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차유진 옆에 반투명한 홀로그램이떴다.
[이름 : 차유진]
가창 : B- (B+)
(랩 : B+)
춤 : S- (S+)
외모 : A (S)
끼 : S (EX)
특성 : 블랙홀 (S)
욕할 뻔했다.
'X발 이게 사람 새끼냐.'
그사이에 춤이 또 늘었는지 S등급이 두 개가 됐다. 가창도 최근 보컬 파트가 늘더니 결국 B등급에 진입 했다.
그리고 화룡점정은… 특성이다.
[블랙홀(S) :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인력, 사로잡는 충동]
-무대 몰입도 +180%
A등급이 S가 되면서 150%가 180%가 됐다. 특성도 진화할 줄이야.
'끼가 더 오른 건 저 영향인가.'
식은땀이 다 난다.
'저거랑 뭘 해도 X될 것 같은데.'
오랜만에 아주사 서바이벌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생존본능 말이다.
'팬들이 좋아한다고 너무 섣불리 추진했나.'
아니, 침착하자.
이놈이랑 유닛 한번 해서 내 폼이 깨진다고 그룹 탈퇴해야 하는 것도아니지 않은가. 그냥 좀 쪽팔리고 말 것이다.
'내가 큰세진처럼 어떻게든 차유진 눌러보려던 것도 아니고.'
'둘 다 잘했다'로 여론을 밀어보려 안간힘을 쓰는 팬들과 '곰머새끼 나대더니ㅋㅋ' 같은 소리를 하며 비웃는 차유진의 개인 팬들이 벌써 눈에 선하긴 하지만.
그리고 결국 박문대의 무대 잘하는 이미지에 타격이 올 것도….
'그건 못 참지.'
안 되겠다. 혹시라도 그런 사태가 발발하지 않도록 재점검한다.
"유진아."
"네!"
"유닛 무대에서 쓰고 싶었던 장치 다 말해봐라."
스마트폰 보던 차유진이 벌떡 몸을 튕겨 일어났다. 눈이 번쩍번쩍거리는군.
[물! 폭죽! 조명과 댄서들! 그리고 거대한 움직이는 구조물!]
있는 대로 다 쓰고 싶었다는 소리다.
"어차피 그거 다 쓰는 건 예산상 불가능했다는 건 알지."
"알아요! 그래도 많이 써요! 좋아요!"
"그래."
사실이다.
안무 시안과 무대장치는 이미 다 컨펌이 난 상태다. 그리고 차유진이 말한 것 중에 제법 많은 요소가 무대에 실제로 쓰인다.
비하인드에서야 내가 속 좋게 차유진의 주장을 수용해주는 모습일 테지만, 사실 내가 노린 부분이기도하다.
화려한 주변 장치 덕에 무대 전체로 집중이 퍼지는 그림을 원했거든.
그러나 차유진 스탯을 확인하니 알겠다. 좀 얕은 수였던 것 같다.
'분산 안 될 거야.'
분명 사람들은 차유진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다. 무대장치는 그걸 도리어 그걸 도와 버릴 지경이다.
더 강제적으로 그 집중을 뺏어올 방법이 필요하다.
제일 쉬운 건… 역시 내 스탯도 건드는 건데.
'상태창.'
이번엔 내 상태창을 한번 점검해보자.
[이름 : 박문대 (류건우)]
Level : 18
칭호 : 없음
가창 : S-
춤 : B+
외모 : A-
끼 : A-
특성 : 잠재력 무한,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 바쿠스500(B), 잡아채는귀 (A)
!상태이상 :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남은 포인트 : 2
이제는 내 상태창도 능력치가 상당히 준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차유진걸 보고 난 후에 확인하니 좀 빛이 바래긴 하는군.
'일단 특이점은 없다.'
살펴볼 만한 건… 레벨이 하나 올라간 것. 그리고 자연 증가한 춤 스탯 정도인가.
아마 투어 스케줄에서 계속 즉석 안무를 익히고 소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단계 오른 것 같다.
그럼 평소대로라면 내 행동 방식은 뻔하다.
'줌을 B+에서 A-로 올리는 거지.'
등급을 바꾸는 효율적인 방식에, 차유진의 장기인 춤에 따라붙을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애매하다.
'그렇게 올려도 차유진과 자릿수가 달라.'
차유진의 춤은 S-다. 유닛 무대인이상, A-로 비벼봐도 간신히 급 맞춰 주는 그림으로 끝날 수도 있다.
2포인트를 다 투자해서 A로 맞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초에 끼와특성에서 밀리니까.
그리고 이건 어디다 투자해도 마찬가지다.
'…가창을 S+로 만들어버려?'
눈은 차유진을 봐도 귀는 박문대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좀 처절하긴 하군.
일단 보류해 두고, 남은 변수를 살펴보자.
'음.'
나는 그동안의 콘서트와 리얼리티인지도로 쌓인 팝업들을 불러왔다.
[성공적 공연!]
절대 다수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명성 갱신 알림을 포함해서 이런 팝업들이 몇 개 됐다.
대부분은 적당히 특성 뽑기를 줬는데, 그래서 쌓인 뽑기가 무려 5회다.
그리고 여기서 가까운 시일 내로 써먹을 만한 게 나오는 건 매번 증명돼서 더 의심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이젠 거의 확신한다.
'싹 탕진하자.'
뭐 쓸 만한 것 좀 뱉어봐라.
일단 저등급부터 간다.
나는 '보물'과 '영웅'이 붙은 뽑기를 다 돌렸다. C에서 B등급이 기본으로 나오는 놈들이다.
레버가 돌아가고 슬롯머신이 번쩍인다.
파파팡!
['말랑뽀짝 귀요미(B)' 획득!]
['천사표(C)' 획득!]
['악어의 눈물(A)' 획득!]
['부동심 (B)' 획득!]
필요 없고, 됐고, 상황에 안 맞는다.
'무대 관련이 하나도 안 나오잖아.'
대외활동에 관련된 특성만 쏟아진다.
'무대는 알아서 하라는 건가?'
이번 유닛 무대를 망쳐도 별 타격이 없을 거란 암시인가.
나는 짜게 식은 머리로 팝업창을 훑었다. 그러다가, 문득 상당히 꺼림칙한 예상을 떠올렸다.
'아니면 이제 곧… 때가 오기 때문일 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 곧 상태이상은 끝이다.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 정해진 기간 내로 20만 명 이상 의관객과 만나지 못할 시, 사망
달성 인원 : 199,997 / 200,000
단 3명 남았다.
앵콜 콘서트가 끝나면, 아니, 혹시 천재지변으로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뭐든 관객 셋만 채운 무대 한 번이면 이 상태이상도 끝이다.
'그리고… 그 X 같은 진실 확인이 또 뜰 것 같은데.'
지난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이번에도 누군가가 뒈지는 장면을 보여줘도 이상하지 않았다.
…날 동요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태도 논란을 방어할 수 있도록, 대외활동과 관련된 특성이 뜬다… 라.
'설득력 있어서 더 기분 나쁜 추리군.'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X발 쓸데없는 걸 보여주지 말라고.
나는 혀를 찼지만, 일단은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특성을 교체했다는 말이다.
[특성 :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A)이 삭제되었습니다!]
대신 그나마 쓸 만한 '부동심' 특성을 넣었다. 등급은 낮아진 거지만, 다방면 사용이 가능한 특성이니까.
…참고로 A등급이라 순간 혹했던'악어의 눈물'은 가련하게 울어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그, 수도꼭지 특성의 상위호환이다.
쓰레기란 뜻이다.
'됐다.'
나는 목을 우두둑 꺾었다.
자, 뇌를 비우자.
남은 건 하나.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 붙은 뽑기다.
[전설 특성 뽑기 👈 Click!]
투어 끝내고 받은 마지막 뽑기다.
양산형 X망겜이든 갓겜이든 일단 전설이 붙어 있는 건 좋은 게 국룰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애매한 게임 시스템도 마찬가지겠지.
'최소 A 예상한다.'
제발 나도 무대 강화 특성 좀 추가하자!
홀로그램 슬롯머신의 레버가 당겨지고, 백금색으로 가득 찬 칸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라라라락-
그럴싸한 특성 명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가운데.
타닥.
슬롯은 천천히… 멈췄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색 빛으로 빛나는 칸이었다.
파파파파팡!
[특성 : '탐닉의 시간(S)' 획득!]
'X발.'
S 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침대를 갈겼다. 다행히 스마트폰에 도로 빠진 차유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미쳤나.'
아무리 내가 이딴 뽑기에 목매지 않아도 그렇지, 이런 고등급이 뜨니 척수까지 짜릿했다.
잠깐, 그래도 진정하자.
어떤 특성인지 확인이 먼저다.
'그래도 어감만 봐서는 무대 특성같은데.'
나는 특성의 세부 사항을 띄웠다.
[특성: 탐닉의 시간(S)]
-이 위에서 살아 있는 나를 느낀다.
: 무대 몰입도(본인) +180%
'돌았다.'
이름만 바꾼 블랙홀이지 않은가.
"후우."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무대 몰입도 추가 180%….'
이 정도면, 포인트 분배만 효율적으로 잘 맞추고 연습만 조율하는 걸로도 차유진과 겨룰 수 있겠….
아니, 잠깐만.
다시 보니 뒤에 뭐가 붙어 있다.
무대 몰입도(본인)
'본인'?
그러니까, 전체 관객의 몰입도가 아니라… 무대 하는 본인이 자기 무대에 몰입한다는 뜻이잖아.
"…."
이 개새끼가 진짜.
'내가 내 무대에 자아도취라도 빠지라는 건가.'
이 상태창이 진짜 게임이었으면 벌써 환불 때리고 별 하나짜리 리뷰를남겼을 만행이다.
'상도덕을 X발 어디다 팔아먹었어.'
나는 잠시 상태창을 보며 이를 악물었으나, 곧 머리를 식혔다.
'…부동심과 비교한다.'
침착하게 이해득실을 따지자.
일단, S등급인 이 특성의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정말 내가 무대에 몰입하게 해주겠지.
그렇다면 평소의 나는 어떤가.
몰입이 부족하나?
'무대가… 재밌긴 하지.'
보람도 있고, 나름대로 무슨 컨셉이든 분위기를 맞춰 민망한 기색을 내비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평타는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몰입하면 무엇이 좋은가?
'더 자연스러워 보이겠지.'
공연하는 당사자가 깊게 몰입하면, 보는 사람도 더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도 어느 정도는 기대할만하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 여러 방해 요소가 난입해도 흐름을 깨지 않고 공연을 더 수월히 끌어갈 수 있겠다.
'그리고… 더 재밌을 수도 있고.'
…이건 고려 사항은 아니니까, 넘기자.
"흠. "
어쨌든, 정리하고 보니 '블랙홀' 수준의 사기는 아니더라도 제법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다.
특히 컨셉이 강한 이 그룹 특성상, 스스로 위화감을 덜 느끼고 공연할수 있다는 점도 이득이다. 컨셉 소화력에 영향을 줄 것 같으니까.
'보는 내가 다 민망하다' 같은 소리도 덜 나올 것 같고 말이다.
'잘하는 것과는 좀 다른 말이긴 하지만, 더없이 뻔뻔하게는 할 수 있겠단 뜻이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
불쑥, 극단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잘 쓰면 되겠는데.'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이미 내가 가진 변수는 다 깠고, 다른 옵션은 없지 않은가.
'일단 해볼까.'
나는 당장 팝업을 조작했다.
[특성 : 부동심(B)이 삭제되었습니다!]
잠깐 스쳐 지나간 '부동심'의 빈자리에 새로 나온 특성, '탐닉의 시간'을 꽂았다.
그리고 남은 포인트를 다 끼에 쏟았다.
끼 : A+
좋아. 이대로 간다.
"차유진."
"네?"
"유닛 무대 더 재밌게 해볼래?"
차유진이 되물음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앵콜 콘서트까지 보름도 채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와 차유진은유닛 무대 구성을 약간 수정했다.
그리고 둘 다 수정된 방향을 만족해했다.
"괜찮겠어?"
"정말 좋아요!"
"너희가 그렇다면야…."
류청우는 몇 번 되물었지만, 차유진은 엄지를 치켜들 뿐이었다.
그럴 만했다.
우리는 각자 잘하는 걸 할 예정이거든.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1화]
테스타의 서울 앵콜 콘서트 당일.
고척 스카이돔에 입성한 대학원생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드디어… 첫콘을…!'
앵콜 콘서트가 토요일에 시작되는 덕에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드디어 스포일러 없이 콘서트를 즐 길 시간이었다!
척척박사가 될 것인가, 석사로 취직할 것인가의 기로 앞에 서 있는 대학원생이었지만 오늘의 고민은 하나뿐이었다.
'문대가 잘 보이겠지? 이 자리가 최고 맞지?'
그렇다. 대학원생은 무려 돌출 앞 좌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티케팅을 성공했다.
지난 콘서트에서 아주사 시즌 4가 차지해 논란이 일어났던 바로 그 구역이었다.
박문대의 사진을 찍는 그녀의 친구는 눈물을 좍좍 흘리며 부러워하면서도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나 방금 입장함 심장 튀어나올 것 같다ㅠㅠㅠ
대학원생은 몇십 분 전에 온 친구의 메시지에 답장하며, 자신의 자리에 입장해 앉았다.
정말 그 말대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앵콜 콘서트는 보통 세트 리스트가 비슷한 데다가 공연장까지 비슷했으니, 견적은 벌써 나왔다.
'돌출 무대에서 적어도 네 곡은 보겠네!'
그녀는 코앞에서 박문대의 무대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응원봉을 부여잡고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으아아아아!"
"어어억!"
몰아치는 공연에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사람들 사이에서, 대학원생도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아 너무 좋아!'
정중앙의 시야 좋은 곳에서 보는 콘서트는 거의 예술적이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박문대! 문대야!"
방금 끝난 박문대의 솔로 무대가 그 예시였다.
투어 중 사용하던 의자를 제거하고, 다시 맨몸으로 공중에 떠 올라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이 무대는 정중앙에서 보자 그 의도가 더 선명히 느껴졌다.
감정의 소용돌이처럼 어지러운 원색 천의 난무.
조명 아래 중앙에서, 떨어지는 천 너머 허공을 부유하는 무상한 연정.
대학원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접을 읊조렸다.
'박문대는… 천재다.'
그리고 그 모든 감성이 선명히 다 가온 것은 비단 좋은 자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대가 너무 잘해.'
지난번보다도 더 서늘한 박력.
같은 공연장이라 분명 음향은 그대로일 텐데, 목소리에서 어딘가 사람을 건드리는 감성이 이상하게도 좀더 날 것처럼 선명히 느껴졌다.
만일 대학원생이 SNS에 접속했다면 중계를 엿보는 사람들의 이런 감상평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박수침
-야 저음질 주절주절 변명 이제 안 받음ㅋㅋ 박문대는 이렇게 들어도 개잘하네ㅋㅋ
-방금 박문대 음원보다 더 좋은 거 나뿐이야?
-제발 앵콜콘도 딥디 내줘
몰입도가 달라지자, 무대 위에서의 감정선 질이 달라진 것이다.
박문대 본인의 예상보다도 확실한 '탐닉의 시간(S)' 효과였다.
그리고 방금 백스테이지에서 무대 장비를 해제한 박문대 본인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후우."
손이 떨렸다.
고통이나 경련 때문이 아니라 여운 때문이었다.
머리끝까지 감정이란 물에 잠기다가 건져 올려진 것 같은 공허함과 개운함이 과했다.
'그래도… 예상보다 좋은 선택이었다.'
본인도 방금 무대가 만족스럽긴 했기 때문이다.
의식하는 단계 없이 바로 진입하는 몰입은 사람을 더 고양시켰다.
특히 섬뜩할 정도로 처절한 감성의 곡을 혼자 했으니 더했다.
'평소보다 더 강해.'
박문대는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이온음료를 마시며 뇌를 가다듬었다.
"무, 문대야! 몸 불편한 곳은 없을까…?"
"어, 편해."
"그,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 그래도 혹시 불편하면 꼭 말해야 돼!"
"그럴게."
"으, 으응! …아! 방금 꽃그음, 광장히 멋있었어…!"
"그래, 고맙다. 너도 멋지더라."
의상을 갈아입은 선아현에게 막간을 이용해 대화를 빙자한 걱정을 듣고 있자니, 슬슬 시간이 다가왔다.
'단체곡 이어지고, 즉석 무대, VCR 좀 길게 가고….'
"7분 남았습니다!"
'앵콜 직전에 유닛.'
콘서트 중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훅훅 지나간다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그러니 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제대로 한다.'
마음을 굳힌 박문대는 다시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기 위해 복도를 이동했다.
그리고 마지막 류청우의 솔로 무대 후렴구에 맞춰 밖으로 나오며, 다시 무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사실, 몰입하지 않기도 힘든 환경이었다.
이제 제법 가짓수가 되는 타이틀곡 무대가 지나가고, 귀여운 즉석 무대가 지나가는 동안 관객들은 오랜만의 오프라인 경험에 흠뻑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들 알았다.
VOD를 통해 복습까지 마친 지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제 콘서트는 완연히 후반부였다.
그러니 대히트한 테스타의 이번 리얼리티 끝에 홍보까지 붙인 '유닛 무대'가 곧 나올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세트 리스트 변동 별로 없었지!'
'역시 유닛 무대 좀 공을 들인 것 같은데…'
특히 지난번 콘서트와 중복된 VCR이 나오는 순간에는, 흥분 속에서도 마치 휴식 시간 마냥 팽팽 머릿속에 계산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유닛 무대는 적절한 시기에 등장했다.
[Falling- 떨어지는 가을별처럼, 네게 fall, fall, Fallen.]
처음은 선아현과 류청우.
별로 경험한 적 없는 조합에 관객 들은 신선해하며 무대를 관람했다.
둘은 유명 남성 아이돌 선배인 티 홀릭의 데뷔곡을 산뜻하게 소화했다.
'오∼ 좋다!'
박문대 팬인 대학원생의 평이었다.
다음은 배세진과 이세진, 그리고 김래빈의 무대.
[널 노려 내 Target, 난 안 놓쳐 my enemy.]
히트맨이라는 강렬한 컨셉의 여성 아이돌 곡을 가져와서 적절히 파트를 분배했다.
'멋진데?'
역시, 박문대를 제외하면 일반인의 감성을 가진 대학원생은 적절히 호평을 내렸다.
두 유닛 무대는 모두 첫번째 콘서트 때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더 대형 공연다워졌다.
덕분에 저절로 등에 힘을 넣었다.
'이제 문대가 남았다는 거지…!'
앞선 두 무대가 훌륭했던 만큼, 과연 피날레를 맡은 박문대와 차유진이 어떤 무대를 준비했을지 기대가 부풀었다.
'SNS에서도 다들 기대했고!'
좀 더 물밑을 들여다보면 손톱을 물어뜯을 기세로 걱정하는 의견도 넉넉했으나, 대학원생은 아직 그 정도로 인터넷과 친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저 기대 100%의 상태로 마지막 유닛 무대를 접하게 되었다.
[….]
전 무대가 끝나고, 전광판에 짧은 영상이 흐르며 어두워진 무대 위.
땡-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울리며, 갑작스럽게 조명이 돌아왔다.
흑백 무대 위에는 댄서 여덟 명과 함께 각 잡힌 안무 대형을 갖추고 있는 키 큰 남성의 인영이 보였다.
차유진이었다.
'문대는…?'
대학원생의 생각이 문장으로 완성 되기도 전에, 음악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본 팝송의 멜로디였다.
빠밤밤밤밤!
-Listen!
No matter how hard
I think about it,
I can not hold it
경쾌하고 날렵한 일렉트릭 스윙 사운드 위로 댄서를 이끌고 차유진이 동작을 시작했다.
그 많은 사람 중 본인 혼자 검은 셔츠에 하네스부터 쥬얼리 체인까지 전부 빈틈없이 챙겨입은 모습이, 누가 봐도 솔로 가수의 모습이었다.
-Why Why∼
are you not a monster?
차유진은 화려했다.
반짝이는 조명과 경쾌한 목소리, 그리고 배경에서 터지는 글리터 효과까지 안무의 일부로 사용하는 모습은 입이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차유진은 무대를 신들린 것처럼 즐기고 있었다.
—Umm Umm Umm∼
비명 같은 환성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정중앙에서 벗어나 성큼성큼 왼편으로 걸어 나오는 빈틈 즈음에야, 대학원생도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래서 문대는?'
그러나 차유진은 자비 없이 후렴에 들어갔다.
후크송 형태인 곡 덕에 빠르게 네 번이나 반복되는 아이코닉한 파트였다.
-Monster, monster
you got me so
I grabbed you
bebe, babe
차유진이 댄서들 사이에서 더없이 복잡한 안무 동작을 홀로 가볍고 쫀득하게 살렸다.
시선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bebe, babe!
날렵하게 차오르는 동작 후, 차유진이 검지로 입을 그으며 웃었다.
"와…."
박문대의 팬까지 반사적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토록 인상적인 첫 번째 후렴의 마무리 순간.
갑자기 반주가 바뀌었다.
우우웅-!
'어?'
지극히 현대적인 전자악기를 사용하던 세련된 편곡이 먹히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에 과격한 밴드 오케스트라가 들이닥쳤다.
"…?!"
"…?"
관객석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전.
무대 중앙에 번뜩이는 찬란한 빛과 함께 배경이 열렸다.
"…!"
그리고 거대한 푸른 융단 구조물 위 옥좌 같은 황금 의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웅장한 의자 위에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니트가 눈에 띄는 교복을 입은, 안경 쓴 박문대였다.
'이게 뭐야?'
박문대는 천연덕스럽게 고뇌하는 얼굴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래,
생각만 해도
더 이상은 널
견딜 수 없어
한국어로 번안된 팝송의 가사였다.
박문대는 맑고 뚜렷한 목소리로 곡을 끌고 나갔다. 어딘지 평소보다 조금 과장되고, 감정적으로 들리는….
'아니, 잠깐만.'
푹 빠질 뻔했던 대학원생은, 박문대의 이 편곡도 제법 귀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번안된 게 아니었다.
'…이거 뮤지컬이잖아!'
그렇다.
이 팝송, 'Monster Baby'는 해당 가수의 곡들을 모아 만들어진 모 뮤지컬의 유명 넘버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람
같지도 않아, 넌!
박문대는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방만하게 의자에 앉아 노래를 계속했다.
괴상한 17세기 성에서 조난당해 맛이 간 현대 학생 역할이 부르는 곡을 소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 우우, 우우우∼
박문대의 주변에는 요란한 근대 차림의 인영들이 등장하더니, 춤을 추며 코러스를 넣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뮤지컬 앙상블이었다.
덕분에 배경을 아는 소수의 사람이든 아니든, 관객들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뮤지컬 장면을 재현 중이라는 것을.
'헐.'
같은 곡을 정반대의 형태로 다짜고짜 보여주는 무대였으나, 박력이 대단한 탓에 관객들은 당황을 잊고 말려들어 갔다.
-몬스터, 몬스터
날 잡아채고
끌어당겨
그래, 그렇게!
박문대가 거대한 황금 의자 위에서 안무를 하면서도, 구조물 자체는 앙상블의 손에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사와 스토리를 맞췄다.
-내내, 그렇게!
색색의 조명과 깃털,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현란한 시대극 요소가 교차하는 가운데, 박문대의 보컬이 공연장을 쭉 갈랐다.
폭발적이고 극적인 뮤지컬의 맛이었다.
"와아아아!"
일단 관객들은 반사적으로 또 박수를 쳤다. 소름이 쫙 돋는 퀄리티였으니까.
그러나 유닛 무대라고 할 건 없었다.
'거의 그냥… 단독무대 대결?'
'유닛은 아닌뎅.'
이 콘서트 고양감에서 벗어나는 순간 알음알음 이야기가 나올 것이란 예측을 몇몇이 할 찰나.
지이잉!
간주가 떨리더니, 무대 왼편의 꺼진 조명으로부터 흑백의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인영이 우르르 중앙 무대로 밀고 들어왔다.
"어?"
차유진과 댄서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자와 융단 구조물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던 박문대와 앙상블들을 오른쪽으로 쭉 밀어버렸 다!
"…?"
뮤지컬 세트는 주르륵 넘어지듯이 밀려났다….
그리고.
빠밤밤밤- 빠바밤!
다시 들어온 신디사이저와 브라스에 맞춰서 차유진과 댄서들이 이번에는 막대를 꺼내 들었다.
막대들은 움직임에 따라 연결되고 해체되며, 안무의 강약과 화려함을 더했다.
"우와."
막대에서 야광색이 번뜩이는 순간, 허공에서 수많은 빛이 몰려들어 차유진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야광 드론 퍼포먼스였다.
차유진은 삐딱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드론을 살아 있는 것처럼 다뤘다.
-bebe, babe!
그렇게 다시 한번 후렴이 거창히 마무리되는 순간.
이번에는 틈도 없이 박문대 쪽에서 순식간에 무대 중앙으로 밀고 들어왔다.
황금 의자에 올라서 팔짱을 낀 박문대는 질 수 없다는 듯 거대한 샹들리에를 떡하니 구조물에 달아놨다.
그리고 선전포고를 하듯이 앙상블과 고음의 화음을 척 넣었다.
-오늘도 생각했지
더는 참아줄 수 없어!
가사가 절묘했다. 샹들리에가 빛을 난사하며 댄서들의 안구를 괴롭혔다.
'미친!'
이제 관객들은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쩔 줄 몰라서 웃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무대를 즐기는 편안함과 기대가 있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다소 메타적인 유머러스함이 뻔뻔하게 무대에서 이 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차유진과 박문대가 워낙 천연덕스러웠기 때문에 무대는 머쓱한 대신 몹시 즐거워졌다.
Drrrrr-!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둘은 결국 마지막 후렴구에선 말 없는 기 싸움을 하며 함께 돌출 무대로 뛰어나와 무대를 하기 시작했다.
신디 사운드와 오케스트라가 합쳐지며 곡은 페스티발이나 카니발에 쓰일 만큼 요란하고 웅장해졌다.
-Monster, Monster
bebe, babe!
잡아채고 끌어당겨
그래 그렇게!
원어와 번안 가사가 섞였다. 앙상블 사이를 댄서들이 치고 들어갔다.
차유진이 황금 의자에 올라가서 창법을 바꿔 노래를 부르고 박문대가 드론과 춤을 췄다.
서로의 영역을 거침없이 침범하는 폭주감이 무대를 달궜다.
-Monster, 그렇게!
피잉!
온갖 색의 폭죽이 터지며 화음과 안무가 절정을 찍었다.
무대의 이질적인 두 요소들은 서로의 파괴적 느낌을 더 과격히 살리며 엔딩을 맞이했다.
우하아아악!
폭죽과 일렉 반주 소리 너머, 사람들의 비명이 공연의 일부처럼 현장을 뒤흔들었다.
"이야아아아!"
대학원생도 자기도 모르게 응원봉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박수를 쳤다.
한 시간 후 귀갓길에서, 이 무대가 겨우 4분 20초짜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하게 될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대박이요! 대박이요!"
"알았다."
차유진은 VCR 내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대단히 방금 무대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해는 됐다. 나도 좀 놀랐다.
'이게 되네.'
어지간히 낯짝이 두껍지 않고서야 몰입하기 어려운 구성이었는데, 숙연함 한 점 못 느꼈다.
'꽝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S등급 값은 했나.'
도리어 기분 같아선 VCR이고 나발이고 무대를 쉬지 않고 계속하고 싶은….
"또 해요! 백 번 해요! 대박!"
물론 저 정도는 아니다. 놔라.
"그래. 일단 대형 정리하자."
"네!"
이런 뜬금없는 체력 소모는 안 된다. 오늘 밤에는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어야 했다.
이 유닛 무대 도전 말고도 오늘의 이벤트가 남아 있으니까.
'…이제 정말 끝인가.'
콘서트 종료까지 앞으로 약 30분.
상태이상 해제가 정말로 코앞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2화]
앵콜 콘서트 첫날은 예정대로 별문제 없이 성황리에 끝났다.
유닛 무대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제발 음원 좀ㅠㅠㅠㅠㅠㅠ
-이 둘을 같은 팀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아주사의 유일한 장점이다 이제 폐지해
-박문대 성대 차유진 춤 이 조합 케이팝 명예의 전당에 올려야 하는 것 아닌지 (주접입니다 지나가세요
-차고영 덥앱에서 맨날 문대형 유닛 떠들더니 이유를 알겠네 우리 애 천재네
간혹 다른 유닛 무대랑 비교하려는 어그로도 튀어나왔으나 그다지 통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1, 2위 출신이 유닛인 덕인 것 같다.
조합이 조합이다 보니 다른 유닛 팬들 쪽에서도 괜한 시비 만들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디든 쪽수 많은 쪽은 건들기 껄끄럽지.'
애초에 유닛 무대들이 전체적으로 퀄리티가 좋았으니까 '테스타는 어느 조합이든 잘한다' 같은 이야기로 뭉뚱그리더라고.
그래서 그냥 무대 하나하나 알아서 좋아하는 분위기로 팬 커뮤니티는 화목했다.
-오늘 너무 좋다
-진짜 오프닝 VCR 나올 때부터 벅차서 눈물이 줄줄
-테스타 디너쇼까지 가는 거다 약속 (콘서트 단체 사진)
박문대와 차유진의 개인 팬들의 기류도 출범 이후 최고조 수준으로 괜찮으니 그냥 축제나 다름없었다.
이 말뜻은, 관계자 중 긴장한 건 나뿐이라는 뜻이다.
"형! 내일 나 샹들리에 흔들어요!"
"그래. 잘 자라."
나는 다섯 번쯤 들은 애드리브 제안에 또 오케이 사인을 주고 침실을 나왔다.
"어디 가요?"
"반신욕."
그리고 거실을 지나, 욕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의심 안 사고 혼자 한두 시간 있을 만한 장소가 여기뿐이라 별 수 없다.
달칵.
"후."
나는 욕조에 걸터앉았다.
…사실, 콘서트가 끝나는 순간 이미 팝업이 뜨는 걸 봤다.
비하인드컷 인터뷰 등 간단한 야간 스케줄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취침 시간까지 확인을 미뤄둔 것뿐이다.
'물론, 지금 팝업 확인한다고 바로 뭘 할 필요는 없지만.'
아직 기간이 남았으니 좀 더 두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그래도 어쨌든,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나도 더 미뤄두기가 어렵다.
보자.
'상태창, 알림.'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아까 스치듯 존재만 확인한 팝업이 도로 떴다.
[성공적 만남!]
당신은 관객 '200,000명'과의 만남에 성공했습니다!
!제한시간 : 충족 (성공)
!상태이상 :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제거!
: '선택지' 확인 Click!
우선… 성공은 확실하다.
"하…."
어쩐지 긴장이 쭉 빠지는군. 나는 묘한 탈력감에 관자놀이를 눌렀다.
남은 건 그놈의 망할 진실 확인… 잠깐.
"…!"
: '선택지' 확인 Click!
키워드가 진실이 아니다.
'선택지'?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당연하지만 곧바로 연상되는 내용이 있었다.
'…본래 몸과 '박문대' 몸 중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마지막 상태이상 클리어 보상으로 가장 그럴싸하고 적당한 이야기 아닌가.
"…."
다만 너무 뜬금없이 좋았다.
머리가 식는다.
'이제 와서 제시하긴 늦지 않았나.'
이 괴상한 시스템은 내가 박문대의 몸에 들어온 이후 게임 스타일을 충실히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이런 당근을 끝까지 제시하지 않다가 깜짝 보상으로 준다는 건 이상했다.
보통 게임이라면, 무조건 시작 지점에서 상태이상 때리기 전에 미끼로 이것부터 던졌을 것이다.
'아니, 게임이 아니어도… 구조나 효율을 생각하면 그게 맞아.'
너 뒈진다고 채찍만 갈기는 것보다 엔딩에 확실한 보상이 있는 편이 희망 고문하기 딱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른 가설은?'
몸을 고르는 게 아니라면 뭐가 그럴싸할지 머리를 굴려봤지만, 특별히 '이거다' 싶은 가설은 떠오르지 않았다.
"…후우."
진짜 반신욕을 해야 하게 생겼다. 머리가 지근거리는군.
짧게 술 생각이 들었으나 무시하고 그냥 욕실에서 나왔다.
'내일, 뭐든 내일 고려한다.'
일단 마지막 콘서트는 잘 끝내야 했다. 컨디션에 영향 줄 건 머리에서 지우는 게 맞다.
'잠이나 자자.'
그대로 침실로 복귀하려던 찰나, 부엌에서 웬 놈이 손을 흔들었다.
"음? 문대 안 자?"
큰세진이다.
"반신욕."
"아∼ 좋지."
놈은 히죽 웃더니 들고 있던 병에 서 차가운 보리차를 한 잔 더 따라 내밀었다.
"한 잔? 엄마가 어제 주셨는데."
색 때문인지 묘하게 맥주가 생각났다.
나는 군말 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큰 세진이 웃는 낯 그대로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문대 유닛 무대 대단하던데? 유진이랑도 진짜 잘했더라∼ 역시 박문대!"
다만 내용은 뼈가 있다.
'은근히 뉘앙스가 있는데.'
본인의 차유진 유닛 경험을 반추해서 말하나.
나는 당시를 떠올렸다.
-그냥, 무대 자체를 잘 뽑아. 너랑 차유진이랑 누가 더 잘하는지 각 잡고 비교할 마음 자체가 안 들게.
당시 내가 이런 류의 충고를 했던 것 같은데, 그래놓고 나는 차유진과 정면 승부 스타일의 무대를 해버렸으니 신경 쓰일 법도 했다.
그러나 이건 그냥 모양새의 문제였다.
"…강조할 점을 그나마 맞게 고른 거지."
나는 냉차를 들이켜며, 무덤덤이 중얼거렸다.
"뮤지컬 아니었으면 안 통했어. 노래를 어떻게 부르든."
"…."
결국 네 유닛 무대 때랑 다를 바 없이, 형식을 잘 잡았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특성빨도 있긴 하지만 그것까지 설명할 순 없지.'
대신 이놈에게 말을 마무리할 기회나 주자.
"너 유닛 무대도 좋더라. 그림자 퍼포먼스도 딱 맞아서 멋지고."
"…!"
큰세진의 얼굴에 약간 민망해하는 것 같은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본인도 아마 머리론 알면서 무심코 말해본 심정은 알겠으니, 이 정도로 할까.
놈은 너스레를 떨며 냉큼 기회를 받았다.
"…하하. 열심히 했지. 실전에서 잘 나와서 좋네∼"
"그러게."
배세진이 혼이 탈탈 털리며 연습하던데, 만약 무대가 망했다면 널 죽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눈치 없고 일 열심히 하는 김래빈이 사이에 껴서 잘 진행된 것 같다만.'
큰세진이 빙긋 웃었다.
"다음에는 문대랑도 같이해 봐야지! 우리 데뷔하고 나선 유닛 한 번도 같이 안 해봤잖아∼"
겹치는 포지션이 전무한데 굳이?
아마 이놈도 마무리 덕담 삼아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
"문대문대, 방금 포지션도 다른데 굳이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
"…!"
"하하, 맞았나 봐∼"
"…아니."
이 새끼 어떻게 알았냐.
큰세진은 소리를 죽여 폭소했다가, 곧 표정을 잡고 말했다.
"흠흠, 그래도 기회가 오면 우리 잘 할 걸?"
"그렇겠지."
"좋아∼ 그 자세지!"
큰세진은 보리차를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어 말했다.
"…너한테는 참 고마운 게 많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별말씀을."
"넌 칭찬만 하면 그 소리 하더라!"
큰세진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웃기고 있군.
이놈도 오랜만에 한국 콘서트라 감성적으로 변한 모양이다.
'…어쨌든, 좀 낫긴 하군.'
이놈이 의도한 건 없지만, 무대 이야기를 하니까 쓸데없는 생각이 안 들어서 편하긴 했다.
"그럼 나 들어간다."
"그래. 내일도 우리 잘하자∼"
나는 그대로 취침했다.
변수는 없었다, 아직까진.
그리고 다음 날.
와아아아아!
"감사합니다!"
앵콜 콘서트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으악! 옷이 붙어요!"
"일단 얘들아, 물건부터 챙기고…."
"다, 단체 사진 찍어야 한다는데…?"
거사가 끝나고 남은 자잘한 일들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뒤풀이도 숙소에서 멤버끼리 간단히 배달 음식이나 먹고 끝났다. 투어 끝나고 한국 들어올 시점에서 한 번 거하게 했기 때문이다.
"술 안 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요."
나는 무알콜 맥주를 할당받았다. 취한 놈에게 술을 뺏기니 상당히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눈치를 봐서 바람 쐬는 척 베란다로 나왔다.
"…후우. 상태창 알림."
팟. 다시 어제 본 팝업이 돌아왔다.
자, 이제 시간이 됐다.
오늘 이후로 컴백까지 그룹 공식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래 봤자 한 달 정도의 텀이지만, 그래도 내가 뭘 까보려면 이 사이가 적당하다는 뜻이다. 여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하나 떠오른 게 있다.
'분명 이 '선택지' 항목을 클릭하면 각 선택지를 소개하는 팝업이 또 뜰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UI를 생각하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그럼 빨리 알고 고민하는 게 낫다.'
나는 침을 삼킨 뒤, 손을 들어 '선택지'를 눌렀다. 아무 촉감 없이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 위로 새 팝업이 떴다.
[선택지]
: '진실' 확인 Click!
: '코인' 획득 Click!
※중복 선택 불가
"…!"
몸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역시 아니었다. 그리고 둘 중 하나는… 낯익은 놈이다.
'진실'.
이거야 뭐 지금까지 봐온 그 지랄 맞은 과거 알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지의 의미는 결국 밑의 새 옵션에 있었다.
'코인'.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전혀 직관적이지 않은 단어에 저절로 머리가 회전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화폐.
'무슨 상점이라도 열리나.'
이것도 웹소설에서 많이 본 설정이군. 나 혼자만 상태창 상점.
그럴싸하지만 너무 추상적이었다. 그 외에는 가상화폐 따위의 이미지만 떠올랐다.
"…망할."
끝까지 애매하게 구는군. 나는 선택지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실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긴 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는 선택지에 바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코인' 획득!]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진실은… 너무 리스크가 커.'
뭘 보여줄지 모르니까.
당장 팝업의 묘사만 봐도 '진실'은 확인이고 '코인'은 획득이다. 코인이 무엇이든 소유하는 것이니 꽝이어도 현상 유지 아닌가.
'이게 맞다.'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팝업을 보았다.
이제 이 코인으로 뭘 할지 설명이 나올 것이라는, 상식적인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뜬 팝업은… 예상과 달리, 이미 익숙한 형태였다.
[돌발!]
상태이상 : '스타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뭐?"
X 같은 상태이상 알림이 또 뜬 것 이다.
'이 개새끼들이 진짜…!'
정신이 아득해진다. X발 마지막은 무슨! 대체 언제까지 이 지랄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한편에서는, 묘한 기분이 올라왔다.
안도감이었다.
'이것도… 현상 유지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적어도 1년은 지금까지처럼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니까.
당장 내일만 돼도 미친 생각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유예가 주는 이상한 편안함이 있었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다는.
"아니."
나는 그 느낌에 저항하기 위해 이를 악물며 팝업을 쏘아보았다.
'대체 목적이 뭐냐.'
그때였다.
갑자기… 팝업이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
(줄긋기)상태이상 : '스타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그리고 내용이 줄이 쳐지며 사라졌다.
"뭐야."
끝이 아니었다.
띠링!
상태이상 : '1위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새 팝업이 떴다. 내용은 이전에 한 번 보았던 상태이상이다.
"무슨,"
그리고 이것도 끝은 아니었다.
(줄긋기)'1위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줄긋기)'대상이 아니면 죽음을' 발생!
(줄긋기)'공연이 아니면 죽음을' 발생!
(줄긋기)'최고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줄긋기)'데뷔가 아니면 죽음을' 발생!
'X발 뭐야.'
팝업의 상태이상은 끝없이 이름에 줄이 쳐지고 삭제되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해킹이라도 한 것처럼 수없이 깜빡이며 새 이름으로 갱신되었다.
그 짓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띠리리리링!
[돌발!]
상태이상 :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발생!
겨우 팝업이 갱신을 멈췄다.
바로 직전의 상태이상 명과 똑같은 이름을 달고.
다만, 내용 설명이 달랐다.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 정해진 기간 내로 40만 명 이상의 관객과 만나지 못할 시, '박문대'의 사망
달성 인원 : 0 / 400,000
20만 명이 아니라 40만 명.
인원이 두 배가 됐다.
그리고 설명에 추가된 점이 있다. 사망에 구체적인 인명이 붙었다.
'…그냥 사망이 아니라, 박문대의 사망.'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코인 이 지랄부터 지금 이 버그 난 것 같은 상태창까지 대체 상황을 파악할 구석이 보이질 않았다.
머리를 굴려도 소용이 없다. 단서가 없는 거니까.
"…."
나는 베란다 한편에 앉아서 머리를 식혔다. 담배가 좀 당기긴 했지만, 견딜만 했다.
"후."
그리고 몸이 차가워질 때쯤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두 가지가 확실하다.'
첫 번째는 1년 내로 관객 40만 명 채우기.
이건 오히려 괜찮다. 당장 2달 투어로 20만 명을 채웠다.
올해 하반기 투어는 규모를 더 키웠으니, 그거 예정만 봐도 40만 명 은 달성할 수 있다.
'행사까지 끼우면 더 너끈하지.'
그러니 이건 일단 넘어가자.
두 번째는… 이 사태에 대해 뭐라도 물어볼 만한 놈이 한 놈 있기는 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새끼가 알려준 게 틀리기까지 했으니 추궁할 명분도 있다.
"…X발."
썩 내키는 짓은 아니지만, 옵션이 없으니 별 수 없지.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강아지 사진이 첨부된 MMS 문자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짧게 끊겼다.
-네.
대충 짐작했겠지만, 청려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3화]
나는 청려가 받은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통화됩니까?"
-네. 미션에 문제 생겼나요?
"…."
-연락할 만한 이유가 그것뿐인 것 같아서.
앵콜 콘서트 끝나자마자 연락하는 건 타이밍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하도 예상외의 상황들이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고려가 부족했다.
'그래도 단서를 구걸하는 느낌을 줄 순 없지.'
이건 무조건 추궁하는 말부터 나와야 분위기를 잡는다. 나는 목을 꺾었다.
"미션 자체에는 문제없었죠."
-그렇구나.
"그런데 미션이 또 생겼는데?"
-….
"마지막이 아니더라고. 일부러 거짓말한 거였습니까?"
-아니요.
전화기 너머의 대답은 고분고분했다. 웃음기도 없었다.
개가 끙끙대는 소리가 잠깐 작게 울리는 것 같더니, 곧 조용히 말이 이어졌다.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괜 찮으면 시간 될 때 잠깐 보는 건 어떨까요? 전화는 누가 들을 수도 있고.
"전화로 하시는 게 낫겠는데요."
진짜 전화로 미주알고주알 떠들자는 게 아니라, 누가 듣는 게 내 대가리 깨지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는 뜻이다.
-불편하면 테스타 숙소에서 봐도 괜찮아요. 다른 생각은 없어요. …어차피 안 되는 걸 아니까.
음, 쓸데없는 소리 하거나 내빼면 녹음본으로 윽박지른 뒤에 캐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물론 이놈이 또 언제 눈깔이 돌아갈지는 장담 못 하니, 안전책은 당연히 만들어둘 생각이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는 장소와 시간을 잡은 뒤 베란다에서 나왔다.
마침 근처에 있던 김래빈이 화들짝 놀랐다.
"형! 35분째 자리를 비우셔서 혹시 몰래 음주하러 가신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만, 베란다에 계셨습니까?"
"그래."
이놈도 좀 취했군.
나는 다른 놈들이 눈치채고 말을 걸기 전에 놈의 옆에 앉았다.
"래빈아."
"예."
"내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경청하겠습니다!"
본인에게 지적할 것이 있다고 착각 했는지 김래빈이 빠릿해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을 한번 내저은 뒤 설명을 이었다.
"내가 말이야…."
그리고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갔다.
며칠 뒤.
"괜찮네."
나는 내가 제안하고 놈이 통째로 대절한 시내 구석의 야외 카페에 먼저 도착했다.
외부에서 관찰하긴 힘들지만, 혹시라도 비명이 들리면 근처의 누군가가 곧바로 신고할 만한 장소다. CCTV도 충분하고.
"일찍 오셨네요."
그리고 몇 분 후 진입 펜스 앞에 나타난 청려의 옆에는… 딱 맞는 가슴 줄을 찬 개가 헥헥대고 있었다.
"멍!"
"…."
혹시 모른다고 생각은 했으나… 진짜 이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데려오는 편이 변명에 좋을 것 같아서. 괜찮죠?"
"…상관은 없는데."
"하하, 쓰다듬어도 괜찮아요. 사람을 좋아하는 애라."
청려는 빙긋 웃더니 개를 잡아들어 안은 채로 이동했다. 개는 세차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속도 좋군.'
잘 먹이는지 토실토실해 보이긴 한다.
"카페 주인이 안에 있는 음식은 원하는 대로 먹어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편하게 들어요."
이 상황에서 그게 목구멍에 넘어갈 리가 있나.
나는 탁자에 앉아 덤덤히 대답했다.
"생각 없고, 일단 이야기부터."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미션이 안 끝났다… 부터 시작하면 될까."
"그 전에 먼저 대답해야 하는 게 있을 텐데."
"음?"
나는 계속 의문을 가졌으나, 이놈이 대답할 것 같지 않아 보류해 뒀던 질문을 던졌다.
"넌 어떻게 미션 횟수를 확신했지?"
"…."
이놈은 처음부터 내게 확신을 가진 채로 총 상태이상 개수를 말했었다.
-내가 계산하기로… 기본 한 번에, 돌아온 연(年)수만큼 더해서 주어지는 것 같았거든요. 그거.
"그 돌아온 연수 더하기 1회라는 공식이 어디서 도출된 건지 알아야겠는데. 틀렸으니까."
"아, 그거."
청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개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폭탄 발언을 했다.
"우리 같은 사람한테 사례를 수집했는데."
"…!"
"아, 지금은 없어요. 죽었거든요."
놈은 별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무슨 병이었는데… 아무튼."
나는 양손을 움켜쥐었다. 뇌가 얼 얼했다.
다른 놈이 있었다고?
"어떻게 만난 거지."
"아, 이건 약간 창피한 이야기인데… 다섯 번째였던가? 최대한 빨리 데뷔해 보려고 괜한 말을 하고 다녔던 적이 있거든요."
청려가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래를 안다고 여기저기 방송에서 떠들었어요."
"…!"
"그런데 분야가 달라서 그런가, 미션이 클리어되지 않아서… 음, 다음부터는 다시 제대로 했어요. 생각하니까 재밌네."
이 새끼 어투가 변하고 있다.
미친놈에게 쓸데없이 과거에 푹 젖을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나는 묘하게 변하려는 분위기를 끊었다.
"어쨌든, 그래서?"
"그래서… 어떤 노인이 자기도 미래에서 왔었다, 그러면서 접근했었는데요."
청려는 개에서 손을 뗐다.
"진짜인지 확인 좀 거치고… 그런 뒤에 맞춰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뭘."
"그 사람이 아는 미래가 끝나는 시점이, 내가 재시작하는 과거 시점하고 딱 맞더라고."
"…!"
"그러니까… 동 시간대에 한 명만 존재하는 것 같던데요, 미래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몇 년, 그리고 그다음으로 내가 몇 년."
"…."
"이제는 문대 씨."
나는 그제야 이놈이 내게 떠들었던 말을 이해했다.
-지금이 딱 좋을 때잖아요. 주인공으로 사는 기분일 텐데.
미래를 아는 딱 그 시기를 점유하는 게 한 사람뿐이어서였나.
'…그럼 대체 뭐가 기준이지?'
이 새끼랑 내가 무슨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죽은 노인도 연예계 관련 직종 종사자였나?
별 의문이 다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이걸 다 캐묻긴 상황이 오묘했다.
이 와중에도 청려는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내가 재시작해 본 적이 없네?"
"…."
"한 번쯤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재시작해서 그 사람도 과거로 돌아오는지 확인해 보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그럼 우리 괜한 고생 안 했을 텐데. 하하!"
"아니."
나는 일부러 맥을 끊었다.
"아니야?"
"어. 그거 확인하겠답시고 죽는 것 보단 좀 맞는 게 낫지."
"…음. 뭐, 그래요."
청려의 기세가 죽었다.
'미치겠군.'
나는 내 손을 핥기 시작한 개의 털에 놈의 침을 닦다가, 문득 다른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럼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걸 바로 알아차린 것도."
"맞아요. 시기가 딱 맞아떨어져서."
청려가 웃었다.
"혹시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미래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갑자기 일반인 출신이 오디션에 나와서 1등을 해버리더라고요."
"…!"
"모두가 망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대단히 성공한 프로그램에서… 아주 결정적인 타이밍에, 가정사를 터뜨려서 1등을 잡았으니까."
"…."
우연과 상태창의 효과가 톡톡히 들어간 결과였으나, 청려는 약간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몇 번 돌린 줄 알았지? 당연히."
"…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 떠볼 만 한 후보지처럼 보이긴 했다.
"그런데 설마 다른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음, 사실 미션이 또 생겼다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순간, 머릿속에 가설 하나가 지나갔다.
"…내가 '박문대'가 아니라서."
"네."
남의 몸에 들어왔으니 그냥 과거로 돌아온 케이스들보다 추가 패널티가 붙었다는 뜻이다.
'바란 적도 없는데 미쳐 돌아가는군.'
나는 미간을 눌렀다.
…이 가설이 맞다면, 이번 상태이 상에서 굳이 사망 대상을 '박문대'로 지정한 것도 제법 연관성이 느껴진다.
이제부터는 상태이상을 못 깨면 박문대 몸을 계속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다는 신호 같지 않은가.
'X발.'
…한 번으로 끝일까?
모르겠다. 그것 외에도 상태창 오류부터 코인까지 별 변칙 사항이 다 있어서 말이다.
'심지어 코인은 확인도 안 돼.'
수령했다는 팝업 이후에 소식이 없다.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인벤토리'까지 육성으로 외쳐봤으나 변화는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도 주워들은 차유진에게 '앨범 재고 남았어요?' 같은 소리만 들었다.
'망할.'
생각하니 낯이 다 뜨거워진다. 나는 머리를 비벼 오는 개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상태창 있는 놈은 없나.'
앞에 앉은 새끼에게 '상태창'을 한 번 외쳐보라고 말해보고 싶어지는군.
물론 그 충동을 실행하는 대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에 하나 상태창이 진짜 떠도 문제고, 안 떠도 문제다.'
괜히 더 자극하지 말자. 소정의 목표는 달성했으니 최대한 자극을 줄이고, 다음에 더 캐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개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끼잉!"
일어나지 말라는 뜻이냐.
"콩이가 더 놀고 싶은가 보네요."
"…콩이?"
"네."
생각보다 토종다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개와는 어울리는데 저놈이 붙였다니 좀 징그럽군.
그 순간, 청려가 마치 강조하는 것처럼 말했다.
"원래 이름이에요."
"…."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래."
나는 아마 꽤 오래전부터 콩이라는 이름을 썼을 놈의 머리를 툭툭 몇 번 더 쓰다듬어 준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더 놀다 가지."
"됐다."
기가 쭉 빨린 기분이었다. 이놈과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입구 펜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를 안아 들고 따라오던 놈은 입구에서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러고 보니, 문대 씨도 원래 이름이 있겠네요."
"…!"
"설마 동명이인이었나? 하하."
나는 거의 무심코 대답했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내 기록은 찾아봐도 없었으니 말이다.
"류건우."
"음."
놈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박문대보다 낫네요."
"…그렇긴 하지."
차마 부정할 수가 없군.
그래도 박문대도 나름대로… 듣다 보면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팬들도 결국 유니크하다고 좋아하는 것 같던데.'
어쨌든, 나는 그대로 야외 카페의 펜스를 넘어 귀가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개가 제법 구슬프게 하울링하는 소리가 코너를 돌 때까지 들렸다.
나는 목 뒤를 주물렀다.
'소득이 없진 않았어.'
왜 상태이상이 또 떴는지에 대한 가설이라도 잡았으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확실히 머리가 하나 더 있으니 결과를 도출하기 편하긴 하다. 이제 저놈도 쓸데없는 블러핑을 안 넣고.
하지만 이 괴상한 일이 다른 놈들에게도 연달아 일어났었다는 말을 들으니 더 괴랄했다.
'왜 나만 상태창이 뜨는 거지.'
진짜로 무슨 웹소설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군.
그때, 주머니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런.'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김래빈이었다.
"미안. 확인이 늦었다.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
-굉장히 빠르시군요… 1시간도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어제 김래빈과 한 대화를 회상했다.
-내가 쉬는 시간에 외출할 건데, 30분 간격으로 나한테 문자 좀 보내줄 수 있을까. 길진 않을 거라… 많아도 대여섯 번만 해주면 될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지난번에 웬 미친놈하고 시비 붙었던 게 생각나서. 좀 대비해 둘까 싶다. 답장 안 오면 전화하고, 전화까지 안 받으면 회사에 신고해 버려.
-그렇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일종의 위급상황 알림벨 알바다.
김래빈은 일단 언질만 주면 입이 무겁고 맡은 일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드무니 앞으로도 종종 써먹을 생각이다.
'돌아가면 간식이라도 해줘야 하나.'
무보수로 부려먹긴 힘드니 당근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 너머로 소음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앗, 야!
-형! 빨리빨리!
-저리 가 차유진!
-중요해! 김래빈이 저리 가!
차유진이군. 잘 알겠다.
"금방 들어간다. 조금 뒤에 보자."
내가 침착하게 통화를 종료하려던 순간이었다.
-문대 형! 우리 미국 프로 나왔어요!
"…?"
-우리 리얼리티 쇼!
굉장히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참고로, 자세한 정황을 확인한 뒤에는 더 황당해졌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4화]
테스타의 워킹 홀리데이 는 위튜브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해외 KPOP 팬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생겼었다.
-그러니까 호떡이라 외치면 테스타의 미소를 살 수 있는 가게라는 거지? (우는 이모티콘)
-정말 잘생긴 청년이라고 말하는 손님을 볼 때마다 '당연하죠'라고 외치고 있는 러뷰어
-익명: 아시안의 정교함은 젓가락 빨이지ㅋㅋ
-래빈: 30g을 손으로 맞춤
-익명: 아무도 청우의 친절함은 언급하지 않네 모두가 그의 '핫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어 (울면서 웃는 이모티콘)
게임 콜라보곡에 이어 행차에서 눈도장을 찍었던 테스타가 이번 리얼리티로 해외팬들의 유입 창구를 활짝 열어줬다는 평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제적 메인스트림에 끼어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원래 이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생긴 정도지.
그래서 미국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말에 무슨 소린가 하면서도, 호떡이 바이럴을 탔나 싶었다만….
확인하고 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사소한 부분이 주목을 받았더라.
"이거, 이거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차유진이 들이민 것은 SNS에서 영어 자막이 붙어 공유를 타고 있던 짧은 동영상이었다.
바로 리얼리티 시즌 2에서 차유진의 어머님과 식사를 나온 장면이었다.
팀을 나눠서 역할을 분담한 덕에 차유진과 나, 류청우 셋이 이 식사에 동행했었는데… 식사 구성이 상당히 독특했었다.
[추첨에 뽑혔헜거든! 너희와 같이 가면 좋겠구나]
바로 미국의 요리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식사 자리던 것이다.
우리 제작진은 신이 나서 현장 협상을 통해 몇 컷 따가긴 했는데, 솔직히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잠깐, 형 그거 안 익었어요.]
[그래?]
[어머, 익혀달라고 하자!]
류청우가 시킨 흰살생선 요리가 안 익어서 주방에 돌려보내자, 어마어마한 고함이 들렸기 때문이다.
[이 생선은 너무 차가워서 만진 내 손이 동상에 걸리겠다!]
[….]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어딜 가던 노선이 비슷한 모양이다.
아주사 때 망할 때마다 트레이너에게 면박당하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멋진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이 고스란히 요리사 프로그램 쪽에서도 방영되었다고 한다.
다만 오해가 있었다.
멤버들을 형제로 생각했더라고.
차유진 어머님이 신청하실 때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과 식사:)' 같은 문구를 쓰신 탓이었다.
덕분에 질책에 스토리가 생겼다.
[저 손님들은! 해외에서 근무하다가 어머니와 1년 만에 고향에서 식사를 하신댄다!]
[너희가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망치고 있어!]
[그만! 다 내 주방에서 나간다, 당장!]
심사위원이 이런 대사를 했더라.
게다가 언제 찍힌 건지, 주방의 소란을 들으면서도 덤덤한 우리의 얼굴까지 함께 화룡점정으로 송출되었다.
[옛날 생각난다.]
[그러게요.]
이 대사가 친절히 자막까지 붙어서.
그리고 이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주방 분위기와 대조되며 제법 웃겼던 모양이다.
일종의 동아시아 밈으로 미국 인터 넷에 잠깐 반짝 떴다고 한다.
-A-가 괜히 아시안 C가 아니지ㅋㅋ
같은 소리를 하며, '빡세게 사는 동아시아인에겐 미국 서바이벌은 일상인 거임ㅋ' 따위의 희화화 밈이 돈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테스타를 알고 있던 KPOP 팬들의 시야에도 금방 들어 갔겠지.
-맙소사 테스타잖아
-멍청이들아 쟤들은 '진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우승했다고ㅋㅋ
-'옛날 생각이 난다'는 말은 그들이 겪었던 비슷한 서바이벌 프로를 의미해! 세상에 이런 오해가 생기다니 (폭소하는 이모티콘)
-그들의 리얼리티쇼에서 해당 장면이 이미 방영되었어 (링크)
-문대가 훌륭한 요리사라 덜 익은 생선을 먼저 알아차리는 장면은 언제 봐도 재밌는 걸
-그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정말 정신 날아갈 룰이었어 그걸 이겨 낸 테스타가 정말 자랑스러워
이 소란도 미국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꽤 알려지게 되며, 재밌는 반전으로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논란으로 승화될 뻔했다는 게 절정이었다.
-또래의 아시아인들을 형제로 오해해버리는 게 일종의 인종차별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차후 차유진 어머님의 사연 때문에 생긴 오해라는 것이 잘 해명되었으나, 어쨌든 유머부터 논란까지 쭉 이슈를 타고 나니 제법 바이럴이 됐나 보다.
[최근 인터넷에서 유명한 스토리를 소개해 주는 코너죠!]
결국 미국에서 인터넷 가쉽을 다루는 뉴스 스타일 방송에도 짧게 보도된 것이다.
차유진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신기해요!"
"그러게."
사람이 별 우연으로도 다 입소문을 탈 수 있구나 싶다.
다만 이렇게까지 신날 일인가 싶긴 하다만, 모국어로 보는 입장에서는 더 웃기게 보일 수도 있겠지.
차유진은 흥얼흥얼 '바로 나'를 대 충 부르며 영어로 된 페이지를 탐방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문대문대, 보리차 더 있어∼ 형이 양보한다, 마셔도 돼!"
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됐어."
"헐, 우리 엄마의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
나는 결국 이를 악물고 보리차를 꺼냈다. 큰세진은 폭소했다.
'저거 진짜.'
좀 꼴 받긴 했지만, 어쨌든 이 낮에 우리가 다 숙소에서 뒹굴고 있어서 가능한 상황이긴 했다.
'…오랜만의 여유인데.'
그놈의 빌어먹을 '진실' 확인이 유예되니 이게 좋긴 했다. 모레부터 컴백 싱글 후반 작업만 공들이면 문제없을 것 같았다.
'곡도 거의 나왔고, 최종 수정만 좀 보면 되겠지.'
컨셉츄얼하게 힘준 다음 정규 앨범 전에 가볍게 팬 서비스 겸, 리얼리티로 올라온 폼 확인 겸 내는 싱글 이었다.
예정대로라면 활동 후반이 대학 축제 기간이랑 겹쳐서 상태이상 할당 량도 쏠쏠하게 당길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도대체 확실한 게 없는 이 지랄맞은 게임 시스템을 제외하면, 단기간의 미래는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당장 다음 날에 변수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바로 본부장 눈이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문제는 그놈의 미국 밈이었다.
당연하지만 대단한 공감을 불러일 으킬 만한 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밈은 금방 사그라들었으나, 계속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나는 정말 VTIC 뿐인 티카지만, 테스타에게도 관심이 생기는 걸.
-버닝 쉐프즈 가 외국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해서 그들의 프로그램을 찾아봤는데, 조회수가 천만을 넘어! (테스타 워킹 홀리데이 1화 캡처)
-이름이 테스타라고? 흥미롭군 KPOP을 검색하는 날이 올 줄이야 (폭소)
-대체 어떤 종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했기에 저 독설에 '옛날 생각'이 난 거야?
본래부터 KPOP에 관심 있던 사람부터 심심해서 색다른 볼거리를 찾던 사람들까지, 일부가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재상장! 주식회사 를 넷플러스에서 발견하고 만다.
-이 친구들이 출연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찾았는데, 마이너스 투표제가 있어! 맙소사 (경악하는 GIF)
그렇게 소소하게 커뮤니티 중심으로 뒤늦게 재상장! 아이돌 주식회사 에 미국 시청자가 붙었다는 말이다.
감성은 미국인 입맛에 안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자극성 하나는 보장하는 탓에 입소문이 좀 난 모양이다.
-증오 투표 순위도 공개해버리는군 미쳤어
-팀에서 한 명만 생존권 보장 투표를 한다고? 당장 미국에도 도입하자 XD
└사이코패스 새끼
└굳이 수입할 건 없어. 모르나 본데 이미 이 나라에 그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넘치거든….
물론 당장 넷플러스 일간 미국 시청 순위 안에 들 정도의 성과는 아니었다.
단지 미국 시청자 중 한국 쪽 드라마나 예능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에게 알고리즘으로 아주사 가 추천될 정도의 소소한 성공이었다.
다만, 본부장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온 모양이다.
본인이 그렇게 밀던 '리얼리티로 미국에 어필'이 진짜 성공해 버린 것처럼 보일 테니까.
사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자체가 뜬 것도 아니고, 본인의 비전과는 다르게 기획이 수정되었다는 건 아마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니다. 아마 수정 안 했으면 더 터졌을 거라 생각하겠군….'
'자기가 맞았다'는 강한 확신과 성취감에 도취된 윗분은 폭주 기관차나 다를 바 없었다.
후배 아이돌, 미리내 쪽 데뷔도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보니 더 심했고.
'X발.'
다행인 것은 매니지먼트 실장이 본부장의 행태를 열심히 까내리는 것 같았다.
미리 수작 부려놓은 보람이 있는 놈이다.
"형이 아티스트의 성과를 훔치는 사람은 회사를 운영하면 안 되지 않냐는데요."
"와."
실장의 사촌 동생인 세 번째 매니저가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에게 온 문자를 읽은 내용이다.
'제대로 사이가 틀어졌나 본데.'
계획대로 계속 서로 물어뜯고 싸워서 아무것도 진행 안 되면 좋겠다. 싱글 내고 활동 시작하면 흐지부지 될 테니까.
'4주만 서로 기 싸움만 하고 있어라.'
"저희 많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네요."
"네, 뭐."
3번 매니저가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말을 흘리고는, 도로 스마트폰 게임을 켰다.
'정말 이 일에 관심 없군.'
그래도 이놈은 시키거나 부탁하는 건 안 빠져나가고 꼬박꼬박하는 타입이라 첫 매니저보다 쓸 만했다.
게다가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이런 문자도 선을 모르고 그냥 보여준단 말이지.
"…얘들아, 이동하자."
"네."
반면에 첫 매니저는 변한 생태계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지, 뺀질거리는 태도가 상당히 줄었다.
이것도 편했다. 게다가 새로 온 치프 매니저가 일을 빠릿빠릿하게 하더라.
'그래도 여전히 류청우가 너무 일을 많이 해.'
직접 동행하는 로드매니저 둘이 다 시키는 것만 하는 꼴이라 결국 류청우가 주도적으로 관리를 확인하게 된단 말이다.
본래라면 매니저들이 일일이 확인하고 류청우는 피드백을 잘 주는 선이어야 맞다.
'아무래도 테스타 전담팀에 일 잘 하는 놈을 꽂아서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좀 더 계획을 짜보자. 일단은 다음 활동 준비가 먼저였다.
일단 지금 할 일정은 활동 코디 관련 회의다.
"저 빨간 머리 해요!"
"그래. 마음껏 해라, 유진아."
"히히."
"혹시 세진 씨… 배세진 씨는 더 밝은 색으로 염색하실 생각 없으세요? 저희가 볼 때는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 이상할 것 같… 아니,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
"억지로 부탁드리는 건 아니고요! 이미지 변신 느낌 어떨까 해서요."
"이미지 변신 좋죠∼ 문대야 피어싱 콜?"
"너 많이 해라."
"무, 문대는 피어싱, 안 좋아하는구나…."
"그냥 그래. 넌 좋아해?"
"아, 아니! 해본 적이 없어서…."
"와 박문대 차별 봐."
발언권이 강해진 덕에 헤어와 메이크업 관련해서 이제 본인들의 의견이 제법 많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레 또 뵐게요!"
'음, 피어싱이라.'
그렇게 회의가 끝난 뒤, 아직 정해 지지 않은 내용을 복기하며 녹음실로 이동할 때였다.
"저, 정말 죄송한데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매니지먼트실 좀."
"아, 네."
매니지먼트실 쪽에서 조심스러운 호출이 들어왔다.
'뭐지.'
이 경우 없는 호출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맞았나 보다.
"테스타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릴 호출한 매니지먼트 실장이 만나자마자 기운차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 새끼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냐.'
"이번 컴백, 본부장님이 자꾸 미국 쪽을 공략하자고 하셔서 심적으로 고생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 괜찮습니다."
애초에 본부장 오더가 직접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상사를 까는데 껄껄 웃기도 뭐하지 않은가.
류청우의 떨떠름한 대답에, 실장은 더 힘 있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티스트의 능력과 의사를 존중해야죠! 그래서 이번 회의를 통해 제가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예?"
이거 자랑 및 어필하려고 부른 거구나 싶어서 기가 찼으나, 그보다 대체 뭔 확답을 받았다는 건지 상당히 두렵다.
그리고 망할 발언이 나왔다.
"이번 테스타 활동, 본부장님께서 굳이 미국으로 테스타 분들을 보내지 않으셔도 충분히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거라고요!"
"…."
"그러니 테스타 분들 미국 데뷔하실 걱정 없이, 지금 하시던 것처럼 원하는 앨범을 만드시면 됩니다."
미친 새끼야.
졸지에 팬서비스용 싱글 하나를 글로벌 히트쳐야 하게 생겼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5화]
'너희끼리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언뜻 듣기에는 신뢰와 믿음이 느껴지는 좋은 발언 같지만, 윗사람에게 이 말을 들었다면 둘 중 하나의 뜻이다.
'네가 알아서 해라' 아니면 '잘 못 하면 네 탓'.
그리고 이 매니지먼트 실장이라는 놈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 두 뜻을 모두 담은 발언을 하고 있다.
'이번 활동에서 테스타가 글로벌 성과가 없으면 본부장이 냉큼 치고 들어올 명분을 자기가 줬잖아.'
뻔하다. 본부장은 '역시 내가 말하는 대로 해야 세계 시장에 먹힌다' 같은 소리를 하겠지.
'자연스럽게 테스타 발언권은 지금보다 약해진다.'
지금 주도권도 겨우 이만큼까지 키워뒀는데, 이 답 없는 X소 회사에서 그런 상황은 지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테스타가 이번 앨범으로 글로벌 히트까지 할 자신은 없다고 빼는 것도 문제다.
그것도 본부장이 개입 명분으로 삼을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
'이 새끼 본부장한테 놀아났네.'
낙하산 새끼에게 뭘 기대하겠느냐만, 열받긴 하군.
"물론 저희가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매번 적중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데…."
"네? 아니, 지금까지 해오시던 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실장이 자기 발언권만 신경쓰느라 당연히 테스타가 평소 같은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되잖아∼'가 가수에게 부담이 될 거란 고려는 아예 하지 못한 것이다.
일선에서 고생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게 정말 낙하산답다.
"…음, 예."
류청우도 결국 일단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진지하게 못 하겠다고 하다간 그룹 꼴이 우스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망할.'
이번 싱글은 가볍고 대중성 있는 쪽으로 이미 편곡과 안무를 빼뒀단 말이다. 리얼리티로 얻은 국내 인지도를 소화할 생각이었으니까.
'후렴 포인트 안무도 따라 하기 쉽게 만들었는데.'
컴백 몇 주 남기고 지금 와서 지향점을 다 뜯어고치게 생겼다.
데뷔 때 불지옥을 또 보겠군.
"…."
뭐 빠져나갈 구멍 없나.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테스타도 슬슬 신인을 벗어나는 중이니, 어떻게 잘 비비면….'
그때, 김래빈이 번쩍 손을 들더니 직구를 날렸다.
"저, 하지만 이번 싱글은 국내 대중성에 초점을 맞춰서 구성한 활동으로, 글로벌 히트를 노리지 않았습니다만."
"…!"
'야.'
순간 입을 막을까 생각했으나, 당황한 실장의 얼굴을 보자 깨달았다.
'오히려 이쪽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어.'
김래빈은 아무 의도 없이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류청우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한번 보자.
"어, 국내에서 잘되면 당연히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이 있겠죠."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KPOP의 국내 히트와 글로벌 히트 간의 괴리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심화하여 다양한 사례를 만들어냈으며…."
김래빈은 국내에선 히트했으나 글로벌 시장에선 별 반응이 없던 곡부터 반대 사례까지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을 다 해냈다는 뿌듯한 얼굴로 말을 끝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글로벌 히트는 더더욱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실장은 악의 없는 배경지식 폭격에 약간 압도된 것 같았다.
다만 김래빈이 말대꾸하려는 의도는 아니라는 것은 알았는지, 기분 상한 기색 대신 떨떠름한 투로 나불 거리기 시작했다.
"컴백까지 아직 몇 주나 남았으니 노선을 좀 변경해 보는 게 어떨까요? 지금 본부장님이 워낙 독불장군이니까…. 여러분도 잘 알죠?"
됐네. 꼬투리 발견했다.
나는 손깍지를 꼈다.
"그럼 당장 실장님 말씀에 맞춰서 이번 그룹 활동 노선을 다 정비해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
우리가 실적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낙하산한테 이 정도 싫은 소리는 할 수 있겠지.
"물론 저희를 위해서 해주신 말씀 인 건 알고,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도 듭니다만…."
그래도 완충재는 한 겹 깔아주고.
"애초에 저희 의도와는 반대 방향이니, 본부장님께서 보시기엔 이것도 아티스트 중심은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네요."
"…."
'아티스트의 의사를 존중하자'랑 '아티스트가 기획한 게 뭐든 간에 글로벌 실적 위주로 바꿔'라는 오더가 상충되지 않냐는 말이다.
실장의 표정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듣기에도 그럴싸하지?
기껏 이겼는데 본부장이 말 바꿔서 꼬투리 잡힐 걸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왈칵 몰려들 것이다.
"그러게∼ 저희가 원래 활동하려던 방향이 있다 보니까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희가 아직 미국에 큰 뜻이 없으니, 우선 국내 활동 열심히 하는 쪽으로 컴백 준비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지원사격이 쏟아진다.
우린 하던 준비 계속할 테니 일 벌인 네가 알아서 수습하란 뜻이다.
당연하지만, 실장의 안색이 나빠진다.
"음, 그러면 제가 앞으로 여러분을 지원하기가 좀…."
쪽팔리게, 했던 말 철회하면서 아쉬운 소리 하기 싫다는 거군.
'음, 이 이상 밀면 이 새끼가 감정 상한다고 헛짓거리할 수도 있겠어.'
실장의 화살은 본부장을 향해야지 테스타를 향하면 안 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코너에 밀어붙여 두면 좋은 점이 많다.
'뜯어내기가 수월하지.'
그럼 이대로… 아, 맞다.
'…팀원 동의는 받고 진행하기로 했지.'
나는 다른 멤버 놈들과 눈을 마주 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신호를 보냈다.
'그냥 얘 말대로 해주자, 잘못하면 폭탄 터지겠는데.'
'그래, 그래∼'
'어느 쪽이든 열심히 할게…!'
'배고파요!'
마지막에 이상한 신호가 끼어든 것 같지만 무시하고.
아무튼, 고개 젓거나 결사반대하는 놈은 없다. 나는 진지한 투로 실장에게 천천히 대답했다.
"음…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떨 까요."
"뭐, 어떤…?"
"회사에서 리얼리티가 잘되는 걸 보고 투자를 크게 해주셔서, 컴백 전에 저희가 기획 규모를 키운 걸로요."
자본금이나 더 투입해라.
"그러면 맥락이 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은데, 혹시 실장님 보시기엔 어떠신가요."
시간이 부족하니 돈을 있는 대로 부어서 공백을 채우겠다는 전략이었다.
'저놈 낙하산이니 본사 쪽 자금은 잘 끌어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실장이 반색했다.
"제가 보기엔 괜찮네요."
됐다.
그림상 테스타가 돈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 혹시 평타로 끝나도 뒷말이 적게 돌 것이다.
이제 어마어마한 자본금을 때려 부어서 4주 만에 편곡과 안무와 MV를… 수정해 보자.
'X발.'
졸지에 강행군이 됐네.
그날, 우리는 녹음 스케줄을 미루고 회의실에 틀어박혔다.
"글로벌 히트…."
"으음."
의외로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배세진이었다.
"…영어로 하면 어때?"
제법 합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KPOP의 글로벌 생태를 살펴보면 너무 이른 제안이었다.
"영어를 쓰는 건 영미권 대중성을 노리는 건데… 일단 그쪽 대중들이 저희를 알아야 그게 통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다. 일단 그쪽 팬층이 확실해야 써볼 전략이었다.
자칫하면 괜히 '미국 너무 의식한다'는 류의 부정적인 꼬리표만 달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 밈으로 유입된 사람들을 팬층으로 굳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존 KPOP 해외 팬분들이 좋아 하셨던 컨셉들을 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거 확실하죠∼"
류청우의 중얼거림에 큰세진이 번쩍 한 손을 들었다.
"안무 멋있고, 비트 좋고∼ 뮤직비디오 멋지게 뽑힌 거 좋아하시지 않나요?"
"그, 그렇게 멋진 건 한국에서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음, 그렇지. 근데 뭐라고 해야 하나, 한국에서는 비트가 엄청 강조된 댄스곡은… 남자 아이돌 곡이면 잘 안 들으시는 분도 많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데뷔 타이틀 두 곡 중에 비트가 너무 요란하지 않으면서 듣기 편한 '마법소년'을 더 밀었다.
'그쪽이 'Hi-five'보다 확실히 음원 차트 순위도 높고 롱런했어.'
마찬가지 맥락에서, 극도로 컨셉추얼하고 빡센 '행차' 같은 곡은 직전 타이틀곡보다 음원 순위가 살짝 약했었다.
커리어 하이를 달성하고 팬덤 유입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난 탑티어 진입 활동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큰세진의 말대로다.
'딱 부풀어 오른 국내 대중성이 아깝긴 하지만, 해외 반응이 필요하다면 이쪽이 맞긴 하지.'
물론 방향을 정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모든 걸 수정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안무나 이런 건 다 수정하면 되는 거라 큰 문제는 없… 세진아, 괜찮지?"
"…당연하지."
배세진이 꿋꿋하게 류청우에게 대꾸했다.
류청우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그래. 음, 그래서 더 멋있는 방향으로 나머지는 차근차근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편곡이 힘들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 말에 다 김래빈을 쳐다보았다.
"…?"
김래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보다가, 곧 깨달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컨셉만 정해지면 분위기에 맞춰서 편곡 시안을 몇 가지 뽑아오겠습니다! 나흘만 허락해 주십시오!"
호쾌한 발언이었다.
"괘, 괜찮을까…? 많이 힘들지 않겠어…?"
"안 그래도 이번 타이틀은 여러 방면으로 조합해 볼 만한 좋은 멜로디 탑 노트를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설렙니다!"
"…."
김래빈은… 대중성 흥행 공식에 맞추느라 못 했던 걸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신난 모양이다.
'그래, 누구 하나라도 행복하다니 다행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알았다, 래빈아. 그럼 저희 래빈이가 빨리 작업 들어갈 수 있게 컨셉 이야기부터 얼른 할까요."
"그래."
"조, 좋아!"
"문대 뭐 생각나는 거 있어? 아이디어 뱅크잖아 또∼"
원래 우리는 특별한 고정 이미지 없이, 적당히 청량하고 때깔이 좋아 봄에 맞는 시즌송을 낼 생각이었다.
이걸 '뮤직비디오'가 멋지게 뽑힐 만한 스케일의 컨셉으로 바꿔야 한다는 건데….
그러면서 동시에 영미권 입맛에도 맞아서 본부장이 지랄 못 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욕심 같아서는 국내 대중성도 포기하지 않고 많이 챙겼으면 좋겠고.
디지털 싱글이라 앨범을 안 파니까 음원 차트가 중요하단 말이다.
'…음.'
멋진 안무, 강렬한 비트가 어울리면서, 팬들이 소비하기 좋은?
'…아.'
나는 입을 열었다.
"이 기회에 세계관 확장하죠."
"우리 세계관? 어떤 거?"
"행차."
잠시 후, 격렬한 브레인스토밍 끝에 수정안은 편곡까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대신 최대한 듣기 편한 방향으로!'
그리고 격동의 3주가 지났다.
테스타의 팬들은 이번 컴백이 싱글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컴백 소식이 앵콜 콘서트와 맞물려 빠르게 언론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화제성 유지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기사마다 추가된 문구로, 팬들은 이 곡의 분위기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테스타, 벚꽃과 함께 컴백 공개]
[테스타 컴백 예열 UP… 봄 캐롤에 도전장 내미나?]
[국민주식 테스타, 청량한 봄 감성의 남자들로 돌아온다]
소속사 실무진들이 이번 테스타 활동 기획을 확인한 뒤, 분위기를 잡기 위해 열심히 유도한 보도자료였다.
덕분에 팬들은 모두 지난 리패키지 앨범 타이틀이었던 '피크닉'과 비슷하게 대중 친화적인 이지리스닝 곡을 예상했다.
물론, 팬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피크닉으로 음원순위 갱신했잖아 안전하게 가려나 보네
-ㅎㅎ좀 아쉽다 테스타 색은 마법 소년, 행차 이런 쪽 같은데ㅠ
-베러미 같은 게 진짜 오졌는데 자꾸 쉬운 곡 하니까 푸쉬쉭 식는 기분
-연차도 얼마 안 됐으면서 벌써 안무 난이도 살살 낮추는 게 좀 약았다ㅋㅋ 저래도 팬들이 좋아해주니까 그러는 거겠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흥행한 만큼 테스타 컴백에 거의 데뷔 때만큼 관심이 쏟아졌는데, 덕분에 배알이 꼴린 사람도 많던 것이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곡으로 벌써부터 지랄ㅋㅋㅋ 얼마나 위기감이 들면ㅠㅠ 불쌍
-타격감이 너무 없어서 이상하다
-디지털 싱글이잖아 좀… 어련히 정규 빡세게 가지고 올 텐데 꼭 저기 끼어서 팬인데 아쉽다 이지랄 하는 새끼들 너무 짜증남
-우리 애들이 뭘 하든 우리가 알 아서 좋아할 테니 훈수 그만 좀
-ㅋㅋㅋㅋㅋ너무 잘 되니까 이젠 이렇게 밖에 못 긁네 애잔ㅋㅋㅋㅋ
팬들은 적당히 거슬려 하고 적당히 비웃으면서 해당 반응을 넘길 수 있었다.
지금 기세를 봐서는 이 컴백이 실패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번 무대가 저놈이 싹 입 다물게 할 수 있을 만큼 재밌고 화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들 테스타를 신뢰했다.
'지금까지 망한 적이 없다!'
그리고 테스타의 컴백 티저 공개 당일.
팬들은 예상도 못 했던 어마어마한 30초짜리 영상을 보게 된다.
'화, 황야?'
테스타가 고른 컨셉은… 스팀펑크 조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