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테스타의 티저는 황량한 들판을 지나가는 증기기관차로 시작되었다.

치이이익!

톱니바퀴가 도드라지는 황동빛 열차가 화면에 비스듬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빨려들 듯이, 열차의 창문 안이 클로즈업되었다.

[….]

고풍스러운 조선 중기 양식이 접목된 객실이었다.

그 안에 마주 앉은 승객 둘은 각각 흑과 백의 도포를 코트처럼 걸치고 있었다.

겉옷 아래로는 가죽끈과 버클이 오가는 근대적 양식의 옷이 보였다.

문득, 하얀 도포를 걸친 쪽의 얼굴을 카메라가 잡았다. 머리를 단정히 넘긴 선아현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妖怪(요괴)도 市民權(시민권) 증서 발부 웬 말이냐'가 헤드라인으로 큼지막하게 잡혀 있는 오래된 신문을 펼치고 있던 인영이, 신문을 내렸다.

은발의 박문대였다.

박문대는 표정 없이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음악이 들어왔다.

[ - ]

리드미컬한 북과 차르르 떨어지는 윈드차임이 묘한 시대극의 느낌을 살리는 가운데, 영상은 빠르게 컷 신을 넘기기 시작했다.

금화를 튕기는 모노클의 이세진이 씩 웃는 것이 짧게 비치는 것 같더니, 곧 탄광 앞에서 가스램프를 든 정장 차림의 김래빈이 지나갔다.

그리고 묘하게 생긴 아날로그 황동 계기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배세진까지.

배세진이 창밖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 시선을 따라 카메라는 기묘한 도시 안으로 들어간 열차를 비추었다.

전통적 건축 양식과 산업혁명 시기의 상징물들이 어지럽게 엮인 도시가 짧게 잡혔다가 곧 건물 위를 달리는 열차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열차는 탈선했다.

끼이이이이익!

건물과 부딪히며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진다. 황금빛 먼지와 잔해가 휘날렸다.

그 속에서 워커를 신은 발이 튀어 나왔다.

팟!

인영은 곧 파편을 박차고 열차 옆에 매달렸다. 요란한 금속 빛깔 훈장들이 앞섬에서 번뜩였다.

[와우!]

리폼된 군복을 입은 차유진이 열차에 매달린 채 활짝 웃는 모습 뒤로 잔해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 잔해 속에 빨려 들어가던 수많은 현상금 포스터 중 가장 낡은 것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했다.

[100,000냥]

포스터 속 검은 인영의 정체를 인식할 만한 즈음이었다.

갑자기 화면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흔들리더니, 떨어졌다.

지지직-!

반주가 고장난 듯 멈췄다.

흔들리는 검은 배경, 머스킷을 어깨에 걸친 류청우는 턱을 든 채 시선을 내리깔아 카메라를 쏘아보았다.

포스터처럼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

화면이 사라졌다.

노랫소리가 울렸다.

-no oh, no-oh no-oh

목말라 갈증의 시간

멜로디 한 소절.

그리고 정적과 함께 자막이 떴다.

[TeSTAR]

[Spring out]

직후 댓글창이 물음표와 눈물로 미친 듯이 갱신되기 시작했다.

"후!"

김래빈의 개인팬은 도착한 택배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테스타의 이번 활동이 타이틀 한 곡만 발표했기에 앨범은 없었으나, T1은 알차게 관련 MD를 팔아먹었다.

김래빈의 팬이 구매한 것은 응원봉 파츠와… 컨셉 포토북이었다.

사이트에서는 가방부터 모자까지 별걸 다 만들어 팔았으나, 그것까지 다 살 정도로 호구가 되고 싶진 않았던 그녀의 선택이었다.

'티원 새끼들 진짜 대단하다.'

앨범 대신 포토북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팔아먹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당연히 포토북부터 확인하고 싶었으나, 우선 위에 있던 응원봉 꾸미기 파츠부터 들어내야 했다.

'귀엽긴 오지게 귀엽네!'

황금빛 톱니바퀴와 회중시계가 파이프에 연결된 것이 앙증맞았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그것을 정리하다가, 뮤직비디오로 생각이 미쳤다.

"미쳤지."

진짜 그 외에 다른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처음 티저가 나왔을 때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물론 영상 퀄리티가 좋아서도 있지만, 그보다 다른 이유가 컸다.

-봄 청년이라며! 봄 청년이라며!

-봄 청년 (열차 탈선시킴)

-알겠다… 벚꽃이 아니라 황사와 미세먼지가 흩날리는 봄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임

-스프링이 그 스프링일 줄은 몰랐죠

실컷 '청량한 봄 캐롤송' 같은 느낌으로 언론을 선동해놓고, 막상 티저는 SF 판타지 티가 줄줄 흐르는 세계관 뽕맛을 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워하는 사람보다는 홍 분한 사람이 워낙 많았다.

-요괴에 전통풍? 이건 무조건 행차 세계관이다ㅋㅋㅋㅋ

-아 미친 류청우 최종보스 재질 오져버렸다 미쳤냐고∼∼ 국대 총잡이!

-증기기관, 황동, 톱니바퀴까지 빼박 스팀펑크임 세상에 조선 스팀펑크 무슨 일

-티원이 돈은 많아 그래서 참고 덕질하는 거야

-와 이걸 싱글로 던져버리네

정규 앨범도 아니고, 마치 팬서비스처럼 지나갈 것 같던 싱글에 이렇게까지 자본을 쏟아서 각 잡고 내주니 괜히 벅차오른 것이다.

원체 돈 잘 쓰는 대기업 자회사인 게 유명하다 보니 아까워하거나 걱정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물론 긁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근데 이건 앨범을 팔아야 잘 될 것 같은데 음원은… 모를

-티원 배짱 좋네 근데 이상한 쪽으로 뽕 찬 듯ㅋㅋㅋㅋ

-남돌 대중성 원탑 먹을 기회였는데 자기 복을 걷어차네

분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 '대중적인 곡은 재미없다'라고 그랬 냐는 듯 말을 바꿔서 폄하를 시작했디

그러나 그것도 곡이 공개되는 순간 끝났다.

-스며드는 오늘의 감각

즐겨 이 순간, 시선, 예감

What's up?

the real flavor (come out)

곡은 리드미컬하고 나른한 레게였다.

간주와 브릿지에 격렬한 드랍을 섞어서 퍼포먼스를 충실히 살릴 것이 분명히 예상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쉽게 듣기가 좋았다.

몸을 흔들며 드라이브송으로 즐기기 좋은 곡이었다는 뜻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이 솜씨는 같은 토끼인 김래빈 뿐이지.'

김래빈의 팬은 라임만 맞는 주접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고는 택배 해체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봤던 인터넷 반응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테스타의 컴백을 기다렸던 것이 처음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유입된 일반인들은 티저부터 당황했었다.

-영화 예고편 같은데

-이야 얘네 돈 많이 버나보다

-아니 아이돌 뮤직비디온 줄 알았는데 웬 SF 조선시대가

-마지막에 그거 청우에요?ㅠㅠ 세상에 청우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넘 멋있어요!

-뭐야 호떡 팔던 귀요미들 머리색 왜 저렇게 현란해졌어 마법소녀 변신 생각남ㅋㅋㅋㅋ

└놀랍게도 그들의 데뷔곡은 마법 소년

└헐

이 사람들도 SNS에서나 목격할 수 있었지, 본 위튜브 동영상 댓글 창은 외국인의 물결에 쓸려 내려갔다.

-그러니까… 그들이 한국에서 하던 '일'이라는 게 이런 거였군? (턱 괸 이모티콘)

-아현의 포마드 머리에 숨이 멎을 뻔

-다들 한국에서는 비공정이 날아다니고 증기기관차가 건물 위를 달리는 걸 몰랐단 말이야? (울며 웃는 이모티콘)

-그 힘겨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승리한 이들이 결국 이런 멋진 영상을 찍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위스콘신에서 그들을 응원해

-테스타는 더 인정받아야 마땅해!

밈을 통해 유입되어 아주사 까지 시청했던 외국인들이 댓글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KPOP 해외 팬덤 사이에서 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뮤직비디오가 24시간 조회 수에서 3,000만 뷰를 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테스타의 팬들은 슬슬 1군의 맛에 대한 드립을 치고 있었다.

'투어 스케줄이 더 늘어나겠어….'

김래빈의 팬은 암담한 미래를 그리며, 결국 택배 상자에서 포토북을 포장을 벗겨 꺼내는 것에 성공했다.

"후우."

참고로 4권이다.

간사한 자본주의의 돼지, 티원 놈들이 앨범에 쓰던 랜덤 포토카드 제도를 여기도 써먹은 탓이었다….

박문대가 알았다면 중단되었을 수도 있었으나, 미친 일정에 갈리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도 여기까진 챙기지 못했다.

김래빈의 개인 팬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제발 김래빈!'

그녀는 이미 멤버별로 어떤 포토카드가 들어 있는지까지도 적당히 설명 정도는 찾아보았다.

일단 멤버별 2종으로 총 14종의 포토카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김래빈은 윙크를 하고 찍은 셀카가 하나, 정장에 갓을 걸친 뮤직비디오 비하인드 샷이 하나였다.

'기왕이면 전자가 좋겠어.'

김래빈은 셀카를 자주 찍지 않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래빈입니다. 작업 중에 러뷰어 생각이 나서 글을 올립니다. (사진)]

데뷔 초에는 SNS에 이러고서 첨부하는 게 본인 장비 사진인 경우도 수두룩했다면 설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김래빈이 안 나온다면, 아니, 기왕이면 제발 같이 나와줬으면 하는 게 있었다.

'은발 박문대…!'

박문대가 그렇게 차가운 색으로 염색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깔끔하게 새로 다듬어서 반만 넘긴 헤어스타일까지 훌륭했다!

-바바박문대 이게 무슨 일이ㅑ

-제발 공방 가게 해줘 저거 생눈으로 봐야돼

-스프링 박문대 견종 시베리안 허스키로 하자 지금 딱 합의해 (캡처)

티저가 공개되자마자 인기글과 실시간 키워드로 '문대 은발'이 잡혔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확실히 뭘 좀 아는 놈이야.'

머리를 새롭게 염색하거나 컬러렌즈를 낀 대부분의 멤버들이 비슷하게 화제가 되었다는 것을 무시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차게 포토북을 개봉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카드 빼면 제값에 못 팔아! 한 권만 멀쩡하면 돼!'

포토카드 확인이 우선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포토북을 과감하게 열어, 중간에서 떨어지는 카드를 주워 들었다.

"…!"

사진의 인물은… 차유진이었다.

"에잇."

김래빈도 박문대도 아니라는 현실에 그녀는 탄식했으나, 곧 마음을 고쳐 먹었다.

'차유진은 무조건 교환 가능이다!'

미친 듯이 눈에 불을 켜고 교환을 구하는 차유진의 개인 팬이 넘친다는 건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이 뮤직비디오 의상의 차유진 포토카드는 심각하도록 잘 나왔다.

아주 고전적인 오픈카에 발을 올린 채로 걸쳐 누워 씩 웃고 있는 차유진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비명을 지르며 보관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

팔지 말까?

차유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그녀마저도 결국 헛기침을 하며 사진을 조심스럽게 챙겨 들었다.

"아니… 뭐, 애들이 다른 3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혼잣말로 변명을 하며 그녀는 남은 포토북에 손을 뻗었지만, 저 포토카드를 팔지 않을 것 같은 진한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몰라, 더 사면 되겠지.'

그보다 이 뮤직비디오 착장 그대로 음악방송에 나올지가 관건이었다.

이틀 뒤… 아니, 방금 자정을 넘었으니 내일이 첫 음악방송이었다.

그녀는 아이돌 활동 첫 주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떠올리며, 심드렁히 생각했다.

'음, 지금쯤 막판 안무 연습에 한창이겠군.'

안타깝게도 그녀의 예상대로는 아니었다.

같은 시간, 멤버들은 다 낡고 지친 상태로 연습실에 옹기종기 모여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자… 틀자."

"네."

미친 듯이 몰아치던 지난 한 달의 일정을 마친 그들은, 그때서야 이번 뮤직비디오 리액션 영상을 찍고 있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7화]

파란만장한 한 달이었다.

-선생님∼ 저희 안무 시안 컨펌부터

-죄송하지만 가사가 이렇게 수정이 들어가면 리듬과 맞지 않는 부분 이 상당수 발생….

-컨셉 포토용… 의상 나왔다는데.

활동까지 카운트다운이 들어가는데 수정할 건 한도 끝도 없이 많으니 나중엔 실무진들 모두가 거의 정신 나간 듯이 일했다.

물론 최고조는 뮤직비디오였다.

무슨 지랄을 해도 날짜까지 편집을 다 못 끝낸다는 결론이 나왔거든.

'섬뜩했지.'

그래서 컴백 날짜인 화요일에 음원을 먼저 공개한 뒤, 목요일 자정에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식으로 일정을 수정했다.

당시에는 손해를 볼 것 같아서 입맛이 썼으나… 의외로 이 방법은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음원부터 공개된 덕에 오히려 편견 없이 차트에 자리 잡았어.'

뮤직비디오에서 스팀펑크 조선이 나오는 건 재밌는 요소지만, 친근한 요소는 아니지 않은가.

이 특수함이 음원의 인상에까지 영향을 주면 괜히 대중성에 하자가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그냥 신기한 티저로 화제성을 끈 뒤에 음원은 따로 들으니, 곡이 가진 대중성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덕분에 현재 가장 큰 음원 차트에서 4, 5위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4위 Spring out / 테스타] ▲1

솔직히 10위권 예상했는데, 놀랍도록 순조롭다.

'전처럼 무대랑 예능 좀 돌고 나면 이용자가 더 늘려나.'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국내 메이저 예능에 팀 단위로 스케줄을 꽤 잡았다. 리얼리티로 만든 화 성도 활용할 겸.

'기대해 볼 법하겠군.'

물론 앞으로의 순조로운 회사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글로벌 반응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빌보드 메인 차트에 드는 건 기대도 안 한다.

'아직 그럴 정도의 해외 인지도는 아니야.'

애초에 빌보드를 각 잡고 노리려면 그 차트에 맞춰서 컴백 직후 1주일치 성적이 완전히 반영되도록 금요일에 미국 동시 발매했어야 한다.

그 인프라를 도저히 3주 내로 구축할 수 없었다는 건… 충분히 이해 가능할 것이다.

'망할.'

게다가 그것도 앨범 차트를 노려야 그나마 승산이 있는 거지, 그냥 곡 차트는 VTIC 수준의 해외 팬덤이 아니고서는 답 없다.

고로 곡 하나로 활동하는 이번엔, 테스타의 글로벌 성장세를 빌보드 차트 인으로 측정할 순 없다는 말이다.

'테스타 글로벌 인지도를 높였다는 걸 증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글로벌 검색엔진에서의 테스타 검 색량과 플랫폼 국가별 조회수, 투어 규모 증가 정도가 답이다.

그리고 지금 하는 뮤직비디오 리액션도 그걸 견인하는 좋은 위튜브 컨텐츠가 되어줄 것이다.

"오, 시작한다."

"두근두근∼"

멤버들이 피곤으로 찌든 눈을 하고서도 열심히 떠드는 게 참 훌륭한 자세였다.

'정산 덕인가.'

며칠 전에 들어온 올해 1분기 정산액이 데뷔 때 반년 넘게 묵혀서 받은 첫 정산액을 넘겼더라.

배세진이 부동산 담보 대출을 다 갚았다며 기함했었다.

어쨌든, 나도 최대한 성의있게 손 바닥을 치며 모니터를 보았다.

뮤직비디오는 티저의 끝, 그러니까 전복된 열차에서부터 시작했다.

-I…

fancy messy sneaky collapsing

콰쾅!

내레이션 같은 저음의 랩이 끝나자. 열차가 터졌다.

그리고 그 폭발에서 멀쩡히 튀어나은 차유진은 허공에 날리던 신문을 낚아채며 씩 웃었다.

티저에서 '박문대'가 보던 그 낡은 신문이다.

"오∼"

"멋진데?"

"맞아요!"

이 옆의 차유진이 신나게 자신의 멋짐을 주장하는 동안, 화면의 차유진은 신나게 도시로 달려 나가며 뮤직비디오의 스토리라인을 전개했다.

그리고 리드미컬하고 느릿한 도입부 멜로디.

-나른히 손 놓고 즐겨 난

안락한 Driving Mode

다분히 겪었지 Fame, Pain

SF와 근대, 조선을 섞은 기묘한 도시에서의 탐험이 펼쳐진다. 한마디로, 예전 미국 서부 스타일의 모험 활극에 가까웠다.

다만 너무 스토리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어디까지나 뮤직비디오니까.'

비현실적인 양식의 건물 실내나 빛이 번뜩이는 황야를 배경으로 하는 멋진 안무 장면을 잘 챙겨 넣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스토리 분량에서도 배분에 신경을 써달라고 명시했었다.

차유진이 첫 스타트를 끊었지만, 이후 멤버들이 자신의 파트마다 한 명씩 등장하면서 바통을 잇도록.

"왜, 왜 세진이는 외알 안경을 쓰고 있나요…?"

"아∼ 제가 전에 구미호였잖아요? 왜, 눈을 보면 홀린다∼ 그런 걸 좀 보여주는 거죠?"

"멋지네요."

"어어? 문대문대, 좀 더 영혼을 넣어서!"

"와 정말 멋지다."

이미 정해놓은 멘트도 이렇게 중간 중간 채운다. 감탄사만 넣어선 재미 없으니까.

물론 감탄사도 챙기긴 했다.

"와우, 배세진 형!"

"어, 언제나 연기가 대단하세요…!"

"큼, 그 정도는 아니고."

배세진이 아날로그 계기판을 누르자 기차가 톱니바퀴를 굴리며 복구되는 장면에서 쏟아진 칭찬이다.

"저 앞에 어떤 사물도 없었는데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맞아. 세진이가 연기할 때 저기 그냥 초록색만 가득했어요, 여러분."

그린 스크린 앞에서 초점용 막대기만 두고 연기했다는 뜻이다.

마치 기술력을 돌려서 자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게 아니다.

도저히 세트를 다 지을 시간이 없어서 예산으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CG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 업체도 분명 일 지옥이었겠군.'

그리고 그 상황에도 동요 없이 연기할 놈에게 화려한 CG 장면을 몰아주었고, 그게 배세진이었다.

"…잘 나와서 다행이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와!"

배세진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카메라에 고개를 꾸벅거렸다.

뭐, 저놈에게 최근 여론이 호의적이니 한결 편해진 모양이다.

뮤직비디오 리액션은 그런 식으로 계속되었다.

"저거 봐요! 김래빈 못 움직여요!"

"아닙니다! 전 도깨비 역할이라 신비함을 위해 감독님께서 저런 정도로 정적인 동작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윽고 탄광에서 나, 그러니까 박문대와 김래빈이 접선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지나가며 곡과 화면이 모두 고조된다.

나른한 레게에서 강렬하고 깊은 뭄바톤으로.

-사실 알아 부족한걸

내게 필요한 건 감각

애타는 목 타는

갈증의 시간

후반으로 가면서 스토리에 구체적인 목적의식이 약간 드러났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티저의 열차 탈선은 '시민권 증서'를 받기 위해 도시에 올라온 요괴들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여러 연유로 시민권을 받기 위해 이 테러리스트를 잡으려 한다.

그리고 티저 본 사람은 다 짐작했겠지만, 테러리스트는 류청우다.

-no oh, no-oh no∼oh

목말라 갈증의 시간

곧 화면 속 멤버들은 고압적인 얼굴로 쏘아 내려보는 류청우와 한밤중 대치하게 되었다.

"오오!"

근사하게 CG를 입혀놓은 장면은 과하지 않게 그럴싸했다.

자칫하면 어디 저예산 B급 영화 같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돈은 쓴 만큼 값을 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여러 해석이 나뉘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참고로, 강력한 주류는 이거였다.

-차별에 대한 은유입니다!

근거는 이렇다.

-'행차'에서 더없이 강력하고 신비한 존재처럼 나왔던 멤버들은, 인간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뛰어야 합니다.

-아직 인권에 대해 충분한 논의와 의식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근대라는 시대상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차별에 대한 담론입니다.

-'행차'와 유사하게 스토리라인을 배치하여 더욱 주제 의식이 돋보입니다.

-게다가 '행차'에서 결국 자신이 요괴라는 것을 깨달은 '류청우' 님은 이번에는 요괴의 시민권을 부정하며 테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기혐오로부터 비롯된 차별의 정서죠.

-즉, 테스타의 이번 뮤직비디오는 차별에 대한 비판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로까지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고려했던 것을 바로 알아차려 주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결국 이렇게 활용된 것 같긴 했지만.

[요괴를 이렇게 비유하다니? 놀라운 테스타의 뮤직비디오에 경악한 외국인들!]

[미국에서 당했던 동양인 인종차별에 대한 반격? 테스타의 신곡 리뷰]

워낙 이 비디오를 늦게 찍는 중이라 이미 대중 반응과 분석을 한 번씩 쭉 훑어놓은 상태여서… 저절로 생각이 나는군.

어쨌든, 곡의 절정에서 멤버들과 류청우의 전투가 암시되며 강렬한 클라이맥스 안무가 들어간다.

아, 마침 내 파트군.

-스며드는 오늘의 감각

즐겨 이 순간, 시선, 예감

지금, 예고 없이

Spring out

흑단 장총을 한 바퀴 돌려 들어 쏘는 류청우의 컷이 연달아 적당한 파트에 들어갔다.

"우와아아!"

"형님∼ 너무 멋진데요?"

"진짜 진짜 Boss 같아요! What a badass!"

"음, 그런가? 하하."

류청우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촬영 당시 본인도 꽤 마음에 들었는지 사격 취미를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일단은 말하지 말자.

"이야∼ 근데 우리 6:1 그림이라 조금 그렇긴 하다. 그쵸?"

"아니요! 이기는 게 좋아요! 이기면 돼요!"

"…."

이건 편집해달라고 하고.

뮤직비디오는 지난 활동 곡들보다 웨이브와 젖히기가 많이 들어가 극적인 안무를 잘 잡아주며, 결국 요괴들이 류청우를 제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씩 웃은 차유진이 앞으로 나오며 잠시 음원에 없는 간주가 들어간다.

[….]

차유진은 시민권 증서 신청증을 류청우의 손에 끼워준다.

-물어, 뜯어, 즐겨

Now, Spring out

따가운 널

마음껏 삼켜

음악이 돌아오며, 엔딩은 그렇게 끝났다.

멤버들은 제법 천연덕스럽게 처음 본 것처럼 코멘트를 추가했다.

"오∼"

"머, 멋있게 잘 나온 것 같아요…!"

"콘티대로 훌륭히 구현되어 감탄만 했습니다!"

"감독님 감사해요∼ 뮤직비디오 봐 주신 러뷰어 사랑해요∼"

"대박 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뮤직비디오 조회수 테스타 자체 기록 갱신한 건 뻔히 알지만, 예의상 이런 멘트도 좀 붙여주자.

[우와앙!]

[와하하!]

쿠키영상으로 시민권 얻은 놈들이 신나서 뛰어다니는 게 몇 초 나오는 것까지 보고 나니 분량을 적당히 뽑은 것 같다.

"그럼 여러분, 저희 이번에도 열심 히, 멋지게 활동할 테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금방 봐요∼"

인사말과 함께 카메라가 꺼졌다.

그리고 스탭들이 장비를 챙기는 순간, 멤버 모두 피로에 찌든 모습으로 순식간에 돌아왔다.

"후…."

"우리 내일… 깨어 있을 수 있겠죠?"

현재 시각 새벽 1시 반.

내일 샵에 새벽 4시 출발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당장 자야 했으나, 안무 최종 연습을 생각하면 밤샘 확정이다.

"힘내자."

"넵."

뭐, 다른 방법은 없으니 그냥 하는 수밖에 없다만… 하다못해 이동시간을 줄이면 좋겠는데 말이다.

'슬슬 숙소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서울 중심으로 숙소를 옮겨 버리고 싶단 말이지.

정산 액수를 보니 그 정도 투자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번 활동 성적 보고 딜 걸까.'

최대한 괜찮은 입지와 조건을 받기 위해, 나는 타이밍을 잘 고려하기로 정한 뒤, 해당 생각을 일단 치웠다. 너무 바빴으니까.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이 화제가 곧바로 수면 위로 올라 왔다.

"우리 테스타님들, 혹시 숙소 더 좋은 곳으로 옮기는 건 어떠세요?"

"네?"

물론 피곤해 보이는 소속가수를 걱정하여 소속사에서 자발적으로 비용을 댄다는, 자선사업 같은 발상은 아니었다.

치프 매니저가 일부러인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아파트에 자꾸 민원이 들어온다고 해서."

아.

"그 정신 나간 애들 있잖아요, 자 꾸 단지 내 침입하려고 해서 관리실에서 더는 힘들다고 하는데…."

그래. 왜 이 문제가 안 나오나 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8화]

사실 그룹 활동을 하면서 심상치 않은 사생활 침해를 꽤 경험하긴 했다.

-미친 저 택시 일부러 사고 내려고 한 거 맞죠?

-저, 저기… 뒤에서, 자꾸 때리려고 하시는데….

-와∼ 테스타! 저 여기 사인해주시고 사진 좀요!

-예? 죄송하지만 이곳은….

-조카분이래, 해드려 그냥.

심하게는 일부러 접촉사고 내려는 경우부터 약하게는 음악방송 대기시간에 밀고 들어오는 것까지.

뭐, 예상 못 했던 부작용도 아니라 대충 직업적 단점이려니 하고 안일하게 넘겼던 것도 사실이다.

정보화시대답게 직접 오는 사람보다는 전자기기 해킹하려 드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했고.

일단 숙소에서는 괜찮았거든.

'원룸 사태 같은 게 날 여지는 없어 보였는데.'

숙소가 워낙 보안이 괜찮은 아파트라서 말이다.

내가 대충 임시거점으로 삼았던 낡은 원룸에 무단 침입했던 수준으로는 택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배세진도 이 숙소 입주하고 난 뒤 보안 좋은 부동산 구매 충동을 더 강하게 느꼈지 않을까.

다만, 이제 그것도 한계였나 보다.

"아예 뚫고 들어왔다구요?"

"네. 어휴. 택배원을 매수해서 주차장으로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걸 또 들킨 과정이…."

"어, 어떻게 발각되었기에…."

긴장한 김래빈에게 치프 매니저가 한숨을 쉬며 대답해 줬다.

"그게 양동 작전이었대요!"

"…?!"

"관리실 CCTV 실에 잠입해서 사각지대 따다가 걸린 애들이 다 불어서 싹 끌려갔다고… 어휴, 나 참."

"으헉."

"…."

기가 막힌다.

무슨 마피아도 아니고 직원을 매수해서 양동 작전까지 펼쳤냐.

대단히 조직적이라 그 집요함과 열정이 아까웠다. 하지만 놀랍진 않았다.

'데이터팔이 할 때도 비슷한 건수가 몇 번 들어왔었는데.'

웬 놈한테 종일 붙어 다니면서 데이터 남겨달라는 류의 의뢰 말이다.

페이가 꽤 셌는데, 자칫하면 빨간 줄 긋기 딱 좋아서 피하긴 했다.

어쨌든, 그래서 이 꼴까지 보고 나니 더는 참을 수 없던 아파트 관리 실과 주민 회의에서 권고문이 나왔다는 것이다.

"원래도 단지 앞에 자꾸 진 치고 있는 걸 쫓아내는 것도 힘들었다고, 이제 더는 힘들다고 하시니…."

"…으음."

한마디로 '너희 문제니까 직접 어 떻게 좀 해봐'다.

상식적인 요구라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게다가 회사가 신경 쓰기 싫다고 그냥 무시하기엔 위험하다. 아파트 주민들이 언론에 제보해 버리는 순간 일이 커질 테니까.

[테스타 숙소 논란… 소음과 침입 으로 아파트 주민 공포 호소]

벌써 기사 타이틀이 짜릿하다.

'역시 이사밖에 답이 없긴 해.'

회사에서도 이 아파트에 돈과 인력을 투입하느니 '숙소를 더 좋은 곳으로 옮겼다'는 식의 언론플레이가 가능한 이사를 골랐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관련 상황을 상세히 말해주는 건 단순히 설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입 닦고 '좋은 곳으로 옮겨주는 거예요∼' 같은 소리 하는 것보다 이렇게 겁주는 편이 협조를 구하기 편할 테니까.

앞으로 이런… 스토커 관련 대처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확실히 첫 매니저보다 유능한 놈은 맞는데….'

흠, 그래도 역시 인간성 좋은 로드 매니저를 하나 새로 넣는 편이 좋겠다.

워낙 일에 자기 몸 갈아 넣는 놈들이 많은 그룹이다. 매니저로 정 많고 빠릿빠릿한 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김에, 더 크고 좋은 곳으로 이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실까요?"

"가요! 좋아요!"

"잠시만요. 음, 확실히 숙소 바꾸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볼래?"

류청우의 말에 차유진을 비롯해 몇몇이 금방 손을 올렸다.

큰세진은 손을 드는 대신, 마치 들것처럼 흔들며 씩 웃었다.

"아, 이사 당연히 좋죠∼ 근데 어디로 가는데요?"

"아직 후보지 확인 중이긴 한데요, 확실한 건 여기보단 보안 좋고 입지 좋은 곳으로 가야죠!"

"그쵸∼ 아, 샵 가까운 곳으로 가는 거죠? 저는 찬성이요!"

청담동에 있는 샵이 가까울 만큼 서울 중심부가 아니면 반대란 뜻이다.

"하하, 알겠습니다! 아, 그럼 직접 후보지 좀 보실래요? 보내드릴게요!"

"네!"

곧, 메신저의 회사 업무방에 파일이 떴다. 나는 곧바로 파일을 클릭에 후보군을 훑었다.

'괜찮네.'

물론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위치랑 네임드만 보면 모두 썩 괜찮았다.

'이미 유명인들이 입주해 있는 곳도 많….'

잠깐. 여기가 왜 나와.

그 순간, 치프 매니저가 하필 그 '여기'를 집었다.

"사실 저희는 SV빌리지를 좀 강력히 밀고 싶은데요, 테스타 이름값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들어가 줘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전달 중입니다!"

안 된다.

"…방송국에 더 가까운 곳은 어떨까요. 엔드레펠리스나…."

"아, 거기도 또 의미 있게 살펴보는 중이죠!"

치프 매니저는 능숙하게 방향을 틀었다. 옆에서 선아현이 물었다.

"무, 문대는 차에 오래 타는 게 많이 싫어…?"

"…그런 편이지."

"그, 그렇구나!"

아니다.

나는 'SV빌리지'에 누구 숙소가 있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VTIC 숙소잖아.'

물론 연차가 차서 다들 알음알음 독립하며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지만, 괜히 이웃사촌 명분을 줄 필요는 없지 않나.

'뭐, 그 새끼 하는 걸 봐선 주택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만.'

개가 정원에서 뒹구는 사진은 왜 보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대로 그냥 살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피해 가자는 거다.

"그럼 여러분 의견은 꼭 제가 잘 정리해서 전달 드리겠습니다!"

"넵!"

회의는 깔끔하게 끝났고, 아마 이사는 이번 활동이 끝날 때 즈음해서 빠르게 진행될 것 같았다.

'별문제는 없겠어.'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 소식이 다른 곳으로 샜다는 게 문제였다.

-섬별 이사 간대ㅠ E펠로

-X발놈들 갑자기 비싸게구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사생활 침해 고통 호소하면 되는 부분?

—ㅋㅋㅋㅋ아 너무 톱스타라서 숙소 밖에서 빠순이 기다리는 것도 못 참으시겠다잖아ㅠㅠ

-개짜증나 ㅅㅄㅂ겨우 경비 뚫었는데

'정신을 못 차리네.'

트윈 홈마는 대충 살펴보던 캡쳐를 껐다.

이세진과 박문대의 트윈 홈을 운영하는 이 직장인은 막간을 이용해서 SNS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 글을 발견한 것이다.

[테스타 정병사생들 개징그러워]

그들의 비공개 계정을 누군가 캡처해 올렸다.

'굳이 이런 걸 왜 물 위로 끌고 오냐', '적힌 내용도 테스타 사생활 침해다' 등 신나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글을 안 내리는 걸 보니 속셈이 뻔했다.

'활동기에 초 치고 싶나 보네.'

직장인은 뻔한 용의선상-VTIC의 팬, 원커브의 팬 등을 떠올리다가 그만두었다.

그런다고 망할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테스타의 이번 활동은 산뜻하게 순항 중이었다.

팬들의 유입은 많았으나, 아주사 이후 '그들만의 세상'으로 서서히 고착화되어가던 대중성의 약화가 리얼리티 덕에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불안해서 난리인 거겠지?'

게다가 트윈 홈마의 픽인 둘은 특히 새로운 이미지 추가에 성공하며 승승장구 중이었다.

음악방송마다 모노클 종류를 바꿔 착용 중인 이세진은 물론이고, 박문대 은발 또한 대단히 호평이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펜촉을 핥더니 직캠에선 내 심장을 핥아 문대는 사람 심장을 먹어

-은발 문대 절대 박제해 1000년 묵은 엘리트 요괴 바이브 포기 못 해 (주먹 쥔 이모티콘)

-그래 이럴 줄 알았어 흑댕 금댕 대통합의 시대가 왔다

└은발은 티벳 아닐지

개인 SNS도 아니고 위튜브 직캠에 달린 주접까지 눈에 뵈는 게 없이 폭주 중이었다.

'역시 박문대 같이 잡길 잘했네.'

이 정도면 시즌그리팅 만들어 팔면 활동 비용도 충당이 가능하겠다. 트윈 홈마는 만족스럽게 자신의 SNS에 접속했다.

사생이 뭐 어떻단 말인가? 저러다가 또 새 떡밥 뜨면 다 쓸려갈 이슈다.

막말로, 어차피 자신이 잡은 놈들은 사생에게 낚일 놈들도 아니라 추가 논란도 없을 것이었다.

'일단 이세진은 확실하지.'

트윈 홈마가 다년간의 이 바닥 짬으로 확신하는데, 아이돌 이세진은 절대 스토커에게 측은지심 가질 놈이 아니었다.

맺고 끊는 것에 능숙하고 공사 구분을 잘하는 놈이 분명한, 야망 있는 놈이다.

'박문대? 이쪽도 절대 아니지.'

여기야 왜 스토커 짓이나 하면서 사는지 의아해할 놈이었다.

은근히 자기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약한 것 같긴 하지만, 자기 이미지 기가 막히게 만드는 걸 봐선 머리 좋은 것 같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직장인은 깔끔하게 평을 마치고, 제로 칼로리 탄산음료를 꿀꺽꿀꺽 삼키며 보정을 계속했다.

그리고 지난 콘서트에서 풀지 않았던 둘의 투샷을 SNS에 업로드하던 순간이었다.

"뭐야?"

-퍼베님 이거 보셨어요?ㅠㅠ

안면도 없던 익명 계정이 쏜 인터넷 게시판 링크가 심상치 않았다.

[테스타 찍덕 쳐내는 솜씨]

트윈 홈마는 당장 내용을 확인했다.

글에는 웬 덩치 큰 인간이 테스타에 붙어 카메라를 들이대자, 멤버가 팔꿈치와 팔등을 이용해 쳐내는 장면이 GIF 파일로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멤버는… 류청우였다!

"…?"

이놈도 이럴 놈이 아닌데?

운동선수 출신이라 시비에 안 휘말리는데 통달한 타입일 줄 알았는데, 장면만 봐서는 거의 사람을 때리는 것 같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베스트 댓글도 비슷한 내용으로 난리였다.

-헐 류청우 저런 성격이었어?

-솔직히 저런 새끼들은 맞아도 쌈ㅋㅋㅋ 근데 류청우 좀 깨긴 하네

-대체 청우가 뭘 잘못했어 이게 천플이나 달릴 일이야? 무섭다 진짜

-개멋있는데?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됨

반대와 추천이 어지럽게 오가며 온갖 말이 왔다 갔다 했다.

"이상한데?"

일단 자신이 고른 두 놈이 아니라는 것에 '그러면 그렇지' 싶으면서도, 트윈 홈마는 꺼림칙함을 버릴 수 없었다.

류청우가 바보도 아니고, 뻔히 카메라 있는 데에서 경호와 매니저 두고 저럴 이유가 있냔 말이다.

'각도의 마법일 것 같은데.'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상황을 찍은 다른 카메라와 증언이 우수수 쏟아졌다.

-저 새끼 보안 뚫고 와서 거의 애들 몸에 카메라 던지는 수준이었어 류청우가 안 저랬으면 위험할 뻔

-보니까 때린 것도 아님 다른 각도 캠 보면 붙은 새끼가 자기 발 꼬여서 넘어진 거야 날조 그만해 (캡처)

-애초에 이런 당연한 방어로 왜 말 나오는지도 모르겠어 청우 국대 시절까지 끌고 와서 궁예질 하는 거 보니까 속이 타서 미칠 것 같아

평소 그리 공격적이지 않던 류청우의 개인 팬들이 튀어나와서 울분을 토하는 게 트윈 홈마도 이해가 갔다.

난데없이 뺨 맞은 상황이니까.

그리고 슬그머니 상황에 의구심이 들었다.

'누가 작업 쳤나?'

정답이었다.

쏠쏠한 일당을 받고 고용된 데이터팔이의 질주와 열심히 논란을 재생성하려 애쓴 단체 메시지방이 존재했다.

그리고 데이터팔이에게 일당을 준 건… 테스타의 숙소 아파트 보안을 뚫었던 그들이었다.

테스타가 보안 철저한 곳으로 이사간다는 것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이다.

당연하지만, 테스타의 회사에서도 해당 이야기가 안 나올 순 없었다.

"너 제정신이야? 정신 못 차려?"

"죄송합니다."

지금 깨지고 있는 건 테스타 멤버…는 당연히 아니고, 첫 매니저다.

"아니, 네가 혼자 피하면 어쩔 건데? 너 월급 왜 받냐고 새끼야."

카메라로 한 대 칠 것처럼 달려들던 새끼를 쓱 피해서 몸을 물렸다고 온갖 폭언을 듣고 있다.

'혼자 내빼서 좀 빈정 상할 일일 순 있다만… 저럴 일은 아니지.'

매니저가 무술의 달인도 아니고, 일개 직장인인데 몸을 날려 살신성인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건 퍼포먼스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철저히 보안에 신경 쓰겠습니다!"

첫 매니저한테 비난의 화살을 싹 돌려서 혹시 소속 아티스트가 미진한 보안에 빡쳤을 때를 대비한 것이지.

'짬이 보이는군.'

사실 평소 보안 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고, 단지 특수상황일 뿐이지만 일단 달래려 드는 게 능숙했다.

당장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멤버들도 몇 나왔으니까.

"괘, 괜찮아요."

"매니저 형님을 문책하지 않으셔도 괜찮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휴, 감사합니다!"

치프 매니저가 한껏 안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청우님도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해명됐고, 애초에 멋지다는 반응도 많았거든요."

"…."

류청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놈은 전직 국가대표에 워낙 이미지가 온화했기 때문에 이번에 타격이 좀 있었을 것이다.

원래 고깝게 보던 새끼들도 괜히 지금 충격받은 척 설치기 쉬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음, 알겠습니다."

다만 매니저가 뒷말을 안 붙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런 건 회사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아티스트 분이 나서면 오히려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자책처럼 들리는 말 사이에는 '괜히 왜 그랬냐'는 묘한 뉘앙스가 살짝 들어가 있었다.

'본인이야말로 쓸데없이 왜 저러는 거지.'

끼어들어서 대꾸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류청우가 먼저 대답했다.

평소답지 않게, 날이 선 어조로.

"…그러니까, 누가 맞게 그냥 둬야 했다, 그런 말씀인가요?"

"…!"

"아뇨, 그게 아니라… 피하는 걸로도 충분했다, 이런 뜻입니다! 보는 눈이 많다 보니까…."

"…."

류청우는 꽤 오래 대답이 없다가, 딱 한 마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류청우는 그날 스케줄 내내, 공식석상 외에는 말이 없었다.

'망할.'

누가 봐도 뚜렷한 번아웃 증세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09화]

차 안은 냉동창고가 따로 없었다.

온도가 아니라, 분위기가.

'X 됐네.'

류청우가 특별히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부당하게 굴지 않았으나, 절대 평상시 같은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전 음악방송 대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자.

-형 저 과자 또 먹어요! 많이 먹어요!

-그래.

끝이었다.

류청우는 아무 제스처 없이 그대로 소파에 앉아서 손에 쥔 스트레스 볼만 움직였다.

그 후로 아무도 류청우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중이다.

내일 새벽부터는 촬영이 있지만, 간만에 숙소에 저녁 식사 전에 들어 갈 수 있는 날이라 분명 기분 좋을 놈들이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있다.

나? 나야 원래 떠드는 놈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스마트폰으로 여론이나 보는 중이다.

'대충 정리는 다 됐군.'

[류청우 다른 각도 직캠]

[류청우 때린 거 아님XXX]

해명이 다 퍼지고 나니 그제야 '그러면 그렇지' 같은 말이 나오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부득불 '깬다'고 주장하는 놈들은 튀어나오지만… 이건 어쩔 수 없고.

애당초 류청우 상태가 저 모양이 된 건 꼭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 테니까.

참고로 이 분위기는 숙소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들어간다."

"네!"

식사를 마치자마자 류청우는 방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취침해 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탁.

문이 닫히고 류청우가 사라지자마자 여기저기서 걱정의 한숨을 쉬거나 쓴웃음 짓는 놈들이 속출했다.

배세진이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쟤가 화날 만했어."

"맞아요!"

"처, 청우 형 많이 기분 상하셨을까요? 메, 멤버들이 다치지 않게, 좋은 일 하신 건데…."

선아현이 걱정스럽게 외쳤다.

그래봤자 자러 들어간 류청우 때문에 다들 목소리를 있는 대로 낮춘 상태지만.

"음, 회사 입장에서는 알아서 그냥 피하지 왜 굳이 밀쳤을까, 이거 아닐까? 말 나오니까 많이 부담스러우셨나 봐∼"

큰세진이 안타까운 척 빈정거렸다. 넌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내 밥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가며 말했다.

"청우 형이 그동안 회사에 지나치게 잘해줬지."

지랄맞게 굴었으면 아마 얌전히 '죄송하다'만 반복했을 텐데, 성격이 좋고 책임감 있는 놈이 잘 받아주니 선을 넘은 것이다.

"그냥 이 기회에 청우 형 좀 쉬게 두는 게 어때. 필요한 거나 이상 있으면 회사에 바로 이야기하고."

대부분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합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래!"

배세진은 류청우가 빠지면 본인이 최연장자라는 것을 대단히 의식하는 표정이다. 괜한 체력 소모라고 말해 주고 싶군.

"쉬, 쉬고 나면, 괜찮아지시지 않을까…?"

"맞습니다. 원래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법입니다. 이번 활 동기 동안 청우 형을 많이 보조해야 겠습니다."

"그래."

"자, 우리도 얼른 들어갑시다∼"

짧은 토의는 '앞으로 류청우에게 부담 주지 말자'로 결론이 났다.

상식적이고 배려심 넘치는 팀워크이긴 했으나, 사실 근본 원인을 제거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가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동안 류청우가 하던 일을 매니저 중 누구도 깔끔히 해낼 거란 기대가 안 든다.

치프 매니저는 로드 따리나 하는 일을 왜 자신에게 말하는지 당혹스러워하며 첫 매니저에게 넘길 테고, 그놈이야 뭐… 뻔하다.

분명 어느 순간 류청우에게 또 슬쩍 떠넘길 각을 볼 텐데, 그때 잘못 하면 진짜 지뢰 터진다.

'류청우가 빡쳐서 한 대 갈기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그러니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한다. 매니저를 갈아치우든, 정신 차리게 만들든.

'류청우 멘탈이 얼마나 회복되는지도 체크해야겠고.'

활동하다가 혹시라도 커다란 돌발 사고가 나면 곤란했다. 40만 명 동원 상태이상은 잘 살아 있으니까.

그러니 일단… 내일 류청우 상태부터 유심히 봐두자. 괜찮아 보이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잠들었으나, 다음 날 굳이 결론까지 내릴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오늘 예능 촬영 전에 샵 들릴 건 데, 혹시 따로 전달사항 있어?"

"아뇨."

류청우 상태는 어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매니저 면상을 무슨 물건 보는 눈으로 보고 지나쳤다.

'무서워요!'

'조용.'

이놈은 목소리를 낮춰도 볼륨이 이러냐.

나는 남의 귀에 대고 외치는 차유진을 떼어내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일부러 류청우와 가까이 앉았다.

'간 좀 보자.'

류청우는 특별히 비협조적으로 나오거나 답변을 X같이 하진 않았다. 워낙 평소에 서글서글했기 때문에 대조적으로 보일 뿐이다.

'…사실 평상시 나랑 별다를 게 없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떨떠름하군.

어쨌든, 나는 기회를 봐서 내릴 때 쯤 자연스럽게 류청우에게 말을 걸었다.

"음료 살 건데, 형은 뭐 드실래요."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만, 뭐 알겠다.

"COKE! COKE!"

나는 강력하게 탄산음료를 주장하는 차유진의 지지만 받았다.

그리고 팀원 놈들의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 따위의 시선도 받긴 했으나… 뭐, 애초에 이건 도전도 아니다. 빌드업일 뿐이지.

그리고 다음 날.

"청우 형."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놈에게 생과일주스를 내밀었다.

"괜찮아."

"포도당 공급한다고 생각하시죠. 저희 3시간도 못 잤으니까요."

"…."

류청우는 언쟁할 기력도 없는지 그냥 음료를 들어서 마셨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 너무 단데."

그럴 것이다. 설탕과 시럽을 있는 대로 많이 넣어달라고 했거든.

차유진에게 아주사 당시 썼던 슈가하이 방법을 적극적으로 써봤다. 단순하고 자극적이라 허들이 낮지.

"그래서 맛있던데요."

"…음."

류청우는 결국 음료를 다 비웠다.

아마 뭐라 더 말하기도 귀찮고, 식이를 조절할 자제력을 굳이 발휘할 의욕도 없는 모양이다.

다만, 마시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걸 보니 노림수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나는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컨디션 어떠세요. 전 이번에 유독 좀 피곤한 것 같은데."

"그래. 좀… 피로회복이 덜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렇죠."

역시 번아웃 탈력감 때문이었나.

류청우에게서 요 며칠 중에 처음으로 말이 술술 나온다. 설탕의 위력인지 기력이 순간 올라온 것 같다.

"그래도 확실히 액상과당이 효과가 있나 봅니다! 활력이 생기는 기분입니다!"

"음, 그러게."

김래빈이 참지 못하고 안도한 얼굴로 끼어들어도 평소처럼 온화한 반응이 나왔다.

예상보다도 효과가 좋은데?

나는 턱을 만졌다.

'…역시 정신적 스트레스를 신체 작용으로 풀어야 하는 타입 같군.'

단순히 쉬는 게 아니라, 몸이 좋은 자극을 받아서 개운해지면 머리도 깨끗해지는 타입 같다.

"흠."

귀찮지만, 별수 없지.

'류청우에게는 빚이 있기도 하고.'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장소를 하나 검색했다.

다음 날 오후에는 추억의 히트곡 가사를 틀리면 풀장에 자동 다이빙되는 주말 예능을 잘 촬영했다.

몸 안 사리고 입수했다는 뜻이다.

"우악!"

"너 내가 가만 안 둔다!"

"아니, 우리 테스타 불러놓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MC통통!"

결국 누구 하나 거를 것 없이 물에 쫄딱 젖은 꼴이 되어 타올과 드라이기 세례를 받은 후에야 겨우 차에 올라탔다.

녹초가 따로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서 반신욕이라도 하고 싶군….'

하지만 직후에도 스케줄이 있었다.

고정된 스케줄이 아니라 임의로 텀을 정해 잡은 거라 비교적 자유롭긴 하지만 말이다.

바로 W라이브다.

그나마 빈 시간에 욱여넣은 거라 너무 피곤하면 분량과 컨텐츠를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일정.

그러나 이번에는 숙소에서 편하게 진행하는 대신 각 잡고 찍자고 멤버들과 합의했다.

물론, 류청우 빼고.

"한 시간 뒤죠?"

"넵, 이동하겠습니다∼"

테스타는 사전에 섭외한 장소로 이동하며 짧게 눈을 붙였다.

평소라면 어디로 가냐고 확인했을 류청우도 마찬가지로 말없이 잠이나 잤다.

그래서 놈은 잠시 후 도착한 촬영 장에서 더 당황하게 된다.

"여긴…."

멤버들은 놀란 류청우를 둘러싸고 히죽히죽 웃으며 팔 벌려 장소를 소개했다.

"오늘의 w라이브 장소, 사격장입니다∼"

"짠짠짠!"

"…!"

서울 한복판에 있는 대규모 설비의 에어건 사격장.

바로 내가 전날에 검색한 장소다.

"형 사격 재밌어하시는 것 같았는데, 요새 저희가 그렇게 본격적인 취미 활동할 시간이 없잖아요∼ 이렇게라도 즐기셨으면 해서!"

"즐겨요! 놀아요!"

"…."

류청우는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안면에 은은히 감동한 것 같은 기색이 역력해졌다.

"…고맙다, 얘들아. 재밌겠네."

"히히."

좀 감격한 것 같군.

예상대로 잘 통했나 보다.

며칠 동안 물 밑에 가라앉아 있던 배려심이 드디어 류청우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많이 피곤할 텐데, 괜찮겠어? 이 밤에 이렇게 활동량 많은 걸 또 하긴 힘들 텐데…."

배세진이 시선을 피했다.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보니까 재밌어 보여서 찬성한 거야. 다들 해보고 싶었던 거니까 오해하진 마."

"마, 맞아요. 재밌을 것 같아요…!"

"하하, 그래. 알았어."

"흠, 흠."

좋은 생각이라며 흥분해서 제일 먼저 동의했던 놈치고는 제법 이성적인 척 말하는군.

"그럼 저희 둘씩 짝지어서∼ 류청 우를 이겨라! 이 주제로 W라이브 가시죠!"

"봐주는 거 안 돼요! No mercy! 저 이겨요!"

류청우가 간만에 씩 웃었다.

"괜찮겠어? 3명이 한팀 해도 돼."

"와, 형 우리 너무 무시하신다."

참고로 무시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 직시였다는 것이 단 한 시간 만에 드러난다.

"으억!"

일단 배세진과 김래빈 팀이 류청우와 더블스코어가 벌어지며 침몰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들아 왜 이런 무모한 도전을

-못 본 척 해주자

—ㅋㅋㅋㅋ귀여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른 팀 구경하면서 확인한 실시간 댓글은 이꼴이었다.

그리고 류청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펄펄 날아다녔다.

"헐."

"…저게 되네."

미필 일반인들 사이에서 전 양궁 금메달리스트가 날뛰는 광경은 팬들에게 두고두고 웃음 소재로 남을 것 같다….

"청우 형께서는 뮤직비디오에서 한 번 총기를 사용해 보셨기 때문에 다소 어드벤티지가 있다는 점도 고려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머스킷이고 이건 라이플이라 종류가 다르다는데."

"헉."

"머, 머스킷이 개량을 거쳐서 라이플이란 총기가 탄생했다고, 직원분이 그러셨어…!"

"역시! 이건 절대 배세진 형과 저의 패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전한 결과…."

"오∼ 또 더블스코어!"

"세상에."

이런 만담 같은 소리가 이어지든 말든, 나는 묵묵히 총이나 쐈다.

타탕!

류청우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전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선아현과 내가 가장 류청우 점수를 많이 따라 붙었기 때문이다.

-오 여긴 좀 멋있는데?ㅋㅋㅋ

-좀 치네

-테스타 군대 언제가? 빨리 좀 가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분위기 봐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군대 어그로가 좀 끼긴 했지만, 어쨌든 w라이브도 폭소와 스릴을 동시에 잡으며 제법 성공적으로 끝났다.

"또 만나요∼"

"자주 오겠습니다!"

그리고 통상적인 클로징 멘트를 마지막으로 관계자를 비롯한 모두가 도로 녹초 상태로 돌아갔다.

"하."

"후회는 없다…."

"재밌어요! 저 한 번 더 해요!"

아, 차유진 빼고.

어쨌든 스탭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막간에, 아이돌들에게는 잠시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류청우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이거 좀 마셔."

"감사합니다."

사격도 즐기고 경쟁도 이겨서 그런지 좀 상태가 좋아진 놈은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를 인원수대로 사 왔다.

그리고 캔을 받아가는 내 옆에 서더니, 넌지시 말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현이가 그러는데 문대 네가 여기 오자고 말 꺼냈다며."

그걸 또 굳이 말한 놈이 있었군.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류청우가 간결히 말을 끝마쳤다.

"고마워. …훨씬 낫다."

"…."

나는 놈이 내민 음료를 땄다. 탄산이 올라오는 소리가 시원했다.

"속은 좀 시원하신가요."

"그래."

그럼 됐다.

나는 말없이 제로 칼로리 음료를 들이켰다. 류청우는 자신의 페트병을 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별일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지치더라고."

"…."

"양궁 그만둘 때가 생각나서 그런 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내 생각보다 액티비티 약발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0화]

류청우는 특별히 무겁지 않은 투로 말을 계속했다.

"처음에 후유증 알았을 때는 관리가 가능할 줄 알았거든. 다들 재활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기도 했고."

"…."

"의사도 가능성이 보인다고 해서 꾸준히 했는데… 별 효과 없더라."

류청우가 버릇처럼 자신의 한 손을 주먹 쥐었다가 폈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고… 벗어나거나, 복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지…."

"…."

"아무튼, 그래서 괜히 회사에 화낸 거야. 누가 다치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저러나 싶은데, 음, 또 내가 쓸데없는 짓 하나 싶기도 해서."

저게 탈력감의 원인이었나.

성과 없던 재활 시절과 겹쳐지니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따위의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럴 만했겠어.'

워낙 업무가 과중하던 놈이니 더 허탈함이 심했을 것이다.

나는 약간 갈등하다가, 음료를 다 비우고서야 대답했다.

"형 쓸데없는 짓 하신 적 없는데요."

"그래?"

"예. 다들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저도 그렇고."

"…! 그래? 하하, 내가 뭐 특별히 너한테 해준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니, 넌 내가 X 같이 굴었을 때 같이 화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인성이다.

그때 상황이 더 악화되었으면… 지금쯤 상태이상 걸려서 돌연사했을 수도 있겠군.

"아, 설마 그때? 음, 아냐. 너 정도면 양호하지. 그때도 말했잖아. 나도 회복 불가로 확정 났을 때 그랬다니까."

류청우는 피식피식 웃었다.

"진짜 장난 아니었어. 의사한테 화내고… 선발전 날에는 정말, 내가 생각해도 창피하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물어볼 타이밍이니 말은 해주자.

"뭘 하셨는데요."

"활을 부러뜨렸어."

"…!"

와 이 새끼… 성질은 보통이 아니군.

보통 양궁용 활이 부러지는 물건이 아닐 텐데, 정말 어지간히 지랄하긴 했나 보다.

물론 그렇다고 느낀 대로 대답하는 건 바보짓이고.

"뭐, 사람 안 쳤으니 된 거죠."

"그런가? 하하! 그래, 뭐 연습용 하나 부러트린 거니까."

류청우는 한결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이런 걸로 시원해하는 게 괜찮은지 모르겠다만… 내버려 두자.

그래도 정신 차렸는지 사회성 넘치는 말을 덧붙인다.

"아, 미안하다. 네가 듣긴 좀 불편 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는데…."

괜히 류청우에게 지랄했던 그때를 떠올리게 만들지 않냐는 뜻 같군.

"괜찮습니다. 이젠 별로 신경 안 써서.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괜찮다니까."

걱정은 더 큰 걱정으로 잡으라고 했던가.

맛 간 상태창을 본 뒤로는 이미 지나간 '진실' 확인 정도야 삼삼하다.

그러나 류청우는 자신의 페트병을 만지작거리더니, 자기도 모르게 나온 것처럼 툭 말을 던졌다.

"음, 문대야."

"예."

"사실, 내가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게 있는데…."

"…? 예."

류청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기억은 괜찮아?"

"…!"

"아무래도 그쪽 관련해서는 전문가를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과거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서서히 떠오르는 중이다'라는 설정을 쓰고 있다는 것도 거의 까먹고 있었다.

워낙 사건이 많아야 말이지.

'…이렇게 보니 무슨 막장드라마 설정 놀음이 따로 없군.'

어쨌든, 전에 아무렇게나 뱉었던 변명이 갑자기 훅 치고 올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그리고 류청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를 줄줄 뱉었다.

"네가 부모님 뵈러 간 적도 없고, 사진을 보거나…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던 것 같아서."

"…."

"우리 숙소 생활도 벌써 1년 반이 넘었는데, 무심코라도 들었을 만하잖아."

"…음."

나는 빠르게 뇌를 굴렸다.

"가족에 관련된 기억이 거의 없긴 합니다. 특별히 급하게 꼭 찾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구나."

"예. 그냥 전 지금에 만족합니다."

"음, 그래."

류청우가 페트병을 구겨서 깔끔히 정리하더니,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맞아. 나도 지금이 좋다."

나는 류청우가 본인 입으로 반박하는 그림을 그리며 물었다.

"지치신다면서요?"

"무슨 일이든 안 지칠 수는 없는 것 같아. 잘 관리해 나가는 게 중요 하지."

그래. 그 말이 맞다.

"솔직히 아주사 나올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상상보다 훨씬 잘 돼서 감사한 일이야."

"그렇긴 하죠."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테스타의 행보가 놀라운 성공이긴 했다.

물론, 난 아주사 가 잘될 줄 알고 있긴 했다만.

"익숙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려고."

"…."

거참. 사고방식 한번 건강하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일은 이 며칠처럼 원래 아이돌이 해야 할 일만 하시죠. 회사가 할 일까지 해줄 필요도 없고요."

"하하, 뭐… 기왕 리더 맡았으니까 열심히 해보려고 했지."

그 순간, 저편에서 마침내 최고점을 갱신한 차유진이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WOOOOOW!"

"조용히 해 바보야! 벌써 심야에 가까운 시간인데 소음 공해를…."

"소음 아니야! 여기 우리만 있어!"

"건물 근처 거주자분이…."

"없어!"

"있어!"

나는 얼결에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솔직히 저놈들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리더 역할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으음."

부정 못 하는군.

"그냥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대로면 매니저 형이 월급 받는 이유를 잊어버리시겠는데요."

갑질하는 연예인처럼 한마디 덧붙이자 류청우가 빵 터졌다.

"하하! 그래, 알았어."

그리고 주먹 쥔 손을 옆으로 슬쩍 내밀었다.

"우리 앞으로도 잘해보자."

"예."

주먹을 가볍게 손등으로 부딪쳤다.

좀 오그라들긴 하지만, 뽕맛이 있긴 하다.

"저희 정리 끝났습니다∼"

"넵! 테스타 차로 이동할게요!"

그날 류청우는 적당히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은 채로 숙소에 귀가했다.

"유진아, 들어가 자라. 내일 음방이야."

"네!"

차유진까지 감격해서 말을 잘 듣더라.

멤버들은 하나같이 '사격장은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써놓은 얼굴로 엄지를 치켜드는 등의 행동을 하며 자축했다.

"역시 문대야. 티벳여우라 모든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그 눈이 그냥…."

"자라."

그리고 다들 짧은 시간이나마 푹 잘 잤다는 이야기다.

최고는 다음 날 나왔다.

류청우의 분위기가 확 풀어진 것을 감지한 첫 매니저가 바로 발을 뻗었기 때문이다.

"청우야, 뭐 따로 전달사항 있는 애들 없어?"

류청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요?"

"…!?"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멤버들한테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끝이었다.

류청우는 기지개를 켜며 차에 올라 탔고, 매니저는 한 대 맞은 얼굴로 주춤주춤 따라 탔다.

치프 매니저한테 깨진 게 바로 며칠 전이니 괜히 류청우에게 볼멘소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걸로 됐나.'

일 잘하는 놈 구하기까지 시간은 벌 수 있겠다.

그리고 간만에 열어본 인터넷에서는 류청우가 사람 때렸다는 개소리는 싹 들어가고 대신 사격하는 장면으로 화제가 전환되어 있었다.

-역시 태릉이 키운 남돌

-이게 되냐

-양궁 국대들은 역시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와 씨 사격도 이렇게 하는데 진짜 양궁 그만둘 때 피눈물 났겠다;

-새 진로를 아이돌로 잡아줘서 감읍할 따름

"오오∼ 청우 형 사격 멋지다고 난리네요!"

고개를 빼서 화면을 훔쳐본 큰세진이 일부러 류청우를 추켜세웠다. 류청우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그냥 재미 삼아 했던 건데 뭐."

"아닙니다! 어제 사격을 지켜보며 당연히 청우 형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 예상했습니다만, 역시군요."

"괴, 굉장히 멋있었어요…!"

류청우의 분위기가 풀어진 것에 안 도한 놈들이 칭찬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그리고 큰세진은 반응 중 몇몇 댓글에 주목한 모양이다. 질문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어쩌다 아이돌을 진로 잡으셨습니까∼?"

"아, 나?"

류청우가 애매하게 웃었다.

"음, 사실 부모님이 추천하셨어."

"우와!"

"부모님이요?"

"웅, 그분들 보시기엔 어릴 때부터 춤이나 노래를 괜찮게 했다고 자꾸 그러시니까… 그냥 취미 겸 시작했어."

양궁 그만두고 집에 처박혀 우울했을 놈을 집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부추긴 게 새 진로가 된 모양이다.

"너희는? 특히 유진이는 어쩌다 아이돌 하게 된 건지 궁금한데."

"모르는 사람이 말 걸었어요!"

"공모전에 제출했던 비트가 채택되어 서울에 올라가자 계약서가…."

차 안의 화제는 어느새 '왜 아이돌을 하게 되었는가'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한테까지 질문이 돌아왔다.

"그러면 문대는?"

나?

이건 솔직히 대답해도 상관은 없다만… 좀 민망하긴 하군.

"…노래방에서, 아주사 작가님한테 캐스팅당해서요."

"진짜?"

"와, 그거 썰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구나∼!"

차 안이 잠시 시끄러워졌다. '박문대는 대체 얼마나 재능충인 것이냐'가 주제인 것 같다.

"그럼 문대는 지망생도 아니고 그냥 생일반인으로 시작해서 저렇게까지 된 거네?"

"재, 재능이 굉장한 것 같아…! 무, 물론 문대는 열심히 노력도 했고!"

"…대단하네."

"음, 감사합니다."

상태창 이야기 꺼냈다가는 몰매라도 맞을 것 같다.

어쨌든, 처음 이 몸에 들어왔던 그 순간을 떠올리니 어쩐지 감회가 새롭군.

사실 상태창이 주는 스탯 증가나 특성 뽑기가 없었다면, 그걸 기초로 이만큼 직업군에 맞게 성장하지 못 했을 테니까 말이다.

'상태이상 못 해제하면 뒈지는 것만 없었어도 꽤 보람찬 몇 년이었을 텐데.'

…아니, 정정하겠다.

상태이상을 포함해도 제법 보람찼다.

내가 남의 몸으로 과거에 돌아온 이 몇 년이 너무 밀도가 높아서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까닥하면 시한부 선고니 살려고 기를 써서 그런가.'

음, 제법 설득력이 있다.

"…그럼 넌 꼭 이걸 하려던 건 아니었던 거네. 괜찮아?"

"예?"

"활동… 괜찮냐고."

배세진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예. 재밌네요."

"그렇지∼"

"후, 후회 없지?"

나는 씩 웃었다.

"없어."

"오오∼"

멤버들이 요란하게 호응하며 박수를 쳤다.

김래빈은 슬그머니 음원까지 재생시켰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와서 마법소년 EDM 버전을 만들…."

"가자!"

그리고 차 안은 열정적인 아이돌 뽕으로 찬 놈들이 고개를 까닥거리는 꼴로 가득 찼다.

'가관이다.'

나는 의리상 그룹 SNS에 해당 장면은 올리지 않기로 해줬다.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은 다른 잡음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테스타 스탠바이!"

2주 차 음악방송 사전녹화도 깔끔히 진행되었고, 컴백 전주와 첫 주에 촬영한 예능들은 하나둘 전파를 탔다.

그리고 물론 스케줄이 전부 음악방송과 예능만으로 채워져 있던 것은 아니다.

"여기 보시고∼ 턱은 조금 더 들고!"

행사도 몇 번 뛰었으나, 1군에 올라간 관계로 이동 거리가 멀어 비효율적인 행사보다는 더 단가가 좋은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바로 광고다.

"옷깃 한번 만져주세요!"

데뷔 때부터 꾸준히 광고를 찍긴 했지만, 요새는 아예 규모가 달라졌다.

쏟아지는 광고 요청 속에서 소속사는 알짜배기를 제법 잘 골라왔는데, 이미지 소비가 심하지 않고 단가 센 걸 용케 잡아 온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인공지능 큐리어스 같은 무리수도 없고.'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회사 이득도 알차게 챙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모기업인 T1 이 아니라, 소속사인 T1 스타즈의 이득 말이다.

당장 오늘 촬영하는 광고를 보자.

"헉,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같은 소속사의 후배 아이돌, '미리내'를 스마트폰 광고 촬영 현장에서 만났다.

'오.'

소속사의 이름값에 대한 야망이 느껴지는 묶어팔기였다.

그리고 그건 이용해 볼 여지가 충분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1화]

스마트폰 광고가 후배 아이돌과 아예 공동 모델인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작 알았겠지.

다만 함께 촬영하는 부분이 몇 컷 있었을 뿐이다.

"자… 여기서 같이 들어와서, 손에 든 거 한번 보여주시고!"

"예."

"아, 탭도 꼭 한 손으로 들어주세요∼ 가볍게!"

"넵!"

후배 아이돌이 같은 브랜드 라인의 태블릿을 광고하는데, 광고에 추가 효과를 노리고 두 그룹 동시 등장 컷을 약간 넣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쪽이 짬으로든 인지도로든 앞서기 때문에 테스타 촬영일에 미리내가 한 번 더 대기했다가 들어오는 꼴이 된 것이고.

'그래도 또 당일까지 말 안 해준 건 선 넘었는데.'

첫 매니저가 류청우에게 손절당한 충격이 커서 깜박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회사에서 뭉갠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심증은 후자지만.

'요새 몇 번 본부장 의견 튕겨내니 감을 잡았나.'

소속 아티스트들이 서로 엮이기 싫다고 수정을 요구할 가능성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미리 알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괜히 말만 많아지니까.'

가뜩이나 '마법소년' 관련 화제로 이미 긁고 지나간 판이다.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아 또 끼워팔기 무슨 일이야

-딱 봐도 셤별 단독이었는데 후배 끼워주는 걸로 딜했구만ㅋㅋㅋㅋㅋㅋ 탐욕 지렸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어필할 수 있는 미리내를 메인으로 밀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사업적 안목이 참 아쉽습니다.

-그팬들 정말 주제파악 못 하네 음원음반 뭐라도 이겨야 통하지 풉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웅 우리도 싫어 우리 갓기들 다 늙은 남돌에 갖다 대지 마✋

—ㅋㅋㅋ저러다 보통 눈 맞던데 벌써 한쌍 이상 연애 시작했다에 앨범 건다ㅋㅋㅋㅋㅋ

비교부터 시작해서 연애 추측까지.

쓸데없이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다행인 건 회사도 이걸 의식은 했는지, 막상 와보니 수상쩍게 묶이는 컷은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기획사 T1 Stars의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프리미엄 전자기기 라인 '코스믹'을 강조하는 류의 배치였다.

"별처럼 빛나는 나의 아이덴티티."

"별의 선택, 코스믹!"

근데 이것도 은근히 빈정상하긴 한단 말이다.

'자기들이 키운 것도 아니면서 뭐 대단한 공통점과 비전이 있다고 이 지랄이냐.'

아마 이제 다른 신인도 슬슬 개발하고 싶으니, 단순히 아주사 부속 기획사를 넘어 이름값이 필요하다고 내부에서 결론 나온 모양이다.

기존에 있는 그룹들이 이미 흥행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뜬 채로 들어와서 신인 주제에 기가 센 것이라고 투덜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따로 상장이라도 목표로 하고 있을 수도 있겠고.'

어느 쪽이든 아마 현 본부장 머리 에서 나온 생각이겠지.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걸 이용할 수 있겠다는 각이 선 것이다.

'일단 사례 수집부터 해볼까.'

내 촬영이 끝날 때 즈음에 기회가 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의 개인 컷 촬영 이후, 미리내와 짧은 공동 촬영이 마무리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촬영을 끝내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한 녀석 근처로 갔다.

당장 90도 인사가 돌아왔다.

"어어, 선배님! 오늘 촬영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했습니다."

바로 지난 시즌 아주사 에서 2위를 한 그 후배였다.

"촬영은 괜찮으셨나요."

"넵! 아, 어, 선배님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과연 대국민의 지지를 받아 1위로 선출된 아이돌…."

"그만합시다."

"넵."

본인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후배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요새는 좀 어떤가요."

"예?"

"회사요."

"음…."

그래도 당장 '너무 감사하죠!' 같은 사회생활로 꽉 찬 발언이 튀어나오지 않은 걸 봐선, 뉘앙스를 눈치챈 것 같았다.

후배는 약간 비장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전하시죠…!"

"…."

여러 의미가 담겨 있군.

"다음 앨범도 자체 프로듀싱 곡으로 컨펌은 났을까요."

"…음, 더블 타이틀로 가자고 하시긴 하는데."

"흠."

테스타가 데뷔 때부터 저걸 해 먹었으니 흥행 공식이라고 부추기고 있나 보다.

"하나는 영어로 하자고 하셔서요."

"…!"

후배는 해탈한 직장인의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중 한 곡이라도 저희 곡으로 넣어주실 것 같아서 다들 이 정도로 만족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

거참. 예상은 했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고초가 많은 모양이다.

"케어는 어때요."

"케어요? 음, 좋죠! 샵이나 코디도 잘해주시고요…."

말이 빗겨갔다. 나는 화제를 도로 끌어왔다.

"원래 저희 쪽에 있던 매니저 형도 한 분 그쪽으로 가셨잖아요."

"…! 그쵸…! 어휴, 정말 감사하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

"아뇨. 그러실 필요 전혀 없고. 그런 류의 케어는 어떤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나는 '직장 괴롭힘인가…!'라고 얼굴에 적혀 있는 후배를 현실로 돌려 놨다.

"매니지먼트실에서 스케줄은 잘 브리핑해주시는지, 멤버들 건강은 잘 체크하시는지… 같은 거요."

"아, 음."

후배는 고민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회상을 하는 건지 말을 고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다음 말은 제법 진심처럼 들렸다.

"잘 모르겠어요. 워낙 바쁘시고 벅차 보이셔서… 좀, 저희 멤버수가 많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힘들어 보이셔서 괜히 죄송하기도 하구요."

역시.

이쪽도 제대로 돌아가진 않나 보다.

'9명이었던가?'

테스타의 1.5배니 분명 매니저가 더 붙어야 할 텐데, 보니까 아직도 2명으로 돌리고 있더라고.

'프로듀싱팀도 오락가락하면서 본부장 말 들었다, 이쪽 말 들었다 하는 것 같고.'

이쪽은 본부장이 더 꽉 쥐려고 하니 매니지먼트 실장 약발이 덜 듣는 것 같다.

흠… 이 정도면 어떻게 되겠는데.

"그렇군요.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힘냅시다."

"에이, 아니에요! 저희 즐겁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나는 거기서 대화를 끝내려다가, 마침 생각난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렇지."

"…?"

"혹시 전담팀 신설에는 관심 없나 해서요."

이게 사실 본론이다.

매니저 사태 이후로 생각해 온 해결 방안.

"전담팀이요…?"

후배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제안을 잡았다.

"아, 저희 그룹을 전담하는 팀이 만들어지는 건가요?"

"확정은 아니고… 이번에 진행해 볼 생각이거든요. 혹시 필요하시면 후배분들 사례도 함께 전달하겠습니다."

"…!"

"물론 직접 들었다는 식은 아니고… 회사 측근에게 들었다고 말할 생각인데, 어떠세요."

후배는 침을 삼키더니, 곧 눈을 빛 내며 대답했다.

"저희야 정말 감사하죠."

현명한 선택이다.

이미 근황을 이야기한 이상, 사실 내가 함정을 파거나 사기치려는 의도였다면 굳이 의사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음, 그럼 같이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그 순간, 저 뒤에서 후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촬영이 완전히 끝난 모양이었다.

"민하야! 야 빨리 와 봐! 이 초콜릿 미쳤다, 대박 맛있어!"

"오케이 언니∼ 아, 선배님,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네. 잘 들어가세요."

후배는 같은 멤버에게 쏜살같이 뛰어갔다. 팬에게 받은 것 같은 거대한 초콜릿 박스를 흔드는 녀석은… 1위 출신이군.

참… 해맑다.

'…저런 타입이 원래 인기가 많은 건가.'

아니면 오디션 특수일까.

"형! 이거 봐요! So Cooool!"

"어, 멋지다."

나는 어디선가 나타난 차유진이 들이대는 촬영 소품-서핑보드에 반응해 주며, 이 업계의 오묘한 구도에 괴상한 감상에 잠길 뻔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이동하는 낮 중에 연락해야 할 곳이 있었다.

'슬슬 전담팀 이야기 진행해야지.'

참고로, 이미 다른 놈들과 이야기는 끝났다.

류청우의 상태가 회복된 바로 그 주에 말이다.

-전담팀이라….

-과연 회사에서 그런 비용의 지출을 선뜻 감당해 주실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전 찬성! 문대가 좋은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겠죠∼

-…나도 찬성이야.

-오!

-계속 회사에서 관리 문제가 나오잖아.

재밌는 건 배세진이 의외로 단칼에 동의하더니, 적극적으로 의견을 밀었다는 것이다.

-여기 계속 이럴 것 같으니까… 지금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나아.

-세진이 멋진데?

-…! 머, 멋져 보이려고 한 게 아니라… 아무튼! 큼, 다수결이라도 붙이든가!

-오우.

그래서 그 박력에 밀려 만장일치로 진행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렇다.

"메, 메일 내용 보완하는 중이야?"

"그래. 너도 뭐 덧붙일 거 있어?"

"아, 아니! 다, 다 같이 이렇게 열심히 적었으니까, 잘 전달되면 좋겠어…!"

"그러게."

바로 T1의 계열사 중에서도 이 소속사의 직속 모기업인 T1 컬쳐에 직접 이야기를 넣어버리는 것이다.

실장이랑 본부장 싸움도 붙여놨겠다, 이제 회사에서 누군가 독단으로 테스타를 직접 휘어잡으려고 하긴 힘들다.

그러니 이젠 대충 '신인 아티스트는 몰라요' 기조로 모른 척 비비는 걸 버릴 때가 됐다.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 성격 나빠 보이는 게 이득이 되는 시기가 온 거지.'

역시 그룹 자체가 세력이 되어 사내에 직접 치고 올라오는 게 낫다.

자체 프로듀싱한 이번 활동까지 히트했으니, 이제 아쉬운 건 저쪽이다.

글로벌 성과도 꽤 괜찮았는데… 이건 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연락책은 실장한테 입 털어서 빼냈고.'

그놈은 테스타가 본부장 실각 떡밥을 주지 않을까 멋대로 오해하고 있다.

그 대신 이 회사의 고질적 문제를 찌를 생각이지만 말이다.

'인력 수급이 안 돼.'

계속 낙하산을 꽂고, 돌려막고, 무 경력자를 데려오니 아귀가 맞물려서 돌아가지를 않는다.

이걸 가장 쉽게 적자면… 리스크 관리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식이 좋았지.

'보안 문제, 스케줄 전달 문제….'

가장 최근에는 류청우가 겪은 데이터 팔이 공격 사건부터, 스케줄 전달 미비와 휴가 때 내 스토커 부상 사건을 잘 연결한다.

그리고 이미 이 사람들도 알고 있을 '스케줄 유출 산업스파이' 사건까지 잘 이으면, 이런 주장이 가능해진다.

'전담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신생 자회사이기 때문에, 독립된 전담팀을 운영하는 큰 결정을 자체적으로 쉽게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적고.

무엇보다, 이러다가 누가 다치거나 활동을 못 하게 되면 큰 논란과 손해가 될 것이라는 걸 강조한다….

-문대야, 이건… 우리가 너무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그런 놈들이 힘들어서 지랄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 더 좋죠.

-으음, 그래.

1군 진입한 이상 이 정도 깽판은 괜찮다.

평소 업계에서 이상하게 군 것도 아니니 관계자 사이에서 잠깐 신빙성 없는 소문이나 돌고 말겠지.

무엇보다 상대에게는 공손하게 굴면 그만이다.

쟤네가 소속사에 불만이 있든 말든 듣는 나한테만 예의 있게 공손하고 굽신거리면 그만이지 않겠나.

'사전 연락도 잘했고, 서식에 어긋나는 것도 없고.'

다짜고짜 해달라는 어리광이 아니라, 기안문처럼 깔끔하게 잘 만든 것 같다.

나는 자판에서 손을 뗐다.

"됐다."

"오∼"

"이제 전송만 하면 되는 군요!"

"전송! 전송!"

그렇게 '아티스트 전담 프로젝트 팀 신설 관련 건의' 기안문은 T1 컬쳐로 잘 직송되었다.

모기업의 압력이 '브랜드가치' 명목으로 밀고 들어오면 본부장도 결국 결사반대하지 못하고 오케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누구든 순순히 해주진 않을 것 같긴 하다만.'

사실 '심정은 알겠으나 비용과 원칙의 문제에서 불가능하다'는 답이 올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 중이다.

'그러면 또 다음 단계로 가는 거지.'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어쩐지 좀 재미가 있었다.

'뭐든 와라.'

그러나, 그 날?시 반쯤 걸려온 전화는 그다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을 끌고 갔다.

"…서바이벌 출연이요?"

-그렇죠.

전화기 너머 상대방은 깔끔히 대답했다.

-이번에 아이돌 주식회사 제작진들 싹 여기 산하 스튜디오 들어온 거 아세요? 거기서 제작하는 새 프로그램입니다.

"음."

-물론, 이번에는 테스타가 참가자가 아니라 멘토로 나오는 거고요.

'이제 겨우 3년 차가?'

상상도 못 해본 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