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몇 시간 전. 테스타의 비대면 기부 콘서트를 위해 세팅된 무대 그 뒤 편.
"물 필요하세요?"
"괜찮습니다."
청려는 백스테이지가 익숙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당시의 조촐한 지방 축제부터 온전히 VTIC의 스텝으로만 꽉 채워진 스타디움까지.
그는 모든 단계의 업계를 반복적으로 경험했고, 익숙함은 겹겹이 쌓여 그의 내면에 깊은 지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VTIC의 멤버들도 리더의 담담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거나 서툰 대응 한번 보이지 않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그 모습에.
그래서 그들도 데뷔 후 전염되듯 빠르게 태연해졌다.
"와 이거 은근히 떨리는 것 같다."
"그러게요. 이게 게스트의 부담감인가 봐요."
"맞아. 원래 남의 잔칫집에서 더 잘해야 하는 거야!"
VTIC은 자신들의 위튜브 업로드용 카메라 앞에서 능청스럽게 떠들어대며 평소처럼 청려가 적당한 시점에 치고 들어와 주기를 기다렸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뜻깊은 기획이니, 테스타 후배님 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맞아요∼ 좋은 자리에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테스타 후배님!"
멤버들은 웃으며 카메라에 손을 흔들었고, 청려는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아니, 손해지.'
저런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진심으로 하다니.
사고 발생률과 무대 질만 고려해서 멤버를 선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기민하게 눈치챈 놈이 없었다.
이대로면 남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십상이란 것을.
'잘하면 호구, 못하면 퇴물.'
새파란 후배 콘서트에 전원 게스트, 게다가 후배들의 곡을 해주는 동종업계 1군 선배라니.
물론 멤버들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함정이 워낙 보기 좋아서 어쩔 수 없나.'
청려는 이 출연이 이루어진 계기, 박문대의 병문안 당시의 대화를 떠올렸다.
기부 콘서트에 대한 박문대의 첫 제안을.
-공동 주최로 하는 건 어때.
-글쎄요.
이때, VTIC의 스케줄은 곧 살인적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완전체 컴백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려의 솔로 앨범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후, VTIC의 운신 범위는 크게 자유로워졌다.
VTIC 하락세가 가시화되는 것을 염려해 국내 앨범 발매를 미적거리던 이사진의 태도가 사라졌다는 뜻 이다.
덕분에 청려가 따로 손질할 것도 없이 앨범 준비는 탄력을 받았다.
그리고 보통 VTIC 정도의 위치였던 모든 아이돌이 그렇듯이, 그들도 명목을 위한 한 주간의 국내 음악방송 출연 후 해외를 돌 예정이었다.
그런데 스타디움 투어 리허설과 새 콘서트 준비의 병행이라니.
'불가능해.'
잠잘 시간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박문대의 병실에 방문한 것만으로도 청려의 수면시간이 줄어들었다.
준비기간 중에도 이런데, 컴백 이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예측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결정된 미 래였다.
청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활동기라 시간이 안 될 텐데.
박문대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럼 게스트로는?
-음.
-어차피 잘될 싹이 보이면 플랫폼에서도 한 발 걸치고 싶을 테고.
박문대의 설명은 명료했다.
이 기부 콘서트의 포맷을 LeTi의 플랫폼과 독점 계약하겠다.
그러면 LeTi가 우호와 홍보의 제스처로, 마침 박문대와 친목이 있는 청려를 출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 무대나 하나 해주고 숟가락이나 얹으면 된다는 거지.
청려는 그 순간 알았다.
'이미 알았구나?'
VTIC의 현 스케줄상 공동 기획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박문대는 이 구도로 논의를 끌고 간 것이다.
청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게스트로 쓴다… 라.'
그리고 아무 무대나 하나 해달라는 말.
언뜻 듣기엔 선배의 바쁜 스케줄을 배려해 준 것 같으나, 사실 차 떼고 포 떼고 와도 된다는 뜻이다.
테스타는 따로 훈련한 콘서트 특별 무대를 하는 사이, 청려 혼자 일반 공연을 하는 것.
체급의 문제였다.
여차하면 청려의 위상에 타격이 생긴다.
박문대가 VTIC의 투어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위험한 행위였다.
-어때.
그러나 일방적으로 거절하는 것도 위험한 상황이다.
그는 잊지 않았다.
'녹음본.'
납치 당시 대화 녹음본이 박문대의 클라우드에 있을 것이다.
이미 메인보컬이 한차례 사회면을 장식했었다. 이게 터지는 순간 VTIC의 커리어는 끝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청려는 박문대가 녹음본을 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진흙탕 싸움이 될 텐데.'
박문대도 활동에 큰 지장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미션이 남은 입장에 선 절대 쓸 수 없는 패다.
하지만… 박문대는 당장 생존이 걸려 있으니, 여차하면 블러핑으로 녹음본을 거론하며 청려를 협박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우호 관계는 파국이었다.
청려는 그것도 원하진 않았다.
그래서 빠른 판단 후, 빙긋 웃었다.
-좋아요. 게스트 출연.
-그럼….
-아, VTIC 전원 다 나가려고 하는데.
-…!
-괜찮죠? 관객도 더 많아질 것 같고.
미친 짓이었다.
청려 혼자 출연하면 만일의 경우에도 '친목 덕에 섭외된 게스트' 이미지로 타격을 최소화한 채 끝날 수 있었다.
아마 박문대도 청려에게 돌아갈 최악의 경우를 그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려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살을 떼어줄 생각은 없었다.
-….
박문대는 잠시 말이 없었으나, 곧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승부수였다.
VTIC 이 나오는 건 청려 혼자 나오는 것보다 훨씬 큰 타격을 입을 위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득을 얻는다면 더 크다. 직접적으로 두 그룹이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청려는 VTIC의 무대질을 알았기에, 승률을 깔끔히 판단했다.
'7할 이상.'
그리고 판을 더 키웠다.
-서로 곡을 바꿔서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요.
겸사겸사, 박문대의 인원수도 확실히 채워주지 않겠는가.
"…."
회상을 마친 청려는 빙그레 웃었다.
결국 자신이 손을 얹은 판이었다.
'취지가 좋고 재밌어 보인다'는 생각에 멤버들이 넘어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멤버를 골랐으니까. 다루기 쉬운 것들로.
그러나 그들의 힘은 온전히 본업에 있었다.
청려는 박문대의 조건을 다시 떠올린다.
'40만 명이라.'
그들의 작년 온라인 콘서트의 하루 관객 수치가 얼마인지 아는가?
61만 명이었다.
오로지 이 플랫폼에서 유료로 카운트된 명수다.
그러니 VTIC의 그룹 출연이 결정된 이상, 박문대의 생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테스타의 팬덤 유출은 좀 감수해야 할 테지만.'
그것은 본인이 자초한 일 아닌가.
그가 박문대의 후회까지 책임져 줄 순 없었다.
'음, 콩이를 만나게 해줘야 할까.'
청려는 그의 개를 떠올리며, 위로의 방법이나 짧게 고민했다.
"갑시다."
"오늘도 이기는 브이틱! 아 빅토리어스∼"
데뷔 당시 이사가 정해준 촌스러운 응원 구호가 농담처럼 멤버의 툭툭 튀어나왔다.
그 많은 재시작을 거쳐도, 어째 저것만은 변하지가 않았다. 굳이 그가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 른다.
그는 언제나 이기고 싶었기 때문에.
"VCR 종료 10초!"
청려는 눈앞에서 열리는 무대 구조물을 보며, 이상한 찌릿함이 등을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위험을 감수하며, 불확실한 결과를 향해 달려 나가는 감각.
도전심이었다.
[아.]
인이어로 들리는 짧은 시험음.
그리고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로 걸어 나온 VTIC이 여유롭게 대형을 갖춘 순간.
댓글들은 온갖 물음표와 느낌표, 감탄사로 도배되며 읽을 새도 없이 교체되었다.
이곳의 댓글뿐만 아니었다.
-야 브이틱
-진짜 브이틱 나와
-티카들 어캄ㅋㅋㅋㅋ
-미친
SNS 등의 실시간 감상을 보고 기겁해서 테스타 콘서트에 접속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리고 플랫폼에서 때맞춰 VTIC을 구독한 사람들에게 보낸 팝업 알림은 수많은 사람을 당황해 클릭하도록 만들었다.
[VTIC이 등장했습니다!]
팝업 알림 앞에는 이모티콘으로까지 제작된 VTIC의 로고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순간, VTIC은 무대를 시작했다.
위잉- 위잉- 위이이잉!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낮은 드럼이 격식 있는 박수처럼 울리기 시작한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거칠고 빠른, 강렬한 타악기와 금관악기.
그리고 깔리는 상징적인 리프 멜로 디.
-행차
-ㅅㅂ행차해?
테스타의 대표곡, 행차였다.
다만 행차가 가진 고아한 동양풍의 느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테크니컬한 전자 음과 오케스트라가 강렬한 트랩 비트 위를 질주한다.
그리고 달라붙는 정장 위, 검은 하네스와 장갑을 덧댄 차림의 VTIC이 행차의 안무를 더 빠르고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행차, 하신다. 오늘-.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도록
납신다. 행차, 하신다.
그리고 랩은 더 느리고 그루브해지며, 퍼포먼스를 능란하게 받친다.
거대한 짐승을 형상화한 듯한 안무가 들어갈 자리는 사라졌다. 대신 포메이션을 갖춘 특공대 같은, 권위적 느낌의 각 잡힌 군무로 덮인다.
짐승을 포획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어지는 경례하는 듯한 제 스처와 고조되는 베이스.
-지금, 나타나셨다 경고 또 경고
팔자로 접근하는 느릿한 짜릿한
나, 나, 나, 나
-Take off
랩은 박자가 바뀌었다. 달려가듯 쏟아져 공격성을 부추긴다. 그리고 후렴.
-마침내 찾아온 날 행차!
Oh, Oh, Oh….
원곡과 다른 순간에 갑자기 반주가 드랍되었다.
-Never get away from me Yeah
위압감이 넘치는 나른한 웨이브 안무. 그리고 다시 각 잡힌 빠른 군무
기수처럼 움직이는 깃발 든 댄서들 앞, VTIC은 무대 동선을 한계까지 끌어쓰며 미친 듯이 몰아쳤다.
그들에겐 더는 메인보컬이 없다.
그러나 보컬의 부재를 랩과 퍼포먼스로 밀어버렸다.
부재고 나발이고, 보는 사람들이 숨을 참고 압도당하도록.
-와
댓글 창이 어느새 느려졌다. 극한의 집중 상태가 박수에 해당하는 행위를 잊게 만든다.
붉은 레이저와 푸른 레이저, 그리고 더 낮고 웅장해진 리프 멜로디 속에서 VTIC이 날뛰었다.
그리고 2절 도입은 퍼포먼스와 함께 생략. 바로 행차의 브릿지가 들 어가야 할 부분으로 반주가 튀었다.
멤버들은 일시 멈춰서 뒤로 돌아 대형을 잡는다.
그런데, 약속된 멜로디 대신 익숙한 랩 후렴구가 들어온다.
-산군
Their claws are hella sharp
Readily tear you apart
넌 못 잡아 그렇겐
No, you can't.
그리고 손과 허리를 쓰는 아이코닉한 안무.
-?
-산군
-와 여기서
그들의 대표곡 중 하나. 산군 이다.
멜로디와 베이스가 맥락에 맞게 엮이며, 산군이 점점 커진다.
이 곡의 가장 상징적인 전통 취악기 레퍼런스가 추가되면서.
-Make me a Boss
옳지, 그렇지
VTIC은 '짐승'을 키워드로 두 곡을 엮고, '전통풍'의 키워드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버린 것이다.
누가 먼저 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행차 를 완전히 편곡해 아류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시도는 몹시 그럴싸했다.
-X나 멋있어
-산군! 산군! 산군!
-마 대상곡 품격 좀 봐라
대형 히트곡의 등장에 신난 대중과 VTIC의 팬들이, 산군이 행차를 잡아먹고 후반부를 장악하는 것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무대는 재밌는 순간, 모든 설득력을 가졌다.
-산군
Their claws are hella sharp
Let me prove it
폭발적인 마지막 댄스 브레이크.
그리고 거대한 깃발 사이에서 4인 대형을 갖추는 VTIC으로, 무대는 끝났다.
그러나 댓글은 끝없이 감상을 토했다.
-찢었다
-미쳤다 역시 브이틱
-애들 여기 왜 나와요?ㅠㅠ
-소름
-와 진짜 쩔어
VTIC은 숨을 몰아쉰 뒤, 들어가는 댄서들에게 손을 흔들고 카메라에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스탭이 스르륵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아서 몇 마디 토크까지 진행했다.
[좋은 선택지 골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재밌었어요∼]
1번을 골라도 어쨌든 나올 예정이었지만, 능청스럽게 그들은 박수를 보내고, 콘서트 기획 의도를 칭찬했다.
물론 농담도 잊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도 콘서트 중인데∼]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보러와 주세요! 하하!]
사람들은 댓글에서 울부짖었다.
-얘들아 표가 없어…
-이런 기만 너무한데여
-테스타랑 왜 친해진지 알겠음
그리고 표가 있는 몇몇 팬들도 물 밑에서 울부짖었다.
-ㅠㅠㅠ미친놈들아 이런 거 할 거면 예고를 해줘ㅅㅂ
-잘하긴 오지게 잘해 진짜 탈덕 말려도 탈덕 불가… 천년만년 1군 해먹어라 머글들아ㅠㅠ
-리셀 티켓 사고 옴 내가 이런 걸 사다니 X발ㅋㅋㅋ
-레티 이 배때지부른 X새끼들 지들 사업 확장에 애들 이용해먹는 건 언제까지 할 생각이야 애들이 잘하니까 매번 이러네
-ㅋㅋㅋㅋㅋ아 근데 좀 속시원하긴 하다 셤별빠들이 갈고 있을 듯ㅋㅋㅋ 물론 실시간 놓친 티카들도 개빡치겠지만 난 실시간 봐서^^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갔다.
'후배 이기려고 이 악무네ㅋ' 같은 소리 외에는 VTIC을 깎아내리는 글을 당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티도 정신 승리하지 않고는 이 무대를 끌어 내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박문대는 백스테이지에서 이 꼴을 다 보고 있었다.
실제 공연이었으면 비명이 난무했을 것이다.
나는 생수병을 입에 꽂아 넣었다.
무서운 새끼.
'진짜 호랑이 부른 꼴이 됐는데.'
물론, 가죽 잘 벗겨서 말려 쓸 생각이다만.
'이대로 흐름이 넘어가게는 못 하지.'
테스타의 다음 무대도 코앞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43화]
모니터링 장비에서는 무대 위 VTIC이 어색해지는 일 없이 유창하게 토크를 이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오래 활동할수록 동료 아이돌분들 곡을 커버할 일이 점점 줄어들잖아요.]
[맞아, 맞아∼ 콘서트도 우리 곡으로 전부 채울 수 있게 되거든요!]
[그게 참 멋진 일이죠. 그래도 오랜만에 커버 무대 준비하면서 참 재밌었습니다.]
안 봐도 댓글에 '그러게 계급장 떼고 붙어도 X바를 수 있는데 억울했을 듯ㅋㅋ' 같은 소리가 우수수 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팔짱을 끼려다가 참았다. 스텝이 내 마이크 위치를 조정해 주는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저 두 놈, 전문 예능에선 영 힘을 못 쓰더니 자기들끼리는 제법 그럴싸하게 말할 줄 아는군.
"토, 토크… 잘하시는구나."
"8년 넘게 했을 텐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 그렇죠?"
선아현의 감탄에 배세진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청려가 여기 온 게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뭐, 예상했던 일이다. 처음 말 꺼냈을 때도 경악하더라고.
-그 미친놈이 이런 행사는 왜…!
-플랫폼이 그 소속사 거라서요. 아무래도 거절하긴 힘들 것 같은데.
-윽…!
-그래서… 그냥 그 그룹을 다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래. 차라리 그게 낫긴 한데.
그 후 '애초에 꼭 이 콘서트를 그 플랫폼에서 해야겠냐'로 치환되는 긴 논의가 이어졌으나, 배세진은 결국 다수결에서 패배했다.
참고로, 청려가 휴가 당시 나와 개 싸움을 벌인 새끼라는 것을 아는 다른 놈은… 음, 마침 예스만 외치는 리액션 로봇 상태였었지.
-…그래? 알았어∼ 열심히 해야겠네.
당시 큰세진의 리액션은 이걸로 끝이었다.
문제는 이제 와서 상당히 불손한 제스처를 하는 중이라는 건데… 야, 부채질하는 척 참수하는 시늉하지 마라.
이렇게 보면 다들 긴장과 경계 중인 것 같다만, 물론 그냥 신난 놈도 있다.
가령 김래빈.
"상당히 모험적이면서도 세련된 편곡이었습니다. 다음에 저희도 선배님들의 산군 을 좀더 현대적으로 편곡해 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어떠니까!"
"…."
그거 아니다.
'그렇게까지 가면 진짜 기 싸움이 된다….'
'너희가 감히 행차를 이렇게 쓰냐? 나도 산군에 똑같이 해주겠다'로 보이겠지.
지금 기부 콘서트 명목으로 아슬아슬하게 물 위에선 훈훈한 분위기로 넘어갈 것 같은데, 거기까지 가면 정말 답이 없다.
경연 프로그램도 아니고 이게 무슨 디스전이냐며 신난 이슈 위튜버들이 붙을 거고, 그러면 진정한 개판이 벌어진다.
다행히 내가 입 열기 전에 류청우가 먼저 김래빈의 말을 부드럽게 컷했다.
"기회 있으면 해보자."
"예!"
그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곤 짐작도 못 하는 얼굴이군.
"…."
그래도 뭐… 하나라도 행복하다니 됐나.
아니, 한 놈 더 있다.
"우리도 깃발 써요! 깃발 멋있어요!"
차유진은 노래라도 하나 새로 만들 기세다. 배세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놈에게 묻는다.
"…긴장 안 돼?"
"왜 해요?"
"그… 앞 사람들이 잘했으니까."
"괜찮아요. 나 잘해요! 음, 우리 잘 해요!"
"…!"
배세진은 갑자기 얼굴에 비장감이 돌고 있다.
"그, 그렇지!"
"맞아요!"
그래, 기합이나 넣어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었다.
"열심히 하고 옵시다."
"으, 으응!"
"그래요, 이 콘서트를 강력히 주장하셨던 문대 씨∼"
"퇴원한 지 하루 만에 안무가를 섭외한 문대 씨."
"…."
류청우까지?
무대 제대로 해야겠군. 망하는 순간 이놈들이 날 거꾸로 매달고 아가리에 홍삼을 쏟을 것 같다.
물론 망할 생각은 없다.
'준비한 대로만 하자.'
나는 웃으며 놈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다시 테스타의 차례다.
"우와!"
컴퓨터 앞에 앉은 대학원생은 직전에 본 VTIC의 무대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정말 멋진 무대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래도 원곡 무대가 더 좋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테스타 원곡이니까!'
그녀는 이런 명곡을 타이틀로 멋지게 소화해 냈던 테스타에 자부심을 한 번 더 느끼며, VTIC에게도 박수를 보냈다.
'우리나라 아이돌들 진짜 멋있다∼'
여기까지가 업계의 심연을 맛보지 않은 사람의 평이었다.
신나게 둘 모두를 칭찬하는 일반인들과 달리, 골수팬들은 머리를 쥐어 잡고 이걸 어쩌면 좋을지 떠드는 중이었다.
-X발 느그틱 새끼들은 숟가락을 주체를 못 하나 후배 콘서트까지 와서 주책이네
-그냥 애들끼리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진짜 갑질 역겹다
-기부 콘서트에 게스트로 오면서 저게 다 뭐야 댄서 다 끌고 오고... 와 피 확식
-인터넷 끊어야겠다
VTIC 쪽도 크게 다를 건 없었으나, 초반의 당혹과 분노가 가라앉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나왔다.
무대가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짓 할 시간에 예능이나 보내주는 편이 나았어 그래도 빅토리깅이들 이겼으니 됐다ㅋ
└ㅋㅋㅋㅋㅋ아 영업동영상으로 열심히 써야지**
└산군 역주행 한 번 더 가자 하는 김에 행차도 해주자 VTIC 버전 내달라고 요청도 넣고ㅎㅎ
-애들 매번 자기들만 모르는 의문의 1승 하는 거 너무 재밌어 그래 이 맛에 티카 하지
-초동 기간에 이런 거 할 시간 있으면 팬싸나 잡아ㅠㅠ 아 ㅅㅂ개싸움 나겠네
SNS와 커뮤니티마다 깜짝 등장한 VTIC의 무대가 올라오던 그 시각.
[VTIC 들어가 보겠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VTIC은 짧은 토크를 마무리하고 친근히 인사한 뒤 들어갔다.
새로운 문구가 떠오른 전광판을 콕 콕 찌르면서.
[다음 무대는]
1. 테스타가 커버하는 VTIC이다
2. 테스타가 커버하는 VTIC이다...?
직전과 비슷한 보기였다.
다만 원래 'VTIC이 커버하는 테스타다'가 적혀 있던 보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오묘한 부호가 붙은 문장이 채우고 있었다.
-?
-2번 머임
-물음표 왜 붙었엌ㅋㅋ
당연하지만,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느낌에 댓글이 다시 기세를 탔다.
VTIC 때문에 접속한 그들의 팬들도 다시 거론된 이름에 잠시 나가는 것을 보류했다.
-야 이건 또 2번임
-왜 물음표 붙은 건지 궁금해
-왠지 웃긴 거 나올 것 같다고 빠리 #2 쳐라
-ㅋㅋㅋㅋㅋㅋㅋ아 꿀잼
예측 불가의 보기에 즐거워하는 수많은 관객의 말과 함께, 순식간에 보기에 투표가 붙었다.
2. 테스타가 커버하는 VTIC이다...? (179557)
결과는 2번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거 괜찮을까?'
'뭐든 VTIC 이야기 계속 나올 것 같아서 별론데.'
테스타의 팬들은 보기 자체에 불안해하면서도, 신난 관객들에게 괜한 소리를 할 순 없으니 조용히 테스타의 다음 무대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화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대로 스테이지가 바뀌는 것이, 지금까지의 보편적인 무대 시작이었으나….
이번엔 그 대신, 어둠 속에서 소리부터 들렸다.
- 산군
Their claws are hella sharp
Readily tear you apart
"…!"
직전에 VTIC이 공연했던… 산군의 노랫말이다.
-테스타도 산군해?
-미친 설마
-헐
당황한 댓글들 너머, 화면의 무대에는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왔다.
팟.
비추는 것은… 어느새 어두운 무대 한 편에 놓인 탁자였다. 카메라가 슬쩍 그것을 클로즈업했다.
탁자 위에는 안테나가 달린 빨간 레트로풍 라디오가 올라가 있었다.
정황상, 마치 노랫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연출이었다.
그러나 불쑥, 다부진 손이 탁자 위로 올라오더니 라디오의 버튼을 탁 눌렀다.
-No, you can't….
지직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노래가 꺼졌다.
그리고 탁자 위로 손의 주인의 머리가 쓱 들어왔다.
장난스러운 얼굴의 차유진이었다.
[hum, hum, hum∼]
차유진은 신난 표정으로 열심히 산군의 멜로디를 따라 허밍하다가, 어깨를 리듬에 맞춰 흔들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팬의 흥겨움이었다.
하지만 관객마저 긴장이 풀릴 순간, 갑자기 허밍을 멈춘 차유진은 예고도 없이 탁자를 잡고 그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BBA-BAM!
경쾌한 브라스 소리가 터졌다.
그 브라스 음에 맞춰, 차유진 주변 에서 무대조명이 터질 듯 밝아지며 환하게 주변을 반짝였다.
그리고 관객의 시야에 펼쳐진 무대 위는… 금색, 보라색, 붉은색 풍선과 LED 조명으로 가득한, 10대의 파티 장이었다.
소파와 바석, 테이블마다 테스타의 멤버들이 음료를 들거나 앉아서 멈춰 있다.
테이프를 멈춘 듯 움직임 없는 짧은 정적, 그리고….
BBABAM, BAM, BBA-BAAAM!
브라스에 화려한 기교가 가득한 화음이 들어간다.
그리고 차유진의 주변으로, 마치 스며들 듯이 청바지의 류청우와 이세진이 달려와서 대형을 갖춘다.
그들이 스티커와 배너로 어지러운 기둥을 잡고 돌며 안무를 시작하는 순간, 빠른 비트의 일렉트로 스윙 반주가 터져 나왔다!
[Hey partner
내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해 My Owner
우리의 교감이 갈 곳이]
차유진이 웃으며 쾌활히 부르는 이 가사.
모든 관객이 아는 곡이었다.
-나싸
-나이트사인!
-? 이걸?
그렇다.
테스타가 선곡한 것은 VTIC의 불멸의 히트곡으로 남을 Night Sign이었다.
초동 180만 장을 팔아치운 괴물 음반의 타이틀.
그리고 테스타가 데뷔하자마자 동시 발매로 K.O 판정을 당했던 곡이기도 했다.
이 곡은 섹시한 가사와 나른한 음률, 그와 대비되는 강렬한 Inst와 퍼포먼스로 대단히 어려운 무대 강도를 자랑했다.
다만 테스타는 '그렇게' 부르진 않았다.
-와 눈치 못챔
-대박ㅋㅋㅋㅋ
-이렇게 신난 곡이었냐
테스타는 이걸 경쾌한 일렉 기타와 드럼, 디스코풍 전자음이 가득한 반주로 톤을 한껏 끌어올려 버렸기 때문이다.
가사는 마치 치기 어린 플러팅처럼 들렸다.
[서로 잡힌 두 손이
섞이고 비틀릴 때
또 기억하는 거야
Night after night]
소파에서 바로, 바에서 테이블로.
테스타는 대형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다음 파트의 멤버에게 센터를 넘겨줬다.
실물 관객이 없는 무대에는 정면이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 퍼포먼스가 자유롭게 중심을 바꿨다.
소파에 누워 있던 박문대를 찍을 때는 천장에서 카메라가 내려오고, 바석에 앉은 선아현에겐 바텐더의 시점처럼 카메라가 들어왔다.
그리고 멤버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파나 바 위에 서서 동작 큰 안무에 센터로 합류했다.
[이 밤의 끝까지
내 눈을 기억해
Like a night sign
drag you into a trap]
오색찬란한 야광 미러볼이 반짝이고 꽃가루가 터졌다.
멤버들은 딱딱 끊어지는 리듬으로 손과 발을 크게 쓰는 디스코 동작을 응용해 에너지 넘치는 안무를 카메라에 꽉 들어차게 선보였다.
완연한 80년대 초 레트로 하이틴의 분위기였다.
-아 개신나ㅋㅋㅋ
-귀여워ㅠㅠ
-앉은 자리에서 둠칫거리는 중
후배 호스트의 입장에서, 테스타는 다짜고짜 싸움 받아치듯 정면 대결을 고르지 않았다.
대신, 업계에서 연차가 찬 VTIC이 더는 테스타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없는 방향을 고른 것이다.
바로 어린 시절의 열기와 풋풋함이 었다.
[Whoo∼
Whoo, whoo, whoo
Like a night sign]
멤버들은 볼이 빨개지도록 턴을 돌고, 뛰어다니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과격하지 않게, 깔끔하게, 리스펙트의 느낌으로 곡을 끌었다.
게다가 박문대가 소화하는 메인보컬 파트는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젠 VTIC도 저 파트를 저렇게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
-와 고음;
-진짜 노래는 일품임
-하필 메인보컬이 그래서ㅉㅉ
그것만으로도 VTIC의 무대로 부푼 관객의 마음이 살짝 꺼졌다. 압도된 머리가 식었기 때문이다.
테스타는 그 넘치는 에너지 그대로, 처지는 일 없이 깔끔하고 신나게 무대를 끌고 갔다.
그리고, 2번과 1번의 차이점은 마지막에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나는 파티로 마무리되는 듯하던 그 무대 위에서, 색색의 옷을 입은 멤버들이 마무리 대형을 갖추어 선 순간.
갑자기 조명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끼이이이익.
그리고 멤버들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임을 멈췄다.
검고 하얀 무대 위.
내레이션이 울렸다.
[Welcome, welcome
이건 너를 부르는 소리]
본인들의 곡, 악몽 컨셉인 부름 의 후렴구였다.
음산한 목소리.
파티장 뒤, 거대한 배너가 갑자기 풀려 떨어지더니, 그 뒤로 고딕체의 거대한 문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To be continued...?]
콰과과광!
천둥소리와 함께, 멤버들은 고개를 뚝 꺾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치 미국의 고전적인 하이틴 공포 영화의 예고편처럼.
그리고… 무대는 뚝, 조명이 사라지며 끝났다.
[-.]
그 대신 의자 7개가 놓인 평화로운 진행 세트가 천연덕스럽게 도로 화면을 차지했을 때.
-?
-야 여기서 끊으시면
-알았어 투표할게ㅋㅋㅋㅠㅠㅠ
-부름 보여줘!
-기부금 쏴야 보여주는 거임? 기준 금액 불러
당연하지만, 댓글은 잠시간의 당황 뒤에 자연스럽게 투표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비교하려는 호기심을 다음 무대를 기대하는 호기심으로 소화하는 것.
테스타는 VTIC을 감히 그렇게 써 먹었고, 관객들의 관심을 계속 화면에 붙들어놓았다.
성공적인 기획이었다.
잠시 뒤. 광고가 편성된 쉬는 시간.
우리는 쉴 틈도 없이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뒤 VTIC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와!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춤 봐, 우리는 이제 그렇게 못 춘다니까. 여러분도 얼른 관절 영양제 챙겨드세요. 이 직업은 무릎이 생명이라."
"와 맞아! 제가 먹는 제품 있는데 추천해 줄까요?"
"…좋죠."
이 새끼들 되게… 친한 척하네.
나는 겨우 예능에서 한 번 봤던 놈들이 개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꼴을 보며, 청려를 힐끔 돌아보았다.
"…."
놈은 김래빈과 대화하다가, 이쪽을 보고 실실 웃었다. 그래, 어떤 놈들을 뽑아놓은 건지 알겠다.
"아, 지금 문자로 제품명 보냈는데 한번 보세요."
"음, 예."
나는 한숨을 참으며 내 스마트폰을 꺼냈다.
두 놈의 눈이 초롱해졌다.
"오∼ 혹시 우리 이름은 어떻게 저장…."
[VTIC 신오 선배님]
[VTIC 채율 선배님]
"오…."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분류했구나…."
뭘 기대했냐.
나는 대충 영양제 추천 고맙다는 말을 주억거린 다음 이 대화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형님들, 오랜만입니다∼"
"오, 세진이!"
저놈이 백업해 줘서 편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잠시 뒤, VTIC이 스케줄을 위해 떠나기 직전.
나는 아직 무대 의상을 입고 있는 청려에게 작별 인사 대신 질문을 들었다.
아니, 질문의 탈을 쓴 확신을.
"원하는 건 얻었죠?"
"…."
나는 상태창을 불러왔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44화]
나타난 반투명한 팝업에서는 팡파르가 터지고 있었다.
[성공적 만남!]
당신은 관객 '400,000명'과의 만남에 성공했습니다!
!제한시간 : 충족 (성공)
!상태이상 : '관객이 아니면 죽음을' 제거!
단 한 번의 온라인 무료 콘서트로, 관객 40만 명을 달성해야 하는 상태이상을 제거한 것이다.
그럴 만했다.
VTIC 등장 이후 투표수가 거의 30만에 육박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전광판에 카운트가 올라가는 것을 직접 봤다. 실시간 관객 리액션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건 인식될 줄 알았어.'
게다가 이 플랫폼은 가입하지 않아도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적당히 시간 때우려 본 사람들은 가입하지 않고 봤을 것이다.
VTIC의 해외 팬덤 중에도 플랫폼 미가입자가 많다고 하니, 분명 실제 관람 수치는… 어마어마했을 테지.
그중에 적극적으로 실시간 공연에 참여할 가입자만으로도 30만 명을 만든다는 건 테스타만으로는 아슬아슬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VTIC을 끌어들인다는 기초 계획은 넉넉히 성공했다.
결과에서 내 예측과 좀 다른 값이 나오긴 했지만.
: '진실' 확인 Click!
코인 선택지가 사라졌다.
'이젠 기본값으로 줄 줄 알았는데.'
지난번의 코인은 변칙적인 선택지였다는 뜻이다.
'…사고를 예측하고 준 건가.'
묘한 생각이 든다.
정확히는, 전 매니저가 헛짓거리를 저지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이 시스템이 굳이 파악해서 방비했다는 것.
'굳이 똑같은 '관객' 상태이상이 수치만 불려서 다시 뜬 것도 여기서 아귀가 맞는 것 같은데.'
원래 '진실 확인'만 나와야 할 값에 코인이라는 값이 나오니,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한 번 더 같은 상태이상을 수행한 것 같지 않은가.
나는 당시 온갖 상태이상이 튀어나왔다 지직거리며 사라지던 상태창의 이상 현상을 떠올렸다.
'분명 오류 같은 게 발생했어.'
이 말을 해석하자면… 상태창은 오류가 나더라도 어떻게든 나에게 코인을 쥐여 주기 위해 경로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동안 이 시스템에서 감성과 지성의 흔적을 발견한 적은 없다.
그런데 뽑기 확률 조작부터 시작해서 이… 호의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큰 흐름은 뭘까.
"…."
나는 빠르게 고민한 후, 결론을 냈다.
'내가 상태이상을 클리어하길 바라나.'
어떻게든 내가 생존해서 이 정신 나간 상황을 클리어하도록 이 상태창이 구현된 게 아닌가 싶단 말이다.
왜냐하면 상태창이 없던 놈은 몇 번을…
"뭐 봐요?"
"…!"
고개를 들자, 청려가 유심히 내 시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잠시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래요?"
놈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더니, 눈을 돌려 내가 잠깐 쳐다본 허공 방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상태창이 있는 자리를.
'X발.'
나는 무심코 팝업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보일 리는 없는지, 놈은 별 동요 없이 웃고 있다.
그냥 내 시선을 읽은 것이다.
'힐끗 봤는데 그걸 읽어?'
여러 번 살아본 짬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촉이 비상한 놈이긴 했다.
'…원하는 건 얻었냐고 물었지.'
나는 쓸데없는 긴장감을 버리고 정석적인 답변을 내놨다.
"잘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공연이요."
"그래요. 잘됐네요."
청려는 적당히 내포한 의미를 이해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저야말로."
자신 있다는 거군.
나는 손을 내밀어서 놈과 악수했다. 장갑이 서늘했다.
"남은 공연도 힘내서 쭉쭉하길 바라요∼"
"화이팅."
VTIC 놈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악수에 끼어들었다. 나름대로 이 기회로 친분이 깊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쪽 몇 놈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고.
예를 들면, 기어코 편곡 프로그램을 알아낸 김래빈 말이다.
"선배님들 부디 편안한 귀갓길 되시길 바랍니다…! 많은 지도편달 감사합니다!"
"아이고 우리가 뭘 알려줬다고 그래∼"
"해외 나가는 거긴 하지만 고마워요. 잘 들어갈게요!"
"넵!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는 그렇게 악수가 여러 번 오가며 훈훈하게 끝났다.
하긴, 싸운 것도 아니고 언제 다시 얼굴 볼지 모르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훈훈하게 안 끝날 것도 없다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끼리만 그렇다는 것이고, 팬덤은 또 다른 문제다.
'인터넷은… 난리겠군.'
일단 둘 다 본전치기는 확실히 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최악의 경우라도 자선행사에서 둘이 기싸움했다는 말 정도로 끝나면 좋겠는데 말이다.
"세진아, 전광판 투표 4분 남았다 는데."
"갈게!"
다음 투표 안내를 맡은 배세진이 복도를 질주한다. 눈엣가시 같던 VTIC이 사라지니 운신이 더 과격해졌군.
나는 대충 공연 반응을 예상해보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남은 무대나 마저 잘하자.'
입에서 가짜 피를 뿜으며 해야 하는 무대가 바로 다음이었다. 일단 퀄리티나 챙기자.
그리고 이 판단은 괜찮은 판단이었다는 게 곧 밝혀졌다.
테스타의 기부 콘서트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번 콘서트 총 기부금액]
[! ₩252,096,000 !]
[뜨거운 참여와 따듯한 정에 감사 드립니다.]
실시간 참여 기부금액은 1억 4천을 넘겼고, 실시간 최고 동시 접속자는 112만 명을 넘기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플랫폼은 일시적 서버 증설 투자가 헛되지 않았다며 식은땀을 닦았다.
대중 반응도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대박
-개꿀잼이었음 진짜ㅋㅋㅋ
-만원 기부했는데 진짜 기분 좋다 뭔가 좋은 공연도 보고 좋은 일도 한 느낌ㅠㅠ
-이런 거 자주 했으면 좋겠어
-테스타 진짜 애들 괜찮더라 걔네 인하트 없어? 팔로하고 싶은데ㅠ
일단 본 사람들은 다 즐거워했고, 위튜브에 무대들이 하나씩 올라올 것이란 소식에 더 좋아했다.
플랫폼에서 전체영상은 VOD로 파는 것도 큰 저항 없이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개별 무대는 무료로 감상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 정도는 해야 먹고 살지
-테스타 고생했다∼
-브이틱 진짜 멋있더라 두 그룹 우정 응원해용! *^^*
팬들은 전체영상에 들어간 깨알 같은 재밌는 점들을 다 보고 싶었기 때문에 구매율도 괜찮았다.
게다가 하나 더, SNS에 소식이 떴다.
[테스타가 관객분들이 기부해주신 만큼 함께 기부합니다! (사진)]
[모금된 금액은 다 함께 마음 가는 대로 의 이름으로 안전히 전달될 예정입니다.]
바로 관객이 손수 넣은 기부액만큼 테스타가 금액을 더 추가한 것이다.
사진 속 테스타는 막 공연을 끝냈는지 땀에 젖은 얼굴들로, 황급히 마크로 휘갈겨 적은 듯한 금액판을 들고 웃고 있었다.
'왜 관객 돈으로 너희가 공제받냐' 등의 말을 무마할, 나무랄 곳 없는 깔끔한 마무리였다.
아니, 사실 추가 기부는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일 만큼 약간 과하게 '착한' 행위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결정의 이유가 있었다.
아이돌에 관심이 깊은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VTIC과 테스타를 두고 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대에 대한 칭찬이었다.
VTIC이 예고도 없이 깜짝 등장하여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덕에, 순간 인기글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며 인터넷을 장악했다.
[9년 차 아이돌 커버 수준]
[1군 위엄 제대로 보여준 아이돌]
[VTIC - 행차]
수많은 댓글이 달리며, '테스타 원곡보다도 좋다', 혹은 '그래도 테스타가 낫다'는 직접 비교의 뉘앙스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이어서 테스타가 나오며 분위기가 살짝 달라졌다.
-와 테스타 좋다
-이런 느낌 좋아ㅋㅋㅋ
-둘 다 진짜 잘한다 기획도 좋고
-메보... 하... 이 맛이지ㅠㅠ
테스타는 VTIC의 곡을 신선하게 소화하면서도 정면 대결의 뉘앙스를 없애고 '연결된 세트리스트'의 느낌을 더 살린 것이다.
덕분에 비교로 타오르려던 분위기는 좀 잦아들었으나, 대신 서로 감정이 상한 팬들과 그걸 이용하려는 어그로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나만 쎄한가 테스타 구식 라디오에서 나오는 브이틱 노래 끄는 연출이나 이런 거 노리고 한 것 같은...
└그 노래 따라 부른 건 언급 안 하는 치졸함ㅋㅋ 누가 봐도 리스펙이었구만
└80년대 컨셉이라 애들이 입은 옷도 구식인데 무슨 소리지
└팬들 왜 이렇게 입막음질이야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데
└어 나는 니가 어그로라고 느꼈음
-솔직히 무대 스케일만 보면 브이틱이 더 컸지 근데 좀ㅋㅋㅋ 넘 이겨먹으려는 것 같아서 불편했어
└그냥 했으면 성의 없다고 불편하다고 하셨을 분
└미안해 우리 애들이 무대를 너무 잘해서 테스타 팬들 마음이 많이 상했겠다ㅠㅠ
└앞으로는 후배들 창피하지 않게 실력 보여주지 말고 자제해달라고 팬싸에서 말해볼게!
└와 개살벌ㅋㅋㅋㅋㅋㅋ
└제발 그만해 다 잘했는데 왜 이래 제발..
물밑에서는 테스타의 의도, VTIC의 의도에 관한 온갖 과한 해석과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체급 큰 두 팬덤을 싸움 붙이고 싶어하는 분위기와, 그걸 무마하려는 분위기가 팽팽히 맞섰다.
안 그래도 서로를 의식하던 두 팬덤은 무대는 좋아하면서도 상대를 극도로 짜증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아 개빡치네!"
여기도 하나, 기사 댓글에서 VTIC의 팬과 싸우다가 열받은 대학생 하나가 씩씩대고 있었다.
박문대를 자신의 2순위에 올리는 것을 인정한 김래빈의 팬이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게스트로 부른 쪽만 안 됐지..ㅠㅠ
└엥 게스트로 온 쪽이 괜히 손해 보지 않았나 댄서 다 깔고도 좀 밀리던데
└눈 없어? 누가 봐도 게스트쪽이 잘하던데;
"다 티 난다 새끼야."
김래빈의 팬은 '티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추잡스럽냐'고 이를 악물고 댓글을 달았다.
└게스트가 막 튀려고 하니까 어그로는 어쩔 수 없지ㅠ 그것까지 자연스럽게 공연 일부로 소화한 쪽이 대단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런 '실력'적 측면에 대해서 댓글을 달고 있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이걸로 분위기 좀 바뀌긴 했어.'
사실 테스타의 최근 이미지는 '안타까운 피해자'에 가까웠다. 활동하는 것도 '멋지다'보다는 '장하다'는 댓글이 달릴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아이돌로서의 테스타보다 그 사고의 이야깃거리가 너무 컸다.
그리고, 그건 VTIC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면에 나온 메보와 불쌍한 남은 멤버들, 혹은 의심스러운 하락세 그룹의 이미지는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사회면으로 얻은 이미지들이 이번 화제로 휙 날아간 것이다.
대신 두 그룹은 모두 본업으로 뜨거워졌다.
이 그룹들에 관심 있는 사람들마다 '누가 더 잘했는지'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돌적인 의미로 핫해진 것이다.
이 모든 갈등이 지극히 인기 있는 1군 아이돌들스러웠다.
'그건 좀 재밌긴 한데….'
└ㅋㅋㅋㅋ러뷰어 티 너무 낸다∼
"X새끼가!"
김래빈의 팬은 즉시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그 밑에 말을 달았다.
'아 님 티카였음? 팬 몰이 여전하네 안 부끄럽나ㅉㅉ'
그리고 느꼈다.
'이거 뭐 하나만 잘못 걸리면 제대로 한판 한다.'
지금 두 팬덤은 서로가 거슬리기 짝이 없을 것이다.
분명 어딘가에서는 상대 그룹에 대한 지저분한 루머를 캐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것이라고, 김래빈의 팬은 직감했다.
'아 골 아파지겠네!'
그녀가 혀를 차는 순간.
디리링!
[안녕하세요, 저는 문대…]
"…!?"
SNS에 알림이 떴다. 테스타의 계정이다.
"야 박문대!"
김래빈의 팬은 키보드 배틀을 내팽개치고 당장 알림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대 (이모티콘)
즐거운 콘서트였습니다. 멋진 사진이 많아서 제가 찍은 사진도 조금 공유해 봅니다.
관람해 주신 러뷰어들, 그리고 모든 관객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글 밑에 첨부된 사진들은… VTIC이다.
"야!"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러면 지는 것 같잖아! VTIC이 먼저 올릴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즉시 진정했다. 다음 글로 박문대가 테스타 자신들의 사진도 한꺼번에 풀었기 때문이다.
"김래빈 잘생겼네."
그녀는 부름 무대용 붕대를 감은 김래빈이 어설프게 윙크하는 사진을 잘 저장했다.
'음, 그래. 오히려 VTIC이 후배보다도 도량 없는 치졸한 놈들이 되겠어.'
그녀는 더없이 냉정하게 VTIC의 사진을 훑고 지나갔다.
'아, 박문대 짜증 나게 얘네 사진도 엄청 잘 찍어놨네!'
특히 청려의 독사진은 몇몇 홈마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물론 덕분에 VTIC의 팬들에게 '일부러 못 나온 사진 올린 것 같다'는 꼬투리를 주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기 셀카나 좀 더 올려주지.'
그녀는 괜히 투덜거리면서도, 각종 팬들의 손에서 보정된 사진들을 또 저장할 일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많은 팬에게서 벌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내 아이돌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해, 라는 명제가 통용되는 시대는 아니었으나, 분위기 환기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
'거봐, 좋은 행사 멋진 무대 초치지 말라고!'를 외치는 사람들의 의견에 힘과 감정이 실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밑에서도 마지못한 인정까지 나왔다.
-곰머가 뭘 알긴함
-음습댕이 내 편일 땐 든든해
-사진ㄱㅅㄱㅅ
인터넷은 떡밥을 먹느라 잠시 휴전기에 들어갔다.
게다가 테스타 공식 계정에는 공지도 떴다.
바로 이번 공연의 떡밥. '버려진 선택지'들에 대해서.
[테스타의 다른 선택이 궁금한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9월 마지막 주 수요일 밤 11시. CVN에 채널 고정!]
구체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테스타의 새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까지 겸하는 것이 분명했다!
"…일 잘하네."
소속사가 X같이 무능했던 것이지, 그놈들이 납작 엎드리고 그룹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니 이렇게 잘 돌아갈 수가 없다.
김래빈의 개인팬은 드물게 할 말을 잃고 떡밥과 박문대가 찍은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다만, 이 모든 일을 계획한 당사자는 평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모니터링에 열중하는 중은 아니었다.
"선택은 해야 하니까."
"…그렇죠."
"소송인지, 다음 활동인지."
대신, 그는 리더와 다음 행보에 관한 백분 토론에 돌입해 있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45화]
류청우와 각 잡고 이야기해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깨어나고 나서 처음인가.'
아니지. 깨어나기 전에는 그 망할 놈의 진실 확인 덕분에 적정 거리를 유지 중이었다. 좀 더 기간을 길게 잡아도 되겠군.
'…그 진실 확인, 또 하게 생겼긴 하다만.'
나는 짧게 팝업을 떠올렸다가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직 시간은 있다.
아무튼… 깨어나고 난 후에는 이놈이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기에 일부러 좀 내버려 뒀다. 경험상 이럴 때 긁으면 빡치더라고.
그래서 콘서트가 끝나기 무섭게 류청우 쪽에서 먼저 이런 자리를 마련할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무알콜이라도 줄까?"
"…음, 예."
나는 놈이 건네는 무알콜 캔맥주를 받아들었다.
딸깍. 꿀꺽.
캔 여는 소리와 얼얼한 목넘김이 시원했다.
"…잘 마시는구나."
"좀 그렇죠."
미친 듯이 마시고 싶은 건 아니지만, 간간이 술 생각이 안 난다곤 말 할 수 없겠다.
류청우는 맞춰주려는 것인지 예의상인진 모르겠지만, 본인도 무알콜 맥주를 하나 땄다.
그렇게 제법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담소가 시작되어, 본론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혹시 소송은 생각해 봤어?"
그래, 갑자기 잡은 콘서트도 끝났으니까 이 화제가 돌아올 때도 됐지. 나는 솔직히 대꾸했다.
"생각은 해봤는데… 솔직히 지금 반년 이상은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기세가 무너질 테니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야."
류청우가 조용히 맥주를 마셨다.
"지금 1년과… 10년 후의 1년의 가치가 다르겠지."
그렇다.
불확실한 전성기가 어릴 때 짧게 끝나는 직군이 가지는 고민이다.
-이 일이 최전성기 1년을 버리고 갈 가치가 있는가?
류청우는 본래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이 가치판단이 더 익숙할 것이다.
놈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진이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같더라. 뭘 많이 알아보고 있던데. 변호사도 만나고."
"…변호사요."
"그래. 문자로 상담하는 것 같아."
죽을 둥 살 둥 연습하면서 대체 그럴 시간은 언제 만들었냐.
나는 기가 막히면서도, 동시에 입맛이 좀 썼다.
그놈이야말로 콘서트가 아니라 소송 준비를 하고 싶었을 텐데, 나 살겠다고 눈이 뒤집혀서 뜬금없이 기부 콘서트나 했으니 답답했겠군.
죽었다 깨어난 놈 소원이라고 많이 참은 모양이다.
"…."
나와 류청우는 말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그리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세진 형을 부를까요."
"그래."
아무래도 소송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의견이 껴야 이야기가 진행될 테니까.
나는 배세진을 메시지 호출했다.
[형, 청우 형 방 좀 와주실래요 저희 이야기 중인데]
1이 사라지더니, 답장도 없이 와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저기서부터 들리더니, 곧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린다.
"…."
거, 굉장히 알기 쉬운 놈이다.
"들어오세요."
"어, 어어!"
나는 놈에게 문을 열어줬고, 그렇게 구도는 삼자대면으로 바뀌었다.
"소송 이야기 중이었는데요."
"…! 그, 그래."
"예. 형은 여전히 회사 소송을 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시죠."
"…그렇지."
배세진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으나, 대답은 제법 담담했다. 더 이상 얼굴 벌게져서 고함지를 일은 없….
"인권위 권고가 왔는데도 꼬리 자르기만 하고 본부장도 안 바뀌었잖아…! 이대로면 얼마 안 가서 원상 복귀될 거라니까!"
"…."
"지금 조용해지기만 기다리는 거야!"
아니다. 이미 충분히 열받았군.
뭐… 회사가 지금 몸을 바짝 낮추고 사리고는 있다만, 배세진 말도 맞긴 했다. 본부장도 안 바뀌긴 했지.
그런데 사실 안 바뀌는 편이 좋다.
"형, 그래도 그 본부장 계속 있는 편이 편할 것 같긴 한데요."
"뭐? 왜!"
나는 덤덤히 말했다.
"쫄았을 테니까."
"…?"
"아마 아무 일도 못 벌이고 우리 눈치나 보게 될 걸요. 사건이 하도 커져서 안 그럴 수가 없을 겁니다."
한마디로, 서열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소속 가수가 회사 실수로 죽을 뻔 했는데 그 가수들에게 고소 명분까지 있는 순간 끝이지.
아마 본사에 죽도록 깨졌을 텐데, 자리 보전하려면 앞으로 고생깨나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맥주 캔을 가볍게 분리수거용 으로 찌그러뜨렸다.
"그러니까, 이 회사가 좀 쓰레기같이 느껴지더라도 앞으로 우리 운신은 더없이 편할 거란 뜻이죠."
"쓰, 쓰레기까진…."
"음, 비도덕적이라고 수정하겠습니다."
"…."
배세진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말문이 막힌 것인지, 기가 막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곧 한풀 꺾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이러면 지난번 병실에서 소송 유예했던 때처럼, 배세진이 다수결에서 밀려서 포기해야 하는 구도가 반복되는 건가.
배세진은 잠깐 주저하는 것 같더니, 곧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좀 그런 생각을 했어. 이번 일로, 소송을 걸어서 이기면 좋은 선례가 남을 거라고…."
"…."
거기까지 생각했나.
"그런데, 맞아. 그런 일 생각할 시간 있으면 팀에서 내 역할이나 제대로 해야지."
배세진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송 포기할게."
"아니…."
이렇게 압박을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좋게 설득해 보거나, 소송을 하더라도 최대한 단기간에 끝날 수 있는 방향으로 잡아보려고 했지.
나는 잠시 말을 고민했다. 하지만 류청우가 먼저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세진아."
"어?"
"나는 소송 괜찮은데?"
"…!"
뭐?
배세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 진짜?"
"응."
너 이 새끼 아까는 소송 부담스럽다는 내 말에 동조하지 않았냐?
…잠깐.
나는 류청우가 맞장구친 문장을 떠올렸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야.
…'그것도'였군.
나는 침음성을 참았다. 이놈은 중립이었다.
'그러고 보니 병실에서도 그랬지.'
류청우는 여전히 평온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진이 넌 충분히 팀에서 맏형으로서 역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
이건… 좀 더해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송은 그냥 제가 확신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 마세요."
"너희…."
배세진은 순간 감동한 것 같았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다,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볼까? 혹시 마음 안 바뀌었는지!"
"예. 그러죠."
"좋아."
그리고 잠시 뒤.
"소송이요? 어…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하하."
"소, 소송을 하면 다음 앨범은 무기한 연기입니까…?"
"저 활동 할래요! 활동 좋아요!"
"…."
K.O였다.
심지어 찬성이었던 차유진도 콘서트 맛이 좋았던지 돌아섰다.
배세진은 쓸쓸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서 패배를 곱씹기 시작했다. 좀 측은하군.
그나마 중립으로 남은 선아현은 안절부절 못 했으나, 곧 한 손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저… 소, 소송을 하면, 쉬는 건가요…?"
"맞아, 아현아."
류청우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선아현이 눈치를 보더니, 작게 대답했다.
"그, 그럼 너무 길지 않으면… 저는, 좋아요."
"…!"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당장 물었다.
"선아현, 너 쉬고 싶었어?"
"으? 으응…."
선아현이 시선을 피했다. 이놈이…?
"잠깐잠깐, 아현이 그럼 쉬고 싶어서 소송하자는 거야∼?"
"으응, 콘서트도 잘 끝났고, 바, 반응도 좋다니까. 조, 좀 쉬면서… 몸도 관리하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큰세진이 얼른 말을 낚아챘다.
"에이, 그럼 쉬면 되지∼ 새 앨범 준비 전에 한 이삼 주 스케줄 빼고 어디 요양이라도 다녀오자!"
"오∼"
"요양 뭐예요?"
"맛있는 거 먹고 놀기∼"
"좋아요!"
찬성표가 쏟아진다. 배세진이 큰세진을 노려보려다 참는 게 보인다. 어차피 선아현이 소송에 찬성해도 다수결에선 못 이겼을 테니까.
문제는 나인가.
나는 짧게 고민한 뒤, 새 캔의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대답했다.
"요양 좋지."
"오!"
"지, 진짜…?"
"그래."
어차피 큰 고비는 끝났다.
진실 확인을 누를 때까지 아직 유예 기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은 좀 여유롭게 보내도 되겠지.
큰 사고긴 했으니까.
'…내가 너무 무리하게 만든 것도 있고.'
나 말고, 이놈들한테 말이다.
퇴원하자마자 기부 콘서트 기획, 그것도 이 판에서 제일 잘나가는 선배를 게스트로 끼는 계획을 밀어붙 였다.
'나야 절박했지, 이놈들은 그냥 생떼 들어준 거나 다름없어.'
그래도 설득할 때 만든 논리는 유효하게 먹히긴 했었다만.
나는 당시 대화를 짧게 회상했다.
-화제성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화제성?
-예. 사고나 회사에 난리 난 거 말고, 원래 아이돌이 소비되는 방향대로요. 그리고 갈등이 동반돼야 더 뜨거울 테니까.
-음.
그 방법에 라이벌 포지셔닝만큼 잘 먹히는 게 드물다, 이 말이었다.
그리고 이건 얼추 멤버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어준 모양이다. 그건 다행이었다. 결과가 좋았으니까.
'콘서트 끝나고 후속 조치도 잘 들어 갔고.'
기부랑 사진을 선방으로 날렸으니 한동안은 여론도 괜찮을 것이다.
VTIC도 이득을 좀 본 것 같아서 떨떠름하긴 하다만, 대중과 당사자들이 수용 가능한 선에서 챔피언과 도전자 구도는 괜찮게 잡힌 것 같다.
'어차피 테스타가 더 커지면 자연스럽게 잡힐 구도를 좀 당겨온 거지만.'
그렇게 이 콘서트로 뽑아먹을 건 다 뽑아먹었으니, 이제는 나도 양심이 있으면 좀 양보해야겠지.
소송까지는 못 하더라도 쉬고 싶다는데 방해할 생각은 그만두자.
'소송도… 보고, 배세진이 원하는 효과는 어떻게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뇌를 굴렸다. 맞은편의 류청우가 빙긋 웃었다.
"나도 좋아. 회복기를 좀 가져야지. 세진이는?"
"…그런 건 괜찮지."
"좋아, 다들 찬성이네."
분위기는 화목해졌다. 큰세진이 내 앞에 있던 맥주를 가로채 하나 뜯었다. 참자.
"아∼ 마침 얼마 안 가서 추석이니까, 그때 본가 가기 전에 모여서 푹 쉬는 걸로 할까요?"
"조, 좋아…!"
어디를 갈지 신나서 떠들려는 놈들 사이로, 이번엔 김래빈의 손이 슬쩍 올라왔다.
"어, 래빈이 왜?"
"아, 다름이 아니라… 그럼 회사에는 모든 스케줄과 다음 활동 준비를 중단한다는 뜻을 전하는 겁니까?"
그건 괜찮았다.
"어차피 우리 스케줄 한동안은 거의 없어. 팬들 보여드릴 영상만 몇 가지 찍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군요! 그럼 팬들이 보실 영상만 취소… 음."
그래, 그렇게 만드니 문장 뜻이 오묘해지긴 하는군.
다행히 그럴싸한 의견이 나왔다.
"그럼 우리 쉬는 모습 보여드릴까? 좀 편하게∼ 무인 카메라 설치해달라고 말씀드려서!"
"…그런 걸 보고 싶어 하실지 모르겠는데."
"뭐, 좀 노잼일 수도 있지만… 뭐 어때요! 힐링 여행 예능이 다 그렇지 뭐∼ 기부 콘서트도 한 방 쳐놨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휴식기용 컨텐츠로는 나쁘지 않지.
여기저기서 비슷한 찬성 의사가 나왔다.
다만 테마는 좀 바꿔야겠다. 나는 캔을 비우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행은 좀 컨셉이 겹치지 않나. 우리 전 리얼리티에서도 여행 했잖아."
"아, 그렇지."
"훌륭한 지적이십니다."
아이돌 워킹홀리데이. 호떡을 만들어 팔고 다녔던 추억에 다들 오묘한 표정이다.
나는 팔짱을 꼈다.
'그거 말고, 뭐 대표적인 힐링 예능 없나. 요양이랑 맞는 걸로.'
여행 말고, 날로 먹을 만한 게… 아, 그거.
닭발.
"먹방으로 테마 잡는 건 어때요."
"먹방?"
증명된 컨텐츠 아닌가. 나는 아주사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걸 떠올린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큰세진이 폭소했다.
"역시 닭발 티벳 문대네∼ 아, 티벳? 그렇지, 우리 거기 동물도 섞자! 뭐 다른 키워드 없나?"
"자, 자연 풍경…?"
"…그거 좋네."
그렇게 엉겁결에 온갖 힐링 키워드가 조합되어서, 급조한 예능이 긴급 편성되었다는 소리다.
시골 가서 요양하는 테스타
…그리고, 이때까지는 이 즉석에서 막 만든 예능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고 있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46화]
예능 제작은 예상보다도 술술 풀렸다.
적당히 무인 카메라만 설치하고 위튜브에 에피소드 형식으로 공개할 생각이었는데, 본사가 이야기를 들었는지 바로 연락해 왔다.
-마침 CVN에 자리가 하나 났다는데 그쪽으로 가시는 건 어떠세요?
알음알음 알아보니 웬 드라마가 출연진 문제로 2주쯤 펑크가 난 것 같았다. 그 자리에 꽂아주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제안은 아니다.
"생각보다도 저자세던데요."
"그러게~ 눈치 좀 보시네!"
다른 놈들의 판단도 비슷했다.
누가 봐도 테스타와의 원활한 관계 회복을 위해 굽히고 들어오는 전략이다.
다만 배세진은 미끼성 회유책 같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이거 먹고 입 닦으라는 것 같잖아. 가수 활동도 아니고, 예능으로…!"
그것도 진실일 수 있겠지만, 그 의견을 강력히 주장하지는 못했다.
"물론… 소송 안 하기로 했으니까, 받아도 상관없겠지만."
소송을 안 하기로 결론이 나왔으니까.
"아, 형. 그거 말인데요."
"어?"
"소송용으로 각자 모은 자료, 취합해서 좀 정리해 보려는데 괜찮을까요."
"그, 어! 상관은 없지만… 왜?"
"확인해 보고 싶은 점이 있어서요."
"…?"
배세진은 의아한 눈치였으나 순순히 자료를 넘겼다.
그리고 나는 약간 놀랐다.
'…판례를 다 찾아봤군.'
전 매니저와의 상황부터 법적 자문까지.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꼼꼼히 모은 흔적이 역력한 자료였다.
여기에 내가 녹음했던 통화 내역과 문자 내역을 더하면 정말 그럴싸한 소송자료가 될 만했다.
나는 인정했다.
'대단한데.'
배세진에게 기회만 주어졌다면 진짜 승소했을 수도 있겠다.
최소 1년이 넘게 소요되고 승소하더라도 업계 분위기상 우릴 받아줄 소속사와 주류 방송이 없어서 문제겠지만.
정말 배세진 말대로 이런 승소 케이스가 쌓인다면 분위기도 바뀌겠지.
"어, 어때."
나는 솔직한 답을 내놓았다. 이 노력과 집중력의 증거는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사실 다른 방향으로 소송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나 생각 중인데요."
"…! 그런 게 가능해?"
"저도 고민 중이라 확신은 없는데… 형이 준비하신 자료가 워낙 좋아서요. 제 생각이 정리되면 형에게 좀 상담받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당연히 괜찮지!"
배세진은 말한 다음에 약간 머쓱해하는 것 같았으나, 어쨌든 기분은 다소 나아진 것 같았다.
'…정리를 더 해봐야겠군.'
나는 일단 그것을 스마트폰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소송 관련 이야기는 넘어가고, 어쨌든 본사의 제안은 냉큼 받았다. TV 편성 좋지.
그리고 전문 예능 인력들이 급속히 붙으면서 규모가 뻥튀기되었다는 점은… 무작정 긍정적인 일인지는 약간 모를 일이다만.
당장 급조된 첫 미팅에서 나온 말이 이거다.
"저희가 섬을 하나 섭외했는데요!"
"…예?"
"에이, 전국 어딜 가나 테스타 팬분들이 있잖아요~ 약간 극성스러운 분은 따라오실 수도 있고!"
제작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그래서 아예 다른 예능에서 쓰던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길 통째로 잡았어요."
듣기로는 웬 부자의 개인 소유 섬인데, 별장을 제법 멋지게 지어뒀다고 하더라.
게다가 올해 초에 무슨 탈출 예능을 진행한 적이 있어서 방송 관련 시설도 제법 구색을 갖춘 곳이라고 한다.
덕분에 부족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딱 적당하죠? 테스타 분들끼리 자연환경에서 편하게 즐기는 그림에 어울릴 거예요."
제작비 내에서 어렵게 해결 가능했다며 뿌듯해하는 제작진을 두고, 멤버들은 약간 당황했다.
'이거 쉬는 분위기는 낼 수 있으려나.'
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각 잡고 일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단호했다.
"노세요! 편하게 노세요!"
"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힐링 예능에서 스토리, 방송 분량 이런 건 편집에서 알아서 하는 거죠!"
굉장히 자기 주도적인 제작진이었다.
"하고 싶은 거 다 말해보세요! 요트? 마사지? 요가?"
"대게 먹어요!"
"대게 좋다!"
그리고 제일 먼저 차유진이 넘어가더니, 어느새 한 놈 한 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성토하는 장이 된 것이다.
캠프파이어, 수영, 명상, 등산까지 나오더니, 결국 나한테도 질문이 돌아왔다.
"문대 씨는요?"
"저는… 글쎄요. 요리를 해볼까 하는데."
대중 컨텐츠로도 적당하고, 실제로도 못하는 편은 아니니까 볼만할 것이다.
다만 제작진 입장에서도 요리는 당연히 기본으로 넣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건 자연스럽게 하게 되니까~ 뭐 쉬시면서 특별히 하고 싶으신 건 또 있을까요?"
차유진이 끼어들었다.
"문대 형 사진 잘 찍어요! 최고예요!"
"오~ 그럼 같이 사진 찍으러 섬 돌아다니시는 것도 좋겠네요!"
활동량이 절찬리에 늘어나고 있군.
나는 최대한도의 실내 생활을 기획하던 마음을 접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일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촬영 첫날.
"…?"
"진짜 이게 끝이야?"
제작진은 우리를 무인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된 근사한 별장에 방사했다.
말 그대로, 어떤 지시도 터치도 없이.
"어… 음, 게임 같은 거 없나?"
"미, 미션이라도 주실 줄 알았는데…."
없었다.
그냥 해변과 산, 들꽃길이 절경인 섬의 큼직한 3층짜리 별장에 7명이 들어갔을 뿐이다.
"…."
"…."
거실에 슬그머니 앉아 있던 놈들은, 곧 상황을 이해했다.
"진짜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거구나."
"와, 이런 거 처음인데요?"
그리고 곧 본분대로 신나서 별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와, 여기 방 좋다!"
"2인 1실이 기본… 아, 여기는 3인이 함께 잘 수 있는 방 같습니다!"
"정말 커요!"
"…문대야 뭐 하니?"
"수압 확인이요."
별장 건물은 좋았다. 이 외딴 섬에 대체 이걸 어떻게 지어서 유지 중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가스와 수도관이 완비되어 있었다.
'옥상에 물탱크라도 있나.'
어쨌든, 방송이라 1인 1실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로 요양하기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었다는 것이다.
[테스타를 위한 웰컴 푸드 *^^*]
주방에는 심지어 꽃목걸이와 이런 카드가 올라간 간식 바구니까지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식재료도 완비 상태.
'대단하긴 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영상은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았다. 나는 큼직한 삼계탕용 오골계가 들어 있는 냉장고를 조용히 닫았다.
"저는 까만 닭 먹고 싶어요! 같이 요리해서 먹어요!"
"그래."
"Yeeeees!"
차유진이 제일 신났군.
어쨌든, 한바탕 집구경을 마치고 나니 이젠 이 별장 밖이 궁금한 놈들이 밖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설마 축사야?"
"맞는 것 같은데요."
"문대문대, 저거 봐! 그 탈출 예능! 거기서 썼던 세트장 틀인가 봐~"
"신기하네."
컨테이너를 아직 철거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주인이 놔두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송 로고가 달린 벽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뭐, 한 사흘째 즈음에 할 일 없으면 구경삼아 들어가 봐도 괜찮을 것 같다. 같은 방송사니 홍보도 되고 좋아하겠지.
'솔직히 사흘만 버텨도 신기할 것 같은데.'
여기서 세끼 밥 말고는 뭐 할 게 있냔 말이다. 하루 이틀 섬 탐방하고 나면 할 게 없어질….
"형. 그건?"
"아, 등산하기 좋을 것 같아서."
"…."
저건… 요리 담당으로 회피해야겠군.
나는 이런 산길이 제대로 닦이지 않은 곳은 위험하다는 등의 설득 논리를 떠올리며, 류청우가 챙겨온 7켤레의 등산화에서 시선을 뗐다.
"추, 축사에 병아리 있어…!"
"헐, 너무 귀여운데?"
그 후로는 대충 탐험 비슷한 분위기였다.
가장 먼저 가본 별장 바로 옆 축사는 닭과 병아리가 차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이번에 지어둔 것 같았다.
병아리 보고 눈이 뒤집혀서 귀엽다고 소리 지르는 놈들은 됐고, 대충 역할은 짐작됐다.
'계란 서리하라고 넣어둔 것 같군.'
이런 예능에 국룰 아닌가.
그리고 바닷가 좀 구경하고, 근처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좀 산책 겸 걷다 와서 간단히 식사 좀 했다.
메뉴는 제일 쉬운 김치찌개.
"밥이 미리 되어 있더라. 햄 통조림도 있고."
"…찌개 맛있다."
"음, 닭장에서 계란 좀 가져와 볼까요?"
이때쯤 되면 슬슬 감이 온다.
'진짜 시골 요양이랑 다를 게 없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카메라의 존재도 거의 잊고 있었다. 심지어 산책하러 외출할 때도 사람이 아니라 드론으로 카메라가 따라왔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그림을 뽑으려고 이러나 싶긴 한데, 역시 컨텐츠는 별것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점심 먹고 적당히 식곤증이 올쯤.
띵-동!
뜬금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오~"
"드디어 미션이야?"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명상 클래스 신청하신 분들이시죠?"
"헉!"
"네, 네…!"
미팅에서 툭툭 요청한 것들이 실제로 입안에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명상 수업부터 아로마 마사지까지.
전문가들과 장비가 때마다 별장 앞으로 도착했다.
"선베드에 엎드려 누워주세요~"
"넵!"
"으허헉."
이때 배세진이 안마받으며 죽는소리 내는 건 좀 웃겼을 것 같다.
어쨌든, 진정한 '테스타 하고 싶은 거 다 해'의 실현.
남이 호의호식하는 걸 또 방송에서 보는 게 지겹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대리만족은 될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안심은 된다.
게다가 최소한 선은 지키려는지, 집안일은 건 우리가 직접 해야 했다.
이건 그럴 만했다. 아무리 그래도 놀고 휙 나가는 그림만 나오면 보기 안 좋으니까.
7명이나 있으니 금방 끝나서 별로 거슬릴 것도 없었다. 생활력 없는 놈들도 열심히 하려고 하니 나쁘게 보이진 않겠지.
"저 요리 잘해요!"
"아니, 넌 요리는 못하고 짐을 잘 옮기니까 차라리 빨래를…."
"김래빈이 요리 못해요."
"아냐! 난 지난 몇 차례의 요리 영상들에서 인정받았…."
이런 것도 컨텐츠로 써줄지는 모르겠는데, 뭐, 나온다고 해도 매번 저러니 불화설은 안 나올 것이다.
그렇게 꿀이 달달한 사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후암."
"네 맘에~ 파팡파팡…."
슬슬 풀어진 놈들이 푹 늦잠을 자거나, 집안을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등 카메라 없을 때나 할 법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
제작진에게 연락이 왔다.
이것도 방송 그림을 생각한 건지 전화가 아니라 문자로 오긴 했지만.
"어? PD님이세요?"
"응."
류청우의 스마트폰으로 온 문자에는 이랬다.
[기상환경이 악화된다고 합니다. 실내활동 위주로 안전에 유의해 주세요!]
육성으로 그걸 한번 읽어준 큰세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흘간 쨍쨍했으니까."
"그러게. 축사를 좀 보강해 둘까?"
검색해 보니 강풍 동반 비바람이라고 하기에, 우리는 축사를 보강하는 소일거리를 하며 그날 오전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콰콰콰과과광!
"와 씨!"
"소리 진짜 크네."
실제로 들이닥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에, 혀를 내두른 놈들은 얌전히 실내에서 보드게임을 하며 보냈다.
그러나 다음 날.
콰과광! 콰과과광!
"…."
"…여전히 오네?"
비와 강풍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거세졌다.
"문대문대, 저거 봐."
창밖을 보자 해변에서 미친 듯이 파도가 들이닥치는 꼴이 보였다.
조금만 더 앞에 별장을 지었다면 이 안까지 물이 들어찼을 기세다.
[여러분 지금 도저히 배를 띄우거나 섬에서 도보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잠시만 대기 부탁드립니다. 곧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PD의 문자에서는 웃음기가 쪽 빠졌다.
"으으음."
"원래 오늘은 갠다고 했는데 일기 예보가 틀렸나 봐요. 아이고야."
그리고 수정된 일기예보 첨부를 보니, 적어도 모레까지는 이 꼴일 것 같았다.
'망했군.'
벌써 이 방송의 미래가 보인다. 날 밝을 때 찍은 걸 어떻게든 많이 살리느라 루즈해질 꼴이.
물론, 방송 외의 다른 걱정도 튀어 나왔다.
"다, 닭들에게 모이는 줘야 할 텐데…."
선아현의 그 말에, 차유진이 질문했다.
"우리 밥은 괜찮아요?"
"…!"
"잠깐."
나는 당장 계산했다.
원래 신선 재료를 보급해 주겠다던 텀이… 오늘이었다.
즉, 슬슬 물량이 달린다는 소리다.
"즉석 밥이랑 통조림은 있어. 그렇게 굶진 않아."
"우우."
차유진이 축 처졌다.
'아니, 먹을 것뿐만 아니야.'
카메라의 녹화 용량을 갈아줘야 하기 때문에 가끔 방문하던 스탭의 방문도 끊긴 상태다. 전체적으로 모든 게 올스탑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이틀은 우리끼리 이 상태로 이대로 있어야겠는데."
"…."
"오…."
할 말을 잃은 사람들 사이로, 김래빈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럼 저희… 사실상 무인도에 조난당한 거 아닙니까?"
"…!"
상상도 못 한 컨텐츠가 도래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47화]
무인도 조난 1일째.
콰과광!
별장 밖에서는 여전히 미친 듯이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이걸 지은 놈이 자기 안전에 아주 투철한 정신을 소유해서 다행이지.'
그래도 별장은 멀쩡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거실에 드러누웠다.
옆에 차유진이 똑같이 드러눕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아요. 밖이 좀비 아포칼립스로 망한 거죠! 그래서 우리끼리 이 안락한 쉘터에서 지내는 거예요.]
"그래. 대단히 위로가 된다."
"히히!"
웃지 마라, 이놈아.
헛웃음이 나긴 한다만, 그래도 머릿속이 좀 복잡했다.
'촬영 어쩌냐.'
이대로 며칠 분량이 날아가면 정말로 망한 것 같….
[형, 어차피 지금은 촬영 못 하잖아요. 릴렉스~ 하고 편하게 지내요.]
"…!"
[원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로 고민할 필요 없어요.]
…아주 단정적으로 말하는군.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비가 몰아치는 밖을 보고 인정했다.
'뭐 날씨를 내가 어쩌겠냐.'
어차피 땜빵 편성이었는데 예능 하나 말아먹는다고 큰일 나진 않겠지. 다음 걸 잘하면 된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맞아요!"
나는 거실에 누워서 비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식사 시간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
일곱이 다 같은 보존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자니 정말로 무슨 재난 영화에 들어온 기분이 들긴 한다.
"으음, 우리 축사 가서 계란이라도 있나 보고 올까요?"
"세진아, 쓸려 간다."
"넹."
그렇게 감흥 없는 식사를 두 번쯤 마치고 나니 시간이 붕 뜬다.
게다가 안 그래도 느리던 스마트폰 데이터 서비스는 한층 더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고립된 느낌 나는데….'
덕분에 정말로 할 게 없다.
오늘 식사 준비를 담당해서 뒷정리를 면제받은 나는, 기상 상황이 제일 잘 보이는 거실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보드게임도 할 게 다 떨어졌고, 뭐 밖에 나가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으니….
지이잉. 툭.
"…!"
그때.
갑자기, 주변이 캄캄해졌다.
"어어?"
"다들 괜찮으십니까?"
정전이었다.
무인도라 밤에는 밖에 다른 광원이라곤 없다. 완전히 칠흑 같은 암전.
나는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누군가 어깨를 덥석 잡았다.
"…!"
"형!"
"그래."
…차유진이군. 거실에 빨래를 가져 오던 중이었지.
나는 목소리를 확인한 뒤, 다른 놈들의 목소리를 파악했다.
"얘들아, 일단 움직이지 말고 암적응부터 하자."
이건 류청우고.
"네, 네…!"
"와, 5초만 빨랐으면 설거지 중에 멈출 뻔했다니까요."
이건 선아현이랑 큰세진.
차유진은 옆에 있고, 김래빈은 파에.
남은 건….
'배세진은?'
그 순간, 밑에서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읍!
"…!"
"형!"
다행히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멀쩡했다.
"…괜찮아!"
다만 약간 떨리고 있긴 했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외쳤다.
"무슨 일 있어요?"
"이, 이상한 걸 봤는데… 아니, 오지 마! 내가 갈게."
"아뇨. 계세요."
너야말로 움직이지 마라.
나는 손에든 스마트폰에서 손전등 기능을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요!"
같이 가는 건 괜찮다만 남의 목을 조르진 말고.
나는 차유진을 달고서, 불빛을 보고 달려온 다른 놈들과 합류해 빠르게 이동했다.
"세진 형, 거기 있어요?"
배세진은 애매한 자세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스마트폰 손전등 불빛이 들어오자 화색이 되는 게 아무래도 암전이 무섭긴 했나 보다.
"다리 괜찮아?"
"…괜찮아. 문제없어."
배세진은 그 말대로 류청우의 손을 붙잡고 멀쩡히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약간 긴장한 기색이다.
"저기… 넘어지면서 내가 뭘 민 것 같은데."
배세진이 침을 삼켰다.
"저런 게… 나와서."
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즉시 스마트폰 불빛을 움직였다.
반쯤 밀린 캐비닛.
그리고 그 뒤에, …문?
불빛에 드러난 것은, 칙칙한 색의 방화문이 맞았다.
"헐 "
"이게 뭐야."
배세진이 저걸 발견할 수 있던 건 바닥에 은은하게 야광 빛이 도는 탓인 것 같다. 아무래도 야광 도료 따위를 쓴 것 같다.
"와, 이거 무슨 비밀 방 같은 건가?"
"제 생각에는 대피 용도로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싸한데."
숙덕거리던 놈들은, 곧 '사유지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매우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지하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구조상 저 문 너머 근처가 들꽃길이었던 것 같다.
큰세진이 으스스하게 뒤에서 중얼거렸다.
"이거 꼭 그거 같지 않냐? 왜 눈 오는 산장에서 고립됐는데, 숨겨진 문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억!"
"아니다."
끔찍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나는 큰세진의 등짝을 갈기고 도로 거실로 돌아왔다.
다른 놈들도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각자 방에 들러서 스마트폰을 찾았다.
"휴."
"이걸로 손전등을 찾을까요?"
"현관 옆 팬트리에 있었어. 가져올게."
"오오~"
류청우의 활약으로 손전등을 확보하고 나자, 좀 살 만해졌다.
문제는 이대론 스마트폰을 다시 충전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아껴 써야겠는데.'
전기가 나갔으니 별수 없지. 나는 혀를 찼다.
"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 모여서 잘까?"
"대찬성이요~"
"무서운 이야기 말해요!"
그날은 거실에 모여서 취침했다.
차유진이 자신이 영어로 무서운 이야기를 할 테니 번역해달라는 것을 넘기느라 기력을 추가 소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상황은 더 환장하게 흘러갔다.
"다, 닭장이…!"
"어어? 떠내려가는데?"
이틀 내내 내린 비 때문에 물이 앞마당까지 들어찬 것이다.
덕분에 강풍에 열린 축사 문 사이로 흘러나온 병아리들이 둥둥 떠서 마당 아래로 쓸려 가기 일보 직전이 었다.
흐르는 흙탕물 위, 노란 덩어리가 점점이 멀어진다….
꼬고고꼭!
닭이 애처롭게 운다.
"안 돼요!"
"구, 구해줘야 해…!"
결국 다급함에 우산도 우비도 안 걸치고 잠옷 차림 맨몸으로 다 같이 축사까지 뛰쳐나갔다는 것이다.
'환장하겠네.'
"잡아! 잡아!"
"얘들아, 안 넘어지게 조심해! 몸 낮추고!"
다행인 건 운동을 꾸준히 하던 놈들이라 흙탕물 속에 머리 박는 놈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병아리들은 우여곡절 끝에 다 구출은 되었다.
차유진과 류청우가 활약했다는 점만 말해두겠다.
"다행이다!"
"휴우우…."
양손에 다 젖은 노란 덩어리들을 든 놈들은 뒤뚱뒤뚱 축사로 걸어가서 원상복구를 시도했다.
"휴, 다행이다."
"온 김에 계란도 가져가죠!"
비를 온몸으로 다 맞고 있는데 옷에서 물기를 짜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만, 어쨌든 간에 놈들은 몰골을 정리하며 뿌듯해했다.
그리고… 계란이라.
'음.'
나는 머리를 털며 말했다.
"한 마리 먹을까."
"예?"
"어어어?"
"암탉이 다섯 마리니까 하나는 잡아도 될 것 같아서."
"…!"
성인 7명인데 닭 한 마리 못 잡진 않겠지.
김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보존식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좋지 않…."
"No! No! 안 돼요!"
"으아아니 세상에 문대야 방금 구출한 이 조그만 병아리들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걔네 말 못 알아들어. 그리고 원래 다 먹으려고 키우는 거 아니냐."
그리고 막상 닭 잡으면 제일 좋아할 놈들이 제일 반대하는 게 웃기긴 하는군.
차유진이 제일 반대가 극렬했다.
"먹는 거 아니에요! 잘 키우는 거예요!"
이놈은 영어까지 섞어가며 '어린 왕자와 장미' 비유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특별하듯이, 이 닭들은 우리한테 특별한 닭인 거라니까요?!]
오냐, 알았다.
"하하, 그래. 달걀이나 가져가자."
류청우의 정리를 끝으로, 김래빈이 나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닭을 잡으면 차유진에게 분배해주지 않는 건을 강력히 건의합니다."
"…."
아무튼 그 난리를 겪고 계란을 쥐고 실내로 복귀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또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물이 차갑더라."
"그러게요."
정전 탓인지 온수가 안 나와서 졸지에 냉수마찰을 했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는 배세진은 상당히 충격적인 경험을 한 모양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주방이 인덕션이 아니라 가스로 돌아가서 그나마 밥은 따뜻하게 해 먹어서 다행이었다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식사 후, 흰 쌀밥에 반숙 프라이와 고추참치로 배를 채운 놈들에게 말을 꺼냈다.
"일단 전기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그렇지."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특별히 전문 지식이 없습니다만."
그래. 다들 직업군이 겹쳐서 문제다. 예체능에 일생을 바친 놈들 사이에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배세진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발언했다.
"두꺼비집, 같은 거 올리면 되는 거 아닌가."
"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 분전반 차단기가 내려간 류의 문제일 확률도 있다.
나는 '태양광으로 전기를 수급해 왔는데, 요 며칠 해가 안 나서 전기까지 끊겼다…'는 상당히 비관적인 추론을 하던 중에 일단 멈췄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될 지도 모르지.'
류청우가 팔짱을 꼈다.
"음, 어디쯤 있을까. 현관 밑이나 외벽에는 안 보이던데."
"여, 여쭤볼까요…?"
그 말대로 PD에게 문자를 넣어보려고 했으나, 빈번히 실패가 떴다. 신호가 잘 안 잡히는 것 같다.
"강풍 때문에 장치가 망가졌나?"
"워낙 외진 곳이라 그럴 수도 있죠. 지금까지도 몇 번 잘 안 잡혔잖아요."
"으음."
잠시 고민했으나, 곧 의견은 하나로 결론 났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두꺼비집이나 찾아볼까요."
"그렇게 하시죠~"
그리하여 대충 둘 셋으로 나뉜 놈들은 손전등을 하나씩 지참하고 집 구석구석을 탐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뭐, 해 떨어지기 전에는 찾겠지.
"음, 없는데?"
"…."
왜 안 보이냐.
-아무래도 우리가 발견할 확률이 높지?
-그래.
나는 큰세진, 김래빈과 함께 1층 수색을 맡았다.
그리고 이런 건 보통 1층 구석에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제법 긴 시간을 돌아다녔는데도 분전반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층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만…."
주택이라면 보통은 저층에 있지 않나?
그때, 김래빈이 손을 번쩍 들었다.
"혹시 지난번에 배세진 형께서 발견하신 비밀 문 안에 있는 건 아닐까요?"
"…!"
"오~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캐비닛 뒤에 숨겨진, 칙칙한 색의 방화문을 떠올렸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다.'
지하로 이어지는 것 같았으니, 보일러실이 있고 거기에 분전반도 설치되었을 수 있다.
"가볼까?"
"…그래."
나는 놈들과 함께 캐비닛이 있던 복도 구석으로 향했다.
그 방향으로 갈수록 창문이 없어 어두워졌다. 낮인데도 손전등을 켜야 했다.
"잘 가져왔네~ 하마터면 무서울 뻔!"
"시야 확보는 역시 중요합니다."
캐비닛 앞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반쯤 밀린 캐비닛을 마저 밀어버리자, 제법 커다란 방화문이 손전등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보일러실 입구라기엔 좀 과하긴 한데.'
"내가 열까?"
"…괜찮아."
손전등 잡고 있는 사람이 여는 게 낫겠지.
나는 방화문 손잡이를 잡아서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진 않았다.
끼이이익.
자주 열지 않는 듯, 꺼림칙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 안은 시커멓게 불 없이 조용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어슴푸레 보였다.
"…."
"…."
"…좀 무섭네?"
아니, 기분 탓이다.
"가자."
"잠깐!"
"다, 다른 곳을 수색 중인 분들과 합류하여 같이 이동하는 건 어떻습 니까?"
"문대 너도 무섭잖아~ 표정에 다 보이는데?"
전적으로 쫄보 두 놈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탓에, 잠시 기다려서 2층 수색팀과 합류했다.
"아, 여기."
"WOW, 캄캄해요!"
배세진과 차유진이다.
저 조합이 2층 수색도 다 끝냈을지 의심스럽긴 하다만… 어쨌든 합류했으니 들어가기나 하자.
다섯이 된 우리는 방화문이 열려있도록 고정하고, 손전등의 불빛에 의존해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지하라 그런지 온도가 낮고, 어딘가 녹슨 비린내가 났다.
뚜벅.
"여긴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주인분 취향이겠죠."
"그렇긴 하지."
뚜벅.
"…좀 생각했던 건데."
"예."
배세진이 발을 멈췄다.
"이 사람은 왜 굳이, 무인도에다가 이런 별장을 지은 거지…?"
"…."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 조용한 게 좋으셨겠죠~"
"근데 그걸 예능용으로 제공했잖아."
배세진이 식은땀이라도 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조용한 게 좋았던 거면, 나라면 그렇게 안 해."
"…."
다시 일동이 조용해졌으나, 곧 여 기저기서 필사적인 변호가 튀어나왔다.
"예능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방송국에 사이가 아주 가까운 지인분이 계셨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미안."
배세진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약간 뻣뻣해진 목을 돌려서 앞을 가리켰다.
"다 내려온 것 같은데요"
"아."
어느새 계단이 끝나고 바닥이 나왔다.
거대한 공동은… 사방에 나무 박스 같은 게 쌓여있는 것 같았다.
"오, 창고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약간 안심했는지 다른 놈들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분전반….'
그리고 나는 계속 벽을 찾아 손전 등을 돌리다가,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했다.
"…!"
"어어?"
또 다른 문이었다. 심지어 양문.
특이할 건 없었다. 그러나, 그 문 밑에 흘러나온 것은….
큰세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피 아냐?"
피?
정말로, 검붉은 액체가 진득하게 문 아래 바닥에 질질 흘러내려 있었다.
"…."
인지하고 나자, 지금까지 녹슨 냄새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철분.'
피다.
"…!"
"으아아악!"
"으하악!"
기겁한 비명이 공동을 꽉 채웠다.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고….'
X발 어디다 신고한단 말인가? 이게 뭐야?
[맙소사 이게 대체 뭐야 XX! 피잖아!]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아악!"
"올라가, 당장 올라…!"
그때.
달칵.
갑자기 불이 돌아왔다.
순식간에 시야가 훤해졌다.
"…?"
"어?"
아주 그윽한 조명등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집혔다.
음산한 창고라고 생각했던 곳은… 제법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셀러였다.
"…?!"
아까 본 나무 박스도 순 분위기용으로 쌓아둔 모양새다.
누가 봐도 인테리어 좋은 보관고.
그리고 내가 본 문은….
"…냉동고잖아?"
그렇다.
문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모던한 회색으로 반질거리는 냉동고였다.
"…."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냉동고 문을 열었다.
아직 냉기가 남아 있는지, 코가 시원해 졌다.
그리고 각종 소시지나 고기들이 녹으며 핏물이 빠져서 아래로 흘러나온 게 보였다.
비린내의 근원지였다.
"…."
"…."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아, 여기 있던 게 맞았구나."
"무, 문대야. 나 두꺼비집, 찾았어…!"
"…얘들아?"
"저, 저기…?"
분전반을 찾은 3층 탐사대 놈들이 여기까지 내려올 때까지, 나머지 놈들은 허망하게 서서 자신들의 바보짓을 곱씹었다.
그 나머지 놈들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부정하진 않겠다….
"그래도 고기는 많다."
"그러게, 사람 고기로 착각해서 문제였지."
조용히 해라.
정신을 차린 뒤, 나는 냉동고에서 아직 녹지 않아 먹을 수 있는 고기를 꺼냈다.
이 별장 주인에게 나중에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자연재해 탓이니 어느 정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
"봐봐요! 안 잡길 잘했어요!"
"…그러게."
나는 차유진이 번쩍 들어 올리는 냉동 토종닭을 보고 묵묵히 긍정했다.
"위에 냉장고 다시 가동되니까, 먹을 거 몇 가지는 옮기자."
"넵~"
'그래도 그 얼간이 같은 모습이 안 남아서 다행이지….'
나는 내심 안도했으나, 헛된 안심이었다는 걸 곧 깨닫게 되었다.
…요새 카메라들이, 생각보다 배터리가 길게 가더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