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음 느껴진 것은 내가 무언가 따뜻하고 포근한 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여서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걱정해야 하는데도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다. 왠지 모르게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이 들어서 나는 눈을 뜨지 않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번에 잠에서 깼을 때에는, 내가 있는 곳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있었다. 아직 눈은 뜨지 않은 채였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노랗고 밝은 빛이 느껴지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은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생각대로 병원은 아니었다. 소독약 냄새는 나지 않았고, 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침구는 평범한 청회색과 흰색이었다. 몸을 일으켜 앉자 머리가 윙하고 울렸다. 그러고보니 다렉의 총에 머리를 맞았었지. 손으로 더듬자 이마가 약간 부어오른 것이 만져졌다. 그 가운데에 말라붙은 상처도. 주변을 둘러보자 말끔한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방 주인이 정리정돈이 몸에 밴 것이라기 보다는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더 강한 그런 방이었다. 서랍장 위에 놓인 차키가 낯이 익었다. 한쪽 구석에 옷걸이가 멀쩡히 서 있는데도 그 앞 일인용 소파에 걸쳐져 있는 코트도 낯이 익었다. 이불에서 익숙한 스킨 향이 났다.

머리가 계속 울려 잠깐 다시 누웠다가 일어나니 침대 옆 협탁에 워커가 두고 간 것이 보였다. 갈아입을 옷과 물컵, 그리고 약봉투였다. 진통제만 먹고 나머지 두 개는 변기에 내려 버렸다. 욕실 카운터 위에 새 칫솔이 꺼내져 있어 바스락거리는 플라스틱 껍데기들을 한데 모아 휴지통에 집어 넣고 샤워기를 틀었다. 바디워시에서도, 샴푸에서도 낯익은 향이 났다. 워커가 꺼내둔 옷은 긴팔 티셔츠로, 사이즈가 커서 목 뒤의 문신은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짙은 남색이라 비쳐보이지는 않는 옷이었다. 그의 옷 중에 내가 입을 만한 것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 워커는 그 중에서도 내가 문신을 가릴 수 있을 만한 것을 찾느라 꽤 고생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려 방문을 열었는데, 워커의 목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요원들이 으레 그러하듯 워커도 잠을 자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을 하는 적이 없는 공간이 클 필요 없다 생각하는 편이었고, 그의 플랫은 내 것과 별 차이 없이 작은 집이었다. 부엌과 거실, 침실 하나에 욕실 하나. 구조는 조금씩 달라도 요원들이라면, 특히 현장 요원이라면 누구나 틀에 박힌 듯이 그런 집에들 살고 있었다. 어쩌면 MI5의 연봉으로 런던 중심 가까이에 얻을 수 있는 집은 이런 것 뿐이어서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손바닥 만한 공간이니 옷장에라도 틀어박혀 소근거리며 하는 게 아니고서야 전화 통화하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린 없었지만 워커가 현관쪽에 바짝 붙어 얘기하고 있는 걸로 봐선 별로 내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은 아닌 것 같아 나는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문가에 서 있었다. 어째서 나는 그냥 문에서 떨어져 침대로 돌아가거나 하지 않았던 걸까.

그리드에서 온 전화는 아니었다. 가족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딘가 빙빙 도는 듯한 대화. 초조한지 제자리 걸음을 하는 워커의 움직임에 현관의 센서 전등이 노랗게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대화의 한 끝 언저리에서, 나는 그가 전 약혼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마치 개리가 나를 부르던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애정이 담긴 다정한 어조. 워커는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메이넬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건 메이넬에 관한 일이라기 보다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뒤로 물러났다. 옷장 앞에 붙어있는 전신 거울에 내 옆모습이 비쳤다. 곡선형으로 파인 남색 셔츠의 목둘레 바깥으로 문신이 보였다. Dum Spiro Spero. 살아있는 한 희망한다. 가장 처음으로 새긴 것이었다. 교회 돔의 십자가 끄트머리가 그 아래로 몇 개 비어져 보였다. 나는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그새 워커의 향이 내 몸에도 배어든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처음 부터 건드린 적 없다는 듯이 옷 주름 하나까지 바로 잡아 워커의 옷을 협탁에 올려두었다. 흰색이었지만 적당히 도톰한 옥스퍼드 셔츠는 손목까지 내려 소매 단추를 채우자 내 문신을 전부 말끔하게 가려냈다. 거울을 보자 이대로 뱅크 역을 어슬렁거리면 누가 봐도 증권가 회사원처럼 보이는 제니가 서 있었다. 러시아에서의 8년은 없었던 일처럼, 그런 추잡한 과거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멍청한 꼴은 면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새로 매만지며 겉모습을 추슬렀다.

통화가 끝난 뒤 10분 정도 지나 밖으로 나서자 여태 현관 근처에 서 있던 워커는 나를 보더니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현관으로 다가서자 그가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리드. 보고서 써야지."

"…해리가 내일 들어오래."

워커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흔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거짓말. 전 약혼녀와 통화하는 걸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은 그가 정보원들과 연락할 때 쓰는 휴대폰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잘 됐네."

"가려고?"

"고마워. 침대 잘 썼어. 욕실도."

"점심 먹고 가."

그는 왜 나와 잤던 걸까. 그는 왜 내게 잘해주려 하는 것일까. 이젠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으니 잘 된 거라면 잘 된 일이었다. 그냥 편리하니까 나와 잤던 것이고, 나를 동정하니까 친절하게 해주는 것 뿐이다. 섹션 치프의 동정을 사느니, 메이넬에게서 받는 꽃이 더 나았다. 어차피 벨보이가 버려준지 오래지만. 나는 내 어깨를 가볍게 붙든 워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전 약혼녀도 위로해주겠지. 그 여자도 그냥 편리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일까? 당장 키스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워커와 가까이 붙어 있다는 걸 알자마자 나는 반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돌렸다. 워커도 우리가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안 듯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일은 그냥 실수야.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당신도 잊어버려."

"…네가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싫은 거야? 아니면—"

"나 결혼했잖아. …반지는 없지만."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지만. 이라는 뒷말이 머릿속에서 쓰리게 울렸다. 말 없이 실종되버린 시간이 개리와 살았던 시간의 두 배는 되었지만. 개리가 법원에 유기 이혼을 청구하고 그게 받아들여진지 6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왜 하필 그런 변명이 튀어나왔을까. 그냥 네가 싫다거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사실 너는 내 취향이 아니라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직장에서 누굴 만날 생각 없다 할 수도 있었는데. 차라리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더 나았을까. 그래. 그랬겠지. 내가 사라진지 2년도 되지 않아 개리가 나와 이혼한 것은 워커도 잘 아는 사실일테니까. 내가 트레이의 주변을 서성인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시선을 들자 그가 또다시 동정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싫었다. 누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그래서 친절하게 구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메이넬과 영국을 파산시켜버릴 걸 그랬다.

"가볼게. 내일 봐."

다행히도 워커는 더 이상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래. 모처럼의 휴식인데, 불러낼 여자 정돈 얼마든지 있을테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든간에, 그리드의 시간은 흘러간다. 때때로 정보국 요원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감성적인 기분에 빠져들 때면, 나는 버릇처럼 네 번째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구질구질하게 간 보는 녀석처럼. 아니, 처럼이 아니라 딱 그 짝이었다. 다시 그녀와 잘 해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에도 없는 끼 부리는 문자나 보내는 것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외롭지 않고 싶어서.

"리,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냐. 금방 왔어. 어, 머리 새로 했네."

나도 안다. 내가 정말 쓰레기 같은 형편없는 녀석이라는 걸. 하지만 누군가, 나를 리 페이스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았다. 그 날, 증권 거래소 앞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을 때에야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지금껏 외로웠다는 것도, 사람이 그리웠다는 것도. 로이 워커로 사는 것에 나는 지쳐있었고, 때마침 그녀가 나타났다. 물론 그렇다 해서 내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게 아닌 것도 안다. 그녀에게 공평한 처사가 못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쓰기엔, 너무 지쳤고 너무 외로웠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을, 리 페이스를 아는 사람과 있고 싶었다. 왜 이제는 그 이름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캐묻지도 않고, 내가 그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살았던건지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 때마침 딱 알맞는 사람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전 약혼녀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리 페이스를 잘 알았고, 그녀 역시 내게 털어놓지 못하기에 나에게 그간 어디서 무얼 했는지 묻는 일도 없었다. 왜 내 명함에 아론 타일러라고 써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먼 과거의 이야기만, 그 중에서도 안전한 이야기만 했다. 내가 폴로 선수였던 이야기와 부상 얘기는 그 중에 쏙 빠져 있었고, 그녀가 나를 매정하게 버리고 갔던 이야기도 빠져 있었다. 우리는 마치, 고등학생 때 풋사랑으로 사귀었던 추억이 있는 어른들처럼 '쿨하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할 뿐이었다.

나를 보고 밝게 웃으면서 매력을 뽐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씁쓸했다. 사교계에서 반짝 반짝 빛나던 여왕벌 같은 여자였는데. 몇 번인가 결혼에 실패한 뒤 부터였을까, 아니면 다시 돌아온 걸 내가 받아주지 않았던 때부터였을까. 지능범죄팀이라고는 해도 예전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경찰 따위의 나에게 저렇게 교태를 부리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안타까워졌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아마 속 시원해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외모만을 밑천 삼아 이리 저리 갈아타다가 정착할 시기를 놓치고 한 등급씩 맴도는 수준이 쇠락해가는 거라며 보기 좋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인 모습은 누구라도 결국엔 같은 모양인 것 같아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미 충분히 잔인하게 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오늘의 불안감과 외로움을 잠시 잊기 위해, 갈증을 잠시 달래기 위해 나를 상대하고 앉아있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니지. 어쩌면 이런 식으로 누가 더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인가를 저울질하는 속셈 부터가 내가 쓰레기 같은 녀석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밝은 금발과, 태닝으로 갈색 빛으로 잘 그을린 피부, 그리고 매니큐어를 칠한 길고 매끈한 손톱을 보고 있으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루카였다. 언젠가 그녀에게 리 페이스에 대해 털어놓고 가까운 친구 사이로라도 그녀가 이 공허함을 채워줬으면 했다. 하지만 루카의 곁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개리 퓰러와 트레이 퓰러가 있었고, 올렉 다샤빈이 발목을 옭죄고 있었다. 루카에게 나는 그야말로 해리의 총아 자리를 빼앗은 녀석이고, 톰 퀸의 섹션 치프 자리를 빼앗은 녀석일 뿐이었다. 아 그래. 이것도 빼놓을 수 없지. 디브리핑 취조관. 아마 루카의 머릿속에서 나는 제냐나 올렉과 같은 묶음 안에 들어 있는 녀석일 것이다.

"리? 듣고 있는 거야?"

"…아, 미안. 당신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참으로 같잖은 변명이 잘도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왜 그녀를 계속 만나는 것일까. 매번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다 하면서 늘 그녀에게 문자나 전화를 하곤 했다. 이쯤 되면 이게 데이트라고 그녀가 착각하기 시작할 법도 한데, 나라는 녀석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어쩌면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 어쩌면 화풀이일 것이다. 루카가 그 빌어먹을 CIA 녀석을 만나기 시작했으니까. 결혼했으니까 나랑은 전혀 생각이 없다던 게 고작 지난 달이었다. 그새 개리를 정리한 건 아닐 거다. 아직도 시간이 맞으면 트레이를 보러 가니까. 그럼 그때 그 말은 뭐였을까. '나 결혼했잖아' 라니. 개리가 법원에 이혼 청구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게 루카가 러시아에서 실종된 지 고작 1년 8개월 만의 일이었는데. 내가 아는 걸 루카가 몰랐을리가 없었는데. 왜 그런 얼토당토 않은 핑계로 나를 거절한 걸까. '그래 너 싫어'라는 뜻으로 한 소리였나? CIA 녀석을 만나는 건, 너를 만나느니 CIA를 사귀겠다는 건가?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졌어…'

일을 핑계로 원래 예정보다 자리를 더 일찍 떴다. 하지만 그리드에 지금 그렇게 시급한 문제는 없었다. 나는 밖에서 괜히 더 노닥거릴까 하다가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 더미도 있고 해서 일찌감치 그리드로 돌아갔다. 이렇게까지 그리드가 잠잠하게 넘어갈리가 없는데, 뭔가 사건이 하나 벌어질 때가 됐는데 싶더라니 들어서자마자 말콤이 나를 불렀다. 말콤이 건넨 서류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웬 십대 소년이 군용 무기를 손에 넣어 웹상에 판매용으로 게시했는데, 우리 측에서 당장 내리긴 했지만 이건 그냥 길가다가 권총을 주운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당장 그리드를 둘러보았다. 루카는 자리에 없었지만 컴퓨터 모니터는 켜져 있었다. 해리의 오피스를 보니 유리창에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둘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든지 간에, 어쨌든 이 일이 먼저였다. 나는 노크를 할 생각으로 오피스의 문 앞에 섰지만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춰섬과 동시에 내 손도 멈추고 말았다.

"슈거 호스요?"

"그래."

"지난 번엔 들어본 적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었지."

"이번엔 뭐라도 기억해보라구요."

해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루카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상처받은 사람처럼 들렸다. 제아무리 해리라도 그 앞에서조차 석상처럼 굴 순 없을테지.

"사소한 거라도. 아무 거라도 상관 없네. 뭐라도 기억해봐."

"제냐가 그때 저한테 뭘 하고 있었는진 알고 계시죠."

"알고 있네."

"…국장님 부탁이면, CIA와 데이트 하는 것도 할 수 있죠. 몸 팔아서 영국이 파산하는 걸 막을 수도 있구요. 세 살짜리 아들을 놔두고 러시아에 다녀올 수도 있죠."

"루카—"

"그래도 저한테 부탁하실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에요.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끼리라도. 정도가 있으셔야죠."

그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온종일 루카가 CIA 요원을 만나는 것이 해리의 명령이었다는 사실만이 맴돌았다. 해리의 오피스 문이 벌컥 열리고 루카가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동안에도, 내가 해리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팀원들을 소집하여 브리핑을 하고, 내가 현장으 오지게 안 듣는 딘 미첼을 만나 그나마 협조적인 그 애의 엄마를 데리고 안전 가옥에 숨는 동안에도, 그 사실은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빅토리아 역에서 내가 딘을 놓쳐버린 것은 어쩌면 내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느라 나도 모르게 부주의해져있었기 때문일지도. 내가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있느라, 고작 십대 소년을 놓쳐서 샌즈의 손에 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해리의 오피스 앞에서 망설임 없이 노크를 했더라면, 아니면 조금만 더 늦게 해리에게 갔더라면, 나는 배신감에 차갑게 식은 루카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을 것이고, 온종일 그 생각에 잠겨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딘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늦게, 나는 전 약혼녀를 불렀다. 처음으로 내 집에 외부인을 들였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혼자 있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내 옆자리에 긴 금발머리가 햇빛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CIA 옆에서 잠을 깨는 루카도 아마 이런 기분일까. 아니지. 이건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이고, 루카는 해리의 체스판 위에 놓여진 것일 뿐이었다.

"아니야, 더 자."

답답한 기분에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내 소리에 깼는지 그녀가 뒤척였고, 나는 연기라기엔 너무나 훌륭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에 키스하며 이불을 바로 덮어주었다. 이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내가 싫었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표정을 쓰고 목소리를 두를 수 있다는 사실이. 아무런 준비도 다짐도 없이도 숨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능숙하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게 싫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나였고, 온 오프 스위치 따위는 없었다. 십년 넘는 요원 생활 끝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남자 로이 워커가 전부였다. 아론 타일러, 조 맥밀란, 페르나도 우드, 프랭크 모스, 필 윈슬로우… 다들 껍데기만 존재하는 공허한 인물들이었다. 개중에는 출신 고등학교라든지 하는 세밀한 디테일 같은 것조차 없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살아있는 존재였던 리 페이스에게 매달리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붙들고 있었다. 그래. 배부른 투정일 것이다. 새뮤얼인지 스탠인지 콜필드라는 CIA 녀석과 붙어있어야 하는 루카에 비하면.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 부터 깨어 있었지만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쇳소리마냥 기분 나쁜 알람 시계 소리를 한참 듣는 동안에도 손을 뻗어 시계를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알람이 울리고, 계속해서 시간이 이 순간에만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하지만 곧 알람은 멈췄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비번이니 그대로 다시 잠이 들어도 괜찮았겠지만 어차피 잠도 오지 않을 뿐더러 별로 이 집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이제 이 집이 싫었다. 어느 방을 들어서나 곳곳에 콜필드의 흔적이 있는 걸 보는 게 싫었다. 옷장에 그의 셔츠와 타이가 걸려 있는 게 싫었고, 세탁물 바구니에 그의 속옷이 들어 있는 것도 싫었고, 화장실 캐비닛 안에 그의 면도기와 칫솔이 들어 있는 것도, 카운터에 그의 스킨과 로션이 놓여 있는 것도 싫었다. 거실에는 그의 책과 휴대폰 충전기가 있었고, 부엌에는 내가 먹지 않는 시리얼과 커피가 있었다. 씻어내지지도 않는 세균 같은 것에 온 집안이 잠식당한 것 같았다. 여긴 더 이상 내 집도, 안전한 공간도 아니었다.

콜필드는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미국인 요원을 CIA가 빼내가는 것 적이 있으니 그들도 내가 거기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콜필드와 나는 처음부터 아무도 입 밖에 내지만 않았을 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 다 노골적으로 서로를 염탐하기 위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곁에서 듣게 되는 전화 통화, 스치듯 보게 되는 이메일, 여러 고유명사와 주변 일정. 모든 것이 염탐의 대상이었고, 대상임을 알고 있는 만큼 우리는 서로가 캐내가도 좋은 정보만 주변에 뿌려두었다. 입에만 올리지 않을 뿐, 연인 관계는 그저 구색을 갖추기 위한 조잡한 연기에 지나지 않고 결국엔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내가 콜필드의 덫에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의무적으로, 스케쥴의 일환으로만 여겼던 식사 약속이나, 소파에 나란히 앉아 뉴스를 보는 것이나, 혹은 아무 이유 없이 여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는 것에 나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무슨 목적이든간에, 누가 나와 있어주는 것이 좋았으니까. 혼자 있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고, 단순히 나에게서 정보를 더 빼내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화내주는 것이 좋았다.

[내가 할 소린 아닐지도 모르지만, 피어슨은 당신에게 정말 너무하게 구는 군.]

무엇 때문에 여태껏 MI5에 충성 하고 있냐는 물음은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표정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콜필드가 무엇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자신에게 절실한 것은 잃어본 적이 없으리라. 왜 MI5에 남아있냐니.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또 있을까. 이것 말곤 내게 남은 것이 없는 것을. 그래서 그가 싫었다. 아무 것도 잃어본 적이 없으면서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내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 그에게 나는 오로지 MI5 정보에 접근하기 위한 도구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찾게 되니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나는 그대로 부엌 의자에 앉아 있기만 했다. 뭔가 할 일이 없을까 하다가 냉장고에 들어 있던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라자냐를 꺼내 데웠다. 워커가 내 부엌을 보고 뭘 먹고 사는 거냐며 질겁하던 게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콜필드는 내 집이 아무도 살지 않는 곳 같다는 점을 영악하게 눈감아 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제가 이것저것 가져다 놓을 뿐이었다. 그래. 옷장 안에 집어넣어 두었던 액자도 그는 못본척 해줬지. 내 문신이 누구나 등에 그 정도는 새기고 있는 것마냥 자연스러운체 하는 것도 능숙하기 그지 없어서, 나는 그 모든 것이 그의 전략임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에게 안겨 있는 것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한 번 차갑게 식었던 라자냐는 별로 맛이 없었지만 나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고 빈 접시를 닦았다. 여전히 할 일이 없었다. 오늘은 목요일이고 체육관에서 아이들이 농구 연습을 하겠지만 트레이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콜필드의 눈을 피하느라 3주만에 트레이를 다시 봤을 때, 아이는 왼쪽 팔에 기브스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다친 건지도, 언제 왜 다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MI5의 보안 인가로 의료 진료 기록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거라든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라든지, 즐겨 보는 TV프로나, 좋아하는 가수라든가.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아는 아이는 이제 겨우 걸어다니고, 말을 조금씩 하는 세 살 짜리 아이 뿐이었다. 그마저도 나는 개리에 비하면 집에 거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계속 부엌에 앉아있기도 우스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 갈 곳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집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런던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서너시간 정처없이 길거리를 맴돌다가 별 생각 없이 인파를 따라 지하철 역으로 내려갔다. 반쯤 잠결인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이리 걷고, 저리 걷고, 지하철에서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 도서관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었다. 돌아온 뒤 개리와 트레이를 처음으로 다시 보았던 도서관에 나는 다시는 온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곳에서 앨리슨 퓰러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곳이 아니어도 그녀는 트레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잊을 수가 없어 이 곳은 늘 외면해왔었다. 개리가 새로 만난 사람이 얼마나 나를 닮았을지, 얼마나 나의 대용품 같은 사람일지를 보고 싶어했다니. 대체 무슨 근거로 나는 개리가 나를 잊지 못했을거라고 확신해왔던 걸까. 나는 결코 좋은 아내가 아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서관은 그대로였다. 단지 한겨울이었던 그때에 비해 사람들이 훨씬 가볍고 얇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정도만이 달랐다. 나는 트레이가 있었던 책장으로 가 그 앞에 섰다. 열 두살 남자아이들이 읽는 책은 이런 거구나 하면서. 여러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소설들이 한가득했다. 장르는 주로 판타지나 스릴러. 마지막으로 소설책을 읽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확실히 러시아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 때에도 윌리엄 블레이크 정도나 읽을 뿐이었으니 확실히 이런 책은 적어도 20년은 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마침 주변을 지나가고 있던 직원을 붙잡아 어느 것이 가장 인기 있는 책인가를 물었다. 점원은 내 나이대와 내가 서 있는 책장 코너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별 이상한 질문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두어권을 꼽아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서점도 아니고 도서관인 것을. 어쩌면 이런 날씨에 내가 옥스포드 셔츠의 버튼을 모두 채우고 있는 게 이상해보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손목 안쪽의 문신이 보이는 건 아닌지 다시 옷깃을 매만지며 그가 꼽아준 몇 권의 책 중 하나를 골라잡아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몇 시간동안,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게 트레이는 여전히 낯선 아이였고, 그 애에게 나 역시 낯선 사람일 것이다. 개리는 내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버지는 나를 찾았을까. 톰 퀸은 어디에 있는 걸까. 눈을 감자 다른 가족들의 말소리가 도란 도란 들려왔다. 행복하고, 즐거운 목소리들이. 나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전부 제 자리에 꽂아넣고 다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내내 자켓 주머니에 든 통을 만지작거렸다. 라이터 만한 크기의 민트 사탕 통이었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사탕이 아니었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앞으로도 괜찮아지지 못할 거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수면제를 먹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다음 부터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처방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눈에 띌만한 행동도 아니었으니까. 프로작 정도야 다들 비타민처럼 먹어대는 걸.

하지만 사실은, 약보다는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었다. 문제는 얘기할 사람이 없다는 거였지만. 나는 한참동안 사탕 통을 만지작거리다가 워커의 집으로 향했다. 워커는 비번이 아니니 집에 있을 확률은 사실 적었다. 하지만 나는 미리 연락해보지도 않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초인종을 눌러보고 없으면 그냥 돌아서기로. 하지만 만일 그가 문을 연다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뭐라도 얘기할 수는 있지 않을까. 조나 벤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 그들은 더 이상 현장에서 나를 믿고 함께 일할 수 없을테니까. 해리는 나를 믿지 않으니 그에게 갈 수도 없었다. 말콤은… 내가 말콤에게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해리의 귀에 들어가게 될 테니 할 수 없었다. 코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콜필드에게 내가 결혼했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딱 한 번만. 딱 1분만. 워커가 집에 없다면 그냥 돌아서서 갈 것이다.

"일찍 왔네?"

문이 열렸지만, 워커가 아니었다. 차라리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좋았을 걸. 워커의 전 약혼녀였다. 나는 왜 그렇게 바보같았을까. 그가 통화하는 것도 들었으면서. 우리는 둘 다 잠시 말을 잃었다.

"또 보네요?"

그녀가 팔짱을 낀채 가시돋친 목소리로 말을 건넸을 때에야, 나는 그녀도 나를 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렇지. 메이넬의 약혼녀였었지. 나를 기분나빠 하는 것도 그럴 만했다. 메이넬의 펜트 하우스에서 보냈던 시간이 뱀처럼 내 등골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오싹하게 감싸안았다. 나는 내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고 있길 바라면서 이 여자가 알고 있는 워커의 가명이 뭘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잖아도 나에게 적대적인데 리 페이스라는 이름을 대는 건 싸움을 거는 꼴이 될 테니까.

"터너 요원은 집에 없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잠깐만, 당신—"

"왜 그러시죠?"

"무슨 사이야?"

"직장 동료일 뿐입니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래요, 그럼. 약혼 파티에 초대할 필욘 없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은 닫혔고, 나 역시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서서 아파트를 나왔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이나 버스에는 타고 싶지 않아 한 시간 가량 걸어 내 집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물론 그 집이 비어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적어도 워커가 나오는 것보다야 나았다. 나는 정말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래도 워커에게 직접 우스운 꼴을 보이진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알약을 삼킨 뒤 사탕 통을 겨울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 숨겼다. 거실 소파에 한동안 누워 있으려니 금세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나 간단한 걸. 뭐하러 워커를 찾아갔던 걸까. 휴대폰이 울렸다. 콜필드였다. 나는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하고, 키스로 그를 침대에 끌어들였다. 또다시 외롭지 않은 하루가 지나간다.


그녀가 무언가에 토라져 있다는 것쯤은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알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지만, 어조라든가 표정이라든가 하는 부분에서 언뜻 언뜻 풍기는 분위기는 그녀가 나에 대해 뭔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게 있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물어본다 한들 운 좋아야 정말로 괜찮다는 뜻이 아닌 괜찮아만 돌아올 것이고, 내 생각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거라면 정말로 몰라?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나는 그냥저냥 건성으로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며 넘기려 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녀를 상대로 기분을 풀어준다거나 하는 그런 까다롭고 수고스러운 일은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 공들이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돌아보자면 공들이지 않는 것은 나뿐이었을 것이다. 나와 달리 그녀는 이제 진지한 상대를 찾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었던 알렉시스 메이넬 마저 없어졌고, 여전히 아름답긴 했지만 오직 외모만으로 재력가들을 낚기엔 이젠 더 이상 어리지도 않았으니 그닥 경쟁력이 있다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 지능범죄 전담반 요원이라는 꽤나 반듯한 타이틀을 달고 나타난 나는 꽤 괜찮은 타협점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교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자리에 서 있어야만 만족이 되는 그녀의 눈에는 결코 차지 않는 상대였을테지만, 어차피 이제는 그 이상의 상대는 낚아챌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듯 싶었다. 어쩌면 이제는 화려함 따위는 그만두고, 좀 더 현실 감각 있는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단지 이제는 그런 삶을 누리기에 적절한 파트너들은 (그러니까, 신실한 녀석들은) 이미 죄다 착실한 다른 여자들이 데리고 가버리고 난 뒤라 기회가 없어 메이넬 같은 녀석들 사이를 맴돌며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여왕처럼 반짝이던 여자가 이렇게 쇠락해 가는 걸 보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진지한 상대로 여길 정도로 감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녀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저 인정하기 싫어 모른 척 하고 있었을 뿐, 몰랐을리는 없다. 그 문제를 표면으로 끄집어내면 내가 이 이상의 수고로움은 더 이상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여겨 관계를 그만두자 할 것을 알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 듯이 넘어가고 있었다는 건 우리 둘 다 아는 일이었으니까. 시덥잖은 이야기가 오가는 저녁식탁이 치워지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옆에 누가 있는데도 혼자 있는 것처럼 텅빈 저녁이 그렇게 흘러갔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인지, 그녀는 섹스를 원했지만 나는 손길을 거절하고 돌아누웠다. 그날 점심의 일을 여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해리가 나를 데리고 나간 것처럼, CIA 국장 역시 혼자 나타나진 않았다. 나와 해리. CIA 국장과 콜필드. 정보국 요원 넷이서 그렇게 웨스트민스터 1층 레스토랑에 앉아 애프터눈 티 세트를 마시는 꼴이라니. 나는 콜필드가 싫었다. 그가 홍차에 레몬을 넣어 마시는 것도 보기 싫었고, 공석에서 루카를 노스 요원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싫었고, 루카와 똑같은 비누향을 풍기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가장 싫었다. 콜필드에게 우방국 요원을 대하는 사무적인 태도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는 것도 싫었고, 내가 여왕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어느 상황에서든 사적인 감정을 접어둘 수 있는 녀석이라는 것도 싫었다. 그 자리에서 화라도 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면 해리에게라도. 내 팀원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말아달라고 항의라도 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좋아서 그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해리라고 다른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만해도 몇 번이나 내 몸을 빌미로 정보를 얻어냈고, 동료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걸 거리낌 없이 여겼었는지. 성적 유혹만큼 인간이 약해질 수 있는 부분은 없었고, 그렇다면 정보국 요원들에게 가장 요긴한 무기는 결국 정해져 있었다. 판이 이렇게 짜여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일 일찍 나가야 돼."

그냥 내 셔츠 안쪽이나 더듬는 건가 싶던 손은 노골적으로 목적을 내보이며 점점 아래로 향했고 나는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팔목을 잡아 떼내버렸다. 이따금씩 머리가 복잡해져 있을 때면 그녀의 손길을 반기곤 했었다. 다른 집중할 여흥거리로 꽤나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내 팔 안에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던 콜필드의 표정이 마치 다 안다는 듯한 그 눈웃음이 지금 생각해도 총으로 한 대 쏴주지 못한게 못내 아쉬웠으니까.

"그 여자 때문이야?"

"무슨 소리야."

누구를 얘기하는 건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질투를 유발하는 대화 주제로 떠오를 여자라는 것은 루카 외엔 없었으니까. 맨 처음 내 집에 왔을 때, 욕실 휴지통에서 사후 피임약과 경구 피임약 포장지(딱 1일치만 비어있는)를 발견했을 적부터 그녀는 그 흔적의 주인이 루카라 단정짓고 (틀린 건 아니었지만) 길길이 날뛰었었다. 어느 정도는 내가 일부러 건성으로 대처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나는 여러가지로 루카에게 화가 나 있었으니까. 내가 다가서려고 했을 땐 자긴 결혼한 사람이라며 밀어내더니 곧장 CIA를 만나질 않나. 그래서 누군가가 나와 루카 사이를 의심하는 것으로 비뚤어진 대리만족을 했던 걸 거다. 하지만 이제 와서 왜 또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 건지. 내가 내일 일찍 나간다고 해서 또 그러는 걸까. 내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적마다 그녀는 내가 진짜로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루카를 만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나는 또다시 건성으로 대하며 그랬으면 좀 좋았겠냐고 속으로만 생각할 뿐이었고.

"이젠 집에도 오더라?"

"뭐?"

"바람 필 거면 걸리지나 마. 호텔을 가든가."

"왔었다고? 언제?"

"오늘."

내가 벌떡 일어나 앉아 추궁하자 놀랐는지 그녀는 순순히 오늘 루카가 왔었다고 털어놓았다. 오늘 루카는 비번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았던 걸까? 나는 당장 일어나 휴대폰을 세 개 모두 확인해 보았지만 루카에게서 온 전화나 문자, 이메일은 전혀 없었다. 콜필드와 무슨 일이 있었나? 문제가 있었던 걸까? 나는 근래에 있었던 사건들을 재빨리 되짚어 보았지만 루카가 연락도 없이 나를 찾아왔을 법한 일은 없었다. 나는 애꿎은 메일함만 여러번 새로고침을 눌렀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자기 말을 계속 무시하는 것에 화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서 휴대폰을 빼앗아들려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간단하게 뿌리칠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발코니로 나와 잠시 망설이다가 루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은 결국 자동응답기로 넘어갈 뿐이었다. 세 개의 번호가 모두 그랬고, 나는 루카가 또다시 콜필드와 있는 거란 생각에 화가 나 괜히 화분을 발로 차 버렸다. 난데없이 화분에 부딪힌 맨발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렸고, 저만치 굴러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깨어진 화분에서 흙과, 식물의 뿌리가 튕겨나왔지만 분을 삭히기엔 충분치 못했다. 나는 화가 가라앉을 동안 발코니 문 손잡이 뒤돌아 서 있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문을 두들기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젠 넌덜머리가 났다. 정 반대 타입을 고르면 적당히 잊혀질까 했는데. 차라리 비슷한 사람이라도 찾았어야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나 스스로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루카를 처음 만났던 로이 워커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혐의가 걷힐 때까지 그녀를 변절자로 몰고가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이런 복잡하고 성가신 감정이나 생각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텐데.

휴대폰을 내려다보자 액정의 시간이 새벽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덕분일까, 서서히 이성이 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루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리드가 알았을 것이고 내가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나를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긴급한 일이었다면 루카가 내게 따로 다시 연락을 했거나, 혹은 내일 그리드에서 만나면 말해줄 것이다. 콜필드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CIA 요원이 MI5 요원을 해칠 리는 없다. …하지만… 왜 내게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왔던 걸까. 그리드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일이었던 건 아닐까. 해리가 여전히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어쩌면 매튜 맥퍼딘이라는 감시자의 고용인이 해리라는 건 알지 못해서 겁에 질렸던 걸까. 하지만 해리의 승인 없이 그 얘기를 내가 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제 포기했는지 등 뒤에서 덜컹거리던 문은 잠잠했고, 그 소리가 사라지자 한결 마음이 더 차분해지면서 생각이 조용히 제자리들을 찾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해명이라도 요구하듯 팔짱을 낀채 침대에 걸터앉아있었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과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화가 난 듯이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나만 빤히 보고 있는 그녀의 앞에 지난 몇 달간 옷장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던 트렁크를 꺼내주고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나는 그리드로 향했다.


오늘도 절로 눈이 떠져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시간은 새벽 3시 10분이다. 언제나 이 시간이었다. 콜필드가 있을 때에는 수면제를 먹을 수 없었지만, 상대가 누구든 간에 누군가가 옆에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게 있어서 잠이 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이 시간에 깨지 않기가 어려웠을 뿐. 어차피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오늘도 혹시나 해서 눈을 감고 꼼짝도 않고 있어봤지만 이미 잠은 싹 달아나있었다. 이대로 일어나면 하루종일 피곤할 게 뻔했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굳은 듯이 누워 콜필드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의 다리가 내 몸에 맞닿아 있었고, 나는 그 온기가 좋으면서도 그런 것에 안도하게 되는 게 싫어 속으로 벌써 하루에도 수백번씩 곱씹던 것을 또다시 되뇌었다. 콜필드는 CIA다. 그가 나를 만나는 건 정보를 위해서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콜필드가 깊이 잠들었음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벗은 몸에 새벽 공기가 따갑게 느껴져 나는 콜필드의 잠옷 가운을 입었다. 그냥 그게 더 따뜻한 것이라 집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지만 무릎 담요를 두른 채 거실 소파에 누워 건조함에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내내 나는 가운에서 나는 콜필드의 스킨 향에 코를 묻고 있었다.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새벽의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나는 잿빛으로 뿌옇게 물든 거실 유리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언제나처럼. 새벽에 잠이 깨면 늘 이렇게 창문을 보고 누워 있었다. 3시 10분. 일주일에 두어번씩 간수들은 그 시간에 쇳창살을 내리치며 온 죄수들을 깨웠다. 고강도 플라스틱의 진압봉과 녹슨 철문이 부딪혀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진동과 함께 바닥을 타고 기어올라오면 다들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간수들이 자기 방문 앞에서 멈추지 않기만을 바랐다. 겨울에는 특히 더. 불시에 들이닥치는 취조 대상 선정은 무작위인 것처럼 보였지만, 8년쯤 그들과 지내다 보면 감옥에서는 모든 것들이 취조관이 짜놓은 거대한 심리 작전의 한 수라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은 내 차례가 아닐거라는 걸 미리 짐작하고 있다고 해서 그 소름끼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방문에 그들이 멈춰서고, 다른 누군가가 끌려나가는 소리를 듣고, 복도가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해도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3시 10분은 그들이 그렇게 고른 시간이었다. 공포와 긴장감에 빨라진 심박이 겨우 안정을 찾을 즈음이면, 이미 아침 점호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제야 겨우 하루의 시작인데, 그들은 손가락 한 번 까딱한 것으로 온 건물안의 사람들을 녹초로 만들어 놓고 하루를 여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유독 죄수들 간의 싸움이 잦았다. 다들 불안감과, 잠들지 못한 피로감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으니까.

새벽 4시 20분. 나는 속으로 600초를 세기 시작했다. 10분. 10분만 있으면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한들 콜필드가 그 소리에 깨더라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든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드에 다급한 일은 없었지만 MI5의 건물은 언제나, 어느 사무실인가는 늘 불이 켜져 있는 그런 곳이었으므로 내가 일찍 나간다 한들 이상하게 볼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혼자 있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콜필드가 곁에 있는 것으로 안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게 아니니까. 나 자신을 우스운 꼴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일찍 일어났네."

"생각할 게 있어서."

하지만 정작 콜필드가 내 자리가 빈 걸 알고 거실에 나와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았을 때에는, 방금 전까지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도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의 가운에서 나던 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그냥 스킨이나 로션의 향일 것이다. 아주 흔한. 하지만 그 향이 좋았고, 안심이 되었다. 언제라도 진압봉으로 무장한 간수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끌고 나갈 지 모른다는 걱정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접어둘 수 있게 만드는 향이었다. 향이 아니라면 내 어깨를 감싸안고 있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나에게 워커와 무슨 사이냐고 묻던 약혼녀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기가 어깨를 타고 올라와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콜필드는 그냥 내가 추워하는 거라 생각했던지 나를 좀더 꼭 끌어안았다.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까만 모스크바의 겨울 새벽. 한때는 짙은 황갈색이었지만 한꺼풀 연하게 빛이 바랜 죄수복은 어느정도는 러시아의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지만 물에 젖었을 때는 얘기가 전혀 달랐다. 간수들의 팔에 붙들려 교도소의 안뜰로 끌려나가면 언제나 죄수들 사이에 위화감과 긴장감을 조성하며 안뜰의 한켠에 우뚝 서 있던 쇠기둥 앞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기둥에 묶여 물을 뒤집어 쓰고 추위에 정신을 잃을 때까지, 따뜻한 털옷을 입은 간수들은 쉴새없이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는 게 정말로 없었으니까. 그들의 질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얼마든지 정보를 바쳤을 것이다. 간수들이 나를 다시 방으로 데려다놓은 뒤에도 몇 시간동안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추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들에게 정보를 넘겼을 것이다.

"조금만 더 있자."

내가 일어서려 하자 콜필드가 나를 붙들며 졸음에 반쯤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친절한 게 싫었다. 그의 가짜 친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내가 너무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지금 내 옆에 있는게 콜필드가 아니라 개리라면 좋을텐데. 쓸데 없는 생각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워커에게 '나 결혼했잖아'라고 대답했던 게 고작 몇 달 전인데. 개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게 이렇게 쉬운 일이어서는 안 되는데. 트레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게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일찍 가야 돼?"

"응."

"집 주변에 누가 있는 것 같던데."

"알아."

아마 해리가 붙인 사람일 것이다. 내가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 내내. 누군가가 붙어 있었다. MI5에서 붙인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이 보냈던 신입들과는 달랐다. 그 전에는 그냥 기분 탓이려니 했었을 정도로 그냥 내가 예민하게 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메이넬 사건 이후에야 나는 감시자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정도로 실력이 좋은 사람은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돌아온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중이니 돈도 꽤 들었겠지. 해리는 그 정도로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다 늦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콜필드 역시 평소보다 약간 시간이 늦어지고 있는데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새벽에 깬 것 때문에 이제야 다시 졸리기 시작한 걸까. 나는 콜필드에게 기댄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왜 갑자기 내가 그리드에 나가기 싫어졌는지 깨달았다. 워커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