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T1 담당자와 전화를 끊고 대화를 복기했다.

'KPOP 글로벌 서바이벌 리얼리티에 멘토로 출연해달라… 인가.'

물론 지금까지 '글로벌'을 표방한 서바이벌은 한두 개는 아니었다. 당장 아주사 만 해도 글로벌 KPOP 스타를 뽑는다고 설쳤으니까.

다만 이번 포맷은… 좀 독특하긴 했다.

'Tnet 방영이 아니라 넷플러스 자체 제작 타이틀이기도 하고.'

아마 아주사 가 영미권 넷플러스에서 소소한 성공을 거둔 것에서 착안해서 제작이 들어간 것 같았다.

프로그램 구성이 상당히 실험적이었는데, 사실 그것보다는 오퍼가 괜찮았다는 게 중요했다.

-출연 확정만 되면 바로 전담팀 구성하는 쪽으로 다 이야기됐어요.

깔끔하다.

전담팀과 예능 출연이라면 교환비가 고려할 만하지 않은가.

'멘토가 테스타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전달받은 멤버들의 반응이 하나같이 '해볼 만하다'였으니까.

"음… 괜찮네."

"출연만 하면 전담팀이 신설되는 겁니까? 장기적으로 대단히 이득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그만큼 걱정도 나왔다.

"…그 제작진들이라는 게 좀 그렇긴 한데."

"내, 내가 누굴 가르칠 만한 실력이, 부족한데… 괘, 괜찮을까?"

예상했던 이야기였고, 대부분은 합리적인 선에서 정리되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너 잘해."

"맞아맞아∼ 보니까 프로그램 성격상 '멘토'라고 그렇게 두들겨 맞을 일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맞아."

이 프로그램은 신인이 멘토라는 게 도리어 셀링포인트가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굳이 멘토가 악마의 편집을 받을 이유가 없는 포맷이었다.

대체 어떤 프로그램이냐고?

출연 제안을 받아들인 후, 제작진과의 미팅에서 들은 말이면 설명이 될 것이다.

"케이팝 혐오자들을 모아서 케이팝 활동 트레이닝을 시킬 거에요. 물론 단발성 유머로 끝날 일회용이겠지만."

"…?"

멤버들이 약간 당황했다.

'여전하구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적나라하게 말하는군.

오랜만에 보는 류서린 작가는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이 인간, 테스타가 이렇게까지 떴는데도 도리어 태도가 더 거칠어졌는데.

'출연 섭외 때처럼 살살 구슬릴 필요가 없어서 이러는 건가.'

작가를 다소 불편해하는 류청우를 고려했는지, 큰세진이 얼른 대답했다.

"음∼ 케이팝 잘 모르는 외국인분이 케이팝을 알아가면서 정이 드는 그런 구도인 거죠?"

"그렇게 볼 수도 있죠."

더 크고 과격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선 그걸 세세히 알아줄 필요는 없다.

제작진이 테스타에게 요구한 건 하나였다.

"무조건 잘해주셔야 해요."

그리고 이건 특별히 걱정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여러분의 실력이 더욱 우월해 보이도록, 대본도 최대한 잘 구성해 보겠습니다."

"…그렇지! 테스타분들은 워낙 늘 대단하시니까요! 저희만 더 노력해서 그 모습을 화면에 잘 담으면 될 것 같아요∼"

류서린 작가의 필터 없는 말에 약간 당황했는지, 다른 제작진이 끼어 들어서 슬쩍 테스타를 치켜올렸다.

그때, 조용하던 류청우가 담담히 물었다.

"그러다가 화면에서 괜히 오만해 보이는 일은 없겠지요?"

"…!"

"…그럼요."

류서린 작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약간 동요가 보였다.

'아하.'

아까 태도는 기선제압이었군.

이 제작진에게 반감이 있는 테스타가 괜히 까다롭게 굴까 봐 더 강하게 나왔나 보다.

'애초에 전담팀과 맞바꿀 딜로 출 연을 내밀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나.'

테스타가 이 제작진 작품에 순순히 출연하지 않을 거란 말이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서 싹 돌았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직구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니 뺀질거리진 못한다. T1 쪽에서 이미 상당히 입김을 넣어둔 것이 분명했다.

'뭐, 편집 걱정은 없겠군.'

제작진이 바보도 아니고, 모기업과 척질 리가 없다.

"멘토는 테스타 여러분을 포함해서 다양한 KPOP 스타분들이 이미 섭외가 된 상태고…."

"네네."

이후 미팅은 순조롭게 흘렀고, 특별한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기사도 크게 떴다.

[넷플러스와 손잡은 케이팝, 대규 모 서바이벌 예능 제작 돌입]

['화려한 출연진 보장'… 넷플러스 케이팝 리얼리티의 정체는?]

[넷플러스, 케이팝 예능 'Know KPOP Now' 초대형 투자… 케이팝 시장 노리나]

신생 제작 스튜디오의 이미지를 독자적으로 키우고 싶은지, 일부러 기업명인 T1은 언급하지 않은 듯했다.

대신 일부러인 듯, 인터넷에서 출연진에 대한 찌라시가 빠르고 크게 돌았다.

-ㅂㅇㅌ 출연 확정이던데

└망상 지렸고 남돌대장이 뭐하러 넷플 3류 예능 따위를 나오누

└병X아 넷플이 왜 3류야 ㅂㅇㅌ 다큐도 넷플에서 제작했구만ㅋㅋㅋ

-라인업 양심 뒤지게 쓸어가서 계자들 사이에서 말 X나 나온다던데 궁금하네

-제작이 마이티 스튜디오? ㅅㅂ여기 아주사 제작진들 소굴이라며 존 잼 확정ㅋㅋㅋㅋㅋㅋㅋㅋㅋ

└셤별, 영1린까지 다 나온대 아주1사 출연진 다 잡혀 온 듯

└인터넷 다 뒤집어지겠구먼

-아니 그래서 대체 무슨 프론데 오디션은 맞냐 저 라인업으로 무슨 서바이벌;

어차피 멘토라 분량이 그리 크지 않은 걸 알았다면 금방 식었을 텐데,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일단 출연설만으로도 난리였다.

'구체적으로 안 밝힌 효과를 톡톡 히 보고 있군.'

온갖 아이돌들이 거론되는 가운데, 아직 구체적인 공식 출연진 기사는 엠바고가 걸린 채로 촬영 첫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LA로 향하는 11시간의 비행 뒤에, 혹시 했던 루머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X발.'

진짜 VTIC이 있었다.

단. 나머지 놈들 말고 청려만.

'사전에 들었던 출연진 라인업에는 없더만.'

나중에 들어보니 막판에 겨우 오케이 사인을 친히 내려주셔서 전용기 타고 합류하셨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제일 급 달리는 멘토 한 놈이 잘렸을 것이다.

"선배님께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단독도 아니고 멘토 중 하나로 참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런 예능 스타일에 말이지.

그리고 청려는 설마 했던 대답을 내놨다.

"아, 나 곧 솔로 앨범 나오거든요. 그래서 글로벌 홍보 겸?"

"…."

"후배님 말대로, 그룹 밖으로도 활동 방향을 좀 돌려본 거죠. 하하."

"아, 예."

'회사 무슨 수로 설득했냐.'

팬들이 개인 활동을 요구하며 정기적으로 트럭을 보내도 까딱없던 그 소속사가 솔로를 내줬다고? 탈퇴 협박이라도 했나?

…잠깐.

'설마 지금까지 솔로 안 내던 게 저놈 입김이었나.'

그룹 활동에 다른 멤버들이 매달리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틀어막고 있었을 수도 있겠군.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만.'

이놈이 여기 나오든 말든, 좀 기분 나쁜 것을 제외하면 별문제는 없다.

"…박문대! 우리 앉자!"

"아, 네."

나는 우렁찬 배세진의 부름에 부스 내 지정석에 돌아와 착석했다.

배세진이 단번에 마이크를 가리고 황급히 숙덕였다.

'저, 저 미친놈은 왜 자꾸 너한테 말을 걸어?'

'그러게요. 또 대가리 박살 나고 싶나.'

'….'

휴가 때 부상 사건의 전말을 아는 놈들이 이렇게 지원이 들어오니 편하긴 하군.

'이대로만 갈까.'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프로그램이 망해도 상관없다.

이 라인업을 끌어들여 놓고 망하면 제작진 잘못이지, 테스타 탓이라곤 할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바로 어제 전담팀 구성안이 회사에서 통과되었다. 이제 활동 끝나는 시기에 맞춰서 괜찮은 사람들만 좀 끌어오면 된다.

'그럼 됐지.'

이 딜에서 먹을 걸 다 먹었으니, 그냥 테스타가 이 프로그램 속에서 욕만 안 먹으면 그만이다.

비행시간이 좀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온 김에 미국 스케줄도 좀 소화하는 걸로 일정 균형도 괜찮다.

'뭐, 대본 보니 어그로는 출연진들이 다 먹겠어.'

아주사 제작진 놈들은 진짜 지옥 불에서 기어 올라온 것 아닌가 싶다.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넵∼"

멘토들이 관찰하는 모니터 화면 속에서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대본대로의 모습과 언행이다.

-전 유명해질 준비가 됐거든요!

-쿨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지만, 물론 소셜미디어에서 하트를 받기 위해 거짓말 정도는 하죠. 다들 그러지 않나요?

-사람들이 절 알고, 열광하고, 제 행동에 미쳤으면 좋겠는데요. 그걸 위해 뭐든 해야죠.

영어 밑으로 달린 친절한 한글 자막이 저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속되게 말해 관종이다.

'유명해지기 위해, 셀럽이 되기 위해 영혼도 팔 것 같다'는 평을 받기 딱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유명인들이 유명해지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이야기로 참가자를 모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제작진들이 굳이 명시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하나 더 거른 것이 있다.

바로 음악 취향이다.

-케이팝? 아뇨! 전 그런 건, 음… 안 들어요! 절대! (폭소)

-학교에서, 어, 알죠? 그런 애들이 많이 듣는 걸 보긴 했죠.

이놈들은 류서린 작가 말대로 KPOP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했다'는 너무 밋밋한 표현이고… '무시한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전에 우리가 게임 콜라보 덕에 출연한 미국 토크쇼를 보고 코웃음 치던 차유진이 딱 저런 느낌이었지.

"우∼ 너무 해요!"

정작 본인은 거리낌 없이 모니터를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게 좀 웃기긴 한다만.

아무튼,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스토리가 확립된 것이다.

참가자들이 '넷플러스를 타고 전세계에 방영되어 유명해질 나'를 기대하며 리얼리티에 출연했다가, 케이팝 극기 훈련 맛을 보게 된다…는.

'이래서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난리였던 거겠지.'

저놈들이 입 떡 벌리고 놀라는 장면, 그리고 '다시는 케이팝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선언하는 장면을 뽑고 싶었나 보다.

'국뽕은 확실하군.'

게다가 해외 케이팝 팬들에게도 어그로는 확실히 끌겠다. 그걸 어떻게 안 오글거리게 보편적 호감으로 소화하는지가 문제지만.

"재밌네요."

"싫어하실 수도 있죠!"

모니터를 보며 한마디씩 하는 놈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어차피 저런 장면이 나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이미 참가자들도 이 사실을 다 알아서 짜고 치는 고스톱일 확률도 상당한데.'

뭐,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우리는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하면 됐다.

'유명인' 누가 등장할지 두근거리며 모여있는 참가자들이 있는 곳에, 멘토들이 무대장치를 타고 팀마다 등장하는 것 말이다.

몹시 화려한, 해외에서 생각하는 'KPOP스러운 효과'와 함께.

퍼퍼퍼펑! 피피피융!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여러분에게 유명해지는 방법을 알려줄… 케이팝 스타 7팀입니다!]

오성에서 지원받은 인공지능 MC가 영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트장 상단에서 천이 떨어지며, 전광판에 진실이 떴다.

-Welcome to

K-POP Training Camp

당연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

[세상에!]

하지만 당황하고 떨떠름하고, 일부러 과하게 감탄하거나 억지로 웃는 관종 놈들을 데리고 촬영은 바로 다음 컷으로 넘어갔다.

'시간 없어.'

이 프로그램에 7팀이나 되는 인기 아이돌들이 뭐 얼마나 시간을 써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멘토들 다수는 퇴근하고 일부만 도로 들어가서 의상을 갈아 입고 준비하는 사이, 참가자들은 새 컨텐츠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일명 '인트로 스테이지'다.

[이 스테이지에서는, 당장 이 리얼리티 쇼의 승자가 되어서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캠프에 입소하기도 전에요!]

요약하자면 '쟤네가 멘토인 거 인정 못 하겠지? 너희가 이기면 바로 상금 줄게'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첫 담당을 맡았다.

[우리의 멘토분들∼ 등장해 주세요!]

유치하지만 잘 먹힐 것 같은 설정과 함께.

[무작위로 선정된 LA 주민 100명을 관객으로, 여러분은 멘토와 같은 곡을 번갈아 부르게 됩니다!]

[물론, 이 곡은 케이팝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전에 선정한 팝송입니다! 개인기로 뽑으셨죠?]

[그리고 멘토는 지금 그 곡을 확인 할 거예요!]

바로 계급장 떼고 붙는 것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3화]

세트장에 조성된 무대는 미국 공원에 있을 법한, 개방된 원형 계단 노천극장 스타일을 따 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그만 게 360도 뻥 뚫려 있어서 관객이 사방으로 코앞에 있다는 뜻이다.

'신선한 경험이긴 하겠군.'

관객으로 초청된 주민들이 하나둘 찾아와 검문을 거치는 동안, 나는 대기실에 카메라를 끼고 앉아서 봉투를 받았다.

반짝이가 요란한 게 미국 감성이었다.

인공지능 MC의 영어 설명과 함께 귀에 낀 인이어에서 통역이 나왔다.

[이 봉투 안에 든 것은 참가자들이 고른, 자신의 시그니처 곡입니다!]

[우리의 KPOP 멘토는 이 세 곡을 한 시간 안에 전부 익힐 예정입니다.]

[어떻게 되는지 볼까요?]

볼 것도 없다.

이미 사전에 어떤 곡들이 후보인지 할 건지 제작진이 다 알려줬거든.

'물론 이 세 곡으로 추려서는 아니지만.'

한 열몇 곡을 주고, 이 안에서 나올 거라고 언질 준 정도다. 팝송이라 아예 모르는 곡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 참가자들의 달리기든 싸움이든 해서 그중 이 세 곡을 선정한 것일 테고.

음, 방송에서 참가자가 '내가 원했던 건 이 빌어먹을 곡이 아니라구요!' 같은 말을 외치는 게 벌써 보이는 것 같은데.

[긴장되시나요?]

[뭐, 약간은요.]

뻔한 질문에 뻔한 답을 돌려주고, 나는 봉투를 뜯었다.

"음."

뭐, 딱 예상대로였다.

'한 시간도 필요 없겠는데.'

비행기 여독이나 풀고 있도록 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세트장.

선물로 챙긴 와인이나 화장품 봉투(전부 T1의 협찬이었다)를 한 손에 든 채, 팔짱 낀 주민들은 큰 기대는 없이 무대를 기다렸다.

이름 있는 쇼도 아니고 넷플러스 제작 외에는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른다던데요』

[차라리 마술쇼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부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는 참가자들이 이 관객들의 웅성거림을 듣는 것을 찍는 카메라 역시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인트로 스테이지'에서 셀럽이 되기 위한 자신의 장기로 '노래'를 고른 것은 총 8명.

그리고 관객들에게는 버튼 하나가 주어졌다.

[관객들이 버튼을 누르면, 그 자리에 순간적으로 불이 반짝입니다!]

[그들은 '좋다'고 느끼면 버튼을 누를 겁니다.]

[그리고… 경고! 그들은 나오는 모두가 참가자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비밀스러운 케이팝 멘토의 존재를 모릅니다!]

[자, 그럼 우리의 '케이팝' 캠프 참가자분들, 무대 위로 오르시겠습니다!]

관객들은 무대 위로 아홉 명의 사람들이 리프트를 타고 등장하는 것에 반사적 환호를 보냈다.

[와!]

참가자들 역시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 거나 방방 뛰었다. 신난 그 모습들이 방송에서 어떤 종류의 거만함 이나 철없음으로 편집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큰 후드를 뒤집어쓴 동양인 청년도 있었다.

다만 요란한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별 움직임이 없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박문대다.

[자, 첫 곡은… 오! 필 가르시아의 'Drive it' 입니다! 달려볼까요!?]

R&B와 팝을 솜씨 좋게 섞어 듣기 좋은 몇 년 전 유행가였다. 그리고 이 나라 남성들의 오디션 프로그램 단골 곡이기도 했다.

[오∼]

관객들은 통상적인 느낌의 선곡에 적당히 예의 바른 수준의 반응을 보냈다.

다만 다음 규칙을 설명하자, 그 감탄에 진심이 섞이기 시작했다.

[무대 위 참가자들은 무작위로 지목당할 때마다 노래를 부를 겁니다.]

[좋으면 버튼을 사정없이 눌러주세요! 많은 불이 오래 들어올수록, 해당 참가자의 노래를 더 길게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불이 별로 없다면… 음, 다음!]

기계 목소리가 내는 능청스러운 말에 관객석에서 웃음이 쏟아졌다.

[하하하!]

반응 좋으면 그만큼 노래를 더 부를 수 있고, 반응이 나쁘면 끝.

눈에 딱 띄어서 쉽고, 잔인할 만큼 자극적이라 재밌는 규칙이었다!

[자, 그럼 1번부터… 시작!]

심호흡하거나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마이크를 돌리는 참가자들 사이로 음악이 울렸다.

그리고 1번 참가자가 눈을 끔벅이며 마이크를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제법 그럴싸한 음을 만들어냈다.

-거침없이 차를 몰아∼ 난 큰 엔진과 광나는 헤드라이트를 가, 가졌어∼

[오….]

적당히 버튼을 눌러주던 사람들은 참가자가 말을 더듬자마자 버튼 누르는 것을 멈칫했다.

[자, 다음!]

불이 약해지는 순간, 거침없이 인공지능이 5번을 지목했다.

-난 착실한 남자는 아니지만, 야성적이지. 그게 내 매력이야….

그런 식으로 곡이 쓱쓱 사람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한 소절도 겨우 소화했고, 조금 더 간 사람들은 두세 소절을 소화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인공지능의 지명에, 눈앞에 시각 자료로 '실수하면 끝'인 게 눈에 보이니 도리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는 것이다.

-내 눈이 보, 보이… 젠장!

[다-음!]

한마디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참가자는 이제 분위기를 탄 관객들에게 야유까지 받았다.

관객들이 익숙함에 더 무자비해지던 순간.

[7번!]

구석에 멍하니 서 있던 7번에게 처음으로 전광판 콜이 들어왔다.

[….]

번쩍, 순서 불이 켜진 조명을 슬쩍 보던 후드 쓴 동양인 청년은 바로 입을 열고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들어가야 할 곳에 정확히 노래가 시작되었다.

원래 자신의 파트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광경이 나를 살게 해

오늘도 도시의 빛을

달려, 달려, 별과 빛 사이로

[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단단하게 스피커를 울렸다.

혼자 다른 질의 장비를 쓰는 것 같은, 선명한 톤과 성량의 차이.

타다닥! 탁! 타라라라락!

순식간에 관객석에서 버튼을 연타하는 소리와 함께 온갖 색의 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곡이 쭉쭉 뻗어나갔다.

-달려, 달려,

별과 빛 사이로

오늘 밤.

후렴의 고음에서도 목소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곡의 맛이 확 드러나는 멜로디컬한 파트가 도드라졌다.

[이야!]

버튼 연타는 줄어들지 않았다. 계속 불이 반짝이며, 7번의 질주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간주에 들어 간다는 점이었다.

노래가 끊기면, 어쩔 수 없이 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다음 사람에게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다.

[으음!]

전광판에서 가사가 사라지자 상황을 빠르게 알아챈 관객 몇 명은 아쉬워하기까지 할 그때였다.

-DDU DDU DDururu

DDU DDU DDU

[-!]

7번은 간주에 허밍을 넣기 시작했다.

그냥 콧노래가 아니라, 거의 콘서트 애드립 수준의 어마어마한 음역대와 테크닉으로.

[와우!]

그 묘기 같은 솜씨에 다시 버튼에 연타가 들어오며, 7번의 수명이 또 한 번 연장되었다.

파바파바박! 파바박!

불빛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이쯤 되니, 다른 참가자 중에는 입을 벌리고 7번이 하는 짓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박문대는 그 묘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대신 2절에 들어가기 한두 소절 전에 애드립을 멈추고, 정중히 마이크를 내렸다.

[그렇다면야, 다음!]

인공지능 MC의 낭랑한 외침에 관객들은 아쉬워했으나, 이유가 있었다.

'이 타이밍에서 한 번 민다.'

7번, 박문대는 이 룰의 맹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극에 익숙해진다.'

계속 잘 부르는 것보다, 전 소절보다 잘 부르는 게 중요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쭉 부르면, 클라이맥스를 지나서 사람들의 반응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직전에 들은 클라이맥스 파트보단 더 좋아지진 않았으니, 굳이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경우가 속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음이든, 애드립이든, 변주를 주고 새 자극과 놀랄 요소를 계속 줘야 했다.

앞서 괜찮게 부르던 사람들도 두세 소절을 넘기지 못했던 이유기도 했다.

그래서 박문대는 곡 템포가 다시 조절되는 2절 도입을 패스한 것이다.

'뭐, 참가자에게 기회를 주는 그림도 챙겨야 하니까 겸사겸사.'

멘토인 이상, 참가자에게 괜히 한 번 양보하는 그림도 줘야 국내 인터넷에서 '나만 싸하냐'는 개소리가 안 나온다.

그리고 박문대는 이미 계산이 끝났다.

'참가자 숫자를 고려하면… 어차피 끝에서는 한 번은 더 날 주겠군.'

돌아가는 타이밍을 보니, 참가자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자신의 차례가 올 것 같았다.

[안됐군요, 다음!]

앞에서 박문대가 하도 잘해둔 탓에 안 그래도 관객들의 평가는 야박해졌고, 기가 눌린 참가자들은 대부분 한 소절로 나가떨어졌으니까.

그리고 박문대의 계획대로, 그는 마지막 후렴구 직전 프리코러스에 다시 지목을 받았다.

[오오오!]

벌써 편파적이 된 관객들의 기대와 선제 환호 속에서, 박문대는 첫 소절부터 곡을 틀어쥔 채로 놓지 않았다.

-달려, 달려

경적을 때려 빛을 뭉개

오늘 밤

박문대의 곡 점유 시간은 최종 1분 3초였다.

그렇게 게임조차 되지 않는, 충격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첫 번째 '인트로 스테이지'가 끝났다.

[승자는… 7번!]

[와아아아!]

'밥값은 했군.'

박문대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대신 관객 정서에 맞게 손을 흔들며, 피식 웃었다.

무대 옆, 카메라 너머 제작진이 침 흘리는 소리가 벌써 들리고 있었다.

'잘하면 예고편으로도 쓰려나.'

그리고 그 예측은 맞았다.

[케이팝? 전 그런 건 안 들어요.]

[그걸 음악이라고 하기는… 아니, 오해하지 마요. 난 이 나라 보이밴드들도 음악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동생이 완전 미쳐 있는데, 솔직히 걘 제정신 아니에요.]

"오, 예고편?"

"맞아요!"

차 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넷플러스를 재생한 차유진이 신나게 화면을 흔들어 멤버들에게 보여줬다.

즉시 멤버들도 짧은 미리보기 동영상에 시선을 집중했다.

뻔하게 '찌질이 같은 서브컬쳐 케이팝 관심 없음' 같은 소리를 하는 참가자들의 인터뷰 컷이 지나고, 진짜 촬영분이 짧게 짧게 지나갔다.

[이번 여름.]

[유명세에 목마른 리얼리티 참가자들에게]

[케이팝 세례가 쏟아진다!]

"와, 자막 봐."

"번역 잘하셨네."

[아아아악!]

[이건 대체 무슨 X 같은….]

비명을 지르는 참가자들과 웃는 케이팝 아이돌들.

그리고 내가 노래를 부르는 옆모습과 입을 벌린 옆 참가자의 모습이 쓱쓱 지나갔다.

"너 말고도 보컬 두 팀 더 했지?"

"그래."

아마 내가 첫 번째 무대에, 참가자들 반응이 제일 날 것이라 잘 써먹은 모양이다.

"듣기론 다들 이겼다던데."

"에이, 당연하지. 다들 포지션 있는 프론데∼ 설마 졌겠어?"

싱글벙글 웃으며 저러는 걸 보니, 저놈도 댄스 스테이지에서 상당히 압도적으로 이겼나 보다.

[케이팝 아시나요?]

[좋아하시나요?]

[해보실래요?]

[K-NOW]

타이틀이 뜬 직후, 날짜와 함께 '1화 곧 공개'가 떴다.

보통 넷플러스에 공개되는 프로그램들은 네댓 화를 묶어서 한 번에 풀던데, 아마 스튜디오와 한 편씩 공개하기로 합의라도 본 모양이다.

"차유진, 공개 시 알림 받기를 반드시 눌러 둬야 잊지 않고 즉시 관람이 가능…."

"나 알아!"

"알면 뭐해, 안 했잖아!"

'어쨌든, 방영이 멀지 않았군.'

일단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그런가, 첫 화 반응이 어떨지 제법 홍미로웠다.

그리고 그걸 볼 때쯤 새로운 이벤트도 있다.

마침 선아현도 날짜를 보고 깨달았는지 외치고 있다.

"아, 이, 이날… 우리 이사 날짜야…!"

"그러게?"

"대형 TV를 상의 끝에 새롭게 주문한 보람이 있을 듯합니다!"

"정말 좋아요!"

바로 이사다.

드디어 새 숙소로 옮기게 된 것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4화]

테스타가 이사 준비로 한창일 무렵, '그 아주사 제작진'이 만든 새로운 넷플러스 예능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법 소란스러웠다.

공개된 예고편의 어그로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아주사 제작진 새 예능 나만 별론가]

케이팝 까들한테 뭐 하러 케이팝 좋아해달라고 빌빌대는 건지 모를… 문화 사대주의 같음

-맞아 나도 딱 이랬어

-ㅇㄱㄹㅇ

-케이팝 좋다는 애들도 개많은데 굳이굳이 혐오자들 모아놓고 저러는 거 진짜 자존심 없어 보임

-양아치 갱생 서바이벌 이딴 거 보는 느낌이야 그런 거 해줄 시간에 잘 살고 열정적인 사람들 조명해주라고ㅋㅋㅋㅋ

-? 이런 느낌 아닌 것 같은데… 약간 나약한 미국놈들 케이팝 불지옥 맛 좀 봐라 이런 거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 이런 느낌으로 예고편 봤는데

-한쪽에선 사대주의 한쪽에선 국뽕 아주 전방위로 까이네 대단ㅋㅋㅋㅋ

-이딴 저질 예능 찍어내는 거 짜증 나지만 또 잘 될 듯 예고편만으로 또 지랄 나네 어휴

-화제성 원탑ㅋㅋㅋㅋㅋㅋ

게다가 제작진은 가장 말이 많고 논란이 커질 무렵에서야 프로그램의 정확한 내용에 대하여 슬쩍 공식 자 료를 내보냈다.

-케이팝 돌들은 멘토고 미국 관종들 모아다가 케이팝 지옥캠프 시켜서 살아남은 놈만 상금 주는 거래

└X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쳤나봐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해내는 거야 제작진들 진짜 지옥에서 캠프라도 하냐?

-우리 애들 안 그래도 바빠죽겠는데 이딴 거나 시킨다니 어처구니가 없는데 웃기긴 한다

└테스타 팬이구나 아주사 주식을 사서 제작진 키워준 업보임ㅋ ㅉㅉ

└행차 때 입덕했다 X발아

그리고 프로그램에 대한 논란이 살짝 잦아들 시점에서, 이번엔 멘토 출연진에 관한 기사가 줄줄 뜨기 시작했다.

그 스케일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또 프로그램 관련글을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브이틱 진짜 나온다는데?;;;

-아니 재현아 명석한 네가 왜 이런 선택을

-골든에이지도 나오네 아주사 출신이라 끼워줬나… 음…ㅋㅋ

└X병신 예능에 이젠 급수까지 따지고 앉아있네 하여간 이 새끼들 웃겨 죽겠어ㅋㅋㅋ

└네 다음 듣보

-주말 예능에도 이 라인업 한 번에 출연 힘들겠는데 무슨 일이여 소싯적 드림 콘서트 급

-테스타 아주사 제작진들이 성골로 찍어놔서 잡혀간 듯 불쌍

그리고 누구나 출연을 예상했으며, 이미 예고편에서 박문대가 나온 시점에서 체념한 테스타 팬들은 이미 한번 불타오르다 꺼진 후였다.

-그래 아주사 새 시즌 멘토가 아닌 게 어디야

-이번 활동 예능 역대급으로 많이 나왔는데 그중에 하나 정도는 뭐 이런 것도 있는 거지...ㅋ..ㅋㅋㅋ...

-테스타가 테스타 하겠지 뭐 워낙 잘해서 오히려 기대됨 (거짓말임)

-애들 촬영하면서 고생만 안 하면 좋겠다

많은 팬 커뮤니티들은 그냥 '촬영하면서 테스타의 마음이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정도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번 'Spring Out' 활동이 워낙 정석적으로 잘 돌아간 데다가, 해외 반응 지표까지 좋아 날이 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류청우의 카메라와 관련된 작은 구설수도 다발적인 메이저 예능 출연을 통해 이미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출연하는 아이돌 팬들의 떨떠름한 반응과 일반 네티즌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화제성 속에서, 해당 예능은 1화를 송출했다.

[K-NOW!]

[케이팝은 찌질해! 평생 셀럽만을 목표로 했던 관종 참가자들은 예상치 못한 수렁에 빠져든다.]

소개글대로, 제작진들은 24명의 참가자 중 몇몇의 극단적인 특징들을 잘 소개한 뒤, 두 가지 공통점을 편집의 마법으로 매우 강조했다.

관심에 목말랐다는 것.

그리고 케이팝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공개하자마자 바로 실시간 시청 중이던 국내 시청자들의 반응도 극단적이었다.

-아ㅋㅋㅋㅋ 개빡치네

-설마 저게 미국 평균 생각임?

-진짜 기분 나쁘다… 감성이 왜 저래

-'이런 게 진짜 음악이죠' 어쩌구 한 놈 진짜 아가리 쎄게 때려주고 싶음

-ㅋㅋㅋㅋㅋㅋㅋㅋ그냥 웃기다 한국인들 너무 과몰입했네

-난 오히려 저 참가자들 말에 좀 공감가는 것도 있는데.. 요새 아이돌들 노래 너무 다 똑같음ㅠ

└아이고 어르신

참가자들이 서로 기 싸움을 하고, 멋진 숙소에서 온갖 협찬품을 보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드디어 문제의 그 씬이 왔다.

[KPOP 멘토들이 지금 등장할 겁니다!]

[3, 2, 1]

[짜잔!]

[이런, 비명이 난무하네요!]

경악하며, 화내거나 당황하는 참가자들은 여전히 뻔뻔한 비호감으로 그려졌다.

시청자들은 그 낯선 감성에, 이제는 아예 한 발짝 떨어져서 그냥 외국 예능에 출연한 아이돌을 보듯 그 꼴을 감상했다.

-탈주각 선다

-뒤로 넘길래ㅠㅠ

-ㅋㅋㅋㅋㅋ왜 난 개웃긴데? 아이돌들 다 진짜 존잘에 프로네 비교돼서 국뽕오져ㅋㅋㅋ

이대로 갔다면, 분명 K-NOW는 1화 만에 국내 화제성이 확 식고 흐지부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부터는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KPOP 멘토들과 정면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분야는 노래, 춤, 그리고 사진!]

[그래요, 여러분이 지원서에 '특기 분야'로 적은 바로 그 항목이죠!]

-뭐?

-잠깐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기서도 경연 하냐

-미친 소리 그만

그러나 사실이었다.

[좋아요! 이기면 5만 달러라는 거군요∼]

[솔직히, 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네.]

[팝송으로? 음음, 절대 못 지죠. 미안하지만 여러분, 실수하셨네요.]

다시 몇몇 기고만장한 참가자들의 모습이 꽤 길게 잡혔다.

그들은 선곡이나 사진 테마를 두고 또 과격하게 다투더니, 곧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득한 아마추어의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게, 아이돌들은 매우 침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하, 한 시간 주시는 거구나∼]

[열심히 해야겠네.]

[이거 여기 넣으면 될까요?]

-일케 보니 진짜 다른 인종 같다

└다른 인종 맞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프로그램의 후반부.

맨몸으로 출전한 아이돌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참가자들을 거의 도륙했다.

[승리, 승리, 승리!]

아주사 제작진 특유의 강조하는 편집점과 맞물려서, 해당 장면은 잔인할 만큼 시원하고 압도적으로 스크린을 탔다.

[이런, 더 볼 것도 없군요!]

[한 번 더 멘토의 승리입니다!]

[압도적이네요! 흠, 이래도 캠프가 소용없다고 하려나요?]

[참가자 : 망할….]

특히 공들여 편집된 박문대의 첫 보컬 스테이지는 물론, 다 함께 가면을 쓴 댄스 스테이지에서까지 결과는 여전했다.

순식간에 인터넷이 관련 반응으로 뒤덮였다.

-와 X발 뽕찬다

-미친 박문대 미친놈아 이럴 줄 알았다 역시 1위 짬 어디 안 가는 구나

-케이팝 불지옥 맛을 쬐에금만 맛 보아라

-제발 곰인형 가면 쓴 큰세진 직캠 줘 비하인드 풀라고!ㅠㅠㅠㅠ

-이걸 미국놈들만 봤다니 믿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해라

-너무 재밌다 역시 아주사 제작진이 손맛은 있네ㅋㅋㅋㅋㅋㅋㅋ

원래도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포맷에 환장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시청자들이었다.

거기에 심정적으로 가까운 케이팝 아이돌들이 시원하게 이기니 마치 스포츠에서 이긴 것 같은 짜릿한 맛이 더해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거… 이 국뽕 맛을 영미권에 홍보해도 괜찮은 거 맞음?ㅋㅋㅋㅋㅋㅋ

-미국에선 흥행 못 하겠다 기분 나빠할 것 같아ㅠ

-맞아 케이팝만 너무 띄워준다고 거부감 느낄 것 같은데

-아이돌들 양학할 때 다 탈주했을듯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외국에서는 또 다른 감성으로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갱생의 맛이었다.

그들은 아직 참가자들에게 전혀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철저히 그들이 고생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제작진들이 참가자들에게 '살면서 겪어본 짜증나는 인간상' 속성을 훌륭히 부여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이 기회에 좀 자라라고 (혀 내미는 이모티콘)

-오 제발 캡 쓴 금발 놈은 맨날 인하트에 괴상한 짓 올려대던 내 전 남친이랑 똑같아

-이거 제법 웃긴걸?

-제발 다들 '케이팝' 스타처럼 12세 이용가 등급으로 다시 태어나길(폭소 이모티콘)

여기서 케이팝이 가진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가 대단히 선전 중이었다.

바로 건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건전한 전 연령대 인상의 친구들이 악성 관종들에게 현실적인 교훈을 주는 구성은 꽤 희한하면서도 잘 맞아떨어졌다.

-꼭 못된 애들 잡아다가 특수한 여름 캠프에 보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걸 (폭소)

└대중적 의견 : 사실임

└그리고 그 캠프에는 케이팝(무지개와 유니콘 이모티콘) 교관들이 있군!

그래서 영미권 시청자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제법 유머러스한 패러디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예능에서 활약한 케이팝 아이돌에게 스며들 듯이 호감을 느꼈다.

-다들 정말 친절하고 품위가 있네! 약간 감동적인걸

-저 후드 애는 정말 대단한 가수야

-아주 어릴 때부터 트레이닝을 받는다더니 헛되지 않은 모양이지

그 틈 사이로 열심히 기존 KPOP 팬덤들이 영업과 정보를 뿌렸다.

-저 후드 애는 전혀 트레이닝을 받은 적 없어! 오디션 출신 100% 일반인이었다고! 그냥 재능과 노력의 덩어리일 뿐이야

-그들의 최신곡은 정말 대단해 누구든 동양과 스팀펑크의 조합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어 (링크)

-이제야 케이팝의 좋은 점을 알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게 놀랍네 뭐 90년대에 살고 있나?

그리고 이 반응이 한국으로 번역되어 들어오기도 전.

KPOP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던 시청자들의 반응은, 1화 마지막에 나온 다음 화 예고편에 의해 하나의 목소리로 귀결되었다.

[저걸 보세요, 우리의 최고 선임 멘토께서 나타나시는군요!]

[멘토 : 안녕하세요.]

바로 VTIC 청려의 클로즈업 샷이 등장한 것이다.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KPOP 아이돌들의 첫 등장 화면에서 잡아주지 않았던 그 모습을 예고편에서야 보여주었다.

-헐 청려

-미미미미미치ㅣ니 존잘

-뭐야 뭐했어

-신청려 당장 귀국해

[멘토 : 부디 이 캠프에서 많은 것 들을 배우고 가시길 바랍니다.]

청려는 깔끔한 영어로 대본을 소화했다.

[멘토 : 아, 이번 평가의 이름은… 'VTIC을 배워라'네요. 아마 의미 있는 트레이닝이실 겁니다.]

[멘토 : 저희는 유명하거든요.]

청려가 빙그레 웃었다.

긴장감 넘치는 BGM과 함께, 노려 보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짧은 컷으로 지나가며 예고편은 끝났다.

-제작진 ㅅㅂ 다음화 보라 이거네ㅋㅋㅋㅋ

그렇게 아주사 제작진들의 신작 예능은 다시 한번 버즈량을 확보했다.

대단히 순조로우면서도 요란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오자마자' 이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다짐한 테스타는 당사자들임에도 이 반응을 아무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유가 있었다.

"으아아아!"

"다시 해요! 다시 해요!"

"아, 아니야…! 이, 이게 맞아!"

"헐, 아현이가 이렇게 적극적인 거부를? 수상한데요?"

"네가 더 수상해."

"얘들아… 우리 두 시간째야."

그들은 룸메이트 배정 게임 연장전에 과몰입한 상태였다.

이사 후 가볍게 시작한 팬서비스 컨텐츠의 부작용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5화]

배세진이 침착하게 말했다.

"다음은… 네 차례야."

"네, 네!"

선아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킨 뒤, 조심스럽게 외쳤다.

"세, 세진이를 지목하겠습니다…!"

"뭐어어? 아현이 아까 내가 의심했다고 너무 막 찍는 거 아니야? 이거 개인감정 들어가면 안 되는데∼"

"아, 아니야!"

이 두 놈이 말싸움하는 건 처음 본다.

더 웃긴 건 주변 놈들이 손에 땀을 쥐는 얼굴로 저 대치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다 이 꼴이 됐냐.'

나는 손에 든 남은 카드를 내려다 보다가 심오한 고민에 빠졌다.

이사 온 숙소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분위기가 그렇게 온화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완전 커요! 완전 좋아요!"

"화장실은 그대로 3개 맞지?"

"안쪽에 리모델링 겸 배관 넣어서 작은 화장실 하나 더 만든 집이래요. 4개입니다."

"오."

어차피 청소 회사에서 사람이 나오기 때문에 화장실 개수가 늘어난 건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숙소 입지가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결국 SV빌리지로 왔군….'

VTIC 숙소가 있는 그 동네 말이다.

E팰리스로 가는 게 유출되는 바람에 별 수 없었다. 보안에 신경 쓰다 보니 후보군이 더 줄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다만 평수 차이가 있어서 단지 내에서도 거리가 꽤 머니, 쓸데없이 볼 일은 없겠지.

'침실이나 확인하자.'

나는 아무 쓸모 없는 꺼림칙함을 몰아내고 숙소를 둘러보았다.

"와우! 방 많아요! 저 혼자 써요?"

"침실은 4곳이잖아. 독방을 쓸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야!"

"…!"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갑자기 화들짝 놀란 배세진이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혼자 쓸 수 있다고?"

"예! 혹은 3명이 함께 큰 방을 쓰고 남은 한 명이 독방의 혜택을 또 누리는 구성도 가능합니다만…."

안 된다.

'그건 그림이 안 좋지.'

사실 숙소를 두 채 잡고 각자 독방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한 숙소를 계속 쓰는 건 뒷말을 막을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2주년 기념일도 전인데 벌써 독방을 쓰는 걸 보니 서로 사이가 별로인가 따위의 말이 나오기 쉽거든.

'적어도 1년은 더 두고 봐야 한다.'

그런데 괜히 3인실을 만들면서까지 독방을 하나 더 추가한다?

독방 쓰는 놈들에게 이상한 이미지 씌우려고 기를 쓰는 새끼들이 튀어 나올 것이다.

나는 그쯤에서 끼어들었다.

"괜히 좁게 쓸 필요는 없지. 네 말 대로 2인 방 셋에 독방 하나가 낫겠다."

"예!"

김래빈은 약간 뿌듯한 얼굴로 바로 수긍했으나, 막상 말한 내 입맛이 떫었다.

'혼자 쓰고 싶은데 말이지.'

확률이 두 배로 늘어날 기회를 내 발로 차버리니 아쉽긴 하군.

"오∼ 이 방 멋지다!"

"치, 침대 크기가 많이 커졌네."

어쨌든, 숙소가 넓어지며 방들도 커진 덕에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길 것 같긴 했다.

"아, 그렇지."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소리가 나온다.

류청우가 씩 웃더니, 우스갯소리 하듯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 제일 큰 방을 혼자 쓰는 사람한테 몰아주는 걸로 할까?"

"…!"

그리고 이 의견을 놀랍게도 다수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통과된다.

"오! 그거 좋네요∼"

"음, 팬분들께서 룸메이트 관련 컨텐츠를 시청하실 때 보상에 대한 설득력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

류청우 본인도 좀 놀란 듯했으나, 아무래도 다들 자신이 독방을 쓸 때의 그림을 열심히 그려본 듯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방 배정 게임이 말도 안 되게 과열된 거겠지.

"합리적 선상에서 검토해 보아도 지난 두 턴 동안 차유진의 발언은 모순되었기 때문에, 사기꾼은 차유진입니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맞아!"

"자, 자. 그럼 래빈이는 유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차유진은 지난 턴에 뇌물을 받을 수 없었다는 명제로 '검증'하겠습니다!"

"싫어요!"

차유진은 지목당하자마자 무슨 사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난리를 부리고 있다.

'문제는 저놈만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거지.'

지금 턴 돌아가는 내내 다들 저러고 있다. 나는 다 포기한 채로 턱을 괬다.

사실 이건 마피아 게임과 카드 게임이 섞은 간단한 보드게임이었다.

시작 때 비밀리에 뽑은 직업 카드에 따라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정해져 있는데, 그걸 통해 돈을 제일 많이 모으는 놈이 이기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차별화된 점이 있다.

'그냥 아무 행동이나 막 해도 안 걸리면 그만이다.'

직업상 못 하는 행동도 블러핑으로 맘대로 저지를 수 있었다.

즉, 필연적으로 온갖 거짓부렁이 판칠 수밖에 없었다.

'…웃길 것 같아서 골랐는데.'

문제는 첫판에서 큰세진이 온전한 뻥카로 이겼다는 것이다.

-세, 세진이… 국회위원, 아니에요…?

-…꽃집 주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아, '그걸 속냐∼' 이야, 이럴 때 쓰는 말 맞죠? 하하 하하!

-으으으!

자신의 뮤직비디오 대사를 인용한 큰세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다음 판부터 거짓말이 판을 지배하는 메타가 되어버린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돈 모으려고 거짓말을 마구 하기 시작하니 결국 3번째 라운드만에 개판이 됐다.

"자, 유진이 '검증'하자. 카드 보여 줘."

참고로 다른 이로부터 직업을 '검증'당하게 되면, 해당 사람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한동안 돈을 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검증'에 지목당한 놈들은 하나같이 극렬히 자신을 변호했으나….

뭐, 아까 말했지 않은가. 개판이라고.

"음… 유진이 직업은 '경찰'이었네! 지난 턴에 뇌물을 받았으니 유진이 탈락!"

"우우…."

"역시!"

이젠 '검증'하는 족족 다 걸리고 있다.

'망했네.'

이거 지금 두 시간 넘도록 촬영 중인데, 보니까 다 편집되고 한 삼십 분 분량으로 축약될 느낌이다.

팬들은 풀버전을 달라고 슬퍼하겠지만, 막상 정말로 풀버전을 풀면 분위기가 숙연해질… 그런 재미 없는 뇌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거짓말 안 할 것 같은 놈이 이겨야 뇌절을 벗어나겠는데.'

안 되겠다.

'다음 판은… 선아현을 몰아주는 게 낫겠군.'

제일 거짓말 못할 놈 아닌가.

그래서 4번째 라운드에서는 선아현이 선전하도록 약간 밀어준 것이다.

-이, 이거 살게…!

-음, 가게 인수 쪽이 더 돈을 많이 주는 것 같은데.

-그, 그런가? 그럼 그걸로…!

그리고 선아현은 착실히 돈을 잘 불리더니, 의외로 큰세진과 말싸움에서도 안 밀리며 놈을 '검증' 타이밍에 지목하는 것에 성공했다.

"저, 정말, 새, 생각해서 결정한 거니까… 저, 세진이 검증 부탁드립니다…! 지난 턴의 빌딩 건설이요!"

"알았어, 아현아."

독방에 큰 매력을 못 느꼈는지 자진해서 사회자로 빠진 류청우가 바로 큰세진의 카드를 확인했다.

나는 팔짱을 꼈다.

'한 놈 탈락인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으나, 류청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 세진이… 거짓말 아니었네!"

"…!"

"지, 진짜요?"

"그래. 빌딩 건설 가능한 직업이야."

이 새끼가 이중 뻥카를 친 것이다.

"에이, 이번에도 또 거짓말하면 그렇잖아요. 저도 양심이 있지!"

거짓말이 줄줄 나오는군.

덕분에 '검증'에 실패한 선아현은 그 패널티로 3턴이나 쉬어갔다.

"아현이는 이번 턴도 행동 금지."

"네, 네…."

"세진이도 한 턴 더 돈 못 버는 거야."

"알겠습니다∼"

덕분에 뜬금없는 승자가 나왔다.

"이번 판 1등은… 문대!"

바로 나다.

"예, 감사합니다."

참고로 다 의미 없는 짓이다.

어차피 전전 판에서 큰세진 놈에게 집중 마킹을 당한 탓에 총액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X발.'

그냥 재미고 나발이고 돈 싹 쓸어올 걸 그랬나.

어쨌든, 그래서 최종 승자가 누구냐면….

"방을 마음껏 고를 수 있는 종합 1등은 바로 이세진입니다!"

"하하하!"

결국 저 새끼가 이겼다.

보는 사람은 재밌을 것 같긴 하다만… 어쩐지 배알이 꼴리는군.

'찌를까.'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오∼ 문대문대, 고마워!"

"독방 쓰면 편하겠네."

"…?"

"이거 독방 쓸 사람 고르는 거였잖아."

"맞아요, 부러워요!"

"넓은 방에서 즐거운 1인 생활 보내시길 바랍니다."

독방 쓰는 걸 기정사실로 몰아가니, 큰세진의 표정이 순간 꿈틀거렸다가 얼른 돌아왔다.

"하하, 아니! 음, 꼭 그런 건 아닌데∼"

오, 피하려는군.

이번 컨텐츠에서 분량 뽑으려고 게임에서는 활약했지만, 역시 독방을 쓰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혼자 쓰면 자체 컨텐츠에서 등장 분량에 약간 손해를 볼 확률이 높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양보하는 그림으로 가려나.'

그럼 뭐, 후보는 하나뿐이겠다.

"에이, 저도 쓰고 싶긴 한데… 음, 청우 형에게 독방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리더 형님이 데뷔 때부터 정말 이 팀을 지탱해 오셨죠!"

"어, 나?"

"그렇습니다 형님∼ 이런 건 원래 연장자, 리더가 쓰시는 거 아닙니까!"

"오오오!"

"멋진 선택이십니다!"

그렇게 류청우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독방을 잡아갔다.

'부럽군.'

내심 혀를 차는데,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최연장자…."

배세진은 소리 내서 말할 생각은 없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생일은 배세진이 제일 빠르군. 이미지가 이래서 중요한 거 아닐까.

'…물론, 따지고 보면 내가 진짜 최연장자다만.'

나는 날아간 독방의 기회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뭐, 2인실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일단 룸메이트도 조용한 놈이 걸렸고.

"그럼 문대와 아현이가 한 방이구나."

"자, 잘 부탁해…!"

"그래. 오랜만이다."

선아현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원으로 자리가 마감되자마자 선아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설마 이놈도 독방이 아니라 차유진 피하려고 열심히 한 건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 머릿속을 지나갔으나,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자.

참고로 큰세진 놈은 분량에 눈이 멀어 게임을 뒤흔든 업보를 제대로 뒤집어썼다.

애꿎은 놈도 같이 맞아서 문제지.

"오, 그러면… 두 세진 형님께서 같은 방이십니다!"

차유진과 김래빈이 서로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같은 방을 골랐기 때문이다.

결국 본인의 선택권을 류청우에게 양보하며 선택권이 없어진 큰세진 은… 자동으로 배세진의 방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형, 잘 부탁드립니다!"

"그, 그래."

둘은 한 박자 늦게 화목한 인사를 나누었다. 라이브 방송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나 해라.

'싸우진 않겠지.'

한바탕 싸운 뒤로는 아예 서로 필요한 대화 외에는 간섭을 안 하는 놈들이다.

그리고 같은 방이라고 해도 지난 숙소 거실 크기다. 부딪힐 일은 없을 거라도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뭐, 낌새 보이면 바꿔주면 된다.'

대외적 변명은… 취침 시간이 너무 달라서 서로 고통받는다는 식으로 좀 웃기게 말하는 정도면 되겠군.

"자, 그럼 저희는 각자 방에 짐을 풀고, 또 다른 룸메이트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러뷰어 또 봐요∼"

그렇게 엔딩 멘트로 룸메이트 게임 촬영은 마무리되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내 방으로 결정된 곳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확실히 질이 더 좋긴 하군.'

리모델링을 많이 거쳤다더니 정말 그런 티가 났다.

"무, 문대야. 우리 재밌게, 잘 지내자…!"

"그럼 좋지."

소음공해 없는 쾌적한 취침 시간이 벌써 기다려지는군.

-저 놀러 가요 많이 가요

-마음만 받는다.

이 대화가 좀 불길하긴 했다만 그래도 차유진 룸메이트를 벗어난 게 어디냐 싶다.

'그 새낀 말이 너무 많아.'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뻗었다.

들리는 건 선아현이 본인 프랑스 자수와 수세미를 정리하는 소리뿐이다.

'평온하군.'

이게 이사 온 맛인가 보다.

…참고로 이 감상은 하루를 가지 못 한다.

바로 다음 날.

또 비행기를 타고 LA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그놈의 예능 추가 촬영이었는데, 컨텐츠가 X 같았다.

멘토진을 섞어서 1회용 특별 무대를 하게 생겼거든.

문제는 내 팀에 청려가 있다는 것이다.

'X발.'

발단은 그놈이 나온 K-NOW 2화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6화]

국뽕 화제성을 제대로 끈 지옥불 케이팝 캠프는 1화에 이어서 2화까지 지대한 관심 속에서 송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화제성에 청려 출연이 한몫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다.

바로 희소성의 법칙 때문이다.

VTIC이 멤버 탈퇴 사건 이후로 예능 등 가볍고 즐거운 컨텐츠를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만의 예능이야ㅠㅠ

-재현이만 나와서 아쉽긴 한데 리더라고 총대 멘 것 같아서 속 쓰리기도 하다… 얘들아 고생 많았다

-예고편만 봐도 역시 케이팝 근본 이시다 ㅅㅂ 신청려 평생 아이돌해

그리고 이 새끼 2화에서 멘토 출연진이 가져갈 수 있는 임팩트란 임팩트는 다 처먹었더라.

'우린 1화 분량에서 치고 빠져서 다행이었지.'

모니터링 중에 보니 중요 심사위원부터 교관에, 상담역까지 다 해먹은 모양이다.

-세상 친절하게 팩폭하는 청려 (동영상)

-마 이게 K돌이다!

-ㅠㅠㅠㅠ우리 리더님 항상 마음이 따듯한 사람 (캡처)

-이걸 왜 못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진 않지만 일단 연습은 봐주는 신재현ㅋㅋㅋㅋㅋㅋ 여전하구만

심지어 촬영 분량은 바쁜 탑티어답 게 썩 많지 않은데 결정적인 파트만 쏙쏙 빼간 것 같다.

'가성비 돌았냐.'

역시 X발 사람은 뜨고 봐야 한다. 같이 나온 멘토 놈들만 기껏 촬영 시간 빼서 손해 봤겠군.

'그러고 보니 그중에 골든에이지 놈들도 있었는데.'

골드 1이 있는 그 그룹 말이다.

산업스파이 건 이후로 연락이 뜸하더니, 이 아주사 제작진 예능에서 다시 얼굴을 본 후로는 간간이 인맥 챙기는 수준으로는 연락이 온다.

[골든에이지 하일준 형 : 문대야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이번엔 촬영 안 겹쳐서 아쉽네, 다음에 봐!]

나는 골드 1의 메시지에 적당히 답장을 돌려주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예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깔끔하군.

사람이 원래 일할 때 이 정도로 서로 얼굴 붉힐 일 없는 관계가 딱인데 말이다.

특히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미친 놈과는 안 엮이는 게 상책인데, 은근히 계속 같이 일할 건수가 잡히니 이게 상당히 짜증 난다.

그나마 같이 가는 놈이 말을 잘 들어서 다행이지.

"무, 문대야. 여권 받았어?"

"그래."

선아현 말이다.

멘토진들의 특별 콜라보 무대는 하나가 아니었는데, 선아현이 속한 특별 무대도 이번에 촬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느 그룹에서 시간 없다고 지랄했나 보군.'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특별 무대는 안 하겠다고 지랄 좀 해볼 걸 그랬다.

"비행기 타서 좀 자. 그 팀도 안무는 미리 땄어도 동선은 새로 맞춰야 해서 시간 없을 테니까."

"으, 으응!"

나와 선아현은 따라붙는 데이터 팔이와 일부 홈마의 카메라들을 무시하고 비행기에 무사히 올라탔다.

'좌석은 좋은 거 줬네.'

투자금 제대로 당겼나 보지. 나는 좌석 옆 커튼을 쳐서 혹시 모를 사생활 침해를 방지했다.

매니저는… 모르겠다. 두 번째 놈이 따라왔는데, 알아서 뒤에 잘 앉아 있을 것이다.

'잠이나 자자.'

그리고 내가 좌석을 밀어서 거의 침대처럼 만든 뒤, 생수병을 딸 때였다.

선아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 저기 있잖아."

"어."

"무, 문대는… 그, VTIC 청려 선배님 불편해?"

"프흡."

생수가 코로 나올 뻔했다.

'어떻게 알았냐.'

"괘, 괜찮아?! 마, 마사지…."

"어어, 됐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머리를 털었다. 선아현은 좀 걱정스럽게 내 꼴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꺼냈다.

미리 생각해 뒀던 것 같았다.

"부, 불편하면… 나, 나랑 바꿀까?"

"뭐?"

"우리 팀 무대, 문대가 이미 안무 아는 거라, 괘, 괜찮을 것 같아서…."

"…."

"나, 나는 원래 사, 사람들 불편해 하니까… 별로 차이도 없고…!"

"괜찮다."

나는 픽 웃으며 물병을 닫았다.

나 참. 그래도 나름 감동적이긴 하군. 저놈이 이제 남 대인관계 걱정도 하냐.

"그리고 너 언제 또 안무 익히려고."

"하, 하루 있으니까… 괜찮은데."

"…."

재능충 열받네.

"아무튼, 좀… 그놈 마음에 안 들긴 한데, 일 못 할 정도는 아니야. 애초에 별거 아닌 놈이고."

"그, 그렇구나. 그, 그래도… 생각 있으면, 꼭 말해줘!"

"알았어."

그럴 일은 없겠다만, 말은 순순히 해줘도 괜찮겠지.

나는 침대 비슷하게 변한 좌석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시 후, 지나가는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티 나냐."

"으응?"

"내가 그 선배 맘에 안 들어 하는 거."

"…조, 조금?"

"혹시 언제 그랬어."

"마, 만날 때마다, 문대가 자꾸 주먹을 쥐어서…."

"…."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11시간 뒤, 나는 내가 정말 주먹을 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진짜였군.'

제작진에서 이미 카메라를 설치해 둔 대형 안무 연습실.

한발 늦게 도착한 청려가 실실 웃으며 인사를 할 때, 내 손은 정말 자체적으로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갈겼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어쨌든 선아현 덕분에 하나 알았군. 카메라 있을 때는 주의해야겠다.

'어쨌든, 확실히 VTIC 이름값은 있군.'

내가 내 주먹을 신경 쓰든 말든, 주변 놈들은 하나같이 몸에 힘이 빡 들어간 상태로 청려에게 인사 중이었다.

"반갑습니다. 바로 연습 시작할까요?"

동경 혹은 열등감을 줄줄 흘리는 놈들 사이에서, 청려는 여상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건 편하군.'

연습 전에 시간 낭비 안 만들겠다는 건 반대할 마음 없다.

그리고 시작된 동선 작업.

"한 번 더 갑니다!"

파트는 사전에 다 나눴고, 영상을 통해 이미 정해진 자신의 동선도 익혀오긴 했다.

그러나 또 막상 다 같이해 보면 간격과 높이, 동작 크기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걸 정비하는 작업인데, 보통은 안무 트레이너가 붙으나….

"왼쪽 분 팔꿈치 더 드세요."

"네, 네…!"

이번에는 어느 순간부터 트레이너가 '한 번 더 틀게요'만 외치는 중 이다.

웬 새끼가 하도 다 잡아대서 말이다.

"프리코러스 때 박자 조금 더 빠르 게 들어오세요. 팔 내리실 때 동작 끊고 들어오면 됩니다."

"아…. 예!"

당연하지만 여기서 짬 제일 많이 찬 놈인 청려다.

슬슬 연차와 인기 덕에 뺀질거릴 법한 놈들도 주눅이 들어서 따라오는 꼴을 보니 편하긴 하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할까요. 음, 10분?"

"넵!"

쉬는 시간도 칼같이 끊을 것 같다.

호오.

'이건 진짜 쓸 만한데.'

과연 몇십 년간 아이돌 리더만 하면서 산 놈이 다르긴 하군. 능률이 남다르다.

'빨리 끝나겠어.'

놈에 대한 평가를 약간 수정하려던 순간이었다.

"후배님."

"…예."

즉시 취소했다.

카메라도 정비하니 굳이 이놈들과 말 섞을 필요가 없어서 구석으로 간 건데 굳이 또 말을 거는군.

다만, 의외로 평소처럼 정신 나간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청려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조용히 조언했을 뿐이다.

"동작을 크게 하는 건 좋은데, 관절을 잘못 움직이고 있는데요."

"…."

"자, 보세요."

깔끔한 시범이 이어졌다.

전신을 굽혔다가 튕겨서 상반신에 반동을 주는 동작.

"여기서 팔꿈치랑 허벅지랑 닿죠."

"예."

"왜 닿는 것 같아요?"

"몸을 숙였다가 펴는 동작에 리듬감을 주려는 것 같습니다만."

"맞아요."

단번에 긍정이 나왔으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안 되지."

"…!"

"보세요. 이건 다음 동작에서 상반신을 숙이는 것까지 고려해서 움직여야 해요."

청려가 팔꿈치를 굳이 안 그래도 될 만큼 옆으로 뺐다가 상체를 당겼다.

"이러면, 팔 관절 동선이 커져서 숙일 때 움직임이 더 빠르게 튀죠."

그러자, 어딘가 동작에 긴장감이 생겼다.

소위 '쫄깃하다'고 표현하는 그것이었다.

"그래야 선이 보기 좋아지는 겁니다."

"…."

"앞뒤 동작이 '왜' 들어갔는지까지 주의하면, 앞으로는 지금 가진 기량을 다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혀를 씹을 뻔했다.

맙소사.

이 새끼가 '진짜' 도움이 되고 있다.

방금 조언이 극히 쓸모 있는 말이라는 걸 내가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스탯 올린 것에 비해 어쩐지 동급 스탯보다 잘 춘다는 느낌이 덜 들더라니.'

이런 건 재능이 아니면 시간이 필요한 깨달음이었다.

차유진처럼 본능적으로 알거나, 큰 세진처럼 수없이 고민하고 연습해서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언어로 잘 다듬어서 문외한도 이해가 가도록 전달하는 건… 비슷한 짓을 몇천 번이나 시도한 놈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지난 세월 날로 먹은 건 아니군.'

나는 깔끔히 인정했다.

"예. 감사합니다."

"…!"

청려는 예상치 못했는지 잠시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곧 알아서 납득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역시 이런 건 따로 듣는 게 좋죠? 다 같이 있을 때 지적당하면 마음 상하잖아요."

"…."

"아, 후배님이 특별히 못한다는 말은 아니고. 하하."

이건 X발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데.

'내가 춤만 그렇지 노래는 X발.'

상태창빨이긴 한데 이게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네.

"그런 걸로 기분 상하진 않습니다. 선배님께서도 녹음 때 제가 조언 드려도 기분 안 나쁘실 텐데요."

"…아하. 네."

청려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곧, 인정하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건 재능의 한계인가 봐요. 더는 안 되더라고."

"…."

그러긴 했을 것이다. 보컬 성장 한계가 B+인 놈이 B+까지 아득바득 올려놓은 것을 보니.

약간 감탄하려던 찰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낮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매번… 노래 잘하면서 제정신인 어린놈 찾는 게 얼마나 짜증이 나던지."

"…."

"뭐, 이번… 그러니까, 지금도 썩 성공이라곤 못하겠네요. 탈퇴했잖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VTIC 메인보컬이 클럽 그놈이었지.

안 되겠다. 더 정신 나간 소리가 나오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도 활동 잘만 하시던데요."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나 봐요. 그러니까…."

삐비비비 빅!

그 순간,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아, 시간 끝났네요."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청려는 곧바로 연습실 가운데로 가서, 목을 스트레칭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디테일 맞추죠."

그리고 일회용 특별 무대에서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을 만큼 집요한 안무 디테일 통일 작업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좋아 죽는 건 제작진뿐이었다는 점을 말해두겠다.

"올라왔나?"

청려의 개인팬은 넷플러스를 새로 고침하며, 혹시라도 3화가 올라오진 않았나 계속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곧 보답 받았다.

"떴다!"

오랜만에 청려가 나올 예능을 놓칠 순 없지! 청려의 팬은 신나게 3화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청려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음…."

확실히 여전히 자극적이고, 참가자들이 눈물 콧물 빼면서 고생하면서도 정화되고 다듬어지는 걸 보는 맛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청려가 거의 안 나왔으니, 흥이 확 식었다.

'그렇지… 그렇게 길게 촬영했을 리가 없잖아.'

메인 MC도 아니고, 멘토로 그 정도까지 출연했으니 충분히 대단한 떡밥이었다.

"컷본이나 봐야겠다."

청려의 팬은 어깨를 으쓱한 뒤, 시간 낭비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잠시 후!]

[KPOP 멘토들의 화려한 시범 무대가 펼쳐집니다!]

[참가자 : 오 X발 맙소사!]

[세상에. 과연 참가자들은 이 무대를 재현할 수나 있을까요?]

갑자기 특별 무대 예고가 떴다.

"미친, 신재현!"

그리고 팬은 청려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뭐야!'

청려의 팬은 참지 않고 바로 재생 바를 마지막으로 넘겨 버렸다. 이렇 게 넣은 걸 보니 분명 마지막에나 나올 것이라 짐작하면서.

그리고 그 예측은 맞았다.

"으아악!"

갑자기 전형적인 위튜브 무대 컨텐츠처럼 변한 영상 분위기 속.

팬은 대형을 맞춰 서 있는 7명의 아이돌 멘토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말 청려가 있었다!

"허억."

청려가 다른 아이돌과 같이 무대를 하는 건 데뷔 2년 차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와 씨, 박문대도 있네.'

팬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리고 아이돌들이 턱을 치켜든 채 팔짱을 끼거나 포징을 하고 있는 그 대형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한 순간.

인트로가 시작되었다.

-ShhShhShh, Shh…!

"…!"

이건… 발매한 지 반년밖에 안 된 따끈따끈한 아이돌 히트곡이었다!

심지어 그냥 히트곡도 아니다.

'저거 미리내 곡이잖아!'

데뷔한 지 만 1년도 되지 않은 신인 여자 아이돌의 히트곡이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7화]

커버 무대.

자신의 곡이 아닌, 다른 그룹이나 가수의 곡을 퍼포먼스 하는 무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것에도 암묵적인 선이 있었다.

'후배의 곡은 굳이 하지 않는다.'

후배보다 못하면 그림이 굉장히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하더라도 '상도덕 없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보통 커버 무대가 단 며칠만의 연습으로 타인의 곡을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리스크는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아주사 제작진들의 이 예능에 멘토로 나오는 아이돌들은 이미 뜰 대로 뜬 팀도 많았다.

'아니, 연말에 커버 무대 할 급이 아닌 놈들도 수두룩하잖아!'

그들이 신인의 최근 히트곡을 커버하는 뜻밖의 짓을 하는 걸 영상으로 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는 뜻이다.

'헐.'

참고로, 비슷한 시간대의 관련 SNS들 역시 '?' 따위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려의 팬은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

'하긴, 재현이 선배 곡으로 추리면 너무 가짓수가 줄어드나?'

VTIC보다 선배면서 근 5년 내 히트곡을 가진 아이돌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과거 곡을 커버하는 것도 재미없었다.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신인 여돌 곡… 재미는 확실한데!'

그러고 보니 청려가 여자 아이돌 곡을 소화하는 것을 보는 것도 정말 데뷔 연도 이후 처음이었다!

갑자기 터진 희귀한 떡밥이란 생각에 팬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청려가 못할 것이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기에 가능한 반사작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이 이삼 초 남짓에 휙 지나갈 무렵.

-We gonna fly high

화면이 클로즈업을 멈추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둥둥둥둥-

베이스, 드럼 위로 까랑까랑한 현악기 우드가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처럼 변형되어 깔렸다.

그리고 핏 좋은 가죽 하네스 의상을 입고 있던 아이돌들이 대형을 가르고 보랏빛 무대에서 안무를 시작했다.

각기 다른 그룹 출신에서 오는 위화감은 부드럽게 녹아 가려졌다.

다년간의 활동으로 잘 다듬어진 능숙함도 한몫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센터가 유별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청려였다.

-넌 외쳐 high up

날아가, 저 위로

속박의 shoot up

벗어나, Paradox

'으악!'

강렬한 후렴이 다짜고짜 도입부터 치고 나왔다. 청려의 팬은 자동으로 침음했다.

"하, 개좋아…."

화면의 청려는 마치 하나의 동작처럼 몇십 초의 안무를 물 흐르듯 연결해 끌어 도입을 끝내버렸다.

원곡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마치 순식간처럼 느껴지도록.

엄청난 역량이었다.

'그아아악!'

알 수 없는 괴성과 멤버 이름을 부르짖는 것을 제외하면, 팬 커뮤니티에서도 뜨문뜨문 비슷한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려 개잘해 X발

-월드 클라스 오졌다

-오 키만 바꿨는데 분위기가 달라짐

키만 바꾼 것은 아니었다.

뉘앙스가 달라진 것이다.

미리내의 데뷔곡, 'high up'은 거미줄에 걸린 애벌레가 고치로 붙잡혀 굳어가나 결국 나비로 탈출한다는 메타포를 담은 곡이었다.

부분적으론 약간 복고풍의 애절한 맛이 있는 듯하면서도 세련되며 리드미컬한 맛이 최근 유행에 딱 맞아 흥행에 성공했다.

신인다운 칼각이 돋보이는 곡에 군데군데 의도된 감성이 들어간, 나무랄 곳 없는 데뷔곡이었으나… 그만큼 색이 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애초에 메타포 자체가 아주사 시즌 4로 인한 논란과 잡음의 여론을 떨쳐내고 비상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런 짓에 이력이 난 기성 아이돌들은 이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

이번 커버 무대에 괜히 어설프게 그 고유의 감성을 따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허물을 찢어, 버려

Take off, take off, take off

난 이륙해 지금 바로

단지 박력만을 살렸다.

"와, 씨."

신인의 데뷔곡이 으레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경직이 없었다. 대신 여유에서 나오는 표현력이 극대 화되었다.

게다가 청려가 잡아둔 안무 각은 이 여유가 방자함으로 보이지 않도록 원천 차단했다.

결과적으로, 잡아먹을 듯이 몰아치는 무대가 되며 원곡과 또 다른 느낌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글로벌 KPOP 팬덤에서 환장하는 '세고 끼 넘치는 컨셉'의 좋은 표본이 되었다.

게다가 원래 같은 그룹이 아닌 탓에,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그것을 극대화했다.

특히 후렴.

-넌 외쳐 high up

(high-up, up, up, up)

멀리 가, 더 위로

"이야!"

몰아쳤다.

청려가 이끄는 대형은 유려하고 강약조절이 절묘해 시선을 잡아당겼다.

가운데 선 놈이 조절을 잘하면, 전체적인 퀄리티가 올라가 보이는 안무의 법칙은 충실히 지켜지고 있었다.

아마 3화가 올라오자마자 쭉 훑어서 공연 장면부터 뽑아낸 일부 사람들은, 벌써 GIF 파일을 끝없이 뽑아 내는 중일 것이다.

'아, 상도덕 없단 이야기 확정이네!'

청려의 팬은 어그로 꼬이는 미래가 그려지는데도 어째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무대의 마력이었다.

거기엔 '날아오르겠다'는 가사가 있는 대로 모두 부숴서 받침판으로 삼겠다는 식으로 들릴 정도로 기가 넘쳤다.

-high up!

그리고 2절 벌스.

갑자기 드라마틱한 멜로디가 들어오며 보컬 역량이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당연하지만 박문대가 맡았다.

그리고 여기는 본래 미리내의 센터, 1위가 소화하는 파트기도 했다.

'걔는 춤도 잘 추던데.'

청려의 팬은 엄청난 만능 육각형 캐릭터인 시즌 4의 1위를 잠시 떠올렸다가, 화면의 박문대를 보고 반사적으로 오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박문대도 이제 제법 춤을 잘 추었지만, 팬이 아닌 사람 중엔 아직도 그의 춤에 의구심을 가진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 아주사 첫 등장 때의 'POP CON'이 워낙 강렬해서였다.

"으음."

그러나 그 걱정은 지레짐작으로 끝났다.

-아픔도 상처도

절대 멈출 수 없어

THE WAY OUT

Can't let us down

"오."

박문대의 춤이 쫀득했기 때문이다.

몸을 굽혔다 필 때의 느낌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잘하네?'

평소 테스타의 타이틀곡 대형에서 이런 본격적인 안무 중에 센터인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그 신선함이 더 컸다.

워낙 댄스가 특기인 놈들이 많은 그룹에 있는 비애일까, 청려의 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여기 춤 선이 어째 좀….'

우리 애랑 닮지 않았나?

하지만 청려의 팬이 그 묘한 기시감을 느끼기 전에, 노래가 먼저 귀를 잡았다.

-We gonna fly high!

이 사슬에 맞서

Say goodbye

분명 후보정이 들어갔겠지만, 원곡보다 드라마틱한 전개였다.

"워우."

밸런스 멤버와 보컬 특화 멤버의 차이가 유의미하게 느껴졌다.

'진짜 잘하네.'

청려의 팬은 새삼스럽게 화면을 보다가, 문득 반질거리는 박문대의 어린 얼굴을 보며 묘한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연상되는 뺀질한 놈 때문이었다.

'그 무능력자 새끼 메보랍시고 엉덩이 뭉개고 있어서 애들 고생했을 걸 생각하면…!'

그 새끼는 끼도 X나게 없어서 수납하기 바빴지 않은가!

'올팬 기조 때려치워! 진작 욕을 바가지로 쏟아서 그 대가리를 고쳐줬어야 했는데!'

아직도 '브이틱은 5명ㅠ' 같은 댓글을 달아대는 해외 팬들을 떠올리며, 청려의 팬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어쨌든, 보던 무대가 홀릴 듯 좋아서 분노는 금방 가라앉았다.

"휴."

이런 전형적인 컨셉추얼 신인 아이돌 곡을 하는 청려가 너무 오랜만이라 행복했다.

-We gonna find

THE WAY OUT

그녀의 아이돌이 무대 위에서 거의 날아다닌 뒤, 마지막 후렴은 박문대가 센터를 잠시 차지하며 곡이 끝났다.

"흠."

능력치 분배를 따지면 청려를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박문대가 제법 인상적이었기에 팬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청려 분량이 충분해서 가능한 감상이었다.

"재밌다…."

청려의 팬은 침대에 누워, 올라온 청려의 사진과 움짤들을 저장하며 흡족해했다. 이런 거리감 없는 떡밥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슬쩍 박문대의 것도 몇 개 저장했다.

'뭐, 귀엽잖아.'

'애들이랑 친한 것 같던데, 테스타 끝나면 LeTi랑 계약하지 않을까' 따위의 짐작을 하며, 팬은 하루를 만족스럽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비하인드 영상이 올라왔을 때, 박문대에게 동작을 알려주는 청려를 확인하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며 뿌듯해하게 된다.

-문대야 너 언제 누나 몰래 댄스 라인 됐니 역시 아이큐 300 천재 강아지

-최고의 허스키, 추천합니다 (후렴 안무 장면 박문대 GIF 파일)

-박문대의 컨셉 소화력은 실로 독보적이다. 어디에 붙여도 정확한 표현력을 보여줄 줄 아는 퍼포머는 드물다. 그리고 박문대는 분명 그 소수 중 하나일 것이다. (사진)

-야 괜히 시즌3 1등이 아니네 프로그램 전성기 우승자는 때깔이 달라요ㅋㅋㅋㅋ

'반응 괜찮네.'

나는 첫 공개된 무대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T1에서 밀어주는 신인 그룹의 곡이었기에 '왜 하필 후배 곡 골랐냐' 등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누가 봐도 제작진 입김이니까.'

게다가 반대로 '티원이 너무 미리내를 밀어준다'는 이야기도 예상보단 많이 나오지 않았다.

'무대 평이 워낙 좋으니까.'

일단 결과가 좋아서 만족스러우면 세부적인 과정들이야 정당화되는 경향성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워낙 관계없는 놈들끼리 묶어서 무대를 시켜놓았기 때문에, 은근히 누가 더 잘했다는 기 싸움이 심했다.

물론 보통은 제일 인기 많은 놈이 이긴다, 이런 식으로.

-신청려 얼굴 봐 어딜 봐서 곧 10년차이신지 어제 데뷔라고 해도 믿겠음

-청려는 아직도 갓기다

└그 나이면 아재잖아ㅠ

└느그 돌은 면상이 아재잖아ㅠ 늙은 아이돌이라니… 마음이 안 좋다 화이팅!

-청려야말로 천년돌

'천 년은 모르겠고, 한 오십 년은 아이돌 해 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떨떠름하게 SNS 페이지를 쓱 내렸다.

이번에는… 인정하긴 싫다만, 저 '제일 인기 많은 놈'이 무대에서 역할이 제일 크기도 했으니 특별히 코멘트할 건 없다.

'어쨌든, 성공은 했고.'

국내뿐만 아니라 따로 올라온 위튜브 동영상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조회 수가 붙고 있다고 한다.

예능도 띄우고 미리내 인지도도 키우고, 회사에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도 손해 본 건 없지.'

이 예능의 해외 인지도가 쭉쭉 올라가면서, 초반에 멘토로 조명 잘 받은 테스타 멤버들의 해외 인지도 상승에도 제법 도움이 됐다.

'이번에 내가 나온 특별 무대도 워낙 반응이 좋았고.'

그리고 다음은 선아현이니까, 웬만하면 이 기세를 이어갈 것이다.

거기 라인업에 영린도 끼어 있었거든.

청려만큼은 아니지만, 해외 인지도가 좋은 사람이니 선아현도 시너지로 득을 볼 것이다.

게다가 둘이 연차도 워낙 차이 나서 쓸데없는 연애설 위험도 없다.

'혼성그룹 노래였지.'

듣기로는 해외에서 제법 인기 있던 모 인기 기획사의 혼성 유닛 곡을 커버했다고 한다.

투어 중에 즉석 무대에서 한번 해 봤어서 나도 안다. 명곡인 데다가 선아현에게 잘 어울리는 분위기라 잘 나올 것이다.

마침 옆에서 내 무대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당사자가 영상이 끝났는지 말을 건다.

"무, 문대야. 정말 멋있게 잘했어…!"

"춤 괜찮아?"

"으응! 히, 힘이 좋아!"

오, 확실한가 보군.

"고맙다. 너도 잘 나올 것 같은데."

"그, 그럴까?"

선아현은 헤헤 웃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생각해도 제법 잘한 모양이지.

'역시 안 바꾸는 게 정답이었군.'

안 봐도 잘했을 건 같다만, 다음 주에 한번 모니터링은 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보던 스마트폰를 껐다.

다만 예상과 달리, 거기까지의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며칠 뒤, 두 번째 특별 무대 예고편이 올라온 후.

[쿨릿 최기운 인하트 비공개 계정에 올라온 글.jpg]

[최기운 비계 다 털림ㄷㄷㄷ]

선아현과 같이 이 혼성 유닛 곡의 무대를 했던 이름도 모를 새끼의 비밀 계정이 만천하에 털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라인업 중 영린만 고려해서 생각도 안 했던 놈이었는데.'

여기까진 솔직히 우리 알 바는 아니었다. 그놈이 논란 때문에 카메라 분량을 덜 받으면 차라리 이득이 됐으면 모를까.

문제는 어김없이 관심법 쓰는 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기 이거 선아현 이야기 아니야? (캡처)

-시기 딱 맞지 않나 촬영날 같은데

'…슬슬 쿨타임 돌아올 때가 되긴 했지.'

해충박멸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