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눈앞의 팝업에선 여전히 반짝이와 꽃가루가 떨어진다.
그러나 그 광경이 얼마나 초현실적이든 말든, 팝업 안의 내용이 문제였다. 이렇게 끝이라고?
'이게 뭐야.'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다.
물론 1년 주고 아이돌 못 되면 돌연사할 거라 위협당하는 미친 짓을 그만두고 싶긴 했지.
그러나 이런 방식, 이런 타이밍은… 지금 장난하나.
"너 뭐냐고 X발."
다짜고짜 기억에도 없던 '박문대'와의 친분에, 기억에도 없던 공시 떨어진 이후의 삶에, 마지막엔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르는 것까지 보여주더니.
아무 설명도 과정도 없이 무슨 손절 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끝내고 있다.
"그럼 왜 보여준 건데."
그 망할 '진실 확인'만 아니었어도 그럭저럭 내 성공을 기분 좋게 받아 들이고 계속 살았을 것 아닌가.
뭐, '류건우'는 이미 한번 삶을 포기했으니, 그 삶은 신경 쓰지 말라 이거냐?
박문대로 그냥 잘살아보라고?
"그럼 원래 있던 놈은 어디로 간 건데."
원래 박문대는 대체 어디 갔냔 말이다. 그리고 내가 확인한 류청우의 비디오 속 '류건우'는 뭔데.
'진실 확인'이고 나발이고 뭐 하나 명확해진 것이 없다. 그리고 뭐 하나 납득가지 않았다.
하지만 팝업의 변화는 없었다.
"…후."
그래.
멍청하게 홀로그램에 대고 소리 지르지 말고, 일단 상황 파악부터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팝업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했다.
우선, 처음 뜬 칭호부터.
[칭호 : 성공한 자 (아이돌)]
-당신은 성공했습니다.
: 상태이상 발생 영구 제거
"…."
갑자기 또 '상태이상'이 떠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군.
그러나 이걸 보장하는 놈도 그 '상태이상'을 띄우는 시스템이란 점에서 썩 신뢰할 순 없다. 패스.
그리고… 보상 탭에 칭호 외의 다른 하나.
[영구적 상태창]
앞으로도 내가 나와 다른 놈들의 상태를 스탯화하여 확인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음."
나는 팔짱을 꼈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 머리가 다시 식었다.
이상했으니까.
'내가 너무 유리하지 않나.'
나한테 나쁠 게 없었다. 업계에서 이렇게 유용한 능력이 없을 것이다. 여차하면 기획사를 차려도 실패하지 않을 필승 능력이지.
이런… 초자연적 보상을 나한테 남기고 끝낸다라.
아무런 사전 고지도 없이?
"…."
빡쳐서 손절이니 뭐니 했으나, 이건… 손절이라기보단 서비스 종료에 가까운 것 같다.
이 시스템은 그냥 내가 배당받은 상태이상을 다 끝냈으니 짐 뺀 것이다.
내 궁금증이나 이 사태의 원인을 설명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망할."
모르겠다.
나는 허탈하게 팝업을 보다가, 그냥 누웠다.
그래 X발, 어쨌든 상태이상은 졸업이다. 마음대로 살아도 돌연사할 일은 사라졌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씁쓸한 뒷맛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잠들 수 있었다.
망할 축하 팝업은 아침까지 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하니 손을 움직이는 것이 그나마 편했다.
"괜찮다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나는 해물파전과 동그랑땡을 부쳤다. 그리고 예정에도 없던 양념 갈비까지 했다. 내가 사온 고기 중에 마침 생갈비가 있더라고.
집주인 모자는 안절부절못했으나, 막상 시식을 진행한 뒤에는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맛 괜찮나요."
"…응."
"참 맛있긴 한데, 아휴, 그래도 손님한테…."
손님이라.
그러고 보니, 배세진과 달리 나는 아직 숙소 외에 따로 부동산을 구매한 적은 없다.
다른 멤버들이야 원래 집이 있으니 살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나는… 집을 좀 보러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몸으로 계속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합리적인 계획이라고 판단 하면서도, 썩 내키지 않았다.
'미치겠네.'
배부른 소리라는 걸 알아서 더 기가 막힌다.
"고마워, 잘 먹었어."
"설거지 생각 말고 얼른 TV 보고 있어~"
그래도 식사는 괜찮았다. 명절 식사로도 적당했고.
그리고 멍하니 TV를 보고 있을 때 즈음, 스마트폰이 울렸다.
[류청우 형]
"…!"
'류건우'에 대해서 문중에 알아보겠다고 했었지.
'빠른데.'
나는 즉시 전화를 받았다.
"형."
-아, 문대야. 빨리 받았네.
류청우의 목소리 뒤에서 희미하게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전화의 본론이다.
-네가 봤던 그 '류건우'라는 분 말인데.
"예."
-음, 대학 이후로는 특별히 연락이 없으시대.
"…."
오.
류청우는 연락처라도 알려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는 투였으나, 이미 충분히 큰 단서였다.
'여기 '류건우'가 최소한 대학까지는 갔다는 거로군.'
나는 팔짱을 꼈다.
이건… 원래 내 행적이 맞긴 한데.
몇몇 친척 집에 신세 지던 고등학교 이후로는 아예 이쪽은 발길을 끊었다. 연락해 봤자 쓸데없는 생각만 나니까.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아쉽지?
"아뇨. 그래도 실존하는 사람이라니까 개운합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해요."
-전화 한 통 한 건데 뭐.
류청우는 약간 농담조로 덧붙였다.
-살려준 보답하려면 더 잘해야지.
"…."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야.
나는 굳이 정정해 주는 걸 포기하고, 그냥 명절 이야기나 좀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 노선을 바로 정했다.
"뭐 해?"
"노트북 좀 쓰려고요."
이제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봐야겠지.
나는 이 몸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나, '류건우'에 대해 쭉 확인했었다.
내가 쓰던 각종 포털 사이트 계정, 전화번호, 학교 계정까지 확인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대로 간다.
'살아 있던 게 아니라, 죽은 계정 흔적이 있나.'
내가 이미 삭제했거나 휴면으로 돌아갔을 계정과 흔적을 알아보는 것이다.
'내가 삭제한… 직캠용 계정의 데 이터와 영상들은 남아 있었지.'
'gunl234'의 영상들.
영린의 비 오는 날 레전드 직캠 같은 것들 말이다.
거기서 착안한 것이다.
나는 당장 검색 엔진의 고급 검색 기능을 켜서, 검색 일자를 조정했다.
과거로.
"…."
그렇게 두세 시간 이상의 검색과 탐색 후.
나는 결론을 내렸다.
'있다.'
'류건우'가 과거에 썼던 계정과 기록은 다 남아 있다.
가령 새내기 때 사진 관련 카페에 남겼던 질문 글 같은 것들.
내가 인터넷에 글이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지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있다는 것을 안 상태로 찾아보니 확실했다.
없어진 건 실시간으로 살아 있던 인터넷 계정과 전화번호, 흔적들뿐이다.
그러니까, '류건우'는… 인터넷과 현실 세계를 포함한 모든 장소에서, 내가 '박문대'의 몸에 들어온 순간을 기점으로 사라진 것이다.
'증발했네.'
그렇다. 초자연적 증발이었다.
"…후."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정리했다.
나는 사실, 처음 내가 이 몸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런 추측을 했다.
여긴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니며, 류건우는 없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살던 과거가 맞아.'
류청우의 비디오에서 본, 인터넷에서 찾은, 이 류건우는 내가 맞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작용으로 류건우가 아닌 박문대가 되었고, '류건우'는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왜 과거로 사람들이 돌아오는 건지 매커니즘을 모르는데.
하다못해 내 전에 과거로 돌아왔던 청려도 이유를 몰랐다.
"…."
'방법이 없나?'
정말 이대로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냥 집이나 살면서 정착 준비나 해야 하나.
묘한 탈력감에, 접은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메시지가 수십 통 떠 있었다.
'제법 많이 쌓였군.'
겨우 세 시간쯤 안 본 건데 말이다. 나는 명절 특수로 활발해진 단체 메시지방 위, 새로 온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선아현이었다.
[선아현 : 문대야 잘 지내고 있니? 부모님께서 연락하시려다가 혹시 네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내가 대표로 연락하게 되었어.]
그렇게 시작하는 선아현의 장문은 자신의 명절 안부를 시작으로 빙 돌아 차후 이 그룹의 활동까지 이르렀다.
선아현다운 내용이었다.
[문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원래 하던 대로만 해도 분명 좋은 앨범을….]
그런데, 이 부분이 어쩐지 걸렸다.
"내가 원래 하던 대로…."
그냥 덕담에 붙는 표현이라는 건 알았다만, 이유 없이 다시 읽게 되었다.
마치 무언가 떠오를 단서처럼….
"…!"
그래. 알겠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너도 추석 잘 보내고 숙소에서 보자.]
나는 돌아오는 답장을 확인한 뒤, 바로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벽을 보고, 생각했다.
-내가 원래 하던 대로.
다른 잡생각은 다 집어치우고.
침착하게. 내가 이 망할 상태창을 경험하며 얻은 지식만 조합해 보자.
첫 번째는, 혼수상태에서 겪은 백 일몽.
'거기선 시스템이고 상태창이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어.'
-Enjoy your daydream :)-
이딴 거만 떴지, 순 먹통이었다. 업적도 전혀 달성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뽑기는 가능했다.'
미리 얻은 뒤 삭제하지 않은 팝업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백일몽에서처럼 시스템에서 반응이 없는 지금.
내가 만일을 위해 보관해 둔 하나의 팝업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전설 특성 뽑기 Click!]
이것.
온라인 기부 콘서트를 끝나고, 공연 업적을 갱신하면서 얻은 뽑기.
딱 하나 있다.
그리고 백일몽에서도 뽑기는 할 수 있었으니, 지금도 돌릴 수 있을 것이란 걸 이미 내가 안다.
'두 번째는….'
나에게만 뜨는 이 상태창이, 내 성공에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청려는 상태창이 없었다. 아마 청려가 만났다는, 미래에서 왔다는 노인도 그랬겠지.
나만 이걸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특히 이 점이 드러나는 게 뽑기다.'
무슨 확률 조작이라도 하는 건지, 항상 내가 필요할 것을 내놓았다.
다만 아닌 경우도 있다.
'탐닉의 시간이나 바쿠스는 다르게 뽑았어.'
그것들은 내가 이 '필요' 매커니즘을 파악한 뒤, 뽑기를 앞에 두고 강렬히 바라며 뽑은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강렬히 바라면, 원하는 것을 받아갈 수도 있다.
나는 이 점에 주목했다.
핑그르르르-
룰렛 머신의 그림이 돌아간다.
나는 바랐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상태이상의 보상과 비슷한 효과!'
룰렛에서 팡파르가 터졌다.
아마도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룰렛 효과일 것이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칸.
[특성 : '미션 체질(S)' 획득!]
[특성: 미션 체질(S)]
-도전하는 당신을 위한 등가교환
: '미션' 수행 가능
됐다.
나는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새로운 팝업이 떠오르고 있었다.
[미션 발생!]
목표 : 대상
미션 기한 : D-_
보상 : _
패널티 : _
나는 고개를 들어 홀로그램을 보았다.
'특성'이라 그런지, '상태이상'에 비할 바 없이 자유도가 높았다.
"좋아."
나는 일단 기한을 채웠다. 500일.
[D-365을 초과 시 패널티가 강화됩니다.]
당장 올해가 3달 남았는데 대상을 띄워놓고 장난하나. 다음.
'중요한 건 보상이다.'
'진실'이나 '이유' 같은 구체적이지 않은 것은 넣을 수 없다. 매번 뒤통수 맞았던 걸 생각해라.
하지만 '내가 이 몸에 들어온 이유와 과정에 대한 설명' 같이 구체적인 건 또 넣을 수 없다. 칸 초과로 못 적더라.
'웃기네.'
나는 픽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뭐, 또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 모든 사태에 대해서 질의응답이 가능할 후보자.
행방을 알 수 없는 놈.
"박문대와의… 대화."
어떻게 할 거냐.
[보상 : 박문대와의 대화]
항목은 정상적으로 입력되었다.
그리고 자동으로 패널티까지 채워졌다.
[패널티 : 상태창 삭제]
"오."
상태창을 걸어?
나는 잠시 보상 탭의 내용을 삭제하고 '춤 EX' 따위를 넣어보았다.
패널티는 춤 스탯 하락이었다.
'역시 동등한 걸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박문대와의 대화'는 '상태창 삭제'를 요구할 정도로 강렬한 보상이라는 뜻이다.
"됐네."
증거가 따로 없다.
나는 다시 보상을 '박문대와의 대화'로 돌려놓았다.
확인을 누르자, 낯선 팝업이 떴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그래."
받고 가자.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5화]
500일 내로 대상을 못 타면 상태창이 사라지는 미친 딜을 받아들인 후.
남은 명절 휴가는 그냥 평화롭게 흘러갔다.
사실 숙소로 며칠 일찍 돌아가서, 다음 앨범을 위해 대중음악의 글로벌 동향과 국내 트랜드를 대대적으로 분석해 보려 했으나….
정신 차려보니 명절 음식을 생산하고 있었다.
"…?"
"어머, 문대는 송편을 참 예쁘게 빚네~ 우리 세진이는 만두가 따로 없다?"
"엄마!"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진실 확인'부터 미션까지 대가리를 터지게 쓴 영향이 좀 있는 모양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게 당기더라고.
그래서 그냥 테스타의 섬 생활 이라고 쓰고 조난기 라고 읽는 예능이나 모니터링하며 시간을 보냈다.
[차유진 : 워어어어우!]
[류청우 : 얘들아, 발 조심!]
"굉장히 스펙타클하게 편집하셨네요."
"…그러게."
장비를 착착 준비한 뒤, 언덕에 올라 헬리콥터로 물자를 받는 모습은 어쩐지 열정적인 스포츠 경기나 탐험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보상처럼 주어지는 포식.
[냠냠냠]
[즐겨요, 누려요 테스타… ]
그냥 무작정 힐링하는 것보다 도리어 그림이 좋았다. 보급이 달려 고생하며 일한 것과 대조되며 더 좋아 보여서 그런가.
'마지막까지 반응이 괜찮았겠어.'
그리고 슬쩍 확인한 인터넷 반응은 정말 그랬다.
-개노잼 부둥부둥 예능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알찼음
-애들 힐링하는데 내가 다 힐링됨 애들아 푹 쉬어
-이거 정규로 계속했으면 좋겠어 조난 설정 세트장에서 탈출하면 보상 주는 느낌으로? 꼭 테스타 아니어도 재밌었을 포맷이네ㅋㅋ
┗애초에 테스타가 아니었으면.. 조난되자마자 촬영이 끊겼을 것..
┗ㄹㅇ솔직히 테스타여서 가능했다 이건ㅋㅋㅋ 리얼함이 한몫함
┗? 테스타 팬인 건 알겠는데 다 른 아이돌이나 방송인들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ㅠㅠ
┗님이 테스타를 무시하는데여
이 정도 기 싸움까지 나온다는 건 정말 흥했다는 뜻이다.
'재밌다는 여론은 못 누르니까 테스타 덕이 아니라는 쪽을 미는군.'
좋은 일이었다.
다만 예상 밖이었던 것은, 이 파급력이 국내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호떡 파는 것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놓고 미국을 노리겠다고 지랄하던 본부장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었던 그 예능도 아니고, 이런 국내 파일럿이 흥할 줄은 몰랐다.
[TeSTAR in a deserted island and- DISASTER? (경악하는 이모티콘)]
방송사에서 올려준 방송 요약 클립은 순식간에 조회수가 불어나더니, 며칠 안 가서 영어 번역 제목과 자막까지 제공되기 시작했다.
조난과 럭셔리한 휴가.
원초적으로 재밌는 구성이라 이해하기 편해서 그런가, 해외 팬들이 적극적으로 위튜브 리액션 채널들에 요약본을 추천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테스타의 조난 예능에 압도당한 미국인들!]
[이게 바로 케이팝 아이돌의 예능이다! 폭발하는 재미에 깜짝 놀라는 해외 위튜버들의 반응 (한글 자막)]
자연스럽게 번역 국뽕 채널에도 유입되며 새로운 컨텐츠가 만들어지는 나름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좀 많이 오글거리긴 했다만.
[위튜버 : 오 X발 세상에, 지금 쟤들 허리케인 속에 갇힌 거야? 무인도에서?]
[위튜버 : 아니, 나는 케이팝 아이돌 리얼 버라이어티라길래 달콤하고 귀여운 내용일 줄 알았는데 말야….]
[위튜버 : 맙소사! 쟤네 놀라는 것 좀 봐ㅋㅋㅋ]
[(보자마자 그냥 자동으로 입덕하시는 중~ 환영합니다.)]
이런 자막을 추가하는 것도 셀링 포인트 중 하나겠다만, 보는 사람이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음."
"…뭐 보는데."
"아, 저희 예능 해외 반응이요."
"그…! 너도 봤어?"
배세진이 눈을 번쩍인다. 본인의 몸치 탈출기를 찾아보던 녀석답게 이런 쪽에 조예가 깊은가 보군.
"아, 이 사람 말고… 영상 잘 고르는 사람 있는데. 잠시만."
배세진은 TV에서 위튜브를 틀어서, 본인의 구독 채널 중 하나에 들어갔다. 생각보다도 본격적으로 위튜브 생활을 즐기고 있나 보다.
그리고 배세진이 재생한 영상은 제법 괜찮았다.
[안녕하세요, 케이팝 만세입니다.]
사실 왜곡이나 과장이 없고, 본인이 번역한 위튜버가 누군지 백스토리도 잘 챙겨놨다. 억지스럽게 뽕 채우려는 자막도 없고.
"재밌는데요."
"…큼! 그렇지."
다 비슷하게 숙연한 제목과 채널명 속에서 용케 이런 걸 찾았다 싶다. 이건 키워드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나는 그 후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해당 채널에서 영상을 봤다. 생각 없이 보기 좋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묘한 패턴을 발견했다.
'흐름이 있군.'
가령, 이번 예능으로 테스타를 처음 접한 외국인이 있다면, 보통 테스타의 본업인 음악 영상 추천을 댓글에 부탁한다.
[혹시 내가 또 봐야 할 이들의 영상이 있다면, 댓글에 추천해줘. 구독도 잊지 말고!]
그럼 KPOP 팬들이 우르르 가서 추천글을 달아놓는데, 주로 Spring Out이다.
-세상에 당신이 테스타를 리뷰하다니!(폭소 이모티콘)
-그들의 진정한 재능은 예능이 아니라 무대야ߑͰߏܰߑͰߏܰߑͰߏܠ제발 이 뮤직비디오부터 봐줘! (링크)
-'Spring Out'은 반드시 봐야 하는 작품이야. 그의 반응이 너무 기다려 지는걸. (생일 고깔을 쓴 이모티콘)
자본을 쏟은 조선 스팀펑크의 맛이다. 별다른 호불호 없이 블록버스터 영화 감성이라 잘 먹히나 보더라고.
'애초에 그걸 노리고 만들긴 했다만.'
해외 반응을 목적으로 한 것을 정말 해외 팬들이 알차게 써먹는 걸 보니 보람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반응이 좋으면, 다음에는 '행차'를 내민다.
-두 곡은 일종의 시리즈로 연결되어있어! 분명히 네 취향일 것이라 장담해
멤버들의 솔로곡이 전부 포함된 티저부터 보도록 한 뒤에야 본편을 보게 하는 세심함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또 비슷한 걸 추천해달라고 하면 127섹션 게임 콜라보 트레일러 영상을 알려주고….'
같은 세계관인 'Better me'를 거쳐, 결국 '마법 소년'으로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다들 '러뷰어'를 자청하게 되는 마법의 서클이었다.
[안녕 구독자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요즘 이 케이팝 빅스타인 테스타에 완전히 빠져 있어! 그냥, 그냥 러뷰어라니까!]
[오늘은 그들의 가장 최신곡인 'Nightmare'를 리액션할 거야. 1, 2, 3 재생!]
케이팝 리액션이 제법 조회수가 나오는 사업이라 과장하는 위튜버들이 다수겠지만, 어쨌든 대단한 일이었다.
'1군들은 대부분 이런 루트가 있지.'
가령 VTIC도 그런 루트가 보였다. 주로 산군 으로 시작하는.
아무튼, 내 예상보다도 테스타가 글로벌 위튜브 흐름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테스타의 극복, 그리고 비상]
번역하자면 이런 뜻인 영어 제목의 비슷한 영업 동영상들이 심상치 않게 대단위 조회수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
제일 조회수가 많은 하나를 확인해 봤다.
[맏형 중 하나이자 리더인 류청우는 원래 한국의 양궁 국가대표로, 올림픽 남자양궁 단체전의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인한 치명적인 후유증 탓에 성년이 되는 해,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이 영상은 테스타가 어떤 백스토리를 가지고 잔인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해 데뷔했는지, 그리고 이후 엄청난 성적을 냈는지 요약해 놨다.
또, 최근의 끔찍한 교통사고로부터도 어떻게 회복하고 기부 콘서트를 했는지를 알려주는 영상이었다.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성공담이었단 뜻이다.
'미국인 입맛인가 보군….'
자수성가와 굴곡진 스토리의 맛이 사골처럼 진했다.
[테스타의 가장 연장자인 배세진은 한국에서 대단히 유명한 영화에 출연했던 아역배우였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 아동 샤먼을 연기해 엄청난 연기력으로 영화제에서 수상을….]
"허…."
옆에서 배세진이 굿을 하는 어린 자신을 보고 얼굴을 가렸다.
"자랑스럽지 않으신가요."
"장난해? 완전 못 하는데."
아무래도 성장하며 눈높이도 높아진 탓에 흑역사로 보이는 모양이다.
어쨌든, 다소 과장은 있어도 잘 만든 영상임은 확실했다.
게다가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뉴스와 교차 편집해서 당시의 팬덤 느낌을 잘 재현했다.
"음."
"…다들 걱정했지."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멤버가 퇴원한 순간, 그들은 놀라운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장기 입원 아동을 위한 온라인 기부 콘서트였다.]
그리고 기부 콘서트는… 음, 사실 이 사람들 입장에선 테스타가 외국인이라 심적 거리감이 있을 테니, '선한 영향력'에 초점이 가도 큰 상관은 없다만.
원래 다른 나라 연예인은 좀 꺼림칙한 일이 터져도 '문화 차이'라는 합리화가 한번 가림막이 되어주지 않나.
'그래도 이미지는 파악해야겠는데.'
나는 혹시 몰라 모바일로 댓글까지 한번 체크해봤다.
-이 동영상의 전 매니저를 반드시 사형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그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
-세상에 한밤중에, 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협박을 했다고? 세상에 없어야만 하는 악한 종자야
"…."
댓글창은 기부 콘서트고 나발이고 금방이라도 전 매니저를 화형시킬 기세였다. 남의 나라말인데도 흉흉함이 느껴진다.
'역시 빡침은 만국 공용정서인가.'
어쨌든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강력 범죄자가 본인의 범죄 때문에 욕먹는 거니까.
특별히 절절한 사연이 있는 놈도 아니라 동정할 것도 없다.
'물론 이게 아니어도 이미 충분히 먹었을 것 같다만.'
게다가 앞날이 캄캄한 놈이었다.
어마어마한 여론의 분노를 맞은 전 매니저에게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가 적용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목이 쏠렸으며 뒷배가 없고 대기업을 적으로 돌린 케이스답게, 형사 재판을 말아먹었다.
"그러고 보니까 전 매니저한테 17년 구형됐다고 했죠."
이게 감형되지 않고 고스란히 처맞았더라. 아마 항소한 2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세진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그런 놈은 17년이 아니라 평생 거기서 살다 죽어야 하는데."
"…."
아니… 어차피 출소해도 제대로 못 살걸.
이미 매니저 일하면서 온갖 팬들에게 사진이 얻어걸린 적이 있던 덕에,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놈의 얼굴이 나온다.
아마 다른 케이스들처럼 대충 감옥에서 삼사 년쯤 살고 나왔어도 국내에서 정상적인 일을 하고 사는 건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보니, 해외에서도 살기 어려울 것 같다.
전 매니저의 얼굴이 대놓고 뜨는 테스타 영업 동영상이 조회수 800만 뷰가 뜨는데 뭐.
'테스타가 더 뜰수록 출소 후에 살기 힘들겠군.'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 얼굴 볼 일 없을 사람 같은데 편하게 생각하시죠."
"…그래. 휴일이잖아."
배세진이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녀석의 어머니가 흐뭇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그래, 보기 좋은 광경이다.
'일하기 전에 많이 쉬어둬라.'
휴가 끝나자마자 이번 앨범 준비를 제대로 할 생각이니 말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테스타 입덕 알고리즘 늪에 빠진 팬층이 원하는 게 뭘까.
'잘 빠진 곡이지.'
그래. 깊은 세계관도 좋고 이지리스닝과 음악성도 좋다만, 그것보다 좀 더 원초적 접근을 해야겠다.
빡세고 멋진 안무, 영상미 죽이는 강렬한 뮤직비디오, 그리고 신나고 비싼 사운드.
그냥 다른 생각 없이 보고 들으면서 재밌는 것들 말이다.
바이럴처럼 퍼지는 글로벌 기세를 굳히는 데에는 그것만 한 특효약이 없다.
'한마디로 돈을 물처럼 쏟아야 한다는 건데.'
그거야 이 회사 윗분들이 유일하게 잘하는 구석이었으니 문제는 없다.
다만 어떻게든 숟가락 얹으려는 이 놈들이 전체적 그림에 방해되는 걸 어르고 달래는 건 더는 안 되겠다.
'시간 낭비야.'
소송용으로 모은 자료를 넘겨준 배세진에게 했던 말도 마침 지켜야 해서 말이다.
-다른 방향으로 소송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나 생각 중인데요.
가뜩이나 전 매니저에게 모든 주목을 다 넘기고 슬쩍 빠져나가려다 들켜서 X될 뻔한 회사인데 뭐.
'한번 뵈러 가야지.'
나는 본부장과 즐거운 미팅을 계획 하며, 남은 연휴를 보냈다.
그리고 연휴가 끝나는 첫날, 바로 놈과 면담을 잡았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6화]
추석 연휴가 끝나는 날 저녁 숙소.
멤버들이 하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와 배세진이 가장 먼저 도착할 줄 알았는데, 먼저 온 놈이 있더라.
"어?"
"오~ 문대 왔네! 잘 왔어, 잘 왔어! 세진 형님도요~"
숙소와 본가가 가까운 큰세진은 일찌감치 복귀해서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보는 것은 코멘터리가 붙은 테스타의 섬 생활 스페셜화다.
듣기로는 흥분한 사촌들에게 사인을 뿌리며 1군 아이돌의 명절을 즐긴 모양이다.
얼마 안 가서 큰세진 친척들의 목격담과 사인 인증이 SNS에 범람하겠지.
"냉정한 문대문대는 잘 지냈니? 우리 여사님이 너 실물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시더라!"
작은 할아버지 댁까지 갔다 왔다는 놈이 말은 잘한다.
"그래. 다음에 영상통화 한 번 드려야겠네."
"하하!"
큰세진은 킬킬 웃었다.
쉬는 게 좋긴 한지 아니면 인지도를 실생활에서 확인하니 마음이 놓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여유가 생긴 건 좋은 일이다.
이제 앨범 만들 때 마지막 기력 한 방울까지 쭉 짜낼 수 있겠군.
"아, 많이들 벌써 왔네."
"다, 다녀왔어…!"
류청우와 선아현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선아현은 또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는데, 남해의 작은 섬에서 기념품 선물까지 챙겨왔다.
나는 선아현이 내민 기러기 모양 빵을 받아들었다. 안에는 녹차 크림이 들어 있었다.
"우, 우리 갔던 그 섬 근처였어! 부모님이,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 고생을 보고도…?'
모르겠다. 하지만 즐거웠다니 내버려 두자.
"명절 연휴 편안히 보내셨습니까!"
그리고 보따리 싸 들고 온 김래빈은… 어딘지 좀 토실토실해졌다.
할머님 입원부터 본인 교통사고까지 올해 손자 고생했다고 왕창 먹이신 모양이다.
"형들?"
"…음, 잘 왔다."
"예!"
뭐, 괜찮겠지. 비활동기니까. 건강에 문제 생길 정도도 아니고… 앨범을 준비하게 되면 자동으로 원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정도는 양호했다는 것이 새벽에 밝혀진다.
가장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한 놈이 마지막에야 나타났기 때문이다.
"야호! Everybody say hello~ like 안녕하세요!"
"차유진!"
새벽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 타고 온 차유진 말이다.
이놈은…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좋게 말해서 건강해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야말로 선크림 파괴자다.
바닷가에서 끝내주는 연휴를 보냈나 보지.
'스타일리스트가 기함하겠군….'
실내에 가둔 뒤 비타민D만 경구 섭취하게 만들지 않을까.
"야! 너! 얼굴 뭐야!"
일단 김래빈부터 경악해서 차유진의 등짝을 갈긴다.
"어욱! 아냐! 나 건강하고 멋있어!"
"아니거든! 이건 건전한 태닝이 아니라 그냥 관리 실패로 인해 규칙 없이 탄 거잖아!"
"김래빈도 운동 안 했어! 실패야!"
"…! 아, 아니 나는 금방 운동을 통해 근손실을 회복…."
아무튼 그 난리통이 끝난 후에야 나는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그게 새벽 2시였다.
"내일… 아니, 오늘 점심 즈음에 회사 좀 가보려고 하는데요."
"으헝?"
"왜, 왜…?"
"문대야 너 워커홀릭 너무한다, 좀 쉬어. 너 세진 형네에서도 일하다 왔지?"
"아니, 일단 들어봐라, 좀."
뭐 한마디 하면 우르르 붙는군.
나는 이마를 누르며 말을 꺼냈다.
"우리, 특히 배세진 형이 소송 자료 모았던 게 아까워서 생각한 건데요…."
나는 연휴 동안 느긋이 짜둔 계획을 말로 옮겼다.
"음."
출발 전에 이미 한번 들었던 배세진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다른 놈들은 느낌표를 거쳐 고뇌에 찬 얼굴들이 되었다.
"그, 그게 가능할까…?"
"…가능은 해. 내가 변호사한테 물어봤어."
배세진의 대답에 이어서 김래빈이 손을 들었다.
"혹시 불법적 행동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그 후로는 제법 생산적인 토의와 서로 간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결국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음, 어차피 우리 원하는 건 다 합의가 된 상황이잖아요? 통할 것 같긴 한데요."
"그래. 그럼 내일 다 같이 가서 면담하는 걸로 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저 혼자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
그런 놈은 도리어 비밀스러운 일대일을 위압적으로 느낄 것이다. 나이도 어린놈들이 떼로 오면 하급자의 하극상으로 느낄 것 같단 말이지.
대표 한 명이 적절했다.
나는 그 부분을 설명한 후, 말을 덧붙였다.
"청우 형은 리더라 형이 대표면 공식적인 딜이라고 착각할 것 같아서요. 제가 가서 허를 찌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으음…."
배세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보복이나, 위협 같은 걸 고려하면…."
"괜찮습니다. 저도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쓸 생각은 없어서요."
"…?"
왜 표정이 저러냐.
나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본부장이 저한테요?"
"…."
"못 할걸요. 그런 놈이 무슨."
그리고 잠시 뒤, 의견 전달자는 나로 최종 결정되었다.
순조로웠다.
T1 Stars의 세 번째 본부장은 그럭 저럭 괜찮은 명절 연휴를 보냈다.
정신 나간 해고자가 골치 아픈 일을 만들긴 했지만, 명절 직전부터는 나름대로 회복에 탄성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회사 이미지 타격부터 본사의 간섭, 투어 취소로 인한 손해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근거렸다.
'회복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나마 다행은 혼수상태였던 테스타의 멤버가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으나, 그 다음 행보는 영 탐탁지 않았다.
'그 와중에 기부 콘서트라니.'
그것도 타 소속사의 연관 플랫폼에서 말이다.
영 의심스러웠다.
'설마 그쪽으로 이적이라도 시도해 보겠다, 이건가?'
여론과 분위기상 차마 막을 순 없었으나, 연예계가 처음이라 아이돌의 소속사를 스포츠 선수의 구단에 가깝게 생각하던 본부장은 더 떨떠 름해했다.
간을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스타가 그 소속사와 다시 컨택하는 기미는 없었고, 그는 의심을 일단 거뒀다.
'여론 회복하는 대로 살살 달래서 투어부터 돌려야겠어.'
그러면서 투어 끝날 시점에 맞춰서 다음 앨범을 준비해서, 글로벌 런칭할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떼쓰는 아이돌 놈들의 말을 반영해줘야 하는 것은 벌써 스트레스였지만 말이다.
'대학도 안 나온 놈들이 사업 얼굴 마담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할리우드 초기, 표 팔아먹으려고 만든 스타 마케팅 때문에 업계가 이 지경이 됐지 않은가!
하여간 엔터 사업은 체계와 품위가 없다며,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야심을 가지고 뛰어들긴 했지만 영 정이 떨어졌다.
'몇 년 정도만 포트폴리오 쭉 뽑고 다른 사업라인을 런칭해야겠어.'
그러다 점심시간, 미리 잡은 테스 타 멤버와의 약속에 나온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어서 와요."
사실 이것도 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디 그가 소속 연예인의 말 한마디에 약속을 잡아줘야 하는 위치던가?
그래도 새로운 패로 쓸 수도 있을 테니, 한번 들어볼 생각이었다.
교통사고 사건 때문에 회사가 뒤숭 숭한 건 사실이니까.
'어디 보자.'
그는 혼자 나온 테스타의 멤버, 박문대를 보며 짐작했다.
'청탁인가.'
리더도 아니고, 지난번에 본사에 연락해 댔던 놈이라는 정보를 그도 들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테스타 전담팀이 만들어졌다는 것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도 못 나온 딴따라에게 그런 머리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써먹을 생각은 있었다.
'좀 부추기면 자기 욕심을 못 이길 타입이야.'
팀에서 발언권이 있고, 나름대로 출세 욕심이 있는 놈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혼수상태에서 회복하고서도 자신을 만나러 온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코스요리가 나오는 초밥집 룸에 앉자마자, 박문대는 서류부터 꺼냈다.
"소송 서류입니다."
"크흡!"
본부장은 사레가 들렸다.
그러나 눈앞의 아이돌은 미동도 없이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무심히 관찰하는 얼굴이다.
"…."
본부장은 순간 분노로 눈앞이 벌게지는 것 같았으나, 먼저 실리부터 챙겼다.
서류 말이다.
그리고 경악했다.
"…!"
"전 매니저 관련 소속사 과실 증거 자료입니다."
서류는 법적 의미에서 꼼꼼했다.
게다가 일부러 구체적 내용을 지운 부분도 있어서, 이 페이퍼를 확인하더라도 회사가 반박 자료를 만들기 까다로웠다.
누가 봐도 전문가의 손이 닿아 있었다.
'변호사를 고용했나…!'
본부장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한 뒤, 서류를 내렸다.
"그래서 나한테 이걸 왜 보여주고 있지?"
"…."
"보니까 당장 소송하려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러나?"
박문대는 인정했다.
'나름대로 머리는 있는 놈이군.'
하긴, 이 본부장은 낙하산도 임원의 친인척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냥 자아 비대한 상급자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말하기 편했다.
그는 숙소 복귀 전날 밤. 배세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박문대 네가 첫 정산 때 세금 이야기했었잖아. 이건 세전 금액이라 나중에 많이 떼일 거라고.
-예.
-맞아. 그렇더라. 연예인은 근로자가 아니었어.
박문대도 계약서 작성 당시에, 자신이 대학과 공무원 시험을 통해 얻은 법 지식을 바탕으로 알았다.
연예인은 회사와 근로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어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을 제대로 적용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보기엔 기획사의 힘이 너무 크긴 한데.'
당장 그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고.
박문대의 생각은 이러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계약서를 좀 더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다는 건데?'
사업자 간의 계약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제안을 하게 된다.
"기본 계약서에 추가 조항을 넣죠. 페널티 겸 개런티 조항을요."
"개런티라."
"예, 심각한 건 아니고, 일종의 내기 개념으로 넣자는 겁니다. 내용은…."
박문대는 웃었다.
"테스타가 다음의 연도 중 연간 시 상식에서 대상을 수상 시, 테스타의 새로운 독립적 레이블 수립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
"기한은 2년으로 잡고… 아, 물론 형태는 산하로요. 계약 파기되면 쓰나요. T1 소속으로는 남아 있어야죠."
박문대가 새롭게 내민 페이퍼에는 세부 내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연간 시상식'이란 그해 음악시장 에서의 판매 수치를 70% 이상 방영하는, 음원 혹은 음반 플랫폼 주체가 개최하는 시상식을 의미한다.
-…해당 검증이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 갑은 을의 주도적이며 안전한 활동을 보장한다. 해당 조항에서 '주도적'이란….
한마디로, 우리 알아서 할 테니 방해 말고 케어나 제대로 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박문대는 알았다.
'이 새끼는 연예계 인맥이 없어.'
있는 건 여기 자리를 꿰찰 만큼의 T1 본사 쪽 이사진과의 인맥이다. 하지만 평판 문제로 윗사람에게 이런 문제를 떠들 순 없을 것이다.
'그럼 혼자 가지고 가야지.'
아니, 사실 떠들어도 상관없다.
'우린 T1 하고 척질 생각이 없고, 네가 본부장으로 있는 이 소속사와만 거리를 두고 싶다는 주장의 반복일 뿐이니까.'
이미 전담팀 요청 때도 써먹은 논리였다. 딜이 들켜도 본사에서 새삼 스럽게 테스타를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
그 시간, 본부장도 비슷하게 계산을 끝냈다.
자신이 윽박지르거나 강하게 나오면, 도리어 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점을.
그래서 두 손을 깍지 끼며, 좀 더 진중하게 말했다.
"아티스트 의견은 알겠지만… 내가 오케이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잖아요? 나는 실무진이고… 이사진, 대표이사님께 말씀드려야지."
거짓말이었다. 사실 대표이사는 T1 친인척에게 명함을 주기 위해 준 자리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이 계약 수정사항을 논의할 사람은 본부장이 맞았다.
"아 전 그런 걸 잘 몰라서요."
박문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그냥 본부장님이 설득해 주세요."
"…! 무슨…."
"아니… 잘 모르니까요. 안 되면 저희 그냥 소송하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변호사분이 알아서 해주시겠죠."
미친놈인가?
본부장은 할 말을 잃고 박문대를 뚫어져라 보았으나, 그 매끈한 얼굴에는 동요 한 점 없었다.
그래서 그도 알았다.
이놈은 정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소송을 갈길 놈이었다.
그리고 이런 미친놈은 설득이 안 통한다.
"조금 있으면 아주사 새 시즌을 또 할 텐데, 거기서 데뷔하는 분들도 여기 소속이 될 테니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은 저희야 뭐… 레이블 정도는 괜찮죠. 안 그래요?"
"…."
"대상 타면 레이블이나 하나 만들어주시면 되는 건데, 어려울 건 없어 보이는데요."
그리고 그날 해질녘.
박문대는 수정되어 도장과 지장이 찍힌 7장의 계약서를 모두 챙겨 들고 귀가했다.
'깔끔하네.'
시간을 안 주고 몰아붙이면 이럴 줄 알았다.
이런 문제에서 하루 이틀 기한을 더 줬다가는 쓸데없는 짓을 했을 것이다.
'빨리 처리하는 게 정답이야.'
그리고 추가 조항이 어쨌든 테스타의 성적은 본인 커리어와도 관련 있으니, 탈 수 있는 대상을 못 타게 방해하진 못한다.
저 본부장은 누가 봐도 명예욕이 더럽게 많은 놈이니까.
게다가 만일을 위해 이중으로 위반시 배상 조항도 걸었다.
박문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배세진이 원하는 대로 법적 판례를 만들진 못했다만… 이 정도로 만족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이제 내년까지는, 그리고 대상을 탄다면 그 이후까지도 운신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겠는가.
만일 대상을 못 탄다면?
'그때는 정말 계약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 상관없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앨범이나 준비하러 갈까."
그는 넉넉한 시간을 전부 쏟아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만든다.'
…그렇게 지극히 고강도의 앨범 준비 합숙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테스타가 계획한 컴백 첫 무대는, T1이 주최하는 연말 시상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