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사실, 털린 놈의 비공개 계정에서 밝혀진 내용은 뻔한 레퍼토리였다.
[응 X나 지겨움]
[언제 다하냐" (불타는 이모티콘)]
[X발것들 귀찮아죽겠음… 휴 스타의 삶 왕관의 무게]
직장인이 자기 일을 욕하는 것처럼 자기 일에 대한 한탄과 욕으로 꽉 채워놓았단 뜻이다.
그래도 회사 욕으로 끝났으면 '좀 깬다' 정도로 끝났을 텐데, 이놈은 동료와 팬까지 자유분방하게 비난했더라고.
당연하지만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탈퇴해 미친새끼야
-ㅋㅋㅋㅋ그렇게 귀찮은 줄 모르고 그동안 미련하게 너한테 시간을 쏟았구나 미안하다 이제 갓반인으로 편하게 살렴
-남의 비공개 계정을 유출한 게 잘못 아닌가 다들 일하면서 쌍욕 한 번 안 해본 것처럼 지랄이네 그래 연예인 욕하는 게 재밌긴 하지ㅋ
└당사자냐? 댓글 달 시간에 은퇴 나 ㄱㄱ
-저 순간적인 감정이 돌의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도 제발 신중할 수 없었을까 머리가 너무 아프다...
-태도 X 같더니 이럴 줄 알았지ㅋ
놈의 과거 행적부터 말실수까지 쭉 끌어올려지더니, SNS의 글들과 짜 맞추어지며 온갖 추측과 의심이 난무했다.
-이거 보이는 라디오 때 온 팬들 지칭 맞는 듯 그때 라디오에서 X나 불편한 티냄 (동영상 링크)
-얘랑 친한 동갑라인 애들 한번 검증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흠…
-스타의 삶 이지랄ㅋㅋㅋ 팬싸 다음날이네 와우다 (스케줄표 캡처)
뭐, 절반은 억측이었겠지만 일단 불붙은 재미를 놓칠 순 없는지 사람들은 신나게 온갖 디테일을 싸잡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선아현도 지목된 것이다.
[클럽 죽돌이 또 X나 착한 척해ㅋㅋ어제 물이 그르게 좋았냐]
캡처를 확인하니, 이 글이 올라온 게 하필 선아현과 함께 특별 무대를 촬영한 날이었다.
그리고 '남성', '스케줄 겹침', '착한 척' 키워드에서 단번에 선아현이 지목된 모양이다.
-솔직히 경우의 수 다 빼면 하나 남잖아
-이거 너무 노골적으로 ㅅㅇㅎ인 데?ㅋㅋㅋㅋㅋ 스케줄 딱 맞음 ㅅㅇㅎ 심지어 그 촬영 전날 스케줄도 없네ㅋ 소름
-일단 중립기어 박는데 솔직히 개 쎄하긴 하네 평소에 이미지 관리 너무했잖아 그 가식…
선아현이 워낙 순한 이미지다 보니 도리어 '그게 진짜일 리 없다'는 식으로 의심하는 소수 여론이 좀 있었는데, 거기서 우수수 붙는 것 같다.
게다가 물밑에서는 거의 기정사실처럼 떠들어대는 글도 좀 봤는데, 이건 아무래도 일부러일 테고.
-아 말더듬쉑 여자 환장하는 거 이제 알았냐 불쌍한 빠순이들ㅠㅠ
-터졌다터졌다 누구 정황 더 있는 새끼들 빨리 가져와봐 뿌리게ㅋㅋㅋ
-휴 드디어 음침말병이 팰 수 있냐 너무 좋아 (박수 이모티콘)
'이건 아주사 때부터 있던 새끼들이고.'
선아현을 깎아내리거나 깔아뭉개는 것에 인생 건 것 같은 새끼들 말이다.
대부분은 아주사 끝나고 떨어져 나가거나 관심 가는 새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순간 갈아탔으나, 몇몇은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다.
'다른 놈들도 끈질긴 안티는 당연히 있긴 한데… 선아현한테 붙은 새끼들은 결이 좀 달라서.'
그냥 '망했으면 좋겠다' 이런 게 아니라, 선아현의 이미지를 망치고 기를 죽이는 것에 집착하는 새끼들이 다수였다.
선아현이 상담받으며 공식석상에서의 태도가 덜 소극적으로 변하니 더 지랄인 것 같고.
'미친 새끼들 생각 원리 추측해 봤자 뭐 의미 있겠느냐만.'
답은 고소였으나, 일단 터진 건은 빠르게 수습하는 게 좋겠다.
나는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정리는 어렵지 않겠는데.'
이런 건 그냥 이놈들이 지껄이는 '정황상 의심'과 대치되는 증거를 흘려두면 팬들 여론 선에서 깔끔해질 것이다.
당장 지금도 저 물 밑에 손 못 대는 곳 아닌 데에서는 무섭게 선아현의 팬들이 해당 여론을 두들겨 패는 중이다.
-ㅋㅋㅋㅋㅋ너무 개소리라 당혹스러울 정도임 수세미 뜨고 자수 놓는 애한테 클럽 이지랄ㅋㅋㅋㅋㅋㅋㅋ
-와 고소감 널렸네 PDF 쭉 따간다 대기업 법무팀 만날 준비나 해라∼
-아현이 그룹 외에 친목도 안 뜨는 애인데 미친 소리 작작 좀
-아 막말로 클럽 가면 또 어때 우리 애는 팬 기만 스케줄 펑크 태도 논란 없는 프로 아이도루거든여ㅋㅋ
혹시 정말 클럽에 갔다 해도 문제 없도록 여론 나눠 작업하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물론 선아현 같은 놈이 클럽 죽돌이일리도 없지만.
여기에 방어용으로 당시 이사 소식에 룸메이트 컨텐츠에… 뭐, 반증으로 올릴 건 많다.
말 많아지기 전이니까 당장 오늘 내에 뭐라도 올리면 단번에 정리될 것이다.
다만 선아현의 멘탈 상태는 좀 고려해 볼 사항이다.
'지레 겁먹거나 패닉을 가능성도 있지.'
선아현의 성격에 제대로 쉬려고도 안 할 테고, 그럼 지금까지 받은 상담이 도루묵 되는 상황까지도 그려진다.
'…다음 활동 한번 볼 만하겠군.'
벌써 관자놀이가 지근거린다.
역시 빨리 진행해서 굳이 선아현 눈에 안 들어가는 수준으로 끝내는 게 맞겠다.
나는 곧바로 회사와 통화해서 컨텐츠 공개 시기를 조절하려 했다.
하지만 하필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아현이 촬영 때 쓸데없는 소리가 나와서요. 그냥 지금 공개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완성이 아직이라. 그럼 비용 좀 더 쓰더라도 자정까지 완성되도록 당기는 게…."
"무, 문대야?"
"…!"
하필 선아현이 베란다까지 날 찾으러 왔더라고.
합숙 생활의 단점이었다. 망할.
"이, 이거, 침대 옆에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음, 그래."
선아현이 날 찾은 목적은 방 안 인테리어 문제였다. 나는 선아현이 내미는 개 인형을 받아다가 적당히 옆에 뒀다.
'…이놈이 룸메이트라는 점을 좀 더 고려했어야 했나.'
어쨌든 이미 이야기를 들은 이상 별수 없었다.
'선아현은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부류지.'
정확한 사실을 못 들으면 도리어 더 나쁜 쪽으로 상황을 짐작할 확률이 높다.
'가볍게 턴다.'
나는 바짝 굳어있는 선아현에게 되도록 편한 어조로 말했다.
"별일 아냐. 웬 아이돌 하나가 욕 먹는 거고,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예방 차원에서 엮지도 못하게 만드는 게 낫지 않나 해서."
"그, 그렇구나…."
"그래."
"알았어."
선아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넘어갈 것 같진 않은데.'
"그, 그런데."
그럴 줄 알았다.
"어, 어떤 이야기야…? 내, 내 이야기 나온다고 해서…."
거기까지 들었냐.
어쨌든, 괜히 뜸 들이지 말고 가볍게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너 혹시 클럽 가냐는 건데."
"크, 클럽?"
"어. 다들 안 믿는데, 무슨 날짜가 비슷하다고 하는 소리야. 그래서 그 날 너 다른 일 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지."
"아, 아하…."
선아현은 이번에도 얌전히 수긍했다.
'끝났나.'
이대로 괜히 이상한 소리 찾아보지 않도록 스마트폰만 며칠 못 쓰게 하면 되지 않나 싶었다.
"일이 커진 것도 아니니까, 굳이 넌 안 찾아봐도 돼."
하지만 선아현이 말은 수긍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 저기. 그럼 문대가 다 찾아본 거야…?"
여기서 안 찾아봤다고 하면 마치 어디서든 이 헛소리를 목격할 만큼 일이 커졌다는 것처럼 들리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모니터링하다 보니 좀 깊게 들어갈 때도 있어서."
"으음."
그리고 선아현은 눈치를 보는 것처럼 뜸을 들였으나, 결국 뒷말을 또 이었다.
"이, 있잖아."
"어."
선아현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아, 앞으로는, 문대도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안 찾아보면 안 될까…!"
"…!"
"히, 힘들잖아. 그런 말들은… 자주 보면 무뎌지는 게 아니라, 더 힘들어지니까…."
"…음."
약간 당황스럽다. 소강상태 때도 아니고, 당장 이득 보는 상황에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나는 팔짱을 꼈다.
"빠르게 대처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겠어?"
"괘, 괜찮아."
선아현이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고, 다들 그렇게 믿는 것도 아니잖아…!"
"…!"
"호, 혹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때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
"…."
"그, 그러니까… 문대가 너무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주사 때 '하도 욕먹는 걸 많이 봐서 익숙하다'고 발언했던 선아현이 하는 말이라고 믿기지 않는 발언이었다.
상담을 착실히 받는 위력이 여기서 나오나.
'놀라운데.'
덕분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니, 선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차, 찾아보면 오히려 불안해지는 것 같아."
"그러냐."
"으응. 저, 전에는, 내가 한 게 아닌데, 왠지 다들 그렇게 믿게 될 것 같고… 아무도 해명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걱정이 들어서…."
"…."
경험담인가.
"호, 혹시 해명이 통해도, 나중에, 다시 문제가 되어서 큰일 날까 봐… 자꾸 확인하고, 걱정했어."
경험담이 맞는 것 같다.
'그 또래 관계 문제인가.'
나는 묵묵히 경청했다. 선아현이 침을 삼켰다.
"하, 하지만, 그런 일이 진짜 일어날 가능성은 굉장히 낮은 거야, 그렇지…?"
"맞아."
"으, 응!"
즉답에 선아현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러니까, 문대도 많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해서!"
"…."
거참. 도와주는데도 자제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좀 빈정상해야 하는데, 너무 정론이라 그럴 마음도 안 든다.
'걱정해 주는 거니 뭐.'
나는 팔짱을 풀며 피식 웃었다.
"뭐, 요새는 그렇게까진 안 봐. 이 번에는 우연히 눈에 띄어서 한 거고."
안 그래도 지난번에 차유진에게 비슷한 말 들은 이후로 하나하나 안 놓치고 보려는 짓은 그만뒀다.
선아현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 그렇구나!"
"어. 그리고 사실 이게 좀 재미도 있어서."
"…! 재, 재미있…?"
"보는 거 말고. 싹 쓸어버릴 때 그 맛이 있지."
"아, 아하."
선아현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공이 떨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 알았어. 문대가 그렇다면…."
"그래. 적당히 할 거야."
"으응."
오히려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말에 선아현이 도로 얌전해졌다.
'룸메이트 되더니 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되는군.'
그리고 그제야 정석적인 반응도 나왔다.
"그, 그리고… 문대야. 정말 고마 워, 이, 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번에는 어차피 알았으니까 그냥 대응하는 걸로."
"아, 알았어. …그, 근데! 다른 분들이 고생하시는 거면, 안 해도 괜찮…."
"아냐, 다른 사람은 안 할 거야."
"어어?"
이미 '편집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는 답 왔을 때부터 생각해 뒀던 게 있다.
"너랑 내가 한다."
"어어…?"
그리고 스케줄이 빈 그날 저녁, 열 심히 랩탑을 붙잡고 네다섯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다.
덕분에 자정에 예정대로 컨텐츠를 업로드할 수 있었다.
물론, 아까 회사와 이야기했던 공식 컨텐츠는 아니었다.
팬들이 느끼기에도 테스타는 SNS 계정을 알차게 이용하는 편이었다.
사진이나 근황은 거의 매일 같이 돌아가며 올라왔고, 가끔 멤버들이 투닥거리거나 경쟁적으로 업로드하는 귀여운 모습도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동영상이 올라오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짧은 동영상이 아니라, 제법 길이 있는 영상이 올라오는 것은 팬송 깜짝 공개 이후로 처음이었다.
-동영상 길이 6분 27초?
-누구냐 이 효자는
-ㅋㅋㅋㅋㅋㅋㅋ몰라 일단 클릭해
특별히 자기를 표출하는 것 없이 'Good night'이란 내용만 적힌 그 글의 동영상을 사람들은 얼른 클릭했다.
"…!"
그리고 나오는 장면에 반사적으로 함박미소를 지었다.
-헐 브이로그
-허억 사랑한다
재생된 것은 낯선 거실에 자유롭게 앉은 멤버들을 찍은 투박한 동영상이었다!
심지어 작은 자막까지 들어가 있었다.
[팝콘러버 차유진]
[냠]
일정이 안 맞는 룸메이트 컨텐츠나 이사 컨텐츠 대신, 박문대가 개인적으로 찍어뒀던 소장용을 빠르게 편집해 올린 것이다.
그는 일부러 90년대 필름카메라풍 필터를 써서 촬영 날짜와 시간이 다 뜨게 만들어서 올리는 노림수도 잊지 않았다.
[19:11:21]
[오늘의 저녁 당번들]
[선아현은 불 접근 금지]
어두운 듯 따듯한 옛날 색감 속.
멤버들이 아직 짐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주방을 배경으로 저녁을 먹으며 떠들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거나, 카메라를 보고 브이를 하거나 인사를 하는 것도 짧게 짧게 편집되어 들어갔다.
[파자마가 편했다]
[굿나잇!]
심지어는 양치를 하거나 자러 들어 가는 모습까지도.
나른한 BGM이 깔려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터를 제외해도 상당히 날것처럼 느껴지는 그 감성은, 어딘지 공식 영상 컨텐츠와는 다른 맛이 있었다.
-너무 귀엽다
-애들 아직도 데뷔 때 맞춘 동물 파자마 계속 입고 있어 사랑해
사람들은 약간 사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친근한 컨텐츠를 신나게 즐겼다.
물론 부과 효과도 착실히 나왔다.
-저기 숙소 아니잖아
-뭐지 MT 갔니?
-대박 애들 진짜 이사갔나 봐!
-방금 그럼 룸메이트 게임이야? 미친 빨리 공개 좀 감질맛 나네ㅠ
-이거 설마 문대가 찍었어..? (카메라 돌려서 보는 문대컷 캡처)
-제발 문댕댕 차고영 룸메 한번 더 하자 내 꿈임
아직 공개되지 않은 두 컨텐츠, 이사와 룸메이트 게임의 예고편 느낌으로 기대감도 살린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적 역시 바로 달성되었다.
[아현이 자수 완성]
모든 시간대에서 멤버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화면에 나왔기에, 자연스럽게 선아현의 무고함도 깨끗이 증명되었다.
중간중간 비는 30분 만에 클럽에 갔다 올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ㅅㅇㅎ 클럽 어떻게 됐어?ㅠㅠ 맞는 것 같대?
└응 그때 걔 숙소 이사기념 할리갈리하고 있었음ㅅㄱ∼
가뜩이나 팬들이 밀어놔서 억눌려 있던 의심은 다시 한번 얻어맞으며 소강했다.
-영악한 새끼
-ㅋㅋㅋㅋㅋ곰머가 설계해줬냐
-ㅉㅉ클럽남을 덮어? 삐틱에서 배운 게 없네
물밑에서도 더는 널리 통할 떡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의미 없는 발악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번, 쓸데없는 구설을 밀어 버릴 파도가 밀려왔다.
-야 위튜브에도 뭐 뜸
-뭐야 오늘 무슨 날이여
-잠 다잤네
Vlog 공개 한 시간 뒤.
새벽 1시경에 T1 Star의 위튜브 공식 채널 알림이 뜬 것이다.
[테스타(TeSTAR) 'Enchanted?' Concept Film]
검은 썸네일에는 행차와 'Spring out' 두 뮤직비디오 사이 어디쯤의 의상을 입은 류청우가 소나무를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헐
바로 테스타가 이번 활동 마무리용으로 준비했던, 세계관 연결용 컨셉 필름이었다.
원래 사흘 뒤 공개였던 것을 박문대가 그룹 회의를 통해 끌어온 것이다. 이미 편집을 끝내놓은 덕에가 능한 일이었다.
대놓고 물량 공세였다.
덕분에 팬들의 반응은 이렇게 되었다.
-갑자기요?
-뭔진 모르겠지만 고맙다 얘들아
-아 맛집이야 역시 양도 많이 줘
쏟아진 컨텐츠에 신난 팬들이 허겁지겁 영상을 클릭하는 순간.
"…!"
가볍게 달아올라 있던 그들의 마음이 확 내려앉도록, 영상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액정을 집어삼켰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19화]
영상은 소나무 아래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류청우로 시작했다.
[….]
배경의 소나무 숲은 완연한 밤이었다. 그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던 안광이 눈꺼풀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
피잉-
화면이 깜박거리며, 마치 회상하듯이 과거와 미래를 접붙였다.
눈부신 낮. 화살을 쏘아 보낸 류청우가 미소와 함께 궁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컷이 검은 머스킷 총기를 든 표정 없는 류청우로 바뀌더니, 총구에서 탄이 튀어나왔다.
탕!
그리고 쏘아진 탄을 느릿하게 비추던 장면은 어느새 비슷한 크기의 금화가 이세진의 얼굴 앞으로 튕기는 컷으로 바뀌었다.
티딩-
그리고 금화를 튕기던 이세진의 손은 어느새 대궐에서 춤사위를 벌이던 화려한 손동작의 컷으로 전환되었다.
휙.
그다음은 허공에 휘날리던 오색 천이 빛바랜 끈으로 바뀌더니, 그 끈을 팔찌처럼 동여맨 박문대가 비추어졌다.
그렇게 조각조각, 뮤직비디오에 나올 법한 컷들이 의식의 흐름처럼 짜맞추어져 화면을 지나갔다.
느릿하게, 클래식풍으로 편곡된 행차의 멜로디를 BGM 삼아서.
-? 뭐지
-행차랑 스아웃 때 찍어둔 것 같은데
-해석을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뜬금없는 영상에 당황하면서도 훌륭한 영상미와 멤버들의 새로운 컷을 일차적으로 즐겼다.
마치 B컷 모음처럼 보여야 마땅했으나, 절묘한 컷의 배치로 상징성의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 더 진행되자 구성을 눈치챈 사람도 있었다.
-이거 행차 티저 순서 거꾸로 올라오네
└헐
└미친 소오름
그렇다.
멤버들의 컷은 행차 티저에서 각 솔로곡이 등장했던 순서를 역행으로 거슬러 올라 등장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었다.
티저 맨 처음에 등장했던 선아현의 수면 위로 손을 뻗는 컷이 등장하자, 그것이 머스킷을 돌렸다가 잡아채는 류청우의 컷으로 변한 것이다.
처음과 끝이 연결되었다.
그렇게, 마치 회상을 계속하는 것처럼 컷은 이어졌다.
휘이익!
계속, 반복적으로.
더 빠르게, 엄청난 속도감과 함께.
그렇게 쫓기듯, 내달리듯 교차하던 예술적인 컷들은 시작할 때처럼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찰칵.
차유진이 포박된 류청우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며, 그 손에 쥐어진 시민권 신청서가 클로즈업되던 순간.
[딩-.]
갑자기 컷이 고정된 것이다.
그리고 대신, 뜬금없이 차유진의 뒤에 서 있던 배세진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치 영화처럼 느긋하게 고정된 클로즈업과 함께.
[….]
상념이 드러나는 그 얼굴은, 마치 직전 수많은 컷으로 표현된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와하하하!]
이윽고 배세진은 신나게 시민권 신청서를 들고 뛰어다니는 멤버들을 뒤로한 채, 슬그머니 발을 옮겼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타다닥!
그리고 곧 배세진이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
바로 지난 뮤직비디오에서 그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보던 거대한 창이었다.
광활하고 이국적인 도시는 여전했다.
그러나 창에는 전 뮤직비디오에서 굳이 자세히 비추어주지 않았던 서류가 하나 붙어 있었다.
-시민권 증서 요청 대응 지침 (요괴)
구겨진 서류 위에는, '유사시 적극적 거부'에 수많은 붉은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시민권 증서는 무용한 미끼였다는 것을 뜻하는.
[후.]
배세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 서류를 뜯었다.
그리고 몹시 주저하듯이, 서류와 창밖을 번갈아 보았다. 창밖 한구석에서 아직도 신이 난 멤버들의 모습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
현악기 하나로 'Spring out'의 테마 멜로디가 연주되었다.
배세진은 천천히, 서류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낡은 천을 꺼내서 눈 위를 덮기 시작했다.
행차 때처럼.
그 위로 자연스럽고, 또렷한 음성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다시 태어난다면,]
[너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화면의 배세진은 머뭇거림도 없이, 눈을 감은 그대로 창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느릿한 클로즈업과 점점 고조되는 음악.
그리고 손이 닿는 순간.
툭.
음악이 일그러지며, 시야가 반전되었다.
쉬잇.
암전과 화이트 노이즈.
그리고 다시 살아난 화면.
배세진이 아닌 흑발의 박문대가, 교복 차림으로 서서 창문에서 손을 떼었다.
학교였다.
그는 뒤를 돌아 카메라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
아주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아주 친숙한,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마법소년의 멜로디.
그와 함께, 화면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Still enchanted]
[See you in that dream]
문구만을 남긴 채.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
-지금 내가 뭘 본 거냐
당연하지만, 그 후 테스타의 팬덤 은 사흘쯤 거대한 세계관 연결 떡밥에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훌륭하네."
개인 일상과 공식 세계관 영상을 연달아 공개하는 건 역시 효과가 탁 월했다. 나는 온갖 이론이 판치는 SNS 글을 쓱 훑었다.
어디 보자, 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군.
-평행세계 존맛
-일종의 인셉션 같은 구조라고 생 각함 꿈속의 꿈? 아마 행차 마법소년 배러미 비행기 같은데
-생각해보면 피크닉 때도 묘하게 전 뮤비 장면 다 겹쳐 나오지 않았냐 설마 그것도 떡밥이었냐…?
-ㅠㅠㅠㅠ우리 애들 요괴가 아니라 사람 되고 싶었구나 근데 원래는 요괴였으니까 자꾸 초능력으로 능력 나오는 거고
-다음 앨범 마법소년으로 세계관 돌아오는 것 같지? (김칫국 드링킹
워낙 의미심장하게 만들어둔 탓인지, 배세진의 역할부터 시작해서 세계관 순서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사람들을 더 흥분시킨 것 같았다.
'재미는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다만….'
물론 세계관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팬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요 며칠 좀 시큰둥했겠지.
-얘들아 뇌절은 하지 말자
-너무 나갔는데 대체 어디까지 엮을 생각인 거임
-그냥 수트 입고 섹시 컨셉이나 한번 해주라 티원 새끼들 세계관 놀음 오냐오냐해주면 끝도 없이 감
-셤별 컨셉충 그룹인 건 알았는데 스케일 너무 커지니까 좀 피곤함
-문대가 양치하는 거나 한 번 더 보고 와야겠다 ㅅㄱ
그래서 이쪽을 위해 곧 이사와 룸 메이트 게임 컨텐츠도 공개될 예정이다. 그럼 며칠 내로 팬 커뮤니티가 더없이 쾌적하게 돌아가겠지.
'선아현 이야기는 더 나올 건덕지도 없는 것 같고.'
이만하면 일석이조는 될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 안을 확인한 뒤 곧바로 스마트폰에서 해당 탭을 내렸다.
'음, 슬슬 그만 봐야겠지.'
말을 해둔 게 있으니, 한동안은 물 밑에서 지껄이는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아예 보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이 세계관 컨텐츠를 약간 빨리 풀려고 짧게 회의를 진행했을 때 관련 이야기가 나왔기도 하고.
-그, 그래서… 문대가, 앞으로는 인터넷 많이 안 보기로 했어요…!
-잘했어!
-그래. 안 그래도 문대가 너무 자주 찾아보는 것 같아서 좀 걱정했거든.
-전자기기 사용 시간을 절제하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들었습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김래빈은 좀 잘못 이해한 것 같긴 했다만… 어쨌든 이렇게 되니 큰세진마저도 '난들 어쩌겠음' 같은 표정으로 어깨나 으쓱하더라.
이놈들이 이렇게까지 만장일치로 내 정신건강을 우려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누가 보면 무슨 은둔형 외톨이 위험군 수준으로 인터넷에 빠진 놈인 줄 알겠어.'
어쨌든, 그래서 나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며칠 위튜브로 동물 동영상이나 보면서 살면 되겠지.'
나는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위튜브로 접속했다.
시청 기록을 남기지 않고 관련 정보 수집을 거부해 둔 탓에 알고리즘 같은 건 안 나왔다. 그냥 인기순 정렬해서 개나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동영상이 실시간 인기 5위더라.
[테스타의 큰 그림? 미국인들을 케이팝 개미지옥에 빠뜨리는 루트 발견!]
…썸네일에는 '아주사?', '세계관은 또 뭐야!'라는 말풍선을 달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서양인들이 보였다.
국뽕 어그로가 흘러넘치다 못해 질식할 지경이었다.
다만, 위튜버 이름을 보니 몇 번 본 놈이다.
'내용 자체는 제법 알차게 구성하는 놈이었지.'
대충 해외 인터넷을 편향적으로 요약하는 놈이라고 보면 됐다.
"…."
그럼 실시간 인기 동영상 정도는… 사실 봐도 상관없지 않나? 관심 없는 놈들도 한 번씩은 볼 썸네일이지 않은가.
'척 보니 칭찬이나 줄줄 늘어놨을 것 같은데.'
타격 입을 일이 없다. 나는 곧바로 타당한 결론을 내리고 동영상을 클릭 했다.
'안녕하세요 위튜브 시청자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뻔한 분량 채우기용 이야기는 넘어가고.
본론부터 1.5배속 재생하자.
[여러분, 지난 동영상에서 제가 테스타의 영미권 인지도가 상승한 이유를 말씀드렸었죠.]
[바로 서바이벌 오디션 밈에서 아이돌 주식회사 로 이어진 관심이, 'Spring out' 뮤직비디오 조회수로 연결된 흐름인데요.]
그 '옛날 생각난다' 발언이 동아시아 밈하고 맞물려서 화제 좀 탄 걸로 호들갑 떠는 것이다.
[이 동양의 스팀펑크 세계관이 많은 양덕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투척된 것이 바로 새 케이팝 예능 K-NOW입니다.]
[아주사 제작진이 만들었다는데, 심지어 접근성 좋은 넷플러스 자체 제작 예능이었죠. 당연히 테스타-아주사 라인에 관심이 생긴 미국인들은 이 프로그램을 우르르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우르르'까진 아니다. 그냥 아주사 까지 볼 정도로 KPOP에 흥미 생긴 놈들이 좀 유입된 거지.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순간, 제법 쓸 만한 다음 말이 나왔다.
[다만 여기서 끝이 아닌데요. K-NOW가 예상보다 현지에서 대박을 친 것입니다!]
오, 이건 맞다.
아주사 제작진의 지옥 케이팝 캠프는 미국에서 꽤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 봤자 넷플러스 자체 제작치고 잘됐다는 거라 진짜배기 인기 채널급은 아니었다만, 인터넷에서 일반 인들에게 화자는 좀 됐다는 뜻이다.
물론 이 위튜버는 그 이야기는 싹 생략했다.
그래도 다음 말은 제법 날카로웠다.
[대박 예능은 다양한 대중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는데요, 여기서 바로 밈을 계기로 테스타-아주사 라인을 탔던 올드비들이 활약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 미국 일반인, 대중 시 청자들에게 아이돌 주식회사 와 테스타를 적극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
오, 이건 좀 새롭다.
'이런 분석이 있었나.'
그냥 예능빨로 해외 인지도 수혜좀 받은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그 안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나 보다.
[K-NOW를 감명 깊게 시청한 시청자들이 결국 테스타의 뮤직비디오나 아이돌 주식회사 를 시청하며, KPOP에 새롭게 유입된 것이죠!]
[기존 KPOP 팬들의 관심뿐만 아니라, KPOP 파이 자체를 키우는 영리하고 파급력 강한 행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작진은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으며 회사도 여기까진 고려 못 했다는데 이번 분기 정산을 걸겠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기까진 그림 안 그렸거든.
그러나 위튜버는 완전히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찬 모양이다.
[그렇다면 테스타의 큰 그림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심지어 바로 어제, 테스타의 세계관 영상이 새롭게 업로드되었습니다. 해당 영상은 테스타의 지금까지 활동 연대기를 연결해주는데요.]
[결국, 그들의 데뷔곡인 '마법소년'까지 유입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표까지 나왔습니다!]
[※영상 제작일 기준※]
…그러냐?
영상에 첨부된 그래프는 좀 과장되긴 했지만 맞는 소리였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테스타는 이번 활동을 마무리하고 휴식기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앨범에서는 또 어떤 행보로 우리를 놀라게 해줄까요?]
[오늘 영상은 여기까지입니다.]
흐음.
나는 턱을 문질렀다.
과장과 호들갑이 많긴 한데, 다 걷어내고 살펴봐도 꽤 고려할 만한 담론이 있긴 하다.
'다음 앨범이 또 중요하겠군.'
언제는 안 그랬냐만, 이번에도 관심을 팬층으로 잘 소화할 만한… 국내외에서 다 잘 먹힐 곡을 타이틀로 뽑아야겠지.
정체기 없이 쭉쭉 커지는 게 좋긴 한데, 숨 돌릴 틈도 없다.
'좀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하나.'
새 팬 만들겠다고 기존 팬들의 니즈를 벗어나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자료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인터넷 탭을 열어 세부 검색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저, 무, 문대야. 검색해?"
"…! 그냥 좀."
선아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아, 안 보기로… 아, 아니야. 문대가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만. 그래도 많이 보지는 않았으면 해서…."
"…."
"야, 약속했으니까…."
오냐.
"그래."
"으, 으응!"
나는 스마트폰을 껐다. 그리고 내심 한숨을 쉬었다.
'뭐, 할 거 없나.'
곧 비활동기라 스케줄 파악할 것도 없다. 어째 손발이 근질거린다.
그때였다.
드르륵!
대뜸 스마트폰이 진동하더니, 문자가 왔다.
"…?"
[202X년도 제1회 검정고시 응시자 유의사항 안내]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비활동기에 맞춰서 이걸 신청해 뒀었지.
'대충 보고 오는 걸로 할까.'
나는 심드렁하게 도로 스마트폰를 내렸다.
참고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놈들도 얼결에 이 문자를 봤다는 것은 이때까진 모르고 있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20화]
솔직히 검정고시를 보는 것에 대단한 의도는 없었다.
그냥 살면서 만일의 경우에도 고졸 정도는 해두는 편이 손해가 없을 것 같았을 뿐이다.
'예능에서 머리를 그렇게 썼는데도 중졸이라고 긁는 놈들이 겨우 검정고시 합격했다고 잠잠해질 리도 없고.'
그래서 그냥 때 되면 토익 갱신하는 것처럼, 크게 의식하지 않고 기출 문제집이나 한번 풀고 끝냈다.
대졸에 공시 준비까지 했는데 설마 검정고시를 못 붙겠냐 싶었지.
그리고 생각대로, 기출문제 점수를 보니 너끈히 합격권이었다.
"조용히 다녀오기만 하면 되겠어."
채점된 문제집을 덮으며 내린 결론 이었다.
활동도 어제로 끝났고, 아직 휴가를 받을 수준은 아니었으나 공식 스케줄이 하루 이틀 걸러서 나올 만큼 여유로웠다.
그래 봤자 2주쯤 쉬고 난 뒤엔 다시 다음 앨범 준비를 해야겠지만, 그래도 모레 검정고시 보는 데에는 문제없다는 뜻이다.
나는 팔짱을 꼈다.
'괜히 떠들지 말자.'
여론에 내 검정고시 소식이 빠져나가서 좋을 게 없었다.
쓸데없는 동정 여론부터 스토커가 붙어서 고사장에 민폐가 될 최악의 케이스까지 돌발상황만 늘어날 뿐이다.
가뜩이나 모니터링도 제한이 걸린 마당에 귀찮기만 하지 않겠는가.
'다른 놈들에게도 굳이 말할 것 없고.'
모처럼 쉬는 날이니, 각자 알아서 놀게 두자.
[이 망할 KPOP 밴드들 같으니!]
"와하하하!"
당장 문밖에서는 차유진이 폭소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K-NOW를 4화부터 몰아보는 중인 것 같은데, 덕분에 소음 속 모의고사 훈련 한번 효과적으로 했다.
다만 차유진이 폭소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4화부터 분위기가 좀 바뀌던데.'
'노답 관종들 KPOP 지옥 캠프로 골탕 먹이기' 느낌이던 초반과 달리, 4화부터는 참가자들의 사연을 조명하며 슬쩍 공감대를 형성해 주더라.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다른 사람들이 날 '신경 쓴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전 상금이 꼭 필요해요. 가족을 위해서요.]
그리고 그 분위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참가자들의 태도 편집도 좀 변했다.
캠프에 고통스러워하고 KPOP 폭격에 엑스트라 악당처럼 나가떨어지던 전과 달리, 무대를 하나둘 완성하며 진짜 보람을 느끼는 걸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100% 나 자신을 밀어붙이며 살아봤던 적이 없던 것 같아요.]
[그들은 진짜예요. 공장식 훈련? 다 X이나 먹으라고 해요! 이 노력은 진짜고, 그들은 스포츠 선수가 훈련하는 것처럼 훈련하는 거라구요!]
게다가 KPOP 멘토들과 공감대 형성까지.
가령 '박문대'의 가정사 같은 것도 참가자 사연과 엮어서 살짝 써먹더라고.
아, 마침 날 언급하는 장면이 지나 가는지, 문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전 부모님 돌아가시고 X나 약이나 하는 쓰레기로 살았는데, 제 멘토는 오디션에 나가서 우승했잖아요.]
[이건 정말 제게 많은 걸 의미해요.]
그냥 공연 시 카메라 찾는 팁을 알려줬을 뿐인 장면이었는데 잘도 인터뷰와 짜 맞췄더라.
해외에선 아직 식상하다고 느끼지 않아서인지 은근히 감동 신파 코드 잘 통하는 것 같던데, 순조롭게 화제성 더 먹고 있겠군.
'출연진도 좀 나눠 먹을 테니… 넘어가 줄까.'
그러고 보니 시즌2 제작 확정 소식도 이미 들었다.
'다음 앨범에 유입만 많이 됐으면 좋겠군.'
나는 심드렁하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차유진이 단번에 고개를 돌리고 눈을 번쩍이며 외친다.
"형! 형은 대단해요, 멋진 사람이에요!"
"어, 고맙다."
금방이라도 'Love yourself'를 외칠 기세다. 과연 미국놈이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따르며 물었다.
"다들 외출했냐."
"몰라요! 저 지금 일어났어요!"
지금이 오후 2시인데 정말 자랑스럽게도 말한다.
하긴 활동기엔 서너 시간 자면서 살았으니, 며칠 열두 시간쯤 자도 게으른 놈 취급하긴 그렇지.
"형, 게임해요!"
"좀 있다가."
"지금 해요!"
"너 보던 거 있잖아. 그건 다 보고 해야지."
"아하."
한 텀 넘겼군. 저거 예능 보다가 게임 하자고 말했던 것도 까먹을 확률이 절반은 된다.
나는 식탁에 걸터앉아 천천히 물을 마셨다. 잠시 뒤, 옆 방에서 슬그머니 배세진이 나왔다.
"형 계속 잤어요? 저도 그랬어요!"
"아, 아니, 그냥… 책 읽었는데."
"에이."
배세진은 간만에 편한 얼굴이었다.
큰세진 놈과 같은 방이 된 뒤로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구석에 앉아 있는 걸 좀 봤는데, 아마 지금 놈이 방에 없나 보다.
'그러고 보니 선아현도 방에 없었지.'
큰세진이나 류청우는 그렇다고 쳐도, 외출 잘 안 하는 김래빈과 선아현까지 나갔으니 과연 비활동기답다.
"…저기."
"예. 물 드실 건가요."
"어? 어어…."
주방에 걸어 온 배세진에게 물을 줬다.
배세진은 물컵을 손에 쥔 채로 얼떨떨한 얼굴로 있다가, 마시지도 않고 대뜸 물었다.
"…뭐, 할 말 없어?"
"…? 딱히요."
설마 방 바꿔주겠다는 제안을 기대한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호의는 물로 끝이다.
"음, 그래."
배세진은 어쩐지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 같았으나, 별말 없이 얌전히 물을 마시고 도로 방에 들어갔다.
'뭐냐.'
어째 할 말 있다는 뉘앙스긴 했으나, 분위기 보니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아서 넘겼다.
'쫄리면 알아서 말하겠지.'
비활동기 초입이니, 나도 좀 쉬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물컵을 정리했다. 할 것도 없으니, 문제나 한 번 더 풀어볼 생각이었다.
"형! 저 다 봤어요!"
…그리고 잠시 후, 기어코 예능을 다 보고도 게임을 안 까먹은 차유진과 게임을 몇 판 해줬다.
솔직히, 딱히 할 게 없어서 심심했기 때문에 좀 귀찮아도 할 만했다.
[호버나이트 하는 게 어때요? 지난 번에 친구가 재밌다고 했거든요!]
"맘대로 해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때 이렇게 대충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이틀 뒤 아침, 상상도 못 했던 걸 받았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보는 날 아침.
나만 일어나기 위해 알람도 진동으로만 맞춰뒀었다.
'다 자고 있겠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세안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오며 보니, 반대편 침대가 비어 있었다.
'…?'
선아현 어디 갔냐.
'내가 여기 화장실을 써서 거실 쪽 쓰러 나갔나.'
제일 가능성 있는 추측을 하며, 외출복을 걸치고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였다.
제일 먼저 느낀 건… 냄새다. 제법 고소한 음식 냄새.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박문대 나왔다!"
"…?!"
고개를 드니, 훤한 거실과 주방을 동거인 놈들이 다 채웠다.
'이게 뭐야.'
오늘 무슨 날인가 고민하려던 찰나, 큰세진이 손바닥을 치며 다가왔다.
"아이고, 문대문대∼ 오늘 시험 본다며!"
"…!"
큰세진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보니, 다른 놈들도 다를 게 없다.
다 아는 게 기정사실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알았냐."
큰세진이 과장되게 측은하단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문대야, 우리가 단체 생활을 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하자… 네가 보는 스마트폰 화면… 옆 사람도 훤히 보인단다."
"…!"
"아니, 어떻게∼ 그런 중대사를 치르면서 어? 멤버들한테 한마디 말도 없냐∼ 너무 무정한 거 아니야?"
"무슨 수능도 아니고 굳이 말할 필요가…."
"흑흑, 그런 섭섭한 말씀을!"
"맞아요! 섭섭해요!"
"…."
이놈들 일부러 서운한 척하고 있다. 재미 붙였냐.
그나마 이성적인 설명은 류청우에 게서 나왔다.
"어차피 다들 시간 있고, 숙소에 있는 날이니까… 깜짝 배웅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하하."
"…네."
이건… 좀 예상 못 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조용히 시험을 보시고 싶을 형님의 의사를 고려하여 시험장까지 배웅은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그건 정확한 판단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그래서… 이거, 다 같이 만들어봤어."
맨 뒤에 서 있던 선아현이 얼른 국자를 움직이더니, 이윽고 그릇을 식탁에 차렸다.
그 안에 든 것은… 닭죽이었다.
"…."
"닭고기 스프 만들고 싶어요! 근데 다들 반대했어요!"
"시, 시험 전이니까, 익숙한 게 좋을 것 같아서."
"닭고기 스프 맛있는데…."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몰골의 다 탄 치킨 스프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게 두 번의 과정을 거쳐 이렇게 멀쩡한 닭죽으로 진화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아현이가 열심히 했고… 세진이, 그러니까 배세진이가 많이 했지. 우리 중에 그나마 요리를 할 줄 아는 게 래빈이랑 세진이뿐이라서."
"저보단 배세진 형께서 확실히 조예가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 그 정도는 아니고."
배세진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 김래빈이나 너나 고만고만하다.
'용케 만들었군.'
나는 제법 정성이 들어간 것 같은, 괜찮은 몰골의 닭죽을 들여다보다가 말문이 막혔다.
좀… 당황스러운데, 미안하기도 하고.
"어때, 문대야 너무 고마워서 막… 말이 안 나오지? 다 알아, 맛있게 먹어∼"
훌륭하다. 미안함이 싹 가신다.
"넌 뭐 했는데."
"에이, 다 같이 장 보러 갔다 왔지∼ 배달시키면 들키잖아. 재료가 어디 허공에서 떨어졌겠어?"
그래서 어제 뜬금없이 다들 자리에 없던 거였군. 용케 안 들키고 냉장고까지 넣었구나 싶다.
"어때, 이해 가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가,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고맙다."
"…!"
"다들 감사합니다."
"고맙긴."
"얼른 먹어!"
어쨌든, 나는 그렇게 히죽거리는 놈들 사이에 앉아서 닭죽을 먹게 되었다.
"…맛은 있어?"
"예. 맛있네요."
체하는 줄 알았다.
다만, 남기면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 깨끗이 비우긴 했다.
…고마운 일이기도 했고.
"한 그릇 더 먹을래?"
"괜찮습니다. 큰세진 너 사진 찍지 마라."
"어어? 문대 팬분들께 이 중요한 순간을 공유하기 싫은 거야? 멤버들 이 이렇게 열심히 요리를 했는데∼"
"…."
그래, 아주 마음대로 해라.
당장 검정고시 본다고 공지 때리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박문대가 아침 얻어먹었다고 올리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나, 남은 건 도시락으로 싸갈래?"
"음, 그래. 고마워."
사실 어제, 점심으로 먹을만한 걸 대충 챙겨놓긴 했다만… 그건 돌아와서 먹어도 되겠지.
나는 닭죽이 든 보온 통을 들고, 다른 놈들의 배웅을 받으며 적당한 시간에 숙소에서 나왔다.
"만점 받아라∼"
"저녁 맛있는 거 먹어요!"
기분이 희한했다.
'수능 때도 내가 싼 도시락 들고 갔었는데.'
남의 몸으로 검정고시 보면서 이런 걸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시험이나 잘 보자.'
이러고 합격 못 하면 정말 웃긴 꼴이 될 것 같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좀 더 신경 써서 봐야겠다.
나는 마스크를 낀 뒤, 볼캡을 눌러 쓰고 길을 나섰다.
시험장은 멀지 않았고 택시로 쉽고 조용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회사에 경호 인력 요청했으면 오히려 시험을 방해한다며 욕 좀 먹었을 것이다.
'나랑 비슷한 차림이 한둘도 아니고.'
워낙 연령대도 다양해서 나 정도의 평범한 차림새는 묻혔지 않은가.
쓸데없이 소식을 유출하지 않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책상에 앉아 펜을 꺼냈다.
오랜만의 시험이었다.
서울의 한 검정고시 고사장 안.
박문대의 말대로 다양한 연령대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다만, 박문대가 미처 예상치 못한 점도 있었다.
하필이면 그중 어떤 아이돌을 뼈대만 보고도 식별할 수 있는 엄청난 팬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는 점이다.
'바, 박문대?'
그렇다.
박문대의 책상 뒤 자리에 가방을 올리던 한 수험생은, 자신의 앞에 있는 낯익은 등을 보고 얼어붙었다.
저 골격, 저 목 뒤의 머리선.
수없이 찾아본 온갖 박문대의 직캠 뒷모습이 반사적으로 겹쳐졌다.
그리고 본능 수준의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했다!
'잠깐, 이제 비활동기니까… 그리고 문대는 고등학교 중퇴했으니까! 시험 보러 올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이 폭격처럼 밀려들었다. 당연하지만, 수험생의 자아는 스스로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라는 고함도 지르고 있었다.
"…."
하지만 잠시 뒤, 온갖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수험생은 힘겹게 생각했다.
'조심해야지!'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지만 박문대가 맞아도 실례고, 아니어도 실례다. 어쨌든 절대 시험에 방해가 되면 안 됐다!
굳게 다짐한 수험생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짜릿한 검정고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21화]
종이 울리고, 시험지를 배부하는 중에도 수험생의 머릿속은 서너가지 문장이 동시에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문대 지금 은발일 텐데, 흑발? 뭐지? 가발인가? 역시 문대가 아닌가?'
'문대가 아니라도 이렇게 느낌 닮은 사람을 보니까 왠지 계 탄 느낌이다.'
'잠깐! 신분 확인할 때 얼굴 보이지 않을까!?'
'어어어! 그렇지! 시험지 돌릴 때 뒤돌아볼… 아니구나. 감독관님이 나눠주시겠구나.'
몇 가지는 맞는 말이었으나, 몇가지는 틀린 가정이었다.
가령 박문대는 은발을 가리기 위해 컬러 스프레이를 썼으며, 신분 확인할 때 살짝 마스크를 내리고 감독관에게 얼굴을 보이긴 했다.
그러나 뒤에 앉은 수험생에게까지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며, 감독관은 나이 지긋한 남성이었기에 박문대를 바로 알아보진 못해 그저 태연했다.
'으으윽!'
그래서 뒷자리의 수험생은 그저 답답함과 궁금증에 괴로워하며 내적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다만, 직후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자, 시험지 돌려주세요."
"…!"
시험지를 앞사람에게서 배부받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험생은… 마침내 보았다.
'허억.'
앞자리의 남자는 아주 살짝만 뒤로 돌아 순식간에 시험지를 건넨 후 자세를 바로 했다.
게다가 마스크까지 썼지만, 수험생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가로로 크고 선이 깨끗한 눈!
'바바박문대!'
박문대가 맞았다!
수험생은 거의 졸도할 것 같은 심정으로 시험지를 받았다.
지금 팬사인회에서 앨범을 받는 건지 검정고시를 보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니, 팬사인회에 당첨된 적도 없지만!
"종이 친 후에 문제 풀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사, 살려줘.'
수험생은 주어 없는 고함을 속으로 질렀으나, 다량의 모의고사 경험 덕에 시험지를 펴고 문제를 풀기 시작하긴 했다.
하지만 충격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떠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잠시 뒤.
'…빨리 풀면 그만큼 일찍 문대의 등을 볼 수 있는 거잖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험지에 코를 박고 있던 수험생에게 이상한 발상이 잘못된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게 수험생은 맹렬히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검정고시 불합격이 한 발짝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으아아!'
그리고 박문대에게만 놀랍게도, 이 교실에서 그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비단 이 뒷자리의 수험생뿐만이 아니었다.
'괜찮네.'
나는 마지막 선택과목인 '도덕' 문제를 다 풀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시험은 별문제 없이 평탄히 진행되었다.
점심시간에는 약간 위험할 뻔했으나, 적당히 사람 없는 먼 계단 복도 쪽에서 창가 보고 먹었다.
'애초에 죽이라 먹기도 편해서 쉬웠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시험 자체도 기출에서 보았던 평년보다 쉬웠다는 점이다.
사회나 과학 쪽은 다 잊어버린 파트에서만 출제될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못 본 것 같진 않군.'
나는 너끈한 합격을 거의 확신하며 살짝 스트레칭을 했다.
"흡."
뒤에서 어딘지 편찮은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좀 거슬렸나 보다. 나는 그냥 팔을 내렸다.
'남은 시간은… 10분인가.'
그리고 얌전히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시간에 맞춰서 택시를 불러 뒀으니 얼른 내려가서 타기만 하면 됐다.
'됐네.'
그러나 막상 10분 뒤 맞이한 현실이 썩 예상대로는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챙긴 뒤, 다들 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중 같은 교실의 누군가가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저기 학생!"
"…."
"학생 혹시… 그 문대 아니야? 그 호떡 만드는 문대?"
여기서 짧게 고민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라고 외치고 뛰어나갈지 말이다.
그러나 목격자가 한둘이 아닐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게다가 이… 여사분도 나름대로 작게 속삭이신답시고 작게 이야기하시는 걸 보니,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네. 시험 보러 왔습니다."
"아이고! 그렇구나. 장해라… 그, 괜찮으면 사인 한 장만 되나요? 우리 딸이 너무 팬이야!"
"그럼요."
나는 수험표에 짧게 사인을 해드린 뒤,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허어업, 괜찮으시면 저도 좀…."
"아, 예."
"저기! 정말 죄송한데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아직 교실에 남았던 몇몇 사람들이 즉시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질서정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 하나 현 사태에 기겁하지 않았다.
강렬한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이 사람들 진작 다 의심하고 있었나?'
어쩐지 예닐곱 명이나 교실 안 나가고 미적거리더니, 나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테스타 대중 인지도를 내가 너무 안일하게 후려쳤나 보다.
'식은땀이 다 나는데.'
무엇보다 이 많은 사람이 시험 중에는 아무 제스처도 안 했다는 게 제일 놀랍다.
한 사람이라도 호들갑 떨며 이야기를 하고 다녔으면 민폐 논란으로 번질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럼 난 점심시간쯤 벌써 각 봐서 탈주했겠지.
'…덕분에 잘 봤네.'
뭐 빠져나갈 구석이 없군. 내 예측 실패를 커버해 준 셈이니 말이다.
나는 군말 없이 사인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와, 감사해요…."
그렇게 몰려든 몇 명에게 사인을 마치고 얼른 나가려던 참이었다.
'사진 요청 들어오기 전에 정신없을 때 얼른 빠져나가자.'
그런데 가방을 들면서 보니, 뒷자리의 사람이 아직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
"…?"
게다가 미동도 없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니 입을 벌린다.
저거 팬사인회에서 많이 보던 표정인데.
"혹시 사인 필요하신가요."
"…?! 네! 네네넵!"
자의식 과잉이 아니었군. 다행이었다.
"사,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뒷자리 사람의 수험표에도 황급히 사인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잘 들어가세요!"
"활동 파이팅!"
이 고사장 교실이 끝 쪽이라 다른 고사장의 사람이 이걸 보지 못한 게 다행일 뿐이었다.
나는 사람이 많이 빠진 복도를 가로질러 빠르게 달렸다.
'후기 올라오려나.'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으니, 그냥 날 좀 동정하거나 긁다가 끝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운동장으로 나가 곧바로 택시에 탑승했다.
숙소까진 올 때처럼 금방이었다.
"웰컴∼"
"자, 잘 다녀왔어?"
"응."
"죽은 점심으로 드시기 어떠셨습니까?"
"잘 먹었어. 고맙다."
그리고 내 시험을 핑계로 삼은 차유진의 강력한 주장 하에 족발을 시켜 먹었다.
덕분에 무알콜로 건배사를 듣는 오묘한 짓을 또 했다.
"문대 오늘 시험 보느라 수고했고… 우리 다음 활동까지 잘 회복해서 또 멋진 모습 보여드리자."
"그럼요∼"
"예압!"
"충실한 준비 기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자, 잠깐. 박문대 스마트폰 내려놔!"
"…개가 고기 먹는 영상인데요."
뭐, 비활동기다운 하루였다.
저녁도… 맛있었다.
박문대의 검정고시 소식은 그의 생각보다는 느리게 퍼졌다.
사인을 받아 간 사람 중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없었기에 반신반의하는 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너 명이 사인을 받은 수험표 인증을 한 후에야 정설로 인정받았다.
결정타는 이 후기였다.
[어제 시험 보러 가서 최애 봤에]
지금 누구 생각하고 들어온 사람들 많을 것 같은데ㅎㅎ
응 내 최애 박문대 맞아!
(사인 인증 사진)
나 심지어 문대 바로 뒷자리에 앉았는데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 진짜 등만 봐도 잘생겼더라 뼈까지 잘생겨서 고개를 못 들겠더라ㅠㅠ
자세도 너무 바르고 어깨도 딱 예 쁘게 넓고7ㅠT
(…)
박문대의 뒷자리에 앉은 수험생의 인증이었다.
그리고 그 인중 뒤에는 친절한 어그로 방지까지 붙어 있었다.
문대 진짜 조용히 시험만 봤고 끝나고 나갈 때 사람들이 아는 척하니까 일일이 다 사인도 해줬어
심지어 나 굳어서 말도 못 하고 앉아서 보기만 했는데 혹시 사인 필요한지 물어봐서 해준 거야ㅠㅠ
괜히 피해 갈까 봐 안 올릴까 했는데 이미 다들 알길래... 문대가 얼마나 잘해줬는지도 알아줬으면 해서 올린다...
수험표는 나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가기로 했어ㅋㅋㅠㅠ
귀엽고 훈훈한 후기였다. 박문대의 검정고시 응시 소식에 다소 아련해하던 팬들까지도 이 후기는 즐겁게 확인했다.
사생활 침해로 볼 정도는 아니고, 저절로 어떤 상황이었을지 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댕댕이 사람 좋아해서 사인도 다 해주고 왔냐고 아이고ㅠㅠㅠ
-사인을 물어봐서 해줬다니 박문대 진짜 파워 유죄.. 저분 집 가서 잠 못 잤을 것
-ㅠㅠ내가 셤 볼 때 곰머 봤으면 다 때려 치고 등만 보고 있었을 듯 ㅅㅂ부럽다
아슬아슬하게 인성 영업까진 되지 않는 선에서 귀여운 일화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지도 돌았다.
하지만 박문대가 예상했던 대로, '긁는' 리액션도 당연히 따라왔다.
다만 박문대의 추측보다도 약간 더 심했다.
-박문대 솔직히 검정고시 볼 필요 없잖아 그냥 자기 욕심이지
-학벌 콤플렉스 진짜 있나 봨ㅋㅋ
-같은 고사장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다행이었지 정신나간 빠순이 끼어있었으면 어쩌려구 저런 짓을;
-명예욕 못 참지 근데 그래봤자 고졸이라 어떻게 하냐ㅠ
-먼저 사인해줄까 물어봤대 숙연..
일부러였다.
박문대가 계속 절묘한 타이밍으로 논란을 끊거나 방지하다 보니,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진성 안티들이 벼르고 있던 것이다.
물론 박문대의 대처는 덜 노골적인 경우가 많았기에, '정말로 박문대가 과하게 여론을 신경 쓰는지'에 대해서는 별 신빙성이 없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욕할 때 맛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박문대가 과한 물밑 반응을 보고 역으로 몸을 사리며 눈치 보는 티를 내길 바라는 심리였다.
-곰1머 써치 X나 하잖아 백퍼 이것도 보고 있을걸ㅋㅋㅋ
-아 검고로 떡밥 삼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X나 팰거야∼ㅋㅋㅋㅋ
-응응 곰머야 이거 다 긁어부스럼인 거 알지? 조용히 넘어갈 거지?
-이런데 올리면 진짜 개웃기겠다 기싸움 멍청 인증ㅋㅋㅋㅋㅋ
그러나 그들에겐 안타깝게도, 박문대는 인터넷과 거리두기 중이었다.
그나마 보는 건 팬 커뮤니티나 위 튜브가 전부였다. 그 이상 보려고 하면 귀신같이 멤버들이 끼어드는 통에 박문대로서도 별수 없었다.
즉, 어그로는 그저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아예 안티고 나발이고 신경 안 쓰는 멤버가 대신 대응하게 된다.
"형! 닭죽 러뷰어 보여줘요!"
"그래라."
어차피 소문 다 났다고 생각한 박문대는 쿨하게 허락했고, 차유진은 화끈하게 당시 사진들을 바로 업로드했다.
[문대형 시험 있어서 닭죽 먹어요. 모두 열심히 만들어요. 최고의 Teamwork! (호랑이 이모티콘) (사진 묶음)]
장을 보고 요리하는 다양한 멤버들의 사진부터, 닭죽을 보고 당황하거나 먹으며 미소 짓는 박문대의 사진들까지.
스토리가 있는 일상컷들이었다.
-?
-아 뭐야
-진짜 올림?
그리고 어그로들이 잠시 당황하는 사이.
"음? 유진이 사진 올렸어?"
"네!"
"오∼ 그렇구나."
상황을 본 큰세진은 본인이 찍은 동영상까지 올려 버렸다.
[문대문대의 이런 스마일은 오랜만… 역시 잘 먹는 게 최고죠?ㅋㅋ 러뷰어도 맛점이 (동영상)]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이 서로 잘 지내고 친한 것을 보며 싫어할 팬은 드물었다.
당연히 팬들은 마음 따듯해지는 뜻밖의 추가 훈훈함에 불타올랐다.
-우리 애들은 테스타에 진심이야 영원히 이대로 가자 답은 디너쇼다
-다시는 아이돌의 가족 영업에 속지 않으려 했건만… 닥쳐 테스타는 가족이다
-ㅠㅠ마음이 정말 따뜻해졌어 얘들아 좋은 소식 고마워
사진과 동영상까지 물량 공세가 대단한 데다가, 박문대 본인이 찍거나 올린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어그로는 나 홀로 주먹질을 하다가 나가떨어졌다.
-ㅋㅋ곰머 기싸움 오졌다
-다른 애들한테 올려달라고 부탁했겠지 현타 안 왔어?
-이 악물고 올리는 느낌인데 나만 그런가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발언이 이어졌으나, 어쨌든 정신승리일 뿐이었다.
결국 그 애매한 머쓱함에 '박문대는 서치충' 이야기는 시들시들해져 버렸다.
참고로 당사자인 박문대는 방구석 에서 레서판다 동영상이나 보던 중이었다.
"…음."
그는 간헐적인 무료함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특별히 할 게 없었다.
다만 기대하는 건 하나 있었다.
'모레부터 휴가지.'
바로 사흘의 휴가가 코앞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낸 적 없던 박문대에겐 대단히 의미 있는 시기였다.
'이번에야말로 끝내주는 휴가를 보낸다.'
계획은 완벽했다. 그러니까, 계획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22화]
테스타의 휴가 3일이 결정된 것은 꽤 전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아티스트의 컨디션이 잘 관리되어야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본부장의 발언이 놀랍게도 철회되지 않고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치고는 매니지먼트실에 투자 안 하는 놈이지만.'
사실 소속 가수를 신경 썼다기보단 본인 경영철학적 아집에 가까운 것 같다만… 어쨌든 나야 이득이니 반대할 마음은 전혀 없다.
덕분에 사흘간 혼자 조용히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약간 기대도 있다.
'그때는 모니터링 좀 할 수 있겠어.'
최근에 액정으로 본 게 털 달린 사족 짐승뿐이라 떨떠름하다.
"…음."
내가 사용량을 조절하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비활동기 내내 인터넷 검색 여부를 감시당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단 말이지.
직무유기도 이 정도 되면 꿀이 아니라 액상과당이다.
그러니 저놈들이 집에 돌아간 시간을 이용해 나도 할 일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쉬는 거지.
…물론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하고 제대로 휴가를 즐긴 적이 한 번도 없긴 하다만.
'애초에 휴가를 몇 번 받은 적도 없으니까.'
이번에는 모든 변수를 차단한 뒤 기필코 혼자 있겠다. 그런 구상을 했다만….
뜬금없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좋은 쪽으로.
"형들, 혹시 MT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래빈이 휴가 바로 전주에 이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MT?"
"멤버십 트레이닝의 약자로서, 동료 간 화합과 팀워크를 돈독히 하는 짧은 여행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이 래빈아, 그건 알지∼ MT 가고 싶다는 뜻이냐고 물어본 거야!"
"아, 예!"
큰세진의 타이름에 김래빈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긴 건 옆에서 차유진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이 작당했냐.'
다음 말을 들으니 맞는 것 같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일 외에 화제는 거의 공유하지 못하는 아쉬운 점을 보완했으면 합니다!"
"놀러 가요, 저 한국 바다 갈래요!"
지원사격 한번 적극적이군.
류청우는 약간 난감한 얼굴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래? 휴가인데 집에 안 가봐도 괜찮겠어?"
"3일? 어허, 저 미국 못 가요! 부모님 바빠요!"
차유진이 냉큼 대답했다.
'음,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군.'
사흘 가지곤 차유진은 미국에 못 간다. 그리고 휴가철이 아닌 시기상 부모님이 오시기도 애매할 것이다.
'본인이 집 못 가서 심심할 테니 멤버들과라도 놀아야겠다 이건가.'
계산 한번 확실하구만.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갑자기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설마 이거 무산되면 차유진이 휴가 내내 숙소에 있나.'
야 설마.
"휴가를 완전히 사용하자는 주장은 아닙니다. 단지 휴가 전날부터 1박 2일 동안 외딴곳에서 MT를 진행한 뒤 휴가 첫날 오전에 집으로 복귀하는 계획입니다!"
"오, 좋은데? 다들 어떠세요?"
"나, 나도 좋을 것 같아…!"
"…하루쯤은 괜찮겠지."
여기저기서 찬성표가 쏟아진다. 휴가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짧게 여행을 가자는 김래빈의 의견이 제법 그럴싸했나 보다.
"…."
"문대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냉큼 대답했다.
"좋지. 가자."
"…! 네!"
딴소리 못 하게 '가자'로 방점을 찍어버리려고 마지막까지 기다렸지.
다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 차유진을 데리고 가게 만들어야 한다.'
MT 동안 어떻게든 상황을 몰아서 휴가 동안 차유진을 저놈들 집 중 하나로 보내 버린다.
"오∼ 문대 적극적인데!"
"그래, 한번 가는 것도 좋지. 혹시 래빈이가 생각해 둔 곳 있어?"
"저 있어요! 강하도 바다 가요!"
"강화도야! …예, 형. 묵었으면 하는 곳을 몇 군데 봐두었습니다."
나는 턱을 만지면 심사숙고했다.
'음, 류청우, 큰세진, 김래빈 정도가 후보인가.'
나머지 둘은 차유진과 코드가 안 맞거나 상대를 부담스러워하니 가능성이 극히 낮다.
'흠.'
나는 목적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놈들을 보며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잠시 뒤.
"그럼 위치랑 내부 고려해서 강화도 여길 예약할게. 다들 괜찮다는 거지?"
"네 넵∼"
"회사에는 제가 얘기해 둘까요."
"그럼 고맙지."
내가 회사에 양해를 구하며 비상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며칠 내로 당장 승부 볼 일이라 유출 걱정은 크지 않았다.
차 역시 매니저 쪽으로 렌트해서 운전자만 류청우도 함께 등록할 예정이라 추적될 염려도 덜하다.
'그리고 여차하면 매니저가 올 수 있도록 대기하겠다고 했고.'
매니저가 최근 눈에 띄게 협조적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전담팀 구성 계획이 본격화되니 위기감에 약발이 잘 먹힌 것 같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후보 펜션 예약까지 수월히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보안과 시설 탓에 비수기에도 가격이 센 덕인 것 같았다.
"자, 예약 완료. 재밌게 갔다 오자!"
"와아아!"
"래, 래빈아, 좋은 제안해 줘서 고마워…!"
"과분한 말씀입니다.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신났군.
나는 소파에 팔을 젖혀 누웠다.
'…컨텐츠도 아닌데 이 인원으로 어디 가는 건 처음이긴 하지.'
일이 아닌 여행이 신선하긴 했다.
사실 직장 동료끼리 가는 시점에서 워크샵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든다만… 특별히 불편해하는 놈도 없으니 굳이 꺼낼 말은 아니다.
심지어 배세진마저도 은근히 기대하는 기색이다.
오죽했으면, 이놈은 당일 렌트 카 안에서 이런 말까지 꺼냈으니까.
"…이런 걸 가보는 건 처음이야."
내 옆자리의 배세진은 본인이 꺼내고도 왜 말했는지 후회하는 눈초리였으나, 이미 리액션은 터진 후였다.
"진짜요?"
"수학여행 등 여러 행사에 참여해 보신 적 없습니까?"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해서, 안 갔어."
"그러시군요! 확실히 수십 명이 함께 이동하는 여행은 선택의 폭이 좁고 불편한 경우가 잦습니다."
김래빈은 솔직한 호불호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오묘한 뉘앙스를 다른 놈들은 다 눈치챈 기색이었다.
'학교 단체 생활에 잘 못 섞였나 보군.'
특별히 놀랍진 않다.
그때, 선아현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저도 많이 가본 적 없어요…!"
쓸데없는 소리를 한 자신에 대한 현타가 가득하던 배세진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네!"
좀 거들어줄까.
"저도 별로 안 가봤어요. 그냥 갈 때 재밌게 다녀오면 되죠."
"…! 마, 맞아. 오늘 여행이 즐거울 것 같아서, 기대가 돼요…!"
"…나도."
배세진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묘하게 아련하다.
'분위기 왜 이러냐.'
다행히 이 오그라드는 분위기는 다음 순간에 작살났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옵션이 완벽했습니다!"
"바다 좋아요!"
"하하, 분위기 막 훈훈한데요? 여기서 딱 선곡 들어가야죠∼"
아무 생각 없는 놈들의 해맑은 발 언 뒤로 큰세진이 노래를 틀었기 때문이다.
두둥둥두둥 두둥두둥둥둥둥!
이건… 마법소년 EDM 버전이군.
'언제 김래빈한테 받았냐.'
"아, 오늘∼ 일 생각 버리고, 그냥 우리끼리 재밌게 놀고 오는 겁니다∼ 테스타 가자!"
"하하!"
운전석의 류청우가 웃었다.
'강화도까지 한 시간 반 걸리나.'
그 정도면 앞자리에 큰세진이 앉았으니 전담으로 류청우 말 상대를 해 주겠군.
'알아서 잘 굴러가겠어.'
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놈들 사이에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놈들 분명 도착해서 게임부터 달리기까지 별짓을 다 할 테니, 지금 이라도 육체의 평화를 즐기려는 생각이었다.
"내일 만난 너를! 너너너 너를!"
"으하하하!"
그리고 이 판단이 맞았다.
그날 자정 넘은 시각.
"차유진!"
"와하하하!"
제일 어린 두 놈이 해변을 질주하고 있다.
'안 지치나.'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놈들 지치지를 않는다.
-바베큐! 바베큐!
-여기 노래방 기계도 있는데요?
펜션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러더니, 고기 굽기부터 온수 풀장까지 다 알차게 써먹고도 힘이 펄펄 넘친다.
'이쯤 되면 다 뻗을 줄 알았는데.'
잘하면 밤새 저러겠군.
더 웃기건 그나마 지금 제일 정적 인 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불꽃놀이다.
"예, 예쁘다."
"그러게."
물론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막대형 몇 개 들고 펜션 앞 은수 풀장 근처에서 흔드는 것이다.
'해변에서 하면 쓸데없이 불법 시비 걸릴 수도 있으니까.'
해수욕장에서는 이거 불법이거든.
그리고 방금 차유진이 해변을 배경으로 불꽃놀이 사진을 찍으려다가 김래빈에게 적발당해 쫓기는 중이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린다.
"물을 끼얹는 건 비상식적… 어프 후!"
음, 잘 놀고 있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다 탄 막대 형 폭죽을 뽑아 정리하려 했다.
그때였다.
"문대문대∼ 맥주?"
"…!"
말을 거는 큰세진의 손에는… 살얼음 낀 수입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도수가 낮은 과일맥주 종류다.
"놀러 온 거잖아. 너 금주도 몇 달 째인데, 기분 좋을 때니까 한 잔 마셔도 되지 않나 해서∼"
"…."
그렇긴 하지.
나는 말없이 캔을 받아서 땄다.
탁.
그러자 옆에서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웃기냐."
"야, 그럴 리가∼ 그냥 훈훈해서 그렇지."
큰세진이 킬킬 웃으며 옆 선베드에 드러누웠다.
"아, 분위기 좋다∼"
이놈도 좀 마셨나 보군. 나는 천천 히 맥주를 들이켜며 밤바람을 쐬었다.
…확실히, 기분은 괜찮았다.
그래도 특별히 술을 미친 듯이 들이키고 싶거나, 간절히 더 마시고 싶진 않았다.
담담했다.
"…."
이 몇 달의 금주가 효과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명이었다.
습관적 연결고리가 끊겼다.
'고맙다고 해야겠군.'
나는 저쪽에서 두 번째 막대형 폭죽을 고르던 배세진을 짧게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큰세진이 갑자기 툭 말을 던졌다.
"우리 이대로 잘 가겠지?"
"…."
"야, 진짜… 당장 삼 년 전으로 돌아가서 나한테 앨범 100만 장 판다고 하면 안 믿을 거야."
"다들 그렇지."
"그럴까? 그렇지!"
큰세진이 웃었다. 보고 있던 선아현이 따라서 웃는 게 보였다.
"아무튼∼ 나 이 팀 참… 마음에 든다. 우리 친구들 내가 많이 사랑해∼ 올해도 잘하자고!"
"으응! 자, 잘하자!"
일단 어깨동무는 놔라. 셋이나 이러니까 선베드에서 굴러떨어지겠다.
그래도 이 정도 말은 해도 괜찮겠지.
"열심히 가자."
"좋아!"
등을 격려하듯 때린 손이 떨어졌다. …뭐,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나는 웃고 말기로 했다.
"아, 문대야. 근데 사실 그거 무알콜이다?"
"…!"
"패키지 똑같더라고. 어, 근데 문대 괜찮은 것 같은데∼ 무알콜인 것도 모르고. 앞으로는 한두 캔 마셔도 되겠는데?"
"마,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이건 웃고 말기엔 좀 선 넘은 것 같기도 하군.
흠, 그래도 결과가 좋은 점과 잠시 후 차유진 넘기기 작업의 수월함을 위해 넘어가 줄까.
판결을 고민하던 때였다.
따당- 따다다당-!
갑자기 웬 희한한 벨소리가 울렸다.
"어, 내 건 아닌데."
"나, 나도."
나는 근처 선베드에서 해당 스마트 폰을 바로 확인했다.
[누나]
이건 김래빈이다.
"래빈이. 가져다주고 온다."
"오케이∼"
"내, 내가 갔다 올까?"
"괜찮아."
나는 해변으로 발을 옮겼다. 다행히 쫓고 쫓기던 두 놈은 펜션 근처로 돌아와 있었다.
"차유진 너는 너무 사회적 양식이 부족…!"
"래빈아, 너 전화."
"아, 감사합니다!"
김래빈은 바닷물에 젖은 채로 씩씩대다가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직 울리고 있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받았다.
"누나. 응, 나는 잘…."
그렇게 목적을 완수한 내가 도로 펜션 앞으로 돌아가 보려던 참이었다.
낌새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
"…!"
김래빈의 되물음에는 갑자기 이상한 기색이 섞였다.
내가 바로 알아차릴 만한 투의.
그러니까… 굉장히 충격적인 소리 들었을 때 사람이 내는 얼빠진 소리 같은 것.
반사적으로 발이 멈췄다.
고개를 돌아보았다.
"어…, 아니, 무, 무슨…."
"…."
"김래빈?"
차유진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지, 김래빈은 어두운 해변가에서 스마트 폰을 들고 그저 서 있었다.
안 떨리는 것이 없었다.
"모, 모르겠…. 왜?"
"래빈아?"
"…!"
류청우가 근처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보고 끼어들어 김래빈의 팔을 잡았다.
그때야 전화를 내린 김래빈이, 손을 벌벌 떨며 대단했다.
"하, 할머니… 도, 돌아가실 것 같다고…."
"…!"
그 순간, 해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잠깐, 누나분 맞으셔?"
"네, 네…."
"어디서 전화 왔는데."
"벼, 병원…? 그러니까… 집에…."
"집 근처 큰 병원이야?"
"네, 네…."
김래빈은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필 또 여행지에서.
마치 지난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뭐야."
"래빈이 왜 그래?"
주변에서 다른 멤버들이 뛰어왔다.
류청우가 당장 김래빈의 등을 두드 렸다.
"래빈아, 심호흡하고."
"예, 예…."
"일단, 옷 갈아입고…."
나는 당장 펜션으로 달려갔다.
"문대야?"
그리고 바로 현관에서 차 키를 챙겨서 해변으로 다시 달려 나와 김래빈에게 말했다.
"차 타."
저럴 때가 아니다. 옷이고 심호흡이고 가면서 해도 되니까 당장….
"…박문대, 너 면허 없어. 진정해."
맞다.
나는 작게 속삭인 큰세진의 말에, 차 키를 류청우에게 넘겼다.
"…그래, 래빈아. 지금 바로 이동하는 게 낫겠다. 옷은 차 안에서 갈아입자."
"…."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해변을 가로질러 바로 주차장소로 가서, 차를 탔다.
나는 차 뒷자리 구석에 처박혔다.
"다들 탔지? 움직인다."
"네."
차는 바로 출발했다.
…그렇게, 휴가 첫날이 시작되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23화]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니, 가끔 김래빈이 숨넘어갈 듯이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평상시라면 어떻게든 '괜찮으실 거야' 같은 말로 위로했을 놈들도 묵묵히 운전을 하거나 등만 두드렸다.
위로가 더 불안할 상황이었으니까.
"네 형. …예, '이 새벽에' 오셔야 죠. 저희 지금 이동 중이니까 최대한 빨리 근처 대기 부탁드립니다."
나는 겨우 연결된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전달 후,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지금 '이 새벽에?' 같은 발언이 나올 상황이냐? 워라밸도 주장할 순간이 있는 거지 이 미친 새끼가.
"…."
그 이후론 뭘 하고 있냐고?
X 같게도 아무것도 못 했다.
그러면서 생각만 하고 있다.
여기서 김래빈 본가가 있는 강원도까지는 어떤 짓을 해도 세 시간 이상 소요된다는 것을.
'만일의 경우 늦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평소 휴가 직전 때처럼 서울에서 바로 출발했더라면 어땠을지 가정해 보자.
그 시간은 한 시간 반 이상 단축되었을 것이다.
한 시간 반의 차이.
그 계산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X발.'
내 앞에 앉은 놈도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래빈은 지금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 있다. 무의식중에 또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마 본인이 먼저 전화를 다시 걸진 못하는 게….
"…."
숨이 찬다.
'그만.'
웃기는 일이었다. 당사자도 아니고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몰입이나 하고 자빠졌군.
나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고개를 창문에 박고,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게 그나마 방해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졸도할 것 같은 세 시간 정도가 차 안에서 흐른 후.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고속도로 톨 게이트를 막 지났을 때였다. 류청우가 최대한 차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삼십 분이면 도착할 거야."
"…."
배세진이 힘겹게 김래빈에게 말을 걸었다.
"…옷 갈아입어."
"…."
지나치게 오래 긴장과 걱정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김래빈이 천천히 자신의 상의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미 다 마르기 직전인 옷이 시트 아래로 떨어지며 염분도 떨어졌다.
그리고 새 옷을 걸친 김래빈은 넋 나간 듯이 움직임이 없더니, 곧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제가… 쓰, 쓸데없이 MT 가자고 해서… 늦,"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래서 사실 그럴싸한 이유를 지금부터 만들어내야 했으나, 설명을 덧붙일 틈은 없었다.
끼어든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저 때문이에요."
"…!"
"내가 먼저 가자고 말했어. 김래빈 탓 아니에요!"
차유진은 제법 씩씩하게 말했지만, 본인도 거의 울 것 같은 몰골이었다.
김래빈은 쉰 소리를 내질렀다.
"아, 아냐! MT는 가, 같이 기획 한… 자, 장소도 내가…."
"나중에 생각해."
나는 놈의 말을 끊었다.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할머님 뵙고 와."
"…."
김래빈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생각을 하게 만들면 안 된다. 이게 맞았다.
경험상으로는.
곧 차의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종료 했다.
"가자."
"…예."
그렇게 김래빈은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머지 인원도 동행할 수 있는 곳까지는 따라갔다.
병실 복도 옆 대기 의자에 앉아 김래빈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
"아이고, 우리 엄마…."
병실 앞에서는 친인척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의료진이 오갔지만, 당연히 우리는 아는 척하거나 말 걸 것 없이 닥치고 앉아 있었다.
다만 분위기를 보니,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불러도 될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창밖에 어슴푸레 날이 밝는 것이 비칠 때쯤이었다.
"문대야."
"…."
"박문대, 너 차 가서 좀 누워 있는 게 어때."
"나 말고 류청우… 형이 가야겠지."
새벽 내내 잠 안 자고 운전한 사람이 아직 깨어 있는 게 말이 되나.
저놈이 자러 가는 게 도의상 맞았다.
그러나 류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안 피곤해."
"네. 저도 그렇습니다."
"…."
짧은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멤버들은 더는 서로에게 휴식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조용히 더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김래빈은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나와서 상황을 전달했다.
"래빈아."
"괜찮아?"
"예, 예…. 할머니, 이야기하고…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당장 고비는 넘겼다는 것이다.
'하.'
우습게도 전신의 긴장이 쭉 빠져나 가는 것 같다.
김래빈은… 늦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김래빈의 표정과 뉘앙스에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안심한 얼굴이 아니다.
'…앞으로도 고비가 계속 오겠군.'
김래빈에겐 최악의 휴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회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돌아갈 집이 있는 멤버들은 일단 귀가했다.
뒤늦게 병실에서 나온 김래빈의 누나가 부드럽게 권유했기 때문이다.
-래빈이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 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
-휴가시라고 들었어요. 귀한 하루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시는 길 안전하시길 바라요.
미안하기도 했겠고, 이렇게 많은 외부인을 신경 쓸 상황도 못 되었을 테니 합리적인 발언이었다.
가족과 보낼 시간이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놈들이 여기까지 동행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의리였지.
그러나 차유진은 어차피 숙소행이었겠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괜찮아요, 저 집 못 가요! 여기 있어요.
-유진아….
전 소속사 생활 덕에 김래빈 가족과도 제법 안면이 있는지, 이쪽은 어쨌든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차유진만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놈이 누굴 완전히 케어할 타입이 아닌데.'
자칫하면 김래빈의 누나가 이놈까지 챙기게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똑같이 숙소에 있을 두 놈 중에 하나만 여기 남겠다는 건, 심지어 빠지는 게 연장자인 꼴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남기로 했다.
-저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휴가 때 숙소에 있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몇 번의 사양과 안도 끝에, 우리는 김래빈 누나와 할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김래빈의 본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래빈의 누나와 대화를 통해 적당히 사정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정도 더 상황 지켜보고, 여건이 되면 수술 들어갈 거라고 하시는데….
-…확률이 높진 않더라구요.
-그래도, 이번처럼 갑자기 말 듣는 것보다… 래빈이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 아서요.
무슨 질병인지 꼬치꼬치 캐묻는 정신 나간 짓을 할 순 없었다.
단지 오가면서 친인척들이 나누는 대화를 주워듣자면, 무슨 뇌하수체 문제 같았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긴장이 풀린 김래빈이 울면서 한 이야기는 이랬다.
"지, 지난번에 입원하셨을 때 발견했는데… 저 서울에서 일하는데 신경 쓰게 하기 싫다시면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
"그, 그런 줄도 모르고… 신경도 안 쓰고, 제,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
"아니야! 너 바보 아니야."
"아니, 바보 같았어! 오, 오늘도… 나 혼자 정신도 못 차리고, 제대로 못 해서…."
"너 충분히 잘했어."
나는 김래빈의 말을 끊었다.
"침착하게 잘했어. 할머니도 뵙고, 다 했잖아.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은 없는 거야."
"…."
김래빈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통했다는 것에 이상한 감회를 느꼈다.
'맞아.'
이런 일에 어떤 당사자가 능숙할 수 있겠는가.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것이다.
나는 김래빈의 누나에게 사전에 허락받은 대로,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서 이온음료를 꺼냈다.
그리고 분명 수분 공급이 부족할 놈에게 따라 건네며, 마시는 것을 확인한 뒤에 천천히 말했다.
"차에서… 밀어붙여서 미안했다. 고생했어."
"아, 아닙니다…! 덕분에, 늦지 않고 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더 늦어도 걱정하는 일은 일 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심리적인 문제겠지.
그리고 나는 이 심리적 문제가 계속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어렵게 됐어.'
휴가 이후에, 회사와 이놈이 나눌 대화까지 말이다.
"맛있는 거 먹어, 김래빈. 배달해!"
"배, 배달은… 시키는 거야."
"알았어. 시켜!"
그나마 차유진에게 말대꾸하면서 평상시 기조를 되찾은 김래빈은 겨우 음식을 시켰지만, 많이 먹진 못 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평상시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병원의 긴급호출에 대기하면서 휴가가 흘러갔다.
그리고… 그 어려운 순간이 왔다.
휴가 마지막 날 아침.
"할머니 수술하신다고 합니다."
김래빈이 아침부터 자신의 누나에게 연락을 받더니, 제법 침착하게 말했다. 스마트폰을 거꾸로 들고 있긴 했지만.
"먹으면서 말해라."
"김래빈 자리 여기야!"
"알아, 우리 집이거든! …예! 그, 할머니 상태가 호전되셔서 수술 처치를 받으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회복 확률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이 수술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더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르겠다.
희망적으로 생각하려는 놈에게 초를 쳐야 할지, 맞장구를 쳐줘야 할지.
그래서 나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꺼냈다.
휴가 첫날부터 생각했던, 그 '어려운' 문제를.
"곁에서 간호할 생각이야?"
"예…?"
"알겠지만, 오늘로 휴가는 끝이다."
나는 숟가락을 그릇 안에 놓았다.
"내일 아침 중에 복귀해야 돼."
"…!"
"서울 돌아가도 괜찮을지… 잘 생각해 봐야지."
…활동 복귀해서 서울에 있다 보면, 할머님의 수술 경과가 갑자기 악화될 경우 임종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데뷔 초에, 할머님이 처음 쓰러지셨을 때 김래빈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그 경우에… 제가 공연 중에, 촬영 중에… 중단하고 가는 게 옳은 건지. 그런데 그러면… 직업적 소양이 부족한 것 같고.
가족이냐 일이냐.
그 망할 양자택일의 순간이다.
그것도 한순간이 아니라, 수술 경과를 볼 4주를 통째로 걸고 생각하는.
'상황 한번 쓰레기 같군.'
물론 그때도 그랬지만 할 말은 정 해져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복귀 한동안 안 해도 괜찮다. 다 잘 살자고 하는 짓 인데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어."
"…맞아요. 괜찮아!"
"회사 설득은 같이 들어갈 테니까 걱정 말고."
차유진이 제법 지원사격을 할 줄 아는군. 요 며칠은 분위기 파악을 잘하더라니.
그리고 사실, 이쯤 말하면 김래빈이 눈을 질끈 감고 '정말 죄송하지만 그러겠다'고 외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그렇게 해도,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
"주, 중요한 정규 앨범인데, 제, 제가 맡은 곡은 아직 한 곡도 전부 완성하지 못했고… 타이틀도, 작업 중이고…."
당연하지만, 김래빈에게도 꿈과 책 임감이 있던 것이다.
"뮤직비디오도, 안무도, 무대도… 아,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게 되는데."
심지어 김래빈은 프로듀싱을 전담하는 멤버였다. 그러니, 테스타라는 그룹의 음악성 자체이기도 했다.
김래빈은 자신이 완전히 빠지면 그룹 정체성에 손상이 온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할머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회복되시면… 제가 한 일은, 아니, 그, 그걸 바라는 건데."
"그래, 알겠어."
나는 놈의 말을 멈췄다.
그 말이 맞았다. 만일 할머님이 문제없이 회복되면, 김래빈은 괜히 쉬었다며 후회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후회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겠지.
'…내가 편파적으로 치우쳤나.'
내 과거 상황과 지나치게 겹쳐봐서 좀 오인했다.
나는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최선은 역시 앨범 발매를 한두 달 미루는 건데.'
하지만 이건 내가 곤란했다.
이러면 투어 일정이 뒤틀릴 수 있는데, 그럼 상태이상 클리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돌아버리겠군.'
그때였다.
"둘 다 해!"
"…!"
차유진이 소리쳤다.
"우리 좋은 방법 많아요! 전화랑… 어엄."
"영어로 해."
[맞다! 저 영어 쓰죠?]
차유진이 눈을 빛내며 식탁을 두드렸다.
[메일도 있고, 영상 통화에 화상 채팅까지 되는 시대잖아요! 김래빈은 여기서 곡 작업하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요소들을 준비하죠!]
"…!"
놀랍도록 합리적이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차유진이 넌 여기서 곡 작업하면서 원격으로 재택근무하라는데."
"재택근무요?"
"내가 듣기엔 괜찮은 것 같다만."
아니나 다를까, 김래빈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나아졌다.
"제, 제가 듣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곡 외에 다른 것들은…."
나는 두 손을 깍지꼈다.
머리가 며칠 만에 원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지. 안무는 만일을 위해 두 버전을 만들 거야. 네가 있는 버전, 없는 버전."
"예?"
"좋아요!"
"그리고 촬영도 마찬가지로, 일단 우리 개인 컷과 단체를 따고, 네 개인 촬영 날짜를 따로 최대한 미뤄서 잡아놓는다."
"오우!"
"최대한 네 합류 시간을 뒤로 빼면서, 네가 합류 못 했을 경우의 버전도 완성해 두는 거지."
김래빈이 입을 떡 벌렸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그냥 후반에 합류할수록 너 혼자 더럽게 힘들진다는 건데."
나는 물었다.
"그래도 할래?"
"…예!"
좋아.
김래빈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법 씩씩해 보이더니, 곧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여러 연유로 북받쳐 오르는 게 있을 법했다.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고."
"네…."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혹시 하다 안 되면 중간에 그만둬도 돼."
"맞아! 김래빈 잘못 아니에요."
그 말이 맞았다.
그렇게, 일과 가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 보려는 4주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