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다섯 시. 그리드의 공기는 멈춘 듯이 적막했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자 그제야 눈에 건조함과 피로감이 몰려와 나는 손바닥을 비벼 두 눈에 댄 채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화면을 등진 채 몸을 뒤로 쭉 기댔다. 그리드의 정규 근무 시간은 오전 여덟 시부터였고, 지난 며칠간 별다른 사건 (테러라든가 테러라든가, 아니면 테러라든가)이 없었던 관계로 그리드는 텅 비어 있었다. 빈 책상들을 쭉 둘러보다 보니 루카의 자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자리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흔적이라고는 곁에 놓인 서류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쩐지 사람 사는 것 같지 않던 루카의 집이 떠올라 책상으로 다가갔다. 흔히들 액자 한두개 쯤은 놓게 마련이었지만 루카의 자리에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문득 그녀가 트레이의 사진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서랍을 열어보았으나 그 안에도 그저 사무 용품이나 현장 요원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물건들만 있을 뿐 개인적인 물품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책상의 주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녀의 모니터에 내 자리가 비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보니 이 자리는 아담이 쓰던 자리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해리의 오피스는 등 뒤에 있었고 전방 시선도 그리드의 오피스를 바라보는 쪽이 아닌 복도를 향한 쪽이어서 나는 맨 처음에 루카가 이 자리를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갈 것만 같았다. 집에 가고 싶다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떠올라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시 반. 평소라면 루카가 보통 그리드에 나타나는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아닌 듯 싶었다. 나는 몇 번이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루카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럴만한 명목이 없음을 쓰게 삼키며 손을 내려놓았다. 어제 그녀는 왜 나를 찾아왔던 걸까. 왜 오늘은 그리드에 일찍 오지 않는 걸까. 여덟 시는 한참 멀었지만 사람들이 하나 둘 씩 그리드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꽤 북적이게 되었을 때에도 루카는 오지 않았다.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연락해서 어디냐고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콜필드와 있는 걸까.
나는 그간 밀렸던 서류 작업들을 처리하며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몇 장이나 서류를 넘긴 뒤 시계를 보면 생각과는 다르게 고작 2-3분이 흘러 있을 뿐이었고, 그리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다른 누군가가 사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애꿎은 시계만 노려보며 파일 묶음 두 개를 처리하고 나자 겨우 여덟 시까지 십 오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그리드의 문이 열리고 루카가 들어오길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한숨을 삼키며 다음 파일 묶음을 펼쳐들었다. 십여분 째. 보고서에 빠져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더니 어느새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언제 온 것인지 저만치에서 루카가 머그잔을 든 채 코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이!"
루카에게 다가가기는 커녕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말콤이 나를 불렀다. 해리는 벌써 그 곁에 있었고, 어느새 루카도 곁에 다가왔다. 말콤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오늘은 물론이고 어쩌면 앞으로 며칠간 루카에게 어제 나를 찾아왔던 것에 대해 물을 기회가 없으리란 걸 알았다. 말콤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짧은 미팅이 끝났을 즈음엔 루카는 벌써 딘 미첼의 신변보호와 증언을 위해 자리를 떠난 뒤였고 나는 해리와 함께 외무장관을 만나러 향했다. 그녀는 듣던대로 거만한 정치인이었고, MI5가 UN 특별 협상관 클로드 데니젯의 신변 보호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 했다. MI5가 아닌 군 부대가 데니젯을 경호하길 원하는 외무장관을 설득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인가?"
"전혀 아닙니다."
발신자는 루카였다. 지원을 요청하는 그녀에게 마음 같아선 외무장관에게 안 된다 말했던 군 부대라도 보내주고 싶었지만 이미 데니젯의 경호에 일반의 두 배는 되는 인원이 소요되었기에 루카에게 보내줄 수 있는 지원이 없었다. 미첼의 집 밖에 밴이 두 대 정차해 있다는 루카의 말에 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이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차가운 명령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는 여전히 해리가 외무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빌어먹을 여자. 목숨 내놓고 뛰는 건 자기와는 상관 없으니 저렇게 고상하게 앉아 있을 수 있겠지. 나는 이래서 정치인들이 싫었다. 그들의 정치 테이블 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해리 피어슨의 어깨에 무겁게 늘어져 있는 순직한 요원들의 목록은 그들에겐 닿지도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겠지.
"녀석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
루카와의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지원은 없고, 루카는 신변보호 대상인 민간인 두 명을 데리고 무장했을 게 분명한 녀석들을 상대로 프로토타입 무기를 안전하게 옮겨야 했다. 전화를 끊으며 딘 미첼을 데리러 내가 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쓰리게 번졌지만, 해리가 외무장관 앞에 섹션 치프도 아닌 루카를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딱딱한 피맛이 입안에 번지자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감정을 앞세워선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울리며 경직되었던 몸이 차분해졌다. 감정을 앞세우면 피해는 더 커질 뿐이었다. 나는 그간 루카가 얼마나 훌륭하게 현장 일을 해냈는지,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 경력을 지닌, 해리가 가장 아끼는 현장 요원인지를 되새기며,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외무장관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해리의 뒤를 따랐다.
그리드로 돌아오자 말콤과 벤이 루카의 경로를 추적하고 있었다. 루카는 벌써 미첼의 집을 떠나 이동하고 있었고, 나는 루카에게 게이트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말콤이 종이 쪽지로 내게 누군가가 통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걸 알리자마자 게이트를 지나가라는 말과 함께 통신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에서 외부로, 혹은 외부에서 그리드로의 통신에서는 늘 암호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고 그건 당연히 도청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생긴 규정이었지만 실제로 그리드의 통신이 도청을 당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고, 이것은 상대가 일반 테러 집단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말콤이 역추적을 하는데에는 적어도 하루는 걸릴 것이었고, 그 동안은 전자 통신 수단을 사용한 연락은 모두 끊기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옛날 방식대로 아날로그 접선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연락 수단이 재개될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만 남았다. 두 명의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도, 프로토타입 무기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도, 딘 미첼에게서 프로토타입의 입수처를 알아내는 것도. 마지막 부분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긴 했다. 추적자가 붙은 상황에서 비행 청소년과 신용카드 돌려막기 빚더미에 앉아있는 싱글맘을 상대로 하는 일이 되겠지만 취조에 관한 한 루카는 8년간 취조를 당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경험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쪽이었으니까.
나는 오늘 아침에 눈인사를 나눈 것이 루카와의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드에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그리드에 있었으므로. 조에게 미첼 모자가 사라진 것에 대해 지역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지 않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내라고 지시하고, 벤에게 프로토타입 개발자들을 추적하게 한 뒤, 해리를 대신하여 말콤에게 역추적 보안 인가를 내려주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리를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없었지만. 루카가 그리드로 전화를 걸었던 휴대폰 GPS를 통해 그녀의 마지막 위치가 서레이의 쇼핑 센터 였음을 확인한 뒤 나는 조에게 접선 임무를 맡겼다. 빌어먹을 데니젯의 경호 때문에 루카에게 인원을 보내줄 수는 없었다. 그저 추적자들을 따돌리기에 도움이 될법한 새 차량과 한동안 몸을 낮추고 있을 안전 가옥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외무장관에게 나를 섹션 치프라고 소개하던 해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다시금 어제 루카가 나를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쓰게 삼켰다.
루카와 접선하고 돌아온 조가 내민 것은 신문이었다. 말콤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90년대에 쓰던 암호법 중 하나라며 루카가 표시한 붉은 선들을 잠시 지켜보더니 27일 수요일 아침 6시 10분, 화이트 시티 부근이라는 메시지를 해독해주었다. 나는 그 상황에 90년대 암호법을 쓰고 있었냐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완벽한 기억력 때문일까, 루카는 종종 나이에 맞지 않게, 그러니까 해리나 코니, 말콤의 세대 쯤 되는 방식들마저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있곤 했다. 어쩌면 그게 그녀를 유능한 현장 요원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그녀가 해리가 가장 아끼는 요원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고보니 해리는 아직도 루카에게 감시를 붙여놓고 있었는데, 나는 언젠가 기회를 봐서 해리에게 이유를 물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감시를 붙인 것 치고는 해리는 루카를 나만큼이나 믿는 것 같았으므로.
루카가 전한 바로 그 시각, 그 위치에서는 파파라치 교통사고 사망 사건이 있었다. '오토바이의 전자 시스템이 완전히 작동을 멈춰" 일어난 사고였다. 프로토타입 무기가 사용된 사건인게 분명했다. 딘 미첼은 그 목격자이고. 하지만 무엇 때문에 파파라치가 죽어야 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에게 안치소로 가서 다른 사항들을 더 알아보도록 한 뒤 벤이 발견한 CCTV 영상을 체크했다. 다른 수단이 아니라 보안 인가를 가지고 정문으로 들어와 프로토타입을 수거해간 마이클 스미스의 신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우리는 거의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었지만 언제 다가온 것인지 뒤쪽에서 해리가 말했다.
"마이클 스미스가 아니라 마이클 샌즈네."
"이 사람 아세요?"
"중동에서 20년간 복무한 MI6 요원이지.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에서 주로 까다로운 업무들을 수행했어."
"암살 부대였단 거네요."
"2년 전에 시리아 사막에서 하마스 단원 두 명을 사살하란 임무 중에 실종된 자야. 그 뒤론 자취를 감춘 사람인데."
조가 쇼핑 센터에서 사진을 찍어온 추격자 또한 샌즈의 부대에서 복무했던 MI6 요원이었다. MI6가 연관되었다면 그리드와의 통신이 도청당한 것도 놀랄 게 없는 일이었다. 나는 1년 전 루카가 막 영국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의 파일을 읽으며 알게 되었던 일화 중 하나가 떠오르는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려 애썼다. 해리가 루카를 FSB에게서 빼내기 위해 온갖 연줄을 동원하는 것을 보고 MI6 국장이 요원 하나 갖고 무슨 수선을 저렇게 피는 거냐고 했을 정도였단 말콤의 말이었다. MI6에 반감 따위를 가져 봐야 일에 도움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파파라치가 가지고 있었던 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 때문에 마이클 샌즈는 MI6 요원의 지위를 이용해 프로토타입 무기를 가지고 그를 암살했고, 사건의 목격자인 딘 미첼과 프로토타입을 쫒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그가 루카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해리의 눈에는 나와 똑같은 걱정에 빠진 기색이 어려 있었지만 우리 둘 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드의 사건에서는 늘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하게 나뉘었다. 우리는 동료를 걱정할 수는 있어도, 직접 그들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현장에 막 투입된 견습 요원이든, 베테랑 요원이든 간에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몫을 해내거나, 혹은 순직 목록에 이름을 올리거나 둘 중 하나였으므로.
"당신은요? 아이가 있나요?"
난데없이 나에게 떨어진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안전가옥에 들어온 뒤 내가 사라 미첼에게 건넨 말은 오로지 보안에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말 것, 창문을 열지 말 것,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목욕은 할 수 없고 샤워만 5분 내에 마칠 것, 휴대폰이나 전화 같은 전자 기기는 절대 사용하지 말 것, 창문을 가린 신문지와 문틈과 창틀을 막은 검정 테이프를 뜯지 말 것. 사라의 반문에 도청 당할 수 있으니 알츠하이머에 걸린 그녀의 노모에게 연락할 수 없다는 것과, 물소리나 수도 계량기의 움직임으로 안전 가옥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들킬 수 있기 때문에 물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 같은 이유로 창문과 문틈을 막긴 했지만 전등 불을 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때에만 짧게 하라는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졌을 뿐 나는 그녀를 신변보호 대상으로만 보기만 하고 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진 않았었다. 적어도 그녀가 이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괜한 걸 물었네요. 그것도 '내가 알면 안 되는' 것 중 하나겠죠."
내가 대답이 없자 사라는 성격에 맞지 않게 나를 상대로 약간 빈정거리며 머그잔을 다시 양 손으로 꼭 쥐고는 소파 위에서 몸을 더욱 웅크려 앉았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내게 그런 개인적인 질문을 한 것이, 지금껏 내게 자신의 사적인 치부를 스스로 풀어놓은 것에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내게서 인간적인 태도를 구하려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인종이 다른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마트의 고객 지원 서비스 과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고, 6개의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한 끝에 신용불량 위기에 처해 있는데다가, 아들은 갖가지 자잘한 경범죄를 일으키는 문제아였다. 그런 사라의 앞에 정보국 뱃지를 달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거북했을 것이다. 나의 사무적이기만 한 태도는 어쩌면 내가 그녀를 낮게 보고 있다는 오해를 샀을지도 몰랐다. 프로토타입과, 추격자들의 존재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던 데다가 미첼 모자를 오로지 신변보호 대상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정작 그들의 호감을 얻어 협조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추격자들이 아마추어나 일반 테러집단이 아니라, 베테랑 프리랜서든 어딘가의 정보국 요원이든 섹션 D의 팀 만큼이나 잘 조직되고 훈련된 이들이라는 것을 잠시 잊으려 애쓰며 표정을 한결 풀어내렸다.
"아들이 있어요. 다음 달이면 열 세살이죠."
"그래요… 애들은 한없이 어린 것 같다가도, 어느새 보면 다 커버리더라구요."
평소라면 언제나 내 목소리와 표정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트레이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고 있었든 간에, 사라 미첼의 태도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았다.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말에 공감하게 되어 왠지 웃음이 나왔다. 러시아에서 나에게 트레이는 언제나 세 살짜리 어린아이였으니까. 지금쯤 얼마나 컸을까, 어떻게 자랐을까를 상상하곤 했지만 그래도 트레이를 떠올릴 때면 항상 이제 겨우 걷고 말을 하는 어린 아이밖에 떠오르지 않았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아이는 계속해서 세 살이었던 것이다. 사라는 내 웃음을 다른 의미로 이해했는지 소파에 잠들어 있는 딘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당신은 집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우리랑 있어도 괜찮나요?"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모에게 단 5분, 1분만이라도 연락을 할 수 없냐는 요청을 내가 계속해서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에 반발했던 것을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있는 집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냐고 묻는 사라의 질문에, 나는 내가 개리와 트레이에게 얼마나 형편없는 아내이고 엄마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포스트잇이나 문자를 남기면 그나마 나은 날이었으니까. 개리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트레이가 그들의 손에 자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제 아들은 저를 몰라요."
사라는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듯 하다가 내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자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녀만의 방식대로 내 말을 해석해보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개리가 트레이에게 나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내 존재를 말해주었는지 어떤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법원에 유기 이혼을 신청한 사람이 아이에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길 바랬다. 앨리슨 퓰러가 자기를 낳아줬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길 바랬다. 어떤 이유를 대도, 심지어 내가 8년간 러시아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해도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내가 곁에 없었던 것에 정당한 이유가 되진 못할 테니까.
"대체 딘이 봤다는게 뭐죠?"
"그냥 사고에요. 딘은 목격자고, 신변보호가 필요한 사건일 뿐이에요. 일반적인 일입니다."
"만일…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아무 일도 없을거라고 약속해줘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맹세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이 흘러나올 수 있는 내가 스스로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다가선 사람을 아무런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편리함을 위해 속이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인 게 싫었다. 사라가 내 말을 굳게 믿고 더 이상 캐묻지 않자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저 자기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일 뿐인데, 나는 그걸 잔인하게 이용하면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딘이 얼마 전부터 깨어있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아이의 호감과 신뢰를 얻으려고 그렇게 대답한 면도 있었다. 나 자신이 별다른 복잡한 계획 없이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게 나는 때때로 소름이 끼치곤 했다. 나는 러시아 이전에도 이런 사람이었었나? 하지만 그 전의 내가 어땠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같은 것은 이미 기억 속에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다섯 살 무렵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린 것처럼. 어쩌면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도 잠들고 나자 나는 홀로 안전가옥 거실을 서성였다. 어차피 수면제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잠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되도록이면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오래되어 묵은 내가 나는 커피를 내리고 있으려니 해묵은 일들이 떠올랐다. 별 것 아닌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트레이가 우는 소리에 새벽녘에 깨는 것이나, 마트에서 어느 시리얼을 살 것인지를 두고 개리와 늘 벌이는 가벼운 논쟁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커피와 함께 그 기억들을 저 깊숙이 삼켜버리곤 소파에 앉아 바깥에서 나는 소리 하나 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드에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딘을 쫓는 자들의 정체를 알아 냈을까. 그리드와의 통화를 도청한 것도 그렇고, 추격하던 모양새도 그렇고 결코 아마추어들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거의 습관처럼 쓰다듬고 있던 내 글록을 꺼내 하나씩 분해하여 커피 테이블에 늘어놓고 천천히 손질하기 시작했다. 글록 17. 러시아 이전에도 늘 쓰던 모델로, 경찰이든 일반 요원이든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가볍고, 안전 장치가 견고했으며, 탄창에는 17발을 장전할 수 있었다. 물론 돌아온 뒤 지급 받은 총은 일련번호가 전혀 다른 새 것이었지만, 나는 마치 처음 MI5에 입사했을 때 지녔던 총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달리 할 일도 없기에 글록을 분해하고 꼼꼼히 점검한 뒤 다시 조립하기를 네 번째 하고 있었을 무렵, 현관에 달린 신문 투입구가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총을 들고 현관쪽으로 다가갔지만, 추격자들이 위험한 물질을 던져넣고 갔다거나 하는 걸 발견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드에서 보낸 게 분명한 서류 봉투 뿐이었다.
나는 소파로 돌아와 봉투 안의 내용물을 찬찬히 살피며 그 의미를 곱씹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좋지 못했다. 추격자는 MI6 출신 프리랜서였고, 딘이 목격한 암살 현장은 중동 국제 정치에 연관된 —특히 이스라엘과— 문제였다. 나는 제발 모사드는 끼어들지 않기만을 바라며 마침 방에서 나온 딘을 맞이했다. 딘은 내 글록에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고, 지난 밤 내가 사라에게 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은 것에 고마워하고 있었으로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카틴샤 만큼이나 간단하게 나는 딘을 구석으로 몰아 넣으며 그 날 목격한 것이 더 있는지를 캐물었다. 하지만 딘은 아무것도 없다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말이에요. 그냥 파파라치 가방에 돈이라도 들었나 봤는데 없어서—"
"가방? 그 가방은 어떻게 했어?"
"버, 버렸는데요—"
"어디에?"
가방. 파파라치의 사진 파일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이클 샌즈가 딘을 쫓아온 것은 단순히 무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무슨 일이냐며 가로막으려는 사라를 밀쳐놓고 딘을 데리고 가방을 버렸다는 폐차장으로 향했다. 가방의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혼자서 갔을 테지만, 확인을 위해서는 딘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딘이 폐차장에서 가방을 찾아내고 그 안에 들어있던 USB를 발견하는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이미 추격자들이 다시 우리를 따라 붙은 뒤였다. 내 글록에서 네 번의 총성이 울리고, 우리를 쫓던 이들 중 두 명이 사살당하고 난 뒤에야 딘은 자신이 어떤 일에 휘말렸는지 실감하게 된 것 같았다. 시작은 딘이 암살 현장을 목격한 것과, 프로토타입을 훔친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린 아이에 불과한 딘이 이런 사건에 휘말린 것이 편치 않았다. 안전한 곳에 있게 하지 못하고 추격자들이 활보하고 있는 거리로 아이를 끌고 나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마침내 일이 마무리되고 빅토리아 역에서 워커가 사라와 딘에게 새로운 신원을 제시했을 때, 나는 작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은 사라의 얼굴을 보자 언제나 그리드로 돌아가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사건이 파일 서류철 안의 과거의 것이 된 뒤에야 들곤 했던 홀가분함에 마음이 가벼워졌던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런던을 떠나는 것은 싫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선 딘을 제때 붙잡지 못한 것은. 벌써 일이 다 끝난 것마냥 긴장을 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잡지 못하고 한참 동안 빅토리아 역을 뛰어다니게 했던 것 같았다. 임무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켰기 때문에 모든 걸 망쳐버리게 된 것이다.
"딘!"
워커는 훈련받은 요원답게 곧장 자세를 낮추고 뒤를 올려다보며 저격수를 찾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엘레베이터의 유리창에 흩뿌려진 혈흔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라가 울부짖는 소리도, 주변 행인들이 난데없이 머리에 총격을 맞고 죽은 십대 소년의 시체에 비명을 지르는 것도 전부 두꺼운 수건을 덧씌운 오래 된 스피커 소리처럼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워커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뭐라 소리쳤지만 그게 워커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이런 것에 신경쓰는 사람이 아닌데.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배우자에게 내 직업을 속이는 사람이었는데. 포스트잇 한장만 남기고 세 살짜리 아이를 내버려둔 채 모스크바 행 비행기에 오르는 그런 여자였는데. 신입 시절에 처음으로 용의자를 사살했을 때에도,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자를 보았을 때에도 이렇지 않았었는데.
고개를 돌려 옆을 내려다보자 워커는 나를 부르기를 포기했는지 밖으로 끌어낸 딘의 시체 옆에 앉아 —그래, 엘레베이터 문에 걸쳐 있었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해리일까. 그리드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경찰들이 행인들을 몰아내고 주변을 노란 테잎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물로 엉망이 된 사라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당신을 협조적으로 굴게 하기 위한 뻔한 거짓말이었다고,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당신도 알지 않았느냐는 대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겁하게도 그런 변명이 곧장 떠오르다니. 그것을 입밖에 낼 정도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은 아니어서 참 다행이었다.
"일단 그리드로 가지."
이제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은 없었는지 워커는 내 팔을 잡아 끌어 역 밖으로 향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나섰다. 워커가 차를 주차한 곳이 어딘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반걸음씩 뒤처져 걷고 있었고 워커는 팔을 붙든 손에 힘을 조금도 놓지 않았다. 마치 수갑만 없을 뿐 연행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나도 모르게 주차장 한 가운데서 멈춰서서는 푸스스 웃었다.
"아니, 아니야. …미안."
신변 보호하에 있던 민간인이 방금 사살당했는데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다니 아마 날 미친 싸이코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웃음은 쉽게 멈추질 않아서 워커가 나를 조수석에 밀어넣을 때까지 나는 피식거리고 있었다. 그리드로 돌아가는 길은 먼 길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도심에서는 차가 막혔고, 10여분 정도 자전거가 훨씬 빠를 것 같은 속도로 가다 멈추다를 반복하던 중 워커가 불쑥 내게 물었다.
"어젠 무슨 일이었어?"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
적어도 수백번은 머릿속으로 곱씹어두었던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타고나길 정보국 요원으로 타고난 것일까. 어쩌면 그냥 이런 사람인 걸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왔다. 마치 그게 진실인것처럼. 단지 이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엔 워커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 자연스러웠지만, 애초에 너무나 허술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워커는 알 테니까. 그에게서 진실을 숨기려 너무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 텐데.
워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대답을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캐어 묻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 상대방을 몰아붙이면 대답을 얻을 수 있고, 언제는 아무리 해도 소용 없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는 그리드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시선도,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유리창에 기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우중충한 런던의 해질녘 무렵을 올려다보자니 처음 런던에 돌아왔던 날이 생각났다. 비록 그땐 깜깜한 밤이었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네 잘못 아니야."
"알아."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워커는 마치 오는 내내 입안에 담아두고 있던 말인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지나가는 길에 들려봤었단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우리 둘 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딘 미첼이 죽은 것은 명백하게 내 잘못이었다. 명백하게. 딘의 손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라이플의 사각을 만들었더라면. 왜 나는…
"딘은 네 아이가 아니야. 그냥 신변 보호 대상이었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얼마나 오랫동안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어느새 워커가 조수석 문을 열고 내쪽으로 몸을 숙 어깨를 붙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드로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아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기만 했고 워커 역시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하진 않았다. 10분. 20분. 워커와 내 휴대폰이 차례로 몇 번씩이나 울리다가 잠잠해진 뒤에도 우리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드의 주차장에 도착한지 한 시간이 거의 다 돼서야 나는 내가 아직도 안전벨트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버튼을 눌렀다. 워커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나란히 그리드로 향하는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해리에게 보고를 마친 뒤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콜필드에게 연락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휴대폰을 꺼버렸다. 어차피 오늘 집에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한동안 그칠 줄 모르고 진동이 울리던 책상 위 휴대폰은 진동이 울리는 간격이 조금씩 길어지더니 이젠 두어시간에 한 번씩 전화가 오는지 30여초간 지잉거리며 서류더미 위에서 소란스럽게 굴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들리지 않는 척 무시했다. 폴더의 작은 액정에 뜨는 발신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따로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그 휴대폰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약혼녀 뿐이었으므로. 정보원들과 연락하는 휴대폰은 따로 있었고, 그리드와 연락하는 휴대폰은 당연히 자켓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동거인 (내 경우엔 전 동거인이지만)의 연락을 피하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콜필드는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다보니 업무상 만나야 할 일이 아니고서는 루카에게 전화를 하는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사적인 문자는 꽤 자주 보내는 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루카는 서너시간에 한 번씩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보고는 답장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치워버릴 뿐이었다. 딘 미첼의 사망으로부터 13시간째. 서로를 비스듬하게 등진 각자의 책상에 앉아 우리는 그렇게 정작 휴대폰 주인은 무시하는 진동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책상은 하나 둘 비워져가고, 루카에게 오늘 저녁에 한 잔 하겠느냐고 물어볼까 고민하던 찰나, 해리가 우리 둘을 그의 오피스로 불렀다.
슈거호스. 해리가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나는 온 몸의 혈관이 차갑게 굳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라토프에서 5개월간 루카를 담당했던 고문관 예브게니아 티호미로프바가 그토록 알아내고 싶어했던 것. 루카가 처음으로 물었을 때 해리가 들어본 적도 없다고 거절했던 것이었다. 나는 바로 옆에 앉아있는 루카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누가 나사로 죄어놓은 듯이 자리에 앉아 해리가 쏟아놓는 정보들을 내 안에 눌러담을 뿐이었다. 냉전의 마지막 시기에 MI5가 소련에 심어놓은 친서구파 인사들. 세월이 지나 그들이 소련(이제는 러시아지만)의 상층부 인물이 되면 활동을 활성화하게 되어 있는 네트워크였지만, 9년 전부터 다섯 명이 미심쩍은 이유로 사망한 상태였다. 9년 전이라면 루카가 모스크바에서 FSB 손에 들어간 시기와 일치했다. 물론 루카는 슈거호스 작전의 내부 배신자로 지목되기엔 나이대도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작전에 포함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기가 맞물리는 정도가 상당히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었다. 루카가 가진 기억력도 걸릴만한 대목이었다. 만일 자료실에서 우연히라도 슈거호스 파일을 본 적이 있다면. 혹은, 이미 누군가에게 포섭되어 슈거호스 자료를 빼낸 뒤 모스크바 작전에서의 실종은 러시아로 건너간 것일 뿐이라면.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리는 없었다. 루카를 한 번이라도 직접 대면해보았다면, 그녀가 배신한 적이 없다는 것을, 러시아에서의 8년간 단 하루도 빠짐 없이 FSB의 죄수로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층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해리가 왜 여태껏 루카를 감시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아마 루카도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니콜라이 판코프와 접선하게. 유출자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
해리가 루카에게 건넨 파일 안에는 접선 정보와 일반인 여권, 그리고 비행기 티켓이 들어 있었다. 루카의 손가락이 티켓에 인쇄된 행선지를 훑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그 곳을 벗어난지 이제 1년 남짓한 시간이 겨우 흘렀을 뿐이었다. 나는 해리에게 왜 나를 보내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실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전문 분야를 따지자면 중동 쪽을 도맡아 했던 데다가, 러시아어는 초보적인 수준으로 밖에 할 수 없고, 누가 봐도 슬라브계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섹션 치프를 러시아에 보내는 것은 너무나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슈거호스 유출자가 누구든지간에, 제 꼬리가 밟힐 상황이라는 걸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루카는 동유럽계처럼 보이는 외모였고, 러시아어의 지역 억양까지 조절할 수 있었으며, 하루 이틀쯤 자리를 비운다 한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었다. 여차하면 CIA와의 일이 있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루카는 말없이 아직 잉크 냄새가 가시지 않은 빳빳한 여권 커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해리를 바라보는 눈에는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해보게."
"제 감시자는 누구였죠?"
"매튜 맥퍼딘이네."
그게 누구든지 간에, 루카가 아는 사람이었던 게 분명했다. 루카는 놀란 듯이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를 바라보는 눈에 더 이상 의심은 없었다. 루카는 콜필드와 며칠간 런던에 없을 거라는 통화를 한 뒤 러시아행 비행기를 타러 그대로 떠나버렸다. 나는 두어시간쯤 더 그리드에 남아 있었지만 결국엔 해리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텔 같은 낯선 곳에 편히 누워 잠들 기분도 아니었으므로 약혼녀에게서 50통에 가까운 부재중 전화와 100여개가 넘는 문자 메시지가 와 있는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 외로 집은 깔끔했다. 뭔가 집어던져져 있거나, 깨져있거나, 난장판이 피워져 있을 줄 알았던 것에 비하면 말끔하기 그지 없었다. 신발장을 확인해 보니 여자 구두는 전부 치워져 있었고, 침실의 옷장도, 욕실의 캐비닛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갔을 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딘가는 간 모양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심카드를 싱크대 하수구에 넣고 스위치를 돌렸다. 위잉하고 계란 껍질이나 당근 조각 같은 것들과 함께 심카드가 잘게 갈려 수도관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휴대폰은 내일 그리드에 가져가 타릭에게 주면 알아서 해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리드 외에 내가 여기에 사는 걸 누가 알게 되었으니 이사를 하긴 해야겠지 싶어 여행 가방을 하나 끌어다가 꼭 챙겨야 할 것들을 담아넣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집과 무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별 것 없다 생각했는데 다 채워넣고 보니 여행용 가방 세 개는 너끈히 나온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싶었다. 가방은 일단 차에 넣어두고, 집주인에게 연락하고, 새 집을 찾아 들어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루카가 돌아올 때까지는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시간이 도무지 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이사하는 일 정도면 충분히 바쁘겠다 싶었으니까.
하지만 다음날 그리드에서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바쁜 하루가 펼쳐져 있었다. 밤새 해리는 사라져 버렸고, 내사과에서 섹션 D 지휘권을 가져갔으며, 루카는 연락할 수 없는 상태였고, 그리드의 한 가운데에서 벤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다른 곳도 아닌 그리드에서. 나는 조를 밀어내고 벤의 책상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는지 초록색 램프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문자함을 확인해보니 새로 도착한 사진 파일 메시지가 있었다. 오래된 사진. 하지만 사진 속의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바로 그 전, 벤이 이미 열어본 문자 메시지에 적혀 있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유출자 코니 제임스]
그리드는 어수선했다. 해리는 어딜 갔는지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고, 워커가 섹션 D를 지휘하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내사과 사람들이 그리드에 남아 코니 제임스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물론 벤의 시신도, 현장도 말끔하게 정돈되어 치워진 뒤였지만 나는 책상과 컴퓨터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가 기묘할 정도로 텅 비어있는 제2 자료실의 문간에 서서 화학약품의 냄새가 풍기는 방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철제 책상이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던 부근은 바닥의 고무 타일에 눌린 자국과, 미묘하게 빛이 덜 바랜 자국이 남아 있어서 혈흔 하나 없이, 피 냄새 한 점 없이 완벽하게 치워진 방인데도 오히려 사건 현장 같은 느낌이 진하게 풍겼다.
내사과가 해리를 데려간 게 아니라면, 누가 그를 데려간 것인지 짐작되는 곳은 이제 단 한 군데였다.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는 곳. 슈거호스 유출자를 향해 그리드가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었으니 당연히 슈거호스 네트워크를 무력화시키려던 FSB가 그를 끌고간 것이겠지. 모두들 어렴풋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MI5 대테러부서 국장이 런던 한복판에서 FSB에게 납치 당했다는 건 다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워커가 슈거호스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암호문 뿐이었다. '티레시아스가 내일 오후 3시에 깨어난다'. 그게 다였다. 정보원은 모습을 다시 감춰버렸고, 우리는 그를 추적할 수가 없었다. 말콤과 타릭이 작업 중이긴 하지만 티레시아스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말콤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24시간 남짓 남은 상황에서 티레시아스가 무엇인지, 내일 오후 3시에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어질거리며 거리를 가늠하는데 이질감이 드는 것을 무시한 채 코트를 집어들고 엘레베이터로 향하는데, 워커가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정보원 찾으러."
말콤과 타릭이 티레시아스의 정보를 찾는 것 만큼이나, 내가 런던에서 (런던에 있기는 할까) 해리의 슈거호스 정보원을 찾는 일은 승산 없는 시도였지만 그렇다고 그리드에 가만히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날 때까지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지 말고 가서 자."
"안 졸려."
"거울이나 보고 말하지?"
"비행기에서 잤어."
"그래. 세 시간 삼십 분 짜리 비행기에서."
잠 사실이었다. 해리가 모스크바로 보냈을 때도 딘 미첼 일로 현장에 있느라 며칠간 선잠을 잔 상태였고, 모스크바에서도 계속 긴장해 있느라 한시간 정도 짧 전부였다. 그 밖에는 워커의 말대로 비행기에서 잤을 뿐이었다. 자야 하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신체 반응 속도가 느려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잘 수가 없었다. 수면제가 없어도 서너시간은 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일 오후 세 시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위협이 런던을 겨누고 있는 가운데 잠이나 자러 갈 수는 없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이리 와. 코니는 내사과에서 취조 중이고, 티레시아스는 말콤이랑 타릭이 찾고 있어. 정보원은 나도 찾고 있고 조도 찾고 있고, 그리드 전체가 찾고 있어. 다른 녀석들도 돌아가면서 잤으니까 너도 가서 자라고."
워커가 손목을 잡아 끌자, 차가운 손가락의 느낌에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뒤로 팔을 빼냈다. 내 기억 속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모스크바의 날카롭게 시린 공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자기 싫어 했던 것이 단순히 티레시아스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아마 비슷한 생각이 워커에게도 스쳤던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내 손을 놓고 약간 뒤로 물러나 내게 다시 수면실에 가서 쉴 것을 권했고, 나는 이번에는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이었지만 때마침 열린 엘레베이터에서 나온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워커도 그런 사소한 문제는 씻은 듯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해리."
해리가 돌아왔지만 상황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FSB에 붙들려 있었던 해리는 슈거호스 연락 망의 가짜 이름을 셋 대고 풀려났고, 우리에게 티레시아스가 러시아 버전의 슈거호스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지만 그들이 내일, 아니 이제 오늘 오후 3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루카의 말대로 MI5의 내부 정황을 잘 아는 누군가가, 러시아에 충성을 팔아넘긴 누군가가 티레시아스의 구축을 도왔을 것이고 코니 제임스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내사과의 취조에도 한 마디도 털어놓지 않는 코니를 보면 그녀에게서 정보를 직접 얻어내는 것은 그리 있음직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리드 사람들은 코니 제임스에 관한 모든 것을 추적하고 있었고, 티레시아스의 정체를 밝히는 작업에 비하면 훨씬 수사망이 좁혀진 조사였지만 나는 그래도 우리가 주어진 시간에 비해 너무 모호한, 찔러보기 식이나 다름 없는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무력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지만, 해리와 내가 모든 게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제 자리에들 서 있는 것일 테니까. 나는 블라인드가 걷혀져 있는 해리의 오피스를 바라보았다. 해리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루카는 등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이번에도 코니의 취조실에 자신을 들여보내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해리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MI5의 내부 배신자인 코니 제임스에게 루카와 단 둘이 (비록 모든 것이 녹음되고 바로 옆 방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겠지만) 있을 기회를, 루카 노스를 공격할 기회를 줄 수는 없을 테니까. 루카가 돌아온 뒤로 코니가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고, 몇몇 사적인 이야기도 오고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루카가 러시아 감옥에서 8년을 보내야 했던 것도 코니 제임스의 짓일지 모른다.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심리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해리는 결코 루카를 코니와 대면시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만 생각해 보더라도, 누군가가 개리 퓰러나 트레이를 이용하여 심리전을 펼친다면 루카가 과연 냉정하게,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없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는 많은 의문이 들었다. 루카는 여전히 자신을 결혼한 사람으로 여겼고, 거의 매주 트레이를 보러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신변보호 대상인 십대 소년 딘 미첼의 죽음도 있었다. 해리는 루카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테니 왜 코니 제임스와 루카 노스를 대면시키면 안 되는지에 대한 훨씬 더 기다란 목록을 가지고 있겠지.
"로이, 코니가 소유한 창고를 찾았어요."
조가 찾아낸 것은 코니가 젬마 존스라는 가명 아래 소유하고 있던 템즈강 근처의 창고였다. 가명을 사용하고, 현금으로만 결제하고, 내부 CCTV가 없다는 점 등 얼핏 보기에도 비밀 창고라는 게 뻔한 매물이었다. 새벽 두 시. 나와 해리, 그리고 루카는 내사과의 관할 하에 체포되어 있던 코니 제임스를 몰래 빼내 그녀의 창고로 향했다. 해리는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또다른 코니 제임스의 가능성 때문에 MI5를 믿지 못했고, 나와 루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고는 행적대로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던 듯이 창고는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느낌이 짙었다. 바닥에 얇게 깔린 먼지. 철제 캐비닛과 몇몇 가구들을 덮어놓은 비닐에 내려앉은 뿌연 얼룩들. 수갑을 찬 코니를 내가 의자에 묶어 앉히는 사이, 해리는 전등을 연결했고 루카는 곧장 캐비닛 안의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심리전을 걸어보려는 코니의 시도를 해리가 말상대를 하며 걷어내는 동안 나는 루카와 서류철들을 훑었다. 어느 것이든 간에, 티레시아스에 관련되어 있거나 혹은 코니가 영국 기밀을 팔아넘긴 관련 자료들이었다. 나는 파일을 하나씩 다시 캐비닛의 제자리에 집어넣고 새 파일을 끄집어 낼 적마다 무언가가 쓰리게 속을 찢어놓고 머리를 아득하게 만드는 것 같아 손이 떨렸다. 열 아홉살에 비서직으로 MI5 일을 시작한 코니 제임스의 머릿속에선 무슨 생각들이 오갔던 걸까. 도대체 어떤 논리로 그녀는 제 사람들을 팔아넘겼던 것일까. 나는 한 파일에서 '루카 퓰러'와 그녀의 아버지, 남편, 아들에 대한 상세한 문건들을 발견하곤 차가운 벽돌 무더기에 갇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곁눈질로 올려다보자 코니는 여전히 한쪽 구석에서 해리와 서로 노려보고 있었고, 루카는 나를 등진 채 다른 캐비닛 안의 문건들을 보고 있었다. 9년 전 루카를 FSB의 손에 넘긴 것은 코니 제임스였다. 그리드로 간신히 돌아온 루카를 나와 해리가 러시아 첩자 보듯 경계하는 동안 그녀에게 살갑게 다가가 이런 저런 생활을 챙겨주었던 코니 제임스였던 것이다. 루카가 해리나 나에게는 하지 않는 사적인 이야기를 가끔 주고 받는, 마치 섹션 D의 인자한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참이든 고참이든 섹션 D의 사람들에게 어머니처럼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 코니 제임스가, 루카를 8년간 러시아 감옥에 던져 놓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벤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부터, 벤의 휴대폰에서 [유출자 코니 제임스]라는 루카의 문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럴 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해왔었지만 (그리고 그러길 바래야 했다. MI5에 내부 배신자가 여럿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증거물을 눈앞에 마주하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꾹 다문 채 뜨거운 것을 억지로 삼키듯이 파일을 덮어 다시 책장에 꽂아넣었다. 지금은 이걸 추궁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으니까.
"해리."
파일 더미 속에서 세 시간.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루카가 해리를 불렀다. 민간 무전 주파수로 매일 전송된 코드의 기록이었다. 음악이나, 무작위 단어와 숫자의 조합 같은 것들. 정확한 해독 코드를 알고 있는 수신자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코드였지만 80년대 중반부터 2-30가지의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발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근에 발신된 새로운 코드. '천국의 비'.
"'천국의 비'가 뭐지, 코니 제임스?"
"뉴질랜드행 티켓. 새 신원. 그리고 신변 보호."
"'천국의 비'가 중요한 거라면, 그리고 그게 뭔지 알려주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러시아로부터의 보호도."
"얼마든지. '천국의 비'가 뭐지?"
"소련 연방이 붕괴될 거란 걸 알았을 때, KGB는 긴급 대책을 세워놨지. '천국의 비'는 그 중 하나야. 영국 내부에 휴대 가능한 핵폭탄을 숨겨두고 미래에 필요할 때 쓰려는 거였지."
"뭐라고?"
"휴대용 핵폭탄 말이야. 러시아가 어떻게 되든, 정권을 누가 잡게 되든, 휴면기에 있던 티레시아스 요원에게 작전 개시를 명령하는 코드만 발신하면 KGB는 영국 한복판에서 핵폭탄을 터트릴 수 있는거지. '천국의 비'는 런던에 핵공격을 하라는 지시 코드야"
"오후 세 시까지 얼마나 남았지?"
"9시간 27분이요."
"제 시간 안에 런던을 대피시킬 순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집단 패닉만으로도 수천명이 죽을 거에요."
"티레시아스에게 발각되지 않고 핵폭탄을 찾아 해제시키는 수밖에 없겠군."
제임스는 누가 어디에서 핵폭탄을 터트리는 지에 대한 정보는 자신도 라디오 송신을 듣고 암호 코드를 해독해야 알 수 있다고 주장했고, 우리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임스가 티레시아스의 암호 코드에 관련된 파일들은 런던 브리지 근처의 다른 창고에 보관해두었다는 점과, FSB 측에서 우리가 제임스를 빼낸 것을 알고 암살 부대를 보냈다는 거였다. 우리는 제임스에게서 티레시아스에 관련된 파일의 일체 (런던에 있는 모든 러시아 스파이에 대한 정보를 포함한)와 오늘 오후 3시에 누가 어디에서 핵폭탄을 운반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그녀에게 FSB로부터의 보호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것이었다)와 새 신원에 대한 약속을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루카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FSB의 암살 부대가 붙은 것을 알자마자 해리는 런던 주재 FSB국장인 빅토르 사르키잔과 담판을 짓기 위해 우리와 갈라져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해리가 제 발로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을 납치했던 자에게 간다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해리의 말이 전부 옳았기에 그를 막을 수도 없었다. 슈거호스의 내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해리를 직접 납치했어야 했던 것으로 보아 사르키잔은 런던 주재 FSB국장이긴 해도 티레시아스 작전에 속한 인물은 아니었다. 냉전 시절 KGB가 심어둔 코드이니 FSB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모를 수 있었다. 암살 부대가 붙은 것이든, 단순한 훼방이든 간에 FSB와 협력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그들의 방해는 없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해리가 사르키잔에게 내밀 협상 카드도 FSB 측으로서는 반대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런던 한복판에서 핵폭탄이 터진다. 런던 곳곳에 주재해 있는 러시아 외교관들과 FSB 요원들, 정치인, 기업인들, 그리고 그 가족들. 그들을 전부 대피시킬 시간은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런던의 핵 테러 직전에 러시아의 주요 인물들만 영국을 빠져나간 사실이 발각되면 (그리고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렘린 궁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 되고 만다. 아포칼립스는 모두에게 좋을 것이 하나 없다는게, 해리가 가진 협상 카드였다. 이대로 방사능에 삼켜져 죽을 것인지, 아니면 MI5를 도와 티레시아스를 저지할 것인지. 사르키잔이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MI5에 협력할 것이다.
어디든지 티레시아스의 인력이 있을 수 있었고, 그들이 도청하고 있을 위험이 있었기에 해리는 말콤과만 짧게 통화를 연결했다. 골목마다 CCTV가 설치된 런던에서 지상이든 지하든 어디에도 모습이 잡히지 않고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리는 각종 CCTV 화면을 손안에 쥐고 있는 말콤의 지시 아래 인파가 북적이는 길거리로 금세 사라졌다. 나는 말콤에게 2시에 의회와 왕실을 대피시킬 것을 명령하고 통신을 끊었다. 골목길 저 끝에 비치는 큰 길가에 한가득한 인파가 보였다. 만일 티레시아스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폭발과 함께 그대로 죽어버리거나, 혹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단숨에 죽은 자들을 부러워하다 죽게 되겠지. 그리고 몇 십년간 런던과 그 주변 도시들은 황폐하게 버려질 것이다. 크렘린 궁은 이번 일을 미국의 탓으로 몰고갈 것이고, 유럽 내 반-미국 정서는 또다시 들끓을 것이다.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듯이 그런 걱정들도 한데 접어 저만치 치워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의회와 왕실이 대피하는데 45분. 만일 런던에서 핵폭탄이 터진다면, 그들만이 무사할 것이다. 의회와 왕실만이. 영국이 완전한 무정부 공황 사태에 빠지는 것만은 막아야 할테니까. 하지만 런던의 모든 사람들은 죽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구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핵폭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알면 티레시아스는 오후 3시까지 기다릴 것 없이 폭탄을 터트릴 것이고, 아무도 대피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런던을 대피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탄이 터지지 않게 하는 것 뿐이었고, 런던 브리지까지는 1마일 정도 이동해야 했다. 빌어먹을 FSB 암살 부대만이라도 떼낼 수 있다면. 루카와 코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두 사람의 언쟁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랬죠?"
"왜 그랬겠어?"
"보통은 환상에 사로잡히거나 보상에 눈이 멀어 배신 하죠. 하지만 당신은 둘 다 아닌 것 같군요."
"둘 다 아니지. 고르바초프 이후로 우린 한 걸음 물러나 구경만 하는 처지가 됐어. 미국이 세계의 주역인양 헤치고 다닐 동안 말이지."
"왜 티레시아스라고 이름 붙였는지 알만 하네요."
"뭐, 너야 항상 신화 같은 얘길 좋아했으니까."
"나에 대해 아는 척 하지 말아요."
"어쨌든, 난 러시아 편인게 아니야."
"그냥 미국이 싫은 거다?"
'아니. 불균등 상황이 싫은 것 뿐이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항상 그랬지. 그래서 날 싫어하는 거잖아? 내가 첩자여서가 아니라,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내가 당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아주 많이 있지만 틀렸어요. 난 당신과 전혀—"
"그런게 아니라면 콜필드는 왜? 해리에게 싫다고 할 수도 있었—"
"이동하지."
코니가 콜필드 이야기를 건드리려 하자 무언가에게 발목을 채인 듯이 멈춰섰던 걸음이 나도 모르게 다시 이어졌다. 나는 이동해야 한다는 말로 둘의 대화를 끊고 골목길 바깥 쪽의 큰길가를 보고 섰다. 루카. 코니. 그 다음이 나였다. 어디든, 어딘가의 옥상에서는 FSB의 암살 부대가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들의 총에 맞아 죽는 것과 티레시아스의 핵폭탄에 죽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쁜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 둘 다 나쁘지. 둘 다 싫다. 그러니 FSB의 암살 부대도 따돌리고, 티레시아스의 핵폭탄도 저지하는 걸로 하자. 나는 그렇게 속으로 자기 암시를 되뇌이며 코니의 뒤를 따라 큰길가로 발을 내딛었다. CCTV가 비추고, FSB가 우리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런던 브리지로 향하기 위해서.
"괜찮겠어?"
"총 맞은 건 당신이야."
"그 얘기가 아니라— …길은?"
"신입 교 있지."
터널의 보수나 폐쇄로 인해 평상시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런던의 지하 터널에 대한 것은 정보국 요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치는 신입 교육 때 반드시 등장하는 얘기였다. 물론 다른 슬라이드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지나갈 뿐이었지만, 당시 화면에 띄워졌었던 지도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러시아 암살 부대의 눈을 피해 런던 브리지를 건널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 터널로 내려가는 것은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 차라리 이런 상황이 되어 다행이지 싶었다. 적어도 다른 생각 없이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오랜 기억을 더듬어 집중했고, 군데군데 흐리게 기억나던 지하 터널의 지도는 점점 뚜렷하고 명확해졌다. 그래. 제임스의 배신이나, 워커가 총을 맞은 것이나, 우리를 뒤쫓고 있는 러시아 암살부대나, 티레시아스의 핵폭탄 말고. 단 하나. 이 지하터널로 런던 브리지를 건너는 것만 생각할 수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총상은?"
"중요한 덴 안 맞았어."
"너무 속단하지 마."
조금 절뚝이긴 해도 멀쩡히 걷고 얘기하는 걸 보면 장기나 뼈를 다치진 않은 듯 했다. 하지만 관통상이었고, 어두운 옷이라 잘 보이진 않았어도 피로 까맣게 젖어들어가는 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으니 오래 갈 순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금 워커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10분 쯤 전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 게 단순히 조명 탓이라면 다행일텐데. 코니가 너무 지쳐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기에 잠시 앉아 물을 마시며 쉬는데, 저만치서 총성이 들렸다.
"네가 추격자라면 어떻게 하겠어?"
"발 빠른 녀석을 정찰 보내겠지."
"내 생각도 그래."
총성은 아마 러시아 측의 정찰자가 버려진 지하철 칸에 살고 있던 노숙자를 처리한 소리일 것이다. 입밖에 내진 않았어도 우리 셋 모두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 지하철 칸이 그닥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12분. 정찰자와 우리의 거리는 고작 12분이었다. 그것도 코니의 느린 걸음 때문이었으니 녀석에게는 4-5분이면 충분히 따라잡을 거리일 것이었다. 워커도 같은 계산을 했는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임스를 잡아 끌었지만 이대로는 곧 붙잡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갈래길에서 워커가 우리에게 먼저 가라고 한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워커와 제임스를 보내고 내가 남겠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워커도 코니 못지 않게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고, 총상을 입은 상황에서 단 둘이라면 오히려 제임스에게 당할 수도 있었고, 게다가 길을 아는 것은 나였다.
"너무 늦게 따라오지 마."
"금방 간다니까."
조심하라거나 하는 얘기는 주고 받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워커를 보는게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가 러시아 암살 부대에게 당하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가 핵폭탄을 막지 못하는 것이든 간에, 그를 보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고작 그런 얘기가 마지막 대화가 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제임스의 팔을 더욱 세게 쥐어 앞으로 이끌었다. 이따위 배신자 때문에 워커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싫었고,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제임스를 지키는 것 뿐이라는 것도 싫었다. 제임스는 나를 러시아에 팔아 넘긴게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어쩌면 제임스 본인이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래. 내가 돌아왔을 때 살갑게 굴어준 것은, 내가 얼마나 아는지 정탐하려는 것이었겠지. 범인이 범죄현장에 돌아오거나, 수사당국과 접촉하는 것처럼. 제임스의 팔을 필요 이상으로 꽉 쥐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 배신자를 쏘아 버릴 것만 같았다. 제임스도 그걸 잘 아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숨이 차든 말든 내가 끌고 가는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 순종적인 모습이 더 화를 돋구긴 했지만.
그렇게 런던 브리지를 (정확히는 그 지하를) 건너기 시작할 무렵, 저 멀리에서 총성의 메아리가 엷게 들려왔다. 여러 번의 총성이. 하지만 돌아보거나, 걸음을 멈출 여유는 없었다. 그저 워커는 섹션 치프니까, 그러니까 죽진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성경 구절이라도 되는 양 속으로 읊을 뿐. 해리가 FSB과의 접촉에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총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보아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낙관주의는 가장 위험한 생각이었다. 성공하기 이전까지는 FSB의 협력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했다. 나는 FSB의 도움을 바라는 입장이 된 상황의 아이러니함에 웃음이 나왔다.
"저 옆이야."
제임스의 말에 따라 들어간 런던 브리지의 지하 방은 본래는 비상 전력 발전실 중 하나였던 곳으로, 몇 번의 증축 끝에 이제는 버려진 공간이었다. 배신자 코니 제임스에게는 아니었지만. 방안을 꽉 채운 캐비닛의 양에 속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죽음과, 희생이 묻혀버린 것일까. 제임스는 얼마나 많은 영국 요원들을 러시아에게 팔아 넘긴 것일까. 이제는 제임스에게 모스크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FSB에 대해 물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설사 그녀가 정보를 팔아 넘겼다 한들 기억이나 할까 싶었으니까. 그리드에서, 매일 매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죽어가고, 살아 남더라도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아왔으면서. 그러면서 제임스는 뻔뻔하게도 두꺼운 낯짝을 뒤집어쓰고 내게 저렇게 태연히 말을 걸고 있었다.
"안 거들고 뭐해? 벌 돼가."
제임스는 서류철들을 그닥 질서 있게 보관해두지 않았으므로 티레시아스가 장기 비 활성화 요원 월터 크레인을 시켜 그로스브너 광장에서 서류 가방 형태의 핵폭탄을 터트릴 계획을 세웠다는 걸 알아내기까지는 27분이 걸렸다. 두 시 십 이분. 하지만 그리드에 연락을 하려면 지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나는 제임스의 등에 총을 겨눈 채 비상 계단의 문을 열었다.
"루카 노스?"
러시아 암살 부대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곧장 제임스의 등을 겨누던 총을 그의 이마를 향해 높여 들었지만 상대방은 대응하기는 커녕 고개를 까딱이며 양손을 들어보일 뿐이었다. 그의 뒤로 러시아 요원 보였지만 둘 다 총은 꺼내고 있지 않았다.
"당신들과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래서, 핵폭탄은 어디지?"
FSB 암살 부대가 갑자기 우리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는 건, 해리가 FSB 국장 사르키잔과의 협상에 성공했다는 뜻이니 기뻐야 마땅했다. 총구가 막혀 꼼짝 없이 죽을 목숨이었는데도 암살 부대 녀석들이 아슬아슬하게 협조 명령을 받아 목숨을 건졌으니 그것도 기뻐야 마땅했고, 제임스와 단 둘이 런던 브리지로 향했던 루카도 별 탈 없이 돌아온 것도 기뻐야 마땅했고, 티레시아스가 오후 3시에 장기 비 활성화 요원 월터 크레인으로 하여금 그로스브너 광장에서 서류 가방 형태의 핵폭탄을 터트리려던 계획을 저지하고 핵폭탄을 수거해온 것도 기뻐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허리에 맞은 총상 때문이라고, 출혈 때문에 혈압이 낮아졌고, 그래서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 뭔가가 계속 신경에 거슬리듯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이라고 나 자신을 타일러봤지만 부질없는 변명일 뿐이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도 불안하고, 뭔가가 자꾸만 성가시게 찔러대는 것처럼 신경이 바짝 곤두선 것은 핵폭탄을 해체하겠다고 나선 것이 하필 코니 제임스였기 때문이고, 루카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암살부대의 총에 맞아 죽었더라면 이런 기분은 맛보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우스운 얘기지만, 총구가 막혀 쓸 수도 없는 총을 다섯 명의 러시아 요원에게 겨누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허풍을 치던 순간, 이제는 내 운발도 다하고 정말로 이게 끝이라 생각했던 순간 나는 루카를 떠올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부질없고 터무니 없는 생각들을 했던지. 나와 루카가 총이나 테러, 정보국 따위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9년 전 모스크바에 갔던 게 루카가 아니라 나였더라면 하는 생각. 개리 퓰러가 루카를 기다려줬더라면 하는 생각. 차라리 루카가 러시아에 충성을 팔고 어딘가 3국으로 도망쳐 평안한 삶을 얻었더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잠들때까지만 같이 있어달라고 붙잡던 손과, 집에 가고 싶다던 지친 목소리와, 길거리의 십대 아이들을 바라보던 눈이 떠올랐다. 그래서 정작 나는 그녀와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도, 개리 퓰러와 트레이 퓰러가 있는 집에 루카가 돌아갈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거니와, 나는 그런 소망을 품을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누군가, 아니 무언가, 아주 친절한 천사 같은 거라도 나타나 지난 9년을 없던 일로 싹 지워준다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이젠 이번 생의 운은 다 써버렸나 보구나 하고 FSB 암살 부대의 총구를 마주보고 선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하게 들었던 것이다.
"당신 두곤 안 가요."
제임스의 입에서 우라늄을 제거하면 평범한 폭탄이 될 뿐이지만, 폭탄을 해체하는 사람은 피할 틈 없이 폭발에 휩쓸리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자 나는 벽에 기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폭발을 피할 만한 곳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루카는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자, 루카."
내가 팔을 잡아 끌었지만 루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제임스의 창고에서 발견했던 파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루카의 팔을 다시 잡아 끌었다. 내가 힘이 빠진 건지 이 녀석이 고집에 갑자기 힘이 세진 건지. 그래. 이렇게 될까봐 신경이 곤두섰던 거였다. 제임스가 폭탄을 해체하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냉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십년간 몇 명이나 되는 영국 요원들을 러시아에 팔아 넘겼는지 모를 배신자 코니 제임스가 이렇게 영웅처럼 죽는 꼴을 루카가 용납할리가 없을 테니까. 폭탄 따위는 두렵지 않다며 우리에게 저리 가라고 손짓하는 제임스를 보고 있는게 그래서 더 화가 치밀었다. 나라고 저런 배신자가 여기서 이렇게 간편하게, 손쉽게, 편하게, 명예롭게 죽는 걸 선택하는 걸 보고 싶진 않으니까. 하지만 런던에 핵폭탄이 터지든지, 아니면 코니 제임스가 우라늄을 제거하고 일반 폭발에 휩쓸려 죽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폭발에 루카와 나마저 휩쓸리고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카야 러시아에서의 8년을 생각하면, 코니 제임스에게 그 죄값에 걸맞는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에 화가 치밀어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핵폭탄이 터지는 것도 싫지만 코니 제임스가 편하게 죽게 두기도 싫다'고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지만 섹션 치프인 나까지 감정에 휩쓸려서 우리 둘이 괜히 폭발에 휘말려 죽는 꼴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용의자들을 진압해 끌고 갈 때처럼 루카의 양 어깨에 내 팔을 걸어 뒤로 잡아 끌었다. 루카는 잠깐 동안은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계속해서 잡아 끌자 마지못해 단념하고 내 쪽으로 돌아섰다. 일직선으로 곧게 이어진 지하 터널의 30여미터 앞 부근에 왼쪽으로 빠질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에 나는 그리로 향하려 했다.
"루카."
루카를 부르는 제임스의 목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루카의 어깨 너머로 제임스를 향해 고개를 저었지만 그 빌어먹을 배신자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까지 루카를 뒤흔들어놓고 싶은 걸까.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가. 내가 폭탄을 해체할 줄 알았더라면, 냉전 시대 같은 구시대의 러시아제 핵폭탄을 해체할 줄 알았더라면 저런 배신자 따위는 당장 밖으로 끌어내고 내가 직접 할텐데.
"새벽 세 시에 악몽에 잠에서 깨면 누굴 탓하지?"
"…"
"러시아 지옥에서 8년? 누굴 탓인 것 같아?"
"…해리요. 해리 탓이죠."
"해리는 그만 놔줘. 해리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누군데요?"
"루카, 저런 얘기 듣지 마. 빨리 이쪽으로—"
"대답해요. 날 팔아 넘긴게 누군—"
"나였어. 전부 다 나였어."
그 다음 일은 폭발의 굉음과 출혈의 어지러움에 기억이 빙글빙글 희미하게 뒤섞여 확실치가 않다. 단지 제임스를 쏘아 버리려는 루카를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어쨌든 내가 루카를 데리고 왼쪽의 샛길 통로로 피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만들어졌던 런던의 지하 대피 통로의 두꺼운 콘크리트 구조가 크게 흔들리는 진동과, 굉음, 그리고 먼지와 폭약 내음도. 그렇게 어렴풋한 폭발 속에 한참동안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곳을 헤메이다 눈을 떴을 땐 병실이었다. 안개라 생각했던 것은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스한 김이었고, 벽을 더듬어 짚고 있다 생각했던 것은 루카의 손등이었다. 나는 몇 번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내가 총에 맞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왠지 안심이 돼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병실은 노을이 한가득 다홍빛으로 그늘져 있었고, 루카의 눈은 보랏빛 도는 남색처럼 보였다.
"매튜 맥퍼딘은 누구야?"
불현듯 해리가 말했던 그 이름이 떠올라 내가 불쑥 물었다. 생각보다 내 목소리는 갈라져 있지 않았다.
"…내 전 섹션 치프."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손가락을 살짝 움켜쥐듯 움직이자 얽히듯 맞닿아있는 루카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루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에게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침대 난간에 엎드려 잠이 든 루카는 잠결에도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나 역시 손을 풀 생각이 없었다.
