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이 상황을… 교통사고 후 코마로 결론을 내린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부상 정도다.
'파편이 가슴에 적어도 5cm는 들어갔다.'
직전에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고, 혹시 과장이 없는지 몇 번 더 되새김질했으나 확실했다.
무조건 치명상일 것이다.
내 기억으론… 출혈도 심했다.
파편을 뽑은 것도 아니고 꽂힐 때 그 정도면 예후가 좋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즉사는 아닐 것이다.
'심장에 직통으로 박힌 것도 아니잖아.'
심야의 도로지만 서울 한복판이다.
배세진이 신고했으니 경찰이 확인 이라도 했다면 구급차가 왔을 테고… 그럼 적어도 사경을 헤매는 정도는 됐을 것이다.
'바로 죽어서 다시 시작할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두 번째는 거울로 확인한 내 얼굴 때문이다.
"…29살이 아니잖아."
'류건우'의 얼굴이라 당황한 탓에 바로 파악하지 못했으나, 다시 천천히 보니 알겠다.
너무 어렸다.
'이건… 적어도 대학 졸업은 한참 전이다.'
그러나 여기는 내가 '박문대'로 처음 깨어났던 모텔이고, 당시 확인했던 달력과도 같은 날짜였다.
[202× 12월]
즉,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혹시 몰라서 화장대의 지갑도 확인 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시작만 3으로 바뀐 '류건우'의 번호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류건우 0X1208 - 3XXXXXX]
20살의 류건우.
"이게 무슨…."
다만 침대 위에 음독자살용 약과 유서는 없었다.
…마치, 박문대의 상황만 따와서 류건우에 적당히 맞춘 것 같은 꼴 아닌가.
'앞뒤가 맞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깔끔히 떨어지지가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 상태창에 떴던 문구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름 : 류건우 (박문대)]
-Enjoy yo나r daydream :)-
'daydream'은 백일몽이란 뜻이지.
그리고 그냥 '류건우'가 아니라 괄호로 '박문대'가 같이 표기된 건…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아직 내가 박문대의 몸에 있기 때문이라면?'
내가 혼수상태로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는 중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 시스템이 개입했다.'
…그 코인.
내가 무의식 속에서 본 그게 직전 상태이상을 클리어하고 받은 코인이 맞다면, 이 상황은 그 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클리셰를 고려해서 상점에 쓰는 게 아닌가 짐작했으나 이젠 다른 추측이 든다.
'…오락실 게임처럼 여벌 목숨이 아닐까.'
이쪽도… 게임 시스템에 어울리긴 하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의미 없이 스스로 비웃었다.
"하."
아무튼,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나는 양손을 움켜쥐었다.
"…돌아갈 방법이 있을 거다."
코마에서 깨어날 수 있는 방편으로 이 상황이 주어진 거라면, 깨어나면 된다.
그리고 보통 꿈에서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뛰어내려야 하나."
이 모텔이 특별히 고층은 아니라 여기서 떨어져도 죽진 않을 텐데,
그 정도로 충분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진짜 박문대의 몸이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기각.
다음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인데, 솔직히 지금 어지간한 걸로는 충분한 충격을 받을 것 같지 않다.
이미 누적된 게 많아서 말이다.
'또 뭐가 있을까.'
나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남아 있긴 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기.'
외부의 회복.
다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회복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
나는 주어진 상황을 조합해서 가장 온건한 방법을 우선 뽑았다.
'우선 힌트를 찾는다.'
이게 시스템의 개입이라면, 이 꿈을 파악하는 동안 깨어날 힌트가 나올 수도 있겠지.
'상태창이 반응할 수도 있고.'
나는 침대 밑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지갑을 챙겨서, 모텔방을 나섰다.
일단 이 코마 속에서 '류건우'가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자.
"…."
나는 새로 개통한 휴대폰을 들고나오며 이를 악물었다.
'똑같다.'
내 20살 적과 금전 상황이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곤 박문대처럼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다만 친척들과 연락은 닿지 않았다.
'철저히 편리한 대로 구성됐군….'
모순점이 나타나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인 점을 깨달았다.
'노래를 잘해.'
이 몸은 현실 '박문대'의 능력치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처음 '박문대'로 깼을 때처럼, 노래 방에 가서 노래 한 곡 부르고 깨달은 사실이다.
내가 박문대의 몸으로 겪었던 모든 무대의 감각이 그대로 이 몸에도 남아 있었다.
'부추기는 건가.'
현실에서 '박문대'가 갔던 길을 그대로 가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 모든 걸 진짜 '류건우'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처럼….
"…."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우고, 그렇다면 꿈을 진행해 보자.
'다음에 내가 했던 일이… 아주사 참가지.'
류서린 작가에게 섭외되기 위해 근처 노래방에 죽치고 있는 것 말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정말 참가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는… 골 아픈 일이긴 하나, 시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원래 내 얼굴도 보기 나쁜 편은 아니니까.'
일단 노래가 S급이니 가능성은 나 쁘지 않았다.
다른 옵션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나는 이걸 다시 시도해 보는 것으로 결정하고 즉시 노래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
날짜가 어긋났는지, 꿈이라 무슨 차이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며칠 동안 류서린 작가가 노래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X발.'
그리고 난 알고 있었다.
'오디션은 이미 끝난 시점이야.'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내가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방법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하."
다시 힌트 없이 제자리에 봉착했다.
'뭘 어쩌라는 거냐.'
미친 척하고 어디 옥상이라도 올라 가야 하나.
그러나, 안 그래도 몸이 정상이 아닐 텐데 너무 과한 리스크라는 판단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할 수 있는 건….'
내가 데뷔할 만한 방법은….
있다.
"…!"
나는 확실한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다만 위험했다.
'…잘못하면 이 안에서도 뒈질 수 있겠는데.'
그래도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시도해도 손해는 아니다.
'다짜고짜 옥상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는데 이 정도야.'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하도 문자로만 본 탓에 눈에 익은 연락처를 쳤다.
한두 자리 헷갈리는 번호도 있긴 한데, 그냥 전부 다 보내 버리면 그만이다.
[매번 견종을 바꿔 기르더니 이번에는 안 기르네 지난번에 조현병 루머로 망해서 그런가]
이 문구에 반응할 놈은 정해져 있으니까.
오로지 당사자만이 스팸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래니, 과거니, 재시작 같은 소리를 할 것도 없다. 그런 뻔한 소리에 동요해서 연락할 놈도 아니다.
이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동요한다.
"…."
나는 문자들을 보낸 후, 확인 여부가 뜨기를 기다리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뒤.
드르르륵.
-너 뭐야
바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나온 고조 없는 말에,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너 같은 사람
이 정도면 이해했겠지.
그리고 짧고 살벌한 통화 뒤, 나는 LeTi 소속사 내부의 회의실에서 놈을 보게 되었다.
"…."
"왔네."
마침 휴식기였는지 야밤이나 새벽이 아닌데도 용케 만날 시간을 냈군.
하기야, 활동 첫 주라도 이 상황이면 무조건 신상 명세부터 파악했을 놈이다.
지금도 일단 실마리를 잡으려 연락은 했으나, 내 번호 뒷조사라도 맡겨뒀을 게 분명했다.
나는 캡을 쓰고 앉은 놈에게 고개를 까닥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재시작 중입니다."
"…."
놈은 표정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몇 번째."
"세 번째요."
그러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얼마 못 갔겠네요."
청려는 온화하게 대꾸하더니, 팔을 풀어 탁자에 올렸다.
'…계산 끝냈군.'
아직 몇 번 안 한 놈이니 털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3번째인데도 자신이 놈을 모르는 걸 보니… 과거로 함께 돌아올 수는 없겠다는 생각.
'오해하게 내버려 둔다.'
코마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이 새끼가 내 머릿속의 지식으로 재구성된 것이든, 시스템이 개입해서 진짜와 똑같든, 이 시점의 놈은 리셋 증후군의 미친 새끼다.
나는 얌전히 말을 꺼냈다.
"일단 문자로 무례한 소리 한 점 사과드립니다. 웬만한 말로는 반응 안 할 테니, 그 정도는 하라고 하셔서."
"아, 나랑 그런 말도 했어요?"
"예. 어쩌다 보니."
물론 거짓말이다, 새끼야.
"음… 몇 년 후에서 왔을까."
"3년 뒤입니다."
"아, 3년이라…. 난 어떻게 살고 있나요?"
"잘 살고 계십니다. VTIC은 올해도 대상이라는 게 전반적 여론이었고."
"그렇구나."
본인이 돌린 기간만큼은 아니겠지만, 3년이면 제법 쓸 만한 수치다. 눈 돌아갈 정도는 되지.
'…솔로 이야기는 하지 말자.'
지금 이놈이 고려할 패가 아니다.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청려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제법 잘 지냈나 봐요."
"제가 재시작해 봤자 본인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신 뒤로도 그럭저럭."
"그럴싸하네요."
청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요 없이 미소 지은 그대로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연락한 이유가?"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나는 이미 한번 해본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기서 데뷔하고 싶습니다. 최대한 빨리."
"아, 그게 미션이구나."
"…."
청려가 웃는 표정 그대로 대꾸했다.
"그리고 그쪽은… 후배님이라고 하면 되나?"
"예."
"그래요. 후배님은 나에게 미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겠다는 말이겠네요."
"그렇습니다."
당장 '널 어떻게 믿고' 같은 대사는 안 나올 줄 알았다.
어떻게든 손에 두고 감시할 놈이 저절로 왔는데 기꺼운 상황 아닌가.
그러나 곧바로 긍정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데뷔하게요?"
"…!"
"LeTi는 솔로 활동은 지원 안 하는데. 지금 연습생들은… 데뷔할 놈들도 없고."
"…."
"아, 이미 알고 있겠구나. 미래에서 돌아왔다면서요."
네가 솔로나 신인 데뷔를 막고 있는 것 같은데.
전자는 그룹 활동에 소홀할까 봐, 후자는 그룹 활동에 방해될까 봐.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생각했던 방안을 말했다.
"…생각해 둔 멤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같이 데뷔했었고."
"아. 어떤?"
"곧 시작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 출연진입니다."
나는 잠깐, 떠오르는 놈들을 생각했다.
"…프로그램 중, 타 소속사로 공식 섭외될 기회가 있는데… 데려왔으면 합니다."
캐스팅 콜 말이다.
…여기서도, 뭐로 가도 그놈들과 데뷔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침을 삼켰다.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한 거구나."
그리고 눈앞의 이 새끼는 위협이 될 싹을 자르려고 어느 순간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 테니 되도록 그 전에 깨어나자.
"…."
류청우가 처음 들은 것은 기기에서 울리는 알림음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병원 천장이었다.
"…!"
당장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에서 부축하며 다시 눕히려는 손길이 느껴졌다.
"…번 의식 돌아왔습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누우실게요."
긴 운동선수 시절로 인해 의료진의 말을 신뢰하는 것이 버릇이 된 그는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누워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발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금이 가거나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팔이 아니라, 다행….'
아니다, 자신은 더 이상 팔만을 최고 우선순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만, 상처가 심하지 않다는 것에는 감사해야겠다.
"…후."
류청우는 긴 한숨을 쉬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노력했다.
주변이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그는 상황을 이어붙였다.
'…사고가 났지.'
그 전 매니저.
일단 탑승자들은 무사히 응급실로 이송된 것 같다.
유명인이라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를 배려해 준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소리는 들렸다.
"…괜찮…."
"보호자분 여기…."
다들 놀랐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내가 제일 뒤였으니까, 다들 나보단 괜찮겠지.'
부모님이 오시기도 전에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까. 아마 다들….
그 순간이었다.
정신 잃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 섬광처럼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자신을 밀치던 어깨와, 그 아래 살로 꽂히던 거대한 파편….
"…선생님!"
"예?"
"문대…, 문대 혹시 어때요."
"…."
"문대, 박문대. 아시죠?"
"…그 부분은 저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환자분 안심하시고 쉬고 계세요."
류청우도 알았다.
…거짓말이다.
달칵. 문이 닫혔다.
류청우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 정에 휩싸였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31화]
응급실은 아직 본 목적으로만 분주했다. 기자들한테까지 소식이 들어 가지 않은 덕이다.
이세진은 바닥을 보며 묵묵히 생각했다.
'회사에 연락했으니 그것도 이젠 끝이겠지.'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하지 못할망정 자신도 소리를 질렀으니, 곧 상황 파악한 관계자들로 온갖 말이 다 나올 것이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
의식을 잃은 류청우를 제외하면 회 사에 연락할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는데, 도저히 침착할 수가 없었다.
"…후읍."
이세진은 스마트폰을 쥐고 숨을 골랐다.
손이 떨렸다.
대부분의 멤버는 괜찮았다. 관절을 접질리거나, 골절상을 입은 정도.
시간이 지난 뒤 후유증은 확인해야겠지만, 지금의 이세진도 가벼운 찰과상만 입은 상태였다.
이 모든 일을 일으킨 당사자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탓에 튕겨 나와 기절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누군가에 비하면 자비로울 지경이었다.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세진은 전 매니저에 대한 분노보다 압도적인 감정에 숨을 참았다.
공포였다.
-다들 괜찮…!
그가 사고 직후에 상태를 체크하고 멤버들을 확인할 때.
맨 뒤, 류청우 옆에서 본 건….
'…아냐, 괜찮을 거야.'
자신이… 너무 당황한 탓에 상처를 현실보다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게 틀림 없었다…
다들 가벼운 부상인데, 뒤 차가 박은 곳과 제일 가깝던 류청우도 다리에 금만 가고 끝인데, 박문대만… 그럴 리가 없다.
출혈 때문에 그랬던 거지. 수혈받고, 수술도 들어갔으니 괜찮아질 것이다.
이세진은 답지 않게 잘 알지도 못 하는 분야를 지레짐작하며 머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직전에 박문대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할 뻔했기 때문이다.
-현재 환자분 상태가… …래서 위험… 당장 관 삽입 들어가야….
최대한 들어보려 애썼지만, 도저히 집중되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우리… 방금까지, 2주년 공연했는데.'
아무리 사고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지만, 이렇게 대비할 수도 없이 온 단 말인가?
이렇게 무력하게?
그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참 잘되는 중이었잖아.'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박문대가 뭘 잘못했다고….
재능도 있고, 성실하고, 기를 쓰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한 업계도 아닌 곳인데 왜 하필 박문대란 말인가.
사는 것도 순탄치 않았던 놈이.
-보호자 동의 필요합니다.
-보호자가….
없었다. 이세진은 피가 식었다.
-저, 제가 그냥 사인할 수 없을까요? 그냥….
-잠시만요.
빠르게 사인이 오가는 것 같더니, 의료진은 이세진의 사인을 받는 대신 환자 재확인 후 회의를 진행해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응급상황이라 가능한 일이었으나, 어쨌든 이세진은 망연히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안 그래도 패닉 상태던 다른 멤버들도 처치를 다 받았을 테니, 상황을 알았을 것이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그 꼴을 이 세진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곧 목격담이 뜨고… 기사가 뜨면 루머가….'
아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단 멤버가 다 멀쩡해야지.
이세진은 이를 악물고 손을 쥐었다.
'괜찮겠지.'
그래도 수술이 된다는 건 회복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박문대가 곧 정신을 차리면….
-그러다 30대에 돌연사하는 거야!
'X발, 괜히 그런 소리를 해서….'
이세진은 무릎을 주먹으로 쳤다. 눈앞이 허옇다.
'깨어나겠지.'
그래야 했다.
"…류건우입니다."
"아∼ 넵.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세진입니다."
나는 싹싹하게 인사하는 놈을 오묘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코마 속에서 봐도 여전히 뺀질뺀질한 놈이었으나, 하나가 달랐다.
'이 새끼 눈이….'
맛이 갔다.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보겠답시고 싱글벙글 웃으며 넉살좋게 구는데, 눈에 의심과 경계를 못 지운다.
'…루머로 하차한 게 치명타였나.'
게다가 학폭 루머로 하차한 자기를 굳이 LeTi가 데려온 이유도 모르겠고, 해명까지 세심히 가능했던 이유는 더더욱 모르겠다 이거지.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전 21살인데∼"
"저도 21살입니다."
"오, 저희 동갑이네요."
일단 고참인 내가 서열이 더 위라고 판단했는지 함부로 말 놓자는 이야기도 안 한다.
아주사 로 쌓은 인지도를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루머 때문에 멘탈이 박살났단 뜻이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말 놓을까요."
"아, 그럴까? 좋지∼"
이후 이세진은 정보를 캐기 위한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에 소속사 관계자를 만나러 떠났다.
"…."
이게 맞나.
캐스팅 콜 전에 긁어모을 수 있는 놈들을 데려오려고 한 짓인데, 이상하게 입맛이 썼다.
게다가 선아현 측은… 소속사에 응답도 아직 주지 않는 상태다.
… 아주사 방송분을 보니, 왜 그러는지 알겠다.
'X발.'
머리가 지근거렸다.
…무슨 억지를 써서라도 아주사 에 참가할 걸 그랬나.
사실 LeTi 정도면 이딴 망한 프로그램, 참가자 하나 튕겨내고 자기 연습생 꽂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소속사가 강경히 거부했다는 점이다.
-아이돌 주식회사? 거길 왜….
'…이득 될 게 전혀 없다 이거지.'
두세 놈 연습생으로 추가해 주는 정도는 데뷔도 아니니 청려 입김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이 소속사의 이름표 달고 검증도 안 된 연습생이 저질 프로그램에 나갈 순 없다는 것이다.
이땐 다들 아주사 시즌 3도 화려하게 망할 줄 알았으니까.
'설득이 안 먹혔어.'
미래지식 미끼로 청려를 좀 더 부추겨볼 순 있을 것 같았으나, 아주사 첫 촬영이 코앞이라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했다.
'X 같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볼 점은, 이 소속사에서 내 대우를 상당히 잘해준다는 점이다.
-건우 씨 따로 레슨받아 본 적 정말 없어요? 정말?
지난 두세 달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초반 보름쯤 내 기량을 파악하더니 태도가 더없이 사근사근해졌다.
그럴 만도 했다. 데뷔 3년 차 메인 보컬 짬이 어디 가진 않았더라고.
'데뷔 조에 합류시킬 계획까지 짜는 중인 것 같던데.'
그 데뷔 조, 3년 뒤에도 데뷔 소식 없으니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군.
"…후."
나는 연습실 거울을 보고 앉았다. 29년간 본 익숙한 내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솔직히 말하겠다, 진행 자체는 훨씬 편하다.
이미 내 능력치는 거의 완성형이고, 회사가 영리하며 대우가 좋다. 게다가 난 어떤 곡, 어떤 컨셉으로 데뷔해야 할지도 이미 알고 있다.
능력치가 검증된 멤버만 모으면 분명 데뷔 후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리고 상태창을 못 보는 이상, 기존에 합 맞춰본 놈들 데려오는 게 가장 좋을 것이고.
'…선아현이 연락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
캐스팅 콜 로 몇 놈 더 잡아와서 데뷔하면 딱일 것이다. 여의치 않으면 기존 연습생 하나 정도는 넣어도 된다.
그러니 원래 아주사 로 별 지랄 맞은 일 다 겪은 현실보다 훨씬 수월한데도….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현실이 아니라 그렇지."
깨어나는 게 목적이라 어쩔 수 없는 거라며, 나는 생각을 끝냈다.
"현실이 아니라니?"
"…!"
고개를 돌리자, 연습실 뒤편 문을 열고 걸어들어오는 청려가 보였다.
'저 새끼는 노크도 못 배워 먹었나.'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음, 슬슬 그런 생각할 때도 되긴 했지."
"…."
"근데 현실이니까, 그런 생각 마요. 시간 낭비라서."
안 됐지만 꿈 맞다, 새끼야.
나는 말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청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캐스팅 콜 따라올 거라면서요. 그거 사흘 뒤 촬영이던데."
"…."
"방송에 출연은 안 돼요. 그냥 내가 데려가는 거라."
"그거면 됐습니다."
설마 출연하고 싶었겠냐.
어쨌든 미래지식이 몇 번 검증된 이후로 소름끼치게 친절해진 놈은 흔쾌히 캐스팅 콜 조작까지 승낙했다.
"음… 이 문항이 나온다는 거죠?"
"예."
'주어진 문항에 대한 답변이 제일 비슷한 소속사에게 이적 제안을 받는다'는 방식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김래빈은 어차피 그대로 가도 LeTi에게 권유를 받을 걸 안다.
그리고 차유진과 류청우는… 무슨 짓을 해도 이런 작업 때문에 넘어올 만한 놈들이 아니란 것도 알고.
그러니 남은 한 놈을 잡아올 생각이다.
"알려줬으니 아마 그대로 할 겁니다."
배세진.
제대로만 한다면, 이 시점에서 제일 낚기 쉬운 놈이다.
그리고 며칠 뒤 아주사 촬영장.
"이거부터 옮겨요!"
나는 스탭 사이에서 비슷한 복장으로 LeTi 쪽 심부름을 하며 상황을 확인했다.
'…확률은 높다.'
일단 소속사에서 캐스팅 콜 전에 두 멤버와 접촉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확인했다.
'김래빈과 배세진.'
내 사주를 받은 청려의 조언을 통해서였다.
아주사 가 워낙 흥행한 타이밍이라 이 정도 꼼수는 기껍게 해주더라.
둘 다 가장 혹할 만한 방향으로 딜을 조언했다.
'김래빈에게는 작업 지원 중심.'
-국내 엔터테인먼트사 중 프로듀싱 관련 설비에 예산을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 소속사 AR 작업이 대단히 체계적이더라고. 게다가 김래빈은 VTIC이 쓰는 녹음 프로그램을 궁금해 하던 놈이니 제법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놈의 도덕적인 성향을 고려해서 문항 유출 이야기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 모든 게 '공식적인 방법' 이라는 점만 강조했다.
-프로그램에서의 공식적인 이적 방식을 통해 만남을 가질 수 있다면 대단히 기쁜 일이겠습니다.
다만 여차하면 차유진도 설득해서 함께 와도 좋다는 정도는 덧붙였고.
'차유진은 필요할 땐 눈치를 보는 놈이다.'
본인이 이 제안이 내킨다면, 지금 돌아가는 판을 눈치채고 알아서 눈치껏 김래빈이 할 법한 답변을 찍을 것이다. 가능성은 몹시 낮지만.
'그리고 배세진은… 안전.'
-법무팀 인력이 완비되어 있으며, 아티스트 보호를 위한 대형 로펌과의 작업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속사 분쟁 등에 강하다는 은근한 뉘앙스를 담아, 대놓고 문항 답안과 함께 컨택했다.
안 그래도 혹할 놈인데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청려는 의외로 나 대신 대외적으로 소속사에게 바람 넣는 역할을 제법 성실히 수행했다.
'작곡가를 미끼로 거래하길 잘했군.'
그래서 이제 결과를 볼 순간이다.
나는 스탭 행세를 계속하며 촬영장을 확인했다.
일단… 김래빈.
[그… 음, 죄송합니다. 출연한 이상 최선을 다하여 제 일에 임하고 싶습니다.]
현실에서보다 더 고민하긴 했으나, 결국 거절은 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이후다.
[여기요.]
[아, 예! 감사합니다.]
명함을 받아 갔거든.
즉, 불우한 사고로… 이 프로그램이 풍비박산 나거나 본인이 하차할 시 LeTi와 컨택하겠단 뜻이다.
그리고 세상사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됐다.'
나름대로 3년 동안 이 제작진을 봐왔는데, 아주사 박살 나는 방법이야 지금부터 짜내도 서너 가지는 나올 것이다.
게다가 촬영이 끝난 후에 류청우까지 혼란을 틈타 슬쩍 접근한 LeTi 관계자의 명함을 받아갔다.
상상 이상으로 성과가 좋았다.
'차유진만 어떻게 하면… 전원 다 모아서 그대로 데뷔할 수도 있겠는데.'
갑자기 머리끝이 짜릿했다.
나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
배세진이… 거절했다.
심지어 명함도 받지 않았다.
'미쳤나.'
왜 동아줄을 걷어차고 있단 말인가. 현실에서도 이때 더럽게 고민했던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예.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배세진은 아주사 에 잔류가 확정 되었다.
"…."
나는 입 다문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뺨이라도 후려 맞은 것 같군.'
어차피 대충 안 되는 놈은 거르고 갈 생각이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벌컥.
나는 냉수라도 끼얹을 생각으로 거칠게 관계자용 화장실에 들어갔다.
"…!"
"…!"
그리고 배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물 틀어놓고 질질 짜고 있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 거면 뭐 하러 거절해.'
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도 승낙하는 게 어떨까요."
"뭐?"
배세진은 멍하니 대꾸했다.
"LeTi 괜찮은 소속사거든요."
"…."
배세진은 얼굴이 시퍼레졌다가, 다시 시뻘게졌다가, 마지막으로 허옇게 질렸다.
'너무 직접적으로 찔렀나.'
"뭐… 너, LeTi…."
"네. 거기 스탭입니다."
배세진은 망연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갑자기 극도로 방어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대꾸했다.
"너희는… 연예인 빼가려고 이런 짓까지 해?"
"…!"
"나한테, 미리 연락하고… 문항 빼돌리고."
'X발.'
여기서 뒤틀렸나.
이놈은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문항을 보내고, 사전에 법무팀 이야기까지 꺼낸 것.
배세진이 느끼기에 원래 본인 소속사에서 하는 짓과 비슷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다.
"…."
쾅.
배세진은 도망치듯이 화장실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실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차 안.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팔짱을 꼈다.
'없던 일 치자.'
그래도 기분이 더러웠다.
맞은편의 청려가 옆자리의 멤버가 숙면 중인 것을 체크하더니, 입을 열었다.
"후배님?"
"예."
"아니, 나는 이해가 안 가서. 어차피 합류 안 했으니 물어보는 건데요."
"…."
"마지막 그 배우 출신은 잘하는 참가자도 아니던데, 왜 굳이 데려가려고 했어요? 나라면 이 기회에 잘랐을 텐데."
"…뭐?"
"협조적인 것도 아니고, 별 쓸모 없어 보여서요."
"…!"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왜 데려오려고 했냐고?
'그거야….'
내가 무의식중에 의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대로 데뷔하면, 배세진은 마약 루머를 쓰고 커리어가 끝장난다는 것을.
'그놈 인생이…, X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사실 나도 안다.
현실도 아닌데 여기서 배세진이 마약 루머를 덮어쓰든 죽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체 왜 내가 이 지랄을 하며 신경을 쓰는 건지 모르겠다, 망할.
"괜히 지난 관계 신경 쓰지 마요. 손해니까."
"…."
"어차피 다 명함만 받아가서 인원도 확정 아닌데, 그러지 말고 이런 건 어때요."
"뭐요."
청려가 미소 지었다.
"음, VTIC에 합류하는 것?"
"…!"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함정인가.'
재계약 시즌까지 지난 탑티어 그룹에 새 멤버 합류라니, 자살하라는 걸 색다르게 말하는 재주가 있다.
"아니, 잘 들어봐요."
그리고 놈은, 놀랍게도 제법 그럴싸한 루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32화]
VTIC에 새 멤버를 합류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신선한 개소리로 시작했다.
"우선 후배님은 프리 데뷔를 해요. 혼자."
"…."
갑자기 솔로 이야기 나와?
"올해 특별한 불상사가 없으면… 남자 솔로 부문으로 신인상은 오히려 쉽겠죠. 경쟁자가 없을 테니까."
천연덕스럽게도 말하는군.
"이 소속사는 솔로 활동 지원 안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프리 데뷔 정도야 설득해볼 만할 것 같아서."
청려는 태연하게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아무리 정식 데뷔 전 맛보기 활동이라도 저렇게 확신하나.'
역시 이 소속사가 솔로를 극단적일 수준으로 배제하는 건 이놈 입김이 있던 것이다.
나는 팔짱을 꼈다.
"그렇게 데뷔해도 성적 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남자 솔로로."
소속 그룹 없는 남자 아이돌이 솔로로 성적 낸 게 언젠지 까마득할 지경이다.
그러나 청려는 하하 웃었다.
"아, 퍼포먼스 중심 아이돌 말고, 보컬 중심 가수로요."
"…!"
"VTIC 이후 LeTi에서 나오는 첫 후배잖아요. 화제성은 확실하겠죠? 분야가 다르니 견제도 좀 피해갈 테고."
그 말대로다.
게다가 아이돌처럼 댄스형 솔로가수가 아닌 음원을 노리는 타입의 전통적인 남자 솔로, 발라드나 인디는… 타율이 괜찮다.
곡만 좋다면.
"그리고 내년 초에 VTIC 유닛이랑 콜라보 곡을 내요. 퍼포먼스를 좀 보여주는 종류면 좋겠고."
"…."
퍼포먼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어필하며, 날 VTIC과 엮는다 이건가.
"같은 소속사 콜라보 곡은 사례가 많으니 반발이 있어도 넘어갈 수준이겠죠. 성적이 좋고 후배님 역할이 확실하면 팬들 반발심도 누그러들 테고요."
이쯤 되면 무슨 말은 하는지 알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쪽 메인보컬 사건이 터지면, '차라리 류건우를 넣어라' 같은 개소리를 진짜 수용해서 절 그룹에 합류시키겠다는 말입니까?"
"똑똑하네. 맞아요."
류건우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VTIC 메인보컬 대체재로 투입하겠다는 뜻이군.
'미친 소리다.'
당연했다.
메인보컬 사건을 내가 말해준 건 그게 가장 놈이 목맬 비싼 정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1∼2년 후에 터지는 사건이지만, 발생은 딱 이 시기다.'
즉, 검증이 편했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뢰를 쌓기 용이할 것이라 판단했고.
그러나 이 새끼는 논란을 방지해 그놈의 폼을 유지할 생각 대신 나로 갈아 끼울 생각을 하는 중인 것이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일 터지는 걸 막을 수 있는데, 왜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놈의 표정이 사라졌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
"기억해둬요. 앞으로 유용하게 쓰일 사실이니까."
순 부품 취급이군.
'확실히 미친놈이긴 한데….'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풀어 말하자면 그룹에 타격이 갈 것을 감수해도 본인이 제어 못 할 분란 종자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 말 잘 듣고 절박한 놈, 더불어 쓸만해서 감시해야 할 놈을 겸사겸사 넣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볼 거죠?"
나 말이다.
'이런 일도 겪는군.'
이 새끼랑 같은 그룹을 할 기회가 생길 줄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뇨. 사양하겠습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계획은 까딱하면 X 된다.
그리고 칼자루를 놈에게 완전히 넘겨주는 꼴 아닌가.
'이 새끼가 감언이설 처발라놓고 상황이 변하면 프리 데뷔 이후로 날 처박아 놓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냥 꿈이면 모를까, 지금 내 행동은 전부 혼수상태에서 일어날 힌트를 찾으려는 것이다. 괜히 모험하지 말자.
'최대한 현실과 비슷하게 간다.'
…못 잡은 배세진도 아주사 프로그램이 무너지면 한 번 더 섭외 기회가 있겠지.
나는 손을 틀어쥐었다.
그러나 이놈과 척질 필요도 없기에, 나는 매우 그럴싸한 변명부터 들이댔다.
"솔로 신인상 부분이 미션에 들어 맞을지 확신을 못 하겠습니다. 아이돌 그룹 신인상만 쳐주면 전 그대로 죽는 건데요."
"아하."
이건 먹힐 줄 알았다. 청려는 팔짱을 끼며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그럼 다음에는 다른 방법 써보면 되는데. 아직 도전 의식이 부족하네."
"…."
이 새끼와… 길게 이야기하지 말자.
이후, 청려는 '한 달은 여유를 주겠다'며 제안을 당장 철회하지 않고 여지를 둔 채 떠났다.
'꼭 내가 한 달 내로 포기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은데.'
기분 나쁜 새끼였다. 차라리 심심하면 개 사진이나 뿌리는 현실의 놈이 나을 지경이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 일이나 하자.'
밑밥은 다 깔아뒀으니, 슬슬 은둔 생활 하는 놈을 끌어내야겠다.
…이 꿈의 선아현 말이다.
병실은 조용했다.
의료 기계와 복도 저 너머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며 내는 화이트노이즈만 부드럽게 1인 병실을 감았다.
공인인 신분만을 고려하여 개인실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이 개인실을 이용하는 환자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선아현은 조용히 간병인용 의자에 앉았다.
박문대는 친인척이 없었다. 하다 못해 테스타가 대단히 성공한 후에도 먼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하나 나타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서 이 병실에는 고용된 간병인 외에는 오로지 그가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인연들만이 드나들었다.
정신 차린 멤버들을 중심으로, 회사 사람들도 가끔 문을 열었다.
하지만 팬들이 보낸 수많은 선물은 아직 검사를 거치고 있었다. 덕분에 병실은 휑하도록 비어있었다.
"…."
선아현은 탁자 위에 뜨개질로 뜬 복슬복슬한 인형을 하나 올렸다. 직접 뜬 것이었다.
인형에서 떨어지는 손이 떨렸다.
'정신 차리자….'
선아현은 숨을 꾹 참았다.
그가 멤버 중에 가장 이 병실에 자주 방문해 간병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선아현은… 거의 다치지 않았으니까.
골절 등의 사유로 조치가 필요했던 멤버들이나 회사와 싸우느라 바쁜 멤버들과 달리 초기부터 운신이 가능하던 것이다.
그리고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 사실에 타는 듯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마디도 못 했어….'
다른 멤버들이 어떻게든 전 매니저를 설득하거나 신고할 때, 그는 차마 말을 얹지 못했으니까.
공포에 질려 말문이 막혔던 것이 아니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이 괜히 나섰다가 방해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
선아현은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리고, 의자 위에서 굳었다.
동생들은 괜찮다. 동생이니까.
하지만 동갑인 두 사람이 전 매니저를 설득하는 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사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기발하거나 용감한 발상을 하더라도,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여론과 회사를 상대하려면 누군가의 커버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했다.
'회사에 화를 내도, 제대로 통한 것 같지가 않아….'
반편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갑자기 의료적 지식이 생겨서 박문대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한 것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차에 멤버들을 인도한 것뿐이었다. 몸은 멀쩡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정신이 반쯤 나간 채였다.
선아현은 주먹을 꾹 쥐었다.
'한심해.'
그래서 그는 정말 쓸모가 없었다. 적어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현실의 걱정 탓에 자기혐오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박문대가… 닷새째 의식이 없다.
수술이 제법 성공적이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워낙 충격이 크고 출혈량이 많았던 탓인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뒷자리에 앉았어야 했는데….'
그 편이 훨씬 좋은 결과였을 것이다. 문대도 덜 다치고….
"…."
선아현은 얼굴을 닦아냈다.
이런 일로 염치없게 울 수는 없었다.
그럴 시간에 기도라도 해야 했다.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후유증 없이.'
얼른 돌아왔으면.
"와, 이렇게 또 보네요∼ 반갑습니다!"
"아, 아, 안녕하… 세요…."
"…."
인위적일 만치 서글서글한 이세진과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는 선아현이 인사를 한다.
나는 입 다물고 그 꼴을 보았다.
골치가 지근거렸다.
'…말도 안 놓았나.'
같은 골드니 놓았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건 이세진 쪽에서 선아현과 억지로 친해질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저 얼굴이면 이세진이 한 번 인맥용으로 찔러볼 법도 한데.'
그 정도로 선아현의 퍼포먼스 질과 방송 편집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 나도 방송을 봤으니 무슨 짓이 일어났는지 안다.
'…견제를 너무 심하게 당했어.'
첫 팀전에서 다른 놈들이 안 어울리는 파트를 억지로 들이밀고 애를 X같이 구박해놓은 덕이다.
하다못해 편집도 이 짓을 당한 선아현에게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선아현 진짜 개발암;
-말 더듬는다고 의견전달 못 하는 거 아니잖아 ㅅㅂ나라도 답답해서 욕 박았음
선아현의 팀원들도 온갖 욕을 다 얻어먹었으나, '구박당할 만했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저런 애는 서바이벌 나오면 안 되지' 같은 댓글이 최다 추천을 받고 올라오며 지랄이 났다.
그리고 이곳의 선아현은… 마이너스 투표의 영향을 직통으로 받아 아슬아슬 탈락하게 된 것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
'일단 빼 내오긴 했는데….'
이놈 집은 이미 알고 있으니, 가서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방 빼려 정리하던 중에 방문해서 부모님을 'LeTi 연습생'이란 신분으로 설득해서 이놈을 챙겨왔다.
워낙 선아현의 상태를 걱정해서 아티스트 케어로 이미지 관리 잘한 소속사 이름값에 넘어오시더라.
물론 본인 설득이 조건으로 붙긴 했지만.
-당장 데뷔는 아니고, 연습하면서 같이 지내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학생 말은 고마워요. 하지만, 아현이가 싫다고 하면 더 권하진 않을 거예요.
-…한번 설득해봐도 괜찮을까요.
나는 그 길로 방에서 선아현과 독 대해 설득을 진행했다.
-소속사에서… 네가 꼭 포함되어야 그룹 데뷔가 가능하다는데.
-….
-혹시 연습이라도 나와볼 생각은 없는지 궁금해서. 너 잘할 것 같거든.
선아현은 반응이 없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나, 결국 마지막엔 고개를 끄덕였다.
몰골이 영 아파 보였으나… 밥 좀 잘 먹이고 잘 재우면 한결 나아지겠지.
'연습해서 데뷔만 제대로 가능하면 멘탈도 괜찮아질 거다.'
선아현은 이럴 땐 멘탈이 터진 두 부같이 보여도 회복탄력성이 좋은 놈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봤지.'
잘… 다독이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뒤.
"아현 씨, 잠시만요."
"…."
선아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부 모님과 함께 소속사 관계자들을 만나러 떠났다.
그리고 이세진은 은근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저 친구도 이쪽 그룹으로 넣는대?"
"그런 것 같은데."
"음∼ 그렇구나. 아까 들어보니까 네가 직접 설득했다더라, 진짜야?"
"…."
"이야, 너 솜씨 좋다∼"
이세진이 옆에 척 앉았다. 나는 코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멘탈이 좀 돌아왔나.'
대충 아주사 에서 처음 만났던 때 정도는 되는가 싶은 순간.
옆에 앉은 이세진은 사회성 넘치는 말투로 지나가듯 말했다.
"음… 회사에서 생각해둔 다른 친구는 없대?"
"…그건 왜."
혹시 다른 멤버가 궁금한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이세진은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어? 아니, 저 친구 나갈 수도 있잖아∼ 혹시 해서!"
"…!"
나갈 거라고 확신하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나는 즉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 쟤 너 무서워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
"척 봐도 그런데… 아, 일부러 약간 겁주고, 동기 부여하는 그런 거 아니었어? 하하, 미안∼"
"…."
내가… 그렇게 보였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최대한 온건한 방법으로 설득 했다. 강요하거나 윽박지른 적 없다.
'그냥 선아현이 필요하다는 말을… '
그 순간, 선아현의 상태가 떠올랐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멘탈이 박살난 상태.
그리고 내가 사용한 말.
-소속사에서… 네가 꼭 포함되어야 그룹 데뷔가 가능하다는데.
…네가 안 와서 내가 데뷔를 못 하면, 네 탓이라는 식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선아현은 대꾸도 못 하고 같이 와줬다고.
"음, 아무튼 누가 올진 너도 잘 모른다는 거지? 오케이∼"
"…."
이세진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한 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연습실에서 걸어 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알던 선아현은 그런 놈이었나.
내가 알던 이세진이, 이런 말을 하던 놈이었나?
'…아니.'
아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사고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내 행동 경로를… 다시 돌아보았다.
'앞뒤가 안 맞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면서 현실과 똑같이 데뷔하려는 이 짓을 하기 시작했지?
코마에서 깨어날 힌트를 찾는다?
찾는다는 보장은 어디 있으며, 그게 현실과 똑같이 가야 할 확실한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냥 내 추측일 뿐이지.'
그렇다면 내가, 이 추측을 어떻게든 확신하면서 해 먹으려고 한 이유는….
X발. 그냥,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박문대로 살았던 삶을 그대로 구현하고 싶어서.
"하."
나는 숨을 몰아쉬며 연습실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상태창의 메시지를.
-Enjoy your daydream :)-
'이래서 백일몽이었나.'
백일몽의 뜻은 헛된 공상이다.
…그러니까, 이게 내 욕망이던 것이다.
박문대로 살았던 그 삶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나 보다. 내 것으로.
그러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청려에게 직접, 내 입으로 했던 말이다.
-다시 시작해서 똑같은 팀을 꾸려도 절대 지금과 같을 수는 없겠죠. 공유한 사건과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지랄을 합리화해 온 이유는 또 무엇인가.
"…."
나는 거대한 거울에 머리를 박은 채,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인정했다.
'박문대로 지난 2년 반도 내 삶이었기 때문이겠지.'
박문대의 몸으로 겪은 것이긴 하나, 모든 선택과 사고, 경험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 정신이 직접 겪은 것이니까. 그 건 변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지랄이 끝나고 혹시 원래 내 몸, 류건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내 경험인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알겠다.
"후."
나는 거울에 박은 머리를 들어 올렸다.
거울에 뿌옇게 김이 껴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비록 저기 보여야 할 것이 '류건우'의 얼굴이지만, 그래도 이 꿈이 내 삶이 아니었다.
'그만.'
너무 여기 오래 있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사는 '내 현실'로.
그 순간이었다.
띠링.
"…!"
[기능이 해금되었습니다!]
[기능 : 뽑기 (소모형)]
팝업이… 떴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현실에서 남겨뒀던 것이.
[잔여 뽑기 : 1]
[보물 특성 뽑기 Click!]
나는 손을 들어 그것을 연타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33화]
김래빈은 한 손에 든 상자를 고쳐 잡으며 병실 복도를 걸었다.
다른 쪽 팔은 아직 반깁스 중이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신중히 움직여야만 했다.
김래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자를 놓치는 등의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돼!'
그래도 사고 이후 병원 주변에서 바글바글 대기 중이던 수많은 언론 관계자들의 수가 제법 줄었기에, 여기까진 수월히 진입할 수 있었다.
충격적이던 교통사고 보도 이후 시간이 제법 흘렀기 때문이다.
'혼수상태에서 수술 회복 중'이라는 타이틀이 열흘 이상 지속되자 그 들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났다.
하루걸러 하루꼴로 사건이 터지는 연예계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온갖 비관적인 추측 기사, 칼럼, 팬들의 걱정과 분노가 소용돌 이치며 인터넷은 아직도 아비규환이었다.
[테스타 박문대… 뇌사 위험 있나]
['5월의 신랑'이 당한 사고 그날의 재구성]
[수술 이후?일, 박문대의 회복을 위한 기도]
그리고 김래빈은 이런 것을 어쩌다 가끔 검색엔진 메인에서만 확인할 뿐, 세세한 반응을 자세히 살펴볼 지식도 여유도 없었다.
그렇기에 팬들이 공식계정에 다는 댓글을 토대로 간단한 사실관계만을 이해했다.
'다들 문대 형이 깨어나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어.'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김래빈!"
"…! 병원이잖아, 조용히 해!"
옆 병실에서 뛰쳐나온 차유진이 목발을 현란히 사용하며 무서운 속도로 김래빈을 쫓아왔다.
그는 김래빈보다 더 큰 뼈를 다쳐 부상이 심해 아직 입원 중이었다.
"문대 형 보러 가?"
"…응."
"나도 갈래."
차유진은 꿋꿋이 대답하며 김래빈을 따라 속도를 맞춰 걸었다.
수술 당시에 펑펑 울며 스페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기도를 올렸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평정심이었다.
'차유진은 멍청해서 좋겠다.'
김래빈은 짧게 차유진을 부러워하다가, 다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박문대의 병실은 바로 근처였다.
"형."
"저희 왔습니다."
"으응, 어, 어서 와…."
병실 안, 석상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선아현이 얼른 일어나더니 작게 대답했다.
"문대 형 편안해요?"
"…응, 불편한 곳은, 어, 없을 거라고 그러셨어."
"알았어요!"
차유진은 씩씩하게 침대 옆에 앉더니, 의식 없는 박문대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열심히 근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팬들이 종이 확? 새 보낸다 해요. [신기해요. 어느 나라든 비슷한 이야기가 있나 봐요. 어쨌든, 형의 완쾌를 바란다니까 좋죠?]"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중론이었으나, 묘하게 희망을 주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멤버들은 차유진을 말리지 않았다.
"다른 형들께서는 이미 왔다 가신 모양입니다."
"…아, 아까, 회사에 갔어."
"그렇군요."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유진의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가져온 것은 무척 중요한 소식이었기 때문에, 차유진의 말소리와 물리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끈질기게 오래 떠들어대는 차유진을 보며 '면회 시간을 중복된 이야기로 낭비하지 마!'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병실에선 정숙해야 하니까!'
그 대단한 문대 형 앞에서 양식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며 김래빈은 자신을 타일렀다.
그리고 결국 차유진과 투닥거리는 일 없이 조용히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형, 안녕하십니까…."
물론 누워있는 박문대에게선 대답은 없었다.
김래빈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할머니 때가 생각났기 때문일지도 몰랐으나, 어쨌든 본인은 그냥 꾹 참았다.
"제, 제가 준비해 온 것이 있습니다."
그는 침착하려 애쓰며 상자를 들어 열었다.
상자 안은 꽉 차 있었다.
온갖 선과 음표가 그려진 종이 여러 장과 아이코닉한 소품들, 그리고… 노트북.
조용히 서 있던 선아현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다음 앨범 컨셉 자료입니다."
김래빈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마시고 편하게 일어나주시면 됩니다!"
그가, 퇴원하자마자 한 일이었다.
"…."
차유진까지 할 말을 잃고 김래빈을 보았다.
사실, 매우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박문대가 당장 깨어난다고 해도 재활과 복귀가 당장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박문대가 의식을 되찾지 못한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의료진들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래빈은 마치 당장에라도 가능한 것처럼 다음 활동을 구체적으로 '준비'해 온 것이다.
잠들어서 보지도 못하는 박문대에게 보고하기 위해.
'알아.'
김래빈은 생각했다.
불투명한 미래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예상하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시간 소비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어.'
할머니도 깨어났으니, 분명 문대 형도 곧 깨어날 것이다.
"준비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김래빈은 논리적이지 않은 확신을 되새기며 상자를 들고 씩씩하게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아요!"
"…!"
"형 일어나서 우리 또 콘서트 해요! 많이 해요!"
"그, 그래! 문대야, 준비할게…!"
차유진에 이어, 풀이 죽어 있던 선아현까지 자극을 받았는지 뜨던 털실을 꾹 부여잡고 외쳤다.
다른 누군가가 여기 있었다면,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어 혀를 찼거나 안쓰럽게 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들은 꿋꿋했다.
"…."
물론, 여전히 박문대는 대답이 없었다.
현실은 만화가 아니었기에 혼수상태에 빠진 이가 동료의 부름으로 깨어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박문대가 없는 미래 계획을 세우는 대신, 그렇게 선택했다.
그리고 잠든 박문대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오고 있었다.
내가 연타한 상태창의 'Click' 문구는, 현실에서처럼 번쩍 빛나며 새로운 팝업을 불러왔다.
이제 익숙해진 슬롯머신 그림.
레버를 당기자… 칸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칸들 사이사이, 간혹 보이는 백금빛 칸들.
그러나 그 칸들은 현실에서처럼 온갖 낯부끄러운 문구들로 채워지지 않았다.
모든 칸은 비어 있었다.
"…."
하지만 나는 그냥 칸이 멈추길 기다렸다. 턱 끝에서 식은땀이 떨어졌다.
천천히 돌아가던 슬롯이, 정지하는 순간.
파팡!
[슬롯머신 대성공!]
: 전설 특성을 뽑습니다!
백금빛 빈칸에 도착했다.
[특성 : _ 획득!]
팝업의 공란이 적나라했다. 마치 아무거나 채울 수 있다는 듯이.
'꿈이라서 그런 건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백금빛, 전설 특성.
'A등급이다.'
내가 아는 A등급은… 뭐가 있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번뜩이는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바쿠스… 1000으로."
[바쿠스1000(A)를 입력합니까?]
[예 / 아니오]
나는 손을 들어 예를 쳤다.
A등급으로 올라간 바쿠스1000에 붙은 추가 효과는….
-모든 피로 회복 속도 +100%
그렇다면, S등급으로 올라간다면?
[동일 특성 확인!]
'바쿠스1000(A)'를 합성하시겠습니까?
그래.
그 순간, 눈앞에서 폭죽처럼 색색의 빛이 터졌다.
그리고 팝업이 번뜩이는 무지갯빛으로 갱신되었다.
[합성 성공!]
'넥타르(S)' 획득!
감미로운 삶의 맛
-생명력 완전 회복 (1회용)
"…!"
이거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해냈다.'
맞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어느새 일어서 있었던 몸이 휴식을 달게 빨아먹는다.
긴장이 풀리며 사지가 후들거리는데, 풀리지 않은 의문들 때문에 머릿속까지 진탕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돌아갈 수 있다.'
저걸 활성화하는 순간, 내 몸이 완전 회복을 진행하며 깨어난다는 건 딱 틀이 맞아 들었다.
현실 대신 이 꿈속 '류건우' 몸이 회복될지 모르는 가능성… 아니, 닥쳐라. 그럴 일은 없다.
'여긴 상태창이 애초에 안 먹혔어.'
게다가 원래 내가 '박문대'의 몸으로 현실에서 가지고 있던 특성과 합성되었지 않은가.
이건 무조건 현실 몸 대상이다.
머릿속이 짜릿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초조해졌다.
'상태창이 다시 비활성화되기 전에 얼른 해야 해.'
이 망할 꿈에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나는 팝업에 떠 있는 특성, '넥타르(S)'를 곧바로 활성화하려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벌써?"
"…!"
…고개를 돌리자, 스케줄이 있다며 돌아갔던 놈이 연습실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청려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 태세를 갖추었다. 변명은 많았다.
"더 연습이 될 것 같지도 않으니 돌아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거짓말."
놈이 연습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왔다.
'지금 바로 누르면….'
잠깐, 허공을 누르는 동작에서 위화감이 들면 이 미친 새끼가 공격할 수도 있나?
내가 빠르게 손익을 따지는 사이, 청려는 내 맞은편에 섰다.
그리고…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연다.
"음, 생각보다 근성이 없는데."
"뭐라고?"
"3번째라면서요? 이 시기에 겨우 이런 일로 재시작하려는 건 다소 섣부른 선택 아닌가 해서요."
아, 그 이야기였나.
하긴, 이 새끼가 이게 내가 혼수상 태에서 꾸는 꿈이라는 걸 알 턱이 없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결 수위를 낮추어 대꾸했다.
"재시작 안 합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말이 심각하게 나왔는데, 진짜 숙소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그럼 들어요."
씨알도 안 먹히는군.
놈은 내가 재시작을 마음먹었다고 확신하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 후배님이 모은 둘은… 다루기 애매한 상태던데. 매번 협조적이진 않을걸요. 이번에도 봤죠?"
"…."
"앞으로는 한 달 정도 두고 본 후에 합류를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이번엔 좀 성급했던 것 같아요. 직전에 제법 좋았나."
"맞아요."
나는 웃었다.
"그냥 같이하고 싶어서 고른 겁니다."
"…!"
청려는… 오묘한 얼굴이 되었다.
까마득한 과거가 불쑥 치고 나오기라도 했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뭐, 초반이니까 한두 번은 그래도 상관없나."
"…."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뒤, 일부러 가볍게 말을 던졌다.
"그래도 만일 제가 재시작하면, 애들 데뷔는 시켜주시죠. 좋은 정보 여럿 드리고 가겠습니다."
"음, 저 둘을요?"
"영 별로라면서요. VTIC에 위협이 되진 않을 것 같은데."
청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긍정이란 뜻이군. 이러면 별문제 없을 시, 내키면 해줄 확률이 꽤 된다.
나는 차분해진 놈을 내보내다시피 하며 배웅했다.
그리고 놈에게 몇 가지 예약 메일을 걸었다.
[202X년 8월.txt]
2주 간격으로 도착할 미래지식.
그리고… 배세진의 아버지가 운영 하던 도박장을 검찰에 찔렀다.
-마약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불법 도박장입니다. 반드시 확인 부탁드 립니다.
어차피 여기 더 있을 것도 아니니, 신고자가 나로 밝혀져도 상관없으니까.
'…이걸로 조금은 나아지겠지.'
마지막으로는 선아현 부모님께 현실에서 선아현의 현재 담당일 상담사의 병원 연락처를 검색해 보냈다.
-제가 상담받았던 선생님인데, 크게 도움받았습니다.
탁.
다 끝낸 뒤 스마트폰을 닫으니, 어쩐지 개운했다.
'…남은 건 없나.'
그때였다.
"오∼ 청려 선배님이랑 친해?"
고개를 돌리니, 스마트폰 보며 나갔던 녀석이 도로 연습실에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팝업을 잠깐 돌아보다가, 이세진에게 대꾸했다.
"…없진 않지."
"그래?"
"어, 근데 널 소개해 줄 일은 없어."
"…!"
"저 새끼 미친놈이거든. 앞으로 조심해라."
"…뭐?"
놈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이었다. 간만에 보는 인간적인 얼굴이다.
"…."
아마 내가 나가는 순간 이 망할 꿈은 다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다 자기만족일 뿐이지만, 뭐 어떤가.
나는 닫았던 스마트폰을 다시 열고, 놈에게 빠르게 말했다.
"그 새끼 대신 작곡가 소개해 줄 테니까, 잘 들어라. 데뷔하면 유용하게 쓰고."
"뭐라고?"
나는 다짜고짜 놈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무명일 한 작곡가의 연락 처였다.
지이이잉!
진동이 요란했으나, 이세진은 얼빠진 얼굴이다.
"자, 여기로 연락해서… 샘플을 쭉 들어본 뒤에, 3번이나 7번을 골라. 그게 잘 될 테니까."
"…갑자기 무슨,"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냥 들어도 너도 그걸 고를 것 같긴 한데. 한번 말해본 거야."
"…!"
현실의 네가 그랬으니까.
이세진의 눈은 당황이 역력했다. 그리고 말을 고르듯이 얼굴을 한 손으로 문지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 고맙긴 한데,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거든. 좀 진정한 다음에 이야기하지? 아니, 선배님은 왜 미친놈이고…."
한 꺼풀 벗겨진 꼴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풀어졌을지도 모르겠군.'
어쩐지 좀 유쾌했다.
나는 놈을 잠깐 보다가, 등을 돌려 문을 향했다.
"저기, 잠깐."
"또 보자."
현실에서.
여기서 할 일은 이제 없다.
나는 한 손을 뒤로 흔든 뒤, 거침 없이 연습실을 돌아 나왔다.
팝업은 여전히 내 시야에 떠 있다.
[넥타르(S)'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경고※ : 소모형 특성 /1회용)]
"그래."
그리고, 시야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34화]
배세진은 퀭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일부러 불안을 부추기는 기사들은 대부분 회사에 의해 내려갔다.
아니, 적어도 회사는 그렇게 주장 중이었으나, 배세진의 생각은 달랐다.
'그냥… 이미 올라올 만큼 올라와서 그런 거 아니야?'
회사에서 사고의 내막을 아예 막아 버렸으니 더 우려먹을 게 없어서 기사도 시들해졌다는 말이다.
그렇다. 회사는 전 매니저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론에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기사에는 그냥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전 매니저의 운전 소홀로 인한 사고'로 보도되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배세진은 손을 꽉 쥐었다.
일부 멤버들이 이를 악물고 집요하게 실무진들을 추궁한 결과, 그들도 전 매니저가 침입한 경로를 알았다.
-공연 업체 쪽에서 매니저 바뀐 이야기를 제대로 못 들어서… 낮에 다른 일 보고 온 줄 알고, 통과시킨 거래요.
-…!
그러니까 이 사고는… 전 매니저를 해고했다는 사실을 관계자들에게 제대로 고지 못한 회사의 탓도 있던 것이다!
본인들도 그걸 아니까, 본사에까지 요청해 필사적으로 언론 입단속 중이라는 걸 배세진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도 회사는 관리인력 소홀이라며 전방위로 비난을 받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실관계가 더 명확해지면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게 될 테니, 최대한 사건이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럴 시간에… 박문대 회복에나 신경 쓰라고.'
물론 기대도 없었다.
만일 몇몇 멤버들이 회사에 강력히 반발하지 않았다면, 슬금슬금 6인 체제 활동이나 언급했을 테니까.
'역겨워….'
배세진은 입을 틀어막았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배세진은 그룹을 사업 밑천으로만 보는 천민자본주의적 시선에 완전히 질렸다.
자기들 일이 아니니 소속 연예인의 일정에 대해 안전불감증처럼 구는 것도.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봐서 질릴 지경이다.
'이 업계에서 이런 사고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매번 똑같은 일이 반복된단 말인가.
이래서야, 제도권 안에 있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빼면… 전 소속사와 다를 게 없다.
배세진은 입을 막은 손이 허옇게 되도록 힘을 주었다.
'…더 제대로 된 소속사를 찾아야해.'
분명 괜찮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인륜을 지키는 소속사도 있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3년만 버티면….'
배세진은 그대로 끝도 없는 의식의 흐름에 빠져들 뻔했다. 하지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박문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
배세진은 힘없이 스마트폰을 든 손을 떨구었다.
어차피 무슨 계획을 세우든, 이런 일에서는 박문대가 있어야 제대로 돌아갈 거란 사실도 안다.
'무슨… 한평생 그것만 하고 산 것처럼 처리하니까.'
배세진은 그런 초인적인 또래는 처음 보았다.
그 빛나는 재능, 자신감, 담대함. 그것만으로도 하늘이 내린 엔터테이너로 보이는데… 심지어 사회생활까지 능숙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당시에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던 적도 있으나, 데뷔 후에는 그럴 것도 없었다.
비교할 마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반드시 갚아주겠다고 큰소리친 적도 있으나, 아득했던 것도 사실이다.
'박문대가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오기나 할까 싶었지.'
실제로 배세진이 도와주기 위해 했던 일도 마음만 앞서서 어설프기 그지없었다고, 본인은 스스로 냉정히 평가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배세진이 움직여야 했다. 뭔가를 해내야 했다.
박문대는 깨어나지 못하고, 다른 멤버들은 다쳤거나 심신이 지쳐서 평소와 같은 기량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언제나 그랬어.'
그는 과거, 언제나 심신이 고단하고 예민한 상태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건 배세진, 자신이었다.
"…."
배세진은 입을 막던 손을 뗐다.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하자.'
배세진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어딘가의 연락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배세진은 이를 악물고 전송을 꾹 눌렀다.
이게 효과적인 선택일지는 그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는, 옳았다.
"…후우."
배세진은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팬이 선물한 햄스터 무늬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침착하려 애썼다.
그때였다.
[ ∼ ]
"…!"
전화가 왔다.
배세진은 허겁지겁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선아현 동생
배세진은 숨도 쉬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
전화기 너머에서 흥분한 목소리 여럿이 울렸다.
"…."
침착하게 기다리던 배세진은, 결국 완성된 문장에 아연실색했다.
"…자, 잠깐, 잠깐! 금방…!"
배세진은 더듬거리다가, 문장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심장이 뛰었다.
넥타르(S)를 활성화한 후.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하더니, 어느새 정신이 아무것도 없는 허연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아니, 이건 부유라기보단… 어딘가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다.
'꿈으로 들어올 때와 정반대인가.'
그때는 온통 시커멓게 변하더니.
대충 속 편히 생각하자면, 깨어나는 중이라고 짐작하고 싶다.
나는 팔짱을 끼려다가, 딱히 몸의 형태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꽤 오래되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순간.
새하얀 공간에 색이 들어왔다.
'…!'
아니, 색이라기보단 파동이다.
저 멀리서부터.
마치 감정이나 생각처럼 추상적인 것들을 감각화한 것 같은, 묘한 충격들은 다가와서 내 위를 덮쳐왔다.
피이잉-.
'…!'
전신이 울리는 듯, 강렬한 경험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처음 인지한 것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박문대의 홈마스터였다.
데뷔 전 프로그램 시절부터 박문대의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다.
그녀는 박문대의 교통사고에 대한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스마트폰만 계속 붙들고 있었다.
울지도 못했다.
그리고 새벽 3시.
스마트폰에 뜬 박문대의 수술 기사를 확인한 뒤에 자신의 SNS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
-많이 기도해주세요 제발
액정에 떨리는 손톱이 부딪혔다.〕
이게 대체 뭐지.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남매였다.
이미 눈이 시뻘겋게 퉁퉁 부은 누나 쪽은 인터넷에서 테스타의 교통 사고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과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다.
동생은 평소처럼 시비를 걸거나 장난을 치는 대신 누나의 옆에 앉아서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그리고 턱도 없는 인터넷발 의학지식을 주워섬기며, 박문대가 괜찮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이야기를 슬쩍 던졌다….〕
파동이 뜨거웠다.
〔속보를 본 대학원생은 랩실 한쪽에서 커피를 뽑다가 커피를 엎질렀다.
그리고 바닥이 엉망이 된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목놓아 엉엉 울었다.
주변에서 달려온 랩실 동료들은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걱정해 주었다.
내심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으나, 뒷담을 할지언정 지금은 무심코 위로할 만큼 강렬한 슬픔이었다.〕
이야기가 끝나질 않았다.
〔이세진과 박문대를 함께 찍는 한 직장인 홈마스터는 테스타의 교통사고 소식에 '아직도 배운 게 없다'며 업계의 관행에 혀를 찼다.
하지만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몸 상태를 핑계로 다음 날 직장에 연차를 낸 채 박문대의 소식을….〕
왜 이런 게 쏟아져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다.
인생 처음으로 아이돌 콘서트를 보러왔던 사람.
다양한 아이돌을 거친 끝에 박문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 '5월의 신랑'을 좋아하던 사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박문대를 응원한 뒤 잠시 잊고 살던 사람. 테스타의 다른 멤버를 좋아하다 박문대도 호감으로 생각하게 된 사람.
박문대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걱정하는 사람, 앨범을 대량 구매해 박문대의 포토카드를 전부 모아 꾸며 놓은 사람….
피이잉—.
테스타의 박문대를 알고 있는 온갖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이 여름밤 시골 밤하늘 별처럼 사방에서 반짝였다.
수많은 걱정이, 슬픔이, 생각이, 그 복잡다단한 마음과 단순하고 강렬한 감정들이 심장을 꽉 채웠다.
그리고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
어떻게 직접 사귀지도 않은 사람들과 이토록 연결되어 있다는, 강렬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박문대는 나인가?'
아니, 이 질문은 맞지 않았다.
'테스타의 박문대… 그 아이돌은 내가 맞는가.'
자신의 본명을, 자신의 살아온 신분과 생김새를 바꿔 활동하는 연예인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그 연예인은 TV 속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박문대는 '5월의 신랑'처럼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에 불과한 걸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박문대가 나 자체, 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내 일부였다.
이 모든 감정과 생각은… 전부 고스란히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 나와 공유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정의는 맞았다.
이들은… 그거다.
-내가 깨어나길 바라는 사람들.
'….'
압도당할 것 같았다.
그 모든 감정, 생각이 파도처럼 내 머리 위를 덮고, 젖은 흔적을 남기고 지나간다.
새하얀 공간은 어느새 온갖 색으로 물들어 색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처럼 짠맛이 났다.
황홀했다.
감미로운, 삶의 맛이었다.
나는 그대로 빛깔 속으로 빨려들어 상승했다.
저 위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넥타르 (S)]
-활성화 성공!
"허억!"
나는 숨을 토해내듯 뱉었다.
진흙에 빠진 것처럼 사지가 둔했다.
하지만 공기가 죽이도록 달았다.
'…낮인가.'
너무 오래 눈을 뜨지 않았던 탓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귀는 멀쩡했나 보다.
"박문대!"
"무, 문대…!"
이 목소리들은 잘 알아듣겠다.
이놈들은 자기들 치료나 제대로 받을 것이지, 대체 남의 병실에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도, 고맙긴 하군.'
나는 귀가 떨어질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어깨와 머리에 쏟아지는 손들을 감내했다.
아주 기꺼웠다.
내가 시야를 회복하며 의료진들이 내 몸에 부착한 장치들을 제거한 것은 잠시 후였다.
놀랍게도 여섯 놈이 다 병실에 있었다.
'1인실이 좋긴 하군.'
다 큰 놈들 7명이 다 들어오고도 운신할 구석이 남아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 상황의 이유는… 마침 문병을 왔던 놈들이 뭘 목격했던 모양이고.
"무, 문대가 자, 잠깐, 눈을 떴던 것 같아서… 호, 혹시 모르니까 불렀어. 으응, 의료진분들께도 연락, 연락하고…."
"그래…. 고마워."
"아, 아냐…!"
그러다 내가 안 깨어났으면 어쩌려고 그랬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나도 대가리가 있지.'
눈물 콧물 짜는 감동과 축하의 도가니탕에서 산통 깰 수는 없지 않은 가.
…그리고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니까.
대신 최대한 온화하게 멤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던 중이었다.
코가 벌게진 놈이 외쳤다.
"문대문대, 멜론 먹을래? 당도 최고잖아∼"
"어, 그래."
역시 눈이 다르군. 나는 새삼스럽게 큰세진 놈을 훑어보았다.
"…어, 문대 설마 새삼 참 진실한 친구를 둬서 감탄 중인 거야∼?"
"비슷해."
"…!"
저 개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군.
현실로 돌아온 느낌 말이다.
큰세진은 얼떨떨한 얼굴로 날 보다가, 이내 한 팔을 극적으로 치켜들어 얼굴을 가리고 흑흑 소리를 냈다.
"너무 감동적이야!"
저거 진짜 울면서 일부러 우는 척 하는 중인 것 같은데, 내 상태가 정
말 심각하긴 했었나 보군.
'일단 아까 봤던 장면들을 생각하면, 수술은 확정이고….'
의료진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뻔한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특별히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사실 몸 상태가 그렇게 쓰레기 같지도 않다. 그래서 혹시 '넥타르'를 활성화한 덕에 이렇게 멀쩡한 건가 싶었는데 말이다.
'…설마 그냥 가만히 있었어도 회복할 상처였나?'
어쩌면 내가 괜히 오버한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쨌든, 돌아왔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난 지금 내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환자 특식으로 제일 먼저 받은 멜론을 먹으며 상황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아직 의식을 회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좀 둔했다.
그러다가 보았다. 멜론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은 차유진을.
"…줘?"
"괜찮아요! 형 많이 먹고 힘내야 해요!"
씩씩하군. 처음에 내 목을 거의 조를 듯이 환영해 주더니 여전한 모양이다.
그리고 김래빈은 참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일단 우느라 바빠 보였으니 내버려 두고.
지금 대화할 건….
"그러고 보니, 지금 며칠인가요. 사고 낸 전 매니저는 어떻게 됐고."
"…!"
이걸 대답해 줄 사람인데.
"…박문대."
"아, 네."
의외로 배세진이 굳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일단… 그 전에 이 이야기부터 들어."
"예."
배세진은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회사가… 그, 전 매니저 이야기를… 제대로 말 안 하려고 했거든."
"아."
거기까진 대충 예상했다.
'그건 나중에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고.'
중요한 건 운전대 앉았던 그 새끼가 지금 콩밥 처먹을 준비가 끝났냐는 점이다.
하지만 배세진은 한 손을 불끈 쥔 채 상상도 못 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인권위에 익명 제보했어…!"
"…?"
"지금까지 일을 전부!"
"…?!"
뭐… 뭐라고.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35화]
인권… 위?
갑자기 나온 인권위에 병실 분위기가 혼란스러워… 질 줄 알았으나 다른 놈들은 모두 담담한 걸 보니 나 빼고 다 합의된 사항이군.
'최소한 제보 전후에 이야기는 했다는 건데.'
나는 미간을 누르려다가, 링거가 꽂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 국가인권위원회 말이죠."
"…그래!"
그쪽이… 사법적 강제력은 없는 기관일 텐데?
기껏해야 회사에 윽박 좀 질러주고 끝일 것이다.
애초에 익명으로 들어온 아이돌 인권침해 제보를 진지하게 처리해 줄 지도 모르겠다만.
그러나 내 설명에도 배세진은 당황한 기색이 없다.
"알아. …그 사람들이 이걸 다 해결해 줄 순 없겠지."
"…."
"그래도 언론에는 나올 거 아냐! 시, 시정 권고도 받고!"
"…?"
배세진은 여전히 주먹을 쥔 채로 열심히 자신의 행동 원리를 설명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이놈의 판단은 이렇다.
"회사가 연예면 언론 보도를 막고 있으니, 사회면 기자 쪽으로 기사가 나가게 해보았다… 이 말씀인가요."
"맞아."
한마디로 노선 변경이다.
배세진에게… 이런 야심이 있었다니.
'후….'
담배… 아니, 됐다.
혀 깨물 뻔했으니 입안이나 가다듬자.
나는 빠르게 무슨 파장이 일어날지 머릿속으로 점검했다.
'익명이라면 배세진이 노리는 효과는 안 날 확률이 높지.'
모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아티스트 관련 사고를 은폐하려 든다?
인권위에서 자체적으로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정성스럽게 알아볼 확률은 굉장히 낮았다.
'여기서 소스 얻어들은 기자들한테 찌라시 도는 정도면 회사 성질만 긁고 끝날 수도 있다.'
다만 회사에서 초조해질 테니, 그게 '감히 제보를 해?' 따위의 괘씸함보다 커지면 협상하기 쉬워지는 측면은 있….
"그리고 익명이라는 게… 그룹명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야."
"…그러면?"
"제보자의 익명성만… 지켰어. 어, 어머니 친구분 명의를 써서…."
"…."
배세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면, 우리라고 생각 못 할 테니까. 경쟁업체나… 퇴사자나,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알고 보니, 이놈이 지금까지 소속사에서 일어난 온갖 고용과 노동 관련 문제는 다 정리해서 보낸 것 같다.
야근수당 미지급부터 시작해서 산 업스파이와 관련 불법 개인정보 수색까지 말이다.
'판을 어디까지 키운 거냐.'
사실 이것도 백일몽인 건 아닐지 슬슬 의심이 든다.
"…."
"나, 나도 이게 자랑스럽다는 건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나는 쓴웃음을 참았다.
"아뇨. 잘하신 것 같은데요."
"…!"
배세진이 눈이 둥그레졌다.
"지, 진짜?"
"예."
일단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넘어갔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모기업인 T1이 테스타를 찍어서 족칠 상황은 넘어갔군.'
패로 못 쓰는 게 아쉽긴 하지만….
교통사고 나 혼자 당한 것도 아니고, 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이득 봐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다.
'저놈들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을 텐데.'
자기 나름대로 행동할 수도 있지.
'스케일이 좀… 다른 방향으로 많이 커질 것 같긴 하다만.'
이건 오히려 좋다. 직장 내 갑질 등 사회적 문제로 튀는 순간 아랫사람들이 아니라 윗분들과 본사가 주도해 처리할 이슈로 변한다.
그리고 우리 입장에선 윗대가리가 무슨 고초를 겪든 실무진만 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룹 운신에 문제만 없다면 상관없단 거지.
'잘하면 결재봇 상태를 또 보겠군.'
상상만 해도 편안하다.
나는 한결 편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결과가 기대되네요."
"…그래!"
배세진은 안색이 밝아졌다. 멤버들도 고개나 끄덕이지 누구 하나 동요하는 놈이 없었다.
'사고 이후로 소속사랑 거하게 싸우긴 했나 보군.'
나는 내심 혀를 찬 뒤, 아까 답변 받지 못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졌다.
"그래서, 오늘이 며칠인가요."
"…."
그러자 놈들이 시선을 주고받는다.
'뭐냐.'
지금까지 조용하던 류청우가 천천 히 입을 열었다.
"…문대야."
"예."
"오늘은 7월 6일이야."
"…!"
달이 다르잖아.
'잠깐,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게 데 뷔기념일, 6월 18일인데….'
그럼 내가 18일이나 혼수상태였단 뜻이다.
"…."
아니… 6월이 그냥 살살 녹았네.
내가 잠시 망연해하는 사이, 류청 우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쉬고 있어. 일이나 활동은 나중에 생각하고."
"…."
"앞으로는… 네 몸부터 생각하고."
아.
나는 류청우를 올려다보았다.
놈은 답지 않게 어두운 안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 머리에 철근 꽂힐 뻔한 걸 내가 대신 가슴에 처맞았지.'
솔직히 누구 뒤지는 것보단 교환비 괜찮지 않나?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옆자리 놈이 대가리 뚫리는데 그냥 보고 있기도 그렇지 않은가.
나는 상당히 떨떠름히 놈을 쳐다보았으나, 대충 심정은 이해했다.
'자기 대신 혼수상태 빠졌다고 생각했나.'
뭐, 시스템의 농간일 수도 있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만… 빚으로 생각한다면 나중에 의견 동조나 잘해줬으면 좋겠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일으켰다.
"잘 챙기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몸은 멀쩡한 것 같은데… 그냥 피로가 쌓여서 못 깬 거 아닐까요."
"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박문대, 앉아!"
"아무래도 재검사를 받아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거참… 유난들이군.
그리고 잠시 뒤.
의료진들이 놈들의 열렬한 요청 때문에 병실에 계획보다 빠르게 재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환자가 보름 이상의 혼수상태에서 회복하자마자 신나게 과일을 까먹었단 소식에 기겁했다.
"멜론을요? 환자분, 지금 배 안쪽 감각 어떤지 말씀해 보세요!"
"…!"
"전 멀쩡합니다만."
"선생님! 여기 환자분이…."
그리고 온갖 호출이 이어졌다.
'…그렇지.'
18일이나 누워 있던 놈이 당도 최고 멜론을 까먹었으니 그럴 만도 하군.
멜론을 권했던 큰세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긴 했으나, 다행히 별 이상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애초에 평범한 상태였다면 삼키자마자 통증에 시달렸지 않을까.
"내가 먹을걸요!"
차유진이 멜론을 그냥 다 자기 입에 넣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 건 넘어가고.
'이거 아무래도 넥타르 약발 같은데.'
'생명력 완전 회복'이란 특성 덕에 내 소화기관도 급속 회복한 게 아닐까 싶다.
'말 나온 김에 확인해 볼까.'
한바탕 난리 통이 끝난 뒤, 나는 상태창의 특성 항목을 불러왔다.
[특성 : 잠재력 무한, 탐닉의 시간 (S), 넥타르(S)-활성화, 잡아채는 귀(A)]
역시 활성화 표기가 되어 있군.
아무래도 현재 급속 회복 중이고, 가슴에 난 상처까지 다 치료되면 사라질 모양이다.
'…그럼 이제 바쿠스빨은 끝인가.'
입맛 다시게 된다. 아깝군.
물론 다음 뽑기에서 다시 바쿠스를 뽑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워낙 활동에 요긴히 쓰니까.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상태창을 껐다.
'그나저나… 18일이라.'
낭비가 심하긴 했지만, 투어 일정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한 달이면 충분히 회복되겠지.'
나도 그렇고, 저기 아직 보호대 찬 놈들도 3주 내로 회복한다고 했던 것 같다.
한 달 더 준비해서 출발하면… 대충 일본 몇 회 빼고는 다 챙기겠군.
'됐네.'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료진이 전부 나간 뒤, 멤 버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정신을 차렸다.
"문대야… 진짜, 미안하다."
"아니, 맛있었는데."
"앞으로는 꼭 허락을 받자…."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내가 좀 더 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이놈들 머릿속에 떠오른 모양이다.
"내일 또 방문하겠습니다!"
"무, 문제 있으면, 언제든 부르면… 우, 우리 집 근처야…!"
"저 퇴원 안 해요."
"어쭈 차유진 까분다, 나가자!"
"힝."
"…쉬어, 문대야. 정말…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류청우는 희미하게 웃는 것 같더니, 이내 그 기색도 사라졌다.
'영 기운 없어 뵈는데.'
내 예상보다도 고민이 컸나보군.
한번 잡아두고 캐보려던 순간.
"…박문대."
"…? 예."
배세진이 나가기 직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인권위 조사 들어오면… 그걸 바탕으로 T1 Stars에 소송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해."
"…예?"
"그래서 성공하면, 새 소속사로 가는 거야…!"
"…?!"
무슨 미친 소리야.
뒤통수를 후려맞은 것 같다.
'설마 사회면으로 띄운 뒤에… 공권력을 이용해서 재판까지 들고 가 보겠다는 발상이었나!'
그게 통할지 안 통할지를 떠나서, 왜 방송사와 스튜디오를 가진 대기업에 시비를 걸려고 하냐.
너희 거대 플랫폼 하나를 걷어찰 생각이냐고.
나는 도저히 이걸 동의했다고 믿을 수 없는 놈부터 찍어서 쳐다보았다.
큰세진이 눈을 피했다.
'야.'
"음∼ T1 도 이렇게 되면 소속사를 개편하려고 할 텐데, 그때 소송가능성까지 나오면 좀 더 딜이 좋아질 것 같아서∼"
"…."
"꼭 새 소속사 아니라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래서 이 새끼까지 넘어갔군….
"지금 당장 할 일은 아니고 차차 의논해 볼 거니까… 일단 문대는 좀 더 쉬게 두자."
"그럼요∼"
"…가라."
나 혼자 좀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복잡한 머리로 손을 저었고, 멤버들은 웃거나 손을 마주 흔들며 병실을 나갔다.
달칵.
나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병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소송이라.
내가 웬만한 건 다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건 이 업계에서 오래 해 먹기 좋은 판단은 아니다.
지금까지 소송 걸었다가 커리어가 괜찮게 풀린 케이스를 거의 못 봤거든.
승소든 아니든, 업계에 찍히는 것이다.
'대중성 챙기려면 최대한 좋게 좋게 푸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긴 한데.'
무엇보다 최선의 경우라도 승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그 때까지 활동이 거의 전면 중단….
'잠깐.'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쭉 올라온다.
'…그럼 투어는?'
못 한다.
"…."
야, 이 새끼들아…!
투어 못 하면 난 뒈질 수도 있다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더니, 졸지에 돌연사 위협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박문대가 혼란에 빠진 사이, 인터넷에서는 그가 의식을 차렸다는 속보가 속속들이 뜨는 중이었다.
[(속보) 테스타 박문대, 의식 되찾아]
[박문대 의식 돌아와… "팬들의 간절함이 닿아"]
[교통사고 테스타, 18일 만의 혼수 상태 회복]
-방금 기사들 뭐야
-진짜야?
-이거 정말이에요? (링크)
-제발 아 제발
팬들은 혹시 또 다른 오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진정하려 했으나, 다행히 첫 속보 이후 30분 만에 소속사에서 인정 기사가 떴다.
[T1 스타즈 "테스타 박문대 오후 2시경 의식 회복 맞다"]
그리고 나서야 온갖 SNS와 커뮤니티, 댓글 창에서 축하와 안도, 눈물의 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꿈일까 봐 무섭다
-어떡해 진짜 눈물이 안 멈춤
-문대야 18일을 싸워서 돌아와 줘서 고마워 네가 뭘 하든 응원할게 정말로
-이 사진을 올릴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2주년 기념일 박문대 사진)
-사랑해 문대야! 24살의 너를 30살의 너를 40살의 너를 계속 응원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ㅠㅠ
안타까운 사고로 죽을 뻔한 어린 연예인이 살아 돌아온 것이기에, 당장은 대중들의 반응도 따듯하기 그지 없었다.
-이대로 떠나긴 참 아까운 청년이라 새 기회를 받았나 봅니다 건강히 회복하여 멋진 노래로 한국을 빛내길∼∼
-진짜 잘 됐다 팬도 아닌데 너무 안타까웠음ㅠㅠㅠ
-ㅊㅋㅊㅋ 잘 살길
-18일 만에 의식 회복한 거임?ㄷㄷㄷ 대박
이런 극적인 순간에는 악플도 도저히 기를 못 폈다.
-이것도 곰머님 설계 아니냐 사실 첫날 정신 차렸는데 언플 했을 확률은?ㅋㅋㅋ
└까질에 정신이 나갔지
└이런 걸 두고 선 넘는다고 하는 거임
-그래도 한동안은 활동 못 하겠지 그걸로 만족해야겠다
└놀라운 인성
└18일 혼수상태였던 23살짜리도 까는 K-악플러
-ㅋㅋ난 얘 별로던데 인터넷만 난리네 내 주변은 언급도 없음
└죄송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있긴 하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분위기가 잦아든 다음에는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은 다들 행복하게 가수와 팬을 축하했다.
그래서 며칠 후, 배세진이 인권위에 제출한 내용은 감동과 훈훈함 속에서 갑자기 터졌다.
[엔터테인먼트사의 그늘… 테스타 교통사고의 진실 밝혀지나]
['사내 인권침해 사례 잇단 접수' T1 스타즈 인권위 진정]
-? 이거 뭐임
-와우
-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 티원 미쳤나
그래서 사태는 상당히 재밌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더없이 행복한 소식 뒤에 터진 폭로였기에, 얼결에 연달아 좋은 소식으로 취급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X소 다 털리네ㅋㅋㅋㅋ
-정의 구현 가자!
결국 여론은 피로해지기 쉬운 울분 대신, 완벽한 해피엔딩에 대한 열망 쪽으로 감정 노선을 잡았다.
일명 사이다 메타.
배세진의 1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