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전기가 돌아온 별장.
온수로 잘 씻고 건조기로 빨래도 마친 놈들은 둘러앉아서 백숙을 먹었다. 죽도 한 솥 끓이고.
"크, 이거지…."
"저, 정말 잘 먹었어!"
"형 요리 맨날 맛있어요!"
"그래, 고맙다."
솔직히 채소가 거의 없다 보니 밖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을 것 같진 않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순식간에 토종닭 두 마리는 뼈만 남았다.
'괜찮네.'
나는 앞으로의 식사를 예상했다.
아마 그 정도 크기의 셀러라면, 고기뿐만 아니라 보관성 좋은 다른 식재료들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과하지 않은 선에서 한두 가지는 더 먹어도 양해를 구할 수 있겠지.
…쪽팔려서 얼른 나오느라 제대로 찾아보진 못했다만.
'망할.'
-으아아악!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아악!
다시 뇌를 스치는 아찔한 헛짓거리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잊자. 멘탈에 좋을 게 없다.
"으음, 아직도 제작진분들이랑 연락 안 되네요?"
"그러네. 밖에 나가서 한번 시도해 볼까?"
다른 놈들은 충전이 완료된 스마트폰을 들고 연락책을 강구하는 중이다.
'뭐, 전기 복구됐고 먹을 구석 나 왔으니 그리 급할 건 없다만.'
수정된 일기예보도 썩 믿음직하진 않다만, 아무리 길어도 앞으로 이삼일이면 정리되겠지.
이젠 방송 분량이고 나발이고 그냥 여기서 최대한 쾌적하게 지내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솔직히 선 넘었지.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제안했다.
"지하창고에 채소 있는지 좀 확인할까요. 응급 상황이니까 어느 정도는 써도 될 것 같은데."
"그럴까?"
"난 찬성~ 아, 그리고 핏물도 좀 치워드리죠! 제작진분들 오셨다가 우리처럼 식겁하시겠어~"
"미, 밀대 찾아올게…!"
그리하여 식사 정리가 끝나는 대로 청소도구를 가지고 다시 지하실에 내려가게 되었다.
혹시 또 정전이 일어나는 것을 대비하여 손전등을 넉넉히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고.
'아마 보존성 좋은… 향신료나, 안주용 올리브 절임 같은 건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예상대로, 몇 가지 추가 물품을 발견했다.
"오 와인~"
"혹시 이 치즈가 혹시 워낙 고가이거나 한정된 품목이라 저희가 섭취했을 경우 주인분께 충분한 보상을 드리지 못할 확률이 존재할까요?"
"…그냥 다른 걸 먹자."
하지만 내려간 지하실에서 발견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헐, 이거 봐."
"…!"
냉동고 핏자국을 지우던 도중.
그 거대한 기계의 그림자에 교묘히 가려진, 또 다른 문을 찾은 것이다.
심지어 이번 것은 제법 작았다. 내 키라면 살짝 굽히고 이동해야 할 정도.
류청우가 유심히 문을 살폈다.
"음, 이건…."
"…이번에야말로 이 건물 보일러실 아니야?"
가능성 있는 발언이다.
"열어 봐요!"
"정전도 일어났는데 갑자기 가스 끊기고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한번 확인은 해두죠?"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오!"
"그럼 열어 보겠습니다."
합의된 것 같군. 나는 밀대를 세워 둔 채, 금속 문손잡이를 돌려 잡아 당겼다.
드르륵.
문은 부드럽게 열리며… 예상하지 못했던 안쪽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손전등!"
배세진이 손전등으로 안을 비추자, 저 멀리 길이 꺾인 콘크리트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정집 밑에 있을 만한 구조는 아니었다.
훅.
안으로 지하 구조물 냄새가 나는 바람이 빨려들며 코를 스쳤다.
"헉."
"와, 이거 뭘까요?"
"우, 우리가 가봐도 괜찮은 걸까…?"
핏자국 때문에 기겁했던 것을 깨끗이 잊었는지, 미지의 탐험 거리에 어째 들뜬 놈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해는 간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실내에 처박혀 있었으니 이런 걸로도 흥미가 돋겠지.
류청우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비상 대피로 같은데… 저기 봐. 유도등 같거든."
"오오."
과연, 안쪽에서 어렴풋이 살짝 초록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난을 대비해서 만들어뒀나.'
그러면 도리상 여기서 촬영하는 놈들한테도 말은 해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뭐 주인 마음이긴 하다만.
류청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조난 중이다 보니… 한번 확인해 두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해."
"가요! 가요!"
"…괜찮겠지."
그래서 밀대로 입구 문을 고정한 채로, 통로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지난번 사태로 교훈을 얻은 놈들은 손전등을 있는 대로 다 켜고 통로를 편안하게 걸어갔다.
다만 생각보다 이 통로가 상당히 길었다.
이윽고 비상 유도 등을 서너 개쯤 지나쳤을 때.
"이거 별장 밖으로 꽤 나온 것 같은데요?"
"…그러게."
이게 뭔 통로인지 정체를 모를 노릇이니, 슬슬 긴장하는 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몇 명이 빨리 이 통로 끝만 확인하고 오는 건…."
"NONONO!"
"무슨 소리야~ 다 같이 가야지!"
"…."
난리군.
어쨌든, 그래서 몇 번 더 모퉁이를 돌며 이동한 결과.
"저, 저기, 문 같아요…!"
드디어 통로가 끝나고 문이 나왔다.
문에는 묘하게 잘 디자인된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는데, 작동 중이진 않은 것 같았다.
"오, 주인분이 이런 센스가 좋으신가 보네요."
"그러게."
나는 다른 놈들이 떠들 때까지 기다려줬다가, 문손잡이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럼 열겠습니…."
"어어~ 문대문대, 잠깐! 이런 것도 다 같이 해야 하지 않겠어?"
"맞아요! 저도 해요!"
"…그러냐."
그래. 마음대로 해라.
카메라도 없는데 공동체 증명에 참 적극적인 놈들 덕분에, 일곱이 한 문에 매달리는 기이한 그림이 나왔다.
심지어 구호까지 외친다. 순 학교 수련회 같다만… 뭐, 즐거워 보이니 굳이 뭐라 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배세진까지 한 손 내미는 것을 보고, 손잡이에서 살짝 내 손을 비켜주었다.
"자, 다 같이 열어봅시다."
"하나, 둘… 셋!"
달칵.
처음 느껴진 것은, 묘한 저항감이었다.
그러나 장정 일곱이 한꺼번에 문을 여니, 특별히 멈칫거릴 일 없이 단번에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우당탕탕!
"…!"
"뭐, 뭐야?"
눈앞에 드러난 것은 웬 어두컴컴한 실내공간이었으나, 그게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으아아악!"
"와으학!"
몇 시간 전 지하실에서 들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비명이 아주 이 공간이 떠나가라 싶게 울렸다.
"…?"
"어어어?!"
문밖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안면이 있는 얼굴들이다.
금방이라도 때릴 듯, 엉거주춤하게 카메라 장비 지지대를 들고 있는 그들은… 제작진이다.
뭐야.
'너희가 왜 여기서 나와.'
"아니, 여러분이 왜 거기서! 대체 어디서!"
"엄마야!"
아무래도 상대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제작진은 서글픈 소리를 내며 앞으로 엎어졌다.
"으어허헉!"
두 그룹은 더없이 당황한 채로 마주 보며 고함을 지르다가,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진정했다.
"그러니까… 비상 근무 중이셨군요."
"예…. 그렇죠."
초췌한 안색의 제작진들은 벌써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날씨가 이렇게 돼서 갇힐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 문자.'
-여러분 지금 도저히 배를 띄우거나 섬에서 도보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잠시만 대기 부탁드립니다. 곧 대책을 강구하겠습니다.
왜 굳이 '섬에서 도보 이동' 이야기가 있나 했더니, 섬에 상시 거주 중인 인원이 있었던 거였군.
하긴, 생각해 보니 아무리 자연스러운 그림을 뽑고 싶어도 섬에 출연진만 놔두고 제작진이 모두 빠지는 시간대가 있는 건 미친 짓이다. 무슨 사고가 날 줄 알고.
다만, 이런 천재지변까지는 예상 못 한 모양이다.
제작진 하나가 진저리를 쳤다.
"기껏해야 소나기 예보만 있었는데… 어휴."
그래서 아무 준비 없이 이곳에 제작진들이 고립된 것이다. 물도 식량도 부족한 상태로 상당히 고초를 겪은 모양이다.
그리고, 여기서 당연한 질문이 나왔다.
"근데 여긴…?"
"아, 여기 그 예능 세트장이에요! 컨테이너."
"…!"
나는 첫날, 별장 밖으로 확인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로고 있는 컨테이너요?"
"네네."
그 철거되지 않은 탈출 예능용 컨테이너를 이 제작진들이 촬영 준비 기지로 써먹었다고 한다.
"날씨 안 좋아지면 여러분 관광 컨텐츠로도 쓰려고 했는데… 네, 망했네요."
"하하하하…."
어쨌든, 덕분에 사람이 며칠 지낼 만한 수준의 쾌적함과 강도는 유지 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작진들이 임시 거처로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벽지를 뚫고 우리가 튀어나와서 기함했다고 한다.
"벼, 벽지요?"
"네. 아니, 위치도 모르시는데 대체 어떻게 오셨어요?"
그리고 제작진들은 우리가 온 통로를 보고 기절초풍했다.
"헐, 이런 게 있었어?"
"나 진짜 박 PD님 가만 안 둘 거야…."
나중에 알게 된 비화로는, 사실 지난 탈출 예능에서 쓰려다가 출연진 들의 이동 루트상 드러나지 않은 구조물이었다고 한다.
메인 PD 등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지만, 여기 비상 대기조로 남은 막내 당직들은 모르고 있었다고.
어쨌든, 그래도 이들이 굳이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고 여기서 이 궁상을 떨고 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아, 그쪽도 먹을 게 별로 없고 불안할 텐데… 괜히 저희가 여기 고립됐다 어쨌다 하면 부담이 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힐링 컨텐츠 맘껏 즐기게 해주겠다고 데리고 왔는데, 이 지경이 되어서 면목이 없었다고.
나는 그 문맥을 읽었다.
'테스타가 지랄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군….'
사실 제작진 입장에선 우리가 그래도 할 말 없는 상황이긴 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작은 뒷말이 붙었다.
"촬영 그림도 망가질 것 같고…."
"…?"
"촬영 그림…이요?"
천재지변 나고 카메라 다 죽었을 판에 무슨 소린가 했다.
"아, 그거… 아마 지금도 고정 캠 몇 개는 아직 살아 있을걸요?"
"네?"
"새로 받은 장비거든요. 그, 적외선 카메라도 아마 살아있을 것 같고."
"헐, 그렇구나~"
"…."
괜찮다. 어차피 지하실에는 카메라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 꼴은 안 보여 주겠지.
어쨌든, 이후로는 상식적인 구조 제안이 이어졌다.
"별장에 식재료 꽤 있거든요! 걱정 마시고 어서 같이 가요. 아이고, 너무 고생하셨다…."
"그래요. 일단 씻고 식사하신 다음에 말씀 나누시죠."
"모, 몸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흑흑."
"감사합니다."
제작진들은 비바람 몰아치는 위험천만한 비포장길 대신 실내 통로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별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문을 통해 나오자마자 외쳤다.
"아, 여기로 통하는 거였구나!"
"…?"
그… 낯익다는 반응은 뭐냐.
"최 작가님이 여기서 무슨 보물찾기 하는 걸 원래 오늘 컨텐츠로 쓰려고 했다셨거든요."
"우리 중에 여기 설치 담당자가 없지? 맞아. 아무튼 그래서 다들 처음 들어오긴 하는데… 아, 여기 식재료도 많았네요. 다행입니다."
제작진들이 밝게 외쳤다.
…그리고 당장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어디선가 숨겨진 카메라들을 찾아내서 확인하는 것 아닌가.
"이야, 다행이다. 이 컷들 살릴 수 있겠어요!"
"…."
실화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스토리적으로, 좀 끊기지 않을까요. 통로에는 카메라도 없고."
"아, 걱정 마세요."
제작진이 환하게 희망을 뭉갰다.
"혹시 몰라서 저희 쪽도 기록용으로 카메라 돌렸거든요. 여러분이 등장하시는 것도 잘 찍혔을 거예요!"
"당연히 편집 잘 들어갈 테니 그건 염려 마시고요."
"…."
그래, 이 부분은 포기하자. 아니, 컨텐츠 되고 좋겠군. 걱정이 한결 덜었다.
'정전 때 지하실만 넘기면 된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힌 사실은 그다음에 밝혀진다.
별장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카메라를 확인하던 제작진들이, 감탄과 탄식을 교차하고 있을 때.
"아, 메인이 죽었네…."
"이걸로 끝인가?"
"저… 혹시 이것도 필요하십니까?"
김래빈이 뜬금없이 카메라를 하나 슬그머니 꺼내 온 것이다.
"…!"
저거… 내 취미로 발탁돼서 가져온 카메라잖아.
촬영 후반에 반나절쯤 인당 하나씩 쥐고 섬을 돌아다닐 용도로 지급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다들 처박아두고 까먹은 줄 알았는데.'
심지어 나도 상황 돌아가는 판에 거의 잊고 있었건만, 이 고지식한 놈이 뭔가 찍어놓은 모양이었다.
제작진은 일단 감사했다.
"오! 감사합니다."
"넵, 저희 좀 돌려볼게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래 봤자 몇 컷 안 될….
[조난 1일째, 아침 9시 11분. 기록자는 그룹 테스타에서 프로듀싱과 랩을 맡고 있는 21살 김래빈이다.]
[만일을 위해, 이 모든 사건을 기록해 두려고 한다….]
"…."
언뜻 본 카메라에는, 김래빈의 진지한 얼굴이 큼지막하게 잡혀 있었다.
이놈은 조난인 한명 한명의 배경을 주절주절 설명하더니, 아주 3시간마다 브리핑을 했다.
무슨 1인칭 캠코더 시점 재난 영화가 따로 없다.
[오전 12시. 통조림과 즉석 밥을 배분했다. 이 폭풍이 지나가기 전에 떨어지는 일이 없길.]
[오전 6시. 어제는 거실에서 모든 인원이 함께 취침했다. 차유진이 쓸데없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괴기한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류청우 형은 즐거워했다.]
그리고 정전사건 당일 기록.
주먹을 불끈 쥔 김래빈이 카메라에 대고 외쳤다.
[우리는… 병아리를 구할 것이다!]
"…."
"으하하학! 대박!"
"래빈 씨 최고예요!"
"그, 그렇습니까."
나는 직감했다.
'망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캠코더 기록은, 그대로 예고편으로 나가게 된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49화]
시간을 돌려, 몇 주 전.
'테스타의 기부 콘서트에서 선택받지 못한 무대를 공개할 방송'에 대한 은근한 예고가 뜬 직후.
두근거리던 팬들은 방송사를 확인하곤 약간 의아해했다.
-CVN인데?
-엥 티넷도 아니고 갑자기 씨비엔
Tnet 같은 대중음악전문 채널에서 무대만 편성한 것도 아니고, 예능과 드라마로 유명한 케이블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애들 예능 할까?
-어떻게 나올 생각이지 설마 리얼리티 또 하냐
-시기 애매한디
아이돌 리얼리티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자체적으로 인터넷 플랫폼을 사용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이렇게 대형 채널에 본격적인 프로그램이 대뜸 편성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도 컴백 시즌도, 투어 시즌도 아닌 애매한 시기에.
-티원이 뭐 했나
-사고난 걸로 스토리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티원 X새끼들 가만 안둠
└사고난(X) 티원이 사고를 일으킨(0) ^^
└ㄹㅇ이게 맞다
-살인미수 X소 회사 망했으면 애들만 잘 됐으면
의심하거나 걱정하는 사람도 간간이 나올 만큼 예외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약간의 의아함만을 가지고 새 떡밥을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뒤.
[테스타만을 위한 별장으로 놀러가요!]
[테스타의 섬 생활, 9/30 Wed]
푸른 하늘 아래 바닷가와 해먹, 시원한 음료가 교차하는 예고 이미지.
공식 채널 및 기사로 새롭게 뜬 이 홍보는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테스타의 휴식과 힐링!
-아 다행
-물론 카메라 없는 데서 쉬는 게 최고지만… 애들아 고맙다ㅠㅠ
-ㅠㅠ오랜만에 마음 편히 볼 듯 애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푹 자고 재밌게 놀았으면…
-출국 안 해도 되면서 사람 없는 곳 잘 골랐네
팬들은 굉장히 전형적이며 상식적인 리얼리티 포맷에 안도하며 기뻐했다.
심지어 촬영 이후에 테스타가 추석 연휴 간 전격적인 휴가를 받는 것까지 슬쩍 기사로 흘러나오자, 분위기는 약간 더 부드러워졌다.
-얘들아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푹 쉬자ㅜㅜ
-정말정말 고생 많았어 끝까지 러뷰어 챙겨줘서 고마워 건강 꼭 챙기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촬영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아닌지 염려하는 여론이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테스타가 촬영 끝나고도 푹 쉴 수 있겠다', '망할 회사가 이제야 눈치를 본다' 같은 말이 팬들의 SNS와 커뮤니티에 전반적 여론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휴가로 리얼리티 딜 본 거 아니야?'
여기, 박문대와 이세진의 사진이 올라가는 계정을 운영 중인 직장인은 매우 현실적으로 비관했다.
'너희 연휴 때 푹 쉬게 해줄 테니 이것만 좀 해달라. 별거 안 시킬 거고, 놀기만 하면 된다… 뭐 그런 이야기 했을 것 같은데.'
T1의 이미지 쇄신용 작업이 아닌가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 홈마는 곧 어깨를 으쓱했다.
'뭐,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건, 진짜 힐링만 하다가 오는 프로그램이면 CVN에 편성된 게 오히려 악수라는 점이다.
'힐링은 재미없잖아.'
교통사고와 기부 콘서트로 핫해진 테스타에 확 어그로가 끌려서 1화를 봤다가 탈주할 일반인들의 반응이 벌써 보였다.
-미안한데 노잼..
-애들은 귀엽더라ㅋㅋ 나중에 클립 보려구!
그러니 진짜 힐링이면, 사실 팬들만 시청률에 집계될 것이라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시청률 망하면 또 지랄할 텐데.'
-충격적인 테스타 리얼리티 2화 시청률
-테스타 예능 폭망이다 vs 그정도는 아니다
-아쉬움 많이 남는 테스타 이번 리얼리티 성적
벌써 라인업이 선했다.
VTIC의 팬인 티카가 신나서 날뛰겠다며, 직장인은 한 2주쯤 짜증 나고 피곤한 상황이 지속될 것을 예감했다.
그래도 별수 없긴 했다.
'뭐, 티원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 어려운 걸 주진 않겠지만.'
지금 여론이 간신히 기부 콘서트를 통해 아이돌 본업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교통사고로 인한 충격을 살짝 덮은 수준이었다.
아마 이런 포맷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반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지난번처럼 호떡 팔아서 여행 빚 갚게 하는 거였으면… 죽이려고 했을걸.'
지금 분위기를 봐서는 회사가 멤버들에게 석고대죄를 했다는 기사가 떠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직장인은 그게 상당히 회사 현실과 괴리된 여론이라 생각했다.
'그냥 일하고 있겠지 뭐. 어쨌든 이번 예능은 그냥 가겠고.'
그녀는 심드렁하게 생각했으며, 이 생각은 다음 예고편을 보고 더욱 공고해 졌다.
[테스타 하고 싶은 거 다 해!]
[테스타 : 와, 저희끼리 여기 다 써요?]
척 보니, 음식부터 취미까지 정말 하고 싶은 걸 다 시켜주는 류의 힐링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방영된 1화도 그랬다.
아름답고 온화한 남해의 섬과 때깔 좋은 별장. 그리고 소박한 닭장과 흐드러지게 핀 들꽃.
[차유진 : 병아리! 정말 귀여워요!]
[이세진 : 와, 우리가 이런 걸 다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네.]
멤버들은 신나서 섬과 별장을 돌아 다니며, 보양식을 먹고 럭셔리한 마사지를 즐겼다.
[배세진(마사지 마니아) : 으허억]
[박문대 : (당황)]
[류청우(등산 마니아) : 등산화를 좀 챙겨봤어.]
[박문대 : (외면)]
웃긴 장면도 이렇게 간간이 들어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소한 정도다.
전체적으로, 테스타를 오냐오냐해 주는 대리만족형 리얼리티였다.
-차고영 닭다리 몇 개 먹는 거얔ㅋㅋ 많이 먹고 코 자자!
-마음이 따뜻해짐
-아현이 명상하는 거 봤냐고 숲속의 왕자님 따로 없음 그가 바로 X즈니 프린스다
-그래 이거야 이런 걸 원했어
팬들은 행복해했으나 직장인은 마음을 접었다.
팬들만 볼 내용이 맞았으니까.
'좀 미끄러지는 구간도 있는 거지.'
머리 좋은 놈들이니 다음 앨범을 알아서 잘 준비해 올 것이라며, 직장인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1화가 끝나며 나온 예고편에서 모든 게 뒤집혔다.
[다음 날…?]
[? : (지지지직)- 1일째, 오전 9시 11분.]
[? : 기록자는 (지지직)- 21살 김래빈이다.]
"…!?"
새롭게 공개된 예고편은…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스펙타클해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
[아나운서 : 남해에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고립된 제작진!]
[막내 작가: 저희 물이 거의 안 남았는데요?]
[조연출 : ㅋㅋㅋㅋㅋ (실성)]
[멘탈 붕괴]
빰밤밤 빰밤밤밤 따라라라↗
강렬한 BGM을 배경으로 미친 듯이 폭풍이 휘몰아치는 섬과 뉴스 컷이 편집되어 들어갔다.
그리고 멘탈이 나간 제작진의 얼굴 없는 옆모습과 뒷모습이 교차 편집되어 리드미컬하게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것은… 다시 캠코더스럽게 편집된 화면에 등장한 김래빈이다.
김래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래빈(21) : 우리는 병아리를 구할 것이다…!]
[테스타 : 으아아아!]
물 위로 동동 떠내려가는 병아리를 향해 달려 나가는 잠옷 차림 테스타의 모습을 끝으로, 예고편은 끝났다.
"…."
SNS는 이미 물음표와 폭소로 도배된 상황.
'…이렇게 틀어버려?'
직장인은 답지 않게 웃다가, 당황하여 잠시 검색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팬이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도 반응이 폭발했다.
[테스타 예능 갑분 조난ㅋㅋㅋ]
[힐링이 아니라 킬링 아니냐]
[빨리 이것좀 봐줘 미친ㅋㅋㅋㅋㅋㅋ (예고편 링크)]
"흠."
역시 뜰 놈은 뭘 해도 뜬다더니, 아무래도 그녀의 아이돌은 정체기도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직장인은 흡족하게 상황을 보며, 계정에 올릴 박문대와 이세진의 보정샷을 골랐다. 명상 도중 이세진이 박문대에게 장난을 거는 컷이었다.
다만, 동시에 예감했다.
'불편하다는 애들 튀어나오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보정한 GIF 파일을 올릴 때 즈음에는 새 의견이 공유를 타고 있었다.
-태풍이 왔는데 촬영 강행했냐고
-힐링인 것처럼 해놓고 또 애들 개고생만 시켰나 보네 진짜 개빡침
-설마 조난당한 걸 컨텐츠랍시고 방영하는 거임? 미쳤나봐
'아, 또 선동질.'
사실 도덕적으로 적합한 요구였으나, 사회적 성공욕에 찌든 직장인의 뇌는 그 모든 것들이 초치기로 느껴졌다.
'X발 이미 찍었다잖아. 뭐 촬영분 폐기하리?'
저런 갑작스러운 자연 재난을 어쩌란 말인가.
저들이 좋아하는 그 아이돌들이 재난 중에서 뭐라도 살려 보려고 기를 썼을 걸 왜 모를까.
"참."
그녀는 은근히 그 모든 반발을 '진지충'으로 미는 여론에 힘을 실어줬다. 물론 익명으로.
-아 제발 좀 그냥 보자ㅠㅠ 기부콘 때도 이러더니 또 이러네
-테스타 예능 잘 될 것 같으니까 초치려는 애들 섞인 듯 ߑͰߏܱ526
결과는 테스타의 끝내주는 휴가 소식이 전해지며 논란이 되지 못하고 묻히는 것으로 끝났다.
'됐어.'
그녀는 개인 교류용 SNS 계정에서 여전히 걱정이나 하고 있는 박문대의 첫 홈마 글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건강하게 별일 없이 웃으며 촬영 잘 마무리 됐던 거면 좋겠다... 뭐든 문대가 무리하지 않길
'원래 아이돌은 무리하는 직업인데 말야.'
전성기가 길지도 않은데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직업이다.
직장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테스타 리얼리티 다음 방영이나 기다렸다.
그리고 1화 때보다도 불어난 관심 속에서 방영된 2화.
놀랍게도, 시작 시점은 테스타가 아니었다.
제작진이었다.
[사상 초유의 촬영 중단]
[연락이 끊기고 고립되어버린 막내 제작진들.… ]
[조연출 : 아 비바람 미쳤다;;]
[막내 PD : 우리 이대로 조난 당하는 거 아니에요?]
[막내 작가 : 이미 조난 당한 것 같… 핳ㅎㅎ]
제작진들은 촬영 도구와 필기구, 생수병이 어질러진 어두운 실내공간 속에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나 편집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뱃길 끊김※]
[※헬리콥터 못 뜸※]
[막내 PD : 이거 안 되겠다, 안 되겠어. 별장까지도 못 가. 출연진 컨택 불가야]
[막내 작가 : 와….]
[※걷지도 못함 (!)※]
멀리서 보면 비극도 희극인 법이었다. 웃긴 BGM과 편집으로, 그들의 고난은 다소 깜짝 카메라처럼 익살스럽게 편집되었다.
다만 안타까움은 느껴졌다.
[막내 작가 : 우리, 우리 지금 사흘째 머리 못 감았… (말잇못)]
이런 대사가 오갔기 때문이다. 테스타의 상황에 집중하던 사람들도 자기도 모르게 숙연해질 정도였다.
물론 근본적인 의문은 계속 있었다.
'그런데 테스타는?'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커질 딱 시점.
[찌이이익!]
[제작진 : 아아아아악!]
갑자기 제작진이 기댄 어두운 벽이 뜯어지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테스타였다.
그 순간, 테스타의 놀란 얼굴들이 클로즈업되며 화면이 멈추었다.
[테스타 : 으아아악!]
[?]
어마어마한 크기의 빨간 자막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목소리 삽입.
[류청우 : 여러분 괜찮으세요?]
[막내 작가 : 허어어억]
[테스타가… 구하러 왔다!]
천사들의 합창 BGM이 깔렸다. 완전히 히어로가 따로 없는 등장 연출이었다. 심지어 테스타의 뒤에 CG로 후광까지 넣어주었다.
"아니…!"
직장인마저 할 말을 잃을 만큼 임팩트 있는 등장이었다.
[조연출 : 아니, 위치도 모르시는데 대체 어떻게….]
테스타는 서로를 간헐적으로 쳐다보다가, 바람 빠지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자막.
[테스타는 대체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걸까?]
[◄◄◄]
화면이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난 1일째]
그리고, 테스타의 시점의 조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박문대 : 바람이 너무 부는데. 나가면 안 되겠어.]
[이세진 : 그러게~ 오늘도 공쳤나. 에휴!]
[김래빈 : 오전 12시. 형들께서 차 후 생활의 방향에 대하여 토의하셨다. 외출 금지는 새로운 규칙으로 정착할 듯하다.]
김래빈의 카메라가 큰 역할을 했다. 김래빈의 셀프카메라 소리는 마치 해설처럼, 중요한 장면마다 슬그머니 들어갔다.
그리고 상황을 더 웃기게 만들었다.
[배세진 : 아니! 고구마가, 고구마가 더 쉬우니까 내가 먼저….]
[류청우 : 세진아, 콩이 더 빨리 자란다는데? 이 카드는 내가 가져갈게.]
[배세진 : (충격)]
[Cam : 보드게임 도중, 곡식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혹시 재배하게 될지 모르니 유심히 확인해 두었다.]
과몰입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김래빈 진짴ㅋㅋ
-너 이런 캐릭터였구나 개간지 달팽이 탄 중세토끼인 줄 알았는데 그냥 토끼였던 거임
-아니 이게 뭐야 왜 혼자 찐 조난 일기 찍고 있냐곸ㅋㅋ
-애한테 카메라 쥐어준 거 누구야 자수해
그리고 그런 유머러스한 요소가 아니더라도, 고난을 미화하거나 얼버무리는 느낌은 덜했다.
첫 등장 편집의 임팩트 덕이었다.
테스타가 처한 고난보다는, 선량하고 도전적인 면모도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스타는 날씨 때문에 패닉에 빠지거나 불평하지 않고, 착실히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열심히 놀았다.
[차유진 : 숨바꼭질? 해요! 숨어요 형!]
[박문대 : (흔들림)]
[선아현 : 좋아…! 나 숨을까?]
-애들 되게 착실하다 뭐라도 해보려고 하곸ㅋㅋ
-식사 부실해진 건 너무 슬퍼ㅠㅠ 제작진들 반드시 한우와 대게로 보답해야할 것
그렇게 착착 진행된 방송은, 대망의 정전 에피소드에 돌입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0화]
진지해도 씩씩하기 그지없던 김래빈의 캠코더 녹음본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Cam : 후우, 지금은… 오후 9시.]
[Cam :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
[Cam : 모든 별장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화면에서는 갑작스럽게 집안의 불이 모두 꺼졌다.
[!]
[김래빈 : 다들 괜찮으십니까?]
[차유진 : 형!]
[갑작스러운 암전]
그 순간부터 에피소드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류청우 : 일단 움직이지 말고 암적응부터 하자.]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서로를 확인하는 테스타]
[그런데]
[한 명이… 없다?]
[? : 으으읍!]
[박문대 : 형!]
요절복통 모험기에 가깝던 조난에 피소드에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교차 인터뷰까지 삽입되기 시작했다.
[선아현 : 갑자기, (배세진) 형의 비명이 들려서….]
[박문대 : 당황했죠. 다들 놀랐을 겁니다.]
그 형식에서는 어딘지 공포 영화의 냄새가 났다.
-갑분 스릴러ㄷㄷㄷ
-헐 뭐야 무섭게ㅠㅠ
-정전까지 났냐 좀 심한데
-배세진 다침?
적외선 카메라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데구루루 굴러갈 것 같은 요상한 자세로 엎어진 배세진을 비추었다.
[…?]
[세진 씨… 멀쩡하네….]
그 몸개그로 잠깐 예능다운 분위기가 환기되긴 했으나, 오래 가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는 적외선 카메라.
[쉬이이잇]
[류청우 : 네. 캐비닛 뒤에 이상한 문이 있더라고요.]
[박문대 : 그런데 그때 제가 보기엔… 그 뒤에 공간이 없었거든요.]
[박문대 : …그러니까, 길이 없죠. 지하실로 통하는 것 외에는.]
그들이 발견한 지하실 문이 상당히 으스스한 적막과 함께 화면에 클로즈업되었기 때문이다.
-헐
-아 개무섭
-별장 주인 뭐야 왜 저런 게 숨겨져 있어요ㅠㅠㅠ
-와 분위기 쫄리네ㅋㅋㅋ
-주작 아님?
주춤거리며 그 문에서 떨어진 테스타.
인터뷰가 다시 교차했다.
[이세진 : 좀 섬찟하던데요? (쓴웃음)]
[배세진 : 이상한 느낌이….]
그리고 시점은 바로 그날 밤, 괴담을 푸는 차유진으로 넘어갔다.
[차유진 : 문대 형! 한국어로 해주세요!]
[박문대 : (살려줘)]
[차유진 : (영어) …그러니까, 그 집 지하실에서 미치광이 의사가 전두엽 절제술을….]
[박문대 : 옛날옛날 미국에 의사 귀신이 들린 집이 있었답니다.]
[이세진 : 문대야 길이가 다른데?]
[류청우 : 음.]
실제 당시에는 그럭저럭 훈훈하고 웃긴 분위기였으나, 편집되어 나온 영상에서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마치 애써 웃어넘기려는 것 같은, 앞일에 대한 복선과 같은 느낌으로 구현된 것이다.
시청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지하실 문 뭐냐고 아씨
-빨리 그 문 캐비닛으로 다시 막자ㅠㅠ
-얘들아 왜 그걸 그냥 두는 겨
-설마 얘네 계속 정전 상태임?
-힐링예능 어디감 다들 과몰입했냐
그 찜찜한 느낌 그대로, 다음 날로 넘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팀을 나눠 분전반을 찾기 시작한 테스타의 모습이 보였다.
[Q : (배)세진 씨가 처음 의견 내셨다는데?]
[배세진 : (귀 벌게짐) 그냥 두꺼비집 말만 한 건데….]
[배세진 : 예, 그,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느낌이 이상해서요.]
인터뷰가 끝나는 동시에, 화면에는 배세진의 긴장한 얼굴이 크게 들어찼다.
그리고 마침내 분전반을 찾아 지하실에 걸어 들어가는 장면에서 배세진의 발언이 이어지듯 조명을 받는다.
[배세진 : 이 사람은 왜 굳이, 무인도에다가 이런 별장을 지은 거지…?]
[순간, 정적이 흐르는 계단]
-으아아악ㅠㅠ
-아 하지마 왜 그래
-제작진이 속이는 거지 그렇다고 말해 빨리
-세진이가 사주받은 거임 암튼 그럼
적외선 카메라가 잡아낸 굳은 멤버들의 얼굴이 천천히 지나갔다.
그리고 도착한 지하실.
적외선이 아닌 손전등의 빛에 의지한 어두컴컴한 화면에서, 멤버들이 발견한 것은-.
[이세진 : …저거 피 아냐?]
[피?]
[!]
멈춘 화면이 뒤틀리고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며, 아이가 웃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BGM으로 들렸다.
[으아아악!]
화면의 테스타가 혼비백산하여 온갖 비명과 리액션을 쏟아냈다.
시청자들도 덩달아 댓글로 비명과 고함, 의심을 쏟아낼 때쯤.
[띠리링~]
[?]
지하실에 불이 돌아왔다.
일부러 필터를 잔뜩 먹인 밝고 뽀얀 셀러 속, 테스타 다섯 명은 한 덩어리가 되어 오들오들 떨며 붙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보고 혼란에 찬 표정이 된 덩어리 녀석 중 하나가, 슬쩍 일어나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 나와 냉동고를 열었다.
귀여운 집들이 효과음이 터졌다.
[뽀로롱!]
[ 고기 파티 ]
[멤버들이 본 핏물의 정체↘]
적나라한 화살표가 얄밉게 무빙했다. 그 위로 반짝이는 과격한 무지개 CG가 찬란했다.
[박문대 : ….]
얼빠진 아이돌들의 표정에 아련한 BGM이 깔렸다….
그리고 잔인한 제작진은 멤버들의 지난 반응을 하나씩 클로즈업해 반복 재생까지 해줬다.
[차유진 : (현란한 영어)]
[김래빈 : (소리 없는 비명)]
[배세진 :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아악!]
[이세진 : 올라가, 당장 올라…!]
[박문대 : (넘어짐)]
[~스스로를 낚은 어부 명단~]
얼굴을 가리고 수치스러워하는 다섯 멤버들의 인터뷰 컷이 지나갔다.
[박문대: …약간은 당황했습니다. 무서웠던 건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박문대의 태연한 척하는 인터뷰에는 대놓고 폭소 자막까지 붙었다.
그리고 시청자도 가차 없이 폭소했다.
-어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필 쫄보들만 갔엌ㅋㅋㅋㅋ
-아 박문대 안 무서운 척하지 말라고~~ 인터뷰 소용없다고~~
-아니 무서울 만했지 갑자기 무인도에서 정전이라니.. 하지만 너희는 쫄보가 맞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괴감으로 굳은 다섯 명의 멤버에게 두 멤버가 찾아온 다음에도 편집은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람들을 웃겼다.
[선아현 : 나 두꺼비집 찾았어…!]
화면 위로는 분전반 스위치를 조작하고 하이파이브하는 류청우와 선아현의 화기애애한 모습까지 어슴푸레한 효과와 함께 삽입되었다.
[ߑ̴ͫ서운 정전은 우리가 퇴치했으니 안심하라구 멤버들!]
-쫄보 아닌 놈들만 기가 막히게 빠졌네ㅅㅂㅋㅋㅋ
-이건... 팀을 그렇게 찢은 손바닥의 잘못이다... 데덴찌가 만악의 근원인 것을
└ㅋㅋㅋㅋㅋㅋㅋ
-양궁 국대랑 X즈니 왕자님을 나눠 가졌어야지ㅉㅉ (잇몸 미소)
게다가 테스타는 굉장히 부끄러워 하다가도 결국 고기를 보고 신이 나 버렸다.
그들은 열심히 냉동 닭을 찾아 들고 거의 춤을 춰버렸고, 그런 날것 같은 반응에 폭소는 배가 되었다.
-애들 너무 귀엽다
-ㅋㅋㅋㅋㅋㅋ으악으악ㅋㅋㅋㅋ
-진짜 열심히 한닼ㅋㅋㅋㅋ
고기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며, 슬그머니 이런 말도 나왔다.
[배세진 : …그래도 카메라가 없어서 다행이다.]
[↑ 있었음]
[PD : 원래 보물찾기를 할 예정이었는데 그게 거기서…]
[예능 요정의 가호를 받는 테스타]
[여러분의 성실함에 감사합니다… by 조난 당해 촬영이 망한 제작진 일동]
조작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돌려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알뜰살뜰 웃음을 챙긴 방송은, 참고 멘트까지 잘 챙기며 깔끔하게 끝났다.
[※별장을 빌려주신 분은 귀농에 로망을 가진 노부부십니다※]
[※해당 방송 및 발언에 대하여 너그러이 이해해 주신 별장 주인 부부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백숙을 끓여서 신나게 먹방을 찍는 테스타의 모습으로, 이번 화는 훈훈하고 시원하게 마무리되었다.
당연하지만, 방송이 끝나자마자 시청자들의 감상평이 폭발했다.
-미쳤다 빅재미
-오랜만에 웃겼음
-빨리 테스타의 섬 조난 봐라 개꿀잼
└섬생활인 줄 알았는데 언제 개명했냐곸ㅋㅋㅋㅋ
-진짜 테스타에 예능 요정 붙었나 아 너무 웃곀ㅋㅋㅋㅋ
게다가 제작진은 예고를 잔뜩 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어떻게 제작진을 구하러 온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이 떡밥을 길게 가져가는 것으로 다음 화 시청률을 노린 것이다.
게다가 예고편도 몹시 재밌어 보였다.
병아리를 구출하는 테스타와 손전등을 챙기는 테스타, 그리고 등산화를 챙겨 신으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까지.
[류청우 : 와, 이게 대체 뭐지?]
[이세진 : 진짜 이런 촬영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하하하!]
생존과 모험, 탐구.
좀 더 장르적 재미를 추구한 것 같은 밝고 액티비티한 예고편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테스타가 활기차고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이번 화가 자칫 '가학적인 포멧이다'는 평을 들을 구석을 알맞게 상쇄하기도 했다.
[테스타가 제작진을 구하러 간다?]
[과연 제작진의 보은 힐링은 얼마나 거창해질 것인가!]
그리고 결국 테스타가 이 조난극 이후 얼마나 대단한 힐링을 누리게 될지를 조명하며, '힐링 파트'가 남아 있다는 것도 강조해 줬다.
게다가 속속들이 올라오는 신난 테스타의 SNS 업로드까지.
울보왕 다음 쫄보왕 문대 (사진)
(폭소 이모티콘)
└그만둬라 이세진
└그만둬라 문대문대
안녕하세요, 러뷰어. 선아현이에요.
(사진)
이건 제가 만든 향초입니다. 섬 여행에 챙겨갈까 고민하다가 두고 갔었는데, 오늘 방송을 보니 살짝 아쉽기도 합니다. 멤버들이 무서워할 때 힘이 됐을 수도 있을까요?
└아니요 형 나 안 무서웠어요!
└유진아 거짓말하면 엉덩이에 뿔 난다
└(호랑이 이모티콘) 저 안 나요!
덕분에 팬들은 기세를 탄 예능 바이브에 휩쓸려서 불만이나 걱정마저도 슬쩍 잊어버렸다. 멤버들이 정말 즐거워 보였으니까.
그리고 다음 편을 기다리며 설레서 내용을 추측하기도 했다.
-병아리 구하는 건 무조건 래빈이가 먼저 튀어 나갔을 듯 편집 보니 딱 그럴 각
-손전등 왜 또 필요하지? 설마 밤에 뭐 하나... 아님 또 정전?
-등산화는 제작진 구하러 갈 때 신을지도
└아님 진짜 등산했을 수도 있곸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미친
참고로, 마지막 추측이 맞았다.
"상쾌하다."
"…네."
나는 숨을 헐떡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침 공기가 좋긴 하다만, 그냥 몸을 움직여서 산소가 단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류청우가 짧게 감탄처럼 중얼거렸다.
"풍경 좋네."
그 말대로 별장과 해안가, 그 너머의 바다와 육지가 제법 근사하게 보인다.
그럴 만하다. 산꼭대기니까.
'망할.'
진짜 등산을 하게 될 줄이야.
나는 제작진 구출 후에 챙긴 컨텐츠들을 회상했다.
비가 그친 후에도 파도가 거세서 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재난 느낌과 연결된 액티비티들을 몇 가지 했다.
'헬리콥터로 채소 받는 건 제법 재밌게 그림 좋았는데.'
그때 등산화 개시하면서 설마 진짜 등산까지 연결될 줄은 몰랐단 말이다.
나는 지난 보물찾기에서 김래빈에게 쪽지를 넘겨준 것을 약간 후회했다.
'벌칙이 이런 걸 줄은 몰랐지.'
물론, 이놈한테는 벌칙이 아닌 것 같다만.
나는 슬쩍 류청우를 쳐다보았다.
"…."
놈의 표정이 제법 편안해 보였다.
등산 덕인지, 사고 이후 어딘지 음울하고 억누르는 것 같이 보이던 느낌이 좀 사라진 것이다.
'…류청우도 고생 꽤 했지.'
아무래도 앞으론 좀 더 숙이고 들어가 줘야겠다는 마음은 든다.
이젠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구간은 지난 것 같으니, 말 좀 붙이고 더 잘 대우해 줘도 괜찮겠지.
"물 좀 드시죠."
"아, 고마워."
나는 놈과 조용히 따듯한 누룽지를 마셨다.
그러나 하산 직전, 드론 카메라가 멀어진 뒤 이 대화를 예상했다는 건 아니다.
"그래, 문대야. 괜찮으면… 이번 추석 연휴 때는 숙소 말고 멤버들 집에 가는 게 어떨까. 아, 우리 집도 괜찮아."
뭐?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1화]
이 섬 조난 예능이 끝난 뒤, 추석 연휴가 보장된 건 좋은 일이었다. 써먹을 곳이 있으니까.
'…'진실 확인'을 그때 누를 생각이었는데.'
혹시 내 상태가 썩 좋지 않더라도 연휴 동안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 이득이었고, 명절이라 이놈들이 다 본가로 갈 것도 썩 괜찮았다.
'혼자 깔끔히 정리할 수 있겠지.'
근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이건 무슨 제안이란 말인가.
'명절에 직장동료를 집으로 불러?'
서로 불편해지려고 작정했나.
특히 류청우는, 어렸을 때 나처럼 명절마다 본가로 내려갈 확률이….
"…."
'됐다.'
거기까지… 쓸데없이 추측하지 말자. 의미 없는 짓이다.
터벅.
나는 천천히 산길을 걷다가, 그냥 대놓고 물었다.
"명절에 제가 가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괜찮아."
류청우는 선선히 대답했다.
"평소랑 별로 다를 건 없어. 그냥 가족끼리 지내자고 이미 이야기했거든. 명절 음식이나 좀 하지 않을까?"
"…."
내 침묵을 무엇으로 해석했는지, 류청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친척들 만나는 게 좀 불편해."
"…!"
"그쪽으로 아이돌 주식회사 연락을 받았지."
류청우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관련 기사까지 떴었으니까… 그 후로 부모님도 명절엔 안 가신다고 하셔."
"…."
그래. 아주사 작가가 친척 찬스를 썼었지.
괜히 기사들한테 먹잇감이 될까 봐 류청우의 부모님도 친척 교류를 자제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말을 골랐다.
"현명하시네요."
"하하,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집에는 나랑 부모님뿐이야. 동생은 친구들이랑 여행 간다고 하고. 아, 우리 강아지도 있구나."
"…."
"한번 생각해 봐. 너 혼자 숙소에 있는 건 아마 이번엔 힘들 것 같으니까."
"예?"
류청우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가시고, 약간 장난기가 보인다.
"몰라? 멤버들도 회사도 너 휴가 때마다 이상한 일 생기니까 혼자 두면 안 된다고 하던데."
"…."
그건… 그럴 만하지.
나는 지난 휴가 때 내 전적을 떠올리며 할 말을 잃었다.
'하필 그걸 다 털려서.'
나라도 팀원 중에 누가 휴가만 받으면 매번 맛이 가거나 개싸움에 휘말린다면 감시할 것이다.
혼자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겠다만, 여의치 않다면….
'그렇다면… 류청우네도 나쁘진 않나.'
이놈과 그리 친한 건 아니니, 오히려 방 하나 받고 적당히 지낼 수 있을 테니까.
류청우의 부모님을 보는 건 썩 쾌적한 시간은 아니겠다만, 참을 만은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부모님 사진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대가족 여행을 가거나 했을 때… 꼭 사진이나, 비디오를 남기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다못해 단체 사진이라도 살펴볼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잘 말해보면, 여기에 '류건우'는 없더라도, 내 부모님이 계시는지는 확인할 수 있….
'쓸데없는 소리.'
나는 생각을 털었다.
여기에… 부모님이 계셨다는 기록이 있더라도, 내가 지금 보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쓸데없이 동요만 커지겠지.
'머릿속 개소리에 넘어가지 마라.'
나는 충동을 끊고 이를 악물었다. 빠드득 소리가 입안에서 울렸다.
문제는, 그게 옆 놈한테도 들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불편해?"
"…!"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어른들이랑 같이 지내는 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을 하려던 게 아닐 텐데.
나는 맨 처음 놈의 뉘앙스를 이해했다.
'본인이 불편하냐는 뜻이었잖아.'
류청우는 좀 씁쓸하기까지 한 기색이었으나, 곧 안색을 바꿔서 편안하게 말했다.
"음, 그래도 생각은 해봐."
"…."
여기서 이대로 넘어가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형이 불편해서는 아닙니다. 꺼림칙한 것도 아니고."
"…음."
류청우는 걸어 내려가며 내 쪽을 빤히 보는 것 같더니, 쉽게 대답했다.
"그래."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진짠데요."
"알았다니까. 고마워."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나는 발에 걸리는 돌을 찼다.
"그게 아니니까, 형이 이상한 부채감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
명절에 직장동료 부르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지 않은가.
아마 평상시의 이놈이었다면, 썩 친해 보이는 동갑내기 놈들 집이나 가보라고 권유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 집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대신 말이지.'
그런데 굳이 이러는 건… 이놈 머리에 '박문대한테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딱 박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겠다.
"전 사고에서 형 대신 다친 게 아닙니다. 그냥 운이 더럽게 없던 거죠."
차에서 이놈 대신 철근 맞은 거 말이다.
류청우는 잠시 말이 없었으나, 곧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맞다니까요. 시트 위치상…."
"문대야, 나도 눈 있어. 네가 날 밀치는 걸 봤다고. …너 그걸로 죽을 뻔했어. 그리고 후유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
류청우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하던 일을 그만뒀어. 죽을 뻔한 것도 아니었다는데."
"…."
그래, 나도 그걸 봤었다.
나는 '진실 확인'에서 봤던 놈의 사고 장면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팔 작살 나고 엉엉 울던 놈을.
'…어쩌면, 그게 나한테도 영향을 줬을지 모르지.'
거기까지는 사실이다.
류청우의 사고 다음 장면을 머리에서 뭉개며, 나는 조용히 놈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넌… 이미 후유증으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야. 예전이었으면 이 정도 등산은 그렇게 숨이 차지도 않았을걸."
"…."
"크게 다치고, 너무 오래 누워 있던 게 컨디션에 준 거겠지."
아닌데.
야, 그건… 바쿠스 없어서 그런 건데.
'다음 뽑기에서 도로 뽑을 거야, 새끼야.'
그리고 넥타르 써서 다른 후유증도 없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복했는데 무슨.
그냥 내가 벌크업이나 좀 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식은땀이 다 나네.'
그러나 이런 웹소설 설정을 모르는 민간인 류청우는 미간을 누르고 있었다.
"나 대신 그렇게 된 거나 다름없지. 그런데 어떻게 내가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
"…."
그래. 아무튼 류청우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양궁도 그만두고 힘든 시기를 보낸 덕에, 그걸 대신 처맞은 내게 부채감이 엄청났나 보다.
"후우."
뭐, 우연히 철근에 배때기를 가져다 댔다는 건 더는 안 통할 것 같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뭐, 제가 형 목숨 구해줬다고 치죠."
"…!"
"앞으로도 많이 고마워하시면 됩니다. 필요하면 거침없이 부를 테니까 꼭 보답해 주시고."
고마워하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불편하겠구나 싶으니, 그냥 이놈이 덜 미안해할 때까지 잘 써먹기나 하자.
"아, 체력은 운동으로 커버할 거니까 괜찮습니다."
"…."
류청우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태세 전환이 순식간에 나올 줄은 몰랐나 보다.
하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웃지 마라, 정든다.
류청우가 시원스럽게 말하는 게 들렸다.
"알았어, 보답할게."
"예."
공기가 좀 가벼워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하산을 계속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명절에 형 집은 안 갈 겁니다. 저한테 제일 관심 없을 집으로 갈 건데요."
"그래, 잘 쉬어."
나는 깔끔하게 대답하는 류청우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반드시 다른 놈 집에 가야 한다면, 제일 조용할 곳으로 가야지.
물론 내가 바라는 조용한 명절 휴가와 정반대되는 난리가, 이 예능이 방영된 밖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완전 대박! 테스타 최고!
"…감사합니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제작진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완전히 이해했다.
'프로그램이 생각보다도 잘됐군.'
3화의 시청률 성적표가 6.1%까지 나온 것이다.
'케이블에서 하는 아이돌 예능이 이 정도면 규격 외지.'
CVN의 간판 정규 예능만큼 높은 수치였다.
섬에서 먹은 냉동 닭의 PPL을 나중에 땄는데, 그것도 판매량이 치솟았다고 하니 얼마나 반응이 좋은지는 뻔했다.
기사회생하다 못해 대성공이 뜬 제작진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밝을 수 없었다.
-저희 시즌 2 너무 하고 싶다니까요!
"좋죠."
당연히 방송국 내부 윗분들도 함박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듣기로는 우리 다음으로 올 땜빵용 파일럿 프로그램을 몰아내고 대신 비하인드 스페셜화를 편성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한다.
'뭐,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촬영 운이 좋았던 측면이 크다만.'
사고가 빵빵 터지는 데다가 예측이 안 되니 흥미진진해서 재밌었겠지. 솔직히 그 맛을 다시 살리긴 어려울 테니 다음 시즌은… 모르겠는데.
'그래도 말은 잘해주는 걸로 할까.'
이 제작진이 약속을 지키긴 했다.
조난 타임 끝나자마자 남은 제작비 다 거덜내서 럭셔리한 휴가를 만들어주긴 했으니까.
그때 먹은 대게가 인당 세 마리는 될 것이다. 음, 차유진은 다섯 마리.
"저희도 스케줄 가능하면 다시 출연하고 싶어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에이~ 고마워요. 문대 씨!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신나서 멤버 전원에게 전화를 돌려대는 PD와의 대화를 거기서 마무리했다.
"PD야?"
"예."
"계속 전화하네."
배세진이 툴툴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 좋으신가 보죠. 프로그램이 잘돼서."
"그건… 그렇지."
배세진은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그 꼴이 다 나가긴 했지만."
"…."
그래. 아주… 개그맨이 따로 없었지.
나와 배세진은 2, 3화에서 했던 뻘짓들이 하나하나 강조되어서 방송을 탔던 것을 떠올리며, 잠시 차 안에서 침묵했다.
'팬사인회가 두렵군….'
그 고요함은 잠시 후, 운전대에서 나온 말로 깨졌다.
"세진 씨, 여기 맞으시죠?"
"아, 네! 이 아파트요."
배세진이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고 안색을 회복한 건 순식간이었다.
'대출 안 낀 자가 아파트의 위력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저기 맨 위층이야!"
배세진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집에 계신댔어."
"네."
그렇다.
나는 이번 연휴, 배세진의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들어보니 아무 데도 안 가고 조용히 어머니와 보낼 계획이라고 하더라고.
명분도 좋았다.
-그, 집들이라고 생각하고 오든가!
-그러죠 뭐.
-…?!
-초대 감사합니다.
배세진은 그렇게 본진을 털렸다는 이야기다.
'빈말이었다면 좀 미안한데.'
혹시 몰라서 과일이랑 고기를 좀 비싼 놈으로 사 오긴 했다.
여차하면 보여주기용으로 하루 이틀만 있다가 빠질 생각이니, 괜찮겠지.
"어서 와요~ 여기가 문대구나!"
"안녕하세요."
"들어와요, 들어와~"
배세진의 어머니는 부드러운 인상의 밝은 분이셨다.
"안 그래도 방금 너희 예능 또 봤다? 어휴, 우리 애기들 정말 고생 많았네…."
그래. 배세진은 외동일 텐데, 하나뿐인 자식이 섬 가서 개고생하는 꼴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
"그래도 너무 재밌더라!"
"…음, 예."
뭐, 즐거움도 드렸다니 그건 다행이군.
어쨌든, 배세진은 짐작했던 대로 제법 어머니와 화목한 모양이었다.
"문대가 참 실물도 훤칠하네. 우리 애가 그 프로그램 나올 때부터 문대 이야기를 많이 했어."
"내, 내가 언제요!"
"뭘, 노래 엄~청 잘하는 동생 있다며~"
"으으윽!"
배세진은 수치로 고통받으며 침몰했다. 배세진의 어머니는 깔깔 웃으며 그런 아들을 꼭 껴안았다.
"…."
뭐, 보기 좋은 모자지간이다.
잠시 후, 충격에서 회복한 배세진은 어머니에게 등짝을 도닥거려진 뒤에 비척비척 일어섰다.
"…방 보여줄게."
"예. 감사합니다."
굳이 놀리진 말자.
나는 얌전히 내가 묵을 방을 소개받고, 그 김에 집까지 살피게 되었다.
"벽지는 내가 골랐어. 하늘색."
"보기 좋네요. 깔끔하고."
"…큼, 괜찮긴 하지. 아, 여기 이 수납장도 이렇게 하면!"
"오."
본인이 마련한 집이라는 것이 대단히 뿌듯했는지, 배세진도 후반에 가서는 완전히 살아났다.
그리고 내가 사 온 과일을 먹으며 시간을 좀 보낸 뒤 저녁.
"잘 먹겠습니다."
"차린 건 별로 없는데 많이 먹어요~"
저녁은 녹두전과 불고기 잡채였다.
어머니 혼자 준비해 놓을 걸 걱정한 배세진이 미리 맛집에다 배달을 맡겼다고.
'명절 느낌은 나는군.'
어쨌든, 썩 괜찮은 시간이었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다.
"내가…!"
"됐고 그릇 주세요."
나는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배세진에게 설거지를 강탈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내 방으로 돌아왔다.
탁.
"후."
침대에 앉아, 나는 팔짱을 꼈다.
여기저기 연락할 곳이 있어서 밤까지 혼자 있겠다고 했으니, 여유도 충분하다.
"상태창."
때가 됐다.
'진실 확인'을 누를 적기가.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2화]
사실 '진실 확인'을 반드시 해야 하는 마지노선까지는 기간이 더 남아 있다. 상태이상 카운트다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걸 여유롭게 까볼 시간이 추석 연휴 이후론 없다는 점이다.
'새 앨범 준비한 뒤에 바로 연말 준비야.'
그룹의 앨범 활동 역량이 건재함을 보여주려면 이번 연말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진실 확인' 부작용으로 쓸 시간은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기를 놓칠 순 없지.'
나는 내가 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장 타당한 판단을 내렸다.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면 몇 달 더 개겨볼 걸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만, 일단… 그건 생각하지 말자.
이걸 계속할 수 있는 미래를 우선 고려하기로 합의했으니까.
나는 숨을 내쉬었다.
'간다.'
[진실 확인' - click!]
나는 팝업창의 단어를 눌렀다.
달칵.
예상했던 대로, 시야가 사라졌다.
그리고 의식이 아래로 빨려들 듯 가라앉았다.
"스무 살이라고."
"…네, 네."
나는 익숙한 식당에 앉아 있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한 뒤 제법 자주 오는 단골 국밥집이다. 가성비가 좋고 혼자 와서 먹기 편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내 맞은편에는 안색 안 좋은 어린애가 하나 앉아서 국밥을 뜨고 있다.
이 옆 모텔 앞에서 외투도 없이 죽을상을 하고 엎어져 있길래, 신고하려다가 밥이나 먹이러 온 것이다.
'쓸데없는 오지랖.'
자기 인생 챙기기도 바빠야 할 놈이 별짓을 다 한다 싶다만, 이미 저지른 일은 별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앞에 앉은 놈이 움찔거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제가 돈이 없어서."
"…."
네 꼴을 보고 달라고 할 생각이 있었겠냐.
"나 먹는 김에 산 거니까 다 먹어라."
"…감사합니다."
만원도 안 되는 밥 얻어먹는 걸로 무슨 죄인처럼 구는군. 내가 썩 누굴 사줄 몰골로 안 보여서 그런가.
나는 잠시 계산대 옆 거울에 비친 나를 확인했다.
남방을 하나 걸치고, 모자와 안경 쓴 공시생이다. 그래도 사지는 멀쩡해 보인다.
내 앞의 놈보다야 사정이 나아 보인다는 뜻이다.
'음.'
나는 깍두기를 집어 드는 놈을 훑었다.
스무 살이니 가출은 아닐 테고… 그냥, 나랑 비슷한 놈인데 대학을 못 갔겠지.
"연락할 곳 있어?"
"…."
"알바는?"
"…잘려서요."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군. 나는 숟가락을 들고 국밥을 한술 떴다.
그리고 말했다.
"주민센터부터 가."
"네…?"
"행정복지센터 말야. 거기서 기초 생활수급 조건 되는지부터 확인해라. 그거 되면 매달 돈 나오니까. 그거 아니어도 챙길 만한 구석 있을 테니 뭐든 끈질기게 물어보고."
나는 일방적으로 놈에게 방법을 계속 읊고, 식사를 계속했다. 맞은편의 어린애는 당황한 것 같았으나, 반박하진 않았다.
'불편하겠지.'
그 나이대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빠르게 남은 국물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간다. 먹고 가라."
생각이 있으면 가보겠지.
"자, 잠깐만요!"
그러나 패딩을 걸치는 도중, 당황한 부름이 들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도.
"저기…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
나는 잠시 멈췄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을 뱉었다.
"너 고깃집 알바해 본 적 있냐."
"네? 해, 해본 적은…."
하긴 미성년자가 고깃집 알바는 힘들다. 친인척이 아니면 보통 잘 안 받아주니까.
나는 후보 맨 위에 줄을 긋고 다음 것을 꺼냈다.
"편의점 알바 소개해 줄 테니까 거기 연락해 봐라. 전 알바생이 알려줬다고 해. 번호 줄 테니까."
고깃집 사장이 제일 사연팔이에 약하긴 했지만, 편의점도 상도덕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맞은편은 더 당황한 기색이다.
"포, 폰이 없어서요…."
"…."
나는 한숨을 참고, 스마트폰을 뒤져서 내 번호와 편의점 사장의 번호를 휴지에 적어줬다.
"선금 받고 공짜폰은 하나 개통해. 없으면 일을 못 하니까."
"…."
"받아."
놈은 멍한 얼굴로 휴지를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
아마도 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슬슬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저, 성함이…."
그래, 이 지랄까지 했으니 통성명은 하는 게 맞겠지.
"…류건우."
그래. 참 잘하는 짓이다, 류건우.
처음 본 애한테 네 사정을 투영해서 쓸데없이 시간과 생각을 낭비하고 있는 꼴 좀 봐라.
"넌 이름이 뭔데."
맞은 편의 어린놈이 고개를 들더니, 제법 씩씩하게 대답했다.
"박문대예요."
특이한 이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야말로 가게를 나왔다. 이 괴상한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이후로도 이 '박문대'라는 놈과 가끔 연락하긴 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밥 얻어먹었던 박문대입니다. 편의점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편의점 알바비를 받았다고 밥 사겠다는 문자를 받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나 별로 만난 적은 없다. 굳이 만날 이유도 없고, 내 삶 챙기기도 버거워서 말이다.
이놈이 꼭 갚겠다는 소리를 하긴 했으나 별 기대는 없다. 밥 한 끼 외엔 뭘 해준 것도 없고.
그냥 가끔 만나서 밥 먹는 건 괜찮았다. 매번 아무도 안 만나고 처박혀서 책만 보니 사회성이 박살나는 것 같아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나 별개로 내 성적표는 괜찮지 않았다.
"미쳤나."
면접에서 떨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심지어 객관적으로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블라인드 같은 소리 하네, X새끼들.'
가정사에서 마이너스 받았다는 것밖에는 추측할 만한 지표가 없다.
'그 망할 가정사도 잘 포장했는데.'
교수 면담 때도 잘만 먹혔는데 말이다.
보통은 플러스가 될 텐데, 올해 면접관 운이 더럽게 없었던 모양이지.
"…후."
나는 매트리스에 드러누웠다. 뇌가 고장난 것 같다.
'술이나 마실까.'
그것밖엔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공시생 삼 년, 그 빌어먹을 면접에서 떨어지고 난 뒤 혼자 술을 마셨고….
다음 날 아침.
포기했다.
"손절하자, X발."
이유는 간단했다. 벌어둔 돈이 다 떨어졌거든.
애초에 처음 계획부터 여기까지만 해보려고 했다. 2년 차에 한 번, 3년 차에 한 번.
데이터팔이 한탕 더 뛰어보면 어떻게 충당될 수도 있겠다만… 내 나이도 그렇고, 취직하는 게 더 안전했다.
'애초에 고용 안전을 위해 준비한 건데 목적과 수단이 도치되면 안 되지.'
나는 최악의 경우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 무슨 끔찍한 사고가 생겨도 나한테 일과 급여를 줄 직장을 가지고 싶었던 거니까.
"…."
급수를 낮춰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어쨌든 그것도 새로운 비용이 들기 때문에 보류했다.
'29살이면 막차는 타겠지.'
나는 그해, 적당한 중견 기업에 취직했다.
그리고 제법 잘 적응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내일까지 해놓으면 된다."
"네."
겨우 29년 살면서 내 정신력을 다 긁어다 써서 바닥이 난 건지, 아니면 내 성향이 사회 부적응자인 건지.
나는 야근 후 퇴근길, 버스에서 종종 생각했다.
"…."
그냥, 별로 살맛이 안 났다.
감흥이 없었다.
삶이 일방적으로 피곤했다.
특별히 나쁠 건 없으나, 좋을 것도 없다.
회사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지만, 사내 정치도 무료했다. 승진도 큰 감흥은 없다.
'이게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닌 것 같은데.'
이 삶 전반에 누적된 것 같은 무기력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잠깐 정신과 상담도 생각했으나 턱도 없는 짓이었다. 잘릴 일 있나.
이직도 생각했지만, 썩 의욕이 나진 않았다. 일단 이 회사가 이직 준비할 시간을 안 주더라고.
"…."
나름대로 고민해도 별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가끔 술 한잔하는 것 외에 내가 흥미롭게 할 만한 게 있나.
반짝 떠오른 게 있긴 했다.
사진?
'과해.'
그건 너무 비싼 취미였다. 그럴 시간도 돈도 없다.
그렇다고 돈 버는 데이터팔이는 지속 가능한 직업이 아니라 퇴사하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투자한 만큼 못 번 케이스가 수두룩했다.
"흠."
나는 내 원룸에서 인터넷으로 밧줄과 진통제를 주문했다. 잠깐 흥미로웠다.
그래도 몇 주간 생각을 거듭했다.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도, 마지막 주말 밤엔 썩 좋지 못한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행 직후, 의자를 걷어차며 짧게 스친 생각이 있긴 했다.
'이게 우울증이었나?'
그러나 길게 그 생각이 이어지진 못했다.
숨이 막혀서….
"허억."
나는 침대에서 튀어나오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목으로 가져다 댔다.
'숨이….'
멀쩡했다.
"하."
나는 침대 헤드에 상반신을 걸쳤다. 잠옷이 땀에 절어 있었다.
방금 겪은… 아니, 이게 겪은 게 맞나?
그동안은 남의 기억을 확인하는 형태였다면, 이건….
'그게 나라고?'
이건, 내가 기억을 '회상'하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런 일을 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내 마지막 기억은 공시 떨어지고 술 처마시다 잠든 것이다. 그 후의 취직과 그 정신 나간 자살 시도까지의 기억은 아예 없단 말이다.
게다가 일단, 일단….
'난 '박문대'를 만난 적이 없는데.'
이 첫 장면부터 갈린다.
그런 손해 보는 바보짓을 굳이 했다면 내가 잊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 '박문대'의 몸에 들어와서 놈을 처음 봤다.
게다가 시간대도 이상했다.
"박문대가 안 죽었어."
분명 내가 본 첫 '진실 확인'에서 박문대는, 그 모텔에서 수면제로 극단적인 시도를….
그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이상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시도는 시도일 뿐이다.
'박문대가 죽진 못했나?'
생각해 보자.
박문대는 처방도 없는 수면제를… 그러니까, 그냥 수면유도제를 약국에서 구매했었다.
'처방도 없는 약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나?'
의심을 시작하니 확실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그걸 아무리 처먹어도 기껏해야 부작용이나 겪고 죽지는 못하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이번 '진실 확인'에서 본 계절과 날짜를 조합하면….
'박문대가 자살 시도한 직후에 날 만났군.'
모텔 앞에 넋 나간 채로 있던 놈.
그게… 앞뒤가 맞았다.
"…."
그리고 이 추측이 맞다면, 나는 죽지 않은 박문대의 몸에 들어왔다는 말도 된다.
"그럼 넌 대체 어디로 갔냐."
그러나 답은 없었다. 지금까지 없었는데, 있을 리가 없다.
나는 하다 하다 상태창을 불러 물었다.
'혹시 네가 박문대냐.'
그러나 상태창도 응답은 없었다. 대신 이상한 글귀만 떴다.
[-정산 중-]
무슨 X발 개소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박문대의 행방을 알려줄 기색은 없었다.
아니, 박문대의 행방만 중요한 게 아니다. 방금 확인한 뜬금없는 내 미친 짓은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진짜 그랬다고?
'내가 그 정도로 미친 새끼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했다고 치자면, 대체 왜 그 기억은 없어졌단 말인가. 무슨 29살이 아이돌 마지노선이라도 되나?
"미치겠네."
헛웃음이 다 난다.
차라리 박문대면 모를까, 애초에 여기는 '류건우' 자체가 없으니 뭘 탐색해볼 여지가 없다.
처음 박문대의 몸에 들어오자마자, 내 휴대폰 번호, SNS부터 대학교까지 싹 훑어봤는데 계정도 없….
'…잠깐.'
내가 찍은 데이터는 남아 있었잖아.
나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렇다면… 만약 '이곳에 류건우가 과거에 존재했었는지'로 명제를 바꾼다면?
관련 흔적이라도 알아볼 방법은… 있다.
-그래, 문대야. 괜찮으면… 이번 추석 연휴 때는 숙소 말고 멤버들 집에 가는 게 어떨까. 아, 우리 집도 괜찮아.
류청우의 집.
가족여행 앨범이든 영상이든, 나와 부모님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
똑똑.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문대? 너 괜찮아?"
배세진이다. 내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나.
"…예. 쥐가 나서, 잠깐…."
"어, 그, 안마기라도 줘?"
"괜찮습니다. 풀렸어요. 잠시만요."
나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방문을 열자, 주방 식탁에 앉아 있
던 배세진이 반색하다 멈칫했다.
"너, 옷이…."
"네."
외출복 차림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만날 사람이 생겨서."
확인해 봐야겠다.
유독 평화로운 명절 첫날이었다.
"깜이, 이리 와."
"왕!"
류청우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까만 토이푸들을 소파에 올려주었다. 전 냄새와 TV의 명절 특선 프로그램 소리가 분위기를 돋웠다.
하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할아버지 댁은 아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 느낌이 부드럽긴 했다.
"오빠 나 간다!"
"그래, 잘 다녀와."
"아씨, 좀 늦게 오지!"
"하하, 그러게."
동생은 오랜만에 집에 온 오빠에게 한탕 거하게 얻어먹지 못한 것에 투덜거리며 집을 나섰다. 류청우는 웃으며 동생을 배웅했다.
강아지까지 넷뿐인 집안이었으나 허전하진 않았다. 따스한 말이 오갔다.
"그래, 같이 있는 동생들은 어떠니?"
"여전히 좋은 애들이에요. 착하고…."
무심코 배세진까지 동생군에 넣어서 생각하던 류청우는 황급히 배세진을 동갑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러다가, 동생인데도 상당히 어른스러운 한 멤버도 떠올렸다.
"그래, 착한 애들이니까 우리 아들이 명절에 집에 초대하려고 했지~"
"하하하."
마침 부모님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제일 어른스러운 동생. 박문대를 명절에 이 집에 초대하자는 류청우의 말 말이다.
당연하지만, 부모님은 이 생각에 선선히 동의하면서도 열렬히 반기진 않았다.
류청우의 친한 동생이라도 명절에 가족 구성원이 아닌 낯선 사람이 집에 있는 것이 편한 일은 아니니까.
'음, 차라리 세진이 집에 간 게 나았으려나.'
박문대는 눈치가 빠르니, 오히려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고 류청우는 반성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류청우는 테스타의 단체메시지방에 강아지 사진을 하나 올리며, 반응처럼 올라오는 온갖 명절 음식을 보았다.
"다들 잘 지내네."
그렇게 평온한 하루가 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밤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시간대.
띵동-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택배도 아닌지, 문밖의 인영은 떠나 지 않는다.
"제가 볼게요."
"알겠어, 아들~"
류청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토커인가?'
류청우는 다소 부정적인 예감을 하며 바로 누가 서 있는지 확인했다.
"…!"
예상도 못 한 사람이 인터폰 밖에 서 있었다.
류청우는 당장 문을 열었다.
"…문대?"
"예, 형."
그 말대로, 박문대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만, 평소같이 차분한 눈이 아니라 형형한 눈으로.
"말씀대로 놀러 왔는데, 좀 들어가도 될까요."
류청우는 어쩐지 오싹함을 느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3화]
명절 연휴 첫날, 밤 9시에 예고도 없이 집 대문 앞에 찾아온 박문대.
류청우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놀러 와도 좋다고 단체방에 올리긴 했지만….'
음식이 맛있다며 농담처럼 올린 말일뿐이다.
그러나 이 야밤에 사전 연락도 없이, 명절을 같이 보내자는 자신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은… 대단히 기이했다.
'그것도 그 박문대가?'
냉철하고 상황판단력이 좋고, 사리에 밝은 동생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어두운 바깥에 서 있는 박문대는….
"형."
"…아, 미안. 그래."
류청우는 잠시 멈춰 있다가, 발을 옮겨서 박문대가 집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밤에 밖에 서 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뭐지?'
평온한 박문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씻으려고 하는데요."
"…저쪽이야."
류청우는 화장실을 알려주며 생각했다. 박문대가 씻고 오면 좀 차분히 대화해 봐야겠다고.
'부모님께도 미리 말씀드리자.'
지금쯤 오가는 목소리로 방문자가 자신의 지인인 것은 짐작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류청우는 문을 닫으려 했으나….
박문대 뒤에서 따라오던 배세진의 머쓱한 얼굴을 마주했다.
"…?"
왜 네가 거기서 나와?
"어, 안녕."
"그, 그래. 안녕."
배세진이 슬그머니 과일을 들어올렸다.
"이거… 사과인데."
"아, 고마워."
류청우는 황급히 과일을 받아들었다. 묘한 긴장감이 사라져 있었다.
'음.'
그는 그제야 물어보았다.
"놀러 온 건 반갑네. 그런데 둘이… 무슨 일로?"
"…난 그냥 박문대 따라온 거야."
배세진은 힐끔 박문대가 들어간 화장실 쪽을 보았다.
"너희 집에 가겠다는데, 약간… 그, 뭐야. 궁금해서."
'느낌이 이상해서 따라왔구나.'
류청우는 배세진의 걱정을 읽으며 물었다.
"혹시 왜 오겠다는 건지는 들은 거 없어?"
"없어. 음, 그런데…."
배세진은 류청우에게 작게 속삭였다.
"내 생각엔 뭔가 기억난 것 같아."
"…!"
"그, 매번 갑자기 자다가 기억났잖아. 지금까지."
류청우는 즉시 작년 여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람이, 공포와 고통 앞에서… 원래 좀 화내고 남 탓도 하고, 그래도 괜찮거든.
술을 마시고서야 겨우 속내를 털어놨던 박문대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을.
차후 박문대의 알코올 중독 증상을 알아차리며 내심 류청우는 그때의 접근 방식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어쨌든, 별개로 충격적인 경험이었기는 했다.
침착하고 똑 부러지던 동생이 갑자기 나에 대한 거부감을 주체하지 못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경험하면 누구든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것도 이전 기억이 흐릿하다가, 번뜩 기억이 돌아와 그랬다는 걸 알음알음 알게 된 상태라면 더 했다.
'비슷한… 느낌인가.'
류청우는 아까 본 박문대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긴장감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막상 화장실에서 나온 박문대를 보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형,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박문대의 얼굴엔 류청우를 향한 거부감은 없었다.
그냥… 눈깔이 뒤집혔다는 게 올바른 표현 같았다.
'이런.'
류청우는 배세진과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음, 일단… 우리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리고 대화할까?"
"예."
배세진이 황급히 손을 씻고 나와서 박문대의 옆에 붙었다. 그리고 류청우는 둘을 부모님께 소개했다.
어쩐지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여기… 동생들인데, 과일 가지고 잠깐 놀러 왔어요."
"어머!"
"어서 와요~"
부모님은 좀 놀라신 것 같았으나, 어쨌든 좋게 둘을 환영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둘은 깍듯하게 인사했으나, 류청우는 혹시 몰라 박문대의 눈빛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드렁한 동태눈을 한 박문대를 발견했다.
'왜… 저런?'
목표물이 아닌 탓이었다.
류청우는 더 혼란해졌으나, 어쨌든 거실에 박문대와 배세진을 앉혔다.
깜이가 뛰어와서 박문대의 무릎에 앉고, 박문대는 능숙하게 까만 강아지의 귀를 긁으며 말했다.
"형."
"그, 그래."
다시 박문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제 노고에 보답해 주신다고 했었죠."
"…그랬지."
그런… 단어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으나, 어쨌든 류청우는 솔직히 답했다. 옆에서 배세진이 동공을 떨고 있다.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생겼습니다."
박문대는 별 표정 없이 빠르게 말했다.
"형 어릴 때 사진 좀 보고 싶은데요."
"…?"
생각도 못 한 말이 나왔다.
"아니, 기왕이면 영상으로. 단란한 대가족의 한때가 포함된 기록은 없을까요."
류청우는 당연한 질문을 했다.
"그걸 왜?"
"그냥요."
무적의 답변이었다.
배세진이 뒤에서 입 모양으로 외쳤다.
'어릴 때 기억!'
"…!"
그래. 어릴 때 기억과 관련된 단서를 잡아서, 비슷한 장면을 보고 자극을 받고 싶은 걸 수도 있겠다.
'세진이네에서 내가 제일 가깝던가?'
류청우는 막연히 생각하며, 일단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대충 짐작이라도 했다는 안도의 미소였다.
"그래, 그럼 있는 걸 좀 꺼내올까?"
"네. 부탁드립니다."
류청우는 빠르게 안방으로 가서 앨범과 비디오를 꺼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본 것은 기계적으로 깜이를 현란히 쓰다듬고 있는 박문대와, 긴장한 배세진이었다.
"…."
류청우는 잠시 고민했으나, 박문대가 좀 얼이 빠졌을지언정 지난번처럼 충격에 어쩔 줄 몰라 하진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기로 했다.
"여기, 앨범부터 볼래?"
"앨범을 보면서 비디오를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형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정도를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요구가 구체적이고 나이대가 정확한 걸 보니, 정말 배세진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겠다고 류청우도 생각했다.
"하하, 그래."
류청우는 약간 긴장을 풀며, 비디오를 재생했다. TV에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흘러나왔다.
[청우야~ 여기 손 흔들어!]
쑥스러운 얼굴의 어린 자신이 화면에 들어찼다. 덩달아 류청우 자신도 약간 민망했다.
아마 이때도 추석이었는데, 온갖 친척들이 차량을 대절해서 다 함께 놀러 갔던 것이 기억났다.
"…몇 학년 때야? 키 크네."
"아마 2학년이었을 거야."
배세진의 표정에 미약한 패배감이 떠올랐으나 류청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옆에서 박문대가 강아지 턱을 긁으며 이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
어쨌든, 그렇게 앉은 세 사람은 앨범과 비디오를 시청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님은 복도를 오가다 보며 흐뭇한 시선을 던졌지만,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왜 보여주냐'는.
아마도 자신이 부상으로 은퇴한 뒤, 온갖 매스컴에 시달리며 타인에게 방어적으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류청우는 희미한 죄책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문대가 내 목숨을 구해준 건 말해야겠다.'
명절에 박문대가 온다면, 원래도 말하려고 했으니까.
류청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영상을 계속 시청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와아아!]
홈비디오가 또 교체되었다.
배세진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온 강아지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다.
'별일 아니었네.'
이대로 앉아서 이야기나 좀 나누다가 돌아가려나.
야식은 몸에 안 좋지만, 그래도 명절이니 건강한 선에서 뭐라도 먹여 보내야겠다고 류청우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옆자리의 박문대가 벌떡 일어났다.
"…!"
"잠깐."
박문대는 리모콘을 들어 영상을 멈췄다.
그리고 TV 화면을 향해 걸어갔다.
어딘지, 확신에 찬 얼굴로.
'나다.'
보자마자 알았다.
화면 속, 펜션 소파 구석에 앉아서 책을 들고 심드렁한 얼굴을 한 저놈은… 류건우였다.
"…."
어쩐지, 긴장이 쭉 풀리는데.
머리에 피가 도는 느낌이다. 시원했다.
'여기도 있었구나.'
이 비디오는 아직 초반이다. 좀 더 돌리면 부모님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참자.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그 컷을 찍었다.
찰칵.
그쯤 되자, 배세진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거… 아는 사람이야?"
"…."
맞다.
당장 마음이 급해서 변명을 깜빡했군.
'뇌가 썩었나.'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는 사람인데,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요."
"아…."
변명은 오래 끌수록 변명 같아진다. 빠르게 대답하다 보니, 내가 '박문대'에게 밥을 샀던 장면이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이 말이 나왔다.
배세진이 반색했다.
"그럼 혹시 이 사람이 기억나서 온 거야?"
"예? …예."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어주는군. 고맙다.
나는 단서 추적 겸, 살을 붙였다.
"이름이 류건우라, 혹시 청우 형과 친척인가 해서요. 류씨가 많지 않잖아요."
"그렇구나. …음. 이렇게 보니 생김새도 좀 닮은 것 같네."
그런가?
어쨌든, 이름이 비슷하다는 허술한 변명이 생김새 덕에 잘 먹혔는지, 류청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절하게 말했다.
"한번 부모님께 여쭤볼까? 혹시 아는 친척인지."
"…감사하죠."
솔직히 워낙 먼 친척이라 몇 년에 한 번 정도나 얼굴을 봤으니 모를 것 같다만, 시도는 나쁘지 않겠지.
'이랬는데 이미 중학교 때 사고로 저승에 있다고 하면….'
무슨 오해를 받을지 약간 아찔해졌으나 밀고 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지.
그리고 부모님에게서는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말이다.
"으음…."
난감한 건 난데 이 두 놈이 고민한다.
기억상실증이 임팩트가 탁월해서 그러나.
심지어 이런 제안도 나왔다.
"문중에 물어볼 수도 있어. 대충 나이대랑 이름 아니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럼… 감사하죠."
"이런 걸로 감사하긴."
류청우는 웃으며 전화를 걸었고, 곧 몇 마디 대화 뒤에 상당히 긍정적인 소식을 전해줬다.
"빨리 알아보고 말씀 주시겠대."
"명절인데 감사하네요."
"하하, 그것도 전해드릴게."
그렇게, '류건우의 흔적 추적'은 제법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남은 대화 화제는 강아지만 남게 되었다.
배세진이 슬그머니 물었다.
"…그, 끝이야?"
"그렇죠."
아무래도 배세진은 어머니가 혼자 집에 계시는 게 신경 쓰일 것이다.
요청한 것도 아닌데, 따라와 준 것이 놀라울 뿐이다. 물론 아까는 오든 말든 신경도 못 썼다만.
"내가 전화로 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류청우도 완곡하게 '돌아가도 된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그렇게 나는 류청우의 부모님께 한 번 더 인사드린 뒤, 배세진의 집으로 함께 귀가했다.
물론, 인사는 잊지 않았고.
"과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는 김에 산 거지 뭐…!"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꽤 뿌듯해 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정신없는 중에 경우 없는 놈으로 찍히지 않도록 도움을 받았으니, 내일 뭐라도 명절 음식을 하나 해볼 생각이다.
"후."
그렇게, 나는 다시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진실 확인'으로 본 광경때문인지 잠이 잘 오진 않았다.
"…."
X발, 때려 치자. 어쨌든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지금 생각해서 뭐하냐. 답도 없는 것을.
나는 생각을 털고, 대신할 만한 놈을 불렀다.
"상태창."
뭐, 아직도 그 '정산 중'이니 하는 게 떠 있을 것 같긴 하다만….
퍼퍼버버벙!
"…!"
갑자기, 눈앞에 꽃가루가 터졌다.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꽃가루들은 팝업에서부터 튀어나와, 아름답게 난반사하며 침대 위로 비산했다.
그리고 상태창은 황홀하게 무지갯 빛으로 번뜩였다.
[대성공!]
이용자 : 박문대(류건우)는 모든 상태이상 제거에 성공했습니다!
보상 : 영구적 상태창, 칭호
[칭호 생성!]
: 성공한 자 (아이돌)
감미로운 인생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뭐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