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은 적막했다. 우리 둘 다 나눌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차 천장과 유리창을 사납게 두들기는 빗소리 만으로도 딱히 어색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노스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으므로 집이 어디냐는 대화조차 오갈 일이 없었다. 노스도 자신을 어디에 내려주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나도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디브리핑 때처럼 딱딱한 얼굴로 와이퍼가 쉴새없이 움직이는데도 빗방울로 얼룩지고 습기가 맺혀 뿌옇기만 한 앞유리창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문득 노스가 빗소리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표정으로는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음악이라도 틀까 싶었지만 그런다고 빗소리가 가려질 것 같진 않아 그만두었다. 애시당초 나는 라디오나 음악을 틀어 놓고 운전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한 13년쯤 전엔 주구장창 최신 음악을 틀거나 라디오 방송을 틀며 운전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약혼녀의 습관이어서 그랬던 것일 뿐, 나는 운전할 때는 조용한 것이 좋았다. 약혼녀는 전도유망한 폴로 선수였던 내가 부상으로 평생 휠체어에 앉게 될 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떠났었다. 다행히 휠체어 신세는 면하게 되었지만 나는 되돌아온 약혼녀를 받아주지 않았으며, 폴로 경기장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다. 한순간에 모두가 등돌려버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에 가만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언제쯤 다리에 감각이 돌아올까, 평생 돌아오기는 할까 하는 생각을 다섯 달 쯤 하고 나니 명성이나 돈 같은 것 말고, 다른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MI6에 지원했고, 어찌 저찌하다보니 6년 정도 미국에서 미국인인 척 첩보 일을 하게 되었고 (빌어먹을 동부 억양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나는 아직도 불쑥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또 어찌 저찌하다보니 MI5의 섹션 D로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또다시 어찌 저찌하다보니 나보다 경력이 높은 현장 요원들이 하나 둘 순직한 끝에 내가 섹션 치프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워커, 당신은요? 어쩌다가 정보국에서 일하게 됐어요?]
[나? 나야 여자한테 차여서 그랬지.]
누가 물을 적마다 나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모두들 한바탕 웃어넘기곤 했다. 다들 그걸 농담이라고 생각했고, 진짜 이유를 꽁꽁 숨겨두기 위한 능글맞은 답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누가 봐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진실된 답변은 있을 수 없을 만큼 솔직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여자한테 차여서. 나는 그 후론 누군가를 사귄 적이 없었다. 섹스 파트너나 원나잇은 셀 수 없을 만큼 스쳐지나갔지만 여자친구는 없었고, 약혼녀도 없었다. 한 번이면 충분했으니까. 이제는 이 일과 결혼한 셈이었다. 나는 앞유리창에 비친 노스의 희미한 형상을 흘끗 바라보았다. 한때 그녀의 이름은 루카 퓰러였다. 개리 퓰러라는 고등학교 교사 남편이 있었고, 트레이 퓰러라는 아들이 있었다. 개리는 맨체스터 출신의 영국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MI5 요원의 예비 배우자들이 거쳐야 하는 숱한 심의와 서류 작업을 저절로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개리 퓰러의 조부모에서부터 8촌 이내의 친척, 직장 동료, 친구들, 자주 들리는 가게, 하다못해 3블록 이내의 이웃들까지 전부 보안 심사를 거쳐야 했다. 물론 개리는 자신이 그런 수백 수천장이나 되는 서류작업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을테지만. 1년 간의 동거 끝에 개리가 청혼했을 때, 노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8개월간 이어질 끊임없는 인터뷰와 심사와 서류작업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정보국요원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자신의 직업을 계속해서 속였으며, 겨울에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핑계 아래 8개월간 계속해서 약혼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고 사람을 빙빙 돌리는 인터뷰와 심사와, 서류 작업을 전부 거쳤다. 서류 작업을 좋아하는 현장 요원이란 없다. 사건이야 보고서를 올려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 다들 죽어라고 하는 거지. 현장에서 총알과 폭탄과 국가 안보가 휘청휘청하는 일만으로도 사실 우리는 전부 녹초가 되곤 했다. 그래서 그리드에는 늘 잠을 포기하고 새벽까지 남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요원들이 좀비마냥 그렇게들 앉아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배우자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8개월간 추가적인 인터뷰와 서류 작업에 이리 저리 불려다녔을거란 생각을 하니 그녀가 개리 퓰러를 정말로 사랑했었나 보다 싶었다. 나는 내 약혼녀를 그 정도로는 사랑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녀가 나를 그렇게 매정하게 버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정보국에서 일하는 일도 없었겠지만, 만일 내가 MI6에 입사한 후에 그녀를 만났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더라도 아이는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MI5가 아이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영국을 지키는 것이 곧 아이를 지키는 것이니 안심이 될까. 아니면 매일 아침 집을 나설 적마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울까. 아마 노스는 전자였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세 살짜리 아이를 두고 모스크바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는 없지만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한 번 영국이, 여왕이 있는 이 런던이 얼마나 많은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알고 나면… 이 일터를 떠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상황을 전혀 모르는 군중으로 살아간다는 건 다시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일단 한 번 눈가리개가 풀어지고 나면 그걸 다시 쓰고 싶은 자는 없을 것이다.
러시아워에 비까지 겹쳐 벌써 20여분 째 런던의 퇴근길 도로에서 굼벵이마냥 찔끔 찔끔 움직이고 있는데 휴드폰이 울렸다. 나는 폴더를 열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피쳐폰에 비해 스마트폰은 보안이 취약했고 정보국 사람들은 유흥용으로 집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갖고 있을 지언정 다른 휴대폰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타릭 같은 엔지니어들은 온갖 첨단 기기를 그리드에서도 쓰곤 했지만 그거야 그 녀석들은 순전히 제가 좋아서 하루에도 열두번씩 보안을 업그레이드하고 검사하는 녀석들이니까. 다른 요원들은 그렇게까지 귀찮은 전자기기를 사용할 생각들이 없었다. 여차할 때 제 목숨을 기댈 도구는 총이지 심슨 게임이 되는 아이폰이 아니니까. 신참들은 꿋꿋하게 스마트폰과 업무용 휴대폰 두 가지를 들고 다니는 (그래봤자 스마트폰은 로비의 보안팀에 맡겨야 했지만) 편이었지만 다들 한 계절도 못 넘기고 스마트폰은 집안 어딘가에 처박히는 건 매한가지였다. 휴대폰 액정에 뜬 건 말콤의 번호였다. 그의 개인 번호가 아니라 그리드의 번호였고 그건 곧 뭔가 일이 터졌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럼 그렇지, 잠잠한 목요일이라니 어디 가당키나 한가.
"워커입니다."
이제 막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참이었지만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말콤의 이야기에 나는 재빨리 차를 돌렸다. 말콤이 일러준 주소지는 우드포드 역 근처로, 4존까지 나가야 했다. 조수석에 앉은 노스에게도 말콤의 말소리가 들렸는지 그녀는 내가 갑자기 차를 돌린 것에 일말의 의문도 없었다. 나 역시 굳이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인질을 잡아놓고 인터넷에 공개처형 예고를 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그 영상은 MI5의 스크리닝에 걸린 뒤로는 당장 웹상에서는 내려졌지만) 보안 규정 상 MI5가 아닌 노스에게 전달될 사항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스를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 내려놓고 가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그냥 그녀를 태운 채 주소지로 향했다. 어차피 녀석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두어블록 쯤 떨어진 곳에서 차를 멈출 것이고, 노스는 그냥 차에서 기다리게 하면 될 것이다. 주소지 근처에 도착하자 나는 차를 세우고 코트 안쪽에 넣어둔 총을 손으로 툭툭 더듬어 확인한 뒤 노스에게 자리에 있으라고 명령하고 밖으로 나섰다. 내 명령에 그녀는 뭔가 반박할 듯한 표정이긴 했지만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 설마하니 노스가 비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나를 따라 나설 줄은 몰랐었다.
"차에 있으라고—"
나는 노스가 아플 정도로 굵고 따가운 비가 촘촘하게 쏟아지는 길거리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차 문을 닫자마자 따라나선 것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내 명령에 불복종 (노스가 MI5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 것에 불쾌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사실 그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 노스가 다짜고짜 나를 끌어당기더니 내 목에 팔을 감은 채 키스를 퍼부었으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나에게 로비라도 하려는 것인가 하여 혼란스러웠지만 곧 노스가 연인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쓰는 사람처럼 나를 꼭 끌어안고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속삭이는 말에 방금 전 나에게 뭔가 반박하려는 듯하던 그 표정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12시 방향, 두 번째 집. 2층 창문에 망원경이 이쪽을 보고 있어요."
그 집은 말콤이 일러준 주소지였다. 지금 망원경 뒤에서 누가 보고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예고된 처형시간까지는 아직 20분이 남아 있었고, 굳이 그들을 자극하여 처형을 앞당기게 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돌아서려다가 연인의 키스에 마음이 돌아선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노스의 어깨를 감싸안고 12시 방향의 집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묘안과 같은 것이 노스에게도 떠올랐는지 우리는 동시에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러시아어를 구분은 하겠지?"
"저들이 러시아어를 알아들을 것 같아요?"
나는 미소가 씩 지어졌는데, 그건 연기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절로 입가에 걸린 것이었다. 이 계통의 일은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일종의 '감'이라는게 생기게 되어 있었다. 교육자료나 행동 매뉴얼 따위가 아니라, 그 '감'에 따라 일하는 사람과 파트너가 되면 업무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일 자체가 신나고 즐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디즈니랜드에 놀러가기 전날 어린아이 같아진달까. 나는 노스의 웃음은 연기였을지 아니면 나와 같은 만족감이었을지 궁금했다.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문제의 집을 지나쳐 그 옆 집의 울타리쪽에 몸을 감췄다. 내가 울타리의 옆문으로 돌아 테러리스트들이 인질을 잡고 있을 집에 접근하는 사이, 노스는 내게 건네받은 휴대폰으로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쪽에서 아랍어로 언쟁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노스의 러시아측인척 하는 전화에 넘어갔는지 뒷문쪽으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오더니 문에 설치된 부비트랩을 제거하는 쇳소리가 잠시 들렸다. 하지만 정작 문이 열려 내가 잡은 것은 한 명 뿐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앞문으로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녀석을 기절시켜 수갑을 채워 울타리에 묶어두고 앞마당 쪽으로 달려갔다. 그제서야 노스가 물고문 후유증이 있다는 것이 다시 떠올라 걱정으로 가슴이 쿵 쿵 뛰었다. 내가 쓰러트린 녀석도 무장 중이었는데, 다행히 아직 총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노스는 총이 없었다. 병원 검진 결과는 저체중에 영양결핍 상태였고, 나는 노스의 입술이 차갑고 파랗게 질려있었던 것이 단순히 비가 차가워 그랬던 것 같지만은 않아 점점 마음이 다급해졌다.
"여벌 수갑 있어요?"
그래서 앞마당으로 황급히 뛰어나갔을 때, 노스가 덩치 좋은 나머지 테러리스트 한 녀석을 잔디밭에 쓰러트려놓은 채 옴짝달싹 못하게 양 팔목을 붙들어 무릎으로 등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을 보자 나는 당황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노스는 비를 맞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아보였다. 좀 더 정확히는, 2년 넘게 물고문을 당한 뒤에 비를 맞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그게 표정에 드러나보였는지 노스는 턱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꾸했다.
"통제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여벌 수갑을 꺼내 나머지 녀석에게 수갑을 채우자 자리에서 물러난 노스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리드에 돌아가 테러리스트들을 인계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뒤, 집에 돌아가 바라던대로 따뜻한 목욕과 스카치 한 잔을 즐긴 뒤에도 그것이 추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집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던 MI5 요원들을 따돌리는 것은 그닥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따라오게 내버려두었다. 신참들인지 아니면 나에 대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유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도리어 미행하는 쪽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이따금씩 내가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딴청을 피우거나, 걸음을 늦춰 신호등을 놓치는 등 그들이 나를 따라올 수 있게 기다려줘야 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런 행동 때문에 미행 중임을 들킨 것이 더욱 부담스러워 되도록이면 멀찍이 떨어지려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차피 혐의가 벗겨지지 않은 나에게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나는 굳이 저들이 저토록 감시하고 있지 않은 척 해야 할 이유가 도리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쯤 되니 괜히 사람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허공에 대고 소리 치는 척 하며 '그냥 바짝 붙어 따라와도 돼! 해리에게 이르지 않을게!'라고 말이라도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해리가 나를 만나 주기라도 해야 신참들의 미행 실력이 형편없더라는 소리라도 할 수 있는 거지만. 내가 어디를 가는 지 같은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이들에게는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때에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타나봐야 의심만 키울 뿐이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리가 살고 있는 동네는 우리가 원래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한적한 주택가였다. 집집마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화단이 딸린 마당이 있고, 잘 손질된 공구가 정돈된 차고가 있으며, 여기저기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라든가, 조깅을 하는 사람, 혹은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노란 햇살이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동네였다. 지역 분위기만 본다면 개리는 그가 원했던 삶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시끄럽고, 복잡한 회색 도심 한복판의 조그만 연립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은 당시에는 개리나 내가 아직 주택을 구입하기엔 젊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언제든 그리드에 20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을 집으로 삼고 싶었던 것 뿐이었고, 개리는 나에게 맞춰줬을 뿐이었다. 적어도 트레이가 태어난 뒤에는 그가 원했던 삶에 조금씩 맞춰가기 시작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는 나를 기다렸을까?
말콤은 내게 개리의 소재를 알려주면서도 조심스러워했다.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을 내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그랬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개리가 여태껏 혼자 있었을 거라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고,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았다. 누굴 만났더라도 나보다는 제대로 된 배우자였겠지만, 그가 행복했으면 했다. 도서관에 들어서며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낮게 멈추었다. 기둥 뒤에 나를 노리고 있는 저격수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 평화롭고 가정적인 공간에서 한껏 긴장한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러고보니 나라는 사람이 정말 이상한거구나 싶었다. 고문관이나 테러리스트를 마주하고도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도리어 나를 공격할 의도가 조금도 없는 민간인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너무나 낯설고 두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트레이가 이런 사람의 손에 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방형 복층 구조의 도서관이었기에 나는 출입구와 1층의 대부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내 모습은 별로 드러낼 필요가 없는 2층 기둥쪽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운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세 권 뽑아 두 개는 동그랗고 낮은,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코트와 장갑은 괜한 사람과 마주보고 앉지 않아도 되도록 맞은편 소파에 벗어둔 채 기둥을 등지고 자리에 앉았다. 무릎에 책을 펼쳐두긴 했지만 시선은 1층의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었고, 기둥 옆에 놓인 커다란 화분의 잎사귀에 가려 1층에서 누군가가 올려다보더라도 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내가 그들을 내려다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콤은 개리가 매주 토요일 오전마다 트레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들린다고 했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제나 토요일 오전이면 도서관으로 가 학생들의 시험지나 과제물을 채점하거나, 수업 준비를 하곤 했으니까. 트레이가 아직 말을 하기도 전부터 개리는 아이를 데리고 동화책 읽기 모임 같은 것에 가곤 했을 정도였다. 나는… 거의 매번 '급하게 생긴 일' 때문에 모임을 빼먹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볼수록 그가 나를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나를 미행하던 요원 세 명도 1층 라운지에 한 명, 2층 엘레베이터 근처 소파에 한 명, 내 시야에서는 벗어났지만 아마 비상계단 쪽에 있을 나머지 한 명까지 자리를 잡고도 1시간 42분이 더 흐른 뒤였다. 어린 아이를 둔 젊은 부부들이 많은 지역이라 도서관이라고는 해도 그리 조용하거나 차분하지만은 않은 곳이었지만 1층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의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내 귀에 닿았다. 개리는 앞서 뛰어 들어온 두 아이들을 타이르면서 코트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였다. 8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달라진게 없었다. 갈색 빛이 도는 회색 코트를 정리해 팔에 걸쳐드는 모습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내 눈은 어느새 앞서 뛰어들어온 아이들을 쫓았다. 키가 엇비슷한 두 명의 남자아이들은 개리의 말에 다시 얌전하게 입구 쪽의 안내 데스크로 돌아가 방문자 기록 카드를 작성하고 있었다. 왼쪽에 서 있는 아이는 붉은 머리에,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개리가 새로 만난 사람의 아이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제이슨은 점퍼를 이리 건네라는 개리에게 '고맙습니다, 아저씨'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트레이의 친구인 것 같았다. 트레이가 까치발을 들고 서서 안내 데스크에서 방문 카드를 기록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고, 아이가 마침내 돌아서서 개리에게 자기 점퍼를 건네고 제이슨과 SF코너로 달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는 그에 비하면 너무나 짧게만 느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트레이의 모습은 높다란 원목 울타리가 둘러진 침대에 잠들어있는 모습으로, 아직도 조금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세 살짜리의 모습이었다. 아이가 나를 모르는 것처럼, 나 역시도 개리를 닮은 얼굴이 어딘가 얼핏 낯이 익은 정도일 뿐, 트레이에 대해 아무런 것도 알지 못했다. 열 한살 남자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가 아이에게 완벽한 타인인 것 만큼이나, 나에게도 한 순간에 십대 소년이 되어 있는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 뒤로 한 시간 가량, 나는 1층 라운지에 자리잡고 앉아 학생들의 과제물을 채점하는 개리를 내려다보면서 트레이를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과, 개리의 앞에 나타나고 싶은 충동과 끈질기게 씨름했다. 개리의 모습은 너무나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여서, 가까이 다가가기만 한다면 여전히 그의 곁에 내 자리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말콤이 왜 그렇게도 나에게 다짐을 받아냈는지 알 것 같았다. 해리는 왜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은 걸까?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으니까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나는 개리의 앞에 갈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내가 말도 없이 사라졌던 8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검정색 터틀넥 스웨터가 감추고 있는 문신들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그렇게 사라질 일이 없을거라 약속할 수도 없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책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는지 양손에 하얀 면장갑을 끼고 한쪽 옆구리에 두꺼운 책더미를 끼고 있는 사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쪽으로 몸을 굽힌 채 물었을 때에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곳곳에서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는 부모들의 목소리나, 재잘대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런 밝고, 단란한 사람들 사이에서 새카만 옷을 입고 혼자 창백하게 앉아있는 것 이상으로 남들의 눈길을 끌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리고 내 뒤를 쫓아온 MI5 요원들에게 이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곧장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책이 조금… 슬픈 내용이어서요."
사서가 조금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에야 나는 내가 펼쳐놓은 책이 법학에 관련된 논문 저서라는 것을 알았다. 개리를 보게 될 거란 생각에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어느 책장에서 뽑아온 책인지 여태껏 한 번도 눈치채질 못한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미소로 적당히 상황을 얼버무리고는 사서가 자리를 뜨자마자 내 짐을 챙겨 일어났다. 이곳에 더는 있으 같았다. 여기에 더 있었다간 개리에게 내가 돌아왔다고 소리라도 칠 것만 같았으니까. 심장이 뛰는 진동이 온몸에 뜨겁게 퍼지고, 살갗이 바짝 말라붙어 표면의 솜털이 곤두서 스웨터의 아크릴사와 까끌거리며 맞닿았다. 머릿속이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시야가 까만 반점으로 자꾸만 얼룩지고 다리는 꿈결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이질감이 들어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난간을 꼭 붙들어야 했다. 정보국 요원으로서 오랜 시간 단련되어 있어 겉으로나마 태연해 보일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일을 해왔던 게 아니라면 지금 이렇게 동요할 일도, 그걸 억누르고 있어야 할 일도 없었겠지만. 개리가 앉아있는 라운지 쪽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사이 사이에 책장도 몇 개씩 서 있어 그가 나를 볼 일은 결코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그가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다리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가까운 책장 사이로 들어가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사 코너라 사람이라고는 5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책을 찾고 있는 대학생 한 명이 전부였지만, 두 세 책장 너머는 인기 코너인지 발소리가 잦았다.
"그거 4권이야?"
"응, 주인공이-"
"말 하지 마! 말 하지 마!"
"주인공이-"
"아아아아아 안들린다. 안들린다!"
"알았어. 말 안 할게. 야, 그건 뭐야?"
"지난 주에 영화관에서 본 거."
"책도 있어?"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앳된 십대 소년들의 목소리에 현실 감각이 돌아오면서 서서히 정신이 다시 맑아졌다. 저런 사소한 대화를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너무나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8년간 한 번도 없었다. 영국에 돌아온 후에도 나를 맞이한 것은 길고 긴 디브리핑 뿐이었고,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에 서 있을 때 나는 늘 누가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날카롭게 긴장하고 있었을 뿐,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소리에는 귀를 기울여 본 일이 없었다. 테러리스트를 막은 일로 워커가 나에 대한 판단을 바꿨을까 하는, 아무리 해봐야 소용 없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나는 민간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정보국 현장 요원들은 누구나 어딘가가 결여된 인간이 되곤 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꼭 러시아에서의 8년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입을 위해서 타인을 연기하는 것처럼 민간인인 척 꾸밀 수는 있을지라도 다시는 MI5에 발을 들이기 이전의 평범한 사람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다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무심결에 라이플 총의 사각지대를 찾아 걷고 있었으니까. 지나가는 자동차의 차종과 색상, 번호판을 외우고 나를 미행하는 차량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고, 새로운 장소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출입구와 탈출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졌고, 주변에 무장한 사람이 없는가를 스캔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어딘가에서 총성이 울리거나, 폭발음이 들리거나, 혹은 누군가가 내게 달려들어 공격할 거란 듯이 긴장하고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이것이 나라는 인간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이런 사람으로 길들여져 왔기에 이제 와서 민간인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책장을 세 개 지나치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두 소년이 보였다. 머리로는 그냥 지나쳐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나는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느낀 두 아이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마주쳐다보고 나서야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개리를 닮은 얼굴이, 내 것과 똑같은 검은 머리와 파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에서 도망쳐야 했다. 두 목소리 중 어느 것이 트레이의 것이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이가 처음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에도 알아보지 못했듯이 나는 트레이의 목소리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내가 8년간 하루도 아이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 자리를, 그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머릿속이 다시 멍해져 있었는지 나를 등진채 앉아있는 개리의 뒷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정문 쪽으로 나가려면 라운지 주변을 지나야 한다는 게 생각이 났다. 뒷문으로 나가기 위해 돌아서려 했지만 휴대폰을 받는 개리의 목소리에 나는 쉽게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8년간 기억 속에서만 수천 수만번을 들었던 목소리였지만 꿈속에서처럼 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는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앨리슨. 나는 가까운 책장 뒤로 다시 몸을 숨겼다. 도서관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앨리슨. 여자를 부르는 개리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를 보고 싶었다. 누가 내 자리를 차지했는지, 누가 개리의 아내가 되고 트레이의 엄마가 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말콤이 정말로 걱정했던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여자가 얼마나 나를 닮았는지를 보고 싶어하고 있었으니까. 개리가 얼마나 나를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내 대용품 같은 여자를 만났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10여분 뒤에 나타난 앨리슨 퓰러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앨리슨은 나처럼 창백하지도, 크고 마르지도 않았다. 외양만으로 직업을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누가 봐도 툭하면 예고도 없이 며칠 연달아 철야를 하거나 포스트잇 하나 남겨놓고 출장을 가버리는 그런 직업을 가진 여자는 결코 아니었다. 안정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게 한 눈에도 보였다. 나는 개리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이 오히려 나를 잊기 힘들었기 떄문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제야 앨리슨이 손을 잡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못 돼도 다섯 살은 되어 보이는 아이의 생김새를 미친듯이 뜯어보며 나는 그 아이가 개리와 앨리슨 사이의 아이가 아니라고, 앨리슨과 그녀의 전남편이든 전 애인이든 다른 사람과의 아이라고 말할 만한 증거를 찾으려 애썼지만 아이는 누가봐도 개리를 닮아있었다. 트레이처럼. 나는 돌아서서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진한 남색빛의 카펫 때문인지 내 손등에 혈관이 푸르게 도드라져보였다. 지난 8년간 내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왜 갑자기 사라졌던 것인지, 몸에 문신들은 대체 왜 새긴 것인지 같은 걸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돌아올 자리는 없었다. 나는 그걸 내가 정말로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알지 못할것 같았다. 그날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오후 내내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이 흐릿했다. 다만 옷을 갈아입다가 왼쪽 허벅지 안쪽에 올렉이 새겨 놓은 문신이 눈에 띄어 한참 웃었던 것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슐르하. 창녀라는 뜻이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노스가 변절하지 않았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노스를 복귀시키겠다는 내 결정은 미친 소리 같을 것이다. 심지어 노스는 이 모든 것을 전부 해리를 원망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노스를 내 팀에 두고 싶었다. 변절자이든 아니든, 요원으로서의 노스는 섹션 치프라면 누구라도 탐낼만한 사람이었고, 저만한 사람이 러시아측에 붙었다면 곁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꼬리를 밟을 유일한 기회일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간에 결론은 노스를 팀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이득이었다. 해리는 처음에는 내가 노스에게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보고 내용이 노스가 개리와 트레이를 보러 갔던 것에 이르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노스의 복귀를 허락해주었다. 노스가 아직도 두 사람을 신경 쓴다는 것을 두고 그녀가 러시아에게 붙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혹은 여차하면 두 사람을 빌미로 그녀를 조종할 수 있다고 본 것인지, 아니면 MI5의 그 어떤 정보망에도 접근 권한이 없는데도 개리 퓰러를 찾아낸 것을 보면 복귀 시켜주지 않는다 해서 스파이 짓을 하지 못할 것 같진 않으니 차라리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낫겠다 생각한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해리가 섹션 D에서 가장 믿는 사람이 섹션 치프인 나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나 역시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게 해리 피어슨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현장요원들이 일 년에도 수차례씩 갈아치워지는 동안 20년 가까이 대테러부서 국장 자리를 지켜온 해리 피어슨이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 일은 없었으니까. 나는 해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공유했지만, 해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야 그러는 편이 더 좋았다. 해리에게도 인간적인 고뇌나 약점이 있을 거란 건 나도 알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도 내가 하는 고민 같은 것들이 있다는 걸, 선택의 기로에서 불확실성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언제나 흔들림 없고, 기댈 곳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장이었으면 했다. 언제고 망설임 없이 그의 선택을 신뢰하고 명령을 따를 수 있도록. 나에게 내려지는 지시까지 일일이 의심하고 명령자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어야 한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을테니까.
같이 일을 하면 할 수록, 나는 노스가 변절한 것이 아니기를 점점 더 바라게 되었다. 그녀는 상황 판단이 빨랐고, 대담하지만 모험을 하진 않았으며, 정확했고 재치가 있었다. 지난 달에 아담이 순직한 뒤로 그렇잖아도 팀에 결원이 생겼던 차였던 데다가, 조나 벤은 아직 경력이 부족해 다른 신입을 받아들일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노스가 팀에 합류한 것에 각자 나름대로의 안도감을 느꼈다. 조는 일종의 롤모델을 찾은 것 같았고, 벤은 아담을 대신하여 기댈 상급자가 있다는 것이 든든해진 듯 했다. 아무래도 섹션 치프인 나에게는 일에서 오는 중압감이나 사소한 고민거리를 전부 상담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말콤은 노스에게 일종의 속죄를 할 방법을 찾은 셈이 되어 한시름 놓은 듯 했고, 코니는 비록 이전에는 노스와 그닥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녀에 대한 연민인 것인지 새로운 집이라든지 (이젠 더 이상 안전가옥에서 감시받을 필요가 없었고, 동결되었던 노스의 계좌는 다시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 하는 정착 과정을 여러모로 살펴주고 있었다. 사람 보다는 전자 기기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타릭도 노스에게 만큼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기사, 노스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호감을 느끼지 않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는데다가, 그리드에서의 노스는 디브리핑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갑고, 사교적인 사람이었으니까. 8년 동안 갇혀 산 사람이라는 걸 미리 귀뜸받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MI6라든지 아니면 MI5의 다른 부서에서 이직해온 사람이라고만 생각할 정도였다. 눈에 띌 정도로 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스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그녀 자신이 그리드 사람들의 호감과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여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만큼 모두가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신뢰와 인정을 갈구하는 단 한 사람. 해리 피어슨 만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드 사람들이 그녀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록, 노스가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정작 해리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으니까.
노스가 나를 경계하는 이유 중에 절반 정도는 아마 그 때문이지 싶었다. 해리가 노스를 계속해서 경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테러부서 국장 해리 피어슨의 눈에는 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노스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보였기 때문일 테니까. 나머지 절반은 아마 자신의 자리였을 섹션 치프 자리를 내가 꿰차고, 해리의 신뢰도 내가 받고 있는 것이 분해 그러는 것이겠지. 하지만 노스는 결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일을 앞서게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더더욱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를 싫어하는 것과, 해리를 원망하는 것과 MI5 요원 루카 노스로서의 일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러시아의 스파이만 아니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하지만 루카 노스처럼 완벽한 요원이 그렇잖아도 결원이 있어 허덕이던 팀에 뚝 떨어진 것은 역시 너무 말도 안 되게 잘 풀리는 이야기였던지, 나는 노스가 누군가(결코 우리 측은 아니었다)와 접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스가 상대방에게 우리가 해상에서 입수한 코드를 넘기는 것을 확인한 뒤에 사실은 그냥 그대로도 그리드로 끌고 올 수 있었지만 굳이 전기 충격기를 사용한 것은 아마 내 기대와 바램을 저버린 것에 배신감을 느껴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하시는 거에요."
"8년 동안 그럴싸한 핑곗거릴 외우는 데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닌가보군."
"카챠모프가 그 정돈 가르쳐줬으면 좋았을 걸요."
"접선책을 미행해야—"
"이반 예브세예브는 이미 우리가 미행하고 있어."
"자, 루카. 어디 말재간으로 이 상황을 빠져나가보지 그러나."
나는 해리도 나만큼이나 노스를 믿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라도 그리드에서 3-4년 정도 보내고 나면 해리가 빈정거릴 때는 그가 화가 났을 때라는 걸 알게 되곤 했는데, 나는 해리가 저토록 신랄하게 빈정대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본 적이 적었다. 노스도 러시아 이전에 8년이나 그리드에서 일했으니 그걸 잘 알 터였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 처음으로 자신을 똑바로, 뚫어질 정도로 똑바로 바라보는 해리를 마주보았다.
"카챠모프에게 스파이가 되겠다고 약속했죠. 영국에 돌려보내주겠다고 했으니까. 언제까지고 당신이 빼내주기만 기다릴 순 없었어요."
"난 디브리핑 때 이런 얘긴 못 들었는데?"
"해리, 차에서 얘기 했잖아요."
"얘기한 게 아니라 농담을 했잖나."
"어차피 의심하고 있었잖아요. 제가 공식적으로 인정 해봤자 감방에 집어넣고 몇 달씩 디브리핑 했겠죠. 전… 감옥은 질릴 만큼 봤어요. 그래서… 카챠모프를 제 손으로 MI5에 넘기기로 한 거죠. 그럼 믿어줄 테니까."
"음, 꽤 그럴싸 하게 들리는데 말이지—"
"진실이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자네 말은 런던 주재 FSB 국장에게 민감한 기밀 사항을 넘겼단 말이지. 그 자를 무너트리기 위한 일환으로?"
"그래요."
"그래, 그게 어떻게 말이 되는 소린지 한 번 설명해보지 그래."
뒤이어진 노스의 설명은 나나 해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카챠모프는 우리가 해상에서 코드를 입수했다는 것도, 그 암호를 해독해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노스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그녀를 시험하려 정보를 빼올 것을 지시했던 것이고, 노스는 카챠모프가 자신을 믿게 만들기 위해 말콤의 모니터를 지나가며 보고 훔친 정보를 접선책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 뒤로는 일이 템스강 마냥 순조롭게 흘러갔다. 옥상으로 불러낸 카챠모프에게 그와 해리가 웨스트민스터 옆 강가를 걷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내밀며 '좋든 싫든, MI5에게 러시아의 사이버 테러 공격 작전을 흘린 내부 배신자는 당신'이라며 내 충성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냐고 다그치는 노스의 목소리를 인 이어로 듣고 있는 순간이 나에게는 카챠모프를 잡아넣고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해양학 연구 목적의 러시아 잠수함이 엔진 결함으로 영국 해군에 구조되어 크렘린 궁에서 감사 표시를 했다'는 소식을 들을 적보다 더 통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의 말대로 나는 카챠모프가 자신의 죄값에 비하자면 말도 안 되게 작은 처벌을 받게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라 해도 아담이 죽은 것은 카챠모프의 공이었고, 그를 정치범 감옥에 넣어놓고 정보를 짜내는 것 정도로는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해리에게는 그런 감정적인 이야기는 호소해봐야 먹히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카챠모프는 앞으로 유용한 자산이 될 것'이라며 조를 타이르는 노스의 말에 '아담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하고 동의하며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 해리는 나를 데리고 공식적으로는 영국에 존재하지 않는 정치범 감옥에 카챠모프를 인계하기 위해 접선지로 향했다. 나는 아담을 죽게 만들고, 노스를 가지고 놀고, 우리 모두를 제 뜻대로 조종하려 든 러시아 능구렁이 곁에는 가고 싶지 않아 되도록이면 먼 곳에 떨어져 섰다. 해리는 어쩌면 저렇게도 덤덤하게 저런 사내와 마주하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지.
"인계자는 곧 올 거요. 그 때까지 작별 인사 정돈 나눠도 되겠지."
"그래… 이렇게 되었군."
"이렇게 됐지. ...자유로운 삶은 누릴 수 없을테지만, 생활에 불편함은 없을 거요."
"내가 가진 정보를 마지막 한 방울마저 다 짜낼때까진 말이지."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 진 당신도 알잖소."
"그래, 이긴 쪽에 절하는 수밖에. 승리 축하하네."
"이런 승리는 앞으론 없었으면 좋겠군."
"자네 요원 일은 유감이야. …카터였나?"
"카터 요원은 순직했네. 그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라 범죄일세."
"나야 내 조국을 위해 일했을 뿐이지.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어."
"받을 일 없으니 걱정 말게."
"자네도 발 뻗고 잘 순 없겠지, 해리. 스스로를 용서할 때까진 말이야. 우리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후회 같은 걸 할 자리가 아니잖나. 카터는 아주 용감한 요원이었어. 하지만 그냥 자원 아닌가. 얼마든지 채워 넣으면 그만이지. 빈 틈에 채워넣을 용감한 요원 같은 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니 말이야."
나는 아담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카챠모프의 태도에 당장에라도 코트 안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고 싶었다. 그 자식의 기름진 러시아식 억양을 지껄이는 혀에 당장 한 알 박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녀석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했는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내쪽으로 걸어오는 해리에게 차 문을 열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차에 타지 않고 멈춰섰다. 그는 잠시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자동차 뒷좌석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카챠모프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해리가 언제 총을 꺼내 들었는지도 보지 못했다. 단지 그는 돌아서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카챠모프에게 총을 쏘았고, 폐를 맞아 제 피에 숨막혀하며 헐떡이는 카챠모프에게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않은 채 차 앞에서 그의 숨이 끊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카챠모프의 버둥거림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는 20여분 정도가 걸렸지만 인계자는 오지 않았다. 아마 그 누구도 오기로 되어있지 않았으리라. 그리드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해리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팀 내의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콤이나 코니에게조차. 앞으로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늘 목숨을 맡기는 섹션 D의 국장 해리 피어슨에 대해 여전히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챠모프를 잡아 넣은 뒤로 나를 대하는 해리의 태도는 한결 녹아내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드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었고, 더 이상 러시아 첩자를 보는 듯한 해리의 눈초리도, 내 뒤를 그림자처럼 밟는 워커의 의심도 이젠 없었지만 나는 집에 온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결국 집에 돌아가지 못한 거니까. 매일 밤, 일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가 불을 켜면 낯선, 황량한 텅 빈 집이 나를 맞았다. 나는 종종 그런 집이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일부러 그리드에서 며칠을 지새우기도 했다. 개인 락커에 여벌의 옷이 있었고, 그리드에는 샤워실도 갖춰져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은 쉽게 속일 수 있었지만 워커의 눈썰미는 속일 수가 없어서, 그는 내가 며칠 그리드에서 밤을 지샌다 싶으면 모른 척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같은 방향이니 태워다 주겠다는 핑계로 나를 그 집에 다시 데려다놓았다. 태워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면 그 다음날 즈음에 섹션 치프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나를 강제로 집에 보내버리는 식이었다. 나는 그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신경써주는 척 하며 나를 그런 식으로 골리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안전가옥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새로 얻게 된 아파트는, 아주 흔한 80년대식 구조를 가진 아파트로 어쩔 수 없이 개리와 살던 집과 여기 저기 구조가 닮아 있었다. 그리드와 적당히 가까운 거리에 복구된 내 예금 계좌로 감당할 수 있는 주거 구역은 예전에 개리와 살던 그 지역 부근 뿐이었고, 그곳은 여전히 80년대식 건물들로 뒤덮인 지역이었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슷한 계단. 비슷한 현관. 들어서자마자 왼편에는 신발장이 있고, 오른 편에는 부엌이. 앞쪽에는 손바닥만한 거실. 그 안쪽으로 2인용 침대가 들어가면 꽉 들어차는 침실이 하나. 샤워부스와 작은 욕조가 딸린 화장실 하나. 하지만 이젠 침실에는 2인용 침대 대신 싱글용 매트리스가 하나 바닥에 놓여 있었고, 거실에는 더 이상 아기 침대가 없었으며, 옷장과 욕실에는 내 물건 뿐이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만 흐르는 집에 돌아와 현관에 선 채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빈 자리들을 쭉 둘러보며 나는 매번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MI5의 일이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를 되새겨보곤 했다. 정답은 언제나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일어나버린 지금에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그래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라고 자기세뇌식으로 믿어버리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렇게 믿기 힘들다는게 문제였지만.
일단은 침대 대신 매트리스만 들여놓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바닥에서 잤다. 샤워는 여전히 싫어했고, 대개는 뜨거운 물에 스펀지를 적셔 몸을 닦는 편이었다. 차가운 물은 손을 씻는 거라 해도 싫었다. 런던의 겨울비가 무엇보다도 싫었지만 일일이 우산을 챙겨들고 다닐 수 없는 직업이라 대부분 맞고 다녔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제냐가 꿈에 나왔다. 보통은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제냐나 올렉이 나왔을 때에는 하루종일 그들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음식은 단 음식과 아닌 것으로 나뉘어서, 의외로 단 음식에는 흥미가 붙었다. 처음 몇 입 정도만 달콤함이 기분이 좋고 그 이외에는 너무 달아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 금방 내려놓게 되곤 했지만, 그런 것 치곤 질리지도 않고 꽤 징하게 단 것이 좋았다. 하지만 집에서 뭔가를 먹는 일은 없었다. 늘 출근길에 샌드위치와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사 먹었고, 저녁은 건너뛰거나, 레몬을 넣은 홍차와 초콜렛을 먹곤 했다. 점심은 건너 뛰거나, 그리드에서 먹게 되거나. 보통은 식당에서 샐러드 같은 걸 먹는 정도였다. 사실 딱히 뭘 먹고 싶진 않았지만, 보는 눈도 있는데 계속 식사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전에 없이 단 걸 먹으니 그래도 몸을 쓰는 직업인데 건강 정도는 적당히 챙겨야지 싶어 채소나 과일 정돈 하루 한 끼 쯤은 먹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쯤 모두를 그리드에 달라 붙어 있게 만든 사건이 결국 종결되어 서류철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지친 몸을 쉬러 그리드를 떠났고, 나는 텅 빈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컴퓨터 소리만 웅웅대는 그리드에 남아있는 것도 영 내키질 않아 마지못해 코트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이대로 어디든 사람이 버글거리는 곳에 가 있자니 그 또한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혼자 있으려니 미칠것만 같았다. 어디든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조용한 그런 카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런던 한복판에서는 그런 장소를 찾는 것이 사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퇴근 무렵은 역시 시간이 시간인지라 쉽지 않았다.
"루카, 한 잔 할래? 저녁 겸 해서."
그리드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사교적이고, 즐거운 사람이었지만 섹션 치프 로이 워커에게만큼은 아니었다. 여럿이면 몰라도, 그가 지금껏 서너번 같이 한 잔 하러 가겠냐고 물었던 것을 나는 늘 거절해왔었다. 그가 내 디브리핑을 담당한 취조관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해리와의 관계를 빼앗아간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서인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불편했다. 그의 앞에서는 내가 마치 어딘가 장기 파견 근무라도 다녀온 양 루카 퓰러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너무나 무의미해보였고 바보 같아 보였으니까. 내가 가면을 쓰면 쓸 수록, 워커의 눈에는 얼마나 허술하고 위선적으로 보일까, 얼마나 필사적으로 보여 혀라도 차고 싶을 만큼 비참해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누구라도 좋으니 혼자 있기가 싫었다. 텅 빈 집에 돌아가 악몽을 꿔도 좋으니 잠이 들었으면 하면서 차가운 바닥에 눕기도 싫었고, 불 꺼진 그리드에 모니터 불빛을 나이트 스탠드 삼아 담요 한 장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아 또다시 루카 퓰러 같은 가면을 쓰고 연기 하기도 싫었다. 너무나 지쳤고, 피곤했고, 내가 잔뜩 닳아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나는 내 뇌에 갓 새로 내린 커피를 들이붓는 상상을 하며 표정을 고쳤다. 사교적인 미소를 덧바르며 워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겠네. 어디 좋은 데라도 있어?"
팀원이 된 후론 워커도 나도 팀원들 간에 당연히 그러하듯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내가 해리를 부를 때와, 해리가 나를 부를때처럼 워커와 나 사이에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오히려 거리감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섹션 치프와 상급 분석관 사이의 평범한 대화 같겠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냉랭한 거리감과 낯선 경계심이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가 나를 루카라고 부를 적마다, 친근하게 굴 적마다 뭐라도 집어던지면서 저리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가 꼭 개리처럼 나를 부르는 게 싫었다. 엘레베이터의 반투명한 금속 문에 비친 내 모습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앨리슨은 훨씬 아담한 체구에, 갈색 머리가 탐스럽고,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고 다정한 여자였다. 나처럼 비쩍 마른 몸도 아니었고, 여성스럽게 굴곡진 몸을 가진, 그런 아름다운 여자였다. 개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단단히 질려 전혀 다른 타입의 여자를 만났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의식 과잉인 것 같았지만, 그렇게라도 그에게 내가 어느 정도 의미를 가지는 사람은 됐었다고, 그래도 가끔씩은 떠올리는 사람은 될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앨리슨 같은 여자가 곁에 있다면 말도 없이 애만 두고 사라진 여자 따윈 생각도 나지 않는게 정상일 것 같았지만.
"걸어서 20분 정도인데. 걸을까?"
"좋지."
워커가 개리와 닮은 점은 키가 비슷하다는 것 정도일 뿐, 나머지는 정 반대에 더 가까웠지만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벽을 보고 개리라고 생각하라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반 걸음쯤 앞선 채 나란히 걷는 워커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오늘 밤은 그가 개리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럼 조금 살 것 같았다.
"리!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어, 카틴샤. 요즘 좀 바빴어. 이쪽은 내 직장 동료, 리치."
"루퍼트씨도 계속 안 오구… 다들 이러기에요?"
"아 맞아, 루퍼트 멕시코로 파견갔어 결국. 앞으로 몇 년은 못 올걸."
바에서 셰이커를 닦고 있던 열 여섯, 열 일곱쯤 되어보이는 라틴계 여자아이가 워커를 반갑게 맞이했다. 막역하게 인사를 주고 받는 것 치곤 아이에게 일러주는 이름들이 전부 무역회사 사원인 척 하는 위장신분의 이름이라 나는 속으로 왠지 카틴샤가 딱해 혀를 찼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루퍼트는 내가 들어오기 얼마 전 순직한 아담 카터 요원의 위장신분 중 하나였다. 루퍼트 펜리-존스. 나는 카틴샤의 시선을 마주하고 살짝 웃었다. 코트를 걸며 나는 기계적으로 출구를 확인했다. 가게 안에는 MI6인게 분명한 사람들도 몇 몇 있었고, 정치인들과 보좌관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그럴 만 했다. 적당히 시끄러운 분위기에 바도 갖춰져 있지만 박스석도 여럿 마련되어 있어 여기저기서 다들 낮은 목소리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를 몇 없었지만 워커는 그 중 창가 자리를 골랐다. 나는 디브리핑 첫 날, 그러니까 만난지 10분도 되지 않아 나를 사방이 벽으로 막힌 취조실에 몰아넣던 워커가 떠올라 속으로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커다란 창문이 바로 옆에 달린 자리를 고르는 건, 나 보라는 친절인가 싶어 속으로 쓴 맛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워커 역시 겉으로는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 표정이 나를 조롱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가 출구가 보이는 쪽의 자리로 나를 이끌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가 얼마나 망가지고 형편없이 부서진 사람인지, 얼마나 필사적으로 겉모습을 꾸며대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한 그의 행동들이 싫었다.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또 밑바닥까지 내던져진 기분이 들고야 마는 나약한 내 자신도 싫었다. 그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나 스스로도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그만 하고 싶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빈 집에 돌아가는 거였는데. 나는 마주 앉은 사람이 개리라고 착각하려 애썼다.
"여기 피쉬 앤 칩스가 맛있어. 다른 것도 좋지만."
"그럼 그걸로 하지."
"맥주는? 아님 와인?"
"추천해주는 대로."
"여기 보르도가 꽤 괜찮아. 에일도 좋고. 어떤 게 더 좋아?"
"난 신경 안 쓰니까 리 당신이 더 좋은 걸로."
"에일 자주 마셔? 여기 껀 맛이 좀 강한데."
나는 워커의 무신경함에 웃음이 나왔다.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가 나를 조롱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저 무신경한 것이었을 뿐이었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영국에 돌아온 건 이제 겨우 세 달이 되어 가고 있었고, 그 전에는 8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는 게 그는 그토록 쉽게 잊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것조차 나를 비웃는 일인걸까.
"예전엔 마셨던 거 같은데, 맛은 잘 기억 안 나서 모르겠어."
워커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뭐. 8년 만에 돌아와서 하는 게 펍 순례라도 됐을까봐? 나는 돌아온 뒤로 술을 마신 적도 없었다. 물 이외에 마신 거라곤 레몬을 넣은 홍차나, 커피 정도 였다. 그러고보니 올렉에게선 늘 보드카 냄새가 났었다. 에일이 어떤 맛이었는지, 어떤 냄새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보드카와는 비슷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워커에게 그 점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미안."
"아니야. 에일로 하자. 오랜만이니까."
제일 마지막으로 마셔본 기억을 따지자면 와인도 에일 못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얘기를 끌탕하고 싶지 않았다. 워커의 눈에 동정의 빛이 서리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 카틴샤가 에일을 가져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쉬 앤 칩스도 나왔다. 우리는 에일을 홀짝이며 시덥잖은 일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했다. 나는 틈 나는 대로 지하 자료실로 내려가 지난 8년분의 신문을 읽어대고 있었으므로 (아직 5년치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비어있는 부분은 워커가 채워주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에일에서는 별 맛이 나지 않았다. 하기사, 러시아 이후로는 단 음식을 빼고는 뭘 먹어도 별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리드의 커피가 끔찍하다는 건 알만 했지만 이쯤 되니 그건 학습된 기억에 의해 느껴지는 맛이 아닐까 싶었다. 전기 고문이 미각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바닥에서 자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걸까?
"톰이 그만뒀다는 건 아직도 안 믿겨."
"아, 그래 그거. 해리가…"
"설명 안 해주더라고. 뭐, 그렇겠지."
두 번째 에일 잔이 바닥을 비워갈 무렵 해리가 대화 주제로 떠올랐다. 취한 것은 아니었으니 아마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나는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해리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것 같았다.
"디브리핑 때문에 파일 다 읽어서 진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건데 말이야. 해리는 당신 빼오려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그래, 그랬겠지."
워커가 해리를 옹호하는 소리는 더욱 듣기 싫었다. 그렇잖아도 이제야 내게서 경계심을 조금 풀은 워커 앞에서 해리를 불신하는 모습은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나는 너무나 지쳤고, 피곤했고,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사교적인 얼굴을 꾸밀 힘도 남아있질 않았다. 내가 빈 에일잔을 기울이며 회의적으로 빈정거리자 워커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내쪽으로 몸을 약간 더 기울였다. 내가 시선을 올려 마주하자 워커는 디브리핑 때처럼 소름끼치는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 싫었다. 내가 도대체 얼마나 더 해야 내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걸 믿어주려는 것일까? 나는 그냥 러시아에서 죽었어야 했던 걸까? 대체 뭘 위해서 나는 여지껏 살아서 이러고 있는 거지?
"MI6, CIA, 모사드에 UN까지 있는 연줄은 다 동원했어. 나중엔 수상이 나서서 거부권을 행사해서 해리도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MI6 국장이 요원 하나 갖고 왜 저렇게 수선 피냐고 할 정도였어."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워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처음부터 모든게 해리가 시킨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워커도 소파에 기대 앉은 채 자기 잔만 비워냈다. 나는 언제부터 내가 해리를 믿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했다. 카챠모프. 시작은 언제나 카챠모프였다. 그는 이미 MI6의 손에 넘어가 내가 당했던 꼴을 그대로 되받고 있을 텐데도. 정작 이 모든 심리전을 벌인 사람은 판에서 치워졌는데도 난 여전히 해리를 믿을 수가 없었고, 해리는 나를 믿지 않았다. 개리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그리드에도 예전과 같이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무엇 하나 예전 그대로 되찾을 수 있는게 내게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여전히 카챠모프가 만든 올가미에 걸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하지만 해리가 나를 되찾으려 애썼다 해서, 그게 그의 결백을 증명해주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불가능할 걸 알기에 오히려 날뛰었는지도 모르니까.
"FSB가 기다리고 있었어."
"이 얘긴 그만 하자."
"내가 걸린게 아니야."
"일어나자. 늦었다."
"접선 장소에서 FSB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디브리핑 때 그 얘기 했어. 들었어. 나도 알아."
"왜 FSB가 다 알고 있었는지 설명해봐. 그럼 당신도, 해리도 전부 믿을 수 있을테니까."
"그냥 정보가 샌 거야."
"그리드에서 말이지."
"정보는 어디서든 샐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그 날 모스크바에 가는 건 원래 내가 아니었어. 내가 간다는 건 그리드만 알았어. 당신도 알잖아. 파일을 다 읽었으니까."
워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잘 만들어진 표정을 뒤집어쓰곤 카틴샤에게 다가가 계산을 하고 에일을 너무 마셨다는 핑계를 대며 화장실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몇 번이고 해리에게 묻고 싶었던 말들을, 하지만 그가 나를 여전히 믿지 않기에 할 수 없이 담아만 두었던 말들을 부주의하게 워커 앞에 쏟아낸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해버린 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 입었다.
"리가 여기 여자 데려온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카틴샤는 동작 하나 하나가 마치 살사라도 추는 듯 리드미컬했고, 다갈색 피부에서는 윤기가 흘렀으며, 시종일관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뺨은 장밋빛이었다. 화장으로 덧칠한 색이 아니라, 본래의 생기 넘치는 색이었다. 어깨 위로 넘실대는 곱슬머리처럼 생동감이 흘러 넘치는 여자아이였다. 나는 이런 어린 아이에게조차 열등감을 느끼는 나자신이 한심해 그것을 감추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직장 동료 사이에요."
"아? 정말요? 약혼녀 이후론 처음이라서 좀 기대했는데!"
"아마 그 여자 잊으려면 훨씬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워커에게 약혼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던졌다. 반쯤은 직업병이었고,반쯤은 내 속내를 그에게 쏟아낸 만큼 나도 워커에 대해 뭔가 쥐고 있는 게 필요하다는 본능적인 판단에서였다. 카틴샤는 순진해보이는 액면 그대로 손쉬운 상대였다. 그녀는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 다운 호기심으로, 하지만 여자애다운 조숙함으로 내 어조에서 마치 약혼녀를 잊지 못하는 직장 동료를 짝사랑하는 듯한 뉘앙스를 읽어냈다.
"그럴만 하죠. 그렇게 매정하게 버리고 갔는걸요."
"그런 것 치곤 정작 리는 그렇게 나쁜 소린 안 하더라구요. …그 여자 혹시 다시 돌아 왔었나요?"
"리 다리가 나으니까 곧장 다시 왔었어요. 진짜 못된 여자야."
"곧장?"
"그러니까요. 못 걸을지도 모른다니깐 며칠 걱정하는 척 하더니 다른 남자 꽁무니 쫓아가 놓구선. 혹시 요즘도 연락하는 건 아니죠?"
"직접 하는 것 같진 않지만…"
워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나와 카틴샤는 재빨리 '이 얘긴 비밀!' 이라는 눈빛을 주고 받았다. 나는 에일 덕인지 카틴샤에게서 얻은 정보 덕인지 다시 가면을 쓸 힘이 나 있었고, 워커 역시 화장실에서 혼자 생각할 시간을 얻어 가면을 재정비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사이 좋은 직장 동료 리와 리치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펍을 떠났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가로 나아가며 나는 워커의 걸음 걸이에 눈길이 갔지만 부자연스러워보이는 면은 아무 곳도 없었다. 지금껏 현장 업무를 하면서도 워커가 걷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크게 다친 적이 있다는 인상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이 바닥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나는 원래 남들이 숨기려 하는 비밀을 틀어쥐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는 지저분한 여자였던 걸까. 새벽녘에 도착한 텅 빈 아파트의 적막감이 어느 쪽이든 넌 바닥을 치고도 남는 인간이라 대답해주는 것 같았다.
잘못 생각했던 걸까. 그녀가 지난 8년간 러시아 감옥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이 살면, 좀 더 평범하게 대해줄 수 있을 거라고, 아마 그게 그녀에게도 팀에게도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었다. 해리가 전직 정보국 요원인 프리랜서를 고용해 그녀를 여전히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걸 내게 숨기지 않는 것도 못 보고 못 들은 척 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매튜라는 남자가 해리에게 매주 꼬박꼬박 올리는 보고 자료를, 내가 해리의 사무실에 들어가면 그는 마치 나 보란 듯 펼쳐놓고 치우지도 않는 그 파일들을 늘 모른척 했었다. 그녀가 토요일 2시마다 시간이 허락하면 트레이의 축구 연습을 보러 가는 것도 모른 척 했고, 시스템에서 앨리슨 퓰러를 조회한 것도 모른 척 했다. 그게 더 좋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더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러시아에서의 시간은 없는 척 하면 그녀도 괜찮아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멍청하게도.
[에일 자주 마셔? 여기 껀 맛이 좀 강한데.]
[예전엔 마셨던 거 같은데, 맛은 잘 기억 안 나서 모르겠어.]
마치 내가 '파란색 고양이를 봤어' 같은 소리라도 한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잠시 보다가 웃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누군가가 실없는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내뱉는 숨소리가 어딘가 살짝 떨렸고, 왠지 모르게 젖어 있어서, 내게는 그 웃음이 마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려 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각만이라도, 이전의 삶을 한 조각만이라도 되찾고 싶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MI5였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읽지도 않는 가디언지를 들고 잔디 구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구석 벤치에 앉아 아이를 보다가 시합이 끝나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었고, 해리가 나와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겠느냐고 하면 아무 말 없이 그의 오피스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카챠모프를 제 손으로 잡아 왔는데도 해리가 그녀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나 역시 토달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알아도 되는 이유라면 진작에 얘기해줬게지 할 뿐이다. 내게 자신이 그녀를 감시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건, 나에게도 그녀를 경계하라고 암묵적인 지시를 내리는 걸까. 하지만 나는 내키지 않았고, 그녀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리드의 헤드 데스크에 앉아 지시를 내리는 해리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장 요원인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팀원들을 전부 믿지 않으면 일할 수 없었으니까.
내게 속내를 너무 털어놓았다 생각한 것인지, 그녀는 그날 이후로 나를 피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루에 최소 15시간 쯤은 한 공간에 붙어 일을 했으니 피했다고 말하긴 어폐가 있긴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피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팀원들이 알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대상자인 나는 알 수 있는 정도로. 그녀는 여전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하고, 탕비실에 두 사람만 있을 적에도 부자연스럽게 먼저 자리를 떠나버리거나 하지 않고 농담이나 일상적인 대화를 했으며, 서스름 없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곤 했지만 나는 단단한 유리에 가로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루카 노스가 내게 그 날 밤처럼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순간 흘러내렸던 감정들은 다시 빈틈 없이 단단하게 채워져서, 그녀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얼굴만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섹션 치프로서는 그것이 국장인 해리에 대해 품고 있는 반감을 경계하는 것에서 생겨난 우려감이어야 했으나, 솔직히 털어놓다면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자신을 저렇게 꾹꾹 눌러담다가 어느 한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내릴 것 같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조와 벤은 주변 인물 마킹을, 나랑 루카는 현장에 들어가는 걸로 하지."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업무 지시일 뿐이었다. 벤이나 조도 얼마든지 현장에 투입되곤 했지만, 벤은 백인이 아니고, 조는 이제 스물 넷으로 나이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번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현장에 들어가는 게 나와 그녀인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면서 나는 왠지 내가 지위를 이용해 비겁하게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쩐지 평소와 다름 없는 그녀의 표정도 마치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주고 받지 않았다.
"조 맥밀란? 타릭 이녀석, 이름 너무 대충 지은 거 아냐?"
"조안 포터 보다는 낫잖아."
이러다가 나중엔 존 스미스 같은 이름을 받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새 신분증을 지갑에 쑤셔넣었다. 위장 신분에 걸맞는 지갑이긴 했지만 손가락에 와닿는 악어 가죽의 감촉이 영 껄끄러웠다. 옷방에 들어차 있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도 하나같이 내 취향과는 동떨어진 것들이라 조 맥밀란이라는 남자가 여러모로 꺼려졌다. 하지만 일이니 선택권은 없었다. 이게 가장 무난하게 잠입할 수 있는 신분이라면, 기꺼이 조 맥밀란이 되어야지. 하지만 빌딩 몇 채 값은 될듯한 것들을 몸에 휘감아 무장한 채 거울 앞에 서자 역시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 맥밀란이라는 남자는, 마치 내 예전 약혼녀 같은 여자를 트로피 와이프 마냥 팔에 두르고 다녀야 마땅할 녀석처럼 보였던 것이다.
"발신기. 타릭이 줬어."
갑자기 목덜미를 매만지는 손길에 등 뒤에 선 그녀를 내가 거울 속에서 홱 바라보자 그녀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내 셔츠 칼라를 뒤집어 넥타이 안쪽에 발신기를 꽂았다. 나는 잠자코 거울 속에 비친 나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정색의 살랑거리는 옷감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드레스는 뒤에서 보기엔 긴 팔에다가 목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싸는 형식의 얌전한 드레스였지만 앞에서 보면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대담할 정도로 세로 트임이 있었고, 치마 또한 아슬아슬할 정도로 왼편 다리쪽이 트여 있는 드레스였다. 누군가가 아주 열과 성을 다해 월 스트리트 출신의 금융 재벌 조 맥밀란과 그의 영국인 약혼녀 조안 포터를 설정한 게 틀림 없었다. 트임 사이로 비치는 새하얀 다리는 그 역할이 보는 이를 홀리기 위한 것이란 듯이 그녀가 걸음을 걸을 적마다 살랑이는 옷감 사이로 숨었다가 언뜻 모습을 드러내길 반복하며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와, 왼손의 약혼반지, 귀에 걸린 귀걸이는 전부 금빛으로, 하나같이 묵직한 보석들이 박혀있었다. 하지만 왠지 조안 포터가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금껏 이런 신분으로 위장한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늘 맨 얼굴에, 단정하게 묶거나 집게로 집어 올린 머리, 아무런 향수도 쓰지 않고 손톱을 칠하는 일도 없는, 청바지와 셔츠 차림이 일상인 직장 동료 루카 노스에게 익숙해져있었기에 그녀가 마치 타고난 듯이 이런 것들이 제 몸의 일부인양 자연스럽기만 한 조안 포터가 너무나 낯설면서도, 신선했던 것이다.
"왜 그래?"
"아니야."
손톱과 발톱에 칠해진 붉은 매니큐어처럼, 입술 역시 짙고 우아한 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다. 마스카라를 칠한게 틀림 없는 속눈썹은 머리카락처럼 새카만 색이 되어 있어 새파란 눈동자가 유독 더 시린 하늘색으로 빛났다. 나는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이, 늘 연한 빛인 속눈썹이 까맣게 변했기 때문일까 했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손바닥만한 클러치에 (이것 역시 보석이 잔뜩 박혀 있었다) 립스틱으로 위장한 나이프라든지 하는 것들을 챙기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 그게 무엇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거…"
세로로 깊게 트여 있는 가슴팍은 다리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살결 뿐, 그곳에 있어야 할 짙푸른 남색의 문신이 없었다. 분명 윌리엄 블레이크의 태고의 날들이 새겨져 있을 곳이었는데. 나는 마치 처음부터 문신 같은 것은 이었던 적 없다는 듯한 그 모습에 너무 넋이 나가, 나도 모르게 거의 손을 뻗어볼 뻔 했다.
"전혀 모르겠지?"
"그… 어떻게 한 거야?"
"그냥 칠한거야. 별게 다 있더라고."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자기 몫의 발신기를 내게 내밀고는 뒤돌아 섰다. 나는 그녀의 드레스 목깃 뒤편에 보이지 않게 발신기를 찔러넣었다. 하기사. 문신을 그렇게 말끔하게 지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잉크로 새긴 것이 아닌 감옥 문신을 지운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나는 그녀가 화장품으로 문신을 가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무의미한 상상을 그만두려 애썼다. 아마 이것 때문에라도 그녀는 개리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설명할 길이 없을테니까.
그날 저녁은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다. 우리는 조 맥밀란과 조안 포터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연회장을 이리저리 누비며 목표물에 접근했고, 결국엔 탈레반과 무기 거래를 하고 있다는 의혹선상에 올라 있는 자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다. 좀더 정확하게는, 내가 그의 아내와 불장난을 하는 녀석이 되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틀 뒤 그들이 주최하는 자선 파티에 초대되었고, 이 정도면 좋은 수확이었기에 녹초가 되어 조안 포터의 명의로 된 펜트 하우스에 돌아왔을 땐 그래도 둘 다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해리는 계속해서 현장 보고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정식 보고서를 올려야 하기에 우리는 옷만 갈아입은 채 랩탑을 하나씩 붙들고 응접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내가 벗어놓은 시계와 그녀가 빼놓은 귀걸이, 그리고 팔찌가 서류더미와 커피잔 틈새에 놓여 있었다. 수천 파운드는 가뿐히 나갈 악세사리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또다시 옛 약혼녀가 떠올라 기분이 울적해졌다. 우리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좋은 샴페인과 향수 냄새까지 전부 엉겨드는 것 같아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며 랩탑을 들고 도망치듯 내 방으로 향했다. 조 맥밀란과 조안 포터의 침실은 따로 있었지만 우리 둘은 각자 손님용 침실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방으로 돌아온 나는 평소보다 배로 오랫동안 샤워를 하며 조 맥밀란을 벗어 던졌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여 침대에 누웠지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다섯 달 동안 다리에 감각 없이 누워 있던 날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발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랩탑을 다시 들고 일어나 앉았다.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나니 고작 20분이 흘렀을 뿐이어서, 나는 다시금 이번 목표 인물과 그 주변인들에 대한 파일들을, 이미 수십번 읽어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잠이 오지 않아 괜히 보안 접속을 통해 시시콜콜한 시스템 파일들을 읽다가 고개를 드니 벌써 새벽 두 시였다. 자긴 자야겠다 싶어 이만 누우려다가 한 잔쯤 하지 않으면 잠들기 쉽지 않을 것 같아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응접실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려니 왠지 기분이 더 처지는 듯 하여 같이 한 잔 하겠느냐고 물을까 싶었다. 방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봤으니 그녀도 아직 깨어있을테니까. 나는 잔을 내려두고 다시 윗층으로 향했다. 노크를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방안에서 약간 부스럭 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나고 있었고, 불도 꺼지지 않았으니 잠들어 있는 건 아닐 터였다.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가 보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작지만 분명하게, 탕 하고 뭔가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당장 내 방에서 총을 가져와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녀조차.
"루카?"
문가에 서서 방 곳곳을 겨누던 총을 아래로 내린 뒤 방안에 들어서자 라디에이터를 껐는지 한기가 느껴졌다. 발에 와닿는 카펫이 마치 얼음장 같아서 도리어 머리가 쨍 하고 맑아지는 것 같았다. 화장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불이 켜져 있을 뿐. 집 밖으로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했을 뿐더러 나갈 일도 없는데. 해리가 비공식적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다는 점까지 맞물려 나는 속이 까맣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를 간 걸까? 아무도 모르게? 작전 중에? 어딘가와 내통하고 있는 것일까?
"пожалуйста…не…"
갑자기 들려오는 웅얼대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총을 꽉 쥐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있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방안으로 들어서자 얇은 담요 한 장을 덮은 채 바닥에 웅크려 잠든 그녀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자다가 떨어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름 하나 없는 침대를 보니 처음부터 침대에서 잔 적이 없어 보였다. 노란 램프 빛에 팔에 새겨진 문신이 유독 푸르게 보였다. 러시아어를 웅얼거리며 움찔거리는 모습에 그녀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동료가 악몽을 헤매고 있다면 깨워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온기 하나 없는 딱딱한 바닥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악몽에서 헤어나오느니, 꿈에서 제냐나 올렉을 만나는 걸 선택할 사람이었으므로.
잠을 설친 탓일까. 유독 모든 것이 너무 느리고 무겁게만 느껴져서 나는 부주의하게도 반 박자쯤 늦게 미소를 입에 걸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목표물은 그걸 제 입맛에 맞게 알아서 해석한 듯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조 맥밀란 두 사람이 모두 파티장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뒤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마 내 웃는 얼굴이 잠시 어색했던 것도 자신과 같은 이유라 여기는 듯했다. 이러나 저러나 조안 포터는 맥밀란의 약혼녀였으니까. 나는 나를 발코니로 이끄는 손길을 마다하지 않으며 표정을 다잡았다. 그는 예상대로 입에 발린 말들을 쏟아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두고 자리를 떠나다니 배가 부른 녀석이라는 둥 하는 식으로. 하지만 속내는 결국 한가지 아닌가. 맥밀란이 제 아내를 낚아갔듯이 저도 나를 가지고 놀아 체면이라도 건지겠다는 심산이었다. 나는 예전에도 잠입 작전이 이런 식으로 흐를 때가 가장 싫었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로 이런 방향이 꺼려졌다. 남자는 손에 보드카 잔을 들고 있었다. 나는 올렉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미소지었다.
"원래 그런 사람인걸요. 미국에도 여자 한 둘 쯤은 두고 있을테니."
"당신 같은 여자가 왜 그런 녀석과 약혼까지 한 거요?"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 내 왼손을 바라보며 남자가 물었다. 새삼 굵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화려한 반지의 무게가 느껴져 손이 시렸다. 그러고보니 내 결혼반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그리드의 내 라커에 빼두었던 반지가 생각났다. 아무런 보석도 박히지 않은 백금 반지였다. 조명을 받아 샴페인 잔에 흰 빛을 반사하고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런 건 벗어두고 개리가 주었던 반지를 찾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은 작전 중이었고, 내 눈 앞에는 목표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이런. 내가 당신을 슬프게 했나 보군."
남자에게서 풍겨오는 보드카 냄새가 역겨웠다. 내 어깨를 감싸쥐는 손의 온기가 질척하게 느껴져 징그러웠고, 내 손에서 샴페인 잔을 거둬 내려놓는 손가락이 내게 닿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집에는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드에만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해리도 더 이상 나를 그렇게 차갑게 바라보지 않을지도 모르지. 눈 앞의 임무만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파티장에는 실탄을 가진 경호원들이 즐비했고, 탈레반에 무기를 공급하는 사람에게 나 하나쯤 쏘아 죽이는 건 별로 망설일 일도 아닐테니. 고작 이런 남자에게 정체가 발각돼 죽을 거라면, 차라리 러시아에서 돌아오지 않는게 나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입술을 피했다.
"없던 일로 하죠."
나를 붙잡으려는 손을 피해 재빨리 발코니를 벗어났다. 사람이 가득한 파티장에 들어서자 단숨에 뜨겁게 변한 공기에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를 약간 서성이며 파티장을 거닐다가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기에 돌아보니 워커였다. 그는 약간 토라진 약혼녀를 달래는 연기를 하며 내 손에 작은 메모리 카드를 쥐어주었다. 역시나 부인은 부주의하게도 워커를 자기 침실로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그게 우리가 원했던 바였지만. 나는 화가 난 듯이 워커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떠나서는 화장실로 가 문을 걸어잠그고 휴대폰에 메모리 카드를 연결해 타릭에게 전송했다. 이걸로 증거가 충분하다면 좋을텐데.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정말로 싫었다. 워커는 이런 나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몸을 감싼 보랏빛의 얇은 천 아래에 흉측한 문신이 가득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 파티장에서 워커 뿐이었다. 나는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라 실없이 웃었다. 당신 같은 여자?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앨리슨 퓰러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인지가 떠올라 그에 한참 떨어지는 내 모습이 싫었다. 이제는 내가 왜 MI5가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빨리 이 파티장을 벗어나버리고만 싶었다.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전에 없이 피곤하고 견디기 힘든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타릭에게서 온 답장은 내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직접 관여 증거 부족]
남자가 내연 관계를 눈치챈 마당에 부인이 워커를 또 다시 제 방으로 들일 리는 없었다. 나는 다시 파티장으로 나가 워커에게 시간을 끌라고 말한 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윗층으로 향했다. 침실은 워커가 이미 보았으니 나는 그의 집무실을 노렸다. 무기 밀매를 하는 사람 답게 컴퓨터는 암호가 걸려 있었고, 3분 정도 만에 타릭이 풀어내긴 했지만 컴퓨터에는 자료가 없었다. 서랍에도 그저 남자가 운영하고 있는 건설회사와 관련된 자료들 뿐이었다. 나는 다시금 서재를 샅샅이 뒤졌고, 두 번째 액자 뒷편에 있는 금고를 찾아냈다. 시간은 벌써 11분이 흘러 있었다. 워커가 시간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아래층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에라도 저 문을 누구든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클러치에서 도구를 꺼내 금고를 열자 소유허가증을 받지 않은게 분명한 불법 개조 총기가 몇 자루 보였다. 여권, 세공하지 않은 다이아몬드, 금괴, 파운드와 유로, 미국 달러로 되어있는 현금 다발. 그리고 맨 아래칸에 서류파일이 있었다. 무기거래 장부였다. 하단의 서명은 하나같이 남자의 필적이었다. 나는 재빨리 금고를 닫고, 액자를 제 자리에 돌려놓은 뒤 캐비닛에 살짝 가려진 위치에 놓인 팩스 기계에 장부 더미를 꽂아두고 그리드의 번호를 눌렀다. 팩스가 네 장째 송신되었을 때, 남자의 화난 목소리가 복도 밖에서 들려왔다. 나는 서재 안을 둘러보다가 재빨리 책장에 꽂혀 있던 레코드 판을 꺼냈다. 축음기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관상용이었던지 남자가 문을 열기 직전에야 겨우 음악이 흘러나와 팩스 소리를 가려주었다.
"누가—"
서재 안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돌아섰다. 남자의 뺨에 긁힌 자국이 있고 턱 부근이 붉게 부어 있는 것을 보아 하니 제 아내와 불장난을 친 조 맥밀란과 언쟁만 벌이고 온 건 아닌 듯했다. 나는 내게 20분 가까이 시간을 벌어준 워커에게 속으로 감사하며 남자가 팩스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도록 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다행이 그쪽에는 소파가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안 되나요?"
아무 레코드 판이나 집어든 것이 화근이었을까, 음악은 이런 경우에 들어맞는 분위기의 음악이긴 했지만 팩스 소리를 충분히 가리기엔 왠지 조금 부족했다. 나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왼손에 끼워진 약혼 반지를 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다이아몬드가 테이블의 유리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남자는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사냥개마냥 나에게 달려들었다. 소파는 푹신하긴 했지만 나는 한없이 불편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다른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가 내 몸을 더듬는 손길이나, 그의 혀에서 느껴지는 보드카 맛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테니까. 일단은 무엇보다도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그 무게감이 답답해서 마음 같아선 그의 키스에 응답하는 척 하며 자세를 뒤바꾸고 싶었지만,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편이 팩스를 등지게 되는 자세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바짝 안기는 척 하며 몸을 일으켜 팩스를 확인했다. 아직 서류는 반쯤 남아있었다.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남자가 내 옷을 벗길 일은 없을테지만 나는 허벅지 안쪽의 문신이 신경쓰였다. 지퍼가 없는 드레스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이미 남자가 내 몸을 뒤덮은 문신을 보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남자는 워커에게 '이걸 어쩌나, 우리도 한 바탕 뒹굴고 왔는데'하는 식의 흔적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은지 일부러 내 머리핀을 풀어 머리가 헝클어지게 하고, 보란듯이 목덜미에 진한 마크를 남겼다. 남자가 잔뜩 부풀어오른 앞섬을 내게 비벼오자 나는 기계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남자는 내 발목을 쥐고 자세를 잡으려다가 내 힐이 거슬리는 듯 발목을 감싼 스트랩 고정쇠를 거칠게 벗겨 바닥에 내던졌다. 새틴 재질의 매끄러운 힐은 테이블의 모서리에 긁혀 올이 일어났다.
"당신에게 새 구두를 선물해야겠군."
"한 켤례론 어림도 없어요."
하지만 운은 거기까지였던지, 레코드 음악이 끝나고 말았다. 방안에는 팩스 기계 소리만 울렸고, 남자는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곤 고개를 돌려 팩스 기계가 마지막 두 장의 서류를 전송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일어나 앉아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애초부터 그의 아래에 깔려있는 자세에서 드레스를 입은 상태에서는 너무나 불리했다. 남자의 손은 내 양 어깨를 거칠게 붙잡아 내리눌렀다. 올렉이 처음으로 나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던 날도 이런 식이었던 것이 떠올라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곧 남자가 테이블 위에서 뭔가를 집어들어 내 관자놀이 부근을 내려치자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독하게 울리고, 눈앞이 까맣게 흐려져서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은 알았지만 상황 파악은 되지 않았고, 그저 남자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물러나기 위해 팔로 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동안 속이 너무 메스껍고 어지러워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채 내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뺨에 와닿는 카펫 바닥은 생각보다 까슬했고, 맞은 부위가 붓는 것인지 얼굴 왼쪽에 뜨거움이 느껴졌다. 등 뒤에 와닿는 차갑고 딱딱한 것은 아마 책장의 바닥 부분인듯 싶었다. 눈을 뜨려 했지만 몇 번 희미한 움직임들만 보일 뿐 아무것도 인지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루카, 루카?"
누가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어디서 들은 적 있는 목소리인데. 누구의 목소리인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개리인가? 하지만 개리일 수는 없는데. 왜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을 수 없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개리일 수는 없었다. 무언가가 내게 그렇게 알려주었다. 더 이상 개리가 나를 부를 일은 없다고. 몸이 무거웠고, 눈을 뜨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부르는 사람이 너무나 애탄 목소리로 부르고 있어서 나는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는 흐렸다. 한참동안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왼쪽은 여전히 탁하게 뭔가가 가린듯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재 같은 곳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진한 푸른색 카펫 바닥 위는 깨진 유리병이나 레코드판, 찢어진 꽃 같은 것들로 엉망이었다. 핏자국 같은 것들도 보였다. 나는 한참동안 쌕쌕거리며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쉬고 있다가 이곳이 그 남자의 서재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내가 왜 이 방에 들어섰었는지도. 손을 더듬어 왼쪽 얼굴을 만져보자 약간 말라 끈적하게 엉겨붙은 피가 손에 뭍어나왔다. 나는 내가 바닥에 그냥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안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루카?"
워커였다. 나는 워커에게 해야 할 말들이 한꺼번에 여러가지가 떠올라 팩스와 서류같은 단어만 웅얼거리다가 피곤이 몰려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나를 내려놓고 증거물이 될 서류를 확인하러 가기는 커녕 나를 안고 있던 자세를 고쳐잡기만 해서 나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소매를 어설프게 잡아당기는 것 정도였다. 손가락에 피가 끈적이는 감촉이 너무나 불쾌했다.
"체포했어. 팩스 받자마자 해리가 영장 받았어. 늦어서 미안해, 루카? 응? 정신 차려봐."
워커가 뭔가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가 뭐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 내 머릿속에서 미처 의미를 만들기도 전에 금세 흩어져 버렸다. 나는 너무나 피곤했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개리가 만든 치킨 수프가 먹고 싶었다. 그는 늘 스톡 큐브로 만든 스프에 스파게티 면을 잘게 부숴 넣고, 냉동 채소를 넣은 것일 뿐이라 했지만 나는 그가 만든 것이 제일 맛있었다. 왠지 그걸 먹어본지 아주 한참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우리는 결혼했는데, 왜 나는 그를 본지 오래된 기분이 들까. 생각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나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다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안아주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내게 친절한 사람인 것 같아 나는 다시금 그 사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부탁했다.
"개리… 집에 가고 싶어…"
내가 조금 더 오랫동안 그를 붙잡아 두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현장 업무에서는 '이랬더라면…저랬더라면…' 같은 식의 생각은 문제 해결에도, 앞으로의 업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섹션 치프인 만큼 누구보다도 더. 하지만 그걸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지금껏 팀원들이 자신의 실책을 곱씹는 것을 늘 쓸데 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는 입장이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필요 이상으로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루카의 침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인 이어로 전부 듣고 있었지만 나는 내 파트너를 구하러 그 방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드에서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는, 목표물을 잡아넣을 증거를 확보했다는 확언을 받기 전까지는 그에게 손댈 수 없었다. 확실하게 잡아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MI5의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게 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그가 과잉진압이라며 항의하고 있다는 얘길 벤에게 들었지만 해리 피어슨이 국장이고 녀석은 국가반역죄를 저지른 녀석이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나는 녀석의 코뼈를 부러트려준 게 고작인 것이 못내 아쉬웠다. 두터운 크리스탈 재떨이에 맞아 지독한 보라색 멍이 퍼진 이마의 찢긴 상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조금만. 단 5초만이라도 일찍 그 방문을 열었더라면. 녀석에게 맞은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에 부딪힌 것인지 금이 간 오른쪽 갈비뼈 두 대 때문에 부드러운 환자복 아래에는 딱딱한 보호대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물론 이만한게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머리의 상처는 뇌진탕 대신 뇌출혈이었을 수도 있었고, 갈비뼈에는 금이 가는 대신 부서져서 폐를 찌르는 일이 있을 수도 있었을테니까. 나는 새삼 우리가 늘상 이런 위험에 노출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껏 늘 임무의 성공이냐 실패냐로만 작전을 인식하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저 부수적인 피해로만, 그것이 긁힌 생채기이든 팀원의 순직이든간에 그저 어쩔 수 없는 손실로만 인식했던 내 자신이 소름끼쳤다. 어쩔 수 없는 손실. 그런 말로 대수롭지 않게 묻어버리고, 털고 일어나 다음 일을 계속하고 내일을 또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인간이라는게. 어쩌면 약혼녀가 나를 그렇게 버렸던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촉망 받는 폴로 선수라는 것 외에는, 나라는 인간에게는 타인을 끌어당길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그런 도저히 정붙일 곳이 없는 박정한 녀석이었을테니.
죄책감은 내 생각보다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놀라우리만치 마음을 다잡게 하는 것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부채질하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금껏 나는 후회나 자책 같은 것을 그저 나약한 것이라고만 여겨왔으니까. 두려움 같은 것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왜 하필 이런 깨달음을 루카를 희생해서 얻어야 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약기운에 잠들어 있는 루카의 모습은, 지금껏 내가본 그 어떤 모습도다도 평온해 보였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그저 그렇게 푹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비록 상처 투성이가 되어 약으로 잠들어 있는 것이긴 했어도. 항상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러시아 이전에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나는 섹션 치프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루카 퓰러라는 이름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개리와 트레이가 있는 집을 되찾아 줄 수도 없었다. 해리의 신뢰를 돌려줄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낯선 얼굴 투성이인 그리드에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는 것 뿐이었다. 그게 싫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다섯 달 동안, 점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에 누워있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무도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약혼녀가 떠났을 때, 사람들의 위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런다고 그녀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예전과 같지는 않을테니까. 세상에는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고, 약혼녀가 자신을 버리고 라이벌 녀석에게로 가버리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손을 뻗어 시트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던 루카의 손을 잡았다. 디브리핑을 하러 처음 그리드에 왔을 때에는 뽑혀나간 것인지 없었던 오른손의 약지와 소지의 손톱이 이제는 말끔하게 자라나 있는 것을 보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벌써 시간이 이토록 흘렀는데도 그녀가 여전히 겉돌아야 하는 것이 섹션 치프로서의 내 무능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제대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불 꺼진 병실에 빛이라고는 루카의 혈압과 심박을 재는 기계의 스크린과 내 랩탑 스크린이 뿜어내는 빛 뿐이었다. 가장 어두운 밝기였지만 깜깜한 병실 안에서는 충분히 밝았고, 나는 무릎에 랩탑을 올려놓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의 타자 소리와 루카의 심박에 맞춰 울리는 기계음만이 가득한 오늘 밤은 유독 길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를 진정시키는 말콤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긴 러시아가 아닌 영국이고, 나는 감옥이 아닌 병실에 있으며, 내게 다가오던 사람들은 고문관이 아니라 의료진이라는 걸 인식하는데에는 필요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생각을 똑바로 하는 것도, 지금이 언제인지를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말콤은 안정제 때문이라고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만, 내겐 그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었다.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 주변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은 정보국 요원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가장 두려운 악몽이리라. 나는 말콤의 말소리에 집중하며 지금이 언제이고, 여기가 어디인가를 기억하려 했다. 처음으로 말콤을 알아보자마자 톰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던 게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의료진이 내 팔에 뭔가를 주사하려 했지만 나는 다시금 거부했다. 물론 이번에는 난장판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 말콤은 내게 괜찮다는 설득을 하는 대신 의료진에게 고개를 저어보였고 그들은 나를 내버려두었다. 그렇게나 간단한 일이었다. 고문관들도 그렇게 고개를 내저으면 가버릴 사람들이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그들을 거절해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직은 안 돼."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말콤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바로 방금 전 그 소란을 피운 뒤이니 멀쩡하다는 소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난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창문이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병실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난 그걸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있어야만 하는 한정된 장소. 누군가의 허락이 떨어지기 이전엔 내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 꼭 솨창살이나 간수, 고문이 있어야만 감옥인 것이 아니었으니까. 해리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말콤이라면 해볼만 하다는 생각에 나는 몇 번이고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던 (러시아에서는 그닥 쓸모가 없었지만)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여기는 감옥 같아 있고 싶지 않다고 속삭였다. 말콤은 내 말을 못들은 척 했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시간 뒤에 내게 주어진 선택권은 이상적이진 못했지만 그 어떤 것도 이 병실에 다음 주까지 계속 갇혀 있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워커가 나를 데리고 가는대로 따랐다. 그가 데스크에서 퇴원 수속을 하는 동안 로비의 소파에 앉아 어느새 신년 특집 기사가 잔뜩 실린 잡지책들을 뒤적이다 그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내 꼴이 꼭 유기견 보호소에서 새 주인을 따라 나서는 늙고 병든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복도 곳곳은 물론 엘레베이터 안도 '해피 뉴 이어' 같은 문구가 적힌 장식물로 가득해서 나도 워커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바깥 세상에서는 할로윈도, 추수감사절도, 심지어 크리스마스마저 지났다는 걸 우리는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런 행사들이란 사람이 몰리면 테러의 위협이 높아진다는 법칙에 따라 그저 골치아픈 행사일 뿐이었다. 나는 러시아에 있었지만, 런던 올림픽때는 다들 죽어버리고 싶었다고 할 지경이었으니까. 경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국제적 행사 (스포츠든, 정치 회담이든)를 즐기는 정보국 요원이란 없었다. 오죽하면 그 톰 퀸마저 웬만한건 빌어먹을 화상 회의로 좀 하면 안되겠느냐고 투덜거린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톰은 지금쯤 어디서에서 뭘 하고 있을까. 기록상으로는 그가 조기퇴직을 했다는 해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저 그가 어딘가에 나처럼 갇혀 있거나, 혹은 죽지만 않았길 바랄 뿐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데."
"해리면 몰라도 말콤을 속였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온라인으로나 오프라인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걸. 그렇다고 해리한테 거짓말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워커가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오기에 무의미한 저항임을 알면서도 항의해보았지만 역시나 소용 없었다. 그가 내민 이유는 너무나 타당해서 반박의 여지조차 없었다. 모르는 녀석들은 말콤을 그저 구닥다리 데스크 요원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타릭보다도 훨씬 유능한 분석관이었으며, 솔직히 말콤의 머리만 있으면 국가 전복도 허황된 야심은 아니지 않나 싶은 때가 있곤 했으니까.
"스위치는?"
"현관 신발장 쪽에…어딘가 있을 걸."
꼭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집은 언제나처럼 황량하고 차가웠다. 워커는 라디에이터를 틀려다가 전원이 내려져 있단 걸 알고 스위치를 찾았지만 나는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한 번도 켠 적이 없었던 데다가, 신발장을 사용해야 할 만큼 신발이 많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단지 맨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가 집에 도청장치 같은 걸 심어뒀을지도 모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온집안을 이잡듯 훑었었는 기억이 전부였다.
"고장났나본데? 안 들어오지?"
"그래? …안 들어오네. 고장인가봐."
쓴 적이 없으니 내가 사는 동안 고장났을 리는 없고 아마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워커의 머리에도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잠시 팀원들의 실책을 지적할 때의 따끔한 섹션 치프의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일에 관련된 일도 아니고, 나는 혼자 살기에 충분한 성인이므로 제가 나서서 히터를 켜지 않는다느니 등의 타박을 할 입장은 아님을 본인도 알 테니까. 나는 소파 위에 개어져 있던 담요를 집어들어 한 장은 워커에게 던져주고 다른 한 장은 내가 두른 뒤 소파에 앉았다. 까슬한 소파의 갈색 시트가 차가웠다. 익숙한 감각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 나는 몸을 기울여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시 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소파가 흔들거리더니 워커도 자리를 잡고 앉아 TV를 켰다. 그가 채널을 돌리며 볼만한 프로를 찾는 동안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뉴스를 찾으려는 듯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지만 6시 뉴스의 마지막 순서인 스포츠 코너 끝부분밖에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계속해서 채널을 다시 돌렸다. 1분쯤 지나서야 그는 채널 돌리기를 그만두었는데, 그때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눈을 뜬 뒤였다.
"이거 아직도 하나보네."
"올해가 마지막이래."
워커는 아쉽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는 '마담, 이 에르큘 포와로가 당신을 지켜드리지요'라고 하는 배우에게서 세월이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뉴스 이외의 TV 프로를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인가 채널을 돌리며 요즘 TV에서는 뭘 하는지 보려 한 적이 있었지만 매번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배우와 가수들이 가득한 쇼 프로그램을 따라잡지 못하고 TV를 꺼버리곤 했다. 게다가 리얼리티 쇼와 오디션 프로는 뭐가 그렇게도 많은지. 보고 있으려니 내가 얼마나 뒤처진 구시대의 유물 덩어리인지를 알게 되는 것 같아 결국 얼마 못 보고 꺼버리곤 했던 것이다. 워커는 알았을까? 그는 일부러 오래된 시리즈를 튼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가 좋아하는 프로이기 때문이었을까. 팬보이처럼 열중한 얼굴로 탐정 드라마에 빠져든 옆모습을 지켜보자니 어느 쪽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응? 왜 그래?"
"그냥. 섹션 치프가 드라마도 보는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그야 포와로니까… 뭐야, 대체 평소에 날 뭐라고 생각한거야?"
"그러게."
평소라면 해리의 기대주님 아니시냐고 비꼬고 싶었겠지만 덕분에 지긋지긋한 병실에서 탈출한 셈이니 그에게 유하게 굴어야 겠다 생각한 걸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웃어넘기기만 했다. 우리는 다시 TV 화면에 집중했고, 결국 딸이 범인이라는 엔딩을 보고나서야 TV에 흥미를 잃었다. 시계를 보니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워커는 저녁을 먹어야겠다며 일어나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부엌으로 향했지만 나는 냉장고도 찬장도 텅 비어있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 입었다. 워커는 냉장고를 열었다가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우유팩 하나와 냉동실의 얼음만 발견하고 잠시 당황한 듯 하더니 빙그르르 돌아 찬장을 열어보았다.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접시 몇 개가 전부였다. 스토브 위에는 내가 커피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주전자가 하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워커는 마치 '런던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얼굴이 되어 나를 돌아보았다.
"넌 대체 뭘 먹는거야?"
"거기 배달 메뉴 있어."
"어… 그렇네. …코트는 왜 입었어?"
"바로 앞 가게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배달부에게 팁을 주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저 현관문을 두들기고 들어온다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살게 된 뒤로 이 집안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은 워커 뿐이었다. 가게는 타이 음식을 팔았지만, 정작 가게 주인은 터키인이었다. 번호표를 주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어차피 가짜 이름을 주었을 테지만) 줄 필요가 없어 좋아하는 가게였다. 쓸데없이 날씨가 어떻다느니 하고 말을 걸며 귀찮게 굴지도 않았다. 맛은 그냥저냥 먹을만 한 것 같았다. 솔직히 나야 이젠 단 음식이나 맛을 구분할 법 하기에 별 느낌이 없었지만 늘상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맛은 괜찮으려니 싶었다. 가끔씩 음식 생각이 날때면 가는 곳이었다. 나는 항상 테이크 아웃이었지만, 좁달막한 가게 안에 앉아 먹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별로 언쟁을 할 기분도 아니고, 그럴만한 기운도 내키지 않아 나는 워커가 시키는대로 얌전히 가게 밖에서 기다렸다. 12월 28일. 십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소란스레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트레이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을까. 개리는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누나와는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이었다. 어쩌면 앨리슨의 가족과 모였을지도 모르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거실. 벽난로에는 장작이 타고 있고, 가족들이 한데 모여 선물을 하나 둘씩 푸는 풍경. 나는 그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심지어 개리와 결혼할 때에도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열 네살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와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보란듯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으며 누가 묻거든 무신론자라 대답했다. 교구 목사의 딸이 그러고 다니니 아버지는 분명 여러 번 남들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화내지 않았다. 나를 불러 앉혀놓고 설교하는 일도 없었다. 해리의 눈에 띄어 MI5에 들어가게 되었을 적에 나는 아버지에게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 설명했을 때, '네가 그럴 필요 없다'며 완강하게 고개를 젓던 모습을 나는 러시아 시절 몇 번이나 꿈속에서 다시 만났다. 나중에, 내가 MI5에 들어오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아버지에게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고, 그가 군인이었으며, 중동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때에도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도 연락하지 않았고 다녀온 뒤에도 행방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워커가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디브리핑이 끝난 뒤에 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아버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때때로 길을 가는 어린 아이들이나 그들의 손을 붙들고 있는 젊은 부모, 혹은 십대 소년들을 타이르는 중년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들의 모습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젖게 되었다. MI5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때 아버지에게 연락했더라면, 개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했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서며 머리를 벽에 기댔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아서인지 머리가 조금 아팠다. 잠시 그렇게 두통을 가라앉히며 서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의 서늘한 손등이 이마에 와닿았다.
"머리 아파? 열은 없는데."
워커였다. 그는 겨울 날씨에 제 손이 차가워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이마를 마주대었다. 하지만 열은 없었다. 그냥 조금 머리가 울렸을 뿐이었다. 나는 워커에게서 떨어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맥주 같아서. 탄산수로."
초록색 동글동글한 탄산수 유리병을 양 손에 하나씩 쥐고 흔들어 보이는 모양새가 왠지 소풍 가기 전날 들뜬 어린 아이같아 웃음이 나왔다. 말콤의 지시이니 그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다 큰 성인을 베이비 시팅 하고 있는 것일테지. 분위기가 처져봤자 당사자들만 지루하고 답답해질 뿐이니 너무 가라앉지 않게 해보려 애쓰는 워커에게 나 또한 비슷한 기분으로 응답해주었다. 별로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딱히 그에게 쌩하니 차갑게 굴 필요도 그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으므로. 집으로 돌아와 거실 테이블에 타이 음식을 펼쳐놓고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는 보지도 않는 TV를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가벼운 일상 얘기를 나눴다. 그래봤자 대화 주제는 한정적이었다. 우리의 삶이 한정적이었으니 그럴법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리드와, MI5와, 국가 안보나, 테러 위협이나 하는 것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그게 전부였으므로.
나는 앞으로 사흘간 그리드 출입을 금지 당했기에 (말콤이 일하러 나와봤자 네 출입카드도 안 먹힐 거고 컴퓨터도 안 켜질테니 얌전히 집에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갔으니 틀림 없었다) 내일도 하루종일 베이비 시터가 돌아올 때까지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집안에 있어야 할 테지만 워커는 그리드에 나가봐야 했으므로 우리는 10시가 약간 지나자 테이블을 정리했다. 나는 워커에게 그냥 가봐도 된다고 몇 번 말해보았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말콤은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것과 소파에서 자도 상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야 물론 말콤이 접속할 수 없는 CCTV란 영국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여분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옷장에서 담요와 베개를 꺼내다 주었다. 침실로 돌아와 온전히 혼자가 된 뒤에 나는 잠시동안 망설였다. 불을 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 방문 틈새는 꽤 넓은 편이었고, 나는 따로이 탁상 램프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천장등을 켜는 것 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불을 끄고 바닥에 누웠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잠시 눈을 꼭 감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다시 바닥에 누워 시선을 위로 향하니 커튼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갇힌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재차 이르며 눈을 감고 심박수에 맞춰 숫자를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삼천번대에 이르렀을 즈음, 나는 잠이 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무슨 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바닥에 웅크려 누워 있었던 탓인지 어깨와 무릎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주변을 더듬었다. 익숙한 침실 카펫이 손에 쥐어졌다. 누군가가 나를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카챠모프도, 올렉도, 제냐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돼서 나는 조용히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숨을 진정시켰다. 내가 얌전해지자 그는 나를 안아 침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낯선 잠자리가 불편했지만 익숙한 향이 나는 목소리가 나와 마주누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습관대로 다시 숫자를 헤아렸지만 열까지 세지도 못하고 나는 다시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워커는 이미 그리드로 나가고 없었다. 다만 그가 누웠던 흔적만이 침대의 내 옆자리에 남아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