 경솔하며 무모한 치기라고 생각하지않으십니까!"
"우리 꿈 가져야 해요! 김래빈은 소인배예요!"
소인배 같은 단어도 아나?
어쨌든, 둘이 싸우다 도로 대상으로 화제가 돌아간 모양이다.
'리더 어디 있냐.'
류청우를 보니, 매니저와 다음 스케줄 대화 중이라 바쁜 것 같다.
별수 없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상 받으면 좋지."
"맞아요!"
"그런데 내년에 받겠다고 너무 자주 말하진 않는 게 좋겠다."
"왜요?"
나는 피식 웃었다.
"하도 이야기해서 진짜 받았을 때 감격이 덜하면 안 될 거 아니야, 안그래?"
"…!"
충격받은 둘의 얼굴 뒤로 큰세진이 낄낄 웃었다.
"이야 문대 패기 봐."
"멋져요."
"새로운 관점의 조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사실 테스타가 이 기세를 유지한다면 정말 일이 년 내로 대상을 탈 가능성은 꽤 됐다.
'VTIC 그놈들도 군대는 가겠지.'
물론 그때까지 내가 박문대로 살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그럴 거라고 가정은 해보기로했으니까.
"마, 맞아 문대야. 우리 꼭, 열심히해서 대상 받자…!"
"그래."
"대상!"
차유진은 신나서 행차 대신 대상을 넣어서 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배세진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구석으로 들어간다. 안됐군.
'저거 한동안은 계속 기분 좋을 텐데.'
뭐, 굳이 대상 때문만은 아니다.
"마침내 집에 간 날 대상∼"
다음 리얼리티 촬영 행선지가 차유진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샌디에이고의 본인 집이었기 때문이다.
2주 후에 또 호떡 몇백 개 구울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레서 근육통이 오는 것 같군.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음식 장사는 중노동이었다.
'뭐, 팔은 다 나았으니까.'
나는 멍 자국이 거의 사라진 내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검진에서도 주의 소견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때쯤이면… 솔로곡 퍼포먼스도 재개할 수 있을 것 같다.
'좋네.'
서울 앵콜 콘서트가 벌써 기다려진다.
물론, 그 전에 1월에 남은 일본 투어는 다 끝내야겠지만.
테스타의 일본 콘서트 투어는 아레나 사이즈로 진행되었다.
흔히 초대형 가수의 상징으로 보는 돔 투어의 바로 직전 사이즈로, 아주사 가 일본에 방영되기 전에 야심만만하게 잡은 크기였다.
참고로 박문대는 남은 표가 덤핑으로 팔리게 생겼다며 씁쓸해했었다.
하지만 막상 아주사 가 방영되고나자, 아주 적절한 수요 예측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테스타, 일본 첫 아레나 투어 4개도시 8회 공연 전석 매진]
추첨 형식으로 진행된 콘서트 예매는 도시마다 제법 대단한 경쟁률을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경쟁률을 뚫고 예매에 성공한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을 만한 공연이 계속되었다.
-모두 웃는 얼굴로 오프닝을 했다멋지고 귀여워라!
-최애의 개인 무대에 비명을 지르는 아이돌 오타쿠가 여기 (웃음)
-앵콜이 나오는 순간, 이 마법 같은 순간도 끝이구나, 그런 감각 때문에 정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아직도 울고 있다。゚(゚´Д`゚)゚。
-흐르는 땀에도 1mm도 흐트러지지 않아 인간이 아니지요? 역시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분명한 아이
'아니, 그래서 사진은 어딨냐고…!'
쾅. 김래빈의 개인팬은 주먹으로 키보드를 내리쳤다.
무대마다 직캠 한두 개로 공급이 나오면 다행이고, 아예 개인 컷이 전멸 나는 경우도 잦았다.
'구체적인 무대 묘사 후기도 왜 이렇게 없냐고!'
이래서 일본 투어가 싫다며 개인팬은 울부짖었다. 통제가 너무 심하다보니 스케줄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무 떡밥이지 않은가.
그래도 테스타는 양반이긴 했다.
사랑하는 러뷰어 저 왔어용
(곰 이모티콘)
오늘의 벌칙 의상입니다ㅋㅋㅋ 그래도 다들 귀엽죠? 알아요! (새침한이모티콘)
(사진)
투어 중에도 멤버마다 돌아가며 꾸준히 SNS로 오늘의 일정과 공연 후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빅버드 이놈은 맨날 자기 잘 나온것만 골라 올리는 것 같은데.'
김래빈의 개인팬은 괜히 한번 투덜거리면서도 큰세진이 올린 김래빈과 박문대의 사진을 소중히 저장했다.
"귀여워…."
테스타의 이번 즉석 무대 벌칙 의상은 유치원복이었다.
일본 팬들의 후기에서 한 줄씩 언급된 내용을 긁어 모아보자면, 아주사 시즌 3 주제곡인 '바로 나'를 동요 편곡했다고 한다.
'X발…!'
지난주 요코하마인가 저코하마인가에서는 무슨 유명 아이돌 리듬게임유닛 곡까지 해줬다던데, 흐릿한 사진 한 장으로 끝나서 위가 쓰렸다.
개인팬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탕!
'제발 국내로 돌아와…!'
다행히 얼마 전 압도적인 시상식 무대와 귀여운 축하 W라이브 덕에 국내 팬 여론은 아직 괜찮았다.
하지만 VTIC에게 올해 유입을 다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은은했다.
시상식 컴백무대 이후로 여전히 승승장구하며 1위 기록을 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새끼 이빨 잘 털던데.'
청려의 시상식 소감이 엄청난 어그로와 함께 팬들의 코어화를 부추겼던 것을 떠올린 개인팬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은근히 긁는 소리 해대는 몇몇 VTIC 팬들과 한바탕했던 것도 함께 기억난 탓이었다.
-ㅠㅠ우리 애들 세대교체 안 되니까 후배들한테 미안한가 봐 너무 잘해준다…
-잘하는 팀이 계속 이 판을 이끄는 건 어쩔 수 없지 능력 따라가는거니까! 그래서 우린 앞으로도 정상에서 오래 볼 것 같다 사랑해
└이상 능력 따라 라이징하는 후배들 겁 먹고 X나 패는 티카의 발언이었습니다.
당시 마지막 댓글을 사수했음에도 빡침이 가시지 않았던 김래빈의 팬은 씩씩거렸다.
'얘들아, 빨리 국내에 뭐라도 하나 내줘라!'
그때 였다.
띠링.
"어?"
스마트폰에 위튜브 알림이 떴다.
[(예고편) 막내 집에서 레모네이드 대신 호떡을 팔겠다 (비장) I 테스타의 아이돌 워킹 홀리데이 시즌 2]
"미친!"
기다리던 대중성 넘치는 떡밥에, 팬은 블루투스 키보드를 헹가래 쳤다.
일본 아레나 투어를 완전히 끝내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비행기에서 한잠 푹 자고 일어나니, 예상대로 차유진의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나름대로 선물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는데, 거기서 몇 가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주로 언어 문제로 말이다.
차유진의 집에서 뛰쳐나온 한 노인분이 팔을 활짝 펼치고 이렇게 외치셨기 때문이다.
"Bienvenido carifto!"
그리고 차유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Abuela, estoy aqui!"
"…?"
영어가… 아니잖아?
'스페인어?'
당연하지만, 팀 내에서 누구 하나 구사해 본 적 없는 언어다.
예상 못 한 언어의 장벽에 굳은 놈들 사이로 차유진이 달려 나가서 노인과 포옹했다.
아무래도 본인의 할머님인가 보다.
류청우가 황급히 차유진을 잡아챘다.
"유, 유진아? 할머니셔?"
"네! 아, 영어 써요! 내 할머니 영어 잘해요!"
그보다 네가 스페인어를 한다는 것을 언급도 하지 않은 태평함이 놀라운데.
어쨌든 영어로 어설픈 통성명과 환영 인사 및 선물 교환식을 진행하고나자 본격적으로 리얼리티 촬영 분량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당연하지만 차유진 가족들에게 호떡 시식을 부탁하는 장면부터다.
"부모님은?"
"지금 일해요!"
그런 연유로, 아직 퇴근 안 하셨다는 다른 분들 대신 할머님 단독 컷이 들어갔다.
그리고 할머님은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셨다.
"입맛에 맞으시나 봐."
"다행이다."
호떡 하나 구우려고 주방에 몰려있던 다 큰 남자 여섯이 수군거리고있자니, 할머님과 떠들고 온 차유진이 말을 옮겼다.
[맛있긴 한데, 음, 약간 더 달아도 좋겠다고 하시네요! 간식이니까!]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아침 식사를 보니 여기가 대체적으로 한국보다 달게 먹는 것 같긴 했다.
"그럼 달고나도 얹자."
"예?"
"네?"
그리고 잠시 뒤, 달고나 아이스크림 호떡이라는 미친 간식을 팔기로 결론을 내렸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96화]
샌디에이고에서 호떡 장사 개시 첫날.
오픈 시간도 전에 PD가 히죽히죽 웃으며 브리핑을 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내일 바로 놀러 가시는 거예요∼"
남은 빚은 1,000달러.
지난 시즌 빚과 매출의 굴레에서 마지막 필사의 제비뽑기까지 처참하게 패배한 탓에 빚쟁이 상태로 마감했었다.
고로 오늘 천오백 달러쯤 벌지 않으면 내일 노는 순간 빚 확정이라는뜻이다.
'이쯤에서 한번 전부 갚아야 그림이 또 재밌을 텐데.'
돈이 계속 쌓여도 긴장감이 떨어져서 문제지만, 계속 빚쟁이인 것도 별로였다.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편이 좋지 않은가.
다만 PD 놈도 너무 몰입한 건지 틈을 안 준다.
"우리 한국인의 양심을 보여줘야겠죠? 달고나 하나 얹었다고 가격 두배 되고 이런 거 안 됩니다∼"
"쳇."
"어어? 쳇 누군가요, 지금?"
어쩔 수 없군.
지금 믿을 만한 건 호객 능력과…차유진의 기존 인맥인가.
마침 차유진이 양팔을 번쩍 들고 외친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다 온다는데요? 인당 세 메뉴씩 시키게 만들죠!]
"아니, 괜찮아."
저 정도까지 가면 강매다. 논란 글 올라오느니 그냥 호객이나 열심히하자.
일자리 배분도 슬슬 새롭게 개편해서 새 재미를 뽑아낼 타이밍이긴 하나, 오늘은 숙련된 솜씨가 필요한고로 상의 끝에 미루었다.
그래서 오늘의 라인업은 지난번과유사하다.
외국어 능통자인 차유진과 선아현이 주문을 받고, 류청우와 큰세진이마무리 플레이팅과 서빙.
다만, 한 사람만 변동이 있다.
"열심히 할게."
배세진이 요리부에 투입된 것이다.
달고나가 추가되며 노동량이 늘어났다… 가 표면적인 이유이나 사실다른 이유가 크다.
지난 시즌에 배세진이 실수 한 번에 자괴감에 빠지길래 만능 포지션을 빙자한 깍두기로 빼줬더니, 반응이 썩 괜찮더라고.
'귀엽다고 난리였지.'
제작진이 편집으로 워낙 열심히 하는 캐릭터를 살려줘서 '티는 안 나지만 사실 1.5인분 함'이 됐다.
그리고 이번엔 그 이미지를 바탕삼아 포지션을 배정해서 승진하는 맛을 내주는 것이다.
'기왕이면 외국인과 좀 접점이 많은 그림이면 더 재밌겠는데.'
배세진 본인 위가 녹을 것 같으니그만뒀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 완벽한 호떡을 만들어 판매합시다!"
"…좋아!"
"예. 화이팅 한번 하고 갈까요."
"그래!"
대충 자막으로 '이때까지만 해도 활력이 넘쳤다' 같은 게 다음 컷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래도 그림상 한번 해줬다.
다음은… 오픈 직전에 준비해야 할 토핑이다.
"문대 씨, 지금 무엇을 하시나요∼"
"달고나 사전 제작입니다."
큰세진이 핸디캠 하나를 프라이팬에 들이대기 시작했다. 아마 따로나오는 레시피 클립 영상에 쓰겠지.
사실 이걸 레시피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말이다.
"설탕을 충분히 녹인 뒤에, 베이킹 소다를 넣고 공기층을 넉넉히 만들어줄 생각입니다."
"오∼ 그러면 뭐가 좋아요?"
"식감이 부드러워집니다."
나는 거대한 프라이팬 세 개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달고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기 중이던 배세진에게 하나씩 차례대로 넘겼다.
"저! 저 먹어요!"
"…자."
열심히 달고나를 부수던 배세진이 어색하게 차유진에게 큰 조각을 내밀었다.
무슨 맹수 먹이 주는 꼴 같은데 실제 방영분에서는 훈훈한 한 때로 조명될 것 같군.
그리고 그때, 다 부순 달고나 조각들에 신중히 소분 작업을 하던 김래빈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
"어어어!"
"왜 그래?"
"다, 다쳤어…?!"
밖에서 테이블 정리하던 선아현까지 뛰어 들어왔다.
"아닙니다! 이걸 한 번만 주목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김래빈은 흥분해서 자신이 분리한 달고나들을… 저울에 달기시작했다.
30g.
오차 없이 딱 떨어지는 정량이다.
설마 이걸 자랑하려고 한 건가.
"그래, 잘 맞네."
"그리고 이것도!"
김래빈이 후다닥 다른 것을 또 저울에 올렸다.
또 30g이다.
"오."
"이것도…!"
김래빈이 계속 다른 달고나 팩을 저울에 올렸다.
30, 30, 30, 31, 30….
"…?"
"헐."
제작진들까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PD가 황급히 물었다.
"래빈 씨, 이거 전부 저울 안 달고 그냥 감으로 넣으신 건가요?"
김래빈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네!"
맙소사.
"우아아아아!"
"김래빈 손 뭐야!"
멤버들이 김래빈을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김래빈은 예체능이 아니라 랩실에 갔어도 좋은 노예… 아니, 대학원생이 되었을 듯하다.
"대박! 대박!"
어느새 스탭까지 가세해서 무슨 월드컵에서 골 넣은 분위기가 됐다.
[고장 난 호떡 기계가]
[갑자기 정상 운영하기 시작했다]
음, 아마 이런 편집이 직후에 들어가지 않을까.
그다음에 따라오는 게 '괴상하게도운수가 좋더라니'냐 '드림팀 출동'이냐가 문제겠다만.
'오늘 판매 실적으로 결정되겠군.'나는 미술팀의 요청에 따라 앞치마를 바꿨다.
슬슬 가게를 열 시간이었다.
날씨 좋은 날의 라호야 해변 근처.
근처 만화 가게에서 만화를 사 들고 돌아가던 여성은 좋은 냄새를 맡았다.
'시나몬?'
고소하고 달콤한 향에 고개를 돌리자, 코너 옆 작은 가게가 보였다.
'저기 원래 타코 가게였던 것 같은데.'
가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 하겠으나, 좋은 냄새에 슬그머니 다리가움직였다.
딸랑!
[어서오세요∼]
[음, 안녕하세요.]
가게 안은 이 애매한 시간에도 벌써 손님이 제법 많아 보였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테이블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며 서빙을 하다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먼저 다가왔다.
[하나 드셔보시겠어요?]
[아, 음, 좋죠.]
쾌활한 목소리의 키 큰 남자가 시식용 접시를 내밀었다. 웃는 얼굴이시원시원해 보기 좋았다.
그녀는 얼결에 접시 위 조각을 하나 집었다.
[시나몬이 약간 들어간∼ 달콤한 간식인데요. 식감이 좋아요. 아이스크림이나….]
[테이블 3, 달고나 둘!]
[그래, 알았어! 음, 손님. 드시고 맛있으면 저 불러주세요!]
남자는 활짝 웃으며 뭐라 말을 더 붙이려다가, 주방에서 부르는 소리에 미소만 남기고 뛰어갔다.
주방에서 남자를 호출한 사람도 피부가 깨끗하고 단정한 생김새의 또래 남자였다.
'다 잘생겼네….'
인종을 넘어서 느껴지는 바이브가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입구 근처에걸쳐 서서 호떡 한 조각을 씹었다.
바삭한 피 안에서 뜨겁고 달콤한 시나몬 시럽이 터졌다.
"…!"
'맛있잖아!'
안 그래도 냄새에 끌려 온 것이었는데, 마음이 확고해졌다.
'오늘 간식이 정해진 것 같네.'
그녀는 곧바로 메뉴판이 걸린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 기대있던 남자가 확 몸을 일으켜 알은 채 했다.
[주문하실 거죠?]
어어어?
낯선 머리 색 아래에 있는 낯익은 생김새에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어어! 너! 유진!]
[허?]
상대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고개를 들자 잘난 이목구비와 송곳니가 더 잘 보였다.
그녀의 기억이 맞았다. 유진이었다!
[음… 우리 만난 적 있던가요? 중학교? 초등학교?]
물론 이 반응도 예상했어야 했다.
워낙 잘나가던 남자애였기 때문에, 범생이었던 자신과의 접점은 숙제를보여주고 답례로 과자를 좀 받았던게 전부였으니까.
[아… 해나 해밀턴이야. 너랑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아∼ 해나! 반가워. 잘 지내?]
우와, 그래도 아는 척은 해준다니 고무적이군!
해나는 실소하며 대답했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지. 너는?]
[끝내줘. 아, 주문할 거야?]
[어? 어… 음.]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새로운 사람들이 가게로 들어왔다.
[너 이 자식 샌디에이고 돌아왔었냐?]
[오∼ 잘 왔어!]
'으윽.'
안면 없는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녀는 불편함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등 뒤의 누군가와 부딪혔다.
[…! 죄송해요!]
[괜찮답니다.]
또 다른 직원이었다. 프랑스 억양이 말투에 묻어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쪽도 잘생겼다.
'…이게 무슨?'
대체 이 작은 가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 우아한 인상의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저기, 혹시 채식 메뉴도 있나요?]
[그럼요. 채식도… 있답니다. 여길, 봐주시 겠어요?]
그녀는 친절하고 고상한 말투의 직원에게 캐슈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올라간 채식 호떡을 추천받았다.
그리고 메뉴가 나올 때쯤, 유진이 다시 돌아왔다.
[해나∼ 어? 이미 주문했구나!]
그리고 식사를 하며 짧은 대화가 오갔다.
그중에는 기겁할 만한 내용도 있었다.
[케, 케이팝 가수를 한다고?]
[그래!]
상상도 못 한 발언이었다.
이런 말 그렇지만, 미식축구 하던 잘나가는 남자애가 케이팝을 언급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케이팝 가수 중 몇몇이 유명한 건 사실이었으나, 전반적으로는 서브 컬쳐에 가까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은 태연했다.
[몰랐어? 지금 촬영 중이야! 여긴 다 내 팀원들이고.]
[…!]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여기저기 카메라 렌즈가 보였다. 그리고 곳곳에 안내문도 있었다.
-한국 방송국에서 촬영 중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음식과 직원을 보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오랜만에 쿼터백이던 동창을 만났는데, 케이팝 스타가 돼서 간식을 팔고 있다… 니.'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상황에, 그녀는 묵묵히 음식이나 씹었다.
그 와중에도 주문한 호떡은 대단히 맛있었다.
'그냥 여기서 계속 팔아도 잘되겠는데.'
게다가 식사 막판에는 웬 음료까지 하나 받았다.
[음, '달고나 두유라떼'라는 음료야! 저 형 말로는, 내 친구에게 주는 서비스라는데?]
[형?]
유진의 고갯짓에 시선을 돌렸다.
주방에서 아까 본 무심한 표정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귀엽잖아!'
하마터면 실실 웃으며 같이 고개를 끄덕여 줄 뻔했으나, 그녀는 간신히 중간에 노선을 바꿨다.
[진짜? 고마워. 친절한 분이네.]
[맞아, 좋은 형님이지!]
해나는 유진과 대화하며 무의식중에 새 음료를 마셨다.
"…!"
이것도 제법 맛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주방을 보자, 음료를 공짜로 줬다는 남자가 전체적으로 주방을 제어하는 것이 보였다.
'가수인데 이렇게 전문적으로 요리를 한단 말이야?'
어쩌면 원래 이쪽 일이 본업이며,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밴드 멤버로도 자리를 맞추고 있는 걸지 몰랐다….
'…번호 물어볼까?'
아니, 됐다. 알려줄 리가 있나.
그녀는 괜한 생각을 멈추고, 대신 스마트폰을 들었다.
찰칵.
그녀는 가게의 메뉴판을 찍어서 자신의 코믹스 마니아 SNS 계정에 업로드했다.
[우연히 발견한 가게. KPOP 보이밴드가 한다는데 맛은 전문가의 솜씨였어 (턱 괴는 이모티콘)]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기록이었다.
'그래도 음식도 맛있는 건 사실이지. …직원도 귀엽고.'
결국 그녀는 호떡을 3세트나 포장해 갔다.
주방 안의 남자는 그 일련의 흐름을 즐겁게 목격했다.
'좋아, 매출 순조롭군.'
이대로라면 최고액 경신이 코앞이라며, 주방의 박문대는 내심 만족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해나는 자신이 SNS에 올린 글에 어마어마한 반응이 붙은 것을 확인했다.
테스타의 팬들이 울면서 우르르 가게의 위치를 물어본 것이다.
-제발제발 알려줘 제발 어디야?
-오 세상에 나 어제 라호야 비치였는데 ;(
-이 운 좋은 사람 같으니 (차유진이 박문대의 호떡을 바라보는 GIF)
'세상에.'
그녀는 결국 테스타의 몇 가지 뮤직비디오와 미국 토크쇼 출연분을 통해, 자신의 동창이 상상 이상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위튜브를 허우적거리는 며칠 뒤엔 '사인을 받았어야 한다'며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한다.
"후우."
나는 배정받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성공적으로 첫날 영업이 끝난 밤이다.
-오늘의 매출… 1,627달러!
-우와아아악!
인맥으로 온 손님에게는 원가가 크지 않은 음료를 끼워주며 판매를 부추기는 게 예상보다도 잘 먹혔다.
차유진의 친구들이 통이 크더라.
'완판이군.'
그리고 차유진의 가족들과 요란한 저녁 식사 이후에 드디어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다만 차유진과 또 방을 같이 쓰게 되었다. 젠장.
'오늘도 조용하긴 글렀군.'
당장 지금도 차유진은 떠들고 있다.
"형! 우리 유닛 무대 멋진 거 생각해요!"
그래도 저건 유닛 무대가 앵콜 콘서트로 결정된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하긴, 슬슬 이야기해 볼 때가 되긴했지.
"뭔데."
차유진이 내 침대를 쳤다.
[정말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요,역시 서커스가 최고의 선택이에요!]
그러냐?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대꾸했다.
"그래."
"오?"
"하자, 서커스."
"우와!"
차유진은 번쩍 양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역시 다이빙이 더 충격적이지 않을까요?]
이럴 줄 알았다.
'준비과정 잘 잡아야겠군.'
단언컨대, 차유진과의 유닛 무대는 대박 아니면 쪽박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97화]
테스타의 리얼리티는 시즌 2에 접어들어서도 화제성을 유지했다.
아니, 도리어 대중성의 측면에서는오히려 더 나은 성적표를 받았다.
TV에 편성된 시즌 1이 괜찮은 시청률을 올리며 시즌 2는 TV 방영까지의 텀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단, 일주일.
게다가 위튜브 편집과 TV 편집 분량이 약간 차이가 나니 골수팬들은둘 다 챙겨보게 되었다.
물론, 네티즌의 친절하고 빠른 노동력을 이용하는 시청자들이 더 많긴 했지만 말이다.
[아워홀 TV 추가 컷본 (1/3)]
: (영상)
0:43 차고영 할머님 인터뷰
3:58 휘파람 부는 큰세
5:02 박문대 미소 모음
-할머님 픽은 청우구나… 역시 내남자야
└발 닦고 자라
-ㅁ미미친 이세진 휘파람까지 잘부냐 너 대체 어디까지 가냐
-서비스 주면서 웃어? 박문대 유죄
아주사 이후 테스타라는 그룹 자체가 대중에게 예능적 측면에서 이 정도로 직접 노출된 적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팬들은 즐겁게 이 영업 타이밍을 즐겼다.
한동안 VTIC이 혼자 싹 쓸어갈 줄 알았는데, 테스타가 이렇게 비활동기에도 치고 나오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시즌2 시작한 테스타 아워홀]
[미쿡에서 서빙 내내 핫하다는 말들은 테스타 멤버]
[손으로 무게 30g 맞추는 아이돌]
시즌 2의 1, 2화가 방영된 첫 주만해도 인터넷에서는 하루에도 수십개씩 인기 글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다음 주에 이어서 공개된 관광 편인 3, 4화에서도 기세는 죽지 않았다.
[테스타의 마니또 관광!]
이번 관광에서 멤버들은 뽑기를 통해 서로의 마니또가 되었다.
[김래빈 : 청우 형이십니다!]
[류청우 : 아, 문대네요.]
[배세진 : …이세진.]
그리고 자신이 뽑은 멤버가 사전에 고른 '받고 싶은 선물들' 중 하나를들키지 않고 관광 기념품으로 사야만 했다.
벌칙을 면제받기 위해 기를 쓰며 팔자에도 없는 스파이 노릇을 하는테스타를 보고 웃자…는 기획이었으나.
[PD : 멤버를 생각하는 깊은 우정! 우정의 힘을 보여주는 관광이되겠네요!]
[류청우 : 아, 그렇네요!]
[류청우 : 그럼 서로 모른 척하자.]
[제작진 : !]
류청우의 악의 없는 투명한 파훼법으로 완전히 망했다.
멤버들은 일렬로 서서 쇼핑몰에 한명씩 들어간 후 완전히 포장된 선물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PD : 여, 여러분. 누가 마니또인지 안 궁금하세요?]
[이세진 : 네∼]
[김래빈 : 어차피 반나절 후면 공개될 정체이니 견딜 만한 것 같습니다!]
PD의 처절한 애원에도 테스타는 미동도 없었다.
게다가 차유진은 PD의 말을 질문으로 잘못 이해하기까지 했다.
[차유진 : 아! 저요!]
[PD : 아, 역시! 유진 씨는 궁금하시죠∼?]
[차유진 : 아니에요! 저 알아요! 마니또 스페인어에요! 친구!]
[박문대 : !]
[문대는 막내의 유식함이 낯설다….]
머리를 부여잡는 PD와 표정 없이 감탄하는 박문대가 개그감 넘치게 교차편집되었다.
어차피 전 화에서 영업하면서 PD에게 실컷 당하는 웃음 분량을 뽑았기 때문에 가능한, 클리셰를 부수는 전개 였다.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송 후반에는 단순히 즐거움뿐만아니라 전문성과 훈훈함까지 챙겼다.
실컷 사파리와 쇼핑몰을 탐방하고 온 날 저녁.
[이세진 : 우리 저기서 짠 한 번할까요? 음료수로요!]
[류청우 : 그럴까? 어때?]
[선아현 : 전 좋아요…!]
[배세진 : 음료수만 시키자.]
마치 멤버들이 펍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뻔한 편집 점을 만들 것처럼, 이런 대화로 시작한 분량은 한 요소 때문에 속성이 변했다.
[이세진 : 저거 무대에 노래방 기계인가? 아 여기 노래방 컨셉이네!]
테스타가 들어간 곳은 노래방 기계가 있는 가라오케 바였던 것이다.
[류청우 : 그러고 보니 문대가 노래 부르고 싶어 하던 것 같던데.]
[박문대 : 제가요?]
[이세진 : 와∼ 박수!]
[박문대 : (티벳)]
그리고 테스타는 장난을 치다가 얼결에 노래방 기계를 부여잡고 노래를 부르게 된다.
[박문대 : (열창)]
[선량한 선술집에서 프로의 깽판]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부른다….]
비록 자막은 장난스러웠으나 실력만은 과하게 확실했다.
그리고 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조명되는 테스타의 본업이기도 했다.
[쏟아지는 함성과 박수]
그것을 전혀 인지도가 없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인증받는 것은 시청자에게 묘한 대리만족을 줬다.
게다가 박문대뿐만 아니었다.
[이세진 : 형님∼ 한 곡 하시죠?]
[류청우 : 그럴까? 래빈아, 같이 부를래?]
[김래빈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멤버들은 혼자, 혹은 둘, 셋씩 돌아가며 노래방 기계를 이용했다.
한국 곡은 거의 없었으나 어차피 팝송 몇 곡은 다들 부를 줄 알았기에 상관없었다.
나중에는 분위기에 취해서 모르는 손님과 함께 소싯적 미국 보이밴드곡을 부르며 춤을 추는 경우까지 나왔다.
[차유진 : You got a vibe∼ (님좀 하신다는 뜻)]
[손님 : I know! (취했다는 뜻)]
[이 멋쟁이 손님은 감동적이라며 술까지 샀습니다]
이렇게 간간이 웃음 코드를 살리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음악 예능적인성격까지 충족했기에 볼거리가 더풍성해졌다.
테스타는 괜히 무리하게 본인들의 곡을 부르거나, 홍보성 멘트를 하지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흘렸다.
덕분에 시청자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컨텐츠만을 즐길 수 있었다.
[선아현 : 저, 우리 여기서 더 시키면 빚인 것 같아…!]
[이세진 : 어이쿠]
[박문대 : 슬슬 일어나죠.]
그리고 끝으로 차유진의 집에 복귀했을 때, 서로 선물을 주는 컷으로훈훈함의 정점을 찍었다.
[류청우 : 문대가 방석을 유진이한테 양보했잖아. 그래서 골라봤어.]
[선아현 : 내가 준비한 건 손목 받침대야. 아무래도, 래빈이는 컴퓨터를 많이 쓰니까….]
그렇게 의좋은 컷으로 마무리되려는 순간.
[차유진 : 팝콘 맛있어요!]
[배세진 : ?]
카메라는 차유진이 주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초대형 팝콘 통을 받고 얼이 빠진 배세진을 비췄다.
[배세진 : 내, 내가 언제 이런 걸…!]
배세진의 항의가 뚝 잘리더니 평화로운 BGM과 함께 자막이 떴다.
[판독 결과]
[배세진 씨의 선물 목록에는]
[간식이 있었습니다.]
[차유진 대승리]
그리고 컷은 결국 뒤뚱거리며 팝콘통을 옮기는 배세진을 엔딩으로 잡았다. 마지막을 폭소로 장식하니 뒷맛이 좋았다.
이후 맛깔나는 예고편까지 더해져서 기대감을 살리는 것까지 훌륭한예능이 었다.
그러니 반응이 계속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개재밌다
-이거 시리즈로 다른 아이돌들도 쭉 제작해주세요ㅠㅠ
-테스타라서 재밌는 것 같은데 테스타랑 오래 합시다
-요새 진짜 수요일만 기다리면서 산다 제발 오래오래 가요∼
물론 타 그룹의 견제성 댓글도 있었지만, 슬슬 정말 예능 자체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의 인기가 눈에 보였다.
당연하지만 팬들은 비명을 지르며 외치기 시작했다.
-제발 이 뽕 가시기 전에 컴백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됨 티원놈들아
-뭐라도 홍보를 해 새끼들아
이 예능 특수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필사의 외침이었다.
시상식 시즌 때야 확실한 유입 요소-시상식 무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덜했지만, 지금은 다른스케줄에 대한 기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어 추가 같은 거 하면 어쩌냐 국내 괜찮은 줄 알고 더 과감히 해외 돌려버리기 가능성 넘치고요
-미ri내 데뷔 다음 달이라던데 우리 애들 일정 밀리는 거 아닌가
-아 이 새끼들 감 없는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불안한데;
-설마 이대로 리얼리티 계속 뇌절하겠다는 건 아니지 제발 단물 다 빼먹지 말고 박수 칠 때 본업 가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음 주 리얼리티가 방영되기도 전에 새 소식이떴다.
[테스타 Enchanted ME 서울 앵콜 콘서트 티켓 오픈 안내]
바로 서울 앵콜 콘서트 소식이었다.
-드디어
-미친 너무 좋아
-오랜만에 애들 얼굴 보겠다ㅠㅠ
└티케팅을 성공하셔야 보러 가지
└오장육부를 팔아서라도 성공할 예정
투어 스케줄 추가에 대해 걱정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팬들은 서울 콘서트 추가에 기뻐했다.
단순히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본진인 한국에서의 콘서트는 컨텐츠 확장성이 있었다.
일단 입국한다는 뜻이니, 효율성을 고려해 곧바로 재출국보다는 이어서 국내 스케줄을 소화하는 구조로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새 앨범 컴백 같은 것 말이다.
-피크닉 이후로 몇 달 안 지난 거안다 나도 양심이 있지 싱글로 만족할게
-하다못해 행사라도 잡히면 오프 뛸 기회가 더 생기잖아
-문대아 기다려라 누나 적금 깨고온다… 이번에야 말로 팬싸 갈 거야ㅠㅠㅠㅠ
심지어 테스타는 지난 첫 콘서트에서 신곡을 공개한 전적까지 있었다.
'혹시 컴백이 멀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으로 테스타의 팬 커뮤니티 여기저기가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래빈이 방금 아현이가 준 손목받침대 인증했다 아무래도 작업 중인 걸 어필 하는 것 같음
심지어 멤버들이 올리는 모든 SNS를 컴백 힌트라는 창조적 해석까지할 타이밍.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소속사에서 활동 예고가 뜨긴 했다.
-어?
다만 테스타가 아니었다.
[미리내 (Miry-nay) Debut Intro -'NO magic in this WORLD']
후배의 데뷔 예고 영상이었다
-아 ㅅㅂ 소속사 채널 공유 벌써 귀찮네
-그냥 앞으로 서로 그룹 공식 채널에 올리는 게 낫지 않나
-애들은 귀엽다 응원함ㅇㅇ
테스타 팬들은 투덜거리면서 영상을 무시하거나, 호기심에 살짝 클릭해보기도 했다.
다만 클릭한 이유가 묘한 위화감을느껴서인 사람들도 있었다.
'magic? …마법?'
'배경색이 보라색…'
그리고 그들은 영상의 첫 장면부터 어딘가 익숙한 미쟝센을 마주하게된다.
[….]
해가 땅끝에 걸린 가운데, 주홍빛으로 물든 창가에 서 있는 교복 입은 청소년이 뒤를 돌아본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었다.
-마법소년이잖아
연상작용이 너무나 또렷했다.
한국 시각 기준 새벽 한 시.
나는 스케줄 이동 중 비행기 시트에 걸터 앉아서 한 시간 전 업로드된영상을 보고 있다.
놀랍게도 항공사에서 와이파이를 제공하더 라고.
"음."
화면에서는 교복을 입은 아이돌이 창가에서 아주 익숙한 구도로 잡히다가, 문득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두운 밤 거대한 거미줄 위로 떨어지며, 고치로 변하면서 페이드 아웃.
'마법소년'이 연상되는 장면은…처음 딱 3초가량.
"오."
머리 좀 썼군.
나는 피식 웃으며 영상을 껐다.
사실 이미 건너건너 들었다.
후배 그룹의 타이틀은 본인들이 작사작곡한 이전 후보곡으로 최종 결정되었다는 것을.
그럼 이건 무엇인가?
'어떻게든 한계까지만이라도 벗겨먹겠다는 거지.'
'마법소년' 이용해 먹는 걸 미리내의 타이틀 홍보용으로 한탕 땡기는선이라도 해보고 싶단 것이다.
단편적인 '오마주' 선에서 변명될수 있는 정도로.
테스타 팬들이 대놓고 공론화해서 화내도 여론 지지를 받기 애매하도록 어그로만 살살 끌어 먹는다.
내 조언을 들은 후배의 설득은 알맹이만 빼먹고, 내가 깔아놓은 덫은슬쩍 건드리기만 한 것이다.
'…머리 잘 굴렸군.'
그래. 인정하겠다.
누구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생각보다 지능 있는 선에서 회사가 의사결정을 모은 모양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분이 나빴다.
'이거 안 되겠네.'
어떻게든 본인 그림대로 조금이라도 공을 세우려는 게 느껴지지 않나.
'총알 맞는 당사자들 놔두고 자기들끼리 의사결정 하는 게 영 꼴 뵈기 싫은데.'
당장 반년 뒤의 내 거처가 어떻게될지 몰라서 굳이 안 했던 짓까지 슬슬 당긴다.
'파벌을 찢자.'
회사에 분란을 좀 만들어야겠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98화]
테스타가 본격적인 앵콜 콘서트 준비를 위해 국내에 돌아온 지 며칠뒤.
"서울 오랜만이구만!"
테스타의 첫 번째 매니저, 아니, 이제 유일한 매니저는 싱글벙글 웃으며 회사로 향했다.
본래 둘이 처리했던 업무를 혼자 처리하게 되어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럭저럭 수월했다.
어차피 테스타는 그렇게 까다로운 그룹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새 좀 대드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애들이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기가 안 세단 말이야.'
게다가 웬만한 일은 새롭게 계약한 투어 인력이 다 배분받아 갔기 때문에 매니저는 도리어 국내에 있을 때보다 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는 개개인의 컨디션 체크나 관리가 그의 소관이었으나, 슬금슬금관성적으로 놓게 되었다.
그마저도 원래 이런 일이 익숙한 운동선수 출신인 리더가 자진해서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우야, 뭐 아프거나 하다는 애없지?
-네. 문대 상체 안마만 따로 일정빼면 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약간의 직무 태만이었다.
이 업계에서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될 정도의 꿀이었으나, 원래 사람은앉은 자리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애들 전성기 동안 잘 버티다가 경력 좀 땡겨서 이직하면 되겠지.'
안 그래도 요새 회사가 새로 런칭하는 여자 아이돌에 신경을 쏟느라 테스타에 쏟는 관심이 덜했다.
통상적으로 남자 아이돌보다 대중성이 좋은 여자 아이돌 쪽이 지금 본부장의 입맛에 맞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번에 좀 해 먹은 것 같던데?'매니저는 며칠 전 테스타의 반응을회상했다.
-형, 팬들이 너무 안 좋아하는데…회사에서 다른 이야기 없었나요?
-너무 대놓고 마법소년이라 저희 보기에도 좀 그래요∼
-어? 에이, 같은 소속사끼리 원래 약간씩 이런 레퍼런스 쓰지 않나? 팬들 금방 잊을 거야! 이런 게 어디한두 번이야?
이미 회사에서 '혹시 반발하면 적당히 넘겨 달라'는 언질은 받은 상태였다.
회사에 반론을 내는 것보다는 테스타를 어르는 게 쉬운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거라는 것을 매니저는 이미 확신했었다.
'예상대로 그렇게 흐지부지됐고∼'
뭐, 테스타가 이런다고 망하는 것도 아니고 딱 봐도 계속 잘나갈 놈들 아닌가. 매니저 본인의 커리어엔 문제없다.
그러니 살살 달래면서 쓸데없이 피곤한 일 안 만드는 게 최고였다.
"아, 다 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 도착한 방문한 매니저는, 주차장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둘째 매니저였다. 아니, 이제는 후배 그룹 미리내의 매니저로 배치를옮기긴 했지만 말이다.
얼빠진 놈이라 생각하면서도 매니저는 잡담을 이었다.
"누구 기다려?"
"아, 미리내가 지금 실장님 만나고 있어서요. 기다리는 중입니다!"
"오∼ 그래? 어떤 실장이야? 왜 만난데?"
"어, 다른 팀에 말씀드리면 안 된다는데… 되나요?"
이런 어버버한 부분이 아주 짜증나는 놈이었다.
자고로 사회생활은 눈치 아닌가!
'오래 못 버티겠지?'
답답했는데 보내 버려서 속이 시원했지만, 그래도 잡일 시킬 놈이 그립긴 했다.
'다음 놈은 좀 고분고분하고 빠릿빠릿한 놈으로 왔으면 좋겠구만.'
매니저는 곧 충원될 인력을 생각하며 커피로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회사에서 형식적인 보고 후이야기를 들은 뒤, 천천히 테스타의숙소로 귀가했다.
'스케줄 적당히 브리핑하고 으쌰으쌰 스타일로 파이팅 좀 외치고∼'이 정도가 매니저의 오늘 예상이었다.
그러나, 숙소에 들어가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 형 오셨구나∼"
"어서 오세요!"
숙소에는 웬 도넛과 음료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낯선 놈이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뭐야?'
"얘들아, 저분 누구…."
"어, 안녕하세요. 새로 온 매니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앉아 있던 놈은 그제야 느리게 일어나더니, 첫 번째 매니저에게 건성으로 인사하는 것이었다.
'이 자식 뭐야?'
들은 적도 없는 두 번째 매니저라니? 그리고 이 성의 없는 태도는 뭐란 말인가.
첫 매니저는 의심과 짜증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혹시 진짜 새 매니저라도 한 소리 해줘야 할 상황 아닌가!
"새 매니저 이야기 들은 적이 없는데 누구냐? 아니, 진짜 매니저 맞아요? 누구세요?"
"정식 근무는 다음 주인데, 오늘 인사라도 하라고 형이 그래서. 오늘 못 들으셨어요?"
"형?"
박문대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끼어들었다.
"매니지먼트실장님 사촌 동생이시라던데요."
"…!"
"아, 못 믿으셔서 이러시나."
두 번째 매니저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삐딱한 태도로 스마트폰을 들어내밀었다.
"뭐, 통화라도 하실래요?"
스마트폰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사촌 형'이란 수식어와 함께 떠 있었다.
매니지먼트실장이 맞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첫 번째 매니저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잘 들어가세요∼"
"네, 다음 주에 봐요."
두 번째 매니저가 될 놈은 적당히 인사를 돌려주고 곧 떠났다.
날백수로 사는 놈을 꽂은 거라더니 일에 별 열정은 없어 보인다만, 상관없었다. 기대도 안 한다.
애초에 첫 매니저도 기본만 하는놈이다.
'중요한 건 매니지먼트실장의 생각이지.'
그 이름만 있는 놈이 '자기 라인'을 회사에 만들기 시작했다는 제스처가 중요했다.
'잘 먹혔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현관에서 돌아섰다.
"형, 도넛 하나 더 드시겠습니까?"
마침 김래빈이 식탁에서 도넛 박스를 들었다.
"아니, 배불러. 너 많이 먹어라."
"알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어차피 그 도넛을 사 온 놈은 네 덕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다.
나는 입국 첫날의 일정을 회상했다.
그건 앵콜 콘서트에 쓸 새로운 곡을 위한 녹음실 일정이었다.
연습 전에 미리 음원을 맞추는 걸 더 선호하는 팀원들 스타일상 가장빨리 진행되었다.
당연하지만, AR팀과 직접 같이 일하는 자리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A&R 팀 직원들과 인사한 뒤 유닛별로 녹음을 진행하던 때.
나는 녹음을 기다리던 김래빈에게 말을 붙였다.
녹음 부스 주변 여기저기에 있는직원들이 중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많이 신경 쓰여?
-예?
-'마법소년'이 다른 그룹 티저에서 나온 거 말이야.
-아….
김래빈은 단번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회사에서 결정하신 사안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먼저 양해를 구해주셨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좀 억울하지.
-예.
툭툭 모는 곳으로 알아서 잘 가준다.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하게 어깨를 굽혔다.
'훌륭하다.'
나는 지난번, 후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김래빈이 했던 말의 뉘앙스를 그대로 따와서 다시 한번 운을 뗐다.
-사실 그때 편곡이나 컨셉에 워낙 네 의견이 많이 들어갔잖아. 나도…우린 몰라도 네 의견은 물어보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
-아, 아뇨! 컨셉 전반은 문대 형이 이미지와 상징물까지 정하셨는데, 오히려 형과 상의하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래도 네 노력이더 크지.
여기서 좀 더 감정적으로 틀자.
나는 약간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때, 우리 정말 열심히 하긴했는데 말이야. 잠도 거의 못 자고.
-예…. 열심히 했는데….
김래빈은 이제 거의 울상이다. 당시를 떠올리니 더 몰입한 모양이었다.
좋아.
나는 일부러 근처의 AR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한데 여기 휴지 있을까요.
-아, 여기…!
역시 듣고 있었는지, 직원은 영 안쓰러운 표정이 되어서 얼른 곽 휴지를 찾아 내밀었다.
더 가열 차게 안타까워할 수 있도록, 나는 김래빈의 얼굴에 휴지를 뽑아 내밀었다.
당연히 진짜 우는 건 아니던 김래빈은 솔직하게 대답하려 했고.
-…? 저는 괜찮….
-그냥 써.
나는 직접 놈의 물기 없는 얼굴을 꾹꾹 찍어 주었다. 김래빈은 물음표로 머리가 가득 찬 것 같았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저쪽에서 직원들이 '어쩌면 좋냐'는 식의 시선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AR팀은 김래빈을 은근히 제일 좋아하지.'
말이 잘 통하는 데다가 작곡하는 놈이라 교류가 제일 많으니까. 게다가 성정이 순하니 거의 팀 게스트 막내처럼 생각하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저 팀은 직원 중 많은 수가 테스타가 데뷔 때 생고생하는 걸보며 함께 갈렸었다.
이번에 그 데뷔곡 컨셉을 마음대로 따와서 쓴 윗선을 결정에 황당해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목소리 낼 사람이 없다.'
진짜배기 경력직을 모아두다 보니, 도리어 윗선과 개인적으로 친분이있거나 인맥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다음으로는 인맥이 있는놈을 부추긴다.'
그래서 연락한 것이 매니지먼트실이다.
일단 가볍게 선물과 함께 메시지를하나 보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다름이 아니라 최근 투어 중에 테스타가 매니지먼트실에 많은 도움을 받아 감사의의미로….
실제로 투어 중에는 매니지먼트실 사람들을 주로 만나게 되니 얼추 명분은 괜찮다.
그쪽 직원 숫자에 맞춰서 적당히 비타민제나 보내면, 당연히 실장한테서 고맙다는 제스처라도 돌아온다.
보통은 전화로.
-아, 비타민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문대 씨.
-멤버들이 다 같이 상의해서 보낸건데요 뭘. 매니지먼트실 분들이 케어해 주셔서 이번 투어 내내 덕분에 저희 무사히 스케줄 소화하고 있습니다.
이 타이밍에 떡밥을 던지는 거지.
그리고 이 떡밥은 제법 그럴싸한 현황 파악을 바탕으로 한다.
'매니지먼트실은 일찌감치 현 본부장의 눈 밖에 났다.'
이번 본부장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이 이곳에 온 결정적 사유를 모를리가 없으니까.
매니지먼트실 에서 산업 스파이 라는대형 사고가 났던 것 말이다.
본사와 끈이 있으니 매니지먼트 실장 자리 유지에는 문제 없겠지만, 영향력은 좀 다른 문제다.
'일선 의사결정에서 좀 소외당하겠지.'
그래도 산업스파이 건 이후로 제법 긴장한 채로 일하는 것 같던데, 설설 기려니 모르긴 몰라도 열받아서 속 좀 탈 것이다.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일할 정도면 평생 무시당한 경험 드물었을 텐데,지금 상황이 더 참기 힘들 수밖에 없다.
그걸 살살 긁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한 대리님 건 때도 저희 말 진지하게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회사 분 중에 모른 척하셨던 분도 계셔서, 별일 아닌데 제가 예민한 건가 고민했거든요.
산업스파이 건을 '실장인 내가 잘 알아차려서 대처가 빨랐던 건데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스스로 왜곡 및 미화 할 수 있는 단서를 주자.
-실장님 덕분에 안심하고 지금도 활동 중입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거 봐라. 겸양도 없이 날름 먹었다.
여기다가 AR팀에서 '본부장이 이번에 무리수 뒀네', '테스타 애들한테 너무 했다' 같은 여론을 실무진에 퍼뜨려 주면, 실장은 더 확실한 합리화가 가능하다.
'일 못하는 본부장이 자신을 견제한다'는 대단한 착각 말이다.
그 상태가 며칠간 잘 숙성되면 본부장에게 한번 들이받을 동력으로 작용해 줄 걸 알았다.
'낙하산이라 일 잘못되면 잘릴 거란 공포도 없으니, 자신감과 충동대로 지르겠지.'
그리고 다행히 실장이 제대로 뽕이 찼는지, 당장 오늘 아침에 자기 사촌동생을 테스타 새 매니저로 꽂았다… 까지 온 것이다.
'개판 나겠군.'
나는 소파에 누워서 차유진이 남은 도넛을 다 해치우는 것을 구경했다.
"그만 먹어! 너 돼지야?"
"나 호랑이야!"
"호랑이는 밀가루를 섭취하지 않는 육식동물인데, 너는 지금 설탕과 밀가루를…."
흠, 평화롭다.
'슬슬 다음 것도 터졌을 텐데.'
당연하지만, 불발로 끝날 수도 있는데 지뢰는 여럿 깔아둬야 하지 않겠는가.
'그 후배가 말 괜찮게 하는 것 같던데.'
나는 다음 폭탄을 맘 편히 기다리기로 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99화]
심어놓은 '폭탄'이 터진 것은 얼마후, 비하인드 카메라가 붙은 채로 앵콜 콘서트 연습을 하는 도중이었다.
"자, 오른쪽으로∼ 발 차고, 다시옆으로… 형, 조심하세요!"
"…급."
발이 꼬일 뻔한 배세진이 귀가 시뻘게진 채로 다시 안무를 재정비했다.
춤 스탯이 C까지 올라왔는데도 그만큼 더 괴악해진 안무 난이도에 고전 중인 것이다.
'나도 남 말할 때가 아니지만.'
차유진과 유닛 무대를 하려면 스탯을 재정비 해야겠다 생각한 찰나.
안무 연습실 문 뒤편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언성을 높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왔나.'
감이 왔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 할필요는 없다.
"뭐지?"
"음?"
일단 당장 카메라부터 눈치껏 촬영이 종료되었다. 무시하기엔 소리가제법 컸기 때문이다.
안무는 마침 후렴을 지나 마무리 되었고, 멤버들은 동작을 마무리하고당황 반 걱정 반으로 연습실 문을 쳐다보았다.
"누, 누가 말씀 나누시는 걸까요…?"
"…지금 여기 다른 사람은 없을 텐데."
"잠시만."
눈짓을 남긴 류청우가 일어나서 상황을 파악하려던 순간, 한발 먼저 문이 열리더니 안면 없는 놈이 벌컥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 붉으락푸르락 안색이처참한 첫 매니저가 황급히 따라 들어왔다.
놈은 첫 매니저를 무시하고 우리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손에 든테이크아웃 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우리 테스타 아티스트분들. 어휴, 반갑습니다! 아, 이거 하나 드시면서 연습 화이팅하시라고 가져왔습니다."
"누구세요?"
놈은 냉큼 음료부터 받아든 차유진의 말에 깔끔하게 대답했다.
"아, 저는 이번에 새로 온 매니저입니다."
"예?"
당연하지만, 얼마 전 도넛 들고 온 실장의 사촌동생과 겹쳤다.
"음, 며칠 전에 뵌 분하고 다른 분이신데요∼?"
"그 친구는 이제 여러분 따라 다니면서 로드매니저로 일할 거고, 저는총괄!"
총괄.
즉, 치프 매니저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전담 매니저이던 첫 매니저는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돌을 졸지에 상사로 모시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바쁜 스케줄이면 전담이 셋은 붙어야 제대로 돌아갔을 텐데… 아이고, 앞으로는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처리할 테니까 불편한 건바로바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아니…."
음, 첫 매니저는 아직도 당황한 모양새다. 아무 언질도 못 받았나 보지?
치프 매니저가 된 놈은 그제야 첫 매니저를 보며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김 매니저, 혼자 하느라 지금까지 고생 많았겠어요. 앞으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아티스트 분들의 니즈를 관리해 봅시다. 부상이나 컨디션 체크도 매일 시간대별로 진행해 보고."
첫 매니저가 그동안 그룹 케어를 제대로 못해서 승진 라인에서 밀려났다고 광고를 하는군.
그래, 저게 매니지먼트 실장이 새롭게 밀게 될 명분이다.
'아티스트 중심 케어!'
만약에 내가 그놈에게 바람 불어넣는 것으로 끝이었다면, 실장과 본부장의 구도는 선배 그룹 대 후배 그룹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본부장이 후배 쪽을 미니까 본인은 남은 옵션인 선배-테스타 골라 버렸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 두 그룹이 소모적으로 정치질에 이용당한다는, 쓸데없이 피곤한상황이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변수를 하나 더 끼워 넣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후배 쪽도 실장에게 바람을 좀 불어넣는 거지.'
그렇다.
입국하자마자 둘째 매니저 통해서 후배 그룹 2위에게 연락해 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조언해 주셨는데 제가 제대로 못 해서….
-아뇨. 성과를 거두신 거죠. 설득하셨잖아요. 물론 회사가 양보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심적으로 힘드신 건 안타깝습니다.
-예…. 아,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저희가 도리어 선배님과 선배님 팬분들께 폐를 끼쳤습니다!
-서로 피해를 본 거죠. 음… 그래도 많이 힘드시면, 매니지먼트실 쪽에 한 번 이야기해 보시는 방법도 있긴 한데요.
-매니지먼트실이요?
-그룹 케어는 매니지먼트실 담당이니까요. 차근히 말씀드리면 대변해주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미 기획된 건 어쩔 수 없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러니 앞으로는 되도록 선배 그룹과 엮이지 않고 싶다'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럼 이미 한번 내 조언을 써 먹어본 후배는 시도해 볼 것이다.
-…감사합니다! 기회 봐서 해보겠습니다.
야무진 타입 같았으니 잘 챙겨 먹었겠지.
그럼 이제 매니지먼트실 실장에게는 갑자기 섬광 같은 공통 비전이 생기는 것이다.
'본부장이 아티스트의 의지를 묵살하고 있다!'
'자체 제작이 가능한 아티스트들에게 무능한 본부장이 숟가락을 얹으려 무리하고 있다!'
아주 본인 마음에 드는 표어였겠다.
이걸 좀 더 공식적인 언어로 순화하면 아까 본 말이 나온다.
'(본부장 말고) 아티스트 중심으로 가자!'
물론 실장이 진짜 아티스트의 케어에 대단한 관심이 있을 리는 없다.
그냥 본부장을 이겨 먹기 위해 그런 명분을 잡았다는 게 중요했다.
아마 테스타에게 우호적인 AR팀이나, 다 나온 컨셉 새로 포장하느라 사정없이 갈리는 중인 제작 마케팅쪽에서 슬쩍 여기 편승할 테니까.
'그럼 정말 파벌이 되는 거지.'
그리고 제법 효과가 있었나 보다.
당장 '아티스트 케어'의 상징인 매니저 인력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개편된 것을 보니 말이다.
마침 그 상징인 치프 매니저가 첫 매니저를 툭 치며 말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매니저 셋이 전담팀 된 기념으로 오늘 간단하게 한잔하는 게 어때요, 이야기도 좀 하고."
"…어, 예예. 그럼요."
첫 매니저는 결국 떫은 표정으로 굴복했다.
물론, 머리가 식으니 지랄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겨우 인지한 모양이다.
'자업자득이지.'
나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현재 회사 상황에 눈에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서로 견제하고, 아득바득 물어 뜯어줬으면 좋겠는데.'
낙하산 실장이 본부장을 누르고 회사 잡은 뒤 마음대로 해먹을 걱정은 없냐고?
그래, 없다.
'그 새끼 일 못해.'
그냥… 이 엔터 사업에서 자기 업적과 공을 세우고 싶은 윗대가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기력만 다소모하게 만들면 된다.
그사이에 그룹이 주도적으로 일을추진하면서, 실무진들은 자기 일을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 연습 화이팅입니다∼ 여러분 금방 또 뵙겠습니다!"
"네!"
"잘 들어가세요!"
치프 매니저는 자기 번호를 뿌리며 '언제든 편하게 연락 달라'는 말을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그제야 첫 매니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저 사람 좀 불편하지않냐? 갑자기 와서 무슨."
편들어 달라는 뜻이다.
큰세진이 밝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에이, 처음 뵙는 분인데 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저희 신경 많이 써주시는 것 같아서 좀 기대가 돼요! 감사하기도 하고."
"쉐이크 맛있어요!"
차유진이 옆에서 음료를 흔들었다.
결국, 첫 매니저는 욕지거리를 삼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연습실을 떴다.
'멍청한 놈.'
나는 혀를 찼다.
애들이 바보도 아니고, 너보다 류청우가 일을 더 많이 하는 건 진작 다 알았을 것이다.
그게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 못 한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
저기 감탄사를 지르는 김래빈 같은 놈은 아마도 몰랐을…
"이제 알겠습니다!"
"…?!"
절묘한 타이밍에 나온 말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김래빈은 감탄 어린 표정으로 말을이었다.
"문대 형이 녹음실에서 하신 말씀 덕에 이런 상황이…."
"잠깐."
스탭 일곱 명이 주변에 있는데 이 이야기를 대놓고 꺼내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이놈이 이 상황을 이해했다고?'
상당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김래빈은 꿋꿋했다.
"아, 문대가 무슨 말 했어?"
"예! 문대 형께서 그룹이 겪은 고난과 심적 고통을 공개적으로 공유해주신 덕에 회사에서 좋은 피드백을 주신 것 같습니다!"
"…."
"오오, 그래? 문대가 막∼ 힘들다고 했어?"
"예! 제게도 물어봐 주셨습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을 확실히 표현해야만 상대의 반응도 변하는 것을 이번 기회로 느꼈습니다."
"이야∼"
"…음."
하이고.
그러니까, 이놈은 굉장히 기본적인 구조를 파악했다는 뜻이다.
'테스타가 힘든 티를 확실히 냈다.→회사에서 그룹 케어에 더 신경 써줬다!'
이 알고리즘 말이다.
택도 없는 이론 수준이었으나, 대인관계 사고방식이 비슷한 수준인 놈들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쪽으로 말이다.
"무, 문대야…."
"…그랬구나."
안 그랬다.
"언제나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도 이걸로 뿌듯해할 일이 아니다.
이 와중에 큰세진은 실실 웃으면서 박수를 보냈다.
"그러게요, 와, 문대 덕분에 잘 풀렸네∼ 멋지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다. 은근히 열받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제법 뼈 있는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자. 문대문대, 우리도 입 있다? 래빈이 말고 우리한테도 공유하자고∼"
"…!"
"그래, 문대야."
류청우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룹이잖아. 머리가 일곱인데, 상의해 보면 좋은 방법이 나올수도 있지."
"…."
전적이 있다 보니, 내가 일부러 말을 흘린 것까지는 눈치 있는 놈들은다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리고 부정하진 않겠다.
제법 합리적인 발언이었다.
'좀 성급했나.'
나 혼자 처리하는 게 워낙 편하고 빨라서, 이게 그룹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행동이라는 걸 자꾸 간과한단 말이지.
이놈들도 다 영향을 받으니 분명 상의할 자격이 있었다.
'앞으로는 좀… 이야기한 후에 진행해도 괜찮겠어.'
매일 얼굴 보는 처지에,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네요."
"그래!"
류청우는 농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서로 보완할 부분이 있으니까 팬분들, 음, 그러니까… '주주님'들이 이렇게 뽑아주시지 않았겠어?"
"저는 머리 좋아요!"
"차유진은 공식적인 지능 측정 결과가 없습니다. 주관적인 의견…."
"김래빈보다 좋아요."
"그래? 그럼 나중에 우리 컨텐츠로 심리 검사도 한번 해볼까? 그 뭐더라, MBTI도 정식으로 해보고."
"좋아요!"
"아주 재밌는 컨텐츠가 될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말싸움이 불발로 끝났다.
'괜히 리더가 아니긴 하군.'
나는 새삼스럽게 류청우를 훑었다.
이 그룹 구성원으로서 인식이 굳어질수록, 이놈에 대한 경험적 거부감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음, 괜찮은데.'
이젠 슬슬 이전 수준으로 돌아온것 같다. 나는 내심 인정했다.
옆에서 선아현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 그럼 앞으로는… 힘들면 꼭, 서로 많이 의논하자…!"
"그래."
연습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하필 이걸 카메라에 못 잡았다며, 소리죽여 통곡하는 스탭들을 뒤로한 채 곧 연습이 재개되었다.
또 며칠 뒤.
"오."
드디어 공개된 미리내의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서는 '마법소년'의 흔적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었다.
-가편집까지는 컷신으로 중간에 짧은 영상이 삽입되어 있었거든요!
걱정 많이 했는데 정말 선배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매니저를 통해 거의 세배라도 올릴것 같은 후배의 일방적인 감사가 도착했다.
'깔끔하군.'
소속사에서 은근히 부추기던, 미리내를 테스타와 굳이 엮는 기사들도메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테스타의 팬들도 더 기분 나쁜 떡밥이 없자 '티원이 티원했다'면서 일단은 넘어 가줬다.
앵콜 콘서트 유닛 무대 소식이 터지며 관심이 그쪽으로 쭉 쏠렸기 때문이다.
-미친 차고영 문댕댕 유닛? 케이팝 기강 잡으러 오셨다 못 보면 죽음뿐
이런 반응을 보니, 더 제대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와하하!"
나는 옆 침대에서 뒹구는 차유진을보며, 오랜만에 속으로 불러봤다.
'상태창.'
단, 우선 확인하는 건 내 것이 아니다.
차유진의 상태창이지.
'유닛 무대 최종 확정 전에 한 번 더 확인해서 대응책을 완성한다.'
안 그래도 괴물 같던 저놈 스탯,어떻게 변했는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