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루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머릿속에서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어린 애도 아니건만 집에 혼자 두고 온 게 뭐가 어떻다고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심지어 제 집에 두고 온 것을. 하지만 사는 모습을 보고 나니 도무지 걱정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 나만 봐도 뻔하듯이 현장 요원들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은데다 해봐야 집은 잠 자는 곳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둥지 틀듯 안락하게 이것저것 꾸미고 사는 사람은 없기에 어느 정도는 짐작은 했었지만, 그렇게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을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장담하건대 루카는 라디에이터가 고장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가슴 쓸어내린 건 침실에 침대는 있었단 거였다. 방문을 열면 휑한 바닥만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렇게 고집스럽게 바닥에서 자면서 침대를 들여는 놓은 걸 보니 왠지 더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몇 번을 그 침대에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갔을까. 어제 먹고 남은 타이 음식도 냉장고에 약간 들어 있었고, 식탁에는 내가 아침에 사다놓은 샌드위치가 있었지만 그걸 챙겨 먹었을것 같지 않아 여러가지로 신경쓰였다. 대체 뭘 먹고 사는거야? 그러고보니 그리드에서도 뭘 먹는 건 별로 본 적이 없었다. 해봐야 샐러드나 과일 같은 걸 조금 깨작거리는 것 같았고, 야근을 하는 날이면 초콜렛 같은 걸 먹긴 하고 있었다. 진짜. 무슨 어린애도 아닌데. 말 안 통하는 외국에 똑 떨어진 어린애라도 제 먹을 것 정도는 알아서 찾아 먹을테니 이렇게 걱정되진 않을 텐데.

"로이? 왜 그래요?"

"…아냐. 신경 쓰지 마."

보고가 끝났는데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가 멍때리고 있자 조가 이상하다는 듯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별것 아니란 듯 손사래쳐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내 모니터에 집중하려 했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오자, 왠지 모르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졌다. 아니, 싫어졌다기 보다는 계속 그리드에 숨어 붙어있고 싶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하나 둘씩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고, 해리마저 내게 눈 인사만 남기고 그리드를 나가자 넓은 오피스에는 나만 남았다. 설마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있진 않겠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정작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내가 오늘 아침에 했던 부주의한 행동 때문에, 도저히 그 집에 돌아가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으므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침대 위에서 금세 잠이 들었고, 나 역시 몇 번인가 그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다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두어번 그녀가 악몽에 뒤척이는 소리에 잠에서 깼을 적에도, 가만히 손등을 어루만지며 달래다 보면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고, 나 또한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아침이 되어 휴대폰 알람 소리가 루카마저 깨우기 전에 일어나 밖에 나가 아침을 사다놓고 그녀가 여전히 자고 있는지를 확인하러 방에 들어갔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녀는 병실에서처럼 깊게 잠들어 있었다. 침대의 왼편에 누워 창가쪽을 향해 웅크리고 있었기에 보랏빛 멍이 든 이마의 상처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몸에 달라붙는 얇은 회색 티셔츠가 감싼 팔목에 햇빛이 들어 검푸른 문신이 희미하게 비쳤다.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어 뺨을 타고 흘러내린 까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정돈해주려다가 문득 머리카락이 부드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밤에는 나도 이 방에 있었기 때문일까, 새삼 이 방안이 그녀의 향으로 가득하다는 것에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솜털을 셀 수 있을만치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의 숨결에서 비누향이 느껴졌다. 말갛고 어딘가 부드러운, 가까이 다가가야만 언뜻 비치는, 루카 노스를 닮은 향이었다. 까만 머리칼과 달리 속눈썹 색이 옅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의 블론드에 가까운 엷은 빛이라는 것은 가까이서 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결국 나는 내가 누웠던 흔적이 헝클어진 채 남은 자리를 정돈하려다가 충동적으로 몸을 숙여 머리칼이 흩어진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론 내가 한 행동에 스스로 놀라 못된 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혹시 잠에서 깼더라도 일어난 기색을 보일 순 없었을 테니 알고 있는지 어떤지 가늠해볼 수도 없었다. 나는 집 주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더 이상 늦게 들어갈 순 없을 듯 하여 겨우 용기를 내 집안에 들어갔다. 집은 조용하고, 깜깜했다. 벌써 자는 것인가 하여 침실을 조심스레 들여다봤지만 침대에도, 바닥에도 루카는 없었다. 나는 설마 그녀가 아침에 깨어 있었던 걸까 하여 손이 떨릴 만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를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뜻일까. 이대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 어쩌면 그냥 산책이라도 하러 잠깐 나갔을지도. 고작 며칠 전에 머리를 맞아 뇌진탕을 겪고 갈비뼈에 금이 간 사람인데? 산책? 그것보단 그저 내가 껄끄러워 자리를 피해버렸다는 게 더 맞는 말이지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쨌든 식사 거리를 냉장고와 찬장에 집어넣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이제 왔어? 늦었네?"

"어디 갔었어?"

"그냥… 산책…"

반갑게 내게 말을 거는 모습에 아침에 깨어있던 건 아니란 확신이 서자 말도 문자도 메모도 없이 불쑥 사라져 있었던 것에 대해 이유도 없이 화가 치밀어 날카롭게 대꾸하고 말았다. 용의자를 대하는 듯 몰아붙이는 나의 태도에 놀랐는지 루카는 뒤로 반걸음쯤 물러서며 어설픈 대답을 내놓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어딜 가 있었는지는 내가 참견할 것이 못 되었는데도. 멈칫하는 모습을 보자 괜히 화풀이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려는데, 이마의 상처를 제대로 감싸지 않고 내놓고 있는 것이 보여 말없이 다가섰다. 루카는 이번에도 약간 뒤로 물러났다. 크리스탈 재떨이에 찢겨 벌어진 상처 부분에는 나비 밴드 세 개가 붙어 있었지만 그 주변에 들어있던 진한 멍자국은 아침과는 달리 잔뜩 옅어져 거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아니, 감춰져 있었다. 아마 그때 문신을 지웠던 것과 같은 방식인 듯 했다. 루카는 내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또다시 얼버무렸다.

"사람들이 쳐다봐서."

직업이 정보국 현장 요원인것 치곤 정말 형편없는 거짓말이었다. 디브리핑 때 내가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손바닥 만한 방에 몰아넣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던 강단은 어딜 갔는지 그녀는 그저 시선을 피하곤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음식에 흥미라도 생긴 사람처럼. 조금도 그럴 기분이 아니면서 괜히 활기찬 사람처럼 내가 사온 것들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맛있겠는데 같은 소릴 하며 테이크 아웃 해온 음식을 데우는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그제야 오늘이 목요일이구나 했다. 지난 달부터 트레이는 농구를 시작해서, 매주 이 시간이면 학교 체육관에서 제 또래 녀석들과 시합하며 연습하곤 했다. 나는 답지 않게 형편없던 거짓말과, 학부모들에게서 수상쩍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상처 자국을 가린 것에 왠지 마음이 아팠다.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친대도 트레이 퓰러는 루카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먼발치에서 보다가 일찍 자리를 뜨겠지.

"간만에 치킨 수프가 먹고 싶어서."

"…잘됐네. 나도 먹은지 오래 됐어."

테이크 아웃 해온 스프의 일회용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나서 그녀가 잠시 멈칫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실없는 말을 던졌고 그녀 역시 비슷하게 대답해주었다. 형편없는 거짓말을 하는 두 명의 정보국 현장 요원들은 그렇게 어설프게 사이 좋은 플랫 메이트를 역할극을 하며 어영부영 저녁 시간을 넘기고, 마감 뉴스를 나란히 시청하고, 어색하게 잘 자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냥 그대로 잘 자라고 하고 그걸로 끝이었어야 했던 걸까, 나는 또다시 아침 때처럼 충동적인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응?"

라디에이터는 여전히 고장이었기에 어제처럼 각자 담요 하나씩 뒤집어쓰고 소파에 앉아 뉴스를 시청했으니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일어나는 루카의 어깨엔 당연히 담요가 둘러져 있었다. 나는 앞뒤를 재보거나 생각이란걸 하기 이전에 손을 뻗어 그 담요를 붙들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방안으로 들어서려던 루카는 다시 돌아서서 문가에 섰고, 나는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내가 끝부분을 붙잡아 바닥에 늘어진 담요를 잠시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 그녀가 바닥에 웅크려 누워 덮고 있던 얇은 모포 같은 담요였다.

"바닥에서 자지 마."

그것 말곤 더 붙일 말이 없어 돌아서려는데, 이번엔 그녀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 잠들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래?"

10년쯤 전에 여자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상당히 수줍은 고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요즘이라도 루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붙잡은 용기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자신이 여전히 딱딱한 바닥이 아닌 곳에서는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타인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 그걸 그만두는 데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루카 노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녀의 디브리핑 담당 취조관이었던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내가 거절하고 가버릴 것보다도, 나에게, 섹션 치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었고, 그래서 한동안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응…그래…"

우리는 어제처럼 침대에 마주 누웠다. 싱글보다는 여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2인용이라기엔 약간 좁았기에 손가락이 서로 스쳤다. 루카의 숨소리가 잠에 든 듯 깊고 평온한 규칙성을 띈 소리로 바뀌는 데에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달빛에 푸르스름하게 비친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고작 며칠 만에 못된 버릇이 든 것일까. 그리드로 복귀한 첫 날, 홀로 집에 돌아와 다시 텅 빈 거실에 섰을 때 나는 그새 내가 누군가와 있는 것에 익숙해졌음을 알았다. 올렉이 나를 길들이던 방식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너 따위에게 굴복할 일 없다 다짐하면서도 그가 나를 독방에 버려두고 가버릴 때면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좀먹어가며 미치게 했다. 그가 나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려 하는 술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가 굽히면 굽히는대로 부러트리면 부러트리는대로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날 영원히 혼자 두지는 않는다는 걸, 독방에 홀로 있기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느껴져 이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 실제로는 2주나 3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매번 사람 소리를 찾아 문을 두들기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깨어있기는 한 건지 분간도 하지 못할 무렵 올렉이 마침내 나를 꺼내주러 오면,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반가운게 제일 먼저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 다행스러워서, 그는 내 고문관이고 나를 전기 의자에 앉히러 오는 것인데도 그저 기뻤던 것이다. 차라리 그 의자에 앉혀졌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린 적도 셀 수 없을 만치 많았다.

이제 나는 영국에 있고 그는 더 이상 내 고문관이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길들인 그대로였다. 나는 캄캄한 방안을 둘러보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디든 상관 없었다.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걸어다녔고,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고 길거리에 사람도 한적해질 무렵에는 가게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펍으로 발길이 절로 닿았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무서웠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잠들어야 하는 것도 무서웠고, 사람 소리가 나지 않는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런 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존재에 내가 그렇게 쉽게 익숙해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워커가 맞은 편에 누워 있는 한 나는 얼마든지 잠들 수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이대로 잠들어도 안전하다는 걸 믿을 수 있었고, 눈을 뜨면 여기가 영국이나 내 침실이 아니라 여전히 러시아의 감옥이고 이 모든 건 올렉의 침대에서 잠든 내가 꾼 허황된 꿈일 뿐일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누군가에게 응석 부리며 기댈 수는 없었다. 그가 섹션 치프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리드에조차 내 자리가 남아있지 않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벌써 네 달이 넘어가는데 내가 여전히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한 걸 알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었지만 다음 번은 없을 것이다. 해리가 알게 된다면 그날로 나는 배지를 반납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람에게 총을 주고 대테러 작전에 투입시킬 정보국 국장은 없을테니.

바에 서서 마실 생각이 없는 병맥주만 헛으로 홀짝이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거절할까 했지만 몸에 밴 것인지 직업병인지 입은 빙그르르 웃으며 낯선 이를 맞았다. 입에서 거짓말이 너무나 쉽게 흘러나왔다. 가짜 이름. 가짜 직업. 가짜 출신지와 가짜 나이. 하지만 모든게 마치 내가 정말로 그 인물인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말하면서도 나는 스스로가 웃겼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된 걸까. 워커는 이런 나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십여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상대방이 은근슬쩍 내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다리를 짚기 시작해 나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몇분 정도 상대하다 자리를 옮기고, 또 옮기고. 네 다섯명쯤 지나고 나자 이제는 사람이 시끌벅적한 가운데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럴 바에야 그냥 차분하게라도 있고 싶어 다시 집으로 향했다. 새벽 두 시 반. 텅 빈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씻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인가 바닥에 내려가 누웠다가 다시 침대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결국 애꿎은 베개만 집어 던지고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에서 자지 마]

하지만 빌어먹을 워커의 목소리가 나를 꾸짖는 것 같아 나는 결국 다시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새벽 다섯 시. 어차피 곧장 잠든다 해도 잘 시간은 한시간 남짓 뿐이었다. 나는 결국 졸음에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다가 14분간 잠깐 졸고 일어났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나니 왠지 어깨가 결렸다. 나는 속으로 괜히 워커만 욕하며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잠을 자지 못한 머리는 웅웅거리며 울려댔지만 어차피 잠깐 뿐일 것이다. 아침 커피에 더블샷을 넣으면 가라앉을테니까.


"이거, 대체 언제까지 이런대요?"

"글쎄. 저번엔 60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잘됐네. 이참에 미뤄놓은 서류 작업들이나 해달라구."

벌써 열 세시간째. 아무도 그리드 빌딩 밖으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락다운 상태였다. 때때로 두어시간씩 이런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곤 했지만, 지금처럼 '시스템 점검이 끝날 때까지'라는 식의 무기한식 락다운은 나도 처음이었다. 말콤의 말로는 한 9년쯤 전에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단다. 나는 의자를 돌려 서류 작업에 열중해 있는 루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 때 그리드에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 조나 벤이 바깥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듯이 (통신도 전부 끊겨 있으니) 바깥에 있었을까. 하지만 왠지 그녀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러시아에서의 8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왠지 괜히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바깥 세상과 단절된 그리드라니. 사무실을 한 바퀴 쭉 들러보는데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컴퓨터고, 전화고, TV고간에 전자 기기는 아무것도 작동되질 않았다. 아마 IT 보안 부서 녀석들이 있는 15층만 전기가 팽팽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드가 이런 무기한 잠정 락다운 상태가 되면 당연히 런던은 테러에 취약한 상황이 되고 만다. 총 지휘를 내리는 본부가 외부와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니까. 여간해선 보안 부서 녀석들이 락다운까지는 가게 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그러니 다들 말은 안 해도 아날로그식 서류 작업에 부루퉁해진 체 하는 얼굴들에는 근심이 깔려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이제 그것은 온전히 밖에 남겨져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밖에 별 일이 없으면 좋을텐데.

엘레베이터는 당연히 멈췄고, (다행히도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다들 천장을 열고 엘레베이터 벽 사다리를 타고 기어들 나올 재치가 있는 녀석들 뿐이었다) 비상 계단 문까지 락다운에 걸리기 전에 부랴부랴 힘 좀 쓰는 녀석들이 뭉쳐 지하 3층 카페테리아에 내려가 가지고 온 식량들이 탕비실에 재난 구호 센터마냥 쌓여 있었다. 나는 소위 '전자기기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타릭에게 카페인이 함유되었다는 광고 문구가 새겨진 초콜릿 바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불쌍한 녀석. 전기가 나가 시커먼 컴퓨터 모니터 다섯 개에 둘러싸여 담요를 폭 뒤집어 쓴 채 노트북을 끌어안고 한 손에는 마찬가지로 까맣게 꺼진 아이폰을 쥐고 있는 모양새가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는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붙들고 뭐라도 하더니, 시간이 지나자 배터리가 다 돼 꺼져버렸는지 저렇게 길 잃은 어린애 같은 얼굴로 제 자리에 콕 처박혀 있었다.

"응?"

"스프. 마지막이길래 가져왔지."

버섯 크림 스프가 담긴 머그잔 루카 앞에 내밀며 나는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내 몫의 스프 머그잔을 흔들어보였다. 그래봤자 인스턴트식이긴 하지만, 다들 전자렌지로 데워 먹는 냉동 피자나 냉동 라자냐에는 진절머리들이 난 터라 (과일이나 샐러드는 이미 동이 난지 오래였다) 스프는 꽤나 인기 있는 메뉴였다. 나는 락다운 이후로 그녀가 홍차나 맛없기로 유명한 그리드의 커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책상이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겠지만, 나는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그냥 고맙다고만 하고 책상에 내려놓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루카는 머그잔에 곧장 입을 댔다. 스토브는 가스 전원이라 불이 들어오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차가운 물에 스프 가루를 흔들어 녹여 먹어야 했을 테니.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스프를 마시며 그리드 풍경을 구경했다. 한쪽 구석에서는 아크릴 카드 케이스를 가지고 젠가를 하는 무리가 있었고, 말콤은 타릭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몇몇 사무직 신참들은 근성 좋게 아날로그식 서류 작업을 꼬박꼬박 하고 있었다. 락다운이 되었을 때 해리는 내무장관을 만나러 화이트홀에 갔던 터라 그리드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해리의 유리 오피스는 비어 있었다. 그 근처에 있는 코니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아마 자리가 비어있는 몇몇 사무직 요원들처럼 휴게실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거나 할 것이다. 루카는 락다운 이후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나는 평소에는 잘 자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나는 루카의 손에서 머그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어났다. 어차피 그리드는 밤을 샌 녀석이 절반쯤, 두어시간 선잠 잔 녀석이 절반쯤으로 락다운이 풀릴 기미도 요원하겠다 모든 전기가 다 나가버렸겠다 (지금은 그래도 아침이라 밝았지만 어제 저녁과 밤 내내는 비상등과 건전지로 불을 켠 스탠드 예닐곱개가 전부였다) 어차피 누가 뭘 하는지 신경 쓰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바깥 세상과 소식이 차단되었으니 일을 할래도 현장 요원들은 그닥 할 일도 없었고, 서류 작업도 말이 서류 작업이지 복사기 하나 돌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피곤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이 그리드이고 내가 섹션 치프이기 때문인지 루카는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별다른 대꾸 없이 순순히 내가 이끄는대로 안쪽 자료실로 향했다. 사실 자료실이라기엔 뭐한 곳이긴 했다. MI5의 진짜 자료실이라면 지하에 따로 있는데다가, 이 층에서 근무하는 녀석들조차 이 곳이 그저 창고이겠거니 하기만 할 뿐 정작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본 녀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보안 인가가 부족하기도 했고. 해리조차 거의 없는 방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내가 들어온지 몇 년 지났을 때, 거의 닷새 연속으로 철야를 하게 된 적이 있었을 때 아담이 좋은 장소를 알려주겠다며 데려온 곳이었다. 수면실이 따로 있기야 있었고, 정 뭣하면 탈의실에서 잘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게 마련이고 비상등 때문에 계속 밝은 느낌이 나는 게 영 잠들기가 거슬리기에 의자에서 며칠 삐딱하게 잠을 자고 있었더니 아담이 알려준 곳이었다. 원래는 지하의 자료실로 이동하기 전에 임시로 내려놓거나, 혹은 메인 자료실에까지 등록할 내용은 아니어서 이곳에 원본 한 부만 집어넣어놓은 자료들 (대부분 현장 요원들이 자주 꺼내 써야 하는 하급 정보원 자료였다) 을 놓는 곳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점점 쓰지 않게 되어 다들 잊어버린 공간이었다. 가끔씩 아담과 내가 둘 다 해리에게 개처럼 까이고 나면 신세 한탄을 안주 삼아 술병을 한두개씩 비우면서 이리저리 들춰보았는데, 여기 있는 자료들은 족히 20년은 지난 것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꽤 안락한 긴 의자와 소파도 있어서 우리는 가끔씩 비행청소년들처럼 이곳에 숨어들어 키득거리며 비밀 이야기를 쏟아냈던 것이다. 아담이 죽은 뒤로는 나 또한 이 방을 잊은 듯이 지내왔었지만.

"아, 다른 건 건드리지 마. 먼지 투성이거든."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쪽에만 우리가 씌워뒀던 비닐 커버를 벗겨내며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루카는 먼지 따윈 상관 없다는 듯 휴대용 랜턴으로 구석구석을 비춰보며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나는 처음에는 그녀가 여기에서 톰 퀸의 자료라도 찾아보려는 걸까 싶어 아담과 내가 이미 살펴보았는데 20년도 더 된 것들 뿐이라 말하려다 그녀가 이 깜깜한 방안의 벽과 바닥 모서리들을 확인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한 발 물러났다. 그러고보니 그새 잊고 있었다. 루카 노스에게 폐소 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이 방은 창문은 커녕 비상등 하나 없어 그야말로 칠흑같은 어두움 그 자체였다. 이제 와서 닫아버린 문을 열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아 나는 램프 갓을 움직여 자료실 안에 불이 더욱 환하게 비치게 만들었다.

"해리한테 혼나면 섹션 치프가 도망치는 곳이 여기였구나."

"너무 놀리지 마. 좀 자자고 온 거니까."

"오. 빈 술병도 보이는데요?"

"너 그러다가 의자에서 잔다."

소파를 펼쳐 침상을 만들면서 (아담이 가장 의기양양해 했던 부분이었다. 펼치면 좀 딱딱하긴 해도 남자 둘이 불편하지 않게 눕고도 남을 만큼 넓은 침대가 되었으니까) 내가 턱으로 한눈에 보기에도 잠을 자기엔 아주 불편할 게 분명한 일인용 소파를 가리키자 루카는 장난스럽게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보였다.

"여기에 문이 있는 건 알았지만 한 번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다들 그럴 걸. 나도 아담이 알려주기 전에 몰랐으니까."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루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요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물론 상대가 나일 적에만 그러했다. 아마 아담에 대한 이야기는 조나 벤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나 해리를 상대할 때가 아니면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밝고, 쾌활하고, 사교성 넘치는. 내가 보기엔 현장에 투입된 루카 노스의 모습과 똑같았다. 현장요원이라면 누구나 오스카 상 하나쯤은 탈만한 연기력을 지녔게 마련인데,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을 대상으로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 루카 노스라는 이상적인 상급 현장 요원의 역할을. 나는 나나 해리 앞에서는 그런 짓 해서 뭐하겠냐는 듯이 본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을 섭섭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내 앞에서까지 자신이 누구인가를 꾸미지 않는 것이 좋으면서도, '내가 아담에 대해 묻지 않는 것처럼 너도 톰 퀸에 대해 묻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것 같아 싫었다.

"알람은…진동으로. 누가 지나갈린 없겠지만."

램프 불은 켜둔채였다. 루카는 예상대로 금방 잠이 들었고, 나는 불이 켜져 있으니 잠들긴 어려울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나른해져와 나도 잠시 눈을 붙일까 했던게 꽤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손등에 닿는 휴대폰의 진동에 눈을 떠보니 혹시나, 혹시나 해서 설정해둔 두 번째 알람이었다. 첫 번째 알람은 전혀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잠이 깊게 들었었나 싶기도 하고, 어째 램프 불이 훨씬 어두워진것 같아 몸을 살짝 일으켜 고개를 들어 보니 램프 갓 안쪽의 전 개가 불이 나가 있었다. 내가 뒤척이는 것에 루카도 잠이 깬 듯 하여 고개를 다시 내려보니 분명 잠들 때에는 둘 다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웠던 것 같은데, 어느새 루카가 옆으로 누워 내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나야 그 때 며칠 습관된 것이 있어 잠결에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일어날 때쯤엔 내가 이미 그리드로 나가있어 자신이 옆사람에게 붙어 자는 습관이 있는 줄 몰랐던 루카는 여전히 잠이 가득한 눈을 깜빡이다가 뒤로 약간 물러났다. 아니, 어쩌면 몰랐던 건 아닐지도 몰랐다. 단지 아직도 자신이 그런 습관이 있는 줄 몰랐던 것 뿐일지도.

어쩐지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20분의 배는 되는 시간을 자버린 걸 알면서도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다시 누워버렸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지는 않았다. 나는 약간 아래쪽에 누워있는 루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적마다, 블론드처럼 엷은 빛의 속눈썹이 살랑이는 걸 보는 게 좋았다. 희미한 불빛에 윤곽선이 어슴푸레한 노란 빛으로 이지러지는 것을 이마, 콧날, 입술, 턱을 따라 시선을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얼굴을 감쌌다. 나를 올려다보는 루카의 눈동자는 램프 빛을 받아 녹색으로 엷게 빛났다. 그 뒤로는 우리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누가 먼저 키스를 시작했는지도 알지 못하겠고, 누가 누구의 셔츠를 벗겼던 것인지도 기억에서 씻겨나간 듯 없어져 버렸다. 단지 그녀의 입술이 얼마나 달았는지, 살결이 얼마나 부드러웠고, 귓가에 스치는 숨소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만 생생할 뿐이다. 어차피 아무도 찾을 리 없는 구석진 자료실이건만, 우리는 그야말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불장난을 저지르는 아이들처럼 소리가 새어나갈까 속으로 삼켜들며 서로를 꼭 붙들었다. 내가 깊게 허리를 쳐올릴 적마다 나를 감싼 그녀의 다리가 미끄러지는 듯 살결이 맞닿는 소리가 희미한 램프 불빛이 비춘 방안에 가득 울렸다. 고개를 뒤로 젖힌채 허리를 비틀며 내가 허릿짓을 하는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부서지기 쉬운 한없이 작은 것처럼 여겨졌다. 현장에서 망설임 없이 테러리스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내가 언제고 믿고 목숨을 맏길 수 있는 손이, 팔목이, 너무나 얇고 가늘어보여서 그대로 가만 놔두면 사라질것 같아 나는 닥치는대로 손이며 어깨를 붙들고 입을 맞추고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감싸안았다. 숨소리가 점점 더 잦게 떨며 거칠어지고 억눌러 삼키던 신음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오면서 그녀의 다리가 조금씩 쾌락에 떨리고, 강하게 조여드는 호흡이 밭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도를 더 높이기엔 달리 붙잡을 곳이 없어 매트리스의 끝부분을 붙들고 상체를 조금 일으키는데, 루카의 하얀 손이 내 양 손을 붙들어 제 목으로 가져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쾌락에 이성을 붙들 길이 없어 그녀가 이끄는대로 그렇게 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의 목을 강하게 눌러 죄는 동안, 루카의 하얀 손은 내 손목을 꼭 쥐고 있었지만 내 손을 벗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손을 뗄까 두려웠거나 혹은 내게 닿아있다는 확신을 얻으려 그렇게 한 것 같았다. 내가 파정하기 거의 직전에 숨이 막혀 기절하며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속삭였다.

"…올렉…"


희미한 불빛 속에 잠시 잠에서 깨었을 때,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겨 눈을 떴는데, 무엇에 쫓기고 있었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안개속의 일들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흐릿한 불빛에 비친 천장은 빛 바랜 흰 색. 낯이 익었다. 모양이 약간 다른 것 같았지만 창문 없이 사방이 막힌 방으로,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다른 누군가가 잠들어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다시 쏟아지는 잠에 꿈결을 헤매는 듯이 반쯤만 정신이 깨어 있는 채로 한참을 있었다. 바로 곁에 누워있는 사람이 약하게 뒤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꿈에서 나를 붙들고 있는 사람의 손길도 느낄 수 있었다. 올렉. 올렉이었다. 감옥을 탈출하려 했던 내 어깨에 그가 범선 문신을 새겼다. 처음으로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위치에 새겨진 것이었다. 해리가 또다시 FSB의 교환 제의를 거절한 날, 그가 내 팔목에 사슬 문신을 새겼다. 이제는 FSB도 내가 MI5에 버려졌음을 알게 되었으니 나를 두고 협상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이 감옥에서 지내게 될 거란 생각을 하며 바늘이 살갗을 찌르는 동안 얌전히 있었다. 올렉의 침대에서 처음으로 자게 된 밤의 다음날 아침, 그가 내 왼쪽 허벅지 안쪽에 러시아어로 창녀라고 쓰인 문신을 새겼다. 독방에 갇힌 3주 동안 나는 바닥에 누워 울기만 했다. 정작 그가 나를 침대에 묶어놓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면서.

옆에 누워있던 사람이 잠에서 깼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에 누운 사람이 누군지도 희미했다. 단지 내가 어딘가에 갇혀있고, 침대에 혼자 누워있는게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불은 희미했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밝았다. 올렉은 절대 불을 끄지 않았다. 불이 꺼진 공간은 독방 뿐이었다. 어둠은 처벌의 일종이었고, 그는 내가 어둠 속에 몸을 감추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늘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발정난 암캐 같은 년인 걸 개리도 알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간절하게 안겼다. 나를 다시 혼자 두고 가버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매달렸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서 원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정보였고, 나는 슈거호스가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빌고 매달려도 그는 매번 나를 독방에 두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언제쯤 돌아와야, 그에 대한 배신과 분노가 이미 다 삭아 무너져버리고 그를 애타게 찾을 지경이 되는지를 항상 잘 알고 있었다. 기가막히게 매번 그 시기에만 그는 다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 너무나 오랫만에 보는 타인이 반갑고 기뻐서, 나는 나를 전기의자에 앉히는 올렉에게 감사해하며 울곤 했다.

고개를 들어 옆에 누운 사람을 보았다. 아직 졸린걸까, 아니면 막힌 방안에 있어 숨이 답답하기 때문일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두근거리며 속을휘젓고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데, 누구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수염이 까슬하게 자라난 턱이 보여, 올렉, 올렉이구나 했다. 나는 손을 더듬어 그의 얼굴을 감싸쥐고 키스했다. 매번 그러했듯이 애타게. 이번에는 혹시나 그가 나를 독방에 안 보내주지 않을까 해서. 그가 늘 좋아하던대로, 그가 나를 길들인대로 움직이며 그를 기쁘게 하려 노력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내가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그는 나를 독방에 보내는 것을 하루 정도 미뤄주곤 했으니까. 독방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가기 싫었다. 결국엔 그가 매번 나를 보낸다는 걸 잘 알지만, 하루라도 미루고 싶었다. 이런 희미한 불마저 없는 곳에, 어둠과 적막만이 있는 공간에 또다시 갇히기 싫었다. 오늘 그는 왠지 달랐다. 기분이 좋은 걸까.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사랑하는 사이에 하는 섹스라도 되는 것처럼 키스하는 일도 잦았다. 그리고 내가 억누르다 못해 흘리는 소리를 오늘은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독방에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는 올렉의 손을 붙잡아 내 목으로 가져갔다. 그가 나를 길들인 것 중에 이게 가장 싫었지만, 독방보다는 나았다. 숨이 막혀 기절하기 직전에는 차라리 작은 쾌감이라도 있었으니까.

"…올렉…"

하지만 까맣게 흩어지는 시야 너머로, 처음으로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얼굴은 올렉이 아니었다. 로이 워커. 내 섹션 치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곳이 러시아가 아니라 영국이라는 것을, 심지어 그리드의 한 창고방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 다음을 생각하기도 전에 산소가 부족해 가빠진 숨 때문에 눈이 감겼다.


경동맥이 뛰는 것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고, 연한 숨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목에 손을 얹은 채 혼란스러움에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일까? 방금 그녀가 부른 이름이 정말로 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그 이름이었을까? 나는 떨리는 손을 거둔 채 간신히 바로 앉았다. 뭔가 착각한 거라는 목소리가 나를 진정시키려는 찰나, 다리 안쪽에 새겨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어로 적혀 있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불렀던 이름과, 문신이 새겨진 위치만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 일은 없습니까?]

[협박을 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없었습니다.]

거짓말. 하지만 그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라면 적어도 내게서는 복직 승인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멍청한 실수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한들, 그렇다고 대답할 요원이 대체 누가 있을까? '그런 것 보단 해리가 날 돌려 받는데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얘기로 심리전을 벌이더라'는 말에 덥석 물려 그대로 넘어가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누가 봐도 말을 돌리는 거였는데. 그 때부터 벌써 루카의 파란 눈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바닥에 내팽개쳐두었던 셔츠를 주워 입었다. 하지만 단추를 잠글 정도의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을 할 정신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루카를 깨워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대답했든지간에, 업무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게 맞나? 얼마 전의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그냥 운 나쁘게 머리를 먼저 맞아 대응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만일 감옥에서의 기억 때문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조금만 잘못 맞았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공식적으로 정보기관은 '그런 짓'까지 벌여 첩보를 입수하지는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런 짓'이야 말로 가장 유용하게 먹혀드는 방식이었고, 그런 면에서 여자 요원들은 훨씬 더 빈번하게, 더 큰 위험을 끌어안은 채 현장에 서야 했다. 만일 그녀를 4년간 담당했던 고문관이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난 결코 루카 노스가 그리드에 돌아오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무분별하게 분위기에 휩쓸려 팀원과 잠자리를 가진 것만으로도 앞으로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는데, 이제는 이게 합의된 관계였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이름은 습관처럼 부른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내가 누군지에 대한 자각이 없었나? 평온한 듯 정신을 잃은 얼굴은 아무런 대답도 주질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고 흔들어보았다.

"…루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산소 부족으로 기절하게 되면, 의식을 되찾는데 얼마나 걸리더라? 3분…4분… 5분이 넘어서야 루카는 눈을 떴다. 빛이 익숙치 않은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약간 틀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보는 눈빛은 여즉 안개 낀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몽롱했고, 약간 찌푸린채 깜빡이는 눈은 나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나는 속안에서 무언가 쿵 하고 낮게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묵직한 것이 떨어진 자리가 울리는 감각이 퍼렇게 시려왔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올렉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에 떨어져 있던 옷가지를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평소처럼 파란 빛이 차가운 눈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녀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이라는 것이 풀 수도 없을 만큼 엉망으로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벌떼처럼 웅웅거리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소파에 앉아 내 발끝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느새 옷을 다 입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빗어내려 정돈하더니 조용히 방을 나갔다. 창고 문이 철컹하고 닫히는 소리가 무슨 선고처럼 들렸다.

이대로 내사과에라도 가서 '팀원과 강압적인 성관계를 가진 것 같은데요'라고 두 손이라도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시 머리가 핑글 핑글 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락다운이라 다른 층으로 갈 수가 없는데. 내사과가 몇 층이더라? 아니지, 일단 기록이 남을 일이니까 루카에게 물어봐야… 그게 더 이상할지도. 나는 한참동안 멍청이처럼 소파에 달라붙은 듯이 앉아있다가 한 가지 불현듯 생각 난 것이 있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드로 돌아가보았지만 루카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는둥 마는 둥 하며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 가량이 지나 겨우 루카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더 이상 말을 걸 틈이 없었다. 코니도 벌써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다크 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타릭이 조의 자리에 앉아 꽁알대며 루카에게 '전자기기가 없는 세상의 끔찍함'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루카의 표정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그녀가 언제나 연기하고 있는 얼굴 뿐이었다. 결국 그날 밤 늦게, 탕비실에서야 나는 겨우 둘만 있는 상황에 놓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루카는 내게 간단한 눈인사만 하고 재빨리 나가버리려 했지만.

"잠깐만."

그렇잖아도 비좁은 탕비실인데 문을 닫고 막아선 것은 결코 우호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도망치려는 상대방을 잡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팔을 붙들거나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루카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디브리핑때 그러했듯이 아마 속에서는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대화를 짧게 하려 애썼다.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우리 콘돔 안 썼잖아."

루카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문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도리어 내 말이 신선한 충격이라는 듯이 그렇게 서 있었다.

"나 약 먹고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거짓말. 이번에는 내가 말문이 막혔다. 호르몬 조절제를 먹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신경쓸 것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다야?"

"아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루카의 손을 가로막듯이 탕비실의 문 손잡이를 덮어 쥐었다. 반걸음 쯤 뒤로 물러선 그녀를 곧장 똑바로 볼 수가 없어 나는 계속해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내가 추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일 없었다고 했잖아."

"뭐가?"

"디브리핑때. 그런 일 없었다고 했잖아."

"무슨 얘기 하는 건데?"

"나한테 거짓말 하려고 하지 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이름 불렀잖아."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나를 마주보는 파란 눈이 아무런 표정도 없어 내가 되려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거친 칼로 내 속을 찢어놓는다면 꼭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일에 영향 준 적 없어."

"그래? 그래서 저번에 머리 맞고 죽을 뻔 한 건가?"

"자세가 불리했잖아."

"해리한텐 내가 말할 테니까, 휴직하고 제대로 치료 받아."

"치료?"

"상담이라든지—"

"내가 '정상'이 된 건진 어떻게 알 건데? 당신이랑 또 자보면 되나?"

"무슨 말이 그래? 당연히 걱정되니까—"

"당신이 섹션 치프여서? 디브리핑 담당관이었어서? 아니면 한 번 잤다고 내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은거야? 그것 때문에 일 망친 적 없으니까 참견하지 마."

"루카. 이건 경우가 많이 달라. 그 녀석은 네 고문관이었잖아. 4년동안 널 독방에 가두고 의존하게 만든—"

"당신한테 그 얘기를 한 건, 당신이 내 취조관이었기 때문이야.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알고 있는 것일 뿐이지, 참견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라고. 당신 버리고 간 약혼녀 SNS 보는 거, 내가 뭐라고 하는 적 없잖아."

그리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얘기였다. 어쩌면 해리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예전에 폴로 선수였다는 거나 부상이 있었던 것, 약혼녀가 있었던 것 정도만 알고 있을 거였다. MI6에서도 내가 약혼녀와 왜 헤어졌는지 제대로 아는 녀석은 없었다. 몇 번인가 누가 끈질기게 캐내려 하길래 두어명에게만 내가 바람을 피웠다 말했을 뿐이었다. 내가 반 년 넘게 다리에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나, 약혼녀가 3일 만에 나를 차버리고 떠난 것 같은 이야기는 정보국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얘기였다. 너무 오래됐을 뿐더러, 내가 늘 철저하게 숨겨왔으므로. MI6에서 몇 몇은 내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있었다는 걸 알긴 했지만 교통사고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무도 내가 걷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드에서 얻은 정보일리는 없었다.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카틴샤가 일하는 펍에 아담 외에 정보국 사람을 데리고 간 것은 루카 밖에 없었다. 카틴샤는 나를 정보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기 전의 삶과 연결된 유일한 것으로, 그래서 나는 유독 더 그 펍에는 요원들은 결코 데리고 가지 않았었다. 그녀를 그곳에 데려간 것은 내 입장에서는 일종의 빗장을 푸르는 의식 같은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렇게 보란듯이 이용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카틴샤를 이용해서.

"그래.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게 몇 년인데, 카틴샤는 일도 아니었겠지."

"칭찬 고마워. 일 하는 데 아무 문제 없다는 거 이제 잘 알겠네. 어깨 좀 놓지?"

어느 새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취조할 때의 습관이 튀어나온 것인지 셔츠에 눈에 띄게 주름이 남을 정도로 어깨 한쪽 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목소리는 비아냥거리는 듯 했지만 정작 내게 붙들려 있던 어깨가 떨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그랬다. 내가 어깨를 놓자 루카는 곧장 도망치듯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해리에게 보고해야 할 테지만, 아마 나는 하지 못할 것이다.


락다운은 다음 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풀렸다. 다행이 밖에서는 그리 큰 일은 없었다. MI6는 한바탕 했다는 것 같지만, 우리 쪽에는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도의 소란이 일었을 뿐이었다. 그리드에 묶여있던 사람들은 해리의 명령에 기뻐하며 집으로들 향했고, 나 역시 달리 갈 곳이 없으니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샤워기를 틀어놓고 짐을 정돈했다. 정리가 마저 끝났을 때 즈음엔 냉동창고 같던 욕실이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욕실 문을 닫고 샤워기를 끈 뒤 어차피 증기에 뿌옇게 흐려져 있을테지만 습관처럼 거울을 등지고 옷을 벗었다. 처음 몇 분간은 차가운 물이 나왔기에 손에 느껴지는 물은 약간 뜨겁기는 해도 기분 좋을 만큼 따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쉽게 차가워지지 않을 정도로.

[개리가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살갗이 쓰라렸다. 물이 뜨거워서가 아니라 여기저기 벗겨진 탓이었다. 그리드의 샤워실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고, 소름 끼치는 수도관 소리가 천장에서 들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어깨와 팔 부근을 뒤집어보다가 갈색 딱지가 얇은 줄처럼 내려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세게 문질렀었나. 어차피 조금 있으면 금방 익숙해질테니 나는 몸을 뒤로 젖혀 아예 어깨까지 욕조 물에 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물이 따뜻한 것일 뿐인데. 그닥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얼굴이라도 담글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조에 담그고 있던 손을 꺼내자 빨갛게 달아오른 팔에서 어렴풋이 하얀 김이 피어났다. 노란 욕실 전구 빛에 문신은 평소보다 더욱 짙은 푸른빛으로 보였다. 나는 문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혹여나 물감처럼 녹아내리지 않을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이 잠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물이 약간 식을 때까지 욕조에 나른하게 누워 있다가 머리가 조금 아파오려는 것 같아 가운을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와, 맨발에 와닿는 나뭇결의 매끈한 감촉. 그에 반해 보슬보슬한 샤워 가운 아래에서는 방금 막 뜨거운 욕조에서 나와 더운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새 어깨에 닿을 만큼 자란 머리카락 끝부분이 젖어 있었지만 수건으로 물기만 적당히 짜낸 뒤 베개에 새 수건을 깔고 그냥 누워버렸다. 차가웠던 이불 속은 금세 체온으로 덥혀졌다. 비록 내가 누운 바로 그 자리만이긴 해도.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양이라도 세야 하나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우리 콘돔 안 썼잖아.]

그런 걸 신경썼던 게 대체 언제였더라. 사실 워커가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내기 전까진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문제였다. 새삼 내 파일에 그런 건 안 써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대답이 늦어졌으니 아마 워커는 내가 거짓말을 한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올렉과의 일이 있기도 했지만 트레이를 낳을 때도 문제는 있었으니까. 그런 건 생각한지 정말 오래된 일이어서 약을 먹고 있다는 변명 거리를 생각해내는데 필요 이상으로 오래 걸렸다. 그만둘까. 일. 내일 다시 그리드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워커를 마주하고 아무 일 없었던 양 행동하는 것도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하지만 어차피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또 그리드로 나가겠지. 달리 할 일도, 갈 곳도 없으니까. 충전이 어느 정도 됐는지 휴대폰이 켜져 있었다. 손을 뻗어 확인해보니 몇 통의 문자와, 이메일과,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급한 일은 없었다. 나는 의미 없이 습관처럼 휴대폰 메뉴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제 트레이는 다른 학교 아이들과 농구 시합을 했을 것이다. 왠지 화가 나서 나는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아직 오후 네 시 였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어나 옷을 입었다. 다섯 블록 떨어진 마트에서 아마 이번에도 먹는 것보다 유통 기한이 지나서 버리는 것이 더 많을 우유를 한 팩 카트에 담고 그 다음엔 뭘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노닥거리듯이 괜히 마트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관심도 없는 통로들을 하나씩 지나다니면서, 고작 다섯 달 전에 카트에 동전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패닉에 빠질 뻔 했던 자신이 떠올라 실없이 웃었다.

인스턴트 식품 코너를 돌다가 캔 수프를 발견했다. 물론 이건 내가 러시아에 가기 전에도, 내가 어릴 적에도 있던 음식이었지만. 낯익은 라벨이 보여 치킨 수프를 한 캔 카트에 담았다. 그러다보니 왠지 익숙한 것들이 보이면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딱히 열심히 찾아 나선 것도 아니고, 이미 마트를 절반 정도 돌고 난 뒤라 카트에 담기는 물품은 금요일 오후 쇼핑을 나온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없는 거나 다름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 식탁에 늘어놓고 보니 정말 많아 보였다. 나는 물건들을 하나씩 있어야 할 자리에 넣기 시작했다. 찬장이나, 냉장고나, 거실 테이블이나, 욕실 캐비닛 안에. 식탁을 가득 채운 듯이 보였는데, 정돈하는 것은 또 금방이었고, 어디로들 숨어들었는지 집은 달라보이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고, 치킨 수프를 데우고, 향초를 키고, 빈 액자를 침대 램프 곁에 놓았다. 욕실에서 바닐라 향이 나고, 식탁 한 귀퉁이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열쇠 그릇이 놓였다. 그 날 저녁 나는 내가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워커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리드가 아니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수프를 다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 다시 샤워를 하고 수면유도제를 삼킨 뒤 잠자리에 누웠다. 잠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늘 그러하듯 그리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정작 우리는 매 초가 수십 분이라도 되는 양 뛰어다니고 수많은 일들을 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날짜가 그토록 쉽게 지나가 버려 있으니까. 나는 결국 해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카와 그 일을 다시 얘기하는 적도 없었다. 단지 예전이라면 루카가 했을 몇 몇 일들을 조에게 주곤 했을 뿐이었다. 루카는 분명 내 지시에 동의하지 않았을 테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었다. 해리 역시 몇 번 나를 의외라는 듯이 볼 뿐 나와 단 둘이 있을 적에도 지적하는 적이 없었다. 다들 그저, 조가 조금 더 인정 받은 것이라고, 내가 조에게 성장할 기회를 더 주는 것이라고들 여겼다. 나는 섹션 치프로서 팀원을 편애하는 것도 모자라 당사자는 원치도 않는 편의를 베풀기 위해 다른 팀원을 이용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이제 더는 루카에게 '자, 가서 저 녀석을 홀려서 정보를 빼와'라고 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어느새 계절이 변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나는 식탁에 놓인 달력을 5월로 넘겼다. 런던의 우중충한 날씨는 변함이 없었지만, 이제 두터운 코트나 터틀넥 스웨터 같은 것은 아무래도 집어넣을 계절이 된 것이다. 문득 루카가 문신을 가리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쓸데없는 참견이라 고개를 저으며 저녁 식사 준비에 골몰했다. 식사라 해봐야 별것 없었다. 앤초비에 바질 페스토를 넣은 파스타와 스테이크 한 덩어리가 전부였으니까. 뭔가 재료를 다듬거나 썰거나, 씻거나 할 것도 없는 음식이었다. 그냥 캔에서 앤초비를 두 마리 꺼내 마찬가지로 병에 담겨있던 바질 페스토 몇 스푼과 적당히 삶은 파스타 면과 팬에 한가득 담아 몇 번 휘적대면 그만이었다. 새로 산 음식이라고는 집에 오는 길에 테스코의 육류 코너에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스테이크가 전부였다. 나는 습관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며 맥주 한 병과 함께 접시를 비웠다. 오늘 마무리 지은 사건이 실제 내용과는 다르게 포장되어 보도되고 있었다. 오늘도 영국은 평화롭게 지나갔다는 생각을 하며 빈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새 맥주 병을 꺼내와 홀짝이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시덥잖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 일색이었고, 나는 몇 바퀴인가를 돌리다가 결국 그나마 덜 시끄럽고 익숙한 목소리가 나레이션을 하고 있는 채널에 안착했다. 24시간 안에 대상자 모르게 집안을 싹 바꿔놓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신청자는 가족이나 그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흉측한 파란색 고무 바닥 패널을 손바닥만한 주방 바닥에 설치하며 핫핑크색 아크릴 벽과 어울리지 않냐고 호들갑을 떠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보고 있으려니 제정신일까 싶었다. 내가 집 주인이라면, 퇴근해서 집에 왔더니 웬 방송국 자식이 '짠! 당신 집을 바꿨어요! 멋지죠?'하면서 저딴 부엌을 내민다면 카메라로 한대 후려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나는 왠지 주인공이 불쌍해져서 속으로 혀를 차며 괜히 내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냥저냥 말끔하게 생긴, 평범한 집안이었다. 만일 길가는 사람 붙들고 이 집에 데려와 누가 사는 것 같냐 물으면 '정보국 요원 집 같은데요?'같은 말은 누가 등에 총 대고 시키지 않는 한 나올리가 없는 집이었다. 사실 욕실 캐비닛까지 들여다본대도 남자만 사는 집인지 여자도 있는 집인지는 애매할 것 같았다. 옷장을 열어보지 않는 한. 은근히 여기저기에 여자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평소에는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인데 눈에 띄고 나니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나는 부엌으로 가 쓰레기 봉투를 하나 꺼내와서는 눈에 보이는 대로 여자들이 두고 간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다. 별 생각 없이 들여다본 거실 소파 밑에서 짝을 잃어버린 귀걸이를 네 개 발견했을 때에는 설마 무슨 수법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어제 같이 잔 사람인데, 너 귀걸이 하나 두고 갔더라' 하는 식의 연락이라도 오길 바라고 일부러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거실만 치웠을 뿐인데 벌써 봉투가 절반은 들어찼길래 결국 다시 부엌으 봉투를 찾아야 했다. 머리끈 같은 자잘한 거나 있을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면 향초라든지, 꽃병이라든지 별의 별 것이 다 있었다. 사실 액자 틀 같은 거야 그냥 써도 됐겠지만 왠지 싹 다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죄다 봉투에 넣기 시작했더니 의외로 끝이 없었다. 욕실은 가관이었다. 샴푸, 샴푸, 그리고 또 다른 샴푸와 린스와 컨디셔너와 바디크림과, 바디버터(뭐가 다른데?)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2주 넘게 만난 여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눈썹칼 같은 것은 왜 있는 것이며, 내가 산 적 없는 칫솔은 또 뭐가 이렇게 많아야 하는지. 여기만큼은 치울 것 없이 깨끗하다 생각했던 옷장에서마저 외출용은 아님이 확실한 속옷을 몇 개 축출해내고 나니 커다란 쓰레기 봉투가 한 개 반이었다. 그대로 전부 공용 쓰레기통에 처박아두고 다시 들어온 집안이 어딘가 모르게 휑해보여 다시 테스코로 돌아가 이것저것 사다 집안을 채워넣었다. 사람 사는 집처럼 적당히 어수선하게 물건들이 이리저리 늘어선 걸 보고 있자니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 같았던 루카의 집이 떠올랐다.

이런 생각은 해서 뭐하나 싶어 금방 털어내고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그렇잖아도 한바탕 하고 왔는데 집에서 괜한 일까지 만들었으니 역시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늘 그러하듯 옆으로 누워 괜히 발을 꼼지락거리며 시트에 뒷꿈치를 문질거렸다. 여자들이 몇몇은 질색하고 몇몇은 어린애 같다며 킬킬대는 버릇이었다. 나는 침대에 바로 눕는게 싫었다. 다리를 가만히 하고 누워 천장이나 보고 있으려면 그 끔찍했던 병실에서의 시간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다리가 움직인다는 것을, 발 뒷꿈치 처럼 둔한 부위에도 침대 시트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질 만큼 감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보니 루카는 오늘도 바닥에서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요즘은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걱정되는 일이 되었는데, 정말로 잘 잔다기 보다는 약으로 자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식 처방을 받은 것이라면 문제될 게 없었지만 그녀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드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때나, 좁다란 컨테이너 박스에 며칠씩 나란히 앉아있을 때면 루카는 전혀 잠을 자지 않았다. 순번을 바꿔가며 잠을 자게 되어 있었지만 자기 차례에 그녀는 그냥 눈을 감고 있기만 할 뿐 자는 것은 아니었다. 숨소리가 달랐으니 확실했다. 때때로 일이 생겨 새벽에 호출을 하면 전에 없이 전화를 받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언젠가 한 번은 전화를 받기는 했는데 아무런 말도 없는 적이 있었다. 아마 수면제 약효가 다 떨어지질 않아 일어날 수 없었던 거겠지.

어차피 결론도 나지 않을 생각은 그만두자 싶어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휴대폰 벨소리에 일어나야 했다. 그리드의 호출이었다. 나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은 이름이 자료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알렉시스 메이넬. 내 전 약혼녀가 몇 번을 갈아탄 끝에 최근 새로 정착한 금융 거물이었다.


"와인? 아니면 샴페인?"

"와인이 좋겠네요."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기대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나는 내가 어쩌다가 이곳에 앉아 이렇게 메이넬을 향해 웃고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입술은 미소를 머금기를 그치지 않았고, 눈은 메이넬의 이야기에 반짝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계속해서 내가 왜 이 펜트 하우스까지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필사적으로 설명해내느라 정신없었다. 모든 일을 하나 둘씩 거슬러가자면, 결국엔 재무장관이 증거부족을 이유로 메이넬의 자산 동결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증거를 찾고자 런던 증권 거래소에 내가 언더커버로 들어간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아니. 아니지. 알렉시스 메이넬이 하이랜드 생명을 가지고 주가를 조작하여 영국을 파산시키려 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이 펜트 하우스를 멋대로 떠날 수 없다는 얘기였다. MI5인 것을 들킬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도 내 정체를 들키는 길이었다. 나는 메이넬이 고작 자신의 과거와 이상에 대한 얘기를 하자고 나를 펜트 하우스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니라는 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몸에 달라붙는 검정색 드레스를 벗겨냈을 때 보이게 될 문신을 그에게 설명할 방법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럴싸한 변명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메이넬의 시선이 내 몸을 끈덕지게 훑을 적마다 나는 초조함에 다리를 반대로 꼬아 앉았다.

"당신 약혼녀한테 미움 받고 싶진 않은데요."

"뭐하러 그런 여자 걱정을 하지?"

"손이 매워 보이던걸."

메이넬이 그렇게 물었을 때 곧장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녀가 워커의 전 약혼녀였다는 점이었다. 그가 여전히 SNS를 체크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미움이나 원한이라기보다는 내가 트레이를 보러 가는 이유와 더 닮아있었으니까. 나는 정작 개리가 어떻게 사는지는 볼 용기가 없었다. 아마 워커도 직접 그녀의 삶을 지켜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내 목덜미에 키스하려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하면서 약혼녀 손이 매워보이더라는 말을 하자 메이넬은 소리내어 웃으며 목 대신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뺨에 와닿는 그의 입술이 불에 그을린 낙인 도장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메이넬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나는 오늘 밤 이 펜트 하우스를 그냥 나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얼굴이 기계적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거절하고 나갈 수도 없고, 그에게 문신을 보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흐름을 주도해야 했고,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메이넬이 나를 침실로 데려가자 나는 몸을 돌려 그를 침대에 쓰러트렸다. 약간 당황한 듯 했지만 여전히 상황을 즐기는 듯 나를 감상하는 것처럼 올려다보는 그를 쳐다보며 나는 침실의 불을 약하게 조절한 뒤 옷을 조금씩 벗어나갔다. 새벽녘이 되면 길거리에 드문 드문 서 있는 값싼 여자들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차라리 그들이 나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칵테일 드레스를 벗어내리고 속옷과 가터벨트, 스타킹과 구두 차림으로 침대에 몸을 일으켜 앉은 메이넬에게 다가가자 그는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이 내 문신을 손으로 더듬어 훑으며 곳곳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싫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욕망 가득한 눈도 싫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가 내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어내리며 물었다.

"아름답군. 어쩌다 새긴 거지?"

아이러니하게도, 메이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나는 내 문신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 자신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어서, 가끔씩 워커의 친절에 기대고 싶어지거나, 아니면 트레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일 때면 스스로에게 현실을 깨달으라며 거울로 들여다보곤 할 뿐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메이넬 같이 싫은 상대에게서라도 나는 이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반쯤은 진심으로 메이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가 입에 발린 말로 아름답다 해준 것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을. 메이넬은 진심이었고, 나는 그게 더 비참했다.

"어쩌다 보니."

"그래서 당신도 시스템을 믿지 못하게 된 거로군."

웃음이 나왔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워커를 믿을 수 없는 것도, 해리를 전처럼 믿을 수 없는 것도. 어쩌면 나도 시스템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메이넬과 같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는 그러니 그걸 부숴버리겠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 빈 공간을 회색의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MI5로 메워보려 하는 것 뿐이었다. 만일 개리와 트레이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메이넬과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워커는 내 문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차피 그런 건 상관 없었을까. 그의 전 약혼녀는 (사진을 통해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밝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미인으로, 화려한 리셉션이나 칵테일 파티가 잘 어울리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워커 왜 나와 잤던 걸까. 몇 달이나 그 일을 생각해볼 시간이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결론은 늘 하나였다. 우리는 열 두시간 넘게 그리드의 오피스에 묶여 있었고, 내가 먼저 그에게 달려들어 키스했으니까. 그는 그저 굳이 거절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메이넬의 키스를 싫어해야 하는데. 그걸 온전히 혐오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것이 일종의 안도감처럼 다가왔으니까. 내가 아직 누군가가 원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내가 누구인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고, 내가 있을 자리도 확실치가 않은데.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를 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에서 계속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그를 진심으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잖아도 워커는 나와 올렉의 일을 알게 된 뒤부터 나에게 일을 잘 맡기지 않았다. 평소라면 나에게 맡길 일들을 하나 둘 씩 조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어느날인가 더 이상 그리드에는 내가 할 일이 없게 될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가 해리에게 어떻게 보고했을지 알지 못하기에 더욱 초조했다. 나를 보는 해리의 시선은 전과 다를 바 없이 차가웠다. 어쩌면 해리는 처음부터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실망할 것도 없었던 걸까. 아니면 워커는 해리에게 보고를 하지 않은 걸까? 어째서? 내가 전 약혼녀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내 약점을 하나쯤 더 쥐고 있으려는 걸까? 그러고보니 그렇지. 요즘 해온대로라면 조를 보냈을 법도 한데 나를 언더커버로 보낸 것은, 그 날 일에 대한 앙갚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메이넬은 약혼녀에게 그닥 충실한 타입이 아니었고, 오히려 내가 워커에게 한 방 먹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메이넬이 점점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도 숨이 점점 가빠졌다. 하지만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더 컸고, 신음은 쾌락이 아닌 쓰라림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메이넬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바짝 붙어 안기며 그의 귓가에 그를 만족스럽게 하는 말들을 속삭였다. 그는 내가 속으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인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감옥에서 8년쯤 보내고 나면 침대에서 파트너를 속이는 기술 정도는 마스터하고도 남게 마련이었으니까.

정사가 끝난 뒤 메이넬은 내게 샴페인을 건넸지만 나는 일을 핑계로 그의 펜트 하우스를 나와 내 호텔방으로 향했다. 런던 증권 거래소 자체가 전자기기에 제한이 있는 공간인지라 인이어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니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겠지만, 내가 메이넬의 펜트 하우스에 그와 함께 들어갔다는 것과, 그가 직접 나를 호텔로 바래다주었다는 것은 그리드도 알 터였다. 내가 메이넬의 침실에서 이야기만 나누다가 나왔을거라 생각하는 얼간이는 없겠지. 와인을 마신 것이 잘못 되었는지, 샤워하는 중에 몇 번인가 계속 구역질을 했다. 나중에는 위액마저 넘어올 게 없는데도 계속 샤워 부스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해댔다. 샤워를 마치고 곧장 침대에 쓰러져 자는데, 작전 중이라 약을 먹지 못해서인지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새벽 내내 잠결에 뒤척이는데, 한기가 드는 것처럼 온 몸이 오싹해지곤 해서 창문을 닫는 것을 깜빡 했나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생각해보니, 호텔 창문은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왠지 배가 고프지 않아 방으로 배달된 아침 식사는 돌려보냈는데, 증권 거래소로 향하는 길에 컨시어지 데스크에서 내게 꽃이 배달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또 '제니'에게 약혼자 '피트'가 꽃을 보냈나 했지만 메이넬에게서 온 것이었다. 스무살 짜리 여자애도 아니건만, 이런 것에 목이 멜 것 같은게 한심해서 나는 벨보이에게 10파운드를 쥐어주며 꽃을 버려달라고 말했다.


"해리, 중단해야 돼요."

"아직 메이넬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어."

그걸로 끝이었다. 해리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메이넬의 자산을 동결할 증거는 없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작전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해리의 뒤를 따라 그리드로 돌아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내가 해리만 데리고 나가 무슨 얘기를 하고 온 것인지 알 리가 없는 타릭이 흘긋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현장에서 조와 벤이 보내오는 영상을 똑바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비스듬히 앉아 시선을 돌렸다. 10분… 20분… 1시간이 넘도록 메이넬의 펜트 하우스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해리를 쳐다봤다. 그는 언제나처럼 석상 같은 표정 없는 얼굴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메이넬이 고의적으로 영국을 파산시키려 한다는 건 우리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법정으로 끌고 갈 수도, 그를 체포하거나 할 수도 없었다. 우리에겐 아직 증거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말 하나로 우리는 팀원을 메이넬의 펜트 하우스에 밀어넣은 셈인 것이다. 여왕과 국가를 위해서. 신입 시절에는 그 구절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부서지고 찢어져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내가 그 명목 아래 내 팀원들이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녀석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해리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될까? 나는 이번 일에 루카를 보낸 것을 후회했지만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메이넬을 상대하기에 조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멀쩡한 약혼녀가 있는 녀석이 루카를 그런 대상으로 볼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걸까.

3시간 12분만에 두 사람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호텔로 바래다주는 메이넬에게 웃어보이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 풀었다가 다시 묶었는지 달라져있는 머리 모양도, 립스틱이 지워져 연해져 있는 입술 색도, 구김이 가 있는 드레스 끝자락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내 할 일만 할 뿐이었다. 나는 작전을 중단시킬 수도 없었고, 루카에게 펜트 하우스에서 나오라고 지시할 수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하지 못한 것이 나를 사소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유능한 섹션 치프로 만들고 있었다. 톰 퀸은 이런 것이 질려 그만뒀던 것일까. 그때 루카가 펍에서 처음으로 내게 속내를 보였던 날 이후로 나는 남들 눈을 피해 톰 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곤 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정보국 요원의 기록이었다. 연차에 걸맞는 실력과, 그 만큼의 희생으로 얼룩진 기록은 여느 역대 섹션 치프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어느날인가 '조기 퇴직' 한 단어로 끝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톰 퀸이 퇴직을 신청했다는 기록과, 조기 퇴직 처리되었다는 기록. 단 두 줄로 모든 게 끝이었다. 그 어디를 뒤져보아도 다른 기록은 없었다. 섹션 치프인 내 보안 인가로도 찾을 수 없다면, 그런 기록은 없는 거였다. 그가 어느날 갑자기 일을 그만 둬버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해리만이 알 것이고, 그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역시 해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해리, 저에요, 루카. 지금 메이넬과 다렉과 함께 있어요. 다렉이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군요.]

해리가 전화 연결을 스피커 폰으로 돌리자 모두가 말을 멈췄다. 총리조차 드디어 입을 다물고 스피커 폰만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건 명백했다. 루카는 메이넬과 다렉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제니라고 부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메이넬의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나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리드에 있는 것이고, 소수의 제한된 경우에만 증권 거래소 1층에 있는 조와 벤에게 진입 허가를 내릴 수 있을테지. 해리는 표정과는 달리 초조함을 싹 지워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지금 내가 당신 요원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거든. 하이랜드 생명 지원 성명 발표를 취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는 당신이 더 잘 알거야.]

러시아 억양이 묻어나는 다렉의 목소리가 루카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고 말한 순간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조와 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내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둘 다 메이넬의 사무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겠지만. 총리가 전화기의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막은 뒤 해리에게 낮게 속삭였다.

"요원 하나 때문에 영국을 파산시킬 순 없어요."

나도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럴 수는 없었다. 민간인이라도 그럴 수 없었고, '여왕과 국가를 위해' 가리는 것 없이 뭐든 하겠다 맹세한 정보국 요원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총리가 비정한 사람이라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해리라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건, 루카도 우리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머리에 총이 겨눠진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러시아 녀석들에게, 다른 한 번은 무슬림 녀석들에게. 발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뜨거운 총구가 뒷머리에 달라붙는 느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번 모두 나는 그 때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운 좋게 죽지 않긴 했지만. 루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번에도 그런 운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루카, 자네 괜찮나? 루카?"

[50초.]

스피커 폰 너머로 더 이상 루카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총리는 마치 당장에라도 미리 녹화해 둔 성명 영상 방송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릴 사람처럼 휴대폰을 꺼내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그리드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남은 시간을 세는 다렉의 목소리만이 울리는 내내, 해리는 계속해서 루카를 불렀다. 그녀는 더 이상 자리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벌써 죽은 것인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총성은 울린 적 없는데.

[20초.]

[해리…총 같은 거 없어요. 성명 발표하세요. 총 같은 거 없으니까.]

총이 없다는 루카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을 구하고 영국을 파산시킬 수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남은 사람들 속이라도 편하라고 하는 말일 뿐이었다. 모든 프로그램의 방영이 멈추고 뉴스 속보로 총리의 하이랜드 생명 전폭 지원 성명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커 폰에서 총성이 울렸다. 총리는 휴대폰을 떨어트렸고 타릭은 눈을 감으며 움찔했지만 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이나 운에 기대는 근거 없는 확신인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뿐인지, 방금 그 총성이 다렉이 루카를 쏜 것이라고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의 목소리가 들리고, 몸싸움이 벌어졌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전화가 끊어졌다. 짧게 삐- 삐- 거리는 소리가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곧장 타릭의 헤드폰을 뺏어들었다.

"벤? 조? 상황 보고해."

증권 빌딩의 보안 때문에 두 사람의 인이어는 그들이 마이크를 켰을 때에만 우리가 그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몸싸움에 마이크가 떨어진건지 어쩐 건지 한참동안 지직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걸 초조하게 듣고 있는데, 한순간 잡음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로이? 벤입니다. 다렉은 죽었고 메이넬은 다리에 총상 입었어요. 조도 팔을 다쳤고. 둘 다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루카는?"

[괜찮아요.]

작전이 종료될 때면 늘 내가 지금껏 긴장하고 있었구나 하고 인식하게 되면서 안도감이 몰려오곤 했지만 이번 만큼 누가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가 뒤집어 눕힌 것처럼 다행스러운 적은 없었다. 나는 해리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메이넬과 다렉의 시신 인수를 위해 현장으로 향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니 그제야 의료진 두 명에게 둘러싸여 다홍빛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있는 조가 보였고, 메이넬의 컴퓨터에서 다른 증거 자료들을 찾아내고 있는 벤이 보였다. 하지만 주변 어디에도 루카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이대로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 먹구름처럼 순식간에 불어나 괜히 나를 초조하게 했다. 의료진들 무리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지만 루카는 보이지 않았고, 전 층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있는 지능범죄 담당 부서 녀석들 틈새에도 루카는 없었다. 몇 개 층을 허탕 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메이넬의 사무실로 향하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이 눈길이 복도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해가 지고 있었지만 이 난리통에 아직 복도 조명이 켜지지 않은 터라 문틈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확연히 보였으니까. 가까이 가서 보니 장애인용 화장실 문이었다. 미닫이 형식으로 된 문은 꽉 닫혀 있지 않았지만 문을 밀어 열려고 하자 무언가가 걸린 듯이 문이 한동안 덜컹거렸다.

문을 열고 보니 한쪽 구석에 루카가 쓰러져 있었다. 문이 잘 열리지 않았던 것은 구두 굽이 문을 여닫는 홈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만 보면 어린애가 잠든 것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이마에 또 상처가 있었다. 깊게 찢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형태로 보아하니 개머리판에 빗겨 맞은 것 같았다. 얘는 꼭 머리를 맞고 다닌다니까… 물 먹은 솜인형처럼 축 늘어지는 것을 벽에 기대 일으켜 앉히고 맥을 짚어보니 심박수도 정상이었고 호흡도 정상이었다. 그래도 아래층에서 의료진을 두어명 불러다가 루카를 보게 했다. 그들이 혈압을 재고 하는 별 소란스런 짓을 다 벌이게 하고 나서야 나는 '기절한 것 뿐이고 안정을 취하면 된다'는 말을 믿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루카를 데려다 내 차 뒷자석에 눕혔다. 뒷좌석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옛날 이름으로. 그렇게 불린 것이 너무 오래된 일이라, 처음에는 그게 내 이름이라는 것도 나를 부르는 거란 것도 알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나는 거의 무조건 반사식으로 거칠게 내 팔을 빼내려다 상대방을 보고 멈췄다.

"리! 리! 세상에, 정말 다행이야. 당신이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지? 어떻게 좀 해봐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알렉스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거야? 응?"

전 약혼녀였다. 그녀는 내가 지능범죄 수사팀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하지. 사람들 눈에는 MI5는 그냥 경찰일 것이다. 사복을 입고 있으니 형사 정도로 생각하겠지. 이것 때문에 이번 일에는 내가 현장에 나가지 않은 거였는데. 내 얼굴을 알고, 나를 리 페이스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 오지 않은 거였는데. 나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전에 그녀를 잡아 끌어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메이넬이랑은 그만 둬. 금융 사기범이야. 증거 다 있어. 잘못된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정말 좋은 사람이란 말이야. 리, 이건 뭐가 잘못된거야… 알렉스가 그럴 리가 없어…"

그냥 거기서 끊고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그래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변함없이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향기가, 녹색 눈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도도하고 눈부시기만 하던 여왕벌 같은 여자가 메이넬 같은 녀석에게 휘말려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걸 보는 게, SNS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어딜 가나 모두의 주목을 받던 눈부신 여자가 점점 쇠락하는 길을 걷고 있는 걸 직접 보게 된 게 안타까워서 그랬던 걸지도 몰랐다. 나는 왼쪽 뒷주머니의 지갑에서 대외용으로 사용하는 가짜 명함을 꺼냈다. 명함에 적힌 이름은 아론 타일러로, 운 좋게도 지능범죄 수사팀 소속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은 얘기할 수 없고 나중에 연락하라는 말과 명함을 건넨 뒤 다시 차로 돌아갔다. 루카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걸 싫어할 것이다. 나는 차를 몰아 증권가의 북새통에서 빠져나온 뒤 잠시 갓길에서 어디로 향할지를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나는 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